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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시골에는 좁은 숲길과 넓은 평야가 번갈아 이어지는 지형이 많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광활한 평야를 사이에 두고 양 끝의 숲에 몸을 숨긴 채 총격전을 벌인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군이 주둔해 있는 숲에 30, 40대 여성들이 찾아왔다. 서부 도시인 르비우 인근에 사는 이들은 남편들이 속한 부대를 수소문해 동부전선인 이곳까지 차를 몰고 왔다. “우리 남편들, 지금 어디에 있나요?” 부대장은 참담한 표정으로 수백 m 앞 평야를 가리켰다. “저기에 있습니다. 3일째.” 평야 너머의 숲에서 러시아군이 총을 겨누고 있어 시신 수습을 못 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성들은 부대장의 만류에도 적막한 평야로 걸어 나갔다. 언제든 맞은편 숲에서 총탄이 날아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성들은 평야에 널린 시신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했다. 그러곤 각자의 남편을 등에 지고 넘어졌다 일어서길 반복하며 아군 쪽 숲으로 되돌아왔다. 남편들은 서로에게 이웃이자 전우였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함께 군에 자원해 같은 부대로 배치됐다. 마을에 남겨진 부인들은 최근 갑자기 연락이 끊긴 남편들을 찾아보자며 맨몸으로 전장에 온 것이었다. 이들은 남편의 주검을 싣고 고향으로 돌아와 합동 장례를 치렀다. 요즘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이런 비극이 벌어진다. 70일째를 맞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며 완전히 굴복하기 전까진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갈수록 잔인하게 우크라이나인들을 살해하며 핵 공격 등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미국은 군사 원조 등에 42조 원(약 330억 달러)을 추가 투입하기로 했다. 전쟁이 아무리 길어져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가 이 정당한 항전에서 승리하길 바라고 있다. 동시에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죽음의 행렬이 멈추기를 바란다. 안타까운 것은 이 두 바람이 현재로선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푸틴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 이상 전쟁을 빨리 끝내기 어렵고, 그렇다고 끝까지 결사 항전할 경우 희생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정한 평화가 옳은 전쟁보다 낫다’는 독일 격언이 있다. 어떤 명분에도 피하는 게 상책일 만큼 전쟁은 너무도 처참하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며칠 전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을 발표하며 그와는 대척점에 있는 말을 했다. “싸움의 비용이 싸지는 않지만, 공격에 굴복하는 대가는 더 비쌀 것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부정한 평화 대신 굴복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지난달 전장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은 “소련 밑에서 살아봐서 그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러시아에 점령당한 땅에서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등 일부 점령지에서 벌써부터 레닌 동상을 다시 세우고 문화재를 약탈하는 등 민족성을 말살하고 있다. 화폐도 루블화로 바꾸고 휴교 상태인 학교를 열어 사상 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그 지역 청년들은 러시아 군복을 입고 동족이나 다른 약소국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게 될까 봐 치를 떤다. 20여 년 전 러시아의 대량 학살 피해자였던 체첸인들은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대가란 그런 것이다. 지난달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화상연설을 했을 때 참석한 의원은 불과 50명 남짓이었다. 예정된 오후 5시에 맞춰 화상에 등장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의원들이 서로 악수를 건네고 잡담하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연설을 시작했다. 그날의 휑한 국회 강당 사진은 “우크라이나의 주장에 다른 국가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는 러시아 언론의 선전에 요긴하게 쓰였다. 미국 영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의원들처럼 전원 참석해 기립박수를 쳤어야 했다고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사정을 고려하면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강대국들보다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항전 중인 국가의 원수에게 존중과 공감을 표했어야 했다.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어떻게든 저항하지 않을 수 없고, 저항하자니 너무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뼈저리게 실감했던 딜레마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굴복하지 않는 길’을 먼저 걸었던 우리가 품격 있는 외교를 선보일 기회였지만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박완서의 첫 소설 ‘나목’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미군 PX에서 함께 일한 화가 박수근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곧 전쟁통에 가족을 잃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는 초상화와 영화 간판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는 박수근에게 큰 위로를 느꼈다. ‘그는 간판쟁이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안에 별의별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청소부 중 중학교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고관의 미망인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겐 먼 과거인 전쟁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선 40일째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들려주는 생존 스토리는 전쟁의 여러 얼굴을 들춰낸다. “집에서 대피한 저는 엄마, 쌍둥이 여동생, 이모, 사촌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어요. 사람이 많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포성 속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 날 겨우 차 한 대를 잡았어요. 제가 타고 나니 엄마랑 동생이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제가 내리면서 엄마한테 타라고 하니까 안 타겠다고 버텨서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보다 못한 차주분이 자기 짐을 버리고 그 자리에 포개서 타라고 했어요. 추리고 추린 짐일 텐데….”(아나스타샤·22) “산부인과가 폭격을 당해 임신부 수십 명이 제가 있던 마리우폴 극장으로 왔어요. 붐벼서 다들 힘들었지만 임산부들에게 건물 우측 탈의실을 내줬어요. 거기가 가장 덜 추웠거든요. 하지만 그 배려가 너무 후회돼요. 러시아가 미사일로 건물 오른쪽을 때려서 임신부들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먼지 안개를 헤치고 탈출을 하려는데 아는 꼬마가 넋이 나가 있었어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죠. ‘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너는 살아야 한다. 아빠를 위해 살아야 해!’”(나디야·50대) “마리우폴에선 시신을 보면 담요로 덮어줘요. 누군지 알면 이름 적은 종이를 병에 넣어 시신 옆에 두고요. 저와 간신히 이 죽음의 도시를 빠져나온 남자친구는 못 데리고 온 외할머니를 걱정했어요. 남겨진 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저희는 마리우폴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경비병에게 사정했어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안나·21) “30년 간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은퇴하면서 유튜브로 자수를 배웠어요. 집에서 대피할 때 그동안 만든 자수 수백 점을 가방에 넣어 나왔죠. 급할 때 팔아서 비상금 벌려고요. 근데 너무 무거워서 가방을 버렸어요. 지금은 우리 군인들 입을 방탄조끼를 바느질해요.”(부텐코·65) “체첸인인 저는 전쟁이 뭔지 알아요. 23년 전 러시아의 포탄이 쏟아지던 날, 그로즈니(체첸의 수도)에 있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동네 벙커까지 어둡고 탁 트인 길을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동생은 그날 밤 죽어서 체첸의 공동묘지에 묻혔어요. 미국 내 반전 시위에서 우크라이나인을 만났는데 제가 러시아 국적이어서 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더군요. 체첸인 친구는 동생이 러시아 군복을 입고 이번 전쟁에 투입됐는데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했어요. 그 친구는 며칠 뒤 동생이 전사한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밀라나) “한 달 전 입대했어요. 누굴 해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만 총을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놈(러시아군)들이 여기 와 있는 게 정말 화가 나요. 그래도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이 최대한 없었으면 해요. 러시아 군인들도요.”(우크라이나 병사)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피란 열차를 기다리는데 독일군이 쳐들어왔던 1941년이 떠오르더군요. 머리 위로 죽음이 날아다니는 느낌…. 81년 전 그때와 똑같아요. 저는 역사가이고 홀로코스트 관련 책까지 썼는데 평생을 바친 일이 증발해버린 것 같아요. 이번엔 러시아를 피해 독일로 피란을 왔어요. 아이러니하죠.”(보리스·86) “제가 몰던 노란색 스쿨버스를 사람들 대피시키는 데 씁니다.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강아지를 안고 울었어요. 반려동물까진 못 태우거든요. 도로에 간간히 보이는 차량 뒤창에는 ‘baby(아기)’ ‘people(민간인)’라고 쓰인 도화지가 큼직하게 붙어있어요.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문손잡이 4곳에 흰 헝겊을 묶어 놓은 차도 많고요. 이제 마을은 버려진 영화 세트장처럼 황량해요. 공포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죠. 다음 포탄은 어디로 떨어질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세르기·57) “하루 한 번 수프 한 그릇을 받아와 2, 4, 6세 딸을 먹여요. 큰딸은 이곳 지하철역으로 오기 전날 제가 해준 롤케이크가 꿈에 나온대요. 제 직업이 제빵사인데 아이들에게 먹을 걸 못 줘서 가슴이 찢어져요.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려고 동화책을 읽어줘도 아이들 눈빛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아요. 어떤 분이 꿀 한 병을 줘서 겨우 살아있어요. 한 끼에 꿀 한 스푼…. 러시아 군인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려 해서 처음엔 거절하다가 저도 모르게 ‘사탕 줘, 설탕’이라고 말했어요.”