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기획재정부나 공정거래위원회 등 경제 관련 부처의 2급 이상 고위 공무원은 금융권뿐 아니라 관련 공공기관 취업이 힘들어진다. 퇴직 공직자 취업이 제한되는 기관이 기존 3906곳에서 1만3043곳으로 3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취업제한 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길어진다. 공직자윤리법상 퇴직 공직자의 취업제한 대상 기관에 사립대학을 포함시키기로 하면서 교육부 고위공무원 역시 퇴직한 뒤 사립대 총장으로 가는 게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안전행정부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대통령 담화 후속조치로 이 같은 내용의 공직자윤리법과 정부조직법,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개정안을 29일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개정안에 따르면 퇴직 공직자 취업제한 기관은 기존의 사기업은 물론 안전감독 인허가 규제 조달과 직결된 공직유관단체, 대학 등 학교법인, 종합병원과 관련법인 등이 추가됐다. 해당 기업의 기준도 ‘자본금 50억 원, 연간 거래액 150억 원’ 이상에서 ‘자본금 10억 원 이상, 연 거래액 100억 원 이상’으로 확대된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4급 이상 공무원이 퇴직일로부터 2년간 취업이 제한되는 기관은 일정 규모 이상의 사기업체, 법무법인, 회계법인, 세무법인 등이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이 규정에서 빠져 있어 교육부 출신 공무원들이 퇴직한 뒤 대학 총장이나 보직교수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총장, 부총장, 기획처장 등 보직교수까지 취업이 제한될 것으로 알려졌다. 유사시 신설되는 국가안전처 장관이 중앙재난대책본부장을 맡고, 대형 재난 땐 국무총리가 중앙재난대책본부장 권한을 행사한다. 현장 지휘의 경우 육상은 소방관서, 해상은 해양안전기관이 맡는 것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재난 현장에서 긴급 구조를 할 때 소방서장이 구조작업에 참여한 경찰과 군을 지휘하게 된다.신광영 neo@donga.com·전주영 기자}

2009년 말 이전에 공직생활을 시작한 공무원들의 연금 수령 개시 시점을 현재 만 60세에서 61세 이후로 늦추는 방안이 추진된다. 이에 따라 과거 공무원 연금체계 개편 과정에서 열외를 인정받았던 공무원들의 기득권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27일 기획재정부와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정부는 앞으로 국무총리실과 관련 부처들이 공무원 연금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현재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편 방안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지탄의 대상이 된 공직사회에 대한 고강도 개혁안이자 재정상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타개책이다. ○ 94만 공무원 연금수령연령 조정 정부는 만 60세로 돼 있는 2009년 12월 이전 공무원 임용자 94만 명의 연금 수령 개시 시점을 늦추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2010년 1월 이후 임용자(13만 명)의 수령 개시 시점은 이미 만 65세로 늦춰져 있다. 2009년 말 이전 임용자들이 먼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5년이나 연금을 오래 받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데다 전체 공무원의 88%인 이들의 연금에 손을 대지 않으면 매년 발생하는 공무원연금기금의 막대한 적자를 줄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방안은 공립학교 교사를 비롯한 전체 공무원연금 가입자 107만 명의 노후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도 개편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2009년 말 이전 임용된 공무원이 사망할 때 유가족에게 지급되는 유족연금액도 10%포인트가량 감축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2009년 말 이전 임용된 공무원이 사망할 경우 유가족이 받는 유족연금은 원래 받던 퇴직연금의 70%로 2010년 이후 임용자의 유족연금 지급률(60%)보다 높다. ○ 적자연금 악순환 고리 깰 필요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혁에 나서는 것은 연금 지출이 수입보다 많은 만성적자 상태를 타개하지 않으면 나라 곳간이 휘청거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공무원연금은 1960년 도입된 뒤 줄곧 수입이 지출보다 많은 흑자를 유지하다가 1993년부터 지출이 수입보다 많은 적자로 돌아섰다. 연금적립금이 바닥나도 정부가 지급을 보장하도록 공무원연금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에 적자폭이 커질수록 국가가 받는 충격도 커진다. 작년 한 해 은퇴한 공무원들이 받은 공무원연금은 월평균 219만 원으로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84만 원)의 2.6배였다. 공무원들이 매달 받는 평균 연금액은 1990년에만 해도 57만 원이었지만 1999년 100만 원으로 올라선 뒤 매년 증가세를 보여 2011년에 200만 원 선을 넘어섰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령액 때문에 공무원은 퇴직 후 받는 연금으로 재직기간 소득의 62.7% 수준을 유지할 수 있지만 국민연금 가입자는 은퇴 전 소득의 40% 정도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더 내고 덜 받는’ 구조개혁이 여러 차례 이뤄진 반면에 공무원연금 개혁은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했던 결과다.○ “밀실서 나와 공개 논의해야” 정부는 이번 공무원연금 개혁이 과거와 다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009년 개혁 당시 먼저 임용된 공무원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해준 것이 패착이었던 점을 인식하고 공직 입문 시기를 배제한 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한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연금수급 시점을 늦추고, 수급 금액을 현행보다 내리는 한편 공무원연금이 보장하고 있는 복지 혜택을 줄이는 방안까지 포괄적으로 개혁 테이블에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국민연금에 비해 공무원연금 개혁이 느리게 진행돼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투명한 절차에 따라 강도 높은 개혁이 추진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윤석명 보건사회연구원 연금연구센터장은 “정부가 관련 정보를 제대로 밝히지 않아 연구자조차 공무원연금에 대한 분석이 힘든 상태”라며 “공개적으로 공무원연금 재정상태를 정확하게 계산해 개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세종=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세월호 사고에서 해양경찰청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일 대국민 담화에서 공식 사과한 뒤 곧바로 해경 해체를 선언했다. 다양한 대책 가운데 첫 번째 카드로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관재(官災) 논란을 빚은 부처들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번 정부조직 개편 작업은 유민봉 대통령국정기획수석이 주도했다. 유 수석은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에도 정부조직 개편 작업을 맡았다. 유 수석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최대한 빨리 국회에 제출하겠다”며 속도전을 강조했다. 관료들의 집단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미다.○ 공중분해된 해경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초동대처를 제대로 못해 ‘골든타임’을 날려버린 해경은 직격탄을 맞았다. 박 대통령은 그 원인을 “구조·구난 업무는 사실상 등한시하고 수사와 외형적 성장에 집중해 온 구조적 문제가 지속돼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로써 1953년 내무부 치안국 소속으로 출발해 1996년 경찰청에서 분리된 해경은 18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해경의 수사·정보 기능은 다시 경찰청으로 편입되고 해양구조와 해양경비 업무는 신설되는 국가안전처로 이관된다.○ 껍데기만 남은 안전행정부 공직사회는 해경 해체보다 안행부의 기능 조정에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안행부의 핵심 기능인 인사와 조직 업무를 신설될 총리 산하 행정혁신처로 이관토록 했기 때문이다. 안전 업무는 국가안전처로 통합돼 안행부에는 행정자치 업무만 남게 됐다. 이에 따라 안행부는 이름도 바꿔야 한다. 안행부 역시 사실상 해체된 셈이다. 이렇게 되면 안행부의 현행 6개 실·본부는 3개로 줄어든다. 어느 부처나 있는 기획조정실을 빼면 안행부 고유의 업무는 지방행정실과 지방재정세제실 등 2곳뿐이다. 공직사회의 ‘갑(甲)’으로 통하던 안행부의 해체는 정부 부처에 두 가지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먼저 전체 부처를 개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행부 해체를 본보기로 삼아 각 부처가 자체 개혁에 나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안행부의 기득권을 빼앗음으로써 동요하는 관료사회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해수부 기능도 축소 해양수산부 역시 기능이 대폭 축소된다. 해수부의 해상교통관제센터(VTS) 업무는 국가안전처로 통합된다.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시 해수부 관할의 제주 VTS와 해경 관할의 진도 VTS가 이원화돼 신속한 초동대처에 실패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이럴 경우 해수부의 남은 업무는 해양산업 육성과 수산업 보호, 진흥 등으로 국한된다. 안행부와 해수부에서 잘려 나온 기능은 총리 산하 안전 업무를 총괄하는 국가안전처와 공공기관 인사와 조직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혁신처로 옮겨 간다. 문제는 조직개편이 관료들의 자리 이동으로 끝날 수 있다는 점이다. 안행부의 인사담당자들이 그대로 행정혁신처로 옮겨간다면 조직개편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이 민간의 채용을 대폭 확대해 관료사회의 행정고시 기수 문화를 깨뜨리고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이재명 egija@donga.com·신광영 기자}

▼ 생일날 제자들과 케이크 장난친 ‘남쌤’ ▼학생들 대피시킨 남윤철 교사점심 직후 나른한 5교시, 영어담당 남윤철 선생님이 칠판에 ‘while’이라고 쓰며 물었다. “이 단어 무슨 뜻이지?” “∼하는 동안요.” “딱 선생님 단어네. 선생님도 동안(童顔)인데.” 남 선생님은 졸고 있는 제자를 깨울 때도 웃기려 공을 들였다. 출석을 부를 땐 이름 석 자만 읊고 넘어가진 않았다. ‘애들이 말장난을 만들어와 평가를 받고 간다. 그중 최우수작. 예수님이 제자와 쇼핑하다 맘에 드는 옷이 있어 하는 말… 예루살렘(얘로 살 거야라는 뜻).’(2011년 10월 페이스북 게시글) 남 선생님이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맡는 날 학생들은 평소보다 많이 남았다. 어느 땐 느닷없이 들어와 ‘1’을 외쳤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2’ ‘3’ 이어가면 주머니에서 떡을 꺼내줬다. 그의 생일날 학생들은 교단으로 몰려가 케이크 생크림을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그는 생크림 범벅인 채로 다시 제자들 얼굴을 비비는 스승이었다. 그는 수업시간 학생들 질문에 길게 답하는 편이었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남쌤은 항상 기본부터 설명해주셨다. 다른 선생님은 ‘다 알겠지’ 하고 건너뛰는 부분을 쌤은 지나치지 않았다”고 했다. 제자들 성적이 50점에서 55점으로 오르든, 80점에서 100점으로 오르든 그는 똑같이 말했다. “많이 올랐네.” 교실에서 그의 별명은 ‘송일국’이었다. 한 여학생은 그가 ‘○○아, 생일 축하한다. 요즘 영어공부 열심히 하던데 계속 열심히 하고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어’라고 써준 메모를 1년 넘게 지갑에 넣고 다녔다. 미혼의 아들을 떠나보내던 날 남 선생님의 어머니는 “의롭게 갔으니 됐다. 아이들 놔두고 살아나왔어도 못 견뎠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학생들이 많이 희생돼) 아들 장례 치르는 것조차 미안하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남 선생님의 발인 직전 그의 아버지는 “사랑한다. 