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

박선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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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선희 기자입니다.

teller@donga.com

취재분야

2026-01-07~2026-02-06
문학/출판58%
음악33%
칼럼3%
인사일반3%
사고3%
  • [책의 향기]편안함을 음미하는 시간

    “마음속에 있는 샘의 돌/그 돌 속 하얀 점이/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동안/나는 늪가에서 초승달이 되었다가 보름달이 되었다가/그믐달로 바뀌어간다.”(‘달나라의 돌’) 한국 서정시 전통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온 대표적 서정시인 박형준의 일곱 번째 시집. 등단 30년을 맞은 중견시인으로서의 깊이와 서정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세계를 펼쳐 보인다. 누구에게라도 잔잔하면서도 편안한 음미의 시간을 선사할 만한 감각적인 시편들이 수록됐다. 햇살, 강가, 천변, 꽃, 산책로, 비, 나무, 오솔길, 아침 같은 짙푸르면서도 차분한 어휘들과 자연 속의 친근한 사물들은 시인의 시 속에서 새로운 의미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봄날에는 발밑을 보며 걷습니다/발밑에는 상처들이 많습니다//풀꽃이 있습니다/천명의 아이들이/그을음을/닦고 있습니다 … 풀빛 강에 마중나온/천명의 어머니들도/풀빛 그을음을 닦고 있습니다/그래서 발밑에서만/싹이 나옵니다.”(‘발밑을 보며 걷기) 고향이나 어머니, 유년의 기억을 회상하는 시편들도 다수 수록됐다. 한 편의 전원적 풍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개미들이 금방이라도 부화할 것 같은/까맣게 탄 등에/달빛이 흩어지고 있었다/우물가에서 펌프질하며 어머니의 등에 기어 다니는/반짝이는 개미들을/한 마리씩 한 마리씩 물로 씻어내던 한여름 밤/어머니는 달빛이 참 좋구나/막내 손이 약손이구나 하며/시원하게, 수줍게 웃음을 터뜨리셨다.”(‘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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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 사본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산 사람은 없다

    요즘 ‘하나도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사는 사람은 없다’는 그 가방.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꾸안꾸’(꾸민 듯 꾸미지 않은 패션)가 대세가 되면서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재의 니트 주름 가방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날씨가 더워지면 라피아나 밀짚을 엮어 휴양지 느낌이 물씬 나는 가방이나 폴리염화비닐(PVC) 소재로 시원한 느낌을 주는 가방들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최근 가볍고 무심하게 척 걸치면서도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니트 주름 가방이 선봉에 섰다. 한번 사면 ‘깔별’(색깔별) 소장 욕구를 부른다는 것이 이 가방 마니아들의 설명이다. ‘아코디언 백’ ‘복조리 백’ ‘주름 가방’ 등의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는 니트 가방은 국내 브랜드인 조셉앤스테이시, 플리츠마마나 해외 브랜드인 사만사타바사, 이세이미야케 미(디자이너 미야케 잇세이가 젊은층을 겨냥해 만든 세컨드 브랜드) 등이 주력하고 있는 제품이다. 브랜드별로 주름의 간격이나 소재의 탄성, 전체 실루엣 등의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 플리츠마마에서 생산하는 니트 주름 가방은 폐페트병으로 만든 리젠사 섬유를 사용해 친환경적인 것이 특징. 사만사타바사는 올해 처음으로 ‘마이쉘’이라는 명칭으로 니트 가방 라인을 새롭게 선보이며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어떤 브랜드이건 폴리에스테르 같은 합성섬유로 짠 탄탄한 니트에 부채를 접은 것 같은 플리츠 패턴이 뚜렷하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니트 소재는 가을 겨울에 어울린다는 통념이 있지만 사실 느슨하면서도 탄력 있게 짜인 여름 니트는 몸에 붙지 않고 바람도 잘 통해 원피스나 셔츠 등 여름 패션에서 데일리로 활용되기 좋다. 요즘 인기인 니트 주름 가방의 소재도 가벼워지는 옷차림에 맞춰 산뜻하게 들기 좋아 출퇴근용뿐 아니라 비치백이나 산행용 등으로 광범위하게 애용되고 있다. 부드러운 광택감과 촉감을 가진 데다 어떤 스타일의 옷에나 잘 어울리는 것이 니트의 큰 장점. 특히 은은한 파스텔 컬러에서부터 톡톡 튀는 원색에 이르기까지 컬러풀한 색감이 도드라져 선택 장애와 반복 구매를 불러일으킨다는 호소가 나온다. 온라인 패션·뷰티 커뮤니티에선 ‘어떤 색깔 살까요’ ‘벌써 5개째 샀다’는 글들이 보인다. 최근 1, 2년 사이 입소문을 타던 주름 니트 가방은 손나은 김고은 이시영 등의 여자 연예인들이 착용한 모습이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공유되면서 관심이 커졌다. 특히 조셉앤스테이시의 니트 주름 가방은 연애 밀당만큼이나 스타일리시한 코디가 돋보인 채널A ‘하트 시그널’의 출연자들이 들고 나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여기에 ‘가성비 갑’ 제품으로 한혜연 같은 패션 유튜버나 스타일리스트가 언급하며 점점 확산되고 있다. 가격대가 어느 브랜드 것이든 4만∼10만 원 선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부담도 크지 않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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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사면 깔별 소장욕구 불러”…가방마니아 사로잡은 ‘니트 주름 가방’

