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통해 본 학계]자기학설과 다르면 외면

  • 입력 2000년 5월 17일 19시 34분


백제 초기 수도 ‘하남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유력시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보존’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하지만 고고학계와 고대사학회가 지난 3년여 동안 이 유적의 성격 및 역사적 가치를 놓고 벌인 논쟁과 학자들의 태도는 우리학계의 지적풍토와 관련,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자신과 다른 학설은 새로운 ‘물적 증거’가 나타나도 애써 무시해 버리거나 폄하하고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한 현실이 여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고고학자나 고대사학자의 ‘주류’는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하던 시기(기원전 18년∼서기 475년) 왕성으로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이나 경기 하남시 춘궁동 유적 등을 지목했었다. 특히 몽촌토성은 80년대 대대적인 발굴 이후 백제왕궁의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었다.

하지만 몽촌토성을 백제왕궁으로 지목한 학자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1997년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 등이 풍납토성 내부 일대를 발굴한 결과 백제토기와 대형 건물터 등 이곳이 백제 왕궁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몽촌토성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발굴 결과를 보고 몽촌토성을 백제왕궁으로 보던 학자들 중 일부는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기존의 학설을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학계의 ‘주류’는 아직도 신중론을 펴고 있다. “풍납토성이 백제왕궁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다른 일부는 “백제왕궁이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은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발굴 결과를 폄하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몽촌토성이 백제왕궁이라고 하면서도 하나같이 이를 입증할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촌〓백제왕궁’론을 주장해온 한 학자는 이와관련,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축성(築城)의 주체 세력이나 축성 시기 등에 대해 보다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몽촌토성이 백제의 왕궁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 역시 결정적인 유물에 근거하기보다는 ‘여러 정황’에 미뤄 이같은 주장을 펴고 있을 뿐이다. ‘몽촌토성의 발굴조사에서도 성 안에서는 왕궁지로 추정될 만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특수용도의 유적이 확인된 점으로 미루어 왕궁을 중심으로 한 시설물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글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관련, 한 고대사학자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몽촌이 백제왕궁이라고 주장해 놓고선 풍납토성이 백제왕궁이라는 학설에는 신중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풍납토성이 백제왕궁이 틀림없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펴 온 선문대 이형구(李亨求)교수는 “풍납토성에서 전돌과 기왓장, 주춧돌에다가 옛 중국 고위관직명인 대부(大夫)가 새겨진 토기, 가로 세로 각 16m 정도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가 나왔으면 됐지 도대체 뭐가 더 나와야 이곳이 왕궁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느냐”고 반문한다.

학자들의 입장에 관계없이 이곳을 백제 초기왕궁터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은 무리다. 범국가적 ‘유적 보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엄밀한 ‘사실 규명’이기 때문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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