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보는 세기말]김성기/나대로 가치탐닉 패스트푸드점

  • 입력 1997년 10월 6일 20시 24분


오늘의 세기말은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이다. 저마다 21세기를 대하는 태도야 다르겠지만 「3년이나 남았다」보다는 「3년밖에 안남았다」는 판단이 우세를 보일 것이며 그러한 조짐은 이미 드러나고 있다. 도심 곳곳에 「21세기를 준비하자」는 플래카드가 난무하며 전자시계판은 「21세기가 앞으로 며칠 남았습니다」를 알리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러면 나의 세기말은 어떻게 오고 있는가. 조문을 간다. 청결하고 세련되기로 소문난 한 신설병원은 영안실마저도 패스트푸드점처럼 꾸며놓았다. 술좌석에서 「휴게방 가봤느냐」고 서로 안부를 주고 받는다. 성(性)문화에도 패스트푸드의 논리는 작동하는가 보다. 네온사인 아래 리어커 램프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라는 노래말이 지나는 이들의 귓전을 때리고, 그 옆 신문 가판대의 노인은 손만 드러낸채 토큰을 팔고 있다. 횡단보도를 지나다가 「부릉 부릉 부르릉…」 소리에 흠칫 놀란다. 돌아보니 굉음을 낸 오토바이의 폭주족은 저 멀리 가 있다. 박정희의 신화가 복고풍과 맞물려 다시 살아나며 디지털시대의 아이들 사이에 갑자기 팽이놀이가 유행하고 있다. 방금 내 눈에 비친 세기말의 풍경을 일별해본 셈이다. 두서없이 나열한 이질적인 현상을 곰곰이 살펴보면 어떤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아닌 부조화 무질서 혼란이다. 모범적인 이들의 눈에는 위의 풍경이 단순히 혼돈스럽기 그지없는 예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 예외와 별종이 또다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거역하기 힘든 추세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기말이라고 한다. 저간 인식의 자장에 잡히지 않던 낯설고 기이한 현상이 넘쳐흐르는 시절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뿌리나 의식의 중심을 유지하기란 아주 힘들다. 전통적 스타일의 안정된 인성보다는 표출적인 개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바깥의 자극에 쉬 의탁하게 된다. 그래, 각종 신드롬의 풍문에 매달려 안달하지 않던가. 아직은 우리 문화가 자체의 구심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수프마냥 무정형의 상태에 처해 있는 탓이다. 종말에의 이상 심리 또한 미래에의 희망 못지 않게 극성을 부리게될 전망이다. 일본 「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 사건이나 미국의 「천국의 문」 집단 자살이 웅변하듯 종말과 영생이 담합하면서 세기말의 문화공간은 퍽 어수선해질 것 같다. 게다가 첨단 과학기술에 힘입어 인공 자연이 자연보다 훨씬 나은 것으로 행세하는 요즘 세상에는 엔트로피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는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되었고 무엇이 더 탐닉할만한, 진짜보다 월등한 가짜인가에 사람들의 흥미가 쏠리고 있다. 마침내 나 또한 기댈 곳을 잃고 세기말 무드에 휩쓸린다. 이는 분명 병적인 현상이다. 사회문화적으로 장애가 있다는 말이다. 세기말의 문화적 에이즈라 부름직하다. 이런 때야말로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는 천재화가 고야의 말이 정말 실감나는 상황이 아닐는지. 여기서 이성은 무엇이고 요괴란 어떤 것인가. 이는 독자 퀴즈입니다. 김성기<「현대사상」주간·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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