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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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4-03-21~2024-04-20
칼럼44%
남북한 관계33%
산업10%
경제일반7%
사회일반3%
기타3%
  • 서울디자인재단 중소기업 산업디자인 전시회 개최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이달 20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중소기업 산업디자인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된 소형 인공지능 드론, 자율주행 기술을 활용한 발레주차 로봇, 반려인과 반려동물의 동행을 지원하는 용품 등 이색상품들은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의 중소기업 산업디자인 개발 지원 사업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이다. 이날 전시된 제품들은 ‘반려동물에게 편리하게 간식을 줄 수 있다면?’ ‘흥미를 유도하고 안전을 고려한 사용자 친화적 코딩 완구를 만들 수 없을까?’ ‘어렵게만 느껴지는 의학 용어를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할 수는 없을까?’ 등 일상과 연관된 질문을 통해 개발이 시작됐다. 개발 과정에서 서울시와 디자인재단의 역할이 컸다. 시와 재단은 지원 기업을 선정해 5월부터 공동 프로젝트의 역할과 목표 수립, 제품화를 위한 디자인 개발 과제 수행, 디자인 개발비 지원, 역량 강화 교육, 일대일 멘토링을 통해 기업 간 협력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모두 120개의 기업이 참여해 최종 60개의 디자인 결과물이 나왔는데, 바이오·의료 관련이 15개, AI·지능형 정보통신기술(ICT) 관련이 7개, 라이프스타일 관련이 38개이다. 우수과제로 선정된 니어스랩(대표 최재혁)과 디파트너스(대표 이영재)는 공공 및 산업용 드론의 디자인을 고도화했다. 접이식 형태로 개선해 편의성을 높이고, 부품의 생산 및 조립 공정을 간소화하여 제작 원가의 비용을 절감했다. 코보블록스(대표 이영숙)와 아이디앤(대표 강상훈)은 코딩 교구로 활용되는 로봇카의 디자인을 개선했다. 유아 친화적인 디자인을 고려해 곡선형으로 바꾸고, 텍스트 대신 아이콘으로 코딩 명령어를 기입하도록 개선하여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뉴아인(대표 김도형)과 유니체스트(대표 조성환)는 편두통 치료 기기와 연동되는 앱을 일반인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을 직관적으로 개선했다. 또 자율주행 발레주차 로봇, CD음반 대체를 위한 디지털 플랫폼 앨범, 스마트 원적외선 항문케어 시트, 반려동물 간식 디스펜서, 브랜드 및 패키지 디자인 개발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출시됐다. 올해 참여한 120개 기업은 서울시와 디자인재단의 지원 사업을 통해 디자인을 고도화하고 생산 효율성을 대폭 개선했으며, 제품 앱 서비스 출시, 특허 출원, 어워드 출품, 전시·박람회 참가, 해외 시장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최인규 서울시 디자인정책관은 “중소기업 디자인 개발 지원 사업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디자인 산업 활성화, 시민 삶의 질 제고 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며 “디자인 개발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비즈니스의 핵심 요소로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추가적인 사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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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해변에서 떠올린 북녘 고향[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내 고향은 한반도 최북단 바닷가 마을이다. 약 50m 너비의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 고향 집이 있었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로 알고 자랐고, 매일 문을 열면 탁 트인 바다가 맞아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이 바다 건너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장하면서 세계지도를 통해 바다 건너에 일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여름에 태풍이 오면 어린 소년의 피는 끓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해변엔 쓰레기가 가득했다. 그런 날 아침이면 맨 먼저 바닷가 해변에 나가 천천히 걸으며 간밤 해변에 도착한 색다른 쓰레기를 주워봤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소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남에겐 쓰레기일지라도 소년에겐 바깥세상의 비밀을 푸는 퍼즐이었다. 쓰레기는 일본에서 밀려온 것이 가장 많았고, 남조선에서 온 것도 있었다. 주로 빈 페트병, 캔 등이 많았지만 가끔은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쓰레기도 있었다. 일본 슬리퍼 한 짝을 들고 ‘이런 건 왜 신고 다니지’ 궁금했던 적도 있고, 의족 하나를 들고 어떻게 발에 붙이고 다닐까 한참 상상했던 적이 있다. 파란색 일제 플라스틱 파리채를 주워 와 몇 년 잘 썼던 적도 있다. 그 동네에서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바다 건너 세상. 그곳에서 매년 꼬박꼬박 건너오는 쓰레기들을 소년은 연애편지를 바라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커갈수록 해변에 앉아 건너편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많았다.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결국 피 끓는 20대에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중국과 북한에서 여섯 번이나 감옥을 옮겨 다녔어도 바깥세상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2002년 마침내 한국에 왔고, 하나원을 나와 4개월 뒤부터 기자가 돼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꿈은 늘 가슴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내 고향 건너편엔 무엇이 있을까.’ 2005년에 구글어스 서비스가 시작됐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고향과 위도가 분초까지 똑같은 일본 해변을 찾는 것이었다. 찾아보니 그곳엔 검은 해변이 있었다. 어렸을 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꿈도 꾸지 못했던 그 해변에 서서 이번엔 맞은편 고향을 바라보는 것이 오랜 세월 나의 버킷리스트 1번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보름 전 드디어 그 꿈을 이뤘다. 삿포로에서 니가타까지 일본 북서부 해변 도로를 5박 6일 동안 차로 달렸다. 고향 집과 정확하게 위도가 일치하는 해변은 콩알처럼 작은 검은 몽돌이 깔린,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외진 해변이었다. 그곳에 서서 고향 하늘을 바라볼 때 만감이 교차했다. 어렸을 땐 바다 건너 일본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꿈을 마침내 이뤘지만, 이번엔 바다 건너 고향이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어찌하여 이 바다는 이렇게도 건너기 힘든 것이 됐을까. 1300년 전 발해인들은 열악한 목선으로도 일본을 오갔는데, 지금의 북한은 그 어떤 배를 타도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발해인들이 타고 왔던 계절풍과 해류를 타고 부서진 북한 목선들만이 백골을 실은 채 일본 해안에 도착할 뿐이다. 발해 사신 양태사는 계절풍을 기다리는 반년이 너무나 길어 ‘한밤의 다듬이소리’라는 애달픈 시를 남겼는데, 니가타항에서 떠난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 서해에 머물렀던 엿새 동안 나는 점점 더 외부와 고립돼 가는 북한 동해의 도시와 마을들을 헤아릴 수 없이 떠올렸다. 북한 바닷가 마을 어디에선가 40년 전의 어린 나처럼, 외부 정보가 담긴 쓰레기를 들고 호기심에 반짝이는 두 눈으로 살펴보는 소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검은 몽돌 해변에서 나는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다시 저 건너에 서리라. 어쩌다 보니 나는 또 바다를 건너는 것이 목표인 인생을 살게 됐다. 그것은 바다 건너 북한 인민들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땅에서 태어난 우리가 같은 꿈을 꾸다가 문득 그 꿈이 이뤄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고향에 누구보다 먼저 찾아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저 바다 건너편엔 풍차가 가득한 아름다운 해변이 있더구나. 나는 평생을 바쳐 다녀왔지만, 이제 너희들은 배를 타고 한나절 만에 갔다 오거라.”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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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굴은 대한민국이 최고다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북한 땅굴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무력화해야 할 하마스의 땅굴이 북한의 기술로 건설됐다는 보도도 나온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북한이 기술을 수출할 정도로 대단한 땅굴 건설 실력을 갖고 있는지 착각할지 모른다. 현실은 어떤가. 공교롭게 북한은 최근 지하터널을 자랑했다. 지난달 노동신문은 평양 지하철이 개통 50주년을 맞았다며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인민의 지하궁전, 지하 평양을 일떠세워 준 어버이 수령들의 하늘 같은 은덕을 잊지 마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 지하궁전의 확장은 36년 전에 멈췄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 20년 동안 총연장 34km의 2개 노선과 17개 역을 만들었는데 이후엔 더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평양 지하철은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는 반쪽짜리다. 대동강 남쪽의 동평양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통에서 소외된 2등 시민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북한은 대동강 관통 노선을 만들려 노력했지만 하저터널이 붕괴돼 100여 명이 죽는 참사를 포함해 다섯 차례의 시도에도 끝내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돈이 없어 평범한 지하철 연장 작업도 못 하는 지금 실정에선 하저터널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국에는 북한이 서울 지하철까지 연결하는 비밀 땅굴을 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면 서울과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개성공단 인근에서 시작해도 약 40km나 남쪽으로 조용하게 파고 들어와야 한다. 대동강 하저도 뚫을 기술이 없는 북한이 한강이나 임진강 바닥을 폭약도 안 쓰고 삽과 마대로 파서 넘었다는 이야기다. 난제는 그뿐이 아니다. 숱한 버력은 어떻게 처리하며, 수십 km 밖에서 땅굴의 물을 퍼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양수기는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군사분계선 이북을 손금 보듯 하는 우리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1983년 탈북해 땅굴 관련 증언을 남긴 신중철 대위 이후 3만 명이 넘는 탈북민이 더 왔지만, 땅굴을 파는 데 동원됐거나 또는 사돈의 팔촌 중에 관여했다는 증언은 없다. 한국에서 발견된 북한 땅굴 4개는 모두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1990년에 발견된 마지막 땅굴도 굴착 형태로 봐서 다른 땅굴과 건설 시기가 같은 것으로 판명됐다.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땅굴 때문에 고전하자 적의 배후에 침투할 수 있는 땅굴을 파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판 땅굴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남방한계선조차 넘지 못하고 발각됐다. 가장 많이 내려온 것이 군사분계선에서 1.5km 내려왔다. 땅굴의 용도는 선제공격용이다. 북한이 남침으로 한국을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1970년대 중반까지였다. 이후엔 한미연합군과 격차가 너무 벌어져 선제공격으로 남침한다는 꿈을 접은 지 오래다. 금강산발전소 건설을 위해 45km의 도수터널을 판 것이 마지막 대규모 땅굴 건설이었는데 군단급 병력이 1996년까지 10년 동안 동원돼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겨우 완성했다. 북한의 땅굴 기술은 수십 년 전 수준에 멈춰 있다. 지난해 10월 김정은은 동서 대운하를 파겠다고 전 세계에 큰소리를 쳤지만, 실제론 엄두가 나지 않아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이게 귀신도 모르게 서울 지하철까지 땅굴을 연결했다고 일각에서 두려워하는 북한의 진짜 실력이다. 오히려 최근까지 열심히 땅굴을 판 하마스가 북한에 땅굴 건설 비법을 전수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북한의 땅굴을 대단하게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실 세계 최고 수준의 땅굴(터널) 건설 능력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다. 세계를 돌아보면 우리나라처럼 면적당 터널이 많은 나라도 없다. 서울처럼 인구 밀집도가 높고 고층건물이 꽉 찬 도시의 하부에는 지하철 터널이 겹겹이 거미줄처럼 건설돼 있다. 고속터미널역처럼 이미 있던 지하 노선들까지 땅속에서 엮어 하나의 역으로 재창출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50km가 넘는 철도 터널도 건설사 한 곳만 들어가 41개월 만에 완공한다. 지금도 서울 지하 40∼50m 깊이에 최고 시속 200km로 열차를 달리게 하는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터널이 3개 노선이나 뚫리고 있다. 이런 우리가 아직도 망치와 정으로 갱도를 파는 북한에 신비감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땅굴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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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사의 각오로 타는 ‘날아다니는 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북한 공군을 찬양하는 전면 기사가 14일 노동신문에 게재됐다. 불과 한 달 반 전인 8월 28일 김정은은 “앞으로는 육해공이 아니라 해육공이라고 불려야 한다. 해군이 자주권 수호에 제일 큰 몫을 해야 한다”며 해군을 격찬했다. 공군이 불만을 가질 수 있으니 부랴부랴 공군을 다독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국의 영공을 목숨으로 지켜가는 공군 장병들의 열화 같은 애국심을 따라 배우자’는 제목의 기사는 “오직 당중앙 결사옹위의 항로만을 나는 공군 장병들의 결사의 각오와 실천이야말로 누구나 본받아야 할 참다운 애국의 귀감”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기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비장한 죽음’이다. 결사, 육탄, 자폭 등 죽음과 연관된 단어들이 이어졌다. 비행 중 목숨을 잃은 조종사들이 본받아야 할 사례가 나열됐다. 기사를 읽으면 북한에선 비행 자체가 목숨을 건 결사적인 행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을 각오가 없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것이 북한 공군의 실제 현실이기 때문이다. 북한 공군의 최신 전투기는 1980년대 중반 생산된 미그-29로 불과 10여 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1967년 전력화된 미그-23이 40여 대, 1959년 전력화된 미그-21이 120여 대인데 이 중 몇 대나 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나머지는 비행기라고 해야 할지조차 민망한 고물들이다. 북한 공군의 주력인 미그-21은 ‘환갑’이 지난 비행기다. 1950년대에 전력화된 비행기가 주력인 공군은 세계에서 북한이 유일하다. 그나마 인도가 올해 초까지 31개 비행대대 중 3개 대대가 미그-21 50대를 운용했지만 지금은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 인도가 미그-21을 운용한 것은 소련에서 기술을 이전받은 생산 공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조달 및 수리가 가능한 공장까지 갖고 있음에도 인도에서 미그-21은 ‘날아다니는 관’이라고 불렸다. 인도 신문 힌두스탄타임스에 따르면 지난 60년간 400대 이상의 미그-21이 각종 사고로 추락했고, 약 200명의 조종사가 숨졌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우크라이나 전쟁 1년 반 동안 격추된 전투기 수보다 더 많이 추락하고, 더 많은 조종사를 죽게 한 것이 인도의 미그-21이다. 생산 공장이 없는 북한은 인도보다 사정이 더 나쁠 것이다. 인도가 미그-21 운용을 중단하면서 이제 북한 조종사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관’을 타게 됐다. 사고 사례는 노동신문 기사에도 묘사된다. 지난해 10월 북한이 포토숍 복사 붙이기 기능까지 동원해 150대가 떴다고 과장선전한 대규모 항공공격종합훈련에서 이륙 후 고장이 난 비행기가 있었다고 한다. 비행사는 귀대 명령을 거부하고 명령을 관철하기 전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서 그대로 날아가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북한은 이 비행사를 결사의 각오를 가진 귀감이라 내세웠지만 그의 생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전투기는 개발 시기가 20년 정도 차이만 나도 학살 수준의 격차가 벌어진다. 당장 북한 조종사들부터 1947년에 생산돼 아직도 북한에서 운용 중인 미그-15로 1967년에 생산된 미그-23과 전투를 하라고 하면 “미쳤냐”는 소리를 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몇 세대 이상의 격차를 가진 한미 공군과 싸워 이긴다고 큰소리를 친다. 북한이 침투용으로 운용하는 AN-2기는 개발된 지 75년이 지났고, 특수부대 12명을 태우면 시속 150㎞도 나지 않는다. 이걸 타고 북한은 유사시 남쪽 곳곳을 기습 점령한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지만 노동신문이 아무리 열심히 결사의 각오를 주문해도 군인들이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북한군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장마당 세대’가 주력이 됐다. 국가의 혜택이란 걸 받아 보지 못한 이들이 김정은을 위해 진심으로 결사의 각오를 가질까.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침 어제까지 서울공항에선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가 열렸다. KF-21, F-35A, E-737 등 65대의 최신 항공기와 전차, 자주포 등 한미 연합군의 핵심 자산들이 전시됐다. 북한군에 전시회 영상을 보여준다면 없었던 결사의 각오도 진심으로 생기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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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北인권특사 “탈북민 추가 강제북송 없게 中과 협의중”

    “우리는 중국 정부에 강제송환 금지 원칙(principle of non-refoulement)을 준수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방한 중인 줄리 터너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18일 “최근 있었던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임기 중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터너 특사는 서울 용산구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정부의 탈북민) 추가 북송이 없도록 하는 데 방점을 찍겠다”며 “(중국 정부와) 양자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이날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석차 방중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면담에서 탈북민 북송 문제와 관련해 “우리로선 중요한 문제이고 걱정되는 문제라서 (탈북자 북송에 대해) 말한 게 맞다”고 밝혔다.● “中정부에 강제송환 금지 원칙 준수 촉구” 이달 13일(현지 시간) 취임한 한국계 미국인 터너 특사는 첫 공식 해외 일정으로 한국 방문을 택했다. 6년 9개월 공석 끝에 임명돼 방한한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서 “오랫동안 북한 인권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활용해 인권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하는 증폭기(amplifier)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와 협력해 북한 인권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추진자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터너 특사는 미 국무부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등 북한 인권 침해 문제를 주로 다뤄온 전문가다. 북한 인권특사실 특별보좌관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남아시아 담당도 지냈다. 최근 중국이 탈북민 600여 명을 강제북송한 것과 관련해 터너 특사는 “중국 정부에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지고 있는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며 “앞으로도 촉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터너 특사는 북한인권특사 임무로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들의 방북 등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하는 책임도 더해졌다고 이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미국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 납북자나 국군포로 가족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납북자 송환 문제와 관련해서 터너 특사는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인권 침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임기 중 “북한의 끔찍한 인권 상황에 대해 책임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도 했다. 책임을 묻는 구체적 방법으론 “북한 내 인권 침해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수집해 문서화하는 노력” 등을 언급했다.● “유엔총회서 北에 납북자 송환 요청”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 앞서 주한 미대사관에서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 등도 면담했다. 면담 참석자들은 “(터너 특사가) 다음 주 유엔총회에서 납북자들의 송환 및 생사를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달 23일부터 유엔총회 3위원회에서 북한인권특별보고관 등과 만나 납북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날 면담에서 터너 특사에게 전후 납북자 516명의 명단을 전달했다. 터너 특사는 명단을 확인한 뒤 “미 국무부가 매년 발간하는 연례 보고서에 납북자들 이름을 적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달라”는 피해자 가족 대표들의 요청에도 터너 특사는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8일 오전 8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에는 최 대표를 포함해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 이성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황인철 대한항공(KAL) 여객기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북한에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 씨 등이 참석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고도예 기자 yea@donga.com}

