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종구

양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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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건강해야 100세까지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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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4-04-04~20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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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갑에 나간 첫 대회서 우승… 헬스 지도자로 인생 2막”[양종구의 100세 건강]

    조우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동협의회 부회장(60)은 지난해 코로나19가 터진 뒤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온 뒤 아들 현우 씨(26·연세대 체육과 대학원)의 조언에 따라 웨이트트레이닝 트레이너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미스터 연세 출신으로 각종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해 우승까지 한 현우 씨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운동하시는 아버지의 몸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보디빌딩 지도자 자격증 획득과 대회 출전을 권유했는데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했다. 조 부회장은 지난해 보디빌딩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올 3월부터 몸을 제대로 만들기 시작해 5월 말 열린 고양시장배 보디빌딩대회 마스터스 60세 이상부와 피지크에서 우승했고, 마스터스 그랑프리까지 차지했다. 국제보디빌딩연맹 마스터 자격증을 따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지도자를 할 수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운동 및 식단까지 관리해주는 멘토 역할을 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철봉 등으로 몸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복싱과 태권도, 유도, 검도도 했고 팔굽혀펴기, 스쾃 등 체중을 이용한 근육운동(보디 웨이트)을 평생 해왔다. 전문 운동선수는 아니었지만 몸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환갑 기념으로 대회에 나갔는데 첫 대회부터 우승할 줄은 몰랐다.” 항공사와 건설사, 정부기관 등 해외주재원으로만 20년 넘게 일한 조 부회장은 지난해부터 새 인생을 준비했다. 평생 운동을 즐겼고 아들이 2019년 미스터 연세를 준비하고 우승하는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보디빌딩 지도자에 관심이 많았다. 100세 시대를 맞아 자신의 운동 노하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는 “그냥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이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시니어를 위한 전문 트레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서울 목동 에스짐파리공원점과 인근 피트니스센터에서 프리랜서 PT(퍼스널 트레이닝)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60대 전 연령층을 지도한다. 어르신들에게는 자원봉사로 재능기부도 하고 있다. 대회 출전은 개인적인 동기부여이자 자극제이다. 평범한 사람도 도전해 열정을 가지고 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사실 아내가 ‘나이 들어서 뭐하는 짓이냐’며 대회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도전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이 든 사람도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 부회장은 6월 말 열린 월드스포츠탑모델쇼(WSTMS) 미디엄(키 177cm 이하) 부문에서 우승했다. 12일엔 WSTMS 우승자들이 벌인 대회에서 전 연령대를 통틀어 남자부 우승을 차지했다. 10월엔 미스터코리아 서울선발전, 12월엔 미스터코리아 대회까지 출전할 계획이다. 그는 “아시아는 물론 세계 대회에도 나갈 생각이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회 출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몸을 만들 땐 웨이트트레이닝을 주 6일 하루 1시간 30분씩 한다. 3일 하고 하루 쉬는 일정으로 몸을 3분할로 나누어 한다. 하루씩 하체, 가슴과 어깨, 등과 코어로 나눠서 운동한다. 격일로 유산소운동(1시간 달리거나 고정식 자전거 타기)을 해 지방도 태운다. 식단관리도 중요하다. 조 부회장은 ‘지속가능한 운동’을 강조하며 하루 3식을 4식으로 나눠 2식은 단백질과 채소 위주, 2식은 탄수화물 등이 포함된 일반식을 한다. 그는 “근육을 만들 때 탄수화물을 안 먹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일시적으론 가능하지만 평생 운동을 하려면 골고루 잘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70개국 이상을 돌아다닌 해외 전문가로 관광학 박사 학위까지 딴 조 부회장은 요즘 사는 게 즐겁다. 그는 “은퇴하며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준비할까 고민이 많았다. 평생 내가 좋아했던 운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는 트레이너로 사는 게 행복하다. 즐기며 돈도 번다. 일석삼조의 직업이다”고 했다. 조 부회장은 “노령일수록 근육이 중요하다. 40세가 넘으면 매년 근육이 1%씩 빠진다. 근육이 없으면 낙상 가능성이 높고 뼈도 쉽게 부러진다. 근육을 키우면 젊음도 돌아온다. 절대 늦었다는 때는 없다. 나이가 많아도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키우면 충분히 탄탄한 몸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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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너진 마음 일으켜 세운 운동…보디 프로필 덕에 자존감 올라가”[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뒤 마음이 무너졌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결국 나를 나락으로 이끌었고 자존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지속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심리상담까지 받았다. 그 때부터 몸을 움직였다.’ 오우진 초당대 항공서비스학과 교수(36)는 무너진 마음을 몸으로 일으켜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완전히 망가질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찾아왔어요.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몸을 써서라도 과거를 떨치려고 노력했죠. 몸이 피곤하면 생각이 좀 덜해지잖아요. 정신적 고통을 나누는 셈 치고 몸을 많이 움직였습니다. 비행이 없는 날은 하루 6시간 이상 몸을 움직였어요. 필라테스와 요가, 그리고 피트니스. 몸이 힘드니 먹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잠도 자기 시작했죠.” 대한항공 승무원이던 오 교수는 2016년 인간관계로 인한 상실감에 한동안 심리적 고통 속에 살아야 했지만 운동을 통해 잘 극복했다. “상실감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소의 반대쪽에 성취감을 높여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선택한 게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효과적이었죠.” 올 3월 초당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오 교수는 승무원으로 일하면서부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풀고 외모도 관리하기 위해 요가와 필라테스, 피트니스는 계속 해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체계적이고 집중해서 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순간 보디 프로필(Body Profile)을 찍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무너진 정신을 다잡기 위해 뭔가 제가 해낼 수 있는 결과물이 필요했어요. 인간관계, 사회 및 회사 생활에서는 제가 마음먹는다고 언제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잖아요. 거기서 통제력을 잃고 무력감을 느끼죠. 제 몸은 제가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몸을 드러내놓고 사진을 찍으려면 몸을 잘 만들어야 하죠. 개인 노력도 필요합니다.” 보디 프로필은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몸을 만든 다음, 몸매를 돋보이게 찍는 프로필 사진을 말한다. 2017년.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만들어 실행했고, 비행을 하면서도 하루 2시간이상 운동에 매달렸다. 운동은 필라테스와 요가 등 해오던 것을 함께 하면서 웨이트트레이닝의 비중을 높였다. 등과 가슴, 어깨, 팔에 하체 운동까지 골고루 했다. 어릴 때부터 상체에 비해 하체가 강했다. 그래서 더 잘하는 것에 집중해 상체 운동을 등한시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기 위해 상체 운동도 할 수 밖에 없었다. 벤치프레스와 푸시업. 처음엔 엄두도 못 냈지만 지금은 벤치프레스를 30kg 무게로 하고, 푸시업은 10개씩 3세트를 가볍게 한다. 3주가 지나자 체중이 1kg 늘었다. 골격근량이 1.7kg늘고 체지방량이 2kg 줄었다. 그는 “내 몸이 예전보다 더 단단하고 건강해져 보였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운동 시작 2개월 뒤 보디프로필을 찍었다. 만족스러웠다. “제 노력과 성취감을 사진에 담고 싶었죠. 두 달 동안 비행을 하면서도 닭가슴살(혹은 삶은 달걀)과, 토마토, 고구마만 먹으면서 운동을 했어요.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아닌 저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그게 사진이란 결과물로 나왔죠. 보디 프로필은 모든 게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을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는 최소한의 안간힘이었습니다.” 보디 프로필을 찍고 난 뒤 운동은 그의 삶이 됐다. “성취감을 얻었죠. 제가 목표로 한 것을 마무리 지었다는….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먹는 대로, 운동하는 대로 결과물은 나오게 돼 있죠. 작지만 이 성취감에 자존감이 올라갔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개선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 운동을 통해서 정신력도 키울 수 있었다. “운동은 한계와의 싸움이죠. 예를 들어 이너싸이(Inner Thigh) 머신을 이용해 내전근 운동을 할 때입니다. 처음엔 20kg으로 20회 1세트를 한 뒤 5kg씩 올려 1세트씩 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35kg까지 올려 4세트를 하다보면 15회 넘어 더 이상 두 다리를 모을 힘이 없어져요. 그래도 트레이너의 ‘할 수 있다’는 소리에 끝까지 다 해냅니다. 일종의 ‘강제 반복’입니다. 제가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뇌는 그만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명령을 거부하고 반복함으로써 뇌를 굴복시키게 됩니다. 안 될 것만 같았는데 해낸 것을 뇌는 인지하고 몸은 기억합니다. 체력도 정신력도 커지는 것이죠. 트레이너가 ‘할 수 있다’고 옆에서 거들어 주지만 막연히 ‘할 수 있다’를 외치는 게 아니라 제 몸으로 경험하며 증명해내면서 자존감도 올라갑니다.” 운동이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인 결과물은 오래전부터 나왔다. 특히 2007년 존 레이티 하버드메디컬스쿨 교수가 쓴 ‘불꽃: 운동과 뇌에 대한 혁명적인 신과학’(Spark: The Revolutionary New Science of Exercise and the Brain)이란 책이 나오면서 운동과 뇌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진행됐다. ‘운동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운동은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운동은 치매를 예방한다.’ ‘운동은 정신력을 키운다.’ …. 