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6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 병원에 마련된 마광수 전 교수의 빈소에는 고인의 동창과 제자,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올해 1월 ‘마광수 시선’을 출간한 페이퍼로드 출판사의 최용범 대표는 “고인은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소설과 시를 더 쓰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고인을 구속하고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한 건 창작 의욕을 말살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회적 타살이다”고 비판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이 책에 넣을 시를 선별할 때 “외설 시비에 걸릴 수 있는 작품은 모두 빼자”며 자기 검열을 심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즐거운 사라’는 작가 인생의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운명의 시계가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면 그의 삶은 다른 날개를 달 수 있었을까? 새삼 이 작품을 둘러싼 당시 분위기와 재판 과정에 관심이 쏠린다.○ 주홍글씨가 된 ‘즐거운 사라’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작품이 도착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문학의 예술적 한계를 벗어났다”며 마 전 교수를 ‘외설 작가’로 최종 판정했다. 법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 전 교수의 편을 들지 않았다. 앞서 1, 2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91년 7월 여대생 사라의 문란한 성생활을 다룬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출간됐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같은 해 9월 이 작품에 대해 “사라가 생면부지의 남자와 갖는 즉흥적 동침, 여자친구와 벌이는 동성애, 적나라하게 그려진 자위행위, 스승과 벌이는 부도덕한 성행위 등을 묘사한 퇴폐적 성애소설”이라며 제재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을 처음 냈던 서울문화사는 즉각 출판을 중단하고 서점에 풀린 책을 거둬들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2년 8월 ‘즐거운 사라’는 마 전 교수의 문단 동료인 장석주 시인(63)이 대표로 있던 청하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됐다. 간행물윤리위는 같은 해 9월 또다시 제재 결정을 내리고 검찰에 관련 내용을 통보했다.○ 운명의 시계, 세상의 시계 이 사건은 이른바 ‘대통령 하명(下命)’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확인되지 않는다. 검찰과 변호인, 감정인 등 당시 재판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즐거운 사라’를 둘러싼 사회적 관심과 논란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서울지검 3차장은 훗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특별수사통 검사들의 대부(代父) 심재륜 전 고검장(73)이었다. 그는 2012년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즐거운 사라’에 대한 사법처리는 오롯이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적었다. 마 전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현승종 당시 국무총리가 자신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심 전 고검장은 ‘즐거운 사라’ 첫 페이지를 읽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인륜적, 반도덕적 소설”이라며 수사를 지시했는데, 검사들이 모두 손을 저었다. 결국 불교와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도인’ 소리까지 듣던 김진태 특수2부 검사(65·전 검찰총장)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처음에 수사 맡기를 주저하던 김 검사는 하루 만에 마 전 교수의 저서는 물론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외설 논란에 휘말린 외국 서적까지 탐독한 뒤 “제가 하겠다”며 수사를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0월 29일 마 전 교수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더니 마 전 교수에 이어 장 시인까지 구속했다. 김 검사는 당시 법정에서 “카타르시스의 그리스어 어원을 아느냐” “카타르시스는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정화로 얻어지는 것”이라며 마 전 교수와 논박했다. 김 전 총장은 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은퇴한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고 했다. 마 전 교수의 변론은 검사 출신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83)가 맡았다. 항소심에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낙마한 안경환 전 서울대 법대 교수(69)가 외설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감정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안 전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헌법이 보호하는 문학작품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또 다른 감정인인 민용태 전 고려대 교수(74)와 소설가 하일지 씨(62)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하지 않다”며 마 전 교수를 옹호했다. ○ 25년 뒤 오늘… 문단과 출판계는 비통해하며 자성하는 분위기다. 고인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을 때 침묵한 것을 반성한다는 문인이 많다고 한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한 시인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창작품의 표현을 둘러싼 날선 공격과 여론을 앞세운 재판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배우 김수미 씨가 빈소에 술에 취한 채 찾아와 “마광수가 내 친구인데 너무 슬프다. 나도 죽어버리겠다”며 통곡하기도 했지만 지인이 아니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고인의 제자인 나희덕 시인은 “‘야하다’는 것은 단순히 관능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갖게 된 허위의식과 과잉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반대하는 원초적 생명력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가 떠난 이달, 새 소설집 ‘추억마저 지우랴’가 출간된다. 처음 발표하는 단편 21편이 수록됐다. 표지에는 고인이 그린 유화를 싣기로 했다. 어문학사 출판사는 고인이 중편, 장편 소설도 차례로 내자고 제안했으며 중편은 완성됐지만 아직 받지 못했다고 했다. 고인은 머리말을 대신해 ‘그래도 내게는 소중했던’이라는 제목의 서시(序詩)를 썼다. ‘시들하게 나누었던 우리의 키스/어설프게 어기적거리기만 했던 우리의 춤/시큰둥하게 주고받던 우리의 섹스//기쁘지도 않으면서 마주했던 우리의 만남/울지도 않으면서 헤어졌던 우리의 이별/죽지도 못하면서 시도했던 우리의 정사(情死)….’손효림 aryssong@donga.com·권기범·김윤수 기자}

소설가인 나는 얼굴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사회복지사 김정인을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사연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탄광촌에서 태어난 하얀 피부의 소녀 서희연은 집과 길은 물론이고 강물마저 시커먼 그곳을 떠나 새로운 미래를 그리지만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며 삶이 산산조각난다.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거미집 짓기’(마음서재)는 두 개의 이야기가 2012년, 1963년이라는 다른 시간대를 배경으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이야기는 어느 순간 한 지점에서 겹쳐지며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탄광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복지관 내부 등은 생동감 있게 그렸다. 단문으로 속도감 있게 써 내려간 글은 시선을 붙잡는다. 작가는 중편소설 ‘미스터리 존재 방식’으로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재민 씨(41·사진). 대기업에서 9년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한 그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2014년 전업작가가 됐다. ‘거미집…’은 그가 내놓은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정 작가는 사실감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탄광촌, 복지관 등을 직접 가보고 관련 자료들도 꼼꼼히 찾아봤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앞서 나온 내용을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작가는 촘촘하게 이야기 구조를 짠 후 곳곳에 실마리가 될 만한 장치를 숨겨 놓았다. 이를 되짚어 보는 건 작품이 선사하는 또 다른 매력이다. 정 작가는 “엔지니어로 일하며 프로그래밍 작업을 한 경험이 전체적인 틀을 구상하며 소설의 구조를 짜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거미집…’은 추리소설인 동시에 기구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틀도 씌우지 않겠다는 의미로 ‘작가의 말’을 싣지 않았다.