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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비는 낚시터에서 남들처럼 미끼를 던져놓고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물고기가 잡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잘 모르는 포인트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 전자업계에도 대기업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모르고 있는 빈틈을 파고들어 수익을 내는 기업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상 국내 전자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간과한 틈새시장을 노리는 전략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 거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들의 치밀한 전략을 살펴봤다.○ 국가별 맞춤형 제품으로 ‘틈새시장’ 공략 지난해 동부대우전자의 전체 매출 1조6000억 원 중 해외 시장 비중은 80%나 된다. 이미 국내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삼성전자, LG전자라는 ‘두 거인’을 피해 철저하게 현지 특화 전략을 펼쳐 이룬 성과다. 이 회사의 장점은 현지 특화 제품을 만들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 다른 기업들이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동부대우전자는 중남미, 중동 등을 겨냥해 차별화한 제품을 출시했다. 제품은 철저히 현지인들 기호에 맞췄다. 화려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멕시코의 경우, 멕시코 국화인 달리아 꽃문양을 넣은 냉장고를 출시했다. 페루에서는 페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잉카 유적지를 형상화한 문양을 담은 세탁기 디자인을 채택했다. 이런 전략에 힘입어 동부대우전자는 지난해 상반기 멕시코 냉장고 시장 점유율 1위(31%)를 차지했다. 자신의 물건에 남이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중동인 습성에 착안해 만든 중동 특화 제품 ‘자물쇠 냉장고’도 인기다. 문에 자물쇠를 걸어놓아 주인이 아니면 냉장고를 열 수 없게 만든 제품이다. 지난해까지 자물쇠 냉장고는 누적판매 대수 150만 대를 돌파하는 등 중동지역 냉장고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 창출과 중소 가전 시장 공략 침구 살균청소기 전문 기업인 레이캅코리아의 성과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007년 1월 침구류 청소기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고 집먼지진드기만 연구하는 연구소도 최초로 설립해 운영 중이다. 26명의 연구원은 집먼지진드기를 다양한 소재에 키우면서 생태 실험을 한다. “침구류도 청소해야 한다”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레이캅코리아는 지난해까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500만 대 이상의 청소기를 팔았다. 특히 위생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만 350만 대를 팔아치우며 일본 침구청소기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끊임없는 연구개발(R&D)을 통한 제품 경쟁력 확보와 이를 인정한 소비자들의 입소문 때문이다. 쿠쿠전자는 중소가전 한 우물을 파서 성공한 케이스. 밥솥 점유율 1위인 이 회사는 150여 명의 연구 인력이 투입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밥솥 관련 특허만 200개 이상 보유하고 있다. 쿠쿠전자는 대기업이 장악한 대형 가전 시장은 넘보지 않고 있다. 대신 정수기, 비데, 제습기 등 중소 가전으로 제품군을 늘렸다. 2010년 시작한 정수기 사업은 빠른 시간에 업계 2위권에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쿠쿠전자는 판매와 렌털 사업을 병행하며 생활가전 업체로의 성장을 노리고 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KT&G 해외 담배 판매량이 처음으로 국내 담배 판매량을 넘어섰다. 18일 KT&G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담배 판매량은 465억 개비로 국내 판매량 406억 개비를 추월했다. 해외 판매량은 국내에서 생산돼 수출한 것(397억 개비)과 해외 공장에서 생산해 현지에서 판매한 제품 수(68억 개비)를 합한 양이다. 1999년 담배 26억 개비 수출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해외 판매에 나선 KT&G는 2005년 285억 개비, 2012년 407억 개비, 지난해 465억 개비를 해외에 팔았다. 지난해까지 누적 해외 판매량은 5400억 개비다. 지난해 기준 지역별 판매 비중은 중동(48.8%), 아시아태평양(25.4%), 중남미·유럽(14.2%), 중앙아시아(11.5%) 순이다. 제품별로는 에쎄(55.5%), 파인(29.2%), 타임(5.3%) 순으로 잘 팔렸다. KT&G는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한 교두보 확보 차원에서 2008년 터키를 시작으로 2009년 이란과 2010년 러시아에 잇달아 공장을 설립했다. 2011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담배회사를 인수해 동남아시아 시장 개척을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KT&G 관계자는 “국내 담배 수요 감소로 인한 경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해외시장을 공략한 것이 글로벌 톱5 기업으로 성장한 밑거름이 됐다”며 “차별화된 신제품 개발을 통해 수출 효자 종목으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12일 오후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강원 홍천군 북방면 소매곡리. 이 산골마을에 들어서면 해바라기 모양의 태양광발전 시스템을 갖춘 가로등들이 유독 눈에 띈다. 소매곡리는 환경부, 강원도, 홍천군, SK E&S가 참여한 정부의 첫 친환경 에너지 타운이다. 겨울 난방비만 가구당 월 40만 원이 넘었던 소매곡리는 이제 자체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에너지 자립마을’이 됐다. 악취를 풍기던 가축분뇨 처리장의 바이오가스는 도시가스로 전환돼 주민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태양광발전소와 하수 방류시설을 활용한 소수력 발전은 이 마을 65가구가 모두 쓰고도 남는 넉넉한 전력을 생산해낸다. 마을 주민 이승관 씨(78·여)는 “추운 겨울에도 가스가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파리 협정’이 탄생하면서 세계가 새로운 에너지 혁명을 위한 질주를 시작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의 온도 상승폭을 2030년까지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까지 낮추는 게 주어진 지구촌의 미션이다. 그 추진 과정에서 1경4000조 원대의 에너지 시장이 새로 열린다는 전망 속에 국내외 정부는 물론이고 산업계까지 들썩거릴 조짐을 보인다. 전 세계 에너지 구조 자체를 바꾸는 거대한 변화의 조류가 밀려오는 것이다. 미래학자와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에너지원은 ‘태양’이다. 관련 업체들은 연구개발(R&D) 투자 등을 통해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풍력과 지열,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한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의 개발은 아직 미미하지만 성장의 싹을 틔워 나가고 있다. 그 치열한 현장을 들여다본다. ▼ ‘청정 발전’ 태양이 뜨고… ‘탄소 제로’ 바람이 분다 ▼‘시커먼 검댕이 나오는 석탄과 석유는 사라지고, 배기가스 대신에 물만 나오는 자동차를 굴리면서 모든 에너지는 태양과 바람과 파도에서 얻게 되는 맑고 깨끗한 자연 친화적 세상.’ 청정에너지의 사용이 일반화되는 미래 환경을 이야기할 때 가장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면서도 실상은 80% 이상을 검은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는 ‘석유 중독 사회’에서 멀게만 느껴지던 판타지였다. 그러나 2021년 신기후체제의 시작을 앞두고 이런 상상 속의 비전은 점차 눈앞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른바 ‘에너지 혁명’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이 속속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태양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주한 영국대사관의 김지석 기후변화에너지 담당관은 주변에서 ‘태양광 전도사’로 불린다. 각종 강연과 세미나 활동은 물론이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태양광의 엄청난 가치를 설파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충남 공주시의 고향집 근처에 2000m² 넓이의 땅을 사서 직접 태양광발전 패널을 설치했다. 딸의 이름을 따서 ‘수현태양광발전소’라는 이름을 짓고 한국전력과 사업자 계약도 맺었다. 앞서 만든 ‘공주발전소’에 이어 두 번째. 이 두 개의 작은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한전에 공급해 매달 250만 원 안팎의 수익을 얻는다. 김 담당관은 “앞으로 40년은 그냥 앉아서 돈 버는 셈”이라며 “노후 준비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큰소리를 쳤다. “꼭 돈 때문은 아닙니다. 기후변화 같은 재앙을 막는 데 태양이 해결책이라고 봐요. 저 같은 개인들도 얼마든지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줄이는 온실가스 양이 연간 60t쯤 됩니다.” 그는 올해 초부터 페이스북에 ‘발전소 리포트’를 올리고 있다. 투자금 2억9000만 원(땅값과 발전설비, 전기 수송 시스템 구축 비용 등)의 사용 명세와 패널 설치 과정, 매달 전기요금 정산서 등의 정보를 세세하게 공개하고 있다. 김 담당관 같은 개인 에너지 투자는 앞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를 앞두고 내놓은 ‘2030 에너지 신산업 확산 전략’에서 개인들이 전력을 생산해 사용하고 남으면 팔 수도 있는 ‘에너지(E)-프로슈머’ 시장의 활성화를 공약했다. △저탄소 에너지 발전 △전기자동차 확대 △친환경 공정과 함께 4대 주요 신사업 중 하나다. 이를 통해 2035년까지 신재생(renewable)에너지의 비율을 전체 전력량의 13%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재생에너지는 계속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고 무한정 쓸 수 있는 에너지 원천을 뜻한다. 태양광과 지열, 풍력, 조력, 수력, 바이오 에너지 등 6가지가 꼽힌다. 이런 에너지원은 폐기물도 발생하지 않는다. 