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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메신저’ 텔레그램이 꼬리를 내렸다. 딥페이크 유통, 마약 밀매, 테러 등 범죄에 악용되고 있으니 협조해 달라는 각국 정부의 요구에도 끄떡 안 하던 텔레그램이 응답하기 시작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등 규제 당국이 성착취물 등 불법 게시물을 지워달라고 하면 바로 삭제하고, 수사기관의 범죄자 개인정보 제공 요청에도 응할 방침이라고 한다. 우범자들이 몰려드는 후미진 뒷골목 같은 온라인 공간에 환한 가로등을 세우기로 한 셈이다. ▷텔레그램으로선 등 떠밀린 선택이었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파벨 두로프가 프랑스에서 체포돼 기소된 상황에서 선처를 구하려면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범죄를 방관하는 플랫폼 사업주는 공범으로 간주해 처벌한다는 프랑스 국내법이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두로프 CEO는 이용자 간 대화가 서버에 남지 않고, 암호화된 개인정보를 푸는 것도 쉽지 않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체포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정보 제공이 일부 가능하다고 태도를 바꾼 걸 보면 그동안 정부의 협조 요청을 일부러 외면해 온 것 같다. ▷이번 텔레그램 사례는 유해 콘텐츠를 방치하는 해외 플랫폼에 책임을 묻고 시정하도록 하는 게 공허한 목표가 아니란 걸 보여준다. 외국 기업에 무리하게 국내법을 들이대면 통상 마찰이나 사업 철수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설득을 병행하면서 책임을 다하도록 동원 가능한 압박 수단을 마련해놔야 한다. ▷호주의 온라인안전국(eSafety Commissioner)이 좋은 사례다. 이 기관은 디지털 범죄를 총괄 대응하는 호주 정부의 컨트롤타워다. 온라인안전국은 구글,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플랫폼 기업에 2년간 시간을 줘 유해 콘텐츠 자정 시스템을 만들도록 한 뒤 충분치 않으면 정부 기준에 따르도록 했다. 아동 성학대나 테러 관련 게시물은 최악의 콘텐츠로 분류해 무조건 삭제하게 했다. 정부의 최고 대응 기구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제재를 부과하다 보니 기업들의 이행률도 높다. ▷우리는 빅테크 기업들과 상대할 이렇다 할 컨트롤타워가 없다. 여성가족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방송통신위원회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다. 이들 부처에서 불법 콘텐츠를 발견하면 방심위로 넘기는데 방심위는 구속력이 없는 민간 독립기구다. 플랫폼 기업들에 자율 규제를 요청할 수 있을 뿐이어서 삭제 요구 콘텐츠의 30∼40%는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텔레그램을 변화시킨 건 프랑스 사법 당국이고, 호주에서 빅테크들이 눈치 보는 건 온라인안전국이다. 우리도 이런 사례를 참조해 해외 플랫폼 기업들이 불법 유해 콘텐츠 방치를 돈 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는 발상 자체를 못 하게 해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법원에서는 형사사건을 맡을 판사를 정할 때 요즘도 나무로 된 회전원통을 쓴다. 팔각형의 원통에 판사들 명함이 각각 봉투에 담긴 채 들어있는데 법원 공무원이 원통을 돌려 명함을 골고루 섞은 뒤 그중 하나를 꺼내든다. 기소한 검사와 피고인 측 변호사는 원통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함께 들으며 이 과정을 지켜본다. 미국도 민사소송은 우리처럼 무작위 전산 배당을 하지만 신체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형사재판에선 이런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판사 배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의심이 들지 않도록 공개 추첨을 하는 것이다. 정의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눈에 보여야만 비로소 실현된다는 게 미국 사법제도의 오랜 원칙이다.‘눈에 보여야 정의’ 美 법원의 원칙 우리 형사사법 절차에도 비슷한 방식이 쓰이는 경우가 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적정한지 외부 전문가들이 검증하는 수사심의위원회가 열릴 때다. 법률가, 학자, 언론인 등 약 250명의 위원단 풀에서 15명의 심의위원을 뽑는데 로또 추첨기 같은 기구가 동원된다. 위원장(현재는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이 기구에 손을 넣어 고유번호가 적힌 공 15개를 무작위로 뽑는 식이다. 이것만 보면 수사심의위가 투명하게 운영되는 것 같지만 딱 여기까지다. 선정된 위원 15명이 누구인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는 모두 비공개다. 다수결로 나온 결론만 짤막히 발표될 뿐 몇 대 몇으로 나온 결정인지도 알 수 없다. 수사심의위는 검찰이 하겠다고 해서 도입된 제도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말 검찰개혁의 압박이 거세지자 외부 감시를 받겠다며 검찰이 이 제도를 꺼내들었다. 기소 독점 등 검찰권이 공정하게 행사되는지 객관적인 검증을 받겠다고 만든 제도라면 절차가 투명한 게 핵심이다. 사건 성격에 맞는 전문가가 참여했는지, 결론에 이른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수사심의위의 결정을 신뢰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모두 숨긴 채 검찰과 위원들의 선의를 믿어달라는 게 지금의 수사심의위다. 검찰은 심의위원이 누군지 알려지면 외압의 우려가 있다고 한다. 이는 회의 종료 후 명단을 공개하고 위원단 풀을 정기적으로 바꾸면 될 일이다. 위원들 스스로가 공개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수사심의위는 국민적 의혹이 제기되거나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에서 피의자 기소 여부, 수사 계속 여부를 가리는 중요한 절차다. 이런 결정에 참여한 전문가가 자기 이름을 걸지 않고 익명성 뒤에 숨어서 낸 의견이라면 무게가 실리기 어렵다. 위원들 중에는 수사기록을 볼 수도 없고, 양측의 30쪽 분량 의견서와 짧은 발표만으론 사안을 충분히 따져보기 어려워 의견 공개를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검찰이 위원들에게 충분한 자료와 시간을 제공해 풀어야 할 문제다. 수사심의위가 지금처럼 베일에 가린 채 운영되면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 검찰이 수사가 미흡해 여론의 비판이 예상될 때 방어막으로 삼거나, 부담스러운 결정을 하기 위한 수순으로 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심의위의 결론에 꼭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제 기능 하려면 위원-회의록 공개해야 수사심의위가 투명하게 운영됐더라면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사건은 이 제도의 존재 이유를 보여줄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수사팀이 무혐의 처분하려는 이 사건을 두고 외부 전문가 15명이 자기 이름을 걸고 치열하게 논쟁한 회의록을 있는 그대로 공개했다면 어땠을까. 수사팀과 같은 결론이 나왔더라도 ‘김 여사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절차’라는 비판이 지금처럼 격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원석 전 검찰총장은 디올백 사건 수사심의위를 소집하며 “더 이상의 논란이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지만 국민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수사심의위로는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새 무선호출기를 받은 사람은 모두 버릴 것.’ 17일 오후 3시 30분경 레바논의 무선호출기 수천 대에 이런 메시지가 떴다. 짧은 음성으로 온 이 메시지를 듣기 위해 호출기를 만지거나 귓가로 가져간 사람들은 곧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호출기를 옷 주머니에 넣고 있어 메시지가 온 지 몰랐던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삐삐’로 불렸던 이 호출기는 몇 초 뒤 레바논 전역에서 일제히 폭발했다. 이 작은 물건은 터지면서 손과 눈, 복부에 치명상을 입혔다.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2800여 명이 부상당했다.▷폭발한 호출기 소지자는 상당수가 레바논 무장단체인 헤즈볼라 조직원들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는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과 무력 충돌을 벌여 왔다. 올 초 이스라엘이 휴대전화 도청과 위치추적을 강화하자 헤즈볼라 지도부는 대원들에게 휴대전화 대신 무선호출기를 쓰도록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레바논으로 갈 호출기가 생산·유통되는 과정에서 누군가 호출기 배터리 옆에 소량의 폭약을 끼워 넣었고, 원격 기폭장치를 통해 폭발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이런 정교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과 동기를 가진 쪽은 이스라엘밖에 없지만 이스라엘은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고 있다. 이번 호출기 동시 폭발로 정치·군사적 반사이익을 보는 쪽도 이스라엘이다. 고화력 미사일로 위협하지 않더라도 헤즈볼라 조직원들에게 일상에서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다는 공포심을 심어줘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헤즈볼라 지도부는 추가 피해를 우려해 조직원들에게 호출기의 주파수를 끄고 배터리도 제거하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헤즈볼라로선 내부 통신이 한동안 마비되는 타격을 입게 됐다.▷문제는 호출기 폭발의 피해가 헤즈볼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 한복판이나 슈퍼, 카페, 집 등에서 호출기가 폭발해 무고한 민간인들도 다수 희생됐다. 레바논 보건부에 따르면 사망자 중에는 조직원의 8세 딸 등 어린이들도 포함됐다고 한다. 파편에 맞은 노인들이 의식을 잃은 채 이송됐고, 병원에 입원 중이던 조직원의 호출기가 폭발해 의료진이 중상을 입기도 했다. 많은 피해자들이 손가락을 잃었고 열 손가락을 모두 잃은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저강도 공격 수단이 동원된 전쟁도 그 결과는 얼마든지 참혹할 수 있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얼굴 없는 전사자들이 많다고 한다. 자폭 드론이 병사들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 머리 위에서 터지기 때문이다. 군번줄도 함께 사라져 버려 기존 방식으론 전사자 신원 확인마저 어려울 지경이다. 컴퓨터 게임을 하듯 프로그램과 조이스틱 조작으로 손쉽게 인명을 해치는 것이다. 냉전 이후 오랜 휴지기 끝에 다시 시작된 전쟁은 예전보다 한층 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친강 중국 전 외교부장(장관)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신임을 얻은 건 그가 외교부 의전국장으로 일할 때 보인 충성심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시 주석의 벨라루스 방문을 앞두고 친 전 부장은 새벽에 상대국 의전 책임자에게 전화해 시 주석이 올라가야 할 계단이 총 몇 개인지 세어서 알려 달라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동선을 짰다고 한다. ▷‘헬리콥터를 타고 정상에 오른 관리’라고 불릴 정도로 친 전 부장은 승승장구했다. 