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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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zsh75@donga.com

취재분야

2025-11-16~202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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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 여배우의 몰락 부른 ‘문수원 사건’[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평양에서 몇 달 전 이른바 ‘문수원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6명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고, 지난달 20일 관련자 가족을 평안남도 양덕과 맹산에 추방했다. 이들 중에는 유명 여배우까지 포함돼 있어 더욱 화제가 됐다. 문수원은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목욕탕, 사우나, 미용실 등이 구비된 유명 종합편의시설이다. 평양의 대표적 대중목욕탕인 창광원과 비슷한 시기인 1982년에 건설됐다. 보통강 구역에 창광원이 있고, 대동강 건너편 주민을 위해 동대원 구역에 문수원을 건설했다. 평양산원 정문에서 약 200m 거리이고, 현재 평양종합병원을 짓는 곳에선 도보로 약 15분 거리다. 북한의 대형 대중목욕탕들에는 보통 사우나 시설이 설치된 ‘비밀의 방’들이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권력자와 부자들이 단골로 찾아와 마약과 성매매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창광원 다음으로 크다는 문수원도 다를 바 없었다. 문수원은 2008년 새 단장을 하면서 VIP 전용 비밀공간을 고급스럽게 꾸몄다. 시내 중심부에서 좀 떨어져 있으니 단속에서도 비교적 안전했다. 서비스가 좋다는 소문이 난 덕분에 단골들도 많았다. 최근까지 별 탈 없이 영업했지만 올해 엉뚱한 곳에서 사건이 터지면서 날벼락을 맞았다. 엉뚱한 사건은 평북 철산에서 벌어졌다. 이곳에 있는 한 외화벌이 조개양식기지의 젊은 책임자가 연쇄 살인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말이 기지이지 사실상 개인 회사처럼 운영됐는데, 책임자는 일찍이 아버지에게서 기지를 물려받아 흥청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북한판 재벌 2세에 비유할 수 있다. 북한에서 돈 좀 있는 사람이라면 마약을 대부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기지 안 여성들은 물론 외부 여성들까지 데려와 마약과 성매매를 했다. 이 정도 일은 북한에서 비일비재한 것이라 뇌물을 정기적으로 상납하면 걸릴 일도 거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가 뱃놀이를 한다면서 자주 여성들과 배를 타고 나가 놀았는데, 말을 듣지 않는 여성은 죽여서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북한에선 그가 이런 식으로 죽인 여성이 30명이 넘는다는 소문이 났다. 폐쇄회로(CC)TV가 없고, 젊은 여성이 사라지면 탈북했다고 믿는 북한 실정에서 능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흔적을 없애느라 수장한 여성의 시신이 떠올라 발견됐다. 그 바람에 책임자의 경악할 만한 범죄가 드러나게 됐다. 취조 과정에서 그가 평양에도 수시로 가서 문수원에서 즐겼다는 진술이 나왔다.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라 김정은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김정은이 철저히 조사하라고 한 이상 아무리 높은 권력자들이 문수원의 뒤를 봐준다 해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조사 결과 문수원을 즐겨 찾은 간부들 명단까지 줄줄이 나왔다. 문수원에서 직원으로 채용한 젊은 여성 접대원은 물론 인근 대학 여대생들까지 성매매에 가담한 사실마저 드러났다. 문수원 인근에는 평양음악무용대학과 평양연극영화대학이 있는데, 이곳엔 전국에서 뽑아온 미모의 여대생들이 많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학생들 중 일부는 돈이 없어 성매매를 하거나 부유층의 숨겨진 애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김정은의 지시로 책임자와 성매매업자 등 주범 6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이 중에는 문수원에서 마담 역할을 했던 여성도 있는데, 그는 유명 여배우인 리설희 남편의 숨겨진 애인이었다. 리설희는 북한이 자랑하는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손으로 가슴을 가리긴 했지만 북한 영화에서 보기 드문 목욕신과 베드신까지 찍어 화제가 됐던 배우다. 문수원 사건으로 리설희도 남편과 함께 추방됐다. 추방된 사람들은 높고 가파른 산에 앞뒤로 막혀 해가 오후 4시에 진다고 알려진 양덕과 맹산의 오지에 끌려가 농사를 짓게 했다. 떵떵거리며 살던 수많은 권력자와 부유층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이다. 알고 보면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김정은이다. 대북제재와 국경 폐쇄로 외화가 급격히 고갈되는 와중에 때맞춰 돈 많은 자들이 ‘알아서’ 걸려들었으니 민심도 얻고 추방된 부유층의 재산도 몰수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어떤 명목의 범죄와의 전쟁, 부패와의 전쟁이 진행되든 결국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땔’ 사람은 김정은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지나친 식탐과 폭식은 결국 자기 몸에 해가 돼서 돌아오는 법이다. 김정은도 예외는 아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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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육맨’ 김종국에 반해 탈북한 보위부 상위[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집에서 북한 간부들과 주민들을 향해 ‘통일에 동참해 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TV로 봤습니다. 그걸 보고 용기를 얻어 탈북을 결심했죠. 그런데 막상 목숨 걸고 와 보니 박 대통령이 탄핵돼 황당하더군요. 대통령도 쫓아내는 나라라니, 무서운 생각도 들었고, 오라는 사람이 없어지니 잘못 왔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죠.” 북한에서 보위부 상위(한국의 중위와 대위 사이 계급)로 있다가 2016년 9월 바다를 헤엄쳐 20시간 가까운 사투 끝에 남쪽에 온 이철은 씨(33)의 얘기다.# 결심2016년 8월 15일 황해남도 청단군 보위부 2과(정보과) 상위였던 이 씨는 쉬는 날 집에서 한국TV를 보다가 박 대통령의 축사를 접하고 갑자기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지도를 펴놓고 탈북 루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소지한 보위부 ‘특별 긴급 수사원증’으로 북중 국경인 양강도 혜산까지 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남들이 다 하는 방식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씨가 근무한 청단군은 강화도에서 건너 보이는 황해도 연안군과 붙어 있는 지역이다. 그는 당시 ‘불순녹화물’ 단속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109상무’라는 조직에 소속돼 한국 영상 시청자들을 적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씨는 이미 1990년대부터 한국TV를 열심히 봤다. 그는 황해도 연안군에서 부친과 삼촌 세 명이 모두 보위부 간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위부 간부 집에는 단속이 오지 않았다. 밤에 한국TV를 시청하다 밖으로 나오면 한강 하구 건너에서 한국 불빛이 유혹하듯 반짝거렸다. 한국의 생활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한국 영상을 시청하는 사람을 잡아내는 일이 괴로웠다. 이 씨는 그럼에도 출근해선 아무 일도 없던 듯 한국 영상 단속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물급에 대한 신고가 들어왔다. 청단군 군당위원장의 딸이 한국 드라마를 보다 걸린 것이다. 군당위원장은 청단에서 제일 높은 간부다. 군 보위부에는 당위원장의 비리를 감싸줄 측근들이 많았다. 이 씨는 군당위원장 딸의 적발 사실을 상급 기관에 직보했다. 그러자 군 보위부 정치부장이 그를 불렀다. “야, 임마, 너 죽고 싶어. 절차 없이 그런 보고를 왜 단독으로 하는 거야.” “부장 동지가 묻을 게 아닙니까. 힘없는 백성의 자식은 한국 드라마 봤다고 감옥에 가고, 당 간부 자식은 한국 드라마 마음대로 봐도 되는 겁니까.” “너, 이 자식. 책대로 하겠단 말이지. 두고 보자.” 부하가 대들자 정치부장은 펄펄 뛰었다. 북한 공화국 창건일인 9월 9일 청단군 보위부 건물에선 이렇게 둘의 말싸움이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즉시 그는 109상무에서 제외됐다. 정치부장에게 찍힌 이상 앞으로도 시련이 계속될 상황이었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 한국으로 갈 거야.’ 이 씨는 학교 동창 민철(가명)을 찾아갔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민철은 그즈음 장사를 하다 망해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민철아. 나 한국에 가려 한다.” “나도 같이 가자.” 둘은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그런데 보위부 증명서가 있는 이 씨와는 달리 민철까지 데리고 국경으로 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끝에 한강을 헤엄쳐 가기로 결정했다. 며칠 동안 준비를 하고, 탈북 루트로 정한 연안군 해안 정찰까지 마친 뒤 마침내 둘은 배낭을 메고 탈북 길에 올랐다.# 사투9월 18일 저녁 두 남자가 연안의 해안가에 나타났다. 이 씨는 이곳에서 나서 자라 물때와 지형에 매우 밝았다. 게다가 철은의 부친은 함박도 맞은편인 연안군 화양리에서 해안 담당 보위원을 오랫동안 지냈다. 이곳에는 연안 해안에 들어왔다가 강화도 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있었다. 150~200m 간격으로 있는 북한군 잠복초소엔 8시부터 군인들이 잠복을 나온다. 둘은 8시 직전 잠복초소를 통과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약 200m쯤 헤엄쳤을까. 뒷쪽에서 잠복을 나오는 군인들이 비춰대는 손전등 불빛이 비쳤다. 헤엄치는 속도보다 물이 빠져 나가는 속도는 더 빨랐다. 30분 정도 지나니 둘은 물이 빠진 갯벌에 엎드린 상태가 됐다. 조용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갯벌을 보복으로 전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동하다 날이 밝아 발각되면 총에 맞을 판이었다. 그날은 보름달이 훤히 밝았다.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구름이 달을 가렸다. 하늘이 도운 것이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갯벌을 달리니 그제야 바닷물이 다시 보였다. 이 물은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배낭에서 미리 준비했던 자동차 튜브와 펌프를 꺼냈다. 그런데 갯벌에서 펌프질이 잘 되질 않았다. 겨우 바람을 좀 넣었지만 배낭을 얹으니 사람이 매달릴 정도까지 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둘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맞은편 해병대 건물 불빛이 목표였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점점 지쳐갔다. 몇 시간 뒤엔 튜브에 매달리기 위해 식량이 든 배낭도, 신발도 버려야만 했다. 8시간 넘게 사투를 벌인 끝에 새벽 4시가 가까워왔을 때 민철이 말했다. “나 이젠 더 힘이 없어. 날 버려두고 너 혼자 가.” 이 씨는 친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민철을 끌고 계속 헤엄쳤다. 그러나 불빛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전조등을 비추는 배 한척이 나타났다. 한국 경비정인지 북한 단속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북한 쪽에 걸리면 끝장나는 상황이었다. 전조등이 나타나자 민철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까지 모든 걸 포기한 듯 했던 그가 약 100m 거리에 보이는 무인도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작은 이 무인도는 원래 목적지가 아니었지만 배를 피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무인도에 겨우 도착하니 새벽 4시가 지났다. 둘은 전조등을 피해 무인도에서 숨을 곳을 찾아 정신없이 헤맸다. 맨발과 맨손으로 따개비 껍질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바위 위로 뛰어다니다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마침내 둘은 무인도 기슭에 쌓인 쓰레기 더미에 몸을 숨겼다. 몸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구조몸을 숨기고 나니 지독한 추위가 몰려왔다. 둘은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꼭 안았다. 그러다 잠시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날이 밝았다. 이 씨는 조심스럽게 무인도 꼭대기로 이동했다. 이곳이 북한 땅인지 한국 땅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인도 꼭대기엔 불을 피운 흔적과 사람 발자국 흔적이 남아있었다. 500~600m 앞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해병대 막사가 보였다. 뒤를 보니 2km쯤 거리에 북한군 초소가 보였다. 멀리 200~300t급 회색 경비정이 눈에 들어왔다. 태극기가 붙어있길 간절히 바랬지만,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북한 보위부도 중국에서 경비정을 수입해 운영하는데, 똑같은 회색이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중 갑자기 경비정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씨는 무인도 남쪽 기슭을 헤매며 쓸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지게차로 물건을 나를 때 쓰는 깔판인 나무 파레트가 보였다. 거기에 페트병, 스티로폼 등 뜰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찾아 밧줄로 묶었다. 힘이 빠진 민철을 위해 뗏목을 만든 것이다. 민철이 어디서 포장이 뜯기지 않은 한국산 햇반을 주어왔다. 허기진 둘은 그걸 함께 손으로 퍼먹었다. 남쪽의 밥은 꿀맛이었다. 뗏목을 완성한 건 오후 2시. 이제는 한국 쪽으로 밀려가는 물길에 몸을 맡기고 한국 쪽에 발견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둘은 파레트 위에 올라 앉아 둥둥 떠갔다. 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파레트는 물속에 서서히 잠겨갔다. 멀리서 보면 대낮에 해상분계선 한가운데서 남자 두 명이 앉은 채로 둥둥 떠내려가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남과 북이 그 모습을 다 지켜봤겠지만, 다행히 어느 쪽에서도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한두 시간 지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경비정이 두 번 나타났다 사라졌다. 무인도와 해병대 막사 중간쯤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고래 떼가 나타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뒤집히면 큰일이다 싶어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쾌속정 한 척이 다가왔다. 한국군이었다. 총을 겨눈 군인들이 소리쳤다. “귀순입니까.” “예. 귀순입니다.” “손드세요.” 배에 탈 때까지 총을 겨눈 군인들이 “손들어”라고 외쳤다. 둘을 배 뒤편으로 끌고 간 뒤 목과 두 손목을 연결해 뒤로 포박했다. 눈도 가렸다. 군인들은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몸수색을 하니 사복 안주머니에서 비닐에 꽁꽁 싼 보위부 상위 신분증과 만약의 경우 자결하려 준비한 손칼이 나왔다. 쾌속정은 그들을 함정으로 데리고 갔다. 보위부 신분증을 보더니 누군가 나타나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니 나중에 말합시다.” “배고픕니까?” “예.” 포박하고 눈을 가린 채로 군함 식당으로 갔다. 잠시 후 라면이 나왔다. 추위로 벌벌 떠는 두 사람에게 군인들이 모포를 씌워주었다. 라면을 먹고 따뜻한 온기가 도니 둘은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둘을 깨워 눈을 뜨니 군함은 인천항에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둘이 새벽에 헤엄쳐 오는 것을 해병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명이 어둠 속에서 해양 분계선 남쪽으로 넘어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 갔다를 몇 시간째 반복하며 허우적대는 것을 열상감시장비(TOD)로 지켜본 것이다. 경비정을 출동시켰더니 두 사람은 무인도로 급히 헤엄쳐 갔다. 자기 딴엔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에선 감시 장비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명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인도에 갑자기 상륙해 접근하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몰라 지켜만 보다가 “우리가 무서워 못나온다”고 결론내고 잠시 철수했다. 둘이 다시 나타나 확실하게 한국 해역에 진입했을 때 한국군은 쾌속정을 출동시켰다.# 동경이 씨는 태어날 때부터 보위원이 될 운명이었다. 부친과 삼촌 3명이 모두 보위원이라는 건 그의 집안이 뼈 속까지 ‘새빨간’ 집안이란 뜻이다. 북한에는 “보위원 자녀들은 대를 이어 나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김정은의 ‘말씀’이 존재한다. 이 씨 역시 2004년 학교를 졸업한 뒤 군대도 원산항 보위부 소속 병사로 갔다. 이곳에서 6년 군 복무를 한 뒤 노동당원이 돼 2010년 해주 김종태 제1사범대학에 입학했다. 2014년 대학을 졸업하고 동창들은 교원이 됐지만 이 씨는 보위부 군관으로 발탁돼 약 2년 반 일했다. 당국에서 보위부 군복을 입혀주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국TV를 보고 자란 이 씨의 마음속엔 남쪽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사무실에 가면 남쪽에서 풍선으로 보낸 각종 라디오가 산더미처럼 수거돼 쌓여있었다. 그는 몰래 좋은 라디오를 빼돌려 윤도현, 나훈아, 임재범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가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건 2006년이었다. 당시 원산항에 적십자사에서 보낸 쌀 약 2만 t을 실은 한국 선박이 들어왔다. 4박 5일 동안 북한 노동자들이 선창에 들어가 작업하는 동안 이 씨는 권총을 차고 이들을 감시하며 배 위에 서있었다. 이 과정에 한국 선원들에게 담배도 얻어 피우고, 대화도 나눴다. 이 씨와 처음 이야기한 남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선장이었다. 구멍 난 청바지를 입고 있어 “남조선에선 돈이 없어 꿰진 바지를 입냐”고 물었더니 부선장은 웃었다. “유니폼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땐 뭔 소리인지 몰랐어요. 한국에 와서 알았죠. 지금 제가 유니폼을 입고 다녀요.” 부선장이 북에 대해 물으면 이 씨는 대답 대신 먼 산을 쳐다봤다. 이 씨는 2006년 원산항에 쌀을 싣고 들어온 선박에서 근무한, 권총을 찬 북한 병사와 대화를 했던 그 부선장을 한번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2008년경 원산항에 다른 식량지원 한국 선박이 왔을 때는 이 씨가 먼저 다가가 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씨가 해주에서 대학을 다닐 땐 ‘러닝맨’이란 프로그램에 푹 빠졌다. 보위원이 돼서도 빠뜨리지 않고 봤다고 했다. “저는 다른 연예인에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김종국은 남자다워서 너무 멋있었죠. 김종국 보려고 러닝맨을 꼬박꼬박 챙겨봤을 정도죠. 한국에 와서도 김종국 외에 다른 연예인은 관심이 없어요.”