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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견된 돼지독감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파돼 세계적으로 유행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온 가운데 세계보건기구(WHO)와 중국 정부가 “이 문제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크리스턴 린드마이어 WHO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새로운 바이러스를 파악하기 위해 해당 논문을 주의 깊게 읽어볼 것”이라고 했다.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우리는 모든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CNBC 등에 따르면 미 전염병 권위자인 앤서니 파우치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이날 미 상원 보건위원회에서 이번 돼지독감 바이러스에 대해 “스페인독감 바이러스에 기원을 두고 있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H1N1) 바이러스의 특징을 갖고 있다”며 “즉각적인 위협은 아니지만 큰 변이 능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H1N1’ 바이러스 종류가 2009년 확산돼 세계적으로 약 28만 5000명이 사망했으며, 1918년 수천만 명이 사망한 스페인 독감의 원인 바이러스 역시 ‘H1N1’ 계열이다. 앞서 중국 국가인플루엔자센터 등이 참여한 중국 연구진은 H1N1 계열의 바이러스가 중국 양돈농장의 노동자 사이에서 퍼졌다는 논문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고 BBC 방송 등이 지난달 29일 보도했다. 다만 ‘G4EAH1N1’라는 명칭이 붙은 이 바이러스의 사람 간 전염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1957∼1999)가 마지막에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그대로 신문에 실리더군요.” 1987년 박종철 열사를 검안했던 오연상 원장(63·오연상내과)은 그해 1월 15일 근무하던 중앙대용산병원 진료실에 찾아온 윤 기자를 떠올렸다. 오 원장은 당시 윤 기자에게 경찰의 물고문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언을 했고, 동아일보가 이를 보도하면서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거짓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로써 6월 민주항쟁의 서막이 올랐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동감_백년 인연’의 일환으로 오 원장에 대한 감사 행사를 30일 열었다. 오 원장은 1987년 당시 언론 보도 등이 전시된 서울 종로구 신문박물관을 둘러봤다. 당시 박 열사의 시신을 검안한 뒤 오 원장은 기자들 앞에서 “복부 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 수포음(水泡音)이 들렸다”고 증언했다. 오 원장은 이날 “의학적으로는 수포음이 물고문과 직접 관계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인에게는 물고문을 연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했던 말이었다”고 회고했다. 임채청 동아일보 부사장은 본보가 오 원장을 1987년 12월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지면과 오 원장의 과거 사진이 담긴 액자, 창간 100주년 기념 오브제 ‘동아백년 파랑새’ 등을 증정했다. 오 원장이 고교 3학년 시절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을 겪던 동아일보에 낸 격려광고도 액자에 담았다. 이 격려광고 문구는 ‘둔마(鈍馬)의 채찍은 국민이!’, 명의는 ‘중앙고 광고 낸 반’이었다. 오 원장은 “‘중앙고 3학년 7반’이라고 내려다가 혹여 담임선생님이 고초를 겪을까 걱정돼 익명으로 했다”고 회고했다. 본보는 당시 격려광고를 냈던 시민들에게 제공한 기념 메달을 복원해 오 원장에게 선물했다. 유심히 신문박물관의 여러 전시물을 관람하던 오 원장의 발걸음이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 앞에서 멈췄다. 1면 톱 제목은 ‘물고문 도중 질식사’. 동아일보가 6개 면을 고문 관련 고발 기사로 가득 채운 날이었다. 오 원장은 “저 날의 신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고 했다. 이후 본보는 대대적인 고문 추방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사건의 축소 은폐 조작을 고발했다. “내가 박종철 열사를 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 (죄책감이) 커요. 그 일에 관해서는 의사로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해 6월 29일까지 사태는 수많은 우연들이 거의 기적처럼 진행됐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나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의 순수한 의지가 모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지금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지만 곱씹어 보면 혁신적인 발상이다. 수천 km 떨어져 사는, 민족도 풍속도 구별되는 사람들의 말을 한 범주로 묶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인도에서 재판관으로 일하던 영국의 학자 윌리엄 존스.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세심히 연구한 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언어 간의 유사성이 너무나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1785년 이 언어들이 같은 어족에 속한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영국 웨일스대 명예교수로 명성 높은 언어학자인 저자는 아기가 말을 배우는 과정부터 10대의 문자메시지에 쓰이는 약어, 속어, 어원, 사라져 가는 언어까지 말과 글에 관한 다양한 얘깃거리를 쉽게 풀어냈다. ‘지구상의 모든 언어가 단 하나의 조상 언어에서 파생한 것일까?’ ‘맞춤법이 어려운 이유는?’ 같은 질문에 답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신라인 마음속 용면(龍面·용의 얼굴)을 수놓은 자수 기법은 근대 들어 자취를 감춘 ‘가름이음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대 심연옥 교수(전통미술공예학과 섬유 전공)와 금다운 전통섬유복원연구소 연구원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국 자수 2000년을 관통하는 자수공예기술 역사서인 ‘한국 자수 이천년’을 최근 발간했다. 연구가 충분치 않았던 고대∼조선 중기 자수까지 5년여 연구한 결과를 담았다. 신라 말∼통일신라 초 제작된 ‘신라국헌상지번(新羅國獻上之幡)’은 일본 에이후쿠지(叡福寺) 소장품으로 신라에서 보냈다는 묵서가 함께 발견됐다. 번(幡)은 당간지주에 거는 깃발을 말한다. 백제와 신라의 와당(瓦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의 얼굴과 함께 그 둘레에 서역의 영향을 받은 연주문(連珠紋·점이나 작은 원을 구슬 꿰듯 연결시켜 만든 문양)을 수놓았다. 심 교수는 “선과 면을 채운 기법은 얼핏 ‘사슬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근래에는 사용되지 않는 가름이음수”라고 말했다. 일본 나라 주구지(中宮寺) 소장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은 622년 사망한 일본 쇼토쿠(聖德) 태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14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한 색감과 다양한 도상이 눈길을 끈다. 밑그림을 그린 고마노 가세이쓰(高麗加西溢)는 고구려계 인물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제작자인 야마토노아야노 맛켄(東漢末賢)과 아야노 누카코리(漢奴加己利)는 가야계로 추정되며 감독과 지도를 맡은 구라베노하타노 구마((량,양)部秦久麻)는 신라계 인물로 보인다. 이 수장(繡帳)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사 자수 조각과 마찬가지로 ‘이음수’ 기법으로 면을 채웠다. 한국 자수의 역사는 아주 길다. 평양 석암리 낙랑고분에서 운기문(雲氣紋) 자수가 출토됐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수습된 왕비의 금동신발 안에서 자수 장식이 발견됐다. 고대 한국의 자수 공예는 국외로 전해질 만큼 선진적이기도 했다. 심 교수는 “고대∼고려시대에 지금은 잘 모르는 굉장한 자수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면서 “예술과 기술의 경계에서 자수는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한 상징체계로 완성됐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BRUXELLES 18000km(벨기에 브뤼셀까지 1만8000km).’ 사진 속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소속 군인이 바라보고 있는 게시판에는 이 같은 거리 표시가 적혀 있다. 촬영 장소는 벨기에군 막사로 추정된다. 바다를 건너온 참전용사가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재치 있게 담은 장면이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6·25전쟁 발발 70년을 맞아 미국을 비롯한 각국 참전 군인의 활동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 25장을 선별해 22일 공개했다. 국사편찬위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사진들로 유엔군 파병과 대민 지원, 휴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각 참전국의 지원 양상이 드러난다. 사진 속 입대 지원서를 작성하는 뉴질랜드 청년은 심각해 보인다. 미군은 구급약을 나눠 주거나 한국인을 치료하고 있고, 캐나다 병사는 전투에 지쳤는지 힘겹게 부축을 받고 있다. 콜롬비아군 병사들이 휴전 소식에 기뻐하는 사진도 있다. 