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송평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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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칼럼니스트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칼럼97%
사설/칼럼3%
  • [사설]문서 위조 연루된 국정원, 남재준 원장은 답해야 한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의 간첩 혐의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보원의 협조자인 김모 씨가 유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했다. 김 씨는 중국 싼허(三合)변방검사참(세관) 발행 문서를 위조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탈북자인 그는 중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점을 활용해 국정원으로부터 매월 월급을 받고 사안별로 사례비를 따로 받는 협조자로 활동했다. 국정원 측은 “위조인 줄 알았으면 김 씨의 신원을 밝혀 검찰 조사에 협조하도록 했겠느냐”며 위조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씨가 가족에게 남긴 유서에는 “가짜 서류 제작비 1000만 원을 국정원에서 받으라”는 내용이 있다. 정보기관은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해야 할 경우 외부인을 통해 해결하는 어두운 유혹에 빠지기 쉽다. 김 씨가 가져오는 서류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국정원에서 모른 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씨가 위조한 것은 유 씨의 출입경 기록 ‘出(출국)-入(입국)-入-入’이 작업자의 착오일 가능성이 크다는 싼허변방검사참의 설명 자료였다. 이 기록은 유 씨의 변론을 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법원에 제출했다. 출입경 기록이라면 출입이 번갈아 나와야 정상이다. 국정원이 제출한 유 씨의 출입경 기록에는 ‘出-入-出-入’으로 돼 있다. 어느 쪽의 출입경 기록이 맞는지와는 별도로, 김 씨의 싼허변방검사참 설명 자료는 위조로 밝혀졌다. 이번 사건은 한중 간 사법 공조 체제가 부실한 데도 원인이 있다. 중국 정부가 한국 사법기관의 요청에 출입경 기록만 확인해줘도 국정원에서 무리한 증거 수집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서 위조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다. 위조된 문서가 사법절차를 훼손하는 것을 국가기관이 방임했다면 국기문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국정원은 증거 조작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검찰은 국정원으로부터 송치 받은 사건을 검토해 법률 적용에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고 기소해야 한다. 그런데도 검찰은 국정원이 넘겨주는 자료를 받아서 법원에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하고 말았다. 검찰은 담당 검사의 직무 태만을 포함해 이번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유 씨는 남재준 국정원장 취임 직전에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위조문서는 유 씨가 지난해 8월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에 ‘남재준 국정원’이 항소심에 임하면서 제출된 것이다. 남 원장이 민주화 이후 첫 내란음모죄로 인정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을 적시에 처리한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국정원 개혁에 소극적이었다가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닌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남 원장이 증거 조작을 알고도 묵인했다면 물러나야 마땅하다. 몰랐다 해도 이에 상응하는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전 정권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이번 사건은 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야당과 협력해 국회의 국정원 개혁 논의에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국정원은 ‘셀프 개혁’이 제대로 안 된 것으로 드러난 이상 더 많은 민주적 통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201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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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안철수 벤처 정치의 리스크

    안철수 의원을 얼마 전 어느 간담회 형식의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시도지사 후보 영입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가시적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면전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정치인으로서는 아직도 애송이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밝혔다. 그러면서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김영삼의 3당 합당이나 김대중의 DJP연합 같은 신의 한 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물었다. 그가 무슨 귀에 쏙 들어오는 답을 하지는 않았다. 2일 일요일 아침 전격적으로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함께 신당 창당을 발표할 때의 안 의원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안철수였다. 원칙대로만 하는, 그래서 수가 뻔히 드러나 보이는 모범생 정치의 안철수가 아니었다. 영어에 improbable(그럴 것 같지 않은)이란 단어가 있다. 그때 내 느낌이 꼭 그 단어와 같았다. 물론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안철수는 그의 ‘정당주의적’ 멘토들이 충고한 대로 독자 신당을 준비했고 지방선거에 내보낼 거물급 인사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는 게 얼마 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한밤 기자회견 해프닝에서 드러났다. 그 시점에서 안철수는 진짜 현실의 벽과 맞닥뜨렸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기업을 해본 사람이므로 전해 들은 현실과 직접 겪는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알 것이다. 안철수가 공들인 인물들이 무소속으로 나올지언정 민주당에도 새정치연합에도 속할 수 없다고 밝혔을 때 그는 지금 한국의 정치 현실은 독자적인 제3세력을 허용할 여지가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안철수 주변에 모인 멘토들은 말만 그럴듯했지 아무런 정치력도, 정치적 도전의지도 보이지 못했다.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불가능한 원칙을 추구하지 않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타개책을 모색했다는 것, 그것도 논란을 무릅쓴 타개책을 모색했다는 것이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정치인 안철수의 바뀐 모습이다. 제3지대에서의 신당 창당, 5 대 5 지분에 의한 신당 창당이 말로만 동등한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발표 하루 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웃음꽃이 피었으나 새정치연합에서는 낙담 혹은 반발의 분위기가 전해졌다. 겨우 2석의 안철수 세력이 126석의 민주당 세력을 대등하게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새 정치의 포기, 헌 정치로 투항이라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신당 창당 합의가 신의 한 수인지, 또 다른 애송이의 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안철수의 운명이 달린 한 수인 것은 틀림없다. 여기서 실패하면 안철수는 소멸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면서 돌아갈 다리를 불살랐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승부를 제대로 건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승부를 걸어야 할 때 승부를 건 것만은 틀림없다. 리스크는 물론 독자 신당 추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그래서 그것을 벤처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벤처는 투기적인 것이다. 벤처가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안철수 측 송호창 의원의 표현대로 그것은 맨손으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호랑이굴 밖에서 잡히지 않는 호랑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잡는다는 것도 진부하지만 사실이다. 그가 호랑이굴에 들어가 정치 개혁을 가로막는 호랑이를 잡아 내동댕이칠지, 아니면 지방선거 승리를 헌납해 호랑이 배나 불려주는 신세가 될지는 아직은 좀 더 지켜볼 여지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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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위기의 크림반도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은 1905년 러시아 혁명에 동조하는 러시아 수병들의 폭동을 다루고 있다. 당시 전함 포템킨은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1991년 옛 소련의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었다. 나는 파리 특파원 시절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모두 알고 지낸 적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어로 의사를 소통했다. 우크라이나를 소(小)러시아, 벨라루스를 백(白)러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러시아에서 독립했다. 이후 두 나라에서 러시아보다는 서유럽에 접근하려는 흐름이 생겼다. 그 흐름은 우크라이나 쪽이 벨라루스보다 훨씬 더 강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이 65%인 데 반해 벨라루스에서는 벨라루스어를 쓰는 사람이 11.9%에 불과하다. 그 결과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지지를 등에 업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축출이라는 사태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과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것이 러시아가 예로부터 슬라브 문제에 개입하고 동유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해온 구실이다. 러시아는 지금 자국과 가장 가까웠던 우크라이나에서조차 거부당하고 있다. 러시아가 문학과 예술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정치도덕적 가치는 불신을 받았다. 헨리 키신저는 그의 책 ‘외교’에서 “미국의 가치가 미국을 비난하는 나라에서조차 받아들여진 것과 차이가 있다”고 썼다.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땅이긴 하지만 러시아계가 58.5%로 절반을 넘는다. 크림반도 남단에는 러시아 흑해 함대 기지인 세바스토폴 항도 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우크라이나 어느 다른 지방보다 강하다. 이곳에서 러시아계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자치공화국 의회 건물을 점거해 ‘크림은 러시아’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러시아 국기도 게양했다. 러시아가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투입해 21세기판 크림전쟁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우려가 나온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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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그래도 김연아는 여왕이다