    요즘 ‘하나도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하나만 사는 사람은 없다’는 그 가방.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서 ‘꾸안꾸’(꾸민 듯 꾸미지 않은 패션)가 대세가 되면서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재의 니트 주름 가방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날씨가 더워지면 라피아나 밀짚을 엮어서 휴양지 느낌을 물씬 내는 가방이나 PVC(폴리염화비닐) 소재로 시원한 느낌을 주는 가방들이 인기를 끈다. 하지만 최근 가볍고 무심하게 척 걸치면서도 스타일을 살릴 수 있는 주기 좋은 니트 주름 가방이 선봉에 섰다. 한번 사면 ‘깔별’(색깔별) 소장욕구를 부른다는 것이 이 가방 마니아들의 설명이다. ‘아코디언 백’ ‘복조리 백’ ‘주름 가방’ 등의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는 니트 가방은 국내 브랜드인 조셉앤시테이시, 플리츠마마나 해외 브랜드인 사만사 타바사, 이세이 미야케 미(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가 젊은 층을 겨냥해 만든 세컨드 브랜드) 등이 주력하고 있는 제품이다. 브랜드 별로 주름의 간격이나 소재의 탄성, 전체 실루엣 등의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 플리츠마마에서 생산하는 니트 주름 가방은 폐 페트병으로 만든 리젠사 섬유를 사용해 친환경적인 것이 특징. 사만사 타바사는 올해 처음으로 ‘마이쉘’이라는 명칭으로 니트 가방 라인을 새롭게 선보이며 마케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어떤 브랜드이건 폴리에스테르 같은 합성 섬유로 짠 탄탄한 니트에 부채를 접은 것 같은 플리츠 패턴이 뚜렷하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니트 소재는 가을 겨울에 어울린다는 통념이 있지만, 사실 느슨하면서도 탄력 있게 짜인 여름 니트는 몸에 붙지 않고 바람도 잘 통해서 원피스나 셔츠 등 여름 패션에서 데일리로 활용되기 좋다. 요즘 인기인 니트 주름 가방의 소재도 가벼워지는 옷차림에 맞춰 산뜻하게 들기 좋아서 출퇴근용 뿐 아니라 비치백이나 산행용 등으로 광범위하게 애용 받고 있다. 부드러운 광택감과 촉감을 가진데다 어떤 스타일의 옷에나 잘 어울린다는 점은 니트의 큰 장점. 특히 은은한 파스텔컬러에서부터 톡톡 튀는 원색에 이르기까지 컬러풀한 색감이 도드라져서 선택장애와 반복구매를 불러일으킨다는 호소가 나온다. 온라인 패션·뷰티 커뮤니티에선 ‘어떤 색깔 살까요’ ‘벌써 5개째 샀다’는 글들이 다양하다. 최근 1~2년 사이 입소문을 타던 주름 니트 가방은 손나은, 김고은, 이시영 등의 여자 연예인들이 착용한 모습이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공유되면서 관심이 커졌다. 특히 조셉앤스테이시의 니트 주름 가방은 연애 밀당만큼이나 스타일리시한 코디가 돋보인 채널A ‘하트 시그널’의 출연자들이 들고 나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여기에 ‘가성비 갑’ 제품으로 한혜연 같은 패션 유튜버나 스타일리스트가 언급하며 점점 확산되고 있다. 가격대가 어느 브랜드 것이든 4만~10만 원 선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부담도 크지 않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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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이 소설보다 훨씬 스릴러같다, 해결이 안되니까”

    결혼 후 시가의 첫 제사에 참석하게 된 신혼부부. 아내는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미묘하게 불편한 분위기를 직감한다. 이 가정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관계의 불균형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무신경하고 태연한 걸 넘어 완전히 무지하다. 그는 표면적인 관계 뒤편에 숨은 편애와 차별을 알 필요도, 이해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소설가 강화길(34·사진)의 ‘음복’은 가족 속 가부장적 권력관계를 긴장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한 가정의 평범한 제삿날 풍경을 소재로 남성들이 점유한 ‘무지의 권력’이 노출되기까지를 서스펜스 넘치게 그려낸다. 등단 8년 차이자 한겨레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받은 그의 두 번째 소설집 ‘화이트호스’(문학동네)에는 이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꼬리를 무는’ 일상의 스릴러가 가득하다.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작가는 “스릴러 소설보다 일상이 더 불안하다고 느낀다. 결말이나 해결 없이 일상은 계속 이어지는데, 그 불안을 안고 문 밖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살육, 혈흔이 넘치는 장면에서가 아니라 가족, 사람들의 관계 속 불안에 대한 감각이 발달한 것 같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애거사 크리스티, 코넌 도일을 좋아했고 미드(미국 드라마)도 ‘크리미널 마인드’ ‘콜드 케이스’ 같은 수사물만 집중적으로 봤단다. “사건이 해결되는 데서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스릴러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 문법을 빌려오긴 하지만 일상은 사건이 깨끗이 마무리되는 장르소설과는 다르다. 평범한 사람들, 상황으로 가득한 그의 소설은 왠지 본격 스릴러나 호러보다 더 서늘하다. 표제작 ‘화이트호스’는 가장 애정을 가진 작품이다. 호러 색채가 물씬한 이 단편은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산속 깊은, 기괴한 산장에 머물면서 겪는 일을 그려낸다. 끔찍한 죽음, 실종 등이 빈번했던 이 산장은 작가들의 창작숙소로 활용되는데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실종된 작가의 유품과 툭하면 울려 퍼지는 의문의 초인종 소리 가운데서 화이트호스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소설가의 삶에 망령처럼 떠도는 화이트호스는 무엇일까. 영감이나 멋진 이야기, 작가적 성공 혹은 평단의 갈채나 세간의 말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화이트호스는 필요 없다고 외치는 주인공을 만나고 싶었다”며 “장편문학상을 수상한 뒤 여러 비평에 직면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여성 서사를 주요하게 다루는 작가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는 “작가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젠더 부조리나 계급, 여러 사회문제와 맞닿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여성 서사는 끊임없이 있었는데 유독 요즘 화제인 건 오히려 지금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걸 반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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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부터 北美 판문점 회동까지…‘끝나지 않은 전쟁 6·25’ 자료집 출간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국내에 공개되지 않은 당시 사진에 해설을 덧붙인 ‘끝나지 않은 전쟁 6·25’(눈빛)가 출간됐다.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의 눈빛아카이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자료를 중심으로 영국 중국 러시아 북한 등에서 수집해온 사진 약 300장을 엮었다. 전후 사진은 크리스 마커, 구와바라 시세이, 전대식, 한치규, 김봉규 등 국내외 사진가 작품을 썼다. 광복 직후, 개전, 전투,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고지전, 전쟁포로 등 6·25 전사(戰史)를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정전협정 수립 이후부터 지난해 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에 이르기까지 전후사도 간략하게 훑었다. 전쟁 기간 남북 양민의 피란과 학살같이 전화(戰禍)에 고통받은 인간의 모습에도 초점을 맞췄다. 눈빛 측은 “군인보다 민간인 사상자가 더 많았던 전쟁의 아픔을 기록한 것 등 보지 못했던 사진을 다양하게 수록했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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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순진하면서도 음흉한 사랑고백

