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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해요, 시간이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아트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할 수 있을까요?” 2016년 한류 박람회 참가를 앞둔 뷰티 화장품 기업이 KOTRA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 씨를 찾아왔다. 그가 가져 온 제품 샘플에는 유명 한류스타 배우와 미키마우스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유명스타와 캐릭터는 저작권료가 너무 비싸 사용할 수 없었다. 한 씨는 ‘명화(名畵)’에서 답을 찾았다. “화장품이나 가방을 제조하는 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반고흐 그림을 활용할 때는 저작권료가 비쌀 거라고 지레짐작하세요. 그런데 기업인들에게 사후 70년이 넘은 작가의 작품은 저작권료가 공짜라는 말을 해주면, 속된 말로 눈이 튀어나오게 좋아합니다.” 그는 이 회사에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비롯한 여성들의 초상화, 꽃그림 명화들을 추천해주었고, 케이스를 고급화한 이 화장품은 대박이 났다. 아트 컬래버레이션의 효과를 맛본 이 회사는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현대작가와의 협업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팝아트, 일러스트, 캐릭터 등으로 커버가 바뀔 때마다 선호 계층이 바뀌었다. 내용물은 바뀌지 않았지만 포장에 따라 20대 ‘젊은 언니 같은 느낌’에서 30, 40대 ‘청담동 며느리 같은 느낌’까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화장품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콜라보(컬래버레이션)’라는 말이 대중화됐지만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생소했죠. 대기업은 사회공헌사업(CSR) 차원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메세나를 했지만, 중소기업은 예술이란 단어만 나오면 큰돈이 들어가는 일인 줄 알고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트를 활용해 기업이 수익을 얻고, 홍보 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한 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작가, 칼럼니스트, 비즈니스 분야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해왔다. 그의 인생 자체가 컬래버레이션이었던 셈. 그는 “대중들에겐 사랑받았지만 미술계 내부에서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라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며 “20년이 넘게 활동해오다보니 예술과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자’로서의 정체성을 나 스스로도 찾게 됐다”고 말했다. 1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 흡사 철물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종류의 못과 경첩, 파이프, 플러그 등이 쌓여 있었다. 그는 1995년부터 연결 도구인 못, 지퍼, 경첩, 똑딱단추, 옷핀 등의 오브제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문’이 아닌 ‘경첩’과 같은 연결하는 인간으로서의 성찰이 담긴 작업이다. 작가로서 한 씨는 삼성주택문화관을 설계하고, 대웅제약에 ‘못사람’ 조형물을 설치하는 협업을 하기도 했다. 연결자로서의 재능이 가장 빛난 것은 2012년부터 5년간 KOTRA에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려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주선해주는 일을 맡았을 때이다. 이 경험을 그는 지난해 ‘아트 콜라보 수업’(비즈니스북스)이라는 책으로 출간했고, 책은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컬래버레이션은 루이뷔통과 일본의 현대미술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 앤디 워홀과 앱솔루트 보드카, 제프 쿤스와 BMW의 아트카, LG그룹의 명화 캠페인, 현대카드의 갤러리카드 등 국내외 명품 브랜드들이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작업이다. 한 씨는 “KOTRA에 찾아온 기업과 함께 제품을 보면서 상담하다 보면 어떤 아티스트의 작품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현실의 삶과 미술을 연결해서 해설해왔던 덕분에 생긴 재능이다. 그는 유럽시장에 생들깨기름을 판매하려는 한 중소기업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을 라벨에 장식할 것을 추천했다. 서양인에게 익숙한 밀레의 명화는 오랜 전통과 신뢰감, 친환경 이미지를 주었고, 러시아 업체와 20만 달러어치 수출계약을 맺는 성과를 거뒀다. 두통약 펜잘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 부인’ 초상화 그림으로 박스를 포장해 대박이 났고, 몸매 관리를 해주는 의료기기에는 앵그르의 비너스 그림을 새겨 넣어 국제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코카콜라, 루이뷔통, BMW, 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들도 신진 아티스트와 협업한 ‘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을 내놓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변화의 노력이죠. 리미티드 에디션은 희소성 때문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인기를 얻으면서 제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줍니다.” 한 씨는 “전동칫솔, 스팀다리미 등이 모두 이종 간의 교배로 탄생한 히트상품”이라며 “협업은 예상치 못한 이종 간에 이뤄질 때 효과가 배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새우깡 티셔츠’ ‘바나나맛우유 화장품’ ‘메로나 칫솔’과 같이 식품기업이 패션과 화장품과 같은 기상천외한 조합으로 협업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꼽은 컬래버레이션의 기본 원칙은 ‘수평적 동행’이다. 한쪽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콜라주’(오려 붙이기)가 될 뿐이며,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서로 윈윈하는 파트너 관계로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어야 협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18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팝가수 비욘세가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루브르박물관이 비욘세의 뮤직비디오를 찍게 허락한 것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나리자 그림에만 몰려드는 현상을 타개할 묘수가 됐어요. 비욘세는 세계적 명소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기회를 얻었고, 루브르는 비욘세가 촬영한 17점의 명화를 찾아 투어 하는 새로운 관람 동선을 홍보할 수 있게 됐죠. 1억9000만 회가 넘은 유튜브 조회수 덕분에 2018년 루브르는 처음으로 관람객 1000만 명을 넘겼습니다.” 한 씨는 앞으로 고령사회를 맞아 휠체어와 지팡이, 환자복에 패션을 도입한 ‘메디컬 컬래버레이션’을 구상 중이다. “아트는 소비가 아니라 치유의 역할도 합니다. 허리를 감싸주는 복대가 꼭 검은색이어야 할까요? 누구나 병원에 입원할 수도, 잠시 휠체어를 탈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환자복이나 휠체어에 감각적인 컬러와 패션이 접목된다면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가족들이 함께하는 식탁은 치유를 받고,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잖아요. 매일 마주해야 하는 그릇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새해 벽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광주요 매장에서 국내 최초의 ‘윈도페인팅 아티스트’ 나난(본명 강민정·41)을 만났다. 이곳에서는 나난 특유의 자연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짙은 초록색 잎사귀와 하늘색 국화꽃을 그려 넣은 도자기 그릇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그는 도자기가 가마 속에 구워지면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6차례나 테스트한 끝에 원하는 초록색을 찾아냈다고 했다. “과거에 선비가 우물가 아낙네에게 물을 청할 때 체할까 봐 잎사귀를 띄워 줬다잖아요? 국화는 서리가 내리는 날씨에도 꼿꼿하게 꽃을 피워냅니다. 험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식탁에서만큼은 잎사귀를 띄워 줬던 사려 깊음, 국화의 강인함을 채우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됐습니다.” 나난은 광주요뿐만 아니라 국내외 기업들과 활발하게 컬래버레이션(협업)을 해온 대표적인 작가다. 대한항공, 록시땅, 신세계 SSG, 파스쿠찌, 스톤헨지 등 화장품, 패션, 유통기업까지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왔다. 서울예술대에서 광고창작을 전공한 나난은 1999년부터 스트리트 매거진 ‘런치박스’와 LG텔레콤에서 발행한 ‘카이’ 매거진에서 에디터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에서 출발한 그의 캔버스는 다양한 변신을 거듭했다. 먼저 유리창. 2004년에 친구 집 창문에 흰색 마커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밤중에 그렸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탄성이 흘러나왔다. 햇빛이 비친 그림자가 방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냈던 것. 카피라이터였던 친구는 ‘윈도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그는 국내 첫 윈도페인팅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유리창에 그림을 그렸고, 1년 뒤엔 뉴욕, 런던, 홍콩에서 윈도페인팅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역 공항철도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양쪽 유리벽 총 80m 구간은 가장 크고 긴 캔버스였다. 전 세계 대한항공 취항 도시의 풍경을 그린 이 작업은 꼬박 4박 5일이 걸렸고, 2013년에 ‘소비자가 뽑은 올해의 광고상’을 받았다. 프랑스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 본사에서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나난의 그림을 보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스팸인 줄 알았다”는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로방스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나난이 협업한 록시땅 핸드크림은 전 세계 면세점과 기내에 판매됐다. “엄마에게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제주도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어 기내 구매도 했어요.” 