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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노래했다. ‘시간이 있을 때 장미를 따라’고. 장미는 황홀한 생의 순간을 의미한다. 문정희 시인(70), 그의 이름이 진짜 장미가 된다. 일본 조사이국제대가 7년간 공들여 개발한 장미 품종에 ‘문정희’라는 이름을 붙여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23일 문 시인을 만났다. “자그마한 꽃송이의 흑장미였어요. 내 이름을 딴 장미가 끊임없이 피고 지며 생명을 이어간다는 건 무한한 축복이자 행운이에요!” 트레이드마크인 머플러를 멋스럽게 두른 그의 두 뺨은 살짝 상기돼 있었다. 이 대학이 그동안 개발한 장미에 붙였던 이름은 프랑수아즈 사강(프랑스), 안네 프랑크(유대계 독일인) 등이다. 모두 생명의 존엄과 평화를 아름답게 쓴 작가들로, 문 시인도 같은 이유로 선정됐다. 그의 대표 시선집인 ‘지금 장미를 따라’는 일본에도 소개돼 사랑받았다. 동명의 시는 그가 멕시코 여성 화가인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받은 영감을 풀어냈다. 그는 “요즘 최고의 순간을 누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이 보내는 환호 때문이 아니라 내면의 흔들림과 갈증이 잦아들고 헛것을 추려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 70세를 맞아 스스로에게 줬다는 선물은 여행 정도를 떠올렸던 기자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정확한 언어를 쓰겠다는 다짐이에요. 돌이켜 보니 시를 쓸 때 과장하고, 미화하는 수식어를 많이 사용한 것 같아요. 정직하고 정확한 언어를 써야 시 정신이 늙지 않을 테니까요.” 고교 시절 미당 서정주 시인이 발문을 쓴 시집 ‘꽃숨’(1965년)을 출간하며 ‘천재 소녀 시인’으로 불렸고, 여성의 억압된 삶을 앞서 토해내는가 하면 뜨거운 에너지와 삶의 본질을 꿰뚫는 작품들로 우뚝 선 그가 아닌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9개 언어로 번역된 시집 12권은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근래에 받은 상만 해도 스웨덴의 유명 문학상인 시카다상(2010년)을 비롯해 육사시문학상(2013년), 목월문학상(2015년), 올해 선정된 삼성행복대상 등 나열하기 벅찰 정도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문학적 성취를 이루려면 한참 멀었어요. 시를 쓴 뒤 다시 읽어 보면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뚫은 것 같은 전율이 오지 않을 때가 태반이에요. 다만, 지금도 잉크가 마를 새 없이 계속 시를 쓰고 있다는 그 자체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매일 오전 7시에 일어나 곧장 책상 앞에 앉는다. 전날 쓴 글을 고치고 새 글을 쓴다. 집 안 곳곳에 생각날 때마다 빼곡히 글을 써 놓은 냅킨, 메모지 등이 꽉 차 있다. 책은 손에서 떠나는 법이 없다. 요즘은 시리아 시인인 아도니스의 시집, 독일 출신의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인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고 있다. “나이를 먹으며 걱정되는 건 딱 두 가지예요. 눈이 나빠지지 않을까, 호기심이 줄어들지 않을까. 자기 복제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기도 해요. 우리 사회가 빠르게 성장하며 잃어버린 가치인 생명을 밀도 있는 시어로 이야기하며 계속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너무 멀리 가지 마라.” 영화 ‘남한산성’ 마지막 장면에서 대장장이 날쇠가 어린 나루에게 하는 말이다. 원작 소설을 쓴 김훈 작가는 이를 듣는 순간 ‘저거다!’ 싶었단다. 그는 “소설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끙끙댔다”고 했다. 날쇠의 당부는 누구나 어린 시절 많이 듣던 말이다. 투박하게 툭 던지는 듯한 이 한마디에는 애정이 담겨 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은 도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긴 여운을 남긴다. 소설은 나루가 ‘초경을 흘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생명성을 의미하며, 살아서 미래를 기약하자는 뜻을 담았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인기 소설을 영화로 만들 경우 성공할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 원작을 영상과 대사로 재해석해 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쇼생크 탈출’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 등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 ‘남한산성’은 그 자체로도 빼어난 완성도를 지닌 동시에 소설의 영화화에 성공한 사례로 꼽힐 만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21일 막을 내렸다. 경쟁 부문인 뉴커런츠상은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사진)와 이란 모흐센 가라에이 감독의 ‘폐색’이 수상했다. 올해의 배우상은 ‘밤치기’에 출연한 박종환과 ‘죄 많은 소녀’의 전여빈에게 돌아갔다. 박배일 감독의 ‘소성리’, 일본 하라 가즈오 감독의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은 비프메세나상을 받았다. 선재상은 곽은미 감독의 ‘대자보’, 인도네시아 시눙 위나요코 감독의 ‘마돈나’가 수상했다. 올해 영화제를 찾은 관객은 19만2991명으로 지난해보다 17% 늘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미셸 오바마는 백악관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은 한 백인 여성이 자신을 ‘원숭이’로 조롱한 발언이라고 털어놓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영부인이었지만 피부색에 대한 높고도 견고한 편견의 벽을 또다시 확인해야 했다.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폐지됐지만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여전하다. 흑인인 저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차별을 할 바에는 아예 과거처럼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 도서관, 학교 등을 분리하자고 제안하는 장편소설을 통해 현실을 맹렬하게 풍자한다. 이 소설은 지난해 심사위원단 만장일치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을 받았다. 미국 작가가 맨부커상을 받기는 48년 맨부커상 역사상 처음이다. 이 책은 화자인 흑인 남성 ‘미(Me)’의 자기소개부터 예사롭지 않다. ‘흑인 남자가 이렇게 말하면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나는 물건을 훔쳐 본 적이 없다. 세금이나 카드 대금을 내지 않은 적도 없다. 빈집을 턴 적도 없다….’ 이런 그가 대법원 재판에 회부됐다. 노예를 부리고 공공연하게 인종분리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도 할 말은 있다. 그가 살던 로스앤젤레스 인근 흑인들이 주로 몰려 살던 빈민촌인 디킨스시(가상도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자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이 흑인들을 결집시킨 사실을 떠올리며 이를 마을에 적용시킨다. 버스에 노약자, 장애인과 더불어 백인 우대석을 도입하고, 공공도서관의 이용 안내판을 ‘일요일∼화요일: 백인 전용, 수요일∼토요일: 유색 인종 전용’이라고 바꾼 것. 무명의 흑인 배우였던 80대 마을주민 호미니는 정체성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노예가 되기를 간청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주인이 된다. 한데 호미니는 고분고분하지 않다. 집 안에 들어온 송아지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하면 “가축 돌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며 단호히 거절한다. 그는 수없이 호미니를 ‘해방’시키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노예 주인 노릇은 ‘포주 짓도 쉽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라며 투덜댄다. 