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구독 43

추천

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4~2025-12-24
문학/출판30%
역사21%
정치일반10%
문화 일반10%
사회일반10%
칼럼7%
검찰-법원판결3%
인사일반3%
산업3%
만화3%
  • 조선시대 장원급제 여부 고위직 승진과 큰 관계 없었다

    입시나 고시, 전문직 충원 시스템의 공정성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개천에서 용이 났을까, 아니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을 많이 봤을까. 과거 합격자를 양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이 새롭게 진행돼 눈길을 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1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규장각에서 학술회의 ‘조선시대사 연구와 빅데이터’를 열었다. 이상국 아주대 사학과 교수와 박종희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국제정치데이터센터장은 ‘성공의 경로―조선시대 지배엘리트의 관직이력 데이터 분석을 중심으로’를 발표했다. 발표문에서 “분석 결과 과거 합격자가 고위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는 개인의 능력과 가문의 배경 모두 영향을 줬다”고 밝혔다. 조선 500년 동안 문과 합격자는 1만5000명이 넘는다. ‘국조문과방목’에 문과 급제자 명단과 생년, 본관, 가족관계, 등수를 비롯한 개인정보가 담겨 있지만 나중에 어떤 관직을 지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어떤 사건을 기록할 때 인물의 이름과 관직을 충실히 기록했다. 연구팀은 텍스트 마이닝 프로그램을 개발해 실록에서 인물들의 임명과 면직, 포상과 징벌 기록을 추출한 뒤 이를 문과방목 자료와 종합 분석했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해 급제자 약 5000명의 집안 배경 정보와 관직 이력 정보가 결합된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것이다. 연구팀의 분석 결과 급제자의 시험 성적이 좋으면 대체로 고위 관직(1∼3품)에 더 빨리 진출한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 관직을 지내는 기간도 더 긴 편이었다. 개인의 능력이 효과를 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합격자의 조부나 증조부가 관직을 지냈을 경우 고위 관료가 되는 데 걸리는 기간이 단축되는 경향도 발견됐다. 고위 관직에 오래 머무는 데는 조부와 증조부뿐 아니라 외조부의 관직 이력도 영향을 미쳤다. 선대가 높은 관직을 지냈을수록 이런 추세가 뚜렷했다. 가문의 ‘빽’이 확인된 셈이다. 장원 급제(1등) 여부는 고위 관직에 이르는 시간과 큰 관계가 없었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린 시기가 포함된 순조∼순종 시기에는 시험성적이 좋은 이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는 데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상국 교수는 “양반 엘리트가 정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개인의 능력과 함께 가문의 영향력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고 말했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인문학에 활용하는 것과 관련한 시각차가 학술회의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토론자는 실록의 임명 기록이 당사자가 실제 벼슬자리에 나아갔다는 뜻은 아니며, 낙향 등으로 인한 재직 기간의 오차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종희 센터장은 “역사학자는 오차 ‘0’을 목표로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자료를 (통계를 위한) 샘플로 보고, 오차가 전체적으로 상쇄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과거에서 서울 편중 문제는 어떻게 드러났을까. 박현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는 이날 ‘국조문과방목의 통계적 분석’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 유생은 16∼19세기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 전체 합격자의 23.8%에 불과했지만 현안에 대한 대책 등을 묻는 제술과(製述科) 합격자는 59.2%를 차지했다. 식년시는 ‘경서를 달달 외우면’ 되기에 인재 선발의 실효가 없는 시험이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폐지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조선은 주로 지방 유생에게 급제의 기회를 제공하는 이 시험을 폐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 대 이후에는 급제해도 거의 실제 관직을 받지 못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공주 공산성엔 백제 왕이 살았을까

    충남 공주시 공산성은 웅진 백제의 왕성일까. 공산성 발굴 현장에서 궁의 문과 같은 출입시설과 대규모 토목공사의 흔적이 확인돼 주목된다. 공주시와 공주대박물관이 지난해 6월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왕궁 추정지로 출입하는 길과 관련 시설을 만들기 위해 나라에서 벌인 토목공사 흔적을 확인했다고 문화재청이 24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출입시설은 ‘문궐(門闕·궁 같은 곳의 문)’ 형태로 양 측면에 길이 50m, 너비 36m, 깊이 3.5m의 대규모 성토다짐(흙 쌓기와 단단하게 다지는 작업을 반복한 것)을 한 구조다. 다진 경사면에는 강돌과 깬돌(割石·할석)을 깔아 유실을 막았다. 이 출입시설과 연결된 넓고 평탄한 광장에서는 기둥 열(柱列)이 30m 이상 발견됐다. 또 가장 북쪽의 높은 대지에서는 지면보다 높은 여러 개의 단(壇)을 만든 흔적이 나와 국가적 또는 왕권의 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발굴은 공산성이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축조한 대규모 국가 시설임을 보여준다. 발굴단은 “문궐 시설은 대궐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대규모 성토다짐이나 외벽 보호시설 같은 토목구조는 한성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후 최대 규모의 백제 토목공사 흔적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2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석기인의 생존 도구… 현대인의 생존 도구