최근 보디 프로필을 찍는 게 일종의 트렌드가 됐고 일부에선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자신을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지나치게 몸을 만들려다가 오히려 몸을 망치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오 교수는 “몸을 망치면서까지 하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보디 프로필을 단순히 자기 과시용으로 폄훼할 필요는 없다. 보디 프로필이란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얻는 것도 많다”고 말했다. “보디 프로필을 찍는 과정에서 몸도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얻은 성취감, 자신감, 자기효능감을 통해 제가 원하던 튼튼한 마음도 만들었어요. 운동은 몸과 마음의 근력을 함께 향상시킵니다. 운동을 하면서 제가 중심이 돼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게 됐습니다. 비로소 제 삶의 주체자가 된 것입니다.” 오 교수는 특히 젊은이들이 보디 프로필을 찍는 것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왜 최근 젊은 친구들이 보디 프로필을 찍고 싶어 하는 지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취업이 힘들어지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속에서 작은 성취감이라도 스스로에게 느끼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자신에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메시지를 사진에 담고 싶은 마음을 조금 헤아려봅니다. 젊은이들이 보디 프로필을 통해 자기효능감도 올리고 자존감도 높이면서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오 교수는 2019년에도 보디 프로필을 찍었다. 그는 “보디 프로필 촬영하기 위해 노력한 경험이 고스란히 내 몸과 마음에 남아 있고,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나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고 했다. 그는 “운동은 변수가 적다. 투자한 만큼 결과로 나온다. 그만큼 통제력을 느낀다. 사회생활 등에서 느낀 무력감을 운동을 하면서 키운 통제력으로 상쇄 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만간 보디 프로필을 다시 한번 찍을 예정이다. 오 교수는 운동에 매료돼 생활체육지도자와 필라테스 자격증까지 획득했다. 지난해 터진 코로나19 탓에 항공사에서 5개월 쉬고 1개월 근무하는 순환근무 체제 때 쉬는 동안 그는 생활체육 지도자로 활동했다. 오 교수는 지난해 8월 세종대 호텔관광경영학과에서 ‘항공사 객실승무원의 생활체육 참여 정도가 직무성과에 미치는 영향: 신체적 자기지각과 자기효능감의 이중매개효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운동을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것이다. “운동이 없었다면 못 버텼을 겁니다. 이젠 운동을 평생 제 삶의 근간에 두고 살 겁니다. 지금도 뭔가 잘 안 풀리면 바로 운동하러 갑니다. 코로나19로 힘든 국민들도 운동으로 삶의 활력소를 찾길 바랍니다.” 오 교수는 마음이 무너진 뒤 운동으로 다시 일어선 경험담을 ‘바디 프로필로 올린 자존감, 마인드 & 바디 밸런스’란 책으로 엮었다. 전남 무안 집을 홈트레이닝 할 수 있게 꾸미고 운동을 생활화하고 있는 그는 ‘마바밸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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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릎 통증에 계단도 못 올랐는데…‘제대혈 줄기세포 수술’ 뒤 축구공도 ‘뻥’[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앗, 왜 그러지.” ‘축구광’ 황덕진 씨는 63세이던 2013년 오른쪽 무릎에 큰 통증을 느꼈다. 계단을 못 오를 정도였다. 공을 차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평생 이런 일이 없었다. 여기저기 지방 병원을 찾았지만 정확한 진단을 하지 못했다. “어느 병원에선 전혀 문제없으니 공을 차라고 했고, 어느 병원에선 절대 축구하지 말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중 2014년 초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국내에서 제대혈 줄기세포 무릎수술을 받는다는 신문 기사를 접했다. 퇴행성관절염으로 무릎이 아파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히딩크 감독이 수술을 받으면 걸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언론 보도를 본 뒤 송준섭 강남제이에스병원 원장을 찾았습니다. 퇴행성관절염으로 오른쪽 무릎 연골이 다 닳은 상태였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수술하면 축구할 수 있나요?’ 송 원장이 ‘6개월 뒤 축구할 수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수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14년 3월이었다. 제대혈 줄기세포 수술은 갓 태어난 아이 탯줄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배양해 아픈 무릎에 이식시킨다. 치과에서 충치를 제거하듯 없어지거나 찢어진 연골을 깨끗하게 걷어내고 무릎 골수에 구멍을 내서 줄기세포를 이식시킨다. 그럼 연골이 다시 생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근원세포인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체조직을 치유, 재생시키는 기능을 한다. 2014년 1월 수술한 히딩크 감독은 그해 말부터 카트 및 지팡이에 의지 하지 않고 골프를 칠 정도로 회복됐다. 황 씨는 수술하고 회복한 뒤 병원에서 제시한 레그 익스텐션과 레그 컬 등 무릎 주변 근육 강화 훈련에 집중했다. 경남 통영의 축구동호회인 통영 FC 소속인 그는 “축구를 하기 위해 재활전문가까지 찾았다. 재활을 잘 해야 다시 공을 찰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공을 드리블하며 좌우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무릎 주변 근육이 탄탄하지 않으면 통증이 올 것 같았다”고 했다. 정형외과 전문의들은 과거 MRI(자기공명촬영)가 없을 땐 허벅지 근육이 빠지면 관절염으로 진단했다. 연골이 닳아 관절염이 생기면 근육 생성이 안 되기 때문이다. 황 씨는 연골이 재생되면서 다시 근육을 키워 수술 1년 뒤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었다. 근육운동을 병행하며 주 2회 공을 찼다. “제에게 축구는 삶의 활력소입니다. 어릴 때 논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며 시간을 보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축구 덕에 회사에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 축구를 못한다는 것은 저에게 사형선고와도 같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하사관으로 군입대한 그는 한동안 축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를 마치고 대우그룹이 인수한 신아조선에 둥지를 튼 그는 사내 체육대회 때 축구선수로 참여하면서 다시 축구와 연을 맺게 됐다. “1977년이었습니다.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사내 체육대회를 했는데 제가 축구선수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풀백이었는데 오버래핑까지 하고 골까지 넣으니 뒤집어졌죠. 당시 조기축구에 가입해 매일 공을 찼습니다.” 축구동호회에서 이름이 알려지면서 주말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축구를 했다. 생활체육 축구계에서는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면 ‘간첩’으로 불릴 정도였다.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출신인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속한 로얄 FC 등 전국 유명 축구동호회와 친선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황 씨는 사실 술 때문에 무릎이 고장 났다. 그는 “회사에 다닐 때 영업부에 있다보니 술을 자주 마셨다. 매일 조기축구를 했는데 땀을 쫙 빼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고 했다. 그는 “축구하기 전날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축구하면서 땀을 쫙 빼면 되니까”라고 했다. 축구를 하고 나면 다시 술을 마셨다. 대부분 동호회축구 회원들이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 술을 마신 다음날 축구를 하면 피곤한 상태에서 무릎을 과하게 사용하게 돼 연골에 무리를 준다. 무릎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정형외과 전문의들은 “젊었을 때는 허벅지 및 무릎 주변 근육이 강해 버티지만 나이 들면서 근육이 약해지면서 연골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관절염이 오게 된다”고 한다. 축구를 오래 하기 위해선 무릎 주변 근육을 강화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병행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축구를 시작한 황 씨는 평생 축구를 하며 이를 인식했기에 재활에 투자를 많이 한 것이다. “솔직히 줄기세포 수술이 아니었다면 제가 축구를 다시 하지 못했을 겁니다. 연골이 새롭게 자랐기 때문에 과격한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송준섭 원장 때문에 제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수술도 중요하고 재활도 중요합니다. 전 축구를 다시 하기 위해 무릎 주변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습니다.” 송 원장은 “줄기세포 수술의 목표가 모든 운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연골을 재생시킴으로써 다양한 운동을 할 수 있다. 다만 수술 이후 축구 등 특정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주변 근육을 키우는 노력은 개인적으로 꼭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 원장은 히딩크 감독뿐만 아니라 ‘천하장사’ 장성우도 수술해 주목을 받았다. 고교시절 장성우는 ‘박리성 골관절염’으로 유명 대학병원에서 은퇴를 권유해 씨름을 포기할 뻔했다. 박리성 골관절염은 치료하지 않으면 지속적 통증과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청소년기에 발생하는 박리성 골관절염은 퇴행성관절염으로 조기 진행되는 원인이 될 수 있어 나이 들어 자칫 걷지도 못할 수도 있다. 운동을 해야 하는 선수에겐 치명적인 질병이다. 하지만 정성우는 제대혈 줄기세포 수술을 포함해 두 번에 걸친 수술 끝에 연골을 재생시켜 씨름을 계속할 수 있었고 천하장사까지 올랐다. 송 원장은 “무릎 연골 줄기세포 치료법은 획기적이다. 그동안 60세 이전에 퇴행성관절염이 오면 보통 65세까지 기다렸다 인공관절을 하라고 했다. 인공관절의 수명이 15년에서 20년이기 때문이다. 50대에 퇴행성관절염이 오면 10년 넘게 고생하다 인공관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줄기세포 치료법은 나이에 상관이 없다. 젊을수록 연골 재생이 더 잘 된다”고 말했다. 수술은 65세 이전까지는 언제든 해도 완치율이 높다. 70세 이후는 수술 후 회복기간이 길어진다. 황 씨는 2년 3개월 전에는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다. 헬스클럽에서 근육운동하다 허리를 삐끗했는데 무리하게 축구를 강행한 뒤 요추 4,5번 사이 디스크가 돌출한 것이다.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바로 수술했다. 그는 “병원에서 축구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축구를 포기할 순 없었다”고 했다. 수술한 뒤 다시 재활에 들어갔다. 황 씨는 “2년 넘게 허리 및 다리 근육 키우는 데 집중했다. 무릎 수술한 뒤 했듯 허리 주변 근력을 키워야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황 씨는 요즘 오전엔 피트니스센터에서 상하체 근육을 키우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 오후엔 걷고 달린다. 인조잔디축구장을 한바퀴씩 걷고 달리기를 번갈아 24바퀴를 달린다. 약 9km다. 그는 “축구를 하기 위해 마치 신앙처럼 운동하고 있다”고 했다. 축구를 다시 시작한 지 약 1개월이 된 그는 통영 FC가 주 2회 공을 차는데 이젠 주 1회만 참가하고 있다. 좋아하던 술도 꼭 필요할 경우 월 1회로 줄였다. 황 씨는 “주위에서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무릎에 이어 허리 수술까지 하고 축구를 하고 있으니…. 그래서 소문이 다 났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다 줄기세포 수술 받고 축구하고 있다고. 이 나이에 이렇게 다시 축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젠 절대 무리하지 않고 몸 상태 봐가며 천천히 공을 찰 생각이다”고 말했다. 그는 “관절염이 올 경우 무릎 수술이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근육운동으로 꾸준히 몸 관리해야 평생 공을 찰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통영=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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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종구의 100세 건강]“무릎 관절염 ‘아차’ 했지만… 수술-재활 덕 70세에도 축구”

