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인재진 평창문화올림픽 총괄기획자가 검찰 수사를 받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1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인 씨는 지난달 27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부분의 문화올림픽 사업기획이 마무리된 데다 각 사업별 책임자가 이미 선임돼 있어 문체부는 후임자를 인선하지 않을 방침이다.인 씨는 공연기획 분야 전문가로 자라섬청소년재즈센터 대표를 맡고 있으며 올 5월 평창문화올림픽 총괄기획자로 임명됐다.수원지검은 인 씨가 2015년 경기도가 개최한 ‘뮤직런 평택’ 거리공연 축제를 총괄 기획하는 과정에서 경기문화재단 보조금 1억여 원을 유용한 혐의로 지난주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에서 기각됐다. 문체부 관계자는 “인 씨의 혐의와 평창문화올림픽 사업기획은 무관하다”며 “향후 문화올림픽 사업에 대한 내부 감찰을 검토할 수는 있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말다래(장니·말안장 아래 늘어뜨리는 판)에서 비단벌레 날개 장식이 발견됐다.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안장부터 말다래까지 모든 마구(馬具) 세트에 비단벌레 날개가 장식으로 쓰인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국립경주박물관 보존과학실은 “금관총 말다래의 외곽 테두리 조각 한 점을 현미경으로 정밀 관찰한 결과 대나무 판 위에 붙어 있는 비단벌레 날개를 찾아냈다”고 30일 밝혔다. 곤충 날개는 쉽게 썩는 유기물이어서 비단벌레 흔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지금까지 말다래가 나온 신라 왕릉은 금관총과 천마총, 금령총 세 곳이다. 신라시대 말다래에서 비단벌레 장식 흔적을 찾은 것은 최초다. 1975년 황남대총 발굴 당시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안장과 발걸이(등자), 말띠드리개(행엽)가 발견됐으나 말다래는 나오지 않았다.‘왕의 곤충’으로 불리는 비단벌레는 온몸에서 무지개 빛을 뿜어내는 희귀 곤충으로 신라와 고구려, 왜에서 최고급 공예장식으로 사용됐다. 특히 신라에서는 금동판 투조(透彫·재료를 도려내 무늬를 낸 것) 밑에 비단벌레 장식을 깔아 화려함을 더했다. 현재 국내에 서식하는 비단벌레 개체 수가 매우 적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실제로 박물관은 비단벌레 샘플을 채취하기 위해 문화재청 사전허가를 받은 뒤 곤충학자와 사흘간 답사한 끝에 전남 완도군 당인리에서 사체 한 마리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었다.금관총 말다래는 천마총 출토 말다래처럼 대나무판 위에 천마(天馬)도를 새긴 금동장식을 덮었다. 천마총 말다래의 경우 비단벌레 날개 대신 직물로 장식한 차이점이 있다. 최근 경주박물관이 발표한 ‘비단벌레 날개를 중심으로 본 금관총 출토 비단벌레장식 마구류의 제작기법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금관총 말다래는 여러 단계의 제조공정을 거쳤다. 직물 위에 대나무판을 올린 다음 비단벌레 날개 장식을 얹었는데, 이때 대나무판에 날개를 고정시키기 위해 옻칠을 했다. 끝으로 천마가 새겨진 금동장식판을 덮은 뒤 구멍을 뚫고 나사를 꽂아 판 전체를 고정시켰다.이승렬 경주박물관 연구원은 “비단벌레 날개는 부식으로 인해 한 점에서만 발견됐지만 대나무판 전체에 옻칠이 된 걸 감안할 때 판 전체를 날개장식으로 채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비단벌레 장식 안장 뒷가리개’를 복원할 때 약 2000마리가 사용된 걸 감안하면 이보다 약 2배 크기의 금관총 말다래에는 3000~4000마리의 비단벌레 날개가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장과 발걸이, 말띠드리개까지 포함하면 금관총 마구 세트를 장식하기 위해 최소 1만여 마리를 잡았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신라인들이 왕릉을 꾸미는데 들였을 엄청난 공력을 대략 가늠할 수 있다.신용비 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 연구결과는 42년 동안 글리세린 용액에 담겨있는 황남대총 출토 ‘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뒷가리개’의 보존처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한불교조계종이 처음으로 출가자를 공개 모집한다. 조계종 교육원은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선택 출가’라는 제목의 출가자 공개모집 포스터(사진)를 최근 배포했다. 밝은 표정의 비구와 비구니 스님이 한 손을 활짝 펼친 채 맞아들이는 자세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하단에는 모집 기간(내년 1∼2월)과 안내전화, 인터넷 모집 사이트를 적시해 마치 기업 공채 광고를 연상시킨다. 조계종은 모집 대상으로 ‘대자유인의 삶을 꿈꾸는 자 누구나(만 13∼50세)’라는 문구를 넣었다. 조계종이 출가자 공개모집에 나선 것은 한 해 500여 명에 이르던 출가자가 최근 150여 명대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교육원 교육부장인 진광 스님은 “내년부터 상·하반기로 나눠 출가 기간을 정하고 집중적인 홍보활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조계종은 다음 달부터 방송과 신문, 인터넷을 통한 출가자 모집 광고도 시작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립춘천박물관 선사실에 가면 전체 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 안에 전체가 있는 ‘프랙털’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토기 조각들을 벽면에 늘어놓은 재밌는 전시물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빗살무늬토기 모습이 그려지는데, 가까이서 보면 전체 형상을 이루는 조각들 표면에도 빗살무늬가 완연하다. 