흑인들의 모임은 제 시간에 시작하는 법이 없고, 흑인은 제대로 매듭도 묶을 수 없다며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놓고 비꼰다. 서글픔도 묻어나온다. 괴짜 심리학자인 그의 아버지는 경찰에 몇 마디 항의를 하다 총에 맞아 숨진다. 피 흘리며 숨져 있는 아버지를 보고도 흑인의 고통을 가르치기 위해 아버지가 꾸민 연극이라고 믿으려는 ‘미’의 모습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미’의 이야기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랩 같다. 넘실대는 말의 향연에는 흑인 인권 운동의 역사와 인종 갈등으로 벌어진 사건, 미국 대중문화가 빼곡히 녹아들어 있다.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하원 구성 비율을 결정하는 인구를 산출할 때 흑인 노예를 백인 자유인의 5분의 3으로 세는 타협안이 승인된 ‘5분의 3의 타협’, 노예로 태어나 19세기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된 프레더릭 더글러스, 공공장소에서 인종분리를 시행한 짐 크로 법 등이 줄줄이 나온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이들은 자유자재로 역사와 현실을 비틀어대는 블랙 코미디에 무릎을 치고 감탄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은 각주를 일일이 확인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인종 차별의 심각성을 웃음과 눈물, 조롱으로 한바탕 고발하는 광대극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원제는 ‘The Sellout’.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7·사진)가 제주 해녀에게 영감을 받아 쓴 소설 ‘폭풍우’(서울셀렉션)가 최근 국내 출간됐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제주 우도의 해녀들에게’라는 헌사를 실었다. 여덟 살 때 잡지에서 본 제주 해녀의 사진과 기사에 사로잡혔던 르 클레지오는 2007년 처음 제주를 찾았다. 이후 수차례 제주에서 해녀들을 만나며 맨몸으로 전복과 문어 등을 잡는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르 클레지오는 2011년 명예 제주도민이 됐다. ‘폭풍우’는 우도를 배경으로 해녀 어머니와 사는 열세 살 소녀 준과 세상을 떠난 연인의 흔적을 찾아온 전직 종군기자 필립 키요를 통해 생의 의지를 그렸다. 흑인 군인인 생부에게 버림받은 준은 낚시를 하던 키요와 만나 조금씩 가까워진다. 베트남전쟁을 취재하던 중 군인들이 성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한 죄로 옥살이를 한 키요는 사랑했던 연인마저 함께 여행 온 우도의 바다에 몸을 던지자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린다. 준과 키요의 시선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우도의 바다 내음과 해녀들이 물질하는 광경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아후히히’, ‘이야’ 등 해녀들이 바다 위로 올라와 내뱉는 숨비 소리가 원시 언어처럼 들려오고, 바다 위에서 쉴 때 쓰는 색색의 테왁이 파도에 출렁인다. 목이 거북처럼 주름지고 손톱은 다 까진 늙은 해녀들은 따 온 소라와 전복을 평평한 바위 위에 널어놓는다. 우도의 바다와 해녀들이 뿜어내는 생명과 성장의 힘은 작품에 그대로 투영됐다. 준은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아이를 혼내주는 키요에게서 아버지 같은 사랑을 느끼지만, 훌쩍 떠나버린 그를 보며 비로소 엄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키요는 에너지를 한껏 머금은 준과 함께하며 차츰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본다. 우도의 풍경 속에서 상처 입은 이들이 서로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보노라면 제주에 대한 작가의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배경으로 쓴 ‘빛나’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빛나 언더 더 스카이(Bitna Under the Sky)’도 12월에 국내 독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국내외 문인들이 아시아의 수난과 상처를 공유하고 인류 평화를 기원하는 제1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이 다음 달 1∼4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18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간담회를 열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월레 소잉카(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시인 둬둬(중국), 샴스 랑게루디(이란), 사가와 아키(일본)와 소설가 현기영, 시인 이시영 안도현 신현림 등 국내외 작가 30여 명이 이번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행사의 주제는 ‘아시아의 아침’이다. 공초 오상순 시인(1894∼1963)이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에서 ‘아시아는 밤이 지배한다’고 노래한 지 한 세기 뒤에 한국 시인들이 앞장서서 새로운 아시아 정신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아시아문학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인 고은 시인은 “아시아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밀접성이 확장되고 있지만 아시아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식민지 지배를 받다 아침을 맞이한 아시아의 문학을 정면으로 만나보자는 취지로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시인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위해 활동해 온 작가들이 많이 초청됐다. 사가와 아키는 강제징용자, 위안부 피해자 등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주제로 시를 썼고, 아유 우타미(인도네시아)는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퇴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남아프리카공화국)는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투옥됐다.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클로드 무샤르(프랑스)와 통합과 조화를 노래하는 작품을 쓰는 안토니오 콜리나스(스페인)도 온다. 오랑캐 부족 이름을 필명으로 쓰며 현자로 존경받는 담딘수렌 우리앙카이(몽골), 중국 시가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둬둬도 참가한다. 작가들은 다음 달 1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한다. 2일에는 콜리나스, 브레이튼바흐, 무샤르가 강연한다. 4일에는 소잉카가 기조강연을 한 후 고은 시인과 함께 ‘해돋이가 당신의 등불을 끄게 하라’를 주제로 대담을 한다. 이어 작가들은 ‘아시아의 아침, 민주 인권 평화의 진전을 위하여’를 주제로 토론한 뒤 선언문을 발표한다. 제1회 아시아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식도 연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승옥의 ‘무진기행’, 최인호의 ‘지구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작가들이 손으로 직접 쓴 원고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은 1960, 70년대 등단한 작가들의 원고를 소개하는 ‘육필로 삶을 말하다’ 전시회를 20일부터 11월 30일까지 연다. 박완서의 ‘아이고, 하느님’, 이청준의 ‘겨울광장’, 조정래의 ‘회색의 땅’, 이문열의 ‘삶에 대하여’ 등 작가 84명의 원고를 모았다. 자료는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을 간행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보관해 둔 것이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육필 원고에는 작가의 성격과 글 쓸 때의 기분은 물론이고 지우고 다시 쓴 자국에 서린 창작의 고뇌까지, 작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전시 기간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문학 강연회가 열린다. 