    한국 나이 70세인 황덕진 씨는 2013년 오른쪽 무릎이 아파 평생 즐기던 축구를 못하게 됐다. 계단을 못 올라갈 정도로 통증이 심해 공을 차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2014년 초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거스 히딩크 전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 국내에서 제대혈 줄기세포 무릎수술을 받는다는 언론 보도를 본 뒤 송준섭 강남제이에스병원 원장을 찾았다. “검진을 했더니 퇴행성관절염으로 연골이 다 닳은 상태였다. 송 원장에게 수술을 하면 축구를 다시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바로 수술했다.” 2014년 3월이었다. 제대혈 줄기세포 수술은 갓 태어난 아이 탯줄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배양해 아픈 무릎에 이식시킨다. 치과에서 충치를 제거하듯 없어지거나 찢어진 연골을 깨끗하게 걷어내고 무릎 골수에 구멍을 내서 줄기세포를 이식시킨다. 그럼 연골이 다시 생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근원세포인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체조직을 치유, 재생시키는 기능을 한다. 황 씨는 수술하고 회복한 뒤 병원에서 제시한 무릎 주변 근육 강화 훈련에 집중했다. 경남 통영의 축구동호회인 통영 FC 소속인 그는 “축구를 하기 위해 재활전문가까지 찾았다. 재활을 잘해야 다시 공을 찰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공을 드리블하며 좌우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무릎 주변 근육이 탄탄하지 않으면 통증이 올 것 같았다”고 했다. 정형외과 전문의들은 과거 자기공명영상(MRI)이 없을 땐 허벅지 근육이 빠지면 관절염으로 진단했다. 연골이 닳아 관절염이 생기면 근육 생성이 안 되기 때문이다. 황 씨는 연골이 재생되면서 다시 근육을 키워 수술 1년 뒤 축구를 할 수 있었다. 근육운동을 병행하며 주 2회 공을 찼다. 황 씨는 2년 3개월 전에는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다. 헬스클럽에서 근육운동을 하다 허리를 삐끗했는데 무리하게 축구를 강행한 뒤 요추 4, 5번 사이 디스크가 돌출한 것이다.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바로 수술했다. 그는 “병원에서 축구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축구를 포기할 순 없었다”고 했다. 수술한 뒤 다시 재활에 들어갔다. 황 씨는 “2년 넘게 허리 및 다리 근육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허리 주변 근력을 키워야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황 씨는 사실 술 때문에 무릎이 고장 났다. 그는 “대우그룹산하 신아조선에 다닐 때 영업부에 있었다. 술을 자주 마셨다. 매일 조기축구를 하며 땀을 쫙 빼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고 했다. 그는 “축구하기 전날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축구하면서 땀을 쫙 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축구를 한 뒤 다시 술을 마셨다. 대부분 축구 동호회 회원들이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 술을 마신 다음 날 축구를 하면 피곤한 상태에서 무릎을 과하게 사용하게 돼 연골에 무리를 준다. 무릎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정형외과 전문의들은 “젊었을 때는 허벅지 및 무릎 주변 근육이 강해 버티지만 나이 들면서 근육이 약해지면서 연골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관절염이 오게 된다”고 한다. 축구를 오래 하기 위해선 무릎 주변 근육을 강화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병행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축구를 시작한 황 씨는 평생 축구를 하며 이를 인식했기에 재활에 투자를 많이 한 것이다. 황 씨는 요즘 오전엔 피트니스센터에서 상체와 하체 근육을 키우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 오후엔 걷고 달린다. 인조잔디축구장을 한 바퀴씩 걷고 달리기를 번갈아 24바퀴를 달린다. 약 9km다. 그는 “축구를 하기 위해 마치 신앙처럼 운동하고 있다”고 했다. 축구를 다시 시작한 지 약 1개월이 된 그는 통영 FC가 주 2회 공을 차는데 이젠 주 1회만 참가하고 있다. 좋아하던 술도 꼭 필요할 경우 월 1회로 줄였다. 황 씨는 “주변에서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 무릎에 이어 허리 수술까지 하고 축구를 하고 있으니…. 하지만 축구가 좋은 것을 어떡하나? 축구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젠 절대 무리하지 않고 몸 상태 봐가며 천천히 공을 찰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관절염이 올 경우 무릎 수술도 잘해야 하지만 근육운동으로 꾸준히 몸을 관리해야 평생 공을 찰 수 있다”고 강조했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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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에 빠진 남자 “자료수집에 20억…100살까지 공 차는게 목표”[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축구 자료수집가 이재형 씨(60)는 매주 공을 차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일요일인 4일에도 충북 제천에서 서울 동대문구60대축구단 상비군 소속으로 제천60대 팀하고 경기를 했다. “제가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어요. 집 뒤에 공터가 있었는데 동네 형 동생들과 매일 공을 차면서 놀았어요. 성북초교 다닐 때 아마추어 축구팀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죠. 인근에 홍익중과 경신중이 있었죠. 당시엔 속칭 뺑뺑이(추첨)로 중학교에 가는데 축구명문 경신중을 갔더라면 전 축구선수가 됐을 겁니다.” 이 씨는 홍익중을 가면서 축구를 사실상 그만 두게 됐다. 축구를 하지 못해 우울했다. 하교 때 매번 경신중 축구부 훈련 및 경기 모습을 1시간씩 보고 집으로 갔다. 축구를 못하는 대신,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 자료를 수집하게 됐다.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못하니 다른 것에 눈을 뜨게 됐죠. 축구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축구 저금통, 우표 등을 수집했습니다.” 그가 다시 축구를 시작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서울 숭인동 명우축구회를 만나면서다. 당시 조기축구회는 30대 청년부와 40대 장년부가 있었다. 27세에 가입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경기를 뛰지는 못했고 매일 훈련만 했다. “제가 열심히 했더니 조기회 홍보실장으로 임명했어요. 제가 대한민국 최초로 조기축구 신문도 만들었죠. 12페이지짜리 명우소식이란 신문을 1000부 찍어 회원들은 물론 상태팀 선수들에게 돌렸습니다.” 이 씨는 30대 때 종로구 대표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종로구에 15개 동호회 팀이 있었는데 전국대회를 나가려면 대표를 선발해야 했다. 그는 요즘 4개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동대문구60대축구단 상비군을 비롯해 용두축구회, 조이(JOY)축구단, 그리고 성북초교 선후축구회(성북초교 선배 후배 축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이축구단은 과거 축구선수 출신들 모임이다. 박경훈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비롯해 이태호 강동대 교수, 이흥실 김천 상무 단장, 전 할렐루야 선수 출신 김정희 씨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씨는 한 때 국가대표 출신들이 활약한 영서축구단도 만들었다. 영서축구단은 K4 서울 유나이티드로 바뀌었다. 이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집합이 금지되는 바람에 수도권에서 축구를 못해 지방 원정에 가는 팀을 따라가서 매주 축구를 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오기 전에는 주 3회 축구를 했어요. 주중에 1회, 토요일과 일요일. 지금은 주말에 1번밖에 축구를 못해 안타깝습니다.” 축구가 왜 좋을까? “축구를 하고 나면 보약을 몇 재는 먹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몸도 좋아지고 또 성취감도 있습니다. 제가 오른쪽 날개를 보는데 매 경기 골을 터뜨립니다. 공이 제 발끝을 떠나 골네트에 꽂히는 순간,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제가 조기축구 회원으로 평생 터뜨린 골이 3000골 정도 됩니다. 축구황제 펠레가 1200여골 넣었으니 제가 펠레보다 많이 넣었습니다. ㅎㅎ.” 매 경기 최소 2골을 터뜨린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선수 생활했던 감각이 아직 살아있다고 했다. 그는 매일 서울 집(성북구 보문동) 근처 낙산공원을 1시간씩 달린다. 체력이 없으면 축구를 못하기 때문이다. 축구는 하체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 조기회 룰에 따라 전후반 25분을 소화하려면 심폐 지구력도 있어야 한다. 그는 축구를 하면서 가끔 걸리는 감기 외에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다. 이 씨는 1996년 한국이 2002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면서 자료 수집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취미가 직업이 된 것이다. 월드컵 개최 기념으로 1997년 아크리스백화점에서 소장하고 있던 축구자료를 전시했다.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기념품 수준의 것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유물’이 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계기가 됐다.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 때 안정환의 골든 볼, 스페인과의 8강 승부차기 때 마지막 키커 홍명보가 찬 공을 각각 에콰도르와 이집트까지 날아가서 찾아왔다. 45개국을 돌아다니며 4만여 점을 모았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자료 구입비와 여행비에 썼다. 30년 넘게 약 20억 원을 썼는데도 아깝지 않다. 코로나 19가 사라지면 다시 축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해외로 떠날 계획이다. 사재를 털어 축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떠나지만 새신랑이 신혼여행 가듯 행복하기만 하단다. 참고로 그는 아직 솔로다. “전 100살까지 공을 차는 게 목표입니다. 축구를 하려면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소통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골을 차면 서로 몸을 부딪쳐야 합니다. 그 재미도 좋습니다. 그렇게 공을 차다보면 심신이 건강해집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그만 둘 순 없죠.” 그는 축구자료 수집가란 타이틀도 명예로 생각한다. “축구선수가 됐다면 축구자료를 수집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자료수집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축구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축구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는 축구 박물관을 짓는 게 꿈이다.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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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적 야심 채우다 건강 악화…달리고 난뒤 인생 제2막 열려” [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제15대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어요. 