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고통받는 몸의 역사'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8시 49분


■ 고통받는 몸의 역사 / 자크 르 고프·장 샤를 수르니아 엮음 장석훈 옮김 / 413쪽 1만5000원 지호

15세기에는 나병, 16세기에는 바페르, 19세기에는 결핵과 매독이 인간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리고 20세기에 시작된 ‘암’의 시대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인간들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질병 자체를 부인해 보기도 하고 숨기려고도 해 봤다. 때로는 머리 속에서 지우려고도 했고, 그래도 안 되면 무작정 거기서 달아나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은 정신과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의 공포로부터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자크 르 고프 전 파리 고등사회과학원장과 장 샤를 수르니아 국제의학사학회장은 역사학자 철학자 의학자 법학자 소설가 기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동원해 질병과 함께 해 온 인간의 절박한 삶을 그려냈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질병의 정체조차 모호했다. 16세기 이래 18세기까지도 사람들을 두렵게 했던 바페르는 그 정의를 내리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바페르는 치료하기가 매우 복잡할 뿐 아니라 까다롭고 예민한데다 설상가상으로 환자의 수도 늘어가고 있다.”

바페르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설명을 찾기 어렵다. 바페르는 곧 ‘불안’이었고 그저 ‘전염 가능성이 큰 심각한 질병’이었다. 증상에 따르면 바페르는 호흡곤란, 각혈, 간질, 정신착란, 치통, 구역질, 위통, 오한, 소대변 감소, 복통, 발작성 고열, 치질 출혈, 황달 등 거의 모든 질병의 증상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동물적 생기가 멈춰진 상태’로 설명되기도 했다. 바페르라는 말에는 무한히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질환이 포함돼 있었다.

이렇게 모호한 질병 범주인 바페르는 근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의학의 영역에서 추방됐다. 반대로 근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인류의 위협으로 등장한 질병이 있다. 그것은 21세기에 들어서까지도 만물의 영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암이다. 암의 위협은 최근에 닥친 것이지만 이미 식물계에서부터 동물계까지 통틀어 어떤 유기체도 암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암의 실체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한 1950년대 이전까지 그것은 그저 인간이 치료할 수 없는 여러 질병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단지 국부적인 외과 수술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암은 이제 물리학자 생물학자 의사 화학자들이 모두 연합해서 공격해야 겨우 그 실체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질병이라고 여겨질 만큼 골치 아픈 질병으로 판명되고 있다.

하지만 엮은이 중 한 사람인 수르니아 회장은 “질병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질병’을 분류하는 것은 우주의 신비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여 단순화하려는 인간 정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무작정 따를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이 욕망의 딜레마를 생각하면 ‘고통받는 몸의 역사’가 끝날 날은 아직도 요원하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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