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

김민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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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국제부 기자입니다. 예술가의 이야기를 따로 모아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kimmin@donga.com

취재분야

2025-11-22~2025-12-22
미술44%
문학/출판17%
연극14%
인사일반7%
언론3%
문화 일반3%
사고3%
사회일반3%
사건·범죄3%
음악3%
  • 모네의 연못에는 수평선이 없다 [영감 한 스푼]

    바람에 따라 일렁이는 물결에 햇빛이 반짝이는 어느 연못. 이 연못 가장자리로 나이 든 화가가 일꾼과 함께 손수레를 끌고 다가옵니다.수레에 가득 실린 캔버스와 이젤이 차례로 물가로 내려지며 빈 캔버스들이 마치 조그마한 댐처럼 연못을 에워쌉니다.그림 그릴 준비를 마친 화가는 분주하게 8개의 캔버스를 오가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본 연못을 그려 나가기 시작합니다.화가는 이런 식으로 연못의 모습을 30년 넘게 그려 무려 250점을 남겼습니다. 바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입니다.꽃이 핀 수족관에 있는 듯모네가 수련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모네는 파리를 떠나 약 75km 떨어진 근교의 농촌 마을 지베르니에 머물고 있었는데요.1883년 처음 지베르니에 정착할 때는 이 집을 임대로 살았지만 점점 형편이 나아져 집을 매입하고 그 옆 땅도 사면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이 때 모네의 나이가 50세. 청년 시절엔 인상파 그림이 인정받지 못해 가난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루앙 대성당’, ‘건초 더미’ 같은 작품이 호평을 받고 판매도 되면서 화가로서 안정기에 접어 든 시기였죠. 이런 시점에 모네가 시도한 새로운 실험이 바로 수련 연작이었습니다.모네는 이전에도 풍경화에서 성당이나 기차역처럼 같은 곳을 여러 차례 그리면서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빛을 묘사하곤 했습니다.그런데 이번 ‘수련’ 연작에서 극적으로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풍경을 구성하던 많은 요소를 과감히 지웠다는 사실입니다.성당이나 기차역을 그리면 건물이 놓인 땅, 맞닿은 하늘, 또 오고 가는 사람 등이 함께 묘사되고, 이에 따라 보는 사람은 ‘여기가 어디구나’ 짐작하게 됩니다.그런데 수련 그림에서는 사람도 하늘도 땅도 없고 오로지 화면에 물만 가득 차 있습니다.수평선도 지평선도 없이, 연못 한 가운데를 뚝 잘라내어 그린 것처럼 모네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요.이 때문에 어느 평론가는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득 찬 수련 연작을 보고 ‘꽃이 핀 수족관’에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습니다.그림을 보는 사람은 내가 어느 자리에 서서 수련이 핀 연못을 보고 있는지, 한 가운데 섬을 밟고 있는 건지 공중에서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부차적 요소를 모두 없앤 모네는 연못만을 캔버스에 가득 채워 보여주고 있죠.한 곳에 가만히 집중한다는 것모네가 이렇게 배경을 제거한 덕분에 우리는 ‘수련’ 연작 앞에 서면 물의 표면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그리고 화가가 제시하는 대로 조용히, 오랜 시간을 들여 연못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흘러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그 이야기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물 위에 비친,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입니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연잎, 가느다란 가지를 머리카락처럼 드리운 버드나무, 물의 반대편 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 별사탕처럼 흩뿌려진 꽃들과 불타오르는 노을까지.모네가 사실상 연못을 그린다고 해놓고는, 주변에 비친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됩니다.‘수련’ 연작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은 바로 이 풍경의 설계자가 모네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그림 속 연못은 모네가 당국의 허가를 받아 만든 인공 연못이고, 그 주변의 식물들도 모두 직접 골라 심은 것입니다.정원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정원사만 8명을 고용했을 정도로 모네는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습니다.비슷한 시기 고향 액상프로방스로 이주한 폴 세잔이 정물에 집중하고, 타히티로 이민간 폴 고갱이 이국적인 풍경을 통해서 새로운 표현을 고민했다면, 모네는 자신이 원하는 풍경을 직접 만들어 그림 실험을 했던 것입니다.그 결과는 ‘예술가가 그림에서 무엇을 그려야 하느냐’에 대한 새로운 답이 되었습니다.프랑스의 평론가 레몽 레가메는 “모네가 그림 속 나뭇잎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사람의 얼굴, 입은 옷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똑같다. 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은 똑같이 중요했다”고 1927년 글에서 설명한 바 있는데요.그러니까 과거의 방식으로 연못을 그린다면 그 연못이 있는 배경, 둘러싼 풍경, 그것을 보는 사람 등 ‘연못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함께 배치했을 것입니다.성당을 그릴 때 건축물이 제대로 보이게 하고, 기차역을 그릴 때 사람을 함께 그리는 것처럼요.그런데 수평선과 땅을 지워버린 연못 그림은 찰랑이는 물 표면이 주는 감각을 극대화하며 ‘사물의 형태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자아내는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단서를 제시했죠.여기다 30년 동안 이어진 ‘수련 그리기’를 통해 모네는 점차 불필요한 선들을 제거하고 연못의 풍경을 여러 붓터치와 색점의 조합으로, 거의 추상화처럼 보이도록 그리는 데 이릅니다.이런 모네의 말년 작품을 본 후대 화가들은 더 나아가 아예 그림 속에서 사물의 형태를 제거하고 감각만을 묘사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죠.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한 가지에 오랫동안 가만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내가 느끼는 수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모네의 수평선 없는 연못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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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 욕동생’ 김슬기 “이번엔 ‘남장 연기’서 웃음 폭발”

    “제가 남편 차의 브레이크를 터뜨렸어요. 전부 다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 거라고요!” 10주년을 맞은 장진 감독의 연극 ‘꽃의 비밀’에서 막내 지나는 이렇게 외치며 무대에 찬물을 끼얹는다. ‘꽃의 비밀’은 이탈리아 시골 마을에서 보험금을 타 내려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하는 네 여자의 해프닝을 다룬 코미디극이다. 연장자인 소피아가 극을 이끌고 자스민이 ‘감초’이며 모니카가 ‘미녀’라면, 지나는 겁 많은 소녀 같지만 대범한 범행을 저지르는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지나 역으로 무대에 오른 배우 김슬기를 19일 서울 종로구 링크아트센터에서 만났다. 김슬기는 서울예대 재학 중 무려 ‘21년 선배’인 장 감독이 동아리 30주년 기념으로 만든 연극에서 주연을 맡은 것을 계기로 2013년 tvN ‘SNL 코리아’에 출연해 대중에게 존재를 각인시켰다. 귀여운 얼굴에 밉지 않은 욕설 연기로 ‘국민 욕동생’이란 별명까지 붙은 ‘SNL 원년 크루’. 이 무렵 장 감독은 ‘꽃의 비밀’ 각본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 지나는 김슬기를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이번 무대는 장 감독이 보았던 배우 김슬기의 매력을 오롯이 발휘하는 자리인 셈이다. 연극이 끝난 뒤 무대 아래에서 만난 김슬기는 앉자마자 “중요한 대사를 틀렸다”며 “티가 많이 났느냐”며 걱정부터 했다. 무대나 스크린에선 유쾌한 이미지지만, 평소엔 소심하고 웅크리는 성격이라 에너지를 많이 쓴다고도 털어놨다. “극 초반에 소피아와 자스민, 모니카가 웃고 떠들 때 지나는 혼자 불안해하고 겁을 먹기도 해요. 또 자기가 저지른 일을 뒤늦게 자각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복잡한 캐릭터죠.” 그런 지나가 에너지를 터뜨리는 순간은 극 후반부 남장 연기를 시작할 때다. 김슬기는 이때가 “마음 놓고 웃길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남장 이후로는 모든 캐릭터가 몰입하는 ‘쇼 타임’이죠. 우선 남장한 모습만 봐도 너무 웃기잖아요. 배우들도 ‘웃음 면역력’을 키우려 1∼2주 전부터 연습실에서 가발 쓰고 분장을 한 채로 연습해요. 특히 자스민의 얼굴을 미리 많이 봐둬요.” 극에서 지나는 범행을 들킬 수도 있단 절망감에 ‘엎드려뻗쳐’를 하거나, 남자인 척 능글맞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김슬기는 “배우가 깔깔 웃는다고 코미디극이 되는 건 아니다”라며 “당황, 긴장, 슬픔 등 웃음 외의 감정을 보여줘야 관객을 웃길 수 있는 게 희극의 특징”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을 웃기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중학생 때 “자신이 재밌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는 김슬기. 그때부터 “잘 짜인 대본을 충실히 연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는 그는 작품에서 애드리브를 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실제로도 주어진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려는 다부진 분위기가 더 짙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번 ‘꽃의 비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피드백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직전 공연에서 제가 남장으로 등장하니 누군가 크게 ‘귀여워!’라고 외쳤어요. 감사했습니다!” 5월 1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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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의 비밀’은 남장 연기부터가 쇼타임” ‘지나’역으로 무대 선 배우 김슬기

