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길②/유라시아원정로대탐사]영웅탄생과 대몽골국

  • 입력 1997년 4월 3일 10시 22분


칭기즈칸은 1162년 몽골 헨티아이막 다달솜(아이막, 솜은 우리의 도 군에 상당) 델리운 볼닥에서 몽골부 보르지긴씨 이수게이 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형제들이 초원의 불문율을 무시하고 메르키드부 오도이드씨 예케칠레두의 신행(결혼행렬)을 습격해 납치해온 올코노드부 사람 후엘룬 부인이 어머니였다. 이수게이는 몽골부의 숙적 타타르부를 약탈, 그들의 지도자 가운데 테무진 우게를 사로잡아 왔을때 태어난 이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이라고 지었다. 그 무렵 북으로 바이칼 호수에서 남으로 만리장성, 동으로 흥안령산맥에서 서로는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는 몽골어 또는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1백여 씨족이 살았다. 씨족들은 연대하거나 한 씨족이 다른 여러 씨족을 복속시켜 수십 부족을 형성했다. 부족들은 몽골고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또 살아 남기 위해 끝없는 싸움을 벌였다. 테무진이 속한 보르지긴씨는 가까운 부계혈족인 타이치오드씨 주르킨씨와 경쟁하며 연대해 몽골부를 이루고 헨티산맥에서 발원하는 오농 헤를렝 톨강 상류 일대에서 유목했다. 몽골부는 테무진의 증조부 카볼을 첫 칸(유목민의 임금)으로 선출했다. 카볼의 뒤를 이어 타이치오드씨의 암바가이가 칸이 됐고 그가 타타르부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 금(金)나라로 압송돼 살해 당하자 선대 카볼칸의 아들 코톨라가 몽골부의 칸이 됐다. 코톨라칸의 조카 이수게이는 몽골동부지역의 최강자 케레이드부의 토릴칸과 『두 사람의 목숨은 하나, 끝까지 서로 버리지 않으며 항상 서로 생명의 보호자가 된다』는 안다(盟友)사이였고 13차에 걸친 대(對)타타르전, 케레이드부와의 대(對)나이만 연합전선에서 지도력과 용맹성을 입증해 다음 세대의 칸으로 중망을 모았다. 테무진이 아홉살때 이수게이는 아들을 「얼굴에는 빛이, 눈에는 불이 있는」 귀인의 상을 가진데다 매우 총명한 옹기라드부 데이 세첸의 열살 난 딸 부르테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이수게이는 테무진을 사돈에게 맡기고 (사위가 처가에서 장성하는 당시 풍속에 따라)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라 들른 타타르부 사람들의 잔치에서 독을 넣은 음식을 먹고 죽었다. 아홉살때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아버지의 추종자들은 물론 작은 아버지들마저 과부형수와 어린 조카들을 버리고 떠난 거친 황야에서 「동무라고는 제 그림자밖에 없고 채찍이라고는 꼬리만 남은」 외롭고 고달픈 사춘기를 보냈고 이복형제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이는 끔찍한 일도 저지르게 됐다. 그러나 테무진에게는 현명한 어머니 후엘룬, 어머니 못지 않게 현명한 아내 부르테, 몽골부의 다음 세대 칸으로 중망을 모으던 아버지의 후광, 「몽골비사」같은 사료에 아홉마리 거세마(승용마)로 표현되는 재산, 이복아우 벨구테이를 비롯해 하나같이 용력이 출중한 다섯 아우들, 몽골의 초대 칸 카볼의 증손자라는 정통성, 케레이드부의 토릴칸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가 유산으로 남아있었다. 곤경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소년가장 테무진은 도둑들이 훔쳐간 여덟마리 거세마를 밤낮없이 엿새를 쫓아가 되찾아 나흘 밤낮을 쉬지 않고 돌아올 만큼 용기와 집념이 강한 젊은이로 자라났다. 이때 초원에서 만나 자발적으로 동무해준 보르추라는 용감한 소년은 테무진의 누쿠르(평생동지)가 됐다. 테무진에게는 그를 대신해 죽을 준비도 돼 있는 이런 평생동지가 73명이나 됐다. 1183년경 메르키드부가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 가자 테무진은 아버지의 안다 케레이드부 토릴칸과 자신의 안다 몽골부 자다란씨 자모카의 힘을 빌려 메르키드부를 「그들의 처자가 끝장나도록, 겨레가 결딴나도록」 약탈하고 아내를 찾아왔다. 테무진은 메르키드부 오도이드씨의 칠게르라는 장사에게 주어졌던 부르테가 돌아와 낳은 아이를 조치(귀한 손님)라고 이름짓고 자기 큰아들로 기르며 사랑했다. 테무진은 조치의 출생과 관련해 단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거나 차별하지 않았다. 이런 큰 마음 때문에도 그 어지러운 세상에서 테무진을 배신하는 동무는 없었다. 1년반을 자모카와 함께 유목하며 우애를 다지던 테무진은 자신처럼 몽골고원의 패자가 되려는 야심과 능력을 가진 자모카와 결별했다. 자모카 휘하의 많은 사람들이 테무진을 따라 나왔다. 따라 나온 사람들은 『전쟁의 날에 그대의 명을 어기면 우리의 검은 머리를 떼어내 땅바닥에 버리고 가라. 평화의 날에 그대의 마음을 어지럽히면 우리를 떼어내 주인 없는 땅에 버리고 가라』고 충성을 서약하며 테무진을 몽골부의 칸으로 추대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한 이 주동자들이 나중에 테무진을 배신하고 처참하게 보복당한다는 것이다. 테무진은 대항하는 자, 배신하는 자에게는 철저히 가혹했고 주군을 배신한 자는 그 주군이 자기의 적이라 해도 용서하지 않았다. 귀순한 적은 자기 목숨을 빼앗을 뻔한 자도 용서했고 능력있는 자는 중용했다. 테무진에게는 운도 따랐다. 금은 쇠망기에 접어들어 몽골고원의 일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몽골동부의 최강자 케레이드부의 토릴칸은 노쇠해 정책결정이 철부지 외아들의 변덕에 좌우됐다. 몽골서부의 최강자 나이만은 동서로 분열돼 반목했다. 유능하지만 정통성없는 자다란씨 자모카는 피점령지 유지들을 솥에 삶아 죽이고 적장의 머리를 베 말꼬리에 매달고 다니는 등의 포악한 성행 때문에 민심이 이반했고 동무들조차 그의 잔인함에 넌더리를 냈다. 테무진은 자모카의 연합군, 케레이드부의 토릴칸, 나이만의 타양칸과 쿠출룩칸에게 항상 중과부적의 병력으로도 결사공격을 감행해 차례로 격파했다. 1205년까지 수십차례의 대소 전투와 대항하지 않는 자를 온전하게 내버려 두는 관용책을 통해 몽골과 주변의 유목민을 완전히 평정한 테무진은 1206년 오농강변에서 소집된 쿠릴타이(부족회의)에서 몽골고원의 모든 유목민들에 의해 대몽골국의 칭기즈칸으로 추대됐다. 흉노라는 이름의 유목민들이 기원전 209년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한지 1415년, 마지막 통일국가였던 위구르(745∼840) 패망 이후 3백66년만에 몽골고원에 통일국가가 다시 등장했다. 유원수(한국외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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