    나무썰매와 오늘날의 스키, 곰의 뼈와 현대 디자인 의자가 나란히 놓여 관람객을 맞는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핀란드 디자인 10 000년’ 전시다. 단순함과 자연미, 실용성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북유럽 디자인, 그중에서도 핀란드 디자인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다. 문화재를 주로 선보이는 이 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로서는 다소 이례적이다. 노키아에서 제작한 휴대전화가 전시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옆과 아래에 핀란드에서 출토된 석기시대의 날렵한 양날도끼와 벌목용 전통 도끼가 놓였다. 지금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한 디자인이다. 전시는 관객에게 묻는다.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경과 사회에 따라 여러 도구가 필요했고, 핀란드의 삼림에서는 도끼 한 자루가 생존에 중요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가장 유용한 생존 도구는 휴대전화일까?” 나뭇가지의 원래 모습을 통째로 살려 다리로 만든 옛 의자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재치 있다. 전시에선 이 밖에도 고고학과 민속학 자료, 현대 산업디자인, 사진, 영상 등 핀란드 문화유산 140여 건을 만날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와 설피, 청동검 등 우리 문화유산 20여 건을 전시에 녹여낸 점도 흥미롭다. 쉼터 공간은 원목으로 만든 사우나 공간처럼 꾸며 핀란드의 자연 풍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박물관은 “인간과 물질, 사물과 기술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융·복합 전시”라고 밝혔다. 내년 4월 5일까지. 관람료는 만 25∼65세 3000원, 만 8∼25세 2000원.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인천에서 평양까지… 현장의 남북교류사

    주 3회, 오후 5시 반 인천항을 출발하는 단둥페리는 다음 날 오전 9시 중국 단둥항에 도착한다. 1998년 취항한 이 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이들뿐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 노선이 21년 동안 남북 물류의 복판에 있었다고 말한다. 배에 실린 물건 가운데 일부는 단둥 세관을 거쳐 압록강의 중조우의교, 즉 중조(중국-북한) 국경을 넘어 들어갔고, 신의주에서 북한 사람이 받았다. 반대 경로도 마찬가지다. 북한 평양과 신의주에서 출발한 물건 역시 단둥항에서 인천항으로 향했다. 2000년부터 단둥을 연구하고 있는 인류학자가 쓴 현장의 민간 남북 교류사다. 저자는 “휴전선을 넘나들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폐쇄의 길로 들어섰지만, 중조 국경을 통해 남북을 연결한 길은 생겨난 뒤로 끊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썼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2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고구려 기법 모방 신라 금귀걸이 포항서 발굴

    고구려 귀걸이와 닮은 5세기 후반 신라 금 귀걸이가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18일 화랑문화재연구원이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 유적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한 곳에서 금제 굵은고리귀걸이 1쌍과 금제 가는고리귀걸이 2쌍, 은제 팔찌 1쌍 등 장신구류와 다수의 토기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굵은고리귀걸이는 길이 약 5cm로 굵은 고리 아래 작은 동그라미를 붙여 만든 공 모양 장식이 있고, 그 아래 다시 원뿔이 드리워진 모양이다. 연구원은 “고구려의 제작 기법을 모방해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판단되는 귀걸이로, 두 나라의 교류를 보여 준다”며 “공 모양 장식 아래 원반 모양 장식이 생략된 점은 고구려 귀걸이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른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유적에서는 모두 무덤 7기가 조사됐지만 대부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귀걸이가 출토된 무덤은 무너진 천장돌이 부장품을 덮고 있어 도굴을 피한 것으로 추정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암투병 이어령 “시인 이상처럼… 의미를 남기면 불멸”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상의 집’. 소리꾼 장사익 씨가 ‘귀천’을 노래하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85)이 손으로 입을 감싸 쥐고, 감상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로 노래를 마칠 때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무슨 뜻이었을까. 알려진 것과 같이 이 전 장관은 암 투병 중이다. 외부 행사도, 모임 초대도 거의 사절하고 있는 그가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이 이날 마련한 ‘이상과의 만남’ 행사에 강연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짬을 내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몸이 불편해도 오늘 나온 건,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상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도, 불행했어도 오래도록 사는 방법이 있다”면서 “내가 이상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를 전하면 청중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이상이 탄생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병중에도 그는 ‘한국론’을 구술로 집필하고 있다. 12권이 목표지만 완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쓴다. “내가 비록 세상을 떠나도 생각이 끝없이 문화유전자처럼 퍼져간다면 이런 게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게 아니겠나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절망이 끝이 아니에요. 절망을 글로 쓸 수 있잖아요. 그게 암흑이라고 해도 암흑을 쓸 수 있어요. 그래서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는 “생명은 숨쉬는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정보가 생명”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목숨은 다해도, 정보는 살아남는다. “생명은 바로 의미의 세계예요. 신라의 뜻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절대로 멸하지 않은 것이에요. 영원한 것이 없는, 누구나 죽는 삶 속에서 뭐를 남길 것이냐? 의미를 남기는 것이죠. 이상이 바로 그래요. 큰 기념관은 없지만 이상 같은 사람이 오늘날의 한국을 있게 만든 것이지요.” 사실 이 전 장관은 투병이 아니라 ‘친병(親病)’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나이가 많아지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 병과 함께 살자고 태도를 바꿨더니, 병과도 친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항암치료는 받지 않고 있다. “객기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내 나이는 자연히 수명을 다해 세상을 뜨나, 병으로 세상을 뜨나 마찬가지예요. 더구나 나이 많은 사람은 (암 진행이) 더디니까. 참고 견디면서 글 하나 더 읽고, 창문 한 번 더 열고 풍경을 보는 것, 그게 의미가 있어요. 물론 내 얘기고, 젊은 사람들은 의사 지시 따라서 항암 치료 꼭 받으세요.(웃음)” 피곤한 듯하던 이 전 장관은 강연을 시작하자 환자로 보이지 않았다. 힘을 더 얻어가는 듯했다. 그는 “이상은 처음으로 공간적이고 시각적인 시를 쓴 한국인”이라고 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차기회장, 박정자 배우, 문화재청의 정재숙 현 청장과 이건무 전 청장, 김원 건축가 등 30여 명이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내게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 일한 것을 두고 나라에 공헌했다고들 하는데, 이런 건 내 삶에서 별로 중요한 것들이 아니에요. 장관도 내 일생에서 2년밖에 안했어요. 지금은 올림픽 굴렁쇠나 알지, 내가 ‘공간기호론’을 썼다는 건 몰라줘요.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공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외로운 것, 알아주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말이지요.” 그는 젊은 시절 ‘우상의 파괴’를 써서 기성 문단을 뒤흔든 사람이 아니라, ‘이상론’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작가 이상을 되살려낸 인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는 이상의 작품과 유품, 초상을 찾아내고,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그가 창간한 ‘문학사상’ 첫 호 표지가 이상의 초상이다. “이상은 젊은 나이에 객사한 폐결핵 환자지요. 불행하게 살았어요. 그러나 작품만으로 권력과 돈을 남긴 사람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줬습니다. 1930년대 돌아가신 분이 지금도 새로움을 갖고 있다는 게 진짜 공헌이지요. 밖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이름 내는 사람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별로 공헌한 게 없지요. 뒷골목에서 숨어서 일한 분들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끌고 갈 겁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2700년 전 이집트 미라의 신비 속으로…

