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

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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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용 기자입니다.

parky@donga.com

취재분야

2024-03-28~2024-04-27
칼럼97%
사설/칼럼3%
  • [오늘과 내일/박용]베네수엘라 기자 A가 한국 대선판 본다면

    10여 년 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열린 2주간의 저널리즘 세미나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온 기자 A를 처음 만났다. 10여 개국에서 온 기자들은 일과를 끝내고 학교 주변 맥줏집에서 친분을 쌓고 각 나라 정보를 교환했다. 술값은 갹출했는데, 그때마다 A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중에야 정부가 외환을 통제해 달러를 넉넉히 들고 나올 수 없었다는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주최 측이 제공한 체재비 외에 맨해튼 하루 호텔비도 안 되는 100달러 용돈으로 2주를 지내야 하는 그에겐 맥주 한 잔도 사치였다. 사정을 알게 된 다른 나라 기자들은 십시일반 A의 몫을 분담했다. 귀국 전날 밤 A는 동료 기자들에게 베네수엘라 관광엽서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감사편지를 돌렸다. 그의 손 편지를 읽으며 정치가 실패했을 때 국민들은 어떤 설움을 겪는지 절감했다. 한때 미 플로리다 관광지의 명품 매장에서 “한 개 더”를 외치는 산유국 베네수엘라 관광객들이 넘쳐날 때가 있었다.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뒤엔 사정이 달라졌다. 차베스는 부패한 경제 관료와 부자들을 비판하고 소외된 서민들의 분노를 파고드는 전략으로 1998년 선거에서 이겼지만 집권 후엔 서민들에게 경제난과 살인적 인플레를 안겨줬다.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도 없애고 정적과 언론인을 탄압하며 20여 년 좌파 집권 시대를 열었다. 그는 사회주의 시스템을 이식하기 위해 은행 석유 식품 기업을 국유화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공공부문 인건비 증가 등으로 재정 부담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 수입원인 원유 가격 하락과 수출 감소, 미국의 제재 등이 겹치자 경제는 무너졌다. 통화 가치는 하락했고 인플레가 찾아왔다. 베네수엘라는 지금도 살인적 인플레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미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책에서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탈냉전 이후 선출직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례로 꼽았다. 냉전 땐 총칼과 탱크를 앞세운 군사쿠데타 세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했지만 요즘은 선거를 통해 집권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티 안 나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총칼이 아닌 투표함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위기는 어디서든 일어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재임 중인 2018년 이 책이 나오자 “트럼프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에선 올해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며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동시에 과거 군사정권에 저항하던 세력이 이제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쥐고 포퓰리스트로 변질되고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정치 지도자들이 자영업자를 두텁게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으로 막대한 돈을 뿌리더니 선거를 앞두고 뒤늦게 자영업자를 걱정한다. 국민을 부자와 빈자로 편을 가르고 ‘세금 폭탄’을 던지다가 선거와 공시가 발표를 앞두고 보유세 현실화를 미루겠다고 속삭인다. 내년 국가부채가 1000조 원을 넘는데도 대선 후보들은 50조, 100조 원의 공약을 던진다. 말을 듣지 않는 관료들에겐 ‘선출 권력에 복종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패는 견제와 균형이다. 기성 정당은 소속 정치인들이 극단주의로 치닫지 않도록 견제하고 유권자들의 투표지에 차악이 아닌 최선의 후보들을 올려놓을 책임이 있다. 나머지는 유권자의 몫이다. A가 요즘 한국 대선판을 본다면 ‘정신 바짝 차리라’고 충고할 듯싶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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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하산 근절’ 청년공약부터 걸라[오늘과 내일/박용]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싫어하는 경제용어가 ‘펀더멘털(기초체력)’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정부 고위관료들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당시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의 30대 서기관이던 고 위원장은 이후 ‘펀더멘털’을 입에 담길 꺼린다. ‘외환위기 2030세대’는 경제가 무너지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절감했다. 하지만 24년이 흘렀는데도 청년 취업난은 미완의 과제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막대한 세금을 쓰고도 해결하지 못한 건 ‘펀더멘털 관료들’처럼 위기 원인을 외면하고 진통제 처방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자리가 사라진 건 세계화로 공장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자동화로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냥 놔두면 중산층 일자리인 제조업과 서비스업 일자리는 남아나기 어렵다. 그나마 남은 일자리는 불공정 경쟁으로 힘 있는 이들이 독식한다는 게 청년들의 불만이다. 이 세 가지 난제에 해답을 내놓지 못한 청년공약은 시간과 세금 낭비일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중산층 일자리를 빼앗아간 주범으로 세계화와 세계화주의자(Globalist)를 지목하고 무역장벽을 세워 흐름을 되돌리려다가 동맹국 반발까지 샀다. 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 복원과 국제기구 복귀 등을 약속했지만 다른 나라 공장을 미국으로 끌어오는 데도 적극적이다. 글로벌 법인세 공조로 세금을 깎아 일자리를 뺏어간 나라를 견제한다. 글로벌 분업체계가 무너진 탈세계화 시대엔 이런 식의 국가 간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한국 대선 후보들은 어떻게 기업을 유치하고 지킬 건지, 국가 간 일자리 경쟁엔 무엇으로 대응할지 별말이 없다. 과거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 취업난이 해결될 거라고 했는데, 그 자리는 젊은이가 아닌 자동화된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미국은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을 강화해 일자리를 만들고 지킨다는데, 미국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은 한국은 취업자 절반이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는데도 교육 개혁에 손을 놓고 있다. 수요가 급증한 반도체 인력을 육성한다며 다른 학과 정원이 줄면 그 정원으로 돌려 막으라는 식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미 스탠퍼드대가 2008년 141명에서 지난해 745명으로 늘었다. 서울대는 55명에서 70명으로 늘리는 시늉만 했다. 한전공대와 같은 지역 공대를 하나라도 더 세우려고 해도 중복 투자라고 난리다. 세계화와 자동화 해법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대선 후보들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조차 손을 놓고 있다. 청년들이 분노하는 일자리 불공정 게임의 규칙을 바로잡으려면 그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대선 후보들이 당선 이후 캠프에 모여든 어중이떠중이 낙하산을 최대한 배제하고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공정하게 쓰겠다는 약속부터 하면 어떤가. 프랑스 청년들은 요즘 자신들을 “희생당한 세대(G´en´eration sacrifi´ee)” “취업 불안, 경기 악화 등으로 사회 전체의 부채를 짊어져야 하는 세대”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판 ‘희생당한 세대’를 만들지 않으려면 지난 20여 년간 청년들의 젊음을 갈아 넣어 만든 득표용 청년공약부터 걷어내야 한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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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거꾸로 선 한국경제, 대선주자들 해법 있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법대를 나온 법조인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후보는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로 일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지만 변호사로 산 기간이 더 길다. 윤 후보는 27년을 검사로 지냈다. 변호사나 검사는 과거나 현재에 벌어진 허물을 따질지언정 할리우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수사관들처럼 미래를 판단하진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틀 안에서 살아오며 의정 경험이 없고 청년층의 지지도 약하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후보의 아킬레스건 역시 청년들에게 가슴 뛰는 미래를 제시하는 비전 역량일 것이다. 그 점에서 그간 두 후보가 맛보기로 보여준 공약들은 낙제점에 가깝다. 무엇보다 청년들을 위한다는 두 후보가 청년세대에 큰 부담을 지우는 돈 풀기 공약부터 들고 나온 건 위선이다. 물가가 급등하면서 위기 대응을 위한 정부의 돈 풀기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으로 봐야 하는데도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수십조 원이 들어가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건 현실감각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돈줄 조이기를 시작한 미국 등 세계 흐름과도 동떨어진 행보다. 정부가 위기 때엔 저소득층이나 자영업자 등의 피해자를 도와야 하지만 덮어놓고 돈을 푼다고 해서 경제가 더 살아나는 건 아니다. ‘성공한 국가의 10가지 법칙’의 저자인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수석글로벌전략가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지난해 각국의 경기부양책 효과를 분석한 결과 경기 부양 규모와 경기 회복 강도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히려 “팬데믹 기간 지출을 많이 늘리려고 했던 나라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장과 재정적자 및 부채와 같은 어려움을 더 겪게 될 수 있다”며 “이들 국가가 다음에 올 금융거품과 싸우는 데 필요한 실탄을 축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선 후보들이 청년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청년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말고 젊어서 일해야 할 땐 하릴없이 쉬어야 하고, 노년에 쉬어야 할 때는 소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거꾸로 선 한국경제부터 바로잡는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일하지도 않고 구직 활동도 안 하는 비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향후 1년 내 일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역대 최대인 4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특히 20대 비경제활동 인구 중 절반(50.1%)이 1년 내 취업이나 창업을 원하고 있다. 반면 한국인의 노후는 고달프다. 어처구니없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조차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한다”며 ‘K 노인 빈곤’이라고 조롱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이 정책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잠재성장률이 2030년 이후 0%대로 추락한다고 경고했다. 성장 여력이 사라지면 청년들은 취업하기 더 어려워지고 노년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대선 후보들은 ‘전환적 공정성장’이니 ‘정의로운 나라’ 등 듣기에 좋은 구호보다 젊어선 열심히 일할 기회를, 노년엔 안정적인 소득을 어떻게 마련해줄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 청년들의 공정한 취업 기회를 박탈하는 뒤떨어진 고등교육 제도와 기득권 사수를 위해 툭하면 거리로 나오는 전투적 노조, 정년과 국민연금 수급 기간에 발생하는 은퇴자 ‘소득절벽’과 고갈되는 연금 보전 방안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과제가 없다. 그 해법을 내놓는 게 시대가 원하는 대선 후보의 실력이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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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빚 권하는 세상, 서민만 아프다

