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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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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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 대통령은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5년은 분단 이후 남북 관계가 최고로 좋았던 해였습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때의 이야기지만, 아무튼 그해엔 마음만 먹으면 민간인도 큰 제한 없이 평양 관광을 갈 수 있었습니다.그해 가을 통일교 산하 평화항공여행사는 서울에서 평양 관광상품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1박2일 일정에 110만 원이나 했지만 예약이 몰렸습니다.평양 관광 일정은 단순했습니다. 전세기를 타고 서해를 돌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면 김일성 동상이 있는 만수대를 우선 방문하고, 주체사상탑, 개선문, 역사박물관, 만경대 순으로 일정이 이어졌습니다. 투숙은 4성급으로 자처하는 보통강호텔에서 했고, 300달러를 내면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아리랑 대집단체조를 일등석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2005년에 평양을 방문한 인원은 모두 39만7192명이었는데, 이중 금강산 관광객 29만8247명을 빼면 9만8945명이 평양 등 금강산 이외의 지역을 방문했습니다.이 9만8945명 중에 4일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이재명 대통령은 성남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2005년의 이 변호사는 인생에서 나름 ‘한가한’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그 이전에 인권·노동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거의 매년 ‘별’을 하나씩 달고 있었습니다.2002년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을 고발하면서 검사 사칭을 했다는 이유로 150만 원의 벌금을 확정받았습니다. 물론 그가 고발했던 김병량 당시 성남시장은 실제로 억대 뇌물을 받은 것이 확인돼 2007년 징역 1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2004년 이 변호사는 별을 두 개나 받았습니다. 하나는 그해 3월 공공병원 성남시립의료원 건립과 관련해 의회 본회의장에 난입했다는 이유로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돼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또 두 달 뒤엔 혈중알코올농도 0.158%로 음주 운전에 적발돼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습니다.이 대통령은 성남시립의료원 사건으로 수배 중에 정치 입문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2006년 8월 성남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습니다. 2005년은 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중간에 있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돈을 벌려고 애쓰던 시기였기도 했습니다. 2005년부터 그의 변호사 사무실은 폭력, 살인, 강간 사건도 변호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되는 일도 없고, 해놓은 일도 없던 시기 그의 눈에 평양 관광 상품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 한시적으로 누구에게나 평양 관광이 허락됐다고는 하나 북한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면 선뜻 결심하기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2005년 한국 인구가 4818만 명이었으니 그해 방북한 9만8945명은 인구의 0.2%, 즉 500명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당시의 이재명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8년 11월 15일, 경기도에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대표단 5명이 나타났습니다. 경기도가 판을 깐 ‘아시아태평양의 평화 번영을 위한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습니다.이때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는 “옥류관 냉면을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라며 경기도에 옥류관 1호점 유치를 제안했습니다. 이에 이 부위원장은 “옥류관 분점이 경기도에 개관하기 전에 한번 (북측에) 왔다 갔으면 좋겠다”라며 초청 의사를 전달했습니다.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수행단에서 밀려난 ‘모욕’을 딛고 절치부심해 독자적인 방북 방법을 모색했던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가 드디어 끈을 잡은 순간이었습니다. 경기도에 평화부지사라는 자리를 신설해 이화영 전 의원을 영입했던 것에 대한 보답을 받는 듯했습니다. 방북을 활용해 몸값을 올리려는 시도는 절절했지만, 끝내 성공하진 못했습니다. 이듬해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와 1년 뒤 찾아온 코로나 사태 등이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화영 부지사와의 인연은 그를 나락으로 끌고 들어갈 뻔했습니다.하지만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넘겨준 ‘행운의 열쇠’를 뜻밖의 선물로 받고, 북한을 활용하지 않고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옥류관 냉면을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라고 지금쯤 김정은에게도 관련 분석 파일이 올라갔을 겁니다. 아마 김정은은 좀 의아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북한에 온 남쪽 사람에게 옥류관 냉면을 먹여 보내지 않은 적도 있었던 말인가”라며 2005년의 상황을 학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옥류관은 한국 방문객들의 필수 방문코스처럼 활용되지만, 2005년 가을엔 하도 많은 남쪽 사람이 단기간에 몰려와서인지 옥류관 냉면도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일부는 먹었겠지만, 당시의 이재명 변호사는 북한이 옥류관 냉면을 일부러 접대할 레벨은 아니었던 것입니다.이재명 대통령은 임기 중에 옥류관 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요. 2018년 4월 옥류관 수석 요리사를 판문점에 데리고 나타났던 김정은이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옥류관 냉면으로 생색을 낼 마음이 생길까요.이 대통령은 20년 전 북한을 방문한 0.2%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북한에 대한 관심사가 예사롭진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미 이 대통령의 그림은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북 전문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국정원장 후보자로 발탁된 것은 북한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순간마다 다리를 놓은 것은 통일부보단 국정원이었습니다. 특히 한국 대통령의 방북 때엔 예외가 없었습니다.2000년 김대중-김정일의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두 차례나 평양을 사전에 방문해 회담을 조율했습니다.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2차 남북정상회담 직전에도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2차례나 사전 방북해 의제를 조율했습니다.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때도 ‘국정원-통일전선부 라인’이 접촉 창구였습니다. 멀리 보면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해 실무를 담당했습니다.그러니 이종석 국정원장 임명이 무슨 뜻인지는 북한도 너무 잘 알 것입니다. 물론 당분간은 남북관계 전진이 이뤄질 가능성은 높아 보이진 않습니다. 북한은 2023년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놓고 남북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과의 관계를 빠르게 복원할 만한 절실함은 없습니다.북한은 이미 러시아에 바짝 붙어 숨구멍을 열어놓았습니다. 또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당근도 마땅치 않습니다. 유엔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여전히 유효하므로 한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보다 무작정 앞서 나가기도 애매합니다.그럼에도 5년은 정말 긴 시간입니다. 앞으로 대북 접촉의 일선에서 뛸 ‘선수’들에게 옥류관은 참으로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이 될 것 같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옥류관 냉면을 먹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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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숨 걸린 북한의 ‘시범껨’, 걸린 놈만 불쌍한 공포의 생존게임[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시범껨’이란 말은 북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쓰는 말입니다. 북한 국어사전엔 없는데, 구글에 ‘시범껨’이라고 쳐보니 이런 답변이 나옵니다.“‘시범껨’은 ‘시범경기’ 또는 ‘시범게임’을 줄여서 부르는 표현입니다. 주로 야구에서 사용되지만, 다른 스포츠나 게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즉, 공식적인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의 컨디션을 점검하거나, 새로운 규칙이나 전략을 시험해보기 위해 치르는 연습경기를 뜻합니다.”한마디로 남쪽에서 시범껨은 연습경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선 ‘본보기 처벌’이라는 전혀 다른 공포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시범껨에 걸리지마” “시범껨에 걸려 총살됐대” 하는 식으로 쓰지, 이걸 시범경기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언제부터, 또 왜 본보기 처벌이 ‘시범껨’이라는 단어로 통용되기 시작했는지 알 순 없습니다만, 시범껨에 걸리면 저지른 죄의 형량보다 훨씬 더 높은 수위의 처벌을 받게 됩니다. 본보기로 보여주어 경종을 울리려는 목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며칠 전 북한에서 또다시 ‘시범껨’에 걸릴 사안이 발생했습니다. 22일에 새로 건조한 5000톤급 구축함을 진수하다가 배도 띄우지 못하고, 함선이 파손된 것입니다.현장에서 지켜본 김정은은 대노했습니다. 청진까지 가려면 평양에서 차나 열차를 타고 최소 이틀은 걸리는데, 그 먼 길을 갔다가 눈앞에서 배가 뒤집히는 것을 보니, 눈도 뒤집힌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있을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중대 사고이며 범죄적 행위”라며 “우리 국가의 존위와 자존심을 한순간에 추락시킨 이번 사고 책임자들을 엄중하게 문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문책 대상까지 콕 찍었는데, 당 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 국가과학원 역학연구소, 김책공업종합대학, 중앙선박설계연구소, 청진조선소의 간부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해 책임 소재를 가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정은이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 했으니 또 피바람이 불게 생겼습니다. 북한에선 친한 사람들끼리 “군함 만들던 사람들 시범껨에 걸렸네. 어쩌냐. 불쌍하다”고 술렁거릴 겁니다. 군함 건조자들도 자기들 딴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성공했으면 영웅이 됐을 것을 졸지에 범죄자로 몰리게 생겼으니 한 순간의 실패로 본인과 가족의 인생이 끝날 판입니다.● 시범껨에 걸린 지방 간부들북한에선 이번처럼 시범껨에 걸려든 사람들이 수시로 나옵니다. 올해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월에 벌어졌습니다. 2025년 1월 27일에 소집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30차 비서국 확대회의에서는 자강도 우시군과 남포시 온천군의 지방간부들의 세도와 부정부패를 특대범죄로 규정하고 공개 숙청했습니다.회의는 극히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습니다. 주석단 가운데 앉은 김정은은 담배를 피우며 계속 간부들을 노려봤고, 회의 도중 박정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용원 당 조직비서를 불러내어 회의장의 누군가를 삿대질하면서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공식 발표 내용도 무시무시합니다. 일단 우시군에 대해선 이렇게 규정했습니다.“지방의 세도꾼, 관료배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당과 인민 사이의 성스러운 단결의 성새를 허물려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당에 있어서,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우리 제도와 우리 법권에 있어서 추호도 용서할 수 없는 특대형 범죄사건이다.”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의 자강도 소식통에 따르면 회의 나흘 뒤인 31일 우시군 주민들 앞에서 군 농업감찰기관 감찰원과 안전부장 등 관련자 10여 명이 공개 처형됐다고 합니다.온천군에 대한 단죄 내용도 끔찍합니다. 북한 발표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마 전 온천군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관철을 위한 군당 전원회의 준비를 너절하게 하고 회의를 심히 형식적으로 진행하고 나서는 돌아앉아 당일군들을 포함한 40여명의 일군들이 집단적으로 부정행위를 감행하는 특대사건을 발생시키였다.이것은 당의 각급 지도간부들이 봉사기관들에서 음주접대를 받는 것과 같은 안일해이된 생활을 하지 말데 대한 당내 규률을 란폭하게 위반한 행위로서 우리 당 력사에 이번처럼 군당책임일군이 직접 조직하고 군당일군들을 비롯한 군안의 수십 명에 달하는 당, 행정 책임일군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가 그러한 부정행위를 감행한 망동은 일찌기 없었다.온천군에서 공공연히 자행된 집단적인 음주불량행위는 규률 건설에 관한 당의 로선에 전면배치되는 행위이며 사건의 주모자, 가담자들은 지도간부로서의 초보적인 자격도 없는 썩어빠진 무리, 방자한 오합지졸의 무리들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이 정도면 온천군에서도 끔찍한 공개 처형이 이뤄지고, 아주 운이 좋은 일부는 감옥에 갔을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김정은의 신임을 듬뿍 받던 조용원 조직비서도 두 달 넘게 혁명화를 갔다가 얼마 전에 복귀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걸린 놈만 억울하지….”이런 사건을 접하는 북한 주민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당 간부들이 어찌 저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냐”고 분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늘 그랬듯이 주민들은 “우시군과 온천군 간부들이 시범껨에 걸렸네” “걸린 놈만 억울한거지”라며 쯧쯧 혀를 차고 말 겁니다.그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시군 간부들이 저질렀다는 범죄는 군량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고, 그래도 식량이 나오지 못한 가정에선 짐승이나 가전제품을 가져간 것이라고 합니다. 당초에 각 지방별로 군량미를 무조건 보장하라는 지시는 김정은이 하달한 것입니다. 그 지시를 집행하지 못하면 처벌을 받기에 지방 간부들이 강제적인 방법으로 집행했을 뿐입니다. 할당된 수량은 무조건 바치되, 쥐어짜지는 말라고 하면 간부들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김정은도 해답은 내놓지 못합니다.온천군 간부들은 회의 후에 여성들과 온천에 가서 문란하게 놀았던 것이 발각됐다고 합니다. 물론 지방 간부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솔직히 북한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정직한 간부도 거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면 노동당이 하라는 대로 해서는 절대 간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뇌물도 주고, 아부도 하고, 접대도 해야 간부가 될 수 있습니다.높이 올라갈수록 뇌물 액수도 커지고, 접대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들키지 않아서 그렇지 지방의 가난한 온천군보단, 뇌물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평양을 조사하면 몇 배 더 심한 일도 많을 겁니다.하지만 어느 순간 당 간부들의 부정부패에 경종을 울려야 되겠다 싶어진 김정은이 지방 ‘새우급’ 간부들이 벌인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시범껨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시범껨’이 이뤄지면 간부들은 한두 해는 조심히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또 언제 그랬듯이 다시 원래 살던 대로 돌아갑니다. 간부들에게 뇌물과 접대를 받지 말라는 말은 호랑이에게 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수시로 바뀌는 분노의 타깃과거 수십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북한 시범껨의 진짜 문제는 연속성도, 일관된 처리 기준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김 씨 일가의 기분에 따라 시범껨의 대상이 수시로 바뀝니다. 올해 들어선 간부들의 부패와 진수식 실패 때문에 분노가 터져 나왔는데, 다음에도 똑같은 사안으로 분노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분노할 일은 널리고 널렸습니다.실례로 도둑과 강도 사건이 많아진다는 보고가 들어가 김정은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라”고 하면 그때부터 전국 곳곳에서 공개총살이 벌어집니다. 이럴 땐 총살을 당할 죄가 아님에도, 해당 시기 그 지역에서 가장 중한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개총살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시범껨에 불행하게 걸려들었다고 합니다.김정은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죄부터 시작해 한국 드라마를 본 행위, 장사를 한 행위, 부를 축적한 행위, 탈북과 밀수를 한 행위, 군 기강을 무너지게 한 행위, 뇌물 받는 행위, 물자를 빼돌린 행위, 공장 가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행위, 부화행위(불륜) 등등 시범껨에 걸릴 사안들은 너무나 많습니다.바꿔놓고 말하면, 우시군 간부들이 만약 주민들을 수탈하지 않아 군량미를 전량 바치지 못하는 경우에도 “장군님의 지시를 받들지 않은 특대형 범죄사건”에 해당돼 시범적으로 처형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북한 사람들은 “숨만 쉬는 것 빼고는 다 불법”이란 자조 섞인 불만을 늘 토로합니다. 모든 것이 ‘비사회주의적 행위’에 해당되는 북한인지라, 김정은이 어느 대목에서, 어떤 때 화를 낼지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리로 당하는 시범껨김정은 시대엔 시범껨에 당하는 대상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김정은 집권 초기엔, 그의 분노를 자극한 개인이 희생양이 됐습니다.자신이 그려준 그림대로 미림승마구락부를 짓지 않았다고 2013년 5월에 처형한 북한군 설계연구소장이나, 전기와 사료가 없어 자라를 제대로 키울 수 없다고 변명했다고 2015년 5월 처형한 평양자라공장 지배인이 대표적입니다.하지만 최근엔 우시군이나 온천군처럼 지역이나 특정 기관 간부들 전체가 대상이 되는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부터 급격히 두드러지고 있습니다.그해 2월 뇌물사건으로 김일성고급당학교 당위원회를 해산하고 수십 명을 처벌했고, 8월엔 방역 위반을 이유로 함경북도 온성군 당위원회, 보위부, 안전부, 국경경비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이중 10여명이 처형되고, 나머지 간부들은 농민으로 신분을 강등시켜 내쫓았습니다. 같은 달엔 평원군 안전부도 해산시켜 전원 처벌이 이뤄졌습니다. 11월엔 입시비리를 이유로 평양의학대학 당위원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모두 처벌했습니다.2022년 8월엔 홍수 피해로 인한 사망자 숫자를 속였다는 이유로 평안남도 도당을 해산하고 간부 300명을 현장 체포하기도 했습니다.과거 북한 간부들이나 주민들의 목표는 “최소한 나만은 시범껨에 걸리지 말자”는 것입니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처벌까지 집단주의가 적용되니 내가 잘한다고 해서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점점 북한은 더욱 무서운 사회로 진화돼 가고 있습니다. 간부들과 주민들은 점점 숨을 쉬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최대한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정은 차를 추월했다간…올해 초 북한은 개인들에게 자가용 승용차 소유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이러면 주민들이 감격해 눈물을 흘릴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차를 사고 다니다가 시범껨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자”는 것이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일 겁니다. 이미 차를 타고 가다가 김정은의 분노를 샀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평양에 소문이 난 대표적 사례를 든다면 2010년 초 북한군 총정치국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가던 황해도 4군단 모 사단장이 새로 선물 받은 신형 일제 팔라딘 승용차를 타고 신이 나서 달리다가 평양시 입구에서 김정은이 탄 벤츠 S600을 추월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후계자 신분으로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던 김정은은 혼자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사단장의 차를 재추월해 멈춰 세운 뒤 째려보고 갔다고 합니다.