    “순진하면서도 음흉하고, 귀엽지만 어딘가 조금 무섭고, 애달프지만 위로받게 되는 사랑”이라는 황인찬 시인의 추천사가 이 엉뚱하고 독특한 산문집의 매력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첫 시집 ‘제주에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로 문단 안팎의 이례적인 주목을 받은 이원하 시인이 연모의 마음에서 출발했던 자신의 시작(詩作) 뒷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냈다. 산문집은 시인이 좋아하는 한 대상(남성)과의 다양한 일화들과 그것이 한편의 시로 빚어지기까지 감정의 파장을 섬세히 그려낸다. 절절한 연심(戀心)이 산문으로 풀어진 경우는 많았지만, 발화자인 여성이 이토록 앙큼하게 들이대면서도 이렇다 할 결실(?)이 없어 상심하는 상황을 능청맞게 쓴 글은 거의 없었다. 이 산문집의 세계가 여러모로 흥미로운 이유다. “당신에게 놀아나는 내 인생이 나는 좋아요. 당신으로 탕진하는 내 삶이 나는 좋아요”라고 태연하고 명랑하게 읊조리다가 “그가 질질 흘리니까 내가 그의 집 우렁각시가 된 거예요. 그가 터뜨린 자동차 바퀴를 몰래 해결하는 거예요. 그에게 따라붙은 스토커를 조용히 해결하는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평생 당신은 나에게 의존하면 돼요”라고 구슬린다. 곰 인형을 껴안고 잠을 청하다가 “곰 인형이 좀 이렇긴 해도, 나에게 모든 걸 맡긴 곰 인형과는 벌써 갈 데까지 갔어요. 그러니 당신도 내게 모든 걸 맡기세요”라고 도발하기도 한다. 그의 시처럼 산문 역시 문장과 문장이 빚어내는 긴장과 운율감이 기발하고 유머러스하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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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머리숱 줄고 주름이 늘어도 괜찮아요

    잔뜩 꾸미고서 ‘나 오늘 꽤 괜찮은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진을 찍어준다. 찍은 사진을 보자마자 “와, 네가 사진 찍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앞에 뛰어 들어온 저 늙은 여자는 누구…”라고 말하다 당황하고 만다. 세상에! 삭제, 삭제, 삭제.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삭제한다. 거울과 사진 속에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 중년의 시작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중년기란 삶의 큰 전환이다. 머리숱이 줄고,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다. 다들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편안히 나이 드는 것 같지만 40대 이후 중년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사실 사춘기 시절의 방황 못지않은 혼란, 의문, 당혹, 낯섦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가 마흔 다섯에 접어들면서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신체적, 환경적 변화와 함께 젊음이 추앙받는 세태, 그를 이용한 산업 등도 위트 넘치는 입담으로 꼬집는다. 자신이 중년이라는 사실을 처음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줄곧 ‘우리 엄마가 중년이지, 난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묘사할 땐 무심코 ‘어려. 우리 나이 정도야’라고 말한다. 객관적으로 ‘어리지 않은 나이’이자 중년이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해서다. 노화를 의식하는 단계에 이르면 좀 더 어려 보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안티에이징 제품에 쓴 돈을 다 합치면 새로 나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레인지로버를 한 대 뽑고도 남겠는데 별 효과가 없다. 정수리는 쥐가 파먹어서 둥지를 튼 것처럼 빈다. 결국 부분 가발을 착용하는데 세면대에 걸린 가발을 보고 남편이 기겁 하며 소리친다. “죽은 사막쥐인 줄 알았잖아!” 이뿐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가 선택의 기준이었던 구두는 무조건 처음 신었을 때부터 편한 것으로 바뀌고 몸의 모든 것이, 머리부터 무릎 발까지 무너져 내리는 데다 아이들은 ‘엄마 입에서 똥냄새 난다’고 말할 정도로 자라 있다. 그렇다면 중년은,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일케이크에 50개의 초가 꽂혀 있을 때쯤에는 삶이 우리에게 아무리 뜨끈하고 고약하고 구리고 구린 원숭이똥을 던지더라도 대부분 이렇게 받아칠 수 있다. “그래? 하지만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뭐.” 우아하게 나이 드는 방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나이 든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삶이란 부서지기 쉬운 선물에 감사할 줄 알고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며, 과거의 실수를 잊고 넘기는 법도 배우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을 여유가 생긴다. 스스로를 꼴사납고 우악스럽게 묘사하는 데 개의치 않는 저자의 태도도 어쩌면 그런 관조와 여유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수다스럽고, 지치지 않고 웃기는 글이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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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리는 쥐 파먹고 몸은 무너져도…중년의 당신, 불행한가?

    잔뜩 꾸미고서 ‘나 오늘 꽤 괜찮은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진을 찍어준다. 찍은 사진을 보자마자 “와, 네가 사진 찍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앞에 뛰어 들어온 저 늙은 여자는 누구…”라고 말하다 당황하고 만다. 세상에! 삭제, 삭제, 삭제.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삭제한다. 거울과 사진 속에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 중년의 시작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지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중년기란 삶의 큰 전환이다. 머리숱이 줄고, 몸은 예전 같지 않은데 아이들이 훌쩍 자라 있다. 다들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편안히 나이 드는 것 같지만 40대 이후 중년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사실 사춘기 시절의 방황 못지않은 혼란, 의문, 당혹, 낯섦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가 마흔 다섯에 접어들면서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신체적, 환경적 변화와 함께 젊음이 추앙받는 세태, 그를 이용한 산업 등도 위트 넘치는 입담으로 꼬집는다. 자신이 중년이라는 사실을 처음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줄곧 ‘우리 엄마가 중년이지, 난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묘사할 땐 무심코 ‘어려. 우리 나이 정도야’라고 말한다. 객관적으로 ‘어리지 않은 나이’이자 중년이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해서다. 노화를 의식하는 단계에 이르면 좀 더 어려 보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기 시작한다. 안티에이징 제품에 쓴 돈을 다 합치면 새로 나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레인지로버를 한 대 뽑고도 남겠는데 별 효과가 없다. 정수리는 쥐가 파먹어서 둥지를 튼 것처럼 빈다. 결국 부분 가발을 착용하는데 세면대에 걸린 가발을 보고 남편이 기겁 하며 소리친다. “죽은 사막쥐인 줄 알았잖아!” 이뿐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가 선택의 기준이었던 구두는 무조건 처음 신었을 때부터 편한 것으로 바뀌고 몸의 모든 것이, 머리부터 무릎 발까지 무너져 내리는 데다 아이들은 ‘엄마 입에서 똥냄새 난다’고 말할 정도로 자라 있다. 그렇다면 중년은, 불행한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일케이크에 50개의 초가 꽂혀 있을 때쯤에는 삶이 우리에게 아무리 뜨끈하고 고약하고 구리고 구린 원숭이똥을 던지더라도 대부분 이렇게 받아칠 수 있다. ”그래? 하지만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뭐.“ 우아하게 나이 드는 방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나이 든다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삶이란 부서지기 쉬운 선물에 감사할 줄 알고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며, 과거의 실수를 잊고 넘기는 법도 배우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을 여유가 생긴다. 스스로를 꼴사납고 우악스럽게 묘사하는 데 개의치 않는 저자의 태도도 어쩌면 그런 관조와 여유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정신없이 수다스럽고, 지치지 않고 웃기는 글이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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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환자 30대 워킹맘도, 플립 턴 하는 70대 할머니도 여기선 모두 ‘유망주’