    금융당국이 대출을 갑자기 조인다고 난리인데, 올해만 그런 건 아니다. 가을마다 연례행사처럼 관제 ‘대출 보릿고개’가 닥친다. 연말 관리목표에 쫓긴 금융당국이 밀린 숙제하듯 대출 수도꼭지를 잠그기 때문이다. 은행을 찾은 서민들은 막막해지고, 단수 전 욕조에 물을 받아두듯 ‘막차 대출 수요’도 한꺼번에 몰린다. 대출은 다시 급증한다. 관리목표도 물 건너간다. 1800조 원 넘는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한국 금융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대출 규제로 촉발된 지난해 11월 가계대출 증가세는 최악이었다. 전년 11월의 갑절에 가까운 13조6000억 원이 한 달 만에 불어났다.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규모였다. 빚을 내 집을 사거나 주식 투자를 하려는 수요가 몰린 상황에서 당국이 대출 규제를 예고하자 ‘막차 수요’가 분출한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결국 한국 민간부채 위험 수준을 10년여 만에 가장 높은 ‘경보’ 단계로 올렸다. 올해도 ‘집값 급등-대출 증가-대출 규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달라진 건 사나워진 민심에 대통령이 나섰다는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6일 “가계부채 관리는 불가피하지만 실수요자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했고, 금융당국은 14일 전세대출은 대출 총량 관리에서 제외하겠다며 물러섰다. 이를 두고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민주연구원에서 여론조사도 하고 긴급 토론회도 하면서 강하게 서민들 목소리를 전달한 결과이기에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고 공치사했다. 그러더니 “집 없는 설움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모피아들의 탁상행정”이라며 관료 탓도 했다. 부동산 실정부터 반성할 일을 공치사로 돌리고, 책임질 일을 전가하는 게 올바른 정치는 아니다. 관제 ‘대출 보릿고개’는 한국 금융이 후진적이라는 증거지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제도나 시장에 ‘기저질환’이 없는지 따져보는 게 정석이다. 한국경제학회가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8일까지 소속 경제학자 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89%는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에 대해 ‘주택담보대출 등 주거비 자금 수요에서 비롯했다’고 답했다. 가계부채의 기저질환이 집값 급등이라는 건데, 대출만 조이면 대통령이 언급한 실수요자의 고통으로 전가된다. 문제는 집값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의 9억 원 초과 아파트 비중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6월 15.7%에서 올해 6월 56.8%로 늘었다. 소득은 그만큼 늘지 않았으니 집값의 상당 부분은 누군가가 이자를 물고 마련한 빚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집값이 급등하면 전세금도 따라 오른다. 전세대출 수요도 는다. 전세금과 집값 격차가 줄면 전세 안고 집을 사는 ‘갭 투자’가 고개를 든다. 집값은 다시 오르고 가계대출은 또 불어난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춤을 춰야 하는 ‘빚 권하는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가계 이자 부담은 12조5000억 원 증가한다. 대출을 잠시 풀어주는 건 진통제를 놔주고 골치 아픈 문제를 카펫 밑으로 밀어 넣어 감추는 것이다. 집값이 뛰면 내년에도 ‘대출 보릿고개’는 되풀이될 것이다. 서민에게 절실한 건 기존 주택이든 신규 주택이든 주택 공급을 늘려 집값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무주택 서민들에게 큰 빚을 내지 않고 열심히 일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희망을 돌려줄 때 ‘대출 난민’도, 대출 보릿고개도 사라질 것이다. 빚 권하고 공치사할 때가 아니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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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총리의 소시지와 눈물 젖은 빵

    한국에선 자동차 대기업이 소시지를 만들어 구내식당에 공급한다면 골목상권 침해니 일감 몰아주기니 해서 혼쭐이 난다. 독일에선 얘기가 다르다.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은 자동차 생산량보다 더 많은 연간 약 700만 개의 ‘커리부어스트’ 소시지를 만들어 6곳의 공장 구내식당에 제공하고 공장 밖 슈퍼에서도 판매한다. 이 회사가 1973년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소시지 생산을 시작한 건 공장 직원들 때문이다. 독일 노동자에게 국민음식 소시지는 영양 만점 점심 메뉴였다. 독일에서 9월 총선을 앞두고 이 ‘폭스바겐 소시지’가 논란이 됐다. 탄소중립 경영을 선포한 폭스바겐이 직원들의 채식 수요와 환경 보호를 이유로 소시지 생산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시지 재료인 소와 돼지를 기르고 도축하는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많다는 것인데, 이 소시지를 즐기던 노동자와 서민들에겐 날벼락 같은 결정이었다. 과거 폭스바겐 이사회에 참여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77)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입장문을 내고 “커리부어스트는 생산라인에서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에너지 바와도 같은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보호 등의 담론이 휩쓸고 있는 선거 국면에서 원로 정치인의 소신 발언은 독일사회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슈뢰더 전 총리의 부인인 김소연 독일 NRW글로벌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대표의 인스타그램엔 볼프스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하노버 등 독일 전역에서 “총리님께 안부를!” “총리님을 위하여 건배” 등의 인사말과 함께 커리부어스트를 먹는 인증샷이 속속 올라왔다. 김 대표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번 논란을 전하며 괴테의 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떠올렸다. 슈뢰더 전 총리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야간학교를 다니고 대학 때는 공사장에서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비를 마련하던 고학 청년이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그에게 커리부어스트는 공사판의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열량보충제였을 것”이라며 “막일을 직접 뛰어본 사람만이 근육을 뻐근하게 소진시키는 노동 후의 소시지 한 조각과 차가운 맥주 한 잔이 주는 의미를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편은) 환경 보호와 동물 애호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안 슈뢰더 전 총리는 2000년대 초 실업과 저성장에 시달리며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 경제의 체질을 바꾼 개혁 리더였다. 사회민주당(사민당) 소속의 그는 최대 지지 기반인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방만한 복지 지출을 줄이는 한편 일자리 창출과 실업자의 취업을 장려하는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일 정도로 강골이었다. 노조 등에 밉보인 그는 권력을 잃었지만, 독일은 ‘유럽의 리더’로 복귀할 수 있었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보호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선거철마다 정치권이나 금융시장에서 엘리트들이 탄소중립, 탈원전 등 멋진 신세계의 비전을 쏟아낸다. 하지만 서민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충분한 설득과 공감 없이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설익은 비전과 어설픈 개혁 과제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슈뢰더 전 총리가 ‘폭스바겐 소시지’ 논란에 그토록 발끈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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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뉴딜 낙하산’도 ‘개취’라는 청와대