한반도 신석기를 대표하는 양식의 토기를 재치 있게 형상화했다. 춘천박물관이 개관 15주년을 맞아 ‘강원의 역사와 문화’ 전시관 리모델링을 최근 마쳤다. 박물관이 지금껏 진행한 연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선사부터 근세까지 총 2500여 점의 유물을 진열장에 올렸다. 일반관람객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전시실 내 10곳에 영상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전시에선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버드나무 화살대와 화살들을 새로 선보인다. ‘여(呂)자형 주거지’에서 발견된 중도식 토기들을 통해 강원지역에 오래전 자리 잡은 주민들의 생활상을 복원한다. 최근 보존 처리를 마친 160여 점의 나한상도 처음 공개된다. 고려시대 지광국사 혜린이 머문 원주 법천사 터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형 치미(용마루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와 통일신라시대 삭주(朔州)의 행정중심지 춘천에서 발견된 은입사 발걸이도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 ‘관동팔경과 금강산’ 코너에선 최근 독일에서 환수된 겸재 정선의 화첩을 만나볼 수 있다. 화첩은 내년 1월 초까지만 전시된다. 전시실 밖 산책길 주변으로 석조 문화재 등을 비치한 정원을 만들어 관람객을 위한 특별한 휴식공간을 제공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북 경산시 하양읍에서 압독국 초기 수장의 무덤(사진)이 발견됐다. 압독국은 진한(辰韓) 소국 중 하나로, 경산 일대를 지배하다가 2세기경 신라에 복속됐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경산 하양 택지개발사업 부지 내 발굴현장에서 기원후 1세기 목관묘 6기를 발견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중 목관묘 1기에서 청동부채와 청동검, 철검, 청동거울, 청동마(靑銅馬), 부채, 재갈 등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특히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골 한 구도 함께 나왔다. 청동부채는 이례적으로 총 3점이 확인됐는데, 발굴팀은 시신이 양손에 1점씩 쥐었고 나머지 1점은 배 위에 덮은 걸로 추정했다. 학계는 서기 1세기 전후 압독국 초기 세력이 기존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 이외에 하양읍 일대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 자료가 발견됐다고 평가했다. 임당동 고분군은 이번 발굴현장에서 10km가량 떨어져 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금관가야 왕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제2호)에서 가야 유력층 주거지로 보이는 벽주(壁柱)건물(대벽건물·주춧돌 없이 벽체로 지붕을 지탱하는 건물)터(사진)가 발견됐다. 이와 함께 특이한 기형의 제의용 토기들도 확인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봉황동 유적 발굴 현장에서 4세기 말∼5세기 초에 조성된 걸로 보이는 타원형 모양의 대형 건물터 7개를 찾았다”고 21일 밝혔다. 연구소는 “화로(火爐) 모양의 토기와 통형기대(筒形器臺·기다란 원통 모양의 그릇받침), 각배(角杯·뿔 모양 잔),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인물상 혹은 동물상) 등 제의용 유물도 여럿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견된 벽주건물들은 대부분 지름이 10m를 넘으며 일정한 구역에 몰려 있는 양상이다. 앞서 1999년 부산대박물관 조사에서도 인근에서 벽주건물터 1기가 발견됐다. 백제와 왜 유적에서 여러 번 확인된 벽주건물은 귀족들의 주거지로 추정된다. 특이한 것은 공주 정지산 유적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벽주건물은 사각형 모양인 데 비해 봉황동 벽주건물은 타원형 평면이라는 점이다. 유물들은 대부분 벽주건물터 밖에서 출토됐다. 정작 건물터 안에선 토기조각 2, 3개만 확인됐다. 5세기 초 고구려 남정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쇠퇴한 데 따른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출토된 화로형 토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것과 비슷한 양식이다. 통형기대는 막대기 모양의 띠가 있고 몸체에 물결무늬가 새겨지는 등 독특한 형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공주 정지산 유적’(사적 제474호)은 백제 무령왕 부부의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됐다. 정지산 유적은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빈전으로 추정돼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이병호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장은 최근 발표한 ‘백제 왕실의 조상 제사 변천에 대한 시론’ 논문에서 “정지산 유적과 부여 동남리 절터(사지·寺址), 청양 관현리 기와가마터의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은 문양, 제작 기법, 원료에서 서로 일치한다”며 “모두 관현리 가마에서 생산된 동범품(같은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이라고 밝혔다. 