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책]이제하 지음 '풍경의 내부'

  • 입력 2000년 2월 17일 19시 40분


▲'풍경의 내부' 이제하 지음/작가정신 펴냄/169쪽 5000원▲

'결혼 첫날밤 신부에게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길로 도망쳐나온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정신병원에 있었던 한 여자를 만나 같이 살게 되면서 그동안 자신을 얽어매고 지배해온 관습과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설에 대한 소개내용의 일부다.

순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마당에 웬 순결타령이란 말인가? 솔직한 첫 느낌이다. 하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나보자. 작가 이름이 보인다. 그 이름 이제하.

1957년 데뷔 이래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왔던 이제하가 '순결'이라는 화두로 끄집어내고자 한 이야기의 몸통은 과연 무엇일까. 이 궁금증 하나만으로도 소설을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이 소설은 미당 서정주의 시 <신부>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신부를 음탕히 여겨 첫날밤 뛰쳐나간 신랑이 사오십년 뒤에 신방을 다시 찾으니, 신부는 첫날밤 모습 그대로 앉아있다가 어깨를 어루만지자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았다'는 시. 시속의 판타지 리얼리즘적 분위기가 이제하의 소설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新婦>에서 이제하의 관심을 끈 인물은 단연 신랑이다. 어찌하여 뛰쳐나갔고 어찌하여 다시 돌아왔는지 그 의식의 내부를 파헤치는 작업이 <풍경의 내부>에 담겨있다. 작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방식(혹은 치료법)은 '타자화'인 듯하다. 그리고 '타자화'는 주인공 남자의 자기분열적 독백에서 절정에 달한다.

'자신이 오물투성이이므로 상대는 순결해야 한다는 오만방자한 독선…. 엘리트로 자처하던 놈이 여태도 그런 거지발싸개 같은 독선을 그냥 껴안고 있는 거야? 그래서 구원을 받겠다고? 무슨 얼어죽을 구원? 이 무슨 자가당착의 소리야. 그것도 곧 썩어질 육체의 순결에나 매달려 버둥거리는 주제에…'

아직도 신혼여행지 호텔의 밤 베란다는 '도망갈까 말까' 고민하는 담배연기로 매캐하고, 여전히 적지 않은 여인들이 '한 줌 재'로 무너지진 않을까 저어하며 수술도 감내하는 현실에 대고 작가는 소리친다.

왜 그러느냐고?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냐고? 혹시 권위와 인습, 이데올로기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부지불식간 개개인의 삶과 섹슈얼리티에 개입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김경희<동아닷컴 기자>kik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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