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 사이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다’라는 유명 소설가 스티븐 킹의 말을 첫 장에 소개한 것은 추리를 해 나가는 데 일종의 단서가 될 수 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소설가이자 시인, 비평가인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66)가 5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 51분 마 전 교수가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숨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은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 살며 왕래하던 누나가 오후 1시 35분경 발견하고 신고했다”고 밝혔다. 고인의 방 책상에는 A4 용지 한 장의 자필 유언장이 놓여 있었다. 지난해 9월 3일 작성된 것으로, 자신의 유산을 가족에게 남긴다는 내용이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이날 고인의 누나는 “‘그동안 썼던 글들이 부질없다. 외롭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울먹였다. 고인의 고교 동창은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며 “5일 오전 통화한 뒤 낮 12시 반경 ‘만나러 와줄 수 있냐’고 다시 전화해 찾아가던 중이었다. 황망하다”고 했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 마 전 교수는 한때 최고의 윤동주 연구자이자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천재 교수’로 불렸지만 시대와의 혹독한 불화를 겪었다. 연세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197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윤동주 시인을 연구한 문학이론서도 주목받았다. 28세에 홍익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해 1984년 모교인 연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단과 학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자유롭고 파격적으로 표현한 책을 잇달아 출간하면서 외설적인 작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장편소설 ‘광마일기’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논란도 함께 불러일으켰다.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1991년)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1992년 이 작품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설이라는 이유로 강의 중에 제자들 앞에서 긴급 체포됐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학교에서도 해임됐다. 1998년 사면을 받아 복직했지만 2000년 재임용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자 휴직계를 냈다. 2003년 다시 복직했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한 고인은 우울증 증세로 약물 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싫다. ‘즐거운 사라’를 쓴 것을 후회한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고인은 문학가로서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철학적 사유를 담은 소설 ‘미친 말의 수기’(2011년)와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젊음을 그린 소설 ‘청춘’(2013년)을 출간했다. 그의 작품은 자주 논란에 휩싸였지만 자유로운 파격으로 가득했던 그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매 학기 첫 강의마다 다양한 생각과 여러 경험을 해 보라는 의미에서 학생들에게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고 당부했다. 연세대 교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변형한 것.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날아오르지 못한 채 자신의 시집 제목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처럼 떠났다. 1985년 연극학과 교수와 결혼했지만 1990년 이혼했고 자녀는 없다. 유족으로는 누나가 있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발인은 7일 오전 11시 반. 02-797-4444손효림 aryssong@donga.com·김예윤 기자}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5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1회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4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가 4명씩 참여해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강의 약속 지키려 靑 오찬요청 거절… “조용히 나의 길 걸었을 뿐”▼[교육]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가 잠시 공연, 도서 윤리위원을 맡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엔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가 집권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였다. ‘대통령과 윤리위원들 오찬이 있으니 일주일 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그 시간에 다른 대학에 강의 일정이 있던 김 교수는 “학생들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못 간다”고 했다. 오찬 거절 뒤 윤리위원에서 해임됐다는 전화가 왔다. “잘됐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헌신한 김 교수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중앙중고교에서 연세대로 옮기면서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교수다운 교수로 평생을 살자’고 다짐했다. 연세대에서 보직을 맡아 달라는 총장의 요청에도 다른 교수를 그 자리에 추천하면서 자신은 사양했다. “중앙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을 5, 6년 동안 가까이 뵈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 중요한 게 전체를 위해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것과 편 가르기를 경계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아무나 잘 안 되는데 왜 인촌 선생은 됐느냐, 애국심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그렇고요.” 김 교수가 중앙중고교와 대학에서 길러낸 후학들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 유수 대학에서 학자로 성장했다. 중앙중 시절 제자들은 여든이 넘은 이들이 적지 않다. 제자들의 귀가 먼저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사제간의 정이 지금도 돈독하다. 책에 ‘○○군에게’라고 써서 제자에게 선물하면 여전히 어린애처럼 좋아한다는 게 노교수의 말이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김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사회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사회 교육’을 지속하고 있다. 근간 ‘백년을 살아보니’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뿐 아니라 올해, 내년, 그리고 한국 나이로 백 살이 되는 후년에도 각각 한 권씩 신간을 출간할 예정이다. “제자들이 70대 중반쯤 되니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 나이 때가 삶에서 제일 좋은 성숙기였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수상 소감을 묻자 김 교수는 “조용히 나의 길을 걸었을 뿐 별다른 업적이 없는데, 왜 나에게 상이 돌아왔는지…”라고 말했다. 이내 그는 “6·25전쟁, 4·19, 민주화… 내가 살아온 100년이 우리 민족에게도 참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사회에 여러 책임을 지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고 인촌 선생이 위로해주시는 것 아닌가 싶다”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공적 1947∼1954년 서울 중앙중고교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재직했고, 이후 1985년까지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철학을 통해 한국 교육과 문화 발전에 헌신했다. ‘헤겔과 그의 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등 저술 90여 권을 냈다. 타계한 안병욱 김태길 교수와 함께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불렸고 6·25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과 젊은이들의 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다. 중앙중고교 시절 설립자인 인촌 선생의 애민정신에 감명 받아 인촌의 교육 헌신을 현장에서 실천했다. 대학에서도 직책을 사양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에 전념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앉아 있으면 학생이 되고, 서 있으면 선생님이 된다’는 신념으로 대학 강단을 떠난 뒤에도 사회의 강단에서 왕성한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대표’ 대관령음악제 산파… “내년엔 ‘인천뮤직’ 판 키울것”▼[언론·문화]강효 美 줄리아드음악원-예일대 음대 교수“최고 수준의 예술축제가 있는 나라는 매력과 힘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참여하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강효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및 예일대 음대 교수(73)의 오랜 꿈은 2004년 강원도 평창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열매를 맺었다. 