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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걸(‘철도원 삼대’)로 부커상 받고, 그걸(준비작 ‘할매’)로는 노벨문학상 받으면 좋겠어요.” 황석영 작가(81)는 17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영문판 마터 2-10)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개 작품에 든 만큼 수상에 강한 욕심을 내비친 것이다.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그의 입담은 여전했다. 2019년 장편소설 ‘해질 무렵’(영문판 앳 더스크)이 2019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한 사실을 의식한 듯 “32개국에 98개 작품이 번역돼 소개됐고, 10여 차례 국제상 후보에 올랐다. 상을 받을 타이밍이 끝난 줄 알았는데 수명이 늘어서 타이밍이 연장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옆에서 계속 수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이번엔 진짜 받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2020년 출간된 ‘철도원 삼대’는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근현대 역사를 조망하는 소설이다. 그는 “세계가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한 모양을 갖췄지만 사실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다”며 “‘철도원 삼대’는 한국 근대 노동 운동사를 실감 나게 담았다는 데 문학적 의미가 있다”고 했다. 1962년 단편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하며 등단한 그가 62년 동안 작품을 계속 써 내게 한 동력은 두려움이다. 그는 “‘원로 작가’라는 수식어는 매너리즘에 봉착한 작가를 의미한다”며 “난 장대 위에 올라 있는데 떨어질지도 모르는 미지의 허공에서 다시 나아가야 하는 위기의 자리에 있다”고 했다. 황 작가가 올해 최종 후보에 오르며 2022년 정보라 ‘저주토끼’, 지난해 천명관 ‘고래’에 이어 한국 작가 작품이 3년 연속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됐다. 앞서 2016년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한국 작가 최초로 부커상을 받은 바 있다. 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은 5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최종 수상 작가와 번역가에게 모두 5만 파운드(약 8500만 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그는 차기 작품 구상도 줄지어 밝히며 의욕을 드러냈다. “홍범도 장군(1868∼1943), 동학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이 등장하는 소설도 각각 구상하고 있어요. 저를 근대 극복과 수용을 자기 일감이자 사명으로 생각하고 언저리에서 일하다가 죽은 작가로 규정해 주십시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벨라는 궁금한 게 많거든요. 난 흠결이 많고 모험적인 사람이라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요.” 벨라(에마 스톤)는 지난달 6일 개봉한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위험하니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벨라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천재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윌럼 더포)의 집에서 나온다. 영화는 자유분방한 벨라의 성격을 강조한다. 영화와 1992년에 쓰인 원작 장편소설 ‘가여운 것들’(황금가지·사진)은 사망한 성인 여성의 몸에 태아의 두뇌를 결합해 탄생시킨 피조물 ‘벨라’라는 파격적 소재가 같다. 하지만 원작에는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상이 더 강렬하게 담겼다. 원작의 배경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1837∼1901)다. 당시 영국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경제는 급성장하고 국력은 팽창해 대영제국의 황금기로 불렸지만, 여성에 대한 시선은 보수적이었다. 고드윈 백스터는 원작에서 “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지독하게 부당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고 말하며 시대상을 드러낸다. 특히 원작에서 벨라의 전 남편 블레싱턴 장군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괴물 같은 인물이다. 대영제국 군대를 이끄는 블레싱턴 장군은 툭하면 하인들에게 총을 겨눈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를 지배한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폭압적 시선은 아내였던 벨라에게도 향한다. 벨라의 성욕을 제한하는 수술을 시도하며 “그것(수술)이 그들(여성)을 세상에서 가장 양순한 아내로 만든다”고 말할 정도다. 원작을 번역한 이운경 번역가는 “영화는 순수한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원작은 여성을 억압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했던 당시 영국의 시대상을 짙게 응시한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가 쓴 원작은 사회 불평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았다. 그는 원작에서 제국주의 이면의 빈부격차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예를 들어 벨라가 여행 중 만난 ‘회의주의자’ 해리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게 됐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영화는 벨라가 사회 모순을 직시하는 정도로만 간단히 다뤘다. 상류층인 벨라가 시원한 카페에서 풍경을 즐길 때 밖에선 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가난한 이들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장면으로만 표현된 것.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소설 중 철학, 정치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영화는 대신 인간의 ‘정체성’에 집중한다. 과학 실험으로 괴물을 만든 뒤 괴로워하는 창조자 고드윈 백스터의 흉측한 모습은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년)을 생각나게 한다. 고드윈의 철자 ‘Godwin’은 프랑켄슈타인을 쓴 영국 작가 메리 셸리(1797∼1851)의 혼전 성(姓)이다. 영화가 등장인물의 외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점도 돋보인다. 영화 속 고드윈 백스터의 얼굴은 큰 흉터로 가득하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한쪽 턱도 두드러진다. 원작과 달리 스스로 위액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어 외부 장치에 의존한다는 충격적 설정까지 극에 더해졌다. 영화가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과 건물에 환상적 이미지를 더한 점도 눈길을 끈다. 열기구가 지중해 위로 솟아오르고, 공중전차가 골목 위에 매달린 밧줄을 따라 날아가는 영상을 보여 주며 배경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헷갈리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기술에 공상과학(SF) 요소를 더한 장르인 ‘스팀펑크’ 요소다. 영화는 지난달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여우주연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독특한 미장센을 인정받았다. 벨라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원작은 구성이 복잡하다. 벨라의 현 남편인 매캔들스가 쓴 문건이 첫 번째 이야기라면 이를 벨라가 반박하는 편지인 두 번째 이야기가 다른 한 축에 있다. 한 사건에 대해 시선을 달리하며 시각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작가가 매캔들스의 문건과 벨라의 편지를 각각 발견해 정리하는 세 번째 이야기로 정리돼 있다. 장은진 황금가지 편집자는 “영화가 벨라의 시선에서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원작은 이야기가 여러 겹으로 덮여 있다. 독자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형식미가 돋보인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벨라는 궁금한 게 많거든요. 난 흠결이 많고 모험적인 사람이라 세상을 탐험하고 싶어요.”벨라(엠마 스톤)는 지난달 6일 개봉한 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위험하니 밖에 좀 돌아다니지 말라는 이들에게 자신의 성격을 이유로 든 것. 벨라는 선천적으로 타고나길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아버지처럼 따르던 천재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럼 더포)의 집에서 나왔다는 말이다.실제로 사람들은 벨라를 ‘천방지축 소녀’처럼 바라본다. 벨라가 먹던 음식이 맛이 없고 뱉으면 “예의가 없다”고 혼을 낸다. 벨라가 시끄럽게 우는 아이를 혼내려 하면 폭력성이 짙은 여자처럼 바라본다. 벨라는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과 세계 여행을 다니는 벨라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여자처럼 보인다.그런데 정말 벨라는 타고난 천방지축일까. 혹시 벨라를 옭아매는 시대가 만든 억압 때문 아닐까.● ‘빅토리아 시대’ 응시한 원작“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지독하게 부당한 우리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네.”1992년 쓰인 원작 소설 ‘가여운 것들’(황금가지)에서 갓윈 백스터는 한 여성을 살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영국 스코트랜드 도시 글래스고를 지나는 클라이드강에 투신하는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당시 이 여성은 임신 중이었다. 