그를 진정한 ‘효녀’로 느끼게 만들어준 작업은 2015년 신세계 SSG와의 협업이었다. 이번엔 캔버스가 노란색 배송차였다. “엄마는 아무리 비싼 화장품이나 명품 패션과 협업해도 브랜드를 잘 모르셨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노란색 배송차를 볼 때마다 ‘우리 딸이 한 작업’이라며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는 우연히 자신의 서울 이태원 작업실 앞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땅에 조그만 화분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른바 ‘나난 가드닝’ 프로젝트. 이번 캔버스는 시멘트 계단이었던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마을도시재생 사업의 매뉴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그의 실험은 ‘롱롱타임플라워’로 이어졌다. 친구 결혼식 때 종이로 만든 꽃을 부케로 주었더니 “어머, 시들지 않는 꽃이네!”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전시에서 나난 꽃집을 열었다. 종이로 만든 꽃을 송이당 5000원에 팔아 관람객들이 자신만의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관람객 중 한 명이 암 투병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롱롱타임플라워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드린 사진을 보내주었어요. 병원에는 꽃을 사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셨다는 거예요. 또 생화 알레르기가 있던 아내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하고, 프러포즈를 했다는 사연도 감동적이었죠. 소통을 통해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 작가로서 행복했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식탁은 치유를 받고,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잖아요. 매일 마주해야 하는 그릇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습니다.” 새해 벽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광주요 매장에서 국내 최초의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41·본명 강민정)을 만났다. 이 곳에서는 나난 특유의 자연주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짙은 초록색 잎사귀와 하늘색 국화꽃을 그려 넣은 도자기 그릇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그는 도자기가 가마 속에 구워지면 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6차례나 테스트한 끝에 원하는 초록색을 찾아냈다고 했다. “과거에 선비가 우물가 아낙네에게 물을 청할 때 체할까봐 잎사귀를 띄워 줬다잖아요? 국화는 서리가 내리는 날씨에도 꼿꼿하게 꽃을 피워냅니다. 험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식탁에서만큼은 잎사귀를 띄워 줬던 사려 깊음, 국화의 강인함을 채우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됐습니다.” 나난은 광주요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기업들과 활발하게 콜라보레이션(협업)을 해온 대표적인 작가다. 항공, 록시땅, 신세계 SSG, 파스쿠찌, 스톤헨지 등 화장품, 패션, 유통기업까지 수많은 브랜드들과 협업을 통해 대중과 소통해왔다. 서울예술대학에서 광고창작을 전공한 나난은 1999년부터 스트리트 매거진 ‘런치박스’와 LG텔레콤에서 발행한 ‘카이’ 매거진에서 에디터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에서 출발한 그의 캔버스는 다양한 변신을 거듭했다. 먼저 유리창. 2004년에 친구 집 창문에 흰색 마커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밤중에 그렸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탄성이 흘러나왔다. 햇빛이 비친 그림자가 방바닥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냈던 것. 카피라이터였던 친구는 ‘윈도 페인팅’이라는 이름을 붙여줬고, 그는 국내 첫 윈도페인팅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에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유리창에 그림을 그렸고, 1년 뒤엔 뉴욕, 런던, 홍콩에서 윈도 페인팅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역 공항철도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양쪽 유리벽 총 80m 구간은 가장 크고 길었던 캔버스였다. 전 세계 대한항공 취항 도시의 풍경을 그린 이 작업은 꼬박 4박 5일이 걸렸고, 2013년에 ‘소비자가 뽑은 올해의 광고상’을 받았다. 프랑스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록시땅 본사에서도 SNS에 올라온 나난의 그림을 보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스팸인 줄 알았다”는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프로방스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나난이 협업한 록시땅 핸드크림은 전 세계 면세점과 기내에 판매됐다. “엄마에게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제주도 가는 비행기 티켓도 끊어 기내 구매도 했어요.” 그를 진정한 ‘효녀’로 느끼게 만들어준 작업은 2015년 신세계 SSG와의 협업이었다. 이번엔 캔버스가 노란색 배송차였다. “엄마는 아무리 비싼 화장품이나 명품 패션과 협업해도 브랜드를 잘 모르셨어요. 그런데 길을 가다가 노란색 배송차를 볼 때마다 ‘우리 딸이 한 작업’이라며 세상에서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그는 우연히 자신의 이태원 작업실 앞 계단 틈새에 피어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땅에 조그만 화분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른바 ‘나난 가드닝’ 프로젝트. 이번 캔버스는 시멘트 계단이었던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의 마을도시재생 사업의 매뉴얼로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과 소통하고자하는 그의 실험은 ‘롱롱타임플라워’로 이어졌다. 친구 결혼식 때 종이로 만든 꽃을 부케로 주었더니 “어머, 시들지 않는 꽃이네!”라며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 전시에서 나난 꽃집을 열었다. 종이로 만든 꽃을 한송이 당 5000원에 팔아 관람객들이 자신만의 꽃다발을 만들어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관람객 중 한 명이 암 투병 하시는 할머니를 위해 롱롱타임플라워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드린 사진을 보내주었어요. 병원에는 꽃을 사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할머니가 너무 좋아하셨다는 거예요. 또 생화 알레르기가 있던 아내에게 처음으로 꽃을 선물하고, 프로포즈를 했다는 사연도 감동적이었죠. 소통을 통해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 작가로서 행복했습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raphy@donga.com}

“북유럽의 인테리어와 가구가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됐냐고요? 화려한 장식보다는 기능을 우선시한 실용주의에 비결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같은 남유럽에서는 스타일을 중시했지만 스칸디나비아는 심플하면서도 편리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해 왔습니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웨덴의 디자인 그룹 ‘노트 디자인 스튜디오’의 설립 멤버이자 감각적인 공간 건축가로 유명한 다니엘 헥셰르(46). 그는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 참석해 ‘하나로 모인 생각’을 주제로 북유럽 디자인 철학에 대해 강의했다. 헥셰르는 최근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1988년에 지어진 낡은 아파트를 리모델링하고 인테리어를 공개하는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보통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 화이트나 그레이 등 심플한 색상이 주가 되는 것과는 달리, 그는 핑크와 블루 등 감각적인 색상을 믹스하고 다양한 소품을 활용해 경쾌하게 변신시켰다.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주거공간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한 셈이다. “인터넷을 통해 공개했는데 중국이나 브라질에서도 제 집을 봤다고 연락이 오더군요. 평소 고객 성향이나 예산상 제약 때문에 못했던 색채 표현이나 소재에 대한 실험을 맘껏 할 수 있었던 프로젝트입니다. 내 집이 어린 시절 갖고 놀던 공구박스나 실험연구소가 된 기분이었죠.” 보통 스칸디나비아에서 가구가 발전한 까닭에 대해서는 겨울철 추운 날씨에 실내생활이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최근 유럽의 경제적 상황에 따른 해석도 추가했다. “원래 유럽에서 가구와 디자인은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가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런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래 지난 10년간 영국,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경제침체를 겪었어요. 이곳의 우수한 디자이너와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기업들과 앞다퉈 협업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됐죠.” 실제로 덴마크의 ‘무토’나 ‘헤이하우스’ 같은 디자인 브랜드는 ‘뉴(New) 노르딕’을 추구한다. 전통적으로 무채색 위주였던 북유럽 스타일 가구에서 벗어나 내추럴한 원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남유럽 스타일의 화려함을 가미하기도 한다. 헥셰르는 올해 5월에도 한국 기업과 디자인 협업을 논의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한국은 도자기 같은 전통 공예품을 비롯해 케이팝, 패션 분야에서 슈퍼디자인 파워를 가진 국가”라며 “그런데 현대적인 가구, 인테리어, 생활용품 등에서 뚜렷한 디자인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한국인들이 가진 자신감과 정체성을 가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18명의 디자이너와 건축가 등으로 구성된 ‘노트 디자인 스튜디오’는 최고경영자(CEO) 없이 수평적으로 아이디어를 나누며 작업하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디자이너들 사이에는 수석, 시니어, 주니어, 인턴 같은 위계적 질서가 없다”며 “고참이라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인턴이 낸 아이디어가 더 좋은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보통 많은 건축·디자인 사무소 이름은 설립자 이름을 따서 짓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수십 명이 함께 협업을 통해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로젝트의 성공을 한 사람 이름으로 공을 돌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트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채용할 때 컴퓨터 기술보다 협업할 자세를 갖춘 사람을 먼저 뽑습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에 오른 윤제균 감독(50)이 6년 만에 영화 촬영현장에 복귀했다.