국사편찬위는 “6·25전쟁에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5개국이 의료 지원을 했으며, 39개국이 물자를 지원하는 등 총 60개국이 대한민국을 도왔다”며 “각국 참전 군인의 기여를 되새기고 평화를 위한 각국의 협력이 필요함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사진을 공개했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산업유산국민회의’는 일본 정부를 대변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조사를 실행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온 곳이다.” 일본 시민단체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의 고바야시 히사토모(小林久公) 감사는 19일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소장 남상구)가 주최한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 검토 및 대응방안 모색’ 세미나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세미나는 서울 서대문구 동북아재단에서 열렸다. 일본 도쿄에 최근 문을 연 산업유산정보센터는 ‘군함도’를 비롯한 일본 메이지시대 산업유산을 소개하는 곳으로 한국인 등의 강제 동원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5년 7월 일본은 강제노역 시설을 포함한 산업시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가혹한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막상 정보센터는 이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이날 세미나에서 고바야시 감사는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산업을 지탱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일을 다음 세대에 계승한다’는 설립 취지와 달리 당시 노동자와 노동 실태를 은폐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가 센터를 제대로 운영하도록 향후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카타 미쓰노부(中田光信)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은 “2018년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당사국과의 대화’를 촉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정보센터의 설치를 강행했다”고 비판했다. 또 “진상규명네트워크가 지난해 11월 ‘산업 노동에 관한 조사’와 관련해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요청서를 제출했으나, 일본 정부는 ‘기존 조사 내용이 충분해 재조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했을 뿐”이라며 “일본정부와 산업유산국민회의는 식민지 지배 역사를 부정하고 유네스코의 결의와 권고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전문가들은 이날 세미나에 화상회의 플랫폼을 통해 한국 전문가와 함께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전국 박물관이 소장한 고려 말∼조선 중기 소형 총통(銃筒) 300점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16점은 근래 만들어진 가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최영창)의 허일권 김해솔 학예연구사는 최근 발간된 보고서 ‘조선무기 조사연구 보고서1: 소형화약무기’에 게재한 논고 ‘국내 소형 총통류의 형태 변화와 제작 기술’에서 이같이 밝혔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진주박물관은 2년여에 걸쳐 14∼16세기 소형 총통과 부속품을 조사하고 이 보고서를 발간했다. 연구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육군박물관을 비롯해 19개 기관이 소장한 총통 800여 점을 전수 조사했고, 그 가운데 293점을 X선 형광 분석 기법으로 조사했다. 그중 약 5%에 이르는 유물이 위조품으로 의심된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짜 판별의 ‘스모킹 건’(결정적 단서)은 총통 재료인 청동합금 내 아연 성분이다. 청동 총통은 구리와 주석, 납이 섞인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분석 결과 세 금속에 아연이 더해진 총통이 15점, 구리와 아연의 합금 재질이 1점 확인됐다. 아연은 다른 금속에 비해 제련하기 어려워 한반도에선 17세기 이후에야 본격 제련했다. 따라서 14∼16세기 제작된 소형 총통에는 아연이 없어야 정상. 아연 성분이 나온 총통은 표면 색상과 형태도 인위적으로 부식시킨 것처럼 독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허일권 학예연구사는 “아연합금 총통은 위작품으로 의심한다”며 “과학적 분석과 명문(銘文) 판독을 종합해 진위를 가려야 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어느 박물관이 소장한 총통에서 아연 성분이 발견됐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허 연구사는 “아연합금 총통 16점 가운데 지정문화재는 없었다”고 말했다. ‘위조 총통’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1996년에는 국보 274호 ‘별황자총통’이 가짜로 드러났다. 1992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을 포함한 일당이 공모해 현대에 위조한 총통을 경남 통영시 한산면 문어포 앞바다에서 인양했다고 하면서 조선시대 유물이라고 발표했던 것. 이 가짜 총통도 아연 성분이 상당히 포함돼 있었다. 연구진은 조선 중기 이후 소형 총통의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준도 제시했다. 바로 총통 속에 숨은 ‘형지(型持)’다. 구멍이 뚫린 총신을 주조하려면 쇳물을 담는 바깥 틀뿐 아니라 긴 원통 막대 모양의 안쪽 틀도 필요하다. 주조 뒤 제거하면 빈 공간이 되는 이 안쪽 틀이 정중앙에 위치하도록 정밀하게 고정하는 게 핵심 기술이다. 이 안쪽 틀을 고정하는 철제 받침쇠가 형지다. 형지는 나중에 틀을 제거한 뒤에도 총통 속에 남게 된다. 연구진은 소형 총통을 컴퓨터단층촬영(CT) 한 결과 총신이 긴 조선 중기 소형 총통의 내부에서 ‘W’ ‘M’ ‘L’자 모습의 형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형지의 형태를 조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데 조사 대상 가운데 10여 점에서는 형지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보고서는 “조선 중기의 기술력으로 형지 없이 주형을 설계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형지가 없는 총통은 표면의 부식 상태도 어색해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소형 총통에는 격목을 넣는 ‘격목통’이 없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격목은 화약이 폭발해 발사체를 밀어내는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발사체를 넣기 전 밀어 넣는 나무토막이다. 연구진이 CT와 내시경으로 조사해 보니 기존 문헌 기록과는 달리 총열과 약실 사이에 격목통이라고 볼 만한 구경의 변화가 없었다. 보고서는 “소형 총통은 출토된 것보다 전래품이 많아 진위가 논란이었는데, 이번 조사로 과학적 기준이 마련되길 바란다”면서 “대형 화포도 조사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타클라마칸사막 동쪽 누란 유적은 오래전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흔적을 보여준다. 모래바람이 이는 이 유적의 소하 묘지에는 나무기둥 아래 배를 뒤집어놓은 모양의 관(棺)들이 놓여 있다.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듯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던 것일까. 문화재청장을 지낸 저자의 유명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 신간이다. 시안(西安)에서 허시후이랑(河西回廊)과 둔황(敦煌)까지의 여정을 다룬 중국편 1, 2권에 이어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타클라마칸사막을 탐방한다. 현장법사가 불경을 찾아 지나간 길이자 동서 문명 교역의 중심이면서 탐스러운 과일과 고고학 보물이 넘쳐나는 실크로드의 풍광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와 함께 여행을 떠난 듯 실감나는 구성과 현장감, 풍부한 정보는 여전하다. 국내 답사기에 비해 다소 ‘맛’이 덜한 건 여정을 느긋하게 짜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헐버트 박사의 자료를 찾다가 동아일보 사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습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장(70)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 회장이 감동한 사설은 조선의 독립과 항일운동에 헌신한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사진)의 서거를 추모한 본보 1949년 8월 12일자 ‘헐버트 옹(翁)을 추모함’이다. 이 사설은 “우리는 은인을 잃었다. 아니 애국자를 잃었다. 우리 한국을 사랑하기를 그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보다 못지않게 사랑하였고…”로 시작해 “옹의 일편단심은 대한민국의 영원한 번영을 통하여 길이 빛날 것이니 평생소원이던 이 땅 흙 속에서 고이 안식하시라”로 끝맺는다.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의 귀국과 서거, 장례식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2013년 겨울 이 사설이 담긴 신문을 확인했다고 했다. 헐버트 박사가 국빈 자격으로 내한(1949년 7월 29일)한 것을 시작으로, 함께 헤이그 특사로 활약했던 이준 열사(1859∼1907)의 유족을 만난 일,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이 병원에 입원한 박사를 문병한 일, 서거와 장의(葬儀) 준비 과정, 영결식, 추모 분위기 등이 신문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영결식 기사 제목은 ‘3천만의 애끓는 통곡’이었어요. 구구절절 진심에서 우러나온 글이더군요.” 