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전쟁은 수많은 발명을 낳았다. 손목시계도 그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젊은 군인들이 연인이 준 회중시계를 손목에 감던 게 오늘날 손목시계의 시초다. 어두운 참호 속에서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문자판에 라듐 페인트를 칠한 야광시계도 이때 나왔다. 여성 직공들은 라듐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일했다. 라듐은 시한폭탄처럼 뼈를 갉아먹었고 많은 이들이 라듐 중독으로 죽었다. 전쟁의 아픈 뒷모습이었다. 영국 최초로 시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수공예 시계 제작자가 쓴 책이다. 시계가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시계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다뤘다. 시계가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신분의 상징에서 보편적 도구로, 그리고 다시 신분의 상징으로 변신한 변천사를 읽다 보면 새삼 몰취향한 스마트폰 시계 대신 ‘째깍째깍’ 움직이는 손목시계를 차고 싶어진다. 인간이 최초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남아공 ‘국경 동굴’에서 발견됐다. 약 4만4000년 전 만들어진 유물로, 검지 길이 정도 되는 개코원숭이 종아리뼈에 29개의 홈을 새겨놨다. 만약 그 뼈의 주인이 홈과 칸을 번갈아 사용해서 날짜를 셌다면 평균 29.5일이 되니 정확하게 음력 한 달을 계산한 셈이 된다. 고고학계에서는 생식 주기, 임신 주기를 계산하기 위해 이 뼈를 사용했다는 추측도 나온다. 책 속엔 이처럼 흥미로운 시계사(史)가 가득하다. 현직 시계 제작자인 저자의 경험도 곳곳에 녹아 있어 몰입감을 높인다. 저자는 남편과 함께 부품 제작부터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하는, 영국에 몇 남지 않은 시계 제작 공방을 운영 중이다. 지난 500년 동안 만들어진 골동품 시계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로버트 스콧이 1912년 남극 탐험에 가져간 회중시계가 그의 작업대에 올라오기도 한다. 인류 탐험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시계 앞에서 숭고함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이 인상 깊다. 엄지손톱만 한 세계에 평생을 바치는 수공예 시계 제작자들은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눈이 건조해지기 일쑤다. 공방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실수로 튀어 나간 부품을 찾아 헤매는 ‘부품 사냥’도 일상이다. 누군가는 질문할 수 있다. 컴퓨터로 디자인을 입력하고 소프트웨어로 기계를 제어하면 대부분의 제작 공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에 왜 한물간 방식으로 구닥다리 장치를 만드느냐고. 이들에게 저자는 “(컴퓨터로 만들면) 재미가 없잖아요?”라고 답한다. 손을 더럽혀 가며 무언가를 만들고 작은 부품을 만지작거려 작동하게 하는 일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시계는 인공지능(AI)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존재한다. 세계인이 공유하는 무작위 데이터 더미가 아니라 독자적인 개성과 인격을 지닌 장인의 손에서 몇 년의 세월도 감수하며 탄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눈을 가리고도 기계가 만든 시계와 손으로 만든 시계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진정한 지각을 지닌 AI가 나오기 전까지는 수제 시계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란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저자는 어느 집안에서 18세기부터 가보로 내려온 시계를 정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시계를 만지며 자신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고, 내가 사라진 후에도 몇백 년은 더 존재할 물건의 역사에서 나 또한 하나의 장이라는 생각을 하며 앞서간 선배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주워 모은다.” 시계의 역사뿐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한 지극한 자부심도 함께 배울 수 있는 책이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지난해 5월 22일 타계한 고 신경림 시인(1935∼2024)의 유고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창비)에 실린 시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의 한 구절이다. 삶의 유한함을 긍정하고 현재를 충만히 살아가자는 시인의 당부인 듯하다. 16일 출간되는 유고시집은 시인이 생전 마지막으로 펴낸 ‘사진관집 이층’ 이후 11년 만에 나왔다. 잡지나 신문에 발표한 시와 미발표 유작 가운데 60편을 골라 도종환 시인이 엮었다.출간을 앞두고 14일 서울 마포구 창비사옥에서 열린 유고시집 출간 간담회엔 도 시인과 고인의 차남인 신병규 씨, 송종원 문학평론가가 참석했다. 도 시인은 “시집에 실을 시들을 검토하면서 ‘한결같다’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했다. “거창한 것을 내세우거나 자기를 과장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작은 것, 하찮은 것, 낮은 데 있는 것들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 한결같으셨습니다. 유명 시인이 되면 어깨에 힘 들어가고 목소리에 거창한 힘을 실으려고 하기 쉬운데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여전히 자기 성찰의 자세를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신 씨는 아버지의 소소한 일화도 소개했다. 한 번은 중학교에 다니던 신 시인의 손녀가 시험 문제로 할아버지 시가 나왔는데 많이 틀렸다. 그런데 시험지를 집에 가져와 할아버지와 같이 풀었더니 할아버지는 ‘다’ 틀렸다고 한다. 이런 애틋한 할아버지의 마음은 고스란히 유고시집에도 담겼다. ‘퇴원해 귀가하는 차 안에서,/거실 창밖으로 산언덕을 바라보며, 핸드폰 속에서 울리는 손자들의 목소릴 들으며, 나는 행복했는데’(시 ‘미세먼지 뿌연 날’에서) 신 씨는 “1986, 87년경 아버지께서 대우에서 나온 시커멓고 뚱뚱한 워드프로세서 기계를 어디서 들고 오셨다. 엄청 좋아하시면서 그때부터 그걸로 작업을 하셨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1956년 등단 이래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목계장터’ 등을 남기며 평생 빈자와 노동자들의 삶을 시로써 대변했다. 유고시집 4부에도 세월호 참사 등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는 시들이 담겼다. 도 시인은 “이웃이 아프면 자기도 아픈 사람이 시인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고 했다. 시집은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고추잠자리’에서)는 시구처럼 고단하더라도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시집 제목에 대해 도 시인은 “선생님이 (계셨다면)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실 것 같았다”고 말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머지않아 가마득히 사라질 것이어서 더 아름답다/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지난해 5월 22일 타계한 고(故) 신경림 시인(1935~2024)의 유고시집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창비)에 실린 시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의 한 구절이다. 삶의 유한함을 긍정하고 현재를 충만히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16일 출간되는 유고시집은 시인이 생전 마지막으로 펴낸 ‘사진관집 이층’ 이후 11년 만에 나오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에 발표한 시와 미발표 유작 가운데 총 60편의 작품을 도종환 시인이 엮었다.14일 서울 마포구 창비사옥에서 열린 유고시집 출간 기자간담회에는 도 시인과 신경림 시인의 차남인 신병규 씨, 송종원 문학평론가가 참석했다. 