2018년 외교부 부부장, 2021년 주미 대사를 거쳐 이듬해 중국 최연소(56세) 외교부장이 됐다. 몇 달 뒤 중국공산당 국무위원(부총리급)으로도 승격됐는데 전임인 왕이 부장이 5년간 외교부장을 하다 그 자리에 오른 것과 비교하면 초고속 승진이었다. 하지만 성공은 거기까지였고 가파른 추락이 찾아왔다. 외교부장 재임 6개월 만인 지난해 6월 그는 돌연 자취를 감췄다. ▷아무리 잘나가는 공직자나 기업인, 연예인도 공산당 눈 밖에 나거나 부패 혐의 등에 연루되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게 중국이다. 하지만 시 주석의 복심이자 중국 ‘늑대전사(전랑) 외교’의 상징이던 그의 갑작스러운 퇴장은 온갖 추측을 낳았다. 홍콩의 유명 여성 앵커와 혼외자를 출산했다는 소문부터 권력 암투설, 간첩설, 사망설이 이어졌다. 그러다 올 7월 중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친 전 부장의 사직 요구를 수용해 면직했다고 밝혔을 뿐 관련 경위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동지’로 지칭해 완전히 숙청된 건 아닐 것이란 여지를 남겼다. ▷1년 넘게 행방이 묘연했던 친 전 부장이 올봄부터 중국 외교부 산하 출판사에 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최근 보도했다. 베이징 도심 골목에 있는 ‘월드 어페어스 프레스’(세계지식출판사)라는 곳에 그의 이름이 낮은 직급으로 올라 있다는 것이다. 그가 실제 근무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직원들은 친 전 부장이 일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부총리급에서 출판사 하위직으로 추락하긴 했지만 처벌을 면한 것만으로도 그에겐 다행이란 시각이 많다. 시 주석은 2012년 집권 이후 ‘호랑이 사냥’이라 불리는 고위층 사정 작업을 지속해 왔는데 그 와중에 옥사하거나 종신형에 처한 권력자들이 적지 않다. 중국 정부는 친 전 부장을 처벌하지 않고도 그의 행방을 철저히 감추고 낙마 경위도 비밀에 부침으로써 ‘어떤 공직자도 당의 손아귀에 있다’는 선전 효과를 이미 거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부가 고위 각료를 경질할 때 국민에게 사유를 밝히는 게 상식이지만, 친 전 부장은 왜 내쳐졌는지, 또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 의문이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사회주의 중국의 짙은 폐쇄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신동준 씨(42)는 21년 차 바이올린 제작자다. 동준 씨는 어릴 때 청각장애를 갖게 돼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한다. 그 대신 그는 눈으로 소리를 보고, 피부로 진동을 느낀다.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바이올린을 만든다. 음악 콩쿠르에 출전한 학생들은 물론이고 전문 연주자와 음대 교수들도 동준의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오른다. 그 역시 2022년 세계 3대 현악기 제작 콩쿠르인 독일 미텐발트 콩쿠르에 나가 주목을 받았고, 2년 뒤 재도전을 준비 중이다. 보청기를 낀 바이올린 장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지난달 EBS 국제다큐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됐다.》그가 소리를 보고 느끼는 방법2일 경북 경주시에 있는 동준 씨의 바이올린 공방에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실내 온도가 20도, 습도는 45도에 맞춰져 있었다. 나무 악기인 바이올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천장에는 그가 제작 중인 바이올린 4대와 비올라 1대가 걸려 있었다. 33㎡(약 10평)쯤 되는 공간을 가득 채운 5개의 작업대에는 자르고, 대패질하고, 계측하고, 칠하기 위한 각종 장비들이 펼쳐져 있었다. 목수와 재단사, 과학자의 작업실을 합쳐 놓은 듯했다.“좋은 소리를 어떻게 분간하느냐”는 질문에 동준 씨는 유럽 발칸반도산 단풍나무 몇 토막을 가져왔다. 그는 기자의 귓가에 나무토막을 갖다 대더니 손가락으로 나무를 톡톡 두드렸다.“진동이 느껴지세요?” 느껴지는 건 없었다. 동준은 나무토막을 자기 귓가로 가져가 나무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저는 귓가의 피부와 고막으로 진동을 느껴요. 이 나무처럼 귓가를 확 때리는 듯한 느낌이 나야 열린 나무예요. 안 느껴지면 닫힌 나무죠. 열린 나무로 만들어야 바이올린에서도 열린 소리가 나요.” 바이올린은 앞판과 뒤판이 볼록한 ‘아칭(arching)’ 구조로 돼 있다. 아칭을 잘 만드는 게 핵심이다. 부분별로 나무 두께가 다르기 때문에 섬세하게 작업해야 한다. 동준 씨는 앞판과 뒤판을 수천 번 두드리며 최적의 아칭이 나올 때까지 깎아낸다. 동준 씨는 “저는 소리를 이렇게 본다”며 작업실 구석으로 향했다. LP 턴테이블처럼 생긴 소리 테스트기가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 앞판을 테스트기에 올리고는 앞판 위에 현미가루를 흩뿌렸다. 스피커를 통해 ‘윙’ 하는 소리가 나오자 음파의 진동으로 현미가루가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그러곤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이뤄 양옆으로 펼쳐졌다. “지금처럼 가루들이 좌우로 3자 모양, 가운데로 일자 모양이 나와야 아칭이 제대로 잡힌 거예요.” “바이올린 제작은 최고의 예술”동준 씨는 그림을 그리며 중고교 시절을 보낸 미대생이었다. 그러다 20대 초반 악기 제작으로 진로를 틀었다. 가족들은 “왜 굳이”라며 그를 말렸다고 한다. “그림은 전시를 하면 사람들이 한 번 보고 지나가잖아요. 저는 미술이 일회성 예술인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어요. 그러다 집 근처에 바이올린 수리점이 있었는데 거기 걸린 악기들을 볼 때마다 바이올린 제작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모양을 만들고, 색을 칠하고,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게다가 과학적이고….”동준 씨는 수리점에 들어가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첫 3개월은 대패질만 시켰는데도 동준이 포기하지 않자 그곳의 수리 전문가가 노하우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동준은 이후 5년 넘게 바이올린 수백 대를 열고 뜯고 재조립하면서 다양한 제작 방식을 역으로 배워갔다. 잘 만든 것과 못 만든 것을 나란히 놓고 손으로 두드려가며 좋은 소리를 만드는 최적의 진동을 체득했다. 동준은 이후 몇 년간 악기 회사에 다니다가 2012년 개인 공방을 차렸다. 그때부터 주 7일,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상을 12년째 이어오고 있다.―너무 일만 하는 것 아닌가?“제작에 몰입하면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 한 대를 완성하기까지 공정이 500개 정도 되는데 계획대로 진도를 빼려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얼마나 만드나?“1년에 12대 정도 만든다. 바이올린 하나를 만드는 데 6개월~1년가량 소요된다. 중간에 건조 시간이 있어서 여러 대를 동시에 진행한다. 원하는 진동이 안 느껴지면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해 늘 시간이 부족하다.”―늘 신경이 예민할 것 같다.“소리를 느껴야 하는 것도 있고, 바이올린이 과학적인 악기여서 정확하게 비율을 맞춰야 해서 감각이 곤두선다. 예전엔 매운 음식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너무 맵게 느껴져 못 먹는다.” ―얼굴과 손에 상처가 많은데….“칠 작업용 물감을 만들 때 에탄올을 쓰는데 욕실에서 작업하다가 알코올에 취해 넘어지면서 유리를 들이받아 얼굴을 베었다. 손도 많이 베이는데 저보다는 나무가 안 다치는 게 중요하다. 손은 꿰매면 되지만 나무는 한번 잘못되면 버려야 하니까.”―이 일이 그렇게 소중한가?“바이올린을 만드는 건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지금은 나무토막이지만 바이올린으로 만들어지면 100년 넘게 살아가니까. 저는 쓰임이 있는 악기를 만들고 싶다. 100년 넘게 쓰일 악기를 만드는 데 6개월, 1년을 바치는 건 전혀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내가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은 안 됐나?“되니까,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베토벤도 귀가 안 들려서 피아노에 발을 대고 건반 진동을 느끼면서 작곡을 했다. 그게 큰 용기를 줬다. 소리를 꼭 귀로만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연주자와 제작자는 빛과 그림자 관계동준 씨의 바이올린이 연주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탈리아나 미국에 있는 유수의 제작학교 출신들 사이에서 그는 수리 장인의 도움과 독학으로 배운 무명 제작자였다. 동준 씨는 만든 악기들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연주자들을 만났다. 연주자가 악기에 관심을 보이면 연주 운지법을 세밀하게 그려온 뒤 바이올린을 완성해 갖다 줬다. “연주 소리는 속일 수가 없어요.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라면 언젠간 연주자와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어요.”그의 첫 고객은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예고생이었다. 이어 콩쿠르 지망생들로 넓어졌고, 전문 연주가와 음대 교수들도 그의 바이올린을 켠다. 동준 씨는 2021년 전국의 현악기 장인들이 모이는 서리풀 악기제작 전시회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출품해 연주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동준 씨는 악기를 연주자에게 넘긴 뒤에도 한동안 그의 공연장을 찾는다. 수천 번 바이올린을 두드리고 튕기며 느꼈던 소리와 진동이 제대로 울려 퍼지는지 멀찍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고 한다. 소리가 깊을수록 진동은 멀리까지 선명하게 전달된다. “연주자와 악기 제작자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예요. 무대에서 연주자가 박수를 받을 때 공연장 한 귀퉁이에 제작자가 있습니다. 연주자에게서 “오늘 연주가 편안하고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제야 안도감이 들죠.”소리를 몸으로 가르쳐준 외할머니동준 씨는 한 살 때 열병을 앓다가 주사제의 부작용으로 청력을 잃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기의 성장이 더딘 줄로 여겼지만 손자를 눈여겨본 외할머니는 동준 씨의 청각장애를 가장 먼저 알아봤다. 외할머니는 밖에서 일을 하는 딸을 대신해 동준 씨를 돌보며 구화법을 가르치는 특수학교에 보냈다. 구화법은 입 모양으로 말을 이해하고 발성 연습을 통해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교육법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몸으로 배웠어요. 외할머니는 제가 학교에서 배운 걸 하루도 안 빼놓고 복습을 시키셨어요. 할머니 목에 제 손을 대고, 할머니는 제 목에 손을 대고 대화하면서 울림과 진동을 느꼈어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할 때도 손에 느껴지는 진동이 다 다르거든요. 제가 힘들다고 도망 다녀도 외할머니는 저를 끝까지 놓지 않으셨어요. 동요도 할머니 따라 하면서 배워서 불렀는데 특수학교 선생님들이 신기해하셨어요.”동준 씨는 외할머니가 그를 키울 때 썼던 육아일기를 간직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공책에 형형색색의 색연필로 입 모양을 하나하나 그렸고, 손자가 기억할 수 있도록 동요 가사에 나오는 동물이나 물건들도 그림으로 그렸다. <1985년 9. 4>아침에 책 읽어줄 것, 음악 틀어줄 것.발성훈련. 모음의 입 모양을 하나하나 그려서. 손으로도 함.눈여겨보기(똑같은 모양 찾기) 얼른 보여주고 찾게 하기.<1985년 9. 9>탬버린, 피리, 실로폰을 동준이 못 보게 하고, 하나씩 불고 치며 알아맞히게 함. 