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뮤지컬 영화 ‘영웅’이다. 내년 개봉 예정인 이 영화는 2009년 초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동명의 뮤지컬이 원작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 영화계에서 본격 뮤지컬 영화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러시아, 일본 등 해외 로케이션을 거쳐 강원 평창군 횡계리 인근에서 촬영 중인 윤 감독을 만났다. 》○ 이 시대의 영웅은 평범한 사람 “2012년 제가 운영하는 영화사 JK필름에서 ‘댄싱퀸’을 촬영할 때 배우 정성화 씨가 출연하던 뮤지컬 ‘영웅’을 보러 갔었어요. 큰 울림이 있어서 언젠가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국내에서는 생소한 뮤지컬 영화라서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해서 원작 뮤지컬을 영화 스크린에 맞게끔 창작을 했습니다.” ‘해운대’ ‘국제시장’ 등에서 거대한 스케일의 재난과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 윤 감독의 장기는 이 영화에서도 발휘된다. 안 의사는 정성화 씨, 안 의사의 어머니이자 정신적 지주인 조마리아 역은 나문희 씨가 맡았다. ―현대사의 역사적 인물을 다룰 때 고민은…. “영화적 상상력으로만 만든다면, 그 힘든 시기를 실제 지내오신 분들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거짓이 될 수 있다. 반면 고증에만 충실히 한다면 영화적 메리트가 없다. 현대사를 가족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좀 더 가까운 내 이야기로 느낄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가족에 대한 희생의 의미는 특별하다. 외국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6·25전쟁과 산업화 시대를 헤쳐 나온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은 이념 논란도 낳았는데…. “‘국제시장’이 개봉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당신은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겪어온 현대사가 워낙 엄혹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 편, 네 편에 대해 너무 민감한 것 같다. 건강한 비평보다는 편 가르기가 먼저다. 이 작품이 독일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초청됐을 때는 달랐다. 외국인들은 이 작품을 이데올로기가 아닌 영화 자체로 감상을 하더라. 현지 관객들로부터 분단의 아픔과 유머가 섞인 휴먼드라마, 한국의 현대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웅’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젊은 세대는 산업화 시대의 용광로와 같았던 성장기에 살았던 아버지 세대에 비해 기회도 적고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다. 그래서 사회 곳곳에 세대 간, 계층 간, 좌우 간 갈등이 벌어진다. 이 시대 필요한 영웅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해야 하고, 언론은 언론 본연의 비판을 잘해야 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 각자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영웅이고 애국자다.”○ “일장기말소사건 영화화 계획” ―올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영화배급시장에서 디즈니에 1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의 현주소는…. “한국 영화시장의 해외배급사 또는 대기업에 의한 독과점 문제는 늘 지적돼 온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도 ‘기생충’의 쾌거를 봤을 때 한국 영화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절반 가까이 되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찾기 어렵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창의성을 잃지 않는 감독들이 있어 희망이 있다.” ―우리 영화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한국영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천만 ‘대박 영화’보다는 30억∼40억 원의 제작비로 관객 300만∼400만 명이 드는 ‘중박 영화’가 꾸준히 나와야 한다. 블록버스터 작품은 소수의 검증된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를 쓸 수밖에 없다. 안전하게 가야 하기 때문에 도전할 수가 없다.” 현대사 인물에 관심이 많은 윤 감독은 JK필름에서 ‘손기정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던 사연도 들려줬다. “시나리오 자료를 준비하면서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조사하게 됐다. 1936년 8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전이 열리던 당시 광화문 네거리 동아일보 사옥 앞에 조선 군중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군중들은 동아일보 편집국이 틀어놓은 라디오 생중계를 통해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메달 소식을 듣고 새벽 한 시까지 만세를 연창했다고 한다. 영화로 만들 때 이 장면을 꼭 재현해보고 싶다. 동아일보 100년 중에서도 일장기말소사건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가장 큰 라이벌은 신인감독” 윤 감독은 당초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한 달간 무급휴직을 해야 했다. 당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영화 ‘낭만자객’(2003년)으로 쓰디 쓴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는 2014년 ‘국제시장’을 촬영할 때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전 스태프를 위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했다. “저도 영화계 현장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24시간 촬영, 2∼3주 연속 촬영 등 비인간적 대우가 너무 많았다. 당시 만들었던 표준계약서 내용은 3가지로 심플했다. △1주일에 한 번은 쉬자 △하루 12시간 이상은 찍지 말자. 그 이상 찍게 되면 추가수당을 주자 △촬영하다 다칠 수 있으니 4대 보험은 들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표준계약서를 쓰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물어보니까 인건비 추가수당으로 한 3억∼4억 원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했다. 투자사와 의기투합해서 바꿨다. 그랬더니 촬영현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촬영 끝나고 저녁시간에 운동하고, 1주일에 하루는 쉬고, 밤 12시가 넘으면 초과수당을 두 배로 주니까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예산은 좀 늘었지만,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됐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제작할 때 지켜온 원칙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TV나 영화, 인터넷에는 무겁고, 잔인하고, 공포 가득한 콘텐츠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 것을 잘 만들 자신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장르도 아니다. 초기에는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같은 상업영화를 만들었는데,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보니 작품 선택의 기준이 신중해졌다.” 윤 감독의 스마트폰 메모장에는 깨알 메모들이 제목과 함께 분류돼 있다.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본 코믹한 사연, 사업 아이템, 신문에서 읽은 좋은 글귀 등 그때그때 떠오른 아이디어를 기록한 메모장이다. ―국내외에서 라이벌로 생각하는 감독이 있다면…. “가장 큰 라이벌은 ‘신인감독’이다. 아침마다 샤워하고, 밤에 세수할 때마다 생각한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인감독들 보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과연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동료들은 다 친구다.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봤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보다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런데 정말 잘 찍는 신인감독들을 보면 겁난다. 영화는 한두 편 잘되면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도태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늘 준비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갈고닦는 수밖에 없다.” ―내년은 총선의 해다. 좌우, 세대 간 갈등이 우려가 되는데…. “‘내 안에 그놈’이라는 영화가 있다. 왕따를 당하던 뚱뚱한 고등학생과 엘리트 유부남 사장이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영화 속 인물은 처지가 바뀌면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도 촬영할 때 감독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투자자의 입장, 스태프의 입장에서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방향을 찾게 된다. 정치하시는 분들도 국민 입장에서 역지사지하고, 여와 야, 노와 사가 서로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좀 유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평창=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여기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생명이 중요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더해져 그들이 된다.” 위험천만한 세계의 무력분쟁 지역으로 파견됐던 이재헌 정형외과 전문의의 현장 이야기다. 