    “제가 남편 차의 브레이크를 터뜨렸어요. 전부 다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었을 거라고요!”10주년을 맞은 장진 감독의 연극 ‘꽃의 비밀’에서 막내 지나는 이렇게 외치며 무대에 찬물을 끼얹는다. ‘꽃의 비밀’은 이탈리아 시골 마을에서 보험금을 타 내려 각자의 남편으로 변장하는 네 여자의 해프닝을 다룬 코미디극이다. 연장자인 소피아가 극을 이끌고, 자스민이 ‘감초’이며 모니카가 ‘미녀’ 라면, 지나는 겁 많은 소녀 같지만 대범한 범행을 저지르는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다. ‘지나’역으로 무대에 오른 배우 김슬기를 19일 서울 종로구 링크아트센터에서 만났다.김슬기는 서울예대 재학 중 무려 ‘21년 선배’인 장진 감독이 동아리 30주년 기념으로 만든 연극에서 주연을 맡은 것을 계기로 2013년 tvN ‘SNL 코리아’에 출연해 대중에게 존재를 각인시켰다. 귀여운 얼굴에 밉지 않은 욕설 연기로 ‘국민 욕동생’이란 별명까지 붙은 ‘SNL 원년 크루’. 이 무렵 장 감독은 ‘꽃의 비밀’ 각본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 지나는 김슬기를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이번 무대는 장 감독이 보았던 배우 김슬기의 매력을 오롯이 발휘하는 자리인 셈이다.연극이 끝난 뒤 무대 아래에서 만난 김슬기는 앉자마자 “중요한 대사를 틀렸다”며 “티가 많이 났느냐”며 걱정부터 했다. 무대나 스크린에선 유쾌한 이미지지만, 평소엔 소심하고 웅크리는 성격이라 에너지를 많이 쓴다고도 털어놨다.“극 초반에 소피아와 자스민, 모니카가 웃고 떠들 때 지나는 혼자 불안해하고 겁을 먹기도 해요. 또 자기가 저지른 일을 뒤늦게 자각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복잡한 캐릭터죠.”그런 지나가 에너지를 터뜨리는 순간은 극 후반부 남장 연기가 시작할 때다. 김슬기는 이때가 “마음 놓고 웃길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남장 이후로는 모든 캐릭터가 몰입하는 ‘쇼 타임’이죠. 우선 남장한 모습만 봐도 너무 웃기잖아요. 배우들도 ‘웃음 면역력’을 키우려 1~2주 전부터 연습실에서 가발 쓰고 분장을 한 채로 연습해요. 특히 ‘자스민’의 얼굴을 미리 많이 봐둬요.”극에서 지나는 범행을 들킬 수도 있단 절망감에 ‘엎드려뻗쳐’를 하거나, 남자인 척 능글맞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김슬기는 “배우가 깔깔 웃는다고 코미디극이 되는 건 아니다”며 “당황, 긴장, 슬픔 등 웃음 외의 감정을 보여줘야 관객을 웃길 수 있는 게 희극의 특징”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을 웃기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중학생 때 “자신이 재밌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는 김슬기. 그때부터 “잘 짜인 대본을 충실히 연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는 그는 작품에서 애드리브를 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실제로도 주어진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려는 다부진 분위기가 더 짙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번 ‘꽃의 비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피드백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직전 공연에서 제가 남장으로 등장하니 누군가 크게 ‘귀여워!’라고 외쳤어요. 감사했습니다!” 5월 1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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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카소가 75분간 그림 20점 그리는 과정을 영화로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코앞에서 그림을 그려준다?’ 상상만으로도 호사스러운 이 경험을 영화로 간접 체험할 수 있다. 14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MMCA 영상관에서 상영을 시작한 1956년 영화 ‘피카소의 비밀’을 감상하면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가 70대였을 때 제작된 이 영화에 필요한 건 단순하다. 카메라와 종이, 물감, 팔레트, 붓, 그리고 피카소다. 16일 관람한 영화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랭보가 시를 쓰고 모차르트가 작곡하는 과정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화가가 그림 그리는 과정은 볼 수 있다. 그리고 피카소 씨가 그 과정을 공개해 주기로 했다.” 흰 종이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피카소가 펜과 붓으로 쓱쓱 선을 그려 나간다. 화가의 손은 보이지 않고 선들만 저절로 움직인다. 지금처럼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 비밀은 ‘종이’에 있다. 물감이 스며들어 뒷면으로 비치는 종이를 이용해 한쪽에선 화가가 그리고, 다른 쪽에선 카메라로 이 모습을 담아냈다. 75분 러닝타임 동안 피카소는 총 20점을 그린다. 이날 객석에선 특별한 서사도 없이 그림 그리기만 이어지자 중간에 자리를 뜨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서사’가 아니라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선, 그리고 이와 함께 흐르는 다양한 음악에 집중하면 대가의 즉흥 연주회를 보는 듯한 황홀함을 얻을 수 있다. 검은 선을 그릴 때는 현악 선율이 고요하게 흐르다 화가가 채색할 때는 금관 악기가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리드미컬한 드로잉을 할 때는 타악기가 귀를 두드렸다. 그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무렵, 카메라는 열중하는 피카소를 비춘다. 반바지만 입은 맨몸의 화가가 ‘초집중’해 짧은 시간에 드로잉을 완성하는 모습, 촬영 감독을 맡은 클로드 르누아르(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손자)도 볼 수 있다. 13번째 그림부터 피카소는 ‘더 야심 찬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유화와 콜라주 작품을 그린다. 여기서는 유화 물감을 덧칠하고 수정하며 다양한 형태와 구도를 조합하는 복잡한 과정이 펼쳐진다. 압권은 마지막 두 그림이다. 해변 풍경 하나를 두고 수십 개의 버전을 짜임새 있게 그려내는 모습을 보면 ‘피카소 할아버지의 마술쇼’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피카소의 비밀’은 국립현대미술관 필름앤비디오 2025 ‘창작의 순간―예술가의 작업실’의 출품작으로 23일까지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8편이 5월 24일까지 매주 수·금·토·일요일에 상영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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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네의 연못에는 수평선이 없다[김민의 영감 한 스푼]