피리 소리 못 맞히고 실로폰 소리는 맞혔다. 동준이 일어서! 공부 다 했다. 인사하자.동준이가 그림 장려상을 받았다. 생각 밖이다.동준 씨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외할머니는 손자가 만든 바이올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노년에 치매를 앓았던 외할머니는 동준 씨를 자주 불러 냉장고에 있는 과일이 동날 때까지 깎아줬고, 동준 씨는 배가 불러도 군말 없이 과일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외할머니는 제게 ‘평범하게 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남들 사는 것처럼 살라고. 보청기를 끼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제 일상도 어쩌면 평범한 삶 아닐까요. 다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동준 씨는 외할머니 산소에 갈 때면 들려드리는 곡이라면서 ‘슈피겔 임 슈피겔(거울 속의 거울)’이란 연주 녹음 곡을 기자에게 틀어줬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맑고 깊은 바이올린 선율이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동준 씨가 만든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저는 좋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만들고 싶어요. 어디선가 외할머니가 듣고 계실 수도 있잖아요. 가끔은 여쭤보고도 싶어요. 할머니, 이 소리 듣고 계시죠? 마음이 좀 평안해지세요?”경주=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지난해 가을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마약 수사로 큰 성과를 냈다. 필로폰을 국내로 몰래 들여온 말레이시아 조직원들을 검거해 74kg을 압수했다. 830억 원어치에 달하는,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급 규모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밀수범들부터 “세관 직원들 도움으로 마약을 통과시켰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밀수를 단속해야 할 세관이 오히려 공범일 수 있다는 중요한 범죄 단서였다. 사건을 보고받은 경찰청장은 “대내외에 잘 알려야 할 훌륭한 성과”라고 치하했다. ▷그런데 언론 브리핑을 앞두고 수사팀은 난관에 부딪혔다. ‘세관 연루 의혹도 공개하겠다’는 수사팀장(백해룡 경정)과 ‘그건 빼라’는 서장(김찬수 총경)이 갈등을 빚었다. 백 경정은 최근 국회에 나와 당시 상황을 폭로했다. “서장이 ‘용산에서 심각하게 보고 있다’면서 브리핑 연기를 지시했다. 용산에서 괘씸하게 보고 있다는 취지여서 머리가 하얘졌다.” 이에 김 총경은 “직을 걸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해당 대화 녹취가 없어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석연찮은 대목이 적지않다. 김 총경의 지시로 브리핑이 연기된 사이 백 경정은 고위 간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시 서울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이던 조병노 경무관이었다. 그는 “브리핑에 세관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 경찰이나 관세청 둘 다 정부 일원인데 스스로 침 뱉으면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청장이 널리 홍보하라고 칭찬한 사건에 지휘계통에도 없는 간부가 끼어들어 중요 내용을 빼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 경무관은 용산과 가깝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채 상병 사건 핵심 인물인 임성근 전 사단장 구명 로비 의혹의 핵심이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공범인 이종호 씨가 그를 위해 용산에 승진 로비를 한 정황도 있다.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과시해온 이 씨는 지인과의 통화에서 조 경무관을 언급하며 “별 2개(치안감) 달아줄 것 같다”고 했다. 조 경무관이 실제 승진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경찰청장이 그의 부당한 수사 개입을 문제 삼아 인사혁신처에 징계를 요청했음에도 ‘불문(책임을 묻지 않음)’ 처리됐다. 청장의 징계 요청이 수용되지 않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세관이 마약 밀수범들과 공모한 단서가 나왔다면 공권력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범죄이므로 적극 수사해 성과를 내려는 게 경찰 조직의 생리다. 그런데도 조 경무관이 일면식도 없는 수사팀장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 ‘세관은 빼달라’고 한 것은 경찰청보다 센 곳에서 내려온 요구 때문은 아니었는지 의심을 살 만하다. 게다가 마약 수사로 큰 공을 세운 백 경정은 지구대로 좌천된 반면, ‘용산 발언’ 의혹이 있는 김 총경은 대통령실 행정관으로 영전한 것도 정상적인 인사로 보이지 않는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배심제를 하는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에는 배심원이 되기 어려운 직업이 있다. 의사나 법률가, 사건 관련 분야의 학자 등 전문직이 배심원에 선정되면 판사는 이런 사람들부터 돌려보낸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근거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게 배심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배심원 중 전문가가 섞여 있어 다른 배심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공정한 판단이 힘들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12명의 보통 사람들로 이뤄진 미국의 배심원단은 유무죄를 직접 결정한다. 판사는 형량만 정한다. 배심원단이 무죄 평결한 사건은 검사가 상소할 수도 없다. 다만 유죄 평결은 배심원단의 만장일치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유죄가 강하게 의심되는 피고인들이 무죄로 풀려나는 일도 종종 있지만 수사기관이 배심원 만장일치라는 문턱을 넘기 위해 혐의 입증을 더 철저히 하게 되는 순기능이 크다. ▷우리나라 국민참여재판은 판사가 배심원 평결에 꼭 따라야 하는 건 아니지만 만장일치로 나온 결론일 땐 얘기가 다르다. 1심 재판부가 배심원들의 일치된 판단을 받아들여 내린 판결은 상급심에서 함부로 뒤집어선 안 된다. 최근 대법원은 30억 원 규모 사기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깨고 돌려보내면서 “배심원 만장일치 의견의 무게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사유를 들었다. 1심에서 배심원 전원이 무죄로 판단했다면 유죄로 보기에 합리적 의심이 든다는 게 분명히 확인된 것이므로 그에 명백히 반하는 중대한 사정이 없는 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례들이 쌓이면서 ‘배심원 만장일치’와 ‘1심 법원의 수용’이란 조건이 충족되면 상급심도 판결을 뒤집는 데 신중해지는 경향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결론도 1심 법원이 그와 반대로 판결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이뤄진 2800여 건 중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결론과 반대로 난 판결이 109건에 달한다. 배심원들 앞에서 재판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 국민참여재판 건수는 연간 92건(2022년)에 불과하고 배심원들 출석률도 55%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배심원 한 명 한 명은 평범한 시민이지만 다양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이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라면 사법적인 무게가 실려야 한다. 법원이 이를 가볍게 뒤집어 버리면 국민참여재판이란 제도의 실효성이 흔들린다. ‘어차피 결론은 판사의 몫’이란 한계 안에선 배심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평결에 참여할 동기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배심원단에게 유무죄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을 준 것도 그래야만 배심원들이 고도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재판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판결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사람은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 늙어가지 않는다. 바다에 파도가 몰아치듯 특정 시기에 확 늙는다. ‘가속 노화’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노화가 갑자기 빨라지는 두 분기점을 특정했다. 44세와 60세. 20∼70대 108명을 7년간 관찰했더니 ‘예전 같지 않은 몸’이 눈에 띄게 현실화되는 나이가 바로 그때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노화가 특히 빠른 건 몸속 단백질 변화 같은 생물학적 원인 못지않게 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40대 중반은 직장에 다니든, 자영업을 하든 가장 몸 바쳐 일하는 시기다. 조직 내 중간관리자로서 제법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도 이때다. 자녀 교육, 노부모 건강 등 신경 쓸 일도 많다. 과도한 스트레스 그 자체도 해롭지만, 쌓인 긴장을 풀기 위해 술 담배에 더 의존하기 쉽다. 40대부터는 알코올과 카페인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대사 능력이 감소하는데 섭취량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늘어나면 사람이 폭삭 늙을 수밖에 없다. ▷요즘은 ‘젊은 노화’를 촉진하는 유혹들도 많다. 노화의 4대 주범이 운동 부족, 기름진 식단, 술, 담배라고 하는데, 일에 지친 40대들에겐 운동보다는 유튜브 넷플릭스 같은 콘텐츠가 더 달콤하다. 균형 잡힌 식단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다 보니 배달 음식이란 손쉬운 대안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30대 중반부터는 당뇨 고혈압을 유발하는 체내 단백질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거기에 안 좋은 습관까지 겹친 탓인지 요즘 40대 남성의 비만율은 50%가 넘는다. ▷60세 가속 노화의 원인은 40대와 정반대인 측면이 있다. 은퇴나 정년퇴직 등으로 몸의 긴장이 갑자기 느슨해지는 게 문제다. 적당한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있을 땐 잠을 잘 자다가 출근을 안 하면서 수면의 질이 떨어졌다는 은퇴자들이 적지 않다. 사람 만날 일이 줄면 거울을 덜 보게 되고 자연히 피부 등 외모 관리에 소홀해진다. ‘퇴직한 지인을 오랜만에 봤는데 1, 2년 새 부쩍 늙은 것 같다’는 반응을 흔히 접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60대부터 심혈관 질환이 급증하는 데에는 일상이 불규칙하고 활력이 떨어지면서 전반적인 신체 저항력이 낮아진 탓도 있다고 한다. ▷100세 시대인 요즘, 60세 생일을 기념하는 환갑은 의미가 많이 퇴색하긴 했지만 이번 연구 결과를 보면 60세는 여전히 삶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기존의 환갑이 지금껏 살아 있는 걸 축하한다는 의미였다면, 지금의 환갑은 ‘유병장수’ 시대에 대비해 천천히 늙어가도록 건강을 바짝 챙기자고 응원하는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급노화’가 찾아올 수도 있는 환갑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면 아직 건강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몸을 돌보자는 다짐이 필요할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오빠 돈 벌려고 무지 노력해요~’최근 건설 감리업체들의 금품 로비 사건을 수사한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며 설명 자료에 나온 이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감리업체로부터 수천만 원을 받아온 한 심사위원이 아내에게 보낸 카톡 문자였다. 