    약 2700년 전 이집트 제26왕조 시대 살았던 인물의 미라가 있고, 관 뚜껑에는 인간의 머리를 한 새가 망자 위를 맴돌며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것임을 알리고 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6일 개관한 ‘세계문화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기존 ‘아시아관’을 개편해 세계문화관을 만들었고 첫 상설전시로 미국 브루클린박물관과 공동으로 2021년 11월 7일까지 이집트실을 연다. 2016년 12월 브루클린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해 인기를 모았던 특별전시 ‘이집트 보물전’의 주요 유물 등 94점을 볼 수 있다. 기존 중앙아시아실과 인도·동남아시아실, 중국실의 시설과 공간도 개선했다. 신안 해저 문화재를 전시했던 ‘신안실’은 내년에 세계도자실로 바꾼다. 세계문화관 전시 유물은 총 443건(531점)이다. 이집트실 다음으로는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전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협력해 열 예정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로 확장된 시선을 갖는 것은 우리 문화재의 정체성을 드높이는 일이기도 하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상설전시실을 2년마다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공간과 소장품을 확보해 국민들이 언제나 여러 문화를 관람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자신의 죽음 애도한 조선의 선비들

    “어느새 무덤이 말 앞에 이르고, 성명이 저승 명부에 떨어졌구나. … 다섯 딸은 아버지를 찾아 울고, 아들 하나는 하늘 부르며 곡하며….” 조선 전기 문신 남효온(1454∼1492)이 남긴 시 가운데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흥미로운 건 이 시 속의 아버지가 남효온 자신이라는 것. 망자가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시를 짓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 시는 이른바 ‘자만시(自挽詩)’다.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挽詩)를 자신을 대상으로 지은 것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자만시의 계보를 연구한 책 ‘나의 장례식: 自挽詩(자만시), 나의 죽음 소유하기’(고려대 출판문화원)를 최근 발간했다. 남효온은 스승으로 모셨던 김종직(1431∼1492)에게 1489년 편지를 쓰면서 별지로 자만시를 담아 부쳤다. 시는 죽음에 대한 달관을 표현하다가 돌연 살면서 한스러웠던 일을 털어놓기도 한다. “집이 가난하여 술이 넉넉지 못했네. 행실이 더러워서 미치광이로 불렸고, 허리가 곧아 높은 사람 노엽게 했지. 신발이 뚫어져 발꿈치가 돌에 채이고, 집이 낮아 서까래가 이마 때렸다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 벼슬을 단념한 채 평생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고,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키다 죽은 이들을 다룬 ‘육신전’을 펴냈던 남효온의 삶이 시를 통해서도 그려지는 듯하다. 남효온은 이 자만시를 남기고 3년 뒤 세상을 떴다. “늙은 홀아비 신세 담박하기가 중과 같고, 고루하니 어찌 멀리 있는 벗 찾아온 적 있으랴. 쇠한 눈이라 일찍 온 봄에 더욱 놀라니, 매화 이미 졌지만 살구꽃 아직 남았기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숨은 선비 김상연(1689∼1774)의 자만시다. 죽음의 겨울, 일찍 찾아온 봄, 져버린 매화와 남은 살구꽃의 대비가 선명하고 의미심장하다. 책에 따르면 자만시의 뿌리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양식화된 만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중국의 만시와 자만시는 보편적 생사를 주요 주제로 한 반면 조선의 자만시는 개인적 사연을 담은 자만시가 많다. 임 교수는 자만시가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임 교수는 “타인에 대한 만시가 죽음을 통한 상실감을 드러낸다면 자만시는 자신의 가장된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며 “‘죽은 나’라는 가공의 자아가 현실의 나를 규정하고 만든다는 점에서 자만시는 자기형상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7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최정필 국립중앙박물관재단 이사장, 스웨덴 총리 방한 靑 환영 만찬 참석