매번 2등에 그쳤습니다. 그 때까지 번 돈도 다 날렸지만 건강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갑상선과 전립선에 문제가 생겼고 체중도 늘어 각종 성인병 증세가 나타났죠.”최도열 국가발전정책연구원장(69)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뒤 2000년 중반쯤 김대중 대통령 주치의였던 허갑범 연세대 의대 교수(별세)를 찾아갔다. 1980년대 전국 청년대표로 고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최 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동교동계하고도 친했다. 그는 “허 교수께서 성인병엔 걸으면 좋고 달리면 더 좋다”고 했다. 그 때부터 마라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 무렵 1984년 제55회 동아마라톤 대회에서 국내 최초로 ‘마의 2시간 15분 벽’을 깬 이홍열 경희대 교수가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무료 마라톤 교실을 시작했다. “이홍열 교수가 마라톤 교실을 시작한 2000년 7월 12일 찾아가 달리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태권도도 했고 특공무술도 했기 때문에 초급반이 아닌 중급반에 갔죠. 그런데 웬걸. 달리는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 훈련 때 300m도 못가서 쓰러질 뻔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민주화 운동 할 때부터 끈기와 집념엔 자신이 있었다. 천천히 거리를 늘려갔다. 500m, 700m, 1km, 5km…. 결국 10km도 넘어 하프코스까지 달렸다. 이 교수는 “최 원장님이 처음엔 자세가 엉망이었지만 끈기와 집념이 대단했다. 바른 자세로 달리는 법을 알려줬더니 꾸준하게 노력해 지금은 엘리트 선수들만큼 자세가 아주 좋다”고 했다. 최 원장은 2003년 11월 열린 중앙마라톤에서 처음으로 42.195km 풀코스를 완주했다. 3시간 53분 53초. 개인 최고기록이다. 지금까지 50회 넘게 풀코스를 완주했지만 이 기록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다. 첫 풀코스 완주 이후 즐기면서 달리기 때문에 기록에는 연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면서부터 그의 하루는 운동으로 시작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그 자리에서 맨손체조로 몸을 일깨운다. 모든 관절을 돌려주고 스트레칭까지 마치고 발목 펌핑(아킬레스건을 톡톡 때려주는 동작)과 스쾃, 플랭크, 팔굽혀펴기까지 한다. 스쾃은 하루 100~200개, 팔굽혀펴기도 100개 넘게 한다. 그는 “발목 펌핑 양쪽 600개는 10km를 달리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22년을 관리하면서 달려서인지 아직 부상을 한번도 당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위해 즐겁게 달리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지 않는 것도 부상 방지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그는 매일 하루 3000보 이상 걷는다. 그리고 평일 2~3회 10~12km, 주말엔 15~20km를 달리고 있다. 한 달 평균 300km를 걷거나 달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대회가 없어졌지만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앞두고는 한달에 400km를 넘게 달린다. 달리면서 건강도 얻고 자신감도 얻었다. 건강검진에서 어떤 이상 증세도 나오지 않았고 체중도 10kg이 넘게 빠졌다. 한 때 85kg까지 나갔지만 지금은 70~72kg을 유지하고 있다.“풀코스를 달리고 나니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 졌어요. 한 때 정치적인 야심도 있었지만 이젠 다 부질없다는 생각입니다. 있는 재산 다 날리고 건강까지 악화됐죠.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건강한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게 행복 아닌가요?” 최 원장은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도 오르고 있다. 그는 “한 달에 한 두 번은 친구들과 산행을 한다. 새벽 일찍 나서 산을 오르고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 아니면 전날 저녁 10시에 출발해 새벽 3, 4시에 산행을 하는 무박 등반도 한다. 건강을 되찾은 뒤 어떤 산도 쉽게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설악산, 치악산 등 5대 악산을 포함해 지금까지 50개 넘는 명산을 올랐다.“달리기로 건강을 되찾았지만 과거 시골에서 맘대로 뛰어 놀면서 키운 체력이 뒷받침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중고교 시절 경북 성주의 시골에서 하루 왕복 12km 걸어서 학교를 다녔죠. 지금은 아이들이 체육을 즐길 수 없는 환경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 원장은 국회의원 낙선한 뒤에는 공부에 전념했다. 민국당 사무총장도 역임한 그는 2005년 2월 숭실대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박사학위를 받자 지상파 방송 뉴스에 나기도 했다. 이후 주로 학계에서 후진양성과 강연, 연구에 집중했다. 국가발전정책연구원은 국회 법인 1호로 국가 발전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대학교수 100여명이 비상근 근무하며 다양한 정책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사실 최 원장은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국회 입법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고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지고 해서 청년 대표로 합류하게 됐다. “정치는 완전히 포기하고 교육에 관심이 있어 대학 총장에 도전하려고 했죠. 총장을 하려면 부총장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기회 2번 있었지만 못했어요. 한번은 취임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10달 정도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2010년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다시 망가졌다. 힘겨웠지만 그동안 열심히 운동한 덕택에 잘 버텼고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최 원장은 “몸이 사고로 망가지니 회복하기 쉽지 않았다. 처음 달리듯 초보자의 자세로 천천히 거리를 늘려 원상 복귀했다”고 했다. 그는 요즘은 풀코스를 4시간 30분 안팎에 달린다. 2019년 풀코스를 달린 뒤 공식 대회를 달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레이스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울트라마라톤은 입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이홍열 교수가 42.195km 풀코스도 힘든데 울트라마라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풀코스 완주도 힘든데 굳이 50km 100km를 달릴 필요는 없다. 최 원장은 만 80세까지는 풀코스를 완주할 계획이다. 그는 “100세 시대,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는 잡아야 80대에 하프, 90대에 10km를 달릴 수 있지 않겠나”며 웃었다. 그에게 이제 달리기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또 다른 목표가 있을까? 철인3종(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하고 싶다고 했다. 수영 초보라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제가 실제로 나이를 먹기도 했지만 아직은 젊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이유도 제가 아직 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입니다. 정치적으로나 학자로 열심히 살았는데 뭐 크게 이룬 것은 없어요. 하지만 1년에 몇 번 피는 꽃도 있고 10년, 100년에 한 번 피는 꽃도 있잖아요. 전 즐겁게 재밌게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습니다. 이러다 한번은 꽃이 피지 않을까요?” 그는 달리며 또 다른 꿈도 꾸고 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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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배지 욕심에 건강도 악화… 달리는 지금이 가장 행복”[양종구의 100세 건강]

    최도열 국가발전정책연구원장(69)은 제15대,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면서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갑상샘과 전립샘에 문제가 생겼고 체중도 늘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주치의였던 허갑범 연세대 의대 교수(별세)를 찾아갔더니 “성인병엔 걸으면 좋고 달리면 더 좋다”는 얘기를 듣고 마라톤에 관심을 가졌다. 그 무렵 1984년 제55회 동아마라톤 대회에서 국내 최초로 ‘마의 2시간 15분 벽’을 깬 이홍열 경희대 교수가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무료 마라톤 교실을 시작했다. “2000년 7월 12일, 이홍열 교수가 마라톤 교실을 시작한 날 찾아가 달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 태권도도 했고 이후 특공무술도 했기 때문에 초급반이 아닌 중급반에 갔다. 그런데 웬걸. 달리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첫 훈련 때 300m도 못 가서 쓰러질 뻔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거리를 늘려갔다. 500m, 700m, 1km, 5km…. 결국 10km도 넘어 하프코스까지 달렸다. 이 교수는 “최 원장님이 처음엔 자세가 엉망이었지만 끈기와 집념이 대단했다. 바른 자세로 달리는 법을 알려줬더니 꾸준하게 노력해 지금은 엘리트 선수들만큼 자세가 아주 좋다”고 했다. 최 원장은 2003년 11월 열린 중앙마라톤에서 처음으로 42.195km 풀코스를 완주했다. 3시간 53분 53초. 개인 최고기록이다. 지금까지 50회 넘게 풀코스를 완주했지만 이 기록을 넘어서진 못하고 있다. 첫 풀코스 완주 이후 즐기면서 달리기 때문에 기록에는 연연하지 않고 있다. 달리면서부터 그의 하루는 운동으로 시작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그 자리에서 맨손체조로 몸을 일깨운다. 모든 관절을 돌려주고 스트레칭까지 마치고 발목 펌핑(아킬레스힘줄을 톡톡 때려주는 동작)과 스쾃, 플랭크, 팔굽혀펴기까지 한다. 스쾃은 하루 100∼200개, 팔굽혀펴기도 100개 넘게 한다. 출퇴근하며 매일 하루 3000보 이상 걷는다. 그리고 평일 2, 3회 10∼12km, 주말엔 15∼20km를 달리고 있다. 한 달 평균 300km를 걷거나 달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대회가 없어졌지만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앞두고는 한 달에 400km를 넘게 달린다. 달리면서 건강도 얻고 자신감도 얻었다. 건강검진에서 어떤 이상 증세도 나오지 않았고 체중도 10kg이 넘게 빠졌다. 한때 85kg까지 나갔지만 지금은 70∼72kg을 유지하고 있다. “풀코스를 달리고 나니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한때 정치적인 야심도 있었지만 다 부질없다. 있는 재산 다 날리고 건강까지 악화됐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건강하다. 이런 게 행복 아닌가.” 최 원장은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도 오르고 있다. 그는 “한 달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산행을 한다. 새벽 일찍 나서 산을 오르고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 아니면 전날 오후 10시에 출발해 새벽 3, 4시에 산행을 하는 무박 등반도 한다. 건강을 되찾은 뒤 어떤 산도 쉽게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설악산, 치악산 등 5대 악산을 포함해 지금까지 50개 넘는 명산을 올랐다. 1980년대 전국 청년대표로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최 원장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는 공부에 전념했다. 민주국민당 사무총장도 지낸 그는 2005년 2월 숭실대에서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주로 학계에서 후진 양성과 강연, 연구에 집중했다. 최 원장은 2010년 교통사고로 10개월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역경에 처하기도 했다. 힘겨웠지만 그동안 열심히 운동한 덕택에 잘 버텼고 다시 달릴 수 있었다. 최 원장은 “몸이 사고로 망가지니 회복하기 쉽지 않았다. 