(율리야·33)요즘 우크라이나 지하철역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어린이들이 서로를 뒤쫓는 놀이터가 됐고, 경사진 난간에 빨래가 널려 있다. 열차 지연 방송이 나왔을 역내 스피커에선 공습 사이렌이 흘러나온다. 선로 주변 대형 볼록거울 앞에서 10대 소녀들은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빗는다. 열차는 문이 활짝 열린 채 숙소로 쓰인다. 차창 앞 생수병에 꽂힌 분홍 튤립 다발이 지상의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박완서의 첫 소설 ‘나목’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미군 PX에서 함께 일한 화가 박수근을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곧 전쟁통에 가족을 잃고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박완서는 초상화와 영화 간판을 그려 가족을 부양하는 박수근에게 큰 위로를 느꼈다. ‘그는 간판쟁이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 없는 간판쟁이로 일관했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안에 별의별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청소부 중 중학교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고관의 미망인도 있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에겐 먼 과거인 전쟁이 지금 우크라이나에선 40일째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들려주는 생존 스토리는 전쟁의 여러 얼굴을 들춰낸다. “집에서 대피한 저는 엄마, 쌍둥이 여동생, 이모, 사촌과 함께 히치하이킹을 했어요. 사람이 많아 아무도 태워주지 않았어요. 포성 속에 밤을 꼬박 새고 다음 날 겨우 차 한 대를 잡았어요. 제가 타고 나니 엄마랑 동생이 앉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제가 내리면서 엄마한테 타라고 하니까 안 타겠다고 버텨서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보다 못한 차주분이 자기 짐을 버리고 그 자리에 포개서 타라고 했어요. 추리고 추린 짐일 텐데….”(아나스타샤·22) “산부인과가 폭격을 당해 임신부 수십 명이 제가 있던 마리우폴 극장으로 왔어요. 붐벼서 다들 힘들었지만 임산부들에게 건물 우측 탈의실을 내줬어요. 거기가 가장 덜 추웠거든요. 하지만 그 배려가 너무 후회돼요. 러시아가 미사일로 건물 오른쪽을 때려서 임신부들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먼지 안개를 헤치고 탈출을 하려는데 아는 꼬마가 넋이 나가 있었어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죠. ‘네 아빠가 돌아가셨어. 너는 살아야 한다. 아빠를 위해 살아야 해!’”(나디야·50대) “마리우폴에선 시신을 보면 담요로 덮어줘요. 누군지 알면 이름 적은 종이를 병에 넣어 시신 옆에 두고요. 저와 간신히 이 죽음의 도시를 빠져나온 남자친구는 못 데리고 온 외할머니를 걱정했어요. 남겨진 이들이 러시아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저희는 마리우폴에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경비병에게 사정했어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안나·21) “30년 간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은퇴하면서 유튜브로 자수를 배웠어요. 집에서 대피할 때 그동안 만든 자수 수백 점을 가방에 넣어 나왔죠. 급할 때 팔아서 비상금 벌려고요. 근데 너무 무거워서 가방을 버렸어요. 지금은 우리 군인들 입을 방탄조끼를 바느질해요.”(부텐코·65) “체첸인인 저는 전쟁이 뭔지 알아요. 23년 전 러시아의 포탄이 쏟아지던 날, 그로즈니(체첸의 수도)에 있던 집에서 잠옷 바람으로 동네 벙커까지 어둡고 탁 트인 길을 내달리던 기억이 생생해요. 동생은 그날 밤 죽어서 체첸의 공동묘지에 묻혔어요. 미국 내 반전 시위에서 우크라이나인을 만났는데 제가 러시아 국적이어서 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더군요. 체첸인 친구는 동생이 러시아 군복을 입고 이번 전쟁에 투입됐는데도 우크라이나를 지지했어요. 그 친구는 며칠 뒤 동생이 전사한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밀라나)“한 달 전 입대했어요. 누굴 해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만 총을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놈(러시아군)들이 여기 와 있는 게 정말 화가 나요. 그래도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이 최대한 없었으면 해요. 러시아 군인들도요.”(우크라이나 병사)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피란 열차를 기다리는데 독일군이 쳐들어왔던 1941년이 떠오르더군요. 머리 위로 죽음이 날아다니는 느낌…. 81년 전 그때와 똑같아요. 저는 역사가이고 홀로코스트 관련 책까지 썼는데 평생을 바친 일이 증발해버린 것 같아요. 이번엔 러시아를 피해 독일로 피란을 왔어요. 아이러니하죠.”(보리스·86) “제가 몰던 노란색 스쿨버스를 사람들 대피시키는 데 씁니다.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질 못하고 강아지를 안고 울었어요. 반려동물까진 못 태우거든요. 도로에 간간히 보이는 차량 뒤창에는 ‘baby(아기)’ ‘people(민간인)’라고 쓰인 도화지가 큼직하게 붙어있어요.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뜻으로 문손잡이 4곳에 흰 헝겊을 묶어 놓은 차도 많고요. 이제 마을은 버려진 영화 세트장처럼 황량해요. 공포영화 속에서 사는 기분이죠. 다음 포탄은 어디로 떨어질까.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세르기·57) “하루 한 번 수프 한 그릇을 받아와 2, 4, 6세 딸을 먹여요. 큰딸은 이곳 지하철역으로 오기 전날 제가 해준 롤케이크가 꿈에 나온대요. 제 직업이 제빵사인데 아이들에게 먹을 걸 못 줘서 가슴이 찢어져요.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게 해주려고 동화책을 읽어줘도 아이들 눈빛이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아요. 어떤 분이 꿀 한 병을 줘서 겨우 살아있어요. 한 끼에 꿀 한 스푼…. 러시아 군인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려 해서 처음엔 거절하다가 저도 모르게 ‘사탕 줘, 설탕’이라고 말했어요.”(율리야·33) 요즘 우크라이나 지하철역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멈춰선 에스컬레이터는 어린이들이 서로를 뒤쫓는 놀이터가 됐고, 경사진 난간에 빨래가 널려 있다. 열차 지연 방송이 나왔을 역내 스피커에선 공습 사이렌이 흘러나온다. 선로 주변 대형 볼록거울 앞에서 10대 소녀들은 얼굴을 비추며 머리를 빗는다. 열차는 문이 활짝 열린 채 숙소로 쓰인다. 차창 앞 생수병에 꽂힌 분홍 튤립 다발이 지상의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블라디미르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던 1996년 그의 비서는 푸틴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직원들에게 일을 시킬 때 시킨 대로 처리됐으면 그걸로 그만이었어요. 어떤 방식으로 처리됐는지, 도중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따지지 않는 분이죠.” 원하는 결과만 나오면 과정은 묻지 않는 푸틴의 성격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2002년 10월 모스크바 극장 테러사건이 났을 때다. 푸틴이 체첸을 침공해 초토화시키자 체첸 테러범 41명이 뮤지컬 관람객 912명을 인질로 잡고 철군을 요구했다. 푸틴의 지시로 착수된 그날 진압 작전에는 마취가스가 동원됐다. 건물 환기구를 통해 가스가 살포됐다. 인질범과 인질들 모두 의식이 혼미한 상태가 되자 특수부대가 진입해 테러범을 전원 사살했다. 대성공인 듯 보였지만 문제는 인질들이었다. 125명이 깨어나지 못하고 숨졌다. 가스 살포 작전이 인질들에게 안전할지는 크게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밤 푸틴은 TV에 나와 성공적 작전이라며 지휘부를 치하했다. 사망한 시민들에 대해선 “모든 인질을 다 구할 수는 없었다”고만 했다. 푸틴이 22년간 집권하며 체첸, 그루지야(조지아), 크림반도 등 구소련 연방국들을 지속적으로 침공한 것도 그의 결과 지향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 전쟁이야말로 목적 달성을 위해 과정상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태도가 가장 극단화된 행위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지도자의 이런 기질적 결함은 정치적 심판을 면할 수 없다. 하지만 푸틴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제국에 대한 향수와 열패감에 젖은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도 러시아 내에 반전 시위가 열리긴 하지만 국민의 60%는 여전히 푸틴을 지지하고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결과를 달성하고 과정은 비밀에 부치는 KGB식 통치를 하면서도 푸틴은 도전자의 싹을 잘라내면서 승승장구해 왔다. 흙수저 출신에서 자수성가해 ‘국민의 대통령’이 됐다는 자기 확신, ‘대러시아 복원’이라는 시대착오적 소신, 서방의 존중을 받지 못했던 상처와 그로 인한 피해 의식이 결합되면서 푸틴은 90년 전 히틀러의 모습으로 21세기 시민들과 맞서고 있다.요즘 푸틴의 정신상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그는 앞선 성공에서 배운 것으로 다음의 성공을 만들려는 나름의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2000년 체첸을 항복시키면서 터득한 ‘끝장내기식 공격’ 노하우를 토대로 2008년 그루지야를 침공해 5일 만에 승리했다.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순식간에 영토를 점령하는 이때의 수법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합병 때 그대로 적용됐다. 당시 무력했던 우크라이나군과 물렁했던 서방의 제재는 지난달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는 데 자신감을 불어넣어줬을 것이다. 지금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고전하자 핵 공격 위협을 하고 있다. 이게 먹히면 다음 침공 땐 초기부터 핵 카드를 쓰려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푸틴은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그는 서방 제재에는 단단히 대비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복병을 만났다. 가족을 폴란드 국경에 내려주고 다시 돌아와 총을 잡는 아버지들, 빈병에 스티로폼 가루를 밀어 넣으며 화염병을 만드는 여성들, 망치라도 들고 싸우겠다는 노인들, 생포된 러시아 병사들에게 따뜻한 수프를 먹이며 그들의 가족과 영상통화를 연결해주는 사람들 말이다. 푸틴이 침공 직전 연설에서 “국가로서 정체성을 가진 적이 없다”며 얕잡아봤던 나라의 국민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똘똘 뭉쳐 있다.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느낀 폴란드 등 인접국에선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자기 집에 재우고, 다음 행선지까지 차로 태워주겠다며 마중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전 세계에서 의용군 수만 명이 우크라이나로 모여들고 있다. 물론 푸틴은 대량살상무기를 쏟아부어 기어코 군사적 승리를 달성하려 할 테지만 그렇게 이겨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4000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 가슴에 뿌려진 원한은 끝없는 저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서방에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경제·군사적으로 일치단결하는 명분을 줬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장악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인 전면 침공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질 국제질서 파괴, 주권 침해, 민간인 살상은 늘 그래왔듯 개의치 않았다. 