동남리 절터가 538년 사비 천도 이후 세워진 사찰임을 감안하면 정지산 유적 내 빈전으로 추정되는 기와 건물이 적어도 6세기 후반까지 존속한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과 왕비가 각각 사망한 시점인 523년, 526년 이후에도 빈전이 오랫동안 유지된 셈이다. 이는 정지산 유적에서 주춧돌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빈전은 거주 목적이 아닌 이상 영구적인 성격의 건물이 아니라고 본 기존 견해와 배치된다. 앞서 고(故) 이남석 공주대 교수는 정지산 유적에서 백제 말기에 지어진 걸로 보이는 소형 무덤 3기가 발견된 사실에 주목해 빈전설을 비판했다. 왕의 빈전이 설치된 신성한 공간에 일반인의 무덤이 들어서는 건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봤다. 이 관장은 “왕궁(공산성)에서 정지산으로 그리고 다시 무령왕릉으로 두 번이나 옮겨진 것치고는 무령왕 부부의 목관 상태가 비교적 온전한 것도 빈전설을 의심케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지산 유적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관장은 조망에 유리한 정지산 유적의 입지나 건물 배치가 부여 청산성 유적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군사시설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빈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국 사서인 수서(隋書) 등에 고구려와 백제는 3년, 신라는 1년에 걸쳐 빈장을 치른 걸로 기록된 사실을 강조한다. 수서 고구려조에는 “사람이 죽으면 옥내에서 빈(殯)을 치르고 3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해 매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특히 “526년 12월 서쪽 땅(酉地)에서 무령왕비의 장례를 치르고 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는 무령왕릉 지석(誌石·죽은 이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판석) 명문에 의미를 부여한다. 백제 웅진(현 공주) 시대 왕궁인 공산성을 기준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에 정지산 유적이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 지석에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적시돼 있다. 정지산 유적을 발굴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을 면밀히 따져볼 때 정지산 유적을 사비 천도 이후로 보기는 힘들다”며 “설사 동남리 절터 기와와 동범품이라고 쳐도 백제 성왕이 천도한 뒤 선왕을 추모하기 위해 웅진을 찾은 만큼 빈전을 일정 기간 유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왕(日王)의 상징’으로 논란이 돼왔던 충남 아산시 현충사의 금송(金松)이 사당 바깥으로 옮겨지게 됐다. 문화재청은 19일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는 최근 회의를 갖고 현충사 금송 등을 이식하는 조경경비계획을 가결했다”고 밝혔다. 계획에 따르면 금송을 포함한 대형 수목 13그루가 경관을 해치고 있어 사당 바깥 사무실 근처로 옮기거나 제거할 방침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내년 봄 시작해 가을쯤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 금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1970년 2월에 심었다. 하지만 일왕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정신이 깃든 현충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다만 금송은 국내 자생식물은 아니지만, 백제 무령왕의 관을 만든 소재일 정도로 교류 역사가 길다. 그간 문화재위원회에선 2000년대부터 여러 차례 금송 이전 여부를 심의했지만 계속 부결돼 왔다. 금송 이전이 확정되면서 현충사 현판 교체 여부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충사는 1707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이 내려오고 있으나, 현재 본전엔 박 전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 걸려 있다. 문화재청은 2005년 전후부터 이 문제를 논의해 왔으나, 찬반양론이 팽팽해 아직 결론짓지 못하고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은 한국 고고학계에서 하나의 미스터리로 통한다. 한반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송국리 문화’란 용어가 생길 정도로 크게 번성했지만, 기원전 4세기 무렵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반면 일본 열도로 전파된 송국리 문화는 오랫동안 존속한 사실이 확인된다.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송국리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다. 1975년부터 현재까지 42년여에 걸쳐 발굴이 진행 중인 송국리 유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랜 기간 조사된 유적이기도 하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부여 송국리 특별전’은 이 유적의 역사적 의의와 발굴 성과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1974년 1호 돌널무덤에서 발견된 요령식 청동검(사진) 등 유물 800여 점을 선보인다. 