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해외동포학자 통일회의]5돌째 회의 의미와 뒷얘기

  • 입력 1999년 10월 26일 20시 58분


‘지뢰 제거작업’과 ‘철저한 상호주의’의 결실.

95년 처음 개최된 이후 올해로 다섯번째를 맞은 ‘통일을 위한 남북 및 해외동포학자 학술회의’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남북 간의 지속적인 민간대화의 채널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통일학술회의가 5년 간이나 계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상호이해를 통해 다져진 신뢰가 깔려 있고, 이런 점에서 남북간 대화의 한 ‘전형(典型)’을 제시했다는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남북한과 해외학자들이 만나 통일에 대비한 학술적 논의를 시작하자.”

분단 50주년을 맞았던 95년, 송두율(宋斗律·독일뮌스터대)교수 등 해외학자들의 주선으로 처음 회의를 시작할 때의 취지는 순수했지만 그동안의 도정(道程)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96년 9월 2차회의 직후 발생한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97년 2월 황장엽(黃長燁)북한노동당비서 망명사건 등 남북관계가 꼬일 때마다 학술회의의 개최도 진통을 겪었다. 올해만 해도 6월15일 발생한 서해교전사태 때문에 회의개최 일정이 당초 8월말에서 두 차례나 연기됐다.

그러나 그때마다 ‘남북간의 순수한 민간대화창구’라는 점을 북측도 인정하고 회의개최에 응함으로써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칫 ‘논쟁의 장’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통일학술회의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양측 참석자들이 처음부터 서로를 비방하거나 자극하는 발언을 제거하는 ‘지뢰제거작업’에 충실했기 때문.

올해도 회의 시작 직전인 24,25일 양측 대표단이 예비회의를 갖고 서로 원고를 돌려 읽으며 ‘지뢰’를 골라내는 작업을 벌였다. 심지어 양측은 그동안 지난 회의 결과 ‘기피인물’로 지목된 인사에 대해서는 다음 회의에 불참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상호주의를 엄격히 견지해 왔다.

여기에는 “성급하게 결과를 얻으려 하지 말자”는 인내심 있는 자세가 신뢰를 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게 양측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베이징〓특별취재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