소설가 은희경 권지예 김주영, 시인 오세영 김화영 순으로 참여한다. 입장료는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02-379-3182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90년이라는 시간은 감사하는 마음은 더 깊게, 햇살 한 줄기에도 행복을 느끼는 촉수는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지난달 90세 생일을 맞은 시인은 18번째 시집에서 이런 순간순간을 고이 담아냈다. 시 63편에는 구도자의 자세로 걸어온 그의 삶이 투영돼 있다. 시인은 무심한 듯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을 누리는 그 자체가 축복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내 몸의 뼈의 골수까지도/햇빛 쪼이니/복 받는 일 아닌가/복 받는 거 모른다면/안 되는 일 아닌가.’(‘햇빛 쪼인다’) 산불에 가슴 졸이는 모습에서는 그 무엇이 되었든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음을 온몸으로 깨달았기에 시어는 더 절절해진 게 아닐까. ‘산불이/달리는 군대처럼 지나간 후/개미굴은 무사할까/…/산새들 꿀벌들은 무사할까/…/마지막 한 부스러기의 희망은/남아 있는지/그렇다면 된다/모든 살아 있는 것의 붉은 허파가/맥박 치면 된다’(‘문안·2) ‘젊은 시인들에게·2’에서 ‘분노와 좌절에도/발 구르며 세상을 꾸짖지 말고/허리를 구부려/그 짐을 지거라’고 말하는 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행동으로 묵묵히 실천하는 한 명 한 명에게 있음을 따뜻하고도 위엄 있게 당부하는 듯하다. 속마음을 아이처럼 천진하게 드러내는 대목에서는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삶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이런 고백도 가능케 했으리라.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내가 대답한다/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그러나 잠시 후/나의 대답을 수정한다/사랑과 재물과/오래 사는 일이라고//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시계’) 정갈하게 써 내려간 문장을 천천히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아진다. 삶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향해 내민 선물 보따리 같다. 첫 시집 ‘목숨’(1953년)을 낸 후 64년째 시를 쓰는 시인은 “가능하다면 이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내고 싶다”고 했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기에 그는 여전히 청춘이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사람에 대한 아픔을 느낀 사건을 겪었어요. 이뤄지지 못한 데서 오는 고통과 허전함이 컸다고 할까요….” 다섯 번째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문학과지성사·사진)를 출간한 이병률 시인(50)은 최근 전화 인터뷰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금 중국 시안(西安)에 머물고 있다. 감성적인 시어로 사랑받고 있는 그는 4년 만에 출간한 새 시집에서 슬픔과 고독을 켜켜이 토해냈다. ‘산 하나를 다 파내거나/산 하나를 쓰다 버리는 것/사랑이라 한다’(‘사랑의 출처’)고 하고, ‘한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은/…/지구의 뼈가 발리고 마는 것’(‘지구 서랍’)이라고 썼다. 이전 시집에서도 외로움과 아픔을 담았지만 이번에는 농도가 더 짙어졌다. “예전과 달리 교정지를 보면서 여러 번 울컥했어요. 사람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 일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일’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110여 개국을 여행한 그는 낯선 이들에게서 온기를 채운다고 했다. 시의 뼈대가 되는 문장 한두 줄을 선물처럼 선사하는 것도 여행이다. 이번 시집에도 이국의 풍경 속에 놓여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는 이제 사라지기 위해 아이슬란드 폭포에 와 있습니다/…/눈보라가 칩니다/바다는 잘 있습니다/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이별의 원심력’) “먼 곳으로 떠나면 텅 빈 마음에 어떤 무늬가 생기는 것 같아요. 작은 입자가 문장이 돼 들어온다고 할까요. 그 순간과 마주하기 위해 기다리는 거죠.”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끌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그를 여행 작가로 아는 독자도 있단다. “제가 시인인 걸 모르는 독자들을 만나면 삶에서 시가 있을 자리도 안배해야 한다고 얘기해요. 산문을 쓰는 힘도 시를 통해 키운 거니까요.” 충북 제천시의 산골 마을이 고향인 그는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자랐다. “중학생 때 고향에 전기가 들어왔어요. 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방학마다 고향에 내려가 살았어요. 꽃과 나무 옆에 앉아 있으면 시가 옮겨올 거라고 여긴 건 이런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중국에 머문 경험을 담아 다음 시집을 낼 예정이다. 중국은 어린 시절의 색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많아 갈 때마다 푹 젖어든다고 했다. “예전에 느낀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누군가의 심장에 다가가는 게 시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척박한 시대를 적셔주는 시를 다같이 마음껏 쓸 수 있는 판을 짤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현진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제9회 현진건문학상 수상자로 하창수 소설가(57·사진)를 선정했다고 11일 밝혔다. 수상작인 단편 소설 ‘철길 위의 소설가’는 기차와 철로에 대한 사색을 통해 인생을 비유하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구성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수상은 ‘제천’을 쓴 심봉순 소설가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은 11월 1일 오후 6시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살면서 본 영화가 10편도 안 된다’는 60대 소설가와 40대 영화감독. 별 공통점 없는 조합이다. 두 사람을 묶어준 건 380년 전의 역사, 병자호란이다. 지난겨울, 둘은 남한산성에서 처음 만났다. 촬영 현장에서 악수 한 번 한 게 전부였지만 이들 사이에는 묘한 ‘동지애’가 흘렀다. 다들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굴욕과 패배로 점철된 역사를 각자 글로, 영화로 표현해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 ‘남한산성’의 김훈 작가(69)와 소설을 영화화해 최근 300만 관객을 넘어선 황동혁 감독(46)을 1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와 문학 담당 기자가 함께였다.○ 영화 문외한과 소설광 김훈 작가는 영화와 담을 쌓고 살았다. 폐소공포증이 있어 영화 자체를 즐기지 않는다.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20년 전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1998년)일 정도. “캄캄해서 극장에 못 가요. 이번에 가보니 다들 팝콘은 왜 한 사발씩 끼고 앉았는지(웃음). 전 오직 책과 음악, 그림으로만 문화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구세대죠. 기껏 본 영화라곤 이승만 전 대통령 찬양 영화나 6·25 반공영화가 전부고. 우리 세대의 낙후함이랄까요.”(김) 반면 황동혁 감독은 어릴 때부터 소설에 빠져 살았다. 공지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도가니’(2011년)도 그의 작품이다. ‘도가니’ 흥행 이후 사무실에는 “영화화를 검토해 달라”는 소설들이 쌓였다. “다른 소설은 의욕이 안 생기는데 ‘남한산성’은 읽자마자 ‘아, 내가 영화를 시작한 이유가 이걸 만들기 위해서구나’ 싶었죠. 