# 감시이 씨는 보위부에서 주민동태 감시 및 외부 ‘불순영상’ 시청 감시를 맡았다. 보위원 한 명이 700~1200명의 주민을 담당했다. 보위원은 20~40명의 서약을 한 민간인 정보원을 둘 수 있다. 대략 주민 30명 중 한 명이 보위부 정보원인 셈이다. 정보원은 수시로 수상한 동향을 보고해야 하는 것과 동시에 매년 보고서를 내야 했다. 이에 대한 대가는 없었다. 나라에서 하라면 해야 하는 것뿐이었다. 보위원은 정보원과 함께 협조원도 둘 수 있다. 지장을 찍고 보위부 문서고에 서류가 보관되는 정보원과 달리 협조원 숫자는 보위원 능력대로 둘 수 있다. 노동당 기관을 제외한 모든 곳에 정보원이 있었다. 경찰격인 보안서에도 보위부 정보원이 있다. 이 씨는 22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황해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몰래 한국TV를 본다. 대다수 가정이 국가에서 검열한 TV 외에 12인치 정도의 작은 중국산 TV를 몰래 갖추고 있고 배터리, 또는 태양열 패널로 전원을 해결한다. TV에는 USB를 꽂는 포트도 있었다. 리모컨으로 채널 자동검색을 하면 한국TV가 나온다고 했다. 정전이 되면 TV를 시청하는 가정을 포착하는 보위부 감청차량이 있긴 하지만, 수량이 많지 않다. 그리고 휘발유가 없어 저녁 8~12시경 중요 지역만 순찰한다. “우린 사람을 잡아도 악착하게 하지 않았어요. 북쪽에선 탈북민들이 보위부에서 엄청 맞았다고 하는데, 우린 사람을 거의 때리지 않아요.” 청단과 연안은 강화도 맞은편이라 한국 삐라가 많이 날아온다. 신고를 받고 출동해 수거하는 것도 이 씨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남쪽에서 날아온 것 중 USB만 몰래 숨겨요. 비싸니까. 나머진 쓰레기라 보면 돼요. 황해도 사람들이 한국TV를 직접 보는데 삐라 정도로 주민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이 씨는 바닷가를 돌며 한국에서 떠내려 온 물건들을 수집하는 일도 했다. 이를 맡은 부서를 ‘84상무’라고 한다. 북에 보낸다며 페트병에 쌀을 담아 한강 하구에 던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걸 주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오지도 않아요. 그리고 바닷가 갯벌에 주민들이 접근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주워요. 북한 사정 모르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희망이 씨는 2017년 2월 말 탈북민 정착기관인 하나원을 나왔다. 경기도 화성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함께 온 민철은 울산으로 배정됐다. 당시 북한 간부와 주민에게 탈북해 오라고 했던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심판을 앞두고 있었고 나라는 온통 시끄러웠다. 이 씨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런 한국 사회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사회에 나온 이 씨는 처음엔 탈북민 출신 경찰 1호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남쪽에서 나서 자라 교육받은 20대 젊은이들도 취직이 안돼 고생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그해 4월 플라스틱 샴푸병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 올해 1월엔 집을 양주로 옮기고 서울에서 석유공동구매 사업을 하는 협동조합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 “아직 비행기 못 타봤어요. 대다수 탈북민은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첫 비행기를 탄다고 하던데 헤엄쳐 오다보니 비행기를 못 타봤네요.” 그는 외국은 물론 정말 가보고 싶은 제주도도 아직 못 가봤을 정도로 3년 반 동안 열심히 일했다. 탈북 과정에 겪은 20시간의 사투는 트라우마(심적인 상처)도 남겼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도에서 알아주는 배구선수였고, 원산항 보위부에 있을 때는 2㎞ 바다 수영 ‘군사경기’에서 두 번이나 1등을 했었다. “이젠 물에 허벅지 이상 들어가지 못해요. 발이 안 닿으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아요.” 이 씨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물었더니 “일을 배워 사업도 하고 싶고 대학원도 다니고 싶다”고 했다. 올해부터 ‘북한저격TV’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북한 실상도 전하고 있는데 벌써 구독자가 1만 명이 넘었다. “남쪽에 왔으니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그가 갑자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저의 소원은요. 김종국을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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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북부 국경에서 벌어진 잔혹한 학살극[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한반도 최북단이자 두만강 옆에 위치한 함경북도 온성에서 지난달 중순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그런데 북한이 국경을 어찌나 꽁꽁 틀어막았는지 예전이라면 탈북민들의 전화 통화를 통해 바로 다음 날 전해질 이 소식이 지금까지 한국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북한과 연계된 정보 라인들이 거의 다 차단됐다는 의미다. 온성 사건은 지난달 중국에서 누군가가 몰래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간 일이 발단이 됐다. 밀수꾼이나 탈북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온성 맞은편 투먼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귀국하지 못해 1월부터 발이 묶인 북한 근로자가 수백 명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 중 한 명이 몰래 집에 가려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사람은 곧 체포됐다. 그런데 김정은이 북부 국경이 뚫린 것에 크게 화를 내며 무자비한 처벌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7월 탈북 청년이 임진강을 헤엄쳐 북으로 돌아간 뒤 김정은은 개성을 폐쇄하고 경비 담당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바 있다. 그러곤 국가초특급비상방역위원회를 국가비상방역사령부로 기능을 강화하고 방역규정을 어기면 총살, 무기징역을 선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온성에서 밀입국이 발각된 것이다.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밀입국 구간 경비를 담당했던 국경경비대 중대장, 정치지도원, 책임보위지도원, 군 보위부 봉쇄부부장, 군 보안서 기동순찰대장, 밀입국자가 소속된 직장의 당 위원장 및 지배인이 처형됐다. 처형장에는 관계자들을 동원해 참관시켰는데, 얼마나 잔인하게 집행했는지 실신하는 사람, 바지에 오줌을 싸는 사람 등이 속출했다고 한다. 수백 발의 총탄을 퍼부어 사람을 완전 형체도 없이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온성군 당위원장, 군 보위부장, 보위부 정치부장, 군 보안서장, 군 보안서 정치부장, 평양에 있는 국경경비총국장, 정치부국장은 연대 책임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한다. 무기징역이면 한국 같으면 흉악한 살인범이나 부여받는 처벌이다. 온성에 밀입국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감방에서 죽게 됐다. 이뿐 아니라 온성군 보위부, 보안서, 해당 지역 국경경비대를 해산 및 전원 제대시켜 농민으로 보냈다. 처형자와 무기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의 가족도 전부 심심산골로 추방했다. 온성군 보위부나 보안서, 국경경비대는 탈북자들을 워낙 악독하게 다루는 인간들이 가득해서 굳이 동정하고 싶진 않다. 김정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하루아침에 토사구팽 신세가 됐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해산된 보위부, 보안서, 국경경비대 대신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파견돼 국경 경비 공백을 막고 있다고 한다. 요즘 북한 주민들은 ‘개성 사건’에 이은 ‘온성 사건’ 때문에 숨도 못 쉴 상황이다. 이 사건 이후 온성 회령 무산 등 북부 국경 지역들이 봉쇄돼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됐다. 국경 지역 사람들은 산에 있는 개인 밭, 즉 소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이동하려 해도 모두 대장에 기록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도처에 전파탐지기가 있어 국경 사람들은 깊은 산에 가서 한국과 전화통화를 하는데, 꼼꼼한 기록과 수색으로 한국과 연락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20년 가까이 북한을 취재해 온 기자도 요즘 ‘이 정도로 철저한 폐쇄가 가능하구나’라고 혀를 찰 정도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북한에서 자행되는 잔혹한 처벌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2월 중순부터 두 달 동안 700명 이상이 방역규정 위반으로 처벌된 사실은 몇 달 전 필자 칼럼에 소개한 바 있다. 온성 사건과 별개로 8월 20일에도 북한의 최대 국경 관문인 신의주 세관에서 80여 명 검사 전원이 방역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수감됐고 가족은 농촌으로 추방됐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엔 인민적 풍모를 가진 지도자인 것처럼 포장했다. ‘인민들이 허리띠를 더는 조이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선언한 뒤, 허물없이 가정집에 들어가고 허름한 목선을 타고 외진 섬에 가서 군인을 업어주는 등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모습은 사라졌다. 잔인한 처벌의 강도만 높아지고 있다. 하는 일들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화풀이를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면서 풀고 있어 끔찍하다. 더 끔찍한 건 이런 잔인함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 언제까지 피바람이 계속 불지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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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걸리 집에서 만난 탈북 1세대 전철우 대표[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남쪽에서 30년을 살아보니 말이지. 탈북해 여기에 정착을 잘 하려면 머리 좋은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성격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 괴로운 일이 있어도 웃고 잊고 그렇게 넘어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야. 내성적이거나 성격이 섬세한 사람은 견디기 어려워하더라고. 그런 사람은 한국에 와서 처음엔 막 신나서 좋아하다가 또 엄청 환멸을 느끼고 그러는데 감정 기복이 산과 계곡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 살기 힘들지.” 1989년 북한 국비 유학생으로 동독에 유학 갔다가 한국으로 탈북한 사업가 전철우 대표(53)를 24일 서울 성동구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전철우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한국에 많이 알려졌다. 그를 다룬 기사는 대개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더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는 탈북 1세대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그가 겪은 삶을 어찌 돈이나 사업 성패로만 판단할 수 있을까. 그가 이방인으로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 그의 눈으로 지켜보는 탈북민들의 정착 등을 들어봤다.# “지금도 사기는 당하고 살지.” “인생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살아가는 것 같아. 어디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잖아. 순간순간 후회 없이 살자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편안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게 내 인생인 것 같아. 편안하게 산다는 게 말은 쉬워도 막상 그렇지 않더라고. 재벌도 편안하지 못하지. 그렇게 돈 많은 사람도 감옥가고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잘 사는구나 하고 위안을 얻지.” 전 대표는 식탁이 4개 밖에 없는 작은 시장 골목 식당으로 필자를 잡아끌었다. 오랜 단골이라고 했다. 모듬전에 막걸리를 시켜놓고 동네 형이 옆집 동생에게 이야기하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는 이미 한국에 다 알려졌다. 귀순, 연예인, 사업, 실패, 이혼, 사기, 성공…. 그의 이름과 함께 항상 따라 다니는 단어들이다. 사기도 수없이 당했고, 당할 때마다 언론을 통해 간간히 전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이제 한 30년 사기 당했으면 이젠 사기꾼을 가려보는 데는 완전 도사가 됐을 거 같은데요.” 전 대표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야. 지금도 당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한다고 나갔는데 또 사기 당했어. 한국에선 이젠 나름 사람 보는 눈도 있고, 모르는 것은 잘 하지 않으니 이제는 사기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외국에 나가선 또 누군가와 손을 잡고 사업을 해야 하니 또 당하지. 하도 당하니까 이젠 ‘이번은 조금만 당해서 다행이다. 손해를 최소화하고, 빨리 피하고, 빨리 잊자’가 좌우명처럼 됐어.” 그는 2017년 ‘전철우의 맛있는 주방’이라는 브랜드를 내걸고 베트남에 진출했다. 하노이에 즉석식품 가공공장을 세웠고 지난해 11월에는 200평이 넘는 큰 식당도 열었다. 그런데 사업을 확대하려는 순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졌다. 요식업계 전반이 피해를 봤고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정부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면서 올 3월 한국에 들어왔다가 하노이에 다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 사업에 다시 집중하는 중이야. 신속하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사장이 베트남에 나가 있으면 또 국내 사업이 생각처럼 잘 돌아가지 않더라고. 둘 다 같이 하긴 어려워. 베트남은 지금 딴 사람에게 맡겨 놨지.” “자꾸 사기 당하면 사람 쓰기 무섭지 않나요?” “사람을 쓰지 않고선 사업을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사람에게 간혹 배신당해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지. 사람을 멀리 하고 어떻게 사업할 수 있나. 독만 되는 게 아니라 약이 될 때가 더 많아. 정작 내가 제일 어려운 건 시장을 개척하는 거야. 될 것 같았는데, 안되고, 안될 것 같았는데도 되고. 아직도 쉽지 않아. 한국은 과거엔 6개월마다, 지금은 3개월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해. 뭘 하나 시장에 내놓으면 경쟁자들이 가격을 낮추고 따라와. 멈추는 순간 죽는 거지.” 탈북민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라는 말을 듣는 그 역시도 지금까지 멈추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계속 새로운 걸 만들고 확장하고 하다보면 지치지 않나요?”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어. 과거엔 사이즈(규모)에 집착했는데 이젠 버는 것보다 지키는 것에 더 신경을 쓰게 돼. 예전처럼 투자금액, 직원 숫자 이런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적어도 확실한 내 것이 더 소중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은 완벽하다 판단되지 않으면 일을 벌이지 않아.”# 전라도 담당 안보강사 막걸리 두 병과 고기전과 홍어전을 함께 담은 접시가 금새 바닥이 났다. 그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사장님, 이거 똑같은 걸로 한 접시 더 줘요.” 그리곤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막걸리를 직접 꺼내왔다. “요식업체 대표를 수십 년 하다보면 맛에 민감할 텐데, 이렇게 골목에 숨은 작은 식당을 단골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맛있잖아. 내 입에는 이 전들이 참 맛있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입은 과거를 잊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데 김책공대 다니다가 독일 드레즈덴 공대에 유학을 갔고, 한국에서도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다닌 것으로 아는데, 한국에 와서 왜 개그맨하고, 음식 장사 시작한 건가요. 그거 하고 싶어서 부모형제 두고 탈북한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땐 어렸지. 동독이 무너지니 북한도 5년 내로 무너질 것 같았어. 빨리 한국에 가서 자본주의를 배워 돈을 벌면 5년 뒤 고향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는 과거 얘기가 시작되자 쉼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와 정보 요원들에게 “광주에선 왜 그렇게 사람 많이 죽였어요”와 같은 엉뚱한 질문을 자주 던졌다고 했다. 당시 화제가 됐던 임수경 방북 사건과 관련해서도 “임수경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한국을 다시 보게 됐다”고도 했다. 결국 정보당국은 ‘전철우의 입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귀순 기자회견 때 독일에서 그와 함께 탈북한 친구였던 장영철에게만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 전철우는 옆에서 입을 닫고 있었다. 이후에도 기자들이 찾을 때마다 장 씨만 나갔다. 그랬더니 기자들이 왜 둘이 왔는데 하나만 말하느냐고 난리를 쳤다. “어느 날 정보기관 담당자가 부르더니 KBS ‘남북의 창’이란 방송에 나가야 하는데 입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어. 방송 같은 건 그때 관심도 없었는데, 막상 나가니 예쁜 여기자들이 옆에 앉아 질문을 던지니 들뜨는 거야. 그래서 신이 나서 말했지. 그때는 북한 사람의 이미지가 경직되고 증오만 가득 찬,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처럼 여겨졌어. 그런데 내가 겨울에 평양 거리에 나가 눈을 치기 싫어 숨었던 이야기 같은 것을 웃으며 얘기하니 저기(북한)도 저렇게 날라리들이 있구나 싶어 이미지가 확 바뀐 거지. 방송 끝나고 정보기관 담당자가 막 뛰어오더니 ‘대박이다. 대박’ 이러는데 대박이 뭔지도 몰랐어. 그다음부터 방송에서 계속 단골로 출연하다보니 방송인, 개그맨도 됐지. 허허.” 당시는 탈북자가 귀순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오는 숫자도 적었다. 한국에 온 귀순자는 전국을 돌며 몇 년씩 귀순강의를 하던 시절이었다. “난 전라도 고정 담당이었어.” “아니, 왜요. 탈북자들이 강연 가기 꺼리는 곳 아닌가요.” “처음엔 멋모르고 갔지. 광주 조선대, 전남대 이런 데를 보내는 거야. 갔더니 청중으로 온 내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 팔장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쏘아보는 거야. ‘왜 조국을 배반하고 왔느냐’고 욕을 하더군. 거기에 기가 죽진 않았어. ‘여긴 여기 앉은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그러는 사회 아니냐. 나도 대통령 하고 싶은데, 거긴 아버지, 아들이 다 해먹고, 그 연줄로 다 하니 올라갈 틈도 없다. 