환경부 김법정 기후대기정책과장은 “신재생에너지는 탈(脫)탄소의 핵심”이라며 “이게 제대로 진행되면 탄소제로도시나 친환경에너지타운 확대, 전기차 100만 대 보급 같은 다른 환경 프로젝트들의 속도가 확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에너지 ‘게임의 룰’이 바뀐다 전문가들은 여러 종류의 신재생에너지 중에서도 특히 태양과 바람의 2가지 에너지를 주목하고 있다. 기업들의 기술 투자도 이 분야로 몰리는 추세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에서 태양광과 풍력산업은 전체 신재생에너지 투자액의 91%, 매출액의 85%를 차지하는 양대 핵심 축이다. 태양광의 매력은 일단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양이다.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에너지를 전부 변환하면 세계가 1년간 사용하는 에너지를 단 1시간 만에 생산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계산. 지구 전체 표면의 0.1%만 태양전지로 덮어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2012년 ‘토파즈’라는 이름의 태양광발전소를 24억 달러에 인수한 것은 태양에너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된다. 일본의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6월 인도의 태양광발전 설비 및 에너지 관련 정보기술(IT) 분야에 100억 달러(약 12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비행기 같은 대형 운송수단을 직접 태양광으로 작동시키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스위스가 개발한 태양광 비행기 ‘솔러임펄스(Solar Impulse)-2’는 지난해 7월 닷새를 쉬지 않고 날아 태평양을 건너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풍력의 발전 속도 역시 폭발적이다. 세계풍력에너지협회는 풍력발전이 매년 20%씩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발전 단가도 MWh당 100달러로, 2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럽연합(EU)의 경우 2030년까지 풍력발전 설비에 339억 유로(약 44조7600억 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연간 19.5GW(기가와트)를 풍력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글로벌 에너지 전문가인 토니 세바 미 스탠퍼드대 겸임교수는 “석탄과 석유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 정도로는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글로벌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며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읽고 신재생에너지의 개발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바 겸임교수는 그의 저서 ‘에너지 혁명 2030’에서 △2030년 모든 새로운 에너지는 태양과 바람으로 제공되고 △휘발유는 더이상 쓰이지 않으며 △신차는 100% 전기차인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에너지산업의 ‘코닥’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필름업체 코닥이 인화 시간을 줄이고 해상도를 높이며 발버둥쳤어도 결국 디지털카메라의 기술 흐름을 놓쳐 사멸 직전까지 갔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그런데 왜 고작 1.4%? 실제로 과거 에너지 산업을 좌지우지했던 석탄 기업들의 쇠락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미국 내 석탄 생산 2위를 달리던 ‘아크콜(Arch Coal)’의 경우 10년 전만 해도 주당 430달러에 달했던 주가가 지난해 말 1달러까지 내려앉았다. 이 회사는 최근 결국 파산보호 신청을 냈다. 1위 업체인 ‘피보디(Peabody) 에너지’의 주가는 같은 기간 750달러에서 10달러까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처럼 몰락하는 ‘검은 에너지’의 빈자리를 신재생에너지가 당장 메워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신재생에너지의 투자 대비 효율이 낮은 것이 문제로 꼽힌다. 태양광의 경우 밤에는 전력 생산이 불가능하고 비가 오거나 구름이 많이 끼는 날에도 발전량이 크게 떨어진다. 한낮에 생산한 에너지를 모아놓을 저장시설(ESS)의 개발, 필요할 때 이를 효율적으로 꺼내 쓰도록 하는 ‘스마트 그리드 시스템’의 구축 등도 아직은 기대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다른 에너지원에 비해 크게 높은 발전 단가도 부담이다. 태양광 자체는 공짜지만 저장시설과 송전선 연결 등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안하면 발전 단가는 kWh당 250원대까지 올라간다. 10년 전(600원대)보다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석탄(60.3원)보다 3배 이상 높다. 더구나 한국은 시장이 작아 거액의 투자가 요구되는 기술개발에 선뜻 나서려는 기업이 많지 않다. 잇단 ‘장밋빛 전망’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재생에너지의 비율이 고작 1.4%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송영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 기후변화적응센터장은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값싼 에너지원을 놔둔 채 이런 고가의 에너지에 투자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새로운 미래 에너지에 투자하고 개발할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재생에너지 업체들이 안정적인 운영과 투자가 가능한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정부가 세금 혜택과 투자 유도 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홍천=박성진 psjin@donga.com·이정은 기자}
효성그룹은 15일 조석래 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한 법원 결정에 대해 즉각 항소를 결정했다. 효성 측은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금융권의 강요에 의해 발생한 일로 개인적 이익을 추구한 사안이 아닌데도 실형이 선고돼 안타깝다”며 “항소심에서 적극 소명하겠다”고 밝혔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조현준 사장의 항소는 추후 검토하기로 했다. 효성 측은 경영진이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은 정황이 있으면 탈세 등에 대해 관대했던 최근 법원 판결 경향에 기대를 걸었다. 13일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것처럼 조 회장도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법원 결정에 상당수 효성 임직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조 회장이 법정 구속을 피했고, 조 사장이 집행유예를 받으면서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는 반응도 많다. 효성은 지난해 처음으로 영업이익 1조 원을 넘겼고 올해는 공격적으로 해외 사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조 회장이 회사의 굵직한 사업에 대한 투자 여부를 결정해온 점을 감안하면 총수의 부재는 치명타다. 효성의 한 임원은 “오너가 계속 경영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게 무엇보다 다행”이라고 말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그룹 차원의 시무식은 없었다. 신년사도, 임직원에게 보내는 e메일도 없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72·사진)은 말이 없었다. 8일 국내 최대 농자재업체 동부팜한농이 LG화학에 팔리며 2년여간 이어진 구조조정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회장은 지난해 1월 4000자에 가까운 신년사를 통해 주채권 은행인 KDB산업은행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스스로 “대단히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애착을 보였던 동부팜한농마저 결국 매각되자 그는 더 이상 ‘구조조정’을 입밖에 꺼내지 않고 있다. ○ 기나긴 구조조정 마무리 김 회장은 1969년 자본금 2500만 원으로 미륭건설을 설립해 동부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다. 25세 때였다. 김 회장은 스스로를 ‘산업 농사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쇳물(동부제철), 반도체(동부하이텍), 종자(동부팜한농) 등 ‘씨앗 산업’에 주력했다. 김 회장은 2000년 동부그룹을 재계 10대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2013년 동부그룹 계열사는 66개까지 늘어났다. 구조조정의 시작은 2013년 10월 발생한 동양그룹 사태. 회사채 시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동부그룹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이 평균 두 계단 이상씩 떨어졌다. 금융당국은 유동성 문제가 발생한 동부그룹을 한진그룹, 현대그룹과 함께 선제적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으로 지목했다. 그해 12월 김 회장은 주채권 은행이었던 산은에 구조조정의 전권을 위임했다. 정책금융기관 주도의 구조조정이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자산을 매각하는 방식이 난항을 겪었고 포스코에 제안한 동부제철 인천공장-동부발전당진 ‘패키지 딜’도 무산됐다. 연이은 실패에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은 투기 등급까지 내려갔다. 결국 기업재무구조 개선 중인 동부제철과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동부건설을 포함해 40개 회사가 김 회장의 품을 떠났다. 그가 그토록 아끼던 씨앗산업도 동부하이텍만 남고 동부제철과 동부팜한농은 계열 분리됐다.○ 동부 구조조정에 대한 엇갈린 평가 김 회장은 채권단을 향한 원망을 쏟아내면서도 자신의 실책을 부인하지 않았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그는 “핵심설비 조업 불안으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데다 금융시장 등 재무환경 변화를 사전에 예측하지 못해 그룹이 위기에 처했다”고 밝혔다. 평가도 엇갈린다. 