    김연아 선수가 소치 겨울올림픽 여자 피겨스케이팅 종목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국민 모두가 아쉬웠겠지만 누구보다 아쉬운 사람은 작별 선물로 국민에게 금메달을 선사하지 못한 김연아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상식 무대에서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경쟁 선수에게 축하해주고 관중의 환호에 답했다. 아무나 보이기 힘든 모습이기에 더 아름다웠던 마무리였다. 국내외에서 판정 논란이 일고 있지만 김연아는 담담하다. 그는 “실수는 없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할 건 다 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김연아의 진짜 상대는 금메달을 딴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아니라 4년 전 밴쿠버 올림픽에서 사상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건 자신이었다. 그가 이번에 누군가에게 졌다면 바로 4년 전 자신에게 진 것이다. 한동안 아이스링크를 떠났었고 부상에 시달렸다. 나이도 있었다. 하지만 김연아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것이 올림픽 정신이다. “한 달 중 컨디션이 좋은 날이 하루 있을까 말까 하다.”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가 일본 니혼TV에 털어놓은 김연아의 비밀 고백이다. 김연아는 이미 2010년 여자 피겨에서 한국인은 불가능하다는 금메달을 따 세계 피겨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연아는 경기 직후 “밴쿠버 때는 금메달이 간절했다. 이번 올림픽을 앞두고는 동기 부여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김연아를 다시 불러낸 것은 국민이었다. 그는 2011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단의 일원으로 나서 유치에 성공했고 2013년 소치 올림픽 출전권을 늘리기 위해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 1등을 차지해 3장의 티켓을 따냈다. 그 덕분에 김해진 박소연 선수는 처음 올림픽에 도전해 2018년 평창 올림픽에 대비한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국민의 소리 없는 부름에 응해 준 김연아에게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피겨 여자 싱글 경기는 겨울올림픽의 꽃이다. 자기 나라 선수가 출전하지 않아도 세계인이 TV로 지켜본다. 김연아는 우아하고 당당한 여왕다운 태도로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렸다. 프랑스에서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성을 ‘마리안’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마리안을 찾는다면 바로 김연아일 것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했고 이번에도 끝까지 분투한 당신. 앞으로도 귀감으로 남아 미래 세대가 당대의 자랑스러운 여성을 ‘우리 시대의 김연아’라고 부를 수 있기 바란다.}

    • 201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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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안현수, 개인이 국가를 이기다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가 열린 해에 나는 특파원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마침 독일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려 편안한 저녁시간대에 TV로 지켜볼 수 있었다. 폴란드 태생의 독일 국가대표 선수 루카스 포돌스키가 폴란드를 상대로 2골을 넣어 독일의 2 대 0 승리를 이끌었다. 포돌스키는 골 세리머니도 생략하고 좋아하는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포돌스키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상상해봤다. 지난 주말 안현수 선수가 소치 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개인 1000m 경기에서 1위를 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가족과 함께 지켜봤다. 아내와 애들도 그랬지만 나 역시 기분이 착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 선수 때문에 우리 대표팀 선수가 1위를 놓친 것도, 메달권에서 벗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우리나라 선수도 잘하고 안 선수도 잘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안 선수의 역량이 러시아에서까지 인정받은 데 자부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사실 양궁이나 쇼트트랙은 한국인 코치가 외국에 많이 나가 있고 그들이 가르친 팀이 세계 대회에서 우리나라와 경쟁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바짝 쫓아올 때는 조바심도 나지만 넓게 봐서는 우리끼리의 경쟁 같은 느낌이 들어 흐뭇하기도 하다. 내가 착잡했던 것은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잘하는 사람을 쫓아낸 장면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어느 나라보다 많은 반칙으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선수의 경기까지 망치는 우리 팀의 모습이 늘 깔끔하게 경기하면서도 이기는 안 선수의 모습과 대조되는 데다 바로 그런 안 선수가 우리 대표팀에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안 선수가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빙판을 돌고 시상식에서 러시아 국가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봤다. 나는 결코 ‘쿨’하게 축하해줄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포돌스키만 해도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2세 때 독일로 이주했다. 게다가 그의 친조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국적을 가졌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2차대전 전만 해도 독일 땅이었다. 포돌스키는 사실상 독일인이나 다름없었고 두 개의 국적에서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서 독일을 조국으로 택한 것이다. 그런 그도 어디선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는 독일과 폴란드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말했다. 하물며 안 선수야 어떻겠는가. 안 선수는 러시아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러시아어도 잘하지 못한다. 아무리 국경을 초월해 살아가는 세상이라지만 러시아는 그에게 진정한 조국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안 선수는 정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빙판에 키스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거기서 국가 대 국가라는 맥락을 완전히 떠난 어떤 순간을 목격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승리다. 조국은 그저 조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원히 조국인가. 조국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꿈을 실현해 줄 때다. 한국 국적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안 선수의 꿈을 꺾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즉 조국을 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흘린 눈물은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여자 친구에게, 부모에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빅토르 안은 우리에게 개인이 국가를 이기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보였다. 지금은 낯선 풍경이지만 체육단체의 관료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군 면제나 상금 같은 경기 외 전리품이 남아있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파벌싸움이 벌어지고 승부조작이 일어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제2, 제3의 빅토르 안을 보게 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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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윤지충 시복과 제사 금지령