    최정필 국립중앙박물관재단 이사장(74)은 한국과 스웨덴 수교 60주년을 맞아 18~20일 방한하는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의 청와대 환영 만찬에 참석한다. 최 이사장의 부친인 최남주 선생(1905~1980)은 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조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당시 황태자)과 함께 경주에서 ‘서봉총’ 금관 발굴에 참여했고, 1971년 스웨덴 정부로부터 동양인으로 최초로 ‘바자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6
    • 좋아요
    • 코멘트
  • 분단이 빚은 이산의 아픔, 망각 속에서 소환하다

    1952년 10월 37명이 동베를린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1956년까지 357명의 북한 대학생이 동독에 유학했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1959년 40명을 북한으로 조기 소환했고, 동유럽의 모든 유학생에게 일시적으로 북한에 돌아와 정치사상 교육을 받도록 만든다. 이런 와중에 학생 11명이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이념과 민족의 시각을 넘어, 남북한의 공식 역사 서술에서 생략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국제 학술회의가 열린다.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연구소(소장 임지현)는 16, 17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학술회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북한: 잊혀진 기억과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개최한다. 학술회의의 한 주제는 분단과 관련된 ‘디아스포라(Diaspora·이산)’다. 이유재 독일 튀빙겐대 교수는 ‘반제국주의 영웅들: 동독에 간 북한 전쟁고아와 유학생’ 발표문에서 1950년대 북한이 ‘사회주의 형제국가’들과 인적으로 교류하면서 벌어진 일상적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발표문에 따르면 1950년대 북한 정부는 전쟁고아 2만4000여 명, 유학생 5000여 명, 노동자 7800여 명을 이들 국가에 여러 목적을 가지고 보냈다. 북한은 동독에 파견한 전쟁고아가 교육을 마치고 귀환한 뒤 ‘퇴폐적 유럽 생활’과 ‘노동자 계급에 반하는 사상’에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유학생도 소환하기 시작했다. 유학생이 동독인과 연인이 됐거나 결혼한 경우에도 예외는 없었다. 이 교수는 “대부분의 동독 여성은 북한인 남편이나 남자친구를 따라 북한에 갈 수가 없었다”며 “현실은 참혹하게도 이들을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북한의 초기 아파트 문화를 근대적 욕망의 시각에서 조명한 안드레 슈미드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의 발표를 비롯해 ‘북한의 패럴랙스 건축’(김지형 하와이대 교수), ‘이동하는 북한 여성의 원거리 모성’(김성경 북한대학원대 교수), ‘영국 거주 북한 이주민의 고국 정치’(이수정 덕성여대 교수) 등의 발표가 이어진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책의 향기]조선을 발칵 뒤집은 ‘임해군 치정 사건’

    선조 36년(1603년) 8월 도승지와 개성 유수를 지낸 고위 관료가 조상의 산소에 갔다가 화적 떼에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포도청뿐 아니라 경기도와 충청도의 병력까지 동원해 범행에 가담한 자들을 잡기는 했는데, 이들이 감옥에서 잇따라 사망한다. 배후가 따로 있었던 것. 범인 가운데 한 명은 사실 선조의 아들 임해군이 거느리던 수하였다. 장안에는 임해군이 살해에 관련됐다는 소문이 돌고, 추국 중에 죽은 관료의 첩이 남편 살해에 공모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사실 임해군이 이 첩을 좋아해 빼앗고자 했는데, 여의치 않자 첩과 공모해 살해를 교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선조가 벌을 준 건 임해군이 아닌 포도대장이었다. 아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외압을 가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다양한 범죄 사건과 수사, 재판을 추적한 책이다. 범죄로 엿볼 수 있는 당대 사람들의 욕망도 흥미롭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사재 출연 대우재단 설립해 학술총서 760여권 발간… 학문 발전 씨앗 역할