내 아들. 잘 가거라. 장하고 훌륭한 내 자식”이라고 다 들리게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엄하지만 맞장구 잘 쳐주던 ‘왕언니’ ▼아이들 먼저 내보낸 최혜정 교사지난해 단원고에서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최혜정 선생님은 올해 담임을 맡은 2학년 9반 학생들과 일곱 살 차였다. 아이들이 다른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 “네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고 공감해주는 ‘왕언니’ 같은 교사였다. 최 선생님의 교무일지에는 제자들의 가정형편이나 말할 때 특징 같은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카메라를 장만해 틈나는 대로 제자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의 카카오스토리에는 학생들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다. 최 선생님은 야간 자율학습 때 휴대전화를 만지는 아이들을 보면 불쑥 다가가 ‘핸드폰!’ 하고 인상을 쓰며 엄하게 보이려 했다. 하지만 친구들한테는 “내가 어린 걸 알면 무시할까 봐 나이는 비밀로 하는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강한 척해도 속이 여리다며 친구들은 그를 ‘외강내유(外剛內柔)형’이라고 놀렸다. 생일이었던 지난해 11월 26일 한 제자가 그에게 편지를 건넸다. ‘제 생일 때 주신 핸드크림 잘 쓰고 있어요. 나이 차가 별로 안 나 편한 것 같아요. 선생님, 학기 마지막 날엔 나이 알려주세요!’ 최 선생님은 맞벌이하는 부모 대신에 두 동생 아침밥을 챙겨주는 맏이였다. 동생들 진학 상담도 전담했다. 사촌동생들에게도 대입 자기소개서를 보내라고 해 일일이 첨삭했다. 고모에게는 뱃살을 만지며 ‘언제 뺄 거냐’고 농담을 하고, 삼촌이 담배를 피우면 엉덩이를 툭 차며 ‘내가 끊으라고 했지’ 하고 너스레를 떨던 조카였다. 아버지 최재규 씨(53)는 “학교 다닐 때 용돈 30만 원을 주면 5만 원은 저축하고 돈을 남겨서 나한테 등산 장비를 사주곤 했다”고 말했다. 최 선생님은 집에서 부모와 복분자주 마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 최 씨는 지난달 전북 고창에 놀러갔다가 딸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면 함께 마시려 특산품인 복분자주를 여러 병 사왔다. 이 복분자주는 지난달 19일 고인의 빈소 영정 옆에 놓여 있었다.임현석 기자 ihs@donga.com ▼ 학교에선 ‘딸바보’… 집에선 ‘제자바보’ ▼선실 다시 내려간 박육근 교사8일 밤 12시 박육근 선생님의 빈소에 20대 청년이 한쪽 다리를 절며 들어왔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박 선생님의 제자였다. 장애가 있었던 이 제자는 영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돼 찾아오면 웃으며 맞아준다고 하셨잖아요. 저한테 ‘선생님이 되라’고 먼저 말씀하셔 놓고 약속을 깨면 어떡해요.” 몸집이 큰 한 제자도 영정 앞에서 입을 열었다. 용인대 태권도 선수였다. “선생님 저 경기 있어서 공항 가는 길이에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학교에서 싸움을 자주 했던 이 제자는 박 선생님의 조언으로 태권도를 시작했다고 했다. 제자들은 토요일 오후 운동장에서 박 선생님과 축구 했던 추억을 많이 떠올렸다. 말썽부린 아이들에게 박 선생님이 내건 벌칙은 ‘토요일에 나랑 공차기’였다. 학생부장을 오래 맡아 사달이 나면 경찰서에 달려가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한 학부모는 “선생님이 학교폭력 대책 회의 건으로 저한테 전화할 때마다 ‘죄송하다’며 몸을 낮추셨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박 선생님의 친형 박춘근 씨(61)는 “육근이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골에서 어렵게 성장해 넉넉지 않은 집 아이들을 많이 챙겼다. 사고 친 애들 직접 합의해 준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했다. 한 단원고 학생은 “선생님이 형편이 어려운 친구에게 ‘돈 안 내도 수학여행 갈 수 있으니 걱정마라’고 여러 번 말했다”고 전했다. 집에서 박 선생님은 두 딸에게 ‘서운하다’는 불평을 듣는 아버지였다. 아내는 “학생들한테 하는 만큼만 애들한테 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박 선생님은 ‘딸 바보’로 통했다. 학생들 앞에서 “우리 둘째딸이 너희들과 동갑인데…”란 말을 습관처럼 했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처음에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딸 얘기를 꺼냈다가 결국 매번 딸 자랑으로 끝났다”고 말했다.김성모 기자 mo@donga.com}

세월호가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보다 남을 먼저 구하려 한 의인들은 평소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들은 ‘슈퍼맨’이 아니었습니다. 별다른 구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고 대단한 의협심을 발휘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변 사람을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던, 기본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생의 마지막 순간 의로운 선택을 한 분들을 취재해 왔습니다.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 못지않게 의로운 희생자들의 삶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 역시 살아남은 이들의 중요한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박지영 정현선 김기웅 안현영 양대홍(이상 승무원), 남윤철 박육근 최혜정(이상 교사), 양온유 정차웅 최덕하(이상 학생), 이광욱(잠수사) 등 12명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의 부모님, 친구, 제자와 스승 등 주변 인물들을 취재하면서 취재팀은 고인들의 진솔했던 삶의 조각들을 맞춰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등산복은 척척 사도 자기 물건은 단돈 1만 원에 벌벌 떠는 딸, 뒷주머니에 공구를 꽂고 다니며 배 안의 고장 난 곳을 척척 고치던 여(女)선원, 홀어머니와 포장마차를 하며 익힌 솜씨로 틈틈이 친구들에게 요리를 해주던 청년, 체중 102kg에 검도 유단자지만 딸 같았던 ‘애교쟁이’ 아들, 유머가 무기였던 미남 총각 선생님, 집에선 무뚝뚝해도 학교에선 딸 자랑으로 말을 맺던 아버지였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유족들은 “의롭게 죽고도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있을 텐데 왜 우리 아이만 의인이냐” “아직 시신도 못 찾은 가족들이 있는 상황에서 우리만 주목받는 건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12명에 포함되지 않은 한 희생자의 어머니는 “살아있는 목격자가 없을 뿐 우리 아이도 살신성인했을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동아일보는 12명을 시작으로, 뜨겁고 의롭게 살다간 세월호 희생자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려 합니다. 유족이나 지인이 요청해 주시면 고인의 생전 행적을 경건한 자세로 되짚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준 세월호의 의인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김성모 기자}

▼ 아버지 돌아가신 뒤 대학 휴학하고 가장 역할 ▼학생들 먼저 탈출시킨 女승무원 박지영씨최성덕 할머니(75)는 지난달 16일 손녀의 사망 소식에 “오늘이 지 아비도 그렇게 된 날”이라며 통곡했다. 3년 전인 2011년 4월 16일, 박지영 승무원의 아버지 박유식 씨(당시 45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반년 뒤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자 박 승무원이 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가장이 됐다. 대학 1학년 때였다. 이듬해 학교를 휴학하고 PC방과 옷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에게 사촌오빠 박현준 씨(30)가 여객선 승무원 일을 권했다. 박 씨는 “고민하던 지영이가 월급 200만 원에 숙소, 유니폼, 밥이 공짜로 나와 돈 쓸 일도 없다고 하니까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박 승무원은 스무 살이던 2012년 봄 세월호의 쌍둥이선 오하마나호를 타기 시작했다. 얼마 뒤 세월호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 선원이 드문 배 안에서 그는 ‘남자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오하마나호 고홍근 사무장은 “한 승객이 뱃멀미를 했는데 지영이가 밤을 꼬박 새우며 아침까지 옆에서 얼음찜질하고 혈압 재면서 간호했다”고 말했다. 박 승무원의 친구는 “지영이가 엄마 등산복 살 땐 몇십만 원씩 쓰는데 자기 옷은 1만 원짜리 티셔츠 살 때도 망설이다 안 샀다”고 했다. 다른 대학친구 A 씨는 “지영이가 지난해 보금자리주택에 당첨돼 월급을 꼬박꼬박 부었다”고 말했다. 박 승무원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경기 시흥시의 42.9m²(13평) 남짓한 임대아파트에 살았다. 하루는 인천항에 자주 가던 사촌오빠 박 씨가 정박해있는 세월호에 올라탔다. 사고 3주 전이었다. 사촌오빠가 “할 만하냐”고 물었을 때 박 승무원은 “힘들면 이 일 하겠어? 근데 배가 너무 흔들려서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고 무서워”라고 말했다. 남편 잃은 지 3년도 안 돼 큰딸을 빼앗긴 박 승무원 어머니의 카카오스토리에는 바다에 배가 떠 있는 사진을 배경으로 ‘늘 안녕과 행운이 가득하길’이란 문구가 있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여학생들 다칠까봐 날아오는 공 얼굴로 막아 ▼학생들 구하러 식당 달려간 승무원 안현영씨안현영 씨는 열두 살 때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가족들은 발을 굴렀다. 3시간이 지나 나타났다. 옷이 땀에 절어 있었다. 어머니 황정애 씨(55)가 “집에도 못 가고 걱정했잖아” 하고 호통을 치자 그가 말했다. “어떤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기에 집까지 들어다 드렸어요. 저희가 집에 가는 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안 씨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 안규희 씨(57)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들 뺨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안경 파편이 얼굴에 박혀 있었다. 남학생들이 장난을 친다며 여학생들 쪽으로 축구공을 찼는데 공을 막아서다 얼굴에 맞은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됐는데도 ‘괜찮아’ 하더라고요.” 그는 중고교 동창들과 만든 친목 모임 ‘MUR(망우리)’에서 인맥의 중심이었다. 친구 김재홍 씨(28)는 “현영이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똑같지”라고 답한 뒤 상대방 얘기를 물었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듣고 반응해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그런 그가 냉정해질 때가 있었다. 안 씨는 대학 시절 호프집, 액세서리 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들이 찾아가 ‘서비스 안주 좀 달라’ ‘액세서리 하나만 달라’고 하면 안 씨는 “안 된다. 내가 돈 줄 테니 그걸로 사라”고 잘랐다. 김 씨는 “호프집 카운터에 있는 컴퓨터를 잠깐만 쓰자고 했더니 ‘외부인은 못 들어가는 게 원칙’이라고 해 섭섭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사고 사흘 전, 그는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부탁을 했다. 스무 살 이후 내내 돈을 벌어 쓴 안 씨는 부모에게 작은 부탁도 거의 하지 않았다. “배드민턴 라켓 살 수 있는 곳 좀 알아봐 주세요. 수학여행 가는 애들이 14시간 배타고 가다 보면 심심해하거든요. 배에 몇 세트 있으면 애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드라이버 갖고 다니며 수리 척척 하던 女장부 ▼탈출기회 마다하고 남은 女승무원 정현선씨3년 전 불꽃놀이가 한창이던 오하마나호 갑판. 한 승객이 불꽃놀이를 구경한다며 무대 앞 바리케이드 위에 앉아 있다가 뒤로 자빠졌다. 깜짝 놀란 정현선 씨는 기절한 승객에게 응급처치를 한다며 뛰어가다 넘어졌다. 이 일로 발목 인대가 끊어져 3개월간 깁스를 했다. 승객은 기절한 게 아니라 만취해 누워있었다. 정 씨는 다음 날 절뚝거리며 나타나서는 ‘헤헤헤’ 웃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뭔 일만 생기면 일단 뛰고 보는 사람”으로 통했다. 정 씨는 대학을 휴학하고 스무 살에 배를 탔다. 