    바람에 따라 일렁이는 물결에 햇빛이 반짝이는 어느 연못. 이 연못 가장자리로 나이 든 화가가 일꾼과 함께 손수레를 끌고 다가옵니다. 수레에 가득 실린 캔버스와 이젤이 차례로 물가로 내려지며 빈 캔버스들이 마치 조그마한 댐처럼 연못을 에워쌉니다.그림 그릴 준비를 마친 화가는 분주하게 8개의 캔버스를 오가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본 연못을 그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화가는 이런 식으로 연못의 모습을 30년 넘게 그려 무려 250점을 남겼습니다. 바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입니다.꽃이 핀 수족관에 있는 듯모네가 수련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모네는 파리를 떠나 약 75km 떨어진 근교의 농촌 마을 지베르니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1883년 처음 지베르니에 정착할 때는 이 집을 임차해 살았지만 점점 형편이 나아져 집을 매입하고 그 옆 땅도 사면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이때 모네의 나이가 50세. 청년 시절엔 인상파 그림이 인정받지 못해 가난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루앙 대성당’, ‘건초 더미’ 같은 작품이 호평을 받고 판매도 되면서 화가로서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죠. 이런 시점에 모네가 시도한 것이 바로 수련 연작이었습니다.모네는 이전에도 풍경화에서 성당이나 기차역처럼 같은 곳을 여러 차례 그리면서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빛을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련’ 연작에서 극적으로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풍경을 구성하던 많은 요소를 과감히 지웠다는 사실입니다.보통 성당이나 기차역을 그리면 건물이 놓인 땅, 맞닿은 하늘, 또 오고 가는 사람 등이 함께 묘사되고, 이에 따라 보는 사람은 ‘여기가 어디구나’ 짐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수련 그림에서는 사람도 하늘도 땅도 없고 오로지 물만 가득 차 있습니다.수평선도 지평선도 없이, 연못 한가운데를 뚝 잘라 그린 것처럼 모네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어느 평론가는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벽을 가득 채운 수련 연작을 보고 ‘꽃이 핀 수족관’에 있는 것 같다는 표현도 했습니다.그림을 보는 사람은 내가 어느 자리에 서서 수련이 핀 연못을 보고 있는지, 한가운데 섬을 밟고 있는 건지 공중에서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부차적 요소를 모두 없앤 모네는 연못만을 캔버스에 가득 채워 보여주고 있죠.한곳에 가만히 집중한다는 것모네가 이렇게 배경을 제거한 덕분에 우리는 ‘수련’ 연작 앞에 서면 물의 표면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화가가 제시하는 대로 조용히, 오랜 시간을 들여 연못을 바라보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그 이야기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물 위에 비친,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입니다.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연잎, 가느다란 가지를 머리카락처럼 드리운 버드나무, 물의 반대편 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 별사탕처럼 흩뿌려진 꽃들과 불타오르는 노을까지. 모네가 사실상 연못을 그린다고 해놓고는, 주변에 비친 풍경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됩니다.‘수련’ 연작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은 바로 이 풍경의 설계자가 모네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네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정원에 인공 연못을 만들고, 그 주변에 식물도 모두 직접 골라 심었습니다. 정원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정원사만 8명을 고용했을 정도로 모네는 정원 가꾸기에 진심이었습니다.비슷한 시기 고향 엑상프로방스로 이주한 폴 세잔이 정물에 집중하고, 타히티로 이민 간 폴 고갱이 이국적인 풍경을 통해서 새로운 표현을 고민했다면, 모네는 자신이 원하는 풍경을 직접 만들어 그림 실험을 했던 것입니다.그 결과는 ‘예술가가 그림에서 무엇을 그려야 하느냐’에 대한 새로운 답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평론가 레몽 레가메는 “모네가 그림 속 나뭇잎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사람의 얼굴, 입은 옷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똑같다. 그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은 똑같이 중요했다”고 1927년 글에서 설명한 바 있는데요.그러니까 과거의 방식으로 연못을 그린다면 그 연못이 있는 배경, 둘러싼 풍경, 그것을 보는 사람 등 ‘연못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함께 배치했을 것입니다. 성당을 그릴 때 건축물이 제대로 보이게 하고, 기차역을 그릴 때 사람을 함께 그리는 것처럼요. 그런데 수평선과 땅을 지워버린 연못 그림은 찰랑이는 물 표면이 주는 감각을 극대화하며 ‘사물의 형태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자아내는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단서를 제시했죠.여기다 30년 동안 이어진 ‘수련 그리기’를 통해 모네는 점차 불필요한 선들을 제거하고 연못의 풍경을 여러 붓 터치와 색점의 조합으로, 거의 추상화처럼 보이도록 그리는 데 이릅니다. 이런 모네의 말년 작품을 본 후대 화가들은 더 나아가 아예 그림 속에서 사물의 형태를 제거하고 감각만을 묘사한 ‘추상화’를 그리게 되죠.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한 가지에 오랫동안 가만히 집중하는 것. 때로는 그것이 결국은 내가 느끼는 수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모네의 수평선 없는 연못이 보여주고 있습니다.※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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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카소의 펜과 붓이 화면 위를 쓱쓱…영화 ‘피카소의 비밀’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코 앞에서 그림을 그려준다?’상상만으로도 호사스러운 이 경험을 영화로 간접 체험할 수 있다. 14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MMCA 영상관에서 상영을 시작한 1956년 영화 ‘피카소의 비밀’를 감상하면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피카소가 70대였을 때 제작된 이 영화에 필요한 건 단순하다. 카메라와 종이, 물감, 팔레트, 붓, 그리고 피카소다. 16일 관람한 영화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랭보가 시를 쓰고 모차르트가 작곡하는 과정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화가가 그림 그리는 과정은 볼 수 있다. 그리고 피카소 씨가 그 과정을 공개해 주기로 했다.”흰 종이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피카소가 펜과 붓으로 쓱쓱 선을 그려 나간다. 화가의 손은 보이지 않고 선들만 저절로 움직인다. 지금처럼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 비밀은 ‘종이’에 있다. 물감이 스며들어 뒷면으로 비치는 종이를 이용해 한쪽에선 화가가 그리고, 다른 쪽에선 카메라로 이 모습을 담아냈다.75분 러닝타임 동안 피카소는 총 20점을 그린다. 이날 객석에선 특별한 서사도 없이 그림 그리기만 이어지자 중간에 자리를 뜨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서사’가 아니라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선, 그리고 이와 함께 흐르는 다양한 음악에 집중하면 대가의 즉흥 연주회를 보는 듯한 황홀함을 얻을 수 있다. 검은 선을 그릴 때는 현악 선율이 고요하게 흐르다가, 화가가 채색할 때는 금관 악기가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리드미컬한 드로잉을 할 때는 타악기가 귀를 두드렸다.그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무렵, 카메라는 열중하는 피카소를 비춘다. 반바지만 입은 맨몸의 화가가 ‘초집중’해 짧은 시간에 드로잉을 완성하는 모습, 촬영 감독을 맡은 클로드 르누아르(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의 손자)도 볼 수 있다.13번째 그림부터 피카소는 ‘더 야심 찬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유화와 콜라주 작품을 그린다. 여기서는 유화 물감을 덧칠하고 수정하며 다양한 형태와 구도를 조합하는 복잡한 과정이 펼쳐진다. 압권은 마지막 두 그림이다. 해변 풍경 하나를 두고 수십 개의 버전을 짜임새 있게 그려내는 모습을 보면 ‘피카소 할아버지의 마술쇼’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피카소의 비밀’은 국립현대미술관 필름앤비디오 2025 ‘창작의 순간-예술가의 작업실’의 출품작으로 23일까지 볼 수 있다.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8편이 매주 수·금·토·일에 5월 24일까지 상영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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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 떼어낸 뒤 뒤집어… ‘물감의 속살’ 고스란히