나도 정말 돌아가서 올라가고 싶다’ 이렇게 막 떠들어댔지. 그게 먹혔나봐. 강의가 끝나니 그 학생이 날 부르더니 옥상에 데려 가더군. 같이 간 요원도 못 오게 하고 말이지. 얻어맞는 건가 싶었는데 막걸리 한잔 부어주더니 하루 더 있다 가라더군.” “저도요, 2002년에 한국 와서 몇 달 뒤 조선대에 갔는데 그때도 저를 보고 배신자라고 했어요. 형님 때는 더 했겠죠. 그런데 나보고는 막걸리 주면서 자고 가란 말 안하던데. 난 진짜 배신자처럼 보였나봐. 하하.” “그렇게 강의를 마치고 나니 그 다음부턴 계속 안보강의 할 때마다 나를 전라도에만 보내는 거야. 지내고 보니 전라도 사람들이 의리는 있더라고. 아무튼 그렇게 인연을 맺었고, 광주에 전철우사거리도 있는 거 알지?” “몰라요.” “그런 게 있었어. 인터넷에 찾아봐.” # 우주가 내 마음을 끌어 과거 이야기하며 막걸리 잔이 몇 번을 더 오갔을까. 취기가 느껴질 무렵 몇 마디 더 질문을 던졌다. “여기 와서 계속 오뚜기처럼 일어선 비결 같은 뭘까요.” “내 장점은, 우선 부모님이 참 낙관적인 성격을 물러주신 것 같아. 낙천성을 타고 났으니 아픈 일이 있어도 빨리 털고 일어나. 배신당했다 생각하면 일이 잡히지 않는데, 나는 그건 참 빨리 극복해. 둘째는 아무리 최악의 순간이라도 어떤 상황인가를 객관화하는 능력이 타고 난 것 같아. 아무리 나락에 빠져도 ‘여기서 더 무너지지 말자’ ‘절대 지저분해지지 말자’고 자기 최면을 걸어. 거기서 지저분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거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이 뭔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냉정하게 가려봐야 하거든. 요즘은 한 가지만 잘 해도 돼. 옛날에는 돼지 잡으면 백정이라고 놀렸는데, 이젠 돼지고기만 잘 손질해도 셰프라고 대접 받거든.” “그건 원론적인 말이고, 한 가지 잘해서 일어선 건 아니잖아요.” “나는 사람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 사업은 망해도 사람을 잃으면 안돼. 신뢰, 평판, 존중 이런 게 있어야 재기가 가능하거든.” “그건 전철우란 브랜드를 가졌으니 하는 말이고, 일반적인 탈북자들은 중요하게 여길 사람도 없이 시작해야 해요. 그런 말 탈북자들에게 하면 욕먹어요.” “그래, 그건 그렇겠네.”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요새 취미가 뭐예요?” “넷플렉스에서 드라마 보는 걸 좋아하는데, 우주 이런 것에 끌려. 우주와 인생을 비교하면 ‘뭘 하려고 찰나의 인생을 이렇게 고생하며 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다보니 결국 오늘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매일 행복하자, 행복하자 이러며 살지.”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막걸리에 취해 헤어질 때까지 그의 눈은 내내 웃고 있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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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코로나 재난구호 필수품… 참치캔, 글로벌시장서 불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구호식품의 대명사인 참치캔이 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3월부터 6월까지 올해 국내 참치캔 매출액(선물세트 제외)은 전년 동기 대비 18.2% 늘었다. 품목별로는 일반 라이트 스탠더드가 17.9%, 고추참치 등 가미참치가 15.7% 증가했다. 경로별로는 할인점이 20.5%, 개인 슈퍼가 17.4% 증가했다. 기간으로는 코로나가 큰 이슈가 됐던 3월이 31.3%로 가장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참치캔은 국내 코로나19 재난구호 품목에 필수 항목으로 포함되고 있다. 방역을 위해 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코로나19 취약계층의 지원을 위해 지속적으로 지급되고 있다. 참치캔의 수요는 미국에서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유통업체 코스트코는 미국 매장에서 한동안 고객 1명이 살 수 있는 참치캔 수량에 제한을 두는 등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5월부터 참치캔 매출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실제로 미국 내 참치캔 및 참치 파우치 매출은 AC닐슨 기준 올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29.6% 성장했다. 미국 참치캔 시장 점유율 1위 업체 스타키스트는 같은 기간 매출액이 17.47% 늘었다. 특히 스타키스트는 코로나19로 인한 국경 폐쇄로 참치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밀려오는 생산 주문에 공장 설비가 한때 고장 나 전세기까지 띄워 부품을 공수했을 정도였다. 스타키스트는 국내 동원그룹이 2008년 델몬트로부터 인수해 현재 동원산업의 자회사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러한 수요 증가 배경과 관련해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위기감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면서 저렴한 단백질 공급원인 참치캔이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내 5온스(약 142g)짜리 참치캔의 가격은 1달러 수준이다. 참치캔은 2017년 미국 허리케인 ‘하비’ 재난 당시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비는 당시 40만 명의 이재민과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이때 참치캔은 평상시 대비 3배 이상의 판매량 증가를 보이며 한 달간 1000만 달러 이상 판매됐다. 이렇게 판매된 참치캔은 학교, 마을회관, 교회, 문화센터 등 임시 대피소에 이재민들을 위한 비상식량으로 제공됐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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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 정착 탈북 성악교수의 꿈[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허영희 맞지? 나와.” 총을 든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담담히 군인들을 따라 차를 타고 끌려간 곳은 양강도 주둔 북한군 12군단 보위부 감방이었다. 군인들은 그날 밤 잠을 재우지 않더니, 다음날 취조실로 끌고 갔다. 군단 보위부 고위간부가 두터운 서류철을 들고 들어와 한참을 뒤적이더니 물었다. “왜 잡혀왔는지 알겠지?” “네. 그렇지만 죽으면 죽었지 제자를 감시할 수는 없습니다. 보위부가 선생에게 이런 걸 시키는 게 잘못된 일이죠.” “도대체 그 제자와 어떤 관계이길래 당에서 시키는 임무도 거부하는 건가?” 허영희 교수(61)는 제자와의 역사를 담담히 풀어놓았다. “제자이기 전에 딸 같은 애입니다. 못해요.” 보위부 간부는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보초를 불렀다. “선생님 데려가 재우라.” 그날 이후 조사관은 더 이상 취조실에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허 교수의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가 2013년 1월. 4월 15일까지 76일간의 수감 생활이 시작됐다.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로 15년 동안 재직하던 그가 잡혀온 이유는 제자를 감시하라는 보위부의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2012년 3월, 12군단에서 반탐(방첩)을 책임진 보위부 간부가 집에 찾아왔다. 군단 산하 군관과 결혼한 제자가 한국 물품을 밀수하는 것 같은데, 물증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조사해보니 그 제자는 허 선생에겐 비밀이 없다고 하던데 도와주세요.” “옆집을 감시하라면 해도 어떻게 스승에게 제자를 신고하라고 합니까. 절대 못해요.” 고분고분하지 않자 보위부 간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평양 가서 공부하는 아들이 더 중요하나, 아님 제자가 더 중요해?”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밤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음 날 제자를 찾아갔다. “보위부에서 너를 감시하는 것 같은데 조심해라.” 그러나 보위부 감시망이 허 교수에게만 향한 게 아니었다. 2013년 1월 제자와 그의 남편은 군 보위부에 체포돼 끌려갔다. 그 소식을 들은 허 교수는 곧 나도 잡아갈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감방에서 반동이 되다. 허 교수가 추위를 견디며 구속돼 있던 감방에는 다른 여성들도 잡혀와 있었다. 보위부에선 인신매매범들이라 불렀다. 그런 범죄자들과 같은 감방에 있는 것도 치욕이라 그는 생각했다. 처음엔 “너희들은 할 짓이 없어 중국에 사람을 팔아 먹냐”고 분노도 했다. 그들이 서로 쳐다보며 “아니, 이 할머니는 어디서 왔나”라며 더 놀라워했다. 이들과 함께 지내며 허 교수는 비로써 북한의 속살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보위부 조사 서류를 쓰면서 통곡하더라고요. 엄마가 딸의 손을 잡고 와 중국에 딸을 보내 달라 사정해서 돈도 안 받고 보내줬는데, 그 딸이 잡혀왔어요. 강을 건네준 그 여인은 중국에 여자를 팔아먹는 인신매매범으로 잡혀왔어요.” 감옥에 갇힌 여인들은 대부분 중국에 사람을 넘겨주고, 한국에서 돈을 받아 북한 가족에게 전달해주고, 한국과 통화를 했다는 이유 등으로 잡혀 왔다. 북한은 이들을 인신매매범이라 낙인찍고 감옥에 보냈다. 감방 일과는 감시를 받으며 하루 종일 계속 앉아 있는 것이었다. 허 교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간 여인도 엄마가 딸을 팔진 않았다. 이들이 죄인이 아니라 나라가 죄인이 아닌가.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중국 산골에 팔려가 맞아죽고 남몰래 암매장 돼도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것이 과연 누구 탓일까.’ 허 교수는 자기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7세 때 할아버지가 부유했다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양강도 백암이라는 심심산골로 추방됐다. 그러나 뛰어난 노래실력 때문에 혜산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82년부터 양강도 예술단 가수가 됐다. 전국 가요 콩쿠르에 나가 1등도 두 번이나 했다. 여름이면 삼지연 별장에 피서를 온 김일성 앞에서 공연도 여러 번 했고 기념사진도 많이 찍었다. 1998년 모교인 혜산예술대학 성악교수로 옮겨가 제자를 양성했다. 평생 조국의 선전 전사로 충성을 다했고 1년 뒤면 명예로운 은퇴도 예고됐다. 그러나 제자를 감시하라는 보위부의 임무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감옥 안에서 허 교수는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반동’이 돼 버렸다.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태양절’에 당의 배려라며 석방됐다. 보위부 앞마당에 마중 나온 남편이 76일 동안 목욕 한번 못하고 야윈 아내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왜 울어. 저 새끼들이 좋으라고 우나. 울지 마.” 남편이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더는 예전의 눈빛이 아니었다. ● 제자와 함께 탈북 감옥에서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낀 최 교수는 더 이상 그 땅에서 살기 싫었다. 그가 살던 혜산 예술인아파트는 80세대가 살고 있었다. 이웃으로 지냈던 수많은 이들이 한밤중에 사라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나면 북에 남은 가족들이 돈을 펑펑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니 목표가 생겼다. ‘남조선이란 곳이 저렇게 살기 좋은 곳인가. 여기서 평생 속절없이 살지 말고, 늙었지만 나도 한번 가서 살아보고 싶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이 있기에 선뜻 떠날 수는 없었다. 양강도 예술단 가수 시절 한 직장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2살 연하의 남편 최성가를 만났다. 남편은 그때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데니보이’ 악보를 갖다 주며 그녀에게 접근해왔다. 사랑이 싹텄고, 결혼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같은 직장을 다녔고, 지방 공연도 함께 갔다. 허 교수는 탈북할 때까지 단 하루도 남편과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남편은 예술단 기량과장을 지냈고, 나중에 문화예술부 자재공급소에서 일했다. 1988년에 태어난 허 교수의 외아들 최경학은 수재들만 가는 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혜산의학대학 졸업 후 평양의학대학에 진학해 박사원(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하는 과학자가 되라며 음악과 과학을 함께 가르쳤는데, 뿌듯하게 잘 컸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탈북길에 가족을 선뜻 함께 데리고 나설 수도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여기서 살 수 없다는 답은 더 확고해졌다. 2014년 9월 마침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허 교수는 제자를 찾아갔다. 보위부에서 감시하라고 했던 그 제자였다. 제자는 일정 기간 구금 생활을 마치고 석방됐다. 그 역시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부대에서 주는 배급조차 병사들에게 양보했던 남편은 밀수를 도왔다는 이유로 군복을 벗고 1년 동안 노동교화소에 끌려갔다. “나 여기서 없어질래. 가족은 위험해서 함께 못 가지만 내가 먼저 길을 만들어야겠어. 가서 살만한 세상인지 보고 가족도 데려갈 거야.” “한달 있으면 평양에서 아들이 오는데 보고 가시죠.” “내가 그래서 지금 떠나. 그 애를 보면 못 갈 거 같아.” 한참 말이 없던 제자가 말했다. “저도 선생님을 따라 가겠습니다.” 감방에서 만났던 ‘인신매매범’들이 브로커를 소개해 탈북할 길을 안내해주었다. 한국까지 오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 제주도 정착하다 2015년 5월 하나원을 나와 제주도에 집을 받았다. 서울에 집을 받은 제자는 함께 살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지. 우리 멀리 떨어져 살자. 너는 네 인생을 개척해.” 훌훌 털고 제주도에 와보니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북에서 한 아파트에서 살다 탈북해 한국에 온 옛 이웃들도 만났다. “아니, 선생님은 잘 살았는데 왜 오셨어요?” “너는 왜 왔냐. 우리가 돼지냐.” 이제 가족을 데려올 돈을 벌어야 했다. 자본주의에 살려면 시장경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시장을 찾으니 5일장을 소개해 주었다. 거기에서 옥수수를 판매하는 아르바이트를 얻었다. 같이 일하는 한 여인이 “언니, 옥수수 팔려면 소리를 쳐야 한다”며 눈치를 주었다. 교수의 체면이 남아있어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지만, 이게 시장경제인가 라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소리치면 너보다 훨씬 잘해.” 그날부터 장보러 왔던 사람들은 한번씩은 눈이 커졌다. 옥수수 파는 여인이 “옥수수 여섯 개에 오천원!”을 외칠 때마다 시장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라이브로 듣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착해가고 나니 한국에선 나이든 여인이 200만 원 이상 벌 수 있는 곳은 호텔 청소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 올 때부터 노래를 다시 부르거나 학생들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했어요. 북한에서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거긴 외국곡 하나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죠. 여긴 외국에서 유학을 한 가수도 많은데, 나 같아도 북에서 온 여자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겠어요. 여기 올 때부터 제일 아래에서부터 올라가자고 생각했죠.” 리조트 청소를 하면서 언니, 동생으로 부르는 이들도 생겼다. 낙천적 성격인 그녀를 모두 잘 대해주었다. 가족을 빨리 데리고 오라며 돈도 빌려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 가족의 체포 가족을 데리고 올 돈이 생기자 그는 북한에 연락해 남편을 설득했다. 마침내 남편도 동의했다. 아들을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평양의대 박사원을 막 졸업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탈북했다. 2016년 9월 26일. 2년 전 허 교수가 탈북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나 강을 넘은 부자는 하루 만에 공안에 체포돼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북송됐다. 남편과 아들의 체포 소식에 허 교수는 쓰러졌다. 북한 이곳저곳 연락해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아는 이는 없었다.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게 분명했다. 어느 날 그는 아는 사람에게 제주도에서 통곡을 해도 들리지 않는 곳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한라산 자락 어느 깊은 산속에 주저앉아 남편 이름을 부르며 통곡했다. “성가야. 성가야.” 집에서 부르던 남편의 이름이었다. 나중에 그를 데려갔던 사람이 물었다. “보통 아들을 부르는데 왜 남편 이름을 부르며 울었어요?” “아들은 저를 닮았어요. 걔는 어떻게든 버틸 거 같아요. 그런데 남편은 너무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할 거 같았어요. 너무 불쌍하고 미안하고, 미안하죠.” 남편과 아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고 생각되자 그는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 “죽으려 했어요. 못한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남편과 아들을 빨리 데려오려고 청소하면서 만났던 친구들이 1700만 원, 1000만 원씩 빌려줬어요. 청소를 해보니 그 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알아요. 죽어버리면 저를 믿고 돈을 빌려준 그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죠. 죽더라도 돈은 갚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남쪽엔 좋은 사람이 참 많더라.” 허 교수는 남쪽에서 살면서 감사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고 말했다. 가족을 데려오라며 돈을 빌려주었던 친구들은 그녀 가족의 체포 소식을 들은 날 “우리가 돈을 빌려줘 가족이 체포된 것 아니냐”며 함께 울었다. 돈을 갚으려 하자 “사람을 잃었는데 돈이 문제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허 교수는 재작년까지 그 돈을 다 갚았다. 빚을 갚는 날 또 다같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한 지인이 허 교수에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가져다줬다.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더 못 읽겠어요. 울음이 터져 나와서요. 왜 이렇게 가슴 아픈 책을 줬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래도 다 읽어보니 그가 왜 이 책을 제게 줬는지 알겠더라고요. 저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이겨내고 그 경험으로 세계적인 의사가 됐어요. 우리 아들도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고 저렇게 될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생겼죠.” 그는 5년 동안 숙박업소 청소를 하다가 올해 2월 집 인근 치과병원에 취직했다. 매일 문을 열기 전 병원을 청소하고 의료 폐기물을 버리는 일이다. 올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제주도 관광업계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청소하던 친구들이 일거리를 잃었지만 그는 다행히 계속 일을 하고 있다. 