그 결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과정’의 반격에 직면해 있다. 푸틴이 더 큰 만행으로 이를 돌파하려 한다면 기름을 끼얹어 불을 끄려는 꼴이 될 것이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3일(현지 시간) 미군의 이슬람국가(IS) 수괴 제거 작전이 끝난 자리에는 어린아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너진 벽돌 더미 사이로 불에 탄 봉제 토끼 인형과 나무로 된 아기침대, 분홍색 반짝이 샌들이 있었다. 폭탄 파편에 으스러진 벽에는 파란 플라스틱으로 된 유아용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IS의 수괴인 아부 이브라힘 알하시미 알쿠라이시는 시리아 북서부의 한 마을에 숨어 지냈다. 은신처인 3층짜리 벽돌집에는 어린이 10여 명도 함께 살았다. 알쿠라이시가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인간 방패’로 동원한 자신과 부하의 자녀들이었다. 1층에는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평범한 시리아인 일가족이 살았다. 미군은 한 달 전에 이미 알쿠라이시의 위치를 확인하고도 어린이와 여성의 희생을 우려해 헬기 공습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아군의 위험 부담이 큰 특수부대 투입을 결정했다. 3일 새벽, 대원들이 은신처를 에워싸자 아랍어 통역관의 확성기 방송이 울려 퍼졌다. “항복하고 나오면 모두 안전할 것이다. 나오지 않는 자는 죽는다.” 3층에 있던 알쿠라이시는 가족들에게 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이들을 옆에 둔 채로 자폭을 택했다. 굉음과 함께 창밖으로 시신들이 튕겨져 나갔다. 어린이 6명을 포함해 최소 13명이 즉사했다. 생후 15일 된 아기 등 어린이 4명은 구조됐다. 어린이를 ‘인간 방패’로 활용하는 것은 IS의 전술 중 하나다. 이들에게 아이들은 ‘전쟁에 쓰이는 장작(firewood)’이라는 말도 있다. 2017년 IS 근거지였던 이라크 북부 도시 모술에서는 허리에 폭탄을 두른 7세 남자아이가 이라크 정부군에 발견됐다. IS 대원들이 이동할 땐 서방 연합군의 드론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린이와 여성을 동행시키기도 했다. 이런 비겁한 전술을 쓰는 건 IS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는 시민들의 무장 반격을 무력화하기 위해 민가에서 납치한 어린이와 여성들을 최전선에 앞세우고 총격전을 벌였다. 시리아 정부군도 2012년 반군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8∼13세 아이들을 집에서 끌어내 탱크나 정부군 수송 버스 앞에 묶었다. 탈레반은 2010년 미군과 교전하다 후퇴하면서 어린이 5명의 어깨를 나란히 묶어 미군 앞에 세웠다. 아이들이 뒤를 볼 수도, 뿔뿔이 도망칠 수도 없게 잡아놓은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 있는 어린이의 모습은 인류를 각성하게 해왔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2년 미군의 네이팜탄 오폭으로 온몸에 화상을 입어 옷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알몸으로 내달리던 9세 베트남 소녀의 사진을 우리는 기억한다. 1984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카메라를 또렷이 응시하던 12세 아프간 소녀의 초록빛 눈동자 역시 이 전쟁에 무관심했던 세계인들에게 울림을 줬다. 2015년 터키 해변에서 얼굴을 파묻은 채 시신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는 유럽의 난민 정책에 변화를 불러왔다. 사람은 고난에 처한 어린이를 보면 아무리 먼 나라 일이라도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지켜주고 싶은 본능이 발동한다. 아이에게 초점을 맞춘 전쟁 사진들이 우리 기억 속에 오래 각인되는 것도 그런 흡인력 때문일 것이다. 미군의 알쿠라이시 제거 작전 직후 현장에서 촬영된 사진에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다. 반파된 건물 내부의 빨랫줄에 길이가 제각각인 아동복 바지들이 유품처럼 걸려 있을 뿐이다. IS 수괴 은신처의 널브러진 세간 사진을 보고 있자면 그의 자폭으로 날벼락 같은 최후를 맞았을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인간 방패는 사람의 본성을 역이용하는 일부 세력의 극악함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른이 살자고 아이를 사지로 내모는 이 야만은 전쟁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어떠한 전쟁에서든 어른들의 결정으로 아이들이 목숨을 빼앗긴다. 그런 수많은 무고한 죽음들로 전쟁은 구성될 수밖에 없다. 현재 일촉즉발의 상황인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난다면, 그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러시아의 통치에 짓눌린 소비에트연방 민초들의 생생한 증언을 책 ‘체르노빌의 목소리’에 담았다. 이 책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로 폐허가 된 마을에 살았던 한 12세 소녀가 나온다. “나는 집에만 있어요. 우리 반 애들이 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걸 알아냈을 때, 내 옆에 안 앉으려 했어요. 나한테 닿을까 봐 무서워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우리 아빠가 체르노빌에서 일해서 내가 아픈 거래요. 그래도 난 아빠가 아주 좋아요.” 재앙이 벌어지면 아이들은 무방비 상태로 비극을 맞는다. 러시아의 침공 우려로 전운이 감도는 지금의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7년째 내전 중인 우크라이나 동부 접경지 곳곳에는 저격수와 지뢰를 경고하는 표지판이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지뢰 피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곳의 16세 여학생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한) 2014년에 여동생이 태어났어요. 저도 무서웠지만 그 갓난아기가 너무 걱정됐어요. 이제 다시 포격과 총성이 들려와 그때가 자꾸 떠올라요. 우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동생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같은 마을에 사는 80대 노부부는 말한다. “우리는 문맹인데, 제2차 세계대전과 1947년 소련 대기근에서도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매일 밤 잠들기 전 기도하고, 살아서 행복하니까 아침에 다시 기도합니다.” 89번째 생일을 앞둔 이웃집 할머니는 “요즘 밤마다 지붕 위로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서 잠이 안 온다. 내 인생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땅이 넓고 비옥해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하지만 동시에 강대국들의 화약고라는 숙명을 안고 있다. 유럽 열강이 동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고, 러시아엔 흑해와 지중해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다. 폴란드에 이어 독일, 그러곤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체르노빌 참사 이전에도 1930년대 스탈린이 집단농업을 추진하며 우크라이나를 수탈해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홀로도모르(기아 학살)’가 자행됐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러시아에서 독립한 후에도 ‘전쟁 중이거나 전쟁을 준비하면서’ 30여 년을 보내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계속 손아귀에 쥔 채 서방과의 안보 완충지대로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천연가스 공급 등 경제·군사적 목줄을 쥐고 친러 인사를 대통령에 앉혀 장악력을 유지했다. 그럴수록 우크라이나에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해 러시아와의 악연을 끊어내려는 여론이 거세졌다. ‘친러’와 ‘친서방’ 대통령이 교차 집권하며 각각의 지지 기반이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는 분열됐다. 친러 정권이 서구화 열망을 억압할 땐 오렌지 혁명(2004년), 유로마이단 혁명(2014년) 같은 시민 저항이 뒤따랐다.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러 정권이 붕괴하자 러시아는 곧바로 우크라이나 남단의 크림반도를 빼앗은 뒤 러시아계가 많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분리독립을 지원하며 분열을 부추겼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경에는 10만 명이 넘는 러시아군이 집결해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 EU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불허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나토가 코앞까지 동진해 오는 것은 좌시할 수 없는 안보 위협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등 원거리 개입을 줄이고 있고, 대만을 두고 중국과의 각축전에 주력하고 있어 좋은 기회라고 본 것 같다.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하는 EU 국가들 역시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형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시 경제 제재 등 초강경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미국으로선 군사 개입까지 하기엔 부담이 크고, 가만 놔두자니 중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고심하고 있다. 나라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있는 우크라이나는 친러와 친서방 간의 분열이 극심해 국회의원들이 난투극을 자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은 2019년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현재 국가정보국장과 안보보좌관 등 안보 컨트롤타워를 그의 개그맨 동료들이 맡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거대한 체스판’에 갇힌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처지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미소 냉전의 최전방이었고, 이제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선 우리와 겹쳐지는 대목이 적지 않아서다. 그들의 오랜 시련이 이제는 끝나기를 바라지만 우크라이나의 1월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할 듯하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그날 아침 노인의 집에선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현관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었다. 경찰관은 강제로라도 문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홀로 사는 77세 남성이 보름 넘게 연락이 안 된다는 신고가 들어왔을 때부터 예상된 상황이었다. 경찰관 2명과 소방대원 4명이 집으로 들어섰을 때 내부는 찜질방처럼 후끈했다. 보일러가 켜진 상태로 오랜 기간이 흐른 듯했다. 경찰관과 대원들은 방 3칸, 거실, 베란다로 각기 흩어졌다.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크게 불러도 답이 없었다. 그때 안방을 수색하던 대원이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안방에 딸린 화장실의 문이 잠겨 있었다. 문손잡이는 뜯겨져 없었고, 잠금 장치만 걸려 있었다. 이번에도 강제 개방을 했다. 욕실 문을 살며시 열자 타일 바닥 위로 두 다리가 보였다. 대원들은 호흡을 가다듬고 내부로 들어섰다. 노인은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을 힘겹게 움직여 보였다. 