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주

손효주 기자

동아일보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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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효주 기자입니다.

hjson@donga.com

취재분야

2026-01-10~2026-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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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해자도 가해자도 만신창이… 끝나지 않은 탈북자 北送의 비극

    《 8월 중순 취재팀이 ‘탈북자 납치북송 사건’ 피해자 장○○ 씨(33)를 처음 만났던 순간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장 씨는 2004년 겨울, 탈북자 출신 한국인 채○○ 씨(48)가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한 것에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비운의 여인이다. 북송 후 남편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고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장 씨의 집은 충남 소도시의 한 임대아파트였다. 장 씨는 인터뷰를 거절하며 집에 찾아온 취재팀을 반나절가량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계속된 설득 끝에 비로소 문을 열어줬을 때 장 씨의 첫인상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장 씨는 막 머리를 감은 듯 머릿결이 젖어 있었고 분홍색 블라우스 차림으로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7년간 북한 교화소 생활을 할 때 대못을 삼켜 자살하려 한 적이 있고, 출소 후 다시 탈북하다 붙잡혔을 땐 칼로 배를 찌르기까지 했던 ‘독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천생 여자’에 가까웠다. 취재팀은 그날 이후 여섯 차례 장 씨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자주 들은 말이 있었다. “제가 그(북송) 전에는 진짜 뽀얗고 예뻤거든요.” 장 씨는 북송 이후 잃어버린 20대 청춘에 대한 회한이 깊어 보였다. 채 씨의 배신으로 북송됐을 당시 장 씨는 24세였다. 그녀가 아버지 대신 용서를 빌러 온 원수의 딸(22)을 만났을 때 딸의 예쁜 모습에 눈길이 갔던 이유도 그 때문인 듯했다. 장 씨는 북송 후 참혹했던 7년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구수한 북한 사투리를 썼고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자주 지었다. 그녀를 이런 비극으로 내몬 채 씨는 교도소에서 죗값(1심 7년 선고)을 치르겠지만 장 씨의 잃어버린 가족과 꿈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채 씨의 가족 역시 이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채 씨 아내는 이번 사건을 겪으며 북한에서부터 앓아왔던 간염과 폐병, 허리디스크가 더욱 악화됐다. 대학 3학년인 딸은 채 씨가 감옥에 갇히면서 엄마와 남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학교 공부를 하며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육아도우미 일을 하고 있다. 채 씨의 딸은 올해 9월 장 씨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러 가면서 마음이 무거운 중에도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에 대한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도 침울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보며 ‘기차를 또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채 씨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나, 채 씨가 자신의 가족을 사지(死地)에서 구해내기 위해 북한에 넘겨버린 장 씨의 가족이나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채 씨의 범행은 체제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방법이 다른 선량한 가족을 파탄시키는 것뿐이라면 이 야만적 선택을 피해갈 ‘아버지’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가족애’라는 인간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려 한 사람의 인간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북한 체제의 가장 비열한 단면이다. 북한의 두만강과 접한 중국 국경지역에는 채 씨처럼 한국에 넘어왔다가 밀무역이나 탈북 브로커 일로 돈을 벌려고 다시 중국으로 모여든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 현재까지 국내로 들어온 탈북자 2만5560명 가운데 통일부가 소재 파악을 못하고 있는 사람은 3.1%인 792명에 달한다. 이들 일부가 북한의 가족이 걱정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와 ‘비열한 거래’를 하는 것으로 국가정보원은 파악하고 있다. 채 씨와 장 씨, 두 가족이 겪고 있는 비극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9월 교도소에서 만난 채 씨는 기자에게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무얼 위해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채 씨에게 “네 가족을 보살펴 줄 테니 장 씨 가족을 넘기라”고 지령했던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 윤창주 대좌(한국에선 대령급) 역시 2011년 간첩으로 몰려 처형됐고, 그의 가족들도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장 씨와 그녀의 가족뿐 아니라 채 씨, 심지어는 윤창주까지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희생양이었던 것이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두만강변의 배신] 원수의 딸}

    • 201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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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원수의 딸

    《 (지난 줄거리)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채민철에게 속아 가족과 함께 북송된 장은희. 은희가 7년간 교화소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 남편은 죽고 생후 8개월이던 아들은 어딘가로 입양됐다. 은희 가족을 팔아넘긴 민철은 자신의 가족을 탈북시켜 한국에 데려왔다. 은희는 출소 후 복수를 위해 다시 탈북길에 오르지만 강을 건너다 군인들에게 붙잡히자 칼로 자결을 시도했다.》하나원에서 배정받은 서울 강북의 아파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문 앞에 있었다. 허름한 검은 옷에 때가 절어 본색이 사라진 운동화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렸는지 입술이 하얗게 부르터 있었다. 2010년 2월, 아직 영하의 날씨였다. "아버지." 채영선(가명·22)은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주는 느낌이 낯설었다. 다만 10년간 상상해 온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10년 전 여름, 채민철(가명·48)은 영선의 손을 잡고, 등엔 다섯 살이던 아들 영학(가명·17을 업고 평양 시내를 걸었다. 탈북 브로커 일로 생계를 잇던 시절이었다. 북한 주민 2명을 중국으로 보내는 '큰 건'을 앞두고 남매에게 평양 구경을 시켜 준 것이었다. "아빠가 중국 가서 돈 많이 벌어 올게." 한 팔로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리던 그때의 듬직함을 문 앞의 남자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다. 등은 오그라들고 키는 쪼그라들어 보였다.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이마와 볼에 파인 자국이 수두룩했다. 민철이 영선에게 다가왔다. 자신(키 165cm)보다 키가 큰 딸(167cm)을 어색하게 안았다. "보고 싶었다." 민철의 잠바에선 시큼한 땀 냄새가 풍겼다. 영선은 아버지를 허리춤을 꽉 부여잡았다. 영학은 이 광경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어릴 때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민철의 시선은 아들을 거쳐 아내 허정애(가명·45)와 마주쳤다. 정애는 젖은 눈을 깜박였다. 이튿날 아침, 민철의 집은 침묵에 잠겼다. 영선이 "잘 주무셨느냐"고 물었을 때 민철이 "어"라고 답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영학은 아직 아버지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민철이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온 지 5년. 그리워하던 가족이 마침내 탈북해 한국에 왔지만 헤어져 지낸 10년 세월의 벽이 허물어지는 데는 1년여가 걸렸다.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민철이 퇴근하는 오후 8시가 되면 가족은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민철은 마중 나온 남매에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웃음을 지어 입가가 씰룩거릴 뿐이었다. 영선과 영학(키 182cm)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면 가운데 있는 민철은 움푹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아내 정애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집으로 걸어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남매는 민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TV를 봤다. 서로 민철의 팔을 베겠다고 다투다 결국은 양팔을 하나씩 꿰차곤 했다. 영선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 팔을 베고 TV 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아들 생일날 들이닥친 손님 올해 3월, 은희는 결국 한국 땅을 밟았다. 2011년 여름 압록강을 건너 탈북하려다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스스로 배에 칼을 찔러 넣고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은희는 한국에 가 있는 엄마가 보내 준 돈을 찔러 주고 교화소에서 빠져나왔다. 세 번의 시도 만에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은희는 한국에 오자마자 민철의 만행을 국가정보원에 알렸다. 조사관에게 민철의 가족이 3년 전 한국에 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은희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놈을 꼭 잡아 주기요. 내가 먼저 칼탕 쳐(토막 내) 죽이기 전에…." 국정원은 은희 가족이 북송된 직후인 2005년부터 민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이 민철을 간첩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민철 역시 2010년 가족이 한국에 오고 나서 얼마 뒤 "보위부 지령을 받고 탈북자 일가족 북송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국정원에 자수했다. 국정원은 민철을 처벌하는 대신 북한 쪽 정보원 역할을 제안했다. 보위부에서 내려 보낸 공작원들이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귀띔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민철을 협조자로 대하던 국정원은 피해자인 은희가 한국에 살아 들어와 신고하자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정원 요원과 경찰이 민철의 집에 들이닥친 건 올해 6월 20일 아침. 아들 영학의 생일이었다. 출근을 앞둔 민철이 미역국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철은 요원들 손에 수갑이 들린 것을 보고 말했다. "영선이 영학이는 나가 있어라." 영선은 며칠 전 민철이 "아빠 없어도 영선이 네가 엄마 잘 보살펴라"라고 지나가듯 말했던 이유를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요원들은 13평(약 42.9㎡) 남짓한 민철의 집을 샅샅이 뒤졌다. 서류와 사진, 휴대전화 같은걸 모조리 상자에 담았다. 아내 정애는 심장약 몇 알을 입에 털어 넣고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민철은 또다시 남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붙들려 갔다. 이날 저녁은 한국에서 처음 아들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텅 빈 법정에서 내려진 7년 형 8월 9일 경기 의정부지법.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재판장이 민철에게 물었다. "혐의 다 인정합니까?" "네." "마지막으로 할 얘기 없어요?" 민철은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저는 부모 없이 자라서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살았지만 내 아이들은 남한에 와서 꿈을 펼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방청석은 텅 비어 있었다. 민철과 은희 어느 쪽에서도 오지 않았다. 은희는 "벌을 약하게 주면 내가 그 자리에서 배를 가르겠다"고 흥분해 주변에서 참관을 말렸다. 민철의 딸 영선은 재판과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겹쳤고 아내 정애는 허리디스크가 도져 거동을 못 했다. 1심 재판부는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형량을 깎아 주는 관례에 비춰 이례적이었다. 민철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9월 중순 교도소에서 기자와 만난 민철은 스포츠형 머리에 베이지색 수형복을 입고 있었다. 콧대에 가로로 길게 파인 흉터가 도드라져 보였다. 10여 년 전 북한 보위부에 탈북 브로커 일을 한 게 들켜 고문을 받다 코뼈가 부러진 자국이다. "왜 그랬습니까?" 민철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었다. 다시 똑같이 물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소." "북송되면 어찌 되는지 알면서 왜 그랬어요?" 민철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갑자기 들었다. "애들이 위험하면 안전한 데로 빼 줘야 하잖아요. 제가 아빠잖아요." "(다른 가족의) 8개월짜리 아기는 북한에 보내고요?" "저도 그게…. 여자하고 애기가 있어서 안 보내려고 했는데…." "반성한다면서 항소는 왜 한 건가요?" 민철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면회 종료 종이 울렸다. 자리를 뜨려는 기자에게 그가 말했다. "북한에서 10년간 그리 고생시켰는데 어떻게 7년을 또…. 와이프 약값도 많이 들고 돈은 누가 법니까."● '7년'이 앗아간 것들 영선은 9월 12일 충남 아산행 열차에 올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는 기차였다. 영선은 '여행을 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한 복도식 아파트 앞에 닿았을 때 종이가방을 쥔 영선의 손이 덜덜 떨렸다. 종이가방 안에는 카스텔라 상자가 있었다. "네가 무슨 체면으로 여기를 와!" 은희의 집 문이 열리자 은희 엄마가 영선을 쏘아보며 말했다. 은희 엄마는 먼저 탈북해 2008년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집에 은희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해서 제가 빌려고 왔어요." "스물 몇 살밖에 안 된 사위(이명호)가 죽고 손주는 어디 가 버리고. 응? 자기 가족은 살려 놓고 이제 와 어쩌자는 거야. (네 아빠)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은희 엄마는 영선이 오는 걸 허락하고도 막상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영선은 울먹였다. "저희도 10년 전에 아빠랑 헤어져서, 여기 와서 알게 됐어요. 아빠가…." 그때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은희의 얼굴이 보였다. 은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하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영선을 대면했다간 분에 못 이겨 해코지를 할 것 같았다. 은희 엄마의 목소리가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다시 높아졌다. "다 필요 없고 돈으로 보상해. 내 딸, 어떻게 보상할 거야." "아빠도 보상해 드리라고 했어요. 해 드릴게요. 근데 저희가…." 영선은 고개를 떨궜다. 대학생인 영선은 아버지 민철이 수감된 뒤 호프집 서빙과 편의점 알바 일을 하고 있었다. 간염과 폐병으로 앓고 있는 엄마(정애)는 일할 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은희 엄마는 30분 넘게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영선을 지그시 바라봤다. "우리 딸도 불쌍한 만큼 그쪽 딸도 불쌍하고 아깝지. 사람 다 죽여 가면서 왔으니 어찌 벌을 안 받겠어." 영선은 이곳에 오면 전하려던 말이 있었다. 오기 직전 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혹시 써 줄 수 있는지 부탁해 보라"고 했다. 울분을 억누르려 애쓰는 은희 엄마를 보며 영선은 탄원서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발에 쥐가 나 절뚝이며 현관으로 향하는 영선에게 은희 엄마는 카스텔라 상자를 내밀었다. "천당에서 가져온 거라도 안 받아." 영선이 당황해하며 신발을 신으려 하는 순간 안방 문이 또다시 열렸다. 은희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영선을 유심히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크고 쌍꺼풀 진 눈, 긴 갈색 생머리, 매끈하고 탄력 있는 다리. '정말 예쁘게 생겼구나…. 나도 저렇게 고왔는데….' 원수의 딸을 보면 분통이 터질 줄 알았는데 서글픔이 더 크게 밀려왔다. 은희는 7년 동안 교화소에서 겪었던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눈이 튀어나온 데다 시력이 나빠져 돋보기를 끼고 있었다. 민철에게 속아 북송되기 전 20대 초반이던 자신의 모습과 눈앞의 영선이 겹쳐졌다. 은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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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복수를 위한 생존