오하마나호 카페 직원이던 어머니가 병으로 일을 그만두자 대를 이어 배에 올랐다. 아버지는 정 씨가 초등학생일 때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언니 윤선 씨(35)는 “집 사정을 생각해 일을 일찍 시작했다. 당시 인천∼제주를 오가는 배가 하나뿐이었는데 그 배를 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했다. 배에서는 ‘정 장군’으로 불렸다. 옷 뒷주머니에 몽키 스패너나 드라이버를 꽂고 다녔다. 수리할 곳이 보이면 바로 공구를 꺼냈다. 담요는 15장씩 한 번에 날랐다. 동갑 연인인 아르바이트생 김기웅 씨가 술 상자를 옮기고 있으면 “한 번에 두세 상자씩 옮기라”고 말하며 아웅다웅했다. 동료들은 정 씨에게 ‘해군 부사관을 하면 잘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부사관 시험을 두 차례 쳤다 떨어졌다. 정 씨는 “배 타는 게 천직인가 봐요”라며 웃곤 했다. 지인들은 정 씨가 원피스와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천생 여자지만 배에 오르면 대장부가 된다고 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침몰 당시 한 발짝만 옮기면 탈출할 수 있는 3층 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연신 학생들을 내보냈다. 정 씨를 마지막으로 본 화물기사는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하던 도중 정 씨와 눈이 마주쳤다.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눈빛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손효주 hjson@donga.com·임현석 기자▼ 친구들 집에 불러 직접 요리해주는 것 좋아해 ▼애인과 끝까지 남은 아르바이트생 김기웅씨학창 시절부터 김기웅 씨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손수 만든 요리를 먹이는 걸 좋아했다. 김 씨의 고등학교 동창인 한승호 씨(27)는 “기웅이에게 처음 들은 말이 ‘우리 집에 삼겹살 있으니까 놀러와’였다”고 했다. 이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김 씨는 집에 혼자 있는 일이 많아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불렀다. 시간이 늦어지면 자신의 방에서 자고 가라고 한 뒤 자신은 늘 거실에서 잤다. 김 씨 방은 두 명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김 씨 상사였던 선상 불꽃놀이 이벤트 업체 김상석 대표(41)는 “기웅이가 포장마차 일을 하던 어머니를 줄곧 도와서 그런지 곱창볶음 같은 요리를 잘했다”고 했다. 김 씨는 배에서도 한번 요리를 하면 10인분 넘게 해서 나눠 먹었다. 집에 있는 묵은지, 곱창 같은 재료들을 늘 챙겨왔다. 김 씨는 불꽃놀이 담당이었지만 주방 일을 거들어 주방 아주머니와도 친했다. 김 씨는 ‘빌게이츠’로도 불렸다. 기계 지식에 해박해 컴퓨터를 잘 고쳤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컴퓨터 살 때는 김 씨를 먼저 찾았다. 컴퓨터 용도와 예산을 말해주면 김 씨는 최저가로 부품을 구해와 컴퓨터를 뚝딱 조립해냈다. 친구들은 올해 초 친목 모임에 김 씨를 불렀다. 모임 회비는 10만 원이었다. 김 씨는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회비가 부담되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고…. 생활비를 벌려면 배를 타야 돼서 참석을 못 하겠다”며 사과했다. 친구들은 “돈 안 받을 테니 걱정 말라”며 가까스로 김 씨를 설득해 인천 을왕리에 갔다. 이날 저녁 김 씨는 동갑내기 연인 정현선 씨와 통화하며 “일을 거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돌아와서는 친구들에게 “올해는 꼭 취업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인천대 도시건설공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 씨는 올해 연인인 정 씨와 결혼할 예정이었다.임현석 기자 ihs@donga.com▼ 취객 달래고 변기 수리… 세월호 해결사 ▼학생 구하러 간 양대홍 사무장세월호 사무장 양대홍 씨의 어릴 적 꿈은 개그맨이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익살을 부려 남을 웃게 하고 싶었다. 그 꿈을 배에서 이뤘다. “얼굴 둥그스름하고 재밌고 여기저기 나타나던 그 직원요?” 배를 탔던 승객들이 양 씨의 실종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양 씨는 웃음을 머금고 잰걸음으로 배 안을 돌아다녔다. 그가 농담을 던지면 승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비스 책임자로 고위 승무원이었지만 변기 수리, 전기배선 공사, 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밤 12시에야 업무가 끝나지만 로비에서 잠든 승객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술 취한 승객 말상대를 하느라 오전 3시까지 일했다. 오하마나호 라이브 가수로 일했던 형 석환 씨(48)는 “인천에서 제주까지 가는 14시간 동안 동생은 승객들과 정이 깊게 들곤 했다”고 했다. 2011년 한 여성 승객이 남편과 다툰 뒤 바다에 뛰어들겠다며 소동을 벌였다. 이런 일이 매년 4, 5차례 있었다. 양 씨는 자살 소동이 있는 날은 잠을 안 잤다. 고홍근 오하마나호 사무장은 “자기가 잠들면 승객이 또 나쁜 생각을 할까 봐 승객과 이야기하면서 밤을 새운다고 하더라”고 했다. 고 사무장은 “승객들 얘기를 밤새 들어줘 배 탄 지 4년 됐지만 대홍이를 못 잊는 승객이 많았다”고 했다. 3남 2녀 중 막내지만 줄곧 부모를 모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머리를 밀고 나타나 “내 머리카락을 무덤에 넣어 달라”며 울었다. 이후 청각장애가 있는 홀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각각 고교생, 중학생인 두 아들이 있다. 아들들과 2 대 1로 씨름하는 걸 좋아했고 “형이라고 불러”라고 할 정도로 친했다. 형에게 늘 “학생들 너무 예뻐요”라고 말하던 그는 학생들을 구하다 끝내 나오지 못했다. 박지영 안현영 정현선 씨 모두 그와 함께 일하던 사무부 승무원이었다. 손효주 hjson@donga.com / 진도=여인선 기자}

박근혜 대통령은 9일 청와대에서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주재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소비 위축으로 경기 회복세가 직격탄을 맞은 데 따른 것이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 경제 챙기기 행보에 나서는 것은 처음이다. ‘세월호 정국’을 조기에 수습하고 국정을 정상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셀프 개혁’으로 정부 신뢰 회복할 수 있을까 그만큼 박 대통령이 약속한 ‘국가개조 방안’ 발표도 빨라질 가능성이 커졌다. 여권 내에서는 6·4지방선거 후보 등록일(15, 16일) 전후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가개조 방안에는 관료사회 개혁과 국가안전처 신설을 포함한 정부조직 개편, 퇴직 공무원의 유관기관 취업 금지 등이 포함될 예정이다. 문제는 이 방안들이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민낯을 드러낸 관료사회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혁명적인 대안이냐는 점이다. 당장 안전행정부가 관료사회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셀프 개혁’ 논란만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역대 정부가 관료들의 입김에 관료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것처럼 현 정부도 성과 없는 셀프 개혁의 후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안행부는 현재 △폐쇄적인 인적구조 △보직관리 △평가 등 세 가지 방향에서 공직사회 개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박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지시한 내용이다. 안행부 관계자는 7일 “외부 인사에게 공직의 문을 넓히면서 정부 내에서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려 한다”고 밝혔다. 또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 관련 보직에서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직 운용 체계도 손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 내에서도 안행부가 구상하는 공직 개혁 방안으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외부 채용을 확대하고, 순환보직을 축소하는 등의 대책으로 관료사회의 배타성과 복지부동 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회의감이다.○ 안행부 전면개혁으로 관료사회 변화 이끌어야 새누리당 경제혁신특위 위원장인 이한구 의원은 이날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정부 3.0’은 경직된 관료문화를 바꾸자는 취지였지만 초기에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관료들에게 스스로 문제점을 찾아 개혁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만큼 당과 민간 전문가들이 강력한 행정 개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심재철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1일 “관료들에게 ‘셀프 개혁’을 주문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공무원이 아닌 외부 민간 전문가들이 개혁 방안을 만들어 정부에 들이밀어야 하고, 관료 전체가 아니라 소수 부처에 집중해 성과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에서도 관료사회 전반을 개혁하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보다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부처의 인사와 조직 운용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안행부를 전면적으로 개혁해 관료사회 변화의 확실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역대 정부의 ‘개혁 실패’ 반면교사로 삼아야 역대 정부에서도 관료 중심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8월 행정안전부(현 안행부)는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행정고시를 폐지하고 5급 공채를 신설하되 2015년까지 5급 채용 인원의 절반을 시험 없이 서류와 면접을 통해 뽑겠다는 내용이었다. 채용 경로를 다양화해 행정고시 기수를 중심으로 서열화된 공직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행안부는 “1949년 고등고시 도입 이후 61년 만에 공직사회에 획기적 변화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발표 직후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외교부 5급 특채 논란이 불거지면서 특채 확대가 현대판 음서제도(고려·조선시대 귀족 또는 양반 자제를 시험 없이 관료로 채용했던 제도)가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행정고시를 5급 공채로 이름만 바꿨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관료가 만든 개혁안이 정치권과 시민사회로부터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하면서 좌초한 것이다. 외환위기로 정부 개혁 요구가 강했던 김대중 정부 때도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재정부)가 행정 개혁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예산만 낭비한 꼴이 됐다. 대통령직속 기구였던 기획예산위는 1998년 46억 원을 들여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전 부처에 대한 경영진단을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했다. 하지만 부처들의 반발이 거셌고, 실무적으로 행정자치부(현 안행부) 인사들이 개편 작업을 주도하면서 오히려 정부조직 개편 이후 부처가 한 곳 늘어나는 기형적인 결과만 낳았다. 당시 학계에서는 행정 개혁 과정에 민간의 참여가 막혀 빚어진 결과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셀프 개혁’ 논란과 관련해 “안행부의 방안을 전적으로 수용해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안 중 하나로 검토하는 것”이라며 “셀프 개혁 논란에 대해 박 대통령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여러 보완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이재명 egija@donga.com·신광영 기자}