동부그룹 구조조정에 참여했던 금융권 관계자는 “어느 기업이 외부 기관 주도로 이뤄지는 구조조정을 반기겠느냐”고 반문한 뒤 “당시 동양에 이어 동부마저 무너졌다면 제2의 외환위기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재계 관계자는 “선제적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범사례를 남기고 싶었던 산업은행의 조급함이 결과적으로 동부에 가혹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했다. 김 회장은 가까스로 지켜낸 금융계열사들과 동부대우전자, 동부하이텍 등 전자계열사를 중심으로 그룹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김 회장은 현재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 창업 1세대”라며 “뼈아픈 구조조정을 했지만 현재의 위기를 딛고 반드시 재기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삼성SDI가 1회 충전으로 최대 600km까지 주행이 가능한 전기자동차 배터리셀 시제품을 선보였다. 국내외 경쟁업체들이 샘플용으로 개발한 전기차용 배터리셀의 주행 가능 거리가 500km라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게 삼성SDI 측 설명이다. 삼성SDI는 11일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리고 있는 ‘북미국제오토쇼’(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이 제품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이 제품은 2020년경 양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삼성SDI는 이번 모터쇼에 기존 제품보다 높이를 최대 30% 줄인 전기차용 초슬림 배터리팩도 출품했다. 이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크기는 줄었지만 에너지 밀도는 높아져 대량 생산과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고 삼성SDI 측은 밝혔다. 또 함께 출품한 저전압 시스템(LVS) 솔루션은 자동차 연비를 3∼20% 높여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LVS 솔루션은 기존 납 성분 배터리를 리튬이온 배터리로 대체하거나 덧붙여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장치다. 조남성 삼성SDI 사장은 “다양한 방안과 제품으로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선도하고자 한다”며 “북미를 비롯한 글로벌 자동차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OCI가 재무구조 개선 및 향후 투자 재원 마련을 위해 미국 텍사스 주에 건설하고 있는 106M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 ‘알라모(Alamo) 7’을 팔았다. OCI는 알라모 7을 미국 에너지사 콘에디슨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11일 밝혔다. 2714억 원에 매각된 알라모 7은 OCI가 2012년 수주한 450M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중 두 번째로 큰 발전소로 지난해 말 착공해 2016년 9월 준공 예정이다. 태양광 발전사업에서 프로젝트 수주 후 발전소를 건설해 직접 운영하거나 매각해 수익을 창출하는 OCI의 매각 성사는 2014년 8월 알라모 4 매각 이후 네 번째다. 윤석환 OCI 솔라파워 사장은 “확보된 재원은 차기 북미 지역 발전소 건설에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아버지는 농부였다. 친구들과 흙장난하고 놀 고사리손으로 밭에서 커피 원두를 땄다. 온 가족이 농사에 매달려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사일을 돕던 2001년 어느 날.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누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질퍽거리는 도로를 걷던 중 오토바이 1대가 동생을 덮쳤다. 쓰러진 동생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꿈 많던 다섯 살 소년의 다리는 두개골이 함몰되면서 신경을 다쳐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이화여대 목동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베트남 소년 쩐득따이 군(18) 얘기다. 쩐 군은 2010년 교통사고로 아버지마저 잃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악착같이 일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누나 쩐띠낌프엉 씨(24·여)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결국 누나는 한국어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해 ㈜효성이 주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졸업 후 효성 베트남법인에 취직해 돈도 벌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행운은 계속됐다. 쩐 군의 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누나가 근무하는 ㈜효성은 2011년부터 해외 사업장에 의료봉사단 ‘미소원정대’를 파견하고 있다. 현지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은 한국으로 데려와 좋은 시설에서 무상으로 치료해줬다. 누나는 동생의 치료를 부탁했다. 쩐 군은 지난해 11월 한국에 입국해 12월 두개골 복원 및 다리 신경 회복 수술을 받았다. 의료진은 움직이지 않던 다리도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녹록지 않은 대내외 경영환경 때문인지 4일 기업들의 신년회는 차분하게 치러졌다. 재계 총수들은 예년처럼 각 그룹 임원들과 함께한 신년모임에서 많은 시간을 위기의식 고취에 할애했다. 떠들썩한 송년회가 사라진 지난해 말 풍경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침묵 깨고 신년회 나온 최태원 4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K그룹 신년회에 참석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말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이혼하겠다는 뜻과 함께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까지 고백한 뒤 침묵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신년 하례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3년 이후 3년 만이다. 최 회장은 우선 “SK그룹은 지난해 창업 이래 최초로 영업이익 10조 원을 경신하는 성과를 거뒀다”며 임직원들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국내외 경영환경이 상당히 불투명할 것”이라며 “‘패기’를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가자”고 당부했다. 1시간여 동안 이어진 신년회에서 최 회장은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본인이 준비해 온 신년사를 낭독할 때는 박수가 나올 때마다 자제시키는 등 신중한 모습도 보였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의 이번 신년회 참석에 대해 개인사 때문에 그룹 경영에 더이상 누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 회장 본인도 혼외자 공개 당시 “제 가정 일 때문에 수많은 행복한 가정이 모인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 회장이 이날 신년사에서 “서로에게, 그리고 시장에게 솔직할 때 소통의 코스트(비용)가 줄어들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신년회 데뷔한 이재용, 제2창업 선언한 금호家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날 사실상 ‘신년회’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 부회장은 경기 기흥사업장과 수원사업장을 잇달아 방문해 삼성전자 반도체 등 부품(DS) 사업부와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등 전자 계열사들과 함께 시무식 행사를 가졌다. 5일에는 금융 계열사 등과도 같은 방식으로 신년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매년 초 신년사를 발표했던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실리적 경영자로서의 이미지를 쌓아온 이 부회장이 가장 그다운 시무식 행사를 연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계열 분리를 선언한 금호가 형제는 나란히 ‘제2창업’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창업 70주년을 맞아 제2창업의 출발을 다짐하고자 올해 경영방침을 ‘창업초심(創業初心)’으로 정했다”며 영속기업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이윤경영, 품질경영, 안전경영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은 “계열 분리로 인해 우리는 명확한 ‘좌표’를 확보하게 됐다”며 “그러나 이제는 강을 건너기 위해 사용한 뗏목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또 “바야흐로 새로운 창업의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이색 신년회도 많아 코오롱그룹은 시무식에서 올해로 4년째 경영화두를 담은 배지를 제작해 임직원들에게 배포했다. 올해 나눠준 배지에는 경영지침인 ‘Connecture’(connect와 future의 합성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돋보기를 형상화한 모습을 담았다. 편의점 세븐일레븐 임직원들은 사무실이 아닌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에서 한 해 업무를 시작했다. 이 회사 임직원 30여 명은 이날 오전 7시부터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에게 ‘세븐카페’ 한 잔과 도넛, 핫팩, 자체브랜드(PB) 과자로 이뤄진 꾸러미 1000여 개를 두 시간 반 동안 무료로 나눠줬다. 롯데슈퍼 임직원 150명의 신년회 이벤트는 헌혈이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가 서울 송파구 롯데슈퍼 본사를 찾아 채혈 행사를 진행했다. 박성진 psjin@donga.com·백연상·신수정 기자}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두렵기만 한 보편적 진리다. 더이상 치료가 어렵다고 통보받았을 때 밀려오는 절망, 허무, 공포 앞에서 품위 있는 죽음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래도 가장 바라는 한 가지는 차가운 병실에서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것. ‘웰다잉법’이라고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의 법제화가 필요한 이유다. 반복되는 수술과 항암 치료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김범진(가명) 씨. 키 170cm에 몸무게 70kg이었던 건장한 중년 남성의 몸은 45kg으로 말라붙었다. 