    《 (지난 줄거리)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탈북 브로커로 활동하다 한국으로 탈북한 채민철. 그가 행방불명된 죄로 북한의 아내와 어린 남매는 시골 유배지로 보내졌다. “탈북자 일가족과 탈영병들을 북송시키면 네 가족을 잘 보살펴 주겠다”는 보위부 간부 ‘윤 영감’의 제안을 받은 민철은 탈북해 중국에 숨어 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를 속여 북측에 넘긴다. 북송된 은희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   화장실 문 높이는 70cm였다. 멀리서 보면 안에서 쪼그려 앉아 용변 보는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장은희(가명)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화장실 안에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는 푹 숙이고 발꿈치는 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해 감시를 피할 수 있는 자세였다. 쇠붙이를 쥔 손 안에 땀이 흥건했다. 2006년 2월 새벽 4시. 함경북도 온성군 보안서(경찰서) 내 구류장 건물은 고요했다. 손 안에는 7cm 길이의 녹슨 대못 하나와 실핀 3개, 옷핀 하나가 있었다. 옷핀은 걸림 장치가 풀려 바늘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을 벌렸다. 대못을 집어 목구멍 끝까지 가져갔다. 식도에 들어가도록 못을 조금씩 세웠다. 못은 식도 벽을 찢으며 일자로 세워졌다. 못을 밀어 넣었다. "어억, 어억." 구역질이 새어나왔다. 실핀과 옷핀도 우겨 넣었다. 가슴이 막혔다. 물을 들이켰다. 못 끝이 장기 내벽을 긁으며 흘러내렸다. 화장실 안 양동이에는 물이 있었다. 죽은 날벌레 떼와 유충, 물곰팡이가 뒤섞여 부유하는 썩은 녹물이었다. 습관처럼 남편 이명호(가명)를 생각하며 속말을 했다. '현준이(가명) 아부지, 내래 교화소 6년형이랍니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 아입니까. 차라리 이래 죽는 게 나슬 것 같습니다. 죽는 것도 간단치가 않습니다.'●죽은 언니의 다리 9.9㎡(3평) 남짓한 구류장. 16명이 빈틈없이 서로 엇갈려 누워 자고 있었다. 은희는 돌아와 그 틈에 끼어 누웠다. 곧 죽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소매로 훔쳤다. 보위부와 보안서에서 1년 2개월을 보내면서 울다 들킨 이들이 어떤 고초를 겪는지 잘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간수는 우는 죄수를 끌어내 시래기를 강제로 먹여 대변을 보게 했다. 변에서 쇠붙이가 발견되면 고문을 했다. 자살 시도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은희가 보안서에 온 건 4개월 전이었다. 북송된 뒤 10개월간의 보위부 조사를 마친 은희와 명호는 각각 생계를 위해 탈북한 경제범과 남한에 협력한 정치범으로 분류됐다. 2005년 9월말 보안서로 호송되기 전 은희는 명호가 있던 구류장을 지나다 속삭였다. "살아서 보기요." 한 달 뒤 명호는 상급기관인 함경북도 보위부로 끌려갔다. 경제범 형기는 길어도 3년이라고 했다. 영양실조로 죽기 전에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 볼만했다. 결과는 6년형이었다. 북한 당국은 남한행 탈북자가 5년 새 20배로 늘자 긴장했다.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징벌적 선고를 내렸다. 선고를 받은 날 밤, 7년형을 받은 동료 언니와 함께 자살하기로 했다. 각자 같은 양의 쇠붙이를 먹었다. '어차피 죽을 거 실컷 먹어보기나 하자.' 죄수에게 펑펑이 가루(옥수수 뻥튀기를 갈아 가루로 만든 것)를 배식하는 일을 하며 가루를 몰래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가루를 훔쳐 구류장에 들어와 죄수들과 나눠먹었다. 입 안에서 침으로 '펑펑이 떡'을 만들며 우물거렸다. 죽을 때를 기다렸다. 며칠 뒤 설사를 하던 동료 언니가 죽었다. 들것 밖으로 삐져나온 언니의 다리를 은희는 멍하니 쳐다봤다.● 쥐와 경쟁하다 '강짜로(억지로) 거둬 넣은 못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나만은 살아 나가 복수하라고, 당신이랑 군대 아들이 나를 살군(살린)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나가 채 가(채민철·가명)를 만나겠습니다. 칼탕쳐(칼로 토막내) 죽이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원수를 다 못 갚는다고 생각합니다. 꽃나이 세 명이 죽은 거 아닙니까. 그라고 우리 현준이는요….' 여자 주먹 크기의 밥덩이 하나. 2006년 4월 은희가 교화 생활을 시작한 평안남도 개천 교화소에서 나오는 한 끼 식사였다. 100g 남짓이었다. 밥덩이는 강냉이를 껍질째 빻아 찐 것이었다. 껍질에 사료까지 섞여 돌 씹는 느낌이 났다. 때로는 유리조각과 작은 못도 섞여 나왔다. 은희가 속한 뜨개반은 하루에 모자 5개를 떠야 했다. 하루 15시간 이상 뜨는 모자는 중국으로 팔려 나갔다. 5개를 다 못 뜨면 일렬로 꿇어앉아 '각재(각목) 구타'를 당했다. 입으로는 삽이 날아와 이를 깨놓았다. 식사는 '처벌밥'으로 바뀌었다. 한 끼당 30g. 한 숟가락 분량이었다. 살려면 5개를 뜨고 봐야 했다. 평소엔 '까마귀 날개' 국이 밥과 함께 나왔다. 썩어 문드러져 구멍이 숭숭 뚫린 양배추 잎을 물에 넣어 끓인 것이었다. 잎도, 국물도 까맸다. 흐물흐물한 큰 잎이 떠 있는 모습은 군데군데 털이 빠져 죽은 까마귀 날개가 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밥 먹는 시간은 2분. 한 반 죄수가 80명인데 국그릇은 20개였다. 국을 받자마자 '까마귀 날개'를 바닥에 건져놓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 국그릇을 넘겨준 다음 유일한 건더기인 '까마귀 날개'를 씹어 삼켰다. 늘 설사를 했다. '봄에 락종(落種·논밭에 씨 뿌리기)을 할 때는 그래도 낫습니다. 뜨락또르(트랙터) 소리에 개구리가 놀라 튀어 오릅니다. 그걸 잡아다 찢어가지고 몰래 매달아놓고 마르기만 기다리거든요. 꾸득꾸득해지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현준이 아부지, 내래 '세상에 어디 여자라는 기 개구리를 잡는가' 하지 않았습니까. 개구리 튀겨 당신 술안주로 내줘도 내 어디 입에나 댔습니까. 개구리가 눈을 바로 뜨고 올려다보는 게 어찌나 무섭던지요. 이제는 없어서 못 먹습니다. 날이 좋지 않아 마르지 않거나 말리는 중에 쥐가 채가면 얼마나 아쉽고 속상한지요. 참 한심하지요.' 2008년 평안남도 증산교화소로 이동한 은희는 개구리로 버텼다. 개구리를 잡다 걸리면 발길질을 당했다. 처벌밥을 받거나 굶었다. 보호동물을 잡았다는 게 이유였다. 은희는 살아서나가야 했다. 쥐와 경쟁을 벌이는 한편 밥덩이 세 개를 모아 동료가 잡아놓은 쥐와 바꿨다. 쥐고기를 씹으며 4년 전 본 민철의 이목구비를 머릿속에 그렸다. 겨울이면 교화소 내에 달구지가 자주 오갔다. 은희는 달구지 밖으로 팔 다리가 축 늘어진 시체의 모습을 하루에도 여러 번 봤다. 뼈에는 가죽이 쪼글쪼글한 헝겊처럼 붙어있었다. '허약 3도'들이 줄지어 죽었다. 교화소에서는 허약자의 바지를 벗겨 허약도를 측정했다. 엉덩이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엉덩뼈(엉치뼈 아랫부분)가 얼마나 드러났는지를 살폈다. 양쪽 엉덩뼈가 드러나 약간 벌어져 있으면 1도, 세운 주먹이 엉덩뼈 사이에 들어가면 2도, 눕힌 주먹이 들어가면 3도였다. 2도는 똑바로 서지 못했다. 3도는 항문 근육이 토끼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툭 건드리면 쓰러져 죽을 사람들이었다. 2009년 겨울, 은희는 허약 2도였다. '그렇게 맛있던 밥덩이가 목이 까슬까슬하매 넘어가질 않는 겁니다. 내장에 병이 나매 계속 설(설사)을 합니다. 저 지게에 얹힌 날강냉이 하나 채 먹으면 얼마나 달큰할까요. 몸이 금방 나슬 텐데요. 정신이 풀려 서 있을 수 없는데도 지도원은 '놀면 죽는다' 캅니다. 나가도 일을 못할 텐데요. 일을 못해 밥이 줄면 허약 3도가 될 것이고…. 그라면 살아나가 복수하지 못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다섯 생명과 바꾼 약속이 깨지다 민철의 가족을 보살펴주겠다던 윤창주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행불자'의 가족을 따라다니는 감시의 눈길은 더 매서워졌다. 이웃들은 민철의 아내 허정애(가명)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대화를 엿들어 인민반장 회의 때 보고했다. 정애가 민철이 보내준 돈을 가지고 시장에 가면 보안원(경찰)이 따라붙었다. 무언가를 사면 돈의 출처를 추궁한 뒤 잡아갈 터였다. 민철은 정애와 통화할 때마다 "남한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2005년 중순부터 다시 한국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은희 가족 셋과 북한 탈영병 둘을 북한에 넘긴 사실이 중국 공안에 적발돼 그해 여름 한국으로 추방됐다. 민철은 2003년 탈북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가고는 싶은데 애들도 너무 어리고…." 2005년 당시 딸은 14세, 아들은 10세였다. 탈출의 순간은 4년 뒤 찾아왔다. 2009년 6월 보안원이 정애에게 다그쳐 물었다. "이 쌍간나, 니 요즘 누구랑 통화하네?" 벽장에 숨어 남편과 통화를 하다 보위부 탐지기에 휴대전화 전파가 잡힌 것이었다. 남한에 건 전화라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날 밤 짐을 싸 두만강 국경으로 도망쳤다. 민철은 탈북 브로커를 보냈다. 정애와 두 남매는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탈북 1년 만인 2010년 6월 한국 땅을 밟았다.● "아는 살아있다" 2011년 7월 은희는 교화소 문을 나섰다. 두만강변에서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지 6년 7개월만이었다. 교화소에서의 마지막 4개월은 생존 투쟁의 나날이었다. 보이는 대로 낟알을 주워 먹었다. 쓰레기장에서 썩은 고구마를 찾아내 씹어 먹었다. 벌레는 잡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가족을 생지옥으로 팔아넘긴 민철에게 복수하려면 허약 2도에서 벗어나 살아야 했다. 은희는 출소하자마자 보위부원에게 남편의 생사부터 물었다. "무기수 중에 이명호가 없다. 그라면 어찌 됐겠니?" 남편 친구 말도 다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명호가 살아있다고 보는가. 군대아들(민철이 북송시킨 탈영병 2명)도 다 죽었단다." 남편 친구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는 살아있단다. (온성군) 창평으로 가보라." 현준이는 창평의 한 농가에 살고 있었다.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루에 앉은 아이가 보였다. 입양된 현준이는 양어머니 무릎에 앉아 재잘댔다. 보위부원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에 내동댕이쳤던 젖먹이가 어느새 7세가 돼 있었다. 이름도 바뀌어 있었다. 은희는 아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양엄마를 친엄마로 알고 크는 게 행복할 것 같았다. 이제와서 아들을 반역자의 자식으로 살게 할 수는 없었다. ● 발 밑 자갈 소리 "한국 갈 돈 준비됐으이 넘어오라. 내 창바이(長白) 국경에 서있을 거이다." 한국에 간 새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출소한 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은희의 엄마는 은희보다 5개월 앞선 2004년 1월 중국으로 탈북했다. 중국에서 조선족 남자와 결혼해 딸을 기다렸다. 엄마와 새 아빠는 북송된 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2008년 한국으로 갔다. 탈북을 결심한 은희는 갓 제대한 남동생과 혜산(북)-창바이(중)의 국경에서 만나기로 했다. 함북 온성군에서 양강도 혜산시까지는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보름이 지나자 압록강이 보였다. 150m 폭의 강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저녁 9시. 강둑 후미진 곳에 북한 군인이 나타났다. "강에 길 열어놨소. 지금 가면 되기요." 남매가 미리 돈을 쥐어준 군인이었다. 남매는 마지막으로 각자의 옷 주머니를 매만졌다. 국경에 도착하기 전 시장에 들러 산 칼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단추를 누르면 칼집에서 칼날이 튀어 올라오는 자동 칼이었다. 칼날 길이는 7cm. 붙들릴 상황이 되면 다시 고초를 겪는 대신 자결할 계획이었다. 강둑을 걸어 강 초입에 도착했다. 발걸음을 뗐다. '자그락자그락.' 발밑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야반 탈북자를 잡겠다며 압록강 초입에 깔아둔 자갈 소리였다. 자갈들은 서로 몸을 뒤섞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돈을 받은 군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는 밤공기를 타고 공명했다. "누기야." 북한군 초소 불이 켜졌다. 군인 7명이 뛰어나왔다. 은희는 온몸에 힘이 풀렸다. 함께 헤엄치던 동생의 손을 놓았다. 강 하류로 떠내려갔다. 동생은 누나를 뒤돌아보며 중국을 향해 헤엄쳤다. 강 건너 어둠 속에서 새아빠 실루엣이 우왕좌왕 흔들리고 있었다. 떠내려가던 은희는 주머니 속 칼을 꺼냈다. 칼이 튀어 올랐다. 배 깊숙이 찔러 넣었다. 군인들은 은희를 강둑으로 끌어냈다. 양쪽에서 팔을 잡고 강둑에 몇 차례 처박았다. 등을 발로 짓이겼다. 칼이 더 깊이 박혔다. 군인들은 은희를 바로 눕히고서야 배에 박힌 칼을 발견했다. "독종 간나. 제 배에 칼 꽂는 게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은희는 또 교화소에 가면 민철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분했다. 칼에 찔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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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아버지의 선택