허 교수는 취직한 병원 의사와 딸 같은 어린 간호사들도 편하게 대해 주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원장님이 제 치아를 억지로 검사하더니 120만 원짜리 임플란트를 해줬어요. 돈을 내려 했는데 ‘50년 뒤에 갚으라’더군요. 예전에 우리 아들을 한국에 데려와 의사를 시키고 제가 청소를 해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어요. 이 병원을 아들 병원이라 생각하고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청소를 할 겁니다.” ● 살아야 할 이유를 찾다 이제 허 교수는 극단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살고 있는 제주도가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 정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가 주변에서 쓸모가 있고 할 일도 있음을 느꼈다. “내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이 북에 관심을 갖고 통일을 생각하더라고요. 그들이 북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도록 하려면 저부터 모범이 돼야겠죠. 교수했다고 틀(체면)을 차리지 말고 모든 걸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북한 사람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게 되겠죠.” 그는 “북한에 관심도 없던 주변 사람들이 이젠 북한 소식을 자기보다 더 빨리 보고 알려준다”며 환하게 웃었다. 1년 전에는 한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자격증이나 취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첫 중간고사를 쳤는데 컴퓨터에 미숙해 성적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도 몰랐다. 기말고사 때는 성적을 확인해 볼 수준이 됐다. 꼬박꼬박 강의를 들었지만 점수는 대부분 C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북에선 1등만 하려 했고, 노래도 남들에게 지기 싫어 노력했는데 이젠 져도 편안하니 새로운 세계관이 생긴 것 같아요. 제 아들이 컴퓨터를 정말 잘했어요. 아들이 옆에 있었다면 제가 컴퓨터를 이렇게 배울 일도 없었겠지만, 혼자 사니 컴퓨터도 배우게 됐어요.” 그는 앞으로 30년 더 사는 게 목표다.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요. 일제 때 매일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며 살았는데 어느 날 자고 깨니 해방이 왔다고요. 30년 더 살면 그런 날이 오지 않겠어요. 그때까지 돈 많이 모으고 제주도에 좋은 집을 사서 남편과 아들에게 평생의 속죄를 하고 싶어요.” 남편과 아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허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용소에 간 남편과 아들의 생사는 여전히 알 길이 없어요. 누구나 탈북에 성공할 수 없는 거고, 제 남편과 아들은 불행하게도 성공 못한 사람에 속했죠. 그런데 지금도 북한에서 남편과 아들처럼 착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가고 있나요. 나라가 만든 죄인들이죠. 저는 김정은이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 더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남편과 아들이 죽었어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허 교수는 집 앞 바닷가에 나가 해가 지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기자와 만난 8월 중순에도 인터뷰를 끝내고 바닷가에서 석양을 함께 바라봤다. 온갖 상념이 그때만큼은 날아간 듯한 표정이었다. 석양 아래 어디선가 그리운 얼굴들이 그를 향해 웃고있는 것처럼...허영희 교수가 2년 전 제주시민밴드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라 그리움과 한을 담은 노래 임진강을 부르는 모습이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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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물교환이 통일부의 상상력인가[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남북관계를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접근하겠다”고 말하며 취임한 지 거의 한 달이 돼간다. 그러나 그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장관 취임 이후 통일부는 8억 원 규모의 코로나19 방역물품의 대북 반출을 승인하고 세계식량계획(WFP)에 1000만 달러(약 118억 원)를 지원했다. 이런 지원은 새삼스러운 게 없다. 오히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외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만 창피하게 됐다. 그나마 북한의 인삼술 들쭉술을 남한의 설탕과 맞바꾸는 사업의 승인 여부가 화제가 되긴 했다. 이 장관이 청문회에서 “백두산 생수와 남한 쌀 교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과 일맥상통한 사업이다. 그런데 북한이 이런 물물교환을 창의력과 상상력 있는 신선한 돌파구라고 생각할까. 평생 북한을 지켜본 필자 생각으로는 “무슨 자본주의 소꿉놀이하자는 것이냐”며 화를 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하고는 바로 물물교환에 응하면 김정은이 얼마나 우스워지겠는가. 북한은 김정은의 자존심과 체면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다. 또 북한이 인삼술과 들쭉술을 팔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닐 거라 믿고 싶지만 혹시나 물물교환 정도를 창의적이고 상상력 있는 돌파구라고 생각한다면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발상이라 생각한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꽉 막혔을 때는 22년 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떼를 몰고 올라가 금강산관광 사업을 성사시킨 일 정도는 벌여야 창의적 돌파구라고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때도 북한이 선뜻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공개하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소 떼 방북을 막으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북한 중앙수의방역소 서성원 소장(당시 55세)이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 소장은 “소가 들어오면 방역에 이상이 없다 해도 아무 트집이라도 잡아 소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보위부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 남북관계는 바로 얼어붙는다. 서 소장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사건인데 어떻게 이상이 없는 소들을 트집 잡아 훼방을 놓겠는가. 나중에 삼수갑산 가더라도 소신대로 한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소 떼 방북을 성사시키고 한 달 뒤 서 소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승용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반년이나 소식이 끊겼다. 서 소장은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와 대학 동창이었다. 부인이 남편을 살리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김경희의 차를 가로막고 호소한 끝에 서 소장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반년 만에 서 소장은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됐는데, 더 비참한 것은 집안 식구를 봐도 벌벌 떨고, 먹고 싶은 것도, 아픈 것조차 말하지 못하는 정신 이상에 걸려 있었다. 서 소장은 어디에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고문을 받았는지도 모른 채 집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졌다. 북한은 소 떼를 1차로 받은 지 석 달 뒤 “안기부와 통일부의 반민족 분자들이 소들에게 소화될 수 없는 불순 물질들을 먹여 500마리 중에 15마리가 죽고 8마리가 죽기 직전”이라며 비난했다. 이처럼 옛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북한을 상대할 때 우리의 잣대로만 평가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시장경제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흔히 “이 정도의 경제적 이익을 보게 하고, 성의를 보이면 북한도 고마워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북한에선 지도자의 체면이나 외부 정보 차단, 전략적 판단 등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거래의 방법도 우리 상식과 다르다. 대북사업을 성사시키려면 상대 기업에 얼마나 이익을 주는지 설득하기보다는 기업 책임자의 인사권을 쥔 윗선을 찾는 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 윗선에 1억 원의 뇌물이 들어가면 국영기업은 2억 원 손해 볼 수 있는 것이 북한식 계산법이다. 물물교환이 성사되면 김정은 주머니에는 얼마가 들어갈까? 그에게 떨어지는 것이 없으면 설탕 받고 좋아할 인민이 천만 명이라도 의미가 없다.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면 북한식 계산법 정도는 꿰고 있어야 한다. 술과 설탕, 또는 생수와 쌀을 바꾸는 것은 사장이 할 일이지 장관이 매달릴 일은 아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운운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 걸 하라고 통일부가 존재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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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보좌진이 된 아오지 남녀[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아오지. 북한의 웬만한 도시보다 한국에 더 많이 알려진 지명이다. “아오지 탄광에 간다”는 말은 곧 ‘숙청’이란 의미로 읽힌다. 6.25전쟁이 끝난 뒤 수많은 국군포로가 이곳에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오지는 행정구역상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은덕군에 위치해 있다. 은덕군의 원래 명칭은 경흥군이었지만, 1977년 북한은 김일성의 은덕으로 나날이 변모해가는 고장이라는 의미로 행정지역 명을 은덕으로 바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가장 많은 아사자(굶어죽은 이)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가만히 앉아 굶어죽을 수는 없다며 탈북한 사람도 많다. 그렇게 한국에 온 수많은 아오지 출신 탈북자들은 북한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았던 정신력으로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다. 매일 아침 서울 여의도 국회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에 아오지에서 탈북한 두 남녀가 섞여 있다. 김영춘 국회 사무총장의 비서(7급)인 조경일 씨(32)와 지성호 미래통합당 의원의 인턴비서로 일하는 주은주 씨(38)가 주인공이다. 이들을 12일 광화문에서 만나 그동안 걸어온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같은 국회에서 일하지만 둘은 서로를 몰랐다. 이날 처음 만나 같은 고향 출신인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소속 정당이나 이념에 상관없이 금방 어울렸다. 아오지에서 둘의 집은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두 국군포로의 손녀주 씨는 17살 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3년 동안 체신소에서 전화교환수로 일하다 2002년 20세 때 탈북했다. 주 씨의 집안은 아오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 다섯 명과 어머니 남형제 다섯 명 모두 아오지 탄광 노동자였습니다.” 주 씨는 국군포로의 손녀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 출신의 1936년생 주신호 씨, 외할아버지는 서울 종로 인사동 출신의 1924년생 김경찬 씨였다. 그러나 주 씨는 어렸을 때 두 할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인 사실을 몰랐다. 그는 북한군에 자원한 의용군 출신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군포로들은 모두 북에서 의용군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두 할아버지가 국군포로 출신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죠. 외할아버지는 전쟁 때 포로가 돼 소련까지 끌려가 수감생활을 했고 가끔 이런 저런 추억담을 남겼어요.” 6.25 전쟁 직후 포로 교환이 시작되자 북한군 수용소 관리자가 포로들에게 “남쪽으로 돌아갈 사람은 나오라”고 소리쳤다. 김경찬은 눈치를 보며 서있었지만 용감한 몇몇이 대열 앞에 나섰다. 북한군은 이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총살했다. 더는 남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남은 이들은 북부 탄광들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투입됐다. 김 씨는 인사동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유도선수도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국군 장교 출신이었던 것 같아요. 역시 국군 장교로 참전한 남동생이 남쪽에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한은 전쟁이 끝나 병사 출신은 온성군 상화탄광 등에 보냈지만 장교 출신은 모두 아오지에 보냈거든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집안은 남쪽 어딘가에 있겠지만 주 씨는 찾지 못했다. “이산가족상봉센터라는 곳을 찾아갔는데 ‘친척을 찾아도 만나길 거부하면 상봉이 불가하다’는 말을 강조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 나왔어요.”#아오지의 10살 꽃제비조 씨는 아오지의 ‘소년 꽃제비’였다. “1998년에 엄마가 가족을 살리겠다고 먼저 탈북을 했어요. 엄마와 연락이 끊겼던 1998년부터 2000년 사이 저는 시장에서 아버지 몰래 먹을 것을 얻어먹는 꽃제비 생활도 했죠.” 2000년 중국에 갔던 엄마가 돌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다시 탈북했다. 조 씨를 데리고 간 곳은 중국 옌벤(延邊) 조선족자치주 옌지(延邊) 시였다. 엄마는 그를 교회에 맡기고 위험한 국경 지역을 떠나 돈을 벌려 다른 곳에 갔다. 교회에는 부모를 따라 탈북한 10대 청소년이 3명 더 있었다. 교회의 도움으로 이들은 학교도 다녔다. 그러나 이 생활은 2년 뒤에 끝났다. 누군가의 신고로 체포돼 북송됐다. 그때가 14세였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 보위부에 갇혀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2년 동안 북에서 살았는데,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 사이 엄마는 한국에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가 북에서 둘이 같이 살자며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엄마가 말했어요. 여기 오면 대학까지 공부를 시켜준다고. 저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아오지에 있으면 대학은 꿈도 못꾸거든요.” 생활 형편 때문에 조 씨는 인민학교(초등학교)를 2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북송된 뒤 중학교에 입학해 2년 더 다녔지만 기초가 보족해 따라가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찾아 집을 떠났다.#아오지의 추억주 씨가 기억하는 아오지는 ‘검은색, 암모니아 냄새, 시신들’이었다. 기압이 낮은 날 아오지는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매캐한 석탄 연기로 가득 찼다. 집집마다 연소가 잘 안되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한 탓이었다. “하얀 옷을 입을 수가 없었어요. 샌들을 신고 나가면 발이 금방 새까매져요. 석탄을 원료로 질안 비료를 생산하는 ‘7.7연합기업소’가 옆에 있었는데 거기서 암모니아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죠.” 고난의 행군 시기 아오지에선 굶어죽은 시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1997, 98년에 (아사자가) 제일 심했어요. 2000년까지 아오지에서 제일 큰 오봉시장에 가면 꽃제비 시신을 심심치 않게 봤는데 그나마 제가 탈북하기 전에는 많이 나아졌죠.” 그 당시 아오지에선 석탄을 캐내지 못했다. 모두가 굶주려 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탄광마을에서 폐타이어를 땠다. 새까만 찌꺼기가 하늘에 흩날렸다. 당시 북한은 쓰레기 처리를 해주는 조건으로 외국에서 돈을 받고 폐타이어와 플라스틱 등을 대량으로 들여와 아오지 등에 버렸다. 조 씨가 덧붙였다. “저는 시신을 본 기억이 없어요. 꽃제비 때 시장에 가면 누워있는 사람들을 봤죠. 그때는 10살~12살 때라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저 사람들은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죽은 사람들일 수도 있겠네요.” 조 씨는 북송된 뒤였던 2002년부터 2004년 사이가 아오지에선 제일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한다. “아오지 하면 그때 친구들과 강가에서 고기를 잡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모래무지, 세치네(민물고기의 함북 방언), 민물조개 등을 잡아 어죽을 만들어 먹었죠.”#아오지의 탈북 정신 주 씨는 20세 때 탈북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나진 쪽으로 100리가 넘는 길을 식량 배낭을 메고 걸어가 장사를 다녔다. 가끔 길에서 장사하려 나오는 중국 화물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당시엔 외국인과 접촉하면 보위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돈도 다 빼앗길 때였다. 주 씨도 한번은 체포돼 끌려갔다. 보위부 건물에서 여직원이 주 씨의 옷을 벗기고 속옷까지 꼼꼼히 뒤졌다. 위안화가 나오면 바로 압수해 보위부가 나눠가진다. 그게 당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또 중국에서 나오는 화물차를 얻어 타려고 두만강 세관 옆길 도랑에 숨어있었는데 밤에 보위원이 단속하려 나왔어요. 두만강 강둑까지 정신없이 도망쳤죠. 강둑으로 다시 올라가다 경비대에 체포될까 두려웠어요. 그럼에도 죽을 힘을 다해 평소 동경하던 중국으로 넘어왔죠.” 그렇게 도착한 중국에서 주 씨는 6년을 살았다. “그 당시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할아버지들이 어렸을 때부터 ‘우린 죄를 지으면 남보다 몇 배 더 큰 처벌을 받으니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한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주 씨는 2008년 중국에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벌어져 앞집과 뒷집에 살던 친한 탈북 여성들이 북송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터넷으로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베이징으로 갔다가 라오스 국경 옆 쿤밍을 거쳐 홀로 라오스 국경을 넘었다. 브로커의 안내도 없이 스스로 인터넷에서 정한 루트였다. “그때 인터넷에서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는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사람들이 정글을 헤쳐 라오스로 가더군요. 