문이 두 차례나 뜯기는 소리가 나는데도 기력이 없어 소리를 내지 못한 듯했다. 대원들은 서둘러 노인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노인은 한 평 남짓한 욕실에서 불이 계속 켜진 채로 보름가량 갇혀 있었다. 밤낮 구분이 안 돼 시간의 흐름도 느끼기 어려웠다.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문이 잠겨버린 것이었다. 경찰은 “노인이 욕실 문을 열고 나오려 안간힘을 쓰다가 문고리가 빠진 것 같다”고 했다. 수돗물을 마시며 갈증을 견디고, 보일러가 켜져 있어 저체온증을 피할 수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경찰은 보호자 연락을 위해 노인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전화기는 침대 옆 충전기에 꽂혀있었다. 보름 동안 부재중 전화가 50여 통 와 있었다. 노인은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데도 욕실에 갇혀 받지 못하고, 구조 요청도 못 해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에겐 보름간 50통이 넘는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살린 것은 바로 그 부재중 전화들이었다. 그의 사회적 관계망에 위험 상황이 포착된 것이다. 노인의 두 친구는 그와 연락이 닿지 않자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확인을 청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들은 “보름 전쯤 우리 집에서 같이 김장을 담그고 수육도 해먹고 헤어졌는데 그 뒤로 이 친구가 연락이 안 돼요. 꼭 좀 찾아주세요”라고 신고했다. 노인은 구조 당일인 7일 오후 아들의 보호를 받으며 퇴원했다. 노인의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무뚝뚝한 편이라 평소 살갑게 지낸 것은 아니지만 간간이 살피고 연락해 왔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접촉이 뜸해지고 몇 주 바쁘게 지내는 사이 아버지에게 아찔한 일이 벌어진 듯했다. 요즘은 홀몸노인의 집에 활동량감지기, 응급호출기 등을 설치해 고독사를 줄이는 ‘복지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통신사들은 ‘AI 안부전화’ 서비스를 출시하고 일부 지자체는 관내 어르신들에게 ‘돌봄 전화’를 돌린다. 첨단 기술과 찾아가는 행정도 필요하지만, 일단 나부터 부모님께 더 자주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두 경찰관은 빌라 2층 계단에서 마주쳤다. 신입 순경은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경력 20년 차인 경위는 올라가던 길이었다. 몇 초 전 3층에선 비명이 울렸다. 윗집 남자가 흉기로 엄마의 목을 찌르는 것을 보고 딸이 외친 소리였다. 그 광경을 본 순경이 아래로 내달리다 선임자와 계단에서 조우한 것이다. 경위 옆에 있던 피해 여성의 남편은 “빨리 올라가자”고 재촉했다. 경위에겐 권총이, 순경에겐 테이저건이 있었다. 하지만 두 경찰관은 1층으로 내려가 빌라 밖으로 나갔다. 남편은 혼자 3층에 올라갔다. 한 평 남짓한 집 앞 복도에 부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딸은 그 좁은 곳에서 흉기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남편은 칼을 든 남자를 맨손으로 제압하면서 여러 곳을 찔렸다. 15일 발생한 인천 흉기 난동 사건은 112 신고자가 흉기에 찔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출동 경찰관이 등을 돌린 사건이다. 경찰의 부실 대응이 그동안 적잖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능과 미숙함, 후진적 치안 시스템의 문제였다. 이번처럼 시민을 구하려는 의지 자체를 포기했던 전례는 찾기 어렵다. 경찰관이라면 흉악범을 간단히 제압하지는 못하더라도 시민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것이라는 최소한의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범죄자가 경찰을 두려워하는 건 나를 알아보는 순간 어떻게든 잡으려 들 것이라는 걱정 때문인데 그런 전제마저 흔들리게 됐다. 두 경찰관은 현장을 벗어난 이유에 대해 “구조 요청을 하려 했다”고 해명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놔둔 채 ‘나 홀로 탈출’을 한 선장과 선원들이 “해경에 구조 요청을 했다”고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건 후 경찰은 교육 훈련 강화, 매뉴얼 정비 등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필요한 조치이긴 하지만 사건 현장은 예측이 불가능해 언제든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걸 메우는 것은 결국 출동 경찰관의 직업의식과 희생정신이다. 평범한 시민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면 구조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2019년 경남 진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안인득 방화 살인 사건’ 때 관리사무소 수습 직원이 많은 주민을 살렸다. 당시 안인득은 아파트 4층 집에 불을 낸 뒤 연기를 피해 1층으로 내려오는 주민들을 노렸다. 이 직원은 안인득이 휘두른 흉기에 찔린 뒤에도 꼭대기층(10층)까지 집집마다 다니며 “아래로 가면 안 된다”고 알렸다. 관리실 수습 직원도 긴급 상황에선 이 같은 직업정신을 발휘한다. 하물며 경찰이 112 신고자가 칼에 찔리는 것을 보고도 외면한다면 정부가 경찰관을 제대로 선발해 훈련시키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경찰관 채용제도가 직업의식과 사명감을 검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찰 공무원 채용 때 영어, 한국사, 형법 등 필기시험 비중이 50%를 차지한다. 지식 습득 능력이 당락을 좌우한다. 미국, 캐나다 등 외국에도 필기시험이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 상황을 제시한 뒤 지도 이해, 몽타주 식별, 용의자와 증인 찾기 등 직무 적성을 주로 평가한다. 특히 지원자의 주변인, 고교 시절 교사, 대학교수 등을 면담해 지원자의 성향이 경찰 업무에 맞는지 수개월간 자질을 검증한다. 이번 사건으로 비난 여론이 커지자 일부 경찰관은 “우리도 직장인”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소중한 생명인 것은 맞다. 하지만 경찰이 정년과 연금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으로 그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경찰관은 모두가 뒷걸음질 칠 때 의연하게 위협에 맞서는 직업인이다. 이 당연한 전제를 다시 세워야 하는 과제가 경찰 앞에 놓여있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지난달 서울 금천구에서 ‘불 없는 화재 사건’이 있었다.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지하 공사장에서 이산화탄소 소화설비가 작동돼 작업자 4명이 질식사했다. 불을 잡으려고 설치한 소화설비가 사람을 잡은 사건이었다. 이 소화설비는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와 달리 고농축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불난 곳의 산소 농도를 확 낮춰 불의 숨통을 끊는 방식이다. 불이 살 수 없는 환경에선 사람도 순식간에 질식할 수 있다. 일반인에겐 낯선 소화설비지만 의외로 가까이 있다. 전시물에 물이 묻으면 안 되는 미술관, 박물관뿐 아니라 지하철역, 백화점, 병원 등에 설치돼있다. 경찰이 이번 사건의 경위를 수사하고 있는데 두 가지 사실이 이미 드러났다. 실수든 고의든 누군가 소화설비를 작동시키는 스위치를 눌렀고, 이산화탄소가 방출되기 전 경보가 울렸지만 상당수가 즉시 대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안전 설비는 여러 딜레마 속에서 타협을 거치며 만들어진다. 한 예로 아파트 옥상 문을 열어놓을지 말지도 간단치 않은 문제다. 잠가놓자니 화재 시 주민들이 대피할 수 없고, 열어놓자니 우범 지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게 화재가 감지될 때만 열리는 자동 개폐장치다. 이번 사건 현장에서 소화설비 작동 버튼은 누구나 누를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있었다. 버튼을 꽁꽁 숨겨놓거나 누를 때 번거롭게 해놓으면 잘못 누를 가능성은 줄지만 정작 긴급 상황에서 설비를 작동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 같다. 보완책으로 방출 버튼과 방출 지연 버튼을 나란히 설치했다. 혹여 잘못 눌렀다면 바로잡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빈틈이 많은 타협책이었다. 두 버튼은 색깔만 다를 뿐 크기가 같다. 훈련받은 전문가가 아니면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헷갈리기 쉽다. 이번 사건에서 버튼을 눌렀던 사람은 바로 옆 계단으로 대피하지 않고 오히려 내부로 들어갔다가 결국 숨졌다. 경찰은 그가 이산화탄소 방출을 멈추려다 버튼을 잘못 눌렀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 무색무취인 이산화탄소에 색이나 냄새를 넣어 사람이 직관적으로 위험을 알아챌 수 있게 하지 않은 점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소화설비만 탓하기는 어렵다. 설비가 작동하기 전 대피 경보가 울렸을 때 즉시 대피하지 않은 작업자가 많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눈앞에 불이나 연기가 보이지 않아 대피를 주저했을 수 있다. 또 비상벨이 잘못 울리는 상황을 자주 경험하면 경보가 들려도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겐 감각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 외부 자극을 전부 받아들이면 처리해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지므로 선택적으로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나면 자연스레 안전에 둔감해질 수 있다. 안전 설비가 고도화된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안전해지는 것은 아닌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안전벨트가 보편화되고 차로가 잘 닦여 있으면 운전자가 쉽게 속도를 높이듯, 사람마다 수용 가능한 위험의 총량이 있어서 안전한 환경에 있으면 그만큼 긴장을 늦추기 쉽다. 안전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맞서는 일이다. 가만히 두면 위험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므로 지속적인 교육으로 본능을 거스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처럼 고성능의 안전 설비가 많아질수록 우리가 어떤 설비의 영향권에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면 언제든 ‘안전의 역습’을 당할 수 있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음주운전으로 처음 적발된 초범들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나면 대개 이런 질문을 해온다고 교통사고조사계 경찰관들은 말한다. “혹시, 회사에 통보가 되나요?” 벌금이나 면허취소 처분보다 음주운전 사실이 회사에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선처를 부탁하며 반성문과 가족들 탄원서를 공손하게 내민다. 재범들은 다르다. 조사 내내 당당하다. 음주 위반자가 겪는 불이익이 감수할 만하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처음 걸리면 300만~500만 원, 그다음은 1000만 원 정도인 벌금은 내면 그만이다. 1, 2년 면허 없이 사는 것도 해보니 할 만하다. 큰 사고만 안 내면 3번까지는 걸려도 실형을 살지 않는다. 공무원이 아니면 회사에 통보되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조사실에서 경찰관에게 속내를 드러낼 정도로 여유롭다. “형사님, 술 마시고 운전하면 핸들링이 확실히 ‘스무쓰’해요.” 음주운전을 한 사람 중 44%는 또다시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는다. 재범까지 걸리는 기간도 갈수록 줄어든다. 처음 적발된 후 두 번째 적발까지는 536일, 3회까지는 419일, 4회까지는 129일이 걸린다. 단속에 걸려본 경험이 오히려 음주운전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덜어주는 셈이다. 