뒷돈을 받는 게 돈 벌려는 노력이라니… 이어진 부부의 대화는 이랬다.‘담주 목요일에 심사가 걸렸어요. 선정되면 심사비 외에 약간의?’(남편)‘좋군~’(아내)‘(심사위원에) 안 들어가도 상품권도 받고 주유권도 받고… 돈도 주고 어찌 됐던 다 좋아요’(남편)‘나도 좋네~~’(아내)아내와의 카톡에 드러난 도덕적 해이대학 교수인 그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운영하는 심사위원단 후보군에 들어 있어 공사 입찰을 하려는 감리업체들의 로비 대상이었다. 평소엔 술이나 골프 접대를 받다가 특정 공사의 감리업체를 선정하는 심사위원으로 확정되면 업체 쪽에서 돈다발을 가져왔다. 뇌물 시세도 형성돼 있었다. 최고점을 주면 3000만 원, 경쟁 업체에 최하점을 주면 2000만 원 정도였다. 심사위원회가 열리기 하루 전 위원 명단이 정해지는데, 그 직후부터 심사 당일 오전까지가 금품 공세의 피크타임이었다. 동시다발적 로비를 받는 일부 심사위원은 업체들끼리 경쟁을 붙여 뇌물 액수를 높이기도 했다.감리업체들이 이렇게까지 금품 로비를 한 건 돌아가며 한 업체씩 수주할 수 있도록 담합했기 때문이다. 규정대로 경쟁 입찰을 하면 낙찰될지가 불확실하고, 금액도 낮게 써내야 하는데 돌아가며 낙찰을 받으면 가격 경쟁을 할 이유가 없어 비싼 값에 사업을 따낼 수 있다. 관건은 담합이 실현되도록 심사위원들을 매수하는 것이다. 일부 업체가 담합에 응하지 않거나 신규 업체가 입찰에 들어오면 그쪽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심사위원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이런 관행은 LH가 나랏돈으로 발주하는 공공사업에서 특히 만연해 있었다. 국민 세금이 낭비될 뿐 모두가 이익을 보는 거래이기 때문이다. 비싸게 낙찰되면 감리업체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고, 뇌물과 접대비도 거기서 마련했다. 심사위원들은 업체들이 현금을 들고 찾아오니 부수입이 생겼다. 이를 바로잡아야 할 LH 등은 이런 생태계를 애써 망칠 생각이 없는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감리업체 직원 상당수가 LH 퇴직자들이고, 이들은 심사위원들과 근무 인연, 학연 등으로 얽혀 있었다.‘순살 아파트’ 사태가 벌어진 건 기술력이 아닌 뒷돈으로 감리업체를 선정해 온 결과라고 봐도 무방하다. 감리는 설계가 적정한지, 규정대로 시공되는지 검증하는 절차다. 콘크리트를 묽게 만들거나 철근의 개수·간격이 틀렸다면 이를 시정해야 하는 게 감리업체들이다. 철근을 적게 넣어 지하주차장이 붕괴된 인천 검단 아파트 사고는 감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막을 수 있었다. 이 아파트 공사의 감리업체도 입찰 담합에 가담했던 곳이다.돈을 준 쪽이나 받은 쪽 둘 다 문제지만 우리 법은 받은 쪽을 더 무겁게 처벌한다. 이번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7명 중 6명이 심사위원이다. 각자 받은 돈이 5000만~8000만 원에 이른다. 대부분 교수들이어서 민간인이지만 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 뇌물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현행법상 감리업체 선정 위원들은 심사 기간 동안 공무원으로 간주될 정도로 고도의 공적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일해서 돈 버는 시대 지나’ 자기합리화서두에 나오는 ‘뇌물 심사위원’은 아내와의 카톡에서 이런 말과 함께 대화를 끝맺는다.‘이제 일해서 돈버는 시대는 지났어요. (정년까지) 9년 8개월 남았는데 죽어라고 심사하고 돈 벌어야지요~’죄의식을 찾아보기 힘든 그의 말들은 비리가 일상화된 곳에서 전문가의 직업의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준다. 이런 도덕적 불감증의 결합으로 유지되는 불법의 생태계는 비단 건설업계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이규원 대구지검 부부장 검사 겸 조국혁신당 대변인은 직함부터가 모순적이다.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는 검사가 정당의 대변인을 맡는 건 과거엔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이다. 조국혁신당은 검찰 해체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는 정당이다. 그 당의 대변인이 검찰에서 월급을 받으며 주요 당직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건 국가공무원법과 대법원 판례의 엇박자 때문이다. 이 검사는 총선을 한 달 앞둔 올 3월 법무부에 사표를 내긴 했다. 하지만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이 사표를 내도 중징계 사유가 있고 관련 사건으로 기소된 경우 퇴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검사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금지 요청서 허위 작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개월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고 항소심 재판 중이어서 이 법에 따라 사표 수리가 되지 않는다. 검사 신분이 유지되는 것이므로 정치 활동도 금지된다. ▷하지만 ‘황운하 판결’이라고 불리는 2021년 대법원 판례가 이 검사에게 정치인의 길을 열어줬다. 민변 회장 출신의 김선수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당시 재판부는 공직자가 사표를 내기만 하면 수리 여부에 상관없이 사직으로 간주되고, 선거 출마도 가능하다고 봤다. ‘소속기관장에게 사직원이 접수된 때에 그 직을 그만둔 것으로 본다’는 공직선거법 조항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 덕에 경찰 간부 시절 울산시장 선거 개입 혐의로 재판을 받다가 사표 수리가 안 된 채로 출마해 당선된 황운하 의원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난 총선은 이 판결이 낳은 뉴 노멀이 현실화된 첫 선거였다. 이 검사와 이성윤 전 서울고검장, 박은정 전 법무부 감찰담당관 등 수사·재판을 받거나 중징계 가능성이 높은 검사들이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출마했다. 의원 배지를 단 이 전 고검장과 박 전 담당관은 ‘당선과 동시에 기존 공직자는 사퇴 처리가 된다’는 선관위 규정에 따라 사표 수리가 됐다. 하지만 조국혁신당 비례대표로 나섰다가 낙선한 이 검사는 퇴직 처리도 안 되고, 그렇다고 정치활동을 금지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됐다. ▷대검은 이 검사가 업무복귀 명령에 불복하자 감찰에 착수했지만 그를 복귀시킬 효력은 없는 조치다. 그렇다고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은 이 검사의 사표를 수리할 수도 없어 월급은 검찰에서 받고, 일은 당에서 하는 이중 생활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칫하면 이 검사가 다음 선거에서 당선될 때까지 검찰이 생활비를 대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황운하 판결이 재판 중인 공직자에게 선거 출마라는 탈출구를 열어줬듯, 지금의 엉성한 법제를 놔두면 이 검사처럼 ‘소속 기관에서 월급 받는 정치인’의 길을 걷는 공직자들이 또 나올 수 있다.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의 빈틈을 메워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최근 두 달 간격으로 열린 두 고위 법조인의 인사청문회를 두고 ‘재테크를 잘하려면 인사청문회를 잘 봐야 한다’는 반응이 적잖이 나온다. 대법관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으로서 자질을 검증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남다른 재테크 수완이 돋보였다는 웃지 못할 관전평이다. 대학생 딸에게 비상장 주식으로 60배 넘는 수익을 안겨준 뒤 서울 용산구 재개발 지역의 주택까지 갖게 해준 이숙연 대법관 후보자 부부나, 기묘한 증여와 절세를 통해 딸에게 성남의 노른자 땅을 선사한 오동운 공수처장 사례를 보며 ‘부모 찬스’는 자녀가 어릴 때 일찌감치 누리게 해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반응들 속에는 부러움과 함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냉소와 체념이 배어 있다. 어차피 각자도생하는 세상, 법의 빈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엘리트 법조인들의 재테크 노하우나 배워보자는 것이니 말이다.지도층 향한 냉소와 체념 팽배 요즘 이렇게 인사청문회가 희화화되는 바람에 우리가 놓치곤 하는 게 하나 있다. 고위공직자는 대부분 공문서의 맨 아래 줄에 이름이 나오는 공적 결정의 책임자라는 점이다. 더는 법적으로 다퉈볼 수 없는 3심 확정 판결문의 끝에는 주심 대법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해 관계자들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을 두고 정부가 정책적 처분을 내릴 때도 통지문을 끝맺는 건 장관의 이름이다. 그래서 고위공직자는 사건 당사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사회적 논란이 큰 공적인 사건을 다룰 땐 더욱 폭넓은 신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이 후보자와 오 처장은 그만한 신뢰를 받을 만한 공직자일까. 이 후보자는 170억 원, 오 처장은 33억 원의 재산을 신고했는데 부유함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재산 증식 과정이 국민들의 상식에 부합하는지가 중요하다. 이 후보자의 딸과 아들은 8세, 6세일 때 아버지 돈으로 비상장 주식을 300만 원씩 샀다가 지난해 13배 높은 4000만 원에 팔았다. 딸은 19세이던 2017년에도 대부분 아버지 돈인 1200만 원으로 또 다른 비상장 주식을 사서 5년 만에 63배의 차익을 실현하고 거기에 증여받은 수억 원을 보태 재개발 지역 갭 투자를 했다. 세법 전문 변호사였던 오 처장은 2020년 부인 소유의 재개발 예정지 땅을 20세 딸에게 증여하면서 희한한 거래를 했다. 당시 시세대로 6억 원에 그 땅을 바로 증여하면 될 것을 딸에게 3억5000만 원을 먼저 증여하고, 그 돈으로 시세보다 싼 4억2000만 원에 어머니의 땅을 사도록 했다. 증여세를 줄이기 위한 편법 증여였다.공직자 불신 커지면 국민이 손해 두 사람은 인사청문회에서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해 송구하다”고 했지만 이어서 나온 발언은 국민 눈높이를 제대로 알고 한 사과인지 의심케 했다. “요즘은 아이 백일 때 금반지 대신 주식을 사주지 않느냐”는 이 후보자의 말은 기껏해야 삼성전자 주식 몇 주 사주는 게 전부인 국민들에겐 황당한 얘기였다. “딸에게 아파트 하나는 마련해줘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는 오 처장의 해명 역시 그가 생각하는 소박함의 기준이 국민들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줬다. 사회의 룰을 다루는 고위공직자가 지나치게 사익을 추구하고 이를 상식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저울로 정당화한다면 자칫 그들이 주도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그런 사법체계에서는 사회 전반의 준법의식이 얕아지고 정직한 경쟁도 설 자리가 줄어든다. 심판을 믿을 수 없는 경기장에선 선수들이 판정에 신경 쓰느라 실력 발휘를 못 하듯 공직자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면 그로 인한 손해는 국민의 몫이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한때 400만 명이 넘었던 부산의 인구는 현재 329만 명이다. 