김 회장은 당시 동아일보 보도를 모아 2015년 박사 서거 66주기 추모 특집 소책자를 만들고 박사 영전에 헌정했다. 그는 “박사 서거 당시 동아일보는 한국의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 듯한 심정으로 국가원수의 별세를 다루듯 박사의 서거 소식을 다뤘다”면서 “내용이 다른 신문에 비해 압도적으로 상세하고 정확했다”고 말했다. JP모건체이스은행 한국 회장 등을 지낸 김 회장은 대학 시절 헐버트 박사의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감동받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박사에게 빠져들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발족(1999년)이나 박사의 전기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2010년) 발간 소식 등을 동아일보가 빼놓지 않고 독자에게 전한 것에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1962년 전북 전주의 한 중학교에 입학해 선생님의 어깨 너머로 동아일보를 처음 접했다. “그 뒤로 군 복무 3년과 미국 본사 근무 4년을 빼고는 직장과 집에서 평생을 같이했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2년에 걸쳐 3·1운동 현장을 취재 보도한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시리즈 등 독립운동 기사를 눈여겨봤다”면서 “전국 각지의 수많은 독립유공자를 기억해준 걸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목숨을 위협받는 속에서도 남의 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외국인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관련 연구도 충분치 않은 듯싶습니다. 동아일보가 이런 외국인 독립유공자를 언제나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청동기 유적 위에 테마파크를 만들겠다고 해서 문화재 훼손 논란을 일으킨 강원 춘천시 중도 ‘레고랜드’ 사업자 측이 호텔과 전망타워 기초공사를 위해 유구(遺構)가 있을 확률이 있는 땅속 깊이 콘크리트 말뚝을 박겠다고 나섰다. 4년 전 사업자 측이 스스로 제안한 시공법을 무시한 것이다. 18일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에 따르면 강원도와 강원중도개발공사, 레고랜드 코리아는 레고랜드 터에 들어설 두 건물의 기초 시공법을 바꾸겠다고 지난달 및 이달 17일 두 차례 신청했다. ‘(건물 터가) 연약 지반의 장기 침하 가능성이 높아 파일(pile) 기초 시공을 제안한다’는 것. 지반이 약해 건물 하중을 버티기 어렵기에 파일을 박아 보완하겠다는 얘기다. 문화재위 매장분과위는 두 차례 신청 모두 가부 결정을 보류했다. 매장분과위원장인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말뚝을 얼마나 깊고 넓게 박는 것인지, 기존 유구층과의 관계는 어떤지(훼손의 소지는 없는지) 관련 자료 보완을 요구했지만 사업자 측은 두 번째 신청할 때도 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고 보류 사유를 밝혔다. 건물 규모나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길이가 보통 10m 이상인 기초용 말뚝은 수십 m 깊이로 박는다. 이렇게 시공된 수십 개 말뚝이 유구층(유구가 있는 지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는 어쩌면 당연하다. 사업자는 두 건물이 들어설 터 아래에는 유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입증되지 않았다. 말뚝 하단이 닿을 것으로 예상되는 깊이까지 발굴 조사한 적도 없다. 이 위원장은 “중도는 거의 청동기시대 지층까지 발굴했지만 그 아래층에 신석기시대 유구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말뚝이 깊이 내려가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구가 있는지 없는지 파보려면 현재 보존 중인 청동기 유구층을 훼손할 수밖에 없어 문화재 보존 문제가 따른다. 호텔은 6층, 전망타워는 59.8m 높이로 지을 예정이다. 당초 사업자 측은 2016년 4월 땅을 깊이 파지 않고 벌집 모양 구조물을 바닥에 까는 ‘허니셀 기초’ 방식으로 시공하겠다고 문화재위에 보고했다. 4년이 지나 ‘전문가 검토 결과’ 지반이 약하다며 말뚝을 박겠다고 돌변한 셈이다. 지반이 그동안 갑자기 약해진 것일까, 아니면 4년 전 허니셀은 고층 건물에는 잘 쓰이지 않는 시공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업자 측이 건축허가를 받으려고 얼버무린 것일까. 문화재위는 시공 방식 변경을 요청하게 된 경위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문화재위는 국민을 대신해 문화재를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다. 사업자 측은 지난달 공법 변경을 처음 신청할 때 기초적인 건물 배치 자료도 제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화재위, 아니 국민을 대하는 자세를 짐작할 만하다. 방대한 문화재 유존(遺存) 지역에 대규모 건설공사가 허가되는 ‘기적’을 봤으니 ‘말뚝 정도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조종엽 문화부 기자 jjj@donga.com}

“민족정신과 더불어 동아일보와 100년을 함께 살았네요.” ‘현역 100세 교육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7일 오전 젊은 시절 7년간(1947∼1954) 교사와 교감으로 재직했던 서울 종로구 중앙중·고교 내 중앙학교 역사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아일보와 김 교수는 1920년 4월 함께 태어난 동갑내기다. 그에게 동아일보는 다니던 학교(평양 숭실중)가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로 폐교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알려줬고, 참배를 피해 한때 자퇴한 그가 평양부립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할 때 벗이 됐던 신문이었다. 김 교수는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급격한 성장 속에 메말라 가는 정신적 가치를 담은 책 50여 권을 썼고, 퇴임 뒤에도 강연을 통해 사회교육에 앞장서 왔다. 김 교수는 1960년 7월 7일 첫 기고 이후 현재도 본보에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소중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동감_백년 인연’의 일환으로 김 교수에 대한 감사 행사를 이날 열었다.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함께 역사관을 둘러본 후 오찬을 같이하며 김 교수의 본보 칼럼과 인터뷰, 사진 등을 모은 책자 ‘백년의 동반자’와 창간 100주년 기념 오브제 ‘동아백년 파랑새’ 등을 증정했다. 중앙중·고교 역사관에서 ‘자랑스러운 중앙인’ 소개를 둘러보면서 김 교수는 “내 제자구먼” 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 교수는 저서 ‘백 년을 살아보니’에서 “(중앙중·고교 재직 시절이) 평생에서 가장 학생들과 사랑을 나눈 기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김 교수와 만난 중앙고 3학년 이시현 군은 “중앙학교의 큰 스승을 뵙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본보 100주년 캠페인 ‘꿈이 뭐예요?’와 관련해 김 교수의 꿈을 물었다. 김 교수의 평생 꿈은 ‘해방된 한민족이 보란 듯이 민족국가를 세우고 세계에서도 모범적이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다. “해방된 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교육에 일생을 바치자고 결심했지요. 저에게 용기와 교훈을 준 스승이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속으로 ‘선생님, 못 보시고 돌아가셨는데 바라시던 대로 요즘 우리나라 잘삽니다’라고 합니다. 나 죽고 난 50년 뒤에 내 제자들이 ‘더 좋은 나라가 됐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원동력은 민족의식과 교육 열망이었다고 했다. “한국이라는 큰 나무의 뿌리는 암만 봐도 3·1운동 같아요. 어머니가 갓난 나를 업고 교회에 갔는데, 만세운동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울지 않더라는 거예요. 민족의식과 ‘배워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식이 3·1운동에서 싹터 그 힘으로 독립해 나라를 세울 수 있었고, 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도 오늘날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요.” 김 교수는 이날도 ‘100세 청년’이었다. “나는 늙었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항상 미래를 계획합니다. 여러분, 지난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갈 길이 있어요. 멀리, 높이 갈 사람은 짐을 많이 가져가면 안 돼요. 필요 없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6·25전쟁에 대한 반공주의적 연구는 전쟁을 냉전 대결 구도에서만 인식하면서 전쟁 이면의 복합성을 간과한 한계가 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57)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17일 열리는 학술회의 ‘6·25전쟁 한강선 전투와 전쟁 70주년 성찰’의 발표 자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국정치외교사학회와 한국전쟁학회(이상 회장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장)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공동 개최한다. 김 교수는 ‘6·25전쟁사 70년의 역사정치학: 승전을 위한 선전을 넘어서’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북한군 출신 전쟁포로라는 뜻으로 쓰이는 ‘반공 포로’보다 ‘송환 불원 포로’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했다. 반공 사상보다는 단순히 고향이 남쪽이어서 북쪽으로의 송환을 원하지 않은 포로도 있었다는 것.