묘사해 놓은 캐릭터와 쏟아내는 말이 처절하지만 철학적이고, 또 시적이더라고요. 풍경도 아름답되 날이 서 있고…. 저한테 선물 같은 영화예요.”(황)○ 굴욕의 역사 병자호란에는 임진왜란 같은 통쾌한 승리담도, 이순신 같은 영웅도 없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심정이 괴로웠다”고 했고, 감독은 “소설과 실화의 무게를 동시에 지니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굳이 아픈 역사를 꺼낸 이유가 뭘까. “우리나라는 자존과 영광 중심으로만 역사가 쓰였어요. 치욕과 패배, 그것을 극복하는 민족의 노력은 거의 보여주지 않아요. 독자와 관객도 그런 역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돼 있고요. 제 책도 이렇게 많은 독자가 읽을 거라 생각 안 했어요. 70만 부가 넘으면서 ‘진실하게 이야기를 하면 독자도 알아주는구나’ 감사했죠.”(김) “극장에 뭔가 잊으러 가기도 하지만 배우러 가기도 하잖아요. 당시와 지금 상황이 너무나 닮아 타산지석으로 얘기해 볼 만하죠.”(황) 서로의 작품에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최명길의 갓 뒤로 청나라 기마부대가 몰려오는 장면을 꼽았다. “비극적 구도를 한눈에 보여줘요. 갓으로는 군대를 막을 수가 없는데 조선은 그 갓에 힘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 안에서 힘과 희망이 느껴지는 장면들도 좋았고. 난 그런 문장을 못 썼는데 감독은 넣었더라고. 하하.”(김) “단연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죠. 대부분의 대사도 책 구절을 거의 그대로 살렸어요.”(황)○ 서날쇠와 이시백 옆에서 “살 길과 죽는 길은 포개져 있다”며 거드는 작가에게 당대를 살았더라면 최명길과 김상헌 중 누구의 길을 갔을지 물었다. ‘정치적(?)’ 대답이 돌아왔다. “난 서날쇠의 편입니다만. 그만이 삶의 길을 현실적으로 아는 사람이에요. 나라보다 자기 자식, 논두렁이 중요한 게 현실이거든요. 생업이 애국이 되게끔 만드는 게 위정자의 역할이죠.”(김) “마음만은 수어사 이시백이 되고 싶네요. 휘둘리지 않는 게 멋있잖아요!”(황) 두 사람을 엮어준 남한산성을 함께 걸을 계획은 없는지 물었다. 훈훈한 대답을 기대했건만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인지 사뭇 냉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이, 안 가요. 책 쓰면서 하도 가서 남한산성의 개미집이 어디 있는지 다 알 정돈데.”(김) “저도 그만 갈래요. 영화 때문에 너무 많이 거닐어 당분간 좀 그만 가고 싶어요.(웃음)”(황) ●제작사 대표는 김훈의 딸 지연씨영화 ‘남한산성’ 제작사인 싸이런픽쳐스의 김지연 대표(42·사진)는 원작 소설을 쓴 김훈 작가의 딸이다. 서강대 불어불문학과를 나온 김 대표는 2001년 싸이더스에 입사해 ‘말죽거리 잔혹사’ ‘늑대의 유혹’ 등을 홍보하다 2008년 사무실을 차렸고 ‘10억’을 제작했다. 김 작가는 함께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딸에 대해 ‘쿨’ 하면서도 은근한 애정이 묻어나는 특유의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딸 얼굴, 잘 못 봐요.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고 해외에 갈 때도 인천공항에서 ‘지금 어느 나라에 간다’며 전화로 알리는 스타일이거든요.” 김 대표가 소설 ‘남한산성’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했을 때 김 작가의 첫마디는 이랬다. “너 얼마 내놓을래?” “통념에 맞게 드리겠다”는 게 김 대표의 응수였다. 딸이라 혜택을 준 게 아니냐고 묻자 김 작가는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게 ‘친인척 비리’예요.(웃음) 돈은 아직 덜 받았어요. ‘고것’이 까다로워서….(웃음) 난 영화 제작에는 일절 관여한 적이 없어요. 영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원작자와 제작자의 관계일 뿐이에요.” 김 작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영화 제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실감했다. 그는 “저렇게 고된 걸 왜 하나 싶은데 신바람 나서 하는 걸 보면 좋아서 일하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어려운 일을 하는 딸이 염려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고것이 워낙 잘 챙겨먹고 돌아다녀서 걱정은 안 해요. 부하도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부려먹으려고 해도 나 혼자밖에 없어요.”(웃음)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김 작가의 표정에서 푸근함이 전해졌다. 영락없는 아빠 미소였다.장선희 sun10@donga.com·손효림 기자}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63)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우리의 환상 아래 심연을 드러냈다”고 5일 선정 사유를 밝혔다. 영국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는 2007년 도리스 레싱 이후 10년 만이다. 일본계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에 이어 세 번째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한 이시구로는 영국 켄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대에서 문예창작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하자마자 주목받기 시작했고, 세 번째 소설 ‘남아있는 나날’이 1989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격조 있게 삶과 문명 성찰 영어로 작품을 쓰는 이시구로는 기억과 회한을 통해 인간성과 문명에 대해 깊고도 품위 있게 성찰한 작가로, 평단과 독자들의 사랑을 함께 받고 있다. 대표작인 ‘남아있는…’은 20세기 전반 영국을 배경으로 인품이 고귀한 달링턴 경을 모시는 충직한 집사 스티븐슨을 통해 충직함과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개인의 결정이 지닌 의미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앤서니 홉킨스, 에마 톰슨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1993년)로 만들었다. 유명 피아니스트를 통해 사랑, 가족, 부모, 우정의 가치를 섬세하게 조명한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장기 이식을 위해 복제된 클론들의 슬픈 운명을 그린 ‘나를 보내지 마’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쟁의 상처를 그린 ‘창백한…’과 인간의 헛된 욕망을 비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젊은 시절 싱어송라이터가 되기를 꿈꿨던 이시구로가 음악적 내공을 발휘한 ‘녹턴: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는 운명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평범한 이들을 통해 삶의 본질을 노래한다. 그의 장편소설 8권은 모두 국내 출간됐다. 1995년 대영제국 훈장(OBE), 1998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공로 훈장을 받았다.○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가” 이시구로의 수상으로 한림원이 전통적 문학 작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림원은 지난해 미국의 시인 겸 가수인 밥 딜런과 2015년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르포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파격 행보를 보여 왔다.