나도 그렇게 가면 되겠다 싶었죠.” 온밤 빽빽한 정글을 헤치며, 보지도 못했던 벌레와 짐승을 쫓으며 국경을 넘었다. 주 씨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는 라오스에서 경찰에 체포됐지만 북한이 가난한 덕분에 살아났다. “라오스에서 북한 대사관에 연락했어요. 당시 외국인을 체포해 넘겨줄 때마다 라오스 정부는 500달러를 받았어요. 그런데 북한 대사관이 돈이 없어 넘겨받지 못했어요. 제가 라오스 경찰과 흥정을 벌였죠.” 결국 라오스 경찰은 한국 정부에 돈을 요구한 뒤 그를 넘겨줬다. 조 씨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다. 3개월 동안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브로커가 돈을 더 주지 않는다고 조 씨 일행을 프놈펜 북한 대사관에 넘겼다. 꼼짝없이 북송될 상황이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저희를 조사하더니 현지 외국인 감옥으로 인계하면서 3일 뒤 오겠다고 했어요. 엄마를 볼 수 없다니 앞이 막막했죠. 다행히 몰래 숨겨온 위안화가 있어 그걸 간수에게 주고 한국에 있는 엄마와 통화를 했어요. 엄마가 외교부와 통일부를 오가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더군요.” 물밑에서 어떤 외교적 노력이 오갔는지, 아니면 아무 노력도 없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3일 뒤에 오겠다고 한 북한 대사관 직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18일째 되던 어느날 새벽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그들을 인계 받은 뒤 한국행 비행기에 태웠다.#냄새부터 달랐던 한국 주 씨는 인천국제공항에 처음 도착했던 2008년 4월 19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냄새부터 달랐어요. 아오지에서 중국, 라오스, 태국까지 거쳐 오는 동안 모든 나라의 냄새가 다 달랐어요. 그런데 인천에선 참 좋은 냄새가 났어요. 날씨도 너무 따뜻했죠. 할아버지가 남쪽은 참 따뜻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기쁨도 순간. 같은 비행기를 탄 탈북민들이 비상통로로 나오는 것을 보던 한 공항 직원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저 사람들(탈북민)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느냐”는 말이 귀에 들렸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급히 다가가 그 직원을 말렸다. 조사기관으로 들어오는 도로 옆에 푸른 나무도 주 씨에겐 인상 깊었다. “잘 사는 나라는 나무도 살쪄 있구나.” 조사를 맡은 여성 조사관이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첫 인사를 건넬 때만해도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다음 말부터 바로 반말이었다. “야, 너 몽골에 갔지?” “아니요.” “거짓말할래. 너를 본 사람 있어.” 당시 만 해도 옆방에서 취조를 당하던 탈북 남성이 폭행당해 비명소리가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던 남성은 주 씨의 표현대로라면 발로 ‘짓뭉개졌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인권감독관 제도가 도입되는 등 이런 관행이 거의 사라졌다. 하나원을 나온 주 씨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한 종친회 사무실에서 일했다. 첫 월급은 90만 원이었다. 전임자는 150만 원을 받았는데 왜 나에겐 적게 주느냐고 하자 “전임자는 전문대를 나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 씨가 열심히 계산해봤더니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벌지 못해도 인생 전체로는 월급이 더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13년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2019년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을 다니다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얻었다. 남편은 북한에서 해외로 유학 갔다가 탈북해 한국에 온 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현재는 의사로 일하고 있다. 평양 남자와 아오지 여자의 서울살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일년 만에 초중고 검정고시 합격 대학에 보내준다는 엄마의 말에 설레어 2004년 9월 21일 한국에 도착한 조 씨는 처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북에서 학교를 다닌 것은 고작 4년뿐이었지만 한국에서 초중고 검정고시 과정을 1년 만에 모두 통과했다. 이후 1년 동안 대안학교에서 입시 공부를 한 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07학번으로 입학했다. 그 뒤 열심히 공부만 했다. 대학 재학 중 1년 동안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고, 2013년 졸업했다. 그해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친 뒤 2015년 여의도에 있는 정치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조 씨는 “처음부터, 지금도 나는 정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 말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실 인턴비서로 국회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2019년엔 김영춘 의원실 비서로 옮겨갔다. 올해 21대 총선 때는 부산진구 갑 선거구에 출마한 김 의원을 보좌하기 위해 지난해 연말부터 부산에 내려가 살았다. 그러나 김영춘 의원은 선거에서 패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김 전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조 씨는 다시 그의 비서로 들어가 일하고 있다.#이념을 넘어조 씨가 더불어민주당 의원 비서로 들어간 건 정치적 견해 때문이었다. “저는 배고픈 사람에겐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빵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어린 나이에 꽃제비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더는 없어야 하죠. 그러다보니 김정은 체제를 지금 당장 제거할 수 없다면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고 북한 사람들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정치 활동으로 구현하고 싶었어요. 북에는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의 꿈은 당당하게 휴전선을 넘어 좋은 소식을 들고 북에 가는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민주주의 시스템의 제대로 된 버전을 북에 전하고 싶습니다.” 주 씨가 미래통합당 지성호 의원실에 들어온 것은 인권 때문이었다. “지 의원과 2012년에 만나 8년 동안 북한 인권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의원실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고 있고요. 할아버지 때부터 저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다시는 이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0세에 꽃제비가 돼 아오지 시장을 헤맸던 청년은 ‘배고픈 아이들에겐 이념보단 빵이 먼저’라는 신념으로 남북이 오가는 통로를 하루빨리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어 한다. 국군포로의 가족으로 아오지에서 비참한 삶을 대물림했던 청년은 북에 남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에 북한 인권에 평생을 바치려 하고 있다. 비록 몸을 담은 정당은 다르지만 이들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북에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의 피’는 온도가 같았다. “북한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북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더 절실한가.” 아오지에서 대한민국 정치의 심장 국회까지 긴 여정을 헤쳐 온 두 남녀는 앞으로도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 평생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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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가 람보르기니를 몰고 압록강에 나타난 이유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3년 전 탈북해 한국에 정착했던 청년이 지난달 헤엄쳐 개성으로 월북한 사건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들은 이런 일이 터지면 자신들을 향한 야릇한 눈길을 감내하며 한동안 숨을 죽이고 지낸다. 한국에는 정착에 성공한 탈북민도, 실패한 탈북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정착’이라는 잣대로만 탈북민을 보는 시선은 부족함이 있다. 이에 주성하 기자가 21세기 한반도에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간첩 혐의 지난달 14일 인천의 모 처에서 지방에서 올라온 경찰 몇 명이 김예나 씨(가명·30)와 마주 앉았다. 김씨는 북한 보위성과 내통한 간첩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전달 이미 경찰은 김씨를 불러내 휴대전화를 넘겨받은 뒤 디지털 포렌식 작업에 착수했다. 김 씨가 연락을 나눈 북한 보위성 사람은 그가 예전에 북송된 탈북민을 구출하기 위해 매수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실조차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벌써 경찰의 귀에 들어갔다. 이것저것 물어보던 경찰들은 “위챗 대화 내용이 다 복구되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8월 중순에 잡힌 다음 면담을 앞두고 김 씨는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움에 잠겼다. 그는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온 몸이었다. 그가 한국으로 탈출한 뒤 중국 정부는 그에게 입국 금지를 내렸다. 남편은 중국에, 자신은 한국에 남아 이산가족이 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 경찰에게서 간첩 혐의로 조사까지 받게 된 것이다. 이젠 어디든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됐다.# 운명의 시작 김 씨는 2008년 18세 때 한국에 왔다. 가족이 없다보니 2년 정도 서울의 한 수녀원에서 살다가 대학에 갔다. 대학 3학년 때인 2013년 캐나다로 유학을 갔는데, 이때 캐나다로 유학을 온 중국 한족 남성을 운명의 짝으로 만났다. 둘은 2016년 결혼했고, 김 씨는 남편을 따라 중국 랴오닝(遼寧) 성 선양(瀋陽)으로 옮겨갔다. 남편은 큰 식당을 운영했고 그 집안은 최소 수백 억대의 재산을 가진 부자였다. 김 씨의 집에는 람보르기니, 벤츠 아우디 랜드로바 스포츠카 등 고급 외제차만 최소 5대가 있었다. 김 씨는 부자집 사모님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16년 4월 수녀원에 지낼 때 알고 지냈던 한 탈북자 출신 목회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예나. 22세, 23세 되는 탈북 청년 두 명이 선양 근처에서 체포됐어. 얘들을 좀 꺼내줄 수 없을까.” 북송되면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김 씨였다.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제가 도와줄게요. 남편이 공안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불쌍하잖아요. 꼭 살려낼게요.” 김 씨는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조선 청년들은 중국에 도망쳐 왔다 북송되면 감옥에 끌려가 목숨을 잃을 수 있어. 나는 한 동포라 모르는 척 할 수 없어. 당신이 좀 도와줘.”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간절한 호소에 남편이 움직였다. “그래, 내가 해볼게.” 남편이 두 청년의 소재를 수소문했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북송된 뒤였다. 김 씨는 이들의 탈북을 주선한 브로커를 통해 북에 살고 있는 2명 중 한 청년의 어머니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을 꺼내는데 쓰라고 2만 위안을 북에 보냈다. 한달쯤 지난 어느 날 밤. 김 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누나, 살려주세요. 누나 덕분에 감옥에서 나와 다시 탈북한 철민(가명)이와 영남(가명)이예요.” 김 씨는 한국의 브로커에게 연락했다. 브로커는 이들을 국경에서 선양까지 데려오려면 250만 원이 든다고 했다. “그 돈 제가 드릴게요.” 김 씨는 2명 몫으로 500만 원을 보냈다. 브로커가 움직여 철민과 영남은 선양에 왔다. 이곳에서 감옥 생활로 약해진 몸을 추스른 뒤 이들은 한국으로 떠났다. 3국까지 가는 비용으로 김씨는 다시 340만 원을 브로커에게 주었다. 김 씨의 도움으로 한국에 온 철민이와 영남이는 현재 경기 김포와 의정부에서 살고 있다.# 구출의 근거지이 사건 이후 탈북민의 처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김 씨가 탈북 브로커들의 눈에 들어왔다. 이후부터 도와달라는 요구가 끝이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만사를 제치고 도왔다. 탈북하면 국경에서 내륙 도시로 들어오는 길이 제일 위험하다. 곳곳에 공안 초소가 위치해 차들을 단속했다. 김 씨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람보르기니를 끌고 양강도 혜산 맞은편인 지린(吉林) 성 창바이(長白)에 나가 탈북민들을 태우고 선양으로 왔다. 공안은 람보르기니는 감히 단속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창바이에서 선양까지 직접 탈북민을 데려온 것만 해도 3년 반 동안 20여 차례. 그의 식당에 숨었다 한국으로 떠난 탈북민은 300여명에 이른다. 그의 집과 식당 숙소는 언제부터인가 중국 내 탈북 루트의 중간 경유지가 됐다. 중국 감옥에 갇힌 탈북민도 남편을 움직여 7명이나 꺼내주었고, 억류돼 강제로 알몸 화상채팅을 당하는 탈북 여인도 구출한 적도 있었다. 김 씨는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모아두었던 거액의 돈을 탈북민을 구출하는데 써버렸다. 돈이 모자라면 남편에게서 사정해 더 받아냈다. 남편이 부자이고, 김 씨 역시 큰 식당을 운영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탈북민 구출은 큰 위험을 동반한 일이기도 하다.# 공안에 끌려가다 지난해 5월 중국 공안 7명이 갑자기 들이닥쳐 식당에서 일하던 김 씨에게 다짜고짜 족쇄를 채워 끌고 갔다. “명호(가명)를 아나. 왜 도와줬나”라는 심문이 시작됐다. 얼마 전 한국으로 보냈던 명호가 일행 6명과 함께 3국으로 가다 공안에 체포된 것이다. 뒤늦게 뛰어온 남편 덕분에 다행히 김 씨는 무사히 풀려났다. “다시 한번 걸리면 더 봐주기 어려우니 이젠 손을 떼시오.” 자리를 나오기 전 아는 공안이 경고했다. 명호 일행은 중국 내 탈북 브로커들 중에서 악명이 자자한 강은아란 여자에게 걸려든 먹잇감이었다. 강은아는 중국 옌벤(延邊)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보위부 스파이다. 한국에 온 적이 없는 북에서 온 여성인데, 브로커로 위장해 은신하며 거미처럼 먹이를 기다린다. 걸려든 탈북민이 한국에 돈을 대줄 가족이 있으면 일단 한국에 보낸다고 돈을 받는다. 돈을 받으면 내륙으로 이동하는 차에 태우지만, 이후 매수한 공안을 움직여 도중에 체포한 뒤 북송하게 만든다. 이 작업이 끝나면 다시 한국 가족에게 연락해 이들을 꺼낼 수 있다며 또 돈을 요구한다. 강은아는 이렇게 두 번 돈을 받아내고, 보위부 일도 돕는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옌벤에서 이런 짓을 계속하는 중이다. 명호는 강은아가 지난해 선양까지 직접 데려와 김씨에게 넘겨준 탈북민이다. 강은아의 정체를 몰랐던 김 씨는 명호를 도와달라는 브로커의 부탁에 선뜻 12만 위안(약 2000만 원)을 강은아에게 선불로 주었다. 선양에서 명호를 넘겨받을 때 덧니가 유독 눈에 띄는 강은아의 얼굴을 김 씨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가 숨겨주었던 명호는 다른 도시로 이동하다 체포됐고 일행과 함께 북송됐다. 모든 게 강은아의 작전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김 씨는 많은 돈을 뇌물로 보내 일행들을 꺼냈고, 그들을 중국까지 다시 빼왔다. 다행히 명호는 한국에 무사히 왔다. # 한국으로 탈출명호 사건으로 공안의 경고를 받은 뒤에도 김 씨는 탈북민 구출을 계속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끝내 큰 사건이 터졌다. 김 씨가 숙소에서 보호해 주고 보냈던 9명이 3국으로 가다가 체포된 것이다. 탈북 브로커들의 이권다툼이 원인이었다. 두 브로커가 각각 6명과 3명 그룹을 움직였는데, 이동 도중 브로커끼리 서로 상대가 자기 사람을 빼간다고 다툼이 벌어졌다. 브로커에게 탈북민은 돈이다. 분노한 이들은 서로를 공안에 신고했고, 이동하던 9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공안에 끌려간 9명은 김 씨의 집에 숨어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날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김 씨는 집에 있던 외제차 중 탈북민 9명 이송에 사용했던 아우디 스포츠카와 랜드로바, 혼다 밴을 공안이 정확히 압수해 가는 장면을 보게 됐다. 아는 공안이 전화가 왔다. “이번에 잡히면 인신매매로 체포돼 5~7년 형을 받게 된다. 빨리 한국으로 도망가라.” 김 씨는 옷과 돈도 챙기지 못한 채 남편과 작별을 나누지 못하고 황급히 공항으로 나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는 중국 입국이 금지됐다. 이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누군가 또 김 씨를 북한 보위성 요원과 내통한다고 신고했다. 북송된 탈북민을 꺼내기 위해 뇌물을 주며 연락했던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김 씨는 경찰의 조사를 받는 몸이 됐다.# 흙탕에 핀 연꽃 김 씨가 탈북민을 도왔던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탈북민 한 명을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평균 1500만~2000만 원 정도였다. 브로커들은 이 돈을 먼저 온 탈북민 가족에게 받거나 교회 또는 미국의 인권단체 등에서 받는다. 이쪽저쪽에 구출대상자라고 사진을 보내 중복으로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 씨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온 탈북민만 300명이 넘는다. 이들을 한국에 무사히 대가로 여러 브로커들이 최소 45억~60억 원을 챙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중 김 씨의 기여분이 어느 정도인지는 값을 매기기가 쉽지 않다. 그는 가장 위험한 구간인 창바이-선양 구간을 직접 외제차를 몰아 탈북민을 구해오고, 선양에 숨겨주었다. 김 씨 덕분에 브로커들은 막대한 돈을 써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던 위험 구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 써야 했을 돈은 고스란히 브로커의 이윤으로 남았다. 김 씨는 탈북민을 돕는 대가로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2억 원 넘는 돈을 썼고, 온갖 위험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브로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데 내 눈 앞에는 당장 위험한 고향 사람들이 있었고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한 일은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일로 간첩으로 잡혀가진 않을런지….” 7월 어느 날 기자와 마주앉은 김 씨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올해 30세. 한창 인생을 즐겨야 할 20대 젊은 나이에 중국에서 온갖 위험을 뚫고 담차게 탈북민을 돕던 그는 한국에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사를 쓰는 것뿐이에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안돼요. 