192명이 희생된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의 발단은 한 50대 남성의 이상행동이었다. 그가 객차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붙이는 시늉을 하며 머뭇거릴 때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한 승객은 없었다. 대부분 당황해 라이터 불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때만 해도 열차와 불꽃의 결합이 어떤 참상을 초래할지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1년 반 뒤인 2005년 1월 서울지하철 7호선 열차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땐 승객들의 반응이 달랐다. 한 남성이 라이터로 광고 전단에 불을 붙이자 승객들이 소리를 지르며 옆 칸으로 대피했다. 승객들은 즉각 기관사에게 신고했고 다음 정거장에서 역무원들이 투입돼 불을 껐다. 그해 4월 지하철 4호선 전동차에선 라이터를 자꾸 켜대는 취객을 승객들이 제압해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열차 안에서 라이터 켜는 행위를 대하는 태도가 대구지하철 참사를 계기로 바뀐 것이다. 대구지하철 화재 당시 승객들이 방화 기도에 소극적으로 반응했던 건 위험에 둔감해서라기보다 위험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안전 무지증’ 우리는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위험을 알고도 무시했다며 ‘안전 불감증’을 탓한다. 하지만 안전 심리 전문가들은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안전 무지증(無知症)’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무지가 불안감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자인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진화론적으로 위험에 잘 대응해온 개체만 살아남기 때문에 인간 역시 위험을 망각하기보다 회피하려는 본능이 강하다”며 “다만 산업화로 눈에 띄지 않는 위험이 급격히 늘었는데 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경고 시스템이 취약해 위험을 과소평가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상관측 사상 가장 강력했던 태풍 매미. 2003년 9월 제주지역을 강타했을 때 최대순간 풍속은 초당 60m에 달했다. 전국에서 숨지거나 실종된 131명 가운데 바람이 가장 셌던 제주는 사망자가 2명에 불과했다. 오히려 풍속이 제주의 절반 정도였던 영남지역에서 104명이 숨졌다. 고대익 제주시 안전총괄과장은 “제주는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간판이 날아다니고 가로수가 갑자기 쓰러지는 게 다반사여서 태풍 예보가 뜨면 시민들이 외출을 삼가고 대비를 한다”며 “지방정부도 태풍의 공포를 알기 때문에 건축 허가나 시설물 관리를 엄격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태풍을 자주 겪지 않았던 부산은 항구에 대형 크레인을 방치해놓았다가 전복돼 큰 피해를 봤다. 경남 마산 역시 별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해안 저지대가 침수돼 18명이 숨졌다. 올해 2월 부산외국어대 학생 등 10명이 사망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고 때 건물 지붕에 50cm의 눈이 쌓였는데도 치우지 않고 행사를 진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리조트 측이 당초 하중에 취약한 샌드위치 패널로 건물을 짓고, 학교 측이 행사를 강행했던 것은 폭설의 위험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천장을 짓누르던 눈의 무게는 약 192t. 5t 트럭 38대를 지붕에 세워둔 셈이었다. 곽호완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어떤 위험이 올지 뻔히 알고도 방심한다기보다 뭐가 어떻게 위험한지 잘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데 다 안다고 착각해 필요한 만큼의 두려움을 빨리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험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해 화를 자초하는 건 외국도 다르지 않다. 2001년 미국 9·11테러 당시 뉴욕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는 항공기가 날아와 부딪힌 뒤 건물이 무너지기까지 102분의 시간이 있었다. 16분 뒤 또 다른 항공기가 남쪽 타워를 들이받았을 때도 바로 무너지지 않고 57분 뒤에야 갑자기 붕괴가 시작됐다. 비행기 충돌 때는 무사했지만 이 시간 동안 두 건물에서 대피하지 못해 사망한 사람이 전체 희생자 2749명 가운데 15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들 상당수가 ‘건물은 안전하다’ ‘각 층 상황에 따라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을 믿고 안에 머물러 있다 순식간에 최후를 맞았다고 보도했다. 건물 내 안전 담당자들이 붕괴 가능성을 직시하지 못했던 원인은 뭘까. 8년 전인 1993년에도 세계무역센터 건물은 테러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폭탄을 실은 승합차가 지하 주차장에서 폭발해 6명이 사망했지만 100층이 넘는 건물은 거의 손상이 없었다. 이때 경험이 8년 뒤 테러 공격을 당한 직후 ‘폭탄이 터져도 건물은 안전하다’는 오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반복 교육과 훈련만이 안전 보장 사람은 대개 경험해보지 않은 위험에 대해선 과소평가하고 설사 위험이 오더라도 자기는 피해 갈 수 있다고 믿는 ‘통제의 환상’을 갖고 있다.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고 예상되는 피해에 대해선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위험의 전조가 보였을 때 정확한 상황판단 없이 평소 하던 대로 대응하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사례가 많다. 김정오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논문 ‘오류의 심리과정’(2005년)을 보면 전 세계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난 사고 200건 가운데 매뉴얼에 명시된 필수 행위를 관행적으로 빼먹는 잘못이 원인이 된 게 42%에 달했다. 박창호 전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안전 예방대책은 일반인들이 일상행위에 내재된 위험을 잘 모른다는 전제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항공기 조종사나 승무원이 특수훈련을 받듯이 시민들도 위험의 실체를 몸으로 익힐 수 있는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형식적 민방위훈련… 84% “도움 안돼” ▼법으로 규정된 학교 안전수업… 초중고 10곳중 6곳 아예 안해화마(火魔)에서 멀어지는 듯했던 그 길이 더 위험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때 불타는 열차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승객들이 향한 곳은 지상으로 연결되는 계단이었다. 연기는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당시 계단에는 유독가스가 밀집돼 있었다. 좁은 계단에 몰린 수백 명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서로의 다급한 발길을 붙잡았다. 이런 경우 지하철 선로로 대피하다 환기통로를 통해 빠져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희생자는 크게 줄었을 것이다. 위험이 생겼을 때 막연한 상식에 의존해 반사적으로 하는 행동은 도리어 화를 키울 수 있다. 안전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여야만 하는 이유다. 하지만 일반인뿐 아니라 안전담당자 교육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감사원이 지난해 서울시 등 10개 지방자치단체 재해담당 공무원의 방재교육 이수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의무교육 이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47.4%, 가장 낮은 곳은 11.1%에 불과했다. 민방위훈련도 유명무실하다. 한남대 행정정책대학원 ‘민방위 교육훈련의 개선방안’ 논문을 보면 훈련생 설문 결과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는 답변이 83.9%에 달했다. 김현택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경험을 통해 몸에 새겨져야만 평소에도 위험 요인을 잘 의식할 수 있고 사고 때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안전을 생활화하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많지만 학교에서의 안전교육은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법에 규정된 안전 보건 수업을 실시한 초중고교는 전체의 36.4%(2013년)에 불과했다. 교육이 이뤄지더라도 교사들이 비전문가여서 매뉴얼만 읽어주는 수준에 그치는 게 다반사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안전 관련 내용 비중도 36쪽에서 8쪽으로 크게 줄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시민 채성진 씨는 2일 오후 3시 30분경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개찰구에 들어서다 열차의 위치가 표시된 전광판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전동차는 앞차와 뒤차가 2, 3개 역 정도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데 전광판 화면 속에는 열차 모양 아이콘 2개가 거의 나란히 붙어 있었다. 승강장으로 내린 채 씨는 놀라온 광경을 목격했다. 전동차(2260호)가 돌진하듯 역사로 들어오고 있었다. “열차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들어왔어요. 여기가 역인데….” 당시 선로에는 이미 다른 전동차(2258호)가 들어와 있었고 이제 막 왕십리역을 향해 출발한 참이었다. 이 열차 맨 뒤칸에 타고 있던 박모 씨(52)는 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로 윷놀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목적지인 성수역까지 네 정거장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박 씨가 탄 칸의 좌석은 빈자리가 없었고 그 앞에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전동차는 평소보다 역에 오래 머물며 전동차 출입문과 스크린도어를 여러 차례 여닫았다. 일부 승객은 “왜 출발을 안 하느냐”고 항의하듯 소리쳤다. 승강장에 들어서던 전동차(2260호) 맨 앞칸에 탄 대학생 배모 씨(20)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상왕십리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열차가 속력을 줄이지 않는 것이었다. 배 씨가 차창 너머로 바깥 상황을 살피려던 순간 덜컹하는 진동과 함께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쾅!’ 배 씨는 앞쪽으로 구르면서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히는 충격을 받았다. 서 있던 승객들도 대부분 중심을 잃고 앞쪽으로 튕겨 나가며 서로 부딪히고 깔렸다. 잡고 있던 안전 손잡이를 계속 잡고 있던 한 중년 여성은 허리가 확 휘었다. ‘악’ 하는 비명소리가 났다. 열차 칸 앞쪽은 앞으로 휩쓸려온 사람들이 서로 충돌하며 생긴 상처 때문에 바닥 군데군데에 핏자국이 뱄다. 몇 초 뒤 열차 내 전등이 모두 꺼졌다. 열차 앞쪽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승객이 “이러다 폭발하는 거 아니야” 하고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승강장에 서 있었던 채 씨는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뒤차가 앞차의 꽁무니를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뒤차는 3량이 아예 선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전동차 간 이음매 부분은 구겨지고 부서져 있었다. 뒤차 앞쪽 칸 유리창도 산산이 깨졌다. 앞차 맨 뒤칸에 서 있었던 박 씨는 추돌 충격으로 의자 옆 난간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혔다. 순간 얼굴이 화끈하며 정신을 잃었다. 앞차도 충돌 직후 전기가 나가 객실이 어두워졌다. 일부 승객이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작동시켜 안을 밝히자 몇 명이 비상구 옆에 있는 수동 개폐 장치를 통해 문을 열었다. 박 씨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20대로 보이는 남성 3명이 자신을 부축해 열차 밖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박 씨의 점퍼 가슴팍은 코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박 씨는 정신이 혼미한 채로 지하철 계단 쪽에 걸터앉았다. 