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 게이트]국책은행이 편법 CB '합작'

  • 입력 2001년 9월 23일 18시 26분


우리 금융권에는 ‘검은머리 외국인’이라는 은어(隱語)가 있다. 달러표시 회사채나 해외 전환사채(CB)를 해외투자자에게 팔아 외자를 유치한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국내자본이(대부분 발행기업이 스스로) 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해외투자유치에 성공한 우량기업’임을 과시해 주가 등 기업가치를 끌어올리는 것. 이 과정에서 발행기업과 주간증권사 및 되사주는 기관투자가들은 흔히 사전약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소액투자자 등 이해관계자에게 큰 피해를 끼친다.

삼애실업(삼애인더스의 전신)의 주가조작 및 전방위 로비의 핵심 사안인 해외CB의 발행을 도와준 ‘검은 머리 외국인’의 역할은 국책기관인 산업은행이 맡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산은의 사전공모가 없었다면 삼애실업의 편법 해외CB 발행은 불가능했다.

산은 관계자는 “CB전환가격이 낮았고 지난해 10월 당시 삼애실업의 향후 전망을 좋게 평가하는 증권리포트가 나와 정상적으로 유통시장에서 매입했다”며 “해외 유가증권을 발행할 때 주간사가 이를 매입할 수 있는 기관투자가를 찾아놓는 것은 관행”이라고 말했다.

▽산업은행의 역할〓삼애실업은 실제로 지난해 6월 30일 CB발행 결의를 하고도 3개월여간 이를 사겠다는 해외투자자가 없어 CB발행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산은이 나서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삼애실업과 주간사회사인 KGI증권, 산업은행은 ‘해외전환사채 발행→산은 곧바로 재매입→삼애실업의 대주주인 이용호씨 매입’의 구조에 사전에 합의를 했다. 즉 산은은 ‘가짜 외자유치’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CB는 결국 이용호씨가 매입하기 때문에 외국자금은 고사하고 국내자금도 새로 들어오는 것이 없다. 이씨가 자신의 호주머니돈을 한 바퀴 돌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씨는 외자유치 및 보물섬 재료 등으로 주가가 오른 틈을 타 2월 CB를 주식으로 전환, 매각해 102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겼다.

증권업협회 관계자는 “징계대상이 되는 편법거래가 관행적으로 이뤄진다고 해서 산은이 이를 정상거래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노무라증권 홍콩지점 등이 삼애실업 해외CB를 인수한 것은 산업은행이 되사주기로 한 약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1주일 만에 CB를 처분한 노무라증권의 인수 자체도 서류상으로만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손놓은 금융감독기관〓이 같은 편법 해외CB발행에 대해 금융감독기관이 별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측은 해외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발행되는 채권은 국내에서 발행하는 것처럼 유가증권신고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으며 공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입장.

하지만 지난해 2월 4대 재벌이 똑같은 수법으로 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한 것에 대해서는 56억원의 과징금을 물리고 주간사회사에 대해 3개월간 유가증권 인수업무를 제한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대조적이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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