음주운전은 특이한 범죄다. 운전자가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당장은 피해자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용케 안 걸리고 무사 귀가하면 완전 범죄로 끝난다. 설사 사람을 치더라도 과실범의 예우를 받는다.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운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인데 법은 “살인이나 상해의 고의는 없었던 것 아니냐”며 관용을 베푼다. 재범자의 음주운전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치명상을 입힌 뒤에야 멈춘다. 최근 50대 치킨 배달부, 두 아이를 둔 30대 엄마, 알바 후 귀가하던 20대 여대생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모두 재범자였다. 음주운전이 자행될 때마다 잠재적 피해가 차곡차곡 쌓이는데 참사가 현실화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지금의 제도다. 음주 측정 거부 등 혐의로 12일 구속된 장제원 의원의 아들 래퍼 장용준 씨(활동명 노엘)는 2019년에도 서울 도심에서 시속 119km로 달리다 오토바이를 치었다. 혈중알코올농도가 면허취소 수치를 크게 웃도는 0.129%였다. 그 와중에 ‘운전자 바꿔치기’를 하고 도주했는데 피해자에게 3500만 원을 주고 합의해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 정도 대가는 감당할 만했는지 그는 불과 1년여 만에 음주 측정 불응죄를 저질렀다. 장 씨 앞에 펼쳐진 ‘재범자의 길’을 보고 있노라면 이번에 구속된 것이 그에겐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 음주운전을 하다 끔찍한 인명사고를 내기 전에 범죄 습관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경찰서 조사실에서 음주운전자들이 보이는 태도에는 문제의 해법이 숨어 있다. 그들은 법정형만 거창한 관념적 처벌보다 피부로 와닿는 불이익에 예민하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음주운전 사실이 알려지고, 오랫동안 운전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한다. 상습범에 대해선 신상을 공개하는 호주나, 운전면허를 평생 박탈하는 노르웨이처럼 원인을 공략해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생활밀착형 불이익이 집요하게 이어지는 것을 음주운전자들은 두려워한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축구화 언제 와요?” 충북 진천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머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은 요즘 틈만 나면 직원들에게 이걸 묻는다. 직원들이 얼마 전 아이들 발 사이즈를 재고 간 이후 난생처음 축구화를 신어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아프간에선 축구 할 엄두를 못 냈던 여자아이들도 20명 넘게 축구를 시작했다. 하루 1시간의 야외활동 시간에 운동장은 뛰노는 아이들로 분주해진다. 지난달 입국한 아프간 특별기여자 가족 390명 중 약 60%는 어린이 등 미성년자다. 우리에게도 전쟁을 피해 먼 나라로 떠났던 아이들이 있었다. 1953년 봄, 남북한 어린이 1200여 명을 태운 열차가 폴란드 시골의 프와코비체역에 들어섰다. 6·25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10만 명이 넘는 남북한 고아들을 돌볼 수 없게 되자 동유럽 국가에 보육을 위탁했다. 아이들을 맞은 건 폴란드인 보육원 교사들이었다. 그들 눈에 비친 아이들은 전쟁의 충격과 부모를 잃은 상실감에 떨고 있었다. 아이들은 음식이 있는데도 틈틈이 숲에서 고사리와 이끼를 캐 왔고, 침대와 이불이 있는데도 폭탄이 터질까 봐 침대 밑에 들어가 잤다. 교사들은 침대 밑에서 악몽을 꾸는 아이들을 달래며 침대에 눕히고 밤새 돌봤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자신들을 마마(엄마), 파파(아빠)로 부르게 했다. 교사들은 이후 60여 년이 지나 80, 90대 노인이 되어서도 당시 아이들이 했던 한국말을 뚜렷이 기억했다. “빨리는 서두르는 거, 식사는 먹는 거. 아이들은 ‘식사, 빨리’ 이 말을 자주 했어요.” 한 백발의 여교사는 아이들이 고향을 생각하며 부르던 한국 동요를 그대로 기억해 불렀다. 교사들의 보살핌 속에 안정을 찾아가던 아이들은 폴란드에 온 지 6년 만인 1959년 모두 북송됐다. “엄마, 우리는 가요.” 이 말을 하며 아이들은 울었다. 아이들은 북한에 돌아간 뒤 보육원에 숱하게 편지를 보냈다. 원장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년)에는 아이가 그런 편지를 보내다가 북한 당국에 걸릴까 봐 답장을 끊어야 했던 보육원 원장이 나온다. 90대 중반의 그는 주름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아이 이름 세 글자를 말하며 “사무치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도 참혹한 역사를 겪었어요. 그것은 너무도 아픈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폴란드 교사들은 1939∼1945년 6년간 독일 나치군의 만행을 겪었다. 길가에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을 보며 자랐다. 부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보육원에서 자란 교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먼 나라 전쟁고아들의 상처를 끌어안으며 상처의 연대를 이뤄냈다. 13일 진천 인재개발원에서 아프간인들은 기자들과 만났다. “아프간에선 너무 위험하고 불안했어요.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온 저희에게 안전한 곳을 주고 사랑을 베풀어 줘 한국에 감사합니다.” 침략과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우리는 오랜 내전의 생존자들을 보듬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을까.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전자발찌 부착자인 강윤성의 집까지는 차로 13분 거리였다. 지난달 27일 서울동부보호관찰소 당직자들은 강윤성이 야밤에 무단 외출했다는 경보를 듣고 출동하던 길이었다. 0시 35분경 그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직원들은 그와 통화를 마치고는 차 핸들을 돌렸다. 56세인 강윤성은 27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17세 때부터 14차례 감옥을 오갔다. 나오면 몇 달 뒤 더 큰 죄로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범죄 인생’이었다. 올 5월 출소 전 15년의 수감생활은 강도강간으로 5년을 살고 나온 지 4개월 만에 벌인 짓의 대가였다. 그는 여성 혼자 운전하는 차량을 들이받은 뒤 여성이 차에서 나오는 순간 납치해 돈을 빼앗고 성추행했다. 30일간 40명이 당했다. 보호관찰관이 출동했던 그날 밤, 무단 외출은 강윤성이 범행 과정에서 유일하게 내비친 빈틈이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흉기와 공업용 절단기, 몇 시간 전 살해한 여성의 시신이 있었다. 이미 벌어진 참극과 앞으로 벌어질 시나리오가 집 안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집 앞까지 온 보호관찰관들은 “편의점에 다녀왔다”는 강윤성의 말에 차를 돌렸다. 그의 이상행동을 감지했던 발목의 족쇄는 그 순간 무력화됐다. 당시 보호관찰소 차에는 2인 1조의 당직자 2명이 타고 있었다. 서울 동부지역 전자발찌 부착자 110명이 이들의 감독 대상이었다. 현장에 출동하면 휴대용 기기로 나머지 109명의 동선을 볼 수 있지만 유사시 즉각적인 대응이 쉽지 않다. 그래서 부착자가 집에 돌아온 것으로 확인되면 바로 현장에 가는 대신 추후에 이탈 사유를 조사하는 게 관행이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전자감독 부서 보호관찰관의 19%가 전자발찌 부착자로부터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욕설이나 협박, 모욕을 당한 경우는 76%다. 이들의 가장 큰 고충은 ‘반항적인 부착자들과의 관계 형성’이다. 언제 사건이 날지 몰라 불안하고, 제재 수단이 부족해 부착자에게 끌려 다닌다고 한다. 보호관찰소 관계자들은 “만약 그때 당직자들이 집에 들어가려 했다면 치명적인 공격을 당했을 것”이라는 자조 섞인 반응도 보인다. 강윤성이 살해한 여성 시신을 집에 두고 버젓이 무단 외출을 감행한 것은 그렇게 해도 꼬리가 안 잡힐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일 수 있다. 집에 시신이 있을 가능성을 상정하지 못한 것은 보호관찰관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시스템적 무능’의 결과다. 최악을 상상하는 능력은 상상한 것을 검증할 수 있게 운신의 폭이 보장될 때 생겨난다. 더 많은 예산을 들여 감시자를 늘리고, 이들에게 더 강한 권한을 부여해 다른 기본권의 희생을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다. 강윤성의 집에 5차례나 갔지만 영장이 없어 번번이 되돌아온 경찰 역시 문을 뜯고라도 들어가게 하려면 일부 인권침해 소지를 용인하는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전자발찌는 범죄자의 사회 복귀와 시민의 안전을 절충하는 방안으로 도입됐다. 범죄자라도 죗값을 치른 후에는 삶을 이어가야 하니 말이다. 강윤성 사건은 그들을 품기 위해 치러야 할 ‘공존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피해자는 17세의 지적장애 여성이었다. 그는 아랫집에 사는 50대 남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피해 진술도 구체적이었다. 아랫집 남성 김모 씨는 혐의를 부인했다. “피해자를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경찰과 검찰, 법원은 피해자의 말을 믿었다. 1심 법원은 2017년 김 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지적장애 2급인 미성년자를 집과 모텔에서 3차례 성폭행해 죄질이 나쁜데도 뻔뻔하게 범행을 부인한다며 무겁게 처벌했다. 김 씨에 대한 검찰 공소장과 법원 판결문에는 ‘피해자의 지적 능력에 비춰’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김 씨가 “피해자 진술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항변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지적 능력이 부족한 피해자가 모텔 상호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럴듯하게 꾸며냈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피해자는 어려서부터 전남 곡성에서 고모, 고모부와 한집에 살았다.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는 정신장애인 시설에 있어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고모 부부는 조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사료 배달 일을 시켰다. 피해자는 학대와 폭행 속에 자랐다. 고모를 무서워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잠겨 있는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잠긴 문을 가해자가 어떻게 열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고, 경찰은 더 묻지 않았다. 경찰은 피해자가 범행 장소로 지목한 모텔을 답사한다면서 간판 사진만 찍고 왔다. 진술 내용이 맞는지 건물 내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모텔에는 사건 당시 폐쇄회로(CC)TV 영상이 남아있었다. 경찰은 이것도 살펴보지 않았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을 차에 태워 모텔에 갈 때 앞 유리에 내비게이션이 달려있었다고 했는데, 김 씨의 차 내비게이션은 앞 유리가 아닌 운전대 옆에 매립돼 있었다. 여러 의문에도 김 씨에 대한 유죄 판결은 2심 재판에서도 뒤집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고 기일을 며칠 앞두고 피해자가 법정에 나왔다. 당시 피해자는 고모 집에서 나와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다. 1년 넘게 홀로 사건을 파헤쳐 온 김 씨의 딸이 가까스로 피해자를 수소문해 사실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피해자가 증언대에서 한 말은 재판부를 혼란에 빠뜨렸다. “저 아저씨가 아니에요. 