송국리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은 원형 주거지와 특유의 민무늬토기(송국리형 토기)다. 송국리형 주거지는 2개의 기둥 구멍이 난 타원형 구덩이가 가운데 있는데, 광주 송암동 등 남부지방에서 대거 발견됐다. 특히 송국리 유적 내 1호 돌널무덤에서는 총 33점의 핵심 유물들이 나와 한반도 청동기문화 연구의 기존 오류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에 따라 박물관은 그동안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던 1호 돌널무덤 출토품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데 주력했다. 내년 2월 18일까지. 041-830-8478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반도가 또 흔들렸다. 9·12 경북 경주 지진 후 429일 만이다. 경주 지진보다 규모는 작았다. 하지만 규모 5.0 이상 지진이 인구 50만 명 넘는 대도시를 강타한 건 처음이다. 포항시내 곳곳에서 지진 피해가 발생했다. 충격은 대구 경북은 물론이고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까지 느껴졌다. 그만큼 경주 지진 때보다 불안과 공포도 컸다.○ 무너지고 갈라지고…아수라장 포항 “어? 지진 아냐?” 15일 오후 2시 22분 경북 포항시 북구 한동대 기숙사 생활관. 친구들과 팀 모임을 하던 최모 씨(24)는 건물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불안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7분 뒤 이번에는 방 안이 크게 흔들렸다. 꽂아놓은 책과 책상 위 연필꽂이가 떨어졌다. 최 씨는 친구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운동장으로 나서자 맞은편 강의동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4층 외벽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벽돌은 화단으로 떨어졌다. 그 왼쪽으로 황급히 뛰쳐나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뒤처진 친구들을 향해 빨리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다행히 2명이 찰과상을 입었을 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최 씨는 “경주 지진 이후 대피 훈련을 몇 번 한 데다 강의동에 사람이 별로 없는 날이라 다친 사람이 적은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앙에서 불과 3km 떨어진 한동대는 이날 아수라장이 됐다. 강의동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외벽이 떨어져 나갔다. 글로벌레이저기술연구소가 입주한 건물 1층 내벽은 엑스(X)자 모양으로 갈라졌다. 학교는 일요일까지 휴교하기로 결정하고 안전점검을 시작했다. 재학생 4000여 명 중 80%가량이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어 버스 10여 대를 동원해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외국인 학생 등 거처가 불분명한 학생들은 인근 교회에 임시 숙소를 마련했다. 진앙에서 4km 떨어진 선린대에서도 기숙사 건물 천장이 무너졌다. 지진은 포항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마트 건물 2층 벽면 일부가 무너져 아래 주차한 차량을 덮쳤다. 다른 상가 1층 카페 통유리는 산산조각 났다. 고속철도(KTX) 포항역은 천장 패널 2개가 떨어지고 스프링클러가 고장 났다. 지진 직후 포스텍 건물 등을 비롯해 1057가구가 일시 정전됐다. 북구 흥해읍 영일만항 컨테이너 부두 일부 바닥은 갈라지거나 틈이 생겼다. 대형 유통업체 홈플러스는 포항의 전 점포가 임시 휴점에 들어갔다. 롯데백화점 포항점은 손님과 직원을 대피시키고 오후 5시에 영업을 마쳤다. 대구지법 포항지원 청사 일부 시설이 부서져 재판 10여 건이 연기됐다. 또 문화재청과 조계종에 따르면 포항 보경사 적광전(보물 제1868호)과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보물 제833호) 등 문화재 17건(국가지정문화재 8건 포함)이 피해를 입었다. ○ 롯데월드타워에서도 작은 흔들림 소방청에 따르면 전국에서 지진 신고 8300건이 접수됐다. 피해 신고는 143건, 인명 구조 121건이었다. 대부분 경북지역에서 들어왔다. 포항에서는 길을 걷던 A 씨(70·여)가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발목이 부러지는 등 15명이 다쳤다. 흔들림은 전국에서 느껴졌다. 진앙에서 약 280km 떨어진 경기 북부에서까지 “땅과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여진 피해가 우려되자 시민들에게 공원 등지로 대피하라고 방송했다. 전라도에서도 지진이 감지됐다. 서울에서는 1200여 건, 광주에서는 310여 건의 지진 관련 문의가 쏟아졌다.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555m)에서도 경미한 진동이 감지됐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김모 씨(45·회사원)는 “긴급재난문자를 보는 순간 곧바로 사무실 바닥이 2, 3초간 흔들렸다. 경주 때보다 진동이 심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지진 직후 음성통화와 모바일 메신저도 장애를 빚었다. 포항에 있는 가족과 일시적으로 연락이 닿지 않은 시민들은 마음을 졸였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손모 씨(32)는 “포항 북구에 사는 홀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벨도 울리지 않고 연결도 안 됐다. 10분 뒤에 겨우 통화가 됐는데 그 사이 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말했다. 지진이 나자 산업통상자원부는 규모 5.0 이상 지진 발생 시 매뉴얼에 따라 전국 송유관을 약 2시간 동안 차단했다. 고속철도도 만일에 대비해 속도를 낮췄다. 경부고속선과 경부선 등은 포항 인근 일부 구간에서 열차 속도를 시속 90km로 조정했다.권기범 kaki@donga.com·김동혁·김상운 기자}

