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가 최재은씨 「길 위에서」로 영화감독 데뷔

  • 입력 1999년 6월 6일 19시 58분


한국인이면서 95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고 지난해 완공된 성철 스님 사리탑을 디자인한 설치미술가 최재은(46).

미술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그가 독일 일본 폴란드 한국 등 4개국 합작영화 ‘길 위에서(On The Way)’를 통해 뒤늦게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내용, 촬영형식, 촬영장소에서 독특하다. 내용은 70대의 한 노인이 독일 베를린과 폴란드 아우슈비츠,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남아 있는 도시를 여행하면서 겪는 사건과 대화로 구성되었다. 형식은 다큐드라마.

촬영은 5월 폴란드 아우슈비츠 로케에 이어 7일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이뤄진다. 판문점에서 촬영되기는 분단이후 이번이 최초다. 한 소녀(문근영·12)가 끊어진 남북의 길을 전통 모시 실로 잇는다는 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촬영된다.

20억원의 제작비를 독일과 일본의 영화사가 댔으며 배급은 독일의 ‘스튜디오 바벨스버그’가 맡았다. 동베를린 출신의 만프레드 오토가 주인공. 한국 독일 등 10개국 소녀들이 현지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됐다.

최재은은 “세기말을 앞두고 한 시대를 정리하는 데 전쟁과 분단만큼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소재는 없다”면서 “노인이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던 20세기라면 소녀들은 풍요롭고 새로운 미래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번 판문점행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77년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면서도 판문점을 수십차례 방문했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핏줄의 인연도 있지만 판문점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은, ‘진행형의 상처’가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그가 왜 영화를 새로운 수단으로 선택했을까.

“생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20여년에 걸쳐 일관되게 내 작품 속에 담아온 화두였습니다. 2년전부터 이것을 필름으로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설치미술을 통해 건축 영상 등 인접 장르와 연관된 작업을 많이 한 덕분에 큰 부담은 없습니다.”

이번 감독 데뷔에는 일본 소게츠미술학교 시절 은사였던 영화감독이자 미술가 데시가와라 히로시의 영향도 있다. 최재은은 64년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모래여인’으로 특별상을 받은 데시가와라로부터 미술수업은 물론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 수업을 받았다. 영화는 배급사를 통해 2000년 독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예정.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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