    9일 타계한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문화계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로 꼽힌다. 우선 대우학술총서 발간은 가장 대표적 업적으로 꼽힌다. 고인이 1978년과 1980년 200억 원이 넘는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대우재단은 1983년부터 대우학술총서를 출간하며 ‘학술 분야의 씨앗’으로 자리매김했다. 1983년 ‘한국어의 계통’(김방한 지음)을 처음 낸 이래 지금까지 620여 권이 나왔으며 대우고전총서까지 더해 모두 760여 권의 학술서를 발간했다. 이 총서는 소외됐던 학문 분야를 조명하고 전문용어의 우리말 표현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총서 자연과학 분야가 1984년 한국출판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재단은 2015년부터 대우휴먼사이언스 시리즈도 발간하고 있다. 재단은 학회와 장학 지원 등 약 2000건의 지원사업을 벌여 왔다. 재단은 대우그룹이 해체된 2000년 이후에도 보유자산 매각 등을 통해 자체 재원을 확보하고 학술사업을 이어왔다. 올해에도 ‘한국도자제작기술사’(방병선) 등 논저 6종과 번역서 1종을 지원했다. 또 고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장남 선재 씨를 기리기 위해 1991년 경북 경주시에 ‘선재미술관’, 1998년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아트선재센터를 열었다. 선재미술관은 그룹 해체 후 공매됐고 아트선재센터는 김 전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79)이 관장을 맡다가 2016년부터 장녀 김선정 관장(54)이 운영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는 김종성 건축가의 작품으로 지상 3층, 지하 3층 건물에 전시장, 극장, 한옥을 갖췄다. 음악 문학 무용 패션 등 여러 장르와 활발하게 협업하는 실험적 전시를 시도하고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데 힘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2012년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DMZ)에서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의미를 짚으며 국내외 작가 11팀이 참여한 ‘리얼 DMZ프로젝트 2012’전은 큰 주목을 받았다. 김 전 회장은 바둑계의 은인이라고 할 만하다. 아마 3단의 애기가였던 그는 1983년 한국기원 2대 총재로 취임하며 바둑계 발전에 앞장섰다. 당시 기전 상금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었던 프로기사들을 대우그룹 계열사 등에 지도사범으로 취업시켜 바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동양증권배(1988년)와 진로배(1992년) 등 세계 기전 창설에 산파역을 맡으면서 바둑계를 질적, 양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뒷받침은 한국 바둑이 1990년대 세계 바둑을 석권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또 서울 종로구 관철동 한국기원 회관이 비좁다는 바둑인들의 건의에 따라 성동구 홍익동 건물을 희사해 1994년 9월 한국기원이 이전할 수 있도록 했다. 김 전 회장은 장거리 해외 출장을 갈 때 프로나 아마 강자를 대동해 기내에서 수담을 즐겼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김 회장은 법정 스님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장남이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 법정 스님의 위로를 받고 삼청동 법련사를 개축한 뒤 아들의 위패와 영가를 봉안했다. 조종엽 jjj@donga.com·손효림 기자}

    • 2019-12-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경주 골굴석굴, 실크로드 둔황-병령사 석굴과 유사

    “골굴 앞 고개에 올라 돌 봉우리를 바라보았더니 모양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굴 앞의 전실 처마와 창과 벽이 채색돼 있는데 공중에 화려하게 채색된 전각 5, 6채가 바위 사이에 걸려 있어 완연한 그림 같았다.” 조선 숙종 때 학자 정시한(1625∼1707)이 기행문 ‘산중일기(山中日記)’에 남긴 경북 경주시 골굴석굴의 모습이다. 자연 동굴에 조성한 우리나라 유일의 석굴사원인 골굴석굴의 원 모습을 실크로드의 여러 석굴에서 찾기 위한 학술대회가 14일 열린다. 한국미술사연구소(소장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와 한국불교미술사학회는 한국 최초의 실크로드 학술조사(1989년) 30주년을 맞아 학술대회 ‘골굴석굴과 실크로드 석굴’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 연다. 12개 굴이 한 절벽에 존재하고 마애불까지 조성된 석굴사원은 국내에 골굴석굴뿐이다. 그러나 1890년대 화재로 목조 전실(前室)이 사라져 원 모습을 알 수 없다. 현재의 전실은 나중에 지은 것이다. 문명대 교수는 “문헌과 현재의 상태를 종합해 보면 골굴석굴은 실크로드의 둔황(敦煌)석굴이나 병령사(炳靈寺)석굴과 거의 유사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비교 연구를 통해 원형 복원에 참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골굴석굴의 구조는 인도나 중국의 차이티야 석굴(불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동굴)을 변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교수는 발표문에서 중국 간쑤(甘肅)성 둔황의 둔황 285굴과 골굴석굴을 비교했다. 285굴은 서위(西魏) 시대인 538년에 조성됐다는 명문이 남아있어 둔황석굴의 편년과 성격 연구에 중요한 석굴이다. 문 교수는 “두 석굴은 전실과 주실로 구성된 구조가 같고 주실도 골굴 법당굴은 장방형, 둔황 285굴은 정방형으로 거의 비슷하다”며 “그러나 골굴 법당굴은 벽화 없이 조각만 있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손영문 문화재청 상임전문위원은 중국 간쑤성 병령사석굴과 골굴석굴을 비교했다. 그는 병령사석굴이 돋보이는 바위 면에 대형 미륵불을 조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골굴석굴의 마애불인 석가여래좌상 역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염원과 상징을 담아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손 전문위원은 “골굴석굴은 호국정신과 관련이 있는 신인종(神印宗·신라∼조선 초 존재했던 밀교 계통의 불교 종파) 내지 유가종(瑜伽宗·신라∼고려 때 불교의 한 종파) 승려들이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 동쪽 45km에 있는 베제클리크석굴과 골굴석굴의 유사점을 조명한 발표도 나온다. 고승희 서울·대전 문화재전문위원은 발표문에서 두 석굴 모두 예배와 수행의 공간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암벽 개착(開鑿)과 인공 축조 방식이 모두 사용됐다고 밝혔다. 고 전문위원은 “베제클리크석굴 벽화에는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서원을 다룬 ‘서원도’가 많은데, 그 묘사가 골굴석굴 마애불의 형태와 가사의 주름 표현과 유사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청나라 황제 황룡포는…