고모부가 그랬어요.” 고모는 남편이 진범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도 조카에게 “아랫집 아저씨가 한 짓”이라고 진술할 것을 지시했다. 피해자는 “고모에게 맞으면 너무 아파서” 그 말에 따랐다고 했다. 피해자가 경찰 조사를 받을 땐 늘 고모가 보호자로 동석했다. 지적 능력에 비춰 진술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수사기관과 법원의 판단과 달리 피해자는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앞 유리에 내비게이션이 달린 차량은 다름아닌 고모부의 차였다. 경찰이 열어보지 않았던 모텔 CCTV에는 고모부가 피해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피해자의 진술을 조금만 성의껏 확인했다면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김 씨가 1년 가까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피해자는 진범과 한집에 살아야 했다. 이후에도 성폭력이 지속되자 결국 도망쳤다. 검·경과 법원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꼈을 법하다. 범인을 단죄해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죄 추정의 유혹에 빠지면 냉철한 검증이 필요할 때 예단과 추정으로 빈틈을 메우게 된다. 그 결과 실체가 밝혀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벼랑 끝으로 더 내몰린다. 김 씨에겐 “반성하지 않는다”며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했던 법원은 진범인 고모부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죄를 뉘우치고 있고,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게 감경 사유였다. 다만 무고죄가 인정돼 고모부는 징역 3년 6개월, 고모는 징역 7년에 처해졌다. 피해자가 보복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계속 징역을 살았을 김 씨는 2019년 1월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옥살이를 했던 상처가 아물기는 어렵다. 성폭행범이라는, 이미 찍혀버린 낙인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올 6월 법원은 김 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며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고의로 오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사과를 받고 싶다는 김 씨의 요구에 경찰은 “검사가 기소했다”고 하고, 검찰은 “법원이 판단했다”고 하고, 법원은 “유감”이라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 낸 책임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됐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쓰레기 청소부의 작업복은 형광색이다. 깜깜한 새벽에 거리에서 일하려니 ‘보호색’ 유니폼을 입는다. 낮에 집 앞에 쓰레기가 내놓여 있으면 미관을 해치고, 사람들 틈으로 청소차가 지나면 악취와 소음 민원이 많아진다고 한다. 청소부들은 청소차 뒤편 작은 발판 위에 발을 딛고 도로를 누빈다. 음주 차량에 치여 죽거나 다치는 일이 생기지만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빠르게 쓰레기를 치우려는 고육지책이다. 13일 부산에서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다 저장고에 추락해 숨진 50대 청소노동자 역시 미끄러운 발판 위에서 작업을 했다. 그는 수거차가 음식물쓰레기를 저장고 안으로 잘 비워낼 수 있게 삽으로 잔여물을 긁어내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 형광색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가 깨끗이 긁어내야 다시 수거하러 나가는 트럭이 길거리에 오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사고 당시 그가 서 있던 쓰레기처리장 바닥은 겨울 빙판길처럼 미끄러웠다. 하루 수십 대의 수거차가 오가며 바닥은 음식물 기름기와 습기로 겹겹이 코팅됐다. 그가 갑자기 중심을 잃고 거대한 늪 속으로 추락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를 보면서 평소 음식물쓰레기를 버릴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집 밖의 음식물쓰레기 수거통 문을 열 때면 나는 악취와 불쾌한 비주얼을 피해 마스크 쓴 얼굴을 한껏 뒤로 돌린다. 음식물들을 서둘러 수거통에 털어 넣고 계속 고개를 돌린 채로 문을 닫는다. 그러곤 쓰레기가 담겼던 비닐이 피부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아 비닐 쓰레기통에 후다닥 던진다. 눈을 피하고 코를 틀어막았던 그런 쓰레기가 하루 수십 t씩 모이는 곳이 그의 일터였다. 사고 당시 3m 깊이의 저장고에 음식물쓰레기는 1m만 차 있었다. 살아나올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요즘 같은 폭염에는 음식물쓰레기에서 수분이 많이 나와 늪이 되어 버린다. 고체라면 딛고서, 액체라면 헤엄쳐서라도 나왔을 텐데 늪은 허우적거릴수록 깊이 빠져든다. 그는 음식물찌꺼기에 기도가 막혀 질식사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위험을 직원들도 알고, 업체 측도 알았지만 저장고 주변에는 사다리도, 구명튜브도, 하다못해 밧줄도 없었다. 2인 1조로 함께 근무했던 직원은 크레인을 동원해 동료를 구하려다 그 역시 저장고 안으로 추락해 중상을 입었다. 두 달 전인 5월 24일 새벽 3시 같은 지역의 다른 음식물쓰레기 처리장에서도 30대 직원이 비슷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최소한의 생존 장치는 갖춰지지 않았다.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3D’ 업종 종사자들 없이는 단 하루도 도시를 지탱할 수 없다. 그들만큼 필수불가결한 직업인도 드물다. 하지만 ‘3D’는 ‘3비(非)’ 취급을 받는다. 노고는 기억되지 않고, 위험은 개선되지 않으며, 사고 책임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 청소부의 형광색 작업복은 소방관, 경찰관, 군인 같은 제복 공무원(Man In Uniform)의 제복과 비교해도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얼룩진 작업복을 입고 새벽 근무를 나서는 그들에게 우리는 모두 빚지고 있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수사가 8년째 이어지고 있다. 수사는 생물이라는데 이 사건만큼 역동적인 사례도 흔치 않다. 공격과 수비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등장인물의 스펙트럼이 다채로워졌다. 본 사건의 ‘주연’인 김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중천 씨는 뒤로 빠지고 어느새 ‘조연’들로 무대가 채워졌다.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성접대 의혹은 사실로 밝혀졌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게 됐다. 지금의 김학의 사건은 김 전 차관이 공권력 남용의 피해자인 사건이다. “고위 공직자와 건설업자의 유착이라는 본질을 봐야 한다.” 김 전 차관을 불법 출국금지하는 데 관여했거나, 출금 과정에 위법이 있었는지 밝히려던 검찰 수사를 방해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하고 싶을 것이다. 수사를 앞둔 김 전 차관이 2019년 3월 그날 밤 태국행 비행기에 오르도록 놔뒀어야 하느냐는 항변도 있을 수 있다. 진상 규명을 위해 당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것은 맞다. 성접대 사건에 대한 2013년 경찰의 1차 수사, 이후 2차례의 검찰 수사는 부실했다. 수사의 기본인 김 전 차관에 대한 압수수색과 계좌추적이 수사 시작 6년 만인 2019년에야 이뤄졌다. 그해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권고로 출범한 검찰 수사단은 출범한 지 불과 4일 만에 그런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그 정도로 앞서 진행된 수사에서 해놓은 게 없었다. 김 전 차관 성접대 사건 수사는 ‘구체제’와의 전쟁이기도 했다. 검사의 스폰서 관행은 공직자가 지위를 악용해 사적 이익을 누린 대표적 구악이었다. 혐의를 최초 인지한 경찰이 고검장 출신의 법무부 차관을 수사하는 것 역시 관행에 대한 도전이었다. 경찰이 검사를 상대로 벌이는 수사는 검찰에서 번번이 막히던 때였다. 문재인 정부가 이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은 충분히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구태를 청산하겠다면서 같은 구태를 반복하는 역설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과 법무부, 대검 간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요건에 맞지 않는 긴급 출국금지를 감행했다. 그들 중 일부는 출금 경위를 밝히려던 수사팀의 수사까지 무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일련의 사태를 수사한 수원지검 수사팀은 대검의 반대에 부닥쳐 이광철 민정비서관을 기소하지 못할 뻔했다가 팀 해체 하루 전 기습작전 하듯 가까스로 기소했다. 전반기 6년이 부실·축소 수사였다면 김 전 차관 출금 이후 후반기는 절차를 건너뛴 폭주 기관차식 수사였다. 지향점이 달랐을 뿐, 힘을 가진 쪽이 덜 가진 쪽을 찍어 누르는 작동 원리는 다르지 않았다. 불법 출금 수사 자체가 사건의 본질을 흐린 것이 아니라 위법적으로 출금 조치가 내려지면서 본질이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출금 과정의 위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채 김 전 차관에게만 책임을 물으려 한다면 김학의 사건은 정치권력이 ‘선택적 정의’를 추구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동시에 김 전 차관을 국가 권력의 피해자로 격상시켜 면죄부를 주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사건의 본질이 가장 심각하게 흐려지는 결말이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성추행을 당한 뒤 사건 무마 압력에 시달리다 지난달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모 중사는 가해자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았다.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가해자의 이 말은 이 중사를 향한 그 어떤 협박보다 비열한 것이었다. 진실은 묻어버리고,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멍에까지 씌우려는 엄포였으니 말이다. 다른 부대에선 여군 숙소에 침입해 불법 촬영한 부사관 사건을 맡은 군사경찰이 피해를 호소하는 여군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 얘 죽이려고 그러는구나.” 가해자의 목숨을 운운하며 피해자의 입을 막는 일들이 이렇듯 흔하게 벌어진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사망하면 수사기관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한다. 아무리 끔찍한 사건이라도 이 다섯 글자가 전부인 ‘한 줄 사건’이 되고 만다. 나름의 이유는 있다. 가해자가 없으면 실체 규명에 한계가 있고 방어권 행사도 어렵다. 수사해 봐야 실익이 없는 사건에 한정된 수사력을 마냥 투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는 형사사건 처리를 ‘국가 vs 가해자’의 구도로만 본 것이다. 형사사법제도는 가해자에 대한 단죄뿐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시키는 데 궁극적인 존재 이유가 있다. 성폭력 사건은 대개 명확한 물증이 없다. 그래서 가해자가 사망해 실체 규명이 중단되면 피해자는 곧바로 ‘가해자’로 몰린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로펌 대표변호사 성폭행 사건 등 많은 피해자들이 이런 2차 피해를 겪고 있다. “어떤 자살은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라고 소설가 정세랑은 책에 쓰기도 했다. 정치적 파장이 컸던 박 전 시장 사건은 관련 사건 판결과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로 간접적으로나마 피해가 인정됐다. 