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權 현주소]법규는 선진국 수준…현실은 '남성우월'

  • 입력 2001년 7월 1일 18시 40분


《“법은 가까우나 현실은 멀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국내 여성권리의 현주소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법규는 상당 부분 선진국 수준으로 개선됐지만 현실은 아직 요원하다는 얘기다. 동아일보와 여성부는 ‘제6회 여성주간’(1∼7일) 공동 기획으로 여성 관련 법규와 현실의 괴리를 중심으로 국내 여성권리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짚어 본다.<편집자>》

보험회사 근무경력 15년 중 소장 경력만 7년인 김모씨(42·여). 그는 지난해 모 생명보험회사의 소장 모집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지만 고배를 마셨다. 그가 전화로 탈락한 이유를 묻자 회사 관계자는 “이력과 경력은 좋지만, 여성소장은 뽑지 않으며 앞으로도 채용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 글 싣는 순서▼
上. 남녀차별과 성희롱
中. 모성보호와 육아
下. 대(對) 여성 폭력

지난해 모 제지공장에 입사한 여직원 남모씨(28)는 신입사원 연수에 참가했다가 깜짝 놀랐다. 신입사원 6명 가운데 남성 2명만 정식 사원이고 자신을 포함한 여성 4명은 모두 1년 계약직이었던 것. 그는 이 회사가 외환위기 이후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해 왔다는 사실도 알았다.

▽법은 선진국 수준〓한국여성개발원에 따르면 1948년 이후 현재까지 여성권리와 관련해 입법 또는 개정된 법안은 287종에 이른다. 특히 80년대에 남녀고용평등법과 가족법 등 49종이, 90년대에 성폭력특별법과 가정폭력특별법, 여성발전기본법 등 173종이 입법 또는 개정돼 ‘법대로’라면 21세기는 남녀평등의 시대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들 법과 제도는 현실에서 실효성이 크지 않다. 사회적 관심이 높지 않을 뿐더러 당사자인 여성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헌법에는 모든 영역에서 성차별 금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 보장, 국가의 모성보호 노력 등이 명시돼 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 정년 해고 퇴직에서의 여성차별 금지, 여성의 외모를 채용기준으로 삼는 것 등을 금지하고 있다. 또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도 고용과 교육, 법과 정책 집행에서의 남녀 차별과 성희롱을 금지하고 있다.

▽법과 거리가 먼 현실〓그러나 법규와 현실은 거리가 멀다.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왕인순(王仁順) 정책위원장은 “업체들이 모집 공고부터 ‘남성만 뽑는다’고 밝히거나 원서접수 과정에서 여성은 받지 않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또 △같은 직종에서 남녀의 정년을 달리하거나 △여성이 많은 직종의 정년을 다른 직종보다 낮추거나 △결혼 임신 출산과 같은 이유로 여성을 해고하거나 △사내 부부 또는 맞벌이 부부에 대한 해고를 직·간접적으로 강요하는 사례도 있다고 지적한 뒤 이는 모두 현행법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해 취업공고를 모니터링 한 결과 599건의 위반사항 중 응시자격을 남성으로 제한한 것이 95건(22%), 직종 직급을 분리한 것이 54건(12%), 비서 판매 사무 경리직 등 여성만 요구한 것이 187건(44%) 등으로 집계됐다.

정양희(鄭良姬) 서울여성노조 위원장은 “직장 내 성차별은 남녀고용평등법 시행 이후 비정규직 등 고용형태를 매개로 한 성차별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여성 중 비정규직 근로자 비율은 97년 62%에서 지난해 69.7%로 늘었고 전체 비정규직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절반을 넘어섰다.

▽‘여성권한’ 후진국〓유엔개발계획(UNDP)의 ‘2000년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의회 여성점유율, 행정관리직 여성비율, 전문기술직 여성비율 등으로 산정되는 여성권한 척도에서 한국은 세계 70개국 가운데 63위였다.

그러나 직장 내 배치나 승진에서의 성차별은 포착조차 쉽지 않다. 한국여성개발원이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에 대한 사내 승진방침과 실제상황은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규정상 조사대상 기업의 89%가 ‘남성과 동일하게 승진 가능’, 10%는 ‘일정 직급까지 승진 가능’, 1%만 ‘승진대상에서 여성 제외’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관리자가 2% 미만인 기업이 78%, 2∼85%인 기업 2%, 5% 이상은 10%에 불과했다.

▽직장내 성희롱 문제〓95년 여성발전기본법이 성희롱 예방규정을 둔 이래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된 법규는 계속 진전돼 왔다. 99년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과 99년 제정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은 성희롱 금지와 성희롱 예방교육 실시 등을 규정했다.

그러나 현장은 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최영애(崔英愛) 성폭력상담소장은 “현장에서 예방교육을 하다 보면 ‘그런 것도 성희롱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며 “이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여성부 이상덕(李相悳) 차별개선국장은 “성희롱 문제가 현장에서 해결되려면 좀더 많은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영아기자>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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