    • 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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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북한인권특사 “中 탈북민 북송 없도록 해야…유엔서도 논의”

    “우리는 중국 정부에 강제송환금지 원칙(principle of non-refoulement)을 준수할 것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방한 중인 줄리 터너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18일 “최근 있었던 (중국의) 탈북민 강제북송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임기 중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터너 특사는 서울 용산구 주한 미대사관 공보관에서 열린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정부의 탈북민) 추가 북송이 없도록 하는데 방점을 찍겠다”며 “(중국 정부와) 양자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 유엔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이날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지난달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석차 방중 당시 시진핑 국가 주석과의 면담에서 탈북민 북송 문제 관련해 “우리로선 중요한 문제이고 걱정되는 문제라서 (탈북자 북송에 대해) 말한 게 맞다”고 밝혔다.● “中정부에 깅제송환금지 원칙 준수 촉구” 이달 13일(현지 시각) 취임한 한국계 미국인 터너 특사는 첫 공식 해외 일정으로 한국 방문을 택했다. 6년 9개월 공석 끝에 임명돼 방한한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서 “오랫동안 북한 인권 분야에서 일한 경력을 활용해 인권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하는 증폭기(amplifier)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물론 한국 정부와 협력해 북한 인권 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추진자 역할을 하겠다”고도 했다. 터너 특사는 미 국무부에서 탈북민 강제북송 등 북한 인권 침해 문제를 주로 다뤄온 전문가다. 북한 인권특사실 특별보좌관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남아시아 담당도 지냈다. 최근 중국이 탈북민 600여 명을 강제북송한 것과 관련해 터너 특사는 “중국 정부에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지고 있는 의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며 “앞으로도 촉구할 예정”이라고 했다.터너 특사는 북한인권특사 임무로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들의 방북 등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하는 책임도 더해졌다고 이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에 돌아가면 미국에 있는 한국계 미국인 납북자나 국군포로 가족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납북자 송환 문제 관련해선 터너 특사는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인권 침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임기 중 “북한의 끔찍한 인권 상황에 대해 책임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도 했다. 책임을 묻는 구체적 방법으론 “북한 내 인권 침해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수집해 문서화하는 노력” 등을 언급했다.● “유엔총회서 北에 납북자 송환 요청” 터너 특사는 이날 간담회에 앞서 주한 미대사관에서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 등도 면담했다. 면담 참석자들은 “(터너 특사가) 다음주 유엔총회에서 납북자들의 송환, 생사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달 23일부터 유엔총회 3위원회에서 진행되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등과 만나 납북자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날 면담에서 터너 특사에게 전후 납북자 516명의 명단을 전달했다. 터너 특사는 명단을 확인한 뒤 “미 국무부가 매년 발간하는 연례 보고서에 납북자들 이름을 적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국군포로와 납북, 억류 피해자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해달라”는 피해자 가족 대표들의 요청에도 터너 특사는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8일 오전 8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에는 최 대표를 포함해 손명화 6·25국군포로가족회 대표, 이성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황인철 대한항공(KAL) 여객기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북한에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 씨 등이 참석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고도예 기자 yea@donga.com}

    •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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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공데이터법 10년, 디지털 선도 국가의 밑거름

    올해 ‘공공데이터 제공 및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공공데이터법)이 제정된 지 10주년을 맞았다. 공공데이터법은 국민의 공공데이터 이용권을 보장하고, 공공기관의 데이터 제공 의무 준수와 이용 활성화를 지원하기 위해 2013년 제정됐다. 챗GPT로 널리 알려진 생성형 인공지능이 주목받고, 구글과 넷플릭스 등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다국적 기업이 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전략들을 쏟아내는 디지털 심화 시대에 공공데이터는 우리나라가 데이터 분야에서 세계무대를 선도할 수 있는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부터 행정전산망 사업, 국가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 전자정부 사업 등을 통해 정부 문서·자료 등 다양한 국가 지식자원을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 이후 데이터 생성·수집의 본격화와 함께 빅데이터 개념이 등장하며 전 세계적인 데이터 산업 육성 기조가 시작되자 우리 정부는 2013년 공공데이터법 제정을 통해 공공데이터 개방 정책을 적극 시행하였다. 그 결과 2013년 5272개에 불과하던 개방데이터는 10년 만에 8만7033개로 1550%가량 증가했다. 주요 국가들에 비해 데이터 관련 법 제정이 다소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선진국을 크게 앞질러 나가고 있는 것. 2023년 기준 프랑스의 개방데이터는 4만7740개, 영국은 5만7853개에 불과하다. 한국은 특히 개방의 효과성, 시급성 등이 높은 부동산종합정보, 기상정보, 상권정보 등의 데이터를 국가 중점 데이터로 지정하여 개방하고 있다. 공공데이터는 민간 혁신을 촉진하고 많은 경제·사회적 가치를 창출했다. 공공데이터법 시행 이후 공공데이터를 활용한 민간의 서비스 개발 건수는 2800여 개에 달한다. 카카오 지도와 같은 교통정보 제공 앱 관련 기업이나 국내 최대 부동산 플랫폼인 ‘직방’이 데이터를 활용해 성장한 대표적 기업이다. 핀테크 분야의 대표 유니콘 기업 ‘토스’도 숨은 정부 지원금 찾기와 같은 공공 연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공공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하는 많은 민간 서비스에 공공데이터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코로나 기간에도 공공데이터는 큰 역할을 했다. 마스크 부족 사태가 벌어졌을 때 공공데이터를 활용해 민간이 100여 개의 공적마스크 재고 알림 서비스를 개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개방된 백신 데이터를 통해 어느 약국과 병원에 백신이 있는지 확인할 수도 있게 됐다. 이런 노력을 통해 대한민국 공공데이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공데이터 평가에서 3회 연속 1위를 달성했다. 정부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데이터 생성부터 활용까지 데이터 생태계 전반을 더욱 고도화하려 한다. 대한민국 공공데이터가 앞으로도 계속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도록 네거티브 방식의 개방 정책 강화와 수요자 중심의 개방 패러다임 전환, 민관 공동 협력 체계 구축 및 혁신적 협업 기반 강화, 스타트업에서 중소기업까지 성장 단계별 맞춤 지원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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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민 3000여 명, 서울 한복판서 운동회…남북하나재단 ‘어울림 한마당’ 행사

    탈북민 3000여명이 서울에 모여 어울림 한마당 ‘모이자‧손잡자‧힘내자’ 행사를 개최했다. 14일 서울 중구 동국대 대운동장에서 남북하나재단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코로나 확산으로 중단됐던 대규모 탈북민 행사가 5년 만에 재개됐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남북하나재단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탈북민이 주인공인 ‘남북 어울림 한마당’ 행사를 진행했지만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중단됐다.이날 행사에서는 다양한 배경과 정착 사연을 가진 탈북민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교류·지지할 수 있게 화합의 장을 마련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고향음식 나눔, 추억의 놀이 및 운동회, 글짓기 및 노래자랑, 문화·체험 부스 운영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됐다.탈북민들은 ‘모이자팀’, ‘손잡자팀’, ‘힘내자팀’, ‘하나되자팀’ 등 4개의 팀으로 나뉘어 문화예술공연, 체육대회, 가요제를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특히 체육대회 종목 중 ‘병 끼고 달리기’ ‘공 끼고 달리기’ 등은 일반 주민들에겐 생소하지만 탈북민들은 오랜만에 접해보는 북한의 경기 방식이다.이날 ‘병 끼고 달리기’에서 우승한 ‘힘내자’ 팀의 윤향숙 씨(46세·경기)는 북한 시절의 체육대회를 떠올리며 “그때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생활하다보니 체력도 왜소하여 ‘병 끼고 달리기’에서 3등을 했지만, 오늘은 건강한 체력과 즐거운 마음으로 참가하여 1등을 하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또 다른 참가자인 박영남 씨(52세·서울 노원구)는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외롭고 때론 힘든 시간도 많았는데 오랜만에 하나원 동기와 고향 친구도 만나 고향 음식도 함께 먹었다”며 “앞으로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의 활력소를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남북하나재단 조민호 이사장은 “그동안 코로나로 만남이 쉽지 않았던 탈북민들이 풍요로운 가을의 계절에 한자리에 모여 소중한 추억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오늘의 어울림을 통해 탈북민 모두가 더 큰 하나가 되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통일의 선발대로 당당하게 살아가길 늘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행사 개막식에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 김의승 서울시 행정1부시장 등이 참석했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이용선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훈 이북5도위원회 위원장이 축사 영상을 통해 응원을 보냈다. 통일부, KB국민은행, 미래를 위한 사랑나눔협회, (주)명인에듀, 금융산업공익재단, 희망을 나누는 사람들, 타이어뱅크 등 여러 기관과 기업이 이번 행사를 후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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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 우주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북한에서 한국 축구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자랐다. 월드컵 녹화 중계 때에 3개 팀만 공개되는 조가 늘 있었는데, 미국 일본도 공개하면서 한 개 나라만 못 한다면 당연히 남조선일 게 뻔했다. 자라는 내내 월드컵엔 늘 3개 팀만 공개되는 조가 꼭 있었다. 매번 월드컵에 나갈 정도면 축구 수준이 매우 높을 것이라 짐작됐다. 16강 대진표에 16개 팀이 모두 공개되면, 남조선 팀이 예선 탈락한 것이어서 매우 아쉬웠다. 돌아오는 월드컵마다 이번엔 남조선이 16강을 통과하라고 속으로 응원했다. 아마 북한 사람들 모두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2002년엔 탈북해 한국에 와 있을 때라 한국의 4강 진출을 목청껏 응원할 수 있었다. 마침 남북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라 북한도 한국의 4강 소식을 굳이 머리를 짜내지 않고 공개했다. 이후 한국의 16강 진출은 빈번해졌다. 북한은 16강전 8경기 중 7경기만 방영했다. 그러니 북한 사람들도 한국의 16강 진출을 당연히 알 수 있다. 북한과 하는 경기가 아니라면 북한 사람들은 같은 민족인 한국팀을 응원한다. 그게 북한의 정서다. 그런데 이번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선 ‘괴뢰’ 팀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나도 놀랐지만 북한 사람들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괴뢰든 남조선이든 이름 때문에 같은 민족을 응원하는 북한의 정서가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TV에 괴뢰라는 단어가 뜨는 순간 아마 대다수 북한 사람들은 ‘남조선과의 관계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괴뢰는 대북 지원이나 개성공단 재개와 같은 타협 정책이 윤석열 정부 기간엔 절대 없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시안게임 직전 북한은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북한 보도들엔 “앞으로 무기를 러시아에 팔아 잘살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지금 ‘남조선 지원은 당분간 기대할 수 없지만, 대신 러시아에서 뭘 좀 많이 받아오겠구나’라는 희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주는 양이 시원치 않거나 또는 지원이 국방 분야에 한정돼 주민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일이 당연히 있을 수가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속은 내가 바보지’라고 생각하며 김정은을 한심한 무능력자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1년 안에 이런 전개가 벌어질 수 있다. 오랜 경험상 이럴 때가 남북 관계가 가장 악화될 때이다. 북한이 주민 시선을 돌리기 위해 도발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취약한 곳을 포착해 빨리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디가 취약할까. 김정은의 입장으로 빙의해 고심해도 한국의 빈틈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랜 경제난으로 북한의 작전 실행 능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고, 반대로 우리 군은 연평도 해전이나 천안함 도발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북한은 까딱하면 한 대 때리려다 열 대를 얻어맞을 수가 있다. 하지만 취약점도 분명 있다. 김정은이 반년 내내 매달리고 있고, 러시아까지 가서 기술을 구걸한 정찰위성이 그것이다. 정찰위성은 가격도 비싸고,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려면 최소 다섯 개는 가동해야 해서 북한 입장에선 운영 실익이 낮다. 그런데 김정은은 왜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다. 위성을 특정 궤도에 올리는 기술을 획득하면 우주에서의 공격이 가능하다. 가령 정찰장비 대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교란 장비를 올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는 큰 기술이 필요 없고, 수십 kg 무게의 장비로도 한국 전역의 통신을 마비시킬 수 있다. 이미 북한은 한국을 향한 GPS 교란 작전을 수없이 진행한 전과가 있다. 지상 공격은 범위의 한정으로 큰 힘을 쓸 수 없지만, 500km 미만의 우주에서 내려쏘는 전파 방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다. 우리는 정찰위성이라니까 진짜 정찰위성인 줄 알고 있다. 우주에서의 전파 공격은 대응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반격은 할 수 있다. 가령 북한이 전파 교란을 일으키면 우리는 전파 송신을 통해 북한 모든 가정의 TV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할 수 있다. 그런 능력 정도는 확보해 놓아야 북한이 함부로 도발을 못 하게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대북방송 송출 예산 60억 원이 내년에는 전액 삭감되는 게 현실이다. 획기적으로 늘려도 모자라는데 거꾸로 간다. 이번에도 또 당한 뒤에 정신을 차릴 것인가.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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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해방의 투사가 된 인민군 대위…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가 걸어온 길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양강도 혜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 기슭에 앉아 있던 인민군 대위가 별안간 강물에 뛰어들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던 시각이었다.빨래를 하던 30명 남짓의 여인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가만히 보다가 대위가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자 한꺼번에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국경경비대가 달려 나와 온갖 욕설을 퍼붓더니 총을 쏘기 시작했다.대위는 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강을 건넜다. 추워서 이빨이 덜덜 떨렸다. 중국 땅에 접근하면서 그는 군복에 붙은 계급장을 뜯어버렸고 군모도 강에 던져넣었다.중국 쪽은 45도 경사의 가파른 제방이었다. 미끄러워 도저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조선족 청년이 머리를 내밀었다.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어디선가 나무 막대기를 찾아와 내밀었다. 1996년 9월 3일에 일어난 일이다.나중에 이 청년은 탈북하는 인민군 군관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북한에 유인 납치돼 6개월 동안 고문을 받고 가까스로 살아왔다.그로부터 약 4년 뒤 휴전선 대북 심리전 확성기를 통해 절규하듯 외치는 목소리가 두 달 넘게 북한으로 퍼져갔다.“나는 620훈련소 선전대 작가 대위 김진(김성민 씨의 개명 전 이름)이다. 620훈련소 정치위원, 선전부장 너희들은 무고한 전우를 반역자로 몰아가 결국 나를 남조선까지 오게 만들었다.”확성기 방송이 시작된 뒤 북한군에선 비상이 걸렸다. 그로부터 다시 6년 뒤 그가 복무했던 부대에서 한 군관이 탈북해 왔다.그 군관은 “그 사건 대단했죠. 소문이 퍼지자 총정치국에서 직접 김진 대위는 억울했다는 것을 부대에 통보했습니다”라고 전했다.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대낮에 인민군 현직 군관이 압록강을 넘자 양강도 보위부에선 다음날 즉시 체포조를 장백에 파견했다.체포조가 넘어오던 시각, 김 씨는 산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부대를 탈출해 꼬박 8일이나 기차를 타고 혜산으로 왔고, 다시 혜산에서 3일을 헤맸다. 온몸의 긴장이 강을 넘자마자 풀렸다. 하루 밤, 하루 낮을 자고 깨어나니 배가 고팠다. 태어나 네 끼를 처음 굶어봤다.배가 고픈 그는 산 아래 십자가 불빛을 찾아갔다. 북한군 복무 시절에 읽었던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신부를 기억해냈던 것이다.여성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를 보더니 대뜸 “어제 강 넘어온 분이죠. 오늘 북에서 체포조가 와서 인민군 군관 찾겠다고 돌아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고프고 지쳐서 어디 갈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집사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먹고 나니 또 졸렸다. 교회의 작은 방에 들어가 쓰러졌는데 깨어보니 다음날 저녁이었다.“여기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저랑 연길에 갑시다. 거기엔 도와줄 분들이 있을 겁니다.”여집사와 함께 12시간을 달려 연길에 갔다. 1996년엔 도로에 검문이 없었다.연길에서 한 조선족 목사를 만났다. 목사는 교회에서 먹고 자도 좋다고 했다. 그로부터 6개월 남짓 그는 교회 안에서 먹고 자고 지냈다. 새벽기도를 오는 신도를 위해 아침마다 불을 피우는 게 그의 일이었다.그 교회에선 ‘월간조선’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작가 출신인 그는 탈북한 전 북한군 대위의 스토리를 스스로 써서 잡지사에 보냈다. 그가 보낸 기고문은 월간조선 1996년 10월과 12월호에 두 차례에 거쳐 실렸다. 각각 60만, 80만 원씩 원고료도 도착했다.“당시엔 엄청난 돈이었는데, 아마 잡지사가 넉넉히 보내준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걸 바꾸니 중국돈 6000위안, 8000위안이 됐는데, 당시 중국 노동자 월급이 2~300위안에 불과했거든요. 거액이 생긴 거죠.”잡지 기고 후 적십자사 명함을 든 한국 남자가 찾아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아 거기에 가는 게 목표입니다. 일단 삼촌부터 찾아주면 생각해볼게요.”적십자사 남자는 1000위안을 주고 가면서 기다려보라 했다. 하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2월 한국에서 백두산 견학을 가는 목사 일행이 교회에 도착했다. 김 씨는 이들에게 사정했다.“저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한국으로 가려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500만 원이 있으면 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부산 동래제일교회에서 왔다는 조완주 목사가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조선족 현지 선교사에게 부탁해 일단 500만 원을 구해 그에게 준 것이다.돈이 생기자 그는 돌봐주던 조선족 목사와 함께 대련으로 떠났다. 목사가 대련에 가면 500만 원을 받고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미국 국적의 한인 목사가 있다며 주선했기 때문이다.● 공안에 넘겨준 한국 선장1997년 2월 대련에 도착하니 풍채 좋은 한인 목사가 약속장소인 카페에 나타났다. 500만 원이 든 봉투를 넘기자 그는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저 사람을 따라가면 한국으로 보내준다”고 말했다.그날 밤 김 씨는 청년과 함께 택시를 타고 대련항으로 갔다. 항을 둘러싼 철조망 앞에서 청년이 “이제 철조망을 넘어 남조선 배를 찾은 뒤 거기에 몰래 올라가면 됩니다”고 말했다.“아니 500만 원이나 받고 항에 데려와서 아무 배나 타고 가라는 게 말이 돼요?”“저는 그 사람 잘 몰라요. 그냥 대련항에 데려가주면 2000위안 준다고 해서 심부름한 것뿐입니다.”김 씨 머리에선 포기할까, 그냥 진입을 시도할까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결심이 서자 그는 청년을 잡고 사정했다.“그럼 내가 들어가 남조선 배를 찾아볼 테니 제발 여기서 좀 기다려주시오. 난 중국말을 하나도 몰라서 어딜 갈 수도 없어요.”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철조망을 넘어 대련항에 들어갔다.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항구 쪽으로 갈수록 불은 더 밝아졌다. 