    “윤지충은 어미가 죽었는데도 효건(孝巾)만 쓰고 상복(喪服)도 입지 않고 조문(弔問)도 받지 않았다. 신주(神主)는 불태우고 제사는 폐했다.” 조선 사회는 정조 15년(1791년) 전라도 진산군(지금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한 가난한 양반 집에서 일어난 이 ‘해괴한’ 사건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천주교와 유교의 정면충돌이었다. 윤지충은 참수형을 당해 한국 천주교회사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는 체포된 후 관아의 신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는 집에 남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위패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것들을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여겨 받들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자생 천주교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놀라울 뿐이다. ▷제사 금지는 중국에서 비롯됐다. 처음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관용적 선교 방침에 따라 제사를 금하지 않았다. 나중에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보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 끝에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최종적으로 금령을 내렸다. 1790년 베이징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문의에 그 결정을 전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못 돼 제사 금지가 불러일으킨 기나긴 박해의 첫 희생자가 나왔다. ▷1874년 첫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프랑스 신부 샤를 달레는 제사 금지에 대해 “조선 국민 모든 계층의 눈을 찌른 것”이라고 탄식했다. 교황청은 1939년에 가서야 제사를 허용했다. 지금까지의 시복시성은 모두 기해박해(1839년)와 그 이후의 순교자가 대상이었다. 한국 천주교 역사 연구의 대가였던 고 최석우 신부는 생전에 제사 금지의 희생자였던 신유박해(1801년)와 그 이전 순교자들을 현양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번 교황청의 시복 결정에 신유박해와 그 이전 순교자들이 대거 포함된 것은 천주교의 경사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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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예술의 진실과 거짓

    영국의 위작(僞作) 화가 톰 키팅은 미술학교를 나와 그림 그리는 기술이 뛰어났지만 독창성은 없었다. 그는 렘브란트 고야 등 대화가들의 작품 2000여 점을 위작하다 영국 더타임스 미술전문기자의 끈질긴 추적에 꼬리가 잡히자 “내가 만든 위작으로 돈을 번 것은 화상들일 뿐, 내가 직접 위작을 판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위작임이 드러나면 가격이 폭락하는 게 보통인데 그의 위작은 오히려 수집가를 자극했다. 그가 사망하자 가격은 폭등했다. ▷청력 상실에도 클래식을 작곡해 현대의 베토벤으로 불린 한 일본 작곡가의 사기 행각이 드러났다. 사무라고치 마모루라는 이름의 이 작곡가는 곡의 구성과 이미지만 제안하고 나머지는 한 대학의 작곡전공 강사 니가키 다카시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 대리 작곡가의 항변이 키팅과 비슷하다. “18년 전 사무라고치로부터 오케스라트용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곡을 제공했을 뿐이고, 사무라고치가 100% 자신의 작품이라고 세간에 발표했다.” ▷사무라고치가 18년 전 그에게 작곡을 부탁한 ‘교향곡 제1번 히로시마’는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누군가는 거기에 ‘이 음악이 좋다. 누가 썼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라는 댓글을 달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클리셰(상투적인 곡)의 연속일 뿐, 교향곡이라고 할 수 없다”고 달았다. 내 감상으로 말하자면 음…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다만 사무라고치가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작곡했다는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지난해 요코하마에서 초연한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그 곡을 치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궁금하다. ▷예술 분야의 사기는 묘한 데가 있다. 미국 영화감독 오슨 웰스는 헝가리 출신의 위작 화가 엘미르 드 호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진실과 거짓’을 만들었다. 거기 이런 대화가 나온다. 드 호리가 “모딜리아니는 일찍 죽었기 때문에 남긴 작품이 적습니다. 내가 몇 점 보탠다고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웰스는 이렇게 답한다. “아름다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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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아름다운 고가도로는 없다

    비정(非情)하고 추한 도시의 느낌을 주는 곳 중 하나가 고가도로다. 자동차로 올라서자마자 빨리 내려가고 싶어진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빨리 달리는지도 모른다. 고가도로 아래도 마찬가지다. 그쪽 도로를 걷고 싶어서 걷는 사람은 없다. 햇볕은 잘 들지 않고 시야는 막혀 있다.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 짓긴 했지만 가능한 한 없애버리고 싶은 필요악이 도심의 고가도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는 1968년 준공된 서울 아현고가도로다. 서울시 공무원 출신의 학자 손정목 씨의 회고에 따르면 아현고가도로가 한창 건설되던 1967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미아리 고개∼청계천로∼신촌을 연결하는 동서 관통 고가도로 계획을 들고나왔다. 이것이 1971년 청계고가도로까지 지어진 계기다. 두 도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고가도로가 한국의 중앙대로인 세종로에 걸쳐 있는 모습이 부담스러운 데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청와대에서 보면 동서로 다 차량이 빠져나갈 수 있어 굳이 연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고가도로는 일반 도로와 달리 수명이 있다. 노후화하면 수리비가 늘어나 더이상 지탱할 수 없는 시점이 온다. 요즘은 도시 외곽이라면 몰라도 도심의 고가도로가 원활한 교통 소통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고가도로 위에서는 빨리 달릴 수 있어도 내려올 때에 다다르면 막히기 일쑤인 것이 도심의 교통이다. 실제 청계고가도로를 없앤 후에도 심각한 교통 혼란은 없었다. 고가도로를 없애자 상권은 미관과 함께 활기를 찾았다. ▷아현고가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가도로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멈춰 설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 거기 서서 서울을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서울시는 아현고가도로 철거 공사 시작에 앞서 8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시민들에게 고가도로를 개방하기로 했다. 자동차에 점령됐던 곳을 걷는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고가도로에서만 볼 수 있는 전망도 감상할 기회다. 최초의 고가도로를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는 이벤트로는 괜찮은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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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설에 돌아보는 ‘우리가 남인가’ 정치