현수교 난간에서 뛰어들었다. 여성의 뇌는 멈췄지만 몸에 약한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갓윈은 아기를 꺼낸 뒤 아기의 뇌를 여성에게 이식했다. 그 뒤 여성의 몸에 고압 전류를 흘려 살려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체는 몸은 성인 여성이지만 지능은 갓난아기다. 기이한 생명체 ‘벨라’는 이렇게 탄생했다.왜 벨라가 투신했는지를 알려면 작품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당시 영국 여성에겐 참정권이 없었다. 영국은 1928년 전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이 부여됐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본인이 여성이면서도 여성 인권 향상에 혐오감을 드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경제는 급성장하고 국가가 팽창해 대영제국의 황금기라 불렸지만, 여성에 대한 도덕적 시선은 경직돼 있었다.특히 벨라의 옛 남편 블레싱턴 장군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괴물 같은 인물이다. 대영제국을 이끈 블레싱턴 장군은 툭하면 하인들에게 총을 겨눈다. 영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블레싱턴 장군은 이런 시선을 여성인 벨라에게도 보낸다. 벨라의 성욕을 제한하는 수술을 하려고 하며 “이슬람교도들은 자기 여자들에게 출생 후 곳 그것을 시키지. 그것이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양순한 아내로 만든다오”라고 천명할 정도다.벨라가 남편과 정략 결혼한 것도 벨라 아버지의 이기심 때문이다. 벨라 아버지는 벨라에게 “넌 당연히 남편을 사랑해야 했어! 남편은 나 외에 네가 만나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남자였다”고 사랑을 강요한다. 벨라가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이 남자들 곁에서 도망칠 방법은 투신뿐이었다.이처럼 원작과 영화는 사망한 성인 여성의 몸에 태아의 두뇌를 결합하여 탄생한 피조물이라는 파격적 소재를 공유하지만 접근법은 다르다. 원작을 번역한 이운경 번역가는 “영화는 순수한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자유롭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원작은 여성을 억압하고, 제국주의가 팽창했던 당시 영국의 시대상을 짙게 응시한다”고 말했다.특히 영화는 벨라의 섹스신을 소설보다 더 많이 등장시킨다. 벨라가 처음 자위를 하고, 덩컨 웨더번과 성에 탐닉하고 매음굴에서 주체적으로 일하는 장면을 수차례 보여준 것. 소설에선 이런 장면이 직접 등장하는 부분이 적다.이같은 장면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이런 장면을 넣은 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벨라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다. 성에 대해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으로 일관하는 벨라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아카데미 디지털 매거진인 ‘A.frame’과의 인터뷰에서 “벨라는 과도한 노출, 섹스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호기심이라는 동일한 태도로 모든 것에 접근한다”고 했다.● ‘프랑켄슈타인’ 닮은 백스터 박사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이 각색된 것도 특징이다. 원작을 쓴 스코틀랜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1934~2019)는 사회문제에 적극 목소리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원작 소설에서도 식민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정교하고 신랄하게 풍자가 자주 등장한다. 벨라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니게 되는 과정도 깊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벨라가 여행 중 만난 ‘회의주의자’ 해리는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원작에서 이렇게 역설한다.“아주 가난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구걸하고, 거짓말하고, 훔치는 법을 배워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말이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게 되자 의회 의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났소. 정부는 혁명을 두려워했으니까.”“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평화주의자나 비폭력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있소. 그들은 우리가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를 개선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본받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해요.”반면 영화에서 벨라는 여행 중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다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는 방식으로 요약됐다. 상류층인 자신이 시원한 카페에서 풍경을 즐길 때 밖에선 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가난한 이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이다. 다만 벨라의 감정을 동정으로 전달할 뿐 깊게 들어가진 않는다. 그리스 출신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지난해 12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원작소설 중 철학, 정치에 대한 내용은 삭제하기로 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란티모스 감독은 대신 인간의 ‘정체성’에 천착했다. 과학 실험으로 괴물을 만든 뒤 괴로워하는 창조자 갓윈 백스터의 흉측한 모습은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을 생각나게 한다. 갓윈의 철자 ‘Godwin’은 프랑켄슈타인을 쓴 영국 작가 메리 셸리(1797~1851)의 혼전 성씨니 원작 소설가의 의도를 감독이 담은 셈이다. ● ‘스팀펑크’ 영상미 두드러져영화가 등장인물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잘 살려낸 점도 돋보인다. 갓윈 백스터의 외양이 원작 소설에서는 이렇게 묘사돼있다.“커다란 얼굴, 두툼한 몸피, 그리고 굵직굵직한 사지 때문에 그의 외양이 난쟁이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깊고 영구적인 주름 세 개로 골이 진 이마에도 희망으로 가득 찬 폭이 너른 눈, 들창코, 그리고 안달하는 어린애의 애처로운 입을 가지고 있었다.”반면 영화 속 백스터의 얼굴은 오려 붙인 듯한 큰 흉터로 가득하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한쪽 턱도 두드러진다. 아버지에게 수차례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려는 듯하다. 원작과 달리 스스로 위액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어 외부 장치에 의존한다는 충격적 설정까지 더해졌다.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며 미장센을 인정받은 이유다.영화가 빅토리아 시대의 의상과 건물에 환상적 이미지를 더한 점도 눈길 끈다. 열기구가 지중해 위로 솟아오르고, 공중 전차가 골목 위에 매달린 밧줄을 따라 날아가는 영상을 보여주며 이곳이 과거인가 미래인가 헷갈리게 한다. 빅토리아 시대 과학기술에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한 공상과학(SF)의 하위 장르인 ‘스팀펑크’의 영상미가 두드러진다.벨라의 시선에서 주로 진행되는 영화와 달리 원작 소설은 구성이 복잡하다. 벨라의 남편인 맥캔들리스가 쓴 문건이 주된 ‘첫 번째 이야기’라면 이를 벨라가 반박하는 편지인 ‘두 번째 이야기’가 다른 한 축에 있다. 한 사건에 대해 시선을 달리하며 시각차를 보여주는 것이다.또 소설은 작가인 엘러스데어 그레이가 맥캔들리스의 문건과 벨라의 편지를 각각 발견해 정리하는 ‘세 번째 이야기’로 정리돼있다. 작가 자신이 여러 문건을 조사하고 발견해 이 소설을 출간한다고 능청스럽게 서술하는 것.예를 들어 소설에서 작가는 “독자들은 어쩌면 이 이야기를 기이한 허구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 서문의 말미에 실은 증거들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글래스고의 파크 서커스 18번지에서 한 천재 외과의가 인간의 유해를 사용해 25세의 여성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며 마치 역사적 사실인 척 말한다.이는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가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1980년)에서 자신이 1968년 출간된 ‘마비용 수사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아드송의 수기’를 입수한 뒤 번역해 출간하는 것뿐이라고 능청을 떠는 방식과 비슷하다. 이 작품이 형식을 파괴하며 다양한 해석을 낳는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장은진 황금가지 편집자는 “영화가 벨라의 시선에서 직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원작은 이야기가 여러 겹으로 덮혀 있다. 독자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형식미가 돋보인다”고 말했다.드라마 ‘무빙’을 본 뒤 스마트폰을 켜고 원작 웹툰을 정주행한 적이 있나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상 캐스팅’을 해본 적이 있나요? ‘선넘는 콘텐츠’는 소설, 웹소설, 만화, 웹툰 등의 원작과 이를 영상화한 작품을 깊이 있게 리뷰합니다. 원작 텍스트가 이미지로 거듭나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재밌는 감상 포인트는 무엇인지 등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모든 인플루언서가 구독자 0명에서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8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인플루언서 강의. 