    청나라 황제가 입었던 황룡포(黃龍袍·사진)는 아홉 마리의 누런 용 문양이 화려하다. 그 사이에는 박쥐와 구름을 수놓았고, 하단에는 파도와 절벽 문양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11일부터 개최하는 특별전 ‘청 황실의 아침, 심양 고궁’에 나오는 전시품이다. 중국 랴오닝성에 있는 심양(瀋陽·선양)은 1625년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요양(遼陽·랴오양)에서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청나라의 첫 번째 수도가 됐다. 청나라가 1644년 산해관 전투에서 승리하고 베이징으로 천도한 뒤에도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심양 고궁의 박물관이 간직해 온 청 황실의 유물 120건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국보에 해당하는 중국의 ‘국가1급 문물’도 13점이 나온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실제 전쟁터에서 썼던 칼도 있다. 날카로운 칼끝과 붉은빛이 선명한 칼날 양 측면의 홈(血漕·혈조)이 여전히 섬뜩한 느낌을 준다. 청대 초기 팔기 관병이 변방을 수호할 때 신호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쓴 운판(雲板·1623년 제작)에는 나라명 ‘대금(大金·후금)’과 연호 천명(天命)이 기록돼 있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세상을 뜬 후 봉안한 시보(諡寶·시호를 새긴 인장)의 손잡이는 웅크린 용 모양이 생동감 있다.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열린다. 무료.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신라 때 쓴 ‘94자 토지문서 목간’ 나왔다

    6세기 신라의 토지관리 문서로 추정되는 목간이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경북 경산시 와촌면 소월리 유적에서 94자가 쓰여 있는 목간(사진)이 출토됐다고 9일 밝혔다. 이 목간은 같은 장소에서 발굴돼 최근 공개된 사람 얼굴 모양의 토기 아래에서 나왔다. 목간은 길이 약 74.2cm로, 굽은 나무의 표면을 다듬어 만든 6면에 걸쳐 글자가 씌어 있다. 목간에는 우리나라 고유 한자로 논을 의미하는 ‘답(畓)’이 들어 있다. 또 조세 부과를 위한 토지 면적 단위는 ‘결(結)’이나 ‘부(負)’를 쓴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에는 결, 부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7세기 이후 사용한 용어로 여겨졌지만, 이번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6세기부터 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목간에 등장한 ‘곡(谷)’, ‘제(堤)’자도 주목된다. ‘곡’은 골짜기에 사는 일정한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제’는 둑이 조세 부과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화재청은 “서체나 내용으로 보아 경산 인근 지역의 토지 현황을 기록한 목간일 가능성이 크다”며 “목간을 통해 골짜기와 둑을 중심으로 한 당시 지방 촌락의 입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축조한 제방과 주변에 자리한 논의 존재, 조세를 수취하는 중앙정부의 지배 양상 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울지마 톤즈!” 아프리카 오지서 빛이 된 이태석 신부

    “내가 봤던 곳 중에 거기가 제일 가난했어.” 장래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오지 남수단 톤즈에 선교 사제로 부임해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한 고(故) 이태석 신부(1962∼2010). 그는 함께 사제의 길을 걷던 후배 김상윤 신부(살레시오회 청소년사목위원장)가 “왜 톤즈를 택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의사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은 살피지 못하고 2010년 1월 14일 선종한 이 신부의 10주기(내년 1월 14일)를 한 달여 앞두고, 이 신부가 몸담았던 살레시오회가 10주기 행사를 소개하는 간담회를 9일 서울 영등포구 살레시오회빌딩에서 열었다. 이날 김 신부를 비롯해 이 신부와 교분을 나눴던 이들이 지난 기억을 회고했다. 김 신부에 따르면 이 신부는 부제품을 받기 전인 1999년 케냐로 선교하러 갔다가 톤즈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제임스 신부를 만났다. 해외 선교를 지망하는 이 신부가 케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임스 신부가 찾아온 것. 그를 따라 톤즈에 간 이 신부는 “상상을 뛰어넘는 가난을 목도하고 톤즈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톤즈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김 신부는 “왜 의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됐는지 물었더니, 이 신부는 ‘나는 돌을 들고 있는데, 다이아몬드가 보이면 돌을 버려야 하지 않겠니’라고 답했다”며 “사제의 길과, 청소년을 이끄는 일을 다이아몬드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살레시오회는 청소년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수도회다. 이 신부와 살레시오회 동기로 친구인 백광현 신부(살레시오회 부관구장)는 “이 신부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며 “이탈리아 로마 유학 시절 내게 사진을 보여줬는데, 광대 옷을 입고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 신부가 초청해 한국에 유학 온 톤즈의 청소년 2명은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했고, 수련을 더 한 뒤 남수단에 돌아가 이 신부가 했던 의료 활동을 지속할 계획이다. 뒤에 유학 온 1명은 한국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하고, 인프라가 부족한 남수단에서 토목기사로 일하고 있다. ‘이태석위원회’(위원장 유명일 신부)는 ‘이태석 기념관’이 이 신부의 기일에 부산 서구 톤즈문화공원 내에 개관한다고 밝혔다. 추모미사는 다음 달 12일 광주 살레시오중고교 성당에서 열린다. 이 신부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울지마 톤즈2’는 다음 달 9일 개봉한다. 이 신부의 전기와 다큐멘터리 영화도 내년 말 선보일 예정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구석기 보물창고 수양개 유적, 박물관으로 관리를”