    《 (지난 줄거리) 중국으로 탈북해 숨어살던 이명호 장은희 부부는 한국으로 데려다주겠다는 탈북자 출신 채민철의 안내를 받아 차에 탔다. 하지만 민철이 부부를 내려준 곳은 북한 보위부원들이 숨어있는 ‘사지(死地)’였다. 은희는 보위부 수사관이 내민 북한 군사 기밀 문서를 보고 숨통이 막혔다. “남한에 가려면 필요하다”는 민철의 말을 믿고 남편이 그에게 건넨 문서였다. “사람이 이럴 수 있는가.” 은희는 치를 떨었다. 》망원경의 초점은 한참을 방황하다 자전거를 탄 소녀에게 멈췄다. 더 들이밀 수 없을 때까지 눈을 망원경에 파묻었다. 흰 셔츠에 남색 치마. 이목구비가 흐릿했지만 딸이었다. 이제 열세 살.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이다. 여덟 살이 된 아들은 키가 제법 자랐다. 머리가 자전거 손잡이 높이까지 왔다. 아들의 반질반질한 바지가 햇볕에 반짝였다. 아이들 옆 풀밭에 앉아있는 여자는 아내였다. 예전보다 더 말랐는지 얼굴뼈와 턱선이 도드라져보였다. 2004년 7월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은 두만강 건너 북한 땅에 있는 가족들을 살펴봤다.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에서 북한으로 연결되는 투먼대교. 이쪽 끝은 중국, 저쪽 끝은 북한이었다. 다리 아래 두만강이 흘렀다. 민철은 중국 쪽 다리 끝 옆에 있는 전망대에 서 있었다. 다리 길이 200m가 민철과 가족 간의 거리였다. 북한 쪽 다리 끄트머리에 세관이 있었다. 중국에서 건너온 무역상을 마중 온 사람들이 많아 감시의 눈길이 분산되는 곳이었다. 전날 민철은 북한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아내 허정애(가명·당시 37세)에게 전화를 했다. "내일 애들 데리고 세관 앞에 나오라. 거기서 놀아라." 정애는 세관 옆 풀밭에서 토끼풀 뜯는 척을 하며 아이들이 놀 시간을 확보했다. 남매는 강둑을 오가며 건너편을 힐끔힐끔 봤다. 전망대에는 관광객이 북적여 검은 점만 여럿 있었다. 아버지를 분간해낼 수는 없었다. 남매는 30분쯤 강둑을 기웃기웃하다 돌아갔다. 의심을 살까봐 더는 머물지 못했다. 세관을 통과해 나온 조선족 남자가 정애 앞에 포대자루를 내려놨다. "저쪽 아저씨가 전하랍니다. 아저씨가 애들 사진 몇 장 갖다달라니까 내일 다시 보기요." 자루에는 약초와 약통 몇 개, 쌀이 있었다. 정애는 간염과 폐병을 앓고 있었다. 아들은 각혈이 심해 코와 입으로 자주 피를 토했다. 그 날 먼발치에서 가족들을 본 뒤 민철은 투먼대교에 사람이 몰리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다리 앞에 나갔다. 아내와 아이들도 그 시간에 맞춰 건너편 강둑으로 나왔다. 민철은 2~3주에 한 번 남매와 통화했다. 버릇처럼 "키가 얼마나 컸는가"라고 물었다. ○ '윤 영감'을 만나다 민철은 다리를 건너 북한에 갈 수 없었다. '윤 영감'을 알게 돼 시작된 숙명이었다. 영감은 지령을 내리는 보위부 간부를 뜻하는 은어다. 윤 영감의 본명은 윤창주.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장으로 반역분자나 간첩을 색출하는 책임자였다. 2001년 7월 윤창주를 처음 만난 곳은 정치범 고문으로 악명 높은 종성집결소 취조실이었다. 민철은 몽둥이에 맞아 코뼈가 부러져있었다. 눈 주변까지 파랗게 부어오른 민철에게 그가 물었다. "토마토 많이 따 먹었나?" 민철은 방금 전까지 토마토 수확에 동원됐다가 불려온 터였다. 한 달 간 조사만 받다가 불쑥 투입된 것이었다. 조사 받는 동안 거의 먹지 못했던 민철은 지도원 눈길을 피해 토마토를 입에 쑤셔 넣었다. 윤창주는 민철이 뭘 하다 불려 들어왔을지 꿰뚫고 있었다. "더 따먹어도 된다. 괜찮아." 집결소에서 처음 들어본 부드러운 말투였다. 윤창주는 머리가 희고 눈빛이 인자한 50대 후반의 남자였다. 배가 볼록 나오고 덩치가 우람한 전형적인 당 간부의 풍채였다. "죄는 없던 걸로 해줄 테니 나랑 한 번 일해 볼래."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준다는 말이었다. 민철의 죄목은 2001년 봄 북한사람 2명을 중국으로 탈북시킨 것이었다. 탈북브로커가 민철의 돈벌이였는데 빼돌린 이 중 하나가 요주의 인물이었다. 민철은 그의 중국 은신처를 알고 있었다. 민철은 망설이지 않았다. "반탐처장 동지 지시대로 중국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중국 파견 전날 민철은 특별면회를 했다. 한 번 들어오면 생사가 불투명해지는 정치범 집결소에선 이례적이었다. 윤창주가 아내 정애를 직접 차에 태워 온 것이다. 정애는 핼쑥한 얼굴로 울먹였다. 민철은 이 면회가 격려용인지 협박용인지 분간되지 않았다.중국에서 잡아오겠다고 한 목표물의 행방은 묘연했다. 1년 넘게 진척이 없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끄나풀은 보호받기 어려웠다. 국가안전보위부(한국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의 경쟁 정보기관인 조선인민군 보위사령부(보위사·한국으로 치면 기무사령부)가 민철의 과거 탈북 브로커 행적을 다시 들춰 수사에 들어갔지만 보위부는 그를 감싸지 않았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살아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민철은 중국에 숨어 지내다 2003년 7월 한국으로 탈북했다. 민철이 행방불명되자 그의 가족은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시골마을로 추방됐다. 갱생차 트럭이 멈춰선 곳은 소 외양간 앞이었다. 민철의 아내 정애는 어린 남매와 이삿짐 보따리를 차에서 끌어내렸다. 축사에 소는 없고 빗물이 가득 차있었다. 구석에 보따리를 내려놓자 모기떼가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물어뜯던 소들이 사라져 애타게 손님을 기다린 모기들이었다. 굶주린 모기들은 사람 손바닥에 짓눌려 으스러져도 살갗에 꽂은 주둥이를 빼지 않았다. 모기를 상대하는 사이 보따리는 땅의 축축한 오물이 스며들어 황토 빛이 됐다. 이 축사가 민철 가족의 유배지였다. ○ 두 아버지 민철은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다시 중국에 갔다. 가족이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그 후 상황을 알아봐야 했다. 중국에서 북한 골동품 밀무역을 하면 한국보다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기도 했다. 정애와 연락이 닿은 건 2004년 7월. 수사를 피해 잠적한 지 2년 만이었다. 가족들은 유배지에서 1년 가까이 지내다 이제 막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투먼대교를 사이에 두고 매주 토요일 서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정애는 민철과의 통화에서 보위부원과 보안원(경찰관)의 '쫄쿠기(뜯어내기)' 얘기를 했다. 매일같이 찾아와 돈과 식량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편이 행방불명이면 중국에 있을 테고, 그럼 돈을 보내줄 것이니 나눠 갖자"는 궤변을 늘어놨다. 보통 북한에서 행방불명자들은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중국으로 간 뒤 번 돈을 가족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정애는 밉보일까봐 빚을 내 뇌물을 댔다. 수시로 있는 중앙당 검열에서 '행불자' 가족은 1순위 조사대상이었다. 검거 실적을 쌓으려 또 다시 추방 보내거나 감옥에 가두는 게 다반사였다. 어린 남매는 '도망자의 자식'으로 살게 될 터였다. 민철 역시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군에서 제대하는 날 세상을 떴다. 열여섯 살에 군 입대 하던 날 민철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다. 민철이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를 알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민철은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전해줄 송금책을 찾고 있었다. 밀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명호는 북한 국경경비대 군인들과 호형호제했다. 명호는 "가족들과 남한에 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민철은 흔쾌히 응했다. 둘 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아버지였다.○ 비열한 거래 며칠 뒤인 2004년 9월 20일 민철은 중국 투먼역 대합실에서 낮 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2001년 윤창주 지령을 받고 중국에 나왔을 때 동료 겸 감시자였던 김용식이었다. "채 사장, 그동안 어디 있었어?" "홍콩에서 조폭 했다." 한국 갔다고 실토했다간 반역자로 몰릴 판이었다. 민철이 말을 이었다. "윤 영감하고는 연락하나?" 민철은 윤창주와 다시 연락하고 싶었다. 한 때 자기를 보호해준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탁하기엔 그만한 '빽'이 없었다. 석 달 뒤인 12월 12일, 민철은 윤창주의 전화를 받았다. 영감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상했다. "채 동무,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 나를 믿는다면 한 번 왔다가라." '가족은 안 데리고 갔더라'는 말의 속뜻을 민철은 여러 번 되새겼다. 윤창주는 공작원 교육 때 "체포할 땐 억지로 끌어오기 보단 스스로 찾아오게 하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한 번 가면 못 올 수도 있었다. 이튿날 오후 8시 민철은 꽁꽁 언 두만강을 혼자 건넜다. 약속장소는 근처 기차굴이었다. 민철은 전날 윤창주와 통화하며 "남한에 귀순하려는 북한 탈영병 둘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탈영병 두 사람은 명호가 민철에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잡으려면 윤창주가 자신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민철은 생각했다. 새카만 굴 안에서 라이터 불빛이 번쩍했다. 윤창주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가족들? 걱정마라. 잘 돌봐줄게." "온성에 아내가 애가 둘 있습니다. 잘 좀 막아주시기요." "채 동무는 내 일만 잘 도와주면 돼. 군인들 며칠 있다 체포하고."○ 잠든 아기 얼굴 문 밖에서 잠겨있는 자물쇠를 열자 안에서 '털컥'하며 총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채민철이야." 안에 있던 두 남자는 문틈으로 민철의 얼굴을 확인하고 총을 거둬들였다. 명호가 숨겨주는 북한 국경경비대 탈영병들이었다. 민철은 조금 전 명호에게서 자물쇠 열쇠를 건네받았다. "오늘 (남한) 간다. 짐 챙겨." 민철은 김용식이 끌고 온 회색 지프차에 탈영병들을 태워 두만강변의 보위부 요원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용식이 당초 계획에 없던 요구를 했다. "이명호 식구들도 넘기자." "가는 안 돼. 여자랑 갓난애가 있다고." "윤 영감 지시다." 탈영병 체포 계획을 짜며 명호 가족 얘기를 슬쩍 했는데 용식이 윤창주한테까지 보고 한 것이었다. "여자랑 애기를 어떻게 넘기나." 결국 명호만 넘기기로 마음먹은 민철은 명호에게 전화를 걸어 "너만 먼저 가자. 내려오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용식이 민철을 비웃듯 바라봤다. "간나 새끼, 너 남한 간 거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민철은 심장이 죄어왔다. 윤창주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북한의 가족들은 더욱 위태로웠다. 용식은 윤창주에게 전화를 걸어 민철을 바꿔줬다. 영감의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채 동무 새끼집(자식 사랑) 큰 거 내 잘 안다. 애들만 생각해." 이 때 명호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마누라가 왜 자기 안 데려가느냐고 난리요." 민철은 명호의 천진한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한국에 간다고 들떠할 명호 부부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했다.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오라. 다같이." 민철은 차 뒷좌석에 탄 명호 가족을 백미러로 쳐다봤다. 방금 전 북한에 넘긴 군인 두 명이 앉았던 자리였다. 명호 아들 현준이가 눈을 감고 아빠 가슴팍에 안겨있었다. 민철은 여권 사진을 찍으러 명호 부부를 사진관에 데려간 날이 떠올랐다. 그날 현준이는 지금 같은 표정으로 민철의 품에서 잠들어있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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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베일 벗은 배신자