그는 2015년 국경없는의사회(MSF) 회원이 된 후 2016년 4월에 요르단 람사에서 시리아 내전으로 팔다리가 터져나간 환자들을 만나고, 그해 7월에는 아이티 타바에서 매일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린 환자들을 수술했다. 2018년 6월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비무장 민간 시위대를 향한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쓰러진 사상자들을 치료했다. 의사들은 무력분쟁 지역으로 파견 갈 때마다 납치되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망 시 상속인을 지정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그의 일기에는 폭탄에 다리가 절단된 만삭의 17세 소녀 이야기 등 구호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두껍고 검은 부리, 희고 동그란 눈. 귀여운 도도새가 정글 숲속에 숨어 있다. 울창한 나무 숲은 도시로 변하고 도도새는 넥타이와 양복바지 차림의 회사원이 된다. 정글처럼 복잡한 도시에서, 도도새는 또다시 길을 잃고 만다…. 아프리카 모리셔스섬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도도새’를 전문으로 그리는 작가 김선우(31·사진). 300여 년 전에 사라진 이 새를 찾기 위해 그는 2015년 진짜로 아프리카를 한 달간 다녀왔다. 그는 지난해 서울 을지로 조명 상가의 버스정류장에 밤마다 환하게 밝혀지는 도도새 그림을 그렸다. 또 한강의 마포대교 100m 구간에 국내의 멸종위기 새들과 함께 도도새를 그렸다. “도도새는 원래 날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모리셔스섬 천혜의 풍부한 먹이가 있는 자연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날개가 퇴화했죠. 15세기에 이 새를 처음 발견한 포르투갈 선원들이 날지도 못하고, 도망도 가지 못하는 이 새를 바보라는 뜻의 ‘도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결국 1681년 마지막 도도새가 잡아 먹혀 멸종되고 말았죠.” 그는 날개를 잃어 멸종된 도도새의 사연을 인터넷에서 접한 뒤 “나 같은 현대인을 닮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이 되고 싶은 게 뭐냐고 하면 1등이 공무원이잖아요. 저도 작가 생활을 하면서 주변에서 ‘굶어 죽는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모두 사회가 정한 프레임과 기준에 무작정 자신의 삶을 맞춰 가면서 꿈을 너무나 쉽게 포기합니다. 새의 진정한 가치는 하늘을 경계 없이 날아다니는 자유인데 그걸 포기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날개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내고 있는 것이죠.” 그의 도도새는 언제부턴가 사람의 몸통과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명화 속의 장면을 도도새 얼굴로 패러디하고 새들이 ‘Save the DoDo’라고 쓰인 깃발을 흔드는 그림도 있다. 단순히 멸종위기 자연을 보호하자는 뜻도 되지만 ‘도도새’로 상징되는 자유와 꿈의 가치를 잃지 말자는 외침이기도 하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주류 경제학자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대침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자산시장의 투기적 행태와 부적절한 정책 대응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했다. 경제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경제학계 외부자의 관점에서 역사적 실증적 측면에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한다. 저자는 1970년대 중반 이래 지난 수십 년간 주류 경제학을 지배해 온 이론에서 일곱 가지 주요 명제를 도출하고, 각각의 명제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본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수적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방임주의가 되고, 마치 자연과학의 일반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숭상돼 왔다. 그러나 저자는 경제학은 매끈한 ‘과학’이 될 수 없으며 더러운 ‘현실’에 기반을 둔 실증과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공익법인 우리글진흥원(이사장 김광시)은 12일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 신영기금회관에서 ‘2019 우리글 사랑 자치단체 대상’ 시상식을 가졌다. 김상호 경기 하남시장(사진)이 소통 부문 대상을 받았고 정순균 서울 강남구청장과 박일호 경남 밀양시장이 각각 문화와 관광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우리글 사랑 자치단체 대상’은 바르고 쉬운 공공 문장을 일선 행정에 구현한 자치단체에 주는 상으로 2013년 제정됐다. 올해 수상자는 각종 안내문과 홈페이지, 문화재 설명문을 알기 쉽고 정확한 글로 선보이고 공직자 국어 능력 향상에 애쓰는 등 공공문장 바로 쓰기에 모범을 보였다. 이 상은 ‘공공문장 바로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공익법인 (사)우리글진흥원에서 바르고 쉬운 공공언어 사용으로 소통을 촉진하고 국어 진흥에 애쓰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를 응원하기 위해 2013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는 상이다. ‘공공문장 바로쓰기 운동’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우리말글이 훼손되고 있는 가운데, 영향력이 큰 공공기관만이라도 공공언어 사용에서 전 국민의 모범이 되게 하자는 운동이다. 공공기관이 만드는 공문서 등을 사전 감수하고, 공직자 국어 능력 향상 교육을 실시하며, 잘못된 공공문장을 시민들이 바로잡도록 하고 있다. 전승훈 문화전문 기자raphy@donga.com}

《오렌지색 눈썹,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원피스, 그리고 볼에 연지곤지를 찍고, 모자를 쓴 여인이 나타났다. 총천연색 메이크업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의상은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러시아 인형처럼 보이려고 한 패션 콘셉트입니다. 그런데 오다가 친구가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전통 결혼식에서 쓰는 모자(족두리) 사진을 보내줬지 뭐예요. 너무 예뻐서 눈이 휘둥그레져 걷다가 그만 꽈당 넘어졌죠!” 》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8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강연회를 가진 베선 로라 우드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르메스, 발렉스트라, 토리버치, 로젠탈, 페리에주에 등 글로벌 브랜드와 연이어 협업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는 화려한 컬러와 패턴을 조합한 쇼윈도와 가구, 가방과 주얼리까지 다양한 디자인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2014년 에르메스 윈도 프로젝트는 화가 앙리 루소의 정물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작품을 2D에서 3D로 바꿔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에르메스는 ‘노동의 과실’이라는 문구를 내걸 정도로 핸드메이드와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브랜드예요. 그런 정신이 담긴 오브제와 디스플레이 세트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토리버치와 협업한 카나페 시리즈는 ‘가짜 음식’을 테마로 만든 설치물이다. 치약을 짜놓은 듯 독특한 무늬로 디자인한 발렉스트라 가방에는 ‘여러 색이 레이어링된 나폴리 아이스크림과 1970년대 아버지의 넥타이, 여기에 약간의 민트 치약을 섞은 어딘가’라는 흥미로운 설명이 붙어 있다. 그는 “사람들은 자연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산업화도 추구하는 이중적인 발전을 해왔다. 저는 늘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럭셔리 브랜드가 흔히 주목하지 않은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재학 시절부터 맨홀 뚜껑이나 래미네이트, 대리석, 벽돌처럼 일상의 사물을 관찰해서 패턴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다”는 설명이다. 또한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영국 유명 화가)가 1980년대 중반 팩스 머신으로 출력한 패턴으로 작품을 만들었듯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나도 여러 도구에 도전해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복사기 위에 살라미(말린 햄)를 놓고 고기의 마블링을 수차례 반복해서 카피해 봤어요. 복사기의 채도를 조절해 빨강, 파랑, 초록 등 특정 색만 강조해서 복사하면 끊임없이 새로운 패턴이 나왔죠. 또 폐목재를 살펴보다 ‘갈색도 모두 같은 갈색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어요. 모든 사물에 접목된 ‘세컨더리 컬러(Secondary Colour)’를 탐구하면서 나만의 색채 조합을 찾게 됐습니다.” 그녀는 각국 여행에서 찾아낸 컬러와 패턴을 디자인에 활용하기도 한다. 멕시코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바실리카 성당 창문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감을 받은 ‘과달루페 소파’가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강남구 봉은사, 중구 을지로, 종로구 광장시장 등을 찾았다. “봉은사의 초록색 문과 빛바랜 살구빛 건물 색채가 너무 좋았어요. 재래시장에서 본 옷과 섬유, 건물 지붕, 을지로에서 본 파이프와 조명 등에서 무궁무진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몇 년 안에 한국 등 아시아에서 발견한 컬러와 패턴을 활용한 디자인 작품을 시도해 보겠습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오렌지색으로 칠한 눈썹, 현란한 무늬가 새겨진 원피스, 볼에는 연지곤지를 찍고 모자를 쓴 여인이 나타났다. 총천연색 메이컵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의상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러시아 인형처럼 보이려고 한 패션 콘셉트예요. 그런데 오다가 친구가 스마트폰으로 한국의 전통 결혼식에서 쓰는 모자(족두리) 사진을 보내줬지 뭐예요. 너무 예뻐서 눈이 휘둥그레져 걷다가 그만 꽈당 넘어졌죠!”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18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강연회를 가진 베단 로라우드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르메스, 발렉스트라, 토리버치, 로젠탈, 페리에 주리 등 명품 브랜드와 연이어 협업을 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는 화려한 컬러와 패턴을 조합한 쇼윈도와 가구, 가방과 주얼리까지 다양한 디자인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2014년 에르메스 윈도 프로젝트는 화가 앙리 루소의 정물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작품을 2D에서 3D로 바꿔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어요. 