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해킹당한 아들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40대 부모의 충격

  • 입력 2000년 3월 12일 19시 49분


중견기업의 김모과장(43)은 어느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다가 아들의 공부방에서 흘러나오는 통곡(?) 소리에 깜짝 놀랐다. 방문을 열어보니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바닥을 뒹굴다시피 하면서 울고 있었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얘기를 듣던 김과장은 낭패감으로 당혹스러워졌다.

“내가 족장을 치려고… (흑흑) 무기를 샀는데… 4만원 주고 형한테 샀는데… 오늘 보니까 훔쳐가 버렸어요.”

▼"N세대 벽 이렇게 높나"▼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게임에 관한 것이라는 정도만 이해가 됐다. 아들이 요즘 저녁식사까지 건너뛰고 인터넷 게임에 열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들을 이렇게 애통하게 하고 비탄에 빠지게 한 원인과 상황에 대해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내 역시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과장은 아들을 겨우 진정시킨 뒤 오전 2시까지 아들로부터 인터넷 게임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건’의 얼개를 추려낼 수 있었다.

아들이 요즘 빠진 게임프로는 ‘바람의 나라’라는 인터넷 네트워크 게임. 옛날 고구려 부여 땅을 가상무대로 해 게임자가 실제 그 나라 백성이 되어 온라인상에서 돈도 벌고 전투도 치르고 결혼도 한다는 줄거리다.

▼가상공간 물품거래 의아▼

많은 병사를 죽여 레벨을 올려 나중에는 그 나라를 통치하는 리더가 되는 게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게임자들이 다른 게임자가 가진 무기나 능력을 컴퓨터 밖에서 ‘돈’을 주고 사고 판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여기서 오가는 무기는 ‘진짜’ 총이나 칼이 아니라 게임자의 ID다. 아들은 며칠전 한 게임자가 갖고 있는 무기가 탐나 그 게임자를 학교 앞에서 만나 4만원을 주고 샀는데 다음날 아침 자신의 ID가 해킹을 당해 그동안 쌓아놓은 레벨은 물론 4만원의 거금을 주고 산 무기까지 물거품이 돼버린 것이다.

▼부모세대 이해노력 필요▼

김과장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말로만 들었던 인터넷 게임의 가상공간이 오프라인(집이나 학교)과 똑같은 완벽한 세계이며 그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마치 두 개의 세계를 사는 사람처럼 오가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더구나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그저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물체를 거래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들은 그 무기를 사서 게임의 신이 되면 게임자들로부터 엄청난 존경을 받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장난감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김과장이 느낀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단절감이다. 아들의 언어와 생각을 도저히 자신의 사고방식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학교선생님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학교 붕괴를 아이의 책임으로 돌릴 게 아니라 이처럼 다른 공간을 살아가는 사이버 키드들에 대해 어른들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려 노력했는지 반성도 했다고 한다.

김과장은 “단순히 아이들이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걱정이라는 생각보다 온라인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 우선 부모세대이므로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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