도 시인은 “시집에 실을 시들을 검토하면서 ‘한결같다’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며 “거창한 것을 내세우거나 자기를 과장하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작은 것, 하찮은 것, 낮은 데 있는 것들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 한결같다”고 말했다. “유명한 시인이 되면 어깨에 힘 들어가고 목소리에 거창한 힘을 실으려고 하기 쉬운데 선생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여전히 자기 성찰의 자세를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신 씨는 고인의 생전 가족과의 소소한 일화를 소개했다. 한번은 중학교에 다니던 손녀(신 씨의 딸)가, 시험 문제로 할아버지 시가 나왔는데 많이 틀렸다고 했다. 시험지를 집에 가져와서 할아버지와 같이 풀었더니 할아버지는 다 틀렸다는 것. 손주들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은 고스란히 신간에 담겼다. “퇴원해 귀가하는 차 안에서,/거실 창밖으로 산언덕을 바라보며, 핸드폰 속에서 울리는 손자들의 목소릴 들으며, 나는 행복했는데”(‘미세먼지 뿌연 날’ 중에서)신 씨는 “1986, 87년경 아버지께서 대우에서 나온 시커멓고 뚱뚱한 워드 프로세서 기계를 어디서 들고 오셨다. 엄청 좋아하시면서 그때부터 그걸로 작업을 하셨다”고 회상했다.고인은 1956년 등단 이래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목계장터’ 등을 남기며 평생 빈자와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했다. 이번 시집 4부에도 세월호 참사 등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아파하는 시가 담겼다. 도 시인은 “이웃이 아프면 자기도 아픈 사람이 시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했다.시집은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고추잠자리’ 중에서)는 시구처럼 고단한 삶이라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시집의 제목에 대해 도 시인은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실 것 같아 정했다”고 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광활한 유튜브 세계에서 ‘결혼 장려 영상’으로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채널이 있다. 2023년에 개설해 2년 만에 구독자 131만 명을 모은 ‘인생 녹음 중’이다. 부부가 운영하는 채널은 간단한 선으로 그려진 캐릭터에 실제 부부 음성이 녹음된 짧은 영상으로 구독자를 사로잡았다. ‘(불편한 얘기는) 노래로 말해요’란 제목의 50초짜리 애니메이션은 운전 중인 남편과 조수석에 앉은 아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내는 “내가 오빠를 향해 부르는 곡”이라고 운을 떼더니 “너는 한 마리 뱀이지∼”로 이어지는 자우림의 ‘뱀’을 열창한다. 남편이 외출할 때 뒷정리를 하지 않고 몸만 빠져나가는 걸 지적한 것. 영문 모르고 신나게 따라 부르던 남편은 차츰 ‘내 얘긴데’ 싶었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가 웃음을 터뜨린다. 채널엔 이렇게 일상 속 부부의 유쾌한 ‘티키타카’를 담은 영상 68개가 올라와 있다. 이 부부가 지난달 29일 첫 에세이 ‘인생 녹음 중’(김영사)을 펴냈다. 동아일보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현재의 다정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서로를 더 아끼게 되었는지 진솔하게 나누고 싶었다”며 책을 낸 계기를 밝혔다. 1980년대생 8년 차 부부란 것 외엔 실명이나 실물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캐릭터 세계관으로 활동하다 보니 밝히기가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다. 책도 ‘인생 녹음 중 부부’란 이름으로 냈다.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남편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한다는 아내가 일상을 녹음하는 콘셉트의 채널을 만든 건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남편이 운전하다가 졸지 않도록 아내가 옆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노래 부르는 아내가 웃겨서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가 ‘핵심 기억 구슬’을 모으듯 소소한 순간을 녹음했다. 일상 속 잔잔히 빛나는 순간을 한데 모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녹음에 맞춰 남편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남편은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폰으로 집에서 24시간 녹음을 한다”며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화였거나 재미있는 순간이라고 느껴지면 저장 버튼을 누른다”고 설명했다. 아내는 “영상에 비하면 녹음은 훨씬 덜 부담스러워서 그리 의식하게 되진 않는다”고 한다. 책에는 세상 기준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부부의 개성 넘치는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결혼식의 기본이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인 시대에 스튜디오 촬영도 하지 않았고 드레스도 친한 언니에게 빌려 입었다. 결혼식 전날에는 24시 사우나에 가서 미역국을 먹으며 세신했다. 아내는 책에 “결혼식 준비할 땐 ‘스드메’보다 ‘사세미(사우나·세신·미역국)’를 권한다”고 썼다. 이 부부는 결혼 때 구한 방 하나, 화장실 하나짜리 신혼집에서 8년째 살고 있다. 거실에 러그 하나 새로 깔고 “집 전체가 달라진 것 같다”며 박수 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들이 채널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영상을 본 사람들이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같은 댓글을 달 때”라고 한다. 실은 ‘인생 녹음 중’ 채널은 부부가 7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다. “뭐든 만들면 30, 40년 뒤에도 부부에게 이야깃거리로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만족도가 높단다. 아내는 “(이 책이) 아직 집이 불편하고 매일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끼는 분들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광활한 유튜브 세계에서 ‘결혼 장려 영상’으로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고 있는 애니메이션 채널이 있다. 2023년에 개설해 2년 만에 구독자 131만 명을 모은 ‘인생 녹음 중’이다. 부부가 운영하는 채널은 간단한 선으로 그려진 캐릭터에 실제 부부 음성이 녹음된 짧은 영상으로 구독자를 사로잡았다.‘(불편한 얘기는) 노래로 말해요’ 란 제목의 50초짜리 애니메이션은 운전 중인 남편과 조수석에 앉은 아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아내는 “내가 오빠를 향해 부르는 곡”이라고 운을 떼더니 “너는 한 마리 뱀이지~”로 이어지는 자우림의 ‘뱀’을 열창한다. 남편이 외출할 때 뒷정리를 하지 않고 몸만 빠져나가는 걸 지적한 것. 영문 모르고 신나게 따라부르던 남편은 차츰 ‘내 얘긴데’ 싶었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다 웃음을 터뜨린다. 채널엔 이렇게 일상 속 부부의 유쾌한 ‘티키타카’를 담은 영상 68개가 올라와 있다. 이 부부가 지난달 29일 첫 에세이 ‘인생 녹음 중’(김영사)을 펴냈다. 동아일보와 가진 서면인터뷰에서 “현재의 다정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서로를 더 아끼게 되었는지 진솔하게 나누고 싶었다”며 책을 낸 계기를 밝혔다. 1980년대 생 8년 차 부부란 것 외엔 실명이나 실물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캐릭터 세계관으로 활동하다 보니 밝히기가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다. 책도 ‘인생 녹음 중 부부’란 이름으로 냈다.