처음 달리듯 초보자의 자세로 천천히 거리를 늘려 원상 복귀했다”고 했다. 그는 요즘은 풀코스를 4시간 30분 안팎에 달린다. 2019년 풀코스를 달린 뒤 공식 대회를 달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레이스를 멈추지 않고 있다. 최 원장은 만 80세까지는 풀코스를 완주할 계획이다. 그는 “100세 시대, 얼마나 살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는 잡아야 80대에 하프, 90대에 10km를 달릴 수 있지 않겠나”라며 웃었다. 그에게 이제 달리기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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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이렇게 달릴줄이야”…우울증 탈출한 ‘홍천러너’[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송혜경 씨(34)는 마라톤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홍천에 살며 달리고 있어 ‘홍천러너’로 불리는 그는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 찾아온 외로움과 우울증, 그리고 과다 체중을 달리기로 이겨냈고, 이젠 매일 산과 들, 도로를 달리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 “2017년 5월 나이키 우먼레이스에 무작정 참가했어요. 하프코스 대회였는데 그동안 달리기는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죠. 운 좋게 출발 지점 앞에서 총성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시 권투 등 운동을 열심히 하는 배우 이시영 씨가 참가했어요. 그래서 이시영 씨만 보고 달렸어요.” 한 10km를 지났을까. 힘이 들어 걷다 뛰기를 반복했다. 눈물도 나왔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라는 자책도 했다. 그 때쯤 제한시간 2시간 30분 안에 못 들어올 주자들을 태우는 회수차량이 나타났다. 송 씨는 “차에 타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뛰어 제한 시간 안에 들어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니 내 체력이 이것 밖에 안 되나?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어린 나이인 24살에 결혼한 뒤 사업상 홍천에 살다보니 외로웠고, 다소 느긋하게 살다보니 체중도 급격히 늘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며 집 근처 피트니스센터에 등록해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며 식이요법으로 다이어트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하프마라톤이 열린다고 해 참가했던 것이다. “결혼해 홍천에 살다보니 친구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어요. 주변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소 우울했고 그렇다보니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게 됐고 살도 많이 쪘어요. 다이어트와 웨이트트레이닝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이렇게 달릴 것이라곤 생각 안했어요. 그런데 달리고 보니 완주했다는 자신감과 제 자신의 체력에 대한 실망감이 함께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여성으로 하프코스에 첫 출전해서 2시간 30분 안에 완주했다는 것은 기본적인 체력은 된다는 얘기다. 다이어트를 위해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덕분이다. 당시까지 최고 체중에서 10kg 정도를 감량하고 있었다. “집 주변 홍천강을 달렸어요. 평일에 5~6km를 주당 2~3회, 주말엔 20km 이상을 달렸죠. 대회를 앞두곤 더 길게 달리기도 했죠. 풀코스를 완주하려면 장거리를 꼭 달려야 하거든요. 그리고 그해 10월 중앙일보jtbc마라톤에서 풀코스를 4시간 50분쯤에 완주했어요.” 어느 순간 달리기가 친구가 돼 있었다. 심신이 피곤해도 달리고 나면 너무 상쾌했다. 삶도 활기가 넘쳤다. 홍천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친구였다. 그 때부터 매년 42.195km 풀코스를 2~3차례 완주했다. 하프코스도 자주 참가했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019년 춘천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45분대. 지금까지 풀코스를 7번 완주했다. “달리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울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달리고 나면 기분이 좋았어요. 외로움, 일하는 스트레스 등이 다 날아간 것입니다. 건강은 당연히 찾아왔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가 빼려고 했던 살이 다 빠진 것입니다. 달리면서 약 20kg이 더 빠졌고 제 최고 체중에서 약 30kg 감량했습니다. 지금은 매일 달리기 때문에 요요현상이 전혀 없이 똑같은 체중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송 씨는 달리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없어졌다는 것을 다시 강조했다. 운동생리학적으로 운동이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선진국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우울증 환자에게 운동을 처방하기도 한다. 송 씨는 “제가 달리면서 활기차게 살자 남편도 적극 달리기를 지지해주고 있다”고 했다. 대회 출전하면서 사귄 친구들도 큰 도움이 됐다. 서로 ‘파이팅’을 외치고 응원하면서 달리는 게 너무 좋았다. 대회 때만 잠깐 스쳐가듯 보는 ‘달리기 친구들’이지만 기록보다는 서로 힘이 돼주면서 즐기면서 달리는 게 좋았다. 2019년 10월 강원도 인제에서 열린 인제 K100 국제트레일러닝 대회 때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에 입문했다. 당시 대회 주최 측인 OSK(아웃도어스포츠코리아)가 트레일러닝 여자 세계랭킹 1위였던 미라라이(네팔)와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을 제공해 지원했는데 당첨되면서 산을 달리게 된 것이다. “25km를 가볍게 함께 달리는 특별이벤트였는데 너무 좋았어요. 산도 달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죠. 제가 사는 홍천 주변엔 산이 많아요. 그리고 그동안 약 해발 400m인 홍천 남산에도 자주 올라가서 산에 대한 두려움도 별로 없었어요. 제게 딱 맞은 운동이었습니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이 발병해 모든 도로 레이스가 없어졌지만 소수 정예가 출전하는 트레일러닝은 계속 열렸다. 송 씨가 자연스럽게 산을 달리게 된 이유다. 그는 “산을 본격적으로 달리려고 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어차피 도로 대회가 다 없어지다 보니 주말엔 주로 산만 타게 됐다”고 했다. 올 5월 서울도성길 26km 대회도 참가했다. 요즘엔 오후 7시부터 달린다. 일을 마친 뒤 홍천강을 최소 30분에서 길게는 2시간 달린다. 주 2~3회. 웨이트트레이닝도 주 2회 이상 한다. 상하체 근육을 고르게 잡아줘야 부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매주 산을 달리지만 무릎 발 관절에 전혀 이상이 없다. 허리 디스크도 있었는데 달리면서 아직 통증이 없는 것을 보니 오히려 관절 주변 근육이 강화돼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주말엔 무조건 산으로 가 3~4시간을 달린다. 산을 10~15km를 달리는 셈이다. 주변 월악산, 치악산은 물론 설악산도 달린다. 멀리 지방 원정도 간다. 모두 혼자 달린다. “새벽에 차를 몰고 가 목표로 한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집에 돌아와도 하루면 다 해결됩니다. 뭐 어차피 산에서는 함께 달리는 것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좋아서 즐겁게 달리니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먼 지방을 갈 경우에는 지역 역사 탐험의 기회로 생각한단다. 경북 경주에 가서 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지만 경주 곳곳을 돌아보며 신라의 역사도 느끼고 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사는 게 아주 좋다. 멀리 깔 땐 남편도 함께 가준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짧은 거리를 달렸지만 이젠 50km 이상을 달리는 긴 트레일러닝에 도전할 계획이다. 송 씨는 10월 열리는 서울둘레길 100K에서 50km를 도전한 뒤 11월에 열리는 트렌스제주에서 다시 50km 트레일러닝에 참가할 예정이다. “솔직히 제가 아주 잘 달리지는 못하지만 입상권에는 들 정도입니다. 작은 대회에서 5~6위는 많이 했어요. 어차피 시작한 달리기니 큰 대회에서 꼭 5위 안에 들고 싶어요. 잘 달리는 사람들이 많아 쉽지 않겠지만 이렇게 목표를 설정하고 달리면 동기부여도 돼서 더 열심히 달리게 됩니다.” 송 씨는 달리며 새 인생을 살고 있고 이렇게 계속 달리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이젠 달리기는 없어서는 안 될 ‘절친’이 됐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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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미루다간…” 위기의식에 시작한 근육운동, 자신감도 안겼다[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직업상 얻은 요추 경추 디스크에 고혈압 고지혈증까지 생겼어요. 더 이상 미루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1호 비뇨의학과 전문의’ 윤하나 이대서울병원 비뇨의학과 교수(51)는 지난해 3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체중 감량을 위해 근육을 키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15년 넘게 건강을 위해 필라테스를 해왔지만 나이 들면서 찐 살이 빠지지 않았다. 의사로서 각종 질병까지 얻어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는 “의사도 사람이다 보니 나이가 들고 나잇살도 피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일한다고 살을 빼기 위해 강도 높은 운동을 병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운동해야 했다. 그래서 병원근처 웨이트필라테스를 하는 루나짐을 찾았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할 때 어깨를 올리고 근육이 긴장시키는 자세를 유지하다보니 어느 순간 거북목이 됐다. 비뇨의학과 수술은 수술 부위가 매우 좁고 로봇 수술이 많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모니터를 보는 것처럼 굽어지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목 디스크까지 발병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까지 이르렀다. 재활의학과 교수의 조언을 받아 2005년쯤부터 필라테스를 시작한 이유다. 건강은 유지됐지만 나이 들면서 늘어난 살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윤 교수는 웨이트트레이닝과 필라테스를 함께 해주는 PT(퍼스널 트레이닝)를 받으며 유산소 운동도 병행했다. 웨이트필라테스는 웨이트트레이닝과 필라테스를 병행하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하는 운동 방식이다. 박루나 루나짐 대표는 “원래 필라테스는 저항운동(근력운동) 이었다. 한국에 들어오면서 근막 이완운동, 속칭 스트레칭이 됐다. 발레 동작을 기본으로 필라테스와 웨이트트레이닝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전신의 근육을 발달시킨다”고 설명했다. 경추 요추 디스크 증세가 있는 윤 교수는 전체적인 코어 근육 향상뿐만 아니라 디스크 부분 근육을 강화시키는 다양한 동작도 병행했다. 디스크 증세가 있는 부분 근력이 강화돼야 뼈와 뼈를 제대로 잡아줘 통증이 사라진다. 주 3회 1시간 씩 PT를 받고 집에서는 고정식자전거를 타거나 트레드밀(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근육을 키워 에너지 소비량을 높이고 유산소운동으로 지방을 태우는 게 다이어트에 가장 효과적인 운동법이다. 근육량이 늘고 지방이 감소하면 기초대사량 등 에너지 소비가 늘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그는 “공복상태에서 다이어트 효과가 좋아 아침 일찍 유산소 운동을 했다. 피곤해 하지 못하면 일을 마치고 저녁에도 했다”고 했다. 조금 빠지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나이가 들면 다이어트 할 때는 일정 강도 이상으로 운동을 해줘야 효과가 나타난다. 그래서 나이 들어 다이어트하기가 더 힘든 것이다. 윤 교수는 지인들과 얘기하다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회에 출전하려면 식단관리도 해야 하고 훈련도 체계적이고 강도 높게 해야 해 다이어트 효과가 좋을 것 같았다. 7월 말 열린 2021맥스큐 머슬마니아 피트니스 코리아챔피언십 대회를 위해 3개월 전부터 강도 높은 준비에 들어갔다. 