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실업]생활苦/신분 불안정…가족생계 꿈못꿔

  • 입력 2000년 9월 4일 19시 14분


일본에서 어렵게 박사 학위를 받고 2년 전 귀국한 P씨(42)는 고민에 빠졌다. 시간강사로 도저히 가정을 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학기 K대에서 시간강사로 9시간을 강의했다. 시간당 강사료 2만원에 월수입은 70여만원. 아내와 초등학생 딸 등 세 식구는 늘 쪼들린다. 방학 때 쥐꼬리만한 수입도 끊겨 여름 휴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생활비를 벌려고 가게 일을 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는 심정은 괴롭기만 하다.

P씨는 “왕복 교통비에 교재 자료비, 식사비 등을 빼면 남는 게 없다”면서 “강의 경력을 쌓으려고 강의를 하지만 앞 길이 보이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P씨는 그래도 이번 학기엔 주 15시간으로 늘어 사정이 나은 편. 박사 학위를 받은 대다수 시간강사들이 주 6시간 강의가 고작이다.

전국대학강사노조(전강노)에 따르면 국공립대 강사료는 시간당 2만8000원선, 주 6시간을 평균으로 치면 월수입은 67만2000원. 통계청의 4인 기준 도시근로자 평균 생계비 187만3000원의 3분 1 수준. 노동부의 월 최저임금(42만1490원)을 약간 상회한다.

사립대는 더 열악하다. 시간당 2만∼2만4000원이 보통이고 1만4000원을 주는 대학도 많다. 최고 강사료를 주는 대학의 시간강사 연봉이 1300만원 정도이고 평균은 530만원에 불과하다.

각 대학의 강사에 대한 수업 의존율은 98년 32.6%에서 99년에는 35.9%로 높아지고 있으나 대우는 형편없다.

전강노 양문석(梁文錫)위원장은 “대학이 공휴일 시험기간을 제외하고 강사료를 계산한다”면서 “이월금을 많이 남기는 대학들이 10여년간 공부한 박사들에게 형편없는 대우를 하는 것은 인력 착취”라며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박사라도 시간강사면 ‘일용잡급직’이나 다름없다. 한 학기 단위로 계약을 하니 늘 신분이 불안하다. 재직증명서나 신분증 발급, 의료보험 등 어떤 혜택도 없는 ‘일당 근로자’일 뿐이다.

K대 강사 P씨는 “대학 도서관에서 책도 대출할 수 없어 가르치는 학생에게 책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면서 “시간강사들은 은행에서 신용카드도 발급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드러내고 불평할 수도 없다. 문제를 제기하면 ‘튀는’ 사람으로 찍혀 시간강사 자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강사 경력 4년의 40대 박사 L씨. 지난 1학기 2개 대에서 주 18시간을 강의하고 월 140만원을 벌었으나 이번 학기에 10시간으로 줄었다. 학과장이 번역, 교재 수정 등 온갖 잡일을 시키고 아예 새 이론을 써달라는 주문까지 해 거절했더니 강의시간을 줄여 ‘보복’한 것이다. 그는 “박사라고 강사료를 1000원 더 얹어 주는 대학의 강사료 책정에 어이가 없다”며 “교수들이 횡포를 부릴 때는 ‘내가 왜 공부를 했나’하고 후회한다”고 말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현청(李鉉淸)사무총장은 “1억원 이상의 학비를 들여 박사 학위를 받은 30대 학자들이 생계에 쪼들려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은 국가적 손해”라며 “국제 수학상인 ‘필드상’은 40대 학자들을 수상 대상에서 제외할 정도로 젊은 학자들의 활력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인철기자>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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