힘겹게 붙어있는 살가죽 아래로 푸른 핏줄이 더 선명해 보였다. 부인 최현희(가명) 씨는 힘없이 누워 있는 남편 옆에서 연신 “말랐어요. 너무 말랐어요…”라며 애를 태웠다. 더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남편이 가장 먼저 한 말은 “절망 속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설령 의식이 없어졌을 때 하루라도 더 살게 하려고 절대 애쓰지 마라. 사느라 힘들어 못 한 여행 다니고 사진 찍으며 가족과 함께 있다가 눈감고 싶다”였다. 최 씨는 “2012년 11월 처음이자 마지막 수술을 받은 이후 애 아빠는 줄곧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말했다. 최씨의 가장 큰 고민은 남편의 마지막. 남편은 연명 치료를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 의식을 잃을 경우 연명 치료를 중단할 법적 근거가 없다.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때 가족의 뜻을 받아들여 의식 없는 말기 환자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료진은 살인방조죄로 처벌받았다. 이후 병원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고통만 완화하러 병원에 왔다가 의식을 잃는 날에는 본인과 가족의 뜻과 상관없이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계속 받다가 세상을 떠날 가능성이 크다. 김 씨 뜻대로 하면 가족과 의료진이 죄인이 되고, 뜻대로 하지 않으면 김 씨가 불행해진다. 법이 그렇다. 정답 없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던 말기 환자 가족들의 고통이 잠시 줄어드는 듯 했다. 18대 국회부터 소관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던 웰다잉법이 9일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것이다. 이 법안은 연명 치료 대신 통증 완화, 상담 치료를 제공하는 호스피스 서비스를 암 환자뿐 아니라 각종 질병 말기 환자로 확대 적용하고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개인의 결정권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명 치료와 존엄사의 법적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법안을 법제화할 수 있는 법제사법위원회가 21일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두고 벌어진 여야 정쟁으로 파행되면서 웰다잉법 연내 법제화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말기 환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정치권이 특정 법안을 두고 이견을 보이는 사이 최 씨는 범법자가 될 수도, 남편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게 됐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수술, 방사선 치료 등 적극적 치료(cure)가 아닌 돌봄(care)을 택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누리기 위해 애쓰는 가족들에게 이 법이 절실하다”며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바라는 말기 환자들을 위해 연내에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세 살 때 눈이 멀었다. 심한 열병이 빛을 앗아갔다. 항상 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나 벽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마음 놓고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이형례 씨(66·여)에게 하얀색 지팡이에 의존해 혼자 길을 걷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2008년 상상은 현실이 됐다. 서울 남산에 걷기 좋은 산책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이 3.5km에 이르는 산책로를 따라 깔려 있었다. 급격히 꺾이는 부분이 없어 부딪칠 염려 없이 편히 걸을 수 있었다. 이 씨는 매일 이 산책로를 따라 운동했다. 15일 오전 10시에도 자주색 털모자를 쓰고 오리털 점퍼까지 껴입은 이 씨는 오른손에 쥔 하얀색 지팡이로 바닥을 좌우로 가볍게 ‘콩콩’ 하고 두드리며 산책을 시작했다. 이 씨는 “서울 시내에 시각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생겨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2007년부터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건물이나 시설물을 인증해 주는 제도다. 서울시 청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국립현대미술관 등 전국 203곳이 인증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작 장애인들이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에는 공원 입구까지 300여 m에 걸쳐 점자블록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출입구 공사 가림막 등이 블록 연결을 막고 있었고 정작 공원 내부에는 블록이 없어 시각장애인 혼자 공원시설을 즐길 수 없는 구조였다. 15일 이곳을 찾은 시각장애인 나병택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52)은 “점자블록만으로는 목적지를 제대로 찾는 데 한계가 있고 그마저도 공사 때문에 중간에 끊겨 있어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승철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재활지원센터 팀장은 “장애인 편의시설이 수적으로는 늘고 있지만 정작 실효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장애인들이 직접 의견을 내고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연간 승객 2500만 명이 이용하는 제주국제공항 관제시설의 통신장비가 이상을 일으켜 착륙을 위해 상공에 대기 중인 항공기와 연락하지 못하는 아찔한 상황이 처음으로 발생했다. 관제시설 고장은 76분이나 이어졌지만 직원들이 비상시스템을 제때 작동시키지 못하면서 항공기 20여 대는 관제탑의 도움 없이 착륙했고 밤늦게까지 모두 77편이 지연 운항했다. 13일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와 제주지방항공청에 따르면 12일 오후 6시 50분 발생한 제주공항 관제시설 통신장비 고장으로 오후 8시 6분 자동 관제시스템으로 복구될 때까지 76분 동안 송수신 장애가 발생했다. 통신 장애가 생긴 직후부터 오후 7시 40분까지 50분간 제주 상공에 떠 있던 항공기 10대는 제주공항 안내등 불빛(라이트건) 유도와 공항에 착륙해 있던 같은 회사 항공기와의 비상무선 교신을 통해 가까스로 착륙했다. 또 오후 7시 40분부터 26분간은 한국공항공사 직원들이 무전기 형태의 비상송수신기로 비상교신을 하며 제주공항 안내등으로 유도해 하늘에 떠 있던 항공기 10대를 착륙시켰다. 제주공항 통신기기는 주 장비와 예비 장비를 포함해 근접관제소 12대, 관제탑 8대가 있다. 근접관제소는 제주공항에서 가로세로 135km 거리부터 하늘에 떠 있는 항공기와 교신을 한다. 또 관제탑은 제주공항에서 9.4km 범위 내 항공기와 근접 교신을 한다. 비상 상황 매뉴얼에는 관제탑과 근접관제소 통신장비 주 장비가 작동되지 않을 경우 예비 장비로 전환해 항공기와 교신하도록 돼 있다. 예비 장비마저 작동되지 않을 때 마지막 단계에 활용하는 방법이 비상송수신기와 라이트건 사용, 같은 항공기끼리 교신이다. 이날 제주공항 관제시설 통신 먹통으로 항공기 77편이 지연 운항되면서 승객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승객 조모 씨(30)는 이날 오후 8시 15분 제주에서 출발해 대구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를 탈 예정이었으나 오후 11시 30분이 돼서야 비행기에 올랐다. 조 씨는 “자꾸 이륙 시간이 지연되니까 항의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오후 6시 45분 김포공항과 오후 6시 55분 광주공항에서 이륙해 제주로 가던 아시아나항공 OZ8951편(승객 168명)과 OZ8147편(승객 119명)은 제주공항과 통신이 되지 않아 아예 회항했다. 김포와 광주공항으로 되돌아온 항공기 2편은 다시 이륙해 예정 시간보다 2, 3시간 늦게 제주에 도착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회항한 항공기 기장들이 통신 불능 상황을 기내방송으로 설명해 환불을 요구한 승객은 없었다”며 “10여 년 동안 근무하면서 관제탑과 통신 두절된 상황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제주공항 관제탑에서 통신시스템을 담당한 한국공항공사 직원들의 실수로 통신장비가 마비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직원들이 주 장비와 예비 장비에 장착하는 전자카드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통신마비 상황이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통신기기 이상이 생긴 상황에서 예비 장비가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이럴 때 직원들이 수동으로 예비 장비를 가동시켜야 하는데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토부는 직원들 실수가 아닌 통신기기 결함으로 예비 장비 전환이 아예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이형주 peneye09@donga.com·조은아·박성진 기자}