조선시대 성곽을 둘러싼 ‘인마(人馬)살상용 부비트랩(함정)’이 최초로 발견됐다. 바닥에 죽창(竹槍)을 꽂고 수풀로 위장한 부비트랩이 나온 것은 국내 유적을 통틀어 처음이다. 한울문화재연구원은 전남 강진군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사적 제397호) 발굴현장에서 성벽 남쪽 해자(垓子·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에 못을 판 것)와 함정 유구 64개가 확인됐다고 15일 밝혔다. 함정은 남문을 에워싼 해자 밖에서 발견됐는데, 지름 3.5∼4.9m의 둥그런 구덩이를 약 2.5m 깊이로 팠다. 64개의 함정은 해자와 6∼8m 거리를 둔 채 2∼4열로 나란히 배치돼 있었다. 함정 바닥에는 끝을 쪼갠 대나무를 뾰족하게 다듬은 죽창들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위장용으로 함정 위에 살짝 덮어놓은 걸로 보이는 잣나무 가지와 풀들이 발견됐다. 이홍우 연구원 발굴팀장은 “함정 지름이 최대 5m나 되는 걸 감안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말까지 살상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해자의 방어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나중에 만든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자 안에서는 조선 초기 도자기가 여럿 발견됐으나 함정에서는 이보다 시기가 늦은 자기 조각만 몇 개 나왔다. 고려 말인 1388년 현 광주에 세워진 전라병영은 왜적 방어를 위해 1417년 강진으로 옮겨졌다. 전라병영은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와 제주도에 배치된 육군을 지휘하는 지방 사령부 역할을 했다. 올해는 강진 전라병영성이 축성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번 발굴에서는 남문 쪽 해자 부근에서 성을 출입할 때 사용된 다리 흔적으로 보이는 나무기둥도 확인됐다. 조선시대 함정을 언급한 기록으로는 다산 정약용이 쓴 민보의(民堡議)가 대표적이다. 다산은 민보의에서 적의 인마를 살상하기 위해 대나무 조각 등을 심어놓은 함정인 함마갱(陷馬坑)을 다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고려시대 희귀 불화(佛畵)인 나한도(羅漢圖·석가모니 제자인 나한을 그린 그림) 4점이 15일 개막하는 동국대 박물관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된다. 특히 이번 나한도는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왕실이 1235년 몽골 침략에 맞서 강력한 항전 의지를 담아낸 불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고려 나한도는 우리나라와 일본, 미국 등에 불과 10여 점만 남아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은 “개인과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총 4점의 고려 나한도를 처음 공개한다”며 “특히 이 중 2점에서는 제작 연대와 경위가 기록된 화기(畵記)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4점 가운데 3점은 도상이 서로 다른 500명의 나한을 낱장에 각각 그린 오백나한도의 일부이며 나머지 한 점은 십육나한도다. 나한은 불법을 깨쳐 신통력을 지닌 수행자로, 불가에서는 일종의 수호신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이번에 공개될 오백나한도 한 점에서 “눈앞에 다가온 적을 속히 멸하시어 나라 안팎을 편안케 하소서. (중략) 을미년(1235년) 10월 대정(隊正·종9품 고려 무관) 김의인이 동량(棟梁·재정 조달 등 실무 책임)을 맡다”라는 기록이 확인됐다. 팔만대장경처럼 부처의 힘에 의지해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려고 한 고려왕실의 간절한 바람이 읽힌다. 이듬해인 병신년(1236년)에 제작된 십육나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정 관장은 “총 516점에 이르는 오백나한도와 십육나한도를 함께 그리려면 최소 10개월 이상 소요된다”며 “고려왕실이 1235∼36년에 걸쳐 나한도를 제작한 걸로 본다”고 말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미국 호놀룰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석가설법도’도 함께 선보인다. 석가여래를 가운데 놓고 좌우로 자리 잡은 보살, 제자들을 그린 이 그림은 16세기 중반에 그려진 대표적인 금선묘(金線描·금가루로 선을 그린 것) 불화다. 조선 전기 석가설법도는 불과 4점만 알려져 있다. 