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남편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한다는 아내가 일상을 녹음하는 콘셉트의 채널을 만든 건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남편이 운전하다 졸지 않도록 아내가 옆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노래 부르는 아내가 웃겨서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가 ‘핵심 기억 구슬’을 모으듯 소소한 순간을 녹음했다. 일상 속 잔잔히 빛나는 순간을 한데 모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녹음에 맞춰 남편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남편은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폰으로 집에서 24시간 녹음을 한다”며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화였거나 재미있는 순간이라고 느껴지면 저장 버튼을 누른다”고 설명했다. 아내는 “영상에 비하면 녹음은 훨씬 덜 부담스러워서 그리 의식하게 되진 않는다”고 한다. 책에는 세상 기준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부부의 개성 넘치는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결혼식의 기본이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인 시대에 스튜디오 촬영도 하지 않았고 드레스도 친한 언니에게 빌려 입었다. 결혼식 전날에는 24시 사우나에 가서 미역국을 먹으며 세신했다. 아내는 책에 “결혼식 준비할 땐 ‘스드메’보다 ‘사세미(사우나·세신·미역국)’를 권한다”고 썼다.이 부부는 결혼 때 구한 방 하나, 화장실 하나짜리 신혼집에서 8년째 살고 있다. 거실에 러그 하나 새로 깔고 “집 전체가 달라진 것 같다”며 박수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들이 채널 시작한 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영상을 본 사람들이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같은 댓글을 달 때”라고 한다. 실은 ‘인생 녹음 중’ 채널은 부부가 7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다. “뭐든 만들면 30, 40년 뒤에도 부부에게 이야깃거리로 남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만족도가 높단다. 아내는 “(이 책이) 아직 집이 불편하고 매일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끼는 분들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듬직한 체구의 한 남자가 한 손엔 창을, 다른 손엔 술이 담긴 호리병을 들었다. ‘고리 눈’에 입가를 따라 촘촘하게 바늘처럼 돋은 호랑이 수염. 우리에게 익숙한 삼국지 ‘장비’의 모습이다. 장비를 비롯해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삼국지의 만화 캐릭터를 그린 이. 한국 만화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故) 고우영 화백(1938∼2005)이 올해 타계 20주기(지난달 25일)를 맞았다.1938년 만주 본계호(本溪湖)에서 태어난 고 화백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삼국지’와 ‘십팔사략’ ‘수호지’ ‘열국지’ ‘임꺽정’ ‘일지매’ ‘서유기’ 등 40여 작품을 남겼다. 1953년 15세에 부산 피란 시절 ‘쥐돌이’로 데뷔한 그는 만화를 사회상을 비추는 표현 수단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근 고 화백의 타계 20주기에 맞춰 절판됐던 그의 작품을 복간하는 등 고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고우영, 만화가 뭔지 알게 해 줘”고인의 작품 중 17종의 출판권을 보유한 문학동네는 지난달 23일 ‘일지매’를 전자책으로 내는 등 여러 작품을 순차적으로 복간하고 있다. 쌤앤파커스는 ‘서유기’ 복간을 위해 4일부터 와디즈 플랫폼 펀딩에 나섰는데, 이미 목표 금액을 훌쩍 넘겼다. 흑백 원고를 일부 채색한 담채판도 제작했다. ‘서유기’는 2010년쯤부터 사실상 절판돼 현재 중고 거래로만 거래되고 있다.젊은 독자와의 만남을 위해 새로운 플랫폼과의 만남도 이뤄진다. 고 화백의 유족이 세운 ‘㈜고우영’은 네이버웹툰이 새롭게 도입하는 쇼츠 서비스 ‘컷츠’에 ‘서유기’ 전편을 올릴 예정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원화 스캔본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고 효과음과 음성도 넣는다. 고 화백의 필체로 만든 ‘고우영체’도 무료 배포 중이다. 청강문화산업대는 3월 20일부터 전시 ‘우리시대 이야기꾼 고우영’을 열고 있다. 만화가 조석은 전시에 보낸 축전에서 “어린 시절 만화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 작품이 ‘삼국지’와 ‘십팔사략’”이라고 했다. 강풀도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니 그 감각에 혀를 내두를 만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전시는 5월 15일까지.●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야기꾼9일 둘러본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의 ㈜고우영은 문을 열자마자 헌책방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곳은 고 화백의 작품 원본과 스케치를 다수 보관하고 있다. 상자를 여니 가로 26.5㎝, 세로 39.3㎝ 하드보드지 원화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고 화백의 필체로 채운 말풍선과 화이트로 수정한 자국도 그대로였다. 가로 6칸, 세로 7칸에 삼국지 등장인물을 그린 ‘인물 도감’도 있었다. ㈜고우영의 신명환 대표(만화가)는 “(고인은) 작중 인물이 죽으면 도감 위에 ‘X’자 표시를 남겼다”며 “인물이 이렇게 많은데 한 명도 중복되는 캐릭터가 없었다”고 했다. 지금 이 시대에 고우영을 다시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신 대표는 각색의 묘미를 강조하며 “선생님은 고전과 민담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야기꾼”이라며 “지금도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선생님 작품을 반드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화백은 국내 만화에서 작가가 작품에 개입하는 연출을 도입하기도 했다. ‘삼국지’ 유비를 본인과 닮게 그렸고, ‘열국지’ 마지막 장면에선 천하통일을 마무리한 진시황이 “이제 좀 쉬자”며 모자를 벗고 수염을 떼자 고 화백 본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신 대표는 지난해 프랑스 파리 올림픽 당시 퐁피두센터에서 열렸던 만화 전시에서 한국 작품은 없었던 점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K웹툰이 유명하다고 해도 어떤 분야든 계보를 아는 게 기본이겠지요. 해외 만화 평론가들, 연구자들이 알 수 있도록 고 화백의 작품을 비롯해 우리 만화 문화유산의 번역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스테디셀러가 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이어 상반기 베스트셀러 2위(1월 1일∼4월 22일·예스24)에 오른 ‘초역 부처의 말’까지. ‘힙불교’는 출판계에서 단연 주목받는 키워드다. 최근엔 ‘반가사유상’ 화보집(사진) 복간이 출판계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05년 1판 1쇄를 끝으로 절판됐던 책을 민음사에서 전면 개정판으로 내놓는데 비싼 가격에도 관심이 높다. 신간은 가로 44cm 특대형 크기의 화보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을 2권에 나눠 담았다. 360도 각도 초근접 클로즈업으로 촬영해 반가사유상의 어깨, 등, 뺨 같은 세부 신체 구조와 옷 주름, 손가락의 세밀한 표현 기법까지 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기존 반가사유상 관련 책들은 작은 판형에 글 위주로 담아 불상의 조각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비해 신간은 사진 위주로 꾸려 차별화했다. 원로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 해설 글을 수록했다. 화보집은 국립중앙박물관 단독 전시관 ‘사유의 방’에 놓인 국보 반가사유상들을 “내 방에 두고 볼 수 있다”며 입소문을 탔다. 