승객들은 다리를 절뚝이며 어두운 선로를 통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역무원이나 제복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선로 주변에선 “엄마!” “○○야!” 하며 서로를 다급히 찾는 외침이 간간이 들렸다. 사고 후 얼마나 지났을까. 뒤차에서는 “밖으로 나오지 말고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어둠 속에서 “대기하자”는 의견과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한 남성이 “세월호 때도 시킨 대로 가만히 있다가 다 죽었어”라고 소리치자 ‘빨리 문을 열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 승객이 전동차 문을 열었고 승객들은 밖으로 빠져나가 선로를 따라 상왕십리역 승강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젊은 여성들은 두려움에 질린 듯 흐느꼈다. 승객들은 곧 “침착하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남자 승객 서너 명은 차 비상문을 열려고 손가락을 문틈에 넣고 끙끙댔다. 한 승객이 벽 쪽을 더듬더니 비상레버를 찾아 당겼다. 문이 열렸다.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을 부축했다. 승강장에서 사고를 처음부터 목격한 채 씨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열차 안에서 힘들게 몸을 이끌고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가 새하얀 지팡이 든 할머니, 만삭의 임신부, 교복 입은 학생들도 있었다. 잠시 후 뒤차 맨 앞쪽 문이 열렸다. 기관사가 어깨와 팔 부위에 피를 흘리며 문을 열고 나왔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기관사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부상자들은 밖에 대기하던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승강장에는 “기관 고장으로 열차 운행이 불가능하니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라”는 멘트가 나왔다. 다행히 다친 곳이 없는 승객들은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황급히 사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진 지 17일째인 2일 전동차 승객 1000여 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신광영 neo@donga.com·강은지·박희창 기자}

《‘화물 과적 점검만 제대로 했더라면….’ ‘비상버튼만 눌렀더라면….’ ‘제때 탈출 지시를 했더라면….’ ‘해경, 배에 직접 들어가 구조했더라면….’ 302명의 사망·실종 참사를 낸 세월호 침몰 사고를 보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맴도는 아쉬움이다. 대부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태도나 자세만 바꿔도 되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되는 일이다. 사고 때 이런 게 이뤄지지 않은 것은 평상시 구조구난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설령 갖췄다 할지라도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 및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언론 역시 이런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형사고 때마다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사후에 제대로 고쳐졌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이에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의 총체적인 재난관리 시스템을 집중 점검하고자 한다. 사고 순간은 물론이고 평상시 누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꼼꼼하게 파헤쳐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안전 대한민국 이렇게 만들자’는 제언을 위한 첫 번째 시리즈다. 앞으로도 동아일보는 적절한 시간 간격을 두고 ‘5000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이 확보되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점검할 예정이다. 》 승무원 12명 중 거동이 가능한 사람은 5명뿐이었다. 지난해 7월 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공항. 아시아나항공기가 착륙 도중 활주로와 충돌해 꼬리가 떨어져나가는 순간 승무원 5명이 부상당했다. 황급히 작동시킨 탈출용 슬라이드는 일부가 안에서 펴져버렸다. 승무원 2명이 끼어 옴짝달싹 못했다. 다치거나 몸이 끼인 7명을 제외하고 남은 승무원 5명의 손에 승객 291명의 목숨이 달린 상황. 설상가상으로 비상구는 8개 중 3개만 열렸다. 뒤편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기체 화재가 폭발로 이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90초. 이 시간이 탈출과 생존에 필요한 최소시간, 즉 골든타임이다. 승무원들이 훈련해봤던 최악의 상황은 300명을 비상구 4개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가 명료해지면서 뭘 해야 할지 보이더라고요. 훈련을 매년 해서 그런지 그냥 몸이 막….”(이윤혜 선임 승무원)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전부 대피시킨 뒤 살아서 나왔다. 그 후 1, 2분 만에 기체는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사망자는 3명. 2명은 착륙 당시 충격으로, 1명은 출동한 소방차에 치여 숨졌다. 이 사건은 골든타임 ‘90초’가 완수된 항공기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는 대개 예상을 뛰어넘는 최악의 형태로 일어난다. 사고 때마다 우리 안전 담당자들이 늘어놓는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변명이다. 세월호 참사는 구조당국의 무능한 초동대응 실태를 여실히 드러낸 사례다. 첫 침몰 신고가 들어온 16일 오전 8시 52분부터 배가 완전히 뒤집힌 10시 31분까지 총 99분. 아시아나항공기 사고 때와 비교해 ‘골든타임’이 65배나 많이 주어졌지만 30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신고를 접수한 해경은 신고자인 단원고 학생에게 위도 경도 등을 묻다 4분을 허비했다. 신고 내용이 사고 해역을 담당하는 진도 해상관제센터(VTS)까지 전달되는 데에도 15분이 걸렸다. 진도 VTS는 레이더 관측 업무를 소홀히 해 세월호가 100도 이상 급선회했음에도 이상 징후를 알아채지 못했다. 신고 후 약 40분 만에 헬기와 경비정이 도착했을 땐 배가 기울 대로 기울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선내 수색 구조를 하도록 특수훈련을 받은 대원은 현장에 없었다. 최신예 해군 구조함 ‘통영함’(1600억 원) 등 정부가 천문학적 예산을 들인 해상 구조 인프라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단원고 학생 등 300여 명이 갇힌 채 배가 뒤집히는 광경을 구조대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봤다. 안이한 초동대응으로 인명피해를 ‘극대화’하는 패턴은 정부가 수십 년째 고치지 못하고 있는 고질병이다.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27명이 숨진 1999년 경기 화성시 씨랜드 화재 때 소방차가 도착한 건 신고 1시간 13분 만이었다. 화재 사고 골든타임은 단 5분. 당시 씨랜드 측 화재 신고를 받은 경찰은 40분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소방차 도착에도 20분 넘게 걸렸다. 씨랜드 진입로는 비포장 일방통행로였고 주민들이 사유지를 주장하며 쇠말뚝을 박아놓았는데 당국은 이를 방치해왔다. 사건 후 15년, 소방차 5분 내 도착 비율은 여전히 66%에 불과하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때 상황실 근무자들은 모니터를 보지 않아 화재 경보가 뜬 지 3분이 지나도록 멍하니 있었다. 불이 난 열차가 역에 방치돼 있던 사이 맞은편에서 다른 열차가 들어와 그쪽까지 불이 옮겨 붙었다. 두 열차에서 192명이 숨졌다. 2012년 경북 구미 산업단지 불산 누출사고 때도 소방당국은 불산의 맹독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단순 가스누출로 판단해 피해를 키웠다. 구조요원들이 초기 2시간 반가량 무방비로 방재작업을 했고 위험지역(반경 3km) 주민 대피도 사고 발생 5시간 만에 이뤄져 불산 오염 등 2차 피해가 생겼다. 김근영 한국방재학회 이사는 “초동대응은 정확한 정보 수집 후 신속히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도의 작업인데 대부분 하위직 근무자가 담당한다”며 “매뉴얼은 부실하고 훈련도 형식적이어서 최일선 담당자들의 상황 판단력과 자신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안전행정부 의뢰로 국내 재난관리시스템을 연구한 한국재난안전기술원은 보고서에서 “우리 재난관리 체계는 피해 예방보다 재해 발생 이후 복구 및 지원의 개념이 강했다”고 밝히며 초동대응 능력 향상을 핵심 과제로 꼽았다. 세월호 참사는 정부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받아보고도 별 대책을 세우지 않는 사이 벌어진 일이다.신광영 neo@donga.com·주애진 기자}

16년 전 가을, 미술학원 상담실에 겉멋 든 고등학생 하나가 들어섰다. 인사를 한답시고 고개만 까닥했고, 교복은 좀 놀아봤다는 듯 단추를 풀어헤친 상태였다. 녀석은 한쪽 어깨에 가방을 들쳐 메고 있었다. “이제석”이라고 껄렁껄렁하게 자신을 소개한 그 녀석은 역시나 학교 성적이 하위권이었다. 며칠 나오다 말겠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장짜리 스케치 숙제를 내주면 녀석은 스무 장, 서른 장을 그려왔다. 한번 쓴 붓으로 다른 색을 칠하려면 그것을 물에 씻고 걸레에 몇 번 닦아야 한다. 그런데 제석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시커먼 물에 담갔다 꺼낸 붓을 입으로 쭉쭉 빨아가며 그림을 그렸다. 오래도록 굶주리다 먹이를 발견한 야생동물처럼 무섭게 몰두했다. 제석이는 조금만 관심을 보여주면 10배의 노력으로 화답했다. 공부 좀 하라고 말하곤 했는데, 하루는 녀석이 “쌤(선생님), 저 공부 한번 해볼까요?”라고 했다. 이튿날부터 제석이는 푸른색 교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손바닥 크기의 영어 단어장을 넣고 다녔다. 이후 쉬는 시간에 연필로 쓴 단어장을 빼서 혼자 중얼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석 달쯤 지났을까. 단어장을 얼마나 많이 넣었다 뺐다 했는지 교복 왼쪽 가슴 부위가 새까매져 있었다. 교복을 빨아 입어 다른 데는 깨끗해도 그곳만은 언제나 까맸다. 제석이는 미대 합격 통보를 받던 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녀석이 허리디스크로 고생해 왔다는 걸 나는 문병을 가서야 알았다. 허리도 안 좋은 녀석이 매일 저녁부터 새벽까지 7시간 넘게 연습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제석이는 대학에서 매 학기 전 과목 A+를 받았다. 실력도 좋았지만 가정형편상 장학금이 생명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제석이에게 학원 보조강사 일을 맡겼다. 가끔 다른 학원에서 특강 요청이 오면 제석이를 대신 보냈다. 학부 1, 2학년생이 미술 강사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런데도 제석이는 고작 두세 살 어린 학생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제석이가 보조강사를 그만둔 얼마 뒤 나는 시내에서 놀라운 광경을 봤다. 반바지 차림의 청년이 굴러가는 게 신통할 정도로 낡은 연탄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주워온 듯한 작은 헬멧은 머리 위에 엉거주춤 걸쳐져 있었다. 제석이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려 영어학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학원은 대구에서 수강료 싸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녀석은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버려진 오토바이를 주워 탄 것이었다. 제석이는 그렇게 눈물나게 유학비용을 모았다. 몇 년 뒤 나는 TV 9시뉴스에서 제석이를 봤다. 세계적 광고제인 ‘뉴욕 원쇼 페스티벌’에서 공장 굴뚝을 권총으로 묘사한 광고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PC방 컴퓨터로 그 뉴스를 봤는데, 앉은 자리에서 오전 3시까지 인터넷을 뒤지며 관련 뉴스를 보고 또 봤다. 다른 제자나 강사들한테 얘기하면 괜히 질시를 받을까봐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기뻐했다. 사람들은 제석이를 ‘광고 천재’라며 놀라워했지만 나는 그 결과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 녀석은 광고 천재라기 보단 ‘노력 천재’였다. 제석이가 광고전문가로 커가는 동안 나는 학원 원장이 됐다. 다른 미술학원 원장들은 수업에서 손을 떼고 경영에만 신경 쓰지만 나는 그러질 못하고 있다. 강의실에서 아이들과 계속 부대끼다 보니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갔다. 이게 다 제석이 때문이다. 녀석은 요즘도 불쑥 전화로 “쌤, 뭐해요?”라고 묻는데 나는 “쉰다”고 하고 싶지가 않다. “쌤은 수업하다 바닥에 엎어져 그림 그릴 때가 제일 멋져요”라는 제석이의 오래전 한마디는 내 삶의 지표가 돼버렸다. 제석이는 자기 약력을 소개할 때 계명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예일대 미대와 함께 미술학원 이름을 밝힌다. 나에게 배운 걸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제자가 있는데 어찌 가르치는 일을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제석이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쌤, 야구 하면 누가 떠오르세요?” “박찬호.” “축구는 누가 떠올라요?” “박지성.” “광고 하면은요?” “….” “저는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석이는 ‘광고의 아이콘’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의 명성이면 적당히 해도 먹고살 텐데 아직도 남들이 안 가는 힘든 길을 가려는 건 그 목표를 위한 몸부림인 것 같다. 제석이는 까까머리 학생 때부터 판을 새로 짜는 방식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만의 룰을 만들어갈지 나는 응원하며 지켜볼 것이다.정영규 대구 제3미술학원 원장}