    소파에 앉은 사람, 나란히 선 두 사람, 꽃을 보는 사람. 첫눈에 보면 그림들은 큰 붓으로 그린 듯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표면이 납작하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면 입체감이 생겨야 하는데, 그림 전체가 한 덩어리인 듯 매끄럽다. 비밀은 작가의 독특한 작업 방식에 있다. 비닐 위에 형체부터 그린 뒤 마지막에 배경을 칠한다. 이후 전체 물감을 떼어내 뒤집어 캔버스에 붙여 ‘물감의 속살’을 보여주는 정의철 작가의 개인전 ‘낯설게 하기’가 충남 공주 갤러리정안면에서 열린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미술학교를 수료한 뒤 줄곧 ‘정체성’을 주제로 다뤘던 작가는 몇 년 전만 해도 자화상 위주로 어두운 색채 작품을 해왔다. 그런 그가 공주로 작업실을 옮긴 뒤 한층 밝은 색채와 편한 구도로 신작을 내놓고 있다.정 작가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이사한 뒤 식물도 키우고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색이 달라졌다”고 했다. 신작들은 붓 대신 물티슈로 물감을 칠해 선과 형태도 부드러워졌다. 인물화를 낯설어하는 한국 관객에게 다가가려는 고민의 결과다. 이 고민의 과정은 갤러리 한쪽 벽면에 전시된 종이 작품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3년 전부터 매일 한 점씩 그리기로 결심한 뒤 그린 드로잉 중 일부를 선별해 함께 전시했다. 3월 2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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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 정의철, 개인전 ‘낯설게 하기’서 독특한 작업방식 공개

    소파에 앉은 사람, 나란히 선 두 사람, 꽃을 보는 사람. 첫 눈에 보면 그림들은 큰 붓으로 그린 듯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표면이 납작하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면 입체감이 생겨야 하는데, 그림 전체가 한 덩어리인 듯 매끄럽다. 비밀은 작가의 독특한 작업 방식에 있다.비닐 위에 형체부터 그린 뒤 마지막에 배경을 칠한다. 이후 전체 물감을 떼어내 뒤집어 캔버스에 붙여 ‘물감의 속살’을 보여주는 정의철 작가의 개인전 ‘낯설게 하기’가 충남 공주 갤러리정안면에서 열린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미술학교를 수료한 뒤 줄곧 ‘정체성’을 주제로 다뤘던 작가는 몇 년 전만 해도 자화상 위주로 어두운 색채 작품을 해왔다. 그런 그가 공주로 작업실을 옮긴 뒤 한층 밝은 색채와 편한 구도로 신작을 내놓고 있다.정 작가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이사한 뒤 식물도 키우고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색이 달라졌다”고 했다. 신작들은 붓 대신 물티슈로 물감을 칠해 선과 형태도 부드러워졌다. 인물화를 낯설어하는 한국 관객에 다가가려는 고민의 결과다. 이 고민의 과정은 갤러리 한 쪽 벽면에 전시된 종이 작품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3년 전부터 매일 한 점씩 그리기로 결심한 뒤 그린 드로잉 중 일부를 선별해 함께 전시했다. 3월 2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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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상화가 하종현의 눈에 비친 전후 한국 모습은…

    마포(麻布·삼실로 찬 천) 뒷면에 물감을 밀어 넣는 ‘배압법(背押法)’을 사용한 연작 ‘접합’으로 잘 알려진 추상미술가 하종현 작가의 초기작들을 살펴보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14일 개막한 ‘하종현 5975’전은 하종현이 1959년 홍익대를 졸업한 직후부터 ‘접합’을 시작한 1975년까지 만든 작품을 살펴본다. 이들 작품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다. 총 4개 시기로 나눠진 전시는 시간 순서대로 펼쳐진다.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에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나타난 추상회화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을 보고 그린 작품들을 모았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거나 그림 표면을 불에 그을리고 어두운 색조를 활용해 불안한 시대상을 담고자 했다. 1959년 ‘자화상’ 같은 인물화도 있다.1960년대 후반 작품을 조명하는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에서는 연작 ‘도시계획백서’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에서 영감을 얻어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을 넣은 기하학적 추상화다. 또 단청 문양이나 돗자리 직조 기법을 인용한 연작 ‘탄생’도 이때 작품이다. 하 작가는 1969년 비평가 이일 등 작가 및 이론가 12명과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한다. 실험 미술의 영향을 받아 철조망, 신문, 스프링 등 일상적 재료를 작품에 활용하는데, 이때 작품이 3부에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특히 도면으로만 남아 있던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년)을 재현해 첫 전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선보인다. 거울 여러 개와 두개골,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재료로 활용한 작품이다. 마지막 4부는 연작 ‘접합’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접합―배압법’(1974∼1975)이다. 이 무렵 작가는 마포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르고 나무 주걱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을 고안했다. 이런 배압법을 이용한 여러 시도들을 4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하종현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물성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트선재센터는 이번 전시와 연계해 지난해 10월 신정훈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와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레슬리 마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근현대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등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세 연구자가 심포지엄에서 발제한 ‘근대화의 회화, 면밀하고 고집스럽게 물질주의적인’(신정훈), ‘하종현의 6년(1969∼1975): 매체의 물질성에 대한 실험과 방법론’(정연심), ‘표식 만들기의 정치학: 1960∼1970년대 하종현 회화’(레슬리 마)는 전시 도록에 수록돼 다음 달 출간 예정이다. 4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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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종현 작가의 초기 작품,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전시 개막

    마포(麻布·삼실로 찬 천) 뒷면에 물감을 밀어 넣는 ‘배압법(背押法)’을 사용한 연작 ‘접합’으로 잘 알려진 추상미술가 하종현 작가의 초기작들을 살펴보는 전시가 열렸다.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14일 개막한 ‘하종현 5975’전은 하종현이 1959년 홍익대를 졸업한 직후부터 ‘접합’을 시작한 1975년까지 만든 작품을 살펴본다. 이들 작품을 들여다보는 렌즈는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다.총 4개 시기로 나눠진 전시는 시간 순서대로 펼쳐진다. 1부 ‘전후의 황폐한 현실과 앵포르멜’(1959-1965)에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나타난 추상회화의 한 경향인 앵포르멜을 보고 그린 작품들을 모았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거나 그림 표면을 불에 그을리고 어두운 색조를 활용해 불안한 시대상을 담고자 했다. 1959년 ‘자화상’ 같은 인물화도 있다. 1960년대 후반 작품을 조명하는 2부 ‘도시화와 기하학적 추상’에서는 연작 ‘도시계획백서’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에서 영감을 얻어 강렬한 색채와 반복적인 패턴을 넣은 기하학적 추상화다. 또 단청 문양이나 돗자리 직조 기법을 인용한 연작 ‘탄생’도 이때 작품이다.하 작가는 1969년 비평가 이일 등 작가 및 이론가 12명과 함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한다. 실험 미술의 영향을 받아 철조망, 신문, 스프링 등 일상적 재료를 작품에 활용하는데, 이때 작품이 3부에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특히 도면으로만 남아 있던 거울 설치 작업 ‘작품’(1970년)을 재현해 첫 전시 이후 처음으로 다시 선보인다. 거울 여러 개와 두개골, 골반 엑스레이 필름을 재료로 활용한 작품이다.마지막 4부는 연작 ‘접합’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접합-배압법’(1974-1975)이다. 이 무렵 작가는 마포 뒷면에 물감을 듬뿍 바르고 나무 주걱으로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을 고안했다. 이런 배압법을 이용한 여러 시도들을 4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하종현의 작품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와 물성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아트선재센터는 이번 전시와 연계해 지난해 10월 신정훈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와 정연심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레슬리 마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근현대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등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세 연구자가 심포지엄에서 발제한 ‘근대화의 회화, 면밀하고 고집스럽게 물질주의적인’(신정훈), ‘하종현의 6년(1969~1975): 매체의 물질성에 대한 실험과 방법론’(정연심), ‘표식 만들기의 정치학: 1960~1970년대 하종현 회화’(레슬리 마)는 전시 도록에 수록돼 다음 달 출간 예정이다. 4월 20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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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라진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 만나보니 [영감 한 스푼]