국방부 영문 홈페이지 청사 약도의 ‘산각지(Sangakji)’는 삼각지(Samgakji)로 바뀌었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홈페이지에 ‘Changdeokgung’로 표기돼 있던 창덕궁은 ‘Changdeokgung Palace’로 달라졌다. 경복궁 등도 ‘궁’ 부분을 ‘palace’로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2013년 8월 마련된 ‘문화재 명칭 영문표기 기준 규칙’을 지킨 것이다. 올 8월 본보가 보도한 정부 부처 및 공공기관 홈페이지의 영문 오기(誤記) 실태가 13일 현재 상당 부분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넷 곳곳에 잘못 표기된 외국어 안내를 찾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영문 표기 개선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캐나다에서 온 조너선 쿤텔 씨(25·유학생)는 13일 “3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표지판만으로 목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며 “늦게나마 짧은 시간에 외국어 표기를 바로잡아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넷과 달리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안내 표지에는 여전히 ‘어색한 외국어’가 자주 눈에 띈다. 러시아에서 온 일리야 안드류스첸코 씨(21·관광객)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안내문에서 어색한 표기를 자주 보다 보면 마치 한국이 영어를 못하는 나라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태희 경희대 관광학과 교수는 “과거에 비해 외국어 오기가 많이 고쳐졌지만 손님이 오기 전 집 청소하듯 일상생활 공간의 오기도 바로잡으면 좋을 것”이라며 “주기적으로 정리 및 수정 기간을 정해 오류를 잡아가는 활동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국가가 관여하는 공식적인 영역에서는 영어 표기가 ‘틀렸다, 맞았다’ 식의 접근보다 외국인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표기라는 접근이 필요하다”며 “국가의 이미지와도 직결될 수 있는 외국어 표기는 ‘소통’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개선해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평범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약품의 특성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성실하게 고객들을 설득하며 약을 팔았다. 그런데 단 한 번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보증을 서준 게 화근이었다. 월급쟁이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송모 씨(40)는 늘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순간 마약을 떠올렸다. 제약회사 직원인 송 씨가 마약 원료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송 씨는 전 직장동료였던 김모 씨(52)에게서 필로폰 원료물질인 슈도에페드린 5만 정을 공급받았다. 문제는 제조기술. 송 씨는 인터넷을 통해 필로폰 제조기술을 습득했다. 제조에 필요한 기구는 수도권 의약품 도매상과 인터넷에서 구했다. 준비를 마친 송 씨는 경기 안산시의 한 오피스텔을 필로폰 제조실로 삼았다. 송 씨는 이곳에서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까지 10차례에 걸쳐 필로폰 60g을 만들어 판매했다. 필로폰 1회 투약량이 0.03g임을 고려했을 때 송 씨가 제조한 필로폰은 2000여 명이 한번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폭발성이 강한 황산, 벤젠 등을 집에 쌓아놓고 이웃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심야시간에만 작업했다. 이웃들은 송 씨의 엇나간 행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송 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구글 등 해외사이트를 통해서만 자신이 제조한 필로폰을 광고했다. 하지만 송 씨의 범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송 씨와 박모 씨(49) 등 2명을 구속하고 제조기구 및 원료, 필로폰 10여 g을 압수했다고 13일 밝혔다. 송 씨에게 재료를 공급한 김 씨 등 4명은 약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나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서 행복합니다.” 프로야구 한화의 안방인 대전야구장에서 주요 승부처마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기고 있을 때나 지고 있을 때나 마찬가지다. 응원가가 처음 만들어진 2011년 무렵엔 패색이 짙을 때 이 노래가 나오면 화를 내는 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이 노래는 패배에 지친 한화 팬들을 치유하는 위로가 됐다. 한화의 응원단장 홍창화 씨(35)는 “처음 ‘행복하다’라는 응원가가 나왔을 때 팬들이 쑥스러워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팬들이 이 노래를 힘차게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행복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데 익숙한 이는 많지 않다. 좋은 감정을 느껴도 이를 억제하고 숨기는 게 몸에 밴 탓이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을 미덕으로 삼는 전통문화의 영향이다. 군사정권 시절 일부에서는 ‘행복하다’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기도 했다. ‘배부른 사람, 부르주아, 나만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나 쓰는 말이라는 편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을 말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됐다. ○ 표현할수록 커지는 행복 성장의 시대를 넘어 행복의 시대로 가기 위해선 ‘행복하다’라는 표현에 친숙해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개인의 행복감 표현을 억누르는 사회 분위기에선 진정한 행복을 찾기 어렵다. 한화 팬들이 ‘행복하다’라고 함께 노래를 부르면 행복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처럼 긍정적 감정이 생기면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행복감이 배가될 수 있다는 얘기다. 동아일보는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행복지도를 바탕으로 딜로이트컨설팅,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팀, 대한신경정신건강의학회와 함께 ‘행복 표출하기’처럼 작지만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꿀 수 있는 ‘행복 10대 제언’을 마련했다. ‘행복감 표현하기’의 효과는 의학적으로도 입증됐다. 행복, 즐거움 등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과거의 즐거운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해마, 감정을 조절하는 뇌 전두엽을 자극한다. 이때 신경전달물질인 세라토닌이 더 많이 분비돼 행복한 감정이 증폭된다. ‘행복하다’라고 말할수록 ‘행복 호르몬’이 더 생성되는 것이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기분이 나쁠 때 행복을 강요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지만 행복한 감정을 느낄 때 이를 깊이 음미하고 표출하면 일종의 자기최면 또는 자기암시 효과가 나타나 행복의 총량이 커진다”고 말했다.○ 비교 분노를 넘어 나에게 집중하기 ‘행복 10대 제언 선정단’은 한국인의 행복을 가장 크게 저해하는 ‘비교하는 습성’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나의 행복을 내 안에서 찾는 작업이 1차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선정 작업에 참여한 곽금주 교수는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는 생존에 대한 분노, 경제성장기에는 성장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는데, 21세기에는 상대적 박탈감에 의한 비교분노에 휩싸였다”며 “진정한 행복을 위해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나의 행복을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전화기를 끄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한 달에 한 번 자신을 위한 선물하기 △한 달에 한 번 자원봉사 또는 기부하기 △10년, 20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보고 때때로 수정하기 등이다. 동행지수에 따르면 나를 위한 투자를 많이 할수록 행복했다. 특히 나를 위한 일 가운데 돈을 쓰는 것보다는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 행복 요인이었다. 나를 위한 소비를 적게 하더라도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의 행복지수는 56.56점으로 소비는 많이 하지만 시간이 없는 사람(51.74점)보다 높았다. 장기적인 자신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것도 행복의 중요한 밑거름이다. 먼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의 동행지수(59.06점)는 가까운 미래만 보는 사람(55.36점)보다 높았다. 30, 40대 또는 가정을 이룬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스마트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최신 기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69.09점)은 관심이 없는 사람(46.97점)보다 행복했다. 또 새로운 뉴스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행복했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전화 한 통으로 도전해 행복 찾기” 봉사, 기부 등 타인을 위한 삶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위’라는 편견도 걷어내야 한다. 동행지수에 따르면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63.35점)은 그러지 않는 사람(49.51점)보다 행복감이 높았다. 특히 월소득이 300만 원 이상이지만 봉사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54.44점)이 300만 원 미만이지만 봉사하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62.44점)보다 덜 행복했다는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남을 위해 마음을 열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강호권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은 “은퇴 후에나 봉사를 시작하려는 분들이 많지만 젊을 때부터 실천하지 않으면 은퇴 뒤엔 못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터넷에 ‘자원봉사’로 검색하면 수많은 단체가 나오는데 전화 한 통으로 새로운 삶에 도전해 행복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 “믿을 수 있는 이웃 -정부 -의회… 스트레스 요인 적어” ▼행복도 1위 덴마크의 비결은… 신뢰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①미국 ②중국 ③덴마크 ④대한민국 정답은 ③번이다. 1973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행복도를 조사한 덴마크는 유엔의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2012, 201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년 중 9개월이 춥고 겨울에는 오후 3시만 되면 해가 지는 나라. 인구가 500만 명밖에 안 되는 덴마크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이유는 뭘까. 행복학자들은 덴마크의 행복 비결로 ‘신뢰’를 꼽는다. 가족, 이웃, 지역사회, 국가에 대한 강한 신뢰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라는 거다. 덴마크 학자 게르트 팅고르 스벤센의 연구에 따르면 세계 86개국 중 덴마크 사람의 78%가 이웃을 신뢰한다고 답해 다른 나라의 평균(25%)보다 크게 높았다. 정부, 경찰, 사법부, 행정부 등 행정기관에 대한 신뢰도 역시 84%에 달했다. 토마스 레만 주한 덴마크대사는 “덴마크 사람들은 아이가 자고 있는 유모차를 건물 밖에다 두고 안에 들어가 일을 본다”며 “아무도 이 아이를 데려가거나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웃, 기업, 정부를 믿으면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지고 투명성이 높아져 부정부패로 인한 비용까지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가 국민의 행복을 높이려면 덴마크처럼 국내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병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국내에선 국민 행복을 높이기 위해 불안(不安)과 불만(不滿)에만 집중하면서 불신(不信)에 대한 고민이 적다”며 “정부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게 정책의 일관성, 목표의 현실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특별취재팀 △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사회부=박성진 기자}