전시는 다음 달 8일까지. 02-2260-3722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남 통영 한산도의 수루(戍樓) 현판이 충무공의 친필로 바뀐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서 집자(集字)한 글씨로 교체될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가 지난달 25일 회의에서 수루 현판과 주련(柱聯·건물 기둥이나 벽에 붙이는 글씨)을 교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 충무공이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우국충정의 시를 읊기도 한 역사 현장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올라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로 시작하는 충무공의 ‘한산도가’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기존 현판에는 1976년 강영수 경남도지사가 쓴 글씨가 적혀 있다. 문화재위는 “지금의 현판 글씨는 수루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어 교체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천안 성거산에서 최대 규모의 백제시대 목곽고(木槨庫·나무로 만든 저장시설)가 발견됐다. 이곳에 5∼6세기경 백제 군사들이 주둔한 산성(山城)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은 “충남 천안시 성거산 위례성(충남도기념물 제148호) 내 용샘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목곽고를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사각형 평면의 목곽고는 가로 5.5m, 세로 5.4m, 깊이 1.8m 크기로 지금껏 확인된 백제시대 목곽고 가운데 가장 크다. 앞서 대전 월평동 산성에서 나온 백제 목곽고는 가로와 세로 길이가 각각 5.2m로 조사됐다. 연구원에 따르면 해당 목곽고는 백제시대에 처음 조성됐으며, 통일신라∼조선시대까지 석축 우물로 개축된 뒤 사용됐다. 목곽고 상부에 있던 목재들에 대해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5∼6세기로 조사됐다. 백제가 한성에서 사비로 천도한 이후 목곽고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곽고는 마치 전통 목가구처럼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서로 짜 맞추는 결구(結構)법으로 지어졌다. 우선 바닥에 가로 3칸, 세로 3칸의 목재를 十자 형태로 결구했다. 이어 교차 지점에 지름 12cm의 구멍을 뚫고 총 16개의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았다. 이때 나무기둥 밑부분을 마치 못처럼 뾰족하게 다듬어 쉽게 끼워 맞출 수 있도록 했다. 이종수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원장(단국대 교수)은 “성거산 목곽고는 다양한 목재 가공·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어 백제시대 건축물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연구원은 목곽고 벽면이 점토로 코팅된 점 등을 미뤄 식수 저장시설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인근에 성벽이 남아있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곳에 백제 군사들이 주둔한 산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곳은 한때 서울 풍납토성과 더불어 백제의 첫 수도였던 위례성 후보지로 추정됐지만, 지금껏 관련 유구가 발견된 적은 없다. 앞서 1980∼90년대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성곽과 서문 터가 확인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장도빈 선생 기념비는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독립운동과 관련한 내용이 전무하여 독립운동 관련 기념비로 볼 수 없다.” 최근 국가보훈처가 국정감사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정재호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 자료다. 앞서 러시아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산운 장도빈 선생(1888∼1963) 기념비가 4년 전 훼손됐으나, 담당 부처인 보훈처는 이를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올 8월 동아일보 취재 결과 드러났다. 보훈처는 “산운 기념비가 발해사 연구를 기념한 것일 뿐 독립운동 내용이 전무하므로 관리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과연 사실일까. 본보가 러시아 현지에서 직접 확인한 본문을 살펴보자.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블라디보스톡 권업신문의 주필로서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한국의 해방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 대한매일신보에서 항일 논설을 쓰다 1911년 연해주로 망명한 산운의 활동이 독립운동과 무관하다면 무엇이 독립운동인가. 1990년 정부가 산운에게 수여한 건국훈장 독립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철에 얽힌 인류 문명사의 대(大)서사시가 펼쳐졌다. 7일 관람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쇠·철·강―철의 문화사’ 특별전은 기술혁신의 매개체이자 전쟁수단이던 철의 다양한 속성을 입체적으로 포착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아우르는 유물들을 통해 인류사 관점에서 접근한 기획 의도가 돋보였다.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을 발굴한 전임 이영훈 중앙박물관장이 심혈을 기울인 전시답게 철의 역사고고학적 의미도 담아냈다. 