    동네 수영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무서운 속도로 오픈턴을 하며 자유형 대시를 끝도 없이 해나가는 고수도 있지만 레일 끝에 붙어서 수다 삼매경에 빠진 아주머니들도 있고, 자기도 잘 못하면서 다른 사람 자세 계속 지적하고 있는 아저씨, 뭍에 나온 생선처럼 퍼덕거리는 아가씨, 수영장에 운동하러 온 건지 워터파크에 연애하러 온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연인들도 있다. 13년차 신문기자이자 워킹맘으로 매일을 전력 질주하듯이 살아온 저자는 디스크에 이어 갑상선암이란 ‘불행의 콤보’를 달고서 이 북적거리는 동네 수영장에 쭈뼛거리며 들어선다. 다치지 않는 안전한 운동이라서 선택한 수영은, 그런데 뜻밖에도 완벽하게 질주하는 것만이 최선의 삶이라는 신념의 중력을 무력화시키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수영을 배운 첫날 선생님이 초급반 수강생들에게 말한다. “우리 오늘은 아무 것도 안 할 거구요. 그냥 다 같이 물에 둥둥 떠볼 거예요.” 물에 가만히 떠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낯설고 평온한 시간을 마주하고야 저자는 생각한다. “물이라는 거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닥도 저렇게 잘 보이고, 원하면 언제든지 발 딛고 설 수 있어 … 힘을 다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언제든 둥둥 뜰 수 있어. 보노보노처럼!” 사회에서는 ‘초급이라 못해요’라는 변명이 더는 통하지 않는 ‘짬밥’이 됐지만 수영장에서는 다르다. 평영 킥을 하는데 자꾸 뒤로 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만세 접영’을 하면서 심각한 ‘저병’(접영을 못하는 증상) 환자임을 드러내도 용서가 된다. 수영장이란 이 이상한 우주에선 치열한 삶의 대가로 이런 저런 병을 안고 온 30대 워킹맘도, 저 연세에 어떻게 플립 턴을 하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70대 할머니도 모두 ‘유망주’이기 때문이다. 느려도 괜찮고, 누군가를 추월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 속도로 물속에 곧게 뻗은 푸른 직선을 따라’ 그저 묵묵히 물살을 가르면 된다. “바야흐로 속성과 선행의 시대. 나는 오늘도 그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유유히 거슬러 ‘거북이 수영클럽’으로 향한다. 그 안에서 매일 분명 수영이 아닌 이상한 훈련을 반복하는 중이다.”(‘거북이 수영클럽’) ‘뭍’에서 완벽주의자를 지향하며 살아온 작가는 ‘물’에서 가장 느린, 하지만 행복한 거북이가 됐다. 수영을 배우는 초급자가 겪게 되는 유머러스한 에피소드와 주변 어디에나 있는 동네 수영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풍경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 삶과 시대를 읽는 경쾌한 은유가 됐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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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책 표지 봤니?