두 권에 15만 원이나 하지만, 올해 초 와디즈 펀딩 당시 목표치의 6000%(400명 구매)를 달성했다고 한다. 지난달 29일부터 앙코르 펀딩도 시작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스테디셀러가 된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이어 상반기 베스트셀러 2위(1월 1일~4월 22일·예스24)에 오른 ‘초역 부처의 말’까지. ‘힙불교’는 출판계에서 단연 주목받는 키워드다.최근엔 ‘반가사유상’ 화보집 복간이 출판계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05년 1판 1쇄를 끝으로 절판됐던 책을 민음사에서 전면 개정판으로 내놓는데 비싼 가격에도 관심이 높다.신간은 가로 44㎝ 특대형 크기의 화보집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을 2권에 나눠 담았다. 360도 각도 초근접 클로즈업으로 촬영해 반가사유상의 어깨, 등, 뺨 세부 신체 구조와 옷 주름, 손가락의 세밀한 표현 기법까지 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기존 반가사유상 관련 책들은 작은 판형에 글 위주로 담아 불상의 조각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비해 신간은 사진 위주로 꾸려 차별화했다. 원로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이 해설 글을 수록했다.화보집은 국립중앙박물관 단독 전시관 ‘사유의 방’에 놓인 국보 반가사유상들을 “내 방에 두고 볼 수 있다”며 입소문을 탔다. 두 권에 15만 원이나 하지만, 올해 초 와디즈 펀딩 당시 목표치의 6000%(400명 구매)를 달성했다고 한다. 지난달 29일부터 앵콜 펀딩도 시작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세진’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재택근무자다. 그의 업무는 주어진 키워드에 맞게 기사를 스크랩해서 비공개 카페에 올리는 단순 반복 작업. 하루 4시간 근무가 끝나면 담당자 다섯 명에게 일일업무 보고서를 전송한다. 하지만 메일은 늘 ‘읽지 않음’ 상태다. 회사는 장애인 의무고용 할당제를 채울 뿐,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세진은 쓸모없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1일 출간된 소설집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문학동네)에 수록된 황시운 작가의 단편소설 ‘일일업무 보고서’의 줄거리다. 직장인이라면 공감할 만한 ‘일의 쓸모’에 대한 고민을 다루면서, 실제로 장애인 재택근무를 겸업하는 작가의 경험도 담겨 묘사가 핍진하다.‘내가 이런 데서…’는 특별한 점이 또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취지로 출범한 문학 동인(同人) ‘월급 사실주의’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장강명 작가가 2022년 6월 김의경, 정진영 작가와 합심해 기획했다. 작가들은 동인 참여를 원하는 11명이 모였을 때 여러 출판사에 직접 기획안을 보냈다. 이후 해마다 동인지의 성격을 띤 소설집을 내고 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먹고사는 문제를 다룬 한국 문학이 드물다는 공감에서 출발했다. 장 작가는 “2000년대 들어 한국 노동시장이 둘로 쪼개지던 시기에 그 실태를 사실적으로 알리고 비판한 작품은 소설보다 드라마나 웹툰이 먼저 떠오른다”며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소설이 더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젠 사라지다시피 한 한국 문단의 동인이 등장했단 점에서 반갑지만, ‘월급 사실주의’는 상당히 느슨하게 운영된다고 한다. 결성 이래 단 한 번도 모이지 않았고, 단체대화방조차 없다. 모두 의도적으로, 서로가 만나는 동호회가 아니라 책으로 말한다는 취지다.최근 ‘월급 사실주의’는 조용히 입소문이 나면서 작가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오기도 한다. 황 작가도 이전의 두 소설집을 읽고 먼저 연락을 취했다. 황 작가는 “최근 문단에서 당대 현실에 대해 사실적인, 어떤 면에선 노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쓸 수 있는 장(場)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 소설집은 황 작가를 포함해 김동식 서수진 예소연 윤치규 이은규 조승리 황모과 등 8명이 참여했다. 새로운 구성원만큼 다루는 현장도 다양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황모과 작가는 인공지능(AI) 시대를, 예 작가는 플랫폼 업체의 별점에 전전긍긍하는 등 노동자의 애환을 그렸다. 조 작가는 장애인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 서 작가는 해외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를 다뤘다. 다양성을 담아내는 동인 ‘월급 사실주의’에도 원칙이 없진 않다. 발품을 팔아 현장감 있는 소설을 쓴다는 목표가 있다. 원년 멤버인 정 작가는 “앉아서 쓰지 말자, 앉아서 쓰면 다 티가 난다는 게 공감대”라며 “동인 소설집 나올 때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렇게 많구나’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그동안 노동소설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이념적인 얘기 위주였거든요. 노동이란 단어 자체도 그런 느낌이 있고. 저희는 이걸 다른 식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진짜로 그 안에서 먹고사는 얘기를 그대로 보여주자는 취지죠.”(정진영 작가)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대학 동기 결혼식에 갔을 때 일이다. 누군가 뷔페 식당에서 서윤후 시인(35)의 등을 탁 쳤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동창이었다. 안부도 없이 “야, 너 아직도 시 쓴다며?”라고 대뜸 물었다. ‘아직도?’ 맘에 걸렸지만 웃으며 답을 했다. “응, 나 ‘여전히’ 시 쓰고 있지.” 서 시인은 만 19세에 등단해 17년째 쉬지 않고 시를 쓰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를 병행하면서 지금까지 시집 5권과 산문집 4권을 펴냈다. ‘여전히’ 쓰는 정도가 아니라 지독하게 성실히 써 왔다. 최근 다섯 번째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낸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문지 사옥에서 만났다.‘나쁘게 눈부시기’는 대체 어떻게 눈부신 걸까. 서 시인은 “전조등이 갑자기 환하게 비출 때, 저 사람은 밝게 나아가고 싶어서 켠 불이지만 누군가는 갑자기 사방이 안 보여 찡그리게 된다”며 “빛을 통해 볼 수 있는 어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집을 엮었다”고 했다. “그동안 ‘나쁘다’는 제 수첩엔 없는 단어였어요. 첫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때부터 줄곧 자기 질서를 지켜온 표본적인 사람처럼 시를 써왔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작가가 ‘윤후 시인이 나쁘게 쓰는 글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나에게 없던, 혹은 내가 숨겨 왔던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말로 들렸어요.”‘나쁘게’ 변신을 예고한 대로 이번 시집에는 유독 날카로운 조각의 이미지가 많다. 수록 시 ‘유리가미’에서 시적 화자는 연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연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매단다.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려고/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끊어진 연을 주우러 또 올 수 있게’(시 ‘유리가미’에서) 하지만 이런 조각이 남을 상하게 하는 무기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시인은 깨진 조각을 이어 붙여 새 생명을 불어넣는 ‘킨츠기(金継ぎ·일본의 도자기 수리 기법)’를 들여다본다. 금가루로 틈을 메워 수선된 도자기는 깨졌던 부분이 아름다운 금색 선으로 빛난다. 상처를 숨기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떻게 상처를 극복했는지 남겨 놓는 셈이다. ‘접시를 깨뜨렸던 실수는 흉터의 좋은 재료가 된다…깨진 것을 이어 붙이며 무늬를 새겨 넣은 저 접시를 시작하는 접시라고 불러야 할까?’