    《 (지난 줄거리) 중국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던 명호 은희 부부는 그를 구원자로 믿었다. 한국에서 온 탈북자 민철. 그의 안내로 지프에 탔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쪽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차가 멈추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어둠에서 나타난 낯선 사내들의 그림자. ‘중국 공안인가?’ 은희의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꽁꽁 언 두만강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아기는 팔다리를 빳빳이 뻗고 부들부들 떨었다. '으앙으앙' 목청 찢어지는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북한 보위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준이(가명)의 기저귀를 벗겨 칼로 북북 찢었다. "기저귀 두둑한 거 좀 보라. 이 독종 간나, 아 새끼 기저귀에까지 돈을 숨겨 놨구만 기래." 칼을 내두르자 노란 액체가 묻어나왔다. 현준이가 겁에 질려 싼 오줌이었다. 돈은 없었다. 현준이는 알몸으로 떨며 제 엄마만 봤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눈범벅이 된 아기 얼굴을 닦아주려다 보위부원의 귀쌈(귀싸대기)에 나가떨어졌다. 2004년 12월 16일 오전 3시 중국 투먼(圖們) 도봉호텔. 불 꺼진 방에 혼자 앉은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의 귀에 아기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소리를 떨치려 술을 들이켤수록 새파랗게 질린 현준이 모습은 더 생생해졌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6시간 전 그가 목격한 광경은 고량주 2병을 비워도 사라지지 않았다. ○ 두만강-12월 15일 전날 밤 9시경 투먼과 함경북도 온성군을 가르는 두만강변. 민철은 장은희 가족 체포조가 4명에서 순식간에 20여 명으로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온성군 남양 북한군 중대부 초소에서 대기하던 보위부원들은 가족을 태운 차가 멈춰서자마자 두만강을 넘어 투먼으로 모여들었다. 초소는 두만강 중국 국경에서 100여 m 떨어진 지척이었다. 체포조는 은희를 걷어차고 귀쌈 때리기를 반복했다. 아기는 얼굴이 눈밭에 반쯤 박혀 바둥거렸다. "지도원 동지, 내 도망 안 갈 테니 현준이 좀 업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 개간나. 개소리 치지 말고 걸어라." 체포조는 밧줄에 묶인 가족을 군홧발로 차며 초소 방향으로 몰았다. 현준이는 누군가의 팔에서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했다. 경기를 일으킬 듯 자지러지던 아기는 이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덜덜 떨뿐 울지도 못했다. ○ 낯익은 뒷모습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초소에 들어섰다. 은희가 아기의 상태를 살피려고 고개를 들면 군홧발이 날아왔다. 한 간부가 발길질을 만류했다. "아는 보게 해주라. 어차피 다 죽을 거 아이가." 은희가 고개를 들자 결박돼 벽을 보고 꿇어앉은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뒷모습은 움츠리고 있었다. 먼저 끌려온 탈북자인 듯 했다. 트럭 소리가 초소 밖에서 요란하게 퍼지더니 부대장급 간부 서너 명이 초소로 뛰어들었다. "개새끼들." 간부들은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뒤통수를 찍어 찼다. 얼굴이 벽에 부딪친 뒤 바닥으로 튕겼다. 피범벅이 됐다. 은희는 피로 물든 가죽점퍼를 유심히 봤다. 낯설지가 않았다. 은희 가족과 함께 숨어 살던 탈영군인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이었다. 점퍼는 한 달 전 은희가 이들을 투먼시장에 데리고 가 사 입힌 옷이었다. "남한가면 옷 잘 입어야 돼. 이래 입고 모자도 쓰면 너거 군인인 줄 아무도 모를 거다." 정혁과 광일은 형수가 사준 옷을 들고 몇 달 만에 웃었다. '저 아들이 와 여기 있는가….' 두 시간 전 군인들의 은신처였던 투먼 석유제현공장 사택 3층. '끼이익.'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얼어붙었다. 바깥에서 채워놓은 자물쇠 열쇠를 가진 사람은 은희의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조선족뿐이었다. 이들이 연락 없이 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채민철이었다. "오늘 (남한으로) 가자. 짐 챙겨라." 군인들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정말입니까? 진짜지요?" 정혁과 광일은 아껴둔 가죽점퍼를 챙겨 입었다. ○ 결정적 증거 부부는 갱생차에 실려 온성군 보위부로 호송됐다. 보위부원이 원하는 답변을 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였다. 구류장 배정 직전 두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 남겨진 시간은 3초. 명호는 은희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일체 모른다." 모든 죄를 자신이 안을 테니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해 살아나가라는 얘기였다. 구류장에 들어가기 전 몸 검신(檢身)이 시작됐다. 보위부원은 은희 옷을 모두 벗겼다. "뽐뿌질 하라." 은희는 팔을 머리 위로 올린 뒤 나체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 질 안에 숨긴 돈이 빠져나온다는 것이었다. 수치심에 떨면서도 속으로 되뇌었다. '일체 모른다.' 조사가 이어졌다. 은희는 각목과 철제 의자로 맞아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조사를 받지 않는 시간은 9.9㎡(3평) 크기 구류장에서 죄수 15명과 앉아서 생활했다. 잘 때는 나란히 열을 맞춰 앉은 다음 뒷사람 배 위에 몸을 겹쳐 누웠다. 사람과 오물, 벌레 등 구류장 안 모든 것이 한꺼번에 썩어가며 악취를 내뿜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에는 벌레가 우글대는 걸레가 있었다. 이불이었다. 현준이를 누일 곳은 그 거적때기뿐이었다. 조사받은 지 10일째 되던 날 보위부원이 물었다. "니 채민철이 왔을 때 어떤 말했어?" 가슴이 철렁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보위부원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2004년 10월 중국 투먼 교원주택 8층 1호. 장은희는 남한 방송에 나오는 여배우를 보더니 '나 남한 가도 알리지 않을까요?(북한에서 온 거 티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음." 은희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보위부원은 은희 표정을 힐끗 보고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채민철이 '한국 가도 알려지지 않을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하자 웃으며 좋아함." 3개월 전 은희와 민철이 나눈 대화와 똑같았다. 심장이 내려앉으려는 순간 남편의 당부가 떠올랐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래? 이래도 모른다 하는가 보자." 보위부원은 다른 종이를 은희 가슴팍에 내밀었다. '동계 훈련 명령서'라고 적힌 종이였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글씨가 가득했다.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김정일.' 은희는 얼어붙었다. 남편의 당부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 그날만 불이 켜졌다 은희 가족이 숨어 지낸 투먼의 아파트는 늘 어두웠다. 빈집으로 위장하려고 불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 보위부원 군홧발 소리 수십 개가 아파트 곳곳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소리가 멈추는 동시에 보위부원들이 문을 부수고 집으로 들이 닥치는 상상이 은희를 괴롭혔다. 2004년 12월 초. 불을 끄고 거실에 앉아 있던 은희의 눈길이 작은방 문틈으로 향했다. 하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두런두런하는 소리도 들렸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문을 열어젖히자 갇혀있던 빛이 쏟아졌다. 담배 연기까지 가득해 방은 더 환해보였다. 방 안에는 남편과 정혁, 광일이 있었다. 명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고 수화기 너머 한 남자가 불러주는 말을 따라 읊었다. 정혁은 명호가 읊는 말을 종이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광일은 창가에서 망원경을 들고 북한군 초소 쪽을 살폈다. 세 남자는 줄담배를 피웠다. 수화기 너머는 남편과 친분이 있는 북한 군인인 듯했다. 남편은 은희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했다. "2004년도 동계 훈련을 다음과 같이 진행할 것을 명령한다. 군종, 병종, 전문병 부대, 구분대(대대 아래의 부대 조직단위)들의 훈련 달수는 다음과 같이 할 것. 땅크병구분대 7달, 비행구분대 12달…." "전자전병훈련은 적의 무선전자수단들의 배치 위치를 신속 정확히 판정하여 적극적인 전파 장애를 조성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월 일선 부대에 직접 내려 보내는 훈련 명령서였다. 군사기밀이었다. 유출은 곧 총살이었다. 다음 날 명호는 안절부절못했다. 은희는 명호가 은희 가족의 은신처를 지공한 조선족과 통화하며 하는 말을 들었다. "채 형이 국정원 사람에게 명령서를 줘야 남한에 수월하게 갈 수 있대요. 명령서를 복사해서 채 형한테 얼른 줘야 합니다." 명호는 필사적이었다. 얼마 전 중국 다롄(大連)의 일본 국제학교에 들어가 망명 요청을 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보위부가 명호 가족을 잡겠다며 혈안이 된 터였다. 명호는 마지막 동아줄이라 믿은 민철에게 명령서를 건넸다. 그 명령서가 은희 앞에 놓여있었다. ○ 화장실 밀담(密談) 은희는 계속 먹지 못했다. 구류장 식사로 나오는 썩은 강냉이죽은 먹으면 바로 탈이 났다. 껍데기가 둥둥 떠있는 데다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 때문에 입에 대기 힘들었다. 민철의 정체를 알게 되자 배고픔도 잊었다. 젖도 말라버렸다. 현준이는 남은 기력을 다해 울었다. 강냉이죽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던 현준이가 어느 날 입을 뻐끔뻐끔했다. 은희가 할 수 없이 죽을 떠주자 입을 쫙쫙 벌려 받아먹었다. 은희는 민철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할 거면서 왜 현준이를 친아들처럼 예뻐했냐고. 아기를 보고도 어떻게 승냥이로 변할 수 있었느냐고. 체포 12일 만인 12월 27일, 구류장 문이 열렸다. 간수가 들어섰다. "애기를 안고 나오라." 은희는 직감했다. 구류장에 수감된 여성의 아기는 입양 보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 애기 떼면 안 됩니다. 나 죽거든요. 차라리 날 죽게 해주세요." 울며 발버둥을 치다 혼절했다. 그날 밤 은희는 간수를 불렀다. "선생님, 저 대변보겠습니다." 1호 구류장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소변은 방에서 해결하지만 대변을 보려면 복도 끝 화장실에 가야 했다. 2, 3호를 지나 4호 앞에서 멈춰 섰다. 철창을 톡톡 건드렸다. 명호에게 화장실로 오라는 신호였다. 대변 전용 화장실은 가까이만 가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수들은 '사람 갈 곳이 못 된다'며 감시하지 않았다. 부부가 1, 2분이나마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현준이 아부지, 현준이를 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은희는 오물 범벅인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명호는 은희 옆에 쪼그려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효주·신광영 기자 hjson@donga.com논픽션 드라마는 사건의 실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한 새로운 형식의 기사입니다. 공식 기록과 당사자 증언을 검증해 재연한 100% 실화(實話)입니다.}

    •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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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만강변의 배신]국경의 덫