    최근 들어 독특한 효과와 제본, 질감의 표지를 앞세운 책들이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다.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디자인과 외형에서부터 독자의 시선을 끄는 것이 중요해지면서다. 출판사 열린책들은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작 소설 ‘기억’ 초판을 렌티큘러(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게 한 굴절 소재) 표지로 제작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인물의 모습이 달라지는 표지는 몽환적인 느낌을 주면서 시선을 잡는다. 수많은 전생을 여행하며 자신을 탐색한다는 책의 줄거리를 표지에서부터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홍유진 열린책들 기획이사는 “제작 단가가 10배 가까이 높긴 하지만 예약 판매 첫날 지난해 같은 작가의 신작보다 판매율이 50%나 높았고 초판 6만 부가 거의 소진됐다”며 “독자의 반응과 만족도, 화제성 등에서 투자할 만한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한다”고 말했다. ‘누드사철(絲綴)’ 기법도 요즘 들어 부쩍 많아졌다. 실로 종이를 묶어 제본하는 유선제본은 보통 양장으로 다시 한 번 덮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제본한 책등이 다 보이도록 노출시킨 형태다. 풀로 제본한 무선제본과 달리 어느 페이지에서도 180도로 잘 펼쳐지고 제작 단가도 일반 책과 비슷한데 눈에 띄는 효과까지 덤으로 누린다. ‘취미는 판화’ ‘귀잡고 병잡고’ 등 여러 책을 누드사철로 펴낸 이연희 그림씨 대표는 “넘겨보기 쉬운 데다 제본한 실끈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옛날 책 같은 독특한 느낌도 들어서인지 요즘 누드사철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큰 인기를 끈 ‘펭수 컬러링북’도 누드사철 형태로 만들어졌다. 표지로 책을 모두 덮지 않고 잘라낸 형태도 있고 제목이 사라진 책도 있다. 이미지가 강조된 실험적 문장을 구사하는 이상우 작가의 신작 소설집은 표지에 제목도, 작가 정보도 없다. 책 안에도 목차나 제목이 없는 등 책 구성이 실험적이다. 이 책을 낸 문학과지성사 측은 “내용만이 아니라 책의 실물 디자인에도 신경을 써서 기존 소설책의 전형적 디자인 틀을 벗어나 배치했다”고 말했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곱세크’를 출간한 꿈꾼문고는 표지를 책의 3분의 2 정도에서 잘린 형태로 만들었다. 표지 뒤 색지에 작가 소개를 넣고 본문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한 독특한 형태가 눈길을 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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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김훈 “야만적 폭력의 뿌리 담아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고대사를 보면 삼국시대 모든 나라가 거의 매달, 거의 매일 싸웠습니다. ‘삼국유사’에 ‘피가 강물처럼 흘러 방패가 떠내려갔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 세상의 기초를 이뤘던 그 적대감, 야만적 폭력의 뿌리에 대한 공포감이 내게 있었고 그것이 부딪히는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신작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사진)을 출간한 소설가 김훈 씨(72)는 1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태아와 같은 세상의 발생 초기를 그리려다 보니 인류사에는 없었던 새로운 시공간을 설정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소설은 인간과 자연이 뒤엉켜 있는 미지의 시공간 속 두 나라 초와 단의 전쟁 이야기가 중심이다. 유목적인 초, 농경적인 단의 충돌 속에서 문명이 태어나고 수많은 생명이 짓밟히고 저항하며 죽고 태어난다. 특히 말(馬)은 인간의 야만과 문명을 감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10년 전 미국의 한 인디언 마을에서 어둠 속의 야생말들을 봤는데 수백 마리이면서도 혼자였다”며 “저 말에 관해 쓰게 되리라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말의 속성, 인간에게 사육당한 역사, 신화나 설화의 말 등을 집중적으로 찾아봤다. 그는 “말들이 인간의 세계에서 저항하고 도망치는 것을 그려내고 싶었던 건 내 속에 유목의 피가 있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적이면서도 힘 있는 단문으로 유명한 그는 이번에 더 간결하고 신화적인 언어를 썼다. “화가가 물감을 쓰고 음악가가 음을 쓰듯이 언어를 쓰면서 지금껏 없던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시공을 열어보려는 욕망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이 역사의 시공간을 완전히 벗어나고 언어가 역사적 경험을 넘어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원고지 앞에 있는 건 언제나 고통이고 후반부를 쓸 무렵 건강이 나빠져 힘들었다”는 그는 우리 시대의 야만으로 주저 없이 약육강식을 꼽았다. “모든 혁명이 결국 약육강식을 견딜 수 없어 벌어졌는데 그 운명을 돌파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코로나19 사태 등이 약육강식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킬까 봐 우려도 했다. 그는 “이런 문제는 반드시 최하층부를 강타한다”며 “마스크 쓴 채 지하철로 몰리고 땀과 비가 섞여 다들 젖을 텐데 코로나보다 당장 올여름이 더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선의, 자비심에 호소해 사회의 야만을 해결하려는 것은 유약한 방식이라며 “제도와 구조를 바로 만드는 수밖엔 없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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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곡의 시대 꿋꿋이 맞선 여성 예술가들 삶에 경의”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살던 가족이 모두 하와이로 모인다. 단 한 번뿐인 특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고인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을 갖고 자유롭게 하와이를 둘러본 뒤 가장 의미 있는 순간들을 수집해 오는 제사다. 정세랑 작가(36)가 4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사진)는 시대를 앞서 산 여성 예술가 심시선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경쾌하고 따뜻한 터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화가이자 작가인 심시선은 6·25전쟁 때 가족을 잃고 새 삶을 찾아 하와이, 유럽 등에 체류한 여성 지식인이다. 두 번의 결혼과 파격적 언행 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유명 인사였다.》 지난달 말 예약 판매를 시작하면서부터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반응이 빠르고 좋다. 3대가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간 예술가의 삶뿐만 아니라 현대사 한 세기가 모두 드러나는데 아픔과 굴곡의 역사도 작가의 손끝에서 뭉클하게 버무려진다. SF로 등단한 뒤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는 “책이 여전히 근사한 매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느리지만 정교한 대화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출간 소감을 밝혔다. 작가와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가족들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강연록, 잡지 인터뷰, 회고록 등을 통해 20세기를 치열하게 살아온 여성 예술가 심시선의 삶이 드러난다. 지난 세기 여성 예술가를 소설에서 다루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떤 작가의 업적이 잘 보존됐거나, 유난히 지워졌는지를 살펴보면 전체 지형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20세기 여성 작가들은 특히나 평가절하를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특정 집단의 발밑을 단단하게 만들고, 다른 집단의 발밑은 모래로 허무는 것을 경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만나본 적 없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지키는 쪽이 되고 싶어서 그런 바람을 소설로 그렸다.” 정 씨는 ‘작가의 말’에 “김명순이나 나혜석에 나의 계보가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며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들이 죽지 않고 일가를 이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고 썼다. 그는 “누가 될 것 같아 특정인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지만 당시 여성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으며 문체, 어휘를 익혔다”며 “전쟁과 분단, 가난과 독재가 큰 압력이었을 텐데도 ‘참 꼿꼿하고 멋진 심지를 가진 분들이었구나’ 자주 감탄했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추도식 배경을 하와이로 정한 이유는…. “북미와 중남미에 가족들이 이민 가거나 파견을 간 적이 있어서 ‘가운데인 하와이에서 만나자’는 농담을 하곤 했다. 개인적 농담에서 시작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하와이 이민사에 관련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고 거칠었던 지난 세기를 용감하게 개척한 분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2016년 하와이 답사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즐거운 기억 중 하나라 여행이 어려워진 시기란 것이 슬프다. 전 세계적 위기를 잘 이겨내는 데 소설이 사람들 곁에 있어줬으면 한다.” ―작품을 쓰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동시에 읽기 괴로운 책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괴로워질 수밖에 없는데, 2020년은 현실이 이미 혹독하니까. 재미와 의미를 오가면서 균형을 잡는 게 가장 어려웠다.” ―앞으로 꼭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한동안은 오락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경쾌한 추리소설을 준비 중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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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생 코드’ 출판가 바람몰이

    “그녀는 나프나프와 에고이스트를 지나, 나는 MLB와 후부를 지나, 우리 모두 클럽모나코쯤으로 왔구나 생각했다.” 최근 출간된 소설가 김봉곤의 단편소설 ‘시절과 기분’ 속 이 문장은 1980년대생에게는 더없는 공감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2000년대가 시작되며 대학에는 ‘산소학번’(2002년 입학)이니 ‘오존학번’(2003년 입학)이니 하는 별칭이 생겼고 대학가는 이 소설 주인공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빙수가게가 점령했다. 하지만 한때 즐겨 입던 소녀 감성 혹은 힙합 느낌의 브랜드가 추억 저편으로 밀려난 것처럼, 이들도 이제는 모던한 해외 브랜드 ‘클럽모나코’로 대변되는 말쑥한 30, 40대가 됐다. 최근 출판계에서는 이처럼 1980년대생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주목받고 있다. 문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대부분 1980년대생이 된 만큼 인기 있는 책에서 ‘80년대생 코드’가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출판, 문학 등 문화계의 주요한 소비층으로 부상한 1980년대생 역시 당시의 추억, 향수를 적극적으로 환기시키는 ‘우리 이야기’에 열렬한 반응을 보인다. 일본문학 번역가 이지수 씨가 올 초 펴낸 에세이집 ‘아무튼, 하루키’도 80년대생이 공감할 만한 코드를 ‘하루키 덕질사(史)’ 속에 위트 있게 녹여내 인기다. 학창시절 처음 가입한 ‘H.O.T 팬클럽’이나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반드시 자기 전에 접속했던 싸이월드, 일본 교환학생 시절의 기억 등 비슷한 세대의 추억을 불러내는 공통분모가 다양하다. 작가의 첫 산문집인 이 책은 곧 3쇄를 찍는다. ‘일의 기쁨과 슬픔’ 등으로 지금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소설가 장류진 씨도 80년대생, 2000년대 초반 학번이 사회에 나와 겪은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현실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최근작 ‘펀펀 페스티벌’은 대기업 합숙 면접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원자들의 치열한 견제와 무리수, 치사함 등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80년대생 여성들의 어린 시절 로망이던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활동이나, “요즘 신입생들은 1학년 때부터 중도(중앙도서관) 간다”는 비아냥거림에 아랑곳 않고 스펙에 도움 안 되는 동아리를 포기한 경험 등 추억 환기 장치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이 작품은 문학과지성사의 올해 문지문학상 후보작이자 ‘이 계절의 소설’로 선정됐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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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야기꾼’ 성석제의 초단편 소설집