에르메스는 ‘노동의 과실’이라는 문구를 내걸 정도로 핸드메이드와 장인정신을 존중하는 브랜드예요. 그런 정신이 담긴 오브제와 디스플레이 세트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토리 버치와 협업한 카나페 시리즈는 ‘가짜 음식’을 테마로 만든 설치물이다. 치약을 짜놓은 듯한 독특한 무늬로 디자인 된 발렉스트라 가방에는 “여러 색이 레이어링된 나폴리 아이스크림과 1970년대 아버지의 넥타이, 여기에 약간의 민트 치약을 섞은 어딘가”라는 흥미로운 설명이 붙어 있다. “어릴 적부터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된 ‘가짜 음식’을 갖고 잘 놀았어요. 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가치를 지닌 물건에 항상 흥미를 갖고 있죠. 사람들은 자연을 좋아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산업화 개발을 추구해왔기 때문이죠. 저는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해요.” 그는 럭셔리 브랜드가 흔히 주목하지 않은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재학시절부터 맨홀 뚜껑이나 라미네이트, 대리석, 벽돌처럼 일상의 사물을 관찰해서 패턴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1980년대 중반 팩스 머신으로 출력한 패턴으로 작품을 만들었듯이, 창의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나도 다양한 도구에 도전해왔다”고 말했다. “베니스에서 복사기 위에 살라미(말린 햄)를 놓고 고기의 마블링을 수차례 반복해서 카피해봤어요. 복사기의 채도를 조정해 빨강, 파랑, 초록 등 특정색만 강조해서 복사를 하게 되면 끊임없이 새로운 패턴이 나왔죠. 또 재활용 폐목재를 살펴보던 중 ‘갈색도 모두 같은 갈색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어요. 모든 사물에서 연관된 ‘세컨더리 컬러’(Secondary Colour)를 탐구하면서 나만의 색채 조합을 찾게 됐습니다.” 그는 영국 뿐 아니라 각국을 여행하던 도중 찾아낸 컬러와 패턴을 디자인에 활용하기도 한다.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 성당 창문의 스테인드글래스에서 영감을 받은 ‘과달루페 소파’가 대표적이다. 그는 “런던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린 작품과 멕시코 과달루페, 치아파스 등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보면 색깔과 스타일이 대조적이다. 다양한 작품들은 고유의 색깔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방문기간에도 강남구 코엑스 앞에 있는 사찰인 봉은사, 을지로 조명상가, 광장시장 등을 찾아 이방인에게는 신기하게만 보이는 풍경들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봉은사에 갔었을 때 스님들의 독경소리, 초록색 문과 빛바랜 살구빛 건물, 특이한 나무 조각들이 너무 좋았어요. 다음날에는 을지로와 광장시장 등을 걸으면서 사람들이 옷을 수선하고, 기계를 고치는 장면을 몇 시간 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쳐다봤어요. 재래시장에서 본 옷과 천의 색상과 무늬, 건물 지붕, 파이프와 조명 등이 굉장히 특이해서 무궁무진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향후 몇 년 안에 한국 등 아시아에서 발견한 컬러와 패턴을 활용한 디자인 작품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법무법인 웅빈의 채정석(63) 대표변호사가 6일 중앙중·고등학교 교우회 정기총회에서 제 19대 중앙교우회장으로 선출됐다. 부장검사 출신인 채 변호사는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사장 법무실장, 법무법인 렉스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에이펙스 대표변호사를 거쳐 2014년부터 법무법인 웅빈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별’ 속 남자는 비통한 얼굴로 한쪽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이렇게 심장을 마음과 연결짓는 은유는 우리 일상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1982년 12월 1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말기 심부전 환자이자 은퇴한 치과의사인 바니 클라크가 인류 최초로 인공심장을 이식받았을 때, 그와 서른아홉 해를 함께한 부인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이가 여전히 저를 사랑할까요?” 미국 심장내과 의사인 저자는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기관인 심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대의학에서 중세, 현대의학에 이르기까지 ‘과학적인 심장’뿐 아니라 자신의 개인사를 비롯해 사회심리학적 의미의 ‘정서적 심장’까지 맛깔나게 풀어낸다. 살아 있는 심장은 쉬지 않는다. 다만 뛸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장은 거의 30억 번을 박동한다. 박동할 때마다 심장은 피가 총길이 16만여 km에 이르는 혈관을 순환하도록 뿜어낸다. 일주일 동안 심장을 통과하는 혈액을 모으면 웬만한 집 뒷마당의 수영장쯤은 너끈히 채울 수 있을 정도. 오늘날 심장은 감정의 중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누가 뭐래도 심장은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변한다. 조금만 슬퍼하고, 화를 내도 심장은 거침없이 두근댄다. 이 때문에 저자는 “심장은 삶과 죽음을 부여하는 동시에 ‘은유’를 끊임없이 부추겨왔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 문장(紋章)에 그려진 심장은 충정과 용기의 상장이었다. 심장은 로맨틱한 사랑의 중심이기도 하다. 사랑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트 모양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모양은 성심(聖心), 즉 예수의 신성한 심장으로 믿어진다. 9·11테러 현장에서 응급의료진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심장질환의 사회심리적 요인도 잊지 않는다. 저자는 “심장은 일종의 펌프다. 그러나 감정적인 펌프다”라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슬픔은 극심한 심근 손상을 야기할 수 있다. 심장박동과 같은 무의식적 과정을 조절하는 신경은 괴로움을 감지해 비적응성 투쟁도피반응을 유발함으로써 혈관에 수축신호를 보내고 심장을 급속히 뛰게 하고 혈압을 상승시켜, 궁극적으로는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심장은 집과 같다. 방과 문이 있다.(…) 산소를 소진한 혈액은 우심방으로 돌아와 역류방지 장치를 통과한 뒤 우심실로 들어간다. 우심실은 혈액을 폐로 내보낸다. 산소를 충전한 혈액은 폐를 떠나 좌심방으로 들어가고, 또다시 역류방지장치를 거쳐 좌심실로 들어갔다가 대동맥을 통해 전신으로 내보내진다. 온몸을 흐른 혈액은 두 개의 대정맥에 모여 우심방으로 되돌아간다. 다시금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혈액순환의 원리는 17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확인됐다. 심장의 실체를 알기 위해 인류는 금기를 깨고 관찰을 감행해왔다. 누군가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려가며 탐구해온 결과 인공심장까지 개발하는 역사가 책에 담겼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난가을,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던 장인어른의 심장박동수가 점점 줄어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결국 계기판에 ‘0’이라는 숫자가 떠오르고, 그래프가 일직선이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 책은 심장을 다룬 글이지만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를 던져준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영화 ‘기생충’ 보셨나요? 전 그 영화가 ‘건축의 호러’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함께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는 게 굉장히 큰 공포잖아요.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커뮤니티를 꾸렸을 때 공포감을 덜고,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건축가 송멜로디)○ 나무를 닮은 집, 트리하우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트리하우스’(72가구)는 그야말로 나무를 닮은 집이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각 가구들을 겹겹이 쌓아올렸고, 모든 가구가 중앙 정원과 연결돼 있다. 이 건물은 10월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2019 건축 마스터상(AMP)’을 수상했고, 영국 디자인매거진이 선정하는 ‘2019 Dezeen Awards’의 세계 톱5 주거 프로젝트로 뽑히기도 했다. 예일대 건축대학원에서 ‘코(Co)리빙 건축’을 전공한 송멜로디 씨(29)는 “고시원으로 상징되는 공유주택에 대한 기존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법률적으로 고시원은 무조건 부엌 등 공유 공간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고시원에는 사회적인 낙인이 존재해요. 하루빨리 성공해서 탈출해야 되는 공간, 옆방에 있는 사람은 ‘귀신’ 같은 존재이고…. 따뜻한 커뮤니티 공간이 되려면 무엇보다 햇빛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모티브로 한 중정에는 삼면의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입주자들은 공간의 심장과도 같은 중정에서 커피를 마시고, 일하고, 함께 요리하고, 식사하고, 요가를 한다. 지하주차장에는 차량 공유 서비스가 있어 시간당 7000원 정도에 테슬라, 벤츠, BMW 등 고급 수입차도 빌릴 수 있다. 3개월 기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는 130만∼140만 원대다.○ 엘리베이터가 마을버스인 ‘유니언타운’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2호선 당산역 부근의 ‘유니언타운’은 30년 넘은 9층짜리 직업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복합생활공간이다. 이 건물에 들어서면 마을버스처럼 디자인된 엘리베이터가 반긴다. 4, 5층 공유 오피스, 6∼8층 주거시설 외에도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가는 행선지가 표시돼 있다. 입주자들이 말하는 가장 큰 이점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인맥과 경험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다. 당산철교와 한강의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9층 루프톱에서는 핼러윈 파티, 콘서트, 독서모임, 영화 상영과 같은 소모임이 펼쳐진다. 2층 영어 커뮤니티 카페에서는 수다를 떨며 드라마나 퀴즈를 통해 영어를 배우는 ‘소셜(Social) 러닝’이 이뤄지고,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입주자들이 GX(그룹운동)를 하거나, 한강변을 함께 달리기도 한다.