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만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약 30년간 애스펀음악제에 교수로 참여하며 폐광촌 애스펀(미국 콜로라도주)이 세계적 음악도시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예술총감독을 맡아 7년간 활동한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애스펀처럼 세계 수준의 음악가 공연을 소개하고 젊은 유망주들에게 레슨 기회를 주는 ‘국가대표 음악제’로 성장했다. 음악가의 꿈과 교육자로서의 소명이 마침내 앙상블을 이룬 것이다. 강 교수는 인촌상을 수상하게 된 소감에 대해 “문화와 인재 양성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촌 선생의 이름을 딴 큰 상을 받게 돼 무척 영광”이라며 “음악 활동을 하면서 같이 일하고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서울대 음대와 줄리아드음악대학원을 나온 강 교수는 1994년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젊은 연주자로 구성된 현악 실내악단인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국내에 실내악 붐을 일으켰다. 세종솔로이스츠는 창단 이후 23년간 세계 120개 도시에서 500차례 이상 공연을 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초대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제자들의 성장 단계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강조하는 그는 음악 영재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내 ‘천재들의 스승’으로 불린다.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씩 뉴욕 줄리아드음악원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예일대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청년들을 위해 탄탄한 기초와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마음가짐, 연주실력, 지식 등이 얼마나 준비됐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성장 시기가 다르다”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전에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것만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해지면 하는 일이 재밌어집니다. 결과도 좋아지죠. 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요.” 강 교수는 올해 처음 열린 ‘인천 뮤직 힉 엣 눙크(hic et nunc·‘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뜻의 라틴어)!’의 예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음악계의 흐름을 소개하는 이 행사를 내년에 더 키워볼 계획”이라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공적40여 년간 바이올린 연주자, 교육자, 예술감독의 길을 걸었다. 길 샤함, 김지연, 장영주 등 음악영재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내 ‘바이올린계의 스승’으로 불린다. 1985년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 음악 명문대인 줄리아드음악원 정교수가 됐고 2008년 예일대 음악대 정교수로 임용돼 1000여 명의 음악인을 길러냈다. 7년간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총감독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대표 음악제로 키웠다. 1994년 현악 실내악단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저변을 넓혔다. 미국 CNN은 세종솔로이스츠를 ‘세계 최고의 앙상블’ 중 하나로 평가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세종솔로이스츠 공연을 보고 감탄해 세 차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2003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미문학비평-사전학 큰 족적… “우리말에 깊은 관심 갖길”▼[인문·사회]이상섭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 형제들과 우리말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1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만난 이상섭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80)는 우리말 사전 편찬에 큰 획을 긋게 만든 동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교수의 아버지는 평양요한학교 교장, 연세대 신학과 교수를 지낸 이환신 목사(1902∼1984)로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수시로 우리말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이 교수는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의 말을 듣거나 가게 간판, 현수막, 글 등을 볼 때 유심히 살피는 게 버릇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이 교수는 수상 소감으로 “인촌 선생은 먹고살기도 힘겨웠던 이 땅에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씨앗을 뿌렸던 선각자였다”며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이처럼 큰 상을 과연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몇 번이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영미문학비평과 사전학, 언어학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하며 문학비평용어를 우리말 의미를 잘 살려 엮은 ‘문학비평용어사전’을 편찬했다. 우리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실제 사례를 소개한 첫 사전인 ‘연세한국어사전’을 발간해 우리말 활용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학창 시절 영한사전 대신 영영사전을 보며 공부했어요. 옥스퍼드 사전과 달리 우리말 사전은 단어의 용례가 없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제대로 된 우리말 사전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는 연세한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15년간 영국 학자, 출판인, 서점 관계자 등과 꾸준히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다. 퇴직 후에는 10년간 매달린 끝에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을 완성했다. 기존 문어체 번역과 달리 네 글자씩 우리말 운율을 맞추는 4·4조를 창의적으로 자연스럽게 살려 옮긴 것. 출판계에서는 한국어판 셰익스피어 전집이 일본어판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어 문화의 정수를 맛보게 한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한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이나 낭송을 위해 작품을 썼어요. 내용 못지않게 리듬이 중요하죠. 문어체가 아니라 운율이 있는 글로 번역해야 원서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평생 연구와 글쓰기에 매진하며 학자로서 외길을 꼿꼿하게 걸어온 이 교수는 “우리말을 충실하게 잘 구사하다 보면 외국어를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우리말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적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머리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며 자기만의 색깔이 또렷한 비평을 많이 남겼다. ‘언어와 상상’, ‘역사에 대한 불만과 문학’ 등 저서를 통해 언어 활용에 대해 고찰했다. 외국어 문학비평 용어를 우리말 특성에 맞게 정리한 결과를 엮어 ‘문학비평 용어사전’으로 편찬했다. 영문학자이면서도 우리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리말 사용의 실제 사례를 처음 넣은 ‘연세한국어사전’을 편찬했다. 국내 최초로 말뭉치 수집과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을 시작해 사전학과 언어학 발전에 기여했다. 정년퇴임 후 셰익스피어 전집을 우리말 운율에 맞춰 옮긴 것은 독창적이면서도 탁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문학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암세포 표적치료 획기적 성과… “항암제 부작용 크게 줄어들것”▼[과학·기술]김종승 고려대 화학과 교수“개인적으로 크나큰 영광이다. 연구팀 모두가 지난 10여 년간 한 분야만 연구한 결과를 인정해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암과 싸우며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공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겠다.” 인촌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자인 김종승 고려대 화학과 교수(54)는 암 세포에만 약물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그 과정을 직접 모니터링할 수 있는 ‘약물 전달 복합체’ 연구로 세계 화학계에서 주목하는 연구자다. 그의 오랜 연구가 집약된 결과는 세계적 화학저널인 미국화학회지(JACS) 8월호에 표지논문으로 게재됐다. 암 세포를 치료할 물질을 담을 수 있는 약물 전달 복합체를 유기화학합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 교수는 “암 세포에만 항암제를 실어 나를 배를 만든 것으로, 모든 항암제에 적용 가능한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항암제 치료는 필수다. 