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거부한 ‘제3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했다는 생각 역시 소설 ‘광장’ 등의 영향으로 생긴 통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나중에 미국 등 에 밀입국할 것을 염두에 두고 중립국을 선택했다는 증언이 있는 것을 볼 때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1950년 12월 4일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남하하는 피란민을 촬영해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역시 남쪽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게 아니라고 봤다. 김 교수는 1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사진은 선전용으로 활용됐지만 피란민 가운데는 원폭 투하와 폭격에 대한 공포로 안전한 곳을 찾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이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북한 측은 이 같은 주장의 연장선에서 ‘한국군은 미군의 괴뢰일 뿐’이라고 선전하면서 군사정전위에서 우리 군 소장이 유엔군사령부 수석대표를 맡자 위원회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전협정 서명은 원래 국가 정상이 아니라 군 사령관이 하는 것이고,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국군과 다른 참전국 군 사령관을 대표해서 서명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6·25전쟁 연구는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후기수정주의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것이 미국학계의 냉전사 연구를 분류할 때 적합한 방법이라고 보면서 공산주의, 반공주의, 반(反)반공주의로 나눠 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반공주의적 6·25전쟁 연구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있었지만 도그마가 되면서 계승, 발전되지 못했고 공산주의적 시각이 주도권을 잡는 경향이 나타났다”면서 “반(反)반공주의 역시 공산주의적 선전은 비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승전과 체제 선전을 위해 가려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학술대회에서는 이 밖에 6·25전쟁 당시 한강선방어작전, 김포반도전투, 제2차 서울 수복 전투의 의미를 재조명한 발표 등이 있을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곳은 공청도(公淸道·현 충청도) 비인(庇仁·현 서천군) 땅입니다.”(조선 관리) “비로소 귀국의 이름을 듣고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걱정을 놓았습니다.”(표류한 일본 무사) 예기치 않은 운명은 역사에 뜻밖의 흔적을 남긴다. 1819년 일본 규슈(九州) 남단 사쓰마(薩摩)번(현 가고시마·鹿兒島현)의 중급 무사 야스다 요시카타(安田義方)가 탄 배가 표류하다가 조선 비인현의 한 섬에 도착했다. 야스다는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6개월 동안 조선에서 있었던 일과 대화(필담)를 기록한 ‘조선표류일기’를 남겼다. 19세기 초 조선의 모습을 담은 이 책이 최근 국내 출간(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김윤미 부경대 연구교수 번역·소명출판)됐다. 책에서는 야스다가 그린 다양한 그림 37장이 먼저 눈에 띈다. 조선의 다양한 인물과 물건을 예리하게 관찰해 그렸다. 비인현감의 행렬뿐 아니라 조선의 배(船), 각종 관(冠), 쌀가마니, 도끼, 초가집, 칼, 창, 돗자리, 교자, 담뱃대, 일산(日傘) 등이 그대로 담겼다. 그림에는 ‘조선도(朝鮮刀): 길이가 7, 8척 정도였다. 칼자루부터 칼집 끝까지 금으로 수를 놓았다’는 식으로 설명을 달았다. 일본으로 귀환하기까지 거친 여러 포구도 배가 다니는 해로와 함께 사실적으로 그렸다. 역자는 “문인화의 전통이 강한 조선의 양반이었다면 산수화 한 폭에 담았을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한 점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했다. 야스다의 기록은 편견이 없고 집요할 정도였다. 밥상을 받아도 음식의 종류와 수량을 적었으며 “나는 (술) 6잔을 마셨고, 히다카(동료 이름)는 7잔을 마셨다”고 썼다. 역자는 “야스다의 눈에 비친 조선의 관인은 의젓하고 당당하며, 보통 사람도 생업에 충실한 모습”이라고 밝혔다. 당시 조선과 일본은 우호적인 관계를 200년 넘게 지속하고 있었다. 조선 관리들은 야스다 일행을 경계하면서도 환대했다. 법에 따라 일행의 상륙을 가능한 한 막고, 지명과 거리에 대한 물음에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지만 필담과 시, 술, 음식을 나누며 교분을 쌓았다. 이들의 귀환에 앞서 명주와 베, 지필묵, 청심환 등 선물과 식량을 여러 차례 보내주기도 했다.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한 야스다는 임진왜란을 떠올렸다. “선대 주군(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께서 사천(泗川)에서 고전하다가 대승을 거둔 날이 실로 이백 년 전의 오늘이었다. 우리들은 표류하여 부산포에 이르렀으나 옛날의 전장이 또한 이곳에서 가까이 있다고 한다. 이에 우러러보고 고개 숙여 생각하니 감개가 비장하여 칼과 창을 어루만져 보고, 눈물을 뿌리며 시를 지었다.” 야스다가 표착 직후 다가오는 배에 탄 이들이 조선 사람이라는 걸 금세 알아봤던 것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도공(陶工)의 후손들을 일본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마을에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복식과 수염, 두발을 바꾸지 않고 있다”고 썼다. 야스다의 표류는 시공간적으로 묘하다. 그가 표착한 비인현은 그보다 400년 전인 1419년 왜구의 습격을 받아 조선의 대마도 정벌을 촉발한 곳이기도 하다. 야스다의 표류보다 3년 앞선 1816년에는 조선 서해안을 탐사하던 영국 배가 정박했다가 성경으로 추정되는 책을 조선 관리들에게 건네고 떠났다. 사쓰마번은 약 50년 뒤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며 일본을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감)의 길로 이끌었고, 일본 제국 해군의 주축이 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1207∼1256)는 유럽 원정군을 이끌고 동유럽을 휩쓴 뒤 1243년 흑해와 카스피해 일대의 초원에 킵차크 칸국(汗國·한국)을 세웠다. 이즈음부터 1480년까지, 몽골이 러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시기를 러시아인은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타타르는 몽골과는 다른 유목민 부족으로 몽골 제국에 편입됐는데, 서방 세계에서는 몽골이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멍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배는 상당히 가혹했다. 정복 과정에서 약탈과 학살, 파괴가 자행됐고 이후에도 징세와 징병을 통한 착취가 벌어졌다. 그러나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일면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킵차크 칸국을 연구한 미국 역사학자의 이 책은 ‘멍에’를 가리키는 사료 이면에 은폐된 교류와 몽골족이 러시아에 미친 복합적인 영향을 좇는다. 저자에 따르면 원나라 황실이 어느 정도 한족의 문화에 물들어 갔던 것과 달리 킵차크 칸국에서 몽골인은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 나라는 몽골족의 힘의 근원이 되는 초원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몽골 울루스(ulus·영토, 국가, 백성, 영지를 뜻하는 몽골어)에 포함되지 않는 여러 러시아 공국(公國)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저자는 당시 러시아가 몽골인이 육성한 국제 상업의 혜택을 입었다고 봤다. 또 몽골의 보호 아래 러시아 정교회는 물질적 측면에서 거대하게 성장했다.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같은 동유럽의 적으로부터 방어했다. 훗날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군사 재정 관료 모델을 활용하기도 했다. 킵차크 칸국의 멸망과 함께 여러 러시아 공국을 통합한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는 기독교 제국의 황제이면서 ‘킵차크 칸의 정통 후계자’라는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동시대 사료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칸국을 계승했다는 개념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러시아인이 몽골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최대한 기록에 남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세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생겨난 우호적 사건들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감춰졌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른바 ‘침묵의 이데올로기’다. 부제는 ‘중세 러시아를 강타한 몽골의 충격’.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옛 신라와 가야, 백제 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 18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경북 경주시 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 ‘말, 갑옷을 입다’를 공동 개최한다. 먼저 눈에 띄는 건 2009년 경주 쪽샘지구에서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말 갑옷이다. 보존 처리에만 10년 걸렸다. 실물과 이를 복제해 말 모형에 입힌 재현품(사진)이 함께 전시된다. 1992년 경남 함안군 마갑총에서 역시 완전한 모습으로 나온 가야시대 말 갑옷도 말 투구와 좌우측 말 갑옷이 최초로 함께 전시된다. 