입주자가 대부분 20, 30대인 이 건물은 전체가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3층에 있는 6개의 공유 주방에는 창업을 꿈꾸는 셰프들이 입주해 있다. 이곳은 ‘먹방’을 찍는 유튜버들의 인기 촬영 장소다. 입주자인 박재성 씨는 ‘금빛행성32 파크’라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디자이너. 그는 “공유 오피스에 입주한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과 로고 디자인, 해외 진출 등에서 수많은 협업을 하고 있다”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외국인 친구도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소중한 네트워크 공간”이라고 말했다. 유니언타운은 주거에는 보증금 없이 월 80만 원, 공유 오피스는 월 25만 원이 든다. 이 건물을 만든 유니언플레이스의 이장호 대표는 “경리단길 등 맛집 위주의 도심 재생은 핫플레이스로 떴다가 식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며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해 일과 주거, 공부, 운동, 사교를 함께 하는 수직형 마을을 세우는 것은 새로운 도심 재생 모델”이라고 말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영화 ‘기생충’ 보셨나요? 전 그 영화가 ‘건축의 호러’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함께 공간을 사용하지만 그게 누군지 모른다는게 굉장히 큰 공포잖아요.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을 모른다는 익명의 공포가 있잖아요. 자발적인 커뮤니티를 꾸렸을 때 그 공포감을 덜고, 조금 더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건축가 송 멜로디) ●나무를 닮은 집, 트리하우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트리 하우스’는 그야말로 나무를 닮은 집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각 세대들이 겹겹이 쌓아올렸고, 전체 건물이 하나의 집처럼 모든 세대가 중앙 정원과 연결돼 있다. 이 건물은 지난 10월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2019 건축 마스터상(AMP)’에서 주거건축 부문상을 수상했고, 영국 디자인매거진에서 선정하는 ‘2019 Dezeen Awards’의 세계 톱5 주거 프로젝트로 뽑히기도 했다. 이 건물은 예일대 건축대학원에서 ‘코(Co)리빙 건축’을 전공한 송 멜로디 씨(29)가 설계했다. 그는 “고시원으로 상징되는 공유주택에 대한 기존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법률적으로 고시원은 무조건 공유하는 공간들이 있어야 해요. 부엌도 공유해야 하고, 거실도 있어야 하고…. 그런데 고시원에는 사회적인 낙인(stigma)이 존재해요. 하루 빨리 성공해서 탈출해야 되는 공간, 옆방에 있는 사람은 ‘귀신’같은 익명의 존재고…. 따뜻한 커뮤니티 공간이 되려면 무엇보다 햇빛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모티브로 한 중정에는 천장과 삼면의 창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모든 입주자들은 중정을 거쳐 개인방으로 가기 때문에 커뮤니티 공간의 심장과도 같은 부분이다. 입주자들은 중정에서 일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요리하고, 식사를 하고, 매트리스를 깔고 요가를 한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옥상 정원과 애완견 파크도 공유하공, 지하주차장에서는 스타트업 ‘네이비’가 제공하는 차량 공유서비스가 있어 시간당 6000~7000원 정도에 테슬라 벤츠 BMW 등 고급 수입차를 빌릴 수 있다. 총 72세대가 입주해 있는 주거공간은 모두 개인실. 면적은 16㎡(5평) 정도로 작지만, 천장 높이가 3m인데다 복층구조로 돼 있어 공간감이 널찍하다. 3개월 기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는 130만~140만 원대. 착한 가격은 아니지만 청소와 빨래 서비스를 해주는데다, 다양한 시설과 혜택을 등을 공유할 수 있어 객실이 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엘리베이터가 마을버스인 ‘유니언 타운’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2호선 당산역 앞에 있는 ‘유니언타운’(union town)은 올해 4월에 오픈한 복합생활문화공간이다. 30년 넘은 9층짜리 현대직업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 건물에 들어서면 마을버스처럼 디자인된 엘리베이터가 반긴다. 4~5층 공유 오피스, 6~8층 주거시설 등으로 가는 행선지가 표시돼 있다. 입주자들이 말하는 가장 큰 이점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인맥과 경험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비결은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당산철교와 한강의 야경을 볼 수 있는 멋진 뷰를 가진 9층 루프탑에서는 입주자들이 모여 핼러윈 파티, 콘서트, 독서모임, 영화상영, 필라테스와 같은 소모임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2층 영어 커뮤니티 카페에서는 게임이나 드라마에 대해 수다를 떨며 영어를 배우는 ‘소셜(Social) 러닝’이 이뤄지고, 입주자에겐 무료인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회원들이 함께 GX를 하거나, 아예 한강변을 함께 달리기도 한다. 입주자의 90% 이상이 20~30대인 이 건물은 전체가 청년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3층에 있는 6개의 공유주방에는 창업을 꿈꾸는 셰프들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배달음식, 푸드트럭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셰프들이 건물 1층에 고기집을 직접 창업하기도 했다. 공유주방에서는 일반을 대상으로 한 쿠킹클래스도 열리고, 먹방을 찍는 유튜버들의 인기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4~5층 공유 오피스에 입주해 있는 사람들은 디자이너, 프로듀서 등 프리랜서들이 많다. 월 25만 원에 책상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6~8층 코리빙 하우스에는 K팝 문화를 체험하러 온 외국인들도 많다. 9층 루프탑에서 펼쳐지는 각종 파티와 헬스장, 카페에서 자연스럽게 외국의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목격된다. ‘금빛행성32 파크’라는 캐릭터를 개발하는 디자이너 박재성 씨는 공유 주거와 오피스에 입주한 스타트업 대표들과 로고 디자인 등 수많은 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외부 손님이 올 경우 회의실에서 미팅을 하고, 공유키친에서 셰프들이 해주는 요리로 점심식사를 한다. 박 씨는 “1년간 준비해온 책의 출판기념회를 9층 루프탑에서 할 예정”이라며 “홀로 일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주고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 건물을 운영하는 유니언플레이스의 직원은 48명. 이장호 대표(44)를 제외하고는 90% 이상이 20대다. 이 대표는 노후화된 중소형 건물을 활용한 새로운 도시재생 모델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공유 주택과 공유 오피스와 같은 부동산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졸업할 때 즈음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벗어날 때였다. 당시 외국계 자본이 들어와 국내 부동산을 헐값이 사들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동산에 간접투자하는 리츠 펀드도 생겨났다. 그런 상황에서 부동산 펀드 매니저에 관심을 갖게 됐다. 리츠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부동산을 매입하고, 잘 활용해서 수익을 나눌 수 있다. 부동산 투자 수익을 누군가가 독점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부동산의 민주화’ 개념으로 다가왔다. 이걸 직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 4학년 때부터 공부모임에 쫓아다녔다. 첫 직장인 KB부동산신탁이었다. 리츠관련 업무를 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부동산 금융을 더 공부했다. 귀국 후에도 부동산 투자 펀드 일을 계속해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40대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고민이 많았다. 3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다.” ―창업 이후 부동산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바뀌었나. “금융권 회사에 있을 때 투자했던 것은 대부분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창업 이후에는 골목상권에 있는 중소형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국내 도시가 오래되다보니 건물이 노후화하고, 건물주도 고령화돼 빛을 잃어가는 중소형빌딩이 많다. 노후화된 도시형 빌딩을 운영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싶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어떤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부동산을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도시형 빌딩을 재생하는 솔루션은? “요즘 경리단길이나 삼청동, 익선동 등 서울에서의 도시재생은 리테일 식당 위주로 이뤄지다보니, 핫플레이스로 확 떴다가 금방 트렌디하게 유행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류의 도시재생 보다는, 일도 하고, 주거도 하고, 공부도 운동도, 먹거리도 함께 즐기고, 외국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공간의 매력도가 높아지고, 지역의 상권도 살아나고, 그렇게 지역이 선순환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어렵지만 ‘복합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공유오피스, 공유주거 등 단일 목적의 공간으로 규모의 경제를 키우기보다는, 한 공간에 많은 스토리를 담아내는 생활밀착형의 복합공간을 수직적으로 만들어서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고, 시너지를 이뤄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각 분야의 젊은 친구들이 모여서 직접 컨텐츠를 개발하고 기획했다. 창업을 꿈꾸는 셰프들이 F&B 공유주방과 식당을 운영하고, 커피와 제빵에 관심있는 친구들이 1층에 베이커리 카페를 만드는 식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컨텐츠를 만들고, 집합체로 복합공간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도시재생을 통해 지역도 살리고, 청년들의 스타트업 인큐베이팅도 할 수 있는 모델이다.” ―이 건물은 원래 어떤 빌딩이었나. “원래 30년 된 현대직업학교 건물이었다. 노후화가 많이 진행된 건물을 펀드를 통해 매입해서 리모델링했다. 건물은 코람코 자산운용이 펀드를 만들어 매입했고, 유니언플레이스가 임차해 운영하고 있다. 30년 된 건물이다 보니까 저희가 원하는 목적과 기능에 맞춰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리모델링 컨셉트는 복합생활공간이다. 