유튜브에서 전자 악기와 위스키를 주로 리뷰하는 유명 인플루언서인 강사 네이선(가명)이 이렇게 말하자 참가자 70명의 눈빛이 반짝였다. 강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면 누구나 유명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참가자들은 13∼17세였다. 친구들과 뛰놀거나 수학 공부를 하는 대신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강사는 각종 팁을 전수했다. 가명은 쉽게 검색되고 발음하기 쉬운 것으로 정해야 한다. 영상을 편집할 땐 끊김이 없도록 한다. 침묵이 길면 구독자가 떠난다. 가장 중요한 건 팬 관리다. 구독자들이 댓글로 관심 있는 주제를 표하면 이를 즉각 수용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처음에 여러분의 채널은 여러분을 위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구독자를 위한 것이 됩니다.” 책은 인터넷에서 수많은 구독자를 보유하며 영향을 끼치는 인플루언서의 실상을 파고든 인문학서다. 영국의 디지털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는 저자가 인플루언서를 인터뷰하고, 직접 인플루언서 시장에 뛰어들어 겪은 이야기를 실감 나게 담았다. 바야흐로 인플루언서의 시대다.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에 따르면 전 세계엔 5000만 명 이상의 인플루언서가 있다. 전업 인플루언서도 200만 명에 달한다. 인플루언서들이 늘어난 건 그들이 거두는 어마어마한 수익 때문이다. 미국 유튜버인 라이언 카지는 2020년 광고 수익으로 2950만 달러(약 402억3000만 원)를 벌었다. 미국 인플루언서인 카일리 제너는 1개의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120만 달러(약 16억4000만 원)를 받는다. 팬데믹을 거치며 인플루언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저자도 인플루언서에 도전한다. 인플루언서 수업을 듣고, 유튜브 채널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아침마다 달린 뒤에 ‘#동기부여’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영상을 올렸다. 우유를 사러 가는 길에 예쁜 하늘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 서재에서 글을 쓰며 스트리밍을 열고 구독자들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키보드 소리마저 녹음해 자율감각쾌락반응(ASMR) 영상으로 올렸다. 하지만 유명 인플루언서가 되는 길은 만만치 않다. 미친 척하고 길거리에 누운 사진을 찍어 올렸지만 반응은 미미하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인플루언서끼리 몰래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꼼수도 부린다. 가짜 구독자를 돈 주고 살까 고민하다가 갑작스레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찾아온다. 어느새 동영상으로 올리기 쉽게 말을 짧게 하고, 매 순간 구독자가 늘어나는지를 신경 쓰다가 일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영상을 올리기에 몰두하는 동료 인플루언서를 보며 회의감에도 시달린다. 현재 저자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800명이 안 된다. 저자는 인플루언서의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평가한다. 여가와 노동의 경계가 흐려지고, 자신의 정보를 온라인에 더 많이 공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인플루언서가 조금 더 극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내 일상을 SNS 게시물로 올리곤 하염없이 ‘좋아요’가 눌리기를 기다리는 게 우리 모습 아닌가. 물론 늘 ‘온라인’ 상태로 연결된 시대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끔은 ‘오프라인’ 상태로 단절돼야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킬 것 같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동아일보사와 전남 강진군이 공동 주최하는 제21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작으로 곽효환 시인(57)의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2023년·문학과지성사·사진)이 선정됐다. 본심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종해, 나희덕, 이현승 시인은 최종 후보작 5개 중 곽 시인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고 11일 밝혔다. 수상작은 ‘북방의 시인’이라 불리는 곽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연해주에 영구 정착한 최운보,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항일운동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등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을 불러낸다. “나는 조선에서 건너온 첫 번째 아라사 먹킹이요”(시 ‘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 중), “연해주와 시베리아 대륙 마을마다/억압받는 이들을 위한/자유의 씨앗을 뿌리고”(시 ‘김알렉산드라 소전’ 중)처럼 북방에서 살아간 이들을 주목한다. 수상작엔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너를 기다리는/산사에 봄눈 분분히 흩날린다”(시 ‘미륵을 기다리며’ 중)처럼 보편적 감정을 울리는 서정시도 담겼다. 시인은 우리의 터전을 이루어온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주어진 삶과 사랑하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의 순간을 소리 없는 눈물로 버텨내는 이들을 들여다본다.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곽 시인은 북방의 삶에 대한 내밀함을 유지하면서 역사의식을 개인적인 정서로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갔다”며 “시집에서 완벽하게 구사된 북방의 언어가 그 생생함으로 증언력을 높인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은 또 “시집에 넓게 담긴 사회적 서사와 개인적 서정의 스펙트럼은 영랑의 시가 사회·역사의 영역으로 나아갔던 것과 같다”며 “수상작은 영랑의 시 정신에 부합할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계승했다”고 했다. 곽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북방은 우리의 기원이 되는 공간이면서 다른 민족들과 조화롭게 살고 기상을 떨친 기억을 품은 공간”이라며 “제가 주목한 것은 힘없고 나약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울음을 삼키면서 버텨내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 허기처럼 밀려오는 ‘그리운 무명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곽 시인은 또 “영랑을 우리 문학사에서 순수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품이 넓은 시인으로 기억한다”며 “제 수상으로 영랑의 시 정신이 북방과 그 너머까지를 아우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곽 시인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1996년 시 ‘벽화 속의 고양이3’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애지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을 펴냈다. 문학이론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시 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를 썼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4시 전남 강진군 강진아트홀에서 열린다. 상금은 3000만 원.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최종 후보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고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이금이 아동문학 작가(62)는 8일(현지 시간) 2024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글 부문) 수상 불발 이후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진행된 북 토크에서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수상엔 실패했지만 충분히 평가받았다는 의미였다. 이 작가는 “최종 후보에 든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을 알릴 수 있어 기뻤다”며 “(수상 불발에) 상처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고 했다. 북 토크는 김서정 아동문학평론가 사회로 진행됐다. 현지 독자, 출판사 관계자 등 약 30명이 참가했다. 안데르센상은 아동문학상 중 최고 권위를 지녀 ‘어린이책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린다. 2년 전 이수지 작가(50)가 한국인 최초로 그림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후 이금이 작가가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주목받았다. 하지만 최종 수상은 오스트리아의 하인츠 야니슈(64)에게 돌아갔다. 이금이 작가는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습작에 집중했고,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 ‘영구랑 흑구랑’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 작가는 이날 북 토크에서 “내가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처음 온 게 2000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최종 후보 6명 안에 들어 이 자리에 다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회상했다. 이 작가는 이어 “시상식 이후에 곧바로 북 토크를 하니까 상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며 “올해가 등단 40주년인데 열심히 글을 썼다는 이유로 최종 후보에 뽑아준 것 같다”고 겸손을 내비쳤다. 