(시 ‘킨츠기 교실’에서) 날카로운 조각을 무기로 쓰던 시적 화자는 상처를 매만질 줄 아는 이로 성장한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고 한다. 서 시인은 “그동안은 붙잡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에 집착하듯 기록한 것 같다. 헤어진 사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에 많았다”며 “이제 지나칠 것은 지나치게 두고 남길 것은 남기면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최근 매일 아침 쓰던 일기를 2주째 멈췄다. 기록매체를 내려놓고 맨몸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법은 오히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그 시간에 투신하는 것”이라는 게 요즘 서 시인의 생각이다.“기록을 못 하니까 더 절실하게 보고 절실하게 들어요. 이런 방식으로 감각하는 게 좋습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대학 동기 결혼식에 갔을 때 일이다. 누군가 뷔페식당에서 서윤후 시인(35)의 등을 탁 쳤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동창이었다. 안부도 없이 “야, 너 아직도 시 쓴다며?”라고 대뜸 물었다. ‘아직도?’ 맘에 걸렸지만 웃으며 답을 했다. “응, 나 ‘여전히’ 시 쓰고 있지.”서 시인은 만 19세에 등단해 17년째 쉬지 않고 시를 쓰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를 병행하면서 지금까지 시집 5권과 산문집 4권을 펴냈다. ‘여전히’ 쓰는 정도가 아니라 지독하게 성실히 써 왔다. 최근 다섯 번째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낸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문지 사옥에서 만났다.‘나쁘게 눈부시기’는 대체 어떻게 눈부신 걸까. 서 시인은 “전조등이 갑자기 환하게 비출 때, 저 사람은 밝게 나아가고 싶어서 켠 불이지만 누군가는 갑자기 사방이 안 보여 찡그리게 된다”며 “빛을 통해 볼 수 있는 어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집을 엮었다”고 했다. “그동안 ‘나쁘다’는 제 수첩엔 없는 단어였어요. 첫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때부터 줄곧 자기 질서를 지켜온 표본적인 사람처럼 시를 써왔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작가가 ‘윤후 시인이 나쁘게 쓰는 글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거예요. 나에게 없던, 혹은 내가 숨겨왔던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말로 들렸어요.”‘나쁘게’ 변신을 예고한 대로 이번 시집에는 유독 날카로운 조각의 이미지가 많다. 수록 시 ‘유리가미’에서 시적 화자는 연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연줄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매단다. ‘사람들을 뒤뜰에 남겨두려고 / 깨진 것 중 가장 날카로운 유리가미를 고른다 / 끊어진 연을 주우러 또 올 수 있게’ (시 ‘유리가미’에서)하지만 이런 조각이 남을 상하게 하는 무기로만 쓰이는 건 아니다. 시인은 깨진 조각을 이어 붙여 새 생명을 불어넣는 ‘킨츠기(金継ぎ·일본의 도자기 수리 기법)’를 들여다본다. 금가루로 틈을 메워 수선된 도자기는 깨졌던 부분이 아름다운 금색 선으로 빛난다. 상처를 숨기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떻게 상처를 극복했는지 남겨놓는 셈이다. ‘접시를 깨뜨렸던 실수는 흉터의 좋은 재료가 된다…깨진 것을 이어 붙이며 무늬를 새겨 넣은 저 접시를 시작하는 접시라고 불러야 할까?’(시 ‘킨츠기 교실’에서) 날카로운 조각을 무기로 쓰던 시적 화자는 상처를 매만질 줄 아는 이로 성장한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고 한다. 서 시인은 “그동안은 붙잡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에 집착하듯 기록한 것 같다. 헤어진 사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에 많았다”며 “이제 지나칠 것은 지나치게 두고 남길 것은 남기면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최근 매일 아침 쓰던 일기를 2주째 멈췄다. 기록 매체를 내려놓고 맨몸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방법은 오히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그 시간에 투신하는 것”이라는 게 요즘 서 시인의 생각이다. “기록을 못하니까 더 절실하게 보고 절실하게 들어요. 이런 방식으로 감각하는 게 좋습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미국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2일 토니상 측에 따르면 이 뮤지컬은 올해 제78회 토니상에서 △뮤지컬 부문 작품상 △연출상 △각본상 △음악상(작곡 및 작사) △오케스트레이션(편곡상) △무대 디자인상 △의상 디자인상 △조명 디자인상 △음향 디자인상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후보에 올랐다.‘어쩌면 해피엔딩’은 21세기 후반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을 돕는 로봇인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국내에선 2016년 초연됐고, 미국 공연 제작사에 판권이 팔려 지난해 11월 뉴욕 맨해튼 벨라스코 극장에서 정식 개막했다.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일 테노레’를 만든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박 작가가 각본상이나 음악상을 받을 경우 한국 국적으론 첫 수상이 된다. 박 작가는 뉴욕 개막 당시 소셜 미디어에 “한국인 작가가 쓰고,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공연이 브로드웨이에서 이 규모의 오픈런으로 공연하는 건 아마 처음”이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미국 공연은 인기에 힘입어 내년 1월 17일까지 연장됐다. 올해 토니상 시상식은 다음 달 8일(현지시간)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파파(papa·교황) 프란치스코, 그라치에(grazie·고맙습니다)!”26일 오전(현지 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주변 시내엔 약 40만 명이 운집해 애도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20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장례미사 직후 이탈리아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으로 운구되자, 세계에서 모여든 추모객들은 슬픔에도 감사를 표하며 가는 길을 축복했다.‘빈자(貧者)들의 성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미사가 이날 오전 10시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수됐다. 교황의 유언대로 장식 없는 십자가 문양만 새겨진 목관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박수로 교황을 맞았다. 장례미사는 입당송(入堂頌) ‘주여, 영원한 안식을 내리소서’를 시작으로 기도와 성경 강독, 성찬 전례, 고별 예식 순으로 2시간가량 진행됐다.미사를 주례한 추기경단장인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은 “교황은 당신의 허약함과 고통의 막바지에도, 지상의 삶 마지막 날까지 자기 봉헌의 길을 따르고자 하셨다”며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그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고 애도했다.이날 미사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와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등 170여 개국 지도자 및 대표단이 참석했다. 한국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끄는 민관합동 조문사절단과 염수정 추기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등이 참석했다.교황청은 이날 공식 추모 기간인 ‘노벤디알리(Novendiali·9일간의 의식)’를 선포했다. 9일 동안 매일 추모 기도회가 이어지며, 교황의 묘는 27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차기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Conclave·추기경단 비밀회의)는 이르면 다음 달 5일 시작될 예정이다.