다음날 열린 총정치국 회의에선 그 사단장과 운전병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회의장에 온 사단장이 온밤 고민하며 “차종을 보니 장군님 아들 같은데, 내가 잘못 걸린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바람에 회의 참석자들이 다 알게 돼 소문이 났다고 하네요.그해 5월 5일엔 군에 ‘청년대장 동지 방침’이란 것이 하달됐는데 “요새 군 운전사들이 무법천지이니 강하게 단속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즈음 평양에서 원산으로 가던 김정은의 차가 마식령에 있는 길이 4㎞의 ‘무지개 동굴’에 들어섰는데, 매연을 새까맣게 내뿜으며 앞서 가던 북한군 화물차가 김정은의 경적을 무시하고 비켜주지 않았던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아마 운전병은 매연으로 가득 차 잘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민간 승용차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니 “감히 군대 차량에게”라는 심정으로 더 천천히 갔을지도 모릅니다. 5월 5일 방침 뒤 인민무력부장도 단속돼 청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내 운동장에서 운전병과 함께 2시간 넘게 제식훈련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지금은 김정은이 경호를 받으며 다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 김정은이 밤에 암행어사처럼 평양거리를 몰래 다니다가 “자가용차를 허용했더니 평양 교통이 엉망진창이 됐다”고 화라도 내면 큰일입니다. 당사자 운명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또 최악의 경우 자가용차들이 몰수될 수도 있고, 교통법규를 익히게 한다고 몇 달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니 자가용 허용에도 북한 사람들의 마음속엔 ‘절대 시범껨에 걸리지 말자’는 걱정이 더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김정은의 분노는 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음번 시범껨에 걸릴 불운한 자들이 누가 될지 그건 누구도 모릅니다. 다만 김정은과 가까워질수록 죽을 확률도 높아지는 것은 분명합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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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가용 보유가 가져올 북한의 변화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북한이 올 초부터 자가용 승용차 소유를 전격 허용했다는 대북 소식통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로 자가용을 사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거의 없어 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인 휴대전화 허용보다 더 북한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017년에도 북한이 자가용 승용차 보유를 허용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당시엔 개인 명의 차량 등록은 불가했고 사업소나 기관 명의로 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엔 개인 명의 등록까지 허용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자가용 소유는 북한 법률상 불법은 아니었다. 북한 민법 59조는 ‘공민은 살림집과 가정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가정용품, 문화용품, 그 밖의 생활용품과 승용차 같은 기재를 소유할 수 있다’고 개인 소유권 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총련 귀국자에 한정돼 있었다. ‘개인 소유의 성격과 원천’을 규정한 민법 58조에 ‘개인 소유는 노동에 의한 사회주의 분배, 국가 및 사회의 추가적 혜택, 터밭(텃밭)경리를 비롯한 개인 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 공민이 샀거나 상속, 증여받은 재산,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으로 이루어진다’고 규정됐기 때문이다. 차량을 살 수 있는 큰돈은 ‘그 밖의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밖에는 만질 수 없는데, 지금까지 이 ‘재산’은 일본에서 송금이 오는 총련 귀국자들이나 인정받을 수 있었다. 북한에서 자가용 승용차 보유를 허용하려면 바뀌어야 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58조 적용의 유연성이다. 차량 구매 비용은 분배나 개인 부업으로 충당할 수 없다. 북한 같은 체제에선 많은 돈을 합법적으로 벌었다고 증명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증명하려다가 오히려 재산이 공개돼 ‘비사회주의적 행위자’로 처벌받을 위험이 높다. 자가용 소유는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얻은 개인 수입이나, 외국에서 벌어온 재산, 장사를 통해 번 재산을 모두 ‘법적 근거에 의하여 생겨난 재산’에 포함시켜 인정해야 가능하다. 또 운전면허 제도도 개편해야 한다. 북한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으려면 ‘자동차운전사양성소’에서 1년을 공부해야 하는데, 입학 자격과 연령이 매우 제한적이다. 여러 장애물이 있겠지만 자가용 승용차 보유가 허용되면 북한 주민들의 욕망을 크게 자극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에 자가용 승용차 10만 대 정도 팔릴 수 있는 구매력은 충분히 존재한다. 당장 평양에만 집값이 수만 달러인 주택이 수십만 채 있다. 대다수 거주권은 달러로 거래된다. 평양 주택 구매 자금도 이 58조에 따르면 태반이 불법이다. 하지만 주택만큼은 이 조항이 유명무실해졌다. 처벌의 칼날을 쥐고 있는 자들부터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다른 누굴 처벌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자가용 승용차도 권력층부터 보유하게 되면 주택과 마찬가지로 민법 조항은 사문화될 것이다. 자가용 승용차 보유를 허용해도 아무나 무작정 좋은 차를 살 순 없다고 한다. 메르세데스벤츠나 렉서스 같은 고급 승용차는 여전히 고위 간부만 탈 수 있고 개인은 중국산 차량만 보유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팔리는 판매가격 5000달러 안팎의 4인용 전기차 등은 북한에서도 잘 팔릴 것이다. 폐기 직전의 값싼 중고차도 북한에 대량으로 들어갈 것이다. 휴대전화는 보유 허용 초기에 장사꾼이 많이 샀다. 실시간 정보 교환은 이들에게 더 큰 부를 안겨 주었다. 자가용 승용차도 마찬가지로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 삶의 질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될 것이다. 팔 물건을 넣은 배낭을 메고 다니는 장사꾼은 도태될 것이며 물류 이동은 훨씬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자가용 보유의 의미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비싼 집과 차는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다. “우리 집은 왜 차가 없느냐”는 자녀의 투정에 초연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 자가용 보유가 허용됐다고 해도 아직은 정말로 믿고 사도 될지 몰라 서로 눈치 보는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나 인맥을 믿고 용감하게 사는 자들이 점점 나오게 될 것이고,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보면 너도나도 사게 될 것이다. 나중에 자금 출처를 들먹이며 자가용을 뺏기도 쉽지 않다. 차를 몰수한다는 것은 곧 부유층에게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도 빼앗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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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계 1위’도 피하지 못한 북한의 ‘혁명화’[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북한 김정은이 9일 평양의 러시아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조용원 노동당 조직비서입니다.조용원은 김정은 집권 이후 해임과 강등, 복권을 번갈아 당하며 롤러코스터를 탄 다른 고위 간부들과는 다르게 한 번도 출세 가도에서 밀려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각종 행사 때마다 김정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김정은의 신임은 그의 직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북한에서 노동당 조직비서는 비유하면 ‘인간계 서열’ 1위인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신계와 인간계북한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계(神界)’의 위치엔 1남 4녀가 있습니다. ‘김정은과 포우먼(이설주, 김여정, 김주애, 현송월)’은 인간계가 감히 건드릴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위치입니다.인간계는 신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들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름 서열이 있습니다. 인간계의 실제 권력 서열은 노동신문 등을 통해 공식 발표되는 서열과 차이가 있습니다.북한에선 ‘인사권, 돈줄, 칼자루’로 비유할 수 있는 3대 권력 중 하나는 쥐고 있어야 진짜 힘 있는 실세로 인정받습니다. 칼자루는 국가보위성처럼 남을 숙청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같은 경우는 공식 서열상으론 2위로 발표되지만, 인사권이나 돈줄, 칼자루 중 하나도 제대로 틀어쥔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허수아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3대 권력 중 으뜸은 인사권입니다. 노동당 조직비서는 북한의 대다수 간부에 대한 승진, 해임 등의 인사 권한을 갖고 있는데, 국가보위상도 조직비서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물론 노동당 비서나 군 대장 이상, 내각 상급 인사는 김정은이 하겠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선 조직비서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하지만 ‘인간계 서열’ 1위라고 해도 신계의 눈에 나면 별 수 없습니다. 조용원의 신상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은 올해 1월부터인데, 처음엔 김정은이 가는 행사에 빠지는 것부터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러다 2월엔 상무위원임에도 현지시찰 보도에서 이름이 빠지거나 주석단에서 밀려났고, 급기야 2월 28일 이후엔 종적이 묘연해졌습니다.한국 언론에선 조용원이 숙청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는데, 9일 김정은의 러시아대사관 시찰 때 모습을 드러냈고 비서라는 직책까지 노동신문에 실렸습니다. 이에 정부는 조용원이 정황상 ‘혁명화’를 마치고 복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계 1위도 피할 수 없는 ‘혁명화’란 무엇일까요.# 인간계의 처벌 종류이를 알려면 먼저 북한에서 ‘인간계’가 받는 형벌의 종류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공식적인 형벌은 모두 8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사형, 무기노동교화형, 유기노동교화형, 노동단련형, 선거권박탈형, 재산몰수형, 자격박탈형, 자격정지형입니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의미하는 무기노동교화형은 최고 수위의 처벌입니다. 나머지 형벌은 교화소, 감옥, 노동단련대 등에서 집행됩니다.하지만 북한이 어디 법대로 사는 사회입니까. 법 이외의 끔찍한 처벌도 존재하지만, 외부에 알려질까 봐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형법 이외의 대표적 처벌로는 21세기 지구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연좌제를 들 수 있습니다. 관리소(정치범수용소)는 연좌제의 대표적인 부속물입니다. 멸족을 시켜야 하는 사람의 가족을 수용해 영원히 사회와 격리시키는데, 정치범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은 외부에 공개되지도 않았습니다.정치범수용소도 멸족 해당자들이 들어가는 ‘완전통제구역’과 복권 가능성을 열어둔 ‘혁명화구역’으로 나뉩니다. 혁명화구역에서 수감됐다가 탈북한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완전통제구역 출신은 단 한 명도 탈북하지 못했습니다. 정치범수용소에는 전성기였던 1970년대 중반엔 100만 명 가까이 수감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수감자가 약 20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방기지’라는 것도 있습니다. ‘반동분자’의 일가족들을 깊은 산골에 종신 유배시키는 곳으로 정치범수용소의 혁명화구역과 비슷합니다. 정치범수용소나 추방기지가 무서운 이유는 대다수 수감자들이 재판도 없이 하루아침에 끌려와 평생을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는데 있습니다.실례로 장성택 사건에 연루돼 처형된 간부들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차에 실려 정치범수용소에 갑니다. 이들 가족은 북한 형법을 대입했을 때 처벌할 조항도 없기 때문에 재판도 없이 끌고 가는 것입니다.# 간부가 대상인 혁명화‘혁명화’ 역시 형법에 없는 대표적 처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간부들이 대상입니다. ‘혁명화 교육’ 또는 ‘혁명화 조치’라고도 합니다. 주로 대상자들을 지방 공장, 농장, 탄광 등에서 낮에는 노역을, 밤에는 김 씨 일가 관련 학습을 시킵니다.쉽게 비유하면 인간계 상위에서 살던 인물들을 인간계 바닥에 내려 보내 쓴 맛을 보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주민들은 혁명화 갈 일이 없습니다. 그들의 일상이 곧 혁명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혁명화는 북한에서 고위 간부로 살려면 한 번쯤은 겪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간부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혁명화를 갈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한 체육인들을 꼽을 수 있는데, 과거엔 한국 선수와의 대결에서 패배하면 당연한 절차처럼 혁명화를 갔습니다. 이것은 몇 달 동안의 육체적 및 정신적 처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부들도 배운 것이 있으니 이렇게 아래 사람들에게 써먹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혁명화도 나름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밑바닥에 내려가면 언제 올라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혁명화 대상이 됐다가 죽을 때까지 복권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혁명화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체적 고통보단, 정신적 고통이 크죠. 혁명화를 거친 사람들은 복권하면 김 씨 일가의 발바닥을 핥게 됩니다. 특히 김 씨 일가의 신임을 받아 큰 혜택을 누리던 고위 간부일수록 혁명화 요법은 훨씬 강하게 먹힙니다.# 혁명화의 본질혁명화를 통해 추구하는 것이 뭔지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노동당 대남비서였던 김용순(1934~2003)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용순은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린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활약해 한국에도 잘 알려졌습니다. 김용순이 혁명화를 간 때는 1984년 10월입니다.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 따르면 김용순은 “당 국제부도 외교부서인 만큼 폴카 등 사교춤을 배워두라”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국제부 간부들과 부인들을 모아 춤판을 벌였다가 혁명화 대상이 됐습니다. 그는 “지도자 동지께서 시키는 대로 일처리를 했을 뿐인데 왜 이러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그가 혁명화를 간 진짜 이유는 김정일의 눈 밖에 났기 때문입니다. 김용순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고,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는데, 김정일의 저녁 기쁨조 파티의 고정 참석자였으며 그중 음주가무의 최강자였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당시 국제부 과장으로 있던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바람이 났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습니다.김정은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김용순을 탄광 노동자로 내쫓았고 후임 국제비서로 황장엽을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수호천사’였던 김경희가 아버지 김일성에게 끈질기게 복권시켜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김일성도 김용순이 아첨기가 심하다고 마뜩찮게 여겼지만, 성격이 유별난 딸을 이기진 못했습니다. 1년 반 정도 탄광 노동자로 일하던 김용순은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재교육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평양에 올라왔다가 1987년에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복귀했습니다.여기까지는 김 씨 일가의 눈 밖에 난 간부의 일반적인 혁명화 수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김용순을 사례로 든 것은 이후의 일 때문입니다. 북한 당 고위간부 출신의 탈북자에 따르면 김용순은 탄광에서 매일매일 충성의 일기를 적었다고 합니다.거기엔 ‘당의 신임을 져버렸을 때 나의 인생은 개나 버러지와 같은 인생이로구나’라는 대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김정일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똑똑한 김용순이 왜 혁명화를 보냈는지를 너무 잘 파악했으니 말입니다.김정일은 “참으로 실감나는, 우리 간부들에게 교양적 가치가 있는 일기”라고 평가하고 “이것을 출판해 당 간부들과 모든 국가 간부들에게 의무적으로 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당시 중앙기관 국장 이상급 간부들이 그걸 다 봤다고 합니다.“내 눈밖에 나면 너희들은 다 개나 버러지”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 “네가 가진 돈과 명예, 권력은 모두 나의 하사품이고, 충성을 다 하는 대가로 받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화의 본질입니다.# “몰랐어요. 벌레인줄을…”간부들은 혁명화를 가게 되면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감시의 눈들에게 각종 방법으로 “충복이 될 준비가 됐습니다”를 보여주기 위해 애씁니다. 남 먼저 일터에 나오거나 일기를 쓰거나, 충성의 편지를 바치는 등 수법은 다양합니다. 자신의 처지에 절망해 한숨만 쉬면 복권될 방법이 요원하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반세기 가까이 북한에서 유지돼 온 혁명화는 북한 인민의 생각도 바꾸었습니다.올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사한 북한군 일기에선 “제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지만 어머니 조국은 나에게 인생의 새 출발을 할 수 있고, 재생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번 작전에서 대오의 맨 앞에 달려갈 것이며, 목숨을 바쳐서라도 최고사령관 동지의 명령을 무조건 철저히 따를 것입니다. 김정은 붉은 특공대의 무패의 용감성과 희생성을 온 세계에 보여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발견됐습니다.그는 우크라이나 파병을 일종의 혁명화로 생각하고 일기를 통해 충성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습니다.이번에 조용원은 두 달 만에 복귀했습니다. 그가 혁명화를 갔다 왔다면 모든 간부가 꿈꾸는 가장 최단기 혁명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그는 “언제 다시 복귀할 수 있을까”라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겁니다. 복귀 후에도 “다신 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매일 다지며 살고 있겠죠. 예전엔 김정은이 부르면 무릎을 꿇었지만, 앞으론 기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만약 조용원이 요즘의 한국 노래방에 왔다면, 정말 눈물 흘리며 부를 수 있는 ‘인생의 노래’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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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사증’이 뭐길래… 북한군은 왜 목숨을 내거는가[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러시아 모스크바에서 9일 열린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28명의 국가수반이 선 붉은 광장 주석단에서 ‘원 오브 뎀’으로 비춰지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경험해보지 못한 다자 정상 외교가 부담이었을까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일등공신이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국의 군수물자를 탈탈 털어 보내주고, 심지어 참전 병력까지 보내준 국가 지도자는 김정은 밖에 없습니다.국가정보원은 지난달 30일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1만5000명 가운데서 4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중 전사자는 600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김정은도 지난달 28일 노동신문에 발표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군사위) 서면 입장문을 통해 러시아 파병 사실과 전사자 발생을 공식화했습니다.김정은은 “자랑스러운 아들들의 영용성을 칭송하여 우리 수도에는 곧 전투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며 “희생된 군인들의 묘비 앞에는 조국과 인민이 안겨주는 영생 기원의 꽃송이들이 놓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몇 명이 희생됐다는 언급은 없었습니다.