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官 역사를 지킨다]조선 지조의 상징 성삼문

  • 입력 2001년 4월 8일 19시 32분


◇"나눠먹기 功臣책봉 안될말" 삭제청원

성삼문(1418∼1456)은 1438년(세종 20년) 만 20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1446년 집현전 수찬(修撰)이 된 뒤 10년 가까이 집현전(集賢殿) 한 곳에만 근무했다.

세종은 집현전을 만들면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해 극진히 대접했다. 집현전을 떠나지 말고 학문연구에 몰두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성삼문은 이러한 세종의 기대에 꼭 맞는 사람이었으며, 세종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훈민정음 창제와 ‘동국정운(東國正韻)’ 같은 책의 편찬에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동료들이 권력 지향적인 자리로 옮기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달랐다.

▼글 싣는 순서▼
1. 조선 성리학의 순교자 조광조
2. 조선 언관의 사표 김제신
3. 조선 지조의 상징 성삼문
4. 유교이념의 파수꾼 김일손
5. 直言 모범보인 황희

세종과 문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권을 넘보는 왕자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그 틈에 수양대군이 당시 재상이었던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죽이면서 정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집현전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성삼문은 단종 원년 10월 사간원의 언관인 우사간(右司諫)(종3품)으로 발탁됐으며, 그로부터 한 달 후 좌사간(左司諫)이 된다. 그러나 그가 언관이 됐을 때는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였다.

언관은 유교이념의 수호자라고 자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집권은 언관들의 탄핵 표적이 되어야 했지만, 그것이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나라의 두 재상을 살해했으며 친동생마저 죽이고 집권한 수양대군은 더 이상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누구든 살려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말 그대로 살벌한 때였다.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언관의 직을 맡은 성삼문은 다른 사람들처럼 침묵만 지킬 수 없었다.

좌사간이 된 직후 성삼문은 단종에게, “궁중에 깊이 거처하면서 신하들을 한번도 만나지 않으시니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면서 공식석상에서 신하들을 정기적으로 접견할 것을 청했다. 언관으로서 그의 첫 발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말이었다. 수양대군이 모든 권력을 다 장악하고 있었기에 어린 단종은 그것이 두려워 왕으로서 신하들을 직접 대면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삼문의 발언은 단종이 왕으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재개하라고 권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수양대군의 집권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어 성삼문은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에게 과도한 직위를 하사한 것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제기했다.

엄자치와 전균은 환관이었지만, 수양대군의 거사에 필요한 궁중의 내밀한 정보를 제공해 온 공로로 공신에 임명되고 각기 영성군(靈城君)과 강천군(江川君)에 봉해졌는데, 이것이 나라의 관례에 어긋난다고 탄핵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자신의 공신 칭호를 삭제해 달라는 청원을 제기했다. 수양대군은 정변 이후 포상과 인심 수습을 위해 공신을 책봉했는데, 성삼문도 여기에 명단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청원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언관은 위로는 임금의 잘잘못을 가리고, 아래로는 대신들의 시비를 따져야 하는데 수양대군의 거사에 아무런 기여도 한 바 없이 공신이 된다면 어떻게 언관의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공신 칭호 뿐 아니라 언관직까지 사표를 제출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비판하면서 그런 일에 결코 가담할 수 없다는 의사를 거듭 표명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수양대군의 정변도 모두 왕명을 빙자해서 일어난 일이므로 이를 정면으로 공격하면 결과적으로 어린 단종만 괴롭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비판의 강도를 높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삼문은 옳지 못한 대세를 따라가거나, 그 체제를 인정하는 들러리 노릇은 더욱 하기 싫었다.

성삼문은 집현전의 중추적인 학자였고, 사대부들의 인망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발언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기에 수양대군도 그를 공신에 봉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성삼문이 결코 자신의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권력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삼문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종이 왕위에서 밀려나고 수양대군이 왕이 되어서도 다시 성삼문을 공신에 봉했지만, 성삼문은 이를 외면했다.

성삼문은 사육신(死六臣)으로서 높이 추앙될 뿐만 아니라, 조선 역사에서 언관으로서 굳건한 지조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성삼문은 세조 2년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왕위에 복위시키는 역모를 꾀하다 38세로 장열한 최후를 맞는다.

정두희(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