    나는 태어나서 열 살 때까지 경북 경산군 반야월(현재는 대구)에 살았다. 그곳은 사과밭이 많았다.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는 규칙 관념이 부족했는지 한번은 집에 가서 놀자는 친구 꼬임에 교실 창문으로 가방을 던져놓고 도망친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집은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사과밭의 저편 끝에 있었다. 아무튼 그 길을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돌아오는 내내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두려움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많던 사과밭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금 그곳은 아파트 천지로 바뀌었다. 반야월에서는 설이면 여러 집이 한데 모여 강정을 만들었다. 설을 앞두고 동네 구석에서는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뻥튀기 장사가 밥을 튀겨 내고 아이들은 귀를 막으면서도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강정은 튀밥을 엿으로 뭉쳐 만든다. 한겨울 찬 바깥마당에서 판을 만들어 그 속에 튀밥을 넣고 끓인 조청을 부을 때 수증기가 피어나고 주위에서 아주머니들이 두런두런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과자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막 굳어진 뒤 반듯하게 잘라낸 강정은 얼마나 맛있던지. 명절이면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에 가셨다. 전남 벌교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영천에 가서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삼랑진에서 또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명절이라 기차 안은 통로까지 승객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힘들게 좌석을 구했어도 염치없이 마냥 앉아서만 갈 수 없어 어린 나도 자리를 양보할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 집은 읍내에서도 한참 들어가야 했다. 나 또한 경상도 시골에서 건너왔지만 그런 시골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놀 친구가 없었다. 그땐 어려서 꼬막 맛도 잘 몰랐나 보다. 아버지야 늘 들뜬 마음으로 고향에 가셨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초중고교는 모두 서울에서 나왔다. 어릴 적 서울 아이가 내려오면 그 새침데기 같은 말투가 거슬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리며 쫓아다녔다. 내가 바로 그 서울내기가 됐다. 지난해 말 ‘밴드’ 덕분에 연락이 닿아 30여 년 만에 고교 반창회를 했다. 대학에 올라가면서, 또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흩어져 연락이 끊긴 친구가 많았다. 모두들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오십을 넘긴 친구들이 여자들처럼 수다를 떨었다. 이름도 가물가물했지만 얼굴을 맞대고 보니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담임선생님까지 모시고 머리가 벗어져 가는 제자들이 큰절을 올렸다. 시답지 않은 개인사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다. 내 또래에는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어도 아버지 고향을 쫓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따지면 내 고향은 벌교다. 굳이 명절에 고향에 간다면 삼촌 고모가 계신 벌교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은 모두 반야월에 있다. 그리고 40년 넘게 서울에 살았다. 내가 돌아갈 고향은 어디인가. 아버지의 이농(離農) 세대는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고향이 그리웠고 명절마다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농 세대의 자식들은 최소한 두 개의 고향을 갖고 산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분산되고 고향 의식은 희미해진다. 따져보면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고향 의식이 희미해질수록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당가’ ‘우리가 남이유’의 의식도 함께 희미해진다. 내게 새 정치와 헌 정치를 가르는 기준을 하나 들라면 ‘우리가 남인가’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가 남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들고 싶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더 큰 우리를 만드는 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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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대법원의 순혈주의

    윌리엄 태프트 미국 대통령은 특이하게도 대통령을 지낸 뒤 연방대법원장이 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 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태프트는 구한말 일본의 사실상 조선 속국화(屬國化)를 묵인한 가쓰라(桂)-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이다. 대통령으로서는 별로였지만 대법원장은 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에서 당시만 해도 의원이나 주지사 혹은 장관을 하다가 대법관이 되는 경우는 흔했다. ▷미국도 법원의 전문성이 강화돼 1975년 이후 임명된 대법관은 모두 연방항소법원(일종의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한 경험을 갖고 있다. 최근에 다시 예외가 생겼는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임명한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이다. 케이건은 하버드 로스쿨 최초의 여성 학장 출신으로 임명 당시 법무부 송무차관이었지만 법관 경력은 전혀 없다. 그러나 법조일원화가 된 미국은 법관이라도 검사 변호사 교수 관료 등 다양한 경력을 쌓는 경우가 많다. ▷양 대법원장은 최근 차한성 법원행정처장 후임 대법관으로 조희대 대구지법원장을 임명 제청했다. 법원행정처장은 재판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대법관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구성원 14명이 판사 출신 일색이다. 대법원은 양창수 대법관은 교수 출신이고, 박보영 대법관은 변호사 출신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양 대법관은 판사를 교수로 내보내 연구생활을 하게 한 뒤 다시 대법관으로 불러들인 대표적 인물이고, 박 대법관은 부장판사까지 17년간 판사 생활을 했다. 대법관 모두 법원의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법원에 검사 몫 대법관 자리가 하나 있었으나 안대희 대법관 이후 공석이다. 검사도 법조 3륜(輪)을 구성하는 한 바퀴다.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우수한 몇 명은 수료와 동시에 로펌으로 직행한다. 교수 중에도 우수한 인물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는 한번 판사가 되면 대체로 판사만 쭉 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기 쉽다. 3명을 빼고는 모두 50대 후반의 서울대, 판사 출신 남성이다. 대법원 구성원을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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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중국대사관의 주변 부조화