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시구로는 비극적 진실을 깨닫지만 생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과 문명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치밀하고 정확한 문체로 품격 있게 성찰하는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시구로가 묵직한 주제 의식은 유지하면서도 순수 소설뿐만 아니라 복제 인간을 다룬 공상과학소설(‘나를…’), 도깨비와 기사가 나오는 판타지 소설(‘파묻힌 거인’) 등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림원이 노벨 문학상의 외연을 확장하려 애쓰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민음사 대표를 지내며 이시구로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이시구로는 대중에게 익숙한 공상과학, 판타지 장르를 도입하면서도 장르 문학의 기법을 따르지 않고 고급스러운 문체로 문학적인 혁신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도 “첨단 소재를 통해 고전적 주제를 드러내는 실험을 한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한 건 한림원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작가답게 이시구로의 문장은 노래 가사나 시처럼 리듬감 있고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어 긴 여운을 남긴다”고 말했다. 정통 문학의 품격을 지키면서도 독자적인 화법으로 새로움을 풀어낸 이시구로는 문학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문학을 담는 그릇은 바뀔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63)가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5일 이시구로를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있다는 우리의 환상 아래 심연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영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2007년 도리스 레싱 이후 10년만이다. 이시구로는 일본계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에 이어 세 번째로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시구로의 수상으로 한림원이 전통적 문학작가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림원은 지난해 미국의 시인 겸 가수인 밥 딜런과 2015년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르포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파격 행보를 최근 보여왔었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한 이시구로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특유의 문체로 잘 녹여 낸 작품들을 선보이며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는 작가다. 영국 켄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대에서 문예창작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하자마자 주목받기 시작했고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1989년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남아 있는…’은 고전적 품격과 깊은 주제의식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20세기 전반 영국을 배경으로 고귀한 인품을 지닌 달링톤 경을 모시는 충직한 집사 스티븐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시구로는 이 작품을 통해 숭고하고 맹목적인 충직함의 가치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질문을 던진다.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에게도 위대함의 가치가 여전히 필요한 것인지, 거대한 질서나 주어진 임무에 충성하는 것보다 자신의 삶과 주장을 우선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남아 있는…’은 시대와 삶에 대해 많은 물음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앤서니 홉킨스, 에마 톰슨이 출연하는 동명의 영화(1993년)로 만들었다. 그는 이후 유명 피아니스트가 성공을 위해 저버려야 했던 가치인 사랑, 가족, 부모, 어린 시절의 우정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99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간병사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복제되어 온 클론들의 사랑과 성, 슬픈 운명을 그린 ‘나를 보내지 마’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영국 등 유럽적 색채가 강한 작품과 함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다수 선보였다. 원폭 후 일본의 황량한 풍경을 투명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그려 전쟁의 상처를 드러낸 ‘창백한 언덕 풍경’, 전쟁을 찬양하는 그림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다 종전 후 비난받는 노(老)화가를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을 그린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가 그렇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 노력하며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본질을 음악과 함께 그려낸 ‘녹턴’은 젊은 시절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던 이시구로의 음악에 대한 내공을 확인시켜 준다. 1995년 대영제국 훈장(OBE), 1998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공로 훈장을 받았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노벨상의 계절이 왔다. 2일부터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수상자를 발표한다. 관례에 비춰 볼 때 올해 노벨 문학상은 12일경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에 따르면 응구기 와 시옹오(케냐), 무라카미 하루키(일본), 마거릿 애트우드(캐나다) 등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는 가수 밥 딜런을 선정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한 만큼 올해는 소설가에게 상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출판 관계자들은 책 판매에 도움이 되는 작가가 상을 받길 희망하고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밥 딜런의 수상이 출판 시장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책이 다 잘 팔리는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문학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작가가 수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벨 문학상은 노벨상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높은 상이다. 올해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이 서점가를 한바탕 들썩이게 만들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온몸에 피어싱과 문신을 한 깡마른 여성 천재 해커 리스베트, 예리한 관찰력과 집요함으로 정보기관보다 한발 앞서 사건을 파고들어가는 베테랑 남성 기자 미카엘. 그렇다. 밀레니엄 시리즈가 돌아왔다. 새로운 작가와 함께. 저자는 시리즈 1∼3권을 완성한 후 심장마비로 숨진 원작자 스티그 라르손(1954∼2004)의 뒤를 이어 공식 작가로 선정됐다. 라르손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기자 출신으로 ‘앨런 튜링 최후의 방정식’ 등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막대한 부담감을 이겨내고 시리즈의 명성에 걸맞은 수작을 탄생시켰다. 3권으로 끝났을지 모를 시리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 이야기는 스웨덴의 천재 컴퓨터 공학자 프란스 발데르가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미국의 유명 정보기술(IT)기업에서 일하다 갑자기 귀국한 그가 만들어낸 건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 프로그램. 