서울에 이어 ‘2대 도시’ 타이틀을 유지하곤 있지만 얼마 전 인천도 300만 명을 돌파했다. 최근엔 반갑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늘었다. 부산이 전국 7개 특별·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 단계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소멸위험 지역이란 개념은 일본의 사회학자가 만든 것으로 우리 통계청도 201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부정적 뉘앙스 탓에 소멸이란 단어가 적절하냐는 논란도 있지만 인구 감소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지역의 소멸위험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는 출산 적령기(20∼39세) 여성이 얼마나 살고 있느냐이다. 이 인구를 노인(65세 이상) 인구수로 나눈 값이 소멸위험지수다. 2030 여성 인구가 노인 인구의 절반이 안 되면, 즉 0.5 이하이면 소멸위험에 진입한 것으로 분류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의 소멸위험지수는 0.49다. 서울(0.81) 경기(0.781) 인천(0.735)에 비해 크게 낮다. ▷부산 같은 대도시라도 일자리나 아이 키울 환경 등 청년들이 뿌리내릴 여건이 취약해지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이번 보고서가 던지는 경고다. 보고서에는 또 하나 눈에 띄는 게 있는데 부산 해운대구마저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해운대에는 대형 쇼핑몰과 문화시설, 초고층 빌딩이 많아 젊은층이 선호할 것 같지만 임차료와 주거비가 비싸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자리 부족도 문제지만 지역 내 양극화가 심하면 청년들이 발붙이기 힘들다. ▷이런 대도시는 부산만이 아니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 광역시 45개 구·군 중 소멸위험 지역은 거의 절반에 달한다. 대구 대전 울산 등 여러 광역시 일부 지역에서도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방을 떠난 청년들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몰려들고, 그 결과 수도권에선 한정된 일자리와 주거공간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지방의 쇠락을 막지 못하면 저출산 해결도 어려워진다. 지방에선 청년들 자체가 적어서, 수도권에선 전국에서 모여든 청년들이 먹고살기 바빠서 결혼·출산이 쉽지 않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보고서를 보면 출산율을 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 수도권 집중 완화다. 우리의 도시 인구 집중도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수준(우리의 22%)으로 낮추는 게 저출산 관련 정부 지출이나 육아휴직 사용률을 OECD 평균으로 끌어올리는 것보다 각각 8배, 4배 높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부산 같은 대도시가 활력을 찾지 못하면 다른 저출산 대책에 아무리 많이 투자해 봐야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최근 기소된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가 음주운전 혐의를 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고 후 편의점에서 샀던 캔맥주 4캔이 큰 역할을 했다. 김 씨는 지난달 9일 밤 서울 강남에서 택시를 들이받고 경기도의 한 호텔로 도주한 뒤 그 앞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샀다. 보통의 음주 뺑소니범들은 알 만한 곳으로 도주해 몇 시간이면 잡히는데 김 씨는 추적이 어려운 외딴 호텔에 숨어 있다 17시간 뒤에야 경찰서에 나타났다. 이렇게 시간을 지연시켜 놓고, 맥주까지 사 마셨으니 경찰이 아무리 정교하게 추정한다고 한들 김 씨의 운전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3% 이상이었다는 걸 입증하긴 어렵다. ▷음주 사고 후 일부러 술을 더 마셔 사고 당시 알코올 농도를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술타기’는 음주운전자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앞에서 경찰이 단속 중이면 황급히 편의점으로 가 소주를 들이켜거나, 집에서 술을 마시며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수사기관이 제때 음주 측정을 못 한 경우 사후에 혈중 알코올 농도를 역산하는 ‘위드 마크 공식’이 있긴 하지만 사고 후 2차 음주는 이마저 무력화시킨다. ▷대법원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꼼수를 단죄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2020년 음주 상태로 승용차를 들이받은 화물차 운전사가 경찰에 잡히기 전 소주 1병을 더 마시는 바람에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69%에 달했음에도 무죄 판결을 한 사건에서다. 대법원은 “음주운전자가 처벌을 회피하게 되는 결과를 용인하는 것은 정의 관념에 맞지 않지만 이를 처벌할 입법적 조치가 없는 현재로선 불가피한 결론”이라고 했다. ▷김 씨는 일단 도주 후 술타기 전략으로 음주운전 혐의를 피하는 데는 성공했다. 검찰은 형량이 더 무거운 혐의로 그를 재판에 넘겼다. 음주 영향으로 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한 위험운전치상 혐의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없어도 되지만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였다는 걸 입증하는 게 관건이다.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김 씨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음주운전자 꼬리표보다 ‘역대급 사법 방해자’라는 오명이 연예인에겐 더 치명적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김 씨 사건이 남긴 ‘순기능’이 하나 있다면 음주운전 처벌에 있어 입법의 공백을 여실히 확인시켜준 점이다.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행태를 막지 못하면 형량을 아무리 높여도 소용이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검찰이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술을 더 마시면 음주측정 거부죄와 동일하게 처벌하는 ‘김호중 방지법’을 추진하고 있고, 국회에서도 유사한 법안이 속속 발의되고 있다. 진작 나왔어야 할 법인데 이제라도 촘촘히 만들어 음주운전자들이 꼼수 부릴 틈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9일 정은혜 씨(34)와 만나 악수를 하는데 손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느껴졌다. 지난 8년간 5000명이 넘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 손이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은혜 씨는 화가이자 배우다. 2022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한지민의 쌍둥이 언니(영희)를 연기했다. 캐리커처 작가인 그는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전시를 열며 왕성히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한 공로로 포니정재단이 젊은 혁신가에게 주는 ‘포니정 영리더상’을 수상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프로바둑기사 신진서 9단 등이 받은 상이다.》● “얼굴 그리는 게 좋아요. 사람들은 다 다르니까”경기도 양평에 있는 은혜 씨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그는 뜨개질을 하며 휴식 중이었다. 파란색 실로 목도리를 짜고 있었다. “우빈 오빠 주려고요.” 은혜 씨는 함께 드라마 촬영을 했던 김우빈 배우와 가끔 카톡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했다. 뜨개질은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은혜 씨에게 외로움을 달래준 오랜 친구다. 요즘도 틈틈이 뜨개질을 해 지인들에게 선물한다.은혜 씨가 사람들을 만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이던 2016년부터다. 주말에 북한강변에서 열리던 야외 벼룩장터 ‘문호리 리버마켓’에 노점을 두고 손님들을 맞았다. 그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손님을 계속 앉아 있게 하진 못하고 사진을 찍어서 보고 그렸다. 여름에는 뙤약볕을, 겨울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종일 그렸다. 손등은 부르트고 손가락엔 굳은살이 박였다. 그렇게 5000여 명의 얼굴을 그려 왔지만 은혜 씨는 요즘도 손님을 만나는 게 설렌다고 한다. “저는 얼굴을 그리는 게 좋아요. 사람들은 다 다르잖아요.”노점에 찾아온 손님과 은혜 씨의 대화는 보통 이렇게 시작한다.“여기서 그림 그려주시나 봐요?”“네. 니 얼굴.”“저 예쁘게 그려주세요.”“아유 뭘… 지금도 예쁘면서.”‘니 얼굴’은 은혜 씨와 가족들이 운영하는 노점 이름이다. 반말처럼 들리는 이 세 글자가 손님들을 순식간에 무장 해제시킨다.● 사람들 시선 피해 자기만의 동굴로은혜 씨가 캐리커처 작가로 변신한 지금을 그의 부모는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외모 때문에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던 은혜 씨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상처가 깊어져 자신을 무심코 보는 시선마저 공격적이라고 느껴 과민 반응하는 ‘시선 강박’도 생겼다. 어머니 장차현실 씨는 자신만의 동굴에 고립되어 가는 은혜 씨를 지켜만 봐야 했다.“당시 딸의 휴대전화 통화료 고지서가 왔는데 기본요금 외에 추가요금이 0원이었어요. 뭔가 잘못된 줄 알고 통신사에 전화했더니 사용량이 ‘0’이라는 거예요. 단 한 통도 전화가 올 데도, 전화를 걸 데도 없었던 거죠. 스물두 살 아가씨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어서 눈물이 났어요.”사춘기의 은혜 씨는 방에 틀어박혀 낙서를 하거나 뜨개질로 시간을 보냈다. 외출하고 온 날에는 상상 속의 친구들을 한 명씩 불러내 소리를 지르며 밖에서 겪은 불쾌함에 대해 화풀이를 했다. 은혜 씨는 그때의 마음을 이런 시로 남겼다.‘난 외롭다. 두렵다/나 같은 장애로 왜 태어났을까/괜히 낳아 보네. 괜히 나왔다/나는 외톨이야. 놀 친구가 없다/내 인생이 너무나 힘들다/내가 죽으면 참 좋았을 걸 안다/그래도 쉬고 싶다/울 때는 울어야 한다/기쁠 때는 기뻐야 한다’(나는 왜 그랬을까 中)● 그림을 그리며 세상과 눈을 맞추다“2013년 2월 27일. 제가 처음 그림 그린 날.”은혜 씨는 11년 전 그날을 날짜까지 기억했다. 현실 씨가 딸의 소질을 알아본 날이기도 했다. 미대 출신 만화가인 현실 씨는 당시 생계를 위해 화실을 열었고, 집에만 있던 은혜 씨도 화실로 나오게 해 청소를 시켰다. 하루는 학생들 틈에서 그림을 따라 그리는 은혜 씨를 보고 잡지 속 여자 향수 모델을 그려보게 했다.“은혜 씨가 그린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얘한테 이렇게 좋은 게 있었다니…. 장애인 딸로만 봤지, 뭔가를 하려는 욕구가 있고, 잘하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어요. 저조차도 은혜 씨에게 내재된 힘을 보지 못했던 거죠.”(현실 씨는 딸을 ‘은혜 씨’라고 부른다. 관공서 등에서 성인인 은혜 씨를 자립 능력이 없는 아이처럼 대하는 걸 보고 자신부터 호칭을 바꿨다고 한다.)그날 이후 현실 씨는 화실 구석에 딸을 위한 책상을 마련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늘 목말라했던 은혜 씨에게 “네가 해결하지 못한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다. 