주 4회 PT 1시간씩에 매일 유산소운동 1시간, 그리고 저탄수화물 고단백 음식조절까지…. 병원 업무와 대회 준비를 함께 하다보니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대회 1주일 전엔 더 철저하게 음식을 조절하고 훈련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휴가까지 냈다. 효과는 대단했다. 근육이 붙고 살도 급속히 빠져 지난해 본격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한 뒤 11kg이나 체중이 감량됐다. 대회에서 스포츠모델 오픈 쇼트 4위, 시니어모델 4위 등 2개 분야에서 입상했다. 윤 교수는 사상 첫 머슬마니아 입상 여성 비뇨의학과 교수란 타이틀까지 얻었다. 윤 교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겨울이면 꼭 마사지를 받았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이 불편했다. 진료 보거나 수술할 때 목부터 어깨, 팔까지 테이핑을 했다. 테이핑은 근육을 잡아줘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게 도와준다. 살이 빠지고 근력이 좋아지면서는 안 한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에 나섰지만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더 잘 하기위한 측면도 강했다. 환자 치료를 잘 하려면 건강해야 한다. 그는 “과거 선배들이 의사는 자기 생명을 깎아서 환자를 살린다고 했다. 내 몸이 힘들어도 일단 환자를 치료하고 살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들도 환자를 더 잘 보기 위해 건강을 위해 투자를 많이 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운동을 실천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의사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잘 안다. 문제는 실천이다. 일에 시달리다보면 짬을 내기 쉽지 않다. 윤 교수는 “모두가 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어 한다. 결국 실천의 문제다. 난 실천했다. 선후배들에게 일하면서도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기쁘다. 그래서인지 주위 사람들이 잘했다고 격려해줘 더 힘이 난다”고 했다. 윤 교수는 운동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실천, 그리고 습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체육관이나 피트니스센터에 가는 게 중요합니다. 머리로는 절대 운동 못합니다. 움직여야 해요. 그리고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미루는 습관이 익숙해지면 절대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힘들어도 운동을 실천해야 익숙해집니다. 운동하기 전까지 힘들어서 그렇지 하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이런 쾌감을 느끼기까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윤 교수는 요즘 환자 보는 게 훨씬 편안하다. 그는 “진료가 즐거울 수는 없지만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는다. 과거엔 치료 경과 좋지 않거나 진상 환자를 만나면 짜증을 냈다. 이젠 자신감이 생겨 어떤 스트레스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50세 넘어 머슬마니아 대회에 도전했고 성과를 내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됐다. 그는 “30대가 아닌 지금 이 나이에 도전했다는 게 중요하다. 솔직히 이 나이에 몸만들기 쉽지 않았는데 해냈다. 그 성취감은 말로 다 표현 못한다. 이젠 다른 어떤 것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고 했다. 이젠 환자들에게도 “규칙적으로 운동 하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직접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실 대회 출전해서 상까지 받는 바람에 이젠 요요현상이 오면 절대 안 됩니다. 다 저를 지켜보고 있잖아요. 잘 유지해야지요. 하지만 전 오래 살기 위해서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운동하고 있어요. 의사로서 일도 잘하고 제가 하고 싶은 것도 즐기면서 살기 위해서죠. 이렇게 살다보면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윤 교수는 학창 시절 겨울엔 스키를 타고 여름엔 수영을 즐길 정도로 몸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한 때 취미로 발레를 하기도 했다. 골프도 즐겼다. 그는 “승마와 검도, 종합격투기 주짓수, 스쿠버다이빙 등을 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꼭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왜 비뇨의학과를 선택했을까? “전문의 과정을 선택할 때 교수님이 ‘우리나라에 비뇨의학과 여의사가 없는데 나온다면 이화여대에서 나와야 한다’고 했어요. 그 때까지 비뇨의학과는 피부과와 함께 성병이나 조루 등을 보는 것으로 알았죠. 그런데 직접 공부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소변이 만들어져 내려가고 모여서 몸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기관, 신장, 부신, 요관, 방광 등을 관장해요. 성적인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어요. 외과적 치료와 내과적 치료를 다 해야 해요. 연구할 분야가 다양했어요.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이화여대 출신 윤 교수는 대한민국 1호 비뇨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지금은 50명에 가까운 여성 전문의가 활동하고 있다. 비뇨의학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윤 교수는 필라테스를 하면서 코어근육이 강화되자 자신의 환자들도 코어 근육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필라테스 방광 건강운동을 고안하기도 했다. 2019년 이대서울병원 개원과 함께 지역 주민을 위한 건강 강좌를 진행했다. 윤 교수는 “아직 목표치까지 다이어트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회 출전이란 목표를 다시 잡았다. 그는 “내년에 한 번 더 대회에 출전하고, 55세 때 그리고 65세 때 다시 도전 할 계획이다. 은퇴하기 전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도전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윤 교수에게 피트니스 대회 출전은 즐거운 도전이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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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 빼려 시작한 근육운동, 수술 스트레스도 날려줬죠”[양종구의 100세 건강]

    윤하나 이대서울병원 비뇨의학과 교수(51)는 지난해 3월 중대 결단을 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체중 감량을 위해 근육을 키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15년 넘게 건강을 위해 필라테스를 했지만 나이 들면서 찐 살이 빠지지 않았다. 직업상 얻은 요추 경추 디스크에 혈압도 높고 고지혈증까지 왔다. 의사로서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의사도 사람이다 보니 나이가 들고 나잇살도 피할 수 없었다. 그동안 살을 빼기 위해 강도 높은 운동을 병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루다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병원 근처 웨이트필라테스를 하는 곳을 찾았다.”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을 할 때 어깨를 올리고 근육을 긴장시키는 자세가 되다 보니 어느 순간 거북목이 됐다. 비뇨의학과는 수술 부위가 매우 좁고 로봇 수술이 많기 때문에 수술을 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몸을 굽히고 있어야 한다. 목 디스크까지 발병해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정도에 이르렀다. 재활의학과 교수의 조언을 받아 2005년쯤부터 필라테스를 시작한 이유다. 건강은 유지됐지만 나잇살은 빠지지 않았다. 윤 교수는 웨이트트레이닝과 필라테스를 함께 해주는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으며 유산소운동도 병행했다. 주 3회 1시간씩 PT를 받고 집에서는 고정식 자전거를 타거나 트레드밀(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근육을 키워 에너지 소비량을 높이고 유산소운동으로 지방을 태우는 게 다이어트에 가장 효과적인 운동법이다. 그는 “공복이라서 다이어트 효과가 좋기 때문에 아침 일찍 유산소운동을 했다. 피곤해 하지 못하면 일을 마치고 저녁에도 했다”고 했다. 조금 빠지긴 했지만 미미했다. 지인들과 얘기하다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회에 출전하려면 식단 관리도 해야 하고 훈련도 체계적이고 강도 높게 해야 해 다이어트 효과가 좋을 것 같았다. 지난달 말 열린 한 머슬마니아 피트니스대회를 위해 3개월 전부터 강도 높은 준비에 들어갔다. 주 4회 PT 1시간씩에 매일 유산소운동 1시간, 그리고 저탄수화물 고단백질 음식 조절까지 했다. 병원 업무를 보면서 대회 준비를 함께 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대회 일주일 전엔 휴가까지 냈다. 효과는 컸다. 근육이 붙고 살도 급속히 빠져 지난해 본격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시작한 뒤 11kg이나 감량했다. 대회에서 스포츠모델 오픈 쇼트 4위, 시니어모델 4위 등 2개 분야에서 입상했다. 대한민국 여성 1호 비뇨의학과 전문의인 그는 사상 첫 머슬마니아 입상 여성 비뇨의학과 교수란 타이틀까지 얻었다. 윤 교수는 웨이트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까지 진료나 수술을 할 때 목부터 어깨, 팔까지 테이핑을 했다. 근력이 붙으면서는 안 한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에 나섰지만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측면도 강했다. 환자 치료를 잘하려면 건강해야 한다. 그는 “과거 선배들이 의사는 자기 생명을 깎아서 환자를 살린다고 했다. 내 몸이 힘들어도 일단 환자를 치료하고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들도 환자를 더 잘 보기 위해, 건강을 위해 투자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운동 효과를 보기 위해선 실천, 그리고 습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체육관이나 피트니스센터에 가야 한다. 머리로는 절대 운동 못 한다.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운동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미루는 습관이 익숙해지면 절대 건강해질 수 없다. 힘들어도 운동을 실천해야 익숙해진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요즘 환자 보는 게 훨씬 편안하다. 그는 “진료가 즐거울 수는 없지만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는다. 과거 치료 경과가 좋지 않거나 진상 환자를 만나면 짜증이 났다. 이젠 자신감이 생겨 어떤 스트레스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50세 넘어 머슬마니아 대회에 도전했고 성과를 내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됐다. 환자들에게도 “규칙적으로 운동하라”고 자신 있게 권한다. 직접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살기 위해서보다는 일이든 취미생활이든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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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母 돌아가신 후 무작정 걷기 시작… 35kg 감량했어요”[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충북 청주에서 개인 사업을 하는 정용권 씨(52)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4년 전부터 시작한 걷기와 등산으로 35kg 넘게 감량했다. 그는 매일 걷고 주말엔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오르며 슬기로운 100세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4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지병으로 한달 고생하다 가셨어요. 