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對 노무현]<4>인사스타일

  • 입력 2002년 12월 8일 18시 17분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가 93년 12월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2기 국무총리로 임명된 직후였다. 이 후보는 청와대로부터 총리비서실장을 추천받았으나 고심 끝에 이를 거부했다. 총리비서실장은 청와대 추천이 ‘임명장’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 후보는 직접 총리실 직원들과 언론계 인사들을 만나 적임자를 물색한 뒤 총리실 소속이었던 이흥주(李興柱)씨를 내부 승진시켰다. 이흥주 현 후보특보는 “당시 이 후보와 나는 전혀 일면식도 없던 상태였다”며 “파격적인 인사로 당시 청와대측이 상당히 당혹스러워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고했다.

이 사례는 ‘업무 성격에 맞게 적임자를 배치해야 한다’는 이 후보의 인사 원칙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후보가 올해 8·8 재·보선 공천 당시 박진(朴振) 특보의 서울 종로 공천에 대해 처음부터 완강히 반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후보는 당시 “각자의 길이 있는데, 무조건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어떻게 하느냐”는 논리로 반대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당 지도부가 박 특보의 공천을 결정해 사태는 마무리됐지만, 이를 통해 이 후보는 자신의 인사 원칙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 후보가 8일 정치개혁 방안으로 ‘집권시 국회의원의 입각 금지’ 방안을 제시한 배경에도 이 같은 인사 원칙이 반영됐다는 게 당내 중론이다.

정치권 입문 후 이 후보는 능력과 성실성을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 기준을 통과한 사람은 믿고 계속 중용해 왔다. 당 안팎에서 ‘물레방아’ 인사란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97년 대선 패배 후에도 이 후보를 따랐던 양정규(梁正圭), 신경식(辛卿植), 김진재(金鎭載), 이상득(李相得) 의원 등이 여전히 이 후보의 핵심지원그룹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침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97년 대선 당시 이 후보의 핵심 측근이었던 김영일(金榮馹) 의원은 대선 패배 후 이 후보의 서울 종로 재선거 불출마 방침에 강력 반발한 뒤 한동안 이 후보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후보는 대선을 앞두고 김 의원을 선거사무의 총책인 사무총장에 전격 발탁해 변함 없는 신뢰를 보여줬다.

이 후보 주변에도 몇몇 측근들이 있지만 이들은 오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이른바 ‘3김(金)식’의 보스와 부하관계인 가신은 아니다. 업무에 따라 관계가 맺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 후보가 중요한 고비마다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 국면 전환에 성공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강력한 대여투쟁이 필요할 때 비주류이면서 개혁성향이 강한 이부영(李富榮) 이재오(李在五) 의원을 원내총무에 포진시켰던 것이 단적인 사례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노무현 후보▼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이던 2000년 12월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해양부 정기인사에서 ‘파격적’인 인사스타일을 선보였다.

노 후보는 인사를 앞두고 실 국장급 간부들에게 “당신이 데려다 쓰고 싶은 과장을 1, 2, 3 순위로 세 명씩 적어내라”고 지시했다. 과장들에게는 “희망하는 부서를 1, 2, 3 순위로 써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짜맞추기한 결과 오갈 데가 없어진 과장급 2명은 지방으로 발령을 냈다. 어느 조직이든 ‘탐내는 부하’와 ‘능력 없는 부하’로 나눠져 있기 마련이고 상사들의 선호는 결국 업무능력과 직결돼 있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노 장관은 한발 더 나아가 과장은 1년에 한 명씩, 국장은 3년에 한 명씩 강제 퇴출시키는 파격인사를 하려 했지만 8개월 단명 장관에 그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인사는 ‘자체검증’과 ‘시장경쟁 원리’를 철저히 반영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해양부 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노 후보의 인사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철저히 검증하고 일단 한 번 일을 맡기면 100% 권한을 주는’ 식이다. 노 후보 보좌관 출신인 서갑원 의전팀장은 “국회의원 시절엔 보좌관 한 명을 뽑을 때도 인터뷰를 수 차례나 하고 여러 채널을 통해 뒷조사를 했다”며 “그러나 한번 채용하면 전권을 맡겼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맺어진 끈끈한 관계가 발전돼 나중에 노 후보가 각종 선거에 나올 때마다 보좌진 출신들이 휴직을 하고 선거를 도울 정도”라고 소개했다.

그는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 때는 개혁성향인 운동권 출신 인사들을 집중 공천해 ‘자기색깔’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였다. 8·8 재·보선 때 금천 지역구 공천을 희망한 김중권(金重權)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물리치고 노동운동가 출신인 이목희(李穆熙)씨를 고집한 대목이나 전북 군산후보로 끝까지 강봉균(康奉均) 전 재정경제부장관 대신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함운경(咸雲炅)씨를 밀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인사경향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의 집단탈당으로 사고 지구당이 된 지구당 위원장 보강과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반면 그는 후단협 의원들의 탈당사태 때도 적극적으로 접촉해 만류하기보다는 ‘뺄셈정치’를 언급하며 “갈 테면 가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들은 자기 책임 아래 행동해야지 누가 붙들고 사정한다는 것 자체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게 노 후보의 정치소신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노 후보는 인사의 원칙으로 효율성과 기능성을 중시한다”며 “특히 인사가 현실적인 ‘타협’의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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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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