은혜 씨는 가족이나 연예인들의 얼굴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연필을 들면 저녁까지 놓지 않았다. 그림에 몰입하면서 가상 친구들을 소환해 대화처럼 들리는 혼잣말을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제가 종일 외출했다가 저녁에 화실로 돌아온 날이었어요. 은혜 씨가 불도 안 켜고 창가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빛에 의지해 둥근 어깨를 구부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뭔가가 북받쳐 오르더군요.”(현실)은혜 씨는 그림을 시작한 지 3년쯤 된 2016년 가족들과 집 근처에서 열리던 문호리 리버마켓에 구경을 갔다. 사람이 많으면 움츠러들곤 했던 은혜 씨가 “여기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했다. 타인의 눈빛이 늘 두려웠던 그였지만 그림을 그려 달라며 마주 앉는 손님들의 눈은 자신 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난히 무더웠던 그해 8월 은혜 씨는 ‘니 얼굴’ 노점을 차렸다. 코로나19 기간을 빼고 5년 가까이 거의 매주 노점을 열었다. 아침잠이 많은 은혜 씨는 주말 아침만큼은 맨 먼저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덥거나 추워서 나가기 싫었던 적 없어요?”(기자)“전혀요.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니까.”(은혜)● 틀리게 그려도 세상에 하나뿐인 그림보통 캐리커처는 인물의 장점을 부각하거나 귀엽게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은혜 씨의 그림에는 그런 고려가 담겨 있지 않다. 연예인이건 정치인이건 일반인이건 특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은혜 씨는 “저는 보이는 대로 그려요. 그냥 그게 다예요”라고 했다.“한번은 군수님이 오셨어요. 좀 멋지게 그려 드리면 좋겠는데 은혜 씨가 그분 이빨이 다 쏟아지게 그려놨더라고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나 이리저리 재는 게 없는 것 같아요.”(현실)은혜 씨의 그림은 구도나 명암 같은 미술 공식과도 거리가 멀다. 현실 씨가 가끔 훈수를 둬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다못한 현실 씨가 스케치를 쓱쓱 지우고 고치기라도 하면 은혜 씨는 씩씩거리며 엄마를 째려본다.“엄마가 조언을 하거나 고쳐주면 싫어요?”(기자)“갱년기라 그런가 보다 해요. (웃음) 늙어서 그래, 늙어서.”(은혜)현실 씨도 이제는 딸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했다. “저처럼 정통 미술을 배운 사람은 틀리지 않는 그림을 그려요. 은혜 씨는 자기 멋대로, ‘틀리면 어때’ 하는 마음으로 그리거든요. 근데 결과물을 보면 완성도가 저보다 높아요. 제가 전문가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은혜 씨는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거죠.”● 그림을 통해 갖게 된 ‘마주 볼 용기’‘열다섯 살인 나는 성형수술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고 싶다/마음도 감정도 달라지면 좋겠다. 성격도 날씬해지면 좋겠다.’(되돌아졌으면 좋겠다 中)은혜 씨가 어릴 적 쓴 시 중에는 외모로 인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을 표현한 글이 많다. 늘 내 안의 끼를 표현하고 싶고,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거울을 보고 나면 세상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림은 그에게 성형수술 없이도 사람들과 마주 볼 용기를 줬다.“은혜 씨를 따뜻하게 보는 눈빛들이 은혜 씨를 살린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잖아요. 제 눈에 딸은 달라진 게 별로 없는데 딸을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진 거 같아요.”(현실)은혜 씨는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 이후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포옹전’ ‘정은혜와 친구들’ ‘반려견 지로의 초상화’ 등 전시를 이어오며 요즘도 하루 10시간 정도 캔버스 앞에 앉는다. 강연 요청도 많다고 한다.“요즘 은혜 씨 알아보는 분들 많아요?(기자)“아유, 골치 아파요. 그놈의 인기.”(은혜)“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요?”(기자)“글쎄요. 이미 다 이뤄졌는데.”(은혜)은혜 씨는 4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짤막하게 답했다. 질문을 받으면 찬찬히 생각하다 옆에 앉은 현실 씨가 끼어들려고 할 때쯤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툭 내놨다. 이 질문은 답을 듣기까지 특히 더 오래 걸렸다.“은혜 씨에게 그림이란 어떤 거예요?”(기자)“음…. 만약에 안 그린다고 생각하면 숨이 안 쉬어지는 거.”(은혜)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인 일본은 태평양의 섬들을 군사기지로 만들어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했다. 일본 해군이 막강할 땐 통하는 전략이었지만 1943년 이후 전세가 기울면서 이 섬들은 일본군의 무덤이 됐다. 미국은 전력이 약한 섬을 골라 띄엄띄엄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해상만 봉쇄하는 ‘개구리 뛰기’ 작전을 폈다. 그렇게 식량과 무기 보급을 차단하면 고립무원에 갇힌 일본군은 굶주림의 지옥으로 내몰렸다. ▷남태평양 마셜제도에 있는 산호초 섬 밀리환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섬에는 일본군 3600여 명 외에 군사시설 건설 목적으로 전남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조선인 1000여 명이 있었다. 미군 함정이 이 섬을 포위하면서 보급선의 접근이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섬 안의 군인들에게 각자도생하라고 지시했다. 해안가엔 미군이 있어 물고기를 잡긴 어려웠고, 벌레나 쥐를 잡아 겨우 연명했다. ▷조선인들 중에는 노역에 끌려 나갔다가 실종되는 이들이 늘어갔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살해해 인육을 먹는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일본군이 고래고기라며 고깃덩어리를 던져준 날, 몇몇 조선인들은 사라진 동료를 찾아 나섰다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했다. 허벅지 살이 도려진 채 뼈만 남은 조선인의 시체가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거나, 잡아먹히게 될 운명 앞에서 조선인들은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일본군 감시병을 제압한 뒤 미군에 투항하자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45년 3월 감시병 11명 중 7명을 제거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살아 도주한 병사가 군 병력을 데리고 왔다. 조선인 55명이 학살됐고, 나머지는 야자나무 위 등으로 숨어 목숨을 건졌다. ▷밀리환초 조선인 학살 사건이 알려지기까지 30년 넘게 일제 강제동원을 연구해온 일본인 사학자가 큰 몫을 했다. 역사교사 출신인 다케우치 야스토 씨는 밀리환초 생존자 이인신 씨를 인터뷰한 동아일보 기사(1990년 11월 3일자)를 보고 이 사건 연구를 결심했다고 한다. 기사에는 “나무 열매를 먹으며 버티다 미군 함정으로 헤엄쳐 갔다. 함께 탈출을 기도했던 조선인 150여 명이 죽었다” 등의 상세한 증언이 담겨 있다. 다케우치 씨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제공한 징용사망자 명부를 수작업으로 분석해 밀리환초에서 사망한 조선인을 한 명 한 명 찾아냈다. 그는 1942∼1945년 학살과 기아, 강제노동으로 희생된 218명의 명단을 최근 광주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당시 미군에 구조된 조선인들 사진을 보면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채 온몸이 까맣게 타 있고 뼈만 앙상한 모습이다. 밀리환초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국가는 섬에 고립된 아군을 버렸고, 버림받은 군인들이 타국에서 끌려온 노동자들을 학살하도록 방치한 나라가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 연방하원에 진출한 한국계 의원 4명 중 하나인 앤디 김의 아버지는 고아원 출신에 소아마비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서울역 등지에서 한때 동냥을 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비 장학생 기회를 잡아 1970년대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를 나와 유전공학 박사로 자수성가했다. 김 의원의 어머니는 공립병원 간호사로 일했다. 그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구경시키며 “네게 모든 것을 선사한 나라(미국)를 사랑하고 가슴에 새기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42세의 김 의원은 오바마 행정부 때 국무부를 거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으로 재직했다. 그가 2018년 백인 밀집지인 뉴저지 3선거구에서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을 때 ‘아메리칸 드림의 기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이제 3선인 그는 최근 민주당의 뉴저지주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됐다. 뉴저지는 민주당이 지난 50년간 내리 상원의원을 배출한 텃밭이다.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11월 선거에서도 김 의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첫 한국계 미 연방 상원의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당 상원의원 50명 하나하나가 다 대통령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야심작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추진 초기에 조 맨친 상원의원의 반대에 부딪히자 답답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거의 반반이어서 여당에서 한 명이라도 이탈하면 정부가 정책 추진에 애를 먹는다. 그만큼 한 표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주별로 2명인 상원의원 100명은 권위와 희소성이 있어 주지사들과 함께 대권주자로 여겨진다. ▷소수인종인 데다 조직력과 자금력이 약한 김 의원은 당내 상원의원 경선에서 승산이 낮았다. 뉴저지주는 당 지도부의 입김이 강하고, 많은 정치인이 뇌물 수수로 물러날 정도로 금권선거의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현직 상원의원도 지난해 뇌물 혐의로 기소됐다. 그 틈에 경선에 나선 김 의원은 당내 기득권 개혁을 승부수로 던졌다. 통상 도전자는 출마 전 지도부에 지지를 구하는데 이를 건너뛰고 출마 선언을 해 주도권을 잡았다. 지도부가 자신들이 미는 후보를 투표용지 맨 위로 올리고 다른 후보는 구석에 배치해온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이민 1세대인 부모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끌어내야 했던 강인함을 김 의원 역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복한 교육을 받고 미 주류사회로 진입하긴 했지만 당국자들이 한반도 안보나 무역정책을 결정할 때 한국의 목소리를 별로 고려하지 않는 걸 보며 정치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상원의원이 된다면 한국은 든든한 대변자를 얻게 되고, 미국에도 ‘기회의 땅’이란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요즘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보유세를 물리자는 얘기가 나온다. 