사실 그 때까지는 죽음이라는 것을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를 지켜보며 죽음이라는 게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도 죽을 수 있다고 처음 생각했어요.” 당시 정 씨의 체중이 120kg 나갔다. 그는 “아 내가 무분별하게 살았구나. 정말 생각 없이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저녁 때 허기진다는 이유로 밥 3공기에 맥주 4캔을 마시고 바로 자는 게 생활이었다고 했다. “그런 생활이 나쁘다는 생각도 안했는데 어느 순간 몸이 불어나 있었어요. 제 몸 상태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어머니 돌아가신 것을 계기로 느낀 겁니다.” 돌이켜보니 몸이 좋지 않았다.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혈압도 높았다. 몸이 둔했고 움직일 때 숨이 가빴다. 늘 피곤했다. 머리도 무거웠다. 어쩔 땐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쉬운 게 걷기잖아요. 처음엔 아파트 한바퀴 도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 다음 공원도 가고 마트도 가고…. 조금씩 늘려갔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게 저에겐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1km에서 2km, 2km에서 5km, 5km에서 10km. 걷는 거리가 늘었다. 자연스럽게 걷기가 생활화가 됐다. “자영업을 하다보니 특별하게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생활 속 운동을 실천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3km를 걷습니다. 동네 근처 해발 220m 목령산까지 2km를 다녀온 뒤 아파트 한바퀴 1km를 걷죠. 점심 땐 가게 문을 닫고 1시간 30분을 걷습니다. 한 5km 정도 걷게 되죠. 저년 땐 식사를 하고 3km를 걷습니다. 집사람이 뭐 살게 있다면 걸어서 마트를 다녀오고 아니면 그냥 걷습니다.” 정 씨는 어느 순간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몸이 더 많이 걸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운동량을 계속 늘렸다. 그러다보니 매일 10km 이상을 걷게 됐다”고 했다. 등산을 한 것도 몸이 반응해서란다. “제 고향은 전북 김제인데 주변에 산이 없었죠. 제가 산에 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걷다 보니 더 많은 운동량이 필요해졌고 어느 순간 산에 올라가도 전혀 문제없는 몸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솔직히 평지를 걷기만 하면 재미가 없어서 산을 간 측면도 있습니다.” 산 오르는 것도 처음엔 집 주변 해발 200m 낮은 산부터 300m, 400m로 차근차근 올렸다. 어느 순간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명산도 가게 됐다. 정 씨는 걷기 시작 1년째부터 운동 루틴이 현재 하고 있는 것으로 정해졌다고 했다. 매일 11km를 걷고 주말에는 산으로 가는 게 그의 운동 루틴이다. 2년 정도 지나면서부터 해발 1000m 이상급 산을 오르게 됐다. “솔직히 그냥 살기 위해서 걷고 산에 올랐는데 몸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정도 걸으니 천천히 신체적인 변화가 왔어요. 역시 걷는 양이 많아지니 살이 빠지더라고요. 1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빠져 2년째엔 현재 몸무게인 80kg초중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부터는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 오르고 있다. “체력이 좋아지다 보니 한라산을 찾게 됐죠. 한라산 7개 코스를 다 돌아봤어요. 설악산도 12개 코스를 4, 5번에 걸쳐 훑었죠. 산이 너무 좋아졌어요. 온갖 나무와 꽃, 바위, 계곡, 능선 등 경관도 좋았죠. 산과 하나 되는 느낌도 좋았어요. 정상에 올랐을 때의 쾌감이라니…. 어느 순간 능선을 타는 맛을 알게 됐죠. 그러다 보니 산 전체의 맛까지 느꼈습니다. 그러다 산을 좀 체계적으로 타보자는 생각에 대한민국 100대 명산을 오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일요일(8월 1일)까지 51개의 명산을 올랐습니다.” 정 씨는 7월 28일부터 8월 1일까지 여름 휴가기간에만 100대 명산 7개를 올랐다. 수도권 도봉산과 수락산, 청계산, 경기 양평 유명산, 경남 함양 황석산과 산청의 황매산, 그리고 전남 영암의 월출산까지. 8월 7일엔 전북 장수 장안산, 8월 8일엔 경남 합천 가야산에 오를 예정이다. “한번 산에 오르면 3~4시간은 후딱 지나갑니다. 능선을 탈 경우엔 6~7시간 걸리죠. 이젠 산을 타지 않으면 생활이 힘들어집니다. 저에게 등산은 생활의 활력소입니다.” 이렇게 산을 많이 타면 무릎은 괜찮을까? “걷기 전에는 스키와 스노보드를 좋아했어요. 스노보드를 타다 넘어져 오른쪽 무릎을 다쳤었죠. 인대 등 주요 부분을 다친 것은 아니지만 평상시 절리는 증세가 있었는데 산을 타면서 없어졌어요. 전 등산하면서 무릎이 더 좋아졌어요.” 정 씨는 매일 걷고 산을 타다보니 매년 운동화 4, 5켤레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 등산화를 신었는데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어 더 편한 운동화를 신는다. 2~3개월에 한 켤레는 갈아 신고 있다”고 했다. 정 씨는 다이어트를 위해 산을 탄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솔직히 다이어트를 생각하고 산을 탔으면 지금까지 못 왔을 겁니다. 일찌감치 포기했을 거예요.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걸었고 걷다보니 산을 올랐고, 산이 좋아 산을 타다보니 어느 순간 다이어트란 선물이 제게 와 있었습니다. 혹 다이어트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걷은 것과 등산을 취미로 삼으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그럼 시간이 지나면 살은 자연스럽게 빠집니다.” 정 씨는 요즘 옷 입는 맛이 난다고 한다. 2년 전부터 체중은 그대로지만 몸이 탄탄해져 옷맵시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정 씨가 이렇게 열심히 산을 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내 인필선 씨(50)였다고 했다. “처음부터 집사람이 함께 해줬어요. 함께 걷고 산에도 함께 갔죠. 제가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등산을 즐기고 있는 데는 아내의 도움이 컸습니다. 도시락과 과일 등 필요한 것도 잘 챙겨줬습니다. 산에 가면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정 씨는 걷고 산을 타다보니 살이 빠졌고 건강도 얻었다. 부부간의 정도 더 두터워졌다. 그는 “평생 아내와 함께 산을 타며 즐겁고 건강하게 살겠다”고 했다. 정 씨 부부는 100세 시대를 건강하게 사는 대표적인 모범 사례이다. 스포츠심리학적으로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은 운동을 지속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스포츠심리학에 ‘사회적 지지(지원)’라는 게 있다. 특정인이 어떤 행동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으로 정서적, 정보적, 물질적, 동반자 등의 지지를 말한다. 이 중 동반자 지지가 가장 강력하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만드는 요인으로서 동반자가 중요한데 그 동반자가 남편이나 아내라면 더 오래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김병준 인하대 교수(스포츠심리학)는 “부부가 함께 즐기면 서로 의지하며 운동을 지속할 가능성이 더 높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도 생겨 금슬도 좋아진다”고 말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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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양종구]도쿄 올림픽과 스포츠 선진국

    한국이 도쿄 올림픽에서 불모지라고 평가받던 기초종목에서 선전했다. 기계체조 뜀틀에서 남자 신재환이 금메달을, 여자 여서정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우상혁은 육상 남자 높이뛰기에서 사상 최고인 4위에 올랐다. 황선우는 수영 남자 자유형 100m에서 역시 역대 최고인 5위를 했다. 이런 성과에 일부에서는 “이젠 대한민국도 스포츠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것 아니냐”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스포츠 선진국은 기초종목인 육상과 수영, 체조의 저변이 넓다. 기초종목은 신체능력만으로 평가받는 스포츠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신체능력을 키울 수 있어 선진국은 어렸을 때부터 강조하고 있다. 미국에서 초중고교를 다니면 최소한 한 번씩은 경험한다. 기초종목뿐만 아니라 구기, 라켓 등 대부분 스포츠도 어릴 때부터 접한다. 기초종목을 잘하면 상위 학교로 올라가면서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프로스포츠 종목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한다. 미국은 이런 선순환 구조로 ‘스포츠 강국’의 명성을 쌓았다. 가까운 일본도 미국 시스템과 거의 비슷하다. 선진국은 운동(스포츠)을 교육의 중요한 한 축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전통적으로 스포츠를 중시한다. 하버드대는 신입생을 뽑을 때 학업 성적 외에도 다양한 분야를 평가한다. 그중 중고교 시절 스포츠 선수로 활동하며 주장을 맡은 학생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리더로서 갖춰야 할 기본을 스포츠를 통해 습득했다는 판단에서다. 예일대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리더십과 협동심, 성실성, 사회성, 인내력 등을 스포츠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대학이 이렇다 보니 명문 고등학교도 스포츠를 강조한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선 일반 학생들도 스포츠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1980년대만 해도 육상 등록선수가 2만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5000명대로 줄었다. 4분의 1 수준이 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이 입시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 2학년 땐 아예 체육 수업이 없다. 중학교 때 주 3시간으로 좀 활성화되는 듯하다 고등학교에 가면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입시 점수를 위해 체육시간은 자율학습으로 대체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과 후 학교스포츠클럽제도 등을 도입해 스포츠 활동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입시란 현실에 밀려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다. 결국 운동은 선수들만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학력고사에 체력장 점수(20점)가 포함돼 있을 때인 1970, 80년대 육상 등록선수가 가장 많았다. 군사정권 시절 강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몸도 건강해야 했다. 체력장 하다 실력이 검증돼 육상선수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체력장을 부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했다. ‘신은 인간이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두 가지 수단을 전해줬다. 교육과 신체 활동. 교육은 정신을 위해, 신체 활동은 신체 건강을 위한 게 아니다.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갈 때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다.’ 운동과 공부가 따로 가는 교육 시스템을 바로잡지 않으면 한국은 올림픽 때 기초종목에서 선전해도 늘 ‘불모지에서 이룬 영광’이란 수식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일반 학생도 운동과 공부를 함께 해야 조화로운 인간이 된다. 땀 흘려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기초종목이 반짝 성적을 냈다고 스포츠 선진국을 말할 때는 아니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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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양종구]체조 수영 육상의 영웅들