이 작가는 또 “한국에서 다른 작가분들이 제가 최종 후보에 오른 것에 대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줬다”며 “이금이 개인으로 온 게 아니라 한국의 아동·청소년문학을 대표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황석영 작가(81)가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2020년·창비) 영문판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22년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2017년), 지난해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2004년)에 이어 한국 작가의 작품이 3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처음이다. 부커상 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철도원 삼대’의 영문판인 ‘마터 2-10’(Mater 2-10)을 포함해 6편의 최종 후보작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에 따라 황석영은 소설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 소라 김 러셀, 영재 조세핀 배와 함께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의 최종후보가 됐다. ‘철도원 삼대’는 철도원 가족을 둘러싼 방대한 서사를 통해 일본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노동자의 삶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앞서 황석영은 장편소설 ‘해질무렵’의 영문판 ‘앳 더스크’(At Dusk)로 2019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오른 적이 있다.부커상은 노벨 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한국작가 중에선 소설가 한강이 2016년 ‘채식주의자’로 이 상을 받았다. 올해 수상자는 다음 달 21일(현지 시간) 영국에서 발표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동문학 작가 이금이(62)가 2024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주목받고 있다. 2년마다 아동문학 발전에 공헌한 글·그림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수여하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은 아동문학상 중 세계 최고 권위를 지녀 ‘어린이책의 노벨 문학상’으로 불린다. 202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수지 작가가 그림 부문에서 이 상을 받은 데 이어 이 작가가 연달아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K아동·청소년문학’이 연달아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공감대를 넓히고 있는 건 이야기가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작가의 작품은 보편성을 무기로 다양한 세대와 나라를 포괄하고 있으며 2차 창작물로도 자주 만들어진다. 하와이 이민 1세대가 등장하는 장편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2020년·창비)은 2022년 뮤지컬로 제작됐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장편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2016년·사계절)는 2021년 웹툰으로 만들어졌다. 일각에선 이금이 이수지 등 한국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교육열 높은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은 질 좋은 콘텐츠란 점에서 경쟁력이 높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아이들에게 읽기 좋은 책을 고르려는 학부모의 선구안이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과 영미 아동·청소년문학이 100년 동안 쌓은 수준을 최근 수년 사이 빠르게 따라잡아 이젠 해외 서점 아동문학 상위권을 한국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지은 비룡소 편집주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 작품들을 수입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책의 내용, 그림 수준 등 어느 것도 뒤처지지 않게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발전한 덕”이라고 했다. 해외에선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작품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내용이 깊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모두 읽는 ‘영 어덜트(Young Adult)’ 문학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심향분 전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KBBY) 위원장은 “이금이 작가의 작품은 한국의 역사적 상처라는 특수성부터 성장의 아픔 등 여러 국가 독자가 공감하는 보편성까지 다양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어린이·청소년과 함께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작가”라고 했다. 한국 문학의 인기가 전체적으로 올라간 덕도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해외 출판사가 자발적으로 우리 문학을 출간하겠다고 번역 지원을 요청한 건수는 2014년 13건에서 지난해 281건으로 10년 만에 21배 늘었다. 정보라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2004년·문학동네)가 각각 2022, 2023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받는다. 이런 높은 평가는 한국 작가들의 수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수지 작가는 2022년 한국 작가 최초로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을 수상했다. 그림책 ‘구름빵’(2004년·한솔교육)으로 유명한 백희나 작가는 2020년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았다.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에서 김지안의 ‘달리다 보면’(웅진주니어), 서현의 ‘호랭떡집’(사계절), 최연주의 ‘모 이야기’(엣눈북스)가 우수상 격인 특별언급 부문을 수상했다. 전문가들은 대중성과 문학성을 함께 지닌 아동·청소년문학이 한국 문학을 이끌 수 있다고 평가한다.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는 “아동·청소년문학은 유아들이 즐겨 보는 그림책과 어른들이 읽는 성인 문학을 잇는 가교”라며 “번역 사업 지원 등 정부가 나서 아동·청소년문학을 키운다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아동문학 작가 이금이(62)가 2024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주목받고 있다. 2년마다 아동문학 발전에 공헌한 글·그림 작가를 한 명씩 선정해 수여하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은 아동문학상 중 세계 최고 권위를 지녀 ‘어린이책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린다. 202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수지 작가가 그림 부문에서 이 상을 받은데 이어 이 작가가 연달아 글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K아동·청소년 문학’이 연달아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공감대를 넓히고 있는 건 이야기가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기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작가의 작품은 보편성을 무기로 다양한 세대와 나라를 포괄하고 있으며 2차 창작물로도 자주 만들어진다. 하와이 이민 1세대가 등장하는 장편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2020년·창비)은 2022년 뮤지컬로 제작됐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장편소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2016년·사계절)은 2021년 웹툰으로 만들어졌다. 일각에선 이금이 이수지 등 한국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교육열 높은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은 질 좋은 콘텐츠란 점에서 경쟁력이 높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아이들에게 읽기 좋은 책을 고르려는 학부모의 선구안이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과 영미 아동·청소년문학이 100년 동안 쌓은 수준을 최근 수년 사이 빠르게 따라잡아 이젠 해외 서점 아동문학 상위권을 한국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는 평가다. 박지은 비룡소 편집주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 작품들을 수입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책의 내용, 그림 수준 등 어느 것도 뒤처지지 않게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이 발전한 덕”이라고 했다. 해외에선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작품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내용이 깊고, 다루는 주제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모두 읽는 ‘영 어덜트’(Young Adult) 문학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심향분 전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KBBY) 위원장은 “이금이 작가의 작품은 한국의 역사적 상처라는 특수성부터 성장의 아픔 등 여러 국가 독자가 공감하는 보편성까지 다양한 면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어린이·청소년과 함께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작가”라고 했다. 