그러나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역질이 나는 등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 부작용이 현격히 적은 표적치료제도 있지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암 종류는 적다. 김 교수의 연구는 박사 과정 시절인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각종 가스나 병원균 등을 화학적으로 찾아내는 ‘화학센서’를 연구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 이런 탐색 기술을 의학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예 암 세포를 추적해 약물을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암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테라그노시스(Theragnosis)’ 개념을 적용한 연구를 국내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다. 테라그노시스는 ‘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is)’의 합성어다. 암 세포를 추적하고 약물을 전달하는 표적치료 물질에 대한 연구는 2012년부터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화학회지에 표지논문과 주목할 논문으로 관련 기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2012년 당시에는 암 세포를 추적해 약물을 전달할 수 있는 물질의 가능성에 대해 발표했지만 5년이 지난 올해에는 그 약물 전달 물질을 유기화학합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한 것이다. 연구는 곧 실용화 단계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 교수는 “5년 안에 임상시험을 종료하고, 10년 후에는 상용화까지 끝마쳐 병원에서 환자 치료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공적공주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화학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테크대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건양대와 단국대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임 중이다. 2009년부터 정부의 연구개발사업단인 ‘발광센서 재료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저널에 논문 300여 편을 게재하고, 국내외 특허 40여 개를 출원하며 관련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이달의 과학기술자상’과 ‘지식창조 대상’을 2013년 3월과 11월에 잇달아 받았다. 2015년엔 김 교수의 연구 성과가 미래부 선정 ‘우수연구 100선’의 최우수 성과에 뽑혔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자 대한화학회 부회장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 제31회 인촌상 심사위원(가나다순)▽교육 △위원장 정진곤 전 민족사관고등학교장 △위원 나승일 서울대 교수, 신현석 고려대 교수, 조영달 서울대 교수▽언론·문화 △위원장 윤영철 연세대 교수 △위원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우찬제 서강대 교수,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인문·사회 △위원장 박찬욱 서울대 부총장 △위원 이재열 서울대 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주경철 서울대 교수▽과학·기술 △위원장 국양 서울대 교수 △위원 김기문 포스텍 교수, 유명희 KIST 책임연구원,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 사장}

“‘와이(Why)?’ 책 주인공 이름이 뭐죠?” “엄지, 꼼지요!” 전북 완주군 구이면 대덕초등학교를 지난달 30일 방문한 이동도서관 ‘책 읽는 버스’에서 ‘와이?’ 책 시리즈의 그림 작가 이영호 씨(47)가 질문을 하자 학생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엄지는 책을 읽고 ‘엄지 척’ 하는 훌륭한 어린이가 되라는 의미에서, 꼼지는 큰 꿈을 펼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어린이에게 인기가 뜨거운 와이 책을 14년간 그린 이 작가의 설명에 학생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들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진지한 표정으로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 수업은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문화체육관광부와 KB국민은행의 후원으로 마련했다. 이 작가가 책 만드는 순서를 설명한 후 그림 그리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자 질문이 터져 나왔다. “책 한 권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선생님 손목에 하신 건 뭐예요?” 이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책을 만드는 데는 8개월이 걸린다. 편집부에서 주제를 정하면 이야기 작가가 글을 쓴다. 그림 작가가 그리는 작업에는 3, 4개월이 필요하다. 편집부가 말 풍선을 채우면 관련 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감수한 후 인쇄에 들어간다. 이 작가는 “땀으로 손목이 끈적끈적해지면 선을 한 번에 매끄럽게 그리기 어려워 손목 보호대를 찬다”고 말했다. 이후 초록빛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캐릭터 그리기가 진행됐다. 이 작가가 화이트보드에 엄지, 꼼지, 삼촌을 슥슥 그렸다. 그런 다음 눈썹과 입 모양만 바꿨을 뿐인데 꼼지가 화난 표정이 되고, 엄지는 우는 모습으로 변신했다. 선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삼촌은 악당이 됐다. 펜이 움직일 때마다 “멋지다!” “대박이다!” 하는 감탄이 울려 퍼졌다. 수업이 끝나자 이 작가에게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려 달라며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섰다. ‘삼촌’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받아 든 김반석 군(4학년)은 “한글을 익히자마자 제일 처음 본 책을 만든 선생님을 만나 신기하다”며 웃었다. 좋아하는 ‘케이’ 캐릭터 그림을 받은 송인우 군(4학년)은 “오늘이 빨리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며 스케치북을 안고 신나게 달려갔다. 웹툰 작가를 꿈꾸는 서예준 양(6학년)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서 양은 “웹툰 작가 선생님을 만난 게 처음이라 기쁘고 뿌듯하다”며 만화 캐릭터를 한가득 그린 스케치북을 수줍게 보여줬다. ‘작은도서관…’은 2년 전 전교생이 70여 명인 이 학교의 도서관을 리모델링해 학생과 주민이 함께 이용하는 ‘학교마을도서관’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등교 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는다. 교사들은 독서와 관련된 여러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예림당 출판사는 이날 와이 책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박화선 교장은 “책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독서에 대한 흥미가 커진다”며 “작가와의 만남은 책에 대한 호기심을 높여 학생들이 독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완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19세기 미국 남부. 흑인 노예 소녀 코라는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한다. 턱밑까지 바짝 추격해 오는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다행히 북부로 향하는 지하철도와 흑인 노예를 돕는 이들 덕분에 코라는 자유를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저자는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던 비밀조직 이름인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상상해 작품을 썼다. 당시 지하철도의 활동으로 10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는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듣고 진짜 땅속에 있는 철도로 상상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살짝 화가 났지만. 그리고 실제 철도였으면 어땠을지 질문을 던지며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가슴 졸이는 추격전과 노예제도의 참혹한 실상을 세밀화 그리듯 펼쳐낸 글은 책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을씨년스러운 마을에서 코라가 마주한 노예들의 훼손된 주검은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여러 책과 영화를 통해 알고 있지만, 흑인 노예들이 하루하루 견뎌야 했던 잔인한 일상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노예제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제도가 피부색에 관계없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하는지를 입체적으로 짚어낸다. 백인 농장주는 노예들을 벌레처럼 쉽게 죽이고 팔다리를 잘라내며 인간성을 잃어간다. 흑인 노예는 관리하는 이와 명령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증오가 피어오른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뺏으려 노예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도 처연히 비춘다. 그럼에도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한 명 한 명의 의지가 모여 어떤 힘을 만들어내는지를 일깨운다. 이 책은 2017년 퓰리처상, 2016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탄탄한 작품성과 더불어 미국 내 흑백 갈등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얼마나 심각한지를 또 한 번 확인시켜 주는 현상이다. ‘문라이트’의 배리 젱킨스 감독은 이 책을 드라마로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원제는 ‘The Underground Railroad’.