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훼손 르포]전국 곳곳 유적, 불도저에 밀려

  • 입력 2000년 5월 16일 19시 30분


《서울 풍납토성 뿐만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개발 논리에 밀려 유적이 사라지고 있다. 반만년 역사의 우리나라는 땅속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흐르고 있으나 도로 아파트 설 등 각종 개발사업 과정에서 마구 파헤쳐지거나 콘크리트에 파묻히고 있다.》

▲실태▲

“5∼6세기 이전에 지어진 토성과 수많은 유물이 묻혀 있는 이 땅은 반드시 원형대로 보존돼야 합니다.” “이 만한 정수장 부지가 없습니다. 유물 수습이 끝나면 예정대로 정수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구 달성군 문산리 벌판에 정수장을 건설하는 문제를 놓고 ‘문화재지키기 시민모임’과 대구시는 1년이 넘도록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시민모임 회원들은 거의 매일 번갈아 현장을 지키고 있고 16일에도 현장에서 보존 대책을 논의했다.

시민모임은 지난해 2월 대구시 상수도사업본부가 문산리에 대규모 정수장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제보를 받고 전문가들과 함께 현장을 답사해 이곳에 토성의 유구(遺構)와 유물이 묻혀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초 상수도사업본부측은 고분 몇기를 발굴한 뒤 99년 6월 정수장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민모임 등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쳐 착공이 미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경북 경주의 경마장 건설부지도 개발과 보존의 갈등이 심한 곳이다. 한국마사회는 경주시 손곡동과 천북면 물천리 일대 28만8000여평에 수용인원 1만명 규모의 경마장을 지을 계획이다.

이에 대해 한국고고학회와 경주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은 “유적지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려선 안된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나서 수년째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재정확충을 꾀하려는 경북도와 경주시의 개발의지가 워낙 강해 천년고도의 유적지가 언제 묻혀버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울산 남구 옥동 옥현구획정리사업지구에서는 98년 7월 삼국시대 주거지가 발굴됐다. 그러나 구획정리지구의 공원지구로 편입된 곳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아파트로 덮여 버렸다.

도로나 철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적지가 훼손된 사례도 적지 않다.

백제 고도인 충남 부여에서는 97년 말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마한 말기와 백제 초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사(祭祀) 유적이 훼손되기도 했다.

경부고속철도 공사 구간인 경기 화성군 봉담면 당하리에서는 96년 8월 원삼국시대 대장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으나 시공사측은 270평의 유적지 중 절반 정도에 석재를 쏟아부어 도로를 만들었다.

인천 국제공항 건설지역인 인천 중구 운서동에서도 97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지석 등이 발견됐으나 인천국제공항공사측은 옛집인 당집만 복원키로 하고 최근 공항시설물 부지로 정지작업을 했다.

사유지의 경우는 유적훼손이 더욱 심하다. 삼국시대 고분군 등 유물과 유구가 묻혀 있던 대구 달성군 대봉동의 유적지는 최근 수년 동안 아파트와 도로로 개발됐다.

▲제도적 허점▲

지난해 7월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은 개발 면적이 3만㎡ 이상일 경우 사전에 지표조사를 해 유구나 유물이 있는지를 파악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시행과정에서는 허점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 문화재 발굴전문가는 “형식은 사전조사지만 실제로는 개발업자가 미리 개발계획을 다 세워놓고 요식 절차로 조사를 의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조사과정에서 ‘대충대충 빨리 끝내라’는 압력을 수없이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나마 면적 3만㎡ 이하의 개발은 주변에 매장문화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전조사의무도 없다. 때문에 업자가 개발지를 3만㎡ 이하로 쪼개 개발신청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강정태과장은 “공사과정에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됐다는 신고가 한해에 40∼50건 가량 들어온다”며 “가급적 유적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싶지만 사유재산권을 무작정 제한할 수 없고 예산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홍기자·인천·대전·울산〓박희제·이기진·정용균기자>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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