    오늘은 오랜만에 미술 시장 소식을 전합니다.지난주 금요일인 2월 7일,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인 앤젤 쓰양-러가 한국 언론을 상대로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그간 아트바젤 홍콩은 디렉터가 조용히 방문해 몇 개 매체와 개별 인터뷰를 진행한 적은 있었지만 기자 간담회는 이번이 처음입니다.이렇게 이례적이고 적극적인 행보에 미디어의 관심과 궁금증도 커졌습니다. 디렉터와 인터뷰로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아시아 예술 커뮤니티를 중심에기자간담회가 끝나고 만난 쓰양-러는 2022년부터 디렉터로 선임되었는데, 이 때 아트바젤 홍콩이 10년 차를 넘어섰고 이에 따라 아트페어가 맡은 역할도 달라졌다고 강조했습니다.“2012년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개최됐을 땐 홍콩에 미술 기관이나 로컬 작가가 별로 없어 협업할 여지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첫 10년은 홍콩의 아트 커뮤니티가 성장하도록 도우면서 서구의 예술을 가져와 보여주는 데 초점이 있었죠.”아트바젤 홍콩 창립 멤버인 쓰양-러의 말처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트바젤 홍콩은 ‘서구 시장’을 보러 간다는 의미가 컸습니다. 가고시안, 화이트큐브, 하우저 앤드 워스 등 글로벌 갤러리가 가져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 작가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요.홍콩에서 활동하는 작가나 큐레이터도 있지만 아트페어나 갤러리, 경매에 이들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았고 이 때문에 장터의 역할만 할 뿐 현지 예술 커뮤니티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이런 가운데 아트바젤 홍콩의 두 번째 10년(second decade)은 홍콩은 물론 아시아의 예술 커뮤니티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쓰양-러 디렉터는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이제는 서구에 아시아 예술을 가르치는(educate) 것이 더 중요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더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강조하고 있죠.이제 홍콩에는 글로벌 갤러리나 경매사의 헤드쿼터뿐 아니라 M+ 같은 미술 기관도 있고 로컬 큐레이터나 예술가들도 성장하면서 제법 예술 생태계를 갖추게 되어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지역 예술계가 튼튼해야만 아트페어도 꾸준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로컬 아티스트, 큐레이터가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주최 도시인 홍콩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죠.더 나아가서는 홍콩을 넘어 아시아 다른 예술 기관과도 적극적으로 협업하고 싶습니다.“쓰양-러의 설명은 제가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에 대해 흥미롭게 보고 있던 부분과도 일치합니다.최근 홍콩의 아트페어뿐 아니라 갤러리나 미술 기관에서도 그 중심축이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이는 2019년 대규모 반송환법 시위, 국가보안법 제정, 그리고 팬데믹으로 인한 국경봉쇄까지 일련의 이벤트를 계기로 홍콩에 더욱 강해진 중국 중앙 정부의 영향력도 배경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가 자국 중심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만큼 ‘미술 장터’인 아트페어가 생존하려면 ‘로컬 마켓’에 집중할 필요도 있겠지요.아트바젤이 한국에서 하려는 건?이제 남은 궁금증은 ‘아트바젤이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였습니다. 쓰양-러 디렉터는 “한국에는 이미 키아프와 프리즈가 있기 때문에 아트페어를 계획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고객과 직접 접촉하고 어떤 협업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다”고 했습니다.기자 간담회에서도 친근하게 한국말로 인사를 하고, ‘어릴 때부터 한국 사람이냐는 말을 들었다’며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극 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요.인터뷰 도중에는 한국의 젊은 컬렉터와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하고, “서울 말고 대구, 부산, 제주도 가보고 싶다”며 “그곳에도 예술 현장이 있지 않느냐”며 한국 미술계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그래서 아트바젤이 아트페어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물었습니다.쓰양-러 디렉터는 싱가포르에서 열었던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가 그룹전 ‘SEA Focus’, 일본에서 연 현대미술 투어 프로그램 ‘아트 위크 도쿄’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가장 적합한 프로그램이 무엇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적극 제안해달라”고 밝혔습니다.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홍콩컨벤션센터(HKCEC)에서 3월 26~27일 프리뷰를 거쳐 28일부터 30일까지,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해 개최됩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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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트바젤 홍콩, 서구에 亞 예술 알리는 역할 할 것”

    글로벌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 홍콩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홍콩은 수년 전만 해도 가고시안, 하우저 앤드 워스, 화이트큐브 등 서구 대형 화랑의 작품을 아시아 컬렉터에게 소개하는 장이었다. 하지만 2019년 반송환법 시위, 2020년 팬데믹 등을 거치며 홍콩에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강해진 뒤로는 아트페어도 서구보다는 아시아 시장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 에인젤 쓰양러(사진)는 “이제 아트바젤 홍콩은 서구에 아시아 예술을 교육(educate)하고,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예술계를 후원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아트바젤의 공격적인 ‘홍콩 마케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아트바젤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아트바젤 파리’에 팝업 카페를 열었다. 홍콩의 밀크티와 에그타르트를 맛볼 수 있는 ‘차찬텡(茶餐廳·서민 식당)’을 콘셉트로 한 이 카페에는 홍콩 현대 미술가 트레버 영의 작품을 전시했다. 유럽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몰리는 장소에 홍콩 문화 예술을 알리는 장을 마련한 셈. 쓰양러 디렉터는 “차찬텡 팝업은 팬데믹 시기에 기획했는데, 마침 아트바젤을 통해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다는 홍콩관광청의 제안으로 실현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그간 아트바젤 홍콩을 찾은 미술 관계자들은 홍콩이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만 있고 미술 생태계는 없다”는 지적을 해왔다. 홍콩은 글로벌 갤러리나 경매사는 많지만 공공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은 부족해, 유명 화랑이나 작가만 경제적 이득을 보고 현지 작가나 큐레이터는 들러리 역할만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쓰양러 디렉터는 “2012년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서구 예술을 가져와 소개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10년을 넘어선 지금은 역할이 달라졌다”며 “그동안 홍콩에도 M+ 같은 공립 미술관과 비영리 전시 공간 등 예술 생태계가 갖춰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주제 기획전 ‘카비넷’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나 아시아 디아스포라 작가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홍콩 독립 예술기관인 ‘파라 사이트’와 협력해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필름’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쓰양러 디렉터는 한국 미술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기획한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가 그룹전 ‘SEA Focus’나 일본에서 연 현대미술 투어 프로그램 ‘아트 위크 도쿄’ 등처럼 한국 고객들과 더 가깝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2025 아트바젤 홍콩은 다음 달 26, 27일 프리뷰를 거쳐 28∼3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해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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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라진 ‘아트바젤 홍콩’…“이제는 아시아 예술을 서구에 가르치는 역할”