    예전 학교에는 마치 챔피언을 연상케 하는 펀치를 자랑하는 교사가 한두 명씩 꼭 있었다. 이 중학교에서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교사의 이름은 주성기, 별명은 ‘펠레’다. 그에게 맞지 않고 졸업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라서 명명된 ‘다 패버릴래’가 ‘다 팰래’를 거쳐 ‘펠레’로 정착한 것이다. 학생들에겐 호환 마마보다 펠레가 더 무섭다. 그날 펠레가 누군가 하나를 잡을 요량으로 청소 상태를 문제 삼으며 주번을 부른다. 주번을 몰아치듯 훈계한 뒤 체벌을 가하려던 순간, 갑자기 다른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이 주번이라고 말한다. 한참 혼나고 있던 아이를 내려다보며 “그럼 넌 뭐야?”라고 펠레가 묻자 하마터면 맞을 뻔한 아이가 울상을 하고 대답한다. “전 구 번인데요.”(‘펠레의 전설’) ‘이야기꾼’ ‘만담가’로 불리는 소설가 성석제 씨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 동안 월간 샘터에 만남을 주제로 연재한 원고 중 40편을 선정해 묶어낸 초단편 소설집. 우연히 시작된 보복 운전의 끝에 차를 공터에 세우고 시비를 가려야 하는 위기에 내몰린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오 하필 그곳에), “밖이 개추워요”라는 아이들 말에 “밖에 개가 있어? 개가 왜 춥대?”라고 되묻던 남자가 반려견을 기르면서 얻게 된 여러 가지 ‘개이득’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잔잔하게 풀어낸 이야기(‘진정 난 몰랐었네’) 등 일상에서 출발한 소재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작가 특유의 시원시원한 입담과 유머가 짤막한 콩트 같은 이야기 속에 유쾌하게 버무려졌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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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고료 대신 구독권… 심지어 묵은 쌀 주는 경우도”

    “원고료 대신 정기구독권이나 문예지를 주거나 씻어도 씻어도 검은 물이 나와 먹어도 되나 싶은 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성미 시인이 최근 문학계간지 ‘문학과사회 하이픈’(문학과지성사) 여름호(사진)에 기고한 글 ‘청탁서의 안과 밖, 청탁서와 문예지 제도’의 일부다. ‘문학과사회 하이픈’ 여름호에서는 문예지의 청탁 시스템과 원고료 책정 방식, 작가와의 계약 관행 등 지금까지 적나라하게 말하기 어려웠던 계약 이슈에 대해 살펴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글을 실었다. 이 시인은 이 글에서 등단 이후 작가들이 첫 단행본을 내기 전까지 가장 빈번하게 마주치는 문예지 청탁 시스템의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한국 문단에서 문예지는 신인에게 등단 기회를 제공하는 데다 단행본 출간의 바탕이 되는 단편소설을 게재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인은 청탁서를 보내는 절차부터 원고료 책정과 지급 방식, 전자 출판과 관련한 계약 등이 대부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원고 청탁은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고 출판사 송년회, 문인 결혼식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문학시장이 어렵다면서도 해마다 계간지가 늘어나는 구조도 지적했다. 출판사가 문예지를 출판사의 단행본 홍보, 등단 장사, 자비 출판 시장 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정작 작가에게는 제대로 보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인은 “작가가 의사를 표현할 장치가 보장돼 있지 않고 업무에 공적 성격이 부족하다”고 썼다. 합리적 청탁 절차를 마련하고 공정한 보상을 할 필요가 있다며 기형적으로 운영하는 문예지는 퇴출시키고 공정한 창작 환경과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 조우리 씨 역시 ‘갑의 값’이란 글에서 작가들이 계약서를 제대로 검토할 절차나 시간을 갖지 못하고 관행에 떠밀려 사인하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값을 흥정하는 것에 대한 민망함, ‘설마’ 하는 생각에 주저하기보단 작가들이 먼저 계약 조건을 제안하고, 수정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할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조 씨는 “알아보고 따져보고 살펴보는 일이 더 나은 계약서로 돌아올 거라고 믿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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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맛있는 책’들 쏟아진다

    탐식과 미식 열풍이 출판계에서도 식을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다. 음식을 전면에 내세운 출판물이 잡지나 시리즈, 단행본까지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다. 출판사 아르테는 매달 한 명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소개하는 잡지 ‘유크’를 최근 창간하며 첫 호에 ‘캠핑 한끼’라는 채널을 다뤘다. 캠핑장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오감을 사로잡는 촬영기법과 편집으로 소개하는 채널이다. 단순한 먹방이 아니라 자연소재를 활용한 플레이팅, 캠핑 용기를 활용한 고급 기술 등 아웃도어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요리를 특색 있게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정미 아르테 에디터는 “캠핑 음식은 거칠고 간소화한 끼니란 고정관념을 깨고 독창적인 접근으로 근사한 한 끼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주는 크리에이터라서 첫 호로 소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음식이란 소재가 워낙 인기가 있긴 하지만 그런 만큼 차별화된 색다른 즐거움을 요구하는 이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잡지에는 목살구이, 닭갈비, 배스구이 등 자연의 감성을 만끽하며 즐길 수 있는 요리와 레시피도 함께 수록했다. 음식의 종류와 분야를 한층 세분화해서 들여다보는 시리즈물도 인기다. 민음사의 세미콜론 ‘띵’ 시리즈는 책 한 권 한 권을 모두 특정한 주제의 음식 이야기로만 채운다. 조식, 채식, 해장음식 등을 테마로 각각 한 권씩 책을 만들어냈다. 관심이 있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만 골라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먹는 행위로 위안과 행복감을 찾도록 도와주는 에세이집도 여럿 눈에 띈다. 주로 음식의 풍미와 함께 음식을 매개로 한 사유, 글맛을 함께 곱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책들이다. 에세이집 ‘음식의 위로’(마음산책)는 양배추찜, 라구 볼로냐, 무화과 타르트, 자몽 샐러드 등 군침 도는 음식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의 죽음과 관계의 파경 등 여러 상처를 갖가지 음식과 그 레시피로 치유해간다. 김용희 작가의 ‘밥이 그리워졌다’(인물과사상사)도 정서적으로 허기 질 때 감성을 채울 수 있는 50가지 음식에 대해 쓴 글이다. 실연의 상처를 달랠 때는 양푼비빔밥, 청춘을 상기시키는 돈가스 등 삶에서 마주친 외로움과 영혼의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친근하고 소소한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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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TS 12억 기부하자… 전세계 팬들 같은 금액 모금