    《 두만강에는 야만의 법칙이 흐른다. 상대를 죽여 내가 사는 것이 중국 두만강 국경의 생리다. 9년 전 어린 남매의 아버지였던 탈북자 스파이 채○○ 씨(48)는 비열한 순응을 택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웠던 또 다른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구원의 손길을 가장한 배신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려 했던 탈북자 일가족은 사지(死地)로 내몰렸다. 부부는 20대였고 아들은 8개월 된 젖먹이였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부인과 13세 딸, 8세 아들을 북한에 남겨두고 탈북한 채 씨에게 ‘작업’을 제안하며 “가족을 잊지 말라”고 했다. 부정(父情)과 인정(人情). 그 사이에서 채 씨는 한쪽을 택했다. “내 자식들은 나처럼 꿈 없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채 씨의 선택으로 다른 탈북자 가족의 삶은 풍비박산이 났다. 채 씨의 죗값은 과연 얼마일까.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채 씨가 탈북자 일가족 납치 북송에 가담하기까지 지난 10여 년간 행적을 되짚어봤다. 총성이 사라진 북-중 국경에서 남북한 정보당국이 벌이는 음모, 북한체제의 농간에 스러져간 두 가족의 좌절과 투쟁을 목격했다. ‘드라마’ 형식을 빌리지 않고는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취재팀은 8월부터 두 달간 채 씨와 피해자, 양쪽 가족들, 검경 수사팀, 사건 목격자와 신고자 등 주변 인물을 2∼7차례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기사는 검찰 공소장과 수사기록, 1심 판결문, 당사자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본보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100% 실화를 재현하는 ‘논픽션 드라마’를 앞으로도 계속 선보일 계획이다. 》 회색 지프차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두 달 전 집에서 본 남자였다. 운전사는 말이 없었다. 한국말을 모르는 중국남성인 듯 했다. 왼쪽에 앉은 남편 가슴팍에 생후 8개월 된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장은희(가명·당시 24세)는 차창 밖을 내다봤다. 꽁꽁 언 두만강이 어둠 속에 멈춰 있었다. 반 년 전 아들을 업고 건널 땐 가슴까지 차오르던 강이었다.2004년 12월 15일 오후 9시. 중국 옌볜(延邊) 두만강 접경도시인 투먼(圖們)의 외곽도로를 10여 분째 가고 있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남편이 초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형, 저 두만강 건너에 있는 게 강양군대(북한군 국경경비대) 아닌가?" 조수석의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남한행' 차에 탔지만 은희는 안심하지 못했다. 가는 길에 중국 공안이 차를 세우는 상상이 떠올랐다. 6개월 간 숨어 살 때 제복 입은 사람을 보면 심장이 내려앉던 관성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순조로웠다. 남쪽으로 간다면 왼편에 있어야 할 두만강이 오른쪽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것 말고는….○ 은신처에 찾아온 남자 조수석의 남자가 집에 나타난 건 두 달 전인 10월 어느 날이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키는 북한에선 평균인 165㎝ 정도. 그는 쌍꺼풀 진 큰 눈을 번뜩이며 목례를 했다."우리를 한국에 보내줄 채 형이야." 남편 이명호(가명·당시 23세)가 그를 소개했다. 은희는 생후 6개월 된 아들 현준(가명)이를 안고 채민철(가명·당시 39세)을 빤히 쳐다봤다. 낯선 사람이 집에 온 건 중국 투먼에 숨어 산 지 넉 달 만에 처음이었다. 투먼은 북한 최북단인 함북 온성군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나오는 중국 땅. 남한에 가려고 '선'을 찾는 탈북자가 많다. 명호와 은희는 그해 6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곳으로 탈북했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친해놓은 조선족의 집에 숨어 지냈다. 은신처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투먼대교 옆 8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초소의 군인들 얼굴표정이 보였다. 민철은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 한국 거 보네." 드라마 '올인'이 TV에 나오고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는 민철의 바쁜 눈빛이 은희와 마주쳤다. 민철은 은희 품에 있던 현준이를 끌어안았다. "야, 이 새끼 잘생겼다." 민철은 아기와 이마를 맞대고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은희가 외출 준비를 하는 내내 민철은 아기를 무릎 위에 앉혔다. 민철이 볼을 비비자 현준이는 수염에 따가워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다 같이 사진관으로 옮겨서도 민철은 현준이를 안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 화보 모델해도 되겠다." 이날 명호와 은희는 여권 사진을 찍었다. 위조 여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간다는 게 며칠 전 민철이 명호에게 제시한 계획이었다. ○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쫄쿠기(뜯어내기)'를 못 견뎌 탈북을 결심했다. 명호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송이버섯 밀무역으로 생계를 꾸렸다. 장사를 하려면 북한 최고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원(경찰)의 묵인이 필수였다. 두 기관에서 하루씩 교대로 명호 집을 찾았다. 달라는 뇌물을 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이들을 피해 다니자 명호는 곧바로 체포 대상이 됐다. 밀무역을 하며 다져놓은 북한군과 보위부 인맥은 명호를 조여 오는 수사망으로 돌변했다. 남한행은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탈북한 지 석 달 만인 2004년 9월 명호는 투먼 시내 음식점에서 민철을 만났다. 민철은 "청진에서 군함 타고 나갔다가 수영해서 한국에 귀순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무용담은 명호를 사로잡았다. 1년 전 탈북자 25명이 베이징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려다 중국 공안에게 잡힌 사건 때문이었다. 이후 남한으로 가는 '선'이 끊겨 민철 같은 유경험자가 귀했다.당시 명호는 며칠 전 일 때문에 신경이 더욱 곤두서 있었다. 북한 국경경비대 상등병 김정혁(가명·당시 22세)과 이광일(가명·당시 22세)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명호가 밀무역을 할 때 뒤를 봐줬고 탈북할 때도 두만강 길을 열어준 군인들이었다. "(보위부에서) 형님 배를 따오면 살려준답니다." 명호는 표정이 굳어졌다. 친형제로 여기는 동생들이라도 조심했어야 했다. 명호 가족의 탈북을 도운 게 발각돼 총살 위기에 놓였다가 체포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었다. 탈북을 도와준 사람을 체포용 미끼로 쓰는 게 보위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정혁은 곧 중국으로 찾아온 속내를 털어놨다. "형님 못 죽이겠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남한 같이 가요." 명호는 정혁과 광일을 숨겨줬다. 가족과 사는 아파트에서 10km쯤 떨어진 석유공장 뒤편 다세대주택 3층이었다. 이곳 역시 명호를 숨겨준 조선족의 집이었다. 명호는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전기를 끊어 빈집으로 위장했다. 탈영병 은닉죄는 잡히면 살 길이 없었다. ○ 비정한 국경 도시 투먼은 돈과 안전을 위한 배신이 일상화된 도시였다. 누군가의 최소한의 선의에 내 생명을 맡겨야 했다. 북한 공작원들이 중국 공안 복장을 하거나 탈북 브로커 행세를 하며 탈북자를 색출했다. 돈벌이로 탈북자 은신처를 보위부에 일러바치는 조선족도 많았다. 북한에서 송이버섯이나 골동품을 가져올 판로를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넘기는 식이다. 이들은 북한 정보를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에게 팔아넘기는 이중 스파이 짓도 했다. 명호 역시 국정원 첩보망의 한 고리였다. 북한 쪽 인맥을 통해 빼낸 정보를 넘기며 도피자금을 벌었다. 명호는 투먼을 벗어나려 했다. 중국 다롄(大連)에 있는 일본 국제학교에 뛰어들어 망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호 가족과 탈영병 둘을 포함해 탈북자 16명이 탄 승합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내리지 못했다. 교문 앞에 공안 차량이 이미 와 있었다. 차에 탄 누군가에게서 계획이 새나간 것이었다. 투먼에 돌아온 명호는 더욱 초조해했다. 다롄의 승합차 안에 숨어있던 스파이에게 얼굴이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바삐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민철과 가까워진 건 그즈음이었다. 대부분의 브로커가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조선족이었는데 민철은 달랐다. 한국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고 남한행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명호는 민철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잡히면 정치범으로 몰릴 수 있어 탈북자들끼리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말이었다. "남한에 가려고 하는데…. 형이 도와줄 수 있소?" 민철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가 직접 데려가줄게." 명호는 민철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탈영병 둘도 데리고 있어서 걔들부터 빨리 보내야 될 것 같소." "그러면 네가 다친다. 손 떼는 게 좋지 않겠냐." 명호는 민철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에 고마워했다. 민철은 돈이 궁하던 명호에게 100달러까지 지폐를 종종 쥐어줬다.○ 합승의 함정 민철과 남한행을 상의한 지 두 달쯤 뒤인 2004년 12월 15일 오후 8시. 명호는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민철의 전화를 받았다. 명호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은희랑 애기는 왜 안 데려가겠다는 거야?" 이를 들은 은희가 식탁에 앉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남한) 못 가면 언제 간단 말입니까. 우리도 남자들 있을 때 끼어서 갈 기라요." 명호는 다시 민철에게 전화를 걸어 3, 4분 만에 통화를 끝냈다. "짐 싸라. 다 같이 간다." 명호 가족은 8층을 걸어서 내려왔다. "명호야." 민철의 목소리였다. 200m쯤 떨어진 곳에 지프차가 있었다. 명호 가족이 탄 차는 정적 속에 10분쯤 달렸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차를 세우고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명호야. (함경북도 온성군) 상탄에서 사람 하나 넘어오기로 했다. 받아서 같이 가자." "아, 그럼 그렇게 하기요." 탈북브로커를 한 적이 있는 명호는 '남한행 합승'이 간혹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는 교차로에서 U턴해 두만강변 외곽도로로 들어섰다. 민철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어, 어." 민철은 나직이 대꾸만 했다. 운전사는 곧 한적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과 헤드라이트도 껐다. 한겨울 국경의 밤은 적막했다. 어둠 속에서 남자 2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현준이 아버지, 둘 다 남자입니다. 남한 가는 길에 좋겠습니다." 은희는 험한 길에 건장한 사내들이 동행하는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나란히 오던 남자는 좌우로 갈려 각각 뒷좌석 쪽으로 다가왔다. 은희가 있는 오른쪽 문을 연 남자는 차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야, 이 개간나, 안으로 들어가라." '이런 막 돼먹은 인간.' 은희는 생각했다. 명호 쪽에도 남자가 끼어 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차 앞쪽에 또 다른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은희는 '차는 좁은데 무슨 사람이 이리 많나' 하며 의아해했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은희와 명호의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은희는 차 문을 열려고 몸부림 쳤다. 밖에는 중국 공안 복장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와 있었다. 차 밖으로 끌려나와 강변 쪽 절벽으로 발길질을 당했다. 그때만 해도 은희는 돈을 얼마나 줘야 공안이 풀어줄지 생각했다. 눈밭에 나뒹구는 엄마 아빠를 보고 현준이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 사이로 북한말이 들려왔다. "야, 빨리 빨리 빠져라. 복잡하게 놀지 말고." 괴한들에게 반말을 하는 민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은희는 정신이 들었다.신광영·손효주 기자 neo@donga.com}

    • 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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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장훈 “독도=일본땅 표기 애플 불매”

    가수 김장훈(사진)이 애플이 최근 내놓은 아이폰 아이패드 운영체제인 iOS7에서 독도를 일본 시마네(島根) 현 소속으로 표기한 것을 비판하며 ‘애플 불매운동’을 제안했다.}

    • 201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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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생자만 있고 발포명령자 없는 ‘5·18 모순’ 3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납 추징금을 모두 내겠다고 발표했지만 5공화국에 대한 진정한 역사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특히 계엄군의 총격으로 민간인 165명(정부 집계)이 사망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자 규명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역사적 과제다. ‘5·18특별법’이 제정된 1995년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졌고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까지 이뤄졌지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군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발포 명령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쏘라고 한 사람은 없는 모순이 33년째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12·12, 5·18합동수사본부’의 판결문과 검찰 공소장을 살펴보고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인터뷰, 5·18단체 면담 등을 통해 발포 당시 상황을 되짚어봤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계엄군이 첫 총격을 가한 건 1980년 5월 20일 오후 10시 반 광주역 앞에서였다. 18일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와 공수부대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3공수여단 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됐고 M-16 소총으로 시민들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시민 4명이 사망했다. 이튿날인 21일 오후 1시 반 전남도청 앞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조준한 총격이 있었다. 오후 3시 50분 광주우체국 앞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져 이날에만 38명의 민간인이 사살됐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상부 지휘라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당시 육군참모총장)-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정웅 31사단장-각 공수부대 여단장이었다. 이들 중 누구도 발포 명령을 했다고 인정한 사람은 없다. 검찰 공소장을 보면 당시 신군부의 수괴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첫 총격이 있었던 20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작전 책임자를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장으로 교체해달라고 요구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 때는 전 씨가 군의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가 입수한 2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 21일. 전 각하(전두환) 초병에 대해 난동 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 있다. 1996년 열린 5·18 관련자 재판에서 법원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4시 35분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고 계엄군은 이를 발포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군 수뇌부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게 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아니 볼 수 없고, 이희성 주영복이 그 요구를 적극 수용했다”며 전 씨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군 수뇌부의 공동 책임을 묻는 데 그쳤을 뿐 발포 명령자를 색출하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법원은 자위권 발동 결정 전 벌어진 총격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국방부 과거사위 관계자는 “당시 발포 명령과 관련된 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전 씨 등 관련자들이 진술을 기피해 한계가 있다”며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물증이 없어 실명을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89)은 10일 “당시 지휘권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1980년 5월 22일 부임)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윤 씨와 소 씨는 각각 2002년과 2004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처럼 발포 명령의 진실을 알만한 이들 중 일부는 사망하고, 생존자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신광영·손효주 기자neo@donga.com}

    • 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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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교사령관에 지휘권… 나는 5·18관련 죄 없다”