신변에 위협을 느낀 프란스는 미카엘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려 하지만 미카엘이 그의 집에 도착하기 직전 살해된다. 살해 현장을 목격한 이는 프란스의 여덟 살 아들 아우구스트로, 자폐 증세가 있지만 특정 순간을 사진처럼 완벽하게 기억해 그려내는 능력을 지녔다. 미카엘이 리스베트와 협력해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파헤쳐 나가는 가운데 스웨덴 검찰과 경찰 및 국가안보기관 세포, 미국 국가안보국(NSA)까지 개입하며 각종 변수들이 터져 나온다. 퍼즐 조각이 하나둘 맞춰지며 희미하던 그림이 서서히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은 짜릿함은 책장을 맹렬하게 넘기게 만든다. 정교한 이야기가 작품을 단단하게 떠받치는 가운데 기존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놓치지 않는다. e메일, 인터넷 검색 기록은 물론 휴대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까지 디지털 기기를 통해 벌어지는 행위 하나하나가 국가와 기업, 범죄조직에 의해 감시되고 도청되는 정보화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해커는 모든 걸 훔칠 수 있고 변호사가 있으면 모든 도둑질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일갈은 무력한 법 제도를 꼬집는다. 자본에 위협받는 언론의 위태로운 현실도 가감 없이 비춘다. 여성과 어린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터프하게 응징하는 리스베트의 캐릭터는 여전하다. 여성이 예의상 짓는 미소를 남성에 대한 유혹으로 여기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나의 독립된 사건을 다루기에 처음 책을 접하더라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다. 기존 독자라면 라르손이라는 물리 교사를 카메오처럼 등장시킨 대목에서 스티그 라르손에 대한 오마주를 발견하는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리스베트와 가족을 둘러싼 새로운 사실도 밝혀지며 만만치 않은 또 다른 사건이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다. 이전 시리즈에 이어 4편도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원제는 Det Som Inte D¨odar Oss.(Millennium 4)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하루에 장례식장을 두 군데 간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2시에는 프리미어리그,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며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고 무릎을 친다. 컴퓨터를 능란하게 다루는 초등학교 2학년 손자의 손놀림에 탄복하며 인터넷 검색 요령을 배운다. 올해로 등단 64주년을 맞은 최일남 소설가(85)는 일곱 개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국화 밑에서’(문학과지성사·사진)를 통해 노년의 삶을 담담하게 응시했다. 최 소설가를 25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기자 출신인 그는 까마득한 후배를 시종일관 깍듯하게 대했다. “여러 세상을 겪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은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이 책에는 내 경험을 많이 녹였어요.” 노년이 되면 너그러워지고 사리 분별도 밝아진다고 하지만 도리어 변덕을 부리기 일쑤라고 말한다(‘밤에 줍는 이야기꽃’). 장례식장에서 시대와 나라별 장례 풍습을 떠올리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궁금해하고(‘국화 밑에서’),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의 불통(不通)은 예전에 더 심했다고 회상한다(‘아침바람 찬바람에’).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현역 최고령 소설가’라고들 하는데 알려지지 않았을 뿐 더 나이 많은 소설가가 있을 거예요. 고마운 말이긴 하지만 나이로 사람을 규정짓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2015년 ‘최일남 소설어 사전’(조율)이 나왔을 정도로 우리말을 맛깔나게 구사하는 솜씨는 여전하다. ‘호도깝스럽다’(조급하고 경망스럽다), ‘헤실바실’(흐지부지되는 모양) 등 자주 접하지 못하는 단어가 살아서 펄떡인다. “단어 하나를 찾으려고 반나절 넘게 고민한 적도 많아요. 안방, 화장실, 거실 등 집안 곳곳에 종이와 펜을 두고 문장이나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요.” 잠에서 깨어 뒤척이다가도 머리를 스치는 게 있으면 불도 켜지 않은 채 적는단다. 아침에 일어나 들여다보면 해독이 불가능할 때가 적지 않지만. 엄격하고 정제된 글은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 순간이 아니면 연장되지 않는 게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읽고 쓰는 기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지지만 계속해야죠.”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한 단계 높아졌다. “내 첫 작품이 ‘쑥 이야기’(1953년)라고 하지만 등단 전, 한 금융조합에서 주최한 저축 장려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한 적이 있어요. 본명을 사용하기 쑥스러워 ‘최인수’라고 썼는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김동리 선생이 나중에 ‘최인수가 최일남 맞지?’라며 귀신같이 아셔서 깜짝 놀랐어요.”(웃음) 그는 구상 중인 소설이 있지만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말을 아꼈다. “소설 쓰는 건 어렵지만 이걸 붙들고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돈으로 치는 사기보다 글로 치는 사기가 더 무서운 건데, 그건 안 했으니 그런대로 잘 살았어요.” 인촌상, 이상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쓴 문단의 거목은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췄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가 누구보다도 커 보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수상자 바이엇 인터뷰“글을 쓸 때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순간조차도요.” 제7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81)은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글쓰기가 숙명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글쓰기는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생의 강렬함을 선사한다”고 덧붙였다. ‘소유’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타임지가 선정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요한 작가 50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대영제국 기사 작위 훈장(DBE)도 받았다. 그는 박경리문학상 수상 소식에 깜짝 놀라고 흥분했다고 말했다. “가깝게 지내는 한국인 친구가 있어서 한국에 관심이 많아요. 영광스러운 상을 통해 한국과 또 다른 인연을 맺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해 네 아이를 낳았다. “다양한 경험을 할 시간은커녕 하루하루 버텨내기 바빴죠. 너무 여성적인 소설은 쓰고 싶지 않았기에 제한된 경험으로 인해 작품의 폭이 좁아지면 어쩌나 고민한 것도 사실이에요.” 이 때문에 틈틈이 시간을 내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에서 문학을 전공한 데다 방대한 책을 읽은 것이 문학적인 향기가 강한 작품을 쓰게 만든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는 ‘미들마치’, ‘다니엘 데론다’ 등을 쓴 영국의 유명 여성 소설가 조지 엘리엇(1819∼1880)처럼 폭넓게 사고하고 싶다고 했다. 