남편과 시댁은 아직 제가 탈북민인 줄 몰라요.” 기자는 18년 동안 북한을 취재해 왔다. 탈북 브로커의 세계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협박과 고발, 사기 등이 어우러진 아수라의 진흙탕임도 잘 안다. 그런데 그 흙탕물에도 한 떨기 연꽃이 피어있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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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체제 처형 방식 은밀히 바뀐다[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어렸을 때 북에서 ‘림꺽정’이란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월북 작가 홍명희 소설에 기초해 1987∼89년 5부작으로 제작된 림꺽정은 당대 최고 배우들이 출연했고,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김정일의 지시로 림꺽정과 ‘안중근 이등박문 쏘다’라는 영화가 비공식적으로 상영이 금지됐다. 림꺽정은 온갖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의 반란을 다뤘고, 안중근은 수뇌 암살을 영웅적 행위로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년 전쯤 북한은 과거에 만든 영화 10여 편을 시청 및 유포 금지 대상으로 공지했다. 대부분 외국 생활을 보여줬거나, 반란을 다뤘거나, 주요 배우가 숙청된 영화들이었다. 림꺽정은 주제가까지 금지 리스트에 올랐다. 림꺽정의 주제가를 들으면 누구라도 북한의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1절은 “구천에 사무쳤네 백성들의 원한소리/피눈물 고이었네 억울한 이 세상/산천아 말해다오 부모처자 빼앗기고/백성의 등뼈 갉는 이 세상 어이 살리”라고 시작된다. 3절 후렴은 “나서라 의형제여 악한 무리 쓸어내고/가슴에 쌓인 원한 장부답게 풀어보자”라고 대놓고 반항을 선동한다. 북한 당국이 두려워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영화와 노래인 셈이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건너다보이는, 림꺽정의 실제 활동 무대였던 황해남도 연안군 한 농장에서 지난해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발단은 군량미 수탈이었다. 각 농장에 할당한 군량미가 제대로 걷히지 않자 북한은 아예 군부대에 논밭을 나눠주고 직접 수확해 가져가도록 했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던 농민들은 가을에 다 여문 벼를 강제로 빼앗겼다. 연안군은 곡창지대지만, 아사 사건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곳이다. 산간지대 농촌은 산에 개인 텃밭이라도 몰래 일굴 수 있지만, 평야지대에는 개인 경작을 할 땅이 없는 상태다. 졸지에 한 해 수확물을 모두 빼앗긴 농민들은 분노했다. 이 중 한 개 분조 7명이 외통길(한 군데로만 난 길)에 드러누워 벼를 싣고 가는 군용차들을 막아섰다. 다 빼앗기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우리를 깔고 지나가라는 것이었다. 영화 림꺽정도 농작물을 모두 빼앗겨 분노한 사람들이 수탈하러 나온 양반들을 죽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북한에서 당의 지시를 거부하고 군량미 제공에 반대해 실제 행동에 옮긴 것은 반정부 시위와 다름없는 심각한 정치적 반항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다. 오히려 농장 관리위원회 간부들이 나와 일을 잘 해결해 주겠다고 달래 농성을 풀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이들에 대한 처벌이 없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일은 나중에 일어났다. 3월 초까지 불과 몇 달 사이에 군용차를 막았던 7명 모두가 앓다가 죽거나 객사한 것이다. 북한은 원래 부검이나 사인 공개 같은 것도 없는 곳이다. 내막을 아는 사람은 이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살해됐다고 믿고 있다. 죽은 이들이 워낙 주위의 주목을 받던 터라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연안 사건은 최근 북한의 처형 방식이 새롭게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 군법이 적용돼 2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700명 이상 처형됐는데, 이들도 공개처형이 아니라 비밀처형됐다. 북한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포심을 심어주는 공개처형을 선호했는데, 이제는 수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북한 체제가 대중의 눈치를 볼 만큼 허약해졌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공개처형을 마구 하다가 처형자와 심정적 분노를 공유하는 군중 심리가 폭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밀처형도 소문이 퍼지기 때문에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공포를 주려는 의도를 넘어 진짜로 ‘불순분자’를 없애지 않으면 저항 정신을 누를 수 없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이 커지자 목격자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 이유가 가장 타당해 보인다. 숙청, 비밀경찰, 공개처형, 비밀처형…. ‘인민의 천국’ 공산주의로 간다는 달콤한 유혹에 속았던 나라들에서 보았던 행태들이다. 그러나 동유럽과 소련(현 러시아)은 30년 전에 청산한 유혹의 대가를 북한은 너무도 오래, 잔인하게 치르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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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오리온 제주용암수’ 출시 한 달만에 150만병

    코로나19 이후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음식뿐만 아니라 마시는 물도 수원지, 성분 등을 따져 깐깐하게 고르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에 최근 오리온이 출시한 ‘오리온 제주용암수’가 ‘연수’ 위주의 국내 물 시장에 ‘경수’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하며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오리온 제주용암수는 6월 판매를 개시한 이후 한 달 만에 150만 병 판매를 돌파하는 등 반응이 뜨겁다. 물의 부드러운 정도인 경도는 물 속 칼슘과 마그네슘 함량으로 결정되는데 칼슘과 마그네슘에 각각 가중치를 둬 더한 값이 높을수록 경수에 가깝다. 물 1L에 녹아 있는 칼슘과 마그네슘을 기준으로 경도가 150mg 이상이면 경수로 보는데, 이에 맞는 대표적인 물이 오리온 제주용암수다. 오리온 제주용암수는 미네랄 부족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풍부한 미네랄을 제공하고, 세계적 명수와 경쟁할 수 있도록 미네랄 함량을 신체 밸런스에 맞춰 대폭 높인 것이 특징이다. 주요 미네랄 성분으로는 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칼슘이 1L 기준 62mg, 나트륨 배출로 체내 수분과 전해질 균형에 도움을 주는 칼륨이 22mg, 신경과 근육 기능 유지에 도움이 되는 마그네슘이 9mg 정도 포함돼 있다. 서구화된 식습관으로 인해 몸의 산성화를 겪고 있는 소비자들을 위해 수소이온농도(pH) 8.1∼8.9로 약알칼리화했다. 오리온 제주용암수는 출시 후 중국, 베트남 등 글로벌 시장 진출도 시작했다. 오리온 관계자는 “최근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늘며 오리온 제주용암수에 대한 국내외 반응 또한 뜨겁다”며 “미네랄이 함유된 오리온 제주용암수로 올여름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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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단장 승진에 실패한 현송월 남편[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지난해 북한군 7·27사단 리종무 사단장(71)이 지병으로 쓰러졌다. 연말에 두 명이 후임 사단장 후보로 올랐다. 한 명은 김광민 여자축구팀 감독이었고, 그보다 더 유력한 후보는 7·27사단 당위원회 조직부 박시철 부원(지도원)이었다. 그가 현송월 노동당 부부장(43)의 남편이다. 갑자기 수군수군 말들이 퍼져갔다. “기껏해야 중좌(중령) 편제인 조직부 부원이 곧바로 중장이 맡고 있는 사단장에 오른다는 것이 말이 되냐. 아무리 현송월의 뒷배가 커도 체육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사단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냐.” 부정적 여론 등으로 사단장 인사 처리가 지지부진해진 사이 리종무 중장이 치료를 받고 복귀했다. 사단장 인사는 없던 일이 됐다. 북한군 7·27사단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다. 이는 인민무력성 소속 1군인 4·25체육단과 2군인 소백수체육단, 호위총국 소속 리명수체육단, 각 군단 체육단 등 북한 군부 체육단들을 총망라한 조직이다. 7·27사단장은 북한군의 체육상이라 할 수 있다. 리종무 사단장도 북한 최대 체육단인 4·25체육단장을 지내다가 2012년 장관급인 북한 체육상에 올랐고 2016년 7·27사단장으로 왔다. 북에선 7·27사단장이 인민무력상이나 총참모장, 총정치국장보다 더 선망받는 자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북한 스포츠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보니 후방 공급 및 기자재 공급은 북한에서 최상이다. 달러와 육류를 많이 만질 수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검열을 피해 부정 축재하기에도 안성맞춤이라 언제 숙청될지 모르는 장관보단 훨씬 안전하고 재물도 많이 모을 수 있다. 각종 대회 때마다 자유롭게 외국 구경도 할 수 있다. 최부일 노동당 군사부장은 과거 이곳 사단장을 지내다가 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사단장 전용차 벤츠의 키를 가지고 달아났던 일도 있다. 국정원이 2015년 숙청됐다고 발표한 현영철 전 북한군 총참모장도 7·27사단장 자리를 무척 탐냈다. 그가 사단장이 됐다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리종무 사단장은 유머러스한 언변술로 김정일과 고용희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사람이다. 그의 자리를 넘보던 사람들 모두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유교사상이 팽배한 북한에서 현송월의 남편은 이번에도 출세 시도가 실패해 기가 크게 꺾였을 듯하다. 자신은 부원에 불과한 데 비해 아내는 김정은 체제 들어 모란봉악단장, 대좌, 노동당 후보위원, 노동당 부부장 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송월은 김정은과 어떤 사이일까.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가 김정은의 옛 애인이라고 알고 있다. 2015년 12월 현송월을 단장으로 하는 북-중 친선 공연단이 공연 3시간을 앞두고 전격 귀국하면서 이런 소문이 더 커졌다. 북에서도 현송월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17년 12월 현송월이 책임진 모란봉악단 지방순회공연 때에는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김씨 일가의 경호를 맡은 국가보위성 5총국이 호위를 담당했다. 김씨 일가 외 5총국의 경호를 받은 사람은 현송월이 유일하다. 이를 지켜본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김재룡 총리도 현송월 앞에선 꼼짝 못 하고 공손해졌다. 권력자의 귀에 누가 더 가까운지를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송월이 김정은의 옛 애인이라는 실체적인 증거는 없다. 일반인 남녀가 선을 넘어 비정상적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짐작만 할 뿐 둘의 관계를 단정하기 어렵다. 남녀의 문제는 둘이 입을 다물면 제삼자가 알 방법이 없다. 하물며 전국에 널린 김정은의 비밀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북에 거의 없다. 아니 알아도 말을 할 수 없다. 최근 현송월이 김정은의 아이를 낳았다는 말까지 나오지만 이건 더욱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본부인인 리설주가 낳은 셋째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현송월이 김정은의 아이를 낳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이는 후계구도에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일이라 현송월조차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다. 모든 상황을 차치하고 김정은이 현송월의 남편까지 챙길 생각은 없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장성도 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 현송월에 대한 김정은의 신임도 유효기간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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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은 누구의 사위일까[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지난달 21일 북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에선 리병철 군수공업부장이 실권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북한 군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최고 군사정책 결정기구인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선출돼 김정은에 이어 군부 2인자가 됐다. 그동안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은 북한군의 3대 핵심 실세로 꼽히는 총정치국장, 총참모장, 인민무력상 중 한 명이 뽑혔다. 그런데 이번에는 군수공업부장인 리병철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리병철은 김정은과 맞담배를 피운 최초의 인물이다. 2016년 8월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북극성’ 시험발사에 성공했을 때 노동신문은 둘이 맞담배를 피우는 사진뿐만 아니라 얼싸안고 환호하는 사진까지 실었다. 리병철은 어떻게 이런 신임을 받게 됐을까. 지난해 리병철과 그의 집안에 대한 흥미롭고 자세한 여러 정보를 입수했다. 그가 바로 리설주의 부친, 즉 김정은의 장인이라는 것이다. 정보원의 위치와 신뢰 관계 등을 감안했을 때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정보에 대한 복수 확인이 되지 않는 사이 리병철은 승승장구했다. 리설주의 집안은 외부에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북한에선 리설주가 비행사의 딸이라는 소문만 퍼져 있을 뿐 더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리병철은 혁명가 유자녀를 위해 세운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비행사가 됐으며 고위 당 간부의 딸과 결혼했다. 리설주가 어렸을 때부터 각종 대남행사에 동원된 것으로 미루어 ‘좋은 집안 출신’으로 추정했는데, 부친이 리병철이라면 진짜로 집안이 좋았던 셈이다. 국내 북한 인물자료엔 리병철의 경력이 1990년 북한군 2비행사단장일 때부터 기록돼 있다. 리설주는 1989년생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감안하면, 리병철이 비행연대장을 할 때 태어난 늦둥이 딸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 예술 분야에 정통한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은 은하수관현악단 가수인 리설주와 비밀동거를 했으며 2009년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리설주는 그 당시 약 1년 동안 사라졌다가 이듬해 다시 악단에 복귀해 가수로 활동했다. 북한에선 1960년대부터 인기 연예인이 사라졌다 복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개 김씨 가문과 관련 있기 때문에 동료들은 짐작만 할 뿐 그 사연을 캐묻지 않는다. 김정일 사망 8개월 뒤인 2012년 7월 김정은이 리설주를 현지 시찰에 데리고 나올 때까지 둘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공교롭게 이즈음부터 리병철도 승승장구했다. 그는 1992년에 중장이 됐지만 무려 16년 뒤인 2008년에야 상장 진급과 함께 공군사령관이 됐다. 상장이 되는 데 16년이 걸렸는데 대장은 2년 만인 2010년에 달았다. 2014년 군수공업부 제1부부장, 2019년 군수공업부 부장이 된 뒤 올해 군부에서 김정은 다음의 실세가 됐다. 군수공업부를 미사일이나 방사포를 생산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군수공업부는 수출입의 최우선권을 갖고 있다. 고양이뿔 빼고는 다 취급할 정도다. 리병철이 북한의 최고 돈줄을 꽉 잡고 있는 셈이다. 리병철에게 고난의 시기도 있었다. 지난해 10, 11월경 그는 중앙당 집중 검열을 받았다고 한다. 제거할 고위 인물은 집중 검열부터 받는 게 관례다. 다행히 리병철은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가 복귀한 뒤 김정은은 리설주와 함께 백두산에 올라 리명수 냇가에서 다정한 모습을 연출했다. 2017년 1월 국가보위성에서 조사받던 중 사망한 강기섭 고려항공 총국장은 리설주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즉 리병철과 강기섭은 매부 처남 사이인 셈이다. 이 사건은 김원홍 당시 국가보위상의 몰락을 불러왔다. 강기섭에게도 리설주와 친자매처럼 똑 닮은 딸이 있는데, 강기섭의 딸이 리설주보다 키가 좀 더 크다고 한다. 리병철이 김정은의 해외자금 은닉까지 관리한다는 정보도 있다. 지난해 집중 검열을 받았던 것 역시 김정은이 자기 돈을 리병철이 빼돌린다고 의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난달의 파격적인 승진으로 미루어 리병철은 확실한 재신임을 받은 듯하다. 최근 김여정과 리병철의 급부상을 보면, 김정은의 패밀리(가족) 의존도가 더욱 심해지는 분위기다. 김정은 집권 10년이 돼 가는데, 정작 믿을 사람은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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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경제 발전 선전하는 내용에 마음 흔들려 탈북 결심하기도