대형 재난사고가 터질 때마다 “상황 대처 매뉴얼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작 정부가 보유한 각종 안전 및 위기관리 매뉴얼을 다 합치면 모두 32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연재해나 화재, 산업재해, 교통안전 등을 담당하는 기관마다 사태 수습용으로 임기응변식 매뉴얼을 내놓는 게 관행으로 굳어진 탓이다. 매뉴얼이 중구난방인 데다 워낙 방대해 담당 공무원들이 이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현장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안전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매뉴얼 너무 많아 안 보게 돼”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범부처 사고대책본부 고위 관계자는 2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부 부처와 산하 기관에서 만든 안전 관련 매뉴얼은 개수로만 따지면 3200여 개나 되고 워낙 여기저기서 만들다 보니 내용의 80%가 겹치는 실정”이라며 “내용도 딱딱하고 어려워 비전문가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내 안전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A 사무관은 “매뉴얼이 한두 개로 정리돼 있으면 반복해서 숙지할 텐데 챙겨야 할 매뉴얼이 수십 개에 달해 제대로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난다”고 털어놓았다. 미국과 독일 등 선진국은 매뉴얼을 최대한 쉽고 단순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인적재난과 자연재해를 구분하지 않고 통합 관리하는 ‘전재해 접근법(All Hazard Approach)’을 채택하고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여러 분야의 안전 담당자들이 원활하게 협업하려면 공통된 기준을 충분히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 컨트롤타워 없이 대책본부만 10개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 없이 우후죽순으로 사고대책본부를 만들어 공무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지 못하는 비효율도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이번 진도 여객선 참사와 관련해 범부처 사고대책본부, 안전행정부 중앙안전재난대책본부, 해양수산부 중앙사고수습본부는 물론이고 해양경찰청 교육부 국방부 등을 포함해 10개 가까운 대책본부가 만들어졌다. 각 부처 장차관을 비롯해 대책본부에 투입된 중앙부처 5급 이상 공무원만 245명에 달한다. 정부는 이런 대규모 대책본부를 만들고도 사망자 현황 및 구조 상황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계속 혼선을 빚어 유족과 실종자 가족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침몰한 선박 승객들의 생존 여부가 판가름 나는 사고 초기 ‘골든타임’ 때도 이렇다 할 리더십을 보이지 못해 피해를 키웠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서해훼리호 침몰 후 사흘이 지난 12일 오후까지 정확한 사고 원인 규명은 물론이고 승객 수조차 파악되지 않는 등 당국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1년 전 동아일보 기사다.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서해훼리호(110t) 침몰 사고를 다룬 것이다. ‘서해훼리호’를 ‘세월호(6825t)’로만 바꾸면 지금 상황과 다를 게 없을 정도로 두 사고는 쌍둥이처럼 보인다. 서해훼리호 침몰 당시 선박 안전 및 감독 부실에 대한 총체적인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292명이 목숨을 잃으며 지적한 문제는 지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서해훼리호 침몰 직후 경찰이 밝힌 승선자 수는 14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수차례 번복했다. 정부는 시신 인양이 끝나고 나서야 362명으로 확정했다. 당시 선사들의 모임인 해운조합이 채용한 운항관리자가 주요 항구에 배치돼 승선자 수를 파악했다. 운항관리자가 선장의 보고를 믿는 허술한 구조였다. 서해훼리호 침몰 이후 정부는 운항관리자를 늘렸다. 현재 전국에 74명의 운항관리자가 있지만 여전히 출항 전 선장이 승선자 수를 문서로 보고하면 이를 승인하는 데 그쳐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세월호 선장은 출항 전 점검 보고서에 승선자 수가 450명이라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476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는 이번에도 477명→459명→462명 등 수차례 생존자 수를 번복했다. 서해훼리호 침몰 당시 원인 중 하나로 과적이 지목됐다. 정원이 221명이었지만 362명이 타는 등 화물을 포함해 6.5t을 과적한 상태. 물살이 거센 해역에서 급선회를 시도했고 화물과 사람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복원력을 잃은 뒤 침몰했다. 훼리호는 무자격 업체에서 복원력 검사를 받았다. 세월호도 비슷하다. 세월호 선장은 안전점검표에 차량 150대, 화물 657t을 실었다며 운항관리자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 밝혀진 화물량은 차량 180대, 화물 1157t. 50t 트레일러 3대도 실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호 정원은 921명. 승선자 수는 이에 훨씬 못 미쳤지만 화물이 이를 상쇄하고 남았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복원력이 떨어진 세월호가 과적 상태에서 급선회를 하면서 복원력을 쉽게 잃고 침몰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과적이 가능한 이유는 운항관리자가 배가 물에 잠긴 정도를 보고 과적 여부를 판단할 뿐 화물을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항관리자가 해운조합 소속이어서 감시자 역할을 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다. 운항관리자의 구명장비 점검도 형식에 그치는 실정이다.손효주 hjson@donga.com·신광영 기자}

16일 전남 진도해역에서 침몰한 세월호 인양작업이 18일 오전 시작될 예정이지만 배를 끌어올리는 데 두 달 이상 걸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2010년 3월 백령도 해역에서 침몰한 천안함은 함미 인양에 3주, 함수 인양에 30일이 걸렸다. 세월호 인양이 천안함보다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우선 배의 크기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최대 규모인 6825t, 천안함은 1220t이다. 천안함은 선체가 두 동강 난 상태에서 하나씩 끌어올렸기 때문에 인양 크레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세월호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박종환 목포대 조선공학과 교수는 “배 안에 차량 등 화물이 많이 실려 있는 데다 물까지 가득 차면 무게가 1만 t 이상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사고 현장으로 이동 중인 크레인 3대의 인양 가능 무게는 총 9200여 t. 크레인을 추가로 투입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해양경찰 등 구조당국은 배 안에 공기주머니 등을 집어넣는 등의 방법으로 무게를 최대한 줄일 계획이다. 세월호의 선체가 거의 180도 뒤집혀 있는 것도 문제다. 이 상태로 끌어올렸다간 인양 과정에서 취약한 부분이 파손되거나 추락할 수 있어 일단 배를 바로 세워야 한다. 천안함 인양에 참여했던 정승계 유일수중공사 사장은 “배를 일으켜 세우려면 배 표면에 용접을 해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 작업에만 20일가량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작업은 바닷물이 빠지는 정조시간에만 가능한데 6시간 주기로 1시간 남짓 오기 때문에 길어야 하루 4시간 정도 작업할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지점의 수심이 최고 37m로 천안함 침몰 수심(25m)보다 10m 이상 깊다는 것도 인양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조규남 홍익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잠수부들이 일할 수 있는 최대 수심이 30m 정도다. 물 속은 10m 내려갈 때마다 1기압씩 올라 작업자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해역은 국내에서 물살이 세기로 손꼽히는 지역이기도 하다.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지난해 8월 부산 남구의 한 수련원 인근 내리막길에서 청소년 30여 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도로를 이탈해 10m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대형 참사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중상자나 사망자 없이 대부분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인솔교사의 지시로 학생들 모두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안전장치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는 작은 사고도 치명타가 된다. 2012년 11월 경기 안성시의 한 상가 신축공사 현장에서 인부 김모 씨가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떨어진 높이는 1.7m에 불과했지만 안전모를 쓰지 않았던 김 씨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했다. 안전장치 착용 여부는 위험 순간에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지만 우리 국민의 착용률은 미흡한 상황이다. 국내 안전띠 착용률은 70% 안팎으로 선진국인 독일 98%, 일본 97%, 스웨덴 96%, 미국 85%에 비해 낮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 사고로 사망할 가능성이 안전띠를 맸을 때보다 3.3배나 높다. 안전모의 경우도 공사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지 않아 사망하는 비율이 2010년 31%에서 2012년 41%로 증가했다.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안전행정부는 안전띠와 안전모, 안전조끼의 착용을 생활화하는 ‘3필착(必着)’ 운동을 추진한다고 16일 밝혔다. 안행부는 매월 첫째 주를 안전강조주간으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안전캠페인을 펼치기로 했다. 또 시기별로 사고 유형에 대비한 달력과 ‘3필착’ 운동 교육 교재를 각급 기관에 배포할 예정이다. 선진국은 정부 차원에서 안전기구 착용을 제도화하고 있다. 미국의 병원들은 출산 후 퇴원할 때 보호자 차량에 신생아용 카시트가 없으면 아예 퇴원을 금지하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동승자 공동 책임주의’를 명문화해 함께 차에 탄 사람이 안전띠를 매지 않다가 적발되면 운전자에게 약 9만 원의 범칙금을 부과한다. 