‘경제성장→국민행복?’ 그렇지 않다. 저성장, 빈부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이런 기대감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선진국들은 경제와의 직접 연계에서 벗어나 정부 차원의 ‘국민행복’ 목표를 제시하거나 ‘어떻게 하면 주관적 행복도를 향상시키나’에 대한 연구와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흐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최초로 ‘국민행복’을 국정 목표로 내걸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핵심 공약에 ‘국민행복 10대 공약’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4대 국정기조 중 하나로 ‘국민행복’을 내걸고 △고용복지 △국민안전 △사회통합 △창의교육이라는 4대 세부전략과 65개 과제를 제시했다. 임기 중반을 지난 현재, 그 성적표는 어떨까.○ 행복도 높이는 효과 미미한 국민행복 정책 정부가 국민행복을 꿈꿨지만 그 효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다. 동아일보가 ‘국민행복’ 국정과제에 속한 10개 정책을 전문가 그룹과 함께 점검한 결과다. 10대 정책과 관련해 ‘정책 그 자체로 얼마나 좋은 정책이었나’라는 질문에 6.7점(10점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정책이 실제 국민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나’라는 평가항목에서는 4점에 그쳤다. 정책의 의미에 비해 실제로 국민의 주관적 행복을 높이는 효과는 미미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김병섭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국민행복을 표를 얻기 위한 공약으로 제시하고 국정기조로 삼았지만 실제 내용에선 기존 정책과 차별성이 없었다”며 “처음부터 행복과 정책의 인과관계를 더 생각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한국인의 주관적 행복도는 더 떨어졌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2015년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도는 158개국 중 47위(10점 만점에 5.984점)로 2013년(41위) 조사 때보다 더 떨어졌다. 2014년 캘럽헬스웨이의 웰빙지수에서도 한국은 117위로 전년(75위)에 비해 42계단이나 추락했다.○ 이름만 행복정책, 정책 신뢰에 부정적 영향 전문가들은 ‘국민행복’이라는 거시적 국정 목표와 세부 정책과의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행복과 동떨어진 정책들까지 행복정책으로 포장하면서 정책에 대한 신뢰만 깎아먹었다는 것. 특히 △국민안전 △사회통합 △창의교육 등 과제는 ‘국민행복’이라는 목표와의 연관성이 가장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회통합 과제는 국민행복에 미친 영향 측면에서 2.2점으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다. 창의교육 과제도 이 부분에서 3.3점으로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교육학)는 “행복이라는 정서적 단어는 사회통합, 교육정책 목표로 삼기에 무리한 용어”라며 “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해당 정책의 실천을 더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책 체감도가 비교적 높다고 알려진 고용복지 과제들도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박근혜표 복지의 대표 격인 기초연금(편안하고 활력 있는 노후생활 보장)은 정책 그 자체로는 7.4점을 받았지만, 국민행복과의 연결성 평가에서는 5.7점에 그쳤다. 고용률 70%, 임금피크제 등은 복지정책 중에서도 행복 체감도가 낮은 것으로 평가됐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고용복지 분야의 경우 정책 구호는 거창했지만, 실행 과정에서 공약보다 내용이 축소된 경우가 많아 체감도가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절실한 행복정책 사후관리 전문가들은 ‘행복’이라는 포장지를 정책에 입힐 때엔 더욱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적어도 행복정책이라고 이름을 붙이려면 주관적인 국민 행복과의 연관성을 점검해 차별화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초구의 간판정비사업과 같은 도시 외관 광고 총량제, 경기 파주의 ‘파주사랑’ 같은 녹지 사업, 저소득층 문화 스포츠 바우처 사업 등 큰 비용이 들지 않지만 실천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정책들에만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박형주 가천대 교수(건축공학)는 “국민안전 과제는 슬로건은 거창했지만 국민을 진짜 안심시킬 통계수치 제시, 세부 지침 공표, 홍보 작업이 부족했다”고 분석했다. 각종 정책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를 정확히 분석하지 않으면 ‘행복’이라는 슬로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다. ▼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 다시 생각하게 해줘” ▼본보 ‘동행지수’에 쏟아진 관심 “기사를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누군가에게 ‘행복하냐?’라는 질문도 잘 안 하는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대한민국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김충호 현대자동차 사장은 5회에 걸쳐 보도된 ‘2020 행복원정대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 시리즈를 읽은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대한민국이 치열한 경쟁을 하며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국민 행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번 기획을 보며 국회도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정책과 법안으로 동행지수를 올리는 데 기여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행복한 개인이 없으면 경제성장, 민주화와 같은 기적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동아일보의 기획에 감사한다. 나도 ‘행복파’ 정치인이 되고 싶다”라고 했다. 지역, 성별, 경제력 등과 행복의 관계를 상세하게 풀어낸 기사들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은 “신혼부부가 서울의 전세금이 비싸 불가피하게 충남에 머문다는 내용을 보며 주무 장관으로 안타까웠다”며 “청년 주거 문제 해소를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국민 행복을 위해 뛰자는 이들도 있었다. 김인식 프리미어12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국가가 발전하려면 국민이 행복해야 한다. 이번 프리미어12 우승과 같은 좋은 성적으로 야구팬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다짐했다. 시리즈에 대한 아쉬움과 조언을 해 준 이들도 있었다. 송길원 목사(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 대표)는 “행복해지기 위한 좀 더 구체적인 실행법이 소개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현대산업개발 회장)은 “국민이 스포츠를 즐기는 게 동행지수를 높이는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섭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은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해 행복지수를 개발한 건 대한민국의 이정표를 제시한 셈”이라며 “앞으로 5년 동안 시리즈가 계속된다니 다양한 행복 추구법이 소개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특별취재팀 △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사회부=박성진 기자}