물론 문화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첫 번째로 생각했던 것은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시신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저자는 평생 2만 구 이상의 시신을 부검하고, 헝거퍼드 대학살, 9·11테러, 발리 폭탄 테러 등 굵직한 사건들에 참여한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 그는 죽음 앞에서 가장 냉정해야 하는 사람이다. 법의관은 죽은 자들의 의사다. 시신을 통해 살인사건을 재구성하고,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그래서 법의관들은 누구의 죽음이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법의관이 흔들리면 피고인은 저지르지 않은 일로 유죄 판결을 받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도 사건의 진실이다. 30년간 숱한 죽음 앞에서 냉철했던 그도 2016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았다. “사고 현장에서 몇 달 동안 인체 조직과 뼈를 찾는 작업을 한 인류학자는 비행공포증이 생겼다.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몸 곳곳에, 팔다리에까지 자기 이름을 써넣을 정도였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팔다리가 절단되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이 책에는 법의학자가 되기까지의 수련 과정,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낸 사연, 테러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고통까지 생생한 문체로 담겨 있다. 2018년 영국 ‘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건축물의 첫인상은 창(窓)에서 시작된다. 창의 모양과 크기에 따라 건물의 표정이 확 달라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삶의 풍경, 창에 비친 하늘과 구름, 창을 통해 비치는 내부의 모습…. 현대 도시 건축물의 창을 주제로 한 사진전 ‘전지적 창견시점 Ⅱ’가 19일 서울 마포구 동교로 이건하우스 갤러리에서 개막했다. 건축사진 작가 5명이 서울 을지로, 용산, 중림동, 제기동 등에서 창과 삶이 서로에게 개입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 30여 점이 전시된다. ‘전지적 창견시점’의 ‘전’은 건축과 도시의 터전인 땅을 의미함과 동시에 창과 유사한 모양을 띠고 있는 ‘밭 전(田)’ 자에서 따왔다. 필름카메라로 찍는 건축여행가인 김예슬 작가는 원래 유리로 안팎을 소통해주던 창문에 간판이 붙고, 불투명하게 되면서 벽처럼 변해가는 창의 ‘삶과 죽음의 연대기’를 들려준다. 작가 이한울은 강남과 제기동 두 지역 상권에서 세대 간, 지역 간 차이를 보여주는 창문을 조명한다. 작가 구의진은 종교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인간의 염원에 빗대어 표현한 작업을 공개하고, 프리랜서 사진가 김원은 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평범한 도시인들의 삶을 그렸다.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준석 작가는 서로를 왜곡된 얼굴로 비추는 창들의 사진을 프레임 속에 회화적으로 담아냈다. 전시에 참여한 건축사진 그룹 ‘KAP’ 작가들은 건축과 디자인, 영화연출 등 다양한 전공자 출신이다. 이들은 거대한 표면이나 공간으로 압도하는 건축사진 대신 미시적인 시각에서 도시 풍경에 접근한다. 김예슬 작가는 “창은 은유적으로 ‘꿈’을 상징하기도 하며, 건축할 때도 가장 신중히 공을 들이는 요소”라며 “사진을 통해 낯설게 바라본 도시는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고 말했다. 29일까지. 무료.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바이올린은 흔히 300∼400년 전에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 지역에서 제작한 장인들의 악기를 최고로 꼽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명품 고(古)악기 복원 및 제작, 감정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르트(56)가 14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 왕실이 소유했던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 ‘에든버러 공작(The Duke of Edinburgh)’과 172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등 고악기 4대도 들고 왔다. 개당 최소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이상 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영국 런던에 이는 고악기 복원 및 제조공방에서 30년 넘게 일해왔으며 '플로리안 레온하르드 화인 바이올린'사 대표인 그는 고악기 전문 딜러이자 감정 분야 권위자다. 그는 막심 벤게로프,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니콜라 베네데티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금호문화재단 등 음악 관련 단체의 악기 구입을 조언해 왔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컬렉터들에게 조언해주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 ―‘에든버러 공작’은 어떤 악기인가. “스트라디바리가 1724년에 한 독일 백작의 주문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이후 영국 왕실에 팔렸고, 1880년대 빅토리아 여왕이 아들인 알프레드 왕자(에든버러 공작)에게 줬다. ‘로열 피들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알프레드 왕자는 영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할 때 선상이나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이후 이 바이올린은 미국으로 팔려나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프리츠 크라이슬러, 외젠 이자이, 미샤 엘먼, 야샤 하이페츠 등 당시 유명 연주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위대한 악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콘서트장”이란 주장이었다. 법적 소송 끝에 박물관은 소유권을 포기했고, 이후 이 바이올린은 연주 악기로 활용돼왔다. ―왜 명품 고악기는 박물관에 있어선 안 되는가.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 최고 연주자들이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최고가 될 때까지 수정하고, 튜닝해온 악기는 소리가 좋을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더 많이 사용할수록 나무의 떨림을 통한 파동의 진폭이 좋아진다. 연주자가 모든 부분을 만져주고, 눌러주고, 마사지해줄 때 바이올린은 좋은 바이브레이션에 대한 메모리를 만들어낸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스트라디바디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형에 따뜻하고, 깊이 있고, 다채로운 컬러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르네리 델 제수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기 때문에 개성 있는 연주자들이 선호한다.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훨씬 더 예민해서 살살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한다. F1 레이싱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처럼 최상의 숙련도가 필요하다. 만일 재능 없는 운전자가 F1 카를 몬다면 빙글 돌다가 벽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세계적으로 고악기 시장의 규모는…. “연간 40억 달러(약 4조6740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현재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악기는 3000개 정도만 남아 있다. 희소성 때문에 가치는 계속 오른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주식시장은 폭락해도 스트라디바리 가격은 10% 이상 올랐다. 물론 가짜도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 100만 달러 이상 바이올린 가운데 10분의 1은 가짜로 봐야 한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그는 22세 때부터 런던의 바이올린 복원 공방에서 일했다. 이후 30여 년간 이탈리아 고악기를 복원하고, 제작하고, 책도 펴냈다. 세계적인 고악기 감정 전문가로도 활동하는 그에게는 ‘셜록 홈스’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가짜 바이올린을 밝혀내는 일은 홈스가 범죄 현장에서 수사하는 것과 똑같아요.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핏자국을 조사하고, 알리바이를 검증하듯이 바이올린을 보면서 증거를 찾습니다. 바이올린을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스캔해서 목재의 세포까지 검사하고, 접착제와 안료까지 정밀 조사하죠. 이러한 흔적과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배제해 나갑니다.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죠.” 2003년 이후 한국을 자주 찾은 그는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전시회에서 15세 연주자가 명품 악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던지 깜짝 놀랐다”며 “글로벌 음악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젊은 연주자에게 대여하는 사업이 더욱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바이올린은 흔히 300~400년 전에 이탈리아 북부의 크레모나 지역에서 제작된 장인들의 악기를 최고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델 제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명품 고(古)악기 복원 및 제작, 감정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드(56)가 14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 왕실이 소유했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에든버러 공작’(The Duke of Edinburgh)과 172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등 4대의 고악기도 함께 들고 왔다. 개당 최소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영국 런던에 있는 고악기 복원 및 제조공방인 ‘W.E Hill & Sons’에서 30년 넘게 일해 온 그는 고악기 전문 딜러이자 감정분야 권위자다. 