    글로벌 아트페어 ‘아트바젤 홍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 홍콩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홍콩은 수년 전만 해도 가고시안, 하우저 앤드 워스, 화이트큐브 등 서구 대형 화랑의 작품을 아시아 컬렉터에게 소개하는 장이었다. 하지만 2019년 반송환법 시위, 2020년 팬데믹 등을 거치며 홍콩에서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강해진 뒤로는 아트페어도 서구보다는 아시아 시장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7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아트바젤 홍콩 디렉터 앤젤 쓰양-러는 “이제 아트바젤 홍콩은 서구에 아시아 예술을 교육(educate)하고,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예술계를 후원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아트바젤의 공격적인 ‘홍콩 마케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아트바젤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아트바젤 파리’에 팝업 카페를 열었다. 홍콩의 밀크티와 에그타르트를 맛볼 수 있는 ‘차찬텡(茶餐廳·서민 식당)’을 콘셉트로 한 이 카페에는 홍콩 현대 미술가 트레버 영의 작품을 전시했다. 유럽 미술 애호가들의 관심이 몰리는 장소에 홍콩 문화 예술을 알리는 장을 마련한 셈. 쓰양-러 디렉터는 “차찬텡 팝업은 팬데믹 시기 기획했는데, 마침 아트바젤을 통해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다는 홍콩관광청의 제안으로 실현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그간 아트바젤 홍콩을 찾은 미술 관계자들은 홍콩이 “작품을 사고파는 시장만 있고 미술 생태계는 없다”는 지적을 해왔다. 홍콩은 글로벌 갤러리나 경매사는 많지만 공공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은 부족해, 유명 화랑이나 작가만 경제적인 이득을 보고 현지 작가나 큐레이터는 들러리 역할만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쓰양-러 디렉터는 “2012년 아트바젤 홍콩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서구 예술을 가져와 소개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10년을 넘어선 지금은 역할이 달라졌다”며 “그동안 홍콩에도 M+ 같은 공립 미술관과 비영리 전시 공간 등 예술 생태계도 갖춰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주제 기획전 ‘카비넷’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나 아시아 디아스포라 작가를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홍콩 독립 예술기관인 ‘파라 사이트’와 협력해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필름’ 프로그램도 마련했다.쓰양-러 디렉터는 한국 미술계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싱가폴에서 기획한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가 그룹전 ‘SEA Focus’나 일본에서 연 현대미술 투어프로그램 ‘아트 위크 도쿄’ 등처럼 한국 고객들과 더 가깝게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뿐 아니라 대구, 부산, 제주까지 방문해 한국의 예술 생태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한국에 맞는 프로그램은 여전히 고민 중이고 관심 있는 기관이 있다면 적극 제안해 주면 좋겠다”고도 했다.2025 아트바젤 홍콩은 다음 달 26~27일 프리뷰를 거쳐 28~3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42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해 열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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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원작 뮤지컬-연극 봇물… “감성은 살리되, 무대로 차별화”

    7일 찾은 서울 서초구 신시컴퍼니의 뮤지컬 ‘원스’ 연습실. 두 주연 배우가 원작 영화의 삽입곡인 ‘Falling Slowly’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타를 든 남배우와 피아노 앞에 앉은 여배우가 전부였지만 화려한 배경이나 조명 없이도 배우들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아일랜드 더블린 거리에서 소형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초저예산 영화의 감성이 그대로 묻어났다. 19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막을 올리는 ‘원스’는 영화가 원작인 뮤지컬. 최근 연극 ‘타인의 삶’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셰익스피어 인 러브’, ‘렛 미 인’ 등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연달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원작 영화의 익숙한 감성을 되살리면서도 무대에서 차별적인 요소를 가미해 관객 사로잡기에 나섰다.● 스크린 속을 걷는 듯한 생동감 원스 연습실에서 만난 코너 핸래티 협력 연출은 “뮤지컬 원스는 구슬픈 노래를 가만히 듣기만 하는 공연이 아니다”라며 “노래를 녹음하다 싸우는 장면, 체코인들의 파티 장면 등 다이내믹한 연출이 많다”고 강조했다. 담당 극작가인 엔다 월시도 처음엔 특별한 서사 없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기 어려워 고민했지만 음악 자체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한다. 이런 고민 끝에 뮤지컬은 원작 음악은 살리되, 무대의 생동감을 극대화한 방향으로 제작됐다. 우선 오케스트라 없이 출연진이 직접 악기를 연주한다. 한 배우가 피아노와 만돌린, 벤조, 멜로디카 등 9개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총 16개의 악기가 활용되는, 배우 입장에서는 고난도의 공연이다.공연 전 20분 동안 ‘프리쇼(pre-show)’가 펼쳐지는 것도 눈길을 끈다. 관객들은 아일랜드의 바(bar)처럼 꾸며진 무대에 올라가 음료를 살 수 있다. 배우들은 기타, 아코디언, 만돌린 같은 악기를 즉흥 연주한다. 배우에게 말을 걸거나 즉흥 연기를 감상할 수도 있다. 영화 ‘원스’ 스크린 속으로 관객이 실제로 들어가는 기분을 선사하는 연출이다.이러한 연출 방식은 해리포터 소설이 마무리된 뒤 연극으로 만들어진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를 연출한 존 티퍼니의 개성이 잘 묻어난다. 그의 또 다른 연출작이자 영화가 원작인 연극 ‘렛 미 인’도 7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국내 관객을 만난다. 티퍼니는 “사뮈엘 베케트가 쓴 것 같은 뱀파이어 이야기”라고 영화 ‘렛 미 인’을 설명했다. 최승희 신시컴퍼니 홍보실장은 “한겨울 눈밭의 스산한 기운, 핏빛 사랑과 뱀파이어를 눈앞에서 보는 듯한 충격 등을 라이브 무대의 특징을 살려 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증된 예술 영화들을 무대로 7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막을 올릴 예정인 ‘셰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할리우드 영화를 원작으로 화려한 의상과 캐스팅을 선보이는 작품도 있다. 제작사 쇼노트 관계자는 “영화가 이미 관객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제목만 들어도 알 만한 작품은 쉽게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독립 예술 영화가 원작인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일도 잦아졌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선보인 연극 ‘타인의 삶’은 동명 영화가 원작.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동독에서 사상범으로 의심받는 예술가들을 감시하던 비밀경찰이 점차 그들의 삶에 동화되는 과정을 담아 2007년 미국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연극은 오히려 무대를 단순하게 만들고,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한 연출로 흥행에 성공했다. 칸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은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한국에서 연극으로 제작해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3월 23일까지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이러한 예술 영화 원작 작품은 문화에 관심도가 높은 관객에게 소구력이 있다. 독창적인 스토리와 감성적인 분위기, 서정적인 화면 등도 무대 연출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

    •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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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가공식품이 설계한 비만의 덫… ‘마법의 묘약’은 없다