    경찰의 과잉 진압에 숨진 조지 플로이드 씨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흑인 인권운동 캠페인에 방탄소년단(BTS·사진)의 팬클럽 ‘아미’가 100만 달러(약 12억 원)를 기부했다. BTS와 소속사가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이 함께 나선 것이다. 8일 BTS 팬들이 운영하는 소액 기부 프로젝트 ‘원 인 언 아미(One in an ARMY)’에 따르면 전 세계 아미가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기부한 금액은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앞서 ‘원 인 언 아미’는 1일 팬들의 요청에 따라 인종차별 반대 운동 단체에 소액 기부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BLM)’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시민자유연합(ACLU) 등에 기부금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한 페이지다. 이를 통해 약 5만 달러(약 6025만 원)가 모였다. 이어 6일 BTS와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BLM 측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아미들은 ‘우리도 100만 달러를 모금하자’는 뜻의 ‘매치어밀리언(#MatchAMillion)’ 해시태그를 전파하며 더 적극적으로 기부에 나섰다. 8일 기준 기부 인원 3만7000명, 기부액 100만 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이에 영국 BBC는 이날 아미의 기부 소식을 전하며 “BTS의 팬들은 적극적인 헌신으로 유명하다. 온라인에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고 전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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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동없이 말만 번지르르” 명품업체 값싼 동조 비판

    《백인 경관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씨가 숨진 이후 인종차별과 경찰력 남용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을 2주 가까이 뒤덮고 있다. 음악 영화 등 대중문화 산업계를 비롯해 고급 패션 및 명품 업계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시위 취지에 동참했다. 그러나 일부 시위대의 공격 표적이 된 명품 업계는 SNS에서도 냉소를 받고 있다.》○ ‘명품업체 시위 동참의 진정성 의심’ 샤넬 루이비통 펜디 프라다 등 대다수 명품 및 디자이너 브랜드는 플로이드 추모 시위를 지지하는 ‘#블랙아웃 튜즈데이(#blackouttuseday)’ 운동이 시작된 2일(현지 시간)을 전후해 SNS의 광고 마케팅을 일시 접고 일제히 검은 화면을 드러냈다.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같은 추모 해시태그로 애도의 뜻을 전했고, 경쟁적으로 ‘차별에 반대한다’ ‘우리가 바꿀 것’ 같은 메시지를 냈다. 하지만 SNS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갑을 열어라’ ‘말만 하지 말고 돈을 써라’ ‘후원을 하고 흑인을 중요한 자리에 앉힌 다음 평등에 대해 말해라’ 같은 비아냥거림이 주를 이뤘다. 티파니앤코는 브랜드 상징색인 민트색 티파니블루 화면에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이고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란 애매한 문구를 썼다가 ‘비겁한 표현’ ‘나약하다’ ‘팔로 취소’ 등 거센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업체는 사과한 뒤 입장문을 다시 냈다. 분위기가 더 악화될 것을 의식한 듯 다른 명품 브랜드들도 ‘분노한다’(프라다) ‘우리는 이 전투의 동맹군’(디올)같이 더 명확하고 강력해진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다. 돌체앤가바나는 액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흑인인권단체에 기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도 명품업체들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는 시선은 여전하다. 이 같은 반감의 뿌리는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이 업체들이 SNS에서 몇 마디 거드는 것 이상의 실질적 행동은 하지 않는 데 있다는 지적이 많다. 프라다, 구찌, 돌체앤가바나 등은 최근까지도 흑인을 희화화한 스웨터와 액세서리, 동양인을 비하하는 화보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 인권감수성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줬다. 패션산업 자체가 ‘미의 기준’으로 삼는 모델에서부터 주요 임원진까지 백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특징도 있다. 패션전문지 ‘보그’는 “대중이 접하기 어려운 하이엔드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불평등의 아바타”라고 했다.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존 방식만 안이하게 고수해 화를 자초한다는 평가도 있다.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SNS에 약탈된 자신의 매장 간판 사진을 올리며 “약탈이 폭력이란 말을 믿지 마라. 배고픔이 폭력이고 노숙이 폭력이다”라고 썼다. 이번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는 그였지만 “약탈도 ‘미학적 캠페인’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냉소를 받았다. 흑인 패션 브랜드 파이어모스의 디자이너 커비 진 레이먼드는 “회사 법무팀이라도 흑인 관련법 수정을 돕도록 하라. SNS에서 멍청한 말 하는 건 제발 그만”이라고 꼬집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 오프화이트의 대표 버질 아블로는 흑인운동가 단체에 50달러를 기부한 영수증을 올렸다가 악화된 여론에 기름만 끼얹은 꼴이 됐다. 논란이 커지자 진짜 기부한 2만 달러(약 2400만 원) 중 일부였다고 해명했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각 명품 브랜드의 태도와 대응방식이 향후 대중의 소비나 투자 등을 결정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GQ’는 “마케팅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한 브랜드는 별로 없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 대중음악계 시위 지지… ‘긍정적’ 대중음악과 영화계에서는 실질적인 후원과 지지가 이어지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워너뮤직 소니뮤직 등은 ‘블랙아웃 튜즈데이’ 날 하루 휴무했고 각 한국지사도 이날 SNS에 홍보물은 한 건도 올리지 않았다. 소니뮤직은 “적절하다 생각하는 조직과 단체를 후원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대중음악계에서 흑인음악의 유산이 상당한 만큼, 너 나 없이 차별과 폭력에 맞서는 데 동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1위 음원 플랫폼인 ‘스포티파이’는 흑인 인권 운동을 촉구하는 추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전진 배치했다. 넷플릭스, HBO 맥스, 아마존 스튜디오 등과 배우들도 적극적으로 시위 지지에 나섰다. 워너브러더스는 흑인 인권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을 다룬 영화 ‘저스트 머시’를 이달 한 달 디지털 플랫폼에서 무료 공개했다. 디즈니는 흑인 인권단체를 포함한 사회단체에 500만 달러(60억6300만 원)를 기부했다. 밥 체팩 디즈니 최고경영자(CEO)는 “인종차별과 폭력은 절대 용인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밝혔다. 영화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도 4일 25만 달러(약 3억300만 원)를 인권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배우 존 보예가는 3일 시위에 참여해 “향후 연기 경력에 지장을 줄 수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겠다. 우리는 합당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연설하며 울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티머시 섈러메이도 시위 현장에 나왔다.박선희 teller@donga.com·임희윤·김재희 기자}