    ‘대한민국 100년을 설계한다’는 20조 원 규모 뉴딜펀드를 금융투자 경험이 일천한 비전문가가 굴리겠다고 나선다면 말려야 정상 아닌가. 청와대에선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뉴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성장금융의 투자운용2본부장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있을 때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을 지낸 인사가 내정됐다. 금융권에선 “금융투자 경험도, 자격증도 일천한 부적격 인사”라고 난린데, 정작 청와대는 “청와대가 관여하는 인사가 아니다”라며 강 건너 불구경이다. 한술 더 떠 “전직 청와대 직원이 개인적으로 취업을 한 사안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낙하산,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유감”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게 개취(개인적 취업)의 문제인가. 뉴딜펀드를 뜬금없이 국민들 앞에 띄운 건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금융과 민간 자금이 참여하는 ‘뉴딜펀드’ 조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두 달 뒤 정부는 문 대통령이 주재하는 ‘제1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에서 ‘국민참여형 뉴딜펀드’ 조성 방안을 보고했다. 청와대가 관여하는 인사가 아니라고 해서 방관할 자리가 아니다. 뉴딜펀드에 국민을 끌어들인 것도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막대한 유동자금이 한국판 뉴딜사업으로 모이고 수익을 함께 향유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정부는 일반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모재간접공모펀드를 만들고 국민참여펀드 조성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을 이해관계자로 끌어들였으니 누가 펀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상세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당에서도 오래 일을 해서 전혀 (금융) 흐름을 모르는 분은 아니다”라고 논란의 당사자를 감쌌다. 당에서 오래 일하고 흐름을 이해한다고 해서 국내 최고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할 투자운용 업무를 맡길 수 있나. 김 총리는 “투자운용본부장이 1본부장, 2본부장이 있는데 그중 한 파트를 맡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원래 한국성장금융에 투자운용본부장은 1명이었다. 지난달 이 자리를 둘로 쪼개고 2본부장을 만들더니 16개 모(母)펀드 중 가장 덩치가 큰 뉴딜펀드 운용 업무를 갖다 놓고 공모 절차도 없이 본부장을 내정했다는 게 ‘위인설관 낙하산 인사’ 논란의 발단이다. 권력을 쥔 여당, 청와대 출신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승자독식 세계관은 실력을 쌓기 위해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일을 하고 자격증을 따느라 청춘을 보낸 전문가들의 땀과 노력을 배신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할 한국의 실력주의(Meritocracy)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한국성장금융이 투자하는 자(子)펀드는 200개가 넘고 투자 기업만 약 3000곳이다. 뉴딜펀드 투자운용 책임자는 7조 원의 정책자금이 투입된 모펀드를 굴리며 자펀드나 투자 기업에 막대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 감시가 허술하면 옵티머스·라임과 같은 사모펀드 사태나 총리와 측근이 국영투자사를 통해 45억 달러를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말레이시아 ‘1MDB’ 사건과 같은 ‘약탈정치(Kleptocracy)’ 창구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니 투자운용 책임자는 공개 채용을 원칙으로 하고 주요 의사결정에 대한 감시는 강화해야 한다. 이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전직 직원의 개취’라고 한 청와대의 ‘불공정 불감증’이야말로 유감천만이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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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동산 싱크홀’에 빠진 ‘박 과장’ 구하기 [오늘과 내일/박용]

    때론 영화가 현실의 아픈 지점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난주 개봉해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모은 재난코미디 영화 ‘싱크홀’(지반 환경에 변화가 생겨 갑자기 땅이 꺼지는 현상)은 어렵게 장만한 집이 500m 깊은 땅속으로 꺼진다는 ‘웃픈’ 상상력으로 눈길을 끈다. 영화는 고생 끝에 서울 마포에 신축 빌라를 장만한 ‘박 과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대한민국에 이런 무주택자 캐릭터는 너무 흔하다. 수도권의 자가 보유율이 53%이니 거리에서 만난 가장 둘 중 하나는 무주택자다. 박 과장이 11년 만에 서울에 집을 마련한다는 설정도 현실과 부합한다. 치솟는 집값으로 수도권의 연 소득 대비 주택가격(PIR) 배수는 2016년 6.7배에서 지난해 8.0배로 높아졌다. 박 과장이 수도권에 집을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8년을 모아야 한다는 얘긴데, 월 소득의 18.6%가 매월 임차료로 들어가는 수도권의 평범한 샐러리맨들에겐 ‘재난’ 같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과장의 선택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이다. 집을 얻는 대신 빚쟁이가 되는 또 다른 ‘재난’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도 그렇다. 지난달 말 현재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1040조2000억 원으로 한 달 만에 9조7000억 원 늘었다. 주택담보대출이 가계대출의 73%를 차지한다. 상품시장에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고 공급은 늘어난다. 하지만 과시적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명품이나 부동산처럼 공급이 제한된 시장에선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더 줄 것으로 보고 추가 수요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집값이 치솟는데도, ‘내 집이 꼭 필요하다’고 응답한 국민이 2019년 84.1%에서 지난해 87.7%로 높아졌다. 공급 제한과 집값 상승 신호가 깜빡거리면 언제라도 시장에 뛰어들 준비가 된 ‘부동산시장의 예비군’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생산량이 제한된 한정판을 만들거나 가격 인상설을 흘리고 무례하게 고객을 줄 세우는 상술을 부리는 건 이런 시장에서 공급을 통제하면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집값이 하염없이 오른 뒤에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고 공급의 어려움을 뒤늦게 실토한 정부에 집값 급등의 근본 책임이 있다. 정부가 만든 부동산 싱크홀에 빠져 음악이 흘러나오면 시장의 힘에 떠밀려 무대에서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무주택자에게 정부 당국자가 집값 고점 운운하며 겁을 주는 건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다. 해법 역시 시장에 있다. 시장의 힘을 역이용해 시장이 원하는 곳에 공공이든 민간이든 주택 공급을 충분히 늘린다는 일관된 신호를 줘야 무주택자들의 불안감이 누그러질 것이다. 집 때문에 생긴 박 과장의 재난은 이제 시작이다. 영화에선 그 귀한 집이 집들이 날 장대비 속에서 생긴 싱크홀 때문에 땅속으로 추락한다. 집값 급락이야말로 영끌 투자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동산시장의 싱크홀이다. 3월 말 현재 가계 및 기업에 대한 부동산금융 익스포저는 2343조 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11.2% 증가했다. 부동산시장에선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줄면서 가격이 더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곧 금리가 오르면 부동산 대출 부실이 커질 가능성도 있는데, 집값을 잡고 시장도 연착륙시킬 수 있을까. 정부가 ‘부동산 싱크홀’에 빠진 박 과장들을 협박하고 훈계할 처지가 아니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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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공정도, 경제도 놓친 35조 K추경

    4472만 명에게 25만 원씩 나눠주기로 한 5차 재난지원금(국민지원금)의 발화점은 문재인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2월 간담회였다. 대통령은 이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서 벗어날 상황이 되면 국민 위로 지원금, 국민 사기 진작용 지원금 지급을 검토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다섯 달 뒤인 23일 국회는 국민지원금이 포함된 34조9000억 원의 역대 최대 규모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통과시켰다. 한쪽에선 ‘4차 대유행’을 잡기 위해 방역을 강화해놓고 다른 쪽에선 소비 진작에 방점이 찍힌 국민지원금을 뿌리겠다는 거다. 코로나19 진정을 전제로 국민지원금을 거론한 대통령의 2월 발언과도 거리가 멀다. 이번 추경은 묘하다.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후하고 피해자들에겐 상대적으로 박하다. 국민 88%에게 국민지원금을 나눠주는 데 11조 원, 거리 두기 격상으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 178만 명에겐 절반도 안 되는 5조3000억 원을 배정했다. 피해 유무와 상관없이 뿌리는 ‘상생 국민지원금’은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억울한 ‘공돈’으로 변질됐다. 공정성 논란을 자초했다. 11조 원은 그렇게 뿌릴 돈이 아니다. 한 해 국방비(52조8000억 원)의 약 5분의 1이며 백신도 접종하지 못하고 파병을 나간 청해부대가 소속된 해군과 공군의 1년 예산을 모두 합한 금액(10조6300억 원)보다도 많다. 이 돈을 보태면 대학들의 연구개발비(2019년 기준 5조278억 원)를 세 배로 늘려 세계 일류 대학과 경쟁시킬 수 있고, 지난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130만 명에게 준 생계급여(5조5962억 원)를 올해 세 배로 늘려줄 수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등으로 직장을 잃은 실업자 170만3000명에게 준 구직급여(11조8556억 원)를 감당할 수 있는 큰돈이다. 그런 목돈을 4472만 명에게 뿌리면 푼돈처럼 효과가 줄어든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전 국민에게 나눠준 1차 재난지원금은 사용 가능 업종에서 전체 투입예산 대비 26.2∼36.1%의 매출 증대 효과를 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원래 쓰려던 돈은 저축이나 투자를 하고 정부 돈을 쓰다 보니 소비 효과가 제한적이다. 현금 뿌리기보다 피해를 본 자영업자를 선별해 직접 지원하는 것이 가성비가 좋다는 뜻이다. 방역에 동참한 자영업자들은 빚을 내 근근이 버티고 있다. 3월 말 현재 자영업자 대출은 832조 원으로, 1년 전보다 132조 원(18.8%) 불었다. 연내 금리 인상도 예상된다. 당장은 정부 조치로 대출 원리금 상환이 연기됐지만,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다. 밀린 청구서들이 날아오는 코로나19 이후가 더 두렵다.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간사가 얼마 전 내년도 최저임금을 5.1% 인상한 것과 관련해 “코로나19가 끝난 후의 ‘정상 상태’를 가정해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자영업자들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24.6%로 독일(9.6%), 미국(6.1%)은 물론이고 일본(10.0%)보다 훨씬 높다.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건 한국 경제를 살리는 일이다. 국민 4472만 명에게 뿌릴 국민지원금 11조 원을 보태서 피해를 본 178만 명의 소상공인에게 나눠준다면 현재(1인당 평균 297만 원)의 약 3배인 평균 915만 원을 줄 수도 있다. 거리 두기 단계를 격상하더라도 덜 미안하고, 그들이 밀린 빚을 갚고 재기하게 거들 수 있다. 그런데도 선거에 정신이 팔린 정치권과 피해자를 선별할 능력이 모자란 정부가 현금 뿌리는 ‘헬리콥터 추경’을 반복하며 아까운 재원을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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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요금 고지서엔 ‘자유’가 없다[오늘과 내일/박용]