    2023년 6월 국내 출간돼 4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도둑맞은 집중력’ 저자가 이번엔 ‘마법의 약’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작은 바늘이 달린 파란색 펜을 배에 찌르고 약물을 투입한 지 이틀 뒤. 저자는 늘 먹던 치킨 마요네즈 샌드위치를 겨우 몇 입 베어 물고는 배가 불렀다. 결국 음식을 남길 정도로 식욕이 떨어진 걸 느낀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체중을 9.5kg이나 감량했다! 이 약의 이름은 ‘오젬픽’.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다이어트약으로 유명해진 비만 치료제다. 이 책은 저자가 요즘 서구를 강타하는 신종 비만 치료제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한 내용을 생생하게 담았다. 오젬픽, 위고비, 마운자로 등은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GLP-1 호르몬’ 유사체다. 췌장에서 분비되는 GLP-1은 혈당을 조절하고 식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비만 치료제를 투약한 사람들은 체중을 평균 5∼24% 줄이는 효과를 본다고 한다. 저자 역시 투약 며칠 만에 “식욕이라는 창에 덧문이 내려져 손톱만 한 빛밖에 통과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체중이 줄어드는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살에 파묻혔던 목선과 광대가 드러나며 자존감도 높아졌다. 처음엔 0.25mg으로 시작했던 투약량이 점차 늘어나 1mg에 이르자 메스꺼움과 멈추지 않는 트림, 변비 등 부작용도 심해졌다. 하지만 부작용들은 음식 섭취량이 줄면서 일어난 신체 변화로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됐다. 그럼에도 불편한 감정은 남았다. “우리는 어쩌다 식욕을 낮추는 약까지 필요하게 될 정도로 뚱뚱해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약을 개발한 생명과학자와 식품 산업 관계자, 몸을 연구하는 세계적 석학 등 1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며 신종 비만 치료제의 유행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파헤친다. 먼저 살펴본 건 ‘인간은 왜 이렇게 뚱뚱해졌느냐’였다. 원래 인류 역사를 통틀어 비만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부터 비만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현재 미국 성인의 약 70%, 유럽 인구의 절반이 과체중 문제를 겪고 있다. 인류는 왜 20세기 들어 갑자기 자제력을 잃고 마구잡이로 음식을 탐하게 된 걸까. 저자는 각종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가공식품에서 해답을 찾는다. 50여 가지 화학물질로 딸기향을 만들어 내는 ‘딸기 없는’ 딸기맛 밀크셰이크처럼, 가공식품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화학물질을 부품처럼 조립해 생산된다. 긴 유통 기간 동안 상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6000가지 이상의 식품 첨가물이 사용된다고 한다. 뭣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인간의 포만감을 손상시키도록 설계돼 있다. 그러니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위에 구멍이 난 것처럼 더 먹고 싶어진다. 결국 현대사회의 식문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포만감을 망가뜨리는 음식을 먹은 다음에 또다시 포만감을 되찾는 화학물질을 주입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저자는 비만을 개인의 식단이나 의지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질병으로 보고 원인이 되는 식문화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신종 비만 치료제가 비만으로 건강을 위협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다만 거식증이나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전지전능한 마법의 약은 세상에 없다. 뭐든 과하면 해가 되기 마련이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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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자화상 속 남자의 파란만장한 인생 [영감 한 스푼]

    “우리 집 입구에 걸려있던 이 그림은 상반신 누드의 젊은 남자를, 그 몸에서 초자연적인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이 남자는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진정한 너 자신이 되라’고 부추기는 듯 했다.거짓으로 꾸며낸 페르소나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였다. …그림 속 남자의 눈을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이 글은 오스트리아의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세미 누드 자화상’을 본 감상입니다. 이 감상을 남긴 사람은 소장가인 루돌프 레오폴드의 아들인 디트하르트 레오폴드.루돌프 레오폴드는 게르스틀의 자화상 두 점을 집에 나란히 걸어 두었고, 아들 디트하르트는 어린 시절 보았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적습니다.이후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품이 된 이 작품은 지금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습니다.디트하르트가 어린 시절 이 작품의 강렬함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저 역시 이 푸른 자화상을 처음 보고 게르스틀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꼈습니다.신비로운 빛을 뿜어내지만, 깊은 바닷물 속에 잠긴 듯 약간은 어두움이 감도는 푸른 색.그 가운데 타월로 하반신을 간신히 가린 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는 누드의 남자.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자신감이 넘친다는 이야기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예민한 분위기가 풍겨져 나와 눈을 떼기 어려운 그림입니다.확신과 불안 사이를 오고 가는 파란만장한 롤러코스터. 이 인물이 살았던 삶도 그랬습니다.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게르스틀은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무려 15세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며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그러나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스타일이 맞지 않음을 깨달은 그는 3년 만에 아카데미를 떠납니다.그 후 자신만의 작업실을 마련하고 ‘독학’을 시작하는데요. 이 때 그림을 그린 것은 물론 언어, 철학, 문학, 음악을 공부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당시 빈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책은 물론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의 저서 ‘성격과 성’, 헨릭 입센과 프랑크 베데킨트의 극작품 등 당대 사회적 금기를 깬 연구와 문학 작품을 탐독했죠.빈 분리파가 조형적인 탐미주의에 빠져들어 새로운 표현을 고민했다면, 게르스틀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이 때문에 클림트를 비롯한 빈 분리파의 작품은 ‘너무 장식적이다’라고 비판하고,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이렇게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확신’은 그에게 무기가 되었지만,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불안’을 느끼게 하는 감옥도 되었습니다. 클림트를 거부한 신인 작가게르스틀이 추구했던 가치관은 그가 그린 인물화에서 드러납니다. 클림트의 초상화가 중산층 주문자의 취향에 맞춰 거슬리지 않는 세련된 조형미를 자랑했다면, 게르스틀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인물의 기질을 포착해서 예민하게 표현합니다.게르스틀이 그린 ‘페이 자매’는 그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카롤리네, 파울리네 페이 자매가 무도회 시즌이 끝난 직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만약 클림트라면 자매가 입었던 옷의 장식적인 요소와 질감을 강조하고 여기에 현실에는 없을 디자인적인 패턴을 더해 그림을 완성했을 것입니다.그런데 게르스틀은 자세한 표현을 과감히 생략하고 거의 모노톤의 색채에 흰색 덩어리 속에 두 자매가 엉켜 있는 모습으로 그립니다.당시 자매의 나이는 19세, 22세. 이 무렵 마치 한 몸인 것처럼 무엇이든 함께하고 가깝게 지내지만 때로는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복잡한 자매의 심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매를 둘러싼 시커먼 배경은 정체성의 갈등을 암시하는 듯 하죠.이렇게 게르스틀은 ‘선배 화가들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며 확고한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했지만, 이러한 태도가 그에게 독이 되기도 했습니다.게르스틀의 그림을 흥미롭게 본 갤러리스트가 그에게 전시를 제안하지만 ‘내 작품을 클림트와 함께 걸기 싫다’며 클림트를 참여 작가에서 빼달라고 요구해 전시 기회를 놓친 적도 있으니까요.25세 나이로 마감한 삶“누구도 게르스틀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맞서 싸워 지켜내야 한다고 느꼈다.”디트하르트 레오폴드가 게르스틀에 대해 한 말입니다.이렇게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된 게르스틀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가깝게 지낸 선배 화가가 국왕을 옹호하는 전시에 참여한다고 하자, 이에 대해 강하게 문제 제기하며 인연을 끊습니다.또 유명해지기 전 작곡가 쇤베르크를 만나 서로의 예술에 공감하며 친하게 지내지만, 그의 아내와 사랑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결국 이 사건으로 크게 상처를 받은 게르스틀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25세로 짧은 삶을 마감하죠.그 후 빈 예술계에서 ‘기인’ 게르스틀의 이름은 빠르게 잊혀졌고, 재발굴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대. 열정적인 소장가와 미술사가들이 게르스틀의 작품을 재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1970년대 후반에는 독일 베를린 화가들이 게르스틀의 강렬한 주관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고, 빌럼 드 쿠닝, 게오르그 바젤리츠도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습니다.지금은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함께 빈 표현주의의 문을 연 작가로 평가 받습니다.비록 작가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뒤늦게라도 평가를 받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여러 가지 가치가 혼재하며 폭발했던 1900년대 도시 빈에서 게르스틀이 찾고 싶었던 자신의 자리는 50년이 지나야만 마련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게르스틀을 가르쳤던 한 화가는 “게르스틀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그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적기도 했는데요.이렇게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다 가라앉고 만 한 사람의 인생, 이제는 푸른 배경의 강렬한 초상화가 살아 남아 그 가치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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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 경지에 오른 폴란드의 영화 포스터