온갖 합성금속이 쓰이는 21세기에도 철은 여전히 전 세계 금속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는 핵심 물질이다. 기원전 2000년 무렵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발견된 철기 제작 기술은 히타이트 같은 제국을 일으킨 토대였다. 전시장 초입에 자리 잡은 우라르투 왕국과 중국 한나라의 철제 무기들이 이를 생생히 증언한다. 우라르투 왕국은 기원전 8세기 지금의 이란 일대를 장악한 나라였다. 철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중국의 강철 제작 기술은 서양보다 1000년이나 앞섰다. 그러나 19세기 중국의 몰락은 철기 제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시장 2부로 넘어가는 벽면에는 1840년 아편전쟁 당시 영국이 만든 세계 최초의 철제 전함에 의해 청나라 목선이 침몰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산업혁명에 의한 강철 대량생산이 서세동점의 거대한 파고를 일으킨 순간이다. 고대 전투 장면을 묘사한 컴퓨터그래픽(CG)을 배경으로 삼국시대 쇠갑옷과 투구를 늘어놓은 전시 공간은 2부의 백미다. 부산 복천동과 함안 도항리, 김해 양동리 고분 등에서 출토된 가야 갑옷은 흉갑에 새겨진 문양을 비롯한 만듦새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쇠솥이나 철화백자에서 알 수 있듯 철은 일상생활과 예술의 영역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광배(光背)를 연상시키는 조명을 배경으로 전시된 ‘보원사지 철불(鐵佛)’은 쇠를 자유자재로 다룬 신라인들의 솜씨를 보여준다.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유려하게 흘러내린 법의(法衣) 자락은 1300년이 흐른 지금도 변함없이 아름답다. 제작 공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CG를 통해 탄소 함유량에 따라 연철(軟鐵), 강철(鋼鐵), 주철(鑄鐵)로 변화하는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전시장 중간에 쇳조각으로 숲을 묘사한 현대미술 작품을 배치해 문명의 이기로서 철과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인상적인 시도다. 조선시대 청동으로 만든 화포인 ‘대완구(大碗口·보물 제857호)’를 비롯해 730여 점의 유물을 선보인다. 26일까지. 02-2077-947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반도 청동기의 뿌리는 기원전 20세기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라는 주장이 나왔다. 기존 학계는 비파형동검의 중국 랴오닝(遼寧)지역 전래설 위주로 한반도 청동기 기원을 논의해 왔다. 이번에 제기된 견해는 지난해 11월 강원 정선군 아우라지 유적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 청동 유물을 연구한 결과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최근 발표한 논문 ‘한반도 청동기 사용의 기원과 계통’에서 “정선 아우라지에서 발견된 4점의 청동 장식은 한반도에 청동기가 들어온 연대를 파격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실제로 돌 반지처럼 얇게 편 고리와 대롱옥을 닮은 청동장신구 4점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3세기 유물로 판명됐다. 지금껏 남한에서는 비파형동검(기원전 9세기∼기원전 8세기)보다 앞선 시기의 청동유물이 드물어 이른 청동기시대를 놓고 ‘무문(민무늬)토기 시대’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청동기시대를 정의하는 핵심 기준인 농경 흔적은 확인되는데 정작 청동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라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기원전 13세기의 이른 시기에도 청동기가 사용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강 교수는 논문에서 아우라지 청동기와 시베리아 솝카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8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를 비교했다. 돌 장신구에 끼울 수 있도록 청동기를 두드려 얇게 판으로 만든 뒤 구부린 양식이 서로 일치했다. 그는 “아우라지 청동기는 세이마-투르비노 계통의 청동 제련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시베리아 바라바 초원에서 유행한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무기나 마구보다 청동 장신구 위주인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청동기시대에 국한할 때 중원(中原)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다만 중국 북방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평북 신암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서북지방에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 북방 유목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방통행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곡옥(曲玉)을 모방한 청동기처럼 한반도 고유의 문화 요소도 가미됐다. 강 교수는 “석기 전통이 강한 한반도에서는 청동기가 들어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기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사용했다”고 말했다. 