보초병의 눈을 피해 바닷물에까지 뛰어들며 끝까지 살펴봤지만, 선박들은 모두 영어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북한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그는 남조선 배를 끝내 찾지 못했다. 젖은 옷이 얼기 시작했다. 덜덜 떨며 다시 항구 밖으로 나오니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청년은 “아무래도 그 목사는 사기꾼 같으니 내가 천진에 사는 친구들을 통해 남조선 배를 찾아주겠다”고 했다.김 씨는 청년과 함께 이번엔 천진으로 갔다. 조선족 청년은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천진항에 ‘후션프랜드’라는 남조선 광석 운반선이 들어와 있으니 밤에 그걸 타는 걸 돕겠다”고 했다. 김 씨는 다시 천진항으로 갔다.청년이 “저기 끝에 있는 배가 남조선 배니 몰래 접근해 타라”고 알려주었다. 김 씨는 어둠을 타고 항에 들어가 몰래 선박에 접근했다. 그 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공안이 세 명이나 뛰쳐나왔다. 김 씨는 배 선원인데 술을 마시러 나갔다 오는 길이라고 손짓발짓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자 공안은 배 선장을 불렀다.선장이 나왔다. 김 씨는 선장에게 말했다.“나는 탈북한 인민군 대위입니다. 여기서 선장님이 선원이 아니라고 하면, 저는 공안에 끌려가 북송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공안의 앞이라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장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사가 달린 순간이었다.선장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이것 보시오. 탈북자를 도와주면 우린 공안이고 안기부고 다 끌려다녀야 해요. 우리도 먹고 살자고 일을 하는데 도울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김 씨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선장을 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리 말하면 난 죽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다시 말했다.하지만 선장은 단호하게 “노”를 외쳤다. 공안에게 “노스코리아 아미”라며 잡아가라고 손짓했다. 공안들이 달려들어 김 씨에게 수갑을 채웠다.나중에 한국에 온 뒤 김 씨는 그 선박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런데 후션프랜드라는 선박을 찾지 못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다짐했던 복수의 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졌다.●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쁘냐?”천진 감옥에 끌려간 그는 통역을 구하지 못해 40일이나 수감돼 있었다. 나중에 김일성대에 유학을 다녀왔다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한국말을 너무 못해 겨우 의사소통을 했다.“저는 인민군 군관입니다. 중국에 정치망명을 하겠습니다”고 하자 여자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우린 그딴 거 몰라”고 대답했다. 1차 조사를 받은 그는 도문 변방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를 이송하는데 무려 7명이 호송원으로 따라왔다.도문에서 다시 조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조사관이 2명씩 계속 바뀌었다. 조선족 공안이 그에게 회유를 했다.“너 가면 죽는다. 우린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북에 보내지 않고 중국에 있는 ‘로개농장(로동개조농장)’으로 보내겠다.”북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김 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하루는 새로 나타난 조사관이 “김정일 체제가 싫어서 왔다”는 그의 답변을 듣고 “그럼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다. 김 씨는 북한 체제를 맹비난했다.9일째 되는 날 조사를 받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여럿이 달라붙어 그의 팔을 꺾고 수갑을 채운 뒤 봉고차에 실었다. 차 안에서 처음 보는 탈북 남성과 수갑을 한 쪽씩 나눠차고 짐짝처럼 구겨진 채 북한으로 호송됐다. 현직 군관으로 탈북한 그는 북에 돌아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그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의 심정을 그때 알 수 있었다.함경북도 남양의 국경다리를 건너 도착하자마자 중국 공안이 두 사람을 북한 보위부에 인계했다. 중국에서 차고 온 반짝반짝한 새 수갑이 풀리고, 피로 변색된 듯한 시꺼먼 북한 수갑이 덜커덩 채워졌다. 중국 쪽에서 남양을 바라보면 국경다리 바로 앞에 ‘영생탑’이란 것이 있다. 보위부에선 두 사람을 그 탑 주변을 돌게 했다. 주변에서 장사하던 아줌마들이 몰려왔다. 두 사람을 조국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침을 뱉고 신발을 집어던졌다. 죽음을 앞둔 순간임에도 그는 이때 인생 최고의 수치심을 느꼈다.영생탑을 돌게 한 보위부원들은 다시 이들을 싣고 온성 보위부로 끌고 갔다. 김 씨는 중국이 자신에 대한 자료를 북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산악기공장 노동자라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처음에는 보위부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다.온성 보위부에서 조사 7일째 되는 날 조사실에 들어간 그는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그의 앞에 나타난 조사관은 도문에서 “북한 체제가 얼마나 나쁜지 설명해보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북한 보위부가 중국에 건너와 직접 탈북민의 심문에 동참했던 것이었다. 중국에서 북한 체제를 비난했던 그의 답변이 고스란히 북한 보위부 책상에 올라와 있었다. 사형 당해야 할 이유가 추가된 것이다.다음날 군관 4명이 온성에 나타났다. 그가 복무했던 부대와 인민무력부 소속 보위사령부 군관들이었다.“김진. 이제 가야지. 우선 평양에서 조사를 받고, 다시 부대에 가서 조사를 받을 거야.”“조사가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임마, 그건 네가 판단해야지 우리가 어케 알갔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호송원 4명과 함께 그는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사람들로 빼곡한 일반 객실이 아닌 열차 호송원과 승무원들이 타는 특별 객실이었다. 기차는 느릿느릿 평양을 향해 가고 또 갔다. 4명이 돌아가며 감시하는 바람에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는 내내 그는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희망은 있었다. 천진감옥과 도문감옥에서 50일 넘게 수갑을 차고 수감생활을 하다보니 고무줄이 들어있는 속옷 혼솔 부분의 살이 온통 벌레에 물어뜯겨 피고름 투성이었다. 도저히 수갑을 찰 지경이 아니어서 호송원들은 솜옷 위에 수갑을 채웠다. 그러다보니 손을 살살 움직이면 수갑에서 손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이 지났다. 깊은 밤 창밖을 내다보니 기차는 평성을 지나 평양으로 달리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게 뻔했다.그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화장실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더럽기 그지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그 앞에 서있던 호송원은 냄새가 싫은지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김 씨는 3일 동안 머리 속으로 연습한대로 수갑에서 한쪽 손목을 뽑아냈다.동시에 벌떡 일어나 유리창을 발로 차 깨뜨린 뒤 시속 80㎞ 정도로 달리는 열차 밖으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평양에 가서 온갖 고통을 겪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100m에 하나씩 있는 열차 전봇대만 피하면 살 수도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호송원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몸을 던진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정신을 차려보니 선로 옆 작은 밭에 쓰러져 있었다. 봄을 앞두고 마침 밭을 갈아서 땅이 푹신했다. 3년간의 특수부대 훈련이 무의식중에 그를 땅에 제대로 착지시킨 듯싶었다.주변을 돌아보니 멀리 기차가 멈춰서 있었고, 수십 개의 손전등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도망가려고 일어서려는데 무릎이 움직여지지 않아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로에 있다간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기 시작했다. 마침 수십m 옆에 산이 있었다. 그가 산자락에 붙어 몇 미터 올라가지 않았을 때 선두의 손전등이 그가 뛰어내린 자리에 도착했다. 자세히 보면 사람이 쓰러졌던 자리나 깨어진 유리창을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만, 열차에서 뛰어내린 호송원들과 안전원, 경무원(헌병)들도 당황했는지 정신없이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손전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김 씨는 다시 산을 기어올랐다. 몇 시간 뒤 산중턱에서 바라보니 손전등들은 주변 마을 집집마다 분주히 오가며 돌아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추운 산등성이에서 김 씨는 탈영병으로, 조국 배반자로, 사형수로 전락한 자신의 운명을 처량하게 되돌아봤다.● 남조선 혁명시를 쓴 아버지김 씨는 1962년 자강도 희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는 평양에서 희천공작기계공장 노동자로 혁명화 대상이 됐던 신세였다.아버지 김순석은 북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었다. 해방 후 함경북도 작가동맹 지부장을 역임한 그는 북한 최고 권위의 문학잡지에 여러 편의 시를 실었고, 이것이 인정받으면서 평양창작실 작가로 발탁됐다. 6·25전쟁에는 종군작가로 참전했고, 전후엔 잡지 ‘조선문학’ 편집부장, 조선작가동맹 시분과위원장 등을 지냈다.하지만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종파 숙청 바람이 불 때 아버지도 좌천돼 노동자로 지방에 쫓겨났다. 어떤 이유였는지 김 씨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에 할머니가 맏이이자 청년이 된 아버지만 함경북도 청진에 남겨둔 채 김 씨에겐 삼촌인, 아들 두 명을 데리고 서울로 간 것이 좌천의 중요 이유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정치적 이유가 아닌, 단지 10대의 어린 두 아들을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고 떠난 것뿐이지만, 북한 당국은 월남자로 판단한 것이다.수년 간의 혁명화 끝에 아버지는 1964년에 김일성대 어문학부 교원으로 평양에 복직했다. 김 씨는 희천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평양 중구역에서 북한 최고의 명문 유치원으로 치는 경상유치원과 대동문인민학교, 련광중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세상을 떴다. 김일성대 교원을 하던 아버지는 김정일이 1970년대 초반 대남사업을 하겠다며 ‘3호 청사(노동당 대남담당 기관만 모아놓은 건물 명칭)’를 만들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갔다. 아버지가 맡은 일은 구국전선 등 남조선 지하조직의 작가가 쓴 것처럼 시를 지어내는 것이었다.아버지가 쓴 시는 ‘남조선 혁명가들이 보내온 시’로 둔갑돼 대남방송으로 나갔다. 나중에 김 씨는 아버지가 썼던 시를 찾아봤다. 서울로 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구절구절 역력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얼마하지 못했다. 김 씨가 12살 때인 1974년에 타고 가던 차가 평양의 한 고가다리에서 전복돼 세상을 뜬 것이다.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쓰러져 누웠다. 어머니는 당시 조선중앙통신사 국제연감 담당 기자였는데, 하루도 출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계속 누워만 있다가 1년 뒤 돌아갔다. 김 씨는 “어머니가 세상을 살기 싫어 자살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외아들인 김 씨는 출가하지 않은 막내 누나와 함께 살았다.● ‘창작조 병사’가 되다1978년 중학교를 마친 김 씨는 만 16세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부모를 잃고 빽도 없는 그는 황해남도 태탄군에 주둔한 28사 경보병대대에 배속됐다. 경보병대대는 북한에서 특수부대로 간주된다. 게다가 그가 입대했을 때 “일반 병사도 벽돌 한 장은 거뜬히 깨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경보병대대는 아침 기상 직후부터 내복바람으로 3000번 타격 훈련을 한 뒤 밥을 먹었다. 엄동설한 산골짜기로 타고 내리는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타격 훈련을 하다보면 손에서 흐르던 피고름이 얼음이 돼 달라붙었다.하루도 빠짐없이 24㎏짜리 군장을 메고 평일 50리(20㎞), 토요일은 100리(40㎞)씩 행군 훈련을 했다.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김 씨는 인민군 협주단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제자들에게 부대를 좀 옮기게 해달라고 거듭 사정했다.3년 만에 마침내 김 씨는 경보병대대에서 82미리 박격포부대로 이동됐다. 포부대의 삶은 경보병부대에 비해선 천국이었다.여유를 찾은 그는 짬짬이 시를 써서 인민군 신문사에 기고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시를 쓰는 모습을 보면서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신문사에 약 10편의 시를 기고하면 1편은 신문에 실렸다. 5편 정도 실렸을 때 인민군 신문사에서 어떤 병사인지 궁금해 기자가 찾아왔다. 사단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입대 4년차가 됐을 때 사단 선전부장이 찾더니 “사단 창작조에 들어오라”고 명령했다.이곳에서 1년 정도 활동하다가 입대 5년차엔 군단 선전대로 옮겨갔다. 북한군은 군단별로 정규 선전대를 운영한다. 그가 속한 4군단 선전대는 당시 120명 편제였는데 200명이나 근무했다. 대좌인 선전대장 산하에 문학창작조는 물론 성악, 기악, 화술, 무용, 조명 등 각 분야별 특기자들이 소속돼 있었다. 군단 선전대에 소속되면 군관들이 입는 군복을 입히는데, 선전대를 구분하는 견장도 따로 있었다. 먹는 것도 일반 군부대와 훨씬 나아서 배고픈 걱정이 없었다. 그가 속한 문학창작조는 소좌 편제의 작가 밑에 8~10명의 병사가 소속돼 있었다.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선전대의 가장 큰 목표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군무자축전과, 역시 4년 주기로 열리는 군단별 선전대축전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2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축전을 위해 군인 200명이 복무하는 것이다.가령 군무자 축전의 경우 23개 군단급 선전대(정규군단 12개, 공군, 해군 및 군단급 훈련소 포함)에서 고른 작품들로 2시간 반짜리 공연을 진행하는데, 군단에서 작품이 하나라도 뽑히면 우수한 성과를 냈다고 본다. 각 군단 선전대는 성악이나 기악은 물론 합창이야기, 합창과 시, 노래이야기, 중창이야기, 독연 등 다양한 장르를 내놓고 최종적으로 공연에 선정되기 위해 애쓴다.김 씨는 군단 선전대에 들어간 첫 해부터 전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병사의 자서전’ ‘중대의 기타수’라는 제목으로 그가 쓴 가사가 군무자축전에 오른 것. 김 씨는 “가수가 노래를 잘 불렀던 탓이 컸다”고 회상했지만, 23개 군단 작가들이 경쟁하는 자리에 일반 병사가 쓴 가사가 두 개나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중앙 축전에 올라가면 “김진이 너냐”는 질문을 받게 됐다.창작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책이었다. 북한에서 발간된 고리타분한 서적밖에 없었는데, 외국 명작도 보고 싶었다.한 번은 창작조 병사 한 명이 “해주도서관에 가면 과거 출판됐다가 회수했던 책을 한 부씩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다. 그에게 시간을 주니 도서관에 들어가 1950~60년대 출판됐다가 김일성 독재체제가 공고화되면서 회수한 뒤 한 부씩 남겨 창고에 두었던 금서를 무려 6마대나 훔쳐왔다.그 덕에 김 씨는 안나 카레리나, 레미제라블 등 세계 명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세계 명작 중 일부를 다시 출판했지만 당시엔 이런 책이 금서였다.● 김형직사범대학에 가다입대 7년차가 되자 김 씨는 창작조 조장으로 발탁됐다. 조장이 되니 1년에 6개월씩 평양시 송신구역에 있는 인민군창작실에 올라가 ‘창작조장 강습’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입대 8년차인 1986년에 그는 송신에 갔다. 전군에서 온 30명의 군단 창작조장이 모였는데, 그해와 이듬해 그는 이 창작조장 강습단의 조장으로 발탁됐다. 이때 그는 북한 체제의 부조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됐다.저녁이 되면 30명 중 20명이 넘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평양의 고위 간부집 자식들이었다. 창작실 군관들은 이들에게 ‘과제’를 주어 외출을 허용했다. 가령 정무원 무역부장의 아들은 6개월 내내 며칠에 한 번씩 식용유 통을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이 기름은 군관들과 군관 식당에 배정됐다. 무역부장 아들은 기름통만 전달하고 집으로 귀가했다.군관 결혼식 준비 임무 명목으로 나가는 병사, 쌀을 갖고 오라는 부탁을 받고 나가는 병사, 부식물을 해결하라는 과제를 받고 나가는 병사 등 사유는 다양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평양 간부집 자식들은 뇌물을 주고 군 복무 기간을 집에서 자유롭게 지냈다.김 씨도 집이 평양이지만, 부모가 없어 물자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와 몇 명만이 실력으로 창작조장으로 발탁됐을 뿐 나머지는 뇌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그런 김 씨도 군 생활 말년에 뇌물을 엄청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김정일이 군단 산하 선전대와 체육단이 혼자만 잘 산다고 화를 내면서 해산하라고 한 것. 물론 이 지시는 3년쯤 지나 번복되긴 했다.선전대가 해산되면서 그는 박격포부대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가니 중대에선 그가 가장 고참이었다. 중대장과 소대장도 그보다 늦게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못하고 어려워하자 대대장이 그를 불러 “지금 너 하나 때문에 부대 규율이 어지러워지니 무력부 감 밭에 가서 경비나 서라”고 지시했다.황해남도 용연군에는 인민무력부 호방총국이 소유한 무려 2만 정보 면적의 감나무 밭이 있었다. 경비 움막에 올라가 바라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몇몇 병사들과 감 경비를 서게 된 김 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게 됐다. 규율생활도 없는데다, 감을 따서 고기와 실컷 바꾸어 먹을 수가 있었다. 안면을 익힌 인민군 창작실에 감을 한 트럭 가득 따서 보내도 흔적도 나지 않았다. 북한에선 귀한 과일인 감으로 창작실에 계속 뇌물을 보내니, 창작실이 보답을 했다.인민군 창작실은 3년에 한번씩 김형직사범대학에 위탁생을 모집해 보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위탁생은 기존 신분은 유지한 채 대학에 파견하는 학생을 의미하는데, 졸업하면 파견한 조직으로 돌아가야 한다.1988년 10년차를 맞아 제대할 나이가 된 김 씨는 인민군 전체에서 3명을 뽑는 김형직사대 작가양성반 위탁생으로 발탁됐다. 인민군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부, 보위부, 각도 문학창작실, 중앙 영화문학 창작실 등에서 위탁생을 뽑는데 이들은 한 개 학급을 구성해 3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뒤 졸업장과 작가 자격증을 받고 파견 기관으로 돌아간다.그가 입학했을 때 이렇게 모집된 위탁생은 19명이었다. 작가동맹 문예창작실 실장 정열(대좌)이 창작지도 교수였고 노동당 작전부장 오극렬의 딸로, 북한에선 유명한 영화문학 작가로 알려진 오혜영도 교수진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군단 작가, 대위로 승진김 씨는 대학을 1년 반밖에 다니지 못했다. 새로 생긴 620훈련소에서 작가를 뽑으려고 수소문하다가 학생 신분인 김 씨에게 제안을 해왔다. 소위를 달고 훈련소 작가로 일하면 3년 뒤에 졸업증을 받아주겠다고 한 것. 김 씨의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황해북도 신계군에 지휘부를 둔 620훈련소는 항간에 자주포군단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말에 생겼는데, 이때만 해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군단이라며 비밀주의를 고수했다.김 씨는 제안에 선뜻 응했다. 사실 병사 시절 그의 꿈은 군관이었다. 하지만 남들은 군관학교에 잘만 가는데, 그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추천해주지 않았다.그런 그가 안쓰러웠는지, 제대 전 뇌물을 주어 친분이 두터워진 군단 간부지도원이 부르더니 책상에 서류를 두고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웠다.서류를 펼쳐본 김 씨는 아연실색했다.‘할아버지 일제 때 뽕밭 4000평 보유, 도박으로 탕진. 삼촌 2명 월남. 아버지 기독교 신우회 총무 출신. 어머니 일본군 나남헌병대 타자수’ 등 그의 가족 내역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북한에서 나서 자란 김 씨가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간부지도원은 그에게 알아서 단념하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특히 어머니의 일본군 경력이 가장 걸렸다. 나중에 그는 어머니의 지인들에게 물었다.“어머니는 어떻게 돼 나남헌병대 타자수를 하게 됐나요?”돌아온 대답은 허무했다.“진이야, 중앙당이나 군단에 가면 예쁜 여자들이 근무하는 걸 많이 봤지? 딴 이유는 없어. 너희 엄마가 처녀 때 청진에서 제일 예뻤어.”군관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던 김 씨에게 군단 선전대 작가 제안이 왔으니 대학을 더 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가 군단에 가니 작곡가, 연출가 등을 각 부대에서 스카웃하면서 선전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이곳에서 그는 1996년 9월 탈북할 때까지 7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군복을 입을 사이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장성인 훈련소 정치위원은 북한에서 유명한 구호인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를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던 사람인데, 수시로 창작실을 찾아왔다. 당을 찬양하는 척하면서 자기를 부각시키는 내용을 교묘하게 끼워넣는 작품을 만드느라 1년 반 넘게 함께 고생했고, 친분도 두터워졌다.원래 군단 작가 편제가 소좌라 진급도 빨랐다. 소위로 부임했지만 대위까지 거침이 없었다. 1991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김일성에게서 군권을 넘겨받은 김정일은 그해 모든 군인의 계급을 한 계급씩 올려주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중위로 승진하기도 했다. 약속대로 김형직사대에선 졸업 학년이 되자 졸업장도 주었다.● 한국에서 날아온 편지김 씨는 1996년 8월까지 탈북이란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겹치면서 탈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첫 번째 사건은 1994년에 있었다. 그의 휘하 창작실에 두만강 옆 함북 새별(경원군)이 고향인 병사가 있었다. 이 병사가 휴가로 집에 다녀오면서 떡을 가득 메고 왔다. 그런데 떡을 싼 종이가 북한에선 볼 수 없는 고급 종이였다. 자세히 보니 ‘월간조선’의 화보였는데, 거기에 ‘사람찾기란’이 있었다. 병사에게 물어보니 중국에 있는 친척이 뭘 포장해 보낸 종이인데, 종이가 좋아 떡을 포장해 왔다는 것이었다.김 씨는 갑자기 삼촌을 찾고 싶었다. 1980년대 초반 북한이 남조선 각계 인사들에게 보낸 호소문 명단에 삼촌과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병사에게 “중국 친척에게 이 주소로 사람찾기를 부탁할 수 있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했다. 김 씨는 삼촌 2명의 인적사항을 적어 병사에게 주었다. 