하지만 개인 간의 사건에서 ‘공소권 없음’ 처분이 나면 피해를 인정받을 길이 없다. 로펌 대표 성폭력 사건 피해자는 가해자의 극단적 선택으로 신원이 드러날 위기에 놓였다. 같은 로펌에 근무했던 여성 변호사들 명단이 각종 단톡방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피해자는 지난 6개월간의 수사로 사건이 거의 마무리된 만큼 수사 결과를 통보해 달라고 경찰에 요청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 연방지방법원은 2019년 성범죄로 기소된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이 재판 도중 구치소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자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검찰의 공소기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피해자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하도록 했다. 피해자가 법정에서 피해 사실을 말할 권리를 보장하는 ‘범죄 피해자 권리법(Crime Victim’s Rights Act)‘을 근거로 그들의 피해를 공식화한 것이다. “정의가 있다면 저를 명예로이 해주십시오.” 2013년 상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육군 오모 대위는 이런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국가가 어떤 경우에도 성범죄를 끝까지 밝힐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피해자는 삶을 부여잡을 용기를 낼 수 있고, 가해자 역시 남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극단적 선택을 피하게 된다. ’공소권 없음‘ 처리 관행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수사기관을 찾은 피해자를 좌절시키고, 가해자에겐 자살하면 덮어준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면 대안을 찾아야 할 때가 됐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아버지는 서울 강남경찰서장 또는 세브란스병원 교수, 외삼촌은 전 서울 서초경찰서장, 큰아버지는 법무부 차관…. 손정민 씨(22)가 반포한강공원에서 친구와 술을 마신 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에 관심이 쏠리면서 동석했던 친구의 가족에 대한 갖가지 추측이 나왔다.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억측들이 이어지고 있다. 스물두 살의 장성한 아들로 키워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힘들게 의대에 간 아들이 젊음을 누리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게 얼마나 황망한지 공감하는 40, 50대 엄마들의 반응이 특히 뜨거운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철저한 진상 규명을 바라는 요구 역시 정당하다. 한강공원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건장한 청년이 하룻밤 새 유명을 달리한 사건이라면 누구나 같은 비극을 당할 수 있다. 수사와 재판은 시민의 평온한 일상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공적 서비스다. 시민들은 형사사법제도의 ‘고객’이자 ‘주주’로서 발언권이 있다. 17일 5주년을 맞은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젠더 범죄를 근절하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계기였다. 이후 여성 상대 범죄를 대하는 수사기관과 법원의 태도가 보다 단호해졌다. 하지만 합리적 근거 없이 수사 결과를 예단하고, 수사 방향에 영향을 미치려는 여론몰이는 실체 규명에 치명적인 장애 요인이다. 수사 경험이 많은 경찰과 검사들은 “수사는 사람의 인생을 다루는 일이다. 신중함과 절제력을 잃는 순간 실패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1988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 진범인 이춘재는 돌려보내고 윤성여 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나, 1972년 ‘파출소장 딸 피살사건’ 수사팀이 영화 ‘7번방의 선물’ 실제 인물인 정원섭 씨를 범인으로 내몬 것도 섣부른 수사 프레임과 확증 편향이 겹친 결과다. 실패한 수사는 무고한 시민을 20년, 15년씩 감옥에 가두고 살인마인 진범이 거리를 활보하게 해준다. 손 씨 사건을 수사하는 서초경찰서 앞에서 며칠 전 집회가 열렸다. “○○○ 자수하라” “○○○를 체포하라”는 친구의 실명이 담긴 구호가 울려 퍼졌다. 참가자들은 친구와 그의 가족을 ‘신발군’ ‘신발군네’라고 불렀다. “친구가 아무리 힘들어도 죽은 것만큼은 아니다” “우리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친구 측이) 아니라고 할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14일 가해 양모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된 ‘정인이 사건’ 역시 여론의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킨 사례다. 담당 재판부에는 “정인이 또래 두 딸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20개월 된 손녀의 할머니입니다” “두 돌 아들을 둔 아빠입니다”로 시작하는 진정서 수만 통이 접수됐다.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하는 위탁가정이 되겠다는 신청은 사건 이후 두 달간 630건 넘게 들어왔다. 지난해 1년간 신청 건수(467건)보다 훨씬 많다. 개인에게 큰 아픔을 안긴 사건이라도 실체가 규명된 뒤에는 사회적 선순환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손 씨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일부의 억측과 공격은 이 사건이 우리에게 남기게 될 소중한 메시지를 왜곡할 수 있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배로 낳은 자식이든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든 예쁠 때는 뭘 해도 예쁘고, 말 안 들을 때는 얄밉죠. 하하하….” 최재형 감사원장(65·사법연수원 13기)과 부인 이소연 씨(61)는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배로 낳은 두 딸과 가슴으로 낳은 두 아들 이야기를 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최 원장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것은 인생이라는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며 “입양이든 출산이든 똑같이 힘들고 또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 원장과 부인 이 씨는 두 딸이 중고교생이던 중년의 나이에 두 아들을 입양했다. 2000년 생후 9개월의 진호 씨(21)를 입양한 뒤 2006년 열 살이던 영진 씨(25)를 입양했다. 부부는 입양 부모로서 겪었던 희로애락을 2004년부터 2011년까지 8년간 한국입양홍보회 홈페이지에 약 150편의 일기로 꾸준히 남겼다.》○ “망태 자루 속의 고양이”“영진이를 낳은 어머니로부터 입양 동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우리 딸이 대학 입학했을 때보다 더 기뻤어요.” 최 원장 부부는 2006년 초등학교 4학년이던 영진 씨를 가족으로 맞았을 때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당시 최 원장은 50세, 이 씨는 46세였다. 6년 전 입양한 둘째 아들 진호 씨가 아직 유치원생이라 초등학생을 키우면 보다 수월할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영진 씨는 아들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고뭉치가 되어버렸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마치 10년간 부리지 못했던 응석과 말썽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지만, 상처 입고 깨져버린 마음은 쉽게 아물지 않는 걸까. 이 씨가 동생인 진호보다 책을 30분 더 보라고 하면 “엄마는 내가 미워서 잠을 못 자게 하려고 그런다”며 화를 내곤 했다. 지인은 그런 영진이를 마치 ‘망태 자루 속에 있는 고양이’ 같다고 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사랑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망태. 최 원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입양 후 몇 년간은 힘들었죠. 어느 날 꿈에서 내가 회초리를 들었는데 영진이가 내 손을 낚아채더니 ‘아버지, 왜 이러세요’ 하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이해와 인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4년간 찾아 헤맨 아들의 여린 본심 어떻게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영진 씨를 바꿔 보려던 최 원장 부부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정립해온 양육 방식을 내려놓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했다. 여러 종류의 가정심리상담을 받았고 소아정신과 의사와 정기적으로 상담했다. 그러자 안갯속 같던 큰아들의 여린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이 제시한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영진이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로부터 분리되면서 생긴, 그리고 그 이후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해결되어야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최 원장은 “영진이의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다 나올 수 있도록 부모가 마치 쓰레기통처럼 있는 그대로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진 씨의 마음이 다시 채워지는 데는 4년이 넘게 걸렸다. “몇 년을 같이 살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영진이가 내가 예상했던 대답을 한 기억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뭔가 말을 건넸는데 영진이가 부드러운 반응을 보였어요. ‘이 아이가 달라지는구나’ 생각이 들었죠.”(최 원장)입양될 때 아이의 나이가 많을수록 아이와 부모가 겪는 어려움은 어릴 때 입양한 경우보다 몇 곱절 커진다는 게 최 원장의 생각이다. “아무리 좋은 가정으로 입양되더라도 아이가 겪는 정신적 충격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데 뉴욕 타임스스퀘어 앞에 홀로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영진이도 그런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죠. 정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부모가 어릴 적 속 썩이던 이야기를 꺼낼 때면 미안한 듯 소리 내 웃는다는 영진 씨는 8월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난다. 네덜란드의 유명 예술 교육기관인 ArtEZ예술대에서 4년간 유학할 예정이다. “영진이 떠나면 이제 맛있는 라면이랑 떡볶이, 부침개는 누가 만들어 주나 걱정이에요.”(최 원장)○ 공개 입양 했지만 편견에 상처받았던 아들 2000년 9개월 아기일 때 최 원장 부부의 품에 안긴 진호 씨. 이 씨는 성가정입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갓난아기인 진호를 돌보다 입양을 결심했다. 최 원장 부부는 진호 씨가 입양 사실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개 입양을 했다. 어려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입양 사실을 받아들이면 상처를 보다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결정이었지만 진호 씨가 입양에 대한 편견에 부딪혀 상처받는 모습에 가슴 아팠던 순간이 많았다고 한다. 진호 씨가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다투다가 ‘고아’라는 말을 듣고 큰 상처를 입은 일은 최 원장의 기억에 아직도 뚜렷이 남아있다. “진호에게 ‘크면 누구랑 결혼할래?’