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북한 당국은 러시아 파병 소식이 주민들 속에서 퍼지자 이를 유언비어로 규정하고 유포자 색출에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파병과 전사자 발생을 인정한 뒤엔 태도가 확 바뀐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를 주민 교육 선전용 소재로 사용할 것입니다. 북한의 선전 방식은 상투적이죠. 주민들을 모아놓고 중앙에서 파견된 강사들이 이런 식으로 떠들 겁니다.“미제와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우크라이나 괴뢰도당이 러시아 영토를 침범했다. 러시아가 곤경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을 때 일당백의 우리 특수병력이 전투에 참가해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우리 군 한 개 소대만 나가도 우크라이나 괴뢰 한 개 대대가 겁에 질려 도망가기 급급했다.”“세계 2위의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도 미제 장비로 무장한 우크라이나에 고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원한 포와 포탄, 미사일이 도착하자 상황이 급반전했다. 눈을 단 것처럼 정확한 포탄과 미사일이 목표를 정확히 타격하자 미제는 조선의 군사기술과 장비가 러시아보다 더 뛰어날 줄은 몰랐다고 아우성쳤다. 러시아도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는 조선이라고 감탄하며 각종 장비를 다 보내달라고 손을 내밀고 사정하고 있다.”실제 강연 내용은 더욱 황당할 겁니다. 북한의 내부 선전 강연 내용은 늘 저의 상상력보다 몇 발자국은 더 나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강군을 키워낸 김정은이 위대하다고 결론을 내고 침이 마르게 칭송할 겁니다.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장군님을 그리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는 ‘영웅전사’들의 스토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의 뒤를 따라 제2의 OOO(영웅이라는 병사의 이름)이 되자”는 구호가 전국 각지의 생산현장과 학교들에 걸리겠죠.그렇다면 북한 주민들은 저런 선전을 믿을까요. 안타깝지만, 아마 80%는 믿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세뇌가 먹히게끔 만들려고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폐쇄정책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주민들은 누군가의 아들딸들이 타향의 전쟁터에서 무주고혼이 된 것에 분노하지 않을까요. 당사자가 아닌 한 크게 분노할 사람도 많지 않을 듯합니다.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탈북민들의 많은 증언을 통해 유추해보면 북한은 전쟁을 치르지 않는 나라 중 남성 사망률이 아마 최상위권일 겁니다. 매년 다른 나라라면 죽지 않아도 될 수 만 명의 남성이 국책 사업과 생계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안전장비가 뒷전인 곳이라 큰 공사판이 벌어지면 기한을 맞추느라 어둠 속 야간작업에 내몰리다가 수십, 수백 명씩 죽어나갑니다. 각종 거리 건설이 벌어지는 평양에선 “올라간 아파트 층수만큼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 정설이 된지 오랩니다. 이처럼 죽음이 예사로운 일이 된 북한에서 600명 정도의 사망은 ‘새 발의 피’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거기에 전사한 군인에 대한 대우도 비난을 잠재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칩니다.북한은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의 가족에게 ‘전사증’이란 것을 발급합니다. 전사증은 김 씨 일가 초상화 다음으로 집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데, 이것은 “우리 가족은 이제 핵심계층으로 인정받았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북한에서 6.25전쟁 전사자 가족은 출신성분을 빨치산 가족 다음쯤으로 인정받습니다. 전사자의 부모나 형제, 자녀는 웬만하면 간부로 등용됩니다. 평양에는 핵심계층들이 모여 사는데, 잘 나가는 집안을 조사해보면 전사증이 한두 개씩은 나올 겁니다.그런데 현재 빨치산 가족은 벌써 3대, 4대까지 내려오며 혈통의 ‘약발’이 떨어졌고, 6.25전쟁 전사자 가족도 2대, 3대쯤으로 내려와 힘이 빠졌습니다. 70년 넘게 하도 많은 숙청이 있다보니 가계 출신성분의 순수성도 많이 오염됐을 겁니다.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은 정말 오랜만에 배출된 ‘따근따끈한’ 신흥 핵심계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부모형제는 간부 등용에서 최우선 순위로 선발될 것이고, 자식이 있다면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 김정은을 옹위하는 핵심 요직에 발탁할 것입니다. 전사자 가족은 출신성분의 우대에 더해 공급의 우대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해도 전사자 가족에겐 무조건 배급을 해줄 것입니다.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들에게 평양 거주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입니다. 핵심계층이 됐는데, 당연히 평양에서 살아야죠.평양 거주권은 ‘100만 달러짜리’라고 할 정도로 받기 어렵습니다. 평양 청년과 지방 청년이 결혼을 하면 남녀 상관없이 무조건 지방으로 내려 보낼 정도로 평양은 거주의 순수성을 고수합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당국의 허락 없이 이뤄질 수 없는 북한이니 원한다고 평양에서 살 수도 없는 것이죠.그렇지만, 전사자가 600명이라면 이들 가족 정도는 얼마든지 평양에서 살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이 최근 건설한 5만 세대 살림집 중 일부만 내주어도 주택 문제는 해결됩니다. 어쩌면 부상자 가족도 ‘공로’에 따라 평양이나 대도시로 이주를 허용할지 모릅니다.김정은은 평양에 전사자들을 기리는 전투위훈비가 건립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위훈비는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있는 ‘조국해방전쟁 참전열사묘’에 건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2013년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열사묘는 ‘인민군열사추모탑’을 중심으로 600개 이상의 묘가 자리 잡고 있는데, 꼭 6.25전쟁에서 죽지 않아도 안장이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 전사한 공군 조종사 27명,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전사한 공비 25명 중 24명도 여기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열사묘 주변의 공터도 많아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인민군열사묘’는 지난달 김정은의 참석 하에 성대하게 열린 화성지구 3단계 거리와 도보로 30분 이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3단계 아파트 1만 세대 중 우크라이나 전사자 가족에게 600세대 정도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을 겁니다. 유족들이 기념일마다 혈육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이들처럼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은 북한 당국에게도 나쁘지 않는 ‘그림’일 겁니다.평양에 아파트도 주고, 가족에게 출세를 보장해주며 특별 공급까지 해주니 북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사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는 것이죠. 건설현장 등에 내몰렸다가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가족은 “차라리 우크라이나에 가서 죽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또 세뇌와 별도로 전장에 나간 북한 청년들에게도 목숨을 내걸 동기부여도 어느 정도 생기는 것입니다.북한은 비판받아 마땅한 정책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체제를 위한 희생에 들이는 보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래야 충성을 짜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북한보다 훨씬 잘 사는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전사자 유족들은 2억~3억60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고, 2002년 제2연평해전 전사자 6명은 3000만~6000만원 수준의 보상금을 받았다가 나중에 1억4400만 원~1억8400만 원의 보상금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이 보상금으론 서울에 방 한 칸 구입하기도 어렵습니다. 사고로 사망하나 영웅적으로 전사하나 별 차이가 없고, 취직이나 공급의 특혜도 없습니다.사용도 하지 않는 지방 공항이나 도로 등에 수천 억, 수조 원씩 낭비하는 우리가 나라를 위한 희생에는 너무나 짠 것이 아닐까 돌아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최고의 예우와 보상이 이뤄지는 나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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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과 김옥주, 아직도 따뜻하네 [주성하의 ‘北토크’]

    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시선1# 김옥주의 ‘천하’는 언제까지?요즘 김정은의 관심은 새로 건조한 5000톤급 구축함 ‘최현호’에 꽂혔습니다. 재작년엔 정찰위성에 집착해 한 기를 쏘고 그해 연말 노동당 중앙위 8기9차 전원회의에서 “2024년에 3개의 정찰위성을 추가로 쏴올릴 데 대한 과업을 천명”했다고 하지만, 이 약속은 현재까진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작년의 관심사는 건설이었습니다. 평양 화성지구 건설을 비롯해, 압록강 수해 현장 건설 등에 분주히 찾아가 시찰을 했습니다.김정은은 늘 새로운 것을 가지는데 집착하는 성격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의 뇌를 좌우하는 4가지 호르몬(도파민, 엔도르핀, 아드레날린, 세로토닌)은 주로 “드디어 나도 가졌다”는 성취감에 가장 자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지속 또는 유지와 같은 이후에 일어날 일들은 그를 흥분시키지 못하는 듯 합니다.올해는 지금까지 볼 때 최현호가 그의 성취감을 가장 자극한 것 같습니다. 그는 4월 25일 남포항에서 열린 진수식에 참가해 낮부터 밤까지 이어진 행사 내내 앉아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습니다.28일과 29일 이틀 동안 진행된 최현호 무기 발사 실험에도 꼬박 참가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2023년 11월 21일 첫 정찰위성을 발사한 뒤 하루가 멀다하게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평양종합관제소를 찾아가 “오늘은 어디를 찍었다”며 자랑하던 때와 흡사합니다.최현호 진수를 경축하는 행사의 마감은 해군이 주최한 연회와 중앙예술단체들의 축하공연으로 마무리됐는데, 늘 그랬듯이 어둠 속에서 화려한 축포와 함께 진행됐습니다.북한은 2018년 탁현민 당시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현송월에게 “열병식을 밤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한 뒤로부턴 계속 야간에 행사를 진행합니다. 탁 비서관은 “(행사를) 밤에 해야 조명을 쓸 수 있고, 그래야 극적 효과가 연출된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밝게 보여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어둡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그래서 밤 행사가 낮 행사보다 감동이 배가된다”고 말했다고 2022년에 회상했습니다.그 말을 따라 밤에 해보니 김정은의 감동이 배가됐는지, 이젠 야간 행사가 북한의 표준으로 굳어졌습니다.최현호 진수식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은 이날 행사를 1시간 넘게 방영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공연에서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화려한 축포도, 공연 내내 줄을 맞춰 차렷 자세로 서있던 해군 장병들도 아니었습니다.가수 김옥주가 공연 내내 거의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장 눈길이 갔습니다. 새 것을 좋아하는 김정은과 어울리지 않게, 김옥주는 지금까지도 계속 김정은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는 것입니다. 1985년생으로 김정은보다 한 살 어린 것으로 알려진 김옥주는 이설주의 금성학원 선배라고 합니다. 김옥주는 2021년 6월 20일 김정은이 참석한 노동당 제8기 3차전원회의 축하 국무위원회연주단 공연에서 전체 26곡 중 22곡을 홀로 불러 주목을 받았던 가수입니다. 앞서 2월 열린 ‘설명절 경축 공연’에선 김정은의 앵콜을 두 번 받아 한 무대에서 같은 노래를 세 번이나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김옥주가 이후 4년 가까이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 김정은의 신임을 여전히 넘치도록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김옥주는 은하수관현악단 시절이던 2012년 설 명절 공연에서 이설주와 함께 공연했던 가수입니다. 물론 그땐 쟁쟁한 여가수들이 많아 김옥주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2018년 4월 3일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공연 때 김옥주는 이선희와 함께 ‘J에게’를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계기였습니다. 당시 김옥주는 소좌(소령) 계급의 모란봉악단 성악과장이었습니다.2018년 2월 북한 예술단의 방한 공연 때만 해도 송영, 류진아, 라유미, 김주향 등 유명 여가수들이 많이 활동했는데, 지금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직 김옥주만 홀로 살아남았습니다.김정은 시대 수많은 숙청의 바람이 불었지만, 김옥주는 은하수·청봉·모란봉·삼지연 악단에 이어 현재의 국무위원회연주단까지 무려 5개의 예술단을 거치며 살아남았습니다.2021년엔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는데, 계급도 대좌(대령) 이상급으로 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의 신임만 받으면 사실 계급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대좌도 대장 이상의 발언권이 있는 것입니다. 김옥주에 대한 김정은의 따뜻한 순정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이달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되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80주년 기념일 행사에 북한의 열병식 부대와 공연단이 참가한다는 말들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북한 특수부대들이 열병식에 나올 법도 하지만, 북한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북한은 열병식 참가 군인을 키 172㎝ 이상만 뽑는데, 그래야 누가 봐도 북한군이 멋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수부대는 키가 작은 군인들도 많기 때문에, 일부러 열병식에 부대를 보낸다면 북한에서 따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공연단이 가게 되면 김옥주가 가게 될까요. 그가 또 모스크바에서 독무대를 펼치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그럼 김옥주는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를까요?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보십시오. 2018년에 당시 54세였던 이선희와 33세였던 김옥주가 함께 ‘J에게’를 부르는 영상입니다.시선2# ‘인민복’ 버리는 김정은‘최현호’ 진수식 관련 일련의 행사에서 여러 가지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습니다.12살에 2차 성징까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김주애가 아버지와 그 어느 때보다도 화기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도 그렇고, 최현호에 설치된 5인치(127㎜) 함포에도 관심이 갔습니다.함포의 경우 러시아와 중국 등 북한의 동맹국들은 대구경 함포로 130㎜를 사용합니다. 127㎜ 함포는 미국과 한국 등 서방 선진국들이 쓰는 대구경 함포의 표준입니다. 북한이 왜 굳이 동맹국의 무기 체계를 사용하지 않고, 서방 국가들의 무기 체계를 차용했는지는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런데 이날 행사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북한 해군 정복의 변화입니다. 병사들의 군복은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군관(장교)들의 군복은 남녀 모두 달라졌습니다. 최근 북한 육군의 복장이 ‘중국화’가 되고 있는데, 해군 역시 그러했습니다.군관들의 제복에서 견장(계급장)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오른쪽 가슴에 계급과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명찰이 붙었습니다. 명찰 위에 붙은 마름모 모양의 배지는 ‘해군군관학교’를 이수한 자들에게 주는 졸업 배지로 보입니다. 여군의 모자도 달라졌습니다.이것이 왜 중국을 따라했다고 할 수 있는지 아래 사진들을 보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아래는 중국군 제복인데, 해군만 견장이 없습니다. 북한도 지금 그렇게 바뀌었습니다.중국군 해군 정복만 따로 살펴봐도 북한과 같습니다.물론 북한 해군의 복장은 한국 해군과 닮았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도 해군 장교복에 견장이 없고, 여군 모자도 비슷합니다.중국이나 한국의 해군 정복이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었는데, 북한이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은 인민복 스타일의 군복을 착용했는데, 이제 인민복을 버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이것이 해군에게서만 일어나는 변화는 아닙니다.북한 중학생 교복도 과거엔 목까지 단추를 닫는 인민복 스타일이었지만, 지금은 옷깃이 있는 양복으로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육군이나 공군도 인민복을 버릴지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북한에서 교복이나 정복의 변화를 지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김정은입니다. 김정은의 지시 없이 함부로 옷을 변화시켰다가 목숨을 내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추해볼 때 인민복은 김정은의 취향이 아니라는 의미기도 합니다.그의 부친 김정일은 인민복 스타일과 잠바를 고집했지만, 김정은은 취향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나 그해 6월 싱가포르 북미 회담 때처럼 가끔 인민복을 입을 때가 있긴 하지만, 북한 내부에선 그런 옷을 거의 입고 다니지 않습니다.목을 조이는 인민복이 싫었을까요. 그런데 북한에서 인민의 목을 조이는 것은 옷이 아닌데 말입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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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은 미국 핵심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

    산업통상자원부(장관 안덕근)와 KOTRA(사장 강경성)는 29일 서울 코엑스에서 ‘협상의 시간, 협력의 해법’이라는 주제로 ‘2025 글로벌 신통상 포럼’을 개최했다. 이번 포럼은 2월 18일 발표된 ‘범부처 비상수출 대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케이트 칼루트케비치 맥라티 전무이사가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칼루트케비치 전무이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무역실장과 백악관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2기 행정부의 가능성과 그에 따른 전략을 제시했다. 칼루트케비치 전무이사는 “한국은 방산, 조선, 반도체, 의약품, 에너지 등 미국이 육성하고자 하는 핵심 산업에 있어서 불완전한 공급망을 보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은 미국 내 강력한 투자 기반을 활용하고, 현지 협력사들을 소통 채널로 활용해 미국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양주영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전략연구실장, 김영만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정책총괄과장, 유종철 대한상공회의소 APEC협력센터장이 한미 간 공급망 협력 구조, 아웃리치 현장 분위기, 통상환경 변화에 대한 정부와 기업 차원의 대응 방향 등을 설명했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우리 기업 대응책으로 조명된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은 글로벌 사우스의 시장 기회와 경제 협력 방향을 소개했다. 전임 KOTRA 서남아지역본부장였던 빈준화 KOTRA 글로벌공급망실장은 인도, 강준모 LG 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동남아시아에 대하여 진출 사례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시장 정보를 공유했다. 또한 글로벌 사우스 지역에 신규 진출하기 위해 우리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정부 개발협력사업인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과 경제혁신파트너십프로그램(EIPP)의 성공 사례들도 소개됐다. 한편 KOTRA는 미국의 통상 조치와 그에 따른 대응 방안 공유를 위해 10일부터 매주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 설명회’를 열고 있다. 설명회는 포럼과 연계해 진행됐으며, 미국의 주요 관세 조치 및 미국·멕시코·캐나다무역협정(USMCA) 동향, 중국의 대응, 원산지 관리 및 품목 분류 전략, 무역 리스크 대응 방안 등 실무 중심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 설명회’는 지금까지 약 1000명의 수출 및 해외 진출 기업 관계자가 온·오프라인으로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포럼 현장에서는 참가 기업을 위한 일대일 상담 부스도 마련됐다. 강경성 KOTRA 사장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에서 우리 기업이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는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포럼을 마련했다”면서 “KOTRA는 85개국 131개 무역관을 통해 현장 비즈니스 기회를 빠르게 포착하여 우리 기업에 전파하고, 정부와 함께 우리 기업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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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 해외 여성 노동자들의 비극