특히 노동신문에 나왔던 삼촌 이름과 같은 사람은 모 기독교 단체 총무 목사인 것 같은데, 알아봐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몇 달이 지나 병사가 중국 친척을 통해 월간조선이 보낸 회답을 갖고 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김관○ 목사는 알아보니 당신의 삼촌이 아닙니다.”그런데 이 병사가 보위부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병사는 김 씨가 준 편지와 회답을 고스란히 보위부에 가져다주었다. 현직 군관이 한국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는 매우 중대한 범죄였다.보위부 조사가 시작되던 찰나 군단 정치위원이 나섰다. 자기를 홍보하는 작품을 한창 만들고 있는 작가를 굳이 잡혀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김 씨를 불러 “뭐, 내용을 보니 별 것도 아니던데 내가 잘 처리해줄거니 창작에만 집중하라. 이제부터 이 일은 당신과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했다. 군단 정치위원이 힘을 쓴 덕에 이 사건은 조용히 묻혔다.두 번째 사건은 1993년에 시작됐다. 당시 군단의 신생 선전대의 고민은 관악기가 변변치 않은 것이었다. 북한제 관악기를 들고 축전에 올라가면 외제 악기를 쓰는 다른 군단의 선전대에 계속 밀렸다. 군단 선전부에 외화벌이를 한 돈으로 관악기를 좀 구해달라고 계속 요구해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1993년 축전을 앞두고 선전대장은 이 문제를 두고 계속 속을 썩였다. 하루는 선전대장이 김 씨를 불렀다. 당시 김 씨는 선전대 노동당 세포비서를 맡고 있었다.“비서 동무, 우리가 알아보니 개성학생소년궁전에 재일교포가 기증한 악기 세트가 쓰지도 않고 보관돼 있다고 하오. 우리 이거 훔친다 생각 말고, 잠깐 빌리고 다시 갖다 준다는 마음으로 가져오면 안 될까.”“대장 동지가 알아서 하시죠.”비서와 상의를 마친 선전대장은 때마침 선전대에서 아코디언 강습을 받고 있던 포종심정찰 대대 강습생 5명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인솔해 석탄트럭을 타고 수백 리 떨어진 개성으로 떠났다.침투와 기습 훈련에 특화된 정찰병들은 이틀 만에 새까만 석탄더미에 악기를 숨겨 부대로 돌아왔다. 나팔은 물론, 일본산 드럼세트와 전자바이올린 등 없는 것이 없었다.훔쳐온 일제 악기로 그해 선전대는 군무자축전에서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시 가져다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가 악기에 대해 물어보면 외화벌이를 한 자금으로 사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다.그런데 1996년에 이 사실이 발각됐다. 누군가 군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낸 것이다. 군단 선전대장은 출당된 뒤 강제 제대됐다. 훔쳐온 악기를 사용한 작곡가는 당원 자격이 박탈당하고 후보당원으로 강등됐다. 김 씨는 이 사건에 가담한 적이 없어 처벌을 피했다. 두 지휘관이 처벌을 받으면서 세 번째로 직급이 높았던 김 씨가 선전대장 대리를 맡았다.이때부터 부대에 김 씨가 대장이 되려고 총정치국에 투서를 보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졸지에 그는 출세를 위해 조직과 동료를 배신한 사람이 돼버렸다.● 탈영, 그리고 탈북김 씨는 처음에 자신이 배신자로 지목된 줄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외면하고 피하는 것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받았다.마침내 그는 부하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됐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군단 정치위원이라면 억울한 심정을 알아줄 거라 믿었다. 군단 지휘부에 가니 보초병들이 정치위원의 명령이라며 정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는 담장을 뛰어넘어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정치위원 방으로 찾아갔다.그가 억울하다고 토로하자 정치위원이 “너 아니면 됐어, 가봐. 일 열심히 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자루 속의 송곳이야 언제든지 드러나지 않겠어.”방을 나오면서 그는 정치위원도 자신을 배신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정치국이라도 시원하게 투서를 누가 했는지 밝혔으면 좋으련만, 북한도 제보자의 신상은 나름 보호해 준다.선전대로 돌아온 그는 이 누명을 어떻게 벗을지 고민하느라 이틀 밤을 꼬박 샜다. 그러다가 친구인 여단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던졌다.“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 남조선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면서?”순간 김 씨는 눈앞이 캄캄했다. 편지 사건은 친구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위원 등 몇 명만 알았다. 그런데 그가 상관을 배신한 사람으로 지목되자 정치위원도 그를 제거하려 약점을 꺼내든 것이다. 이때는 정치위원을 띄우는 작품 창작도 끝난 뒤라, 김 씨의 활용도도 사라졌다.친구에게서 편지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 씨는 방으로 돌아왔다. 남조선에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다시 들추면 정치범으로 몰릴 것이 뻔했다.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이럴 바엔 남조선으로 가자.”그는 지도를 펼쳤다. 철도를 따라가 보니 양강도 혜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간단히 짐을 챙겨 부대를 빠져나와 기차에 올랐다. 1996년은 고난의 행군으로 경제가 마비됐던 때라 기차도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열차 안에서 8일이나 고생한 끝에 혜산에 내렸다.혜산역에 내렸지만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몰랐다. 군관복을 입고 “압록강으로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면 수상하게 볼 것이 뻔한 터라 그는 무작정 헤맸다. 그런데 하필 방향이 반대였다. 무려 3일이나 헤매다가 압록강에 도착했다. 나중에 보니 혜산역에서 강까지는 5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압록강 기슭에 앉아 그는 하염없이 중국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되면 물에 뛰어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 5시쯤 변수가 생겼다. 지나가던 국경경비대 두 명이 다가와 증명서를 보자고 했다. 군관이 오전부터 강가에 목석처럼 앉아있으니 수상해보였던 것이다.증명서를 받아본 한 군인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820훈련소 김진 작가 동지군요. 저는 인민군 신문으로 통해 작가 동지 잘 압니다. 심지어 대위 동지에게 편지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작품 하나 쓰려고 현장 답사 왔어.”상대는 기뻐서 주절거렸지만, 신분을 들킨 김 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저들이 부대로 가서 보고하면 체포조가 올 가능성이 컸다. 군인들이 헤어져 얼마쯤 갔을 때 그는 압록강에 뛰어들었다.● 수배를 피한 9일간의 탈출북송돼 평양으로 끌려가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한 김 씨는 산에서 하루를 더 은신해 있다가 주변 기차역을 찾아갔다. 그런데 벌써 기차역에 그의 수배 사진이 붙어있었다.그는 다시 돌아가 숨어 있다가 밤 12시에 담장을 넘어 역에 몰래 들어갔다. 북으로 가는 화물열차를 잡아타고 가다가 새벽이면 무조건 내려 주변에 은신하고 다시 밤마다 화물열차를 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그렇게 9일 동안 북으로 계속 올라갔다. 중국에서 겨울에 옷을 여러 벌 입고 있다 잡혔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호송될 때까지 그 옷들을 여전히 입고 있었는데, 그는 탈출 후에 옷을 한 벌씩 기차역 앞 상인들에게 넘겨주고 먹을 것과 바꾸었다.때는 1997년 3월 말이었다. 낮에 산에 은신해 있다보면 산나물 캐려 올라오는 남루한 사람들, 나물이라도 캐먹고 살려고 산 밑에 비닐로 대충 막사를 만들고 사는 가족들을 수없이 만나게 됐다.지금까지 부대 밖 세상은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김 씨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 나라는 망했구나. 이런 걸 내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했고, 찬양을 하다니”라고 수없이 자책했다.9일째 되는 날 기차 옆에 두만강이 나타났다. 그래서 그날은 날이 밝아도 계속 기차를 타고 갔다.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9시쯤 되자 함북 회령과 학포 사이 구간을 가던 기차가 고개에서 속도가 급격하게 늦춰졌다. 그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논밭을 가로 질러 두만강을 향해 달렸다. 민가나 도로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그런지 막아서는 경비대도 없었다. 아직 두만강은 3분의 1 정도 얼어있었다. 그는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흙탕물로 변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쑥 들어갈 것이란 예상을 했는데 의외로 물이 무릎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냅다 뛰어 중국땅에 도착한 그는 갈대밭에 드러누웠다. 드디어 중국에 다시 온 것이다.아는 곳이 지난번 머물던 연길의 교회인지라 그곳을 찾아갔다. 대련까지 안내해주었던 태중원 목사는 그가 남조선에 이미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에 잡혀갔다 왔다고 해도 믿지 않고, 안기부에서 다시 임무를 받고 왔냐고 물었다.● 연길에서 올린 결혼식연길에서 김 씨는 1999년 2월 한국에 올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연길에 오자마자 그는 사기꾼 목사를 수소문했다. 그가 베이징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으로 찾아갔다.목사는 “네가 목사냐”고 울부짖는 그를 보고도 침착한 목소리로 “정말 미안합니다. 목사도 사람이라 실수합니다”고 하며 500만 원을 돌려주었다.나중에 그 목사는 속죄한다며 탈북민 구출활동에 뛰어들었고 수십 명의 탈북민을 한국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이 요원을 보내 그를 납치한 뒤 살해했다.김 씨는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찾아가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기다리란 말만 되풀이해 들었다.연길에 있을 때 가장 큰 변화는 그를 보호해주던 태중원 목사의 처제와 결혼을 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연변병원 의사로 있었는데, 아프리카 선교사가 꿈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언제 잡혀갈지도 모르는 김 씨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보호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사람을 좋아하는 김 씨는 한국에 온 뒤에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집에 끌고 왔다. 명절이면 주변 탈북민들을 다 불러 모으는 바람에 집이 넘쳐나 아파트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앉아 고기를 굽기도 했다. 김 씨의 집을 거쳐 간 탈북민은 수없이 많은데, 그때마다 부인은 불평 없이 남편과 손님들에게 상을 차린다. 탈북민 사회에서 김 씨 부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먹인 사람은 없다.그는 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살면서 자기 집도 마련하지 못하고, 돈이 생기면 계속 엉뚱한데 써버리는 남편이지만 지금도 김 씨와 뜻을 같이하며 믿음직하게 곁을 지킨다. 이들은 부부가 아닌 동지가 된지 이미 오래다. 연길에서 태어난 딸은 벌써 20대 중반이 넘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연길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태중원 목사는 탈북민을 도와줬다는 죄로 박해를 받아 외국으로 망명했다.결혼하고 얼마쯤 지나 김 씨는 한국에 있는 삼촌을 찾았다. 연길에 있는 내내 여러 선을 통해 수없이 알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는데, 백두산 관광을 왔다가 교회에 들린 한국 사업가가 자신이 알아본다며 돌아가더니 3일 만에 찾았다고 연락을 해왔다. 한국에 사는 할머니와 작은 삼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큰 삼촌 한 명만 남아있었다. 둘은 통화를 하면서 금방 서로를 알아봤다. 큰 삼촌의 목소리가 아버지와 똑같았다.삼촌은 성공한 사업가가 돼 있었고, 자식들 또한 잘 나갔다. 조카가 왔다는 소식에 삼촌은 연길로 날아왔다. 처음 봤지만 보자마자 “형님 아들이 맞구나”고 부둥켜안았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삼촌은 몇 만 달러를 주고 갔다. 당시 연길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김 씨는 이 돈 일부로 중국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한 뒤 한국식 당구장을 하나 차렸다. 삼촌은 한국으로 오라고 거듭 권했지만,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기 싫었다.당구장을 운영하면서 그는 갈 데 없는 탈북 청년 수십 명을 그곳에 숨겨주고 먹여주었다.● 연변의 치열한 남북 정보전1990년대 후반 연변은 남북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보위부와 안기부 요원들이 신분을 숨기고 맹활약했다. 이때는 탈북민이 연변에 가장 많았던 때이기도 했다.탈북민 속에서 북한을 붕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지하조직들도 생겨났다. ‘북한인민해방전선’ ‘피로써 북조선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연합(피민련)’ ‘진달래회’ 등 알려진 것만 5개의 비밀조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폭파시키겠다며 러시아 암시장에서 휴대용 대전차 유탄발사기(RPG)를 사오기도 했다.보위부는 이 조직들을 적발하기 위해 탈북민으로 위장한 요원들을 계속 잠입시키며 혈안이 돼있었다. 보위부의 공작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1990년대 말 혜산에선 김일성동상을 폭파시키려던 비밀조직 수십 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동지들을 밀고한 배신자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보복이 두려워 원산에 이주해 살다가 얼마 뒤 앓아 죽었다.북한 체제를 겨냥한 수많은 공작을 분쇄시키며 맹활약을 한 지휘관은 함경북도 보위부 윤창주 대좌였다. 북한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수백 명을 납치 살해하며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던 그의 운명은 비참했다. 2011년 처형된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심복으로 낙인돼 함북 보위부 심복 10여명과 함께 처형됐다. 그들의 가족은, 그들이 수없이 사람들을 잡아 보냈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외에도 탈북민 공작에 가담한 북한 보위부 간부와 요원들의 말년은 대개 다 비참했다. 북한에서 사냥개에게 차려진 운명은 토사구팽뿐이었다.1990년대 후반 연변에서 활약하던 안기부 요원들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적십자 명함을 들고 다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이 시기에 연변에서 성공한 탈북민 출신 사업가로 활동했던 김 씨는 수많은 공작의 전모를 직접 보았다. 하지만 아직 공개할 수 없는 비밀이 많기에 나중에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다.연길에서 많은 탈북민과 연계를 하면서, 그의 신분도 점점 노출되기 시작했다. 언제 체포조가 들이닥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중국 호적을 갖고 있던 김 씨는 중국 여권을 만들어 한국의 삼촌에게 두 번 놀러오기도 했다. 1999년 2월에도 한국에 와서 강원도 등을 놀려 다니고 돌아가려는데, 김포공항에서 체포됐다. 공항 직원이 조선족 같지 않은 그의 행동을 심상치 않게 여겨 북한 간첩으로 의심한 것이다. 그는 탈북한 북한 군관 출신이라고 순순히 시인하고 조사기관에 이송됐다.당시엔 북한군 자주포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때였다. 그는 하나원에도 가지 않고 무려 10개월을 조사받았다. 그리고 1999년 12월 사회에 나와 정착을 시작했다. 2002년엔 중국에서 가족도 데리고 왔다. 한국에서 그는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김성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 대북 라디오의 역사그가 입국하자 삼촌은 조카에게 자기 회사 부장 직함을 달아주고 사무실까지 내주었다.하지만 회사에 나가도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출근해 책상 먼지를 털어내고 앉아있는 날이 반복됐다. 그의 성격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그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어울리며 1년 넘게 보냈다. 그러다가 이렇게 탈북민이 많으니 뭉쳐서 뭔가 해보자고 제안했다. 2001년 첫 자생적 탈북단체 ‘백두한라회’가 만들어졌다. 김 씨는 30여명의 회원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다녔는데 매달 두 집씩 독거노인의 집을 찾아 도배를 해주었다.그렇게 살던 중 2003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게서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삼촌 회사를 나와 그는 황 전 비서를 보좌하는 일을 시작했다. 2006년엔 탈북자동지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2004년 그는 첫 민간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었다. 2004년 6월 4일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북은 선전 활동을 중지하고 선전 수단을 철거하기로 합의했다는 6·4 합의가 방송에 나오던 날 그는 10여명의 전직 외교관 등 탈북 선배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방송을 보던 누군가 “정부에서 대북 방송을 끊으면 우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동석자들의 눈은 일제히 김 씨에게 향했다.“대북 방송을 할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중에서 김 씨의 나이가 제일 어린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를 방송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당시 김 씨는 KBS ‘남북의 창’, KBS 라디오 ‘출발동서남북’ 등에서 MC로 활약했고 국정홍보방송에서 ‘서울말 평양말’ 코너를 3년째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전방에 나가 확성기로 북한 지휘관들을 단죄했던 용기도 있었다. 나중에 귀순한 620훈련소 출신 군관은 김 씨에게 그 방송 때문에 620훈련소 정치위원 등이 해임될 뻔 했지만 “변절한 사람의 말을 믿고 해임시키는 것은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인정돼 살아남았다고 했다. 군 총정치국은 그때에야 투서를 보낸 사람의 신원을 밝혔다. 알고 보니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제대했던 선전대 창작조장 출신의 병사가 악감을 품고 벌인 일이었다. 부대에선 악기를 훔쳐온 비밀을 선전대 간부 몇 명만 알고 있다고 생각해 제대해 간 사람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선전대장 대리가 돼 가장 큰 수혜자로 여긴 김 씨를 투서자로 확신했던 것이다.그날 술자리에 참석한 12명이 김 씨에게 대북라디오 방송을 하라며 100만 원씩 모아주었다. 한국의 민간 대북라디오의 역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6·4 합의가 발표된 날에 시작됐다. 하지만 방송인과 라디오 방송 운영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1200만 원으로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때 삼촌이 3억 원이란 거액을 건네주었다.한 북한 관련 연구소의 건물을 빌려 방송국을 차리고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총련 통일선봉대 30여명 등 온갖 단체들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매일 같이 시위에 시달리자 김 씨는 없던 오기가 생겨났다.“내가 대북방송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구나.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시위대에 시달리던 연구소 측은 나가달라고 했다. 그는 방송국을 서울의 한 작은 빌딩으로 옮겨왔다. 협박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죽은 쥐, 칼을 꽃은 인형 등이 수시로 배달됐다. 팩스에 딸 이름까지 적어 보내며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협박을 견디며 그는 지금까지 20년 동안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해 오고 있다. 그 기간 수없이 많은 사연들이 있었다.2005년 10월 그는 다른 탈북 여성 3명과 함께 미 하원 탈북자 청문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날 한성렬 유엔대표부 차석대사와 북한 외교관 몇 명이 같은 건물에 왔다. 북한 외교관들이 왔다는 소리에 증언하러왔던 탈북 여성 3명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김 씨는 화가 났다. 급히 종이판을 구해 ‘한성렬,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타도!’라고 적고 한 대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한반도 평화의 길은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는 것”라고 구호를 외치자 한 대사는 험한 표정으로 “너 이 새끼, 죽을래?”라며 고함을 질렀다. 김 씨는 “너도 죽을거야”라고 맞받았다. 북한 최고의 대미 라인으로 알려진 한성렬은 2018년 진짜로 처형됐다.김 씨는 북한 주민의 인권과 존엄성 증진을 위해 미국과 한국에서 번갈아 매년 열리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도 20년째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단체들과 연합해 열리긴 하지만, 한국에서 모든 업무를 담당해 처리하는 김 씨가 없다면 이 행사는 열릴 수가 없다.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 공적으로 그는 ‘2009 아시아 민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구글에서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를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들이 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북한의 협박도 많아졌다. ● “세 번째 삶을 삽니다.”2017년 3월 어느 날, 그날도 김 씨는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밤늦도록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페이지만 마무리하면 되는데 도무지 자판을 칠 수가 없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작업을 마친 그는 마지막 마침표를 누른 뒤 쓰러졌다.병원에 가보니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뇌에 생겨난 시꺼먼 구멍이 보였다.즉시 수술이 잡혔다. 뇌에 있는 종양을 도려내고 입원해 있는데, 의사가 다시 찾아왔다.“사진을 판독하니 뇌종양보다 더 심각한 것이 폐암입니다. 암이 폐에서 전이됐어요. 폐암 말기입니다.”찾아온 가족에게 의사는 “더는 손 쓸 수가 없으니 마지막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나는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는데…. 아직 김정은 정권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내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 이젠 살아남는 것이 나의 투쟁이다.”김 씨는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주사 한 번 맞고 나니 머리가 다 빠졌다. 그의 삶을 아는 지인들이 적극 나서서 수천만 원의 치료비를 모아 후원해주었다. 또 연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해주었다. 그러나 암세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러워 치료를 포기하려는 생각도 여러 번 들었지만, 끝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다.기적이 일어났다. 신약 임상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최신 항암제를 투약했다. 