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의 시인 노천명 40주기 문학전집 출간

  • 입력 1997년 6월 25일 20시 30분


역사적 상처와 여성으로서의 고독을 안으로 삭이면서 깊은 위안과 민족적 공감을 일구어낸 「사슴」의 시인 노천명(1912∼1957). 지난 16일로 그가 떠난지 40주년. 솔출판사는 이를 기념해 그의 문학전집을 이번 주말 펴낸다. 그는 독신으로 산데다 친일, 부역행적 논란으로 타계 후 보살펴주는 이가 드물었다. 이번 전집에는 그간 한차례도 단행본으로 엮이지 않은 「봄 잔디 위에서」「여원부(女苑賦)」「촉석루에 올라」 등의 단아한 시편들이 선보인다. 노천명은 모윤숙과 더불어 일제하 우리 여성시단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두 사람은 극예술연구회가 공연한 안톤체호프의 연극에서 모녀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고전적인 스캔들로 문화계를 달구곤 했다. 이번 전집의 작가연보에는 그의 자아를 갈수록 단단하게 만들었던 질곡의 생애가 기록돼 있다. 우유부단한 유부남이었던 보성전문학교 김광진교수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그 하나였다. 유진오는 이 사연을 소재로 단편 「이혼」을 발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는 「매일신보」 등의 학예부 기자로 일했던 신여성이었지만 남성들과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번번이 이직, 수필 「피해야 했던 남성」 등을 통해 심정을 고백하기도 했다. 이번 전집의 편집위원인 서울대 김윤식교수는 『그는 동시대의 어떤 여류들도 필적 못할 절창들을 써냈으며 작고 40주기를 맞아 전집을 간행하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문학적 특색의 하나는 감추어진 남녀의 두가지 면모다. 어린 시절의 릴케가 어머니의 강권에 의해 여장(女裝), 내성적 시세계를 보였다면 노천명은 남동생이 숨진후 아버지의 명에 의해 남장(男裝)한채로 성장한 탓에 고향 황해도의 억센 서북정서가 살아있다. 「호박색 물결치는 보리밭/허리 굽힌 여인의 손엔 힘있게 낫이 번쩍이오/사악사악 베어지는가 하면 묶어지는 보릿단/맥추절(麥秋節)의 기쁨이 흰 낮 골짜구니에 피었소」(보리) 그녀는 전쟁이 발발하자 피신을 못한 채 작가동맹에 가입, 부역한 혐의로 반년간 투옥돼 격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겪었다. 그녀는 투옥 중에 쓴 시에서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새빨가니 뒤집어쓰고/감옥에까지 들어왔다」고 한탄했다. 이같은 탄식은 「철창의 봄」「저승인가 보다」「모녀의 출감」 등에 이어, 두메에 은거하고 싶다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등의 도피주의적인 시로 흘러갔다. 그는 57년 재생불능성 빈혈판정을 받고 마흔다섯 나이로 숨지기 전날 마지막 시 「나에게 레몬을」을 한 일간지에 발표했다. 〈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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