라고 장난스레 물었더니 친한 입양 가족의 또래 여자아이 이름을 대더라고요. ‘자기 마음을 잘 이해할 것 같다’라고 하면서…. 표현은 못 하지만 아픔이 있다는 걸 알았죠.”(최 원장) 이 씨는 2004년 9월 일기에서 “진호가 요즘 ‘내가 말 안 들으면 나 버릴 거지’라는 말을 가끔 한다. 지원이 예원이도 똑같이 야단을 맞고 컸지만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진호한테 이런 말을 듣자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마음이 서글퍼진다”고 썼다. 그래도 최 원장 부부에게 진호 씨는 사랑스러운 ‘껌딱지’ 막내아들이라고 한다. 고인이 된 최 원장의 모친은 생전 진호 씨의 사진을 항상 지갑에 넣어 간직했다.○ “정인이 사건, 가슴 아프지만 입양 위축돼선 안돼” 최 원장은 입양 제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원래 가정에서 양육되기 어려운 아이들이 가정의 품에서 사랑을 먹으며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대안”이라고 했다. 최 원장은 “열 달간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출산한 부모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가능하면 원가정을 보호해야 한다”면서도 “다만 그게 불가능한 경우 아이들이 위험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국가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원장은 그러면서 국내 입양이 우선 고려돼야 하는 것은 맞지만 아이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해외 입양에 대해서도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 원장은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는 ‘정인이 사건’에 대해선 입양보다 가정에서의 아동학대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인이 사건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입양 이후 사후 관리를 잘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번 사건 때문에 입양 자체가 위축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국내 아동학대 가해자 중 친부모의 비율이 72.3%였던 반면 입양 부모의 비율은 0.3%에 그친다는 보건복지부 자료(2019년 기준)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이 씨가 불쑥 휴대전화를 꺼내 영진 씨가 만든 미술 작품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주책”이라며 부인을 말리던 최 원장도 어느덧 휴대전화를 꺼내 군 복무 중인 진호 씨와 입대 직전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줬다. 영락없는 ‘자식 바보’였다. “두 딸을 키울 때랑 마찬가지죠. 보람도 있고 때론 화도 나는 것. 입양을 했다고 다를 게 뭐 있나요.”(최 원장) “아이들에게 우리가 많이 준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 받은 게 더 많았네요.”(이 씨)인터뷰=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 정리=권기범·유채연 기자}
천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명작들은 60년 넘게 주인 손을 떠나 있었다. 1938년 독일 나치정권이 한 유대인 가족에게서 클림트 그림을 약탈했고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림 주인 마리아 알트만은 2000년 빼앗긴 그림들을 되찾으려 나섰다. 미국 캘리포니아법원에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었다.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상대로 재판할 수 없다는 ‘국가면제’라는 국제관습법 원칙이다. 우여곡절 끝에 알트만은 그림을 돌려받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국에 ‘외국주권면제법(FSIA)’라는 법이 있었다. 외국 정부가 정당한 보상 없이 자국민의 재산을 빼앗아 상업적으로 활용한 경우 ‘국가면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내법을 마련해놓은 덕분이었다. 일본도 외국 정부가 국가면제를 방패삼아 책임을 피하지 못하도록 2009년 법을 만들었다. “자국민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외국의 행위에 대해 국가면제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못 박은 것이다. 일본은 국가면제의 예외를 확대해야 한다는 ‘UN 국가면제협약’까지 비준한 전 세계 22개국 중 하나다. 일본의 법대로라면 ‘위안부’ 피해를 야기한 가해국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떨까.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하느냐를 두고 서울중앙지법에서 최근 3개월 사이 정반대 판결이 나왔다. 한 재판부는 1월 “일본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했고, 다른 재판부는 지난 21일 “일본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두 재판부는 국가면제를 다르게 해석했다. ‘1월 재판부’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국가가 배상을 회피하려고 국가면제 이론 뒤에 숨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법적 절차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하므로 일본의 위안부 운영은 국가면제의 예외라고 봤다. 법과 실체적 정의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는 상식에 가까운 논리였다. 2015년 한일 정부 간에 ‘위안부 합의’가 있긴 했지만 피해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아 재판이 유일한 구제 수단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4월 재판부’ 역시 국가면제를 만고불변의 가치로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외국 정부의 책임을 물은 판례가 거의 없고, 개별 소송보다 국가 간 외교로 해결하라는 게 국가면제의 취지라고 했다. 눈길이 간 대목은 우리 정부와 국회가 국가면제의 예외를 정립하는 등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대내외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점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적 의사결정이 없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추상적인 기준으로 새로운 기준을 창설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국익을 지키려 국가면제의 예외를 적극적으로 넓혀왔다. 약소국의 설움을 알기에 더욱 절실하고 치밀했어야 할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2015년 위안부 합의를 비판하면서 화해치유재단을 없앤 뒤 3년 넘게 무대책이다. 문 대통령은 1월 일본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왔을 때 “당혹스럽다”고 했고, 일본이 4월 판결에 대해 “적절한 판결”이라고 입장을 내자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1월과 4월의 두 판결은 얼핏 정반대로 보이지만 “대한민국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한목소리로 묻고 있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정원섭 씨가 ‘파출소장 딸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1972년 감옥에 갇힐 때 그에겐 9세 아들이 있었다. 15년 복역 후 모범수로 풀려난 정 씨는 장성한 아들에게 유서를 미리 써놓았다.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남은 재를 강 말고 산에 뿌려줘라. 살인범의 더러운 흔적으로 강물을 오염시키고 싶지 않다.” 그는 누명을 벗어 유서를 고쳐 쓰고 싶었다. “더 살고 싶고, 더 살아야 한다. 아들에게 진실을 물려주고 죽어야 한다”는 말을 주변에 자주 했다고 한다. 정 씨는 다시 재판을 받고 싶었다. 다행히 사건 당시 정 씨가 범인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던 증인들이 어렵게 입을 열어줬다. 증인들은 “당시 어린 나이에 겁이 나 경찰이 시키는 대로 증언했지만 그렇다고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도 정말 가슴이 무겁다”고 했다. 하지만 정 씨의 재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2001년 “사건 후 29년이 흐른 뒤에 이뤄진 증인들의 진술 번복을 믿기 어렵다”며 재심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정 씨는 출소 후에도 달라진 게 없다고 느꼈다. 29년 전 그를 통닭구이처럼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들이부으며 거짓 자백을 강요한 경찰,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법정에서 바로잡으려던 증인을 위증죄로 구속한 검찰, “고문에 허위 자백했다”고 해도 1, 2, 3심 내리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법원…. 그 때 그 모습대로였다. 법원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를 받고서야 재심을 열었다.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 인정돼 대법원이 정 씨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국가배상 소송도 이어졌다. 2013년 1심 법원은 국가가 정 씨에게 26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정 씨가 40년 가까이 사회적 냉대를 당하고 가족들마저 그릇된 낙인으로 고통을 겪었다.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결코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심 법원이 국가에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뒤집었다. 과거사 사건은 형사보상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정 씨는 그보다 10일이 늦었다는 게 이유였다. 40년을 빼앗긴 사람에게 10일이 늦었다고 국가 책임을 면책한 것이다. 더구나 ‘소멸시효 6개월’은 1심에서 26억 원 배상 판결이 나올 땐 없었던 규정이다. 2심 판결 한 달 전인 2013년 12월 대법원에서 내놓은 이 판례가 이미 진행되던 정 씨 사건에 소급 적용됐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과거사 사건 소멸시효 단축’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 뒷받침 사례로 추진했다는 게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로 드러났다. 그래도 정 씨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헌법재판소가 2018년 ‘소멸시효 6개월’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한 게 불씨가 됐다. 헌재는 “국가기관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일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한다는 헌법 원칙에 위배된다”고 했다. 하지만 헌재마저 “국가배상 책임이 없다는 법원 판결을 취소해달라”는 정 씨의 헌법소원을 지난해 기각했다. 대법원에서 이미 판결을 확정해버려 소급 적용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30대 가장이었던 정 씨는 지난 49년간 국가로부터 고문 수사, 재심 거부, 배상 거부를 당했다. 한 시민의 소중한 삶을 대하는 우리 사법제도의 수준을 엿보게 된다. 정 씨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7번방의 선물’이다. 정 씨는 2018년 뇌경색이 재발해 기억이 흐릿해졌다. 그 와중에도 사건 관련 기억은 끝내 부여잡으며 “정의가 살아있는 한 국가에서 바로잡아 줄 것”이라고 아들에게 유언했다. 그는 3년간 요양병원에 머물다 지난달 28일 생을 마쳤다.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