    “시집 잘 가려다 홀아비한테 가게 생겼다.”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 노동자 수만 명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요즘 세계의 관심사가 러시아 파병 북한 군인들에게 집중돼 있다 보니 중국에서 감금 노예처럼 일하는 수만 명의 북한 여성 문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노동자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 파견돼 최소 6년 넘게 갇혀서 일만 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귀국 지시는 없다. 현지 관리자들은 지난해 1월 중국 옌볜에서 일어났던 것 같은 북한 노동자 폭동이 또다시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 노동자들이 고용된 대다수 공장들에서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최근 각 공장마다 매달 문제를 일으킬 만한 몇 명을 추려서 귀국시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노동자 중엔 중국에서 3년 정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좀 모아 시집갈 밑천을 마련할 생각으로 온 처녀가 많다. 하지만 코로나19 국경 봉쇄가 끝났어도 귀국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20대에 나온 여성들 나이가 어느새 30세가 넘어가게 됐다. 북한에선 30세 넘은 여성은 노처녀 중의 노처녀로 간주돼 결혼이 어렵다. 돈이 좀 있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6년 정도 일하면 평균 5000달러 정도 모으게 된다. 야근과 특근을 도맡아 죽어라 일만 하면 8000달러까지 벌 순 있지만 이는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 돈으로 북한 대도시에서 집 한 채 사기도 어렵다. 아이를 북한에 두고 온 유부녀 노동자들도 6년 넘게 집 소식을 알 수 없어 화가 나긴 마찬가지다. 북한은 중국에 나와 있는 노동자들이 가족과 연락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집 소식을 들으면 동요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편지도 전화도 할 수 없으니 집에서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동안 번 돈을 고향에 보낼 수도 없다. 언젠가 귀국하더라도 이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일부 먼저 귀국한 노동자 중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3년이나 모르고 있었다”거나 “가족이 먹고살기 힘들어 집까지 팔고 거지가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 상처는 평생 아물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파견 노동자들을 귀국시키지 않는 이유는 대체할 신규 노동자 파견이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북-중 관계가 악화돼 온 결과 중국은 유엔 대북제재 결의를 이유로 북한 노동자를 받지 않고 있다. 북한은 중국에 파견된 노동자 월급의 80% 이상을 빼앗아 간다. 노동자들은 노동당의 중요한 돈줄인 것이다. 중국에 파견된 여성들은 피복, 수산물, 식당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중국 공장들은 남성보다 관리가 쉬운 여성들을 선호한다. 숙소만 마련해 주면 북한 관리자들이 알아서 노동자들을 감금하고 통제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파견된 공장마다 ‘삼촌’이라 불리는 북한 남성 부사장이 한 명씩 같이 나가 있다. 이 삼촌들이 공장 소속 여성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실질적 관리자다. 삼촌은 나이 많은 여성을 반장이나 조장으로 임명해 통제하게 한다. 여성들을 관리해야 하니 북한 측 사장으로 여성을 내세우긴 하지만 사실상 ‘바지 사장’일 뿐이다. 요즘 바지 사장들은 “이젠 총각에게 시집가기 틀렸다”고 한탄하는 노동자들을 “간부 나부랭이들이 참 너무하다. 자기 자식이면 그러겠느냐”며 열심히 다독여 준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겁이 나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의 고혈을 짜내서 먹는 데 맛을 들인 북한은 앞으로도 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달 중순 한 러시아 매체에는 모스크바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 근로자 수백 명이 일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들은 ‘러시아판 쿠팡’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와일드베리스’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있었다. 중국에 노동자들을 파견하기 어려워지자 슬그머니 러시아에 보낸 것이다. 러시아에 파견된 노동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점점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김정은은 이들이 번 돈을 빼앗아 평양에 고층 아파트들을 짓고 인민 낙원을 만든다며 생색을 내고 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죽는 청년들의 목숨과 노예가 된 여성들의 눈물로 쌓은 ‘낙원’ 위에서 김정은의 웃음소리만 높아진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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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OTRA, 美 상호관세 전면전 맞서 수출기업 보호 총력 대응

    산업통상자원부와 KOTRA가 미국 정부의 상호관세 부과 등 통상 환경 변화에 맞서 총력 대응을 펼치고 있다. KOTRA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1월부터 ‘수출투자비상대책반’을 가동하며 급변하는 통상환경 속 수출기업을 위한 대응 방안을 발 빠르게 준비해 왔다. 2월부터는 ‘관세대응 119’ 통합상담창구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달 1일까지 1324건의 상담 문의가 접수됐다. 이 중 관세 관련 문의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미국, 멕시코, 캐나다 등 20개 해외무역관에는 헬프데스크도 설치해 현지 진출 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2월부터 대구경북, 충북, 강원, 인천, 울산 등에서 ‘찾아가는 관세 대응 릴레이 설명회’를 개최해 지역·업종별로 세분화된 관세 대응 전략을 전파해 왔다. 지난달 26일에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통상환경 전환기, 수출기업 지원 종합설명회’를 열었는데, 이날에만 수출기업과 정부, 유관기관 관계자 등 1000여 명이 몰렸다. 하루 동안 일대일 컨설팅 387건, 지원사업 안내에 727명이 문의하는 등 글로벌 통상 전쟁을 앞두고 대비책 마련에 고심하는 기업인들의 상담이 잇따랐다. 실제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2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상호관세 부과를 발표함에 따라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산업부와 KOTRA는 본격적인 발효를 앞둔 9일 이후 수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고자 실질적인 지원책 마련과 실행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관세 대응 119는 통합 상담 창구로서의 기능을 더욱 보강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을 확대해 ‘관세 대응 119 종합지원센터’로 확대 운영한다. 또한 KOTRA의 전문 상담 인력을 확대하고, 미국 현지 관세사를 활용한 해외 상담 채널을 연계할 예정이다. 관세 대응 바우처 사업은 산업부와 연계해 1일부터 참여 기업 모집을 시작했는데, 관세 영향 분석, 피해 대응, 대체 시장 발굴 등 ‘관세 대응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 바우처 서비스와 달리 KOTRA 해외무역관이 발굴한 해외 현지 관세·법률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을 수 있어 기업별 맞춤형 수출 해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KOTRA는 대체 시장과 사업 파트너 발굴 등 수출 활로 모색에도 힘쓰고 있다. 이달 10일부터 매주 목요일 KOTRA 본사 국제회의장에서 ‘통상환경 비상대응 정기설명회’를 개최한다. 29일에는 코엑스에서 ‘글로벌 신통상 포럼’도 개최해 지역별 시장 환경, 대체 시장 기회 요인을 소개할 예정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무역실장을 지낸 케이트 칼루트케비치가 기조연설과 패널토론에 참여해 미국 통상 정책 전망과 기회요인에 대해 설명한다. 강경성 KOTRA 사장은 “미국 상호관세 발효가 우리 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과 수출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KOTRA는 관세 대응 119의 기능을 강화하고 유관기관과의 협업 등 확대 개편을 통해 범정부 총력지원 체계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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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일본 스케이트와 핵추진잠수함

    2월 초 2025 하얼빈 겨울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북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보고 마음이 짠했다.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은 부츠처럼 발목을 높이 잡아주는 스케이트를 신어야 부상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선수들은 마치 초보자용처럼 발목이 낮은, 한눈에도 저렴해 보이는 스케이트를 신고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그걸 신고 렴대옥-한금철 조는 은메달까지 받았으니, 각각 26세와 25세가 되도록 저들이 흘렸을 피눈물은 가늠하기 어렵다.이번 겨울아시안게임에 북한은 단 3명의 선수만을 보냈다. 하얼빈은 북한에서 열차로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지역에서 치러지는 국제대회라고 할 수 있음에도 3명밖에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북한의 겨울 스포츠는 피겨스케이팅을 빼곤 사실상 전멸 상태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북한은 한때 스피드스케이팅이 매우 강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메달을 차지한 선수가 바로 북한 한필화 선수다. 그는 1964 인스브루크 겨울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다. 이는 아시아 여성 선수 최초의 겨울올림픽 메달이기도 했다.그런 전통을 갖고 있음에도 지금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졌다. 한국은 쇼트트랙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있고,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세계 기록을 세운 이상화나 올림픽 금메달을 받은 모태범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계속 배출한다. 같은 민족인 데다 지옥 훈련이라면 세계 최고 수준일 북한이니 우수한 선수들을 배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그런데도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시설과 장비 문제다. 북한에도 당연히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있지만 훈련장이 없어 늦가을에 돼서야 함경남도 부전에 가서 야외 훈련을 시작한다. 장진호 바로 옆인 부전은 춥기로 악명 높다. 영하 수십 도의 날씨에 밖에서 훈련을 하다 보니 동상을 입거나 방광염에 걸리고, 발톱이 빠지는 일이 잦다.선수들은 실력에 따라 스케이트를 차등 지급받는데, 4등급은 북한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이게 스케이트냐 할 정도로 한심한 것이다. 3등급으로 인정되면 러시아제 스케이트를, 2등급으로 인정되면 독일제 스케이트를 준다. 국가대표급인 1등급으로 인정받은 선수 한두 명에게는 일본제 스케이트를 지급한다. 그런데 이 외제 스케이트도 새것이 아니다. 선배들이 타고 또 타던 것이라 스케이트 날이 쉽게 무뎌져서 전문적으로 날을 갈아주는 사람을 매 조에 한 명씩 두고 있다. 선수보다 스케이트가 더 귀한 상황이니 스키니 하키니 하는 종목은 어림도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이런 북한에서 종목을 막론하고 우수한 선수들이 나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하지만 이런 가난하고 슬픈 이야기들은 두꺼운 얼음장 아래에 깊숙이 숨겨져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북한의 모습엔 허세만 가득하다.지난달 김정은은 전략핵잠수함(SSBN)인 ‘핵동력전략유도탄잠수함’ 건조 현장을 공개했다. SSBN은 세계 6개국밖에 보유하지 못한 수십억 달러짜리 무기이다. 유지비도 너무 비싸서 공짜로 줘도 운용하지 못할 나라들이 태반이다. 지난달 말에는 조기경보통제기도 공개했다. 북한과 동일하게 Il-76 수송기 기반인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는 업그레이드 성능에 따라 가격이 4억∼6억 달러에 이른다.핵무기에, 미국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정찰위성 등등 북한이 최근 공개하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것이다.무기뿐만이 아니다. 평양에는 화려한 거리들이 매년 건설되고, 원산엔 제주도 전체 객실 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객실 2만 개짜리 거대한 해안관광단지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것도 분명히 북한의 현실이다. 김정은은 그걸 봐달라고 딸과 함께 열심히 돌아친다. 그의 눈과 귀는 늘 무기나 건물에 머물러 있을 뿐,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그러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장에서 죽어가는 수천 북한군 병사의 울부짖음이나 최전방에서 지뢰를 매몰하다 수시로 사고로 죽어가는 군인들의 비명이 들릴 리가 만무한 것이다.목숨이 하찮은 곳에선 꿈도 하찮다. 너덜너덜해진 일본제 스케이트를 받는 것이 북한 빙상 선수들의 꿈이다. 그 꿈을 이뤄도 렴대옥처럼 외국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의 스케이트를 부럽게 바라볼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돌아갈 뿐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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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한국 국방 이대로 괜찮습니까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3년째 고전하는 것을 보며, 비록 군사전문가는 아니지만 많은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다. 전쟁 양상이 확 바뀌는데 우린 괜찮을까. 병종별로 보자. 한국 육군의 자랑은 최강 화력의 7기동군단이다. 세계 정상급 K2 흑표 전차 수백 대로 북진 선봉에 선다. 두꺼운 전면 장갑으로 포탄을 튕겨내며 전진하는 전차는 ‘지상전의 왕자’였다. 그런데 이 왕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힘을 못 쓴다. 그 넓은 평야에서도 중대급 전차전조차 벌어지지 않고, 포탄을 정면으로 튕겨내며 버티는 일도 거의 없다. 파괴된 전차 대다수는 휴대용 미사일이나 드론, 지뢰에 상부 또는 하부가 뚫렸다. 만약 7군단이 북진할 때 1인칭 드론 수백 대가 공격하면 막을 수 있을까. 북한이 특정 신호에 일제히 수십 m 상공에 날아올라 내리꽂히는 능동형 지뢰라도 개발하면 어떻게 될까. 전차 설계는 이대로 괜찮은가. 강력한 전면 방탄 성능에 집중해온 세기의 개념을 바꿔야 할 때가 오진 않았을까. 장비만 문제가 아니다. 가령 한국군이 강철 체력의 특등사수 육성에 열심인 동안, 북에선 지금 여군들이 드론 조종을 맹훈련하고 있진 않을까. 공군은 괜찮은가. 지금까지는 군용기의 공중전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최고 성능을 위해 비행기는 점점 비싸진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공중전은 전쟁 초기에 좀 벌어졌지, 이후엔 사라졌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에서 도입한 F―16 전투기는 순항미사일 격추 임무에 사용되고 있고, 러시아 군용기는 멀리서 공대지 미사일이나 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강력한 대공 미사일들이 버티니 군용기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된다. 이럴 바엔 수천억 원짜리 다목적 비행기 한 기보단 값싼 순항미사일 격추용 무인기나 폭격 전용기 수십 기를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진 않을까. 엄청난 돈을 쓰는 해군엔 물음표가 가장 많이 붙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해군력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러시아 해군은 꼼짝 못 한다. 전쟁 초기 1조 원 가치의 러시아 흑해함대 기함 모스크바함이 미사일 단 두 발에 격침됐다. 강력하다고 알려졌던 흑해함대가 우크라이나 곡물수송로조차 통제하지 못한다. 뒤로 밀려나 구석에 숨었는데도 전력의 30% 이상인 수십 척의 함정을 앉은 자리에서 잃었다. 1조 원이 넘는 이지스함을 찍어내는 한국 해군이 유사시 돈값을 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북한 해군을 상대로 이지스함까지 쓸 일은 없을 것 같고, 중국을 상대한다면 수십, 수백 기씩 떼로 날아들 최신 극초음속 미사일을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지스함은 사례일 뿐이다. 바야흐로 바다를 휘젓는 수중 자폭 드론, 레이더를 피해 수면을 스치듯 날아와 공격하는 드론, 레이더에도 걸리지 않는 골판지 드론 시대가 오고 있다. 북한이 과거의 포사격과 같은 전통적인 공격 대신에 광섬유로 연결해 전파 방해도 받지 않고 정확도도 뛰어난 골판지 드론들을 대거 날려 보내면 어떻게 막아야 할까.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해병대 격인 해군육전대가 매우 강했다. 그런데 전쟁 3년 동안 상륙작전은 해보지도 못한 채 전선에서 보병대처럼 소모된다. 미군도 해병대를 없애고 있는 흐름에 우리도 굳이 해병대여야만 하냐는 질문도 해야 한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확전 우려 때문에 쏘지도 못할 비싼 미사일을 잔뜩 실은 함정보단 우리에게도 수십 km 밖에서도 드론 1대와 군함 1척을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드론정들이 시급할 수 있다. 서해 5도를 드론의 섬으로 바꾸면 값비싼 육해공 장비의 사용을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북한의 도발을 더 확실히 견제할 수 있다.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은 비교 대상이 안 될 정도지만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비싼 무기만 찾고 또 그것이 아까워 놓지 못하는 사이, 북한은 값싼 드론에 올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수십만 명의 희생과 바꾼 러시아의 전쟁 경험을 고스란히 가져가는 사이, 우린 우크라이나에 참관단조차 보내지 못하고 있다. 줄어드는 병력 자원에 대한 걱정만큼 싸고 효율적인 군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인공지능(AI)까지 더해질 미래 전쟁의 설계는 누가 해야 하는가. 승진훈련장의 판박이 훈련을 수십 년 동안 보면서 결정권자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하긴 어려운 일이다. 경험을 무시할 순 없지만 상상과 혁신은 50, 60대의 몫이 아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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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돈주머니 불룩해진 김정은의 채찍질