    청나라 왕조는 외교란 걸 몰랐다. 변방 오랑캐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하사품을 주는 형식의 조공을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된통 당하고 국제무대로 끌려나와 근대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들과 하나씩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1882년 조선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걸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영사 격인 진수당이 처음 파견됐다. 그가 머물기 위한 공관을 지은 곳이 오늘날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자리다. ▷청 말에 실권자가 된 원세개는 조선에서 정치적 입지를 닦았다. 약관의 원세개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를 끌고 와, 김옥균이 일본을 업고 일으킨 정변을 진압하고 진수당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그를 당시 서울의 서양 외교관들은 총독이라고 불렀다. 원세개는 진수당이 지은 공관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10년간 머물렀다. 그곳을 지키는 청나라 병사의 횡포가 어찌나 심한지 앞길에는 낮에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중국대사관이 새로 지어져 그제 개관식을 했다. 그 자체로는 축하할 일이다. 대사관은 업무동 숙소동 등 두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업무동은 10층, 숙소동은 24층이다. 주변에 나지막한 상가들만 밀집해 있어 이 고층의 건물은 매우 위압적으로 보인다. 외국 공관이라 도시 계획상의 건축 규제를 받지 않았다. 또 현대식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중국 전통식 기와 형태의 지붕을 얹어놓아 보기에 따라서는 부조화스러운 느낌을 준다. ▷프랑스 파리의 중국대사관은 옛 전통 석조건물에 입주해 있다. 영국 런던의 중국대사관은 영국 특유의 벽돌 건물 양식의 외관을 갖고 있다. 독일 베를린의 중국대사관은 본에서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신축됐지만 베를린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일본 도쿄의 중국대사관도 평범한 일본 관공서 모양이다. 미국 워싱턴의 중국대사관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 양식이어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한국의 중국대사관은 층고(層高)와 외관이 위압적이어서 구한말 원세개의 모습이 어른거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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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진중권의 돌고도는 ‘오디세이’

    여고생인 딸이 진중권의 책 ‘현대미학 강의’를 사 가지고 왔다. 학교 추천 도서란다. 그래서 훑어보다가 (진중권의 트위터식 표현을 빌리자면) 뿜었다. 프랑스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책 ‘회화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시적(詩的)인 말로 끝난다. ça vient de partir. ça revient de partir. ça vient de repartir. 진중권은 이렇게 번역했다. 그것은 막 떠났다. 그것은 떠나기 위해 돌아왔다. 그것은 막 다시 떠났다. ▷올바른 번역은 이렇다. 그것은 막 떠났다. 그것은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것은 막 다시 떠났다. 여기서 그것(ça)은 유령을 뜻한다. 유령은 무덤으로 갔다가 돌아오는(revenir) 것이라고 해서 revenant이라고도 불린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허름한 구두 그림을 해설하면서 그림 자체에서는 알 수 없는 ‘대지와 농민의 정신’이라는 유령을 불러들이고, 데리다는 그 유령을 다시 떠나보내며 그림은 그림 자체로 보자고 권한다. ▷진중권의 대표작은 그가 그제 출간 20주년이라고 기자간담회까지 연 ‘미학 오디세이’다. 8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글솜씨는 있다. 스스로는 대학 시절 노동자 문화운동을 하면서 노동자를 상대로 글을 써본 경험이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노동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목사를 아버지로 둔 프티부르주아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부터 교양물을 접해 본 사람 특유의 박람강기(博覽强記)는 글 읽기에 자극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 ▷‘미학 오디세이’ 이후의 그의 책이 비슷한 데가 많다. ‘미학 오디세이’는 1994년 1, 2권이 처음 나왔다. 3권은 10년 뒤인 2004년 나왔다. 3권에는 한 해 전에 낸 ‘현대미학 강의’의 상당 부분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유령 타령만 해도 하도 여러 책에 출몰해서 지겨울 정도다. 그는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로 복제를 들고 있는데 그가 쏟아내는 책들이 색깔만 살짝 바꾼 워홀의 실크스크린을 보는 것 같을 때가 종종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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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日의 눈엣가시 글렌데일 소녀상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글렌데일 시에는 한국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것과 똑같은 위안부 소녀상이 하나 서 있다. 지난해 이 소녀상이 건립될 당시 한국 언론 못지않게 일본 언론도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동상에 흔들리는 일본계’라는 제목으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본계보다 인구가 많은 한국계의 로비력은 증가하고 있고, 위안부에 대한 일본계의 의견은 분열돼 있다고 전했다. ▷‘위안부를 강요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일본 정부는 미국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지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 간 논란으로 묶어 두고 한국 측 주장은 무시하려는 전략이다. 미국 땅의 소녀상이 그 전략에 구멍을 냈다. 중국 정부는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기념물을 허용하기로 했다. 기념물은 표지석 설치에서 최근 동상 건립으로 격상됐다. 한국 측 주장이 제3국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본은 불안하다. ▷지난달 백악관 인터넷 청원 사이트에는 “일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는 청원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이 청원에 지금까지 12만여 명이 지지 서명을 했다. 백악관 규정에 따르면 어떤 청원이든 10만 명 이상이 지지하면 관련 당국은 답변을 해야 한다. 이에 질세라 4일 ‘소녀상을 보호해 달라’는 반대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에 8일 현재 2만5000명이 지지 서명을 했다.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한인단체 가주포럼은 “백악관 청원보다 글렌데일 시의원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시 공원에 어떤 조형물을 설치할지는 연방정부가 아니라 시 관할이다. 지난해 7월 9일 소녀상 건립을 결정하는 글렌데일 시의회 회의장에 다수의 일본계가 방청석을 차지하고 부결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녀상 건립안은 찬성 4 대 반대 1로 가결됐다. 누가 반대했는지 알 수 없으니 시의회(citycouncil@ci.glendale.ca.us)로 e메일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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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가미카제 특공대의 거짓 신화