임상대상자가 되면 새로 나온 비싼 항암제를 무료로 맞을 수 있다.이 약의 효과가 너무 좋았다. 폐암 말기에서 치료를 시작한 뒤 5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유북한방송 대표로, 북한자유주간의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작년 8월 타자를 치다가 또 같은 증세를 느꼈다.병원에 가보니 이번엔 반대쪽 뇌에 종양이 생겨났다. 다시 수술을 했는데 예후는 나쁘지 않다. 그는 이번에도 이겨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 미국에서 효과가 뛰어난 항암제가 또 나왔다고 한다.“사실 삶에 대한 애착은 크게 없어요.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살았고, 폐암과 뇌암 말기도 이겨냈으니 이미 두 번을 죽었다 살아났다고 봐야죠. 남은 생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살자. 그리고 자유북한방송은 중단돼선 안 된다. 지금 저의 목표는 이 두 가지로 단순하게 좁혀졌어요.”아버지는 남조선을 해방한다며 평양에서 대남방송을 하다가 숨졌다. 지금은 아들이 서울에서 북한을 해방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목숨 걸고 대북방송을 진행한다. 그는 이미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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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민은 ‘통일의 전사’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북한 인권 중시로 바뀌면서 탈북민 정착 지원을 담당하는 국내 유일의 공공기관인 남북하나재단의 어깨도 무거워졌다. 3월 취임한 조민호 남북하나재단 이사장은 “탈북민을 취약계층으로 바라보는 것은 단견적 시각”이라며 “탈북민은 북한의 변화를 추동할 소중한 국가적 자산이자 통일을 견인할 전사”라고 강조했다. “탈북민은 남북한을 직접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며, 이들이 한국에서 잘살게 되면 북한 간부와 주민에게 ‘한국은 저런 사회구나’를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과거엔 남북 대화나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이끈다는 생각에만 치중돼 있어 북한의 변화를 이끄는 탈북민의 역할에 대해선 간과했습니다. 탈북민은 통일 이후에도 북한 주민에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학습시킬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조 이사장은 탈북민을 통일의 주역으로 내세우기 위해 남북하나재단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탈북민의 삶이 안정되어야 그들의 사명감도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이사장은 취임 이후 대한민국 기업들이 탈북민을 한 명씩 고용하자는 취지의 ‘일사일인(一社一人)’ 캠페인을 제안하고 성과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탈북민을 고용하는 기업은 통일 준비에 동참하는 미래가 있는 기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함께 그는 여러 부처 및 공공기관 등과의 업무협약(MOU)을 통해 남북하나재단을 알리는 데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시와 이북5도청,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등 이미 많은 곳과 MOU를 맺고 재단의 존재를 알리면서 탈북민 정착의 훌륭한 조력자들로 만들고 있습니다.” 탈북민의 마음을 치유하고 스스로 어울리며 단합을 통해 갈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것도 그의 중요한 관심사다. “이런 취지에서 재단은 9월 18일 인천에 ‘마음소리공감상담센터’를 개소합니다. 탈북민들이 북한 독재정권 치하에서, 또 탈북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빨리 털어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10월 14일, 서울에서 수천 명의 탈북민이 함께하는 ‘탈북민 어울림 한마당’ 행사를 열려고 합니다.” 현재 탈북민들은 한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고 있다는 것이 조 이사장의 진단이다. “고용률, 경제활동 참가율, 실업률 등의 통계를 보면 지난해에 비해 많이 좋아졌고, 한국 사회 평균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재단이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최근 로스쿨에 진학한 탈북민 청년들은 장학금 가점을 주기로 했는데, 통일 이후를 생각하면 북한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인재를 대한민국 사회가 적극 키워야 합니다.” 조 이사장은 1980년대 말부터 10년 넘게 남북 관계 현장을 누빈 1세대 북한전문기자 출신이다. “북한 인권 문제와 탈북민 정착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노력이 결실로 이어질 수 있도록 현장에서 열심히 뛰는 것이 재단과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엔 특종을 위해 남북을 오가며 치열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탈북민을 위한 1호 영업사원’이란 각오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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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이 대패를 인정한 유일한 전투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73년 전인 1950년 9월 11일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미군 대함대가 일본을 출발했다. 7만5000여 명의 병력에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됐다. 이 작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바뀌고,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북한은 인천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인천 월미도는 북한에서 ‘영웅의 섬’으로 추앙받는다. 월미도를 지키고 있던 76mm 포 4문이 5만 대군과 수백 척의 군함, 1000여 대의 비행기와 맞서 3일이나 섬을 사수하는 판타지급 활약을 했고, 구축함 등 적함 13척을 격침하고 수백 명의 적을 죽였다고 선전한다. ‘월미도의 영웅들을 따라 배우자’는 지금도 북한에서 널리 활용되는 선동 구호이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월미도 북한군 수백 명이 상륙작전 개시 수십 분 만에 죽거나 항복했으며, 상륙부대는 전사 1명과 부상 22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처럼 북한의 6·25전쟁사는 월미도처럼 황당한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북한 전쟁기념관에는 어뢰정 4척으로 미군 1만7000t급 중순양함을 격침하고, 1만2000t급 경순양함을 격파했다는 영웅이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다. 매복 공격으로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과 한 개 중대를 전멸시켰다는 영웅도 있다. 이렇게 거짓말 지어내기를 밥 먹듯 하는 북한이 3개 대대가 패퇴했다는 것을 인정한 전투가 있다. 졌다는 얘기를 극히 싫어하는 북한이 대대급 병력의 몰살을 인정한 것은 아마 유일할 것이다. 이는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33편의 장편소설로 구성된 ‘불멸의 역사’ 시리즈 중 1950년 여름을 배경으로 한 ‘50년 여름’이라는 소설에 등장한다. 이 전투가 바로 6·25 개전 초기 벌어졌던 춘천 전투이다.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 발의 탄알의 소나기는 단 몇 분 동안에 대대를 땅에 쓸어 눕혔다…. 다리를 건너간 역량은 한 개 중대밖에 못 되였다. 뒤따르던 두 번째 대대도 역시 같은 비극적 정황 속에 돌진하였다….” 사단의 공격을 저지시킨 것은 강원 춘천 봉의산을 방어하는 ‘괴뢰 6사’라고 소설은 밝히고 있다. 춘천 공격을 담당했다는 북한군 52사의 역할에 대해 소설은 ‘거의 단독으로 전선 중부를 담당하면서 주 타격 전선의 좌익인접을 보장하게 되여 있었고 동시에 적으로 하여금 아군의 주 타격 방향을 서부가 아니라 중부로 오인하게끔 하는 사명도 수행해야 했다’고 적고 있다. 사단이 방어선을 뚫지 못하자 북한군 총사령관이자 보위상 최용건은 ‘52사가 지연되면 서울작전안은 수정돼야 한다’며 춘천에 직접 와서 김일성과 상의 끝에 사단장을 해임한다. ‘불멸의 역사’ 집필을 담당한 작가들은 북한 최고의 작가들이며, 노동당 비밀문서도 볼 수 있다. 흰 것도 붉다고 주장할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 춘천의 패배다. 실제로 6사단은 6·25전쟁 발발 초기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하고, 3일 뒤엔 경기 수원을 점령해 한국군 배후를 차단하려던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닷새나 막아냈다. 배후 포위망 형성에 차질을 빚은 북한은 결국 서울에서 3일을 허비했다. 이 72시간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북한이 계획대로 밀고 내려왔다면 국군은 재정비를 할 수가 없었다. 낙동강 전선이나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3일의 미스터리’에 대해 한강철교 폭파 때문이라는 설, 김일성이 남로당 폭동을 기다렸다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북한 소설에선 중부 전선을 제시간에 뚫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밝히고 있다. 이 춘천대첩의 지휘관은 김종오 6사단장이었다. 그가 제 역할을 못 했다면 낙동강에서 대활약한 백선엽 1사단장도 없었을 것이다. 6·25전쟁의 대표적 영웅으로 백선엽 장군이 거론되지만, 대한민국의 생존에 있어 김종오 사단장의 공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가 사단장으로 지휘한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이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15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1966년에 사망한 김종오 장군은 일본군관학교 1학년 재학 중 광복을 맞아 친일 논란에서도 자유롭다. 대한민국을 구원하고, 북한군과 중공군이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게 만든 김종오 장군은 국군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재평가돼야 마땅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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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첫 장애인 전용 공연장 다음 달 개관

    한국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표준 공연장이 가을 개관을 앞두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공연장은 장애예술인에게 더욱 많은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됐다. 국내 첫 장애인 공연장인 이곳은 연습, 창작공간, 전문교육 지원 등 장애예술인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표준 공연장은 현 정부가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약자 프렌들리’ 정책의 일환으로 신설됐다. 앞서 3월 28일에는 장애예술인 생산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가 도입된바 있다. 이 제도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 총 847개 기관은 창작물 구매 전체 총액을 기준으로 3% 이상을 장애예술인이 생산하는 공예, 공연, 미술품 등 창작물로 구매해야 한다. 우선구매 제도 시행은 장애예술인들이 자립적으로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직업으로서 예술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부는 2020년에 제정된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22년 제 1차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했고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정책 과제들은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 기본계획의 기본 내용은 장애예술인 창작지원 강화, 장애예술인 일자리 등 자립 기반 조성,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접근성 확대, 장애예술인 지원정책 기반 조성, 장애예술인 예술 활동 지원 전문인력 교육 지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장애예술인의 예술 활동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고 장애예술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이미 진행됐다. 지난해에는 청와대 춘추관에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가 진행됐다. 장애인문화예술축제 에이플러스 페스티벌(A+ Festival)의 일환으로 진행된 특별전에는 지체, 청각 등의 장애가 있지만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장애예술인 50명의 작품이 전시됐고 7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등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올해에도 춘추관에서는 장애예술인 특별공연 ‘함께 누리는 마음의 선율’이 열렸다.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대표 이상재)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사장 김형희)이 함께한 특별공연은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와 뮤지컬 곡으로 구성됐고, 시각장애인 이상재 지휘자가 음악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며 관람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정부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을 전담기관으로 지정하여 장애인 지원 추진체계를 일원화하고,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지원 예산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그 결과 관련 예산 규모는 2018년 120억 원에서 지난해 260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장애인의 문화예술, 체육, 관광의 환경이 좋아지면 모든 사람의 환경도 좋아진다는 비전을 갖고 윤석열 정부의 약자 프렌들리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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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정로에 장애예술인 공연장 올가을 개관… 윤석열 정부 ‘약자 프렌들리’ 정책 가속도

    한국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표준 공연장이 가을 개관한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들어서는 공연장은 장애예술인에게 더욱 많은 창작과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됐다. 국내 첫 장애인 공연장인 이곳은 연습, 창작공간, 전문교육 지원 등 장애예술인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표준 공연장은 현 정부가 강하게 추진하고 있는 ‘약자 프렌들리’ 정책의 일환으로 신설됐다. 앞서 3월 28일에는 장애예술인 생산 창작물 우선구매 제도가 도입된바 있다. 이 제도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 총 847개 기관은 창작물 구매 전체 총액을 기준으로 3% 이상을 장애예술인이 생산하는 공예, 공연, 미술품 등 창작물로 구매해야 한다. 우선구매 제도 시행은 장애예술인들이 자립적으로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직업으로서 예술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부는 2020년에 제정된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22년 제 1차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했고 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정책 과제들은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다.장애예술인 문화 예술 활동 지원 기본계획의 기본 내용은 장애예술인 창작지원 강화, 장애예술인 일자리 등 자립 기반 조성,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접근성 확대, 장애예술인 지원정책 기반 조성, 장애예술인 예술 활동 지원 전문인력 교육 지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이를 바탕으로 장애예술인의 예술 활동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높이고 장애예술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이미 진행됐다.지난해에는 청와대 춘추관에서 장애예술인 특별전 ‘국민 속으로 어울림 속으로’가 진행됐다. 장애인문화예술축제 에이플러스 페스티벌(A+ Festival)의 일환으로 진행된 특별전에는 지체, 청각 등의 장애가 있지만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장애예술인 50명의 작품이 전시됐고 7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등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올해에도 춘추관에서는 장애예술인 특별공연 ‘함께 누리는 마음의 선율’이 열렸다.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대표 이상재)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사장 김형희)이 함께 한 특별공연은 일반 대중들에게 친숙한 영화와 뮤지컬 곡으로 구성됐고, 시각장애인 이상재 지휘자가 음악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며 관람객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정부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을 전담기관으로 지정하여 장애인 지원 추진체계를 일원화하고,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지원 예산을 적극 확대하고 있다. 결과 관련 예산 규모는 2018년 120억 원에서 지난해 260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문화체육관광부는 “장애인의 문화예술, 체육, 관광의 환경이 좋아지면 모든 사람의 환경도 좋아진다는 비전을 갖고 윤석열 정부의 약자 프렌들리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3-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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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에 펼쳐진 폭염 지옥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전 세계가 폭염으로 헐떡거리고 있다. 미국 과학계는 얼마 전 올해가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해가 될 확률이 99%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달은 기상관측 174년 이래 가장 더운 7월로 이미 기록됐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올해 폭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2023년의 폭염을 10대 청소년들이 더위를 먹고 쓰러지던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로 떠올리게 될 것이다. 땡볕에 쓰러진 잼버리 참가자들의 사진들을 보며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더웠던 1993년을 떠올렸다. 30년 전 그해 여름 나는 10대 후반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었다. 우리 학년은 9월 9일 공화국 창건 45주년 및 10월 10일 노동당 창립 45주년 행사의 김일성광장 배경대로 차출됐다. 행사 훈련은 6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새벽 5시 기상 고함에 저학년은 벌떡 일어나 합격을 받을 때까지 기숙사 내외부 청소를 했고, 오전 7∼8시 아침 식사가 끝나면 김일성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10만 개의 점이 찍혀 있었다. 가로세로 약 70㎝ 사각형 모서리마다 75-130, 156-30 하는 식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각자에게 점 하나씩 배당됐다. 석 달 동안 서 있어야 하는 자리였다. 훈련은 매우 간단했다. 광장 주석단 지붕 가운데와 양 끝에 세 명의 신호수가 올라가 있었다. 이들이 동시에 1부터 8까지 적힌 커다란 숫자판을 들면 우리는 3가지 종류의 꽃다발을 신호가 내려질 때까지 쳐들고 있어야 했다. 가령 1번이 올라가면 빨간색 꽃다발을 들고, 2번은 노란색 꽃다발, 3번은 둘 다 같이, 5번은 빨간색을 열심히 흔드는 식이다. 자신이 속한 점에 따라 번호별로 다른 색 꽃다발을 들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광장에 ‘김정은 장군 만세’ ‘경축’ ‘일심단결’ 따위의 글씨가 일사불란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머리가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사람이 고작 8가지 동작을 익히는 데 드는 시간은 반나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단순한 동작을 3개월 동안 하루 종일 되풀이시켰다. 대리석인 김일성광장 바닥은 한낮이면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힌다. 그늘도 없고, 물도 없는 그곳에서 우린 영락없는 불판 위 생고기 신세였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일사병으로 쓰러졌지만, 주변 백화점 건물이나 지하차도로 데리고 가 그늘 아래 눕혀 놓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치유가 불가하면 그 점은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살이 익어 밤에는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쓰렸다. 그러나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평양 시민 10만 명이 독재자를 위한 하나의 점으로 3개월을 존재해야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사람들의 얼굴은 아프리카 흑인처럼 새까맣게 타 있었다. 나는 더 빠질 것도 없던 몸무게가 10㎏이나 줄어들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지경이 됐다. 무더운 여름은 그해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엔 김일성 사망으로 다시 광장에 내몰렸고, 그 이듬해엔 깃발 행진대에 뽑혀 4m 길이의 나무봉을 들고 하루 종일 행진 연습을 했다. 그럼에도 첫 고통이었던 1993년이 제일 힘들었다. 나의 이 이야기는 30년 전의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다. 이후 30년 동안 누군가 대물림해 겪은 일이자, 현재도 벌어지는 일이다. 올해 북한은 9월 9일 정권 수립 75주년에 민간 무력 열병식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해에 열병식을 3번이나 치르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고통의 강도는 폭염처럼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오늘도 달아오른 대리석 위에서 꽃다발을 올리고 내리는 단순 동작을 저녁까지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일성광장 주석단 앞 216m를 정확히 1분 40초에 통과하기 위해 먼지를 뒤집어쓰고 행진 연습을 하는 수만 명이 있다. 평양 시민들이 어려서부터 집단체조, 열병식, 대규모 공사 등으로 쉴 새 없이 내몰리는 것은 단순히 일사불란함의 전체주의를 세상에 과시하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큰 목적은 이들을 앉으라면 앉고, 기라면 기는 파블로프의 개로 사육하기 위해서이며 불평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는 게 어려워질수록 채찍의 강도가 더 커지는 것이다. 잼버리 참가자들이 겪은 고통에 분노한 사람들이라면, 멀지 않은 평양의 폭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한 번쯤 상상해 보길 바란다. 