    이달 10일 신의주 인근 위화도 벌판엔 1만 명은 족히 넘을 북한 군인이 집결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637년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날 김정은은 위화도에 450정보(약 4.5㎢) 규모의 온실농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 북한 인민에겐 온실에서 생산된 토마토, 오이보다는 식량이 더 시급하다. 쌀 1kg은 1년 전에 비해 60% 오른 북한 돈 8000원에 거래되고, 석탄을 비롯한 땔감 가격도 최근 두 달 동안에만 50% 이상 뛰었다. 달러 환율은 1년 전보다 무려 2.5배나 올랐다. 인민은 식량과 땔감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주린 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는데 김정은에겐 대규모 온실 건설이 우선이었다. 북한은 생산비를 시장에서 환수하는 시장경제 체제가 아니어서 초대형 온실 운영에 드는 연료, 전력, 비료 등을 장기적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5년 내 건설한 다른 3개의 초대형 온실은 가동되고 있다. 인민의 땔감은 없어도 온실 난방용 석탄은 보장된다는 의미다. 김정은의 ‘삽질’ 구상은 온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올해 통이 커졌다. 지난해엔 매년 지방공업공장 20개를 짓겠다고 하더니 여기에 더해 올해는 군 병원 및 종합봉사소 3개를 시범적으로 건설하고 내년부터는 20개씩 짓겠다고 공언했다. 비싼 의료 장비를 수입해야 하는 병원 건설은 지방공장 건설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 김정은은 또 평양 1만 가구 주택 공사를 앞으로도 이어가고, 원산갈마관광지구를 6월까지 개장하겠다고 밝혔다. 확실히 김정은의 자신감과 씀씀이가 달라졌다. 그의 돈주머니는 어디에서 채워졌을까. 전통적으로 북한은 북-중 교역을 통해 외화를 벌었다. 사상 최강의 유엔 대북제재가 시작되기 직전인 2016년에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88.2%였고, 무역 규모는 58억 달러였다. 하지만 지난해 북-중 무역 규모는 21억8000만 달러로 8년 전의 37.6%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2016년에 26억 달러였던 대중 수출액이 지난해엔 3억2000만 달러로 급감했다. 요즘 최악으로 악화된 북-중 관계까지 감안하면 김정은이 중국에서 외화를 조달하긴 어렵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기간인 2020년 1월부터 2023년 7월까지 3년 7개월 동안 북한 국경은 꽁꽁 닫혔고 대외 교역도 중단됐다. 김정은 돈주머니가 텅텅 비어야 정상이지만 최근 건설 행보는 그와는 반대다. 최근 1년 남짓 김정은이 어디선가 많은 돈을 얻게 됐다는 의미다. 추정 가능한 자금 출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 심지어 파병까지 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얼마나 받았는지는 양국이 침묵하는 한 외부에서 알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이후 뒤따를 대규모 건설 수요에 북한 노동자들이 대거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원산갈마관광지구를 러시아 전상자(戰傷者)들을 위한 휴양시설로 전용한다면 김정은의 돈주머니는 더욱 불룩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북한 해커들의 활약이다. 21일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비트에선 사상 최대 해킹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해킹조직 ‘라자루스’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무려 15억 달러 상당의 암호화폐를 빼갔다. 또 미국 암호화폐 분석회사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해커들이 탈취한 암호화폐 액수는 13억4000만 달러로 전 세계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의 61%에 이른다. 김정은은 이렇게 훔친 돈만으로도 충분히 대규모 토목공사를 감당할 수 있다. 현재 북한 해커 대다수는 중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을 막지 못한다면 ‘도둑놈의 자신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정은이 대규모 토목공사에만 돈주머니를 여는 이유는 뭘까. 건설 자재를 외국에서 사올 돈으로 러시아에서 밀만 수입해도 장마당 물가 상승으로 인한 인민의 아우성은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역사 속에 사라진 수많은 독재자가 이미 해 주었다. 독재자에겐 국민을 채찍질할 구실이 필요하다. 채찍을 휘두르기엔 대규모 토목공사만 한 것이 없다. 인민이 마감이 정해진 삽질 과제에 정신을 쏟다 보면 불평할 여유도 없게 된다. 김정은은 그저 채찍만 열심히 휘두르면 된다. 생활고로 인한 인민의 비명이 높아질수록 김정은이 휘두르는 채찍 소리는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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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트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해외시장 진출에 달려”

    “스타트업 세계화의 교두보를 마련하겠다.” 고려대 크림슨창업지원단을 이끄는 이병천 단장(생명공학부 교수·사진)은 18일 “기존 스타트업 발굴 및 육성 정책을 고도화해 스타트업 세계화와 해외 시장 진출에 주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스타트업 세계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2022년부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인 CES에 참가해 시장 흐름과 부문별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왔다. 이 밖에 세계 최대 이동통신 박람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아시아 최대 규모 개방형 혁신 비즈니스 매칭 행사 ILS, 유럽 창업 전시회 SLUSH, 세계 최대 생명공학기술 콘퍼런스인 BIO USA 등에 꾸준히 참여했다. 해외 창업 생태계의 장점을 조사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지난해에는 해외 투자자와 대학, 기관을 초청해 지식을 공유하고 네트워크를 넓히는 고려대 글로벌 스타트업 콘퍼런스를 열었다. 지난달 ‘CES 2025’에서는 단독관을 운영해 교내 스타트업이 주목받도록 도왔다.” ―어떤 주요한 성과를 낳았는지 설명해 달라. “고려대가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무대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스타트업들이 매년 CES 혁신상을 받았다. 특히 교원 창업기업 큐심플러스(대표 노광석)는 2023년부터 3년 연속 CES 혁신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여러 교내 스타트업이 세계 곳곳에 이름을 알렸다. 크림슨창업지원단의 성과이면서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꾸준히 성장할 역량을 가졌다는 강력한 증거다.”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은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대학 창업을 더욱 활성화해 교내 스타트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촉진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다. 투자자, 연구기관, 대학, 기업, 시장을 아우르는 해외 창업 생태계와 교내 스타트업을 직접 연결하는 글로벌 콘퍼런스를 개최해 창업기업 네트워킹을 더욱 강화할 생각이다. CES를 포함해 해외에서 열리는 딥테크 및 주요 기술 관련 행사에 고려대 단독으로 스타트업 전시관을 마련하는 등 홍보 전략을 고도화할 방안을 짜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 스타트업이 세계적인 투자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아 막대한 투자금을 유치하는 동시에 해외 딥테크 기업과 힘을 합쳐 성과를 낼 수 있는 전략과 정책을 펼 계획이다. 해외 시장을 그저 경험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데서 나아가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중견 업체로 도약할 수 있도록 판로 개척도 지원하겠다.” ―크림슨창업지원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고려대와 크림슨창업지원단의 가장 큰 목표는 ‘대학이 발굴하고 육성한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성장,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연구기술 기반 창업 지원을 받은 스타트업이 해외에 진출해 시장에서 성과를 만들며 결국에는 나라 경제 성장에 기여하도록 도울 생각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해외 투자 유치에 힘을 쏟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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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16명 살해범의 ‘억울한’ 북송

    2022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 전문가로서 문재인 정부 시기에 벌어진 북한 어민 북송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게 물었다. 당시 그는 윤석열 대선 캠프의 영입 1호였고, 안보 분야 이슈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북송 사건을 더불어민주당을 공격할 적합한 소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북송된 북한 어민 두 명이 무고하다고 믿는 듯했다. 그래서 이런 취지로 대답을 했다. “그들이 정말 동료 16명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모든 증거는 현 정부에 있는데 무고한 어민을 북송했다고 공세를 폈다가 감당할 수 있는가. 청와대의 전화 한 통에 나포에 참가했던 군인들과 조사에 참가했던 국가정보원, 국방부, 경찰 조사관 등 수백 명이 일제히 무고한 이를 북송하는 반인륜적 범죄에 동참해 입을 닫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대선에서 내걸 공약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16명을 죽인 흉악범 인권 문제를 전면에 거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 집권해서 재조사했을 때 이들이 무고한 어민이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니 그때 가서 단죄해도 늦지 않다.” 윤석열 캠프는 대선 기간엔 이 사건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이 사건부터 꺼내 들었다. 대통령실은 북송 사진들을 공개하면서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힘이 만든 ‘국가안보문란 실태조사TF’의 한기호 위원장은 “16명을 살해했다는 것은 북한이 탈북 브로커를 송환하기 위해 거짓말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와 집권당의 누구도 이들이 흉기로 하룻밤 새 동료 16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지금도 문재인 정부가 무고한 탈북 어민들을 강제 북송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의 송환 결정에 참가한 문재인 정권 안보라인 핵심 인사들에 대한 결심 공판이 마침내 지난달 13일 열렸다. 대통령 구속 사태 속에서 사람들의 이목도 끌지 못했다. 검찰은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전 국정원장에겐 징역 5년을, 노영민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겐 4년을,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에겐 3년을 구형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서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라고 규탄했던 것에 비하면 시시한 구형이다. 이달 19일에 열릴 1심 선고에서 북송을 범죄로 볼 것인지, 통치 행위로 볼 것인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결심 공판 이전의 재판들은 모두 비공개로 진행됐다. 국가 안보와 관련한 기밀 사항 보안이 이유였다. 검찰은 북한 어민의 나포 과정과 진술 조서, 북한 통신 감청 기록 등을 무려 2년이나 샅샅이 살펴보고, 수많은 참고인 조사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16명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찰 공소장엔 “탈북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받고 죄책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북송된 흉악범들은 탈북 과정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조업 중에 동료들을 죽였고, 일당 중 한 명이 체포되자 도주한 것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오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한국 해군과 조우하자 이틀이나 도주했고, 결국 경고사격과 특수부대의 선상 진입으로 제압돼 체포됐다. 그러자 할 수 없이 귀순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특대형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한 자들이라 해도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국민 모르게 서둘러 북송하려 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 맞다. 흉악범도 재판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다만 모든 물증을 인멸한 흉악범들이 남한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이들 이전에 북한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가 23명이나 되지만 이 중 우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문제는 북송 어부들이 무고한 듯 몰아갔던 정부와 집권당의 그 누구도 “그들이 살인자는 맞지만, 그럼에도…”라고 솔직히 말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돼 우리 동네에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국민들이 “집권하자마자 16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자들의 인권 문제부터 챙긴 윤석열 정부가 훌륭하다”고 했을까.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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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차 밀던 북한군, 외제차 복원 달인으로 거듭나다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993년 북한군에 입대한 임충익 씨는 제대할 때까지 10년 내내 ‘삽질’만 했다. 10년 동안 휴가로 집에 간 적은 단 한 번. 그것도 사흘뿐이었다. 10년 동안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사격을 한 것은 훈련에서 실탄 20여 발을 쏴 본 것이 전부다.임 씨 사례는 예외적이진 않다. 북한군에는 임 씨처럼 군인 임무보다는 제대할 때까지 삽질만 죽도록 하는 청년이 많다. 임 씨는 그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그가 처음 입대한 부대는 815훈련소(평양방어사령부)였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대대에 배속되자마자 평양-향산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 나갔다. 공사판에선 돌을 나르고 교각을 세웠다.일이 힘든 것보다는 배고픈 것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옥수수밥에 염장(鹽藏) 무 반찬, 소금으로 간을 맞춰 멀겋게 끓인 시래기국만 먹어야 했다. 돌도 삭인다는 18세 나이인지라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면 먹을 것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1년 넘게 공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대대가 해산됐다.두 번째로 배속 받은 부대에서는 금강산발전소 건설 현장을 나갔다. 부대는 금강산댐에서 원산까지 연결하는 길이 45㎞의 도수(導水)터널을 뚫는 일을 맡았다. 물길이라 하지만 바닥 폭 15m, 천정 폭 10m, 높이 11m의 어마어마한 굴이었다. 유사시 북한군 기계화 군단이 폭격을 피해 원산까지 이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임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파(發破) 뒤 돌을 광차(鑛車)에 실어 굴 밖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공사 현장이 깊은 산골에 있는 데다 외출도 하지 못하고 갱 안에서만 살다 보니 사회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 숱한 사람이 굶어 죽은 것도 알지 못했다.당시 금강산발전소 건설 군인들에게는 매일 안남미 1kg이 식량으로 공급됐다. 안남미(米)는 영양가가 낮아 빨리 허기가 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량대로 병사들에게 공급됐다면 배고픈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대로 공급된 식량을 간부들이 다 빼돌려 일반 병사들은 늘 허기져 있었다. 반면 대대장이나 정치지도원 같은 간부들은 피둥피둥 살찐 얼굴이 늘 시뻘겋게 돼 돌아다녔다. 부하들 식량을 빼돌려 고기와 술로 바꿔 먹었던 것이다.안전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갱내에서 일하다 보니 사고도 잦았지만 다행히 임 씨는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 한번은 돌을 실은 광차를 몰고 나오는데 뒤에서 천장이 무너지는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터널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제일 많이 죽는 부대는 발파 작업을 담당한 공병국(工兵局)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공병국 소속 군인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저녁이면 민가를 습격해 무자비하게 물건을 훔쳐 오다 보니 군인들 사이에서 공병국은 ‘화적떼’라고 불렸다. 금강산발전소에서 2년 동안의 일을 끝내니 또 부대가 해산됐다.세 번째로 배속 받은 부대가 간 곳은 황해남도 과일군이었다. 과일군은 군 전체가 하나의 과수농장으로 전체 경지 면적 70%가 과수단지다. 주로 평양에 사과, 배, 복숭아, 감을 공급한다. 과수원 둘레가 40km에 이르는 곳도 있다.이곳에서 임 씨는 병실을 짓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까지의 삶에 비하면 훨씬 편했다. 과일군에 간 이유는 어쩌면 공사를 하느라 수고했으니 잠시 쉬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배고픔은 여전했다.영양실조에 걸린 군인들은 농약을 잔뜩 친 과일을 익기도 전에 따먹다 죽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가을에 과일을 실컷 먹을 순 있었다. 애로는 땔감이 없는 것이었다. 나무뿌리를 힘들게 캐서 병실 난방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2~3년 있다가 네 번째로 배속된 곳이 4군단 125사였는데, 새로 만들어진 방사포부대였다. 황해도 구월산 주변 골짜기마다 병실만 짓다가 2003년에 제대했다.부대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병사들과 만났기에 한 부대에만 있다가 제대한 군인보다 훨씬 힘들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노동당에 입당했으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당시엔 10년 동안 군복무를 하고도 입당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두 번째로 다행인 점은 그나마 군 복무가 10년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많은 청소년이 굶어죽어 신병 보충이 여의치 않자 김정일은 1997년에 군복무 기간을 13년으로 늘렸다.하지만 이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17세에 집을 떠나 30세까지 군에 있게 된 고참 병사들이 인근 부락에서 결혼할 여자를 찾아 동거하기 시작했다. 군율(軍律)이 바닥에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김정일은 2002년, 군복무 기간을 다시 10년으로 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임 씨도 2006년까지 13년간 군복무할 뻔했다.● “아들아, 남조선에 가자.”고향인 청진에 돌아가니 부모님이 무척 노쇠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과일군에 근무할 때 딱 한 번 집에 갔다. 그것도 휴가가 아니라 탈영한 병사를 잡으려 간 사흘간의 공무 집행이었다. 군인이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 오면 부대에 뭐든 배낭 한가득 들고 귀대해야 했기에 임 씨는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 가지 않았다.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 씨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우리는 무조건 남조선에 가야 해. 너는 결혼하지 마. 애가 생기면 못 가.”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그가 군에 간 사이에 중국에 가서 3년이나 살다가 왔다. 임 씨 부친은 중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1950년대 말 대기근을 피해 북한으로 건너왔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친척이 많았다.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은 출신성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좋은 일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임 씨 부친도 청진조선소 산하 군함부품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집은 도시 변두리에서 대다수 노동자가 살던 ‘하모니카주택’이었다. 하모니카주택은 주택 하나를 단칸방 대여섯개로 쪼갠 형태를 말하는데 사생활 보호는 거의 되지 않았다.이곳에서 1976년 임 씨가 태어났고 4년 뒤 남동생도 생겼다. 임 씨가 군복무를 할 때 하나 있던 누나는 병으로 숨졌다. 임 씨 학교생활은 평범했다. 수학처럼 원리가 있는 과목은 잘했지만 혁명역사처럼 무작정 날짜를 외우는 과목은 정말 싫었다.김일성 생일 때 당과류 1kg을 선물로 받으면서 몇 번이고 고맙다며 김일성 초상화를 향해 인사하는 일도 싫었다. “사탕과자는 식료품공장 사람들이 만드는데 내가 왜 원수님께 인사를 해야 하냐”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끌려가 혼난 적도 있었다.가정환경 자체가 북한에 충성하며 사는 집안도 아니었고, 군에서 세뇌를 당하며 충성심을 키우는 부대가 아닌 건설부대에 있었던 터여서 임 씨는 한국에 가자는 아버지 말에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탈북을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은 있었다.중국에 있는 아버지 친척들이 도와줘서 임 씨 집안은 먹고살만 했다. 그가 군에 간 사이 동생은 목선을 사서 어업을 해서 돈을 잘 벌었다.제대 후 임 씨의 첫 직장은 철도국 소속 짐함공장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컨테이너를 뜻하는 짐함이 많지 않았다. 직장생활은 무난했다. 2년쯤 지난 2006년 임 씨는 철도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하면 철도 간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3년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임 씨는 점점 북한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이때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더러워서 못 살겠다’였다. 동생이 뱃일로 돈을 많이 벌다 보니 그의 집엔 보위부나 안전부 같은 곳의 정복 입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동당 행정기관 간부들까지 수시로 들락거리며 돈을 뜯어갔다. 많이 벌면 많이 번 만큼 뜯겼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각종 보복이 뒤따랐다.임 씨가 이 같은 현실에 분노할 때마다 아버지는 “너희처럼 부지런한 애들은 남조선에 가면 무조건 잘산다”고 했다. 중국에서 3년 동안 살면서 아버지는 한국의 현실을 어느 정도 알게 됐던 것이다.어느 날 억울한 일을 당해 화가 폭발한 임 씨가 아버지에게 말했다.“좋아요. 남조선에 갑시다. 그런데 어떻게 가면 되나요?”맏아들의 동의가 없어 결행하지 못하던 아버지는 화색이 돌아 대답했다.“네 동생 배로 가면 제일 쉽다. 배를 타고 곧장 나가면 일본인데 거기까지 가면 성공인 거야.”