“그라치에 파파”… 40만명 배웅속 ‘포프모빌’ 타고 소박한 작별[프란치스코 교황 영면]“교황,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관심”… 삼중관 대신 아연 덧댄 목관 입관시민 배웅 위해 사람 걷는 속도 이동… 교황 요청에 난민-노숙인 등이 맞이“교황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성모 마리아) 품에 안기시는 마지막 여정은 그가 평생 사랑했던 가난한 이들의 배웅을 받는 아름다운 이별이었다.”(베노니 암바루스 이탈리아주교회 주교)26일(현지 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장례미사가 끝나자,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작고 아담한 흰색 무개차(無蓋車)였다.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즐겨 탔던 ‘포프모빌(Popemobile)’이다. 40만 명이 모여든 마지막 가는 길도 교황은 평소와 다름없이 소탈한 행보였다. 로마 경찰의 호위 외엔 앞뒤로 각각 2대씩의 의전 차량만 따를 뿐이었다.관이 운구되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앞에서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흰 장미꽃을 든 40여 명이 교황을 맞이했다. 모두 난민이나 죄수 출신이거나 노숙자인 이들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마지막 조의를 표하도록 해 달라”는 교황의 생전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길”이날 오전 10시부터 열린 장례미사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신자 등 25만여 명과 로마 시민 등 40만여 명이 참석했다. 추기경 220명과 주교 750명, 사제 4000여 명이 참석해 교황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순례자와 난민부터 세계의 유력 지도자와 왕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추모객들이 몰려들었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지닌, 모든 이들의 교황이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고 전했다.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은 강론에서 “교황님께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건너가신 이후 지난 며칠 동안 우리가 목격한 넘쳐나는 사랑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감동을 주었는지 말해 준다”고 했다. 그는 “교황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당신 양들을 사랑하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셨다”며 “모든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열망하셨으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두드러진 관심을 기울이셨고, 특히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50년 가까이 교황청에서 재직한 레 추기경은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의 수장이기도 하다. 다만 91세의 고령으로 투표권은 없다. 차기 교황 선출권은 80세 미만의 추기경에게만 주어진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마지막 길역대 교황의 경우, 장례미사를 마친 뒤엔 사이프러스와 아연, 참나무 등 세 겹으로 된 삼중관 입관 절차를 거쳤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1월 장례 예식을 개정해 삼중관 대신 아연으로 내부를 덧댄 목관 하나만 쓰도록 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목관 속에는 고위 성직자의 책임과 권한을 상징하는 팔리움(양털로 짠 고리 모양의 띠), 재위 기간 주조된 동전과 메달, 그의 재위 기간 업적을 담은 두루마리 형태의 문서가 철제 원통에 봉인돼 넣어졌다.장지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으로 가는 운구 차량은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이 교황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게 사람이 걷는 속도로 천천히 이동했다. 20여 분이 지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도착한 교황의 관은 구약성서 시편을 노래한 그레고리안 성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안으로 들어갔다. 교황의 묘는 유언대로 성모 성화 ‘로마인들의 구원’이 걸려 있는 파올리나 경당과 스포르차 경당 사이에 마련됐다. 비석엔 ‘프란치스쿠스(Franciscus)’라는 라틴어 이름과 십자가 모양만 새겨졌다.하관 의식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탈리아 매체들은 “다시 한번 성수가 뿌려지고, 매장이 이뤄졌다. 대성전 공증인이 매장 사실을 증명하는 공식 문서를 작성해 참석자들 앞에서 낭독하고, 추기경들과 전례 담당 고위 성직자들이 서명하면서 의식은 끝을 맺었다”고 전했다.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김혜순 시인(70·사진)이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AAAS) 외국 명예회원으로 선출됐다. 27일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에 따르면 김 시인은 올해 신규 회원 248명 가운데 인문학·예술 문학 부문(8명)에 이름을 올렸다. 1780년 설립된 AAAS는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회원으로 있던 단체다. 전체 회원은 수학·물리학, 생물학, 사회학·행동학, 인문학·예술, 리더십·정책·커뮤니케이션 등 다섯 부문에 걸쳐 약 1만4500명에 이른다. 서울예대 명예교수인 김 시인은 2019년 ‘죽음의 자서전’으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을 받았으며, 2024년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인 최초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시 부문)했다. 2022년 영국왕립문학협회가 해마다 뽑는 국제작가로도 선정됐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김혜순 시인(70·사진)이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AAAS) 외국 명예회원으로 선출됐다.27일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에 따르면 김 시인은 올해 신규 회원 248명 가운데 인문학·예술 문학 부문(8명)에 이름을 올렸다. 1780년 설립된 AAAS는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회원으로 있던 단체다. 전체 회원은 수학·물리학, 생물학, 사회학·행동학, 인문학·예술, 리더십·정책·커뮤니케이션 등 다섯 부문에 걸쳐 약 1만4500명에 이른다.서울예대 명예교수인 김 시인은 2019년 ‘죽음의 자서전’으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을 받았으며, 2024년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인 최초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시 부문)했다. 2022년 영국왕립문학협회가 해마다 뽑는 국제작가로도 선정됐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소설가는 ‘나’로 말을 시작하는 일이 잘 없다.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 말하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일상의 감흥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낸 산문은 그래서 반갑다. 그 소설가가 지난해 한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이라면 더.한강 작가의 신작 산문집 ‘빛과 실’이 24일 출간됐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펴낸 첫 책이다. 여섯 편의 산문과 여섯 편의 시를 묶었다. 