이 유물은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1934년 경주시 황남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말 갑옷과 경주시 계림로 1호 고분에서 1973년 출토된 말 갑옷이 발굴 이후 처음 공개된다. 백제 지역인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한국 최초의 옻칠한 가죽 말 갑옷과 말 투구도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고대 중장기병(철기병) 모습이 영상으로 소개되며, 도기기마인물형각배(국보) 등 관련 유물 140여 점도 전시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받지만 하루 300명까지는 현장에서도 신청을 받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경기 파주시 대성동 마을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가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구성된 비무장지대 실태조사단이 5월 26∼29일 진행한 첫 실태조사에서 구석기시대 뗀석기 2점을 수습했다고 9일 밝혔다. 석기는 마을 남쪽 구릉 일대에서 확인됐으며, 그중 찌르개(사진·위 끝이 날카로우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지는 모양의 도구)는 마름모꼴로, 큰 몸돌에서 떼어낸 돌조각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양쪽 가장자리 날 부분은 잔손질해 대칭을 이뤘다. 나머지 한 점은 찍개(자갈돌이나 모난 돌의 가장자리를 떼 날을 세운 석기) 종류의 깨진 조각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석기가 수습된 지역은 구릉 정상부로, 규암 석재가 다수 확인되고 있어 유물의 추가 수습과 유적 확인을 위해 추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구석기시대 뗀석기 유물은 2004년 개성공업지구 문화유적 남북공동조사 당시에도 1점이 발견된 적이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의 수막새, 상감청자 조각, 용머리 장식 조각을 비롯해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유물이 확인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흉년과 역병으로 숨진 자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고에 드문 해였다.” 경상도 고성의 처사(處士·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구상덕(1706∼1761)은 1733년의 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질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 향촌의 공동체는 역병에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남았을까.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53)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0년 여름호에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은 구상덕이 1725년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쓴 일기다. 이 발표문에 따르면 구상덕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기근과 역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30년부터 이어진 역병과 재난으로 1733년 봄에는 들판에 나물을 뜯을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두창과 온역, 이질, 한질 같은 전염병이 1740년, 1748년, 1753년 등에 되풀이해 창궐했다. 구상덕도 아내와 딸, 친구와 친척을 연이어 역병으로 잃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대응의 시작은 ‘사회적 거리 두기’였다. 구상덕은 자신의 마을에서 역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자 읍내 향교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열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에 역병이 돌자 향교에서 벌인 시회(詩會)에 불참했고, 집에서도 안채 등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인적 드문 산중의 절이나 이웃집으로 몇 주씩 떠나 있기도 했다. 역병이 미치지 않은 동네의 누이 집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구상덕은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의 아들을 거둔 뒤 데리고 암자로 피신했다. 김 교수는 “역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몸을 피할 공간을 제공하는 건 서로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호부조였다”고 설명했다. 구상덕은 역병을 막고자 점술가나 승려를 불러 독경을 요청했다. 1730년 아내가 괴질에 걸리자 소고기를 먹였다. 역병에 고기를 고아 먹는 치병(治病) 풍속이 있었던 것. 1757년 여름에는 역병이 돌자 닭 한 마리 값이 원래 5, 6전에서 몇 배나 올랐다고 일기에 썼다. 조정과 지방관은 처방전을 보급하고 피막(避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대부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워져 환자들은 굶거나 얼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피막은 병자들보다는 아직 병이 옮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구상덕이 가족의 안위만 살핀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파에게 죽을 먹였으며, 역병과 기근으로 버려진 아이를 노비 삼아 거두기도 했다. 또 백성의 고통을 사또에게 전하기 위해 각종 문서 작성을 도왔다. 김 교수는 “역병의 피해가 가혹한 상황에서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사(士·선비) 의식’이 역병의 시대를 헤쳐나간 열쇠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 역시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도모하려는 선비의 의식과 닮아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흉년과 역병으로 숨진 자의 수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고에 드문 해였다.” 경상도 고성의 처사(處士·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 구상덕(1706~1761)은 1733년의 봄을 이렇게 기록했다. 질병의 원인조차 제대로 모르던 시절, 향촌의 공동체는 역병에 어떻게 대응하고 살아남았을까. 김호 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2020년 여름호에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18세기 구상덕의 승총명록을 중심으로’를 게재했다. ‘승총명록(勝聰明錄)’은 구상덕이 1725년부터 죽을 때까지 37년 동안 쓴 일기다.이 발표문에 따르면 구상덕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기근과 역병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30년부터 이어진 역병과 재난으로 1733년 봄에는 들판에 나물을 뜯을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두창과 온역, 이질, 한질 같은 전염병이 1740년, 1748년, 1753년에 되풀이해 창궐했다. 구상덕도 아내와 딸, 친구와 친척을 연이어 역병으로 잃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 대응의 시작은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구상덕은 자신의 마을에서 역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자 읍내 향교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열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집안에 역병이 돌자 향교에서 벌인 시회(詩會)에 불참했고, 집에서도 안채 등 정해진 곳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인적 드문 산중의 절이나 이웃집으로 몇 주씩 떠나있기도 했다. 역병이 미치지 않은 동네의 누이 집으로 부모님을 모셨다. 구상덕은 친구가 역병에 걸려 죽자 그의 아들을 거뒀고, 다시 역병이 발발하자 암자에 머물렀다. 김 교수는 “역병에 걸렸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몸을 피할 공간을 제공하는 건 서로의 선의를 바탕으로 이뤄진 상호부조였다”고 설명했다.구상덕은 역병을 막고자 점술가나 승려를 불러 독경을 요청했다. 1730년 아내가 괴질에 걸리자 소고기를 먹였다. 역병에 고기를 고아 먹는 치병(治病) 풍속이 있었던 것. 1757년 여름에는 역병이 돌자 닭 한 마리 값이 원래 5, 6전에서 몇 배나 올랐다고 일기에 썼다. 정부는 처방전을 보급하고 피막(避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격리했지만 대부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워져 환자들은 굶거나 얼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피막은 병자들보다는 아직 병이 옮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장치였다. 구상덕이 가족의 안위만 살핀 것은 아니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노파에게 죽을 먹였으며, 역병과 기근으로 버려진 아이를 노비 삼아 거두기도 했다. 또 백성의 고통을 사또에게 전하기 위해 각종 문서 작성을 도왔다. 