    작가 김별아는 ‘가미가제 독고다이’라는 소설을 썼다. 독고다이는 특공대(特攻隊)의 일본어 발음을 들리는 대로 쓴 것이다. 작가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훈련 과정을 묘사하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쪽팔림은 수컷들의 숨이 붙어 있는 동안 끊임없이 그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원동력일 것이다. 쪽팔려서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쪽팔릴까 봐 벌벌 떨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던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수컷들에게 위로와 동정을.” ▷돌아올 기름도 채우지 않고 자살 비행을 하는 가미카제 특공대는 현실에서는 누구에게나 거부되지만 상상 속에서는 집요하게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일본에서 가미카제 특공대를 다룬 ‘영원의 제로’라는 소설이 450만 부 이상 팔리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세밑에 도쿄 롯폰기에서 영화를 본 뒤 기자들에게 감동적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극우 정치인 아베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한 해 마무리다. ▷영화는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누구나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기꺼이 자폭 공습에 뛰어들었다는 상투적 설정을 일단 거부한다. 주인공이 뛰어난 비행기술을 익히는 것은 오로지 살아 돌아가겠다는 열망 때문이다. 생환에 집착하는 그를 동료들은 비겁한 놈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서 매번 살아 돌아온다. 천재적 비행기술 덕분에 특공대 교관으로 살아남았던 그도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결국 특공대에 편입돼 희생되고 만다. ▷영화는 충분히 수컷이 되지 못한 한 특공대원을 통해 전쟁의 광기에 희생되는 인간을 그린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인간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일본인이 일으켰고, 그래서 일본인이 직시해야 할 전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회피되는 것 같아 불편하다. 원작 소설을 쓴 햐쿠타 나오키는 난징 대학살을 부인하고 평화헌법도 부정한다. 아베 총리는 햐쿠타의 열렬한 팬이다. 정치의 아베는 문학의 햐쿠타를, 문학의 햐쿠타는 정치의 아베를 마케팅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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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장성택 처형의 신화적 해석

    북한 김정은의 장성택 처형을 정치학 이론이나 저널리즘적 접근으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장성택은 김정은에게 실질적 위협이 돼서 처형된 것일까. 오히려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간단히 제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까지 전개된 사태와 더 잘 맞아떨어진다. 장성택의 몇몇 심복이 처형되거나 망명하긴 했지만 장성택 라인은 대체로 건재하다. ‘위협-제거’라는 상투적 틀이 여기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 공개체포 나흘 만의 전격적인 장성택 처형이 알려지자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것이라느니 김정은 정권 붕괴의 서막(序幕)이라느니 하는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장성택 처형은 2인자 없는 김정은 유일 영도 체제의 완성을 알리는 것인지 모른다. 장성택이 스펙터클(spectacle)한 처형의 대상으로 뽑힌 것은 그가 백두혈통(김일성 가계) 내에서 차지한 애매모호한 위치에서 비롯된다. 하나의 혈통에서 고모부와 이모부는 언제든지 배제될 수도, 포섭될 수도 있는 경계선상의 가족이다. 장성택은 이전에도 숙청됐다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장성택은 어린 김정은을 위해 김정일이 특별히 예비한 희생제물, 곧 처형되기 위해 만들어진 2인자였을 수 있다. 김정일은 죽기 전 여동생 김경희와 매제 장성택 그리고 후계자 김정은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으면 경희와 매제가 정은이를 돌봐라. 정은이 너도 믿을 것은 고모와 고모부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를 대하듯 고모와 고모부를 모셔라.” ‘건성건성 박수를 친 오만불손한’ 장성택은 이런 유훈이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경희와 장성택을 돌려보낸 후 김정은만 몰래 따로 부른다. “장거리 미사일 시험과 3차 핵실험 준비를 해뒀다. 그걸로 너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라. 그리고 나의 탈상(脫喪) 전에 장성택을 죽여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든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수령임을 보여줘야 한다.” 중국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유훈을 돌에 새겨 황실 깊숙이 숨겨놓았다. 황제가 되는 사람만이 유훈을 볼 수 있었다. 그 석각처럼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남긴 비밀 유훈이 있었다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김정은뿐이다. 그것을 저널리즘적으로 추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니 익숙한 신화적 내러티브(narrative)에 따라 상상해볼 뿐이다. 갓 서른 김정은의 뒤에 공포정치의 달인 김정일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유훈통치를 실행하고 있다. 현실과 이념에서 모두 정당성을 상실한 체제는 공포에 의해서만 지탱할 수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전(前)근대 시대 공포를 조장해 인민을 통치하는 방식의 하나인 잔인한 공개처형의 장면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장성택의 처형은 정확히 말하면 공개되지는 않았다. 회의 도중 체포되고 재판을 받는 장성택의 모습과 판결문 끝의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다’는 말만 보였을 뿐이다. 때론 보이는 처형보다 보이지 않는 처형이 더 무섭다. 기관총으로 쏴 죽이고 화염방사기로 태워 없앴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은 흉흉한 소문은 그 공포의 크기를 보여준다. 죽은 김정일과 산 김정은이 추구한 것은 신화적 공포다.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사우론이나 ‘해리 포터’의 볼트모트가 주는 것과 같은 절대 공포. 그러나 절대 공포의 순간을 만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조울증이 찾아온다. 더이상 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우월감은 뒤집으면 이제 모두가 날 두려워하기만 한다는 낭패감이 된다. 마식령 스키장 개장식에서 조증의 김정은을, 김정일 중앙추도대회에서는 울증의 김정은을 봤다. 김정은이 수령 수습을 마쳤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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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국정원 개혁, 정치개입 끊되 無力化는 안 된다