안행부 관계자는 “지난해 충남 태안에서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다가 파도에 휩쓸려 사망한 고교생 5명은 모두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며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진 뒤 후회하지 말고 사전에 철저한 교육을 통해 안전의식을 높여야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일곱 살 진규(가명)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다섯 살 여동생의 목에 줄을 감고 이 방 저 방으로 끌고 다녔다. 아버지는 동생을 이미 몇 차례 벽에 집어 던지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동생은 눈을 껌벅이며 숨을 헐떡였다. 진규는 아버지에게 맞을 때 ‘이러다 죽겠다’고 느끼곤 했는데 눈앞에서 동생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날도 주먹질에 앞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애새끼들은 맞아야 정신 차려.” 여동생이 숨진 지 7년. 올해 열네 살이 된 진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법원은 학대로 자녀를 숨지게 한 부모를 살인자로 보지 않지만 진규가 겪는 후유증은 ‘아동 학대가 살인보다 잔인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혐오했던 ‘폭력’의 노예가 돼 있었다. 》2007년 진규(가명·당시 7세)의 아버지는 다섯 살배기 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아버지가 수감된 뒤에도 진규네 집은 계속 전쟁터였다. 진규가 다른 여동생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한테 못된 것만 배웠다”며 진규를 미워했다. 남편에게 맞고 살던 엄마는 딸들을 지키려 아들을 때렸다. 3년 뒤 아동보호전문기관 직원은 학대신고를 받고 진규네 집을 찾았다가 혼란에 빠졌다. 진규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우울증세를 가진 피해자인 동시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가해자였다. 페트병에 자기 소변을 받아 동네 아이들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있다. 아버지가 진규 남매에게 했던 단골 수법이었다. ‘폭력의 DNA’가 진규에게 옮겨간 듯했다. 진규는 1년간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고 2년간 위탁가정에서 지냈다. 그 사이 중학생이 된 진규는 올해 2월에야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두 달쯤 지난 이달 초 진규는 그 집에 홀로 남겨졌다. 엄마가 여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진규 엄마는 아동보호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진규한테 예전 남편의 모습이 보여요. 무서워서 도저히 안 되겠어요.” 전날 진규가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 부엌칼을 휘두르며 위협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데 이어 엄마한테마저 버림받은 진규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아버지가 뿌린 불행의 씨앗은 진규와 가족들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 생존본능이 공격성으로 표출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아동학대 피해 후 구조된 청소년 10명과 유년시절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30, 40대 성인 10명이 겪은 후유증을 취재했다. 이들은 폭력에서 벗어난 지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학대에서 갓 탈출한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증상을 보였다. 장기간 심리적 물질적 결핍 상태에 있다가 쉼터 등 안정적인 환경에 놓이자 “이럴 때 최대한 챙겨놓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도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학대를 피하려 가출해 노숙생활을 하다 보니 도둑질이 몸에 밴 사례도 있다. 거짓말 역시 살려는 몸부림이다. 보통 학대 부모들은 폭력의 원인을 아동에게 뒤집어씌우거나 ‘약속을 안 지켰다’고 몰아세우며 폭력의 명분을 쌓는다. 학대받는 아동들은 솔직히 말했다가 무참히 구타당했던 적이 많아 상대가 원하는 대로 사실을 가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다는 것이다. 공격성도 자주 나타난다. 부모와 신뢰관계 형성이 안돼 상대를 잘 믿지 못하는 데다 더는 억압받지 않겠다는 절박함의 표출이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부모에게서 타인을 괴롭히거나 제압하는 요령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한 결과다. 피해 청소년들의 이런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섣불리 ‘문제아’로 낙인찍게 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은 이들의 후유증을 더 악화시킨다.○ “엄마 계모 맞지?” 아동학대 피해 후 충분한 관심과 치료를 받지 못한 성인들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지금은 부모가 된 이 피해자들은 몸에 새겨진 학대의 관성이 자녀를 향할 때 극심한 자책감을 느낀다. 친부와 계모에게 골프채로 구타당하고 변기에 처박히는 ‘물고문’을 자주 당했던 A 씨(35·여)는 8세와 3세인 아이들에게 종종 손찌검을 한다. 큰아들은 “엄마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 같아. 엄마 계모 맞지”라고 농담하듯 말한다. 이 아이 역시 세 살짜리 동생을 자주 때린다. A 씨는 “나한테서 아빠의 모습을, 내 아이에게서 내 모습을 볼 때면 내 몸의 피를 모두 빼버리고 싶다”고 했다. 친부가 옆집에서 개 잡을 때 쓰는 몽둥이를 빌려와 마구 때리곤 했다는 B 씨(39). 그는 요즘도 개 짖는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저려오고, 뒤에서 누군가가 몽둥이로 때리는 악몽을 자주 꾼다. 계모는 그가 초등학생 때 냉장고를 자물쇠로 채워 놓고 밥을 굶겼다. 그 때 생긴 식탐이 지금껏 이어져 비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B 씨는 평소엔 조용한 성격이지만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직장 상사가 일방적 의견을 강요할 때 자기도 모르게 상대의 멱살부터 잡았다. 이 같은 분노조절 장애 탓에 다니던 공기업에서 해고됐고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 지금은 막노동을 하고 있다. 학대 피해 과정에서 형제간 신뢰가 깨져 성장한 후에도 사이가 회복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유년시절 두 살 터울 누나와 함께 8년가량 부모에게 학대당했던 한모 씨(40)는 “매 맞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내가 안 맞고 누나가 맞을 때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집을 나온 한 씨는 그 후 누나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 한 씨는 “서로가 곤경에 처했을 때 방관했다는 원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세월이 지나도 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인다”고 말했다.신광영 neo@donga.com·배준우 기자}

“저 좀 잡아가 주세요.” 2012년 2월 수도권의 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30대 여성이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이 여성은 상담원에게 “저를 데려가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몇 번 외치더니 끝내 흐느꼈다. 아동복지기관에 스스로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 그녀는 일곱 살 된 친아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아들을 지키고 스스로를 절망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신고전화였다. 중학교 교사 이모 씨(37·여)도 2010년 11월 아동보호기관에 스스로 학대 가해신고를 했다. 학교에선 자상한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던 이 씨는 집에 오면 ‘괴물’로 변했다. 그는 10세와 6세인 두 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길 때면 화장실에 가두고 뺨을 후려쳤다. 한 번 회초리를 들면 쇠로 된 막대가 휠 때까지 때려야 직성이 풀렸다. 한겨울에 아이들을 맨발로 집 밖에 서 있게 한 뒤 분에 못 이겨 계단 아래로 밀어버린 적도 있다. 두 엄마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가 행동이 느리거나 주의가 산만해 손바닥 때리기 등 가벼운 체벌을 하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 이 씨는 “아이가 커서 혹시 무시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나도 많이 맞고 컸기 때문에 일단 매를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훈육’이 ‘학대’로 변질되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 울산과 경북 칠곡 아동학대사망 사건이 집중 조명되면서 비정한 계모가 주된 가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는 대부분 친부모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보고된 아동학대 6796건의 가해자 가운데 76.2%가 친부모다. 계부모는 학대 가해자의 3.7%였다. 양부모는 0.4%였다. 근본적인 아동학대 대책을 찾으려면 부모가 금쪽같은 친자식을 어떻게 학대하게 되는지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취재팀이 전국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중점 개입사례 10건을 분석한 결과 부모들의 체벌 정도가 서서히 심해져 결국 극단에 이르는 공통점을 보였다. 이른바 ‘폭력의 에스컬레이팅(escalating·상승)’ 현상이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유미 복지사업본부장은 “훈육과 학대의 경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보니 훈육 목적으로 체벌을 시작했더라도 기대했던 교정효과를 보고 스스로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폭력의 강도를 계속 높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적절한 외부 개입이 없을 경우 부모는 자신이 휘두르는 극단적 폭력에 둔감해진다. 이 부모들은 체벌을 피하려 자녀가 잘못을 시인하는 반응을 보이면 그간의 폭력이 ‘필요악’이었다고 합리화하는 특징도 보인다. 가해 부모들은 체벌 후 자녀의 마음을 풀어준다며 잠시 잘해주는 패턴을 보이는데 이는 아동의 체벌에 대한 내성을 키울 수 있다. 아이들이 체벌을 당하는 동안 “이것만 맞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자녀의 내성이 커질수록 부모의 폭력은 세질 수밖에 없다. 학대의 강도가 셀수록 아이들은 부모가 보이는 잠깐의 호의에도 감동한다. 이 때문에 피해 아동이 부모를 감싸게 돼 학대 사실이 외부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자녀 학대 부모들 가운데 30∼60%가 성장과정에서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폭력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어려서 부모의 학대 속에 성장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자기 자녀와 마찰이 생겨 흥분상태가 되면 유년 시절 학습돼 있던 폭력 성향이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쉽다”고 말했다. 또 피학대 경험이 누적되면 감정조절 기능을 하는 뇌 기관인 전전두엽의 기능이 약화돼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진다. 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승강기안전원·원장 공창석)은 주력사업인 승강기 안전검사 업무를 개선해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의 승강기 안전검사를 ‘스마트하게’ 바꾼다. 검사원들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활용해 검사 결과를 현장에서 바로 입력하고 검사 과정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부서장에게 화상통화로 상의하는 ‘스마트워크’ 방식을 도입한다. 우리나라 승강기 보유대수는 지난해 2월 50만 대를 돌파해 세계 9위. 신규 설치는 매년 약 2만5000대로 세계 3위다. 