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지난주 책을 받아 들고 가슴이 먹먹해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유명 화가인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64)는 ‘가수는 입을 다무네’(민음사·사진)를 손으로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말했다.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지 한 달 만인 올해 1월, 홀연히 세상을 떠난 아내 정미경 소설가(57)의 장편소설이다. 2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아내의 유작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책은 전설적인 밴드의 리더였지만 10여 년간 침체에 빠진 ‘율’을 대학생 이경이 촬영하는 과정을 정갈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선율을 붙잡으려는 예술가와 등록금,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이의 몸부림이 다르지 않음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제목은 정 작가가 좋아했던 기형도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따 왔다. “정 작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 책의 제목에 집착하고, 소설 속 문장을 고치기를 거듭했어요. 가수가 입을 다문다는 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데, 돌이켜 보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 같아요.” 그는 아내를 평소 ‘정 작가’라고 불렀다. 서울대 동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한 잡지에 실린 아내(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의 소설을 읽고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연인이 됐다. 대학가의 문학상을 휩쓸던 고인과 대학생 때 동아일보를 비롯해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된 그가 주고받은 편지는 400여 통에 이른다. 아들 둘을 낳고 키우면서도 부부는 매일 아침 두 시간씩 문학, 그림, 건축,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예술적 동지였다. “정서적 교류가 하루아침에 끊어진 게 가장 힘들어요. 시간의 축적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요…. 3, 4년 정도 만났다 헤어진 것 같아요. 내 의식은 이화여대 앞을 서성였던 그 시절을 맴돌고 있어요.” 그는 아내에게 최초의 독자이자 마지막 비평가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요즘 아내의 작품을 다시 꼼꼼하게 읽고 손으로 문장을 한 줄 한 줄 써 보며 문학적 자취를 되짚고 있다. 고인이 19년간 머물렀던 반지하 원룸 작업실에 쌓여 있던 처절한 고뇌의 흔적인 습작 원고 더미도 정리 중이다. “정 작가에 대한 평전을 쓰고 있어요. 정 작가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 치열하게 삶과 부딪쳐 깨지고 피 흘리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의 물줄기를 담은 인물들처럼 살았어요.” 아내와 자신의 여행 에세이를 묶은 책도 준비하고 있다. 고인은 남녀 작가가 번갈아 가며 쓴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층위가 다른 온도의 글을 담은 여행 에세이를 함께 내자고 제안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헤어질 때까지 찍은 사진에 글을 엮은 에세이도 출간하기로 했다. 이들 책 세 권은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선보일 예정이다. 유고 소설은 ‘목놓아 우네’를 포함해 두 권 더 출간된다. 1주기 행사는 글, 그림, 사진, 영상 등 장르를 가로지르는 형식으로 열 계획이다. 그는 고인의 글 더미를 정리할 때면 영혼으로 교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가 책을 읽는 한 정 작가의 문학적 삶은 계속되잖아요. 문학인은 떠나도 떠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빈방의 벽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울곤 하는 그가 조금씩 일어서고 있는 게 보이는 듯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훈 정호승 은희경 박준 장강명….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책 문화 축제인 ‘파주북소리2017’이 9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경기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올해로 7회를 맞았다. 작품 낭독과 공연, 퍼포먼스가 결합된 ‘작가와 마주앉다―작가와의 만남’에는 정호승 이병률 박준 시인, 은희경 장강명 백영옥 소설가, 이기주 작가 등이 참여한다. 김훈 정이현 김연수 천명관 방현석 소설가와 함께하는 낭독 퍼포먼스도 열린다. 무라카미 하루키, 찰리 브라운이 주인공인 만화 ‘피너츠’를 쓴 찰스 슐츠의 작품 속에 나온 음악을 듣는 북 콘서트를 비롯해 단편소설을 연극과 뮤지컬 형식으로 읽는 공연이 열린다. 성우들이 소설을 들려주는 ‘라디오 소설극장’도 진행된다. ‘생각을 치다: 타자기와 작가’ 전시에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헤르만 헤세 등 유명 작가들이 사랑한 타자기와 함께 타자기의 역사를 소개한다. 4가지 물건을 통해 독서 성향을 알아보고, 출판사들을 자유롭게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파주북소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영화 ‘8마일’의 주인공 지미가 토해낸, 유명한 대사다. 유명 래퍼 에미넘이 지미로 출연해 자신의 실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시궁창 현실’이 무엇인지 처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힐빌리는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 지역인 러스트(Rust·녹) 벨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트로이트에서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어머니와 트레일러 집에 사는 지미, 오하이오에서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에게 학대받으며 때로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던 저자의 삶은 전형적인 힐빌리의 그것이다. 저자는 양육권을 포기한 친아버지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한 해가 멀다 하고 여러 남자를 아버지로 만났다. 밥, 칩, 스티브, 맷, 캔…. 이들 아저씨의 집으로 이사를 다니는 인생이 이어진 것. 약물에 찌든 간호사인 어머니가 간호협회에서 실시하는 약물 검사에 내야 한다며 아침부터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건 수많은 상처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저자는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너무나 동떨어진 두 세계를 어떤 사다리를 타고 어떻게 이동했는지 궁금한가. 드라마틱한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야기의 무게 중심은 성공담보다는 학습된 무기력에 젖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힐빌리의 현실을 비추는 데 있다. 힐빌리에게서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술과 약물에 찌들고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누나와 이모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건 힐빌리가 아닌 다른 문화의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란다. 러스트 벨트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역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민주당 지지자였던 이들이 돌아선 이유를 알 수 있다. 노동의 가치를 믿던 이들은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 회사를 그만두고, 푸드 스탬프로 받은 음식을 팔아 술과 담배를 즐기는 ‘복지 여왕’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미국 정치 엘리트들과 현 체제를 불신하게 된 것. 저자가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자녀는 방치했지만 손자만은 제대로 키우려 애썼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해병대 지원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됐다. 오하이오주립대를 졸업한 후 예일대 로스쿨에 간 그는 연일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지금 아내가 된 로스쿨 친구 우샤의 집에 갔을 때 가족들이 소리 지르지 않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랬다. 로펌 입사 면접을 위한 연회장에서 ‘탄산수(Sparkling Water)’를 처음 보고 ‘반짝거리는 물’이 뭔지 몰라 한 모금 마시고 역겨워 내뿜는 모습에서는 올해 33세인 그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힐빌리의 삶은 미국의 빈곤층에 드리운 짙은 그늘을 영화처럼 세밀하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그늘을 걷어내는 방법에 대한 현실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국 빈곤층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남자의 흥미로운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그가 걸어온 궤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힐빌리에게 당부한다.