결혼 15년 차인 중소기업 회사원 이형진(가명·43) 씨는 4세 연하인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지 말고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자”고 약속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을 재산도 없는 형편에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후 몇 년간 양가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낸 끝에 둘만의 자유를 얻었다. 처음엔 기쁨도 컸다. 연애 시절처럼 주말에는 마음대로 지역을 정해 여행을 다녔다. 주말이면 카드 할인 혜택으로 1000원에 조조영화를 봤다. 그사이 또래 친구들은 축 처진 어깨에 “애 보느라 잠 못 자서 피곤하다” “분유 값이 많이 나간다” “아내 신경이 아이에게 집중돼 있어 나는 찬밥 신세다”라며 불평했다. 그때마다 이 씨는 내심 ‘내 결정이 옳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30대 후반이 된 뒤 상황이 바뀌었다. 부부 싸움이 늘었다. 같은 회사원이던 아내는 “직장생활이 무료하다”며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 씨는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던 친구들이 3, 4년이 지나자 블로그에 ‘행복하다’며 자녀와 찍은 가족사진을 올리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이 씨는 4년 전 시험관 아기로 어렵게 딸을 얻었다. 그는 요즘 퇴근 후 대문을 열자마자 아내에게 “우리 딸이 오늘 어떤 귀여운 짓을 했느냐”는 말부터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TV에 나오는 셰프(요리사)처럼 아내와 딸에게 직접 요리도 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고 한다. 이 씨는 “젊을 때 경제적인 이유로 지레 겁을 먹고 아이를 빨리 낳지 않았던 게 후회된다”며 “가장으로서 어깨는 무거워졌지만 아이가 생기니 성격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이해심도 넓어져 이제야 참된 인간으로 성숙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 행복에 필요한 동반자 남자는 결혼을 해야 더 행복해졌다. 동아일보-딜로이트컨설팅 조사 결과 자녀가 있는 기혼 남성의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는 30대 54.70점에서 50대 62.52점으로 나이가 들수록 꾸준히 증가했다. 전 연령대 미혼 남성의 동행지수는 52.93점으로 한국인 평균(57.43)보다 낮지만 기혼 남성의 동행지수는 59.98점으로 높았다. 미혼 남성의 연령대별 동행지수는 20대엔 56.3점이지만 50대에는 43.11점으로 뚝 떨어졌다. 반면 50대 기혼 남성의 동행지수는 62.66점에 이른다. 자녀 양육이 힘들다지만 유자녀 기혼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행복감이 증가했다. 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장은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고 책임감을 가질 때 오히려 행복감이 높아진다”며 “주변에 돌볼 가족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행복감이 낮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남자를 웃게 만드는 것, 존중을 뜻하는 권위 자녀 양육비용이 평균 3억 원에 달하는 등 양육으로 인한 고통이 큰 한국의 특수 상황이 반영된 특이한 결과도 나타났다. 무자녀 기혼 남성이 유자녀 기혼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행복하다는 예상외의 조사결과가 나온 것. 특히 아내의 관심이 어린 자녀들에게 분산돼 본인이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고 느끼는 30대 남성의 행복도가 낮았다. 전업맘, 워킹맘에 관계없이 아내가 육아 스트레스를 남편에게 푸는 경향 때문에 30대 남편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고를 겪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원장은 “젊은 아버지들이 아내의 육아 스트레스를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회사 일을 포기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뜻”이라며 “주거비용, 교육비용 부담감에 아내와 어머니 사이 고부 갈등에 따른 스트레스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남자는 가정에서 권위가 서야 행복감을 느꼈다. 공기업에 근무하며 아내와 아들 둘을 부양하는 문의주 씨(48)는 “직장에서 자존심을 버려 가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데 아버지가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는 권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아버지나 남편이 원하는 건 ‘권력’이 아닌 ‘존중’을 뜻하는 권위라는 것이다. ○ 최신 기술을 활용할수록 행복도 상승 결혼의 필요성과 준비 정도에 대한 미혼 남녀의 답변은 엇갈렸다. 결혼 적령기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결혼 준비는 덜 되어 있고 결혼할 필요도 없다고 답변했다. 반면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질문은 동행지수에 반영되진 않았지만 심층 설문 중 하나로 진행됐다. 남성은 여성보다 기술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최신 기술을 활용할수록 행복하다는 결과도 나왔다. 특히 50대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원장은 “얼리 어답터는 비교적 개척정신이 강하고 진취적이며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결혼해도 ‘썸’타는 남자들 ▼기혼녀 ‘썸 관심도’ 25% 줄어들지만 남성은 결혼 전후 별 차이 없어“본능적 관심” “바람기” 다양한 해석 “직장 여성은 잘 안다. 기혼남도 ‘썸’(남녀가 사귀기 전의 미묘한 감정을 뜻하는 말)을 찾는다. ‘오피스 와이프’를 두기엔 위험하니 ‘오피스 썸’을 타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직장 여성 이모 씨(29)의 얘기다. 기혼남의 썸에 대한 관심은 남녀 간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성의 썸에 대한 관심도는 기혼 여성이 39.55점으로 미혼 여성(52.50점)보다 25% 줄었지만 남성의 경우 결혼 전(48.79점)과 후(46.81점)에 별 차이가 없었다. 이처럼 동아일보-딜로이트컨설팅이 분석한 올해 한국인의 행복 키워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썸이었다. ‘한국인의 행복 키워드’는 1년간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사용된 단어 2만여 개를 추출한 뒤 ‘행복’ ‘좋아요’ ‘만족스럽다’ 등과 함께 언급된 단어를 분석한 결과다. 20대∼30대 초반 미혼자에게만 행복을 줬을 것 같은 썸이 올해 전체 한국인의 행복 키워드에서 상위권인 7위를 차지했다. 썸과 행복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남성들의 절대적 관심도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썸에 대한 관심은 남녀를 불문하고 20대가 가장 높았다. 미혼, 기혼으로 나눌 경우 미혼 여성의 관심도가 미혼 남성보다 높았다. 하지만 기혼자들의 썸에 대한 관심은 남녀 간 성향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남성의 썸에 대한 관심은 30대에 잠시 주춤하지만 이후에 다시 증가했다. 기업에 근무하는 남성 직장인 신모 씨(37)는 “남자들이 육아가 끝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기혼남에게 썸은 ‘한눈판다’의 유화된 의미”라고 말했다. 5년째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결혼을 앞둔 장모 씨(32)는 “SNS에 많이 올라오는 ‘썸녀 만나러 갈 때 입을 옷’ ‘썸녀의 반응별 대처법’ 관련 글에 댓글을 다는 사람이 모두 미혼은 아닐 것”이라며 “결혼을 하더라도 그런 글들을 보면 관심이 가고 괜히 설레기도 한다. 모르는 여자와 썸을 타는 모습을 상상하는 남자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도 40대부터 관심도가 살짝 증가하지만 남성의 관심도 변화 폭에는 못 미쳤다. 동행지수 분석에 함께 참여한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20대 남성들이 결혼 부담으로 진지한 연애를 기피하고 있는 현상이 썸에 대한 높은 관심도로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40, 50대의 경우 생활이 안정기로 접어들며 썸이 설렘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데 역할을 한 것 같다”며 “남성은 본능적으로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성향이 여성보다 강해 높은 수치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들 하나를 둔 40대 여성 김모 씨는 “애도 다 키워본 40, 50대 남자가 썸에 관심을 갖는 건 아마 SNS상에서 관음증이 발현한 것이 아닐까”라며 “그게 정말 ‘바람’의 의미라면 큰일이다”라고 혀를 찼다.특별취재팀 △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 △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 △사회부=박성진 기자}

“30년 동안 잊었던 꿈을 요즘 다시 꿉니다.” 대구 달서구에 거주하며 자녀 넷을 둔 주부 석난희 씨(54)는 최근 서양 유화 수업에 등록했다. 인기 강좌라 대기자에 이름을 올렸을 뿐이지만, 기쁨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았다. 10대 시절 화가를 꿈꿨지만 20대에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꿈을 접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결혼 이후에는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를 하느라 그림 그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녀 4명을 다 키운 요즘은 석 씨의 ‘제2의 전성기’다. 남편과 자녀들이 각각 회사와 학교로 나선 뒤엔 석 씨는 동네 요가 수련원으로 ‘출근’한 뒤 친구들을 만나 점심시간을 즐긴다. 석 씨는 “네 명을 언제 다 키울까 했는데 올해 막내아들을 대학에 진학시키고 한시름 놓고 나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이제 나를 위해 즐길 때가 됐다”고 말했다.○ 50대는 여성 인생 제2의 전성기 지난해 막내아들을 군에 입대시킨 한경아 씨(50·여)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가수 신승훈의 ‘광팬’인 한 씨는 올해부턴 더욱 활발하게 팬클럽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달, 9년 만에 신승훈의 정규 앨범이 나온 뒤 서울 공연(3회)을 3일 연속으로 다녀왔고 광주, 대구, 부산 지방공연도 모두 참석할 계획이다. 한 씨는 “팬클럽 활동은 내 30, 40대 아픔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라며 “아들이 나의 활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엄마의 인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 줄 때가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딜로이트컨설팅이 함께 조사한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에서 가장 행복한 집단은 50대 여성이었다. 50대 여성의 동행지수는 61.85점으로 한국인 평균(57.43점)보다 5점가량 높았다. 특히 자녀가 있는 50대 여성은 62.05점으로 더 많은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20, 30, 40대 엄마는 자녀와 직장생활로 바쁜 남편을 돌보느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데 50대가 되면 여기서 해방되며 행복감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20, 30대 행복의 열쇠는 친정 출산과 자녀 양육 부담이 높은 20, 30대 여성은 50대 중년 여성보다는 행복도가 낮았다. 