이 중 북향 정원에서 식물을 키우며 쓴 산문 ‘북향 정원’, 네 평짜리 마당에 정원을 가꾸며 쓴 일기를 모은 ‘정원 일기’, 글쓰기에 대한 자세를 담은 ‘더 살아낸 뒤’가 미발표작이다. 전체 책 분량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 이전에 쓰였다.가장 눈길이 가는 꼭지는 산문 ‘북향 정원’이다. 일조량이 적은 북향의 정원에서 뿌리를 내리는 식물들과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담겼다. 작가는 북쪽 벽에 붙인 화단에 빛을 쪼이기 위해 여덟 개의 탁상용 거울을 들인다. 15분에 한 번씩 거울의 각도를 옮겨주며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를 감각하고, 사흘에 한 번씩 거울 위치를 바꿔주며 공전하는 속도를 감각한다.이처럼 ‘거울 햇빛’이 드는 정원을 가꾸면서 2021∼2023년 ‘정원 일기’를 썼다. 작가는 단풍나무보다 빨리 자라며 단풍잎을 가리는 불두화와 라일락을 보면서 “학급에서 가장 내성적인 아이를 지켜보는 담임선생님처럼” 단풍나무를 보호하고 싶어진다고 표현한다. 어떤 자연 앞에선 수식어도 불필요한지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무지근할 때도 있다”고 단순한 감탄을 터뜨리기도 한다.그간 작가의 작품을 좇아온 독자라면 반가울 장면도 군데군데 보인다.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을 앞두고 쓴 2021년 4월 26일의 일기에 그는 “칠 년 동안 써온 소설을 완성했다. USB 메모리를 청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저녁 내내 걸었다”고 적었다. 산문 중간중간 작가가 휴대전화로 직접 찍은 식물 사진도 실렸다.책의 맨 마지막 시 ‘더 살아낸 뒤’에는 글쓰기에 대한 소명 의식을 담았다.“더 살아낸 뒤/죽기 전의 순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나는 인생을 꽉 껴안아보았어./(글쓰기로.)//사람들을 만났어./아주 깊게. 진하게./(글쓰기로.)//충분히 살아냈어./(글쓰기로.)//햇빛./햇빛을 오래 바라봤어.”소설가 한강이 1인칭 ‘나’의 시점에서 기록한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노벨 문학상 발표 직후 열린 포니정 시상식에서 작가들의 황금기가 60세까지라고 가정할 때 자신에겐 6년이 남았고,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산문집에 함께 수록된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의 한 구절을 음미하게 한다.“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입니다. …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별명 중 하나는 ‘르네상스 맨’이다. 대학교수, 평론가, 장관, 문학잡지 에디터 등 보통 사람은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다채로운 일을 평생에 걸쳐 했다. 이 전 장관의 부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92)은 이를 ‘우물 파기’에 비유했다. “물이 나오면 다음 우물을 파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우물 파는 사람의 운명”이란 설명이다.영인문학관이 이 전 장관 3주기를 맞아 18일부터 추모전 ‘에디터로서의 이어령’을 개최했다. 23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문학관에서 만난 강 관장은 “이어령의 우물을 하나씩 탐사해 수심과 수량, 수질을 실태 조사하는 작업”이며 “첫 전시로 에디터로 지낸 시간을 조명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장관은 1972년 10월 창간호부터 1985년 11월까지 ‘문학사상’을 편집했다.전시관에 들어서자 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가 실린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사진)가 관객을 맞았다. 이 전 장관이 창간호부터 도입한 ‘한국 현대문학의 재정리’ 코너는 당시 국문학계에 큰 자극을 줬다. 국문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한용운 등의 문학사적 의미를 정리했다. 창간호 때부터 자료조사 연구실이란 별도 조직을 운영해 윤동주의 미발표 유고 8편을 입수해 발표하기도 했다. 이상문학상도 제정해 운영했다. 1975년 12월 실린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 1978년 1월에 실린 최인호 ‘지구인’ 등 문학사상에 연재된 작가들의 육필원고도 만날 수 있다. 매주 목요일 사전 전화 예약자는 영인문학관 2층에 있는 이 전 장관 서재에서 실제 집필에 사용했던 컴퓨터 7대, 장서 등도 관람할 수 있다. 다음 달 31일까지.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아직 중년에 건강한데도 해마다 유언을 새로 쓰는 이가 있다. 죽음을 일상에서 다루는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53)다. 16일 출간한 인문서 ‘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 노트’(21세기북스·사진)에서 유 교수는 다시 한 번 유언을 실었다. ‘일평생 행복하고 원 없이 살다 가는 것 같으니, 너무 크게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즐겁게 살다 오세요.’ 21일 서울 종로구 서울의대 연구관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난 유 교수는 대뜸 “(저한테서) 냄새가 나지는 않지요”라고 물었다. 바로 직전에 부검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냉동보관실과 세포배양실을 거쳐 복도 끝에서 두 번째로 있는 연구실. 그의 공간은 늘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유 교수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부검을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촉탁 법의관으로서 서울에서 변사한 시신의 사인(死因)을 밝히는 일이다. 27년간 수행한 부검만 3000여 건. 수사기관 자문과 법정 증언, 유가족을 상대로 한 설명 등도 법의관의 주요 업무다. 유 교수는 “거의 일과 시간 내내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이번 신간은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21세기북스)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책이다. 특히 이번엔 죽음에 대한 대비를 화두로 삼았다.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연장자가 가장 먼저 죽음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쉽게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유 교수는 “당연히 죽음은 꺼려지고 회피할 수밖에 없는 단어”라며 “하지만 죽음을 인생의 마무리로 받아들인다면 삶을 더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가 현재 맡고 있는 교양 강의 ‘죽음의 과학적 이해’는 서울대에서 인기가 많다. 이번 학기에만 620명이 수강하는 초대형 강좌다. 푸릇푸릇한 젊은 학생들에게 그는 ‘유언 에세이’를 과제로 낸다고 한다. 삶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면 거꾸로 마지막을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지론이다. “노년에 관한 얘기들을 보면, 온통 재테크만 주제로 삼아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지막을 어떻게 정리할까’를 꼭 생각해 보는 겁니다. 아픈 뒤에는 늦어요. 건강할 때 온전한 정신으로 유언을 설계해야 합니다.” 유 교수가 이런 믿음을 갖게 된 건 1년여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선 ‘이만하면 괜찮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라고 말씀하시고 가셨어요.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 기록을 남기셨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언 노트를 쓰는 겁니다. 제 아이는 제가 남긴 글을 보고 ‘아빠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를 알 수 있겠죠. 힘이 될 수도 있고요. 이게 다 우리가 언젠간 겪을 일인데 아무도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하지만 막상 유언을 떠올려 봐도 뭘 쓸지 막막한 이도 적지 않다. 