김 교수는 “역병의 피해가 가혹한 상황에서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스스로 공동체를 지키려는 자발적인 ‘사(士·선비) 의식’이 역병의 시대를 헤쳐나간 열쇠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 역시 공동체의 안녕을 함께 도모하려는 선비의 의식과 닮아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본인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사진)가 1922년 일제의 광화문 철거 방침에 반대하며 동아일보에 게재한 기고문 가운데 일제의 사전검열로 실리지 못한 내용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은 야나기가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1922년 7월 작성한 육필 원고를 일본 도쿄 니혼민게이칸(日本民藝館·일본민예관)에서 최근 발견했다고 7일 본보에 밝혔다.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이 원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5회에 걸쳐 실리면서 광화문 철거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육필 원고에는 일제의 사전검열 탓에 신문에는 실리지 못하고 같은 해 일본 잡지 ‘가이조(改造)’ 9월호에만 실렸던 200자 원고지 2장 분량의 내용도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장을 지낸 이상해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광화문의 아름다움을 추도사 하듯 애절하게 묘사하며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의 글은 당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며 “일제가 광화문을 헐어 조선의 상징을 말살하려는 데서 한발 물러섰고, 광화문은 비록 제자리는 아니지만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져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고 말했다. “너(광화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했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야나기의 원고는 식민지 문화재의 운명과 나라를 빼앗긴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절창(絶唱)이다. 야나기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에도성(江戶城)이 헐린다면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라며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발했다. 야나기에게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와도 같았다. 그는 “나는 마치 너(광화문)를 낳은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끌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새기겠다”고 썼다. 총독부 건물의 신축은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경복궁 흥례문 구역을 헐고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고자 했고, 결국 1926년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상해 교수는 “의궤(儀軌)도 없는 광화문이 사라졌다면 원형 복원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4, 2015년 니혼민게이칸 소장 한국 문화재를 조사했고 이후 도쿄예술대의 관련 연구를 지원했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스기야마 다카시(杉山享司) 니혼민게이칸 학예부장은 “니혼민게이칸 학예사들도 (야나기 육필) 원고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검열된 부분을 파악하고 의미를 고찰해서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재단은 최근 동아일보에 당시 자료(야나기의 원고)가 존재하는지 물어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의 동아일보 기고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오늘날 맞춤법으로 고쳤다. ‘이조(李朝)’와 같은 당시 용어는 그대로 살렸다. 이 기고는 1922년 8월 24~28일 동아일보 1면에 (1)~(5)회로 연재됐다. (※) 표시된 문단은 당시 동아일보 기고에는 일제의 사전 검열 탓에 실리지 못했으나, 일본의 잡지 ‘가이조(改造)’ 1922년 9월호에는 실렸던 부분이다.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야나기 무네요시 (1) 이 한 편을 공개할 시기가 성숙한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장차 행하려는 동양 고건축의 무익한 파괴에 대하여 나는 가슴을 짜내는 듯한 아픈 생각을 느낀다. 조선의 수부(首府)인 경성에 경복궁을 찾아보지 못한 여러 사람들은 왕궁의 정문인 저 장대한 광화문이 장차 파괴될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겠기로 신경에 아무 느낌과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독자가 동양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의 소유자인 것을 믿고 싶다. 가령 조선이라는 것이 직접의 주의(注意)를 여러 많은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점차 인멸(湮滅·자취가 없어짐)하여 가는 동양의 고(古) 예술을 위하여 이 한 편을 정성껏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한 편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한 예술이 잃어버리게 되는 운명에 대한 애석의 문자(文字)이다. 그리고 그 예술의 작자(作者)인 민족이 목전에 그 예술의 파괴를 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나의 동정하고자 하는 애달픈 감정의 피력이다.※그러나 아직도 이 제목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없다면 부디 다음과 같이 상상하길 바란다. 만약 조선이 발흥하고 일본이 쇠퇴해 일본이 조선에 합병되고, 궁성(에도성, 일본 황거·皇居를 이름)이 폐허가 되며 그를 대신해 그 위치에 큰 서양풍의 일본총독부 건물을 짓게 되고, 저 푸른색 물이 흐르는 해자를 넘어 높고 흰색 벽으로 솟는 에도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니면, 정으로 치는 소리를 듣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강하게 상상해보라. 나는 그 에도(오늘날 도쿄)를 상징하는 일본 고유 건축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사실 미적으로 이보다 뛰어난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만들 수 없지 않겠는가. (아, 나는 망해가는 나라의 고통에 대해 여기서 새롭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일본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똑 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번역: 일본 도쿄 예술대 연구진)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切迫)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잇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되어 버리려 한다. 아! 어찌하면 좋을까? 나의 생각은 혼란해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 혹독한 끌과 무정한 철퇴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다. 이것을 생각하고 가슴을 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너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 사람뿐이다. 아직 이 세상은 모순의 시대이다. 문 앞에 서서 너를 쳐다볼 때 누가 그 위력(威力)의 미를 부인할 자 있으랴? 그러나 이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자는 반역의 죄를 받을 것이다. 너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발언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는 너를 산출한 민족 사이에서도 불행히 발언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하여 그 곳에 있는 여러 사람은 어둡고 쓰린 무정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후 세월이 지나갈수록 너를 애모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갈 것도 나의 확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모의 애(愛)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세상이다. 아니 이러한 애(愛)를 죽이라고 강제하는 세상이다. 아!! 생각할수록 괴로운 아픔이 가슴을 누른다. 그러나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니 이야말로 답답하고 아프지 아니한가? 아무나 말하기를 주저하리라. 그러나 침묵 가운데 너를 파묻어 버리는 것은 나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한 일이다. 이 까닭에 나는 말할 수 없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네가 죽는 이 때에 한 번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 의식케 하려고 나는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있는 장소에서 1000마일 이상이나 떠나 있는 내가 홀로 침묵을 깨치고 소리를 친다 할지라도 어둠의 힘과 강한 형세로부터 너를 구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시비를 논단(論斷)하는 이 말을 결코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이를 쓰는 것이 나에게 대하여는 한 가지 큰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의 운명을 다시 회복하도록 보증하여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 대한 존경과 정애(情愛)가 이 세상에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의 미(美)와 역(力)과 운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실로 적지 아니할 것이다. 