    5·18민주화운동 유혈 사태 때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89·사진)은 10일 경기 과천시 갈현동 자택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나는 직책상 책임이 있어 기소됐던 것일 뿐 5·18과 관련해 죄가 없다”며 “그때 지휘권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전 총장은 “당시 내가 일선에서 지휘하지 않았다. 참모들이 다 결정을 하고 형식상으로 내가 결재해서 승인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휘관인 내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을 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장은 1996∼1997년 진행된 ‘12·12, 5·18 재판’ 당시 내란주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개월만 복역하고 특별 사면됐다. 이 전 총장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다 보고하고 명령 받아서 한 거다. 난 복권은 됐지만 연금도 못 받고 있다”며 억울해 했다. 그는 “우리가 기소될 당시 이미 5·18 범죄 관련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 받지 않아도 됐지만 김영삼 정권이 특별법을 제정하는 바람에 복역했다”며 “그럼에도 8개월을 살았고 법에 따라 사면된 것이니 죗값은 다 치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완납하기로 한 것에 대해선 “명예가 다 떨어진 다음에야 추징금을 내는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검찰이 (전 전 대통령을) ‘해골’로 만든 만큼 해골에 옷도 입혀 줘야 한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이희성 씨 인터뷰 일문일답 ▼"나는 5·18과 관련해 죄가 없소. 당시 내가 가장 윗선에 있어 형식상 (유혈진압을) 결제하고 승인했을 뿐 실제로는 일선 참모들이 결정한 것이오. 지휘 체계상 내가 책임지지 않을 수 없어 기소된 것일 뿐이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 최고 지휘권자였던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89·당시 육군참모총장 겸임)은 5·18이 일어난 지 33년이 지난 지금도 유혈진압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 전 계엄사령관은 지난달 12일과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이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밝힌 10일 경기 과천의 자택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두 차례 만나 이 같이 밝혔다. 이 전 계엄사령관은 5공화국 시절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돼 사실상 신군부가 입법·행정·사법 등의 권한을 모두 쥐게 됐을 당시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신군부 가장 윗선에서 공수부대 증파를 지시하고 발포 명령 등의 유혈진압을 최종 승인하는 등 지휘권을 휘둘렀음에도 "(유혈진압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다 보고하고 명령을 받아서 한 것인데 어떻게 내게 죄가 있느냐. 실질적인 지휘 책임은 현지 지휘관이었던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나 후임인 소준열 전교사령관(1980년 5월 22일 부임)에게 있었다"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다. 이 전 총장은 1996~1997년 진행된 '12·12, 5·18 재판' 당시 내란주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기소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8개월만 복역하고 특별사면 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 전 대통령 등 '12·12, 5·18 재판'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 14명 모두 복역 8개월만에 특별사면됐다. 이 때문에 '5공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가 기소될 당시 이미 5·18 범죄 관련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 받지 않아도 됐지만 김영삼 정권이 특별법을 제정하는 바람에 복역했다. 그럼에도 8개월을 살았고 법에 따라 사면된 것이니 죗값은 다 치렀다. 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완납키로 한 만큼 형식적으로는 5공이 모두 청산됐다고 본다."-당시 핵심 피고인으로 기소된 것에 대해 억울한 점이 있나. "내 자리는 책임지라고 만들어놓은 자리였다. 계엄사령관은 전권을 가진 막강한 지위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장 진압 지휘를 총 지휘관인 내가 다 한 것은 아니다. 참모들이 현장 상황을 보고하고 보고가 크게 잘못되지 않았으면 난 승인을 했다. 그러나 참모들이 그랬다고 해서 내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원통해 할 것도 없다. 팔자가 사나워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에서 계급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기소가 안 된 사람도 많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 대한 정상적인 상부 지휘라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진종채 2군사령관-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정웅 31사단장-각 공수부대 여단장이었다. 그런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상 지휘체계를 거스르고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광주 유혈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계엄사령관(최고 지휘권자) 역할을 한 정황이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 당시 검찰 공소장과 판결문에도 이 사실이 적시돼 있는데…. "전두환은 5·18에 관한한 책임이 없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던 전 전 대통령이 정상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5·18에 개입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소위 '좌파'들이 전두환을 끌어들이려하다 보니 '지휘체계가 이원화 됐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만약 전 전 대통령이 지휘체계를 이원화해 배후에서 직접 지휘를 했다면 그건 군법회의(현재 군사재판)에 붙일 엄청난 사안이다. 전두환이 지휘 이원화를 했다면 계엄사령관인 내가 가만히 있었겠나. 전두환은 내게 까마득한 후배다. 그는 내게 불경스럽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8개월간 복역했다. 당시 나이가 73세로 복역 생활이 어려웠을 것 같은데…. "잘 지냈다. 교도소 측에서 젊은 죄수들을 당번처럼 내 옆에 붙여줘 수발을 들게 했다. 교도소 내에 의사가 있는데 그 분이 나를 자기 방에 매일 데려다놓고 건강상태를 확인해줬다. 커피도 매일 대접받았고 밖에 못나간다 뿐이지 교도소 밖에서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다. 나는 그곳에서 '고등관'처럼 지냈다.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교도소 내에 곧 사면된다는 소문이 돌아서 곧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전 전 대통령을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나. "4, 5년쯤 전 전 대통령이 우리 부부를 연희동(전 전 대통령 자택)으로 불러 갔다. 당시 그가 '연금을 못 타게 돼서 미안하다'라며 저녁을 대접하더라. 내가 실형 선고를 받는 바람에 군인연금도 못 받고 있다. 죄가 없는데도 연급을 못타는 것이다. 그것도 억울한데 6.25 참전용사 관련 연금도 실형 선고를 이유로 받지 못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이 잊지 않고 불러줘서 고마웠다."-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완납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리 내면 보기 좋았을 것을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명예는 다 떨어지고 길에 나 앉게 될 상황이 되니까 완납하겠다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 우리(신군부 주축 세력) 중에 전 전 대통령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했을 때 믿는 사람은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뻔뻔해보여서 미움을 산 거다. 검찰이 전 전 대통령을 '해골'로 만들어 놨다. 원칙대로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러나 검찰은 자신들이 해골로 만든 사람에 대해 옷도 입혀줘야 된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

    • 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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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지통]“몸매는 여자, 얼굴은 남자” 여탕 아수라장

    “여탕에 남자가 들어왔어요!” 8일 오전 8시경 경기 수원시의 한 목욕탕에서 112로 신고전화가 걸려 왔다. 여탕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여성들을 기겁하게 한 장본인은 긴 생머리에 치마를 입었지만 얼굴은 우락부락한 영락없는 남자였다. 목소리도 걸걸했다. 여성들은 ‘여장 남자’가 여탕을 훔쳐보려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해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경찰이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결과 번호가 ‘1’로 시작했다. 남자가 맞았다. 하지만 지구대로 연행된 남자 A 씨(31)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이미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트랜스젠더라고 자신을 설명했다. 여경이 그의 몸을 ‘검사’한 결과 실제로 신체적으로는 여성이었다. A 씨는 “성전환 수술을 했지만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는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경찰은 A 씨를 처벌하지 않기로 했다. 목욕탕 관리인도 “처벌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다만 A 씨가 “목욕 중인 아는 언니를 찾는다”며 입장료를 내지 않고 목욕탕에 들어간 점에 대해서는 경범죄를 적용해 2만 원짜리 스티커를 발부했다. 경찰 관계자는 “A 씨가 스스로를 ‘여성’이라 생각하고 있고 성전환 수술도 받은 만큼 범죄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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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이슈]착하고 완벽한 아이… 당연히 있어야할 양심이 없었다

    기타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나의 가족’이라며 아꼈던 아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두 털어 갖고 싶었던 단종된 기타를 사러 간다며 들떠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10대였다. 그가 일했던 호프집 주인은 그를 두고 “완벽했다. 일을 어찌나 잘하고 서글서글한지 아르바이트생 중에 시급을 가장 많이 줬다”고 했다. 그의 은사는 “영리하고 심성이 고우며 감수성이 풍부하고 생각이 많은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다양한 말로 칭찬하던 사람들은 이번 사건을 보고 경악했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반응이었다. “꿈에도 몰랐어요. 그 애가 그런 짓을 하리라곤….” 주위 사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을 놀라게 한 주인공은 8일 발생한 ‘용인 살인 사건’의 피의자 심모 군(19). 심 군은 평소 알고 지내던 김모 양(17)을 모텔로 유인해 성폭행한 뒤 김 양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목 졸라 살해했다. 그는 16시간에 걸쳐 시신의 살점을 도려냈다. 경찰에 붙잡힌 이후에도 “공포영화를 가끔 보기도 하는데 영화처럼 한 번쯤 흉내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등 태연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잔인한 범죄자를 통칭해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는 ‘사이코패스(psychopath)’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지만 소시오패스(sociopath)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서 ‘소시오패스’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부 학자들도 “자신의 잔혹함과 악함을 착하고 친절한 모습의 가면으로 최대한 감추고 있는 심 군은 소시오패스의 전형”이라며 힘을 실어줬다.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와 어떻게 다를까.양심 없는 인간 대중 용어로 자리잡은 사이코패스에 비해 ‘소시오패스’는 낯설다. 흔히 알려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점은 이렇다. 사이코패스는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선천적인 것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며 법적 윤리적 개념이 형성되지 않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이를 뜻한다. 반면 소시오패스는 후천적인 영향으로 탄생하며 나쁜 행동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뜻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부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가 정신분석학 및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정식 용어가 아닐뿐더러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모두 반사회적 인격 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ASPD)를 지닌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설명이다. 둘 다 ASPD에 속하며 잔혹함 등의 정도에 따라 편의상 이름만 달리 붙이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소시오패스에 대한 정확한 정의도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소시오패스도 선천적인 것이어서 사이코패스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전문가들은 소시오패스가 공감 능력이나 죄책감이 없고 자신의 이익과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들을 통칭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책임을 회피하고 남을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종하거나 거짓말을 일삼는 등의 특성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한마디로 “당연히 있어야 할 양심이 없는 인간”이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의학부 외래교수 브루스 페리 씨는 저서 ‘개로 길러진 아이’에서 그가 실제로 상담한 레온(가명)을 통해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레온은 16세에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만취 상태로 각각 12, 13세인 두 소녀에게 접근해 성관계를 요구하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이들을 살해했다. 시신을 성폭행하고 발로 차고 수차례 밟기도 했다. 레온은 그를 만나러 온 정신과 의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의사가 어떤 인물인지 탐색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의사가 거짓말이 통하고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파악한 레온은 “거칠게 반항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 피해자들이 살인을 조장한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돌이키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이렇게 말했다. “부츠를 갖다 버렸으면 좋았을 거 같아요. 현장에 발자국이 남았던 데다 부츠에 핏자국이 있었거든요.” 페리 교수는 그를 두고 “학교에서 지리 숙제를 발표하는 것 같은 말투로 감정 없이 살인을 설명했다. 다른 사람이 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느냐에만 관심이 있는 이기적인 포식자 같았다”라고 묘사했다. 소시오패스는 모두 강력범인가 “소시오패스는 ‘양심 없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잔혹한 범죄자들에 한해 적용하는 것은 편협한 해석이죠. 뉴스만 봐도 양심도, 죄책감도 없고 자신만 생각하며 행동하는 각계각층의 소시오패스가 매일 등장하지 않나요? 주위에도 널려 있는 거죠.”(심영섭 심리학 박사·영화평론가) 하버드대 의대 임상강사이자 심리학자인 마사 스타우트 씨는 전체 인구의 4%가 소시오패스라고 주장했다. 전체 인구의 4%인 만큼 교도소에 소시오패스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 정신분석학계에 따르면 미국 내에 수감된 수형자들 중 평균 20% 안팎만이 소시오패스다. 그렇다면 나머지 소시오패스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스타우트 씨는 “우리는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폭력적인 범죄자 소시오패스보다 더 많은 ‘비폭력적 소시오패스’의 존재를 알지 못하며 알아보지도 못한다”라고 했다. 소시오패스는 강력범죄를 일으키는 심 군과 같은 유형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생해 살아가는 소시오패스, 사회적 지위나 자신의 카리스마를 악용하는 지능형 소시오패스 등으로 나뉜다. 살인자 소시오패스와 후배의 공을 상습적으로 채가면서도 상사에게는 아부하며 자신의 일처리 능력을 자랑하는 직장 동료는 언뜻 전혀 다른 유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심이 없고 남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본질은 똑같은 소시오패스라는 것이 스타우트 씨의 설명이다. 문제는 범죄자 소시오패스는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커밍아웃’을 하게 돼 격리되는 반면 지능형 소시오패스들은 정체를 숨기고 사회 곳곳에 숨어 양심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데 있다. 소시오패스 중 자신의 실제 모습을 숨기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많아 피해를 예상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심 군 역시 주위에서 칭찬이 쏟아질 정도로 본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스타우트 씨의 저서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에는 자신의 모습을 숨긴 뒤 성공한 소시오패스인 스킵(가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시절 폭죽을 개구리 입에 넣어 개구리를 터뜨리며 노는 일을 즐겼던 스킵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냉철하며 자신의 악행으로 타인이 놀라거나 무력해지는 것을 즐기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뒤 사람들을 이용하는 뛰어난 능력을 악용해 광산용 폭파 장비 업체에 입사해 초고속으로 최고경영자(CEO)가 되는가 하면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후배 직원을 성추행하려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팔을 부러뜨리고 주가 조작 등 사기 혐의로 증권거래위원회에 고소당했지만 특유의 술수로 협상해 문제를 해결한다. 일부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조직원 거의 모두는 그가 사람을 이용하는 데 능숙하고 멋진 모습으로 치장한 소시오패스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용당한다. 한 심리학자는 “직위를 이용해 인턴 엉덩이를 만진 뒤 뉘우치기는커녕 교묘한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는 전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 씨, 29만 원밖에 없다며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동정심에 호소한 전두환 전 대통령도 넓은 범위에서 소시오패스”라며 “그나마 이들은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소시오패스 커밍아웃’을 한 셈이지만 여전히 정재계 등 사회 유력 분야에 똑똑한 소시오패스들이 숨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고, 또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정체를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방법은 없다 최근 인기를 끈 드라마와 영화에는 ‘소시오패스 캐릭터’가 꼭 등장한다. 드라마 ‘야왕’의 주다해(수애 분), ‘돈의 화신’ 지세광(박상민 분), ‘추적자’ 강동윤(김상중 분), ‘상어’ 조상국(이정길 분),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민준국(정웅인 분), 영화 ‘화차’의 차경선(김민희 분) 등 각계각층의 소시오패스 캐릭터는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영상물 속 소시오패스들은 날이 갈수록 악독해지고 지능적으로 변하고 있고, 이런 강한 캐릭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일조한다. 문화평론가 정석희 씨는 “작가들이 스토리를 창작하는 데 있어 한계에 부닥치면서 극단적인 캐릭터를 창조해 내세우는 면도 있다”면서도 “드라마가 일부나마 현실을 반영한다고 볼 때 실제로 우리 주변 곳곳에 드라마에서처럼 숨어서 악행을 저지르는 소시오패스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소시오패스가 늘어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없을까. 페리 교수는 레온이 소시오패스가 된 계기를 추적하며 그의 어머니가 레온이 1세도 되기 전 레온을 어두운 아파트에 혼자 방치한 채 산책을 나갔던 점을 발견했다. 레온은 울며 몇 차례 엄마를 찾았지만 어떤 감정을 표현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방치가 이어지면서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끼는 뇌 영역이 발달하는 데 필요한 자극을 받지 못하면서 소시오패스로 성장하게 됐다. 페리는 “1세 이전의 양육 태도가 소시오패스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좌우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상당수 정신과 전문의들은 소시오패스가 형성되는 데 선천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들의 본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양심을 키울 수 있는 의학적 도구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을 “이건 좋은 행동이고, 이건 나쁜 행동”이라는 식의 반복적인 교육을 통해 학습시킨다면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석한 정신과 전문의는 “소시오패스는 스스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억지로 끌려서 병원에 와도 변화에 대한 동기가 부족해 치료가 매우 어렵다”라며 “소시오패스의 특성을 잘 간파한 뒤 이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게끔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 거짓말-동정심 유발 세번 넘어가면 일단 의심 ▼ 소시오패스 어떻게 알 수 있나반도체 회사에 근무하는 한모 씨(25)는 팀장만 보면 신경이 곤두선다. 팀장 김모 씨(37)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한 씨를 타박한다. 작은 실수를 해도 동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심한 욕설과 함께 “짐을 싸서 나가라” “팀에 쓸데없는 놈”이라는 등의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김 씨는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다른 ‘가면’을 쓰기도 한다. 신입사원에게는 천사 같은 얼굴로 “어디 불편한 일은 없느냐?” “힘든 일 있으면 털어 놓으라”며 자상하게 대한다. 신입사원의 직무만족도 평가가 팀장의 근무평정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인사실장이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 한 씨에게 ‘무능하다’고 욕설을 퍼붓다가도 인사담당 간부에게는 “이렇게 훌륭한 사원들을 주셔서 감사하다”며 아부하기 바쁘다. 가식적인 웃음과 말투에 한 씨는 소름이 끼친다. 김 팀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위를 악용하는 ‘지능형 소시오패스’다. 이처럼 ‘소시오패스’는 일상생활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를 괴롭히는 직장상사부터 가까운 이웃까지 교묘하게 숨어 있다. 우리 주변에 숨은 소시오패스에 대처할 방법은 없는 걸까. 심리학자 마사 스타우트 씨는 ‘일상에서 소시오패스에 대처하는 13가지 규칙’을 제안했다. 스타우트 씨에 따르면 소시오패스를 알기 위해선 ‘죄책감이나 양심이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상대방이 세 번 이상 거짓말을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한다. 거짓말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그 이상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때부터 당신을 만만하게 본 소시오패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높다. 소시오패스는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 아첨으로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그의 칭찬이 진심인지를 의심해야 한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범죄나 악행, 거짓말을 들키면 동정심에 호소해 범죄를 숨기려 한다. ‘악어의 눈물’에 속지 말고, 그의 범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스타우트 씨는 조언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소시오패스 중 상당수가 살인 강간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고 철저히 평범하게 위장하고 있어 자세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국처럼 각 직장이나 지역구마다 심리상담사를 배치해 소시오패스를 발견했을 때 전문상담사에게 연결해주는 방법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성연우 인턴기자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 201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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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무실한 공익신고자보호법