돌 장신구에 끼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아우라지 청동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철기가 도입돼 석기의 효용성이 사라진 세형동검 단계 이후에야 한반도에서 청동기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북 장수군에서 6세기 가야 유력층의 무덤임을 보여주는 마구(馬具) 일체가 발견됐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장수 동촌리 고분군 내 한 무덤(30호분)에서 재갈과 발걸이, 말띠꾸미개, 말띠고리 등 마구류 일체를 발굴했다고 8일 밝혔다. 앞서 2년 전 동촌리 고분군 내 다른 무덤에서 징이 박힌 편자(말굽 바닥에 다는 쇠)가 출토됐다. 이 가운데 재갈은 고리가 달린 F자 모양으로, 경북 고령 지산동과 경남 합천 옥전 고분 등 대형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삼국시대 마구는 귀족만 소유했는데, F자형 재갈은 당시로선 희소한 고급품에 속했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에는 총 80여 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번에 발굴된 무덤은 봉분 크기가 남북 17m, 동서 20m, 높이 2.5m에 이른다. 고분군 내 무덤들 가운데 중간급 규모에 해당한다. 내부에선 돌널무덤(석곽묘)으로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主槨) 1기와 부장품을 묻는 부곽(副槨) 2기가 발견됐다. 학계 일각에서는 주곽과 부곽이 나란히 배치된 점을 들어 소가야 묘제와 흡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해당 묘제가 마한의 분구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무덤 안에서는 목 긴 항아리(장경호)와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 그릇받침(기대), 뚜껑 등 토기가 여럿 나왔다. 발굴팀에 따르면 출토된 토기들은 백제와 소가야, 대가야 양식이 혼재된 양상이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고대 장수지역은 주요한 철 생산지였다”며 “철을 매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토기들이 섞여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창경궁에 세운 온실이 일부 원형 복원을 거쳐 10일 공개된다. 문화재청 산하 창경궁관리소는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창경궁 대온실’(등록문화재 제83호) 보수공사를 최근 마쳤다고 밝혔다. 앞서 2013년 점검에서 온실 창틀의 목재가 부식돼 관람객 안전에 문제가 있는 걸로 조사돼 보수에 들어갔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과 목재 구조물에 유리를 감쌌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창덕궁에 가둔 뒤 그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동물원과 함께 세웠다. 일본 왕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바 하야토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공사를 맡았다. 대한제국 말기 서양식 건축물이라는 상징성을 인정받아 2004년 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온실 창틀과 바닥 타일을 교체한 뒤 철제 기둥과 난간을 새로 칠했다. 특히 공사 과정에서 1909년 건립 당시 사용된 영국제 타일 조각을 발견해 원형을 고증할 수 있었다. 해당 타일 제조사(민턴 홀린스)가 1905년에 발간한 제품 팸플릿을 인터넷에서 찾아낸 것. 문화재청은 팸플릿에 나온 타일의 색상과 문양, 발견된 조각의 크기를 참조해 바닥타일을 깔았다. 온실 내부에는 창덕궁 향나무와 경남 통영 비진도 팔손이나무, 전북 부안 중계리 꽝꽝나무 등 70여 종의 식물을 전시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창경궁에 세운 온실이 일부 원형복원을 거쳐 10일 공개된다. 문화재청 산하 창경궁관리소는 지난해 8월부터 시작된 ‘창경궁 대온실(등록문화재 제83호)’ 보수공사를 최근 마쳤다고 밝혔다. 앞서 2013년 점검에서 온실 창틀의 목재가 부식돼 관람객 안전에 문제가 있는 걸로 조사돼 보수에 들어갔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과 목재 구조물에 유리를 감쌌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창덕궁에 가둔 뒤 그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동물원과 함께 세웠다.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바 하야토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공사를 맡았다. 대한제국 말기 서양식 건축물이라는 상징성을 인정받아 2004년 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온실 창틀과 바닥 타일을 교체한 뒤 철제 기둥과 난간을 새로 칠했다. 특히 공사과정에서 1909년 건립 당시 사용된 영국제 타일조각을 발견해 원형을 고증할 수 있었다. 해당 타일 제조사(민튼 홀린스)가 1905년에 발간한 제품 팸플릿을 인터넷에서 찾아낸 것. 문화재청은 팸플릿에 나온 색상과 문양, 발견된 조각의 크기를 참조해 바닥타일을 깔았다. 온실 내부에는 창덕궁 향나무와 통영 비진도 팔손이나무, 부안 중계리 꽝꽝나무 등 70여 종의 식물을 전시한다.김상운 기자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