어쩌면 남동생이 배를 타게 된 것도 이날을 예견한 아버지의 기획이었을지 모른다.● 동해바다를 가른 기적의 6일동생이 소유한 목선은 당시 북한 일반 목선에 비해 훨씬 컸다. 10명도 탈 수 있었다. 탈북 준비를 하면서 동생은 배에 엔진도 2개 장착했고 연료도 몰래 수백 kg을 실어 놓았다. 집에 있던 돈을 다 달러로 바꾸니 2000달러 정도 됐다. 당시 북한에선 엄청난 액수였다. 아버지는 “이 정도 돈이면 중국으로 탈북하기에도 충분하지만 배가 있으니 바다를 통해 바로 가는 것이 제일 쉽다”고 했다.2007년 5월 27일 임 씨 형제와 부모는 탈북 길에 올랐다. 임 씨 형제가 배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동생 일을 도와주면서 자주 배를 타려고 드나들었기에 항구 초소를 통과하기 쉬웠다. 연로한 부모님은 다른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바다로 나갔다가 유턴해서는 밤에 부모님을 싣고 다시 떠났다. 31세 임 씨와 27세 동생은 무서운 것 없는 나이였다. “어떤 놈들이 추격하면 다 죽여 버리고, 안 되면 우리가 죽으면 되지.” 각자 품속에는 최후에 쓸 쥐약도 한 봉지씩 있었다.청진항에서 떠나자마자 나침반을 110도에 맞추고 최고 속력으로 항해했다. 목적지는 일본 니가타(新潟)항이었다.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목선이라 추적은 없었지만, 항해가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몇 시간 항해하니 목선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파도가 높아졌다. 3일쯤 지났을 때 태풍도 만났다. 집채만한 파도 앞 목선은 가랑잎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있었다. 동해 한가운데서 배가 뒤집히면 구명조끼는 별 의미가 없기도 했다. 다행히 몇 년 동안 배를 탔던 동생은 침착했다.“형, 물풍(풍닻·깔대기 모양 어선용 닻)만 든든하면 배가 뒤집히지 않으니 괜찮아.”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버틴 것일 수도 있다.출발 닷새째인 6월 2일 새벽 멀리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일본이란 것을 알았다. 북한 해안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배를 몰아 해안으로 접근했다. 방파제가 보여 배를 댔다. 뭍에 발을 들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여보시오. 우린 북한에서 왔는데 경찰을 불러 주세요.”말은 통하지 않아도 자신들 행색을 보고 놀랄 줄 알았는데, 행인들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일본 사람들이 북한 목선을 본 적도 없고,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안 되겠어. 좀 더 큰 항구를 찾아갑시다.”다시 배를 띄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위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헬기 두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해양순시선도 나타났다.순시선 유도를 따라 아오모리(青森)현 후카우라(深浦)항에 들어갔다. 경찰차를 타고 아오모리경찰서로 이송돼 이틀쯤 조사를 받고는 헬기로 도쿄로 옮겨졌다. 도쿄로 이송될 때 언론사 헬기들이 따라붙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임 씨는 “우리가 참 대단한 일을 했나 보다” 생각했다.도쿄에서 불법체류자 수용시설에 수감됐다. 그래도 침대도 있고 방도 깨끗했다. 한국에서 나온 사람이 임 씨 일행을 맞이했다. 10여 일을 더 조사받았다. 품속에 넣고 온 2000달러는 압수된 뒤 신권으로 바꿔 받았다. 배는 포기각서를 써 줬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조사 시작부터 이들은 최종 목적지는 한국이라고 한결같이 말했다.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임 씨 가족은 6월 16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북한을 떠난 지 20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자동차 장인이 되겠다.”2007년 9월 16일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친 임 씨 가족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게 됐다. 부모님과 동생은 부산에 집을 받았지만, 임 씨는 가족과 떨어져 마산에 정착하는 길을 택했다. 한국에 왔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보겠다는 생각이 컸다.마산을 택한 이유는 공업단지가 많아 일자리가 많다고 들어서였다. 정부에서 내준 임대주택에 도착해 가구 몇 개를 사니 수중에 있던 정착금 300만 원이 하루만에 없어졌다.마산에 도착한 날부터 생활정보지에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리고 이튿날 주유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신분증도 나오기 전이어서 주유소 사장은 경찰서에 전화해 그의 신원을 알아본 뒤 일해도 좋다고 했다.주유소에서 3개월쯤 일했을 때 탈북민 정착지원기관 남북하나재단 홈페이지에 GM대우 수원서비스센터에서 탈북민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이곳에서 일하려면 운전면허증이 필수라고 해서 곧바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해 면허증을 땄다. 다음날 수원으로 올라갓다. 올라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내 팔자는 왜 이렇게 바퀴와 인연이 있을까. 북한에서는 광차를 끌다가, 포병부대에서는 방사포차를 다루다가, 제대해서는 철도에서 일했는데 이제 자동차 바퀴를 다루게 됐네….”서비스센터에서 1년 2개월을 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 만족도는 점점 떨어졌다. 가장 큰 불만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을 보니 월급도 그리 많이 오르는 것 같지 않았다. 자동차 부품처럼 매일 똑같은 일하면서 늙어가고 싶진 않았다.“나만의 평생 직업을 찾아야겠다. 북한군에서 10년 동안 별 일을 다 해봤는데 몸으로 버티는 거야 못할까” 하는 자신감도 있었다.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그가 정한 아이템은 출장 자동차 광택 사업이었다.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면서 대형 센터가 처리하지 못하는 자동차 외장 관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이 분야 장인으로 인정받아 봐야겠어.”2009년 4월 단돈 600만 원으로 출장 광택 일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출장 광택사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홍보가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이 업종의 주요 홍보 수단은 전단지였다. 임 씨도 처음에 전단지를 열심히 돌렸지만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왜 전단지를 뿌리고 있지”라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그는 걸음마를 떼던 인터넷 검색광고 시장에 눈을 돌렸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열심히 홍보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감이 끊임없이 몰려왔다.새벽 4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그야말로 몸을 갈아 넣으며 일했다. 퇴근할 때는 온몸에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주머니에 든 두툼한 현금 뭉치를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하니 돈도 모아지고 기술도 늘었다. 모은 돈으로 2011년 용인지식산업센터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 홍보 방법도 잘 터득해 사무실에 앉아 전국에 오더를 뿌리는 일도 했다.사업이 잘되니 무서움이 사라졌다. 광택만 내는 것이 아니라 광택 및 세차 용품도 팔아 보자고 생각했다. 미국의 한 자동차용품 회사와 총판 계약을 맺어 온라인 매장을 열고 직원도 뽑았다. 대실패였다. 총판사업에 손을 댄 순간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았다. 번 돈을 다 쏟아붓다 마침내 손을 들었다. 첫 시련이었다.● 강남에서 새로 시작하다직원도 하나둘 떠나고 통장 잔고도 텅텅 비어 갔다. 임 씨 가슴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그는 홀몸도 아니었다. 사업이 잘 나가던 2012년 결혼을 한 아내는 임신을 했다. 어떻게 하면 재기할 수 있을까만 고민할 때 한 직원이 “용인은 시장이 한정돼 있으니 서울 강남에서 새로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솔직히 임 씨는 강남을 거의 몰랐다. 그러나 그곳에선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솟아났다. 2013년 그는 대출금 2000만 원으로 강남에 구멍가게를 차렸다. 가게 문을 여는 날 결심했다.“3년 안에 이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들 거야.”그때부터 가게에만 붙어살았다. 집에는 1주일에 한 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렸다. 경쟁력은 저렴한 가격이었다. 강남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박리다매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뼈를 갈아 넣어야 했다. 고객과의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만 눈을 붙이고 작업했다. 직원도 없이 홀로 버티다 관절도 망가졌다.하지만 그런 시절을 이겨내니 점점 고객이 늘었다. 2년 뒤 가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눈물이 났다. 눈물을 몰래 훔치고 공구를 잡았다.3년쯤 지났을 때 강남구 대치동에 마음에 드는 가게가 매물로 나왔다. 그러나 보증금 1억 원이 없었다. 속을 썩이고 있을 때 거래처 사장이 선뜻 1억 원을 빌려줬다. 그동안 봐온 그의 성실함과 약속은 무조건 지키는 신용을 믿었던 것이다. 대치동에 옮겨온 뒤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번 돈 대부분을 재투자했다. 기술자들을 영입했고 다양한 장비와 설비를 마련했다. 그의 업체는 외장 수리, 도색, 광택 코팅, 휠 복원, 덴트(찌그러짐) 복원 분야에서 솜씨 좋은 가게로 소문이 났다. 대표 서비스는 오래된 자동차를 새 차처럼 복원하는 ‘자동차, 새 차 만들기’ 프로그램이다.처음부터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위기는 고객 응대였다. 북에서 온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이른바 ‘진상 손님’을 상대하는 법이었다. 이 때문에 혼자서 많이 울기도 했다. 거액을 합의금으로 지불하고 화가 나 문을 닫을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속상한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마인드를 바꿨습니다. 서비스 일은 맞고 틀리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업 초기에 제가 많이 모자랐던 겁니다. 찾아와 줘서 고맙고, ‘저 사람은 저런 것’임을 내가 인정해 주면 된다고 생각하니 다툴 일이 없어졌습니다.”두 번째 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때였다. 코로나19로 외출이 줄어드니 자동차 수리 일감도 줄었다. 주변에서 문을 닫는 동종 업체가 늘어났다. “코로나19 시기에 매출이 30% 떨어진 업소는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10% 떨어지면 1년 안에 문을 닫더군요. 저도 초기엔 잠시 위축이 됐지만 이게 기회일 수가 있다고 봤습니다. 이 업종은 단골이 중요한데 폐업한 업체 단골을 우리 손님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코로나19 기간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전문 모델까지 써서 홍보 영상을 제작했고 온라인 광고도 더 늘렸다. 자본금이 적은 그에게 공격적인 마케팅 결심은 쉽지 않았지만 과거 온라인 홍보를 해본 그의 경험상 확신이 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점점 고객이 늘었고 매출도 늘었다.대출 2000만 원으로 시작한 강남 생활 13년 만에 기술자 3명을 두고 연매출 10억 원을 찍는 사장님이 됐다.● “만족은 제 안에 있습니다.”임 씨 가게 앞에는 최고급 외제차가 즐비하다. 그는 자동차 외형 복원 업계 ‘달인’으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그가 탈북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동차 전문가로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신분을 밝힌 적도 없다.“탈북민인 게 장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한국에서 탈북민이 성공하면 국가 지원을 받아 됐다고 보는 시선도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북한에서 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사업이 잘 되면서 프랜차이즈로 확장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돈을 많이 번 사장 보다는 인정받는 장인이 되고 싶은 꿈이 더 크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가 마무리입니다. 작업 후 남는 미세한 결함을 수정하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제가 직접 합니다. 이 단계가 품질 차이를 만듭니다. 규격화가 불가능한 이 업종에서 매장만 확대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같은 부모님 밑에서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자라서인지, 동해안 한 도시에서 바다 일에 종사하는 임 씨 동생도 성공했다. 직원 수십 명에 연매출 수십억 원인 사장님이 됐다. 집도 두 채를 사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동생이 흘린 눈물도 임 씨 못지않았다.쥐약을 품고 태풍을 헤치며 닷새 동안 동해를 가로질러 새 삶을 찾은 임 씨 형제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땅에 든든히 닻을 내렸다.“운도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 길이 생깁니다.”임 씨는 아들만 넷을 둔 아버지다. 맏이가 12살, 막내가 5살이다. 가족은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자식들이 잘 성장할 때까지 열심히 돈을 벌고 이후엔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제 그릇이 보이더군요. 그릇만큼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에서 비싼 외제차를 다루다 보니 많이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지금껏 상대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만족하면 그게 성공이라는 것입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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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 대사령의 비밀

    시국이 이 모양인지라 올해는 신년 특별사면이 사라졌다. 내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큰 불운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도 특별사면 제도가 있다. 이를 대사령(大赦令)이라고 부른다. 다만 북한 대사령은 새해를 맞아 하지는 않고, 최대 명절로 꼽는 김일성 김정일 생일이나 광복절, 정권 수립일 등에 발표한다. 그런데 북한 대사령의 비밀을 알고 나면 경악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북한에서 특별사면 기준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화소에서 사면받고 나온 사람도 자신이 왜 풀려났는지 잘 모른다. 전거리교화소에 6년 동안 수감된 탈북민 권효진 씨는 교화소에서 두 번째로 높은 ‘죄수 간부’인 ‘총지령공’을 지내면서 대사령의 두 가지 비밀을 알게 됐다. 첫 번째 비밀은 대사령이 죄인들에게 주는 혜택이라기보다는 교화소 간부들에게 주는 특혜 성격이 더 크다는 것이다. 북한 대사령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政令)으로 발표되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하다. 대사령은 사회안전성이 김정은에게 “장군님의 위대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올해 태양절에 30만 일(日)을 빼서 혜택을 주려고 합니다”는 식의 제안서를 올리고 이를 비준받으면 집행한다. 5나 10으로 끝나는 정주년(整週年·꺾어지는 해)에는 대사령 사면일이 평년의 두 배쯤으로 늘어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안서가 몇 명을 사면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몇만 일을 빼겠다고 돼 있다는 것이다. 승인이 떨어지면 전국 교화소들에 수감자 수에 비례하는 일수(日數)가 할당된다. 가령 전거리교화소가 1만 일 사면 권한을 받았다고 하자. 이를 기초로 간부들이 일수를 배분한다. 보통 7명의 주요 간부가 직급에 따라 사면일을 나눠 가진다. 교화소장, 부소장, 당 비서가 1000일씩 가지는 경우 보위지도원, 보안과장, 간부지도원, 후방과장은 500일씩 가진다. 이렇게 나눠 받은 사면권은 각자 알아서 사용한다. 교화소장은 특정인에게 몰아줘서 3년 형기를 단축시켜 줄 수도 있고, 다섯 명에게 감형 200일씩을 나눠줄 수도 있다. 간부들은 뇌물과 특정인과의 관계 등에 의해 사면을 해줄 사람을 선택한다. 간부들이 나눠 갖고도 남는 일수는 다시 도강죄(渡江罪) 몇 %, 인신매매죄 몇 %, 사회불량자 몇 % 하는 식으로 할당한다. 죄수들은 교화 생활을 잘하면 사면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지만, 실은 바깥에 있는 가족의 뇌물 액수에 사면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북한 대사령의 두 번째 비밀은 더 끔찍하다. 교화소 죄수들은 사회안전성에 소속된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 가며 생산한 식량이나 석탄 등으로 사회안전성과 평양의 지배계층이 먹고산다. 갑자기 대사령이 떨어져 많은 죄수가 석방된다는 것은 노예 수가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이들이 만들어 내던 생산물도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사령으로 죄인 수천 명이 줄어들면 사회안전성은 즉각 이만큼을 충원하려 한다. 그래서 대사령과 비슷한 시기에 각 안전부에 죄수 수를 할당하는 비밀 지시를 내려보낸다. 그러다 보니 대사령이 예고된 해엔 단순 범죄를 저질러도 중형을 받아 교화소를 가게 된다. 북한의 대다수 죄인은 자기 형량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모른다. 일반인은 법조문을 볼 수 없고 변호사도 없으며 법정 다툼도 불가능하다. 판사가 판결하는 대로 형기가 결정된다. 그런데 같은 액수를 훔친 도둑이라고 해도 어떤 해엔 3개월 노동단련형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대사령이 있는 해에 걸리면 3년 형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북한에선 내부적으로 이 시스템을 교화 정책이라고 부른다. 교화 정책의 중요한 목표는 죄인, 즉 노예 숫자를 일정하게 맞추는 것이다. 그래야 교화소 생산량이 들쑥날쑥하지 않게 맞춰지고, 평양 지배계층이 뜨뜻한 집에서 배급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김일성 때부터 3대째 이어지고 있고 김정은도 당연한 듯 활용한다. 자신을 지키는 사냥개라고 할 수 있는 보위성과 안전성에 충분한 인센티브를 줄 돈이 없으니 대사령이라는 제도로 수감자들의 운명과 복역 날짜를 활용해 먹고살 수 있게 허락한 것이다. 올해는 광복 및 노동당 창건 8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대규모 대사령이 떨어질 가능성도 높다. 북한 사람들에겐 2025년이 그 어느 해보다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위험한 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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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 속 여유… 이바라키에서 즐기는 특별한 ‘라운딩’