여성 작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본명(메리 앤 에번스) 대신 필명을 사용한 엘리엇은 ‘남성처럼 생각하는 여자 셰익스피어’로 불리며 지적인 작품을 남겼다. ‘소유’를 두 겹의 이야기 구조로 써 내려간 건 순간적인 영감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 중 어떤 걸 써야 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고 있었어요. 불현듯 두 개가 공존하도록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죠!” 자신의 작품이 ‘매력적이지만 어렵다’는 평가를 인정하며 “삶 자체가 어려운 거니까요”라고 답했다. 이어 자신은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겪으며 삶 자체가 흔들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는 문학이 위기라고들 하지만 인생과 세상을 조명함으로써 삶에 대해 사고하게 만드는 힘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TV와 영화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지만 이 역시 문학의 주요한 소재로 활용될 수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극적이고 탄탄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문학 작품이 계속 탄생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짧은 생각이나 작은 경험이라도 항상 메모하며 글쓰기를 습관처럼 몸에 배게 만든 덕분이다. 최근 건강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니지만 보다 정교한 내용을 더 쉽게 표현하는 방법을 매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와 글쓰기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요즘 1918∼1945년에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를 배경으로 초현실주의자와 정신분석가가 등장하는 작품을 구상하고 있어요. 11세기에 묵언 수행하던 승려가 현대 영국에 오게 된 이야기도 4분의 3가량 쓴 상태랍니다.” 그는 수상을 계기로 박경리 선생의 작품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박경리 선생은 매우 흥미롭고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글을 남기셨더군요. 덕분에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됐어요. 제 작품을 읽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꼭 드리고 싶어요.”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바이엇의 작품 세계묵직한 사유로 문학적 내공 탄탄… ‘소유’ ‘바벨탑’ 등 국내 3권 번역 출간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은 시인, 문학평론가, 전기 작가로 활동하다 1980년대 들어 소설에만 전념했다. 대표작인 소설 ‘소유’(열린책들), ‘천사와 벌레’(미래사)를 비롯해 ‘바벨탑’(현대문학)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소유’는 20세기 문학연구자들이 19세기 남녀 시인의 문학과 사생활을 추적하는 작품이다. 두 개의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적 탐구와 추리 소설처럼 의문을 풀어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남녀 관계와 인생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사유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작가의 탄탄한 문학적 내공을 확인할 수 있다. ‘천사’편과 ‘벌레’편의 연작으로 된 ‘천사와 벌레’도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벌레’편은 아마존에서 10년간 동식물을 채집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젊은이의 이야기로, 원시 대자연 속의 삶과 문명 세계를 대비시킨다. 문명의 삶이 야생의 삶보다 우월하다는 데 회의를 제기하며 생명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소유’와 ‘천사와 벌레’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바벨탑’은 ‘정원의 처녀’, ‘정물’, ‘휘파람 부는 여자’와 함께 요크셔 가족에 대한 4부작에 속한다.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문학 공부를 통해 쌓은 풍부한 지식과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작품이 많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바이엇 문학’ 심사평시대의 틀 안에서 개인의 삶 진지하게 성찰제7회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올해 1월부터 수차례 회의를 거쳐 5명의 최종 후보자를 선발했다. 현재도 활발하게 글을 쓰는 세계적인 작가 가운데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이들을 꼽았다. 최종 후보자는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영국), 코맥 매카시(미국), 가즈오 이시구로(일본계 영국인), 페터 한트케(오스트리아), 얀 마텔(캐나다)이었다. 후보로 선정된 작가들은 리얼리즘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도 탐험, 여행, 항해 등 조금은 인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서사적 접근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풀어냈다. 오늘날 같은 정보와 문자의 과잉 시대에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 듯하다. 수상자로 선정된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은 소설 11권, 단편집 5권과 문학 비평서들을 통해 시대와 사회의 틀 안에서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복잡다단한 요소들을 성찰해 왔다. 이 가운데 소설 ‘소유’와 ‘천사와 벌레’, ‘바벨탑’이 우리말로 번역됐다. 작가의 작품에서 개인의 삶은 다른 사람과의 인간관계, 사회 세력과 관습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삶은 문화에 의해 정의된다. 인류학에서 문화는 사회 전반에 걸친 삶의 양식을 말하지만 작가는 인문교양을 내면화한 사람을 통해 문화를 그려낸다. 맨부커상 수상작인 ‘소유’의 주인공들을 문학 연구자로 설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연구하는 19세기 문인들의 작품과 삶은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작가는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인간의 역사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영국의 북부 요크셔, 프랑스의 브르타뉴 등 태초를 연상하게 하는 지형들은 주인공들의 심리와 행동에 은연중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서술했다. 대자연의 힘은 문화와 문명의 변용을 겪지 않는 동물과 식물에서 더 잘 나타난다. ‘천사와 벌레’에서 두 연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곤충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다. 이 소설은 연인들이 심층적인 연구를 위해 아마존의 원시림 지대로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인간은 지질이나 지형 또는 오래된 생물들의 거대한 힘에 조종되는 대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작품 속 인간들은 이런 힘에 영향은 받되 단순히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 나간다. 중요한 것은 무엇도 범할 수 없는 개인의 개체성이다. 개체성은 복합적인 경험과 요인들을 하나로 융합한 결정체다. ‘소유’에서 남녀의 사랑이 인격적 융합이 아니라 인간의 개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건 인간 현실을 구성하는 넓고 큰 요인들을 담아내고자 한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인간을 보다 진실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김우창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장 ○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 명단(가나다순)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 김승옥 고려대 명예교수, 이남호 고려대 교수, 이세기 소설가, 최현무 서강대 교수}