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손자를 이렇게 키워낸 외할머니는 늘 외쳤다. “절대 자기 앞길만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원제는 ‘Hillbilly Elegy’.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세월호 참사, 군대 내 가혹 행위, 전관예우, 대학 입시 비리…. 한국 사회의 부패와 비인간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80)는 이 가운데서도 전관예우를 특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판결이 퇴임한 선임 법관의 이익을 배려하느라 휘둘리는 건 공적 제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최근 출간한 ‘법과 양심’(에피파니·사진)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했다. 이 책은 헌법재판소, 사법정책연구원, 사법연수원 등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었다. 양심은 법을 준수하게 하는 심리적 동기가 된다고 분석했다. 법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관여할 수 없기에 양심은 법의 안과 주변은 물론이고 법을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리나 도덕에 의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법에 의한 통치보다 덕(德)에 의한 통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풍부한 역사적인 사례는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공자를 비롯해 마이클 샌델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학자의 이론을 종횡무진 펼쳐낸다. 김 교수는 좋은 사회란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룬 사회라며 법, 윤리, 양심, 도덕, 현실의 조화를 강조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소설가 22명이 참여한 손바닥 크기의 초단편 소설집 ‘이해 없이 당분간’(걷는사람)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사회를 다채롭게 조명한 작품들로 구성됐다. 작품별 분량은 원고지 30장가량. 집필 시기는 지난해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이 손바닥 소설을 쓰는 데 참여한 백민석(46) 조해진(41) 손보미 소설가(37)를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초록 빛깔 표지의 책을 만지던 백 작가는 “한 시대의 기록 같은 책”이라며 입을 뗐다. 그는 작품 ‘눈과 귀’를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마님이란 존재를 비판한다. ‘빛의 온도’(조해진)는 촛불집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의 심리, ‘계시’(손보미)는 지진이라는 재난에 처한 사람의 심리를 묘사했다. 이들은 작품별로 제각각의 결을 지닌 게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집필 과정에서의 느낌도 달랐다. 조 작가는 “출판사에서 촛불, 광화문 등 여러 키워드를 제시했다. 교훈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문학적인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반면 손 작가는 “사회 문제를 직접 글에 녹이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마음으로 부담 없이 작업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점점 책을 멀리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소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게 소설의 역할이 아닐까요?”(조해진)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봐요.”(손보미) 소설가는 사회와 교감하며 이를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존재이기에 자연스럽게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람이 죽는 설정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진정한 애도란 무엇일지 생각했고요. 여성 혐오 논란이 일면서 글에서 여성, 더 나아가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되묻고 있어요.”(조해진) “시대정신은 의식하지 않아도 글 속에 묻어나는 것 같아요. 존재의 얼룩처럼요.”(백민석) 글만 써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건 대다수 작가들에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조 작가와 손 작가는 강의를 하고, 백 작가는 여행 에세이 등으로 장르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글을 쓸 때가 가장 재미있다. 살아 있다는 걸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10년간 절필했던 백 작가는 “처음에는 살 것 같고 진짜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글이 그리워졌다. 돌아오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독자로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단다. “내게 의미를 주는 문장을 발견하고, 어떤 곳에서 특정 작품을 떠올릴 때가 있어요.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선사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정말 벅찰 것 같아요.”(조해진) 백 작가와 손 작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깊숙이 끄덕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시-평론, 온라인으로 상시 투고 받아온라인에서 원고를 받아 만드는 시 전문지가 나왔다. 최근 창간호를 낸 계간 ‘모:든시’는 온라인 플랫폼 ‘세상의 모든 시집’(omnipoetry.com)을 통해 잡지에 실을 시와 평론을 상시 투고받는다고 22일 밝혔다. 등단 작가가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다. 홍일표 시인이 주간, 오연경, 기혁, 안지영 문학평론가가 편집위원을 맡았다. 등단 여부나 명성에 관계없이 작품 중심으로 시를 선정하겠다는 것이 이 전문지의 계획이다. ■ 아시아 최대 국제법 학술회의 개최 아시아국제법학회(회장 백진현)는 25, 26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불확실성 시대의 아시아와 국제법’을 주제로 제6차 총회를 연다. 총회는 아시아 최대 국제법 학술회의로 오와다 히사시 국제사법재판소 판사를 비롯해 40개국 500여 명의 국제법학자와 실무자들이 참가한다.}

미당 서정주 선생(1915∼2000)이 10대부터 80대까지 남긴 시, 소설, 희곡, 산문, 자서전, 전기, 번역 등을 집대성한 ‘미당 서정주 전집’(20권·은행나무)이 완간됐다. 미당의 제자인 이경철 문학평론가, 윤재웅 동국대 교수, 전옥란 작가와 전문연구가인 이남호 고려대 교수, 최현식 인하대 교수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5년간 작업한 끝에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21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편집위원들은 “선생은 겨레의 말을 가장 잘 구사하고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라며 “선생의 시를 읽는 것은 겨레의 말과 마음을 아주 깊고 예민한 곳에서 만나는 일이며 겨레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시선집 다섯 권에는 시 950편이 실렸다. 선생이 시의 탄생 과정을 서술한 산문들은 시 창작의 배경과 맥락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전집에 싣지 못한 작품은 목록을 통해 소개했다. 친일 시 4편은 수록하지 않았다. 생전에 시집으로 발표한 작품을 수록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는 게 편집위원들의 설명이다. 이남호 교수는 “선생의 작품은 언어, 비언어로 된 것을 포함해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이라며 “선생은 인간적 약점도 지녔지만 문학적 의미를 조명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잠실종합운동장의 잔디밭에 잡초 서너 개가 있다고 해서 잔디밭 전체를 뒤집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옥란 작가는 “전집 출간 작업을 하며 선생의 작품을 꼼꼼하게 살펴볼수록 참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쓰신 분이란 걸 느꼈다. 비판을 하더라도 선생의 작품을 많이 읽은 후 평가를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생이 전두환 전 대통령 생일 때 축시를 쓴 일을 놓고 일어난 비판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이경철 문학평론가는 “선생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너무 순진하셨다”며 “선생에게 5공 당시 일을 물어보니 ‘전두환 대통령이 워낙 깡패처럼 굴어서 비위를 맞춰주면 사람들을 덜 때리고 덜 죽일 줄 알았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전집 출간을 계기로 선생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새로 시작되길 바랐다. 윤재웅 교수는 “후대 연구자에게 이 전집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선생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는 문화가 생기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영주)은 전국 초중고교 재학생 및 해당 연령 청소년을 대상으로 원주박경리문학제 청소년백일장 대회를 개최한다. 21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자유 주제로 쓴 작품을 백일장 응시표와 함께 토지문화재단 e메일(tojicul@naver.com)로 보내면 된다. 응모자 가운데 100여 명을 선발해 문학제 기간인 10월 21일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강원 원주시 박경리문학공원에서 본선을 실시한다. 대상 1명에게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과 장학금 100만 원, 최우수상 1명에게는 강원도지사상과 장학금 50만 원을 수여한다. 자세한 내용은 재단 홈페이지(www.tojicf.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033-762-1382, 766-5544}