반려동물 증가로 개 물림 사고나 동물 유기 등이 늘고 있는데 여기에 예산을 할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곳간 사정이 급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무자녀세 도입을 검토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자체들이 저출산 지원책을 내놓긴 했지만 실탄은 없다 보니 이런 고육책까지 거론되는 듯하다. 친환경 차량 세제 혜택을 줄이고 전기차 주행세를 도입하자는 목소리 역시 커지고 있다. 지자체들이 줄어드는 세수를 어떻게든 만회해보려는 몸부림이다. ▷지난해 중앙정부의 역대급 세수 결손으로 지자체 곳간은 직격탄을 맞았다. 소요 예산보다 56조 원이나 덜 걷히다 보니 지방으로 가는 교부세·교부금이 23조 원가량 줄었다. 부동산 경기침체와 공시지가 하락으로 지자체 수입원인 취득세와 재산세 수입도 줄어들었다. 기업들 실적마저 부진해 이들이 내는 법인지방소득세도 감소했다. 쪼그라든 재정으로 살림을 꾸리자니 예산이 줄줄이 깎여나간다. 인천에선 도로에 금이 가고 아스팔트가 깨져도 보수공사를 못 하고 있고, 학생들 무상급식이 중단될 위기에 놓인 지자체도 있다.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예산이 깎이는 게 특히 문제다. 기업 투자유치 보조금, 전문인력 인건비 지원, 대학생 인턴 지원, 골목상권 부활 사업 등이 축소되고 있다.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돌아야 세수가 발생하는데 경제 활력을 키우는 사업이 위축되면 오히려 악순환에 빠져 재정 가뭄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지방채를 발행해 돈을 끌어오려는 지자체도 많지만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5%에 달하는 고금리가 큰 부담이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강원도는 안 쓰는 도로를 민간에 팔기로 했다. 행정 목적으로는 용도가 마땅치 않지만 민간의 수요가 있을 만한 도로를 골라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강원도는 도내 미활용 도로를 매각하면 향후 10년간 1200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자체가 이런 식으로 공공자산을 내다 팔면 당장은 보탬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론 세수 기반을 잃게 될 수 있다. ▷감세 기조로 인해 중앙정부부터 세수 확보에 애를 먹는 마당에 지자체 교부세가 늘어나길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운 상황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지방정부들 사정이 녹록지 않지만 광역단위로 재산세를 걷은 뒤 고르게 배분해 지자체 간 격차를 줄이는 대안을 고려해볼 만하다. 서울은 시가 각 자치구 재산세의 50%를 걷어 25개 구에 나누는 재산세 공동과세를 시행 중인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광역지자체가 쇠락한다면 단기 처방에 그칠 수 있어 지방 세수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는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이원석 검찰총장은 제주지검장이던 2022년 4월 주요 일간지에 6차례 연달아 기고를 한 적이 있다. 현직 검사장이 신문 오피니언면에 직접, 그것도 여러 매체에 등장한 건 이례적이었다. 그의 칼럼은 당시 여당이 한창 밀어붙이던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입법에 반대하는 글이었는데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우선 검경을 수직적 관계로 보던 기존 인식을 벗어던졌다. 자신이 수사하거나 지휘했던 사건들을 생생히 소개하며 두 기관이 힘을 합치고 서로 검증해야만 범인을 단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는 검찰 과오에 대한 반성이었다. 정치적 사건에 공정성이 부족했다는 지적, 살아있는 권력에 굴종했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일을 못한다고 무력화시킬 게 아니라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더 엄히 꾸짖어 달라고 했다.검사장 때 ‘검수완박 반대’ 6건 기고 연쇄 언론 기고 한 달쯤 뒤 이 총장은 대검 차장에 올랐고, 몇 달 후 윤석열 정부의 첫 검찰총장이 됐다. 이젠 어느덧 2년 임기 중 4개월을 남겨두고 있다. 그가 칼럼에 썼던 대로 살아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어떤 사건이든 공정하게 실체를 규명하는 데 수사권을 쓰겠다는 다짐을 얼마나 실현했는지 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은 검찰 수장의 내공을 시험대에 올린 사건이다. 수사 대상이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고, 정치적 논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원칙대로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지만 검찰 수사는 김 여사에 대한 검찰 고발이 이뤄진 지 5개월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이 총장의 신속·집중 수사 지시는 총선이 야당의 압승으로 끝난 뒤에야 나와 ‘특검 대비용’이란 비판을 자초했다. 그 후 10일 만에 이 총장의 뜻과 다르게 단행된 인사로 수사팀 지휘부가 물갈이되면서 제대로 수사가 될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총장 패싱’ 인사가 있었다고 해도 검찰의 최종 책임자가 이 총장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김 여사 수사를 견제하는 용산과 이를 ‘김 여사 특검’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야권의 이중 압박을 풀어내는 게 그의 과제다. 그러자면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의 중립을 지켜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명품백’ 엄정 수사로 그때 다짐 지켜야 윤 대통령과 이 총장은 한때 검찰 수사권 수호를 위해 한배에 탔었다. 윤 대통령이 총장에 취임할 때 그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며 대검 기획조정부장으로 발탁했다. ‘검수완박’을 저지하기 위한 검찰 대응을 총괄하는 핵심 참모였다. 이 총장이 검찰 대표로 언론에 기고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이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총장은 인사권으로 검찰을 흔드는 대통령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야권이 벼르고 있는 ‘검수완박 시즌2’에 맞서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검찰 수사권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는 최근 검찰 내부망에 글을 올려 “형사사법 체계가 정쟁의 트로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정치권을 비판했는데,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검찰의 엄정한 수사야말로 형사사법 체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 총장이 2년 전 기고했던 자신의 칼럼들에서 답을 찾았으면 한다. 물증까지 나와 있는 명품백 사건조차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는 검찰이라면 그가 6번이나 칼럼을 쓰면서까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검찰이 과연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임기가 4개월밖에 안 남았고, 곧 있을 후속 인사에서 수사팀마저 교체될 수도 있지만 이 총장은 흔들림 없이 수사 지휘에 매진해야 한다. ‘총장 패싱’ 인사 다음 날 이 총장은 기자들에게 “인사는 인사고, 수사는 수사”라고 말했는데 적어도 수사만큼은 책임지고 완수하는 게 그가 2년 전 칼럼에서 했던 다짐을 지키는 길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부장검사도 사기를 당한다. 얼마 전 퇴임한 검찰 간부는 10여 년 전 서울의 한 검찰청 부장검사일 때 지인에게 속아 690만 원을 떼였다. 사기꾼들을 숱하게 감옥에 보냈던 그마저 사기를 피하지 못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사기범 앞에선 학력이나 사회 경험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심하고 경계해도 한순간에 당할 수 있는 게 사기 범죄다. ▷전세사기 대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박상우 장관이 최근 기자들과 차담회를 했다. 보증금 8400만 원을 날린 대구의 30대 여성이 극단적 선택을 해 8번째 ‘전세사기 사망자’가 나온 지 10여 일쯤 되던 날이었다. 박 장관은 피해자 지원 관련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 전에는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을 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꼼꼼하게 따지는 인식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이날 간담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토부가 원래 피해자 주거지원대책을 발표하려다 돌연 취소하고 차담회로 대체한 것이어서 장관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놓을지 기대하던 참이었다. 박 장관은 이날 50분간 많은 얘기를 했지만 ‘덜렁덜렁 계약했다’는 한마디가 피해자들 가슴에 비수로 박혔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국토부는 “이전 전세계약 과정에 허점이 상당했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피해자들 마음을 돌리진 못했다. ▷요즘 전세사기는 세입자가 대비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업자가 처음부터 짜고 치밀한 각본에 따라 세입자를 속이는 경우가 많다. 계약을 하고 보니 가짜 주인이거나, 동일 매물 다중 계약, 계약 직후 임대인 변경 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이러니 누구보다 악착같이 미래를 준비해 온 젊은이들도 속절없이 당했다. 한 간호사는 휴일 없이 맞교대 근무를 하며 7년간 모은 결혼자금 수천만 원을 잃었고, 조종사를 꿈꾸며 월급을 모아 온 30대 청년은 훈련비로 쓸 5800만 원을 전세보증금으로 날린 뒤 빚을 갚기 위해 비행기 대신 원양어선을 타고 있다고 한다. ▷전세사기는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제도의 실패가 낳은 지능 범죄다. 주무 장관이라면 누구보다 철저히 이런 관점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박 장관은 그날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피해자들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고 했지만 이후 질의응답에서 나온 ‘덜렁덜렁’ 발언은 경솔했다. 올 1월 부산지법의 한 부장판사가 전세사기 사건 주범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한 뒤 방청석의 피해자들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절대로 여러분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게 아니란 점을 반드시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여기 제 이름 보이시죠? 병원 와서 그동안 많이 참으신 거 알아요. 저한테는 눈치 보거나 참지 말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랑 얘기하다 신경질 나거나 피곤하면 손만 들어주시고요.” 