    북한으로 날아간 대북전단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5000명이 넘지만 이들 중 북에서 한국 삐라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삐라가 도달하는 범위가 대개 군사분계선 이북 수십 km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 이 지역에는 군인들이 많이 살고 민간인은 많지 않다. 반면 탈북자의 80% 이상은 삐라가 도달하지 못하는 함경도 지역 출신이다. 다만 북한 최전방에서 근무했다면 삐라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삐라를 경험하면 매우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삐라에 영향을 받고 귀순을 선택한 사례가 적잖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강산 인근에서 북한군으로 근무하다 2016년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한 강유 씨다. 그는 “삐라가 너무 많아 골라볼 정도였다”며 “삐라 외에 USB, MP3, 초코파이, 담배, 1달러 지폐 등도 산에 널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북한에선 한국에서 보낸 삐라나 물자를 만지면 손이 썩는다고 선전해 처음엔 독이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속의 삐라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은 점차 확대돼 한국에서 보낸 USB를 몰래 보는 데 이르렀다. 삐라를 보면서 그의 생각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 씨는 “김정은 일가를 비난하는 삐라는 믿지 않았지만 한국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삐라에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특히 그는 USB에서 고려대에 다니는 탈북 청년의 이야기를 보면서 “저기는 열심히 노력하면 대학에도 가고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귀순 결심에 삐라의 영향이 50%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개성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다 2012년 귀순한 정철민(가명) 씨도 비슷한 사례다. 그는 “김씨 일가 우상화를 비난하는 삐라를 봤을 때는 처음에는 화가 났고, 한국 군사력을 선전하는 삐라엔 영어가 많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국의 경제력을 선전하는 삐라가 가장 인상 깊었다”며 귀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북한 당국은 삐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강원 통천에서 살았던 김주영(가명) 씨는 “1992년 여름 평양에서 살 때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 지역에 가로 15cm, 세로 3cm 정도의 종이에 ‘김정일 타도하라!’고 적힌 삐라가 살포돼 당국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평양 사람들은 모두 필체 검사를 받았다. 한국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내부자의 소행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당국에 특히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삐라를 어떻게 처리할까. 강원 평강군 등 최전방 지역에서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15년 동안 ‘적위대부’ 소속 삐라 수거 전담 조직에서 활동했던 박선희(가명) 씨의 증언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날아온 삐라와 물자는 ‘적지물자’로 불린다. 민가 주변에 떨어진 삐라는 일반인의 신고를 받고 전량 수거한다. 반면 깊은 산속에 떨어진 삐라는 전담 조직이 매일 차를 타고 가서 조별로 할당된 지역을 수색해 수거해 온다. 삐라 내용은 나체의 여인 사진이 제일 많았다. 젊은 병사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 빌딩과 도로 등 한국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삐라가 많았다. 수거한 삐라는 하늘에서 살포된 것보다는 터지지 않은 채 뭉텅이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불에 잘 타지 않는 재질이어서 휘발유를 뿌려가며 태웠다. 삐라와 함께 볼펜, 라이터, 수첩, 여성 속옷 등도 날아왔는데 북한 당국은 USB를 열면 폭발하고 여성 속옷을 입으면 몸속에 벌레가 생긴다고 선전했다. 박 씨는 “한국의 볼펜을 주워 속심만 빼내 북한 볼펜 안에 넣고 썼는데 질이 너무 좋아 인상적이었고, 사탕이나 과자는 돼지를 주긴 했지만 사람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0년 넘게 삐라를 주웠지만 워낙 사상교육을 많이 받아 이에 동화되진 않았다”며 “다만 2008년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로 들어오는 동안 함께 온 탈북자들은 감탄했지만 나는 너무 많이 봤던 풍경이라 무덤덤했다”고 전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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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많아 골라볼 정도…” 한국 ‘삐라’, 北주민들에 어떤 효과?

    북한으로 날아간 대북 전단은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5000명이 넘지만 이들 중 북에서 한국 삐라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삐라가 도달하는 범위가 대개 군사분계선 이북 수십㎞ 정도에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 이 지역에는 군인들이 많이 살고, 민간인은 많지 않다. 반면 탈북자의 80% 이상은 삐라가 도달하지 못하는 함경도 지역 출신이다. 다만 북한 최전방에서 근무했다면 삐라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삐라를 경험하면 매우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삐라에 영향을 받고 귀순을 선택한 사례가 적잖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강산 인근에서 북한군으로 근무하다 2016년 분계선을 넘어 귀순한 강유 씨다. 그는 “삐라가 너무 많아 골라볼 정도였다”며 “삐라 외에 USB, MP3, 초코파이, 담배, 1달러 지폐 등도 산에 널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북한에선 한국에서 보낸 삐라나 물자를 만지면 손이 썩는다고 선전해 처음엔 독이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 속의 삐라만 보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은 점차 확대돼 한국에서 보낸 USB를 몰래 보는데 이르렀다. 삐라의 보면서 그의 생각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 씨는 “김정은 일가를 비난하는 삐라는 믿지 않았지만 한국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삐라에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특히 그는 USB에서 고려대에 다니는 탈북 청년의 이야기를 보면서 “저기는 열심히 노력하면 대학에도 가고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귀순 결심에 삐라의 영향은 50%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개성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다 2012년 귀순한 정철민(가명) 씨도 비슷한 사례다. 그는 “김 씨 일가 우상화를 비난하는 삐라를 봤을 때는 처음에 화가 났고, 한국 군사력을 선전하는 삐라엔 영어가 많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국의 경제력을 선전하는 삐라가 가장 인상 깊었다”며 귀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북한 당국은 삐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강원도 통천에서 살았던 김주영(가명) 씨는 “1992년 여름 평양에서 살 때 김일성 생가가 있는 만경대 지역에 가로 15㎝ 세로 3㎝ 정도의 종이에 ”김정일 타도하라!“고 적힌 삐라가 살포돼 당국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평양 사람들은 모두 필체 검사를 받았다. 한국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내부자 소행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당국에 특히 비상이 걸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삐라를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강원도 평강군 등 최전방 지역에서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15년 동안 ‘적위대부’ 소속 삐라 수거 전담 조직에서 활동했던 박선희(가명) 씨의 증언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날아온 삐라와 물자를 ‘적지물자’로 볼린다. 민가 주변에 떨어진 삐라는 일반인들의 신고를 받고, 전량 수거된다. 반면 깊은 산속에 떨어진 삐라는 전담 조직이 매일 차를 타고 가서 조별로 할당된 지역을 수색해 수거해온다. 삐라 내용은 나체의 여인 사진이 제일 많았다. 젊은 병사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 빌딩과 도로 등 한국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삐라가 많았다. 수거한 삐라는 하늘에서 살포된 것보다는 터지지 않은 채 뭉텅이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불에 잘 타지 않는 재질이어서 휘발유를 뿌려가며 태웠다. 삐라와 함께 볼펜, 라이터, 수첩, 여성 속옷 등도 날아왔는데, 북한 당국은 USB를 열면 폭발하고, 여성 속옷을 입으면 몸속에 벌레가 생긴다고 선전했다. 박 씨는 “한국의 볼펜을 주어 속심만 빼내 북한 볼펜 안에 넣고 썼는데 질이 너무 좋아 인상적이었고, 사탕이나 과자는 돼지를 주긴 했지만 사람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0년 넘게 삐라를 주었지만 워낙 사상교육을 많이 받아 이에 동화되진 않았다”며 “다만 2008년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로 들어오는 동안 함께 온 탈북자들은 감탄했지만 나는 너무 많이 봤던 풍경이라 무덤덤했다”고 전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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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SPC삼립, 쿠팡과 홈 델리 브랜드 ‘얌’ 론칭

    SPC삼립이 이커머스 ‘쿠팡’과 협업해 홈 델리 브랜드 ‘얌(YAAM!)’을 론칭했다고 24일 밝혔다. 얌(YAAM!)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표현하는 영문 감탄사 ‘YUMMY(아주 맛있는)’를 재치 있게 표현한 것으로, SPC삼립의 제품력과 쿠팡의 편의성이 접목된 온라인 전용 브랜드다. SPC삼립은 최근 온라인 식품 배송 시장의 성장과 브런치 문화 확산 등 서구화되어 가는 식문화 추세에 따라 ‘홈 델리’ 콘셉트의 간편식 제품을 개발하고 온라인 전략 부서를 신설해 쿠팡과 손을 잡았다. 얌(YAAM!) 브랜드 제품은 64겹 결이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는 ‘골든 패스츄리식빵’, 프랑스 정통 빵으로 고소한 보리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통검정보리 깜파뉴’, 토스트기와 에어프라이어로 간편한 조리가 가능한 ‘치아바타 샌드위치’ 등 베이커리 10종과 SPC그룹의 샐러드 브랜드 ‘피그인더가든’의 대표 메뉴 ‘파워보울 샐러드’ 등 샐러드 2종, 간편한 식사로 즐길 수 있는 ‘양송이 크림스프’와 ‘전복새우죽’ 등 죽, 수프 5종과 델리 제품 17종이다. 쿠팡의 신선식품 새벽, 당일배송 서비스인 ‘로켓프레시’로만 만나볼 수 있다. 제품 패키지는 시즐감을 강조한 제품 이미지를 삽입해 주목도를 높였고, 일부 제품은 패키지 겉면에 레시피를 넣어 소비자들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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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내년이 진짜 위기인 이유[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강한 바람은 높은 파도를 만든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마자 파도가 일진 않는다. 일정한 시차를 두고 높아지고, 바람이 멈춘 뒤에도 오랫동안 사그라지지 않는다. 파도가 갑자기 높아지면 배들이 침몰한다. 작고 낡은 배가 먼저 뒤집힌다. 세계 주가 대폭락이라는 강풍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만든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흥미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주가 대폭락 1년 뒤쯤부터 허약한 독재국가들이 마치 태풍 만난 낡은 배처럼 뒤집어진 것이다. 21세기 들어 미국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대폭락이라 정의할 수 있는, 직전 고점 대비 35% 이상 하락한 사례는 세 번이다. 첫째는 2000년 1월 11,722.98을 기록했던 다우지수가 2002년 9월 7,591까지 하락했을 때다. 고점 대비 약 35% 빠졌다. 둘째는 2007년 10월 13,930을 찍었던 다우지수가 1년 4개월 뒤인 2009년 2월 7,062로 무려 49.5%나 떨어졌을 때다. 국제 금융 위기였다. 셋째는 올해 2월 13일 29,550을 기록했다가 40일 뒤인 3월 24일 18,576으로 고점 대비 약 37% 하락한 것이다. 이렇게 주가가 고점 대비 35% 이상 떨어지면 이듬해에 독재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졌다. 2003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는 미국의 침공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라크를 제외하고도 2003년부터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독재 정권들을 줄줄이 무너뜨린 ‘색깔 혁명’이 일어났다. 2003년 장미 혁명으로 그루지야(현 조지아)에서 11년 집권했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축출됐다. 2004년엔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2005년엔 튤립 혁명으로 키르기스스탄에서 15년간 장기 집권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각각 권좌에서 밀려났다. 2009년 주가 대폭락이 벌어졌던 이듬해인 2010년 튀니지에서는 아랍의 봄이 시작돼 제인 벤 알리가 쫓겨났다. 이어 리비아에서 무아마르 알 카다피,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예멘에서 알리 압둘라 살레, 알제리에서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 수단에서 오마르 알 바시르가 줄줄이 무너졌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도 붕괴 직전까지 갔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대공황 수준의 주가 폭락이 오면 시차를 두고 실물경제에 충격이 간다. 이 충격을 가장 크게 받는 국가들은 선진국이 아니라 경제가 허약한 독재국가들이다. 다우지수가 하락하면 미국이 최대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미국으로 뽑아가는 바람에 중남미,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가 더 큰 피해를 받는 이치를 떠올리면 된다. 가난한 청년의 분신이 도화선이 된 아랍의 봄처럼 붕괴된 독재국가들에선 경제 악화가 시위를 불렀다. 다우지수가 37% 이상 빠진 올해의 경우 엄청난 유동성에 힘입어 V자 반등에 성공한 듯 보이지만, 전 세계 실물경제는 이미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면 과거 사례에서 보듯이 이 충격이 내년부터 가장 허약한 독재국가들에 미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타격을 볼 가능성이 높은 독재국가로 이란과 북한, 투르크메니스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코로나와 원유 가격 하락으로 큰 피해를 본 이란이 가장 위험해 보인다. 북한 역시 강력한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한 셀프 봉쇄로 급속히 허약해지고 있다. 명색이 국가인지라 내년까지는 충격을 버틴다고 해도 그 이후는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사례를 보면 소련이 멸망한 뒤 3, 4년 잘 버티다 1994년 하반기에 접어들며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과거 이명박 정부 시절 통일부에서 ‘북한정세지수’란 것을 개발했다. 아마 내년에 이 지수의 위기 점수가 가장 높을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들어 지금처럼 북한 내구력이 취약해졌거나 또 취약해질 것으로 예상된 적은 없다. 주가가 V자 반등에 성공해 내년까지 유지되면 김정은 체제는 훨씬 버티기 수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올가을에 팬데믹이 다시 시작된다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충격파는 올 2분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라는 배가 그런 충격에도 전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말하긴 쉬워도, 막상 현실화되면 무서운 시나리오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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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러 끊긴 나라’로 전락한 北, 폭파 이벤트로 제재 판 흔들기

    도대체 김정은―김여정 남매는 왜 이럴까. 북한이 2018년 비핵화 대화 시작 후 전례 없는 초강경 대남 드라이브를 걸면서 한미 외교가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 질문 중 하나다. 지난해에도 ‘삶은 소대가리’ 등 격한 표현의 ‘말 폭탄’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물리적으로 폭파하고, 9·19 군사합의를 깨는 군사 도발을 예고하고 나선 만큼 완전히 다른 판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군 총참모부가 17일 한국을 향해 “대적 군사행동 계획들을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에 제기할 것”이라고 하면서 국무위원장 겸 중앙군사위원장인 김정은이 직접 등장해 강도 높은 대남 압박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대남 메시지에 침묵했던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선다면 앞선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는 다른 차원의 메시지와 행동 강령을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세 번 회담을 갖고 서울 답방까지 동의했던 김 위원장, 그리고 이를 가장 옆에서 지켜본 여동생 김여정은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일까.○ 가중된 제재로 위기에 놓인 경제난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다음 날인 17일 김여정이 내놓은 담화에서 문 대통령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을 걷어내면 북한 수뇌부의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의 윤곽이 드러난다. “미국 눈치를 보면서 대북제재 완화나 해제 시도 등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여정은 문 대통령이 15일 “(제재와 관련해) 더디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으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대 의존의 본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고 일갈했다. 김여정이 직접 나서 문 대통령을 향해 제재 불만을 쏟아낸 것은 북한 경제난이 한층 심각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북한의 대중무역 적자액은 2016년 5억5800만 달러였지만, 2017년 16억7700만 달러, 2018년 20억2200만 달러에 이어 지난해엔 23억7300만 달러로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마저도 수출과 수입 모두 쪼그라들고 있다. IBK북한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4월 북한의 대중무역액은 수출 221만 달러, 수입 218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0% 수준이다. 이렇게 북한 경제난이 가중되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가 누적되면서 그 파괴력을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8월 6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결의 2371호는 북한에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보여줬다. 이 제재로 북한은 석탄, 철과 같은 핵심 광물 자원의 수출이 막혀 가장 큰 달러원을 잃게 됐다. 지난해 12월 해외에 나와 있던 북한 근로자들도 전부 철수하는 수순을 밟은 것도 크다. 해외 북한 근로자들은 벌목공 등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급 중 상당 부분을 달러는 물론 미국 재무부의 단속망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루블화, 중국 위안화, 유로화 등으로 바꿔 전산 시스템이 아닌 외교 행낭을 통해 평양으로 보내왔다. 그런데 그 달러벌이를 위한 ‘일자리’ 자체가 끊긴 것이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로 북한이 올해 1월 말부터 국경을 폐쇄하면서 그나마 있던 물품 교역마저 급격히 위축된 상황이다. 