하지만 친정과의 친밀도는 행복의 수준을 가르는 든든한 배경이었다. 친정과 친하지 않은 20대 기혼 여성의 동행지수(29.72점)는 친정과 친한 20대 기혼 여성(54.2점)의 절반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시댁과의 친밀도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보다 큰 수치다. 여섯 살, 세 살 된 아들을 두고 있는 경기지역 고교 교사 최지영 씨(38·여)는 “친정은 서울에 있고 시댁은 대구라서 물리적인 거리 차이도 있지만 친정 엄마와 가까운 게 여성이자 엄마로서 중요한 게 사실”이라며 “친정 엄마가 주중에 아이들을 돌봐주셔서 복직할 수 있었고 특히 애가 아플 때 정말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무자녀는 불행, 결혼은… 무자녀 기혼 여성은 한국인 평균보다 행복도가 낮았다. 30대까지는 동행지수가 오르다가 이후로는 점점 줄어들었다. 특히 50대 무자녀 기혼 여성의 동행지수는 한국인 평균보다 4점가량 낮았고 같은 세대 유자녀 기혼 여성보다 9점이나 뒤처졌다. 석 교수는 “30대까지는 부부 관계 중심으로 행복감이 유지되는데 40대에 접어들면 남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녀나 직업을 통해서 자기 성취감을 느낀다. 성취감의 대상이 없는 여성들은 마음 붙일 데가 없어 상당히 외로워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미혼 여성의 행복감은 40대에 잠시 낮아지지만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50대 미혼 여성의 동행지수는 75.42점으로 전 연령대의 미혼·기혼 여성을 통틀어 가장 높다는 특이점을 보이기도 했다. 석 교수는 “40대 미혼 여성은 성취감을 느끼면서도 기혼인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외로움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행복을 찾는 과정에서 남편보다는 ‘시스터후드(자매애)’를 지향하는 중년 여성의 특성 덕분에 20대처럼 여자 친구들이 늘어난다. 50대에 외로움이 해소되면서 최고조의 행복감에 이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30대땐 워킹맘, 40대땐 전업맘이 심리적 안정감 ▼워킹맘 업무보람-적응력 높지만 자녀 커가며 ‘좋은 엄마 콤플렉스’ 워킹맘은 30대엔 전업맘보다 행복하지만 40, 50대가 되면서 역전된다. 30∼50대 워킹맘과 전업맘의 동행지수를 분석한 결과 30대 워킹맘은 전업맘보다 자존감이 높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충만했다. 육아로 직장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희망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업무 만족도, 사회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더 높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30대 직장인 기혼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의 자존감이 더 높았다. 자존감은 아이가 없는 30대 직장인 기혼 여성, 30대 워킹맘, 30대 전업맘 순이었다. 딜로이트컨설팅 권요셉 박사는 “30대 워킹맘은 갓 태어난 아이로 인해 불안감이 높아지고 가족생활에 대한 행복감, 가족친밀감은 낮아지는 흐름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40대에 워킹맘의 우위는 사라진다. 전업맘은 40대가 되면 심리적 안정감, 가족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졌다. 워킹맘의 우위 요소였던 자존감이나 긍정적 마인드는 전업맘과 비슷한 수치를 보였다. 자녀가 10대에 들어서는 시기인 40대 워킹맘 대부분이 엄마의 역할이 부족하다는 감정이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30대에는 가족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전업맘보다 0.43점 낮은 데 그쳤지만 40대에선 격차가 5.71점으로 벌어진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며 중학생 딸, 초등학생 아들을 둔 이인영 씨(45·여)는 “학교에 들어간 자녀들이 엄마가 집에 없는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엄마로서의 죄책감은 갓난아기일 때보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커졌다”고 말했다. 40대 워킹맘은 자녀의 학업 성적에도 민감했다. 워킹맘이 좋은 엄마가 돼야 한다는 ‘엄마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다. 30∼50대 워킹맘 중 월소득 200만 원 이하의 경우 심리적 만족도가 전업맘보다 낮은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워킹맘의 특징인 ‘희망하던 업무’라는 자부심이 눈에 띄게 낮아진 것. 동행지수 분석에 함께 참여한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가정과 경력 사이의 고민이 아니라 생계유지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워킹맘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며 “이는 소득계층별 차별화 정책을 실시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특별취재팀 △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 △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 △사회부=박성진 기자}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2015년 을미(乙未)년 마지막 달인 12월. 한국인 상당수는 “그리 행복하지 않다”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한강의 기적’이 상징하는 고도성장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2%대로 주저앉았다. 지속적 경제성장을 포기할 순 없지만 물질적 행복만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시대인 것이다. 성장의 새로운 단계를 앞둔 현재, 한국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면밀히 측정하고 이를 개선할 행복정책 개발과 사회문화 변화가 절실하다. 동아일보와 채널A는 이런 취지에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길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계적인 컨설팅업체인 딜로이트컨설팅과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를 개발해 한국인의 행복을 조사했다. 본보는 올해 4월 1일 창간 95주년을 맞아 ‘엄마의 행복’을 주제로 ‘2020 행복원정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번에 조사된 평균 동행지수는 57.43점(100점 만점 기준)으로 낙제점에 해당하지만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는 2020년까지 매년 동행지수를 점검하고 이를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과 캠페인을 진행할 계획이다. 특히 봉사활동을 하는 저소득 집단(월 300만 원 미만·62.58점)이 봉사를 하지 않는 고소득 집단(월 300만 원 이상·55.51점)보다 동행지수가 7점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결과를 주목한다. 동아일보는 이처럼 한국인의 삶에서 돈 외에도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행복의 비밀을 찾아내 한국인을 위한 맞춤형 ‘행복 10대 제언’을 제시할 계획이다. 한국 사회의 주축이 될 30대의 동행지수는 53.73점으로 20대(55.06점)는 물론이고 모든 조사 연령대(20∼50대)에서 가장 낮았다. 이번 분석에 참여한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6일 “한국의 30대는 초라한 현실의 모습과 이상적인 자아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점점 불행해지는 이른바 ‘쇼윈도 세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특별취재팀△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 △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 △사회부=박성진 기자}

동아일보의 ‘동아행복(동행)지수’는 소득 직장 연령 등 객관적 지표를 토대로 개인의 심리적 안정과 인간관계 건강 등 주관적 요소를 포함해 개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유엔 등이 발표하는 기존 행복지수는 상당 부분 국내총생산(GDP) 같은 거시경제 지표를 바탕으로 평가한다. 이는 국가 간 비교에는 적합하나 실제 한 나라 국민 개개인의 심리와 행복을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최근 개인의 주관적인 행복을 측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단순히 ‘행복하십니까’ 등 기분이나 상태를 묻는 방식이어서 전날의 감정 상태가 반영되곤 했다. 동행지수 개발은 딜로이트컨설팅과 박도형 국민대 교수(경영정보) 연구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분석업체인 씨이랩의 협업으로 3단계로 진행됐다. 우선 개인의 주관적인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8가지 측면에 대해 20∼50대 1000명을 온라인에서 심층 설문했다. 답변자의 취미나 특기, 소비지출 성향, 기술이나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도, 봉사와 나눔의 태도도 세밀하게 물었다.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는 본가와 처가, 시집과 친정의 관계 등도 설문에 포함해 최근 달라진 한국사회의 모습을 반영했다. 60대 이상은 SNS의 사용량이 적어 이번 분석에서 빠졌다. 동행지수는 최근 1년간 주요 뉴스 중 행복에 영향을 미친 이슈를 빅데이터 분석으로 선별했다. 인터넷 포털과 동아닷컴(dongA.com) 등 주요 언론사 사이트에서 관심도가 가장 높았던 뉴스를 뽑아 설문 응답자의 행복과의 상호관계를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로는 최근 한 달 동안 SNS상에서 행복과 관련된 다양한 추세를 뽑아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 연구팀은 6개월간의 작업에서 나온 결과를 토대로 동아일보와 함께 동행지수의 신뢰성과 그에 담긴 의미를 분석했다. 박 교수는 “이번 분석은 특정 기간에 한국인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 행복 관련 트렌드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동적인 조사”라며 “거시경제 지표의 발표시점과 상관없이 한국인의 현재 심리를 가장 잘 반영한 지수”라고 설명했다.특별취재팀△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 △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 △사회부=박성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