    한국전력에 걸려오는 전기요금 민원의 상당수는 전기와 관련이 없는 TV 수신료에 대한 불만이다. KBS가 TV 보유 가정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1994년부터 전기요금 고지서에 수신료를 함께 청구하는 통합징수 제도가 시작됐다. 모든 사람이 시청자라고 가정하고 수신료를 일방적으로 청구한 다음에 TV가 없다는 걸 입증한 사람만 면제하는 ‘옵트아웃(배제선택)’ 방식이다. “TV가 없다”는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한 구닥다리 방식이어서 민원이 발생한다.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독립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TV가 없는데도 수신료를 내라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고 한전에 항의한다. 지난해 역대 최다인 3만6273가구가 수신료를 환불받은 건 1인 가구 증가 등 인구구조 변화와 디지털 매체 증가, 시대 변화에 뒤처진 징수 방식 등과 관련이 있다. 이런데도 KBS 이사회가 수신료를 월 2500원에서 3800원으로 52% 올려야겠다고 의결한 건 패착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힘겨워하는 국민들에게 33조 원의 추가경정예산(추경)까지 편성해 지원금 등을 주는 마당에 한 달에 1300원씩, 연간 수천억 원이 넘는 돈을 수신료로 더 걷겠다는 건가. 이달부터는 월 200kWh 이하 전력을 사용하는 625만 가구의 주택용 전기요금 필수사용공제 할인액이 월 4000원에서 2000원으로 줄어든다. 2000원이 오르는 셈이다. 여기에다 국회가 KBS가 요구한 수신료 인상안(1300원)까지 덜컥 통과시켜 주면 이들은 한 달에 3300원을 더 내야 한다. 소비자물가가 치솟아 전기요금마저 2개 분기 연속 동결됐는데 같은 고지서의 수신료만 이렇게 파격적으로 올릴 수 있는가. 수신료와 전기요금의 불편한 동거는 관련이 없는 두 요금을 한 틀에서 움직이게 만든다. KBS가 수신료를 올리려면 직접 소비자 선택을 받는 게 정석이다. 두 요금을 한 번에 떼어내기 어렵다면 전기요금 고지서로 받는 수신료는 최대한 내리고, 나머지는 KBS가 직접 소비자들을 설득해 걷게 할 수도 있다.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함께 내는 게 편한 사람만 전기요금 고지서로 청구하게 선택권을 주는 ‘옵트인(승인선택)’ 방식으로 바꾸면 불만이 줄어들 것이다. 전기요금 고지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숨은 요금이 또 있다.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 사용으로 늘어난 신재생에너지 의무이행 비용이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비용, 석탄발전 감축 비용 등의 기후환경 요금이다. 가정에서 내는 전기요금의 약 4.9%를 차지한다. 전력 생산비가 저렴한 원전을 줄이고 비싼 신재생에너지를 더 쓰면 비용이 늘어난다. 탈원전과 탄소제로를 서둘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각성한 ‘친환경 엘리트’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좀더 부담할 수 있게 ‘녹색 프리미엄’ 선택권을 확대하는 건 어떤가. 통신요금은 다양한 요금제가 있는데, 가정용 전기요금만 요금제 선택권이 없다. 전력 공급과 수요에 따라 요금제를 다양하게 만들고 이용자들이 생활 방식에 맞게 선택하게 해주면 어떨까. 전력 수요도 분산되고 소비자 부담도 덜어줄 수 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의존도가 커진 제주는 육지와 달리 낮에 전기요금이 싸다. 제주는 9월부터 시간대에 따라 요금을 달리하는 선택요금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제주도처럼 스마트 계량기를 보급하면 못 할 일도 아니다. 소비자 선택권을 박탈한 공급자 중심의 행정편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뜯어고칠 때가 됐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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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영국이 골목사장님 MBA 보내는 이유

    미국 뉴욕 맨해튼 소호엔 2010년 창업한 온라인 안경점 ‘와비파커’ 뉴욕 본사가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고 시력과 얼굴에 맞는 맞춤형 안경을 집으로 보내주는 ‘D2C(생산자 직접판매)’ 모델을 내놓아 성공한 혁신기업이다. 창업자들은 명문 경영학석사(MBA) 과정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경영대학원 재학생들이었다. 여행 중 안경을 잃어버렸다가 비싼 안경값 때문에 한 학기를 안경 없이 보낸 고통이 창업의 동기였다. 젊은 MBA 학생들의 도전이 독점기업이 장악한 미 안경시장을 바꾼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정부가 사회적 타협제도인 ‘한걸음 모델’을 통해 온라인에서 도수 있는 안경을 살 수 있게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규제가 풀리면 소비자는 편해지고 시장은 더 커질 수 있으나 기존 안경점들은 와비파커 창업자들처럼 최신 기술과 MBA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도전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기존 사업자의 변화 의지와 혁신 역량이 없다면 규제 완화는 갈등을 부르고 한국 사회는 또 주저앉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골목사장님들을 ‘디지털 혁신 전사’로 키우려는 영국의 파격적 실험에 눈길이 간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은 서비스업종 상·하위 10% 격차가 독일 프랑스 미국에 비해 80% 이상 크다. 영세 서비스업종의 낮은 생산성이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억 파운드(약 3154억 원)를 투입해 3월부터 골목사장님들을 위한 12주짜리 미니 MBA 과정인 ‘성장을 위한 지원(Help to Grow)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경영역량이 높아지면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게 영국 정부의 분석이다. 미니 MBA 과정은 사업으로 바쁜 사장님들의 일정을 고려해 마케팅과 재무 등에 대한 2시간짜리 온라인 강의 8개와 강의실에서 배우는 MBA식 ‘케이스 스터디’ 4개 세션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다 1 대 1 사업계획 멘토링, 동료 및 졸업생 교류 프로그램 등을 지원한다. 1년 이상 사업을 하고 있는 고용원 5∼249명의 중소사업장 경영자가 지원할 수 있는데,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등록금의 90%만 국가가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의 침체된 지역과 지방대학에도 기회다. 35개 영국 경영대학원들이 참여할 계획이다. 이미 10개 프로그램이 학생 모집을 시작했고 4곳은 정원을 채웠다. 영국 정부는 올가을부터 골목사장님들이 사업을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온라인 무료 상담을 해주고 소프트웨어 구매비의 절반을 지원하는 사업도 시작한다. 영국의 파격 실험이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자영업 비중이 24.6%로 미국(6.1%), 일본(10.0%), 독일(9.6%)보다 훨씬 높고 영세 자영업자의 낮은 생산성, 지역과 지방대학의 침체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이 배울 점이 있다. 한국 자영업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어렵다. 과거와 같은 일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는데 최저임금만 올리면 골목사장님들은 직원을 줄이거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다른 나라에서도 하지 않는 기본소득이나 전 국민 재난지원금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느니 경영난을 겪는 자영업자들을 집중 지원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해법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게 생산적이다. 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한 ‘물고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당장은 필요해도 중장기적으로는 변화에 적응하고 도전에 응전하는 생존기술인 ‘물고기 잡는 법’을 전수해 주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다. 영국은 그 길로 이미 들어섰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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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경제안보시대’, 오원철 수석이라면 어땠을까