    ‘골프 천국’ 일본 이바라키(茨城)현이 한국인 곁에 성큼 다가왔다. 지난해 12월 청주공항과 이바라키공항을 잇는 에어로케이(Aero K) 전세기가 취항하면서 올 3월 4일까지 주 3회(화, 목, 토요일) 운항하게 된 것이다. 동남아 골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저렴한 가격과 온화한 날씨가 장점인 이바라키현도 고려해 볼 만하다. 청주에서 비행기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알고 보면 ‘골프 천국’한국인에게 이바라키현은 생소할지도 모른다. 일본 간토(關東) 북부에 있는 이바라키현은 도쿄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가깝게는 30km, 멀게는 150km 떨어져있다. 태평양에 접한 데다 강, 호수, 산 같은 자연 자원이 풍부하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골프를 즐기는 한국인에게는 훌륭한 경관과 시설을 자랑하는 골프장과 사시사철 춥지않은 날씨, 그리고 상대적으로 싼 비용이야말로 이바라키현의 장점으로 다가올 것이다.한국 기온이 영하권을 기록하며 눈이 내리는 12월에도 이바라키현의 평균기온은 2∼10도를 유지한다. 가장 추운 1, 2월에도 평균기온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눈도 거의 내리지 않음은 물론이다.서울 면적(약 605㎢)의 10배 정도에 인구 280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이바라키현에는 골프장이 114개나 있다. 이 중 국제적인 골프 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수준급 골프장도 10개가 넘는다. 이바라키현 남쪽은 일본 최대 간토평야이고, 북쪽은 산악지대, 동쪽은 태평양이다. 그만큼 지형적으로 다양하면서도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가 산재해 있다.넓고 평탄한 페어웨이에서 태평양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스윙해 보고 싶다면 미국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 골프장마다 다양한 해저드가 절묘하게 배치돼 있어 전략적인 어프로치를 할 수도 있다. 초보자가 즐길 수 있는 코스도 풍부하다.최고 장점은 가격이다. 지난해 12월 방문한 58년 전통의 미토(水戸) 골프클럽은 평일에 점심과 카트 비용을 포함한 라운딩비가 5900엔(약 5만4000원)밖에 하지않았다. 주말에는 1만7000엔∼2만 엔(약 15만6000∼18만 원) 정도다. 놀랍게도 이 골프장은 이바라키현에서 비싼 축에 들어간다고 하니 다른 골프장은 얼마나 쌀지 가늠할 수 있다.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골프장은 해당하지 않는다. 페어웨이와 그린의 잔디 상태는 한국 고급 회원제 골프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캐디가 없기 때문에 일행들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대화도 할 수 있어 좋다. 조급하게 뒤따라오는 팀도 없어 느긋하게 라운딩을 즐길 수 있다. 미토역을 비롯한 주요 교통 거점에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골프장도 적지 않다.● 쇼핑과 정원의 조화낮에 골프를 즐겼다면 밤엔 쇼핑을 즐기면 된다. 이바라키현청 소재지 미토시에는 북(北)간토지방 최대 쇼핑몰 ‘이온 몰 미토 우치하라’를 비롯해 쇼핑 인프라가 잘 마련돼 있다. 면세 슈퍼마켓과 의약품 매장을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다.미토시는 낫토로 유명하다. 일본 낫토의 70%가 이바라키현에서 생산된다. 순창 하면 고추장을 떠올리듯 일본에서는 미토 하면 낫토다. 낫토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낫토 문화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다.세계적으로 인기 높은 일본 술인 사케를 좋아한다면 역시 이바라키현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유명한 쌀 생산지이며 좋은 물이 풍부한 이바라키현에서는 예부터 품질 좋은 사케가 만들어졌다. 현재 주조장(酒造場)은 35곳 있다. 일반인이 견학할 수 있는 주조장도 여러 곳이다. 대부분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쉽게 도착할 수 있다. 렌터카를 운전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의미다.이바라키현 남부 아미(阿見)정에는 미국 서해안 콘셉트를 기반으로 만든 프리미엄 아웃렛이 있다. 일본 국내외 유명 브랜드 약 150개 점포가 모여 있어 특별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이 아웃렛은 또 다른 명물로 유명하다. 높이 12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상인 우시쿠대불(牛久大佛)이 바로 인근에 있어서다. 우시쿠대불은 1995년 세계 최고 최대 청동 불상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우시쿠대불은 그 자체로 ‘절’이기도 하다. 불상 내부에는 5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85m 높이에 전망대가 있다.골프와 쇼핑이 만족스러웠다면 이바라키현이 자랑하는 일본 3대 정원에 드는 가이라쿠엔(偕樂園)을 찾아가 볼 시간이다. 1842년 에도(江戶)막부 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가이라쿠엔은 한마디로 ‘꽃의 바다’라 할 수 있다. 겨울에는 꽃을 보기 어렵지만 2월부터 가을까지 매화축제, 벚꽃축제, 진달래축제 같은 각종 꽃 축제가 이어진다.일본 3대 폭포에 속하는 다이고(大子)정의 후쿠로다(袋田) 폭포는 ‘4번의 폭포’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폭포수가 네 번에 걸쳐 직하하는 장관에 더해 사계절 보지 않으면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없다 하여 붙은 별칭이다.이바라키현의 단점이라고 굳이 꼽자면 온천이 많지 않다는 점일 텐데 아예 없지는 않다. 북부 국영 히타치해변공원에 가면 지하 1504m 고대 지층에서 퍼올린 온천수로 이뤄진 아지가우라(阿字ヶ浦) 온천 노조미가 있다. 온천 인근에는 이탈리아 나폴리와 경관이 비슷하다고 해서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아지가우라 해수욕장이 있다. 태평양을 끼고 이어진 길이 1.2km 백사장이 눈부시다.● 이곳저곳 편리하게 옮겨 다니고…2010년 개항한 이바라키공항은 나리타나 하네다 공항만 알고 있는 한국인에게 일본 간토지역으로 가는 새로운 기착점이 될 수 있다. 충청도에서 도쿄로 가기 위해 굳이 서울까지 올라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지방 공항이지만 국제선과 국내선 모두 있어 간토 북부나 도호쿠(東北) 남부로 향하는 거점이 될 수 있다.도쿄와도 가깝다. 이바라키공항 앞에서 도쿄역까지 운행하는 직행버스를 탈 수 있다. 이 버스를 타면 도쿄 시내 어디든 100∼140분이면 갈 수 있다. 서울에서 하네다공항에 도착해 고속열차로 도쿄 시내까지 가는 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버스 요금은 어른 1650엔(약 1만5190원), 어린이 830엔(약 7650원)이다. 이바라키현 곳곳에는 도쿄를 잇는 수도권 철도인 쓰쿠바 익스프레스와 조반센(常磐線) 역이 있어 골프를 즐기고 도쿄로 이동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지난해 12월 3일 이바라키현 오미타마(小美玉)시 이바라키공항에서 열린 취항 기념식에서 강병호 에어로케이 대표이사는 “현재는 청주에서 떠나는 노선만 있지만 수요가 있다면 인천공항에서 이바라키공항까지 직항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오이가와 가즈히코 이바라키현 지사도 이날 “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중 한국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방문객 수도 많아지고 있다”며 “직항 노선 취항을 계기로 한국인 관광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이바라키현은 한국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다. 기차 승용차 자전거 도보로 당일치기부터 3박 4일 일정까지 주요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를 제안해 준다.이바라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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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한 탈북청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2024년 12월 14일은 탈북청년 석범진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이날 이화여대의 아트하우스모모에선 그가 제작한 첫 독립 장편영화 ‘림시교원’의 시사회가 열렸다. 하지만 세상의 주목이 모두 대통령 탄핵이 선고될 국회에 쏠려 있던 터라 시사회는 썰렁했다. 취재 방문을 기대했던 기자들이 모두 불참하면서 기사도 한줄 나가지 않았다.영화 림시교원은 가까운 미래에 북한으로 교생실습을 간 남한의 대학생 소희가 최고지도자 초상화 분실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석 씨는 시나리오부터 연출, 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담당하면서 2024년 한 해를 통째로 이 작품에 쏟아부었다.소란스러운 시국에 데뷔 무대를 망친 셈이라 억울한만도 했지만 석 씨는 의외로 담담했다.“그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시사회 날짜를 잡았지만, 하마터면 그것도 못할 뻔했습니다. 시사회가 열린 것이 어딥니까. 객석도 가득 찼고요. 영화를 보신 분들이 카메라 무빙이나 연출이 좋았다고 격려해 줘 힘이 납니다.”석 씨는 북한에서 오로지 김정일 시대만 겪었다.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에 태어나,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에 탈북했다. 한국에서 4명의 대통령을 겪었고, 조만간 다섯 번째 대통령을 보게 됐다. 북한에서부터 문학 소년을 꿈꿨던 그는 한국에 와서 여러 편의 소설과 수많은 시를 발표했다. 작품성도 인정받아 24세에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연세문학회장, 연세예술원 영화학 1기 졸업, 영국 유학, 첫 장편영화 제작 등 적잖은 성과도 이뤄냈다. 이제 겨우 30세에 불과한 청년에게 앞으로 어떤 인생이 기다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30년 동안 쌓은 시련과 경험은 그를 버티게 해줄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다.● 김일성 사망 다음달에 태어나다석 씨는 1994년 8월 두만강 옆인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한 달 뒤였다. 어머니는 김일성 장례식을 치르느라 더운 날씨에 여기 저기 다니며 울어야 했다. 그래서 늘 뱃속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끼봐 걱정스러웠다.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난의 행군’에 대한 기억은 없다. 가족들은 풀죽으로 끼니를 떼우면서도 외동아들인 그에겐 쌀밥을 해먹였다. 당시 4살 때였지만 흐릿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비록 풀죽을 먹었지만 그의 집안은 북한에서 상당한 엘리트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독립운동 유공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중소기업 지배인을 지냈고, 할머니도 무산세관 직원이었다. 외가도 뒤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서울대를 다니다가 6.25전쟁 때 북한군에 입대한 뒤 낙동강전선에서 팔을 잃고 영예군인(상이군인)이 됐다. 북에서도 두뇌는 인정받았지만, 남쪽 출신이라 평양에서 살지 못하고 무산으로 내려와 무산공대 교수로 재직했다. 다만 외활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에 기억은 거의 없다.아버지는 출신성분이 우수한 자들만 선발되는 김일성 경호부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훈련 중 머리를 심하게 다쳐 낙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산공대를 졸업한 뒤 전기공으로 일했다.그런데 석 씨가 커가면서 갖게 된 궁금증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는 무산공대를 나와 군 인민위원회 재정부에서 일했고, 큰 이모는 교사, 작은 이모는 의사인데도 왜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까?”조부와 외조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잘 살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고지식했다. 자식들은 부모덕을 보지 못한 채 각자 호구책을 찾아야만 했다.석씨는 소학교에 입학할 나이인 7세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움막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산 속에 소토지(뙈기밭)를 일궜는데, 남들이 훔쳐가지 않게 가족들이 돌아가며 경비를 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움막에서 아들에게 휴지로 쓰던 요리책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그래서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갔는데도 공부는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다.● 소학교 2학년때부터 쓴 시그의 소학교 때 기억은 온통 나쁜 일들로 채워져 있다.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갔다. 군에서 머리를 다친 후유증으로 뇌종양이 발병했고, 병이 심해지면서 반신마비와 전신마비를 겪다가 몇 달 뒤 사망했다.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재산을 다 팔고 나중에는 집까지 팔게 됐다. 어머니는 허름한 집으로 이사해 돼지를 키우고 술을 빚었다. 석 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술통을 메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팔아야 했다. 그래도 먹고 살기 너무 힘들었다.2006년엔 어머니가 그를 이웃집에 맡기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홀몸으로 어린 아들을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자,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이후 석 씨는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됐다. 장손을 남의 집에 둘 수 없다며 그를 거둔 것이다.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 하나가 있다. 소학교 정문에서 폭발물이 터진 일이다. 당시 그 일로 그가 다니던 무산소학교의 교장 딸을 비롯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북한 당국은 이를 안기부의 소행이라고 했다. 그때 이후 석 씨는 남조선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갖게 됐다. 남조선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폭발 현장에서 보았던 살점과 피비린내가 떠올랐던 것이다.순탄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석 씨는 꿈을 키워나갔다. 그의 첫 꿈은 화가였다. 그렇지만 그림을 가르치는 학생소년궁전 미술소조에 입학하려면 매달 쌀 10㎏과 당시 뇌물로 인기 많던 ‘고양이담배’ 2보루씩을 내야만 했다.결국 화가의 꿈을 접은 어린 소년은 소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동무’라는 제목의 시가 그의 첫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읽어주기 바빴다. 칭찬을 받으며 자신감을 얻은 소년은 신이 났다. 시 쓰기를 계속했고 나중에는 수필도 썼다.그는 물리나 화학, 생물 등 이공계 분야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덕분에 일반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군에 하나 밖에 없는 수재학교인 무산 제1중학교로 편입했다.돈도 없고 부모도 없는 석 씨가 학교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오직 하나, 공부 밖에 없었다. 그는 촛불을 켜고 코피가 터질 때까지 공부했다. 그 결과 학교를 대표해 나선 군 학과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5학년 때엔 무산군 대표로 ‘도 알아맞히기 경연’에 나가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알아맞히기 경연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 프로그램 같은 것이다.전국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중앙급 대학에 갈 수 있다. 석 씨의 목표는 김책공대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온 가족이 공대를 졸업한 ‘공대 집안’이었기에, 석 씨도 많은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그런데 또 돈이 발목을 잡았다. 전국 경연에 참가하기 위해선 도 소재지인 청진에 머물며 이듬해 경연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석 씨에겐 숙식을 해결할 돈이 없었다. 한 달 정도 청진에 머물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따라나서지 않고, 7개월을 혼자 고민했다. 잘하면 북한에서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기어 넘다그렇게 그가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에 몇 가지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우선 2009년 11월 30일에 전격 단행된 화폐개혁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어린 그의 눈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모은 돈을 모두 무효화하고, 한 세대에 10만 원만 나눠주는 정책은 너무나도 무리한 정책이었다. 무엇보다 북한돈만 갖고 있던 사람들은 졸지에 거지가 되고, 달러나 위안화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가도 미친 듯이 뛰었고, 온 나라에 생활고로 고통받는 인민들의 아우성이 넘쳐났다.석 씨는 어느날 할머니에게 “이런 정책을 실시한 사람은 인민들 앞에 나와 머리 숙이고 사과해야 한다”고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는 “어디에서든 그런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라”며 어린 손자에게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석 씨의 뜨거워진 감정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후 “이런 말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니”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당시 그가 정서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두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큰 충격이 됐다. 한 명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촌이었다. 특히 공부에 열심인 석 씨에게 “너 그러다가 정신병원에 간다”라며 농담하던 사촌이 먼저 광인이 돼 병원으로 입원하던 장면은 그에게 죽음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라이벌 관계였던 학교 친구가 월반을 해서 국방대학에 합격한 일도 그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부자집 자식은 학년을 조작하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가능한데, 공부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한 것이다.결국 그는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담아 그는 ‘눈길 우에서’라는 소설을 썼다. 모교 선생들에게 전한 무언의 작별 인사였다.2011년 2월 그는 마침내 안내자와 함께 탈북의 길에 올랐다. 두만강까진 집에서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항상 다니던 길이었다. 강에 도착하니 안내인에게서 미리 돈을 받은 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제부터 발소리를 내면 안 돼. 신발을 벗어.”군관은 먼저 신발을 벗더니 꽁꽁 언 두만강에 뛰어들더니 기어가기 시작했다. 석 씨도 신발을 벗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일행은 기어가다 멈추고 동태를 살피고, 다시 기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두만강 일대를 헤맨 끝에 반대편 중국에 도착했다. 이후 군관은 중국 쪽 도로에 가면 택시가 기다린다는 말만 남기고 부리나케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도로에는 택시가 없었다. 엄동설한에 얼음 위를 한 시간 동안 기어오느라 발은 동상에 걸렸고, 얼어붙은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석 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중국 마을 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한참을 돌아와 강을 건넜던 처음 위치에 도달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 때 멀리서 차량 한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놀란 석 씨는 잽싸게 길 옆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수풀에 천천히 다가서다 멈춰선 차량에서 “네가 어제 넘어오기로 한 얘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찾던 택시였다. 택시 기사는 “(자기도) 온 밤을 헤맸다면서 이렇게 만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석 씨가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건네주었다. 전화 속 목소리는 분명 어머니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투가 너무 달랐다.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데 20% 정도만 이해됐다.“나는 지금 나사렛대학교를 다니는데 하나님이 너를 무사히 인도하실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머리 속으로 “대학이 아니고 대학교? 하나님은 누구? 어머니는 중국에 있는 것이 맞나?”라는 의구심만 잇따랐다. 그때까지도 그는 어머니가 중국에 있는 줄로 알았다.나중에 안 사실은 어머니가 탈북 후 중국 남부 선전에서 한국 기업 에서식모로 일하다가 2년 뒤인 2008년에 한국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외할아버지 형제들을 모두 만났다. 외할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이었고, 전쟁 때 동생들을 남겨둔 채 군에 들어갔다는 사실도 그 때 알았다.● 태국에서 겪은 첫 수감생활한국으로 오는 과정은 어머니가 잘 연결을 해준 덕에 다른 탈북민에 비해선 훨씬 순탄했다. 심양이란 곳까지는 혼자 왔다. 하지만 이후부턴 도착하는 곳마다 다른 탈북민들이 합세했다. 중국 남부 쿤밍에 이르렀을 때는 일행이 30여 명이나 됐다. 이 가운데엔 여성과 아이가 20여 명이나 됐다. 남성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석 씨처럼 탈북 후 곧바로 한국행 길에 오른 사람도 없었다.남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북에서 나올 땐 외투를 껴입었는데, 보름 뒤엔 얇은 티셔츠만 입었다. 브로커들은 옷을 한 배낭씩 메고 와 일행들을 갈아입혔다. 살펴보니 먼저 떠난 사람들이 입었던 옷들 같았다.밤새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을 넘었더니 라오스란 곳에 도착했다. 또 몇 시간 뒤엔 태국이라고 했다. 그는 일행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태국에 도착하면 경찰에게 한시라도 빨리 체포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서 큰 도로 가운데로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매던 도중 누군가의 신고를 받은 태국 경찰이 나타났다.태국 감방 생활은 힘들었다. 고생했던 다른 탈북민들에겐 견딜만한 수준이었지만, 첫 수감생활을 경험하는 석 씨에겐 고통스러웠다.감옥 안에서도 그는 자서전을 썼다. 북한에서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과정의 기록이었다. 마침내 탈북 2개월 뒤인 2011년 4월 한국에 도착했다.태국 감방에선 밥을 하루에 두 끼만 주었는데, 항상 똑같은 메뉴인 밥과 닭죽만 나왔다. 반면 한국의 조사기관에서 주는 밥은 무척 맛있었다. 빵과 우유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 덕에 삐쩍 말랐던 몸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하나원에 갔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북에 있을 때 그는 어머니가 중국에서 사는 줄 알았다. 친척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2011년 9월 마침내 그는 하나원을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는 천안으로 갔다. 당시 17세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주변지인들의 권고를 받고 일반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검정고시 만점으로 연세대 입학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은 혼란스러웠다. 두 살이 많아도 밝힐 수가 없었다.북한에서 군 대표로 선출됐던 실력이라 여기서도 과학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 과학중점반에 들어가 물리, 화학, 생물 등 평소 그가 좋아하던 과목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교내외 경시대회에도 자주 출전해 꽤 많은 상을 타기도 했다. 하지만 영어가 너무 어려웠다. 맞춤법을 새로 공부해야 하는 국어는 더 어려웠다. 