동족이 지옥에서 헐떡이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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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포로 귀환 영웅담 위해 죽은가족 아픔까지 걸머쥐고 삽니다” 매출 180억 박정철 대표[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1994년 10월. 6·25전쟁 때 적의 포로가 됐던 조창호 소위가 43년 만에 귀환했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불렀다.그로부터 4년 뒤인 1998년 12월 15일. 국군포로 박동일, 김복기 씨가 동시에 한국에 입국해 기자회견을 했다. 국군포로 2호 귀환자들이었다. 언론들은 다시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박수를 보냈다.하지만 그 위대한 인간 승리를 위해 그들의 자녀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다. 국가가 이들의 귀환이라는 영웅 신화를 만들기 위해 국군포로와 가족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젊음을 조국을 위해 바쳤고 45년 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찾아왔건만, 그 조국은 그들에게 거짓으로 회유하였고 평생 치유되지 않을 단장의 아픔을 본인들과 여러 사람들에게 남겼다.박동일 씨의 막내아들인 박정철 씨는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하다. 박동일 씨의 귀환 뒤 북에 남겨진 2남4녀의 자녀 중 1남3녀, 또 이들이 남긴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국군포로 자녀의 삶박정철 씨는 함경북도 회령군 세천노동자구에서 태어났다. 두만강을 낀 이곳 사람들은 대다수 학포탄광에 다녔다. 그가 태어났을 때 1959년생 누나를 시작으로 자신까지 2남4녀의 형제자매가 있었다.박 씨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 3학년인 14살 무렵 학습 열의를 잃었다. 자신의 가정환경을 알게 된 것.아버지 박동일은 1926년 한반도 땅끝마을인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에서 태어났다. 결혼해 1남1녀를 낳고 살던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국군에 입대했다. 하지만 종전을 코앞에 앞둔 19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평양 승호리 포로수용소에 억류가 됐다가 종전 뒤 여러 국군포로와 함께 한반도 북단 학포 탄광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중국에서 살다가 나왔다는 이유로 출신성분에 꼬리표가 붙은 여성과 결혼했다. 여성도 두 번째 결혼이었다.박 씨는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대학은 고사하고 군에도 입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크면서 알았다. 당시 학포탄광에는 많은 국군포로 출신들이 끌려와 있어 세천중학교에도 국군포로 자녀들이 많았다. 박 씨의 학급에도 2명이 있었다.“저는 자랄 때 추석이나 한식에 맛있는 음식을 해가지고 산소에 가는 애들이 제일 부러웠어요. 친척이 하나도 없어서 놀러다닐 데도 없었어요. 북에 있을 때 아버지의 친한 지인이 살고 있다는 강원도에 한번 다녀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아버지랑 같이 싸우다가 함께 포로가 됐고 수용소에서도 생사고락을 했던 전우였더라고요. 같은 부대 출신이라고 한 명은 강원도 광산에, 한 명은 함북 탄광에 갈라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분은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서로 의지하고, 연락하며 살았어요.”국군포로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탄광에 배치돼 막장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으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졌다.하지만 박 씨의 운명은 살짝 더 좋았다. 군에는 입대할 수 없었지만, 1년제 철도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탄광에서 석탄을 실어가는 철도노동자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 박 씨는 학포탄광에서 좀 떨어진 작은 철도 분기초소에서 근무했다. 초소 근무자는 2명이었는데, 24시간을 기준으로 서로 교대근무를 했다. 근무자 두 명의 집이 한 지붕 아래 얇은 벽으로 칸막이만 구분한 것이라 옆집에서 하품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그동안 형과 누나들은 모두 결혼해 분가를 했고, 박 씨 혼자 나이든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1997년 박 씨도 고등학교 동창인 탄광노동자의 딸과 결혼했다. 어려운 살림이라 결혼식도 못 올리고 그냥 한 집에서 동거하기 시작한 것. 다행히 그들이 사는 곳은 주변에 민가가 없는 외진 곳이라, 그를 포함한 네 식구는 산비탈을 개간해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도 먹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종박 씨의 집에서 두만강까지는 걸어서 35분 정도 거리였다. 그 동네 국경경비대는 겨울이면 그의 초소근처에 벌목하러 올라와 박 씨 가족의 신세를 졌다. 그래서 경비대 군인들은 그의 얼굴을 다 알고, 신세를 갚으려 했다.1997년 여름 어느 날, 친한 군인과 잠복 초소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중국에 가면 대접을 잘 받는다며 자기와 함께 강 건너에 다녀오자고 했다. 군인은 군복을 벗더니 총도 수풀에 숨겨놓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두만강을 건너 맞은편 중국 마을에 들어가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리고 배고파서 북에서 왔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고 과일까지 권했다.불과 몇 시간의 나들이였지만, 중국이 잘 사는 곳이라는 것을 박 씨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그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던 군인도 제대 후 탈북해 한국에서 만났다.그해 겨울 그는 중국에 살았던 어머니가 적어준 사촌형제들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품고 두 번째로 두만강을 넘었다. 현지 국경경비대와 잘 아는 사이라 넘는 것 자체는 별로 위험하지 않았다. 연길에 가니 여러 친척들이 모여 십시일반 도와주었다. 누구는 50위안을 내놓았고, 누구는 100위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모은 400위안을 들고 북에 가니 몇 달은 굶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1998년 봄 세 번째로 중국에 갔다. 이번에는 대접이 달라졌다. 몇 달 전에 도와주었는데 또 왔느냐는 눈빛이 역력했다. 이번엔 200위안을 받아 왔다.그의 운명이 바뀐 사건은 1998년 초가을에 시작됐다. 어느 날 밤 그의 외딴집에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밖으로 불러내더니 한참 뭔가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며칠 뒤 아버지가 중국 친척들에게 도움을 청해 보겠다며 길을 나섰다. 형도 같이 간다고 했다. 뭔가 이상했다.얼마 전 자신이 갔을 때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또 가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중국 친척의 도움이 필요하면 중국이 고향인 어머니가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간다는 것도 이상했다.아버지가 떠나고 일주일정도 지났을 때 형님만 사색이 돼서 돌아왔다. 그는 연길 친척집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깨어나서 보니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박 씨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요시찰 대상이다. 사라지면 가뜩이나 반동 가족의 낙인이 붙은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가야 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어머니에게 무슨 사연이냐고 재촉하니 그제야 어머니가 실토했다.“사실은 네 아버지가 한국에서 결혼했던 사람이다. 아들이 하나 있고, 딸은 전처의 뱃속에 있을 때 군에 입대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지난 번에 집에 왔던 사람이 ‘한국에서 딸이 아버지를 찾는다’고 전해주더라. 그래서 아버지가 강을 건너간 것이다.”박 씨는 아버지가 결혼했던 사람이라는 것, 자신들 말고 다른 자식이 또 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았다. 물론 어머니는 결혼해서부터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자녀들에게 터놓지는 않았던 것이다.● 보위원의 힌트아버지를 찾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기다리면 돌아오지 않을까 속절없이 가슴을 조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10월 초경 담당 보위지도원이 박 씨 집에 나타났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박 씨를 불러내어 수갑을 채웠다. 무작정 끌려가니 보위부 구류장에 처넣었다. 그 외엔 아무 말도 없었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았다.20시간 정도 구류장에 앉아있는데 구류장 철문이 열렸다. 보위지도원은 수갑을 풀어주며 처음으로 한마디 해주었다.“네 아버지가 없어진 것을 아는데, 일주일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집으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집으로 돌아왔더니 가뜩이나 막대기 휘저어도 걸릴 것이 없는 살림에 뭔가 더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전날 저녁 식량을 비롯한 집안 전 재산을 싣고 보위지도원을 찾아가 “일주일만 찾아볼 시간을 달라”고 사정했던 것.급히 전갈을 띄워 근처에 살고 있던 온 남매가 그날 저녁 그의 집에 모였다. 남편이나 부인은 부르지 않고 오로지 박 씨 남매들만 모인 것.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던 넷째 누나는 연락을 할 수 없어 참가하지 않았다. 심각한 토론 끝에 어머니가 결론을 내렸다.“나는 정철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친척들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보겠다. 보위원이 일주일을 시간 준 것은 그동안 도망치라는 신호다. 그러니 만약 1주일이 지나도 찾지 못하면 너희들도 모두 준비하고 있다가 탈북을 해라. 우리는 아버지가 없어지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형은 어머니의 말을 십분 이해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누나들은 “여자들은 출가외인인데, 남의 집에 시집가서 애까지 키우는 우리까지 잡아갈까요. 우린 좀 더 고민해볼게요”라며 수긍하지 않았다.박 씨는 그날 밤 어머니를 모시고 두만강을 넘었다. 어떤 반응일지 몰라 부인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부부 사이엔 그해 4월에 태어난 아들도 있었다.중국 친척집에서 열흘 정도 지내며 수소문했지만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이제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박 씨는 어머니에게 가족을 데리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막아섰다. “너는 아들이라 이제 갔다가 잡히면 무조건 죽어.”“어머니는 제가 아들이라 걱정해서 그러지만, 그럼 제 아들은 어떻게 합니까. 저도 아들을 지켜야겠습니다.”박 씨는 막아서는 어머니를 끝내 뿌리치고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이번 길은 국경경비대와 약속이 돼 있지 않아 무작정 넘어가야 했다.한반도의 최북단인 회령지역은 9월말부터 눈이 내린다. 11월초 경이라 강에는 살얼음이 졌다. 신발을 신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려니 밤에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는 신발을 벗었다. 두세 걸음에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넘다 보니 50미터 남짓한 두만강을 건너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넘자마자 집으로 냅다 달렸다. 아내와 아들은 집에 있었다.“아버지를 찾지 못했어. 그러니 우린 수용소로 끌려가야 해. 너는 살겠지만, 우리 아들은 수용소에 끌려갈 거야. 어떻게 할래. 나 따라 지금 떠날 거야?”아내는 아무 말도 없이 포대기에 애를 업고 박 씨를 따라 나섰다.“그때 저를 믿고 따라 나선 아내가 지금도 너무 고맙습니다. 그때 그가 부모형제 때문에 망설였다면 엄청 위험해졌을 겁니다. 나중에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하니 ‘우리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새벽에 박 씨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두만강에 나왔다. 지형지물도 눈에 훤하고, 단속초소 위치도 잘 알고 있어 걱정이 없었지만 7개월밖에 안 된 아들이 울까봐 제일 걱정이었다.“하늘이 살라고 도왔는지 두만강을 건너는 동안 아들은 울지 않더군요. 그런데 강을 다 건너 중국 땅에 첫 발을 딱 내딛는 순간 아들이 울었어요.”아침에 연길 친척집에 들어오니 귀가 쓰렸다. 만져보니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발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더니 검게 변했다. 맨발로 두 시간동안 얼음 위를 걷느라 동상에 걸린 것. 그런데 사선을 넘나들 당시에는 그런 사실도 몰랐다.며칠이 지나자 형이 혼자 중국에 들어왔다. 형수는 교원의 딸이었는데 “절대 따라갈 수 없다”고 해서 혼자 왔다는 것. 누나들도 “우리는 남편도 자식도 있어 따라가지 않겠다”고 생각을 돌렸다고 형이 전해주었다.● 아버지만 한국으로아버지가 머물렀던 중국 친척집에서 한 달 정도 있었을 때 가방을 옆구리에 낀 남자가 나타났다. 중국 친척들이 그를 알아봤다.“저 사람이 너희 아버지 데려간 사람이야.”그러자 남자가 실토했다.“사실 저는 한국 모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은 저희가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가족을 한국에 데려가려 왔습니다.”다음날 그는 온 가족을 데리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단장을 시키고 사진관에 데리고 가 여권사진까지 찍었다.그런 다음 남자가 박 씨만 따로 불렀다.“실은 아버지가 여권도 나왔고 비행기로 한국으로 모셔가려고 하였는데, 내가 가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이 죽는다며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가서 아버지를 좀 설득해주세요. 가족 모두 중국에 왔고, 여권 사진도 찍고 한국 갈 준비를 하는 중이니 아버지가 먼저 한국에 가면 우리가 한달안에 따라간다고 말입니다.”박 씨는 가방 낀 남자를 따라 모 호텔로 갔다. 정말 아버지가 있었다.박 씨는 남자가 시킨 대로 말을 했다. “어머니랑 형이랑 중국에 와있어요. 여권 사진도 찍었고, 우리도 한 달 내로 한국으로 갈 수 있대요. 아버지 먼저 가세요.”아들이 와서 말을 하자 그제야 아버지도 한시름을 놓은 표정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1998년 12월 15일 한국 언론에는 일제히 국군포로 2명의 귀환소식이 실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국군포로 2명,가족2명 함께 北탈출 귀환국가안전기획부는 14일 한국전쟁 중 포로가 돼 북한에 끌려갔던 김복기(67) 박동일 씨(71)와 이들의 가족 2명이 최근 북한을 탈출한 뒤 제삼국을 통해 귀환했다고 밝혔다. 안기부는 이들이 53년 7월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납북된 뒤 평양 승호리 포로수용소를 거쳐 함북 회령의 학포탄광에서 광원으로 함께 생활해왔다고 말했다.안기부는 이들과 함께 입국한 김 씨의 차남 영구 씨(31)와 박씨의 4녀 정심 씨(30)는 91년 4월 결혼한 부부라고 덧붙였다. 한기흥 기자”박 씨 가족의 탈북은 위 기사 속 김복기 씨의 차남 김영구 씨로부터 시작됐다. 박 씨의 넷째 누나가 김영구 씨와 결혼했던 것. 까치는 까치끼리 만난다는 속담처럼, 출신성분이 매우 나쁜 국군포로 가족끼리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생활형편이 어려워진 김영구 씨는 중국으로 탈북했다.한국에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친척을 찾기 위해 한국 방송의 가족 찾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안기부에 포착됐다. 안기부가 김 씨와 접촉해 아버지의 국군포로 여부를 조사하던 중 김 씨가 장인도 국군포로라고 밝혔다.그러자 안기부는 박 씨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그가 1998년 늦여름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한국에서 유복녀로 남겨놓은 딸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실은 박동일 씨를 중국에 데려오기 위해 꾸며낸 말이었다. 안기부는 김복기 씨와 박동일 씨를 한국에 데려가 조창호 중위에 이은 ‘국군포로 2호의 귀환’에 대한 보도 자료를 자랑스럽게 언론에 배포했다.● 수용소로 끌려간 혈육들아버지의 귀환 소식이 한국 언론에 보도되자 중국에 남겨진 박 씨 가족은 그날부터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아직 북에는 누나들이 남아 있었고, 또 중국에 숨어사는 자신들에게도 북한의 추적이 들어올 수 있었다. 체포돼 북송되면 꼼짝없이 죽어야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가족을 한국에 데려간다던 가방 낀 남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기다려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박 씨의 형이 체포됐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의 등록서류에 중국에 사는 친척 주소들도 올라 있었던 것이다.북한 보위부는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납치조를 파견했다. 당시 박 씨 가족은 친척집에 흩어져 지냈는데, 납치조가 첫 번째로 들이닥친 친척집에 형이 있었다. 이들은 형을 차에 싣고 곧바로 북한으로 나갔다.형과 함께 있던 친척이 급히 도망치라고 전화가 왔다. 박 씨 가족은 양말도 신지 못하고 집을 나와 택시에 올랐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들은 무작정 한족이 많은 동네로 가서 숨었다. 그곳은 연길 옆 왕청이라는 지역이였다.박 씨 가족은 이곳에서 5개월을 지냈다. 아버지가 자신이 받은 정착금을 보내와 그걸로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중국에 남겨진 가족들도 데려와 달라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하소연했지만, 이미 귀환을 정치적으로 써먹은 사람에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국군포로의 귀환 뒤에 남은 건 또 다른 이산가족이었다. 박 씨 가족도 한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저곳 수소문했다. 탈북 후 8개월 뒤 위조여권을 통해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4명을 보내는데 6000만 원을 불렀다. 아버지가 귀환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보냈다. 그 덕분에 이들은 중국의 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입국했다.국군포로 박동일 씨만 귀환시킨 후 중국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던 안기부는 이들이 입국하자 또 생색을 냈다. 1999년은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명칭을 바꾼 때였다. 1999년 8월 16일 동아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작년 귀환 국군포로 일가족 4명 입국국가정보원은 16일 지난해 12월 귀환한 국군포로 박동일 씨(72)의 부인 허순영 씨(65) 등 일가족 4명과 최철규씨(37) 등 모두 5명이 15일 제삼국을 통해 밀입국, 귀순을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허씨 일가족은 지난해 11월, 최씨는 지난해 8월 각각 북한을 탈출한 것으로 진술하고 있어 현재 자세한 탈북동기 등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 5명을 포함, 북한을 탈출해 올해 한국에 도착한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65명이다. 한기흥 기자’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가방 끼고 다니던 남자가 나타났다. 박 씨의 어머니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자식들을 살려내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남자는 “정말 미안하다. 나도 공무원이라 위에서 지시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했다. 박 씨는 이렇게 말했다.“그때 나도 그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요. 그러나 한국에 와서 공기업에서 20년을 일해 보니 그 사람이 이해가 됩니다.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겠죠. 결국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정부와 안기부 고위급들이 문제였던 것이죠.”박 씨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북에 남은 누나들이 모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이 왕청에 숨어살 때 아버지가 보내준 돈을 쪼개 인편을 통해 북에도 내보냈다. 그러면서 빨리 중국으로 탈출하라고 했다.세 누나들은 “우리가 결혼을 했는데 설마 잡아갈까”라며 반신반의하면서도 자식들 때문에 쉽게 뜰 수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재촉이 심해지자 김일성의 생일로 북한 최고의 명절로 치던 4월 15일에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며칠 내로 떠나기로 자신들끼리 약속했다.그런데 보위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4월 16일 새벽에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남편과 자식은 두고, 누나들만 싣고 갔다. 형의 집에도 트럭이 들이닥쳐 아내는 놔두고 생후 1년 반이 된 어린 아들을 빼앗았다. 이미 트럭에 태운 누나들이 조카를 받아 안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동네 사람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형과 누나들의 소식은 이후 영영 알 수 없었다.생떼 같은 자식 4명과 장손을 잃은 박 씨의 어머니는 한국에 들어올 때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가방 낀 남자를 잡고 화풀이를 해도 시계를 돌릴 수는 없었다.“그때 네 아버지를 보내지 않았으면 네 형제들이 죽지 않았겠는데….”그게 어머니의 평생의 한이었다. 또 박 씨의 평생의 한이기도 했다.한국에 온 이후 그는 고향이 바라보이는 중국 땅에도 몇 번 가봤다. 그러나 다시 가지 않은지 꽤 됐다.“통일되면 남들은 다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곳엔 남은 가족도 없을뿐더러 너무 아픈 추억들만 남겨주어 지우고 싶은 곳입니다. 그냥 가족이 그리울 때면 맞은편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철도공사의 탈북민 역장2000년 1월 박 씨 가족은 서울 지역에 17평 영구 임대주택을 받아 정착을 시작했다.나와 보니 아버지는 고향인 해남에 가 있었다.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했고, 전쟁 때 남겨둔 본처와 아들딸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나중에 박 씨의 어머니도 남편을 찾아 해남에 가서 살았다. 박 씨 아버지는 2014년 해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박 씨의 어머니는 지금도 해남에 살고 있다. 정이 든 곳에서 남은 여생을 살겠다는 것.아버지가 해남에 남겨둔 전처의 아들은 박 씨 가족을 만나길 거부했다. 딸은 몇 번 정도 만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간 뒤 남남이 돼 다시 본 일은 없다. 박 씨에겐 배다른 형이고, 누나이지만 전혀 다른 추억을 공유한 이들이 접점이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 씨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그 분들도 이해가 됩니다. 아버지가 전사자로 인정돼 현충원에 묻히고, 그 분들의 어머니는 재혼도 하지 않고 자식들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버지 없는 설움 속에 크면서 얼마나 원망도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문뜩 아버지가 북에서 다른 처와 자식들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 1년 넘게 받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로 박 씨의 몸무게는 43㎏에 불과했다.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첫 직업은 건물 리모델링을 하는 회사였다. 