    요즘 한국 산업정책은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키를 쥐고 끌고 가는 모양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회의를 열고 삼성전자까지 불렀다. 한국 기업들로부터 44조 원 규모의 투자 약속까지 받아내고 ‘생큐’를 연발했다. 수천억 원의 소송비가 들어간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을 중재한 것도 바이든 대통령이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서 법정다툼을 벌이는 데도 정부 관리들은 ‘기업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외면했다”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기업 간 분쟁에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국가 전략산업과 주력기업이 연루된 일은 다르다. 미국은 일자리와 미래산업 경쟁력이 걸린 사안으로 보고 대통령까지 팔을 걷고 나선 게 달랐다. 저쪽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나섰는데 우린 산업통상자원부 실장 주재 반도체 대책회의를 반복할 만큼 산업정책의 감도 떨어진다. 용인 반도체 공장에 산업용수를 대는 것도 개별 기업이 할 일이라고 뒷짐 지다가 뒤늦게 K반도체 전략에 끼워 넣었다. 반도체 인력도 향후 10년간 3만6000명 육성한다면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난감한 대학 내 정원 조정과 임시방편의 계약학과 신설 방안을 내놓았다. 한국 산업정책이 잘 돌아갔다면 기업 투자가 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1∼2020년 국내 제조업의 해외직접투자(ODI)는 연평균 12조4000억 원,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는 4조9000억 원에 그쳤다. 한국 기업은 떠나고, 외국 기업은 이보다 덜 투자하니 매년 4만9000여 개, 10년간 총 49만1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셈이고 지난해 실업률을 4.0%에서 3.7%로 낮출 기회를 잃었다는 분석이다. 대한민국은 1960, 70년대 한정된 자원으로도 정부 주도 중장기 산업정책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시장을 중시하고 국가 간 경계가 희미해진 세계화 시대엔 빛을 잃었지만 최근 경제와 안보를 연계한 자국 우선주의가 득세하는 ‘경제안보 시대’엔 정부 역할이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산업부 전신인 상공부 출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끈 고(故) 오원철 대통령 제2경제수석이 기업 분쟁이나 전략산업 투자를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뭉개는 후배들을 봤다면 죽비를 쳤을 것이다. 5년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산업을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건 정부에서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말”이라며 “공업을 발전시킬 책임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1960년대 상공부 공업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를 거쳐 1970년대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맡아 한국 중화학기업의 초석을 놓았다. 전략 산업을 위한 예산을 따로 마련하는 ‘목돈 전략’과 거점 지역에 기업들을 집중시키는 ‘클러스터 전략’으로 한국 산업을 일으켰다. 서울대 공대 출신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인 그는 산업부 후배 공무원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연에 참석한 산업부 공무원 30여 명 중 이공계 출신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한 명에 불과했다. 그는 “전부 행정만 하는 사람들만 뽑아놓고 기술을 모르니까 나 같은 사람을 불러놓고 강의시키는 게 아니냐”고 화를 버럭 냈다고 한다. 경제안보 시대라는 지금은 산업과 기술을 아는 관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30일은 오 수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다. 요즘 같으면 그의 통찰과 열정이 그리울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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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대한민국엔 ‘화이자’가 없다

    미국의 힘을 짧은 시간에 느끼려면 뉴욕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42번가를 따라 걸어 보라고 한다. 18세기 옥수수 밭이던 동쪽 끝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축인 유엔 본부가 들어섰다. 서쪽으로 더 가면 20세기 초 미국 자동차산업의 성장과 마천루 시대를 상징하는 크라이슬러 빌딩, 세계 최대의 철도역 그랜드센트럴터미널, 지식강국의 저력이 녹아 있는 뉴욕공공도서관, 뮤지컬 등 문화산업 거점 타임스스퀘어와 극장지구로 이어진다. 서쪽 끝 허드슨강변엔 미 국방력의 상징인 항공모함과 전투기, 우주기술의 결정체인 우주왕복선이 전시된 해양항공우주박물관(46번가)이 있다. 길 하나에서 세계를 수호하는 유엔, 지식을 지키는 도서관, 미국을 보호하는 항공모함,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우주왕복선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 뉴욕 42번가다.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미국의 대표 제약사 화이자 본사도 이 길에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자 백신 개발에 착수한 지 9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접종까지 성공한 그 회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4월 한국파스퇴르연구소를 방문해 “치료제, 백신 개발만큼은 끝을 보라”고 당부하고, 우리 정부가 지원을 위한 범정부위원회까지 만들어도 안 된 일을 그들은 해냈다. 어떻게 했을까. 알베르트 부를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최근호에서 비결을 소개했다. 화이자는 지난해 3월 ‘메신저RNA(mRNA)’ 기술을 보유한 독일의 바이오엔테크와 손을 잡았다. 바이러스의 유전자 코드를 합성하는 백신 신기술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개발 기간을 단축한 것이다. 또 백신 후보 물질을 차례차례 테스트하는 기존 방식을 버리고 여러 후보를 동시에 연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돈은 훨씬 더 들어도 시간은 아낄 수 있었다. 수조 원의 개발비가 들어가는 일인데도 미국과 독일 정부의 지원은 거절했다. 부를라 CEO는 “과학자들이 재무적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줬고 과도한 관료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했다. 정부 돈을 받지 않아 보고나 설명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미 정부는 대신 최대 3년이 걸리는 임상 2상과 최대 4년이 걸리는 3상을 동시에 진행하게 해달라는 화이자의 요청을 들어줬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돈 때문만은 아니다. 부를라 CEO는 “민간 부문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고 했다. 사회 문제 해결을 정부와 공공 부문에 의존하는 우리에겐 생소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1962년 ‘대기업과 국가적 책임’ 논문에서 “대기업이 기술 혁신이나 사업 방식의 혁신에 더해 국가 정책의 혁신을 이끄는 역할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근엔 경영전략 대가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가 민간 기업의 창의적 혁신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도 성장하는 ‘공유가치 창출(CSV)’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에겐 당장 접종할 백신이 모자란 것도 문제지만 대대적인 투자와 혁신으로 사회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는 화이자와 같은 대기업을 키우고 존중하는 문화가 부족하다는 게 더 아쉽다. 민간의 창의성과 혁신을 국가 경영에 접목하고 그들을 국가 리더십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식 전환과 사회적 합의 없이 미래 경쟁력은커녕 시민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다. ‘42번가의 기적’을 만든 화이자가 그 길을 보여준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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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정권 말 한국 vs 집권 초 미국

    2년 전인 2019년 3월 19일(현지 시간) 특파원으로 일하며 SK이노베이션의 북미 첫 전기자동차 배터리 공장의 첫 삽을 뜨는 현장을 취재했다. 기공식은 미국 조지아주 북동부 커머스시 외곽 허허벌판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장에서 조지아 출신의 대가수 레이 찰스가 부른 1960년대 노래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내 마음속의 조지아)가 흘러나왔을 때 참석자들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역 인사들과 주민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2600여 개 미래 일자리를 따낸 감격에 젖었다. 당시 SK가 조지아주를 선택한 데는 기업 투자와 일자리를 끌어오려는 조지아주 공무원들의 열정이 한몫했다. 현지 시간 새벽에 한국에서 연락을 해도 그들은 1시간 만에 주지사의 결재까지 받아왔다. 새 공장에서 일할 인력을 기르겠다며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그렇게 얻은 귀한 일자리가 이번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간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으로 날아갈 위기에 놓였을 때 주지사와 정치인들이 똘똘 뭉쳐 ‘일자리 구명 운동’을 펼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에선 기업은 때려야 표가 된다는 분위기지만, 마스크조차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제조업 기반을 잃어버린 미국에선 기업 일자리는 표가 된다. 정파를 떠나 일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무섭게 덤벼드는 게 미 정치인들이다. 이번 LG와 SK 배터리 소송에서도 그랬다. 블룸버그뉴스는 미 12개 부처와 자동차 회사가 매일 회의를 열고 두 한국 회사의 분쟁을 중재하려는 노력을 했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 무역대표부(USTR)까지 동원해 극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를 두고 ‘바이든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슬리피 조’(졸린 조)라고 비웃던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석 달간의 행보에선 오히려 속도감이 느껴진다. 미 정보기술(IT) 대기업에 대한 유럽의 디지털세 공세에 대응하고 일자리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글로벌 법인세 공조를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과 같은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더니 반도체 인프라 재건과 공급대란 해결을 위해 삼성전자 등 글로벌 회사들을 불러 모았다. 벌써 바이든의 석 달이 ‘관세폭탄’으로 세계를 위협하던 트럼프의 4년보다 낫다는 말이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이 바이든 대통령의 대담함을 배워야 한다”는 칼럼까지 실었다. 4년의 국정 경험이 있는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차량용 반도체가 없어 국내 자동차 공장이 멈출 상황이 될 때까지 두 달간 산업통상자원부 1급 실장 주재 회의 2번을 열었다. 뒤늦게 대만 반도체협회 등을 붙들고 반도체 공급을 사정하고 있지만 뾰족한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선 아직도 기업이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성장 파트너가 아니라 개혁 대상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반도체 대란과 글로벌 법인세 공조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글로벌 경제 새판 짜기의 서막에 불과하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사자는 가장 느린 영양보다 빨라야 하고, 영양은 가장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한다. 세계는 기업과 일자리를 놓고 ‘의자 뺏기’ 경쟁에 돌입했는데 선거다, 개각이다 해서 느슨하게 움직이다간 먹던 밥그릇조차 지키기 어렵다. 우린 정권 말이지만 저쪽은 집권 초인 ‘한말미초(韓末美初)’의 시기다. 바이든 행정부에 보폭을 맞추려면 경제부처 수장들은 다시 출발점에 섰다는 생각으로 신발 끈을 동여매야 한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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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용]‘무저갱 세대’는 왜 분노하는가