    현행 공익신고자보호법(2011년 9월 시행)에는 내부고발(공익신고)을 했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해임 파면 등의 불이익 처분을 받은 조직원에 대한 보호조치 조항이 포함돼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불이익을 당한 공익신고자가 보호조치 신청을 하면 내부고발에 따른 불이익 처분이 맞는지를 판단한 뒤 해당 조직에 해임 등의 징계를 철회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보호조치는 공익신고자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상징적 결정에 그치고 있다. 공익신고자에 대한 보호조치 결정서를 받은 조직은 조직 기밀이 조직원에 의해 새나가는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고 조직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부분 권익위를 상대로 보호조치 취소 소송을 제기한다. 해임 파면 등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신고자가 권익위의 승소만을 기다리다 지쳐 스스로 조직에서 나가게끔 합법적으로 보복하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실제로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시행된 뒤 권익위가 보호조치를 결정한 것은 5건. 이 중 조직에서 보호조치 취소 소송을 제기한 것은 4건에 달했다. 대부분의 내부고발자가 공익신고 이후 해임·파면 등의 심각한 불이익을 받고 있어 보호조치가 시급하지만 보호조치 결정이 곧 소송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어서 사실상 공익신고자가 신고 이후 보호받을 방법이 없는 셈이다. 스스로 나갈 때까지 KT 직원이었던 이해관 씨는 ‘KT가 소비자를 기만했다’며 지난해 4월 권익위에 신고했다. KT는 제주도가 최종 후보로 오른 세계 7대 경관 선정 이벤트에서 2010∼2011년 전화 투표 통신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씨는 KT가 국내전송망을 사용해 전화 투표를 했는데도 국제전화인 것처럼 소비자들을 속여 국제전화요금을 부과한 의혹이 있다며 이를 신고했다. 그 후폭풍은 거셌다. 이 씨는 그해 5월 경기 안양 집에서 3시간여 떨어진 가평 지사로 전보조치 됐다. 권익위는 이 씨의 보호조치 신청을 받아들여 전보조치 철회를 권고했지만 KT는 취소 소송을 냈다. 행정소송을 제기한다고 해서 보호조치 결정의 효력이 상실되는 건 아니지만 KT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12월에는 이 씨를 해임했다. 권익위는 해임 철회를 요구하는 2차 보호조치 결정으로 대응했다. KT는 이 조치에 대해서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씨는 “보호조치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누가 이기나 보자’는 듯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더 반복될지 모르겠다”며 “KT는 스스로 나갈 때까지 소송으로 보복하려 한다”고 했다. 현재 민간 및 공공 부문 공익신고자를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공익신고자보호법에는 해당 조직이 보호조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소송이 끝날 때까지는 이행강제금이나 과태료 등을 부과하는 식으로 제재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 행정소송에서 권익위가 승소해 보호조치가 유효하다는 확정판결이 나야 보호조치를 강제할 수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현행법으로는 조직이 양심과 윤리에 따라 공익신고자에 대한 징계조치를 철회하도록 바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법조인만 신고하라 2007년 하남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었던 박동건 씨는 하남시장 주민소환투표 진행 과정에서 투표 청구 서명부가 조작된 사실을 발견했다. 박 씨는 시 선관위 담당자가 이 사실을 은폐·묵인하려 한다며 이를 폭로했다. 이 제보로 박 씨는 타 지역으로 전보조치됐다. 권익위는 당시 부패방지법에 근거해 박 씨에 대한 신분보장조치를 해줄 것을 선관위에 권고했다. 이에 불복해 선관위가 제기한 소송에서 권익위는 1심에서는 이겼지만 2009년 2심에서 패소했고 사건은 이후 4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2심 법원은 “공직자가 의도적으로 조작을 묵인했다기보다 단순 부주의에 따른 것이어서 부패행위로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권익위가 부패방지법을 적용해 박 씨에 대한 신분보장조치 결정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공익신고자의 제보 내용이 사실일 경우에만 공익신고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내부고발이 사실로 확인되지 않을 경우 어떠한 보호조치도 받을 수 없다는 것. 이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09년 3월 선관위는 권익위의 신분보장조치를 무시하고 박 씨를 파면했다. 박 씨는 선관위를 상대로 복직소송을 해 승소한 뒤 지난해 4월 복직했지만 선관위는 다음 달 또다시 박 씨를 해임했다. 권익위와 선관위 간의 소송이 대법원에 묶여 결론이 안 나는 사이 박 씨는 4년 넘게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류하경 변호사는 “공익신고자는 신고 내용이 법원에서 유죄로 선고될 거라는 100%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신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박 씨 사건 판결은 결국 공익신고자가 모든 법적 판단을 다 한 뒤에 신고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법 지식이 풍부한 법조인이 아닌 이상 내부고발을 할 수 없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180개에 속해야 산다 현재 공익신고자보호법에는 공익침해행위 대상 법률이 농산물품질관리법, 식품위생법 등 180개로 한정돼 있다. 이를 두고 공익신고로 인정되는 범위가 너무 좁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해관 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보호조치 취소 소송에서 KT는 “권익위에 신고된 내용을 공정거래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가 2차 조사한 결과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으로 방통위로부터 과태료 350만 원을 부과하는 데 그쳤다. 전기통신사업법은 공익신고자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법률 180개에 속하지 않으므로 해당 신고는 공익신고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올해 5월 법조문을 그대로 적용한 원고 측 주장을 받아들여 KT의 손을 들어줬다. 김형태 서울시 교육의원도 양천고 교사로 재직하던 2008년 양천고 재단인 상록학원 이사장과 재단의 공사비 부풀리기 등의 비리를 공익신고 했다가 파면당했다. 그러나 사립학교가 부패방지법이 적용되는 공공기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 의원은 당시 신분보장조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도 사립학교법이 180개 법률 안에 속하지 않아 김 의원의 신고는 공익신고로 인정받을 수 없다. 결국 그는 파면 상태에서 개인이 행정소송을 거는 방법으로 재단과 최근까지 긴 싸움을 벌이다가 어럽게 승소했다. 공익신고 당시 신고자는 대부분 관련 신고 내용이 180개 법률에 해당한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고한다. 현행법 하에서는 법원이 이 같은 보수적 선고를 할 수밖에 없어 내부고발을 위축시키고 법의 입법취지도 살리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지문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 부대표는 “공익신고자 보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만큼 조사 결과 공익신고자의 신고 내용이 180개 법률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법원이 법을 폭넓게 해석해 공익신고로 인정해야 내부고발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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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운상가 녹지축 백지화… 서울시 1000억 날릴판

    서울시가 종로 세운상가군(세운상가∼진양상가)을 모두 철거하지 않고 리모델링하는 방식으로 개발하기로 방침을 바꾸면서 사전 투자한 1000억 원가량을 날릴 처지에 놓였다. 시는 오세훈 시장 시절인 2009년 현대상가를 비롯해 세운상가군 8개동을 모두 철거해 1km 구간을 도심녹지축인 ‘그린웨이’로 조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시는 현대상가를 철거하고 토지와 영업권을 보상한 다음 해당 용지(3748m²)에 세운초록띠공원을 만들었다. 시는 이를 위해 968억 원을 썼다. 시는 나머지도 철거한 뒤 고층빌딩을 건설하는 등 재개발을 통해 얻은 수익으로 사업비를 회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와 지역 주민 반발로 개발이 지체되면서 서울시는 최근 세운상가군을 철거하지 않고 리모델링하는 것으로 계획을 대폭 축소했다. 이에 따라 선 투자금인 968억 원을 회수할 방법이 없어진 것. 현재 시는 세운초록띠공원을 임시로 벼 밀 보리 농사를 짓는 데 활용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연말까지 사업비 회수 및 공원 활용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며 “계획 변경으로 사업비 회수가 어렵다고 해도 도심에 공원을 마련한 것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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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권]서울시 인권침해 무료 법률 서비스

    서울시는 성별, 종교, 나이, 장애 등을 이유로 인권침해를 당한 시민들을 위해 7월부터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낮 12시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1층 다산플라자에서 ‘인권침해 무료 법률 상담서비스’를 한다고 30일 밝혔다. 상담실에는 서울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위원이거나 인권 관련 공익활동 경력이 있는 변호사 19명 중 1명이 매주 돌아가며 배치된다. 상담을 원하는 시민은 전화(02-2133-6378∼9) 또는 시 법무행정서비스(legal.seoul.go.kr)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하면 된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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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권]한국의료진 ‘황금의 손’ 가졌네요

    18일 서울 강서구의 관절전문병원 웰튼병원. 정형외과 전문의가 치료보조용 신발을 신겨 주려고 코로베이니코프 코바 니나 씨(53·여·러시아)의 오른쪽 발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니나 씨와 그의 남편은 곧게 펴진 엄지발가락이 드러나자 환하게 웃었다. 무지외반증(엄지발가락이 휘는 증상)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던 니나 씨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사는 니나 씨는 남편과 함께 6월 8일 이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이들은 의료기술이 우수한 반면 의료비가 저렴하고 비행시간도 3시간에 불과해 한국을 찾았다고 밝혔다. 니나 씨는 “의료진이 친척같이 대해준다. 한국 의료진은 모든 병을 고치는 ‘황금 손’을 가진 것 같다. 러시아에 돌아가면 한국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내 병원에 외국인 환자가 있는 모습은 이 병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의료관광을 목적으로 서울을 찾는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병원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15만5672명. 이 중 9만6646명이 서울시내 병원을 찾았다. 서울시내 병원을 찾은 외국인 환자 수는 2010년 5만490명이었지만 2년 만에 배 가까이로 증가하는 등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 환자 상당수는 시내 25개 자치구 중 피부과·성형외과 500여 개가 몰려 있는 강남구, 한의원 및 건강검진이 가능한 병원이 밀집한 중구에 몰린다. 지난해 강남구에는 3만4135명, 중구에는 1만700명의 외국인 환자가 찾았다. 이에 비해 강서구는 후발주자지만 인천국제공항에서 가깝고 척추·관절 특화 병원이 많은 것이 장점이다. 이 덕분에 강서구는 중구, 강남구의 뒤를 이어 서울 의료관광의 대표 자치구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려 노력하고 있다. 중구와 강서구는 중소기업청에서 의료관광특구 지정을 받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중구는 명동·충무로 일원 56만 m²를 ‘중구 해피 메디컬 투어리즘 특구’로 지정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다음 달 말에는 5개 국어로 된 의료관광 홈페이지도 연다. 강서구도 척추·관절·여성전문 병원 등 보건복지부에 외국인 환자 유치 의료기관으로 등록한 병원 35개가 몰려 있는 강서로·공항로 일원 200만 m²를 의료문화관광특구 지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중소기업청에 낼 계획이다. 강서구는 베트남, 태국,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19명에게 의료 관련 교육을 한 뒤 올해부터 관내 병원에 국제 간병인으로 배치했다. 강서구 관계자는 “의료관광 특성상 회복 기간에 둘러볼 근거리 관광지 확보에 주력하겠다”며 “인근에 유명 관광지가 많은 중구와 차별화해 강서구는 전통시장 투어 등 생활 밀착형 프로그램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남구는 압구정동 강남관광정보센터 1층에 자리한 메디컬투어센터를 따로 만들고 있다. 이 센터는 2일부터 문을 열 예정이다. 이 센터에는 강남구보건소 직원과 외국어 능통자가 상주하며 성형 시뮬레이션 등의 서비스와 의료관광 정보를 제공한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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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권]서울시내 모든 국공립 어린이집, 7월부터 자정까지 아이 봐준다