윌리엄 브라운 미 조지타운대 교수는 “대북제재가 북한의 수출을 큰 폭으로 줄였다면, 코로나19는 수입을 급감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최근 북한의 수입품은 주민들의 민생과 연결된 생필품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출과 수입 모두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북한은 사실상 무역이 가장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고 밝혔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19일 전했다. 결국 이런 극심한 경제난은 통치자금 잔액을 ‘깡통계좌’로 만들면서 김정은 체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 북한 상품무역수지 적자는 지난해 23억6000만 달러, 2018년 20억 달러여서 북한의 외환보유액 규모(2018년 25억∼58억 달러)가 줄고 있다. 이 때문에 버락 오바마 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트럼프 정부 내내 이어지면서 경제난으로 촉발된 대내적 위기가 본격화되자 상황 변화를 위해 ‘대남 때리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북한 경제는 제재와 코로나19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코로나 때문에 늦긴 했지만 뭔가 하긴 해야겠고, 그러니까 제일 약한 고리인 한국을 공격하면서 제재 이슈를 만들어 나가려는 속셈”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의 거센 대남 공격이 제재와 관련해 한미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17일(현지 시간) 북한에 대한 기존 경제제재를 1년 더 연장하며 북한을 “비상하고 특별한(unusual and extraordinary) 위협”으로 규정했다. 개성 연락사무소를 완파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을 겨냥해 제재 불만을 쏟아낸 지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고삐를 틀어쥔 셈이다.○ 김정은 지도력 실추, 반전 노려2019년 3월 5일 오전 3시, 김정은 위원장이 탄 전용열차가 평양역 구내에 들어섰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베트남 하노이 회담을 위해 2월 23일 오후 4시 30분 평양역을 출발한 지 226시간 30분 만의 귀환이었다. 앞서 박태성 당 중앙위 부위원장은 김 위원장의 하노이행에 대해 2월 25일 노동신문 1면에 “애국애민, 애국헌신의 대장정”으로 치켜세웠지만 김 위원장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열차역 플랫폼은 환영 인파로 가득했다. 북―베트남 회담 성과를 김 위원장의 치적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런 풍경과는 달리 김 위원장의 ‘하노이 노딜’의 충격은 한미 정보당국의 평가보다 심각했고 오래갔다. 김 위원장은 하노이에서 돌아오자마자 ‘흰쌀밥에 고깃국’을 언급한다. 그해 3월 6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국 당 초급선전일꾼대회’에 보낸 서한에서다. 김정은은 서한에서 “전체 인민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하려는 것은 수령님(김일성)과 장군님(김정일)의 평생 염원”이라고 했다. ‘하노이 빅딜’을 기대했던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이 약속했던 ‘쌀밥에 고깃국’을 다시 언급하면서 ‘하노이 노딜’로 대북제재 중 일부가 해제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인민’들의 실망감을 줄이려고 나선 셈이다. 한 대북 소식통은 “일부 강경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하노이 북―미 회담에 나섰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무오류성’ 원칙에 결정적이면서도 공개적인 오점을 남긴 셈”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말까지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거론하며 미국에 양보를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선물’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김정은은 올해 초 다시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허리띠 졸라매기를 독려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2012년 김정은이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핵 개발에 집착했지만 결과는 경제난으로 돌아왔다”며 “모든 실패의 책임을 사실 김정은이 져야 하는 상황이지만 최고 존엄이 질 수는 없으니 그 책임을 한국에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김여정을 앞세우는 것도 김정은의 영도력 실추나 건강 이상과 연관이 돼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각에서 김여정을 북한의 후계자를 뜻하는 ‘당중앙’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상황. 이에 대해 또 다른 대북 전문가는 “김정은이 자신의 실정 책임을 스스로 한국에 돌리는 모습이 불편하니, 일단 김여정을 앞세웠다는 분석이 많다”고 했다. ○ 美대선 앞두고 워싱턴 관심 끌기이런 북한은 결국 미국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방식, 다시 말해 도발적 언행과 사무소 폭파와 같은 다분히 ‘북한식’ 이벤트로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선 정국에 돌입하면 미국 정계는 표심을 좌우하는 국내 문제에 집중하는 만큼 북한과 같은 골치 아프고 해결하기 어려운 해외 이슈들은 뒤로 돌리는 경향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이 이번 대남 강경 드라이브를 통해 워싱턴의 관심 돌리기에 본격 나섰다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여정 담화를 보면 대북전단 문제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한미 태도 문제를 이야기한다”며 “답답한 국면에서 자기들이 아무것도 안 하면 존재감도 잊혀질 뿐 아니라 이 상태를 수용하고 수긍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세게 판을 흔들어서 상대가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반응하려고 하는 의도가 크다”고 했다. 앞서 북한은 워싱턴의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 폭파 이벤트를 자주 사용해왔다. 2008년 6월 27일 미국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한 게 대표적이다. 이는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대북 치적으로 비쳤고, 북한은 이미 효용이 다해 ‘깡통’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냉각탑의 폭파 비용으로 미국으로부터 수십만 달러를 받으며 장사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은 2018년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며 비핵화 의지를 드러내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강력한 이미지는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첫 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졌다. 이번에 북한이 개성 연락사무소를 가공할 만한 폭발력으로 완파시킨 것도 결국 미국이 평양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의 이벤트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 대선 전망이 한층 혼조세로 최근 들어선 것은 북한이 이런 도발 이벤트로 더 몸값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레드라인을 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비롯한 고강도 도발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평양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고,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에게도 과거 오바마 대통령 때 부통령을 하면서 선보였던 ‘전략적 인내’와 같은 시간끌기용 대북정책을 향후에는 펴지 말라고 선제 경고장을 날린 것일 수도 있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은 상황을 의도적으로 최악으로 끌고 간 다음에 극적으로 대화 기조로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상당 기간 우리에겐 뼈아픈 고통의 시간이 될 것 같다”고 했다. 황인찬 hic@donga.com·주성하·손효주 기자}

    •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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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왜 강경정책으로 돌변했나[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하늘로 날아오른 대북전단 풍선들이 북한에 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바람을 따져 보내도 20% 남짓이란 데이터가 있다. 한반도 상공의 편서풍 때문이다. 지상의 바람 방향과 상관없이 풍선이 1500m 이상 올라가면 편서풍의 영향을 받는다. 이 고도면 눈으론 풍선을 거의 볼 수 없다. 풍선이 편서풍 고도까지 도달하고, 제트기류까지 감안하면 2시간 이내에 동해에 간다. 가끔 풍선을 터뜨리는 타이머가 오작동해 남쪽에 삐라를 쏟기도 하고, 타이머가 고장 나면 일본 후쿠시마 쪽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북한에 전단을 보내려면 1500m 이상 올라가지 않게 해야 한다. 과거 대북전단 업무에 종사했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이는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이며 북에 갔다고 해도 대다수가 분계선에서 수십 km 이상 올라가기 어렵다. 백령도에서 날리면 남포 정도까지는 간혹 가지만, 파주나 임진각에서 날린 풍선이 평양까지 갈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특정 날짜를 정해 기자들을 불러 이벤트성으로 날려 보내면 풍향에 대한 고려가 우선되지 않았기에 거의 가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대북전단 단체가 후원자의 신뢰를 쌓으려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한 위치정보 정도는 보여줘야 하는데, 데이터를 검증받는 장면은 본 적이 없다. 대북전단의 내용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베 사진 합성 수준의 낯 뜨거운 내용이나 선교 전단도 많다. 황해도에서 전단을 봤다는 탈북자를 몇 명 만나보니 “자기들(전단을 살포한 탈북자들)은 남쪽으로 도망가 놓고 북에 있는 우리 보고 목숨 걸고 싸우라고 하니 오히려 화가 났다”는 반응들도 있었다. 김여정의 4일 담화문은 “5월 31일 ‘탈북자’라는 것들이 전연 일대에 기어 나와 수십만 장의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 측 지역으로 날려 보내는 망나니짓을 벌여놓은 데 대한 보도를 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날려 보냈다’가 아니라 ‘보도를 보고 알았다’는 식인데, 아마 31일에 날렸다는 전단은 보지 못한 듯한 뉘앙스다. 전단 살포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북한이 지금 이를 문제 삼아 대남 강경정책으로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내부적 원인과 문재인 대통령에게 쌓인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월 23일자 칼럼 ‘보위성 재신임한 김정은, 공포통치 시작된다’에서 올해 북한의 행보를 예상했다. 사상 최강의 대북제재로 경제가 점점 파탄나자 북한은 민심을 통제하기 위해 지난해 말에 이미 공포통치 시나리오를 짰다. 보위성은 올해 상반기 간첩단 사건들을 조작해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이 계획은 미뤄졌고, 간첩 대신 탈북자를 도마에 올리는 것으로 수정된 듯하다. 어차피 둘 다 군중대회를 열고 ‘타도하라’ ‘죽여라’를 외치는 것은 똑같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결정되자 탈북을 완전히 막겠다는 것을 첫 공약으로 내걸고 2009년 1월 김정일에게서 보위기관을 넘겨받았다. 최근 대남기관을 넘겨받은 김여정도 탈북자를 활용해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전국에서 연일 진행되는 집회를 통해 김여정의 담화는 자연스럽게 최고 지도자의 교시처럼 부각되고 있다. 향후 북한 내부 상황의 악화를 김정은 혼자 감당하긴 버거워, 남매가 공동 플레이를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북한이 남쪽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는 오래다. 김정은은 작년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재작년 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했을 여러 약속의 이행을 기대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작년 5월 쌀 5만 t을 제공하겠다고 밝혔을 뿐, 1년 반 가까이 움직이지 않았다. 북한이 원한 것은 쌀이 아니었다. 김정은은 배신감을 느낀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대해 북한이 ‘삶은 소대가리’를 운운하며 맹비난하던 즈음부터 북한의 대남 성명에는 감정적 분노가 서려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현실성 없는 제안만 계속 던져 북한을 정치에 이용한다는 불만으로 읽혔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전단 금지법’으로 풀 성격이 아니다. 또 이미 때도 놓쳤다. 현 정부 임기는 2년도 채 안 남았다. 북한이 미국 대선을 대비해 지금쯤 전략 수정을 준비할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남은 시간이 없다. 획기적인 발상이 없으면 남북관계는 계속 악화될 것이다. 다만 시간에 더 쫓기는 것이 북한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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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후계 1순위 김여정[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김정은 사망설이 퍼졌던 4월 우리는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리게 됐다. 김정은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현재 북한 권력을 계승할 사람이 김여정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성우월주의 관념이 팽배한 사실상의 유교 국가 북한에서, 업적과 권력 기반이 취약한 김여정이 과연 권력을 오래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선 당연히 의문부호가 붙는다. 그 의문에 해답을 찾으려면 후계 1순위 김여정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김여정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세력의 후원을 받는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남편은 누구인지 등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김여정이 1987년생으로 김정은보다 세 살 어리며 어린 시절 오빠들과 스위스에서 유학을 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1990년대 이야기일 뿐 스위스에서 돌아온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는 지난 10년 동안 김여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정보를 모아왔다. 그중에는 김여정이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김일성종합대 법률대학 특설반을 다녔다는 정보도 있다. 특설반은 정규 코스가 아닌 특별히 만든 학급을 의미한다. 정보에 따르면 원래 김일성대 법률대학엔 특설반이란 것이 없다. 유일하게 김여정을 위해 만들었다가 없앴다고 한다. 한 목격자에 따르면 당시 특설반은 약 20명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됐다. 북한에서 여학생들이 입는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녔는데 항상 우르르 함께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법률대학이 있는 김일성대 22층짜리 2호 청사는 내가 6년 동안 공부했던 건물이라 내부가 훤하다. 건물 안에는 여성 운전공이 늘 타고 있는 교수용 엘리베이터도 몇 대 있다. 특설반 학생들은 항상 교수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들이 우르르 단체로 오면 운전공이 이미 타고 있던 머리 허연 교수들에게 “미안합니다. 다른 것 타셔야겠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교수들도 눈치가 있으니 아무 말 없이 내리고, 20대 아가씨들이 거리낌 없이 그 엘리베이터에 탔다고 한다. 아마 그들 중에 김여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머지 여성들은 김여정의 신분을 감추는 역할을 하다가 지금은 보좌진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평양 장철구상업대에 경제학 특설반이 생겨났다. 이 역시 20대 여성 20여 명으로 반이 구성됐는데, 버스를 타고 함께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정보를 종합하면 엄선된 김여정 또래 여성 40여 명이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김일성대에서 법률을 배우고, 한 팀은 경제를 배웠다는 것이다. 김여정은 지금 이렇게 체계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함께 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 그룹의 보좌를 받을 수도 있다. 이들 여성은 김여정을 대신해 전국을 돌며 현실을 보고하고, 정보를 분석하고, 정책 작성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김여정은 법률대학 특설반에 입학했다는 2009년에 만 22세였다. 북한에선 만 18세에 대학에 간다. 김여정이 특설반 이전에 국내 또는 해외에서 다른 대학을 다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의미다. 김여정의 남편에 대해서도 추측이 난무한다. 평범한 군인 또는 경호원 출신이라는 설들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김여정의 대학생활마저 철저히 관리하며 다니게 했다면 그런 그를 배우지 못한 평범한 군인에게 시집보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시기 김일성대 법률대학을 다녔던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따르면, 김여정은 대학 재학 시절 연애하던 남성이 있었다고 한다. 법률대학에 다니는 얼굴이 칼칼하게(날카롭게) 생긴 제대군인이며 김여정이 집에 데리고 가 인사시켰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지금 남편인지는 알 수 없고, 나아가 김여정이 대학 때 연애한 사실이 있었는지도 확신은 할 수 없다. 2018년 김여정이 서울에 왔을 때 임신했다는 추정도 있었지만 사실로 확정되진 않았다. 김여정의 파워는 점점 커지고 있다. 과거 오빠를 보좌하던 역할에서 이제는 북한의 핵심실세 조직인 조직지도부마저 거머쥐고 공동 통치를 하는 단계까지 이른 듯 보인다. 2일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선 오빠와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과 나란히 앉아 달라진 위상을 드러냈다. 현지 시찰에 나선 김정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질수록 우리는 김여정에게도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2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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