    굳이 분류하자면 필자는 ‘외환위기 세대’다. 외환위기가 터지고 1998년 2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실업대란이 찾아왔다. 대기업들이 쓰러지고, 있던 직원도 내보내는 판에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갈 곳은 없었다. 죄 없이 극심한 취업난의 ‘무저갱(無底坑·바닥이 없는 깊은 구덩이)’에 빨려 들어간 듯 젊은이들은 하릴없이 허우적거렸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게 죄인가. 23년이 지난 올봄 청년들도 억울하다. 2월 취업준비생은 역대 최대인 85만 명. 취업난의 무저갱에 갇힌 이들의 약 90%가 2030세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핑계는 대지 말자. 그전에도 청년들이 원하는 괜찮은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부 책임자들은 큰소리만 쳤다. 인턴 몇 명만 뽑아도 수백 명이 몰려드는데 소득주도성장을 한답시고 최저임금도 한껏 올리고, 정규직 전환도 밀어붙이고, 주 52시간제까지 도입했지만 약속했던 소득주도성장은 오지 않았다.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1755달러로 2019년에 이어 2년 연속 뒷걸음질쳤다.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마저 수출 경쟁력과 일자리 보호를 외치는 각자도생 시대에 국제 공조도 없는 일국 소득주도성장론은 칠판 경제학자들의 탁상공론이다.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자영업 비중이 유독 높은 한국 경제에 깊은 내상을 줄 것이라는 경고에도 고집을 피우더니 만성화된 청년 실업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조차 안 한다. 그러면서 제 일자리들은 잘도 챙긴다. 소득주도성장의 불씨를 댕겼던 장하성 고려대 명예교수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지내고 뜬금없는 주중 대사로 새 일자리를 얻어 갔다. 경제수석을 지낸 소득주도성장의 설계자 홍장표 부경대 교수는 요즘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후보로 거론된다. 최근엔 “코로나 세대가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세대의 전철을 밟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며 “모든 청년에게 최소 2년간 일자리를 정부가 책임지고 보장하는 청년일자리보장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랏돈으로, 실패한 소득주도성장 시즌2라도 하라는 건가. 코로나 세대가 정말 걱정이라면 진작 할 수 있는 일은 왜 안 했나. 일자리가 없다지만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에선 쓸 만한 개발자가 없어 난리다. 한 정보기술(IT) 기업 대표는 “중국 알리페이에만 개발자가 1만6000명이다. 우린 네이버와 카카오를 합쳐도 1만 명이 안 된다. 세계 시장에서 어떻게 경쟁하나. 관련 학과 정원을 늘려 달라고 10여 년 전부터 얘기했는데 달라진 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아예 IT 기업들이 돈을 모아 실력 좋은 개발자를 길러내는 세계 수준의 사설 교육기관이라도 만들자는 말들이 판교에서 나온다. 얼마 전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은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의 청산거래 관할권을 두고 수장들까지 나서서 험한 말을 주고받아 ‘밥그릇 싸움’을 벌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작 핀테크 업계는 교통순경을 누가 할 건지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금융위가 만든 이 법안으로 혁신과 청년 일자리 창출을 막는 규제가 하나 더 늘까 걱정이다. 금융과 관련 없는 부수 업무를 할 때도 금융당국에 먼저 신고하고 하라는 건 혁신을 막는 역주행 규제라며 분노한다. 청년들은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당국자들은 제 일이 아니면 귀담아듣지 않는다. 내 일자리만 소중한 ‘일자리 내로남불’ 시대, 무저갱 세대의 분노는 깊어만 간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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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몰랐던 미국 땅 ‘미나리들’[오늘과 내일/박용]

    “어린 딸아이 둘을 데리고 이 땅에 와서 엄청난 고생 끝에 겨우 살 만하니 이런 뚱딴지같은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미국 뉴욕에 무섭게 퍼지던 지난해 5월. 70대 한인 동포 A 씨가 뉴욕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에게 e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2개월 정도 집에서 꼼짝 못 하고 그냥 있다. 설사를 계속하며 걷기도 힘들다. (한인 의사들이 마련한) 항체검사라도 받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A 씨는 30대 초반 미국에 왔다. 마흔 줄에 들어선 딸이 둘이나 있지만 생각이 너무 달라 평소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증상이 있어도 코로나19 진단조차 받기 어렵던 뉴욕에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안타까웠다. 그저 동포 의사들이 운영하는 코로나19 상담 전화번호와 조태열 전 주유엔 대사가 부친 조지훈 시인의 시 중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고 했던 ‘병(病)에게’를 적어 답장을 보낸 게 전부였다. 다행히 A 씨는 지난해 10월 “응급실에서 3번 검사를 받았는데 모두 음성이 나왔다”고 반가운 메일을 보내왔다. A 씨와 같은 이민 1세대들 중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이들이 꽤 있지만, 일부는 힘든 이민 생활 중 가족이 흩어져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코로나19 확진을 받고 병원 응급실에서 숨진 B 씨도 그랬다.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뉴욕주의 무연고 묘지에 묻혔다. 코로나19 위기는 특히 저소득층 한인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뉴욕한인회가 지난해 기금을 모아 어려운 한인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줬는데, 금세 동이 났다. 한인회 관계자는 “‘한인회가 나눠준 식품 쿠폰으로 남편 제사상을 어렵게 차렸다’는 감사 인사를 받고 울컥했다”고 했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과 위협도 늘고 있다. 지난해 5월 말 뉴욕시에서 대규모 약탈 피해가 일어났을 때 한인 가게들도 피해를 입었다. 소호지역에서 옷가게를 하는 한인 2세 조너선 최 씨(25)는 “글로벌 브랜드 매장은 피해를 감수할 수 있겠지만 우린 밤을 새워서 가게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어려운 한인 동포들의 사연은 지금도 메일함에 날아든다. 어린 딸을 데리고 이민을 온 C 씨는 “20대 딸이 4년 전 재생불량성빈혈로 골수 이식을 받았는데 이제 혈액암으로 고생하고 있다. 돈이 되는 건 뭐든지 팔아서 버티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이민 1세대 비중이 줄고 있는 미 한인 사회에서는 일본계처럼 ‘민족성 소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걱정도 크다. 다행인 점은 우리말은 서툴러도 한국인의 문화와 자부심을 잊지 않고 있는 2, 3세가 많다는 점이다. K팝, 한국 화장품 등을 미국에 유통하는 사업가나 할머니에게 배운 한국 음식을 뉴욕에 소개하는 젊은 한인들이다. 한인 이민 가정의 가족애를 다룬 영화 ‘미나리’로 올해 미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리 아이작 정 감독(43)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미국에 뿌리내린 우리들의 ‘미나리들’이다. 한국은 그들을 잊고 살지 몰라도 그들은 그렇지 않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 1일(현지 시간) 정오 미 뉴욕 맨해튼 유엔본부 주변 광장에서 동포 4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운동을 재연했다. 뉴욕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동포들이 기억난다. 미국 땅에 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며 고국을 잊지 않고 있는 미나리들에게 우린 알게 모르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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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소득 주술사들[오늘과 내일/박용]