    7월 1일부터 서울시내 모든 국공립어린이집에 자정까지 아이를 맡길 수 있다. 서울시는 690개 국공립어린이집 중 405곳(58.7%)에서만 실시되던 시간 연장 보육서비스를 다음 달 1일부터 국공립어린이집 전체로 확대한다고 27일 밝혔다. 연장 보육의 경우 부모들은 영유아를 월 60시간까지 무상으로 맡길 수 있다. 60시간이 넘을 경우 초과 시간당 2700원을 내면 된다. 시는 시간 연장 보육교사를 채용하는 어린이집에는 인건비의 80%를, 보육교사가 연장 근무를 하는 어린이집에는 한 달 수당 40만 원을 지원한다. 시는 어린이집이 연장 보육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매월 운영실적을 파악하고 학부모를 대상으로 조사도 할 예정이다. 시간 연장 보육을 하지 않으면 1회 적발 시 과태료 100만 원을 부과한다. 시는 현재 시내 전체 어린이집 6538곳 중 시간 연장 보육시설로 지정된 곳이 1505곳(23%)에 불과한 만큼 민간어린이집 아동도 연장 보육 시간에 국공립어린이집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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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권]도봉산역 광역환승센터 내주 개관

    의정부 양주 동두천 등 경기 동북부 지역 주민들이 승용차나 자전거를 타고 도봉산역까지 온 뒤 대중교통수단으로 도심에 갈 수 있도록 ‘도봉산역 광역환승센터’가 다음 달 1일 문을 연다. 센터는 지하 2층∼지상 4층, 1만6597m² 규모로 주차장 364면과 285대 규모의 자전거보관소, 환승대기공간 등이 갖춰져 있다. 경기 동북부 주민들은 이곳에 승용차나 자전거를 대놓은 뒤 센터와 바로 연결되는 도봉산역(1, 7호선)이나 환승버스정류장을 이용하면 된다. 버스정류장에는 140번, 150번, 160번 등 서울버스 3개 노선과 10번, 10-1번, 39번, 39-1번, 39-4번, 48번 등 경기버스 6개 노선이 지난다.}

    • 201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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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권]‘한강 워터파크’ 28일 다같이 문연다

    한강공원 야외수영장 6곳(뚝섬·여의도·광나루·망원·잠실·잠원)과 난지 강변물놀이장이 28일 개장한다. 이들 수영장은 8월 25일까지 쉬는 날 없이 문을 연다. 이 수영장 및 물놀이장 7곳은 저마다 다른 시설을 갖고 있어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뚝섬에는 튜브를 타고 흐르는 물을 따라가는 유수풀(길이 450m)과 4m 높이에서 한꺼번에 물이 쏟아지는 아쿠아링이 있다. 여의도에는 아쿠아링과 함께 물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터널이 있다. 잠실에는 어린이수영장 양 끝에 터널 형태로 물줄기를 내뿜는 분수가 설치돼 있다. 난지 강변물놀이장에는 최고 분사 높이가 10m인 분수 노즐 113개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갖춘 음악분수가 있다. 수영장과 물놀이장에는 모두 흐르는 물을 타고 미끄러지며 내려올 수 있는 시설인 ‘에어바운스’가 있다. 에어바운스는 1회 이용에 500원을 내야 한다. 물놀이장을 제외한 6개 수영장에서는 반드시 수영모(야구모자도 가능)를 쓰고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 수영장 내에서 수영모와 수영복, 튜브, 비치볼 등을 판매하지만 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물놀이장에서는 수영복 대신 편한 옷을 입어도 되며 수영모를 쓰지 않아도 된다. 선베드는 종일 1만 원, 반일(4시간 기준) 5000원에 빌릴 수 있다. 파라솔은 선착순으로 무료로 빌려준다. 공간이 있으면 개인 파라솔이나 차양막을 설치해도 된다. 샤워실과 탈의실은 무료지만 보관함을 사용하려면 수영장 및 물놀이장에 따라 1000∼3000원을 내야 한다. 주류를 제외한 음식물은 수영장 안으로 가져갈 수 있다. 수영장 내에도 음식을 파는 시설이 있다. 이용요금은 수영장은 어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이며 물놀이장은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6세 미만은 무료다. 이용시간은 오전 9시∼오후 8시. 주차시설은 있지만 성수기에는 오전 9시면 주차장이 꽉 차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교통편 등 자세한 문의는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홈페이지(hangang.seoul.go.kr)나 한강사업본부 공원기획과(02-3780-0658)로 하면 된다. 강남구 양재천 물놀이장도 29일 개장해 8월 25일까지 운영한다. 이 물놀이장은 길이 140m, 폭 10∼15m, 평균 수심 50cm로 어린이들이 놀기에 좋다. 탈의실은 있지만 샤워실은 없다. 수영복 대신 편한 옷을 입어도 된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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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녀노소, 테마 찾아 종로로… 2040, 클럽 찾아 홍대로

    일요일인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지하철 종각역 4번 출구. 보신각부터 시작되는 종로 번화가와 가장 인접한 이 출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부부, 고교생, 40대 남녀, 노인 등 전 연령층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서울 도심의 종로 상권이 예전보다 많이 쇠퇴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날 종각역 종로3가역 등 종로1·2·3·4가동 일대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여전히 서울의 대표 상권임을 보여줬다.○ 강남 누른 ‘종로스타일’동아일보는 한국스마트카드사와 함께 주말 서울시민의 버스 마을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 이용 현황을 빅테이터 분석 기법으로 조사해봤다. 기준이 된 날은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과 다음 날인 28일 일요일. 조사 결과 주말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장 많이 하차한 지역은 전통 상권인 종로1·2·3·4가동 일대였다. 단일 행정동인 종로1·2·3·4가동에는 지하철 종각역 종로3가역 및 광화문 일대 버스정류장 등이 있다. 이 일대는 토요일(24시간 기준) 하루 15만3607명이 몰렸다. 토요일 2위인 강남 대표 상권 역삼1동(강남역 역삼역, 13만9671명)보다 1만3936명이 많았다. 3위는 서울역이 있어 주말 아침 열차를 타려는 이들이 몰리는 회현동(회현역 서울역·10만114명)이었다.일요일에도 종로1·2·3·4가동 일대에 가장 많은 인파(13만716명)가 모였다. 2위는 역삼1동(9만2130명)으로 토요일보다 종로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토·일요일에 종로 일대에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은 이 지역 상권과 더불어 청계천 및 서울광장, 광화문광장에 나들이 나오는 가족과 연인들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전문가들은 종로가 여전히 강남 상권과 명동을 누르고 주말 유동인구를 가장 많이 흡수하는 이유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상권 특유의 구조를 꼽는다. 종로에는 젊은층이 주로 모이는 보신각∼종로2가 사거리 유흥 상권, 전통문화가 있는 인사동 상권, 가족이 선호하는 청계천, 노인 집결지인 탑골공원 종묘 낙원상가 등 모든 세대를 만족시키는 공간이 모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상헌 한국창업경영연구소 소장은 “문화 자연 전통 역사 유흥 등 모든 테마의 공간이 모여 있어 선택의 폭이 넓은 종로는 전국 어디에도 없는 상권”이라며 “지하철 1, 3, 5호선과 버스 노선이 집중되는 지역이어서 접근성 역시 다른 상권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우’ 홍익대, ‘형님’ 신촌 제쳐지하철역 한 정거장 거리인 신촌과 홍익대 앞은 서울 서북권 최대 상권 자리를 두고 20여 년간 경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조사 결과 가장 ‘핫’한 상권이 형성되는 토요일은 홍익대 앞이 신촌보다 한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토요일 서교동(홍대입구역)에서 하차한 시민은 9만4616명(전체 5위). 9만3985명이 하차한 신촌동(신촌역·전체 6위)보다 631명이 많았다. 홍익대 앞은 토요일 오후 8시∼밤 12시에 몰린 인원이 1만8721명으로 1만1193명이 찾은 신촌은 물론이고 시내 다른 지역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해 대표적 ‘밤의 상권’임을 증명했다.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된 1980년대에 싹을 틔워 199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홍익대 앞이 30년 만에 신촌을 추월한 것. 22일 토요일 저녁 홍대입구역 9번 출구는 줄을 서서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북적였다. 홍대입구역에서 홍익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서교로 일대는 10, 20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요 리믹스 클럽과 인근 이면도로의 고급 레스토랑 밀집지역에서는 30, 40대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마포구 관계자는 “홍익대 상권 형성기에 10, 20대를 보낸 현재의 30, 40대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홍익대를 찾는 것이 신촌을 추월한 비결로 보인다”고 했다.홍익대 상권에는 개성이 넘치고 독특한 일본식 선술집, 커피숍 등 30, 40대의 고급 취향을 만족시키는 작은 가게가 많아 프랜차이즈 가게가 장악한 여타 상권과 차별화된다. ○ 강남의 다크호스 반포4동토·일요일 홍익대 앞, 신촌을 모두 제치고 하차 인원 전체 4위를 차지한 다크호스도 있었다. 지하철 3·7호선 고속터미널역이 있는 반포4동이다. 반포4동은 토요일(4위) 9만6013명, 일요일(4위) 7만8115명이 몰려 강남 상권 중 2위를 차지했다.23일 일요일에 찾은 반포4동 일대는 의외로 한적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속버스터미널 이용자였다. 하지만 지하로 들어가면 반포4동이 4위인 이유를 알 수 있다. 고속터미널역과 연계돼 있는 3만1566m²(약 9500평), 총 길이 880m의 지하도 상가에 649개의 가게가 입점해 있다. 가게 대부분은 1만 원 안팎의 티셔츠 등 저렴한 상품을 취급해 부담 없이 쇼핑할 수 있다. 강남고속터미널지하쇼핑몰 나정용 이사는 “지하도에 형성된 쇼핑몰 중 서울 최대 규모로 주말 하루 최대 30만 명이 몰린다”고 말했다. 고속터미널역과 이어지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도 주말 하루 20만 명이 몰린다. 이 점포는 전국 백화점 점포별 매출 순위에서 롯데백화점 본점에 이어 매년 2위를 차지하는 등 반포4동을 다크호스로 만드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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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일 아침엔 학원가로… 저녁엔 공연보러 홍대거리로

    22일 오전 7시 30분.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토요일 아침시간이지만 서울 동작구 노량진1동 노량진역 풍경은 달랐다. 노량진 육교로 이어지는 출구에서는 전동차가 도착할 때마다 가방을 멘 청소년들이 바쁜 걸음으로 뛰어나왔다. 황소은 양(18·고3)은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세 시간 동안 진행되는 단과학원 수학 수업을 들으러 노량진에 온다. 황 양은 “수업 전에 자습을 하기 위해 오전 7시∼7시 30분에는 노량진역에 도착한다”고 했다. 육교에서 6년째 김밥을 파는 박종훈 씨(56)는 “토요일 새벽부터 청소년들이 아침식사로 김밥을 사러 오는데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주말 아침시간(오전 6∼9시) 청소년들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가장 많이 하차한 상위 10개 지역 중 토요일 네 곳, 일요일 세 곳이 학원가였다. 학원가 중 토요일 아침시간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2위를 차지한 서초3동(일요일 아침 4위) 일대였다. 서초3동은 대형 단과학원, 보습학원 등 크고 작은 학원 100여 곳이 밀집해 있어 강남구 대치2동 다음 가는 강남권 대표 학원가다. 4위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관련 단과학원이 몰려 있는 노량진1동(일요일 아침 7위)이었다. 강남구 대치2동은 토요일 아침, 평시(오전 9시∼오후 6시), 저녁시간(오후 6∼9시) 모두 시간대별 7, 5, 9위에 오르는 등 상위 10위에 들어 주말에도 청소년들이 끊임없이 찾는 학원의 메카임을 보여줬다. 일요일에도 아침시간과 평시에 모두 6위를 차지했다. 대치2·4동 일대는 은마아파트 사거리를 중심으로 2km 구간에 학원 831곳이 밀집해 있다. 토요일 아침시간 9위는 노원역이 있는 노원구 상계2동이었다. 토·일요일 모두 아침시간 청소년들이 많이 몰리는 곳 1위는 화양동(어린이대공원역), 일요일 아침시간 3위는 롯데월드가 있는 잠실6동(잠실역)으로 놀이공원이 있는 지역이었다. 청소년이 토·일요일 평시 및 저녁시간에 가장 많이 하차하는 지역은 홍익대 상권이 있는 서교동(홍대입구역)이었다. 22일 토요일 홍익대 앞 번화가에서 만난 기도희 양(17)은 “청소년에게 홍익대 앞만 한 곳이 없다. 콘서트에 가려면 5만 원 이상은 줘야 하는데 홍익대 앞에서는 무료 길거리 공연을 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전체 연령층에서 홍익대는 토요일 5위(일요일 7위), 신촌은 6위(일요일 6위)로 팽팽했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격차가 벌어졌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홍익대는 주말 평시 및 저녁시간을 통틀어 1위였지만 신촌은 토요일 평시 4위, 저녁시간 2위, 일요일 평시 4위, 저녁시간 3위에 그쳤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1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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