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책]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세상 풍자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8시 45분


작가 박성원의 소설적 관심은 가짜가 진짜처럼 둔갑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비롯된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곤란할 정도로 가짜가 고도로 사회화된 현실은 거대한 허구 체계로 비칠 수 있다. 이런 가짜 현실, 허구적 삶을 투시하여 반성적으로 인식하고 진실을 환기하는 것이 소설의 주요한 책무라고 박성원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똘똘 뭉쳐 거짓을 믿는’(댈러웨이의 창) 세상에서 진실을 발견하거나 진실에 도달하기는 퍽 어렵다. 혹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가짜 현상이나 허구적 현실을 증거하고 환기하는 가운데, 진실의 존재론과 그 탐색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문화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박성원에게 있어 현실적 진실은 난망이라 하더라도 상상적 진실은 가망이다. 이 상상적 진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상한 가역반응’을 일으키며, 그 나름의 독특한 소설적 실험을 우리 앞에 펼쳐 보였다.

첫 소설집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에서 모더니즘 시대의 이상(李箱)의 실험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발상법으로 ‘가역반응’을 보인 바 있던 박성원은 두 번째 소설집 ‘나를 훔쳐라’에서는 그 가역반응에 주제적 깊이를 보태고 있다. 박성원식 ‘이상한 가역반응’은 가치가 전도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현실에서 진정성 있는 삶의 방식과 의미를 탐사하는 역설과 혼돈의 담론 과정에서 극화된다. 그는 현실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죽음을 이야기하고, 정상을 환기하기 위해 이상한 광기와 병리를 임상학적으로 보고하며,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가짜의 담론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혹은 그 양쪽의 경계를 넘어 가로지르며 복합적이고 모호한 이야기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 모두는 타성에 빠져 반성을 모른 채 나날의 삶을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삶 일반에 대한 도전과 성찰의 형식일 수 있다. ‘그저 모든 것을 던져주는 것들에 대해 받아먹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기에, 던져진 도덕과 의무와 당연에만 찌들려 있기에, 인위와 가식과 습성에 너무나도 젖어 있기에, 그래서 자생적인 그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는’(호라지좆) 상황에 대한 도전과 성찰 말이다.

이를 위해 그는 상상의 낯선 곡예를 보인다. 느닷없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채 벌레보다 못한 인간으로 변신한 사내가 자신을 입증할 만한 그 어떤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실마리)를 비롯해, 사물의 일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 질환에 걸린 환자의 이야기(중심성맥락망막염), 화석으로 굳어 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사내의 속절없는 이야기(런어웨이 프로세스), 현실적인 것과 환상 혹은 망상적인 것이 뒤섞여 있고 진짜와 트릭이 얽혀 있는 이야기(이상한 가역반응·호라지좆), 거대한 거짓의 체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는 진실의 허망한 갈망에 관한 이야기(댈러웨이의 창) 등등. 이렇게 그의 소설들은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허구 상황을 연출하고 실험한다. 어처구니없는 거짓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어처구니 같은 진실을 탐문하고자 하는 상상력의 역설적 곡예가 두드러진다. 첫 소설집 표제가 암시한 것처럼, 이상(異常)한 현실에서 이상(理想)을 추구하기 위해 ‘이상한 가역반응’을 보인 이상(李箱)의 진정한 후예가 되기를 박성원의 상상력은 소망하는 것 같다.

▽박성원 지음/276쪽/7000원/문학과지성사▽

우찬제(문학비평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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