식당이나 카페에서 피자, 카페라테를 먹으며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는 이들, 스키니 진을 입은 여성들, 도로를 달리는 BMW 렉서스 차량…. 세계 여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곳이 북한이라면? 놀라운가. 이 장면들도 북한의 한 모습이다. 아니, 영어 원서가 출간된 게 2년 전이니 더 바뀌었을지 모른다.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을 지낸 튜더와 로이터통신 서울 주재 특파원인 피어슨은 탈북자, 북-중 접경 지역에서 교역하는 이, 외교관,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는 물론이고 북한에 거주하는 여러 계층을 취재해 정리했다. 영어, 중국어, 한국어 자료도 활용했다. 저자들은 수시로 미사일을 쏘는 나라,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집단체조를 하는 주민 등 북한에 대해 으레 떠올리는 이미지를 벗겨낸다. 그리고 북한 주민의 생활이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게 아님을 보여준다. 북한을 자본주의 국가보다 돈의 힘이 더 막강하게 작용하는 나라로 만든 계기는 1994∼98년에 벌어진 대기근이라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당시 20만 명에서 많게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 배급에 의존하던 주민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은 것. 자녀가 학교에 가고 남편이 출근한 사이 데이트하는 연인에게 빈집을 몇 시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여성들은 대도시 어디나 있다. ‘무료 노동 부서’나 마찬가지인 군부대 인력을 활용해 건물을 지은 후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출신성분이 여전히 사회 진출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은 언제라도 신분이 높은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 컴퓨터와 휴대용 저장장치(USB메모리)의 보급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인기를 더욱 높였다. 배우 김태희가 신은 신발의 짝퉁 제품은 평양 백화점에서 120달러에 팔리고 패션에 관심 많은 남성들은 원빈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따라한다. 눈썹, 입술에 문신을 하고 쌍꺼풀 수술, 코 수술을 받는 여성도 생겼다. 평양에서는 휴대전화가 없는 젊은이는 ‘루저’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정치범은 아들과 손자까지 3대를 처벌하는 등 봉건적 제도가 여전히 유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생생한 삶의 모습과 함께 정치 시스템과 사회 구조를 짚어낸 점은 북한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다. 물품 교역이 보따리상처럼 알음알음 이뤄지는 구조이기에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 제재가 기대만큼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를 260쪽이라는 많지 않은 분량에 담아내다 보니 내용의 깊이는 다소 떨어진다. 탈북자들이 출연해 북한 생활의 이모저모를 알려주는 방송 프로그램이나 북한 내부 실상을 알리는 보도를 자주 접한 이들에게는 익숙할 법한 내용도 꽤 있다. 오늘날 북한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원제는 ‘North Korea Confidential’.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신간 시집들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심보선 시인이 6년 만에 내놓은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문학과지성사)는 출간 한 달여 만에 1만2000권을 찍었다. 심 시인은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조은혜 문학과지성사 편집자는 “새 시집을 오래 기다렸다는 독자들이 많았다. ‘작가와의 만남’ 행사의 참석자들은 2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했고 남녀 비율도 비슷했다”고 말했다. 신용목 시인의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창비)도 출간 보름 만에 4000권을 발행했다. ‘아무 날의 도시’ 이후 5년 만에 나온 시집으로, 외로움과 절망을 마주한 느낌을 특유의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냈다. 김선영 창비 편집자는 “시인이 간간이 발표했던 시에 대한 반응이 좋아 새 시집에 기대감이 컸다. 독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에 속도가 붙고 있다”고 말했다.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는 신철규 시인의 첫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나온 지 보름 만에 3쇄까지 찍으며 모두 4500권을 발행했다. 문예지 등을 통해 발표했던 시들이 방송,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화제를 모으며 출간 전부터 큰 관심을 모았다. 김민정 문학동네 시인선 책임편집자는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과하거나 어렵지 않게 미학적으로 풀어낸 점이 호응을 얻은 것 같다. 시마다 임팩트 있는 행이 들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말했다.신현림 시인이 8년 만에 내놓은 다섯 번째 시집 ‘반지하 앨리스’(민음사)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초판 2000권이 거의 다 나갔다. 시인은 반지하 빌라에서 살았던 경험과 경제적 어려움을 절제된 언어로 토로하면서 여유 있는 시선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노래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0호인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문학과지성사) 역시 지난달 10일 출간한 후 한 달이 조금 지나 누적 1만 부를 찍었다.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 마종기의 ‘바람의 말’ 등 유명 시인 65명의 대표작을 2편씩 실었다. 그간 기념호들에 비해 이번 500호는 호응이 훨씬 크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출판계는 신간 시집 열풍에 놀라워하는 분위기다. SNS 이용이 늘어나며 압축적 언어로 표현한 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새 시집이 한꺼번에 큰 인기를 끄는 현상은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것. 김효선 알라딘 한국소설·시 담당 MD는 “탄탄한 독자층을 보유한 작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시집을 출간하면서 전반적으로 시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는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집 열풍에 거는 기대도 크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삶의 쓰라림과 박탈감을 잘 포착해 격조 있게 승화시킨 작품이 사랑받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단순히 시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집을 읽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감성적인 작품뿐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시를 즐기는 독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시인은 돈을 얼마나 버나요?” 한 유명 시인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후 대개 이런 첫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계간지 ‘문학과사회’의 별책 ‘하이픈’은 올해 여름호에 시인의 삶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실었다. 성동혁 시인은 한 계절에 쓸 수 있는 시가 최대 4편이어서 많을 경우 40만 원을 받는단다. 1년간 시를 써 손에 쥐는 건 평균 120만 원이라고 했다. 다른 시인들도 큰 차이는 없어 시간강사, 아르바이트, 기고 등으로 생활비를 간신히 충당하고 있다. 임경섭 시인은 “(생계유지가 가능한) 직업으로서의 시인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이유는 뭘까. 김하늘 시인은 시 쓰기를 “정신적 충만에 가까운 행위”라고 고백한다. 읽는 이에게도 좋은 시는 정서적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시인들의 바람은 소박했다. 자신이 사주는 밥을 먹어도 친구들이 불편해하지 않길, 입국 신고서의 직업란을 채울 때 머뭇거리지 않길….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치열하게 고뇌하며 성장하는 음악가의 세계가 궁금한가. 짜릿한 긴장감 속에 쉼 없이 책장을 넘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권한다. 가상의 일본 도시 요시가에에서 3년마다 열리는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이 작품은 읽는 이를 순식간에 음악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밤의 피크닉’ ‘흑과 다의 환상’ ‘유지니아’ 등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공상과학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저자의 실력이 십분 발휘됐다. 양봉가의 아들로 자유분방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연주로 심사위원들을 때로 분노케 만드는 가자마 진, 천재 소녀였지만 어머니를 잃은 후 연주회장에서 돌연 사라졌던 에이덴 아야, 탄탄한 실력과 뛰어난 외모로 줄리아드음악원을 대표하는 청년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가족을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대형 악기점에서 일하는 다카시마 아카시…. 