    “전날 밤새 비가 와 불어난 강을 건너자고 하니 뱃사공이 ‘죽으려고 작정했느냐’고 하더군요. 그렇게 건너간 고추밭에 까만 돌들이 보이는데, 죄다 석기였습니다. 그렇게 찾은 수양개 유적이 저에게는 평생의 과제가 됐네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수양개와 그 이웃들’ 국제학술회의에서 만난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78·사진)는 유적을 발견하던 1980년 7월 21일을 어제처럼 떠올렸다. 수양개에서는 7만 여 점의 구석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많은 유물은 아시아에서도 ‘톱클래스’”라고 했다. 1996부터 해마다 개최한 ‘수양개와 그 이웃들’ 국제학술회의는 올해 24회를 맞았다. 그동안 16번은 중국 미국 일본 폴란드 러시아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등에서 열었다. 해외 10개국 학자들이 학술회의 집행위원회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한국의 구석기 유적을 소재로 해마다 국제학술회의가 열리는 건 그만큼 연구할 내용이 많다는 뜻이다. 이번에 함께 열린 베이징원인 두개골 발굴 90주년 기념 국제 고인류학 학술회의의 대회 주제발표 12개 가운데 2개가 수양개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이 교수는 “단양의 수양개 유물 전시관에 박물관 체제를 갖추고 연구원을 보완해 세계인들이 찾는 구석기 연구 중심센터로 만들어야 한다”며 “내년 한국에서 여는 25회 학술회의를 철저히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베이징=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수양개 유물 슴베찌르개는 4만1000년전 것… 아시아 最古”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2015년 출토된 슴베찌르개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약 4만1000년 전의 것으로 새로 밝혀졌다. 또 후기 구석기시대 초기인 이 출토층에서 주로 후대에 출토되는 소형 돌날과 몸돌 역시 발견됐다. 인근 동굴에서 나온 사람 뼈의 연대 역시 비슷한 시기로 분석돼 수양개 일대가 한반도에서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등장을 보여주는 곳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오타니 가오루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 연구원은 1∼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4회 ‘수양개와 그 이웃들’ 국제학술회의에서 “분석 결과 수양개 6지구 4문화층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가 약 4만1800∼4만1200년 전의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한국 슴베찌르개 문화가 후기 구석기시대 초기에 이미 성립했음을 보여준다”고 발표했다. 슴베찌르개는 돌날의 한쪽을 나무나 동물 뼈로 만든 자루에 끼울 수 있게 다듬어 슴베를 만든 석기다. 창촉처럼 동물을 사냥하는 데 썼다. 슴베가 있는 석기는 일본 규슈 지역을 빼면 아시아에서도 주로 한반도에서 등장하는 특징적인 석기다. 수양개 유적은 1980년 충북대 박물관 이융조 교수팀이 이끄는 발굴단이 처음 발견해 연구해왔으며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5년 13번째 발굴 조사를 진행해 지난해 보고서를 냈다. 또 수양개 유적의 같은 문화층에서는 소형 돌날과 몸돌 역시 다수 출토했다. 돌날은 후기 구석기의 특징적인 문화로 후대로 오면 작고 정교한 좀돌날이 등장한다. 한데 대형 돌날과 좀돌날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소형 돌날이 수양개에서는 이미 약 4만 년 전 문화층에서 등장한 것이다. 오타니 연구원은 “이후 등장하는 좀돌날과 유사한 떼기 기술이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며 “소형 돌날 제작 기술이 후대의 좀돌날 제작 기술로 계승 발전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 수양개 6지구 4문화층에서 나온 슴베찌르개, 돌날 석기군의 양상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되지 않은 후기 구석기문화 초기 출현기의 성격을 뚜렷하게 제시해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군이 이처럼 층위를 이뤄 집중 출토돼 석기 제작 기술을 단계적으로 밝힐 수 있는 건 한반도 내에서도 수양개 유적이 거의 유일하다. 한편 김주용 박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는 이 학술회의에서 수양개에서 직선거리로 약 9km 떨어진 구낭굴에서 출토된 인골의 연대가 약 4만4900∼4만900년 전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수양개 6지구 4문화층과 시기적으로도 일부 겹친다. 인골과 함께 출토된 사슴 뼈의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하고 지층의 층위와 종합한 결과다. 김 박사는 “구낭굴 유적은 구석기인들이 강과 동굴을 동시에 생활영역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며 “구낭굴에 살던 사람들이 수양개에 석기를 남긴 이들과 생활영역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아코시마 가오루 일본 도호쿠대 교수는 수양개 출토 슴베찌르개의 날을 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무언가를 자를 때 사용한 흔적이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슴베찌르개를 던져 동물을 사냥한 것 뿐 아니라 다양하게 활용했다는 얘기다. 이번 학술대회는 베이징원인 두개골 발굴 90주년을 기념해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과 고인류연구소’가 개최한 국제 고인류학 학술대회와 함께 열렸다.베이징=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2-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강우규 의사 조사 지켜본 日紙 “노인 맞나”