사회복지사 고주미 씨는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에서 일하며 말기 암 환자들과 만날 때면 이런 인사를 건넨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호스피스 등록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편지로 정리해 가족들에게 전하는 게 주미 씨의 일이다. ‘내 마음의 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을 2013년부터 시작해 11년간 257명의 말기 환자를 만났다. “저는 ‘환자분’이란 호칭 대신 ‘○○님’이라고 이름을 불러요. 환자라는 정체성 말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요. 의사, 간호사들은 그분들에게 더 이상 해줄 얘기가 별로 없고, 가족들도 많이 지쳤거나 속내를 털어놓기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주미 씨가 편지를 함께 써 보자고 하면 환자들 반응이 제각각이다. “저 이제 죽어요?” “이거 유서 쓰는 건가요?” “편지라곤 각서밖에 안 써봐서…” 등등. 하지만 편지를 쓰고 나면 “누구도 나한테 이런 걸 물어오지 않았다” “정리하느라 손이 얼마나 아팠어”라며 고마워하는 이들이 많다.》● 임종을 앞두고서야 깨닫는 것들주미 씨는 후두암 말기여서 말을 할 수 없는 40대 아버지를 만난 날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목과 상체 곳곳에 호스가 달려 있던 그는 주미 씨를 보고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의 아들은 병실 밖을 서성였다. 평소 엄했던 아버지를 어려워한다고 했다.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쓸 수는 있다는 뜻인 듯했다. 주미 씨가 수첩을 내밀자 그는 겨우 알아볼 만하게 몇 글자를 적었다. ‘칭찬 그때그때 못 한 거 미안하다.’“그분한테 다음 질문으로 ‘지금 두려운 게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수첩에 크게 ×자를 그리더니 밑줄을 두 줄이나 긋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편지 제목에 ‘나는 두렵지 않다’라고 써서 보여드렸는데 그 제목에 줄을 쓱 긋고 다시 쓰셨어요.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아버지는 주미 씨와 만난 지 나흘 만에 숨을 거뒀다.말기 상태인데 수용을 거부하는 환자가 있다기에 만나러 갔다가 전 직장 동료를 마주한 적도 있다.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50대인 그에겐 사춘기 아들 둘이 있었다. 주미 씨가 “애들에게 전할 성공 법칙 3개만 알려 달라”고 했더니 그는 5개를 줄줄이 읊었다. ‘남한테 뭐 물어볼 때 무턱대고 묻지 말고 너만의 대답을 갖고 물어볼 것. 가족끼리 스킨십을 자주 할 것! 그리고 여행 많이 가라. 특히 엄마 모시고 자주 가라.’주미 씨가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았을 땐 병세가 악화돼 의료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주미 씨, 미안. 오늘은 못 하겠어.” 그는 그날 숨을 거뒀다.죽음에 임박해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고 주미 씨는 말했다. “여행 많이 해둘걸” “내가 나를 좀 위할걸” “바쁘게 사는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40대 초반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쓴 편지는 “한 편의 시 같았다”고 주미 씨는 말했다. 그는 국어교사였다. ‘아빠는 우리 아들이 변해가는 계절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여유와 낭만이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빠가 조금만 힘내서 집 지붕에서 뚜두둑 뚜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도 같이 듣고 싶네. 사랑한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의 아들, 사랑한다.(7일 후 임종)’● 얼굴 보고는 속 얘기 못 터놓는 가족들한 달째 의식불명인 60대 남편에게 매일같이 말을 거는 부인이 있었다. 환자가 의식이 없을 땐 보호자와 편지를 쓰기도 한다. 그 역시 남편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날 위해서라도 기운 내라고 했더니 당신이 그랬잖아. 악착같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이 섭섭하더라. 왜 내 생각은 안 하는 거야.(눈물) 그런데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지만 여전히 섭섭해. 그래도 여보,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날 기다려줄 것 같아서 좋아. 날 꼭 기다려.’부인은 이 편지를 남편의 귓가에 읽어줬다. 그 후 4일 뒤 남편은 사망했다. 마치 부인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늘로 떠난 듯했다.대장암 말기인 한 70대 남성은 주미 씨에게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었다. “부인에게 편지 좀 쓸까요” 한 마디에 담담하게 독백을 했다.‘여기 온지 보름 만에 내가 하반신을 못 써. 하늘이 나를 부르나 본데 내일이라도 부르면 가지 뭐(눈물). 당신은 나 없이 많은 시간을… 힘들어서 어떻게 해. 겨울이면 춥고, 여름이면 더울 텐데.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주는 손주들이 있으니 걔내들 공책이라도 하나 사주는 재미로 사시구려. 우리 지금은 떨어질지언정… 만납시다, 다시.’부부라고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다. 임종 때까지 갈등을 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말기 암 80대 남편에게 받은 상처가 컸던 부인은 애증의 마음을 편지로 옮겼다.‘내가 병날 정도로 나한테 모질게 한 거, 한 번만이라도 왜 그랬는지, 안 미안한지 궁금하지만 이렇게 누워 있는데 무슨 말을 할까 싶기도 해. 다음 생에는 남 괴롭히지 말고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어.’꼼짝 못 하고 누워 주미 씨가 읽어주는 편지를 듣던 남편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부인에게 전해 달라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너무 미안했다. 날 용서해라.”주미 씨는 말했다. “가족들끼리 얼굴 보고 못 하는 얘기가 많잖아요. 편지가 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편지를 쓰다 보면 ‘끝까지 나를 부탁한다’고 속마음을 표현하거나 ‘수목장으로 해 달라’는 현실적인 내용까지 전하게 돼요.”● 얼마 안 남은 삶을 즐겁게 산다는 건하루는 주미 씨가 유방암 말기인 50대 여성을 만나러 병실에 들어설 때였다. 주치의와 전공의 3, 4명이 환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괜찮아요. 선생님들 정말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몇몇 전공의들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주미 씨는 환자의 대학생 외동딸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의연해서인지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 주미 씨는 딸과 먼저 편지를 썼다.‘엄마 늙을 때까지 내가 옆에 있을 줄 알고 여유 부린 건데, 이제 해줄 수 있는 나이인데…. 엄마가 울면 같이 울 텐데 엄마가 안 우니까 나도 못 울고 있어.(미소) 뭐든 엄마랑 같이 했었는데 어떻게 될까 그런 게 막막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 엄마의 영원한 베이비, ○○가.’(5일 후 임종)주미 씨가 만난 이들 중에는 20, 30대가 적지 않다. 젊어도 성찰이 깊고 자기표현을 잘하는 환자가 많다고 한다. 혈액암 말기 20대 여성이 쌍둥이 동생에게 쓴 편지다.‘쌍둥이 내 동생 보고 싶어요. 나랑 똑같이 생겼어요. 내가 더 예뻐요.(미소) 아프기 전에는 많이 싸웠죠. 아프고 나서는 얼마나 잘해주던지.(울음) ○○아, 내 통장 비밀번호는 통장서랍 안에 다 있다. 그리고 이 말 하면 너 울 거 같은데, 나는 네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미소) ○○이∼ 귀여워!’자궁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보다 한 달 넘게 살아 있는 60대 여성도 있었다. 가족들은 감사해했지만 정작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극도의 통증 때문에 휠체어에 아슬아슬 걸터앉은 채로 주미 씨를 맞았다. “지루하고 우울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오늘밤은 어떻게 지내려나, 내일은 또 어떠려나 생각뿐.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즐겁게 산다는 건 뭘까. 그런 것에 대한 모델링이 없어서 더 힘들다.’주미 씨는 며칠 뒤 그를 다시 찾아 이 편지를 읽어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뭔가에 북받친 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편지 내용이 불편해서 우는 건가 싶어 당황했는데 환자분이 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나보다 나를 더 잘 표현해줘 고맙다. 나도 모르는 대답이 내 안에 있었다’라고요. 저는 그분 말을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경청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 같아요.”● 장지 가는 버스에서 발견한 엄마 편지말기 환자들은 생명이 언제 멎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특히 힘들어한다. 편지 쓰기는 이들이 불안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도록 돕는 작업이다. 주미 씨는 “환자들은 종일 누워 지내며 대소변도 못 가리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기 쉬운데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중요한 사람이란 걸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자존감이 회복돼야 남은 삶을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호스피스 치료는 통증 관리 못지않게 정서적 지지가 중요해요. 요즘 겨울이면 버스 정류장에 ‘엉따(엉덩이가 따뜻해지는)’ 의자가 있는데 버스가 올 때까지 편하게 기다리면 좋잖아요. 호스피스 역시 환자가 생의 종점까지 중심을 잡도록 해주는 거죠. 다만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 혜택을 받는 분이 20%대이고, 인력도 부족해서 서울대병원마저 호스피스가 필요한 분들 중 실제 의뢰되는 비율이 3분의 1 정도인 걸로 내부에선 보고 있어요. 특히 시스템은 없고 개인의 노력에만 의존하는 게 문제입니다.”폐암으로 세상을 뜬 70대 여성의 딸이 주미 씨에게 반가운 연락을 해온 적이 있다. 그 환자는 주미 씨와 함께 쓴 편지를 딸에게 직접 건네려 했지만 미처 전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런데 딸이 장의버스를 타고 장지로 가던 길에 어머니 가방을 열었다가 고이 접어둔 분홍색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따님이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들고 가족들에게 그 편지를 읽어줬대요. 엄마를 보내드리는 데 편지가 뜻밖의 도움이 됐다고 해요.”주미 씨는 이 일의 보람을 설명하며 한 30대 환자의 편지를 인용했다. “‘병원엔 화장실 말고는 거울이 없다. 나 자신을 바라볼 기회가 없다. 제3자의 시선으로 나에 대해 얘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대목이 있어요. 환자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일인 것 같아요.”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