그는 막심 벵게로프, 레오니다드 카바코스, 니콜라 베네데티와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금호문화재단 등 음악관련 단체의 악기 구입을 자문해왔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의 컬렉터들에게 자문해주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 ―‘에딘버러 공작’은 어떤 악기인가. “스트라디바리가 1724년에 독일의 한 백작의 주문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이후 영국 왕실에 팔렸고, 1880년대 즈음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왕자(에든버러 공작)에게 주었다. ‘로열 피들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앨버트 왕자는 영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할 때 선상이나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이후 이 바이올린은 미국으로 팔려나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프리츠 크라이슬러, 외젠느 이자이, 미샤 엘만, 야샤 하이페츠 등 당시 유명 연주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위대한 악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콘서트장”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법적 소송 끝에 박물관은 소유권을 포기하게 됐고, 이후 이 바이올린은 연주악기로 활용돼왔다. ―왜 명품 고악기는 박물관에 있어선 안 되는가.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최고가 될 때까지 수정하고, 튜닝해온 악기는 소리가 좋을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더 많이 사용될수록 나무의 떨림을 통한 파동의 진폭이 좋아진다. 연주자가 모든 부분을 만져주고, 눌러주고, 마사지해줄 때 바이올린은 좋은 바이브레이션에 대한 메모리를 만들어낸다.”―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스트라디바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형에, 따뜻하고 깊이 있고 다채로운 컬러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르네리 델 제수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기 때문에 개성있는 연주자들이 선호한다.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에 살살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한다. F1 레이싱 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처럼 최상의 숙련도가 필요하다. 만일 재능 없는 운전자가 F1 카를 몬다면 빙글 돌다가 벽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개성이 각기 다른 두 악기를 비교한 평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노래를 부르고, 과르네리는 말을 한다”(바딤 레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아무리 슬퍼도 너무 고고해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는 귀족이라면, 과르네리는 울고 싶을 때 땅바닥에 탁 퍼져 앉아서 통곡할 수 있는 솔직하고 겸손한 농부와 같아 인생의 맛이 묻어 있다.”(정경화)―세계적으로 고악기 거래 시장의 규모는 얼마인가. “연간 약 4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현재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악기는 약 3000개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 희소성 때문에 가치는 계속 오른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주식시장은 폭락해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가격은 10% 이상 올랐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 중 1721년산 ‘레이디 블런트(Lady Blunt)’라는 별명이 붙은 작품은 2011년 경매 당시 980만 8000파운드(당시 한화로 약 172억 원)에 팔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1741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비외탕(Vieuxtemps)’은 옥션에서 1600만 달러(약 179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레온하드는 22살 때부터 런던에서 바이올린 복원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 간 이탈리아 고악기를 복원하고, 제작하고, 책도 펴냈다. 세계적인 고악기 감정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는 ‘셜록 홈즈’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그는 “악기 시장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바이올린 중 10분의 1은 가짜로 봐야 한다”며 주의를 상기시켰다. “가짜 바이올린을 밝혀내는 일은 셜록 홈즈가 범죄현장에서 수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돋보기를 들여다보면서 핏자국을 조사하고, 알리바이를 검증하듯이 나도 바이올린을 보면서 증거를 찾죠. 바이올린을 CT촬영으로 스캔 해서 목재의 세포까지 검사하고, 접착제와 안료까지 정밀 조사합니다. 이러한 흔적과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배제해나갑니다. 결국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죠. 진짜냐, 가짜냐.” ―새로운 악기를 제작할 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 “런던에 있는 나의 작업장은 복원 전문가들에게 파라다이스다. 전 세계의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가 모든 이 워크숍을 거쳐 수리되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고악기들을 복원하면서 뚜껑을 열어보고, 틈을 메우고, 목재를 분석하면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터치하고, 느끼고, 기록해왔다. 이렇게 최고의 악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경험이 내 손과 머리에 쌓여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가 고악기 복원과 새로운 악기 제작에도 적용된다. 악기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그러한 장점을 종합하고 단점을 보완한 악기를 만들어낸다. 우리 공방에서 만들어낸 현대 악기의 경우 가격이 6만 달러 정도 한다.” 2003년 이후 한국을 자주 찾아 온 그는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전시회에서 15살짜리 연주자가 명품 악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연주하던지 깜짝 놀랐다”며 “글로벌 음악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대여해주는 사업이 더욱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

요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는 ‘공정’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특권계층의 반칙 행위에 대한 시선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정치권과 상류층에서 무심코 튀어나오는 특권의식에 찬 민감한 발언은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책은 미국 사회 엘리트 계층의 구조 변동을 다룬 컬럼비아대 사회학과 교수의 역작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엘리트의 성격은 변화하고 있다. 구(舊)엘리트들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자기들끼리만 폐쇄적으로 특권의식을 나눴다면, 신(新)엘리트들은 기회의 평등과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이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밤새 노력해 꽃피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만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특권의식과는 다른, 신엘리트들의 ‘특권(Privilege)’이다. 신엘리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구엘리트들의 특권의식에 반대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들이 실험실에서 밤잠을 설치며 갖은 노력 끝에 써낸 논문 한 편으로 올라온 사다리를 특권의식을 가진 구엘리트들은 그들만의 폐쇄적인 네트워크와 자원을 동원해 손쉽게 한번에 올라가 버리기 때문이다. 신엘리트들에게 자신들의 특권은 ‘고난과 역경’의 산물이지만, 구엘리트들은 ‘특권의식’에 의한 반칙이기에 이들은 하층보다 구엘리트들을 더 경멸하고 분노한다. 그렇다면 신엘리트들의 ‘특권’은 구엘리트보다 과연 더 공정할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을 품고 미국 사회 최고 엘리트의 산실인 명문 기숙사립학교 세인트폴 스쿨에서 1년간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과 교사들을 관찰한다. 연구 결과는 비관적이다. 미국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위치한 세인트폴 스쿨의 연간 학비는 4만 달러(약 4680만 원), 학생 1인당 책정된 학교 예산은 8만 달러로 부유층이 다니는 학교다. 이 학교 졸업생이기도 한 저자는 학교의 인종·계급적 다양성이 증가했지만, 부의 세습은 더욱 심화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학교의 신엘리트들은 오페라와 랩 음악을 동시에 즐기고,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기사식당에서도 편하게 어울린다. 위아래 계층과 편안하게 소통하는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싼’ 경험을 통해 몸 자체에 체화돼야 한다. 저자는 세인트폴 스쿨이 ‘다른 학교가 분노할 만큼’ 높은 아이비리그 합격률을 유지하는 비결도 폭로한다. 이 학교는 엄청난 재원을 통해 모든 학생들을 어느 분야에서든 톱으로 만들어낸다. 단 500명의 학생들에게 주어진 수백 개의 동아리들과 수많은 교과목들은 거의 무수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모든 학생이 어느 한 곳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조직돼 있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비리그 대학들과의 오랜 연줄. 학교 입시 담당자들은 입학 시즌이면 “열심히 전화를 돌린다”. 이처럼 모두를 우등생으로 만들어 낸 뒤 각 대학의 구미에 맞는 애들을 짝짓기 하는 것이 그들의 비결이다. 이 책은 학생들의 기숙사 신고식, 수업시간의 풍경 등을 생생히 담아 소설책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기회와 과정은 공정해졌다고 하는데, 왜 사회이동은 더욱 줄고 불평등은 심화될까. 신엘리트들은 “능력 때문이지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 아니야. 너희의 실패는 너희가 이런 사회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은 더 이상 성, 인종, 계급과 같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 능력의 문제로 치부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민주적 불평등’이다.전승훈 문화전문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