승강기안전원은 3일 “시장 규모에 걸맞게 승강기 안전검사 업무를 혁신하려는 것”이라며 “스마트워크 기법으로 주당 3회씩 승강기 검사를 하면 매년 약 33억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승강기 검사 신청 절차도 편리하게 개편했다. 우선 고객이 언제 어디서나 승강기 검사를 신청하고 확인할 수 있는 모바일 검사 서비스를 도입했다. 스마트폰으로 승강기안전원 홈페이지(m.kesi.or.kr)로 접속해 3번만 터치하면 검사 신청이 완료된다. 승강기를 검사할 검사원의 얼굴과 연락처를 사전에 알 수 있어 쉽게 문의할 수 있다. 국가승강기종합정보센터와 안전 해피콜센터도 새로 개편해 고객의 정보 접근성을 높였다. 승강기 검사 장비의 국산화도 본격화된다. 승강기안전원은 “기존에 전량 수입하던 검사 장비를 자체 기술로 개발할 방침”이라며 “여러 개 검사를 하나의 장비로 할 수 있도록 기술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다기능 측정 장비는 아직 현장시험 단계에 있지만 곧 양산체제로 전환되면 매년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장비수입 대체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승강기안전원은 세계 최대 승강기 시장으로 성장한 중국을 비롯해 인도 베트남 몽골 등으로 검사기술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선양에서 진행된 ‘롯데월드 승강기 종합컨설팅’을 수주해 용역을 완료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지난해 승강기안전원은 해외 승강기 컨설팅으로 역대 최고인 5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올해는 베트남과 미얀마 등 동남아로 시장을 확대해 기술용역사업의 수익 비중을 전체의 1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이 2일 강병규 신임 안전행정부 장관(60·사진)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강 장관은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식을 열고 정식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지방에 숨어 있는 규제를 개선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장남의 위장전입과 부인의 농지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 야당이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1일 국회에 보고서 채택을 재요청하는 절차를 거쳐 이날 강 장관을 임명했다.신광영 기자 neo@donga.com}

'광고천재'라는 찬사는 독이었다. 일감이 몰아닥쳤다. 넓은 사무실에 앉아 결재만 하며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한 번씩 움직일 땐 꼭 직원들을 대동했다. 작업 현장에는 직접 나가지 않고 직원들을 대신 보냈다. '원격조종'으로 탄생한 광고에는 '눈깔'이 없었다. 광고주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웠다. 이럴 때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이제석 씨(32)에게 한동안 잊고 지낸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 물건이 있었다. "서랍에 처박아뒀던 목장갑을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됐어요. 순간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 아입니까. 그래, 난 시장통 국밥집 간판쟁이 출신 아이가…." 이 씨는 대학 졸업 후 시장에서 상점 간판을 만들면서 광고의 기초를 닦았다. 목장갑은 거친 목재를 나르고 철판에 못질하던 그의 필수품이었다. 고비 때마다 오기가 발동하는 뚝심이 그때 길러졌다. 미국 뉴욕 '원쇼 페스티벌' 최우수상과 광고계의 오스카상인 '클리오 어워드' 동상 등 세계 유수의 광고제를 휩쓴 그에게 목장갑은 초심(初心)의 상징이었다. 이 씨는 지난해 방 두 칸짜리 작은 사무실로 옮겼다. 광고물 설치작업을 할 땐 가장 먼저 현장에 간다. 벙거지 모자에 목엔 수건을 두르고 손바닥 부분이 시뻘건 목장갑을 낀, 여느 공사판 인부의 모습으로. 그는 "마이클 잭슨이 다이아몬드 장갑이라면 저는 목장갑이죠"라고 했다. 소유한 사람의 인생 역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있다. 쓸모는 사소해도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거나,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지키게 해준 물건들 말이다. 동아일보는 창간 94주년 기획으로 올해도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을 선정했다. 나름의 성취를 이룬 100인에게도 서툴고 막막했던 과거가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삶의 궤적이 엿보이는 '100인의 물건'을 골라 봤다.● 초심을 일깨우는 것들 1981년 사법시험을 치르던 날, 김형태 변호사(58·법무법인 덕수)는 시험장 책상에 낡은 고동색 필통을 꺼내 놨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뒤 20년 가까이 써 오던 것이었다. 필통 안엔 어머니가 손수 깎아준 연필 3자루가 있었다. 크든 작든 시험 전날이면 아들의 연필을 깎아주는 게 어머니의 오랜 응원 방식이었다. 아들은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에서 기자에게 반세기 동안 간직해 온 플라스틱 필통을 건네 보였다. 필통을 쥔 그의 검지와 중지 첫 마디는 굳은살이 박여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손으로 글씨 쓰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손이 움직여야 머리에 영감이 와요. 사적인 글이나 기고문은 물론이고 재판 관련 서면도 다 손으로 씁니다." 김 변호사는 "어려서부터 글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 준 게 이 필통이라서 지금껏 쓰고 있다"고 했다. 변호사 일을 할 때도 글쓰기 습관 덕을 많이 봤다. "재판이라는 게 사실을 정확히 규정한 뒤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력은 좋은 무기입니다. 필통이 총보다 강한 거죠." '행복한 죽음' 전문가로 호스피스 치료의 대가인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암예방관리 전공)는 어릴 때 큰누나를 위암으로 떠나보냈다.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챙기지 못했던 누나였다. 어머니가 "누나 수술 받으러 서울 갔다"고 얼버무리던 날, 스물세 살의 큰누나는 비석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떴다. 윤 교수는 얼마 뒤 집 정리를 하다 초등학생 때 작은누나 소풍에 따라갔다가 누군가의 묘지 비석 옆에서 찍은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작은누나와 함께 찍은 그 사진 한 장이 저에겐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사람의 죽음을 평생 탐구하게 될 것 같은…." 윤 교수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이 사진을 40년째 간직하고 있다. 과거의 아픈 상처와 얽혀 있지만 이후 삶의 자양분이 된 물건도 많았다. 최홍 맥쿼리투자신탁운용 대표(53)의 사무실에 365일 걸려 있는 자주색 카디건이 그런 물건이다. 30년 전 부산에서 만난 예비 장모는 그에게 옷이 담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스물세 살 청년은 장모 앞에서 상자를 열어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이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지독히 가난했던 사윗감을 처가에선 강하게 반대했다.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인연은 끝내 이어졌다. 장모는 어렵게 결혼을 승낙하며 그에게 분홍 카디건을 선물했다. 이 옷은 그가 처가에, 그리고 세상에 뜨겁게 받아들여진 첫 순간의 징표로 남았다. 최 대표는 "고아처럼 자란 제가 사실상 '부모님'께 받은 첫 선물이고, 힘들 때마다 희망을 보게 해준 준 옷이라 실밥이 다 터져도 못 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의식'처럼 이 카디건을 입는다. 백원필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전안전연구본부장(53)은 지난달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참고서 '수학의 정석' 얘기를 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돌려 달라고 할지 몰라 허겁지겁 넘겨봤는데…." 백 본부장은 고교 1학년 때 수학의 정석을 선배들에게 잠깐씩 빌려 봤다. 줄도 못 긋고 중요한 공식을 노트에 빽빽이 옮겨 적던 기억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중학교 때 반장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 수학여행에 못 갈 정도로 가난했다. 홀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며 백 본부장 형제를 키웠다. "농사를 돕고 산에서 나무를 하며 틈틈이 공부를 했어요. 책 사는데 돈을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웃음)." 그는 "아련하게 마음이 아파 오는 시절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극복했다는 것이 지금 자신감의 원천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저랑 길게 통화할 수 있으세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44)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80년대 중반, 114 안내원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는 집에 있던 다이얼 전화기를 붙들고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곳이 어딘지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 "안내원이 처음엔 황당해하더니 제 진심이 느껴졌는지 대한무도협회 번호를 알려줬어요." 이 통화를 계기로 양 대표는 또래 댄서들을 알게 돼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6년 뒤에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했다. 114 통화를 했던 다이얼 전화기가 그에겐 잊지 못할 물건이다. 강영진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53·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은 10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늦깎이 유학을 떠난 지 6개월에 IMF 외환위기를 만났다. 처자식까지 데리고 미국에 왔는데 환율이 두 배로 뛰면서 공부를 관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점심으로 먹던 1달러짜리 쿠키를 강 교수는 내 마음 속의 물건으로 꼽았다.● 성공 자축하는 나만의 기념품 2010년 밴쿠버에 이어 올해 소치 겨울올림픽까지 제패한 이상화 선수(25·스피드스케이팅)는 밴쿠버 대회에서 딴 첫 금메달이 보물 1호다. 단지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밴쿠버(대회) 때까지는 금메달이 유일한 목표였는데 메달을 따고 나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어요. 나를 위해 희생해준 주위 사람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메달이 준 높은 명예보다 이를 통해 얻게 된 넓은 시야에 이 선수는 더 감사했다. '7년의 밤'과 '28' 등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정유정(48) 작가는 소설을 한 권 쓸 때 스케치북 6, 7권 분량의 그림을 그린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한 곳 한 곳 손으로 세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상상하는 세계를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한 뒤 글로 옮긴다. '7년의 밤'에 나오는 세령마을도 그렇게 탄생했다. 정 작가는 "출간된 소설 못지않게 모태가 된 스케치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간호사로 일하다 마흔 넘어 데뷔한 그에게 스케치북은 긴 무명시절 스스로를 단련시킨 도구였던 동시에 지금은 성공을 자축하는 자신만의 기념품이다.▽팀장 문권모 소비자경제부 차장▽팀원 유덕영(국제부) 황인찬 신광영 손효주(사회부) 우경임(인력개발팀) 권기범(소비자경제부) 김호경(산업부) 박성진 홍정수(수습기자)▽대학생 인턴기자고혜린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24)맹서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24)이혜림 성균관대 컴퓨터교육과 졸업(26)장영근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28)최현정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졸업(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