한국 문학의 인기가 전체적으로 올라간 덕도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해외 출판사가 자발적으로 우리 문학을 출간하겠다고 번역 지원을 요청한 건수는 2014년 13건에서 지난해 281건으로 10년 만에 21배 늘었다. 정보라 단편소설집 ‘저주토끼’(2017년·래빗홀),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2004년·문학동네)가 각각 2022, 2023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받는다. 이런 높은 평가는 한국 작가들의 수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수지 작가는 2022년 한국 작가 최초로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을 수상했다. 그림책 ‘구름빵’(2004년·한솔교육)으로 유명한 백희나 작가는 2020년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았다.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에서 김지안의 ‘달리다 보면’(웅진주니어), 서현의 ‘호랭떡집’(사계절), 최연주의 ‘모 이야기’(엣눈북스)가 우수상 격인 특별언급 부문을 수상했다. 전문가들은 대중성과 문학성을 함께 지닌 아동·청소년문학이 한국 문학을 이끌 수 있다고 평가한다.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는 “아동·청소년문학은 유아들이 즐겨보는 그림책과 어른들이 읽는 성인 문학을 잇는 가교”라며 “번역 사업 지원 등 정부가 나서 아동·청소년문학을 키운다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혹시 제 작품이 유출됐는지 확인해 줄 수 있나요? 전 제가 낸 작품의 전자책(e북)이 유출됐는지 아닌지조차 모릅니다. 확인할 방법이 있다면 제게 좀 알려주시겠어요?” 중견 작가 A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5월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e북 72만 권이 해킹돼 그중 5000여 권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암암리에 퍼졌지만, 1년 가까이 자신의 책 유출 여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답답해했다. A 씨는 “내 책이 유출됐는지, 어디까지 퍼졌는지 알려주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했다. 최근 출판계에선 알라딘 e북 유출 사건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인 작가가 배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출판사들이 알라딘과 보상을 마무리하고 있지만, e북의 저작권을 지닌 작가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알라딘 e북 해킹 사건은 지난해 5월 한 고교생에게 알라딘 시스템이 해킹당해 전자책 72만 권이 유출된 일이다. 지난해 12월 한국출판인회의는 피해를 본 출판사 중 140개 출판사를 대리해 알라딘과 해결 방안에 합의했다. 정확한 액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위로금은 종당 100만 원 안팎으로 알려졌다.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도 한국출판인회의와 별도로 약 300개 출판사를 대리해 알라딘과 보상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들은 협의 과정에서 저작권자인 자신들이 배제됐다며 반발하고 있다. ‘알라딘 전자책 유출사태 해결을 위한 저작권자 모임’은 지난달 11일 성명을 통해 “출판사들이 작가들에게 직접 유출 현황을 공유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작가가 자신의 책이 유포됐는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출판사에 문의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책이 유출됐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 단체는 알라딘, 한국출판인회의, 출협에 각각 항의 공문을 보냈다. 이 단체를 대표하는 안명희 작가는 “알라딘은 피해 출판사에 대한 개별 위로금 지급과는 별개로 피해 작가에 대해 직접 배상해야 한다. 작가단체와 직접 협상해 사과하고 그 해결을 위해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현업에 있는 작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했다. B 작가는 “종이책 판매량도 정확히 집계하지 못하는 출판계에서 e북 사건에 제대로 대응할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각에선 작가, 문인 단체가 힘이 없는 현 상황이 문제를 키웠다는 평가도 나온다. 2018년 문학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가 벌어지면서 이른바 문단이 해체됐고, 작가들이 중지를 모을 구심점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C 작가는 “출협 등 출판계 단체는 모두 출판사 대표들의 모임이다. 과거 문단이 있던 때와 달리 문단이 줄어들면서 작가들이 문제를 공론화하기가 쉽지 않아졌다”고 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e북 유출 사건은 전례 없는 일이다. 사건 해결과 보상이 투명하게 이뤄져야 향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2011년 10월 4일 애플의 디자인 총괄 수석부사장 조너선 아이브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의 집에 들어섰다. 췌장암에 걸린 잡스의 얼굴은 수척했다. 두 다리는 뻣뻣한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같은 시간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은 본사에서 신제품 ‘아이폰 4S’를 공개했다.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아이브와 쿡은 야심작 아이폰 4S의 실패에 대해 상의할 경황이 없었다. 다음 날인 5일 잡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잡스 사후 아이브와 쿡이 애플을 이끈 과정을 조명한 경제경영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타임스에서 기자로 일한 저자가 4년간 애플 전·현직 임직원 200여 명을 취재해 썼다. 잡스를 다룬 전기 ‘스티브 잡스’(2011년·민음사)처럼 기업의 속살을 인간사로 풀어내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아이브를 창의력 가득한 ‘예술가’로, 쿡을 사안을 꼼꼼히 챙기는 ‘운영자’로 정의한다. 이런 성향 차이 탓에 두 사람의 동거는 불편했다. 올 2월 출시된 확장현실(XR) 기기 ‘비전 프로’를 둘러싼 견해차가 대표적이다. 아이브는 멀리 떨어진 가족을 잇는 소통의 기기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쿡은 게임과 영화를 즐기는 미디어 기기로 시장에 내놓았다. 현실세계를 벗어나고 싶은 이들에게 제품을 팔아야 매출이 늘 거라는 판단에서다. 갈등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를 사무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결국 아이브가 2019년 애플을 퇴사할 때, 쿡은 아이브를 붙잡지 않았다. 퇴사 후 애플과 맺은 디자인 컨설팅 계약이 2022년 중단됐을 때 아이브는 서운함을 드러냈다. 애플의 혁신적 디자인을 이끈 아이브가 떠난 뒤에도 애플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3조 달러(약 4043조 원)를 넘어섰다. 하지만 애플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올 초 세계 시가총액 1위 자리를 마이크로소프트(MS)에 빼앗겼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투자를 망설인 데 따른 것. 저자는 쿡이 이끄는 애플의 성공 여부를 섣불리 예단하지 않는다. 다만 “애플은 어떻게 영혼을 잃었나”라는 말로 아이브가 떠난 뒤 애플이 잡스의 창업 취지와는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금이 작가가 올해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최종 후보에 오른 데엔 번역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이수지 작가가 202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안데르센상 그림 부문을 수상했지만, 한국인 글 작가가 최종 후보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금이 작가는 수백 쪽에 달하는 두툼한 장편소설을 자주 써온 만큼 한국어를 어떻게 영어로 바꿨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2020년 국내 출간된 장편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2022년 영문판으로 출간됐다. 한국판은 하와이 인사말인 ‘알로하’를 강조한 제목을 달았다. 반면 영문판은 ‘The Picture Bride’라는 직관적 제목이다. 소설이 20세기 초 미국 하와이에 이민 간 남성과 서로 사진만 교환한 뒤 혼인한 여성인 ‘사진 신부’의 삶을 다뤘다는 점을 영미권 독자에게 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주인공 이름은 ‘버들’이다. 고유명사라 ‘Bodeul’이라 번역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문판은 버드나무를 뜻하는 ‘Willow’라 번역했다. 버들이란 이름이 버드나무에서 왔다는 점에 착안해서다. 여성의 머리칼처럼 축 늘어진 잎 때문에 ‘여인’, 버들 류(柳)와 머무를 류(留)가 독음이 같아 ‘이별’을 상징한다고 여겨지는 버드나무의 함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아닐까. 반면 ‘아지매’라는 표현은 발음 그대로 ‘Ajimae’라 번역했다. 아주머니의 방언인 이 단어가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던 당시 여성의 처지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설의 등장인물인 ‘부산 아지매’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친가가 부산이라 추정될 뿐이다. 이금이 작가 역시 한국판에서 “구포(소설의 배경)에 사는데도 부산 아지매로 불리는 아주머니”라고 묘사하며 이름 없는 여성들의 삶을 서술했다. ‘포와(布哇)’ 역시 발음 그대로 ‘Powa’라 썼다. 