    “폭탄 범인 강우규는 검사국으로 호송된 후 종로경찰서 미결감에 들어가 있는데 옥중에서는 매우 유순했다.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는 뭔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홍연대소하고 시사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거만한 태도가 되어 지사(志士)인 양 탁자를 두드리며 이야기하는 광경이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3·1운동 뒤인 1919년 9월 2일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1855∼1920·사진). 그의 조사 과정을 묘사한 일본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그해 10월 7일자 기사다. 기사는 “만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입을 꽉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아 일반 범인과 분위기가 사뭇 달라 조사가 어려웠다”고 전했다. 일본 신문임에도 기사 행간에서 강 의사의 의기와 강단을 느낄 수 있다.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회장 장원호)는 강 의사의 순국 99주기인 29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의거 100주년 기념학술회의 ‘강우규 의거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개최한다. 김형목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발표문에서 오사카 아사히신문을 중심으로 강우규 의거에 대한 일본 언론 보도를 살폈다. 김 연구위원은 “강 의사는 사람이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고, 일본 언론은 독립운동을 폄하하며 강 의사를 현실에 불만을 품은 과격파나 ‘무뢰한’으로 매도했다”고 밝혔다. 민중들이 강우규 의거를 얼마나 통쾌히 여겼는지는 당시 일제 측 조사 자료에서도 알 수 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강우규 의사의 민족운동’에서 1919년 10월 21일 평안북도 지사가 보고한 ‘폭탄 범인 강우규에 대한 감상’의 한 단락을 소개했다. “평안북도 철산군 지방에서의 유식계급자 간에 범인 강우규는 … 나이 60을 넘은 노구를 이끌고 멀리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경성에 잠입하여 … 그 용맹은 장자(壯者)를 능가하며 오인(吾人) 조선민족이 참으로 흔쾌하게 여기는바, 가령 극형에 처해져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라도 그 위훈(偉勳)은 조선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길이, 비사(秘史)상의 일(一) 미담으로서 전해질 것이라고 이를 상양(上揚·치켜올림)함과 같은 언동을 하는 자가 있다.” 박 교수는 “강우규 의거는 그 후 국내외 민족운동의 큰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학술회에서는 김중위 기념사업회 고문(전 국회의원)이 기조강연을 하고, ‘강우규 평전’의 저자인 은예린 씨와 한동민 수원박물관장이 토론자로 나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1-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김구 연설… 통금 사이렌… 역사를 듣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고등학교 데모대는 지금 마산시청 앞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1960년 4·19혁명 당시 3월 15일 마산 시위대가 부르는 애국가와 부산MBC 라디오의 뉴스 중계 음원 가운데 일부다. 최근 발견된 자료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내년 3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여는 특별전 ‘소리, 역사를 담다’에서 들을 수 있다. ‘소리…’ 전시는 청각으로 근현대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1969년 한국을 찾은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 실황에서는 “두 유 싱 인 잉글리시(여러분들 영어로 노래해요)?”라고 묻자 “예!” 하는 관중의 함성이 생생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어독본의 낭독 음원에서는 1930년대의 ‘표준 한국어 발음’을 들을 수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고 조선에 돌아온 직후, 강요된 원고 낭독을 주저하는 손기정 선수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밖에도 해방 공간에서 남긴 독립운동가 김구 조소앙 서재필 선생의 육성, 1969년 반공웅변대회에서 초등학생이 남긴 음원, 1983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음원 등을 들을 수 있다. 국민체조 음악, 통금 사이렌, 국기 하강식 시보 등 지난날 일상의 소리도 있다. 1959년 출시한 국산 1호 라디오 ‘A-501’, 1966∼68년 생산한 국내 최초의 흑백 텔레비전, 1940년대 단파 라디오 수신기 등 160여 점의 자료도 전시된다. 노선희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변화 과정에서 나온 소리, 시대를 반영하는 대중매체의 소리, 주요 인물의 목소리 등을 통해 근현대사의 주요 순간을 새롭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9-11-2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