[문학]故 김수영시인 조카 김민씨, 촌철살인 一行詩로 등단

  • 입력 2001년 8월 20일 18시 28분


최근 발간된 계간 ‘세계의 문학’(민음사) 가을호에 독특한 시 5편이 실렸다. 일본 고유의 단시형(短詩形)인 하이쿠(俳句)처럼 모두 한 줄짜리 일행시(一行詩)들이다.

‘늦잠’이란 제목의 시는 ‘악몽에서 깨어나니 양철지붕마다 금빛 햇살’이 전부다. 짧게는 8자, 길어도 20자 안팎인 한줄짜리 시들은 때로는 잠언이나 경구를, 때로는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는 검객의 칼을 연상시킨다.

최승호 시인의 추천과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의 심사를 거쳐 등단한 주인공은 김민씨(33·사진). 그는 한국 현대시의 거목인 고(故) 김수영(1921∼1968) 시인의 조카이며,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기자가 김씨와의 만남을 여러차례 시도했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냉랭했다. “이제야 부족한 작품으로 등단한 신출내기에게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냐”는 요지였다.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그는 “제 신상은 묻지 말고 작품만 잘 읽어달라”고 주문했다.

삼고초려(?) 끝에 이뤄진 전화 인터뷰에서 김씨는 밝으면서도 퉁명스런 목소리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다.

“단행시는 제가 오랜 습작을 통해서 찾아낸 형식입니다. 한 줄짜리라고 쉽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창작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여느 작품 못지 않습니다.”

그의 말로는, 창작의 노동력은 장애를 극복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에서 길어올려진 것이다. 예를 들어 ‘끓는 노을에 몸 던지는 까마귀 한 마리 운다’는 내용의 시 ‘귀’는 청각이 온전치 않은 그가 겪었던 환청에서 태어났다.

김씨는 자신의 시에 대해 “한 문장을 툭 던지면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의 경험을 불러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김씨는 동국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시 습작을 계속 해왔다. 그가 태어나기 몇 달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큰아버지 김수영 시인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터.

“큰 아버님 작품은 모두 읽었지만 제가 뭐라고 평가하기는 힘듭니다. 제 느낌과 상관없이 우리 문학사에 소중한 자산인 분이지요.”

김씨는 큰아버지의 작품 중에서 초창기 시인 ‘달나라의 장난’이 제일 맘에 든다고 말했다. ‘팽이가 돈다 / 어린 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달나라의 장난’ 중 일부).

유난히 큰 눈망울을 지녔던 고인의 시(詩)정신이 김씨의 작품을 통해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김씨의 시에서 그같은 징후가 느껴진다.

‘어떤 보이지 않는 눈에 우리 또한 아름다울 수 있을까’(‘자벌레’ 전문)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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