    여야가 국가정보원 개혁 특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합의는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국정원의 자율 개혁 대신 국회에 의한 타율 개혁을 하겠다는 의미다. 댓글 사건으로 드러난 국정원 정치개입 악습을 확실하게 근절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다만 국가안보의 첨병인 정보기관을 다루는 만큼 정략을 벗어난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의 정보기관은 국내파트와 국외파트가 구별돼 있고 국내외 파트를 막론하고 정치개입을 단절한 지 오래다. 그러나 국정원은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시대의 악습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국정원의 피해자였던 야당조차 집권한 이후에는 불법 도청 등의 유혹에 빠졌다. 특위는 국정원이 다시는 정치개입을 못하도록 국정원을 환골탈태시켜야 한다. 불법 부당한 지시나 명령을 거부한 내부고발자를 적극 보호하는 방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대북 정보전은 국외와 국내가 긴밀히 연결돼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국정원을 선진국형 정보기관으로 바꾸되 인터넷 세상의 국경 없는 심리전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특위가 논의해 올해 안에 입법화하기로 한 내용 중 불안한 대목도 적지 않다. 정보위 상설 상임위화는 국가안보기관이 야당 눈치만 보다가 할 일을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비밀열람권 보장도 정보위 속기록마저 인터넷에 유출되는 상황에서 걱정이 없지 않다. 사이버심리전 규제는 북한의 국경 없는 사이버 공작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까지 방해해서는 곤란하다. 국정원 개혁이 국정원을 무력화시키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법률안 처리권까지 갖고 있는 특위의 위원장 자리는 민주당에 돌아갔다. 다만 특위 위원은 여야 동수로 구성하기 때문에 여야 합의를 못하면 법률안 처리는 힘들 것이다. 여야가 어느 때보다도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할 이유다. 민주당은 특위 위원 임명에서부터 강경파를 배제하고 국가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 새누리당도 현 국정원 체제를 옹호하지만 말고 선제적인 개혁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이번 합의는 민주당이 당연히 해야 할 예산안 처리를 볼모로 삼아 이룬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면도 없지 않다. 그래도 특검보다는 특위가 미래지향적이다. 1년 가까이 정국을 교착시킨 국정원 댓글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에 맡기고 국정원 개혁을 위해 여야가 최선의 방안을 내놓길 바란다.}

    • 201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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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청와대 행정관이 채 군 가족부 왜 들여다봤나

    검찰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婚外子) 의혹을 받은 채모 군의 가족관계등록부 조회를 서울 서초구청 조이제 행정지원국장에게 부탁한 혐의로 청와대 조모 행정관을 곧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조 행정관이 누구의 부탁을 받고 채 군 가족부를 조회하려고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채 군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과정에 청와대 행정관이 직접 관련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대한 사안이다. 조 행정관은 6월 11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조 국장에게 채 군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본적지를 알려주면서 내용이 정확한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검찰이 국가정보원 댓글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기 사흘 전이다. 당시 검찰 수장(首長)이던 채 전 총장은 9월 채 군이 혼외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퇴했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채 군의 가족부 내용이나 출입국 기록 같은 구체적인 자료와 함께 제기됐다. 이 때문에 검찰 수사에 불만을 품은 외부기관이 채 전 총장을 ‘찍어내기’위해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거론됐다. 조 행정관은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 세 명 중 한 명인 이재만 대통령총무비서관 밑에서 일하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출신인 조 행정관은 청계천 복원사업팀장으로 근무하다 이명박 정부 초기 청와대로 옮겼고 2010∼2011년 대통령실 시설관리팀장을 맡았다. 지난해 4월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현 박근혜 정부에서 총무시설팀 총괄행정관을 맡고 있다. 청와대의 시설과 예산을 관리하는 조 행정관이 채 군의 신상정보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검찰은 조 행정관이 누구의 부탁을 받고 조회를 요청했는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조 행정관의 배후를 예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조 행정관은 원 전 원장과 서울시에서 같이 근무한 적도 있고 조 국장 역시 원 전 원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두 사람이 함께 원 전 원장 측의 채 전 총장 ‘뒷조사’를 도왔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현 청와대 행정관이 국민의 사생활을 캐는 데 개입했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남용에 해당한다. 헌법은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채 전 총장의 도덕성 여부와는 별개로 국가기관에 의한 국민의 사생활 침해는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 201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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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이번엔 밀양으로… 갈등 키우는 게 종교가 할 일인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일부 신부들의 박근혜 대통령 사퇴 촉구 미사 파문 이후 조계종 승려와 개신교 목사들도 잇따라 시국선언을 했다. 조계종에서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주도로 대통령의 대(對)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한편 앞으로 사퇴까지 주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개신교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가 주도해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조계종 실천불교승가회, 개신교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는 이른바 야권 원탁회의의 일원으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간 연대 성사에 앞장섰고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종교 조직이다. 이들의 시국선언이 천주교 조계종 개신교 전체의 의사 표시가 아니라는 것쯤은 국민들도 모르진 않는다.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것이고, 종교인들도 그에 대해 의견 표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누구보다도 신중하게 발언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 말고는 누구도 못하니까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태도로, 그것도 반대나 비판 일변도로 릴레이 하듯 시국선언을 이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종교 본연의 소명보다는 세속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성직자들은 그동안 정치 외에도 광우병 사태, 4대강 문제,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진영 논리가 개입된 온갖 문제에 참견해왔다. 성직자들이 나서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잘못이 있으면 시정해 나갈 능력을 갖고 있다. 주민과 전문가들이 논의하면 될 일에 ‘생명사랑’이니 ‘생명평화’니 하는 애매모호한 구호를 앞세워 성직자가 끼어들면 타협은 요원해진다. 이번 주말에는 송전탑 건설 반대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몰려갈 예정이다. 이를 주도하는 사람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문규현 신부다. 제주해군기지는 어렵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공사장 앞에서는 매일 천주교 신부와 수녀가 주도하는 생명평화미사라는 것이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국가적 쟁점 사업마다 종교인이 나서 제동을 거는 나라도 드물다.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종교까지 걱정을 해야 하는가. 종교는 세속의 일은 세속에 맡겨두고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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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서울대, 조국 표절시비 직접 조사하라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표절 의혹 조국 박사논문 읽어보니’라는 제목으로 조국 서울대 형법 교수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 의혹을 에둘러 다뤘다. 그 의혹은 애초 변희재 씨 측에서 제기한 것이지만 뒤늦게 논문을 본 나로서도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대는 버클리대 로스쿨의 소견을 바탕으로 표절 혐의가 없어 자체 조사에 착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서울대의 결정은 무책임한 것이다. 이번에는 에두르지 않고 표절의 증거를 제시하겠다. 조 교수의 논문은 형사소송의 증거배제 규칙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독일 일본의 사례를 비교한다. 나는 변 씨 측이 다루지 않은 독일편을 꼼꼼히 읽었고 하버드대 크레이그 브래들리 교수의 논문 ‘독일에서의 증거배제 규칙’을 베껴 쓴 문장을 적지 않게 발견했다. 조 교수의 논문 206쪽 ‘the taking of spinal fluid from a suspect to determine his possible insanity, through generally authorized by Section 81a of StPO, was out of proportion to the misdemeanor charge against the suspect(혐의자의 정신이상 여부를 가리기 위한 척수액 추출은 독일 형사소송법 81a조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바이지만 혐의자가 받고 있는 경죄 혐의와는 비례가 맞지 않는다)’는 기술 중 ‘Section 81a of StPO’라는 대목이 브래들리 논문에서 ‘the Code of Criminal Procedure’라고 되어 있는 것만 빼고는 두 논문의 기술이 똑같다. 다른 대목은 둘 다 독일 형사소송법을 뜻하며 이 문장은 사실상 29개 단어가 연속해서 일치한다. 그러나 조 교수는 독일어로 된 판결문을 직접 보고 정리한 것처럼 쓰고 있다. 베낀 문장을 일일이 거론하려면 이 칼럼으로는 부족하다. 조 교수는 본문과 각주에서 출처를 밝히고 브래들리를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출처 없이 브래들리의 표현을 갖다 쓴다. 조 교수가 브래들리를 베낀 곳은 모두 독일 판결을 인용한 부분이다. 조 교수는 판결의 사실관계를 요약한 곳으로 다른 영어 번역이 어렵고 지도교수와의 협의하에 각주를 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지 서울대가 직접 조사하고 판단할 일이다. 독일어가 잘 안되니 영어 논문을 베끼는 것이다. 당연히 독일어 문헌 인용에도 의혹이 많다. 조 교수의 논문에서 각주에 인용된 독일어 논문은 12편이다. 12편 중 9편의 논문이 통째로 인용돼 있다. 이것은 각주라고 할 수 없다. 조 교수는 영어 논문을 인용할 때는 거의 인용한 쪽수를 밝혀준다. 왜 독일어 논문에서만 그렇지 않은 것일까. 논문을 실제 읽지 않고 인용했을 수 있다. 그가 독일어 논문의 저자를 모두 뎅커(Dencker)처럼 성만 쓰고 있거나 H. 오토(Otto)처럼 이름은 써도 이니셜로만 써 이런 의혹이 더 짙다. 조 교수는 영어와 일본어 문헌의 저자는 최소한 참고문헌에는 풀 네임을 써주고 있다. 조 교수는 독일어 논문 저자는 풀 네임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어 지도교수와의 협의하에 그렇게 통일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설득력이 있는지 서울대가 판단해야 한다. 조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 대해 버클리대가 “법학박사학위 과정의 높은 기준을 충족한다”는 의견을 보내왔다고 전했다. 조 교수에게 학위를 준 버클리대가 조 교수 논문을 문제 삼는 것은 이익상반(利益相反)의 측면이 있다. 조 교수 논문의 오류를 다 나열하지 못해 아쉬운데 그걸 보면 독자들은 버클리대가 학위 심사는 제대로 했나 의문을 가질 만하다. 이런 버클리대 말만 믿고 서울대가 자체 조사도 안 해 보고 사안을 종결했다. 공감할 수 있는 절차를 통해 표절 의혹이 해소된다면 조 교수에게도 좋을 것이다. 조 교수가 먼저 표절을 심사해 달라고 요청해보는 것은 어떨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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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통진당 오병윤 의원이 둘러댄 ‘진보적 민주주의’의 정체