어머니가 힘들게 공장에 가서 돈을 벌다보니 학원이나 과외를 받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그는 국어를 익히기 위해 무작정 많은 책을 읽고 시와 시나리오를 썼다. 그랬더니 언젠가부터 국어가 교정이 되기 시작했다.그는 여전히 과학도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어느새 시와 수필, 소설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쓴 단편소설 ‘늑대일기’는 탈북민의 이야기를 반려견의 시각으로 서술한 독특한 소설이었는데 선생들이 보고 매우 좋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다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그런데 고3 때 위기가 찾아왔다. 어머니가 공장에서 일하다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쓰러졌던 것이다. 집에서 돈을 벌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기로 결심했다.젊은 담임선생은 자신의 월급에서 용돈을 떼어 너에게 줄 테니 계속 학교를 다니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 씨는 이런 도움의 손길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사지가 멀쩡한데 왜 도움을 받아야 되냐”는 반발심만 생겼다.믿는 구석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영상을 제작하는 방법을 처음 접했는데, 촬영을 독학으로 파고들어 영상 제작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면 대학을 가지 않고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햄버거 체인점에서 일하며 반 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고, 점차 생활이 안정됐다. 미성년자라 나오지 않았던 정착지원금도 이때쯤에 나왔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다시 고등학교를 가진 못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를 담당했던 천안 서북경찰서 형사는 그가 검정고시학원에 다닐 수 있게 금전적으로 지원했다.석 달 동안 학원에 다닌 뒤 치른 검정고시에서 그는 7개 과목에서 모두 만점을 받았다. 검정고시라고 해도 만점 득점자는 내신 1등급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는 어느 대학을 갈까 고민하다가 연세대를 지목했다. 그가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가 다닌 학교라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2016년 그는 소원대로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에 입학했다.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족 내력 때문에 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세대엔 문예창작과가 없었다.● 이한열문학상을 수상하다대학 생활 초기는 즐거웠다. 그는 동기들에게 굳이 탈북민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커뮤니티마다 리더를 자처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니 동기들은 그를 과대표로 추천했다.과대표를 하면서 대동제, 주점행사, 합동응원전 등을 주도했다. 연세문학회에 가입해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다.입학 다음해엔 연세문학회 회장으로도 선출됐다. 이후 연세대 총동아리연합회 창작예술분과장, 영화동아리 부회장 등을 맡으며 한국 학생들과 잘 어울리게 됐다.하지만 대학 과정에 느낀 교훈도 있었다. 전공과목은 대체로 재미있고 따라갈 수 있었지만, 수학이 너무 어려웠다. 전공에서 난관에 부딪치자 그는 미래를 다시 그려보았다.대학 졸업 후 회사원이 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 같이 보였다. 반면 문학 분야에선 주변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특히 2017년에 쓴 시 ‘타투’는 이한열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타투의 내용은 길지 않다.“타투.날이 찬 오늘은 시린 당신의 발을 찾고 있습니다. 버선발에 덧신을 동여매도 얼어 죽을 것 같았던 그 겨울은 처마 아래 고드름이 참 예뻤습니다. 허기진 날에는 당신이 저녁마다 붙여 두었던 가마 솥 누룽지를 생각합니다. 토끼가 먹는 풀을 뜯어다 사람도 함께 나눠 먹을 때 이태백이 놀던 달에 나도 올라 앉아 쿵쿵 절구를 찧고 있던 것이었습니다.유족보다 더 슬퍼하는 문상객에게는 허리를 더 굽혀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보다 덜 아픈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아픔이 덜 무거워 보이는 착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몹시 아프게 지워버린 이름에게 부름을 돌려주려고 나왔습니다. 피부마다 바늘을 찔러 넣어 떨어진 낙엽들을 피워내겠습니다.”심사를 맡았던 시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석 씨가) 투고한 작품들 수준이 고른 편이어서 시를 보는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을 대하는 진지함과 언어를 부리는 상상력도 믿음직하다”는 심사평을 남겼다.석 씨는 ‘꽃제비와 까치’라는 수필로 광화문 글판 에세이쓰기 대회 특별상을 수상했고, 대학생 때 여성부 장관상도 받았다. 이때 받은 상금으로 그는 카메라를 샀다. 늘 꿈을 꾸던 촬영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첫 단편영화 ‘연음’은 이렇게 나왔다.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글로만 머물던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화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한 해 뒤엔 서울시의 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데자뷔’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영화를 열심히 만든 이유는 ‘영화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 어느 평론가의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점차 노하우를 익혔다. 이 과정에 미래에 대한 꿈도 달라졌다.특히 2019년 영국대사관이 주관한 프로그램에 당선돼 6개월 동안 런던 유학생활을 경험하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좁았다는 것을 느꼈다.그 6개월 동안 그는 학업 외에 ‘런던으로 간 평양사람’이란 시나리오와 함께 ‘뉴몰든FC’라는 장편소설까지 썼다. 이 장편소설은 25세 대학생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탄탄한 서사와 절도된 문체로 여러 작가들을 놀라게 했다. 초고를 오디오북으로 발간한 그는 아직도 이 소설을 끌어안고 수정하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는 자신의 소설을 펴내줄 출판사를 찾고 있다.● “석범진으로 살고 싶습니다.”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학과장을 찾아가 국어국문학과로 전과 신청을 했다.학과장은 석 씨가 코딩을 짜는 것보단 글쓰기에 더 소질이 있고, 회로설계보단 영화를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엔 동감했지만, “누구나 박찬욱이나 봉준호가 될 수 없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박찬욱, 봉준호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석범진이라는 사람이고 싶고 저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 마음을 바꾸진 않았다.이듬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다.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됐지만, 그래도 국문과가 과학보단 훨씬 재미있었다. 성적도 덤으로 높아졌다.코로나 기간에도 그는 짬짬이 ‘길섶’이라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돈이 없어 자원해주는 형과 동생들을 배우로 써야 했고, 남들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서 한밤중에 찍어야 했지만 그래도 영화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2022년 연세대를 졸업할 때 마침 연세예술원이 생겨나 첫 학생들을 모집했다. 연세예술원엔 영화학과도 있었는데, 학생들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장비나 제작비를 지원해주었다. 이미 대학 시절 4편의 단편영화를 찍었던 석 씨는 연세예술원에 지원해 합격했다. 20여 명의 영화학과 학생들 중엔 현직 촬영 및 조명 감독도 있었고, 작가도 있었다. 동기들이 서로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예술원을 다니며 석 씨는 한 걸음 더 성장했다. 2024년 예술원 주최 제1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그가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또 영화학과 1기생 졸업 기념으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됐을 때 예술원 교수들은 연출까지도 석 씨에게 맡겼다. 로케이션 섭외부터 배우 섭외까지 어느 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예산은 1억 원으로 책정됐지만, 이중 7000만 원은 재능기부 등의 형태로 협찬을 받았고, 실제 들어간 돈은 3000만 원 정도였다. 이것으로 장편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석 씨는 해냈다. 돈이 없어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어야 했고, 스토리를 여러 번 바꾸어야 했지만 결국 70분짜리 영화를 7,8월의 땡볕 속에 촬영해 마무리할 수 있었다. 12월에 진행된 영화 림시교원 시사회는 석 씨에겐 영화계로 발을 내딛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겐 꿈이 있고, 꿈을 향해 가기 위한 단계별 목표도 있다.“제가 개인적으로 ‘두만강 감독’이라고 부르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두만강’과 ‘경계’를 만든 장률 감독, ‘무산일기’를 만든 박정범 감독,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입니다. 장 감독은 두만강을 넘어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박 감독은 제 고향인 무산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탈북민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나운규는 어릴 때 고향 회령에서 보고 들은 노래와 이미지를 영화에 접목한 감독입니다. 저는 이 감독들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저도 앞으로 두만강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그의 머리 속엔 벌써 여러 시나리오로 꽉 차있다. ‘꽃제비’ ‘붉은 소년단원’ ‘다섯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영화가 돼 나올 것이다. 모두 소토지 세대와 장마당 세대의 삶을 그려내는 작품들이다.“영화를 찍으면 상업영화를 찍어야 유명 감독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주류가 되지 못해도 독보적인 영화는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어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영화를 만들 순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고 저 자신이고 싶습니다. 영화의 힘을 믿는 한 이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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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북한군이 떼죽음으로 남긴 교훈

    북한군 최정예 ‘폭풍군단’ 병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속절없이 죽고 있다. 12월 치러진 전투에서 북한군 사상자는 1100여 명이라고 국가정보원이 19일 밝혔다. ‘고기 분쇄기’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최전선에서 열흘 남짓 기간에 1만1000명으로 추산되는 파병 병력의 10분의 1이 갈려 나간 것이다. 실전 속 북한군은 전혀 최정예가 아닌, 가장 한심한 전투원들이었다. 북한군과 교전했던 우크라이나 드론 부대 지휘관은 워싱턴포스트(WP)에 “놀라운 일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40∼50명이 한꺼번에 들판을 달린다. 포격과 드론의 최상의 표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군은 드론을 피해 도망칠 줄 알며 숨어서 드론에 총을 쏘지만 북한군은 선 채로 마구잡이로 쏴댔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낮은 레벨의 컴퓨터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증언했다. 북한군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드론과 평야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일부만 맞다. 진짜 이유는 이들이 현대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려 무사’로 키워졌기 때문이다. 특수부대에 입대해 10년 동안 가장 많이 하는 훈련은 맨손으로 벽돌을 격파하거나 뒷발차기로 기와를 박살 내는 따위들이다. 열병식에 나가 발을 배꼽까지 올리며 씩씩하게 행진하는 것도 중요하다. 김정은이 특수부대를 현지 시찰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격술이다. 군인들은 배에 화강석을 올려놓고 망치로 부수고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걸어간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김정은은 활짝 웃으며 너무 좋아한다. 그의 머릿속 특수부대는 우수한 격술가나 차력쇼 전문가들인 것 같다. 특수부대원들이 정작 공격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우크라이나에서처럼 무리를 지어 돌격하거나 갖은 현란한 몸짓으로 이리저리 땅에 뒹굴며 총을 쏜다. 총알을 피한다는 몸짓인 것 같은데, 정작 방탄복을 입고 군장을 착용하면 그걸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지금까지 북한 매체를 통해 본 특수부대 훈련 사진이나 영상에서 현대전의 전투 대형을 본 적이 없다. 한때 우리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폭풍군단의 실체가 우크라이나전을 통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다행이라는 반응도 있다. 북한군 최정예 병력의 실전 능력이 그 정도면 늘 농사와 건설에 끌려다니는 일반 병사들의 수준은 안 봐도 뻔하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한국도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 달리기 등의 높은 체력 기준을 통과하고, 사격을 잘해야만 특급전사로 인정해 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펼쳐지는 전쟁을 통해 뛰기도 힘들어하는 병사도 1인칭 시점(FPV) 드론만 잘 조종하면 특급전사 10명 정도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소개된 29세 우크라이나 드론 조종사 올렉산드로 다흐노도 학창 시절 공부는 하지 않고 비디오 게임만 했지만 참전 후 1년 반 동안 300여 명의 러시아군을 죽였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인 네이비실 소속 크리스 카일이 이라크전에서 사살한 적(공식 160명, 비공식 225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WSJ는 “영화에서 엘리트 군인을 묘사할 땐 강인해 보이는 마초적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오늘날 실제로 전장에서 성과를 내는 건 전투에서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스크린 중독’의 연약한 젊은이들”이라며 “드론 조종에 필요한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닌 빠른 사고력과 예리한 눈, 민첩한 엄지손가락”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 병사의 능력뿐만 아니라 육해공 장비의 보유 효율이나 운용 전략에 대해 반드시 통렬한 재점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물론 우리 군이 이미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총 한번 쏘지 못하고 죽는 북한 군인들을 보며 군 개혁만 떠올리면 일부만 보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세상에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변화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전히 반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엘리트 충원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20대 전후 찍기를 잘하는 능력만 갖췄던 사람들에게 수십 년 뒤 국가 운영까지 맡기고 있다. 하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고, 살기 위해 바닥을 기어본 사람들이 국민에겐 더 나은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파괴적인 전쟁을 보며 우리의 고정관념도 파괴할 필요가 있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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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전거리교화소의 ‘불망산’

    지금까지 수많은 탈북민을 만났지만 경기 광주에서 캠핑카 제작업을 하고 있는 권효진 씨(63)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함경북도 전거리교화소에서 2001년부터 2007년까지 6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정확하게는 견뎌냈다. 교화소에서 6년을 버텨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그가 석방될 때 안전원(경찰)들조차 그를 영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가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가족들의 뇌물이었다. 이를 통해 교화소 내 죄수들 중 넘버2의 위치인 ‘총지령공’ 자리를 따낸 것. 일종의 ‘죄수 간부’로서 “생산 지령과 결과를 관장하고 입소와 퇴소, 병보석, 사망자 등을 종합해 교화국에 보고하는” 업무를 맡는다. 그래서 교화소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그의 증언은 특별하다. 전거리교화소에서 죽으면 ‘불망산’에 간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탈북민 가운데 불망산을 실제 가본 사람은 권 씨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교화소 수감자의 생활을 노예의 삶이라고 했다. “제가 총지령공으로 있을 당시 전거리교화소는 수용 능력이 800명이었지만 보통 1100명이 수감돼 있었고, 이를 관리하는 보안원과 경비병이 240명이었습니다. 당시 33개 교화반이 있는데 동 정광을 채취하고, 임업과 감자 농사 등을 했습니다. 이렇게 전국 교화소에서 죄수들이 생산한 것으로 사회안전성이 먹고삽니다. 즉, 죄인은 안전성의 노예들인 셈입니다.” 교화소에서는 죽음이 다반사였다. “전거리엔 매일 10여 명이 새로 입소하는데, 사람이 죽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제일 적게 죽는 날이 2명이었고, 평균 5∼7명씩 죽었습니다. 추운 겨울엔 10명 이상씩 죽습니다.” 그의 증언에서도 가장 끔찍한 부분은 시신 처리 과정이다. “죄수가 죽으면 ‘사체보관실’에 쌓아두었다가 저녁에 불망산으로 부르는 외딴 화장터에서 태웁니다. 시체를 처리할 때는 총지령공과 수레꾼 4명 등 모두 8명이 갑니다. 화장터엔 굵은 철근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틀이 있는데, 아래에 나무를 쌓고 시체를 올려놓습니다. 죄수들이 삐쩍 말라 시신은 통나무 두께도 안 됩니다. 한 구는 머리를 오른쪽에, 다음은 머리를 왼쪽에 놓는 식으로 차곡차곡 놓으면 틀에 모두 12구의 시신이 올라갑니다. 저녁에 불을 지피고 내려갔다가 아침에 올라가면 재들이 선반 아래에 수북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걸 삽으로 퍼서 화장터 주변에 막 뿌리고, 빗자루로 씁니다. 무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녁에 또 반복됩니다. 화장에 쓰는 통나무는 죄수들이 산에서 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총지령공 기간에 전 씨가 처리한 시신만 수천 구였다. 이런 지경이니 교화소에서 3년을 버티면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다. 전거리교화소는 북한에서 규모가 작은 축에 속한다. 그가 있을 당시 북한에는 교화소가 모두 12곳이 있었다. 제1호 교화소인 평양 화천교화소는 신분이 드러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주로 수감돼 있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강동에 2교화소, 사리원에 3교화소, 개천에 4교화소 등 전국 각지에 교화소는 분산돼 있다. 가장 규모가 큰 함흥교화소엔 무려 1만 명이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모든 교화소에서 전거리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끔찍한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다. 교화소엔 단련형과 교화형을 받은 사람들이 간다. 북한 형법상 형벌에는 노동단련대(1∼6개월), 노동단련형(1∼3년), 노동교화형(1∼15년 및 무기), 사형 등이 있다. 단련형은 공민권이 유지되지만 교화형은 공민권이 박탈돼 큰 차이가 있다. 북한엔 교화소만 있는 게 아니다. 교화소 수감자들이 안전성에 소속된 노예들이라면, 정치범수용소의 정치범은 보위부의 노예들이다. 그 외에도 군인을 수감하는 군 교도소, 보위원만 따로 수감하는 보위부 대열, 깊은 산골에 격리되는 추방기지 등도 존재한다. 권 씨의 증언은 담담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엔 북한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이 담겨 있었다. 체제를 지키는 사냥개인 보위부와 안전성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할 수 없는 독재자들은 대신 노예들을 하사했다. 노예는 죽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노예는 얼마든지 충원된다. 노예들이 생산하는 식량과 땔감 등으로 사냥개들과 이들의 주인인 평양의 지배계층이 먹고산다. 이게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하는 노예 국가 북한의 실상이다.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 20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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