    과거의 인기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몰락한 배우 노마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담은 1950년 할리우드 영화 ‘선셋대로’. 오리지널 포스터는 주연의 얼굴을 사진으로 강조하지만, 폴란드 작가 발데마르 시비에지가 그린 포스터는 짙푸른 아이섀도와 문어 다리 같은 머리칼로 데스몬드의 광기를 묘사한다. 경기 양평군 ‘이함캠퍼스’에서 6월 22일까지 열리는 ‘침묵, 그 고요한 외침_폴란드포스터’ 전시는 함축적이고 독창적인 폴란드 포스터 200점을 선보인다. 예지 플리삭이 디자인한 ‘로마의 휴일’ 포스터는 유럽을 순방 중인 호기심 많은 공주(오드리 헵번)의 탈출을 공주가 입은 새빨간 치마와 개선문 위에서 두리번거리며 공주를 찾는 수행원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주최 측은 “폴란드 포스터는 ‘폴란드 포스터파’로 불릴 정도로 참신한 표현으로 주목 받으며 1950∼1960년대 세계 그래픽 디자인의 전환점이 됐다”고 설명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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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체 없는 아이디어로 될때까지 속이는 세상 비꼬아

    미국 뉴욕에서 ‘애나 델비’라는 가짜 이름으로 독일 상속녀 행세를 하며 거액을 투자받았다가 결국 옥살이까지 했던 사기꾼 애나 소로킨(35). 실제 인물인 그를 모티프로 한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작 ‘애나 엑스’가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연극은 소로킨에서 영감을 얻은 주인공 ‘애나’와 가상의 스타트업 대표 ‘아리엘’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한다. 아리엘은 유명인이나 화려한 외모를 가진 이들만 가입하는 프라이빗 데이트 매칭 앱을 만들어 거액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업을 “실현 가능하단 증거도 없는 허상”이라며 “그냥 인간 본성의 천박함뿐인 아이디어에 투자한 것”이라고 자조한다. 그러면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은 가득하다. 그런 아리엘의 눈에 상류층 상속녀 애나는 완벽한 파트너. 애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리엘을 보며 조금씩 가면을 벗으려는 듯 고민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든 허상은 끝내 파국에 이른다.‘애나 엑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건 스마트폰 화면처럼 꾸민 무대다. 두 사람이 소셜미디어 등으로 주고받는 메시지가 영상으로 떠 연극 무대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메시지를 영어 원문 그대로 사용한 건 상당수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낄 대목이다. 애나라는 여주인공에 돈이 넘쳐나는 실리콘밸리의 ‘될 때까지 속여라(fake it till you make it)’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 아리엘을 결합한 점도 흥미롭다. 극 중에서 애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같은 현대 미술가들을 자주 언급한다. 이 작가들의 ‘실체 없는 아이디어’가 미술 시장에서 큰 거품을 만들어 내는 현상은 두 캐릭터의 실존을 반영하는 듯하다. 극에선 여러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두 배우가 연기하는 2인극이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역할이 수시로 바뀌어 두 배우는 애나와 아리엘일 땐 항상 같은 옷을 입는다. 스타트업 대표인 아리엘이야 스티브 잡스가 떠올라 그렇다 치지만, 거부 상속녀인 애나의 근사한 의상을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다만 설정상 사람들의 환상 속에선 화려하지만,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애나를 표현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애나 역은 최연우 한지은 김도연, 아리엘 역은 이상엽 이현우 원태민이 맡았다. ‘클로저’, ‘올드 위키드 송’을 연출했던 김지호 연출 작품.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3월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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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몸으로 느낀 저항-연대… 1960년대 이후 ‘亞 여성미술’ 한눈에

    도트 무늬 작품으로 세계적 사랑을 받는 구사마 야요이(96).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올해 10월 회고전을 가질 예정인 일본계 미국 작가 루스 아사와(1926∼2013).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외벽에 신작 조각을 설치한 이불(61)과 프랑스 파리 미술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 돔 공간에 설치 작품을 선보인 김수자(68)까지. 최근 세계 현대 미술계에선 아시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구순에 가까워서야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받은 김윤신 작가처럼, 그간 남성 중심의 미술 현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다 뒤늦게 조명받는 작가들도 있다. 이런 분위기에 맞물려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아시아 국가의 여성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전을 계기로 여성 미술의 키워드를 살펴봤다.● ‘나의 몸’이 곧 미술 소재이번 전시는 1960년대 이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 130여 점을 모았다. 대부분 한국에서 처음 소개된다. 제목처럼 이번 전시에 선보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공통 키워드는 ‘몸’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몸을 본떠 조각을 만들거나, 임신·출산 등의 경험을 토대로 작업했다. 또 직접 자기의 몸을 재료로 퍼포먼스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테면 조각이나 회화로 친숙한 구사마도 초기에는 자기 몸에 직접 점을 붙이고 행위예술을 펼쳤다. 영상 ‘자기소멸’에서 구사마는 자신의 몸은 물론이고 나무, 바위, 고양이 몸에 동그라미 모양 스티커를 붙이거나, 타인의 몸에 원형을 그린다. 모든 걸 점으로 뒤덮으며 나와 타인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했다.‘지옥의 문’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다나카 아쓰코는 실험미술그룹 ‘구타이 미술협회’의 1956년 그룹전에서 전구 90개와 진공관 100여 개를 연결한 ‘전기 드레스’를 직접 입었다. 이 전기 드레스를 회화로 옮긴 게 바로 ‘지옥의 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최근 주목받는 차학경(1951∼1982)의 ‘눈먼 목소리’는 길거리에서 단어를 쓴 천을 이용해 구현한 행위예술이다. 이민자로서 겪는 언어·자아상실의 경험을 담았다.● 저항과 연대를 통한 공감필리핀의 선구적인 미술가로 평가받는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도 주목할 작가다. 설치작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비밀결사조직 ‘카티푸난’에 속한 여성 조직원들의 연대를 표현했다. 이처럼 아시아 여성 작가들은 식민주의에 맞서는 등 체제에 저항하며 서로 공감하는 점도 또 하나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인도네시아 작가 멜라 야르스마 역시 20세기 초 네덜란드 식민 지배에 있던 인도네시아의 역사가 짙게 밴 작품을 선보였다. 서구 옷과 원주민 옷을 절충한 어떤 형태를 표방해 만든 작품을 관객이 직접 입어보도록 하며 인도네시아의 아픈 기억을 만나도록 유도한다. 신체를 우주의 축소판으로 보고 그 속에 흐르는 기운을 드로잉으로 표현한 중국 작가 궈펑이의 ‘자유의 여신상’,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므리날리니 무케르지의 ‘바산티(봄)’도 드로잉이나 섬유 같은 재료를 이용해 공감의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배명지 학예연구사는 “가부장제나 국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아시아’에서 그러한 체계를 몸으로 느끼고, 그 몸으로 저항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던 여성들의 작품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7일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여성 미술 연구자와 문화 인류학자 등 8인이 참여한 심포지엄도 열린다. ‘아시아 여성 미술: 역사적 맥락’ ‘미술 너머: 해석과 담론’ ‘콜렉티비즘: 다공적, 집단적 신체’ 등의 연구가 발표된다. 전시는 다음 달 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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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전 안중식 작품서 영감… 정성혜 ‘양양화관’ 전시회

    ‘조선의 마지막 화원(畵員·궁중 화가)’으로 불리는 서화가 심전 안중식(1861∼1919)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 제품을 선보이는 ‘양양화관(洋洋畵館)’전이 7일부터 열린다. 심전의 4대손이자 디자인하우스 ‘혜(HYE)’의 대표인 정성혜 인하대 패션디자인전공 명예교수는 서울 종로구 예올에서 개최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액자 형태의 작품과 스카프 등 60여 점을 소개한다. 안중식이 제자에게 써 준 글씨인 ‘양양화관’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동양과 서양,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란스러운 시대에 동서양이 함께한다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선 안중식 서화에서 도상을 가져온 제품들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민화와 규방 예술, 장식 조형예술 등에서 영향을 받은 작업의 결과물도 관객들을 만난다. 16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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