당시 조선인들이 하와이를 발음하기 힘들어 한자를 음역한 것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다. 당시 사진 신부에게 하와이가 얼마나 두렵고 미지의 땅이었는지 번역이 보여주는 셈이다. 소설 영문판이 지난해 5월 미국의 저명한 출판상인 ‘노틸러스 출판상’ 역사소설 부문 금상을 받은 건 이런 섬세한 번역 덕이다. 번역가 이력도 흥미롭다. 소설 번역을 맡은 이는 안선재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82)다.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안 교수는 1970년대에 종파를 초월한 수도원인 프랑스 테제공동체에 머물며 수행하다 그곳을 방문한 고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김 추기경의 초대로 1980년 수사로 한국에 온 뒤 서강대에서 영어영문학을 가르치다 1994년 귀화했다. 안 교수는 정년 퇴임 후에도 서강대 근처에 오피스텔을 마련해 한국 문학작품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문학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 때마다 조명을 받는 건 작가다. 하지만 좋은 번역이 없다면 유명 작품도 심사 대상에 오르기는 힘들 것이다. 8일(현지 시간) 이탈리아에서 진행되는 안데르센상 수상자 발표에서 ‘Ajimae’ 같은 이색적인 단어가 언급되길 기대해본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년), ‘슬픔치약 거울크림’(2011년)…. 김혜순 시인(69)이 문학과지성사(문지) 시인선으로 출간한 시집들이다. 1981년 문지 시인선 17호 ‘또 다른 별에서’부터 2022년 567호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까지 시집만 총 12종이다. 해외에 번역된 시집도 8종에 이른다. 김 시인이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BCC상)을 수상한 ‘날개 환상통’도 2019년 527호로 출간됐다. 이광호 문지 대표는 “문지 시인선은 동시대 세계 독자와 함께 읽는 책”이라며 “시는 번역이 어려운 장르지만 문지 시인선 중 번역된 시집은 86권”이라고 했다.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출판사인 문지와 창비가 최근 각각 600, 500호 기념 시집을 최근 펴냈다. 3일 출간된 문지 시인선 600호 기념 시집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501∼599호 시집에서 작가들이 썼던 후기를 모았다. 지난달 29일 출간된 500호 창비 시선 특별시선집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엔 401∼499호 창비 시선에서 시를 한 편씩 골라 담았다. 한국 시의 세계화를 이끈 두 시선집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문지는 1978년 황동규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46년, 창비는 1975년 신경림 시집 ‘농무’부터 49년 동안 상업성에 연연하지 않고 시집을 펴냈다. 창비 신인 시인상에서 20세로 당선돼 최연소 수상자가 됐던 한재범의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처럼 젊은 시인을 발굴하는 것도 특징. 백지연 창비 부주간은 “모든 세대를 아우르고 신구 조합이 탄탄한 시선집이 목표”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국내 그림책 작가 3명의 작품이 아동문학계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김지안의 ‘달리다 보면’(웅진주니어), 서현의 ‘호랭떡집’(사계절), 최연주의 ‘모 이야기’(엣눈북스)가 올해 볼로냐 라가치상에서 우수상 격인 특별언급 부문을 수상했다고 1일 밝혔다. 1966년 제정된 볼로냐 라가치상은 이탈리아에서 매년 3월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어린이 도서전인 ‘볼로냐 아동도서전’에 출품된 책 중 예술성과 창의성이 우수한 책에 수여한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BIB상’과 함께 세계 3대 그림책 상으로 꼽힌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광기에 사로잡힌 믿음의 끔찍함. 지난달 21일 공개된 뒤 넷플릭스 세계 1위(TV 부문·플릭스패트롤 기준)에 오른 드라마 ‘삼체’는 첫 장면부터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의 비극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제자와 아내에게 버림받고 끝내 살해당하는 칭화대 물리학과 교수 예저타이(페리 영)의 죽음을 통해 홍위병이 지식인을 핍박한 역사를 직시한 것이다. 특히 이 장면은 이후 예저타이의 딸 예원제(진 쳉·로절린드 차오)가 외계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반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인간 대신 외계인에게 지구를 맡겨야 한다는 ‘인간 회의론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문혁 당시 각계 지식인들이 무참히 죽은 역사를 통해 반지성적 행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원작인 중국 작가 류츠신의 장편소설 ‘삼체’(전 3권·자음과모음·사진)에선 이 에피소드가 첫 장면에 나오지 않는다. 1권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짧게 언급될 뿐이다. 류츠신이 2013년부터 쓴 ‘삼체’는 공상과학(SF) 소설계의 노벨 문학상으로 통하는 휴고상을 받고 900만 부 이상 팔렸다. 류츠신은 2019년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소설도 홍위병 장면으로 시작하려고 했지만 출판사가 검열을 우려해 바꿨다”고 털어놨다. 민감한 장면을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적당히 뒷부분에 배치했다는 것. 원작에서도 문혁에 대한 묘사는 짧지만 참혹하기 그지없다. 예저타이가 죽은 뒤 단상의 모습을 원작은 “핏줄기만이 유일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붉은 뱀처럼 천천히 구불구불 기어가다 단상 끝에서 한 방울씩 아래에 있는 빈 상자 위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예저타이의 부인이 귀가해 실성한 듯 웃는 구절은 부부의 연마저 끊어버린 문혁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드라마 ‘삼체’ 공개 후 중국에선 “드라마가 중국을 나쁘게 그렸다”,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정치적 각색”이라며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중국에서 자체 제작한 30부작 드라마 ‘삼체’가 더 낫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반발은 중국의 젊은 ‘애국주의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삼체’ 제작진은 원작자의 허락하에 각색을 했다는 입장이다. 미국판 원작소설에선 홍위병 장면을 맨 앞 장에 넣었다. 넷플릭스가 중국계 캐나다 감독 쩡궈샹(曾國祥)을 섭외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10년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중국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했다. 일각에선 예원제가 겪는 시련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삶과 연관 지어 보는 시선도 있다. 시 주석은 문혁 당시 아버지 시중쉰 부총리가 숙청되면서 함께 하방된 적이 있다. 오지에서 7년간 토굴 생활을 하다 공산당에 입당했다. 아버지 예저타이가 숙청당한 뒤 고생하다 외계인과의 소통을 주도하는 연구원이 된 예원제의 삶과 겹쳐 보인다. 드라마가 전 세계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주목된다. 원작은 배경이 시종일관 중국이지만, 드라마는 영국, 미국 등으로 확장됐다. 특히 드라마에선 남미, 아시아 등 다양한 출신의 이민자 배우가 출연했다. 박진혜 자음과모음 편집부장은 “단순히 중국을 중심으로 두지 않고 드라마에 여러 인종이 등장하도록 바꾼 점이 돋보인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드라마에서 이주자들이 피부색이나 비자 문제로 차별받는 장면을 넣어 이주 문제를 강조한 점이 두드러진다. 이를 통해 외계인이 지구로 이주할 때, 지구인들은 ‘외계의 이주자’를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했다. 드라마의 총괄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베니오프는 넷플릭스와의 인터뷰에서 “외계인이라는 위협에 맞서는 게 한 국가만의 투쟁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 세계적 투쟁임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국적의 출연진을 캐스팅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원작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를 강조한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드라마는 다섯 명의 영국 옥스퍼드대 동문을 중심으로 우정의 서사를 풀어낸다. 원작에서 중국 과학자인 왕먀오가 홀로 맡았던 탐정 역할을 드라마는 다섯 명이 함께 맡는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드라마 시즌2의 세계관과 배경이 우주로 확장된 원작소설의 흐름을 따라갈지, 옥스퍼드 동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사를 창조할지 기대된다”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버러지를 근절하라! 모든 악귀를 쓸어버려라!”1966년 중국 베이징 칭화대. 칭화대 물리학과 교수 예저타이(페리 영)가 고깔모자를 쓰고 홍위병에게 끌려 나온다. 남자 홍위병이 “물리학 수업 중에 상대성 이론을 가르치지 않았나?”고 소리친다. 예저타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상대성 이론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인데 입문 수업에서 안 다루겠나”고 받아친다. 여자 홍위병이 “아인슈타인은 미국에 가서 원자 폭탄 만드는 걸 도왔다”고 외친다. 예저타이의 부인이자 칭화대 물리학 교수인 사오린이 “반혁명적 빅뱅 이론을 가르쳤다”며 예저타이를 고발한다.흥분한 수천 명의 청중은 “예저타이를 단죄하라!”고 외친다. 홍위병들이 잇따라 허리띠를 풀어 예저타이를 향해 휘두른다. 광기에 사로잡힌 홍위병들이 몰려나와 예저타이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린다. 잠시 후 예저타이의 숨이 끊어지고, 홍위병들은 당황한 듯 그 자리를 뜬다.