영국 작가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81·사진)이 토지문화재단과 박경리문학상위원회, 강원도, 원주시,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제7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토지문화재단과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는 27일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은 생생한 인물 묘사와 삶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바탕으로 개인과 시대를 아우르며 미학적으로 높은 짜임새를 지닌 작품을 써왔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심사위원회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역사, 관습, 자연 등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세밀히 분석하면서도 개개인의 개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새롭고 깊이 있는 시각으로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고 평했다. 박경리문학상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됐고 이듬해 외국 작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해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이 됐다. 1회 소설가 최인훈을 시작으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러시아), 메릴린 로빈슨(미국), 베른하르트 슐링크(독일), 아모스 오즈(이스라엘), 응구기 와 시옹오(케냐)가 차례로 수상했다. 상금은 1억 원. 올해 박경리문학상은 금호아시아나, 마로니에북스, 연세대, ㈜미림씨스콘, ㈜스펙스가 공동 후원했다.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시, 패랭이꽃그림책버스는 공동 협찬했다. 시상식은 원주박경리문학제 기간인 다음 달 28일 오후 4시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삶이 성숙하려면 안으로 여물 시간이 필요하기에 영혼이 맑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정휴 스님(73)은 최근 출간한 ‘백담사 무문관 일기’(우리출판사·사진)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불교신문 사장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종회의원 등을 지낸 스님은 7년 전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백담사 무문관 독방에서 수행에 들어갔다. 치열한 수행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이 책에서 쉬운 언어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정휴 스님은 2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마음과 몸에 익힌 나쁜 습관과 타성을 털어내려 노력했다”며 “정신은 꾸준한 수행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고 거듭난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71년 한 신문사 신춘문예에 시조로 등단한 문인이기도 한 스님은 정제된 언어로 삶을 성찰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자기 응시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탐구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인생이 녹슬고, 과거의 경력에 집착해 권위를 앞세우면 사람들이 외면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내적으로 눈을 뜨려면 집착에서 벗어나 내려놓고 텅 비워내야 한다”고 말했다. 생을 마감할 때 영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걸 기억한다면 더 가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집착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책은 불교 고승뿐 아니라 가톨릭 성자의 예도 들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 옷을 벗고 알몸으로 땅바닥에 누운 뒤 “오래지 않아 내 육신은 먼지와 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의 정신은 육신을 헌 옷처럼 생각해 죽는 것을 헌 옷 한 벌을 벗는 것이라고 여기는 불교 정신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님은 “겨우살이 준비를 위해 김장을 하듯이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덮쳐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마음을 비우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말을 배우는 데 3년이 걸렸는데 경청을 배우는 데 60년이 걸렸다”고 말한 일화를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생사를 초월해 삶을 완성해 나간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노라면 얽매임 없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소쩍새가 울고 가을이면 단풍이 뚝뚝 떨어지는 산사의 정취도 함께 맛볼 수 있다. 수행자의 정신과 생활을 한층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숫자는 진실을 말하고 빅데이터는 더 나은 현실을 만들까. 하버드대 수학박사로 수학과 교수를 지내다 헤지펀드 디이 쇼에서 퀀트(계량분석가)로 일한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재닛 나바로는 네 살짜리 아이를 키우며 대학에 다니는 싱글맘이다. 회사는 빅데이터를 분석해 손님이 많은 시간대에 직원을 더 배치했고, 업무 시간을 하루 혹은 이틀 전에 통보받은 직원들은 근무 일정이 들쭉날쭉해졌다. 규칙적으로 보육 시설을 이용하기 어려워진 재닛은 결국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수학, 빅데이터, 정보기술(IT)의 결합으로 만든 알고리즘이 인간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현장에서 경험하며 수학과 금융이 결합된 파생상품의 가공할 파괴력을 목도한 저자는 빅데이터가 법, 교육, 노동, 보험 등 각 분야에 침투해 차별을 공고히 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현실을 폭로한다. 수학을 대량살상무기에 빗댄 것도 그 때문이다. 2009, 2010년 워싱턴 교육청은 학생 25∼30명의 시험 성적만으로 교사를 평가한 후 206명을 해고했다. 기준은 한 컨설팅 업체가 만든 평가 모형으로, 가정환경의 변화와 학습 장애 등 학업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는 배제됐다. 학생과 학부모가 유능하다고 인정했던 새러 와이사키는 교단을 떠나야 했고, 이후 사립학교에 임용됐다. 가난한 지역의 공립학교는 우수한 교사를 잃은 것이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모형은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뢰자와 수학자, 컴퓨터 과학자의 의도가 반영된다. 대학 평가를 도입해 영향력을 키운 시사 잡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는 하버드대, 예일대처럼 등록금이 비싼 명문대에 불리한 교육비 항목은 평가에 넣지 않았다. 미국 일부 주에서 양형에 영향을 미치는 재범위험성 모형에는 친구와 친척에게 전과가 있는지 묻는 항목이 있다. 빈곤 지역의 흑인은 중산층에 비해 ‘그렇다’고 답할 가능성이 높아 죄를 지을 경우 무거운 형을 받을 확률이 커진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빅데이터 시대에 드리운 어둠에 대한 우려가 과장이 아님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진실을 찾는 대신 스스로 진실을 구현하는’ 인간의 오만을 막는 것 역시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깨닫게 된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