만약 그 수가 적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 적은 사람의 정애라도 받아 주겠지? 어쨌든 너의 죽음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여다오? 나는 이 현세에서 장차 떨어지려는 너의 운명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영(靈)의 세계에서는 너를 불멸의 자(者)로 만들지 아니하고는 마지 아니하겠다. 실제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는 자유는 나에게 없으나 이 문자 가운데서 너를 불멸케 하는 자유는 나에게 있다. 아? 나는 이에서 너의 이름과 자태와 영(靈)을 결코 스러지지 아니할 싶은 힘으로 잘 □각(刻)하겠다. 마치 너를 산출(産出)한 민족이 저 견고한 화강석 위에 끝을 깊이 파서 기념할 영원의 조각을 새긴 것과 같이. (2)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얼마 아니 하여 없어지리라. 그러나 없어져서는 안 될 너의 존재를 위하여 나는 이 글을 쓴다. 그리하고 나는 농후하고 선명한 먹으로써 이 글쓰기를 게을리 아니한다. 지상에 있는 시선에서는 너의 자태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쓰는 이 문자는 지상의 어느 곳을 물론하고 널리 전파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를 근저(根抵) 깊게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적은 추도문을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아!!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뜻 아닌 죽음의 운명을 당하고 얼마나 무참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과 쓰림을 생각하고 작지 아니한 동정을 보내고자 하노라. 아! 불쌍한 너의 영(靈)이여! 만약 네가 갈 곳이 없으면 나 있는 곳으로 와 주며 네가 죽은 후에는 이 문자 중에 길이 살아다오. 누구든지 이 문자를 읽고 너를 생각해 줄 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의 존재가 한 번 다시 여러 독자의 따듯한 의식 가운데에서 애모(愛慕)의 기억을 일으킬 날이 기어이 올 것이다. 그러나 여러 많은 사람은 너에게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말하지 말라는 무서운 제재를 받고 있다. 그 까닭에 나는 그런 사람을 대신하여 발언의 자유를 지금 택하려고 한다. 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너의 자태. 지금부터 50여 년 전 옛적에 너의 왕국 중에 가장 굳센 힘을 가진 섭정(攝政) 대원군이 그의 주저치 않는 강한 의지에 의하여 왕궁을 잘 지키라는 의미로 남면(南面)한 훌륭한 장소에 굳은 기초를 정한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조선이 존재한다는 거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여러 많은 건축이 전면좌우에 연락(連絡)하여 있으며 광대한 도성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야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서로 호응하야 있으며 그리하고 북에는 백악(白岳)의 장식(裝飾)이 잇고 남에는 남산의 요위(繞圍)가 있어서 이 황문은 과연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점령했다. 이러하여 3개의 관문을 중앙에 두르고 거대하고 견고한 화강석으로 높이 축조했으며 그 위에 전통을 잘 지키는 중층(重層)의 건물을 용립(聳立·우뚝 솟음)케 했다. 여러 가지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문은 좌우로 균등(均等)의 고탑(高塔)을 연(延)했으며 그 위에는 각루(角樓)가 아름다운 자세를 보전하고 있다. 앙현(仰見)하는 자로 누가 그 자약(自若)의 미에 대하야 놀라지 않을 자가 있으랴? 이것은 과연 일국의 최대한 왕궁을 지킴에 적당한 정문의 자세이다. 독자여! 이것은 이조 말기의 작품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 그리하고 완려하고 우아하고 정치한 미를 얻어 볼 수가 없다고 냉랭한 생각을 가지지 말라! 도리어 이조 말기에서라도 이러한 위대한 작품을 낸 것을 감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하고 단엄(端嚴)한 그 자태에는 의지(意志)의 미가 표현돼 있지 않은가? 불교의 고려조는 먼 과거로 흘러가고 지금은 유교의 이조 말이 아닌가? 지(地)의 교훈에서 양육된 사람은 대지에 누울 견고하고 안전한 미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된다. 광화문에 대하여는 이조의 미의 권화(權化)를 목전(目前)에 느낄 것이다. 보아라! 광화문이 어떻게 단순하게 태연히 땅에 서 잇는 것을. 문을 지나는 자마다 모두 그 권위에 놀랄 것이다. 실로 한 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건설한 적호(適好)의 기념비이다. 여러 많은 사람은 이미 저 문전 광장에 무수히 쌓아 놓은 거대한 재료가 화염에 싸여 경복궁 재건의 기도가 수포에 돌아가게 됐던 것을 기억하리라. 비상한 노고와 막대한 비용이 덧없는 일편(一片)의 회신(灰燼·재)으로 돌아가 일반 인민이 뜻하지 않았던 재화(災禍)에 그만 의지가 약해진 때에 그러한 변사(變事)를 일고(一顧)도 아니하고 곧 그 실행을 최촉(催促)한 대원군의 의지의 강한 것을 생각할 것이다. 실로 금일의 저 광화문은 그 불요부절(不撓不折)의 정신의 대담한 피력(披瀝)이다. 그는 그가 죽은 지 겨우 20여 년 후에 그의 의지로 지어 놓은 이 견고한 문이 이처럼 빨리 와괴(瓦壞·기와가 깨지듯 부서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예술적 의식이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대하여 이러한 무참한 파괴가 백주에 감행되리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 이것이 오문(誤聞·잘못된 소문)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간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파괴되려는 그 무서운 광경이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러면 이 검은 형세를 제지할 힘은 어디를 가든지 어찌 못할 것인가? 아! 동포여 동양의 순수한 건축을 경애하라! 이에 필적할 만한 건물을 우리는 세우지 못한 것이 아니냐? 오늘날 생활에 소용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버려서는 인되겠다. 예술은 공리의 관계를 초월한 자(者)이다. (3) 미(美)가 있는 자(者)는 길이 보존하여라. 더구나 순 동양식의 예술은 우리의 영예를 위하야 깊이 사랑하라! 여러 가지 사정에 있어서 그러한 예술을 수호하는 것은 조선에 대한 추모요 예술에 대한 이해인 것을 깊이 각오(覺悟)하라! 저 광화문은 비록 근대의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동양에서는 그렇게 많지 않은 훌륭한 건축이다. 조선에서 다섯 개의 우수한 문을 택한다고 하면 저 광화문은 반드시 그 가운데 하나인 작품이다. 작품의 양이 많지 못하고 역시 그 수가 매우 적은 조선에서는 더구나 중요한 건축의 하나가 아닌가? 저 광화문이 주도(主都)의 미(美)를 장식하고 있는 한 요소인 것은 누구나 모두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 주문(主門)이 없어진 때에 경복궁에 무슨 힘이 있으며 경복궁을 잃어버린 때에 한성(漢城)에 무슨 면목이 있으랴? 저 왕궁보다 더욱 정확한 형식과 더욱 위대한 규모를 가진 건축은 조선 안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조 건축의 대표이며 모범이며 정신이로다.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어디까지든지 염치없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힘을 삼갈지어다. 도리어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의 할 일이 아니냐.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더구나 그 중에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구원하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행위가 아닌가? 특히 조선이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 제(諸) 관아를 좌우에 이끌고 용립(聳立)한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야 멀리서 대황로(大皇路)를 밟으며 광화문을 바라보는 광경은 참말 잊어버릴 수 없는 위대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냐?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찰하여 잘 계획한 그 건축에는 이중(二重)의 미가 있도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함부로 그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찌 하랴? 지금은 천연과 인공과의 좋은 조화가 이해(理解) 없는 자로 인하여 파괴되리라는 것을. 이것이 만약 꿈에 불과하다면 다행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현실인 것을 어찌 하랴? 마음을 고요히 하여 10여년 옛적을 생각하여 보라! 위대한 광경에 마음이 끌리어 문 앞에 가까이 나갈 때 사람은 알지 못하게 그 장엄한 미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리하여 중문으로 들어가 금천교를 건너가면 앞에는 장대한 근정전이 용립하고 뒤에는 강녕전과 경회루의 기와가 물결치는 모양으로 서로 중첩하여 있다. 다시 금원(禁苑)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혹은 녹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몸을 장식한 10여 개의 건물이 혹은 그 아래 연화(蓮花)를 피우고 혹은 그 위에 송지(松枝)를 뒤덮어 각각 보기 좋은 장소를 택하여 있다.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 북에는 신무문 그리하고 남면의 정문을 이름하여 사람들은 광화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연한 조직(組織) 있는 광경은 다시 두 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것이다. 