    37년 전 미국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는 지금 봐도 섬뜩하다. 2029년 미래에서 온 살인로봇 ‘T-800’의 위협에서 주인공을 지키려고 역시 미래에서 온 인류가 맞서 싸운다. 로봇이 초래한 핵전쟁, 살인을 서슴지 않는 무자비한 사이보그는 로봇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켰다. 인류를 핵전쟁으로 몰고 간 ‘스카이넷’이 인간이 발명한 인공지능(AI) 시스템이라는 대목에선 소름이 돋는다. 기계에 대한 인류의 두려움은 꽤 오래됐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에 일자리를 빼앗긴 영국 방직공들은 방직기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 운동)’을 벌였다. 물리학자가 사람 모양의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어 만든 괴물이 등장하는 영국 작가 메리 셸리의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도 이 무렵 나왔다. 최근 기본소득 논쟁은 이런 테크노포비아(기술공포증)에서 비롯됐다.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일자리 없는 미래’는 인류의 숙명이니 받아들이고, 정부가 국민에게 최소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게 미 실리콘밸리에서 나온 기본소득 아이디어다. 그걸 수입해 2017년 대선 쟁점으로 만들고 코로나19 위기에서 재난지원금으로 포장해 되네 마네 하는 게 한국의 기본소득 논쟁이다. ‘일자리 터미네이터’라는 비난과 ‘제2의 러다이트 운동’의 표적이 되고 싶지 않은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이야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기본소득을 지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전에 일자리 없는 미래를 피할 대책을 내놓아야 할 정치인들이 한술 더 떠 당장 해보자고 덤비는 건 무모하다. 세계화와 자동화로 중산층 일자리가 줄고 있다지만 ‘기본소득’이라는 백기를 들 때는 아직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자동화 가능성이 70% 이상인 일자리가 회원국 전체 평균(14%)보다 낮은 약 10%다. 당장은 신기술이 한국에서 급격한 고용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OECD의 판단이다. 로봇과의 일자리 전쟁에서 반격할 시간이 우리에겐 남아 있다는 얘기다. 일자리는 생계유지 도구만도 아니다. 청년들이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수단이다. 올해 국방비(52조 원)의 약 6배인 300조 원을 투입해 전 국민에게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쥐여 줘도 제대로 된 일자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폭등하는 집값과 취업난 속에서 좌절하는 청년들의 분노를 달랠 길이 없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18일 “코로나19 위기가 끝나더라도 수백만 개 일자리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기업 출장의 20%가 영원히 사라지고 노동자의 20%가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미 미 실업자의 3분의 2가 직종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새 일자리와 전직 교육, 직업 훈련프로그램이 필요해진다는 걸 뜻한다. OECD는 신기술의 위협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산성 차이가 큰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세계적으로 실업이 급증하는 코로나19 위기에도 파업하는 대기업 노조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새 시대에 맞는 노사협력 모델이 절실하다. 우리 대학과 직업훈련 프로그램은 어떤가. 새 일자리로 가는 길을 청년들에게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해묵은 노동시장 구조개혁 과제는 놔두고 ‘기본소득 될 때까지’를 무한 반복하는 건 비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겠다는 주술사처럼 터무니없다. 진짜 ‘일자리 터미네이터’는 로봇이 아니다. 피할 수 있는 미래를 피하지 못하게 하고, 가능한 해법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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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F는 ‘거버너 리’까지 알고 있었다[오늘과 내일/박용]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 연례협의단을 만난 경제부처 관료들은 한국 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그들을 보고 놀랐다. IMF 측 인사들은 확장 재정정책과 관련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정치적 논란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거버너 리(이재명 경기도지사)도 안다”고 했다고 한다. 지난해 말 이 지사가 “전쟁 중 수술비 아낀 것은 수준 낮은 자린고비임을 인증하는 것”이라고 기획재정부를 비판한 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논쟁을 벌인 일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선거를 앞두고 쏟아져 나오는 유력 대선주자들의 발언은 국제사회도 주시한다. 재정당국에 호통을 치고 면박을 주는 건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다. 재정과 관련해 근거 없는 일방적 주장도 국제사회의 불신을 키운다. ‘보편적 재난지원금’을 주장하는 이 지사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가부채라는 건 서류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자들은 동의하기 힘든 얘기다. 국가부채가 많은 나라는 신용등급이 낮고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리기도 어렵다. 이자도 많이 물어야 한다. 기업이나 금융회사, 시민들의 먹고살 길이 달린 일을 서류상 존재하는 수치라고 폄하할 순 없다. 이 지사는 “국가부채를 늘리느냐 가계부채를 늘리느냐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가 돈을 안 쓰니 가계가 빚을 내야 한다’는 주장은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부풀어 오르고 신용대출이 가파르게 늘어나는 ‘빚투(빚내서 투자) 시대’에 할 얘긴 아니다. 한국의 가계부채 상당수가 부동산 담보를 끼고 있고 자산가들이 낸 빚이다. 정부가 빚을 내서 돈을 푼다고 해서 줄어들 빚이 아니다. 오히려 생계가 막막해 빚을 내는 사람들을 두텁게 돕는 게 양극화를 막는 길이다. 위기가 터지면 민간부채는 국가부채로 전이된다. 은행이나 기업이 쓰러지면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민간부채를 인수해야 할 수도 있다. 재정이 허약한 국가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남유럽 국가들은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극심한 재정위기를 겪었다. 위기 극복을 위해 단기적으로 돈을 풀더라도 뒷날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건 IMF와 국제신용평가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조언이다. 부채 비율이 선진국보다 낮으니 돈을 더 풀어야 한다는 여당 일각의 주장도 무책임하다. 적정한 국가부채 수준은 없다는 게 정설이다. 안드레아스 바워 IMF 한국미션단장은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간편하게 말할 수 있는 최적 부채 수준은 없다”면서도 “한국의 부채 수준은 60%가 적절하다”고 했다. 위기가 닥치면 이것이야말로 장부상 수치에 불과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땐 지금보다 재정 상황이 훨씬 나았는데도 해외 투기세력의 공격에 시달렸다.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올해 47.3%에서 3년 뒤 IMF가 권고한 60%에 육박하는 58.3%까지 상승한다. 코로나19 재확산, 경기 회복 지연, 급격한 고령화 등을 고려하면 이마저도 안심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 믿음을 주는 탄탄한 국가재정이야말로 경제위기를 막는 백신이다. 선거에 눈이 멀어 개방경제인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상대가 있는 경기를 하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자신감이 지나쳐 IMF 등의 권고를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무시할 일도 아니다. 호통을 쳐서 기재부 공무원을 주눅 들게 하고 국내 여론을 움직일 순 있어도 해외 투자자들의 마음까지 돌릴 순 없다. 안타깝게도 위기의 순간 그들은 한국 정치인이 아니라 IMF와 국제신용평가사 등의 조언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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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의 펀드 투자도 다르지 않다[오늘과 내일/박용]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펀드 투자로 대박을 냈다. 2019년 8월 일본의 경제 보복에 맞서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필승코리아 펀드에 5000만 원을 투자했더니 90% 넘는 수익이 났다. 청와대에 따르면 대통령은 이 수익금에 신규 자금을 보태 ‘한국판 뉴딜펀드’ 5개에 1000만 원씩 넣기로 했다. 물론 대통령의 ‘투자 대박’이 불편한 이들도 있다. 한 누리꾼은 이 기사에 “이익공유 하실 거죠?”라고 댓글을 달아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의 펀드 투자는 정책 홍보 성격이 크지만 투자는 투자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주가가 폭락할 때도 펀드를 깨지 않고 버티며 만든 투자 수익을 새 펀드에 넣는 걸 문제 삼을 순 없다. 손실을 감수하고 번 투자 수익을 공유하라는 건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원칙에도 맞지 않고, 경제 주체가 자기 책임하에 자유롭게 경쟁하고 이익을 내는 시장경제 원칙에도 어긋난다. 이익을 냈으니 망정이지 손실을 냈다면 그 손실마저 공유해 달라고 요구할 건가. 그렇지 않다면 이익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투자 수익을 코로나19 사태로 손해를 본 이들과 공유하면 세금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은 어떤가. 세금도 결국 누군가가 낸 돈이고, 도움이 꼭 필요한 저소득층이나 국가사업으로 가야 할 돈이다. 재정으로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대신하라고 하고 세금으로 다시 인센티브를 주는 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양극화 완화 해법으로 ‘이익공유제’를 꺼냈다. 문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코로나 승자’ 기업들이 출연해 기금을 만들어 고통받는 계층을 도울 수 있다면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거들었다. 대통령에게 이익공유를 요구한 누리꾼이 괘씸하다면 정치권이 기업들에 이익공유를 요구하는 것도 부당하다고 말해야 정직하다. 내가 번 돈은 괜찮고, 남이 번 돈만 수상하다는 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이런 이중 잣대론 국민의 공감을 사지 못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등장했던 변종 이익공유제들도 그래서 흥행하지 못했다. 정치권의 이익공유제 재탕은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일이며 선거를 앞둔 책임 떠넘기기다. 일자리를 지킨 공무원과 국회의원보다 정부가 요구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한 음식점, 헬스장, PC방 사장님들과 이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본 건 사실이다. 이들을 선별하고 집중 지원하는 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요구한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다. 할 일은 제대로 안 하고 민간이 알아서 할 일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지나친 간섭이다. 세금은 어디에서 걷어 어떻게 쓴다고 법으로 규정한다. 이익공유 제안은 어디까지 이익이고 어떤 이익을 나눠야 할지 모호하다. 여당에서 쿠팡, 카카오페이 등 플랫폼 기업을 승자로 거론하지만 여태 투자를 하느라 아직도 적자다. 이익공유제의 타깃이 된 금융권도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상환 유예에다 대출 부실 등을 대비한 충당금을 쌓으며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이런 투자 위험과 손실은 쏙 빼놓고 돈을 번 것만 거론하면 당사자들은 생살을 뜯기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기업들이 번 이익을 사회와 공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배당과 급여로 사회에 이익을 돌려주도록 유도하는 정공법뿐이다. 전체 일자리의 10%에 육박하는 공공부문은 코로나19 위기에도 몸집을 불리고 있다. 위기 속에서 세비까지 오른 의원들이야말로 진정한 승자다. 세비 반환 등으로 먼저 이익을 나눈다면 국민들이 모처럼 박수를 칠 것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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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들의 ‘코리아 프리미엄’, 어디쯤 있나[오늘과 내일/박용]