● 첫 장면부터 ‘문화대혁명’지난달 21일 공개된 뒤 넷플릭스 세계 시청 순위 1위(TV 부문·플릭스패트롤 기준)에 오른 드라마 ‘삼체’의 첫 장면이다. 드라마는 처음부터 중국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끔찍함을 직설적으로 묘사한다. 제자와 부인에게 버림받고 끝내 살해당하는 예저타이의 모습을 통해 홍위병이 지식인을 핍박한 역사를 직시한 것이다.특히 이 장면은 이후 예저타이의 딸 예원제(자인 쳉, 로절린드 챠오)가 외계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지구는 인간이 지배해선 안 된다는 회의론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각계각층 지식인들이 무참히 죽은 역사로 반지성적 행동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반면 SF(공상과학) 소설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하고 900만 부 이상 팔린 중국 작가 류츠신이 2013년부터 연달아 쓴 원작 장편소설 ‘삼체’(전 3권·자음과모음)에서 이 에피소드는 첫 장면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1권 초·중반부에 이르러 7페이지 남짓하게 짧게 언급될 뿐이다.왜 장면 배치가 달라진 걸까. 류츠신은 2019년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소설도 홍위병 장면으로 시작하려 했지만 출판사가 검열을 우려해 바꿨다”고 털어놓았다. 중국 출판사는 이 장면을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이야기의 뒷부분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류츠신은 NYT에 “마지못해 (편집에) 동의했지만 소설이 달라졌다고 느꼈다”고 했다.원작 소설에서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묘사는 짧지만 참혹하기 그지없다. 예저타이가 죽은 뒤 단상의 모습을 원작 소설은 “광란의 대회장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핏줄기만이 유일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마치 붉은 뱀처럼 천천히 구불구불 기어가다 단상 끝에서 한 방울씩 아래에 있는 빈 상자 위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고 세밀하게 그려낸다. 예저타이의 부인 사오린이 집에 돌아간 뒤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를 내는 장면을 묘사하는 원작 소설은 부부의 연마저 끊어버린 문화대혁명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류츠신이 ‘삼체’를 쓴 것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류츠신은 “문화대혁명 때 밤에 총소리를 들었다. 도시를 순찰하는 붉은 완장을 찬 남자들로 가득 찬 트럭을 본 것을 기억한다”고 NYT에 말했다.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으로 바뀌던 문화대혁명이 류츠신이 ‘삼체’에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삼체’는 중국의 참혹한 역사를 SF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품어낸 대작”이라며 “요즘 한국 SF에도 근현대사 등 역사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과 작가들이 필요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 “원작자 허락 받고 각색”‘삼체’ 공개 후 중국 내에선 반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드라마가 중국을 비하하는 데 사용됐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중국을 나쁘게 그린다”,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정치적 각색”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지난해 중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30부작 드라마 ‘삼체’가 더 낫다는 주장도 유행하고 있다. 이런 반발은 특히 중국의 젊은 ‘애국주의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넷플릭스가 원작의 심오한 개념을 단순하고 조잡하게 변형시켜 서양 영웅 스타일의 할리우드 스토리로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보도했다.하지만 원작자의 의도를 반영한 각색을 정치적이라고만 비난할 수 있을까. 실제로 ‘삼체’ 제작진은 원작자의 허락하에 각색했다. 또 원작 소설은 미국판에선 홍위병 장면을 맨 앞장에 배치했다. 그래서 이 장면의 각색은 미국판 번역자가 한 것이라 보는 게 합리적이다. 미국판 번역자이자 SF 소설가인 켄 리우는 2019년 NTY와의 인터뷰에서 “서사 중간에 묻혀 있던 역사적 회상을 끌어내어 소설의 서두로 바꾸자고 원작자에게 제안했다”고 회상했다.넷플릭스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감독을 섭외한 것도 주목할 점이다. 2010년 감독 데뷔한 증국상은 중국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했다. 증극상은 넷플릭스와의 인터뷰에서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며 “실제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을 인터뷰해 인간적이고 세세한 분위기까지 담으려 노력했다”고 했다.물론 류츠신이 원작에서 중국 체제를 오로지 비판한 것만은 아니다. 류츠신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각종 인터뷰에서 직답을 피하곤 한다.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주의를 강조한 원작의 메시지는 동아시아적 문화의 특징을 강조한 것처럼 느껴진다. 또 원작은 중국을 미국만큼의 과학 강국으로 묘사한다. 중국 ‘SF세계’ 편집장인 야오하이쥔이 원작 서문에서 “최근 10년간 중국 문학에서 SF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미국 SF와의 비교를 동서양 취향 차이로 논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진전을 이룬 작품이 많이 발표됐다”고 자부심을 드러낸 이유다.일각에선 예원제가 겪는 시련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인생과 엮는 시선도 나오고 있다. 시 주석은 문화대혁명 당시 아버지인 시중쉰 부총리가 숙청되면서 하방한 바 있다. 오지에서 7년 동안 토굴 생활하다 공산당에 입당했다. 아버지 예저타이가 숙청당한 뒤 고생하다 외계인과의 소통을 주도하는 연구원이 된 예원제의 삶과 시 주석의 인생이 겹쳐보인다.● 다국적 캐스팅으로 이민자 문제 강조드라마가 전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것도 주목할 점이다. 원작 소설은 중국만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드라마는 배경을 영국 미국 등으로 넓힌 것이다. 특히 남미, 아시아 등 다양한 이민자 출신 배우를 조합한 것도 특징이다. 박진혜 자음과모음 편집부장은 “단순히 중국을 중심으로 두지 않고 드라마에 여러 인종이 등장하게 바꾼 점이 돋보인다”고 했다.드라마에서 이민자들이 피부색이나 비자 문제로 차별받는 장면을 넣어 이민의 문제를 강조한 점도 두드러진다. 이를 통해 외계인이 지구로 이민을 올 때, 지구인들은 이민자(외계인)를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확장했다. 드라마의 총괄 프로듀서인 데이비드 베니오프는 넷플릭스와의 인터뷰에서 “전 세계 다양한 지역 출신의 배우들을 원했다. 외계인이라는 위협에 맞서는 한 국가만의 투쟁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 세계적인 투쟁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다국적의 다양한 출연진을 캐스팅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드라마가 원작보다 인간적 면모를 강조한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드라마는 다섯 명의 옥스퍼드대 동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며 이들의 우정을 강조한다. 원작에서 중국 과학자인 왕먀오가 홀로 맡았던 일종의 탐정 역할을 드라마는 다섯 명이 함께 맡은 것이다. 이를 통해 접근법은 신선하지만, 필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원작의 한계를 넘어선다.다만 옥스퍼드 동문의 서사가 길어져 드라마가 지루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SF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거치는 각색 과정에서 세계관에 집중할지, 인간관계에 초점 맞출지는 앞으로도 고민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드라마 시즌2가 세계관과 배경을 우주로 넓힌 원작 소설의 흐름을 따라갈지, 옥스퍼드 동문을 중심으로 새로운 서사를 창조할지 기대된다”고 했다.드라마 ‘무빙’을 본 뒤 스마트폰을 켜고 원작 웹툰을 정주행한 적이 있나요?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가상 캐스팅’을 해본 적이 있나요? ‘선넘는 콘텐츠’는 소설, 웹소설, 만화, 웹툰 등의 원작과 이를 영상화한 작품을 깊이 있게 리뷰합니다. 원작 텍스트가 이미지로 거듭나면서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재밌는 감상 포인트는 무엇인지 등을 다각도로 분석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편의점 차리는 건 어때?” 1990년대 중반 30대인 저자는 남편에게 이런 제안을 받았다. 저자는 유치원, 남편은 호텔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었지만 부부가 함께 자영업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편의점을 차리면 지긋지긋한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떼돈을 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친척의 부고를 들어도 일할 사람이 없으면 갈 수 없었다. 누가 언제 무슨 일로 화를 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한시도 마음 놓고 쉴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 차리니 약 30년간 편의점 주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과로와 손님에 시달리는 삶을 저자는 이렇게 토로한다. “편의점 점주로 사는 게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 ‘편의점 왕국’ 일본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점주가 쓴 에세이다. 