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 2002 /4]불공정 사회풍토

  • 입력 2002년 1월 4일 18시 39분


'룰' 사라진 거리
'룰' 사라진 거리
정부가 1989년부터 추진해온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계획은 지난 10여년 동안 한 걸음도 진전을 보지 못한 채 표류해 왔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환경단체 지역주민 등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과 대립이 계속되면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절대 우리 동네에는 안 된다’거나 ‘무조건 환경이 우선이다’는 식의 일방적인 억지 주장과 지역이나 집단의 이기주의 때문에 공공의 이익이 훼손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지적된다.

우리 사회 전반에 ‘언페어플레이’(불공정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공정한 절차와 룰을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보다는 ‘반칙’과 ‘변칙’을 동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글 싣는 순서▼

- ①공정한 정치 누가 막나
- ②여야의 주문과 다짐
- ③경제 바로세우려면
- ④불공정 사회풍토

지연 학연 혈연 등 온갖 연줄을 동원하거나 뇌물을 제공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법을 무시한 채 집단 농성과 시위로 정당한 법 집행을 저지한다. 그래서 법 위에 ‘뗏법’이 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정도(正道)를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거나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기형적 사회풍토에서 생겨난 고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양보의식 부재와 개인 이기주의〓김모씨(28)는 지난해 12월29일 밤 직장 동료와 함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교대 후문 부근에서 택시를 잡으려다 다른 사람들과 시비가 벌어졌다.

주먹다툼까지 하는 바람에 결국 양측 모두 경찰서에 연행되고 말았다. 줄을 서거나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될 일을 서로 자신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행동하다 모두 피해를 본 경우다.

지난해 12월28일 오전 서울 한남대교 북단 고가차도 부근. 한남대교로 연결되는 고가차도는 2개 차로로 경찰은 끼어들기를 막기 위해 고가차도에서 50m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탄력봉을 설치했다.

그러나 취재기자가 1시간 동안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단속 경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무려 73대의 차량이 끼어들기로 고가에 진입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단독주택에 사는 김모씨(28)는 집 앞의 거주자 우선 주차 자리를 하나 샀다. 그러나 주차하기 어려운 사정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낯선 차가 버젓이 주차하고 있거나 심지어 차가 2대인 이웃사람이 남의 자리에까지 차를 세워 놓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언페어플레이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운행이 금지된 고속도로 갓길이나 버스전용차로를 버젓이 달리는 행위, 차량 접촉사고가 나면 교통이 마비되든 말든 목청부터 높이는 행위, 복잡한 교차로에 앞차 꼬리를 물고 들어서기, 줄 안 서기 등….

▼관련기사▼

- 전문가 진단"지도층 부패가 불공정 부추겨"
- 외국인이 본 한국사회

▽연고주의 만능〓서울지하철 왕십리역에서 근무하는 A씨는 지난해 12월 중순 설날 귀성표를 예매하면서 무척 시달렸다.

수많은 사람이 꼭두새벽부터 미리 줄을 서서 표를 사는데 친구 친척 동네사람 등 수십명이 연방 전화를 해 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A씨는 “명절 때면 으레 겪는 일”이라고 말했다.

주부 김모씨(48)는 지난해 3월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에서 난소에 물혹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1주일 후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입원실이 나면 연락을 주겠다던 병원은 1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전화를 할 때마다 입원실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3개월을 기다린 김씨는 결국 ‘연줄’을 동원해서야 병실을 잡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비행기표 예약에서부터 호텔 콘도 골프장 부킹에 이르기까지 각종 연줄을 동원한 청탁은 일상사가 된 지 오래다. 정부 부처와 기업체의 인사에서도 연고주의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교육 현장과 공무원 사회 등 사회 곳곳에서 근절되지 않고 있는 촌지 문화도 따지고 보면 이런 연줄을 만들어 ‘반칙’을 하겠다는 발상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집단 이기주의〓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하반기에 우리 사회를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의약분업 사태. 정부의 졸속 준비와 시행이 빌미를 제공했지만 국민 건강을 볼모로 의사와 약사들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는 통에 애꿎은 국민만 피해를 봤다.

서울 서초구 원지동의 추모공원(화장장)과 경기도의 종합장묘단지 조성 계획, 경북 성주군의 쓰레기매립장 건설 계획 등도 결국은 집단 이기주의와 이해 당사자들의 페어플레이 정신 부재 때문에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경우다.

도심의 교통체증으로 인한 시민들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무질서한 시위 행태도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로 지적된다.

서울 종로경찰서 변종구(邊鐘九) 경비과장은 “지난해 수십여건의 시위와 집회가 종로 일대에서 있었지만 신고한 내용대로 규칙을 지킨 것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사회 지도층의 일탈〓지난해 잇따라 터져 나온 각종 ‘게이트’는 정계 관계 금융계 등 사회 지도층이 총망라된 ‘부패 스캔들’로 언페어플레이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불공정한 행위를 저지르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다시 연줄과 뇌물 등 불공정한 수단을 동원했다가 문제가 된 게 ‘게이트’의 요체라고 볼 수 있다.

반부패국민연대가 최근 서울의 10개 중고교 학생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10명 중 9명꼴로 ‘한국은 부패한 사회’라고 응답했다.

이들은 정치권 기업 공무원 법조계 교육계 순으로 부패해 있다고 응답해 사회 지도층의 일탈이 국민의식 속에 얼마나 깊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조동철(趙東哲) 조직국장은 “불공정한 법 적용에 따른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가 사회 전체에 상실감을 가져다주고 법을 잘 지키면 손해 본다는 인식을 낳고 있다”며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 회복과 함께 지속적인 국민의식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진녕기자 jinnyong@donga.com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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