    •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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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고전영화에서 백인여성만 유독 빛나는 까닭

    “금발에 붉은 뺨을 지닌 에바가 흰옷을 입고 다가오자 태양 빛이 에바의 뒤에 후광을 만들어주었다.”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년)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이상화된 백인 여성의 이미지를 잘 구현하고 있다. 백인 여성은 빛난다. 그것도, 눈이 부시게.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는 사진이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면서 ‘백인성(性)’ ‘백인다움’을 재현해왔다. 시각예술에서 조명과 화장술은 극단적으로 밝고 흰 동시에 번들거리지 않게 광채가 나는 백인다운 피부를 구현해내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백인 여성이 받는 빛은 미덕 순수 사랑을 상징한다. 이 책은 영화학을 전공한 저자가 서구 문화에서 특권적 위치를 형성해온 백인성이 특히 영화, 사진 같은 시각예술에서 어떻게 반복적으로 재현되면서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켰는지를 진단했다. 1997년 출간돼 백인성 연구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저자는 백인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백인을 ‘인간의 표준’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백인우월주의를 먼저 논박한다. 유색인종의 특성과 그들이 받는 불평등한 대우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됐지만 정작 백인 자체에 관해서는 당시만 해도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 백인은 인종의 하나로 간주되지 않고 언제나 ‘그냥 인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백인성 자체가 인간의 조건이었다. 백인성의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색이다. 백인은 실제로 하얗다고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피부색을 가졌다. 하지만 ‘코카시아 인종’ 같은 용어 대신 백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흰색은 빛의 색이며 중립성, 도덕, 계몽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백인화는 르네상스 말기에 성취됐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비(非)유대인화 정도를 떠나 푸른 눈에 밝은 피부라는 백인적 조합을 완성했다. 명백한 이상으로서의 흰색을 구현하기 위해서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은 백인을 부각시키는 조명 기술을 완성했다. 사실 이런 조명 시스템에서는 빛 반사율이 낮은 다른 인종이 매력적으로 연출되기 어렵다. 백인 여성이 빛의 화신으로 묘사됐다면 백인 남성은 다양한 영화에서 마치 조각상 같은 근육질의 견고한 몸을 가진 영웅으로 그려진다. 근육질 몸은 제국주의적 진취성을 상징한다. 심지어 ‘타잔’ 같은 영화는 백인 남성이 식민주의적 권력과 자연에 대한 친밀성을 모두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모든 특혜를 누리는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백인 내부에서도 백인성에 대한 개념과 정의가 수시로 달라졌다는 것. 아일랜드인이나 유대인은 시대에 따라 백인이 되기도 하고 그 집단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최근 인종차별 문제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인종차별적 문화를 지속시키는 백인성의 기원을 살펴보는 일은 어느 때보다 의미 있어 보인다. 백인성을 인류의 보편 기준으로 만들어온 은밀한 문화적 작동기제를 냉철하게 직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례를 들어 글을 풀어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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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에는 성별이 없다

    젠더리스, 젠더 뉴트럴, 유니버설, 유니섹스…. 명칭이 어떻든 최근 뷰티와 패션 트렌드의 핵심은 하나다. 성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향수도 마찬가지다. 체취에 민감해지는 계절을 앞두고 어떤 향수를 선택할지 고민이라면 요즘 대세인 중성적인 향을 염두에 두자. 과거 향수의 세계에선 남녀의 구분이 분명했다. 꽃향기를 본뜬 플로럴 계열은 여성 향수, 알싸한 스파이시 계열은 남성 향수로 분류됐다. 여성 향수는 곡선이 두드러지는 유리병, 꽃문양, 화려한 색감의 캡 등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남성 향수에는 직사각형의 어두운 용기나 가죽 패키지 등이 애용됐다. 하지만 남녀의 경계를 흐린 니치(소수를 겨냥한 프리미엄 브랜드) 향수들이 시장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은 “바이레도, 프레데릭 말, 딥디크 등의 니치 향수들이 성별의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변화로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니치 브랜드의 향수들은 용기와 향이 모두 세련되고 중성적인 느낌을 준다. 젠더리스 향수의 시초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대 캘빈클라인의 향수 CK 원(One)은 젠더리스를 표방한 제품으로 세계적인 히트를 쳤다. 남녀 향수에서 모두 사용하는 시트러스 향에다 주로 남성적 향으로 분류되는 우디(woody) 계열 향을 섞었다. 광고 캠페인에서도 남녀가 주체적으로 선택해 다른 느낌을 낼 수 있는 제품임을 강조했다. 뉴욕타임스는 “X세대의 정신을 반영한 향”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후 플로럴 계열의 향이 큰 인기를 끌면서 젠더리스 향수는 잊혀졌다. 젠더리스 향수가 최근 다시 시장을 이끌게 된 것은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고 패션계 전반에 유니섹스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향기를 남녀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 소비 트렌드 조사 회사인 영국의 민텔에 따르면 성 중립적인 향수는 2010년 17%에 불과했지만 2018년 전체 시장의 51%로 절반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전문가들은 남녀를 떠나 ‘나다운 향기’를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분석한다. 굳이 젠더리스 제품임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남녀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브랜드들은 큰 인기다. 르라보, 이솝 등은 패키지 디자인도 미니멀하게 단순화한 데다 좋아하는 향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서 남녀 누구나 선택할 수 있게끔 했다. 구찌, 셀린 같은 명품 브랜드도 남녀 구분이 없는 향수를 신제품으로 출시하기 시작했다. 구찌는 지난해 9월 최초의 중성적 향수 ‘메모아 뒨 오더’를 유니버설 향수라는 이름으로 선보였다. 성별뿐 아니라 시대에도 구애받지 않는 향이라는 테마로 미네랄 아로마틱 계열의 향을 썼다. 셀린이 지난해 8월 출시한 11가지 향의 ‘오트 퍼퓨머리’ 역시 남녀 구분이 없다. 특히 젠더리스 향은 강한 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들에게 잘 맞는다는 특징이 있다. 홍연주 코스맥스 향료랩장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은 머스크, 코튼, 로즈 향처럼 은은하면서도 지속력이 좋은 향기”라며 “남성적, 여성적 향취가 강렬하거나 독특한 향보다는 친근하면서도 자극이 덜한 중성적인 향의 시장성이 높다”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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