새벽 5시에 나가 밤 10시까지 일했다. ‘함마(해머)’로 벽을 하루 종일 부수고온 날은 손이 떨려 숟가락을 들 수조차 없었다.그렇게 몇 달을 일하다가 우연히 벼룩시장에서 철도공무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봤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처럼 북한에서 철도원으로 일했던 사람은 경력을 인정받아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그는 통일부에서 5년 6개월의 북한 철도원 경력 인정서를 들고 시험장에 갔고 결국 8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엔 철도청에 입사하면 공무원 자격을 받았는데, 지금의 철도공사로 바뀌었다.입사 후 서울 동대문구 이문역(현 폐역) 수송원으로 첫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이문역 주변에는 연탄공장들이 많아 화차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는 화물열차를 떼고 붙이는 일을 주로 했다. 해보니 한국 철도와 북한 철도는 비슷한 것이 많아 적응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24시간 맞교대도 같았고, 철도 규정이나 열차 연결 방법 등도 비슷했다.하지만 언어는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역장이 조회시간에 그에게 “열중 쉬어”를 외쳤는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네”하고 멀뚱멀뚱 쳐다만 봤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장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화가 나 다시 소리쳤다. 그도 목소리를 높여 “네”하고 또 쳐다봤다. 화가 나 목청을 높이는 역장과 천연스럽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조회시간이 폭소 바다가 됐다. 마침내 역장도 같이 웃고 말았다.학연, 지연, 인맥이 없이 직장 생활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24시간 근무시간에 사표 쓸 생각을 24번은 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렇게 20년을 근무하고 역장으로 2020년에 명예퇴직을 했다. ● 매출 180억 원을 이뤄내다퇴직하고 그는 무역회사 대표로 취임해 사업을 시작했다. 공공기관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 철저히 ‘을’로 살아야 했다. 운영하는 회사는 대기업의 대리점에서 물품을 받아다 해외에 파는 일을 했는데, 그가 대표로 부임할 당시 월 매출이 3억 원 정도였다.이런 방식으로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물품을 받기 위해 대기업 본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가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그가 가장 품을 들인 회사는 해외 거래처들이 요구하는 아모레퍼시픽이었다. 그런데 갈 때마다 좋은 제안이라고 하면서도 ‘티오(자리)’가 없다고 마냥 기다리라고 했다. 1년 반이 지나는 동안 다른 여러 회사들이 분명 새로 계약을 맺었지만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회사에 가서 항의를 했더니 지난해 5월에야 마지못해 6개월 계약을 체결해주었다. 이런 계약은 최소 1년 단위로 맺어주지만 그에겐 6개월이 한계였다.그래도 이것을 기회로 삼고 그는 공격적으로 사업을 벌여 지난해 매출 180억 원을 기록했다.그런데 올해 맺은 계약 역시 6개월짜리였다. 상반기에 그는 통일형 사회적 기업 인증도 받았고 회사 직원도 6명으로 늘어났는데,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대출을 끼고 양평에 새 회사 건물도 장만했다.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그의 회사 매출의 80%가 현재 아모레퍼시픽 생활용품에서 나오는데, 올해 하반기엔 절망적인 계약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회사에 주던 물품의 브랜드 종류가 5건에서 1건으로 줄어들었고, 내년엔 재계약이 없다는 조항까지 계약서에 박혔다. 해외에서 주문은 여전히 많이 들어오지만, 그가 본사에서 물건을 받지 못하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한다.지난해 본사 영업담당자 3명이 거래처에 상품을 공급하고 대금을 빼돌리는 방식 등으로 30억 원을 횡령해 기사까지 났다.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던 사람들이었다.“지금 시한부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삽니다. 이젠 직원들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탈북할 때와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코로나도 큰 위기 없이 넘겼는데, 지금 이런 위기에 닥칠지는 몰랐습니다. 저는 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형과 누나들의 인생까지 대신 산다는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 하나 이겨낼 겁니다.”남한강변을 따라 집으로 퇴근할 때 어둠에 잠긴 강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흐르고, 아침이면 태양이 뜬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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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 1호 작곡가 김영남입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신의주의 압록강변에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앉았다. 중국 단둥을 건너다보며 남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나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어?”“영남 동지가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이상 어디든 가겠습니다.”결혼 뒤 남편은 아내에게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게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아내가 말했다.“우리가 속고 살았습니다. 남조선에 갑시다.”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중국에서 3년 동안 마음을 졸이며 숨어살아야 했고, 미얀마 감옥에서 1년 3개월이나 수감생활을 했다.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남자는 음악가라는 꿈을 쫓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아코디언 교본이 단 한 권밖에 없던 한국에서 9권의 아코디언 편곡집을 펴냈고 탈북민 1호 작곡가로 성장했다.올해 6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제1회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서울로망스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음악회에선 그가 작곡한 노래 6곡이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인생이 녹아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NK예총 회장 김영남 씨는 걸어온 60년의 삶을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봤다.● 병사 작곡가김 씨는 1962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도 인민위원회 보건처장이었다. 부친은 노동당 간부였다. 1948년에 입당해 전쟁 때엔 면당위원장, 전후엔 도당 조직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전쟁 전에 형이 남쪽으로 간 사실이 밝혀져 당 간부에서 행정 간부로 좌천됐다. 그럼에도 보건처장이란 직책은 꽤 권한이 있어서 가족들은 부친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살 수 있었다.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김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아코디언 소조에 뽑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1978년 황해남도 주둔 4군단에 입대할 때만 해도 음악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숨겨진 재능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었다.당시 북한군은 2년에 한 번씩 군무자축전이라는 것을 열었는데, 중대별로 음악 재능을 가진 병사들을 뽑아 훈련을 시킨 뒤 평양에서 최종 경연을 가진다. 김 씨는 1983년 열린 21차 군무자축전에서 직접 작곡한 중창으로 전군 2등을 했다.그러자 군단에서 바로 소환했다. 4군단 선전대 소속으로 전문적으로 작곡을 하게 한 것. 군단 선전대는 상좌 계급의 선전대장과 대위 또는 소좌 계급의 작곡가가 지휘관으로 있었다. 그 아래 글을 잘 쓰는 병사들로 구성된 문학창작조와 음악을 잘 하는 병사들로 구성된 음악창작조가 있었다.선전대에서 그는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가 혁명임무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피아노가 원한다고 아무나 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반을 치고 또 쳤다. 얼마 뒤 그는 군단 음악창작조장으로 임명됐다. 물론 작곡한 음악에 대한 최종 승인권한은 군관 신분의 작곡가가 쥐고 있었지만, 병사들도 마음껏 작곡을 할 수는 있었다.1988년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제대할 때 그는 평양음악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음악대학 학생은 제대군인을 받지 말고 유학생 출신으로 받으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10년 동안 군 복무를 하고 오면 기량이 딸려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어쩔 수 없이 김 씨는 신의주 제2사범대학 예능학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니 제대군인들은 의무적으로 예비과 1년을 다니게 했다. 군에서 10년 있다 보면 머리에 녹이 쓸 수밖에 없다며 중학교 졸업한 학생들보다 1년 더 대학을 다니게 한 것이다.이때 그는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다. 대학에 가보니 수준이 너무 맞지 않았다. 예비과를 다녀야 할 학생들은 군에서 5년 동안 작곡까지 하다가 온 자신이 아니라 어린 친구들이었다. 특히 그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 10년 어린 친구들이 몰려와 황홀하게 구경했다. 당시 북한에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뿐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그가 자퇴하지 않은 이유는 뜻밖에도 대학에서 배우는 정치경제학이나 철학, 심리학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음악만 했던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정일 집안 가정교사1993년 대학 5년 과정도 끝나갈 즈음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그를 찾았다. 평안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대장(단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청년기동해설대는 성악, 기악, 화술, 무용 등으로 구성된 25명 안팎의 미혼 전문예술인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사로청에서 발급한 배우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고, 주로 공장이나 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에 나가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그런데 대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장은 엄연하게 북한에서 간부 직책이다. 간부가 되려면 제대군인 출신의 당원에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으면 또 음악을 몰랐다. 그런 점에서 김 씨는 사로청이 찾은 대장 적격자였다. 대학 졸업 전에 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첫해부터 ‘사고’를 쳤다. 1993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경연에서 당당하게 1등을 한 것이다. TV 5대, 6000달러어치의 음향설비, 각종 악기 세트를 우승 상품으로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를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상품을 받아가지고 내려오자마자 그보다 직책이 높은 사로청 고위 간부들이 다 나눠가졌던 것. 그는 환멸을 느꼈다.하지만 최고의 환멸을 느낀 사건은 이듬해에 찾아왔다. 김 씨는 날짜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4년 10월 3일 토요일에 한 농장에서 선전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당 조직부에서 연락이 왔다.“동무, 오후에 정장을 입고 도당 조직부로 찾아오시오. 좋은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오후에 도당에 가니 중앙당 부부장이 앉아있었다.“우리가 찾던 동무가 이 동무나? 동무는 당이 부르면 어디든 갈 수 있어?”북한에서 간부로 살려면 이럴 때 답변해야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제가 당의 배려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당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하겠습니까.”“좋소. 집사람은 무슨 일을 하오?”“도 지방총국 자재상사 통계원을 하고 있습니다.”“그것도 참 좋은 직업이네. 우리가 동무를 평양으로 소환하려 하는데, 평양에 가면 좋은 집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아무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가서 기다리고 있소.”김 씨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얼떨떨했다. 마침 도당 조직부에 먼 친척이 있어 그를 찾아가 중앙당 부부장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며칠 뒤 친척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큰 비밀을 알려주는 듯이 속삭였다.“네가 장군님 집안 음악 가정교사 후보로 뽑혔어. 신원조회가 끝날 때까지 몇 달 기다려봐. 그동안 사고치지 말고 모범적으로 살아야 돼.”“아니, 나 같은 사람을 왜 장군님 집 가정교사로 뽑아요?”“외국 유학 다녀오고 실력 있는 애들이야 당연 있겠지. 그런데 그들은 제대군인도 아니고 노동당원도 아니야. 제일 중요하게는 사범교육도 못 받았단 말이지. 너는 당 간부가 될 조건을 다 갖추고 있고, 게다가 기동선전대장으로 실력도 인정받았잖아. 자제분들 음악 가르치는 게 국제 콩쿠르 입상자 만드는 일도 아니니 충분히 할 수 있어.”김 씨는 부푼 꿈을 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매느라 말을 못할 때였는데, 온힘을 짜내 간신히 한마디 남겼다.“꿈 깨라. 너는 큰아버지가 월남해서 안 돼.”어머니는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당에선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실감이 됐다. 북한 체제에 대한 배신감이 점점 커졌고, 내가 이 사회에서 한계가 있다면 내 자식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절망도 들었다.● “오늘도 꿈길을 가네”김 씨의 부친은 1948년에 노동당에 입당한 당원이었고, 모친도 1950년에 입당한 당원이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북한에선 ‘48년 당원’ ‘50년 당원’이라고 부르며 노당원 대접을 해주었다. 믿을 수 있는 충성계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정환경에 ‘티’가 있으면 절대 어느 정도 이상 승진할 수 없었다.부모님들은 일찍이 그 현실을 깨달았다. 김 씨가 제대돼 돌아오니 어머니가 저녁마다 한국 라디오를 몰래 듣고 있었다. 김 씨도 호기심에 듣다가 아예 중독됐다.1989년 결혼해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났고, 4년 뒤 딸도 태어났다. 가정을 이뤘어도 그는 저녁마다 몰래 라디오를 들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는 아내는 그가 라디오를 들을 때면 다른 방에 건너가 모르는 척했다.라디오를 통해 그는 6.25전쟁이 북한이 선전하는 대로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주체사상에서 선전하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눈물 같은 건 전혀 흘리지 않았다.김정일 가정교사 탈락 이후 그는 북한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청년기동해설대 대장 노릇도 더는 하기 싫어 도 직맹위원회 창작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1995년부터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아내도 직장을 잃었다. 출근할 곳이 사라지고 장사를 해야 먹고 사는 삶이 시작되지 아내도 변했다. 남편의 권유하자 한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김 씨는 자신의 결심을 근처에 사는 작은 누나에게도 터놓았다. 작은 누나도 오래 전부터 한국 라디오를 들었다. 그의 속셈을 들은 누나 가족도 같이 가자고 의기투합했다.하지만 한집에 모시고 사는 아버지가 걸렸다. 아버지는 천식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해 함께 데리고 떠나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났는데, 탈북을 무한정 미룰 수도 없었다.라디오를 통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소식까지 듣자 마음은 더 다급해졌다. 1998년 설을 쇠자마자 그는 마침내 떠나기로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아버지, 저의 가족은 남조선에 가기로 했습니다. 작은 누나 가족도 함께 갈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걸립니다. 이제부터 동생네 집에 가서 사시면 안 될까요.”아버지는 이미 예감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네 결심이 그러하다면 그대로 하라고 지지해 주었다.김 씨는 한국에 오고 나서 자신들이 떠난 지 1년 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남동생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온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통일되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남동생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하지만 2년 전 남동생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날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 뒤 아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그만 울어요. 지금 8시간째 울고 있는 거 알아요?”밖을 내다보니 새날이 밝고 있었다. 그는 불효로 우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 노래를 작곡했다.오늘도 꿈길을 가네(김성민 작사. 김영남 작곡)그리움의 저 하늘 노을보다 불타는 당신의 그 미소는내 삶의 안식처 내 어린 마음에 이 세상 전부이셨던사무치게 그리운 사랑하는 내 아버지기약없이 떠난 자식 가슴깊이 묻어두고기다리실 당신 그리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아픈 매도 들었고 미운 정도 쌓였던 당신의 그 마음은내 삶의 안식처 내 가는 이 길이 고향에 닿아있기를걸음걸음 손잡아 이끄시는 내 아버지고향으로 가는 그 길 마음으로 열어가리못다 드린 사랑 바치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 ● 7명이 함께 탈북1998년 1월 21일. 김 씨는 마침내 탈북길에 올랐다. 그와 아내, 8살 아들과 4살 딸. 그리고 작은 누나와 매형, 9살 난 누아의 딸까지 모두 7명이었다.탈북 경로는 신의주를 떠나 양강도 혜산까지 간 뒤 그곳에서 압록강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와 작은 누나 가족 모두 너무 가난하게 살지 않았던 터라 점차 몰래 처분했던 재산도 달러로 환전해 품속에 두둑하게 챙겼다.떠난 순간부터 사고가 터졌다. 체구가 가장 건장한 김 씨가 일행이 가면서 먹을 쌀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멨다.김 씨는 신의주역에서 일행을 사람들이 빼곡한 기차에 억지로 밀어 넣고 맨 마지막에 열차 승강대에 매달렸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꽃제비들이 쌀 배낭 밑을 면도칼로 짼 뒤 마대에 담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 몇 명씩 함께 움직이는데, 일부러 주변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역할이 있고, 배낭을 찢은 뒤 담는 역할이 있으며, 배낭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배낭끈을 손으로 꽉 잡아당기는 역할이 있었다. 만약 들켜도 여럿이기 때문에 피해자를 때리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졸지에 떠나자마자 식량을 다 잃었다. 그럼에도 돈이 남아 있기에 믿을 구석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강도 희천에 도착해 혜산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려 하니 20일에 한 번씩 다닌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전식당에 짐을 풀었다. 이곳은 국영식당이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종업원들이 먹고 사는 터전이 됐다. 음식도 팔지만, 숙박을 제공하고 1인당 1시간에 북한돈 2원씩 받았다. 일행이 내야 할 돈은 한 시간에 14원, 하루에 336원이었다. 336원은 옥수수 8㎏ 정도 살 수 있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식당에 있으면서 식당 종업원들과 친해졌다. 이들 중 한명의 고향이 자강도 위원군이었다. 만포 아래에 위치한 위원엔 압록강을 막은 댐이 있는데, 압록강 옆 도로는 호수를 끼고 구불구불 길어졌다. 겨울이면 위원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를 질러가는데 이럴 때 중국 땅도 경유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듣자 김 씨는 굳이 혜산까지 힘들게 가지 않아도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노선을 변경했다. 언제 올지 모를 혜산행 열차를 포기하고 만포행 열차를 타기로 했다.며칠 만에 들어온 열차는 지붕까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비닐도 쳐있지 않은 열차 창문엔 군인들이 걸터앉아 돈을 준 사람을 안으로 끌어올려주었다. 아이들이 있는 김 씨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열차에 탔다.열차 내부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해 일단 타면 서있는 자세조차 바꾸기 어려웠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어 생리적 욕구는 선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열차엔 악취가 가득했다. 이들이 타고도 8시간이 지나서야 열차는 서서히 만포로 떠났다.● 심양에 정착하다만포에 도착하자마자 했던 일은 위조 공민증(주민등록증)을 사는 것이었다. 압록강 옆 도로에는 단속 초소들이 많아 외지 공민증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다. 당시엔 국경 옆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위조한 공민증도 장마당에서 1000원에 팔렸다. 공민증을 사다가 안전원에게 걸려 끌려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마침 안전원이 고향사람이라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위조 공민증 2개를 품고 이들은 위원으로 향했다. 만포에서 위원까지는 70리였는데, 중간에 얼어붙은 호수에 올라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여러 초소를 어찌어찌해 통과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인 오후 6시쯤 다시 단속초소와 맞닥뜨렸다. 앳돼 보이는 군인 한 명이 공민증을 보자고 요구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살갑게 다가가 위원 사람이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자, 그 병사는 총을 옆에 놓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참을 먹는데, 소대 초소 쪽에서 밥 먹으러 오라는 고함소리가 날아왔다. 6시부터 7시까지 식사 시간이었는데 이때는 경비대원 모두가 철수해 밥 먹으려 간다. 