이조의 대표적 건축인 강녕전과 교태전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이 되고 변형이 되어 지금은 다만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만이 작은 산 옆에서 고요히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최대의 건축인 근정전을 문 앞에서 우러러 볼 날은 두 번 우리에게 오지 아니할 것이다. 곧 얼마 아니하여 그러한 동양의 건축과 아무 관계 없는 방대한 양풍(洋風)의 건축이 곧 장차 완성될 총독부의 건축이 지금 그 준성(竣成)을 급히 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 이미 전날에는 자연의 배경을 고찰하고 건축과 건축의 관계를 숙려하여 모든 점에 균등의 미를 포함케 하여 순 동양의 예술을 보류(保留)하려고 한 노력이 지금에 이르러는 전연(全然)히 파괴가 되고 방기가 되고 무시가 되었으며 이에 대신하여 아무 창조의 미를 가지지 못한 양풍의 건축이 돌연히 이 신성한 지경을 침범한 것이다. 이리하여 광화문에 연속된 흥례문은 이미 자취도 없어졌으며 저 금천교와 또 그 아래로 보이던 석조의 괴물(怪物)은 무참히 파괴를 당하여 지금은 다만 그 석편(石片) 등이 풀 속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저 위대한 경회루는 이후에도 잔존하겠지만 그것은 다만 유연(遊宴)의 용(用)으로만 공급될 것이다. 이리하여 남는 광화문은 그 위치에 서고 있을만한 의의를 참혹히 잃어버릴 것이다. 이전 날에는 그 문이 없어서는 안 될 위치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도리어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그 건물을 사용하는 자가 변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랴? 누구든지 저 양풍의 건축이 광화문의 존재를 무시하고 설계된 것인 것은 부인할 자가 없을 것이다. (4) 현대의 동양, 주마등과 같이 모든 것이 격변하여 가는 현대 조선에서는 저 광화문이야말로 참말 귀중한 유작품(遺作品)이 아닌가? 이 까닭에 그 파괴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실현되려는 파괴에 대하여 아!! 우리는 무슨 말을 하랴?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하고 그 대신에 무엇이 건설되겠는가? 우리는 위대한 자를 무익한 노력으로써 파괴하고 그 대신에 왜소한 문을 세우게 되는 날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되었다. 아!! 그러면 여러 사람은 눈물을 흘릴까? 그만 미쳐 버릴까? 어떠한 기예로라도 저 광화문보다 더 장엄하고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다운 문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광화문과 장차 세울 문을 마음에 그리고 어느 문이 우월할까를 선택하여 보라! 그 선택함에는 일순간의 시간이라도 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파괴가 기탄(忌憚) 없이 감행됨에야 무슨 말을 하면 좋을 것인가? 여러 사람은 결코 스러지지 아니 할 하나의 기억이 스러지라고 강제하는 날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 옴을 알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스러지지 아니할 기억이 이 문자(文字)로써 여러 사람의 가슴에 인(印) 박힐 수가 있을는지? 어찌하여 저 광화문이 파괴를 당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줬는가? 아! 어찌하여 그 파괴되는 문을 구원할 수 없으리만치 그처럼 비참한 경우에 빠진 자기가 되었는가? 우리에게 그것을 변해(辯解·변명)할만한 변해다운 변해가 있을까? 우리가 이러한 파괴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우의(友誼) 상 정당한 일일까? 또는 이 건축에 대한 정당한 이해일까? 우리는 그 파괴를 시인할 만한 적극적 이유를 어디를 가든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우리는 공연히 대답할 수 없는 대답을 바라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파괴하는 그 사람은 대답하려고도 아니하고 파괴를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아! 시간은 주저 없이 광화문의 사형(死刑)을 우리에게 고하고 있도다. 문은 재흥(再興)된 후로부터 겨우 50여 년의 성상(星霜)을 지났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조성되었으며 누가 지었으며 또는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는 지금도 오히려 새로운 추억이 아니냐? 그리하고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이 지금도 남아 있는 이 때에 이러한 파괴를 감행하여 그러한 기억을 추가케 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하야 너무도 무정하고 무참한 행위가 아닌가? 나는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고 파괴를 피하여 이전을 계획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 자비스러운 처치로써 어떠한 운명을 광화문이 받을까? 다행히 죽음은 이로 인하여 면한다 할지라도 문이 가지고 있던 의의는 그만 반(半) 넘게 죽어 버리는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문이요, 딴 곳의 문이 아니다. 저 위치와 저 배경과 저 좌우의 벽을 제하고는 광화문에 얼만한 가치와 생명이 있을까를 생각하여 보라! 형체는 남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추상적의 생명 없는 형체가 아니냐. 특히 자연과 건축과의 관계와 조화를 생각한 고인(古人)의 주의를 무시하고 그것이 얼만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인가? 아!! 그러면 다시 저를 ‘사(死)’에서 구원할 수는 없을까? 저의 존재와 가치를 시인하고 보호하려는 사람은 없는가? 저는 아직 젊도다. 육체는 완연히 건강하고 정신은 의연히 견고하지 아니한가! 때 아닌 죽음을 저에게 최촉(催促)하는 죄는 그 책임을 누가 지려는가! 아?!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너의 많은 여러 벗들은 이미 너보다 먼저 죽어 바렷다. 도성의 서방(西方)을 장식하고 있던 돈의문(서대·西大)과 소의문(서소·西小)의 양 문은 벌써 시민의 눈에서 자취를 잃어버린 지가 오래다. 선년(先年)에 내가 혜화문(동소·東小)을 방문하였을 때 그 문은 보호자가 없는 까닭에 그 가련한 모양은 풍우(風雨)에 쓰러져 버릴 듯이 보였다. 너의 존귀한 형제인 숭례문(남대·南大)은 성벽에서 고립이 되었으며 또는 보잘 것 없는 철책으로 겨우 몸을 보전하고 있다. 사랑하여 주는 주인이 없는 너는 얼마나 그 짧은 운명을 애달피 생각하는가? 죽지 아니할 네가 죽지 않으면 안 될 이 세상을 얼마나 부자연하게 저주하고 원망하는가?(5) 아!! 문 앞에 안치된 2개의 큰 석사(石獅)여. 너는 오랫동안 잘 왕궁의 정문을 수호하였다. 추운 때나 더운 때나 어느 때를 물론하고 그 자태를 변치 않코 너에게 가까이 오는 자의 마음에 마다 위대한 권위로써 임하였다. 그리하고 문에 상당한 위엄과 확실로써 궁전에 더할 수 없는 미를 첨부하였다. 너는 지금도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고 있으나 장차 네 주인의 신상에 내릴 운명을 위하여 너는 걱정하지 아니하는가? 아! 너는 자세히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의 주인은 이미 임종의 상(床)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하고 너도 영원히 동(動)하지 않겠다는 그 장소로부터 장차 동하게 될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아!! 그러면 너는 장차 어디로 가게 되려는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너를 가져가는 그 사람까지도 그 날이 오지 않으면 그 곳을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용서해 다오? 나는 죄 있는 여러 사람을 대신하여 사죄하려고 한다. 나는 그 까닭에 지금 사죄의 붓을 든 것이다. 혹은 더운 여름철이나 또는 하늘 위에 눈송이 날릴 때나 그러하고 석모(夕暮)의 반월(半月)이 청백(靑白)의 빗을 누상(樓上)에 던질 때나 그 어느 때를 물론하고 나는 몇 번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마음에 그리고 그 문을 쳐다봤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 거대한 모양이 아른아른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그런데 저 광화문이 이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괴로운 현실임에야 어찌 하랴? 누구든지 그 문을 파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사정으로 인하여 너를 이러한 비참한 파탄의 도정까지 인도하게 되었는가?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말한 그 말을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 한다’ 하는 이 말을. 만약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고 하면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그 우열(愚劣·어리석고 못남)한 죄를 지지 아니할 것이다. 광화문이여 장수할 너의 운명이 단명에 마치고 마는 것을 너는 얼마나 괴로이 생각하고 얼마나 적막히 생각하는가? 나는 네가 아직 건전(健全)하여 있는 그 동안에 다시 바다를 건너 너를 찾아가려 한다. 너는 나를 고대하여 다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시간을 이용하여 이 한 편을 쓰는 것이다. 너를 산출(産出)한 너의 친한 민족들은 지금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러한 사람을 대신하여 너를 애석히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의 생전에 말하여 두고 싶다. 그 까닭에 나는 이 말을 기록하여 공중(公衆) 앞에 보내는 것이다. 이로써 너의 존재가 다시 한 번 의식 깊게 여러 사람에게 반성을 준다고 하면 나는 얼마나 기뻐하랴? 그리하고 내가 기록하는 이 문자로써 그 의식을 영원히 계속케 한다 하면 너도 얼마나 기뻐할 것이냐? 그러면 이것이 나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랴?(1922. 7. 4. 도쿄에서)조종엽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