유 교수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을 건넸다. “자기 가치관에 따라 ‘형제들끼리 싸우지 마라’ 정도를 쓰는 분도 계실 것 같고, 조금 더 섬세한 분은 장례식장 음식도 결정하실 수 있겠죠. 저는 이문세의 노래 ‘소녀’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런 것도 알려주고 싶어요.”유 교수는 최근 팬데믹 이후 죽음이 개인화되고 고립화된 현실을 염려하기도 했다. 중장년층 가운데 고독사한 이들이 부검대에 오르는 일이 특히 잦아졌다고 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분도 늘어났어요. 사회가 죽음을 개인의 문제, 남의 문제로만 바라보기 시작하면 개인이 너무 외롭고 힘들어집니다. 가까운 사람과 가족,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을 도울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요?”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물리학은 마술이 아니에요. 미스터리할 게 하나도 없죠.” 일반적으로 ‘물리학’ 하면 다소 난해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재직 중인 물리학자 김기덕 박사(35)는 이러한 이미지는 사회적 통념이라고 반박한다. “지금까지 물리학의 트렌드는 너무 미스터리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졌어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등은 쉽게 다가서기 어렵죠. 물리학을 대중으로부터 너무 멀리 보낸 겁니다.” 최근 신간 ‘모든 계절의 물리학’(다산북스)을 출간하며 한국을 찾은 김 박사를 16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막스플랑크 고체연구소 박막기술팀장이자 초전도체, 반도체를 연구하는 고체물리학자다. 신간에는 물리 중독자의 렌즈로 본 세상이 가득 담겼다. 야구 배트나 커피포트, 러닝화, 노이즈캔슬링 등 일상 어디에나 있는 물리학 원리를 소개하려 했다. 그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인 아내를 타깃 독자라고 생각하고 썼다”며 “원고를 먼저 보여주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할 때까지 계속 보완했다”고 했다. 책에 실린 삽화 54개도 태블릿PC로 직접 그렸다. 김 박사의 주된 연구 과제는 수 나노미터 두께의 양자 물질 ‘박막’을 만드는 것. 그런 바쁜 와중에도 대중 저술 활동을 병행하는 이유에 대해 “물리학은 하나의 교양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답이 돌아왔다.“아무리 물리학에서 ‘이게 중요해요’라고 말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죠. 가령 국내에서 ‘LK-99’ 초전도체 진위 논란이 있었을 때도 물리학의 기본적 지식만 있으면 오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초전도체는 역사가 100년이 넘은 연구 분야예요. 비슷한 스캔들이 세계적으로 굉장히 많은 분야죠.” 그가 속한 막스플랑크 연구소 역시 대중 활동을 적극 장려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만 39명을 배출한 세계적 연구기관이다.“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물리학과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물리학을 꿈꾸는 사람들, 또 저와 함께 물리학을 연구할 이들이 줄어가고 있는 셈이죠. 관심 갖는 사람이 많아져야, 그중 1%라도 물리학자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는 이를 위해 아마추어 과학자들이 더 늘어나길 소망했다. “과학이 하나의 취미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을 보면 굉장히 열정적이거든요. 몇 시에 어디를 봐야 무슨 별이 보이는지 줄줄 꿰고 있죠. 아마 별을 보는 즐거움, 어느 위치에 어떤 별이 뜨는지 아는 즐거움 때문일 텐데요. 물리학도 이렇게 즐길 수 있다는 걸 많은 분들이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극단주의에 취약한 뇌가 따로 있을까? ‘누군가의 뇌를 살피면 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을 잠재적 가능성이 높은지 알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꽤 도전적인 견해다. 어떤 뇌가 극단주의에 특별히 취약하고, 어떤 뇌가 유연하고 탄력적일까. 저자는 2020년 포브스 ‘30세 이하 과학 분야 30인’에 선정된 신경과학자다. 정치를 신경과학과 연결해 이데올로기적 사고의 기원과 결과를 연구하는 ‘정치신경과학’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정치적 성향이 우리 몸속 세포 차원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견해가 흥미롭다. 극단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열성적으로 믿은 나머지 목숨을 바치는 일도 불사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저자는 뇌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현대 과학기술을 이용하면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두뇌 구조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하는지 묻는 게 가능하다는 것. 저자는 민족주의와 종교, 인종주의, 극우와 극좌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 같은 탐구가 가능하다면서 경직된 사고를 하는 사람을 ‘이데올로기 주의자’로 명명한다. 한 연구에서 이데올로기 주의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뇌의 보상 회로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직된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전전두엽 피질에서 도파민 수치가 낮고, 선조체에서 도파민 수치가 높은 경향이 있었다. 선조체는 대뇌 심부의 기저핵에 위치한 뇌 영역으로, 보상을 얻기 위한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유전자 프로필을 가진 사람은 사고방식이 경직될 위험성이 높다고 했다. 여러 연구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은 진보주의자에 비해 오른쪽 편도체가 좀 더 큰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는 두려움과 분노, 혐오, 위험, 위협 등 부정적으로 얼룩진 감정의 처리를 도맡는다. 보수적인 참가자들은 오른쪽 편도체가 컸다. 저자는 이를 편도체의 기능과 보수 이데올로기의 기능이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둘 다 위협에 대한 경계심과 제압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중심축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타고난 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저자가 내린 답은 “그렇진 않다”이다. 인간은 성격과 생물학적 속성이 특정한 조합으로 뒤섞인 칵테일과 같아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 뇌가 전부 동일하진 않다는 것. 경직된 교리를 잘 받아들이는 뇌라 해도 그런 특성이 실제론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읽으면 읽을수록 간단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편도체가 큰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을 더 잘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었기 때문에 보수 이데올로기에 끌리는 걸까, 아니면 보수 이데올로기에 몰입한 경험이 뇌 구조를 변화시킨 걸까. 만약 유연성을 촉진하는 유전자형을 가졌지만 행동과 상상력을 엄격히 규제하는 독단적이고 절대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저자 역시 화살이 양방향을 가리킬지도 모른다고 한걸음 물러선다. 우리의 뇌가 정치적 사고를 조각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결과 뇌가 변화되기도 한다는 것. 간단명료한 답을 원했던 독자라면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답이 간단할 거란 기대부터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극단주의와 인간의 생명 현상이 별개가 아니라는 의견이 흥미롭다.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