온갖 잡화를 팔고 24시간 영업을 하는 일본 편의점의 속살을 유쾌하면서도 잔잔하게 전한다. 한국 거리 곳곳에도 편의점이 즐비한 만큼 한국 독자에게도 먼 이야기가 아니다. 편의점에선 손님이 왕이다. 특히 서비스를 중시하는 일본에선 고객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게 필수다. 예를 들어 저자는 계산대 앞에서 “담배”라고만 주문하는 손님의 취향을 외운다. 길고양이에게 먹이라도 주듯 동전을 던지고, 전자레인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음식을 데우라고 명령하는 ‘진상’ 손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저자가 고군분투하는 건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2021년 기준 일본의 편의점 수는 5만7544개에 이른다. 최근 청년들이 일하지 않으려고 해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2021년 기준 일본의 편의점 사장이 1년 동안 쉬는 일수는 21.3일에 불과하다. 저자 역시 휴일 없이 일한 지 1057일째다. 그럼에도 저자가 편의점 운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편의점엔 요즘 사람들이 먹고 읽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라 장사하는 재미가 있다.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단골손님의 응원에 힘이 나기도 한다. 수많은 손님이 찾아오는 편의점을 ‘천객만래(千客萬來)’라고 부르며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음, 역시 나는 편의점을 사랑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결국 최고의 바둑이란, 나의 최선을 이끌어낸 상대의 몫일지도.” 만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옛 바둑 스승의 말을 떠올린다. 중소기업 ‘온길 인터내셔널’ 사장이 된 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 스승의 조언에서 묘안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과거 장그래는 스승에게 “최고의 바둑, 대국은 뭐냐”고 물었다. 이에 스승은 “바둑은 혼자 두는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 스승은 “묘수가 가득하려면 상대의 바둑도 굉장히 좋아야 한다. 내가 결점 없이 둔다는 건 상대 역시 결점이 없거나 적었다는 반증 아니겠냐”고 했다. 스승은 우문현답을 덧붙인다. “상대도 나도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내가 이겼을 때 이보다 최선일 수 없었던 바둑이 나온다.”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 ‘미생’이 12년 만에 완결됐다. 20일 ‘미생 시즌2’(더오리진) 20, 21권이 동시 출간돼 종지부를 찍은 것. 윤태호 작가(55)는 27일 서울 마포구 슈퍼코믹스스튜디오에서 동아일보와 만나 “힘에 부치고, 팔을 다치는 등의 이유로 여러 번 쉬어서 약 5년 동안 연재를 중단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2012년 연재를 시작한 뒤 완결까지 12년이 걸린 대장정”이라고 말했다. “최고로 잘 썼냐는 질문엔 쉽게 답하기 힘들죠. 하지만 장그래처럼 최선을 다했습니다.” 2012∼2013년 카카오웹툰에 연재된 ‘미생’ 시즌1은 바둑에 인생을 걸었다 실패한 고졸 출신 장그래가 종합상사인 원 인터내셔널에 입사하면서 겪는 좌충우돌을 그렸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같이 폐부를 찌르는 명대사로 독자들의 선풍적 지지를 받았다. 2015년부터 연재된 시즌2는 장그래가 중소기업 온길 인터내셔널에서 일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의 기업문화를 생생히 살려냈다. 2014년 방영된 동명의 tvN 드라마에 힘입어 시즌 1·2 단행본 판매량은 약 300만 부에 달한다. 그는 “시즌2에선 장그래의 입사 동기인 ‘장백기’처럼 4년제 대학을 나온 평범한 직장인의 삶도 충실히 다루고 싶었다”며 “회사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다 갖춘 직장인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동력으로 살아갈까 고민했다”고 했다. 12년 전 연재를 시작한 만큼 시대상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그래는 시즌1에서 무턱대고 야근하며 열심히 일한다면, 시즌2에선 동료와 선후배를 챙기며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리더로 묘사된다. 그는 “요즘 시선으로는 장그래는 너무 열심히 일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빌런’(악당)으로 비칠 수 있다”며 “주 52시간 근무 시대에 맞춰 작품을 낡아 보이지 않게 했다”고 설명했다. “장그래가 성장한 만큼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도 담으려고 했어요. 상급자인 ‘오상식’, ‘김동식’의 부하 직원이 아니라 독립적 주체라는 걸 보여주려고요. 그래서 결국 온길 인터내셔널의 사장이 장그래에게 사장직을 물려준 거죠.” 시즌2는 이창호 9단과 마샤오춘 9단의 제3회 삼성화재배 결승 5번기 제5국을 모티브로 한다. 이 경기 216수에서 이창호는 드디어 승리를 확신하는 듯 ‘계가’(計家·대국이 끝난 후 이기고 진 것을 가리기 위하여 집 수를 헤아리는 일)를 향해 달려간다. 같은 216수를 내세운 미생 마지막 화에서 장그래는 후배 ‘조아영’과의 결혼을 결심한다. 승기를 잡은 이창호, 결혼하는 장그래. 미생을 완결한 그는 완생(完生)에 이른 걸까. 윤 작가는 두 손을 합장하며 이렇게 답했다. “그건 모르죠. 다만 제겐 미생을 읽고 댓글을 달아준 독자들이 최고의 바둑 상대였습니다. 묘수로 가득한 삶을 살던 제게서 최선을 이끌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가 쓴 디지털 세계의 글이 영원히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글이 모두 사라질 거란 두려움이 찾아왔죠.” 이수지 작가(48)는 26일 에세이 ‘만질 수 있는 생각’(비룡소)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블로그에 오랫동안 썼던 글이 얼마 전 블로그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종이책을 펴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림책은 어린이 손에 쥐어지는 물리적으로 단단한 물건”이라며 “책을 묶으며 그동안 내가 해 온 작업이 그렇게 떠다니는 글을 모아 물리적 실체로 만드는 작업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2022년 한국인 최초로 ‘어린이책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그림작가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국내 그림책 작가 중 처음으로 제36회 인촌상 언론·문화 부문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그의 대표작은 ‘파도야 놀자’(2008년), ‘거울속으로’(2009년), ‘그림자놀이’(2010년)다. 제본선을 활용해 ‘경계 3부작’으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바다와 모래사장, 현실과 거울 등의 경계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책의 물성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신간 역시 책의 물성을 독특하게 살려냈다. 큰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을 넣은 표지는 그가 작품에서 자주 쓰는 ‘책 안의 책’ 특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초판은 실로 꿰맨 책등이 보이는 ‘누드 제본’으로 제작됐다. 그는 “그림책 작가는 책을 쓸 때 판형이 어떻고, 무게가 얼마고, 종이를 뭘 쓰는지를 생각하는 예술가”라며 “그림책은 손에 든 순간부터 책 읽기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신간에는 그가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 캠버웰예술대에서 북아트 석사 학위를 받을 당시의 일이 담겼다. 초창기 작업 노트나 외국 편집자와 일한 경험처럼 작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엄마로서 아이들과 보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도 가득하다. 그는 “그림책이 기본적으로 어린이 책이라고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그림책 세계에 빠져드는 독자가 많다”고 말했다. 신간에서 그는 ‘말 없는 그림책이 내게 말없이 말 걸어오는 내밀한 세계. 이것은 완전히 다른 언어이며, 이것이 바로 나의 언어구나’라고 썼다. 글을 최소화하고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 세계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고백한 것이다. 이날 그는 “오독(誤讀)할 수 있는 그림책은 얼마나 멋지냐”며 “아이들이 그림책 안에서라도 정답만 얘기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다음 달 8일 발표되는 안데르센상 글 부문 수상 후보에 이금이 작가(62)가 포함됐다. 한국 그림책이 발전하기 위해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림책을 읽어주는 사람의 태도요. 어른에겐 이 이야기가 정말 멋있어, 너랑 같이 이걸 느끼는 게 너무 좋다는 태도가 필요해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제47회 이상문학상 대상에 소설가 조경란(55·사진)의 단편소설 ‘일러두기’가 25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대도시 변두리 동네에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복사집을 운영하는 ‘재서’와 길 건너에서 반찬가게를 하는 ‘미용’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며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내용이다. 각박한 현실의 이면에서 여러 인물들의 내면의식이 변화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다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수작에는 김기태의 ‘팍스 아토미카’, 박민정의 ‘전교생의 사랑’, 박솔뫼의 ‘투 오브 어스’, 성혜령의 ‘간병인’, 최미래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5편이 뽑혔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