제각각 사연을 지닌 이들이 콩쿠르에 참가한다. 이들이 연주를 통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숲속의 싱그러운 바람을 느끼는가 하면 광활한 우주까지 만나는 모습은 피아노 버전의 ‘신의 물방울’ 같다. 하지만 별다른 거부감 없이 어느새 젖어들 듯 음미하게 된다. ‘음악의 신에게 사랑받는’ 진은 제자를 별로 두지 않았던 전설적인 음악가 유지 폰 호프만이 눈을 감기 직전까지 찾아가 가르친 소년이다. 한 번 들은 음악을 외워버리고 공연장 무대 바닥 일부가 보수 공사로 두꺼워져 피아노 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것까지 찾아내는 절대 음감을 지녔다. 열여섯 살의 진이 콩쿠르에 참가한 건 본선에 진출하면 아버지가 피아노를 사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갇혀 있는 음악을 세상으로 데리고 나가겠다’는 스승과의 약속이 지닌 의미를 깨치고 실현해야 한다. 바람 같으면서도 천진난만한 진의 등장은 아야와 마사루는 물론 심사위원들에게까지 강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음악이 자신에게 지닌 의미를 곱씹으며 호프만이 진을 통해 의도한 바를 더듬어 나간다. 진 역시 처음 접하는 콩쿠르에서 다채로운 연주를 듣고 빼어난 실력을 지닌 아야, 마사루와 교감하며 성장한다. 콩쿠르 현장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듯 치밀한 묘사는 오랜 시간 공들인 저자의 발품 덕분이다. 저자는 일본 하마마쓰시에서 3년마다 열리는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2006년부터 네 번 지켜보며 꼼꼼하게 취재했다. 두 번째 참관한 2009년 대회의 우승자는 조성진이었다. 그래서일까. 앳된 분위기의 열여덟 살 조한선이 본선에서 라흐마니노프 2번을 ‘대단히 우아하고 단정하게 연주해’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정통적 피아니스트라는 인상을 줬다는 대목에서는 조성진이 떠오른다. 최상의 소리를 위해 한정된 시간 안에 신속히 피아노를 점검하는 조율사들, 참가자들이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격려하는 무대 매니저 등 보이지 않는 이들의 땀방울도 놓치지 않는다. 선택받은 자의 환호와 그렇지 못한 자의 탄식이 뒤섞이는 당락 발표 순간은 냉혹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흥미를 자극해 흥행을 유도하는 콩쿠르의 단면을 드러낸다. 작품 속 또 다른 주인공은 음악이다. 쇼팽, 리스트, 베토벤, 브람스 등 거장의 음악이 활자를 통해 쉼 없이 흘러나온다. ‘눈으로 본’ 음악을 소리로 차분히 음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올해 일본 나오키상, 서점대상 수상작.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올해 7회를 맞는 박경리문학상의 최종 후보 5명이 공개됐다.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81·영국), 코맥 매카시(84·미국), 페터 한트케(75·오스트리아), 가즈오 이시구로(63·일본계 영국인), 얀 마텔(54·캐나다)이 주인공이다. 이 상은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1년 제정됐다. 국내외 작가들을 모두 대상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이다. 올해 심사위원은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사진), 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 김승옥 고려대 명예교수, 이세기 소설가, 최현무 서강대 교수, 이남호 고려대 교수다. 후보자들은 모두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작가로 맨부커상(바이엇, 이시구로, 마텔), 퓰리처상(매카시), 카프카상(한트케) 등 유명 문학상을 수상했다. 9일 만난 심사위원장 김우창 교수는 후보자들의 작품 세계에 대해 “문학성이 뛰어나면서도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다. 장르 소설이라 불러도 될 만큼 독자들의 흥미를 강하게 불러일으킨다”고 평가했다. 지식인의 세계를 문학적 언어로 밀도 높게 그린 바이엇은 대표작 ‘소유’를 통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20세기의 문학연구자 두 사람이 19세기 시인인 두 남녀의 문학과 사생활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두 겹의 이야기가 전개되며 궁금증을 자아낸다. 김 교수는 “바이엇은 문화적 유산을 시적으로 녹여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했다. 매카시는 ‘핏빛 자오선’을 비롯해 국경 3부작으로 꼽히는 ‘모든 멋진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을 통해 활극이 벌어지는 곳으로 여겨졌던 미국 서부를 인간의 잔혹함과 고통이 극대화된 곳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동명 영화로도 제작됐다. 김 교수는 “잊혀져 가는 미국의 그늘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함으로써 미국 서부를 문학적으로 개척했다”고 말했다. 이시구로는 ‘남아있는 나날’에서 영국 귀족의 생활을 통해 규율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섬세하게 고찰했다. 김 교수는 “이시구로의 작품은 영국적이면서도 일본적인 색채를 지니는데, 집사의 시각을 통해 영국 상류사회를 또 다른 각도로 조명한 점이 독특하다”고 말했다. 한트케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매번 새로운 형식을 선보여 왔다. 시를 비롯해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희곡 ‘관객 모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다. ‘긴 이별…’은 미국을 여행하는 오스트리아 남성이 독백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물리적인 장소보다는 내면을 여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점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인도 소년 파이가 배의 침몰로 가족을 잃고 구명보트에서 벵골호랑이와 표류하며 공포와 절망, 고독을 경험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다. 김 교수는 “우화적이고 환상적인 설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 생명에 대한 믿음 등을 중층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짚어냈다”고 말했다. 수상자는 다음 달 말 발표된다. 시상식은 ‘2017 원주 박경리문학제’에 맞춰 10월 28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다. 동아일보는 최종 후보자 5명의 작품 세계를 차례로 지면에 소개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세계적인 작가뿐 아니라 덜 알려졌지만 탄탄한 실력을 지닌 젊은 작가도 적극 발굴하겠다”고 밝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인간시장’ ‘김홍신의 대발해’ 등 선 굵은 작품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홍신 씨(70)가 등단 40주년을 기념해 애달픈 사랑을 노래한 장편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해냄)을 출간했다. ‘단 한 번의 사랑’(2015년)에 이어 또다시 사랑 이야기로 돌아온 것.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8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괴로울 때마다 명상하고 면벽 수행을 해봤는데 결국 가슴에 크게 남는 게 사랑이라는 말이었다. 인간에게 영원한 숙제이자 해독제가 없는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만년필을 고집하는 그는 원고지 1만2000장에 꾹꾹 눌러 쓰며 작품을 완성했단다. 그는 “지난해가 등단 40주년이었지만 세상이 어지러워 올해 작품을 발표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바람…’은 가톨릭 사제를 꿈꾸다 의사가 된 청년 리노와 성가대 반주를 했던 7세 연상의 여성 모니카의 엇갈린 사랑을 그렸다. 이야기는 리노와 모니카의 시선에서 교차돼 전개된다. 세례명이 리노인 그는 소설 속 주인공 리노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복사(服事·신부 옆에서 미사 진행을 돕는 이)였고 사제가 되려다 어머니의 반대로 의대에 지원한 적이 있다. “자전적 소설은 아니에요. 옛 추억을 일부 꺼내 살을 붙이고 상상해서 쓴 작품입니다. 역사, 사회를 조명하는 소설도 준비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한 소설은 몇 편 더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는 스스로에 대해 “(정권에 관계없이) 평생 블랙리스트였다”고 말해 왔다. “지난해 블랙리스트 논란이 있을 때 갑자기 조윤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전화해 ‘오늘 저녁식사를 꼭 대접하고 싶다’고 했어요. 사태가 수습된 후 만나자고 했더니 ‘저는 블랙리스트를 절대 만들지 않았어요’라며 전화를 끊더군요. 그제야 제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걸 알았어요.” ‘단 한 번…’에서 독립운동가를 심사하던 위원들이 친일파였고 이들의 실명을 밝혔다는 등의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이 특검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그는 “부조리한 시대를 매섭게 비판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면 오히려 영광”이라며 웃었다. 한편 ‘김홍신의 대발해’를 집필할 때는 너무 힘들어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지만 마음공부를 하며 소설가는 소설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단다. 충남 논산시에 올해 집필관이 들어서고 내년 말에는 ‘김홍신문학관’이 완공된다. 충남 공주시에서 태어난 그는 논산에서 자랐다. “글을 쓰고 제자를 키우며 세상에 보탬이 되라는 하늘의 뜻인 것 같아요. ‘인간시장’ 등으로 고초를 겪을 때 저를 살려준 건 독자들이었습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정진할 겁니다. 마지막까지 만년필을 손에 쥐고 눈을 감고 싶어요.”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