밥이 적으니 교대 식사라는 법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경비가 나오는 7시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김 씨 일행은 군인이 사라지자마자 압록강으로 내려가 얼음 위를 내달렸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 발각되지 않았다. 한참을 내달리니 벌거벗은 북한 민둥산이 아닌 울창한 산이 앞에 나타났다. 중국에 도착한 것이다.일행은 산에 올라가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밤을 꼬박 새고 일어나 주변을 살피니 바로 위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집에 가서 살피니 젊은 한족이 나무를 패고 있었다.몇 년 동안 열심히 배워둔 중국어가 이때 요긴했다. 북에서 왔으니 좀 재워달라고 하자 한족 청년은 100달러를 요구했다. 다음날 그는 일행을 마을로 데리고 가 조선족 할머니 집으로 안내했다.말이 통하는 노인을 만나니 눈물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할머니는 “김정일을 압록강에 처넣고 오지 왜 그냥 왔냐”며 인민들을 굶겨 죽이는 북한 당국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그 할머니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들은 3일 뒤에 심양에 도착했다.심양에는 찾아갈 사람이 있었다. 신의주에 살 때 한 친척이 무역거래를 했는데, 그 대방이 심양에 살았다. 김 씨는 떠나기 전 그의 주소를 외워두었다.그 사람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자, 잠시 당황했던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한국 목사를 찾아 연결했다. 당시 선교로 중국에 파견돼 있던 주계명 목사가 이들을 맞았다. 그는 이들 가족에게 숨어 살 집도 찾아주고, 한국 기업에서 일감도 따올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 미얀마에서 1년3개월 감옥 생활그렇게 심양에 정착한 이들은 3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주 목사가 생활비와 집세, 아이들 학비까지 대주는데다, 어른들이 어느 정도 일도 하니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 수는 없는 법. 목적지인 한국으로 가려니 길이 없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게 돼 마음도 안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불안한 신분으로 중국에 있을 수는 없었다.김 씨는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지도 한 장에만 의지해 동남아에 가서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면 방법이 생길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엔 동남아나 몽골을 거쳐 한국에 오는 탈북 루트가 없을 때였다. 그만큼 국경 경비도 허술했다. 쿤밍을 경유해 미안먀 북부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돼 구치소로 끌려가게 됐다. 그 지역은 군수, 도지사까지 모두 군인이었다.김 씨는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미얀마 북부는 세계 아편 재배의 주요 산지였다. 이곳을 25년 동안 장악하며 한때 미국 헤로인 공급량의 70%를 차지한다는 말이 나왔던 마약왕 쿤사가 1995년에 항복하면서 이곳엔 정부군이 들어왔다.몇 년 뒤부터 쿤사의 잔존 세력이 중국 삼합회와 손을 잡고 다시 골든 트라이앵글을 지배하고 아편을 재배하면서 이곳은 탈북자를 잡아먹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되고 말았다. 극소수 목격자에 따르면 미얀마 북부를 통해 중국을 빠져나오다 범죄조직에 체포된 탈북민은 이곳에서 노예가 됐다. 이들은 깊은 웅덩이에 갇혀 있다가 낮에는 족쇄를 차고 총구 앞에서 아편재배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직접 들어가 조사해 본 사람이 없어 알 수가 없다.김 씨가 체포될 때는 다행히 군부가 일시적으로 북부를 다스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제대로 되지 않아 김 씨 가족은 남녀가 따로 갈라져 구치소에서 9개월을 보내야 했다.이들은 중국의 주 목사에게 도와달라고 연락했고, 주 목사가 미얀마 주재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하는 등 여기저기 뛰어다녀봤지만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9개월 뒤 이들은 다시 감옥으로 옮겨가 7개월 남짓을 더 보냈다. 김 씨는 감옥에 갇힌 아이들이 미얀마 말을 알아듣고 군인들과 대화가 되자 큰 불안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여기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국대사관에서 이들을 데리려왔다. 대사관에 연락을 한지 8개월 만이었다. 2002년 5월 마침내 김 씨 가족 7명은 한국에 도착했다.● “선생님을 초빙합니다”2002년 8월 김 씨는 가족과 함께 서울 양천구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모든 탈북민들이 그러하듯이 김 씨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었다.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우유대리점에 취직해 6개월 동안 일했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그는 북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피아노를 쳤던 경험을 되살려 피아노 수리공이 되려고 조율학원에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낙원악기상가 피아노대리점에 취직했다.악기상가에는 그가 구경도 못했던 악기들이 즐비했다. 어느 날 아코디언 매장에 들려 연습 삼아 연주를 했는데, 여사장이 그의 연주를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선생님. 그 정도 실력이면 피아노 수리하지 말고 아코디언만 가르쳐줘도 돈을 벌 수 있어요.”그 말에 희망을 가진 김 씨는 한국 아코디언 실태를 연구해보기 시작했다. 그가 봤을 때 한국 아코디언의 수준은 북한의 1960년대 수준보다 못했다. 교본도 전국에 단 한 권밖에 없었다.“한국은 다 발전된 줄 알았는데 아코디언은 정말 인기가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아코디언이란 시장을 한번 개척해보자.”그는 큰맘을 먹고 6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이탈리아제 아코디언을 샀다. 두 달 정도 열심히 훈련을 하니 10여년 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광고를 해 아코디언 교습을 시작한다고 알렸다.열심히 노력한 끝에 두세 명의 학생이 아코디언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그의 연주를 찍어 자주 인터넷에 올렸다.2005년 어느 날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여기는 뮤직필드라는 연주 강의 사이트인데요. 선생님을 초빙하고 싶어 전화했습니다.”그것이 김영남을 한국에 알리는 시작이었다. 뮤직필드에서 김 씨는 76개의 아코디언 연주 강의를 제작했다. 강의를 하려니 교본이 없어, 스스로 각종 곡을 아코디언 연주에 맞게 편곡해야 했다.각각 100곡씩 수록된 김영남 아코디언 명곡집 1,2권이 그렇게 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그는 수백 곡의 가요를 아코디언에 맞춰 편곡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9권의 편곡집을 냈다.뮤직필드를 보고 전국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그에게 아코디언을 배운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 성공한 인생아코디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목표도 점점 높아졌다. 2006년 그는 북에서 25명으로 구성된 도급 청년예술단을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2006년 평양예술단을 만들었다. 이듬해엔 사회적 기업인 NK예총도 만들었다.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그는 18명의 단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북한 예술을 알렸다. 동시에 그와 가족들도 한국에 잘 정착했다. 서울에 번듯한 집도 장만했고, 아내는 재가요양복지센터 센터장이 돼 노인복지에 전념하고 있다. 아들도 올해 경력 7년차의 회사원이 돼 성실하게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고, 딸도 공기업의 정규직 조리사로 성장했다.작은 누나 가족은 2010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탈북민 신분이 아닌 한국인 신분으로 당당하게 영주권을 받고 현지에 잘 정착했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잘 정착했지만, 김 씨의 마음에는 늘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있었다.“어찌되다 보니 아코디언 연주가로 알려졌지만, 실은 작곡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코로나로 활동이 중단되자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꿈, 작곡에 매진할 시기라고 판단한 그는 예술단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그렇게 만든 6개의 곡으로 올해 6월 제1회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탈북 예술인들이 아닌 서울대 음악대학과 유수의 해외 음악 대학을 나온 인재들과 함께 연 음악회였다.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살 3가지 꿈이 있다고 말했다.“우선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 편곡을 계속 할 겁니다. 한국 아코디언의 기술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이는 그가 지금도 종로에 허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아코디언 학원을 유지하며 제자들을 키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칠맛 나는 김영남만의 주법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 수많이 찾아볼 수 있다.“두 번째 목표는 세계가 인정하는 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탈북자라는 신분을 넘어 세계에 대한민국 음악을 알리는 당당한 음악인이 되고 싶습니다.”그것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회를 연 이유였다. 앞으로 그는 음악회를 2회, 3회로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세 번째 목표는 탈북민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정말 행복했고, 후회가 없었고, 또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탈북민은 정착에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저는 잘 살았지만 저만 잘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유치원 시절부터 김 씨는 해외에 음악 유학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삶을 돌아보면 그는 K팝의 원조 대한민국에 유학이 아닌, 음악인으로 당당히 정착했다. 그의 인생은 성공이었다.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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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에게 통일은 ‘소원’인가 ‘사고’인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폭염 속에도 통일부엔 칼바람이 분다. 소속 공무원의 4분의 1을 줄일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등 내부는 이미 꽁꽁 얼어붙었다.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통일부를 없애려는 정부조직법은 통과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통일부는 존치보다는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통일부가 어떤 일을 하는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통일을 하지 말자는 여론이 해마다 높아지기 때문이다. 통일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통일 의식 조사에서 ‘선호하는 남북의 미래상’으로 통일된 단일국가를 선택한 비율은 17%였다.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한 2국가를 선호한 사람은 52%였다. 또 응답자 중 17.6%만 통일 비용 조달을 위한 세금 인상에 찬성했고, 9.7%만 통일을 위해 현재보다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감내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만큼 돈 문제는 현실적이고 민감하다. 아마 올해 조사에선 분단을 선호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눈물 흘리던 세대는 이제 소멸됐다고 봐도 된다. 여론을 중시하는 정치인이 국민이 원하지 않는 통일을 굳이 추진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런 국민 의식이 잘못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합리적이다. 가족, 친척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빡빡한 현실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북한 동포를 위해 내 지갑을 선뜻 열기는 어렵다. 더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소말리아와 동일하게 빈곤국가로 분류된 북한은 얼마나 도와줘야 잘살지 가늠조차 안 된다. 여론이 이렇게 바뀌는데도 한국의 통일교육은 여전히 쌍팔년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학교 통일교육안을 보면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을 극찬한다. 이건 교육을 빙자해 아이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지하자원이 풍부하면 북한이 저 꼴로 살 리 만무하다. 통일돼 해외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개성공단처럼 150달러 남짓 월급을 받으며 일할까. 통일되면 처음은 힘들지만 나중엔 훨씬 더 이득이란 논리도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란 성경 구절과 다를 바 없다. 망할지 창대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이쯤 되면 통일교육을 하지 말자는 말이냐는 반론도 나올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통일교육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해야 한다. 다만 이젠 통일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통일 의식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통일은 국민의 소원이나 의무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통일이 된다면 그건 아마 대다수 국민들에겐 소원 성취가 아니라 ‘원치 않은 사고’일 수 있다. 문제는 이 사고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란 점이다. 준비 없이 당할 때 그 재앙은 상상할 수 없이 파괴적일 것이다. 당장 내년에 북한 체제가 붕괴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 대책이 있는가.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휴전선을 뚫고 내려올 때 우리가 그걸 막을 능력이 있는가. 한반도 정세 불안으로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 자본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면 우리는 외환위기 사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불행한 시절을 맞게 될 것이다. 북한 같은 반인륜적 퇴행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다만 사람이 죽는 것은 확실하되 언제 죽는지 알 수 없듯이, 김정은이 언제 죽고 북한 체제는 언제 붕괴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웃 나라 일본은 언제 닥쳐올지 모를 대지진의 공포를 안고 산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한 번 오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통일이란 공포를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통일교육과 준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 통일은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 됐다.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드는 자세로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통일을 하지 말자는 여론이 높은 젊은 세대도 더는 통일에 무관심해질 수가 없다. 북한 체제의 붕괴가 현실화되면 경제활동을 하는 젊은 세대야말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해야 남북이 함께 망하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북한 붕괴의 충격을 최소화할지를 연구해야 한다. 그게 21세기의 통일 준비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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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료비 부담 줄여주는 ‘삼성 iD VITA 카드’ 출시

    삼성카드가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건강 특화용 카드 ‘삼성 iD VITA 카드’를 출시했다. 이 카드는 의료비, 보험, 헬스·뷰티 등 건강 특화 영역에서 높은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할인점, 이동통신 등 일상 영역에서도 혜택을 제공한다. ‘삼성 iD VITA 카드’의 가장 큰 장점은 병원, 의원, 약국 등 의료 영역에서 20% 결제일 할인을 제공한다는 것. 전월 실적에 따라 최대 2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보험과 헬스·뷰티 분야에선 생명보험, 손해보험 등 보험 이용 시 10% 할인 혜택을 월 최대 1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아모레몰, 초록마을, 삼성카드 쇼핑의 ‘헬스케어관’을 이용하는 고객에게도 20% 할인 혜택을 월 최대 1만원까지 제공한다. 일상에서도 해외 가맹점 및 해외 직접구매 건에 대해 월 이용금액 관계없이 1%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또 할인점, 이동통신·렌털·멤버십에서 10%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할인점 10% 할인 혜택은 이마트, 트레이더스홀세일클럽, 롯데마트, 홈플러스, 농협하나로마트 이용 시 제공되며, 전월 이용금액에 따라 월 최대 1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이동통신, 코웨이, SK매직, 웰스 등의 렌털, 쿠팡 로켓와우 멤버십, 네이버 플러스 멤버십 정기 결제 시에도 10% 할인을 월 최대 5000원까지 받을 수 있다. 삼성카드는 ‘삼성 iD VITA카드’ 출시를 기념해 삼성카드 쇼핑 홈페이지에 ‘헬스케어관’을 구축했다. 건강보조식품, 건강보조기구 등 고객들의 건강 증진을 위한 물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한다. ‘삼성 iD VITA카드’ 연회비는 2만 원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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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가 갈 수 있는 팜스테이 마을 283곳

    농협은 팜스테이와 ‘국민과 함께하는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침체돼 가고 있는 농촌을 살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올해로 24년차를 맞고 있는 팜스테이 사업은 전국에 283개 마을이 참여하면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2020년부터 시작한 ‘국민과 함께 하는 농촌 봉사활동’은 매년 참가자 숫자가 꾸준히 늘어 지난해 5만 명을 돌파했다.팜스테이는 국민들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팜스테이는 농가(Farm)에 머무는(Stay) 여행을 의미한다. 농가 또는 농촌 지역에서 숙식하며 농산물을 수확하고 시골 문화도 체험하는 일종의 ‘농촌 체험 여행 프로그램’이다. 아이들과 함께 인근의 계곡이나 강에서 물놀이와 레포츠를 즐길 수도 있다.팜스테이, 코로나 딛고 재도약팜스테이사업은 도시와 농촌이 함께하는 ‘도농상생’을 위한 취지에서 1999년 농협에서 처음 시작했고, 현재 전국 283개 팜스테이 마을이 운영 중이다. 이용객은 410만여 명을 돌파하는 등 지속적 증가 추세였으나 최근 코로나 여파로 이용객이 크게 줄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농협은 코로나 종식 이후 움츠러들었던 여행 수요가 크게 늘어 올해부터 팜스테이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인플레이션과 높아진 항공권 가격에 해외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게 들고, 성수기 주요 피서지의 숙박시설도 동이 나면서 북적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팜스테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의 푸근함과 함께 고요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농촌 팜스테이다.팜스테이 마을에서 숙박하면 크게 일곱 가지 체험이 가능하다. 인근의 계곡, 강, 해변, 섬 등을 찾는 생태문화관광, 전통 주거방식인 황토온돌방 숙박과 현지에서 즐길 수 있는 농산물 직거래, 벼 베기, 옥수수 따기 등 영농 체험, 치즈 만들기, 떡메치기 등 음식 체험, 활쏘기, 널뛰기 등 전통 놀이 체험, 물고기 잡기, 뗏목 타기 등 야외 체험, 장승 만들기, 솟대 만들기 등 전통 공예 체험이다. 마을마다 다른 자연환경과 지역문화를 가진 만큼 할 수 있는 체험도 각각 달라 선택하는 재미가 있다.농협은 엄격한 과정을 거쳐 팜스테이 마을을 선정하고 청결한 위생 관리에 힘을 쏟고 있다. 팜스테이 마을로 선정되려면 주민 4분의1 이상이 동의하고 농가 5가구 이상이 참여해야 하며 운영 실무자는 농촌관광 관련 교육을 수료해야 한다. 친환경 농법을 통해 우수 농산물을 재배해야 하며 방문객을 맞을 편의시설과 농촌·농업 체험 프로그램도 갖춰야 한다.팜스테이 마을들은 휴가철 성수기에 찾아도 바가지요금을 부르지 않으며 황토 온돌로 이뤄진 민박집부터 한옥, 게스트하우스, 펜션 등 숙소 형태도 다양하다. 농협 팜스테이 홈페이지에서 각 마을의 위치와 특징, 체험 프로그램 등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사전 예약은 필수다.‘돌아온 농활’은 대학생에게 인기농협은 또 ‘돌아온 농활’이라는 이름으로 농촌과 젊은 인력을 연결시키는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이미 농협은 2020년에 ‘국민과 함께하는 농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올해엔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단절된 대학문화 중 하나인 ‘여름방학 농촌봉사활동’을 다시 살리고, 미래 세대에게 농업·농촌을 알린다는 취지에서 ‘돌아온 농활’ 프로젝트도 시작했다.국민과 함께하는 농촌봉사활동은 영농인력 부족 등 어려움에 처한 농촌과 농업인을 돕기 위해 시작됐다. 일반인에게 직접 농촌봉사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농업·농촌 가치 확산에 기여할 수 있게 해준다. 2020년에 약 1만8000명이 참여했고, 2021년엔 3만9000명, 지난해엔 5만 명으로 참가 인원이 늘고 있다. 코로나가 끝난 올해는 참여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농협은 농가 선정 및 활동계획 수립을 통해 농촌 일손 돕기를 하고 싶어도 기회나 창구가 없었던 일반인들에게 통로를 만들어주고 있다. 또 전국 네트워크망을 활용하여 일손이 필요한 곳과 봉사활동을 희망하는 수요처를 원활하게 이어주며, 활동에 필요한 교통수단, 중식비, 단체 여행자 보험 등 지원을 통해 참여자가 하루 온전히 농촌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돌아온 농활’은 대학생들에게 농업·농촌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이 사업은 여름방학을 맞이한 대학생들이 일정 기간 농촌마을에 머물며 농업인의 일손을 돕고 주민들과 교류활동을 통해 농업·농촌에 대해 배우고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느껴보는 것이 취지이다. 대학생들은 직접 3∼5일간 농촌마을에 머물며 작물수확, 환경정비 등 농작업을 돕고 함께 식사하면서 농업·농촌의 가치를 느끼고 농업인과 소통하는 기회를 가진다. 대학생들은 단체 활동을 하며 자립심과 협동심을 키울 수 있으며 자원봉사 실적도 얻게 된다. 농협은 제반 활동에 드는 예산도 일부 지원한다. 올해 경희대, 동국대, 성균관대 3개교가 시범사업에 참여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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