    통합진보당 오병윤 의원은 그제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대표 발언에서 “법무부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에서 쓰는 말이기 때문에 북한을 추종한다고 하나 그것은 뉴딜 시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도 쓰던 말”이라고 주장했다. 오 의원은 그러면서 “미국도 북한을 추종했다는 말이냐”고 따졌다. 법무부가 헌법재판소에 통진당의 해산 심판을 청구하며 그 이유 중 하나로 통진당의 강령과 당헌이 김일성의 정치 노선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명시한 데 따른 반박이다. 오 의원은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의 출처로 1930년대 뉴딜 정책을 펼친 미국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언급했지만 잘못 안 것이다. 그보다 20여 년 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을 썼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원으로 두 차례 대통령을 한 뒤 1912년 정계에 복귀했으나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하자 새 정당을 만들었다. 그 당의 이름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진보당(Progressive Party)이다. 진보당은 기업 집중 규제, 노동 재해 보상 등 공화당에 비해 진보적인 정책을 표방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화당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오 의원 자신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진보적 민주주의와 통진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다. 공안 당국이 밝힌 RO(혁명조직) 녹취록에 따르면 홍순석 통진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출처를 ‘김일성 노작(勞作)’이라고 밝혔다. 홍 부위원장은 5월의 한 모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 뿌리가 있느냐. 사회주의를 에둘러서 얘기한 것 아니냐”는 참석자의 질문에 “진보적 민주주의의 어원(語源)이 어디로 가느냐면 수령님께서 (북한을) 건설할 때 ‘우리 사회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라고 한 노작이 하나 있어”라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 북에서 ‘수령님’은 김일성, ‘장군님’은 김정일을 의미한다. 노작은 저서 담화 연설을 뜻한다. 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2011년 통진당 창당 직전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RO 조직원의 대화에서 드러났듯 진보적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말한다. 통진당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수령님’ ‘장군님’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쓰다가도 외부 사람들에게는 주사파가 아니라고 잡아뗀다. 국가보안법을 의식해서일 것이다. 오 의원도 억지로 미국 사례를 끌어대다 부정확하게 출처를 인용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오 의원의 발언은 통진당 사람들의 전형적인 둘러대기 물타기 전략일 뿐이다.}

    • 201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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