    문재인 대통령은 5일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저평가) 시대가 끝나고 코리아 프리미엄(고평가)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 방역에 성공하고 2년 연속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대됐으니 코리아 프리미엄을 언급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일렀다. 지금도 시민들은 상극인 방역과 경제를 잡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강화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헬스장 노래방 당구장 등 자영업자들이 들고일어나는 마당에 ‘코리아 프리미엄’ 타령까지 들어줄 여유는 없어 보인다. 해외에서도 한국의 방역 실력을 인정하지만 프리미엄까진 아니다. ‘방역 프리미엄’이 그렇게 대단했다면 외국인투자가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주가가 바닥을 친 지난해 3월 19일부터 이달 6일까지 13조 원 넘게 한국 주식을 팔진 않았을 것이다. 구호도 참신하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7월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 넉 달 전 라디오·인터넷 연설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돼 코리아 프리미엄이 1%만 높아져도 약 5조 원의 이익이 발생한다”고 했다. 2013년엔 “지금보다 국격이 높은 때는 일찍이 우리 역사에서 없었다”며 ‘코리아 프리미엄’을 주장했다. 그 당시에도 믿지 못한 이들이 꽤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2016년 3월 한국 문화와 우수문화상품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해 “‘코리아 프리미엄’을 창출해야 한다”며 “그 해답을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에서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자 ‘G20’에서 ‘창조경제’로 방점이 바뀐 것이다. 현 정부에선 누구도 창조경제를 입에 담지 않는다. 시장에선 다른 얘길 한다. ‘코리아 프리미엄’을 외친 두 대통령이 감옥에 가고 정부가 시장과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오히려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꼽는다. 얼마 전 만난 한 전직 고위 경제관료는 “홍콩의 외국인투자가와 만났는데, ‘북한 핵과 기업 지배구조 외에도 규제를 쏟아내는 한국 정부가 오히려 디스카운트 요인’이라고 하더라. 가슴이 답답했다”고 말한다. 해외 언론이 인정하는 ‘코리아 프리미엄’은 따로 있다. 반도체 배터리 전자 자동차부터 방탄소년단 등을 배출하는 민간 부문의 역동성, 금융위기를 막아낸 탄탄한 국가 재정, 한마음으로 외환위기 국난을 극복해낸 한국인의 힘을 꼽는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상쇄하던 이 강점들이 무뎌지는 게 오히려 걱정이다. 기업들은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에 경제 3법(상법 공정거래법 금융복합기업집단감독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쏟아져 나오는 규제로 힘들다고 한다. 코로나19 봉쇄령이 내려진 미국에서 가전제품 특수가 생겼는데도 주 52시간 근무제에 묶여 탄력적으로 생산을 늘리지 못한다고 발을 구르던 한 기업인의 모습도 떠오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방패막이가 돼준 탄탄한 국가 재정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 등 정치권의 선심 공세에 무너지고 있다. 술 취한 주인이 집사에게 곳간 열쇠를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형국이다. 지지자들만 보는 편 가르기 정치는 해외 언론이 부러워한 금 모으기 운동의 주역인 시민들을 분열시킨다. 배우 조승우가 나오는 은행 광고에 이런 대사가 있다.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야, 올라야지! … 생각만으론 아무것도 아냐.” 실행 없는 구호는 말잔치일 뿐이다. 코리아 프리미엄을 인정받으려면 있는 강점은 살리고 약점은 서둘러 보완해야 한다. 대통령들의 반복되는 ‘코리아 프리미엄’ 구호에 국민들은 어리둥절하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 202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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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년 봄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오늘과 내일/박용]

    7월 중순 미국 뉴욕 브루클린다리에서 마주한 맨해튼 야경은 스산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지며 관광객들로 붐비던 다리는 인적이 끊겼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한 불빛을 내뿜던 맨해튼 마천루는 재택근무로 직원이 줄고 주민들이 떠나자 빛을 잃었다. “이번 여름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날 브루클린에서 공사장 벽에 분필로 쓴 낙서를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코로나19로 하루에 수백 명씩 사망자가 나오던 지난봄 뉴욕 시민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두려움의 시간을 보냈다. 정부와 정치인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30만 명의 코로나19 사망자를 낸 미국의 방역 실패는 자만이 부른 ‘인재’였다. 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확산 초기 ‘미국이 전염병 방역 경쟁력 1위’라는 조사 결과를 흔들며 “미국은 안전하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최고라던 미 질병관리본부(CDC)는 코로나19 진단키트조차 제때 보급하지 못해 전염병 대응의 기초인 추적과 격리조차 수행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라던 미국 의료 시스템도 밀려드는 환자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TV에선 증상이 심각하지 않으면 병원에 오지 말라는 안내방송까지 나왔다. 마스크조차 부족해 당국은 ‘얼굴가리개’를 써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였다. 에볼라 바이러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를 막아낸 미국의 성공 경험은 코로나19를 과소평가하고 신속한 대응을 막는 ‘성공의 덫’이 됐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마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선거에서도 졌다. 한국은 1, 2차 확산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백신 확보에 뒤처지면서 미국처럼 ‘성공의 저주’를 피하지 못한 모습이다. 정부는 “(백신을) 먼저 접종하는 국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한두 달 관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지만 백신을 확보해놓고 신중하게 접종하는 것과 없어서 맞지 못하는 건 다른 문제다. 세계는 이미 ‘포스트 백신’ 시대로 가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백신을 접종한 사람만 출근을 하게 하는 방안을 거론하고 프랑스는 백신을 접종하지 않으면 대중교통과 공공시설을 제한하는 법안까지 준비하고 있다. 미국이 내년 4월 누구나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백신 오픈 시즌’에 들어가면 백신 접종, 항체 형성, 음성 여부가 공공시설, 대중교통은 물론 세계를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이 되는 ‘백신장벽’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백신 확보만큼 ‘백신 없는 겨울’ 방역도 중요하다. 정부가 백신 확보에 전력을 기울여도 현재로선 백신이라는 외투 없이 올겨울을 나야 할 형편이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노약자와 집단 요양시설의 감염을 막아 중환자실 입원율과 사망률을 낮추고 의료 인프라 붕괴를 막는 ‘수직적 거리 두기’와 역학조사 인력 확충, 병상 확보 및 생필품 공급 체계 등 겨울방역 대책을 재점검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 한다. 백신을 맞지 않고 일하는 의료진과 필수 인력에 대한 지원책이 충분한지도 점검해야 한다. 걱정스러운 건 아직도 방역에 집중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모습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정부가 공공의대 문제로 의료진, 의대생과 각을 세우고 실업의 1차 저지선인 기업을 개혁 대상에 올려놓는 건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내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서려는 정치인들에게서 정권 심판이나 권력 연장의 의지는 꿈틀대지만 바이러스 위협에서 도시와 시민을 보호하겠다는 결기와 약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내년 봄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정치인들과 정부가 심기일전해 답할 차례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 20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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