    신재환이 2일 열린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남자 뜀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양학선이 정상에 오른 뒤 한국 체조 사상 두 번째 금메달이다. 신재환은 1차 시기에서 최고 난도의 ‘요네쿠라’(공중에서 3바퀴 반 비틀어 돈 뒤 착지)를 성공한 뒤 2차 시기에서 ‘여2’(공중에서 두 바퀴 반을 비틀어 돈 뒤 착지)까지 깔끔하게 성공했다. 여2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 경희대 교수의 기술이다. 여자 뜀틀에서는 여 교수의 딸 여서정이 ‘여서정’ 기술로 동메달을 따 한국 여자 체조 사상 첫 메달 획득 및 첫 부녀 메달리스트가 됐다. ▷체조와 수영, 육상은 기초 종목으로 불린다. 체중에 따른 체급도 없고 싸울 기구도 없다. 오직 훈련으로 쌓은 신체 능력이 유일한 경쟁 도구다. 육상 남녀 100m 대결에 지구촌이 주목하는 이유가 신체 능력만으로 지구에서 가장 빠른 남녀를 가리기 때문이다. ▷남자 수영 자유형 100m에서는 황선우가 5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황선우의 100m 5위가 69년 만에 아시아인으론 최고 성적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신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서구 선수들이 이 종목을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선우는 그 벽을 깼다. 육상 높이뛰기 남자 결선에서는 우상혁이 2m35까지 깔끔하게 넘어 개인 최고기록(2m31)보다 4cm를 더 뛰어 역대 육상 트랙과 필드 사상 최고인 4위에 올랐다. ▷기초 종목에서는 한계 상황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면 목표를 이루기 힘들다. 신재환은 허리에 철심을 박은 상태에서도 뜀틀을 수없이 뛰어넘어 요네쿠라와 여2를 완성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돌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들어 세계를 제패했다. 우상혁도 자신의 한계인 개인 최고기록 이상을 넘으려 줄기차게 시도했다. 우상혁은 8세 때 자동차 바퀴에 오른발이 깔려 왼발에 비해 1.5cm 작은 불리함도 극복했다. 달릴 때 좌우 균형이 맞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밸런스를 맞췄고, 결국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들의 성취는 불모지에서 이룬 것이기에 더 빛난다. 대한체육회 등록 선수(2021년 상반기) 기준 육상은 남녀 총 5292명, 수영은 3155명, 체조는 1235명이다. 일본은 육상만 38만여 명이다. 인구를 감안해도 한국이 크게 떨어지는 수준이다. 이들은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출했다. 양학선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마린보이’ 박태환도 그랬다.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특출한 천재 하나에만 기대는 게 한국 기초 종목의 현실이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기초 종목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커지길 기대한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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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생 수련한 ‘태권도 전도사’ “올림픽 노골드? 중요한 건…”[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곽영훈 세계시민기구(WCO) 대표(78)는 글로벌 ‘태권도 전도사’다. 10대 초반부터 태권도를 배웠고 80세를 눈앞에 둔 지금도 도장에서 품세와 발차기, 주먹지르기, 격파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국제 활동을 많이 하는데 해외에 나갈 때 만나는 사람들에게 태권도가 심신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강조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돼 있고 심신의 건강을 동시에 끌어올리기에는 태권도가 제격이라는 것이다. “집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었는데 바로 옆이 대한민국 태권도의 한 축인 청도관이었어요. 친형이 먼저 수련을 시작했고 저도 자연스럽게 따라 배웠습니다. 우리 땐 특별하게 즐길 스포츠도 없었어요. 태권도는 운동도 됐지만 사범을 존경하고 체계적으로 무술을 익히는 등 진정한 도(道)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경기중고시절 잠깐 배구를 하기도 했지만 평생 태권도를 했습니다.” 당시는 경기차원이 아닌 개인 수양으로 태권도를 익혔다. 그는 “사범들은 내게 호국정신과 호연지기를 불어 넣었다. 누구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수양하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라고 했다. 그 정신이 좋았다”고 했다. 곽 대표는 무엇보다 태권도를 통해서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것을 배웠다. “태권도 품세든 발차기든 내 머릿속에서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에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순간적인 판단에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상대를 공격하거나 방어할 수 없죠. 세상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먹어도 결국 몸으로 실행해야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만 가지고는 이뤄지는 게 없습니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합니다. 전 태권도를 통해 그것을 체득했습니다.” 평생 태권도 수련을 멈추지 않은 이유다. 미국 MIT공대(건축학 학사, 석사), 하버드대(정책학) 유학시절에는 체육관에 태권도 클럽을 만들어 세계적인 수재들을 직접 지도했다. 1960년대 초엔 한국 학생은 일본 혹은 중국 사람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태권도로 한국을 알린 것이다. 당시 액션스타로 인기를 누렸던 브루스 리(이소룡)를 닮아 쉽게 태권도를 전파할 수 있었다고 했다. 태권도는 그에게 좋은 기회도 가져다 줬다. 1964년 우연한 기회에 미국 뉴욕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지켜봤는데 ‘아 이런 국제 행사로 나가가 발전 하는구나’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해 일본에서 열린 도쿄올림픽을 지켜보며 ‘한국도 올림픽을 개최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인프라를 잘 갖추는 게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직접 참관했다. 마음먹은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태권도 정신을 실천했다. MIT와 하버드에서 태권도를 지도하며 모아둔 돈이 있어 가능했다. 그는 그곳에서 “시내를 지하철로 연결하고, 쓸모없을 것 같은 공간도 공원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직접 보고 왔다”고 했다. 곽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홍익대 도시계획학과장으로 고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서울올림픽 개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서울 잠실 일대에 올림픽종합경기장 및 공원을 짓는 밑그림을 만들어 제시했다. 지하철 2호선도 그곳을 통과하게 조언했다. 1975년 사람과환경그룹을 만든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시설 건설플랜은 물론 1993년 대전엑스포 유치 마스터플랜 등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했다. 한강종합개발, 대학로, 영종도배후도시, 대전 테크노폴리스 등 굵직한 국가사업의 그림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그는 “서울 수도권. 대전 중부권, 여수 남부권 등 대한민국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구체화 작업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일부에서 잠실 몽촌토성을 개발하자고 했지만 역사를 잘 보전하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외부공간으로 조성했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의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를 없애자는 것도 막았다.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사람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개발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사람과환경그룹은 곽 대표가 1969년 미국 보스턴에 설립했던 회사를 한국으로 들여온 것이다. 한국의 발전을 위해 MIT와 하버드 출신 인재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당초 참여한 사람 이니셜을 따 KMR Associates라고 했다가 한국어 ‘아 좋다’느낌이 나는 ‘Adheotas KMR Associates’로 바꿨다. 인간 환경을 설계하는 국제모임(International designer‘s society for human environment on the basis of technology art and science)이다. WCO는 1987년 창설했다. “고문으로 박종철이 사망하고, 이를 규탄해 시위하던 이한열까지 사망하는 등 정국이 혼란스러웠죠. KAL기 폭파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서울올림픽을 취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죠. 이래서 안 되겠다며 네트워크를 총 동원해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러시아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보이콧을 못하게 막으면서 발족시킨 국제 조직입니다.” WCO는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국제 네트워크로 지원했다. 지금은 실크로드 도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친환경적 도시건설을 유도하고 있다. 그는 WCO 활동에 대해 “우리가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살고 있지만 국가는 정치색이 강하고 국방·외교·경제 등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사람을 덩어리져서 딱딱하게 만든다. 딱딱하면 서로 부딪치게 된다. 국가간 충돌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교류, 연대하면 갈등을 풀고 충돌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WCO 실크로드 시장(市長) 포럼을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곽 대표가 이렇게 활기차게 활동하고 있는 원동력에 태권도가 있었다. 태권도에서 배운 호국정신을 국가번영정신으로 발전시켰고, 미국유학시절부터 국가건설 프로젝트를 준비해 실행했다. 지금도 최소 주 1회는 WCO태권도장에서 수련하고 있다. 수련은 먼저 복식호흡과 명상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뒤 본격적인 신체 단련에 들어간다. 정신수양이 먼저기 때문이다. 곽 대표는 태권도를 했다는 인연으로 1970년대 중반 한국초등학교태권도연맹 회장을 맡기도 했다. 회장 시절 어린이 태권왕 대회를 만들었는데 1회 대회에서 탤런트 김혜수 씨가 서울미동초등학교 다닐 때 나와 태권왕이 됐다고 했다. 곽 대표는 평소엔 걷기와 주변 청소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집(서울 신당동) 근처 매봉산과 남산을 매일 오른다. 40여년 전부터 하고 있는 ’남산소나무 살리기‘도 그에겐 운동이다. 우연히 남산을 걷다 아카시아나무가 너무 빨리 자라며 소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보고 아카시아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매일 하는 집 주변 서울성곽 청소도 그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다. 가지치기와 청소의 운동량이 상당하다. 모두 태권도에서 배운 봉사정신에서 비롯됐다. 태권도 9단인 곽 대표는 “이제 뉴노멀시대다. 시시각각 바뀌는 시대변화에 잘 적응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심신을 단련시키는 태권도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생활속 ’운동‘과 태권도 덕택에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병없이 건강했고 , 노년에도 활기차게 일하고 있다. 그는 태권도 종주국 한국이 도쿄올림픽에서 사상 처음 노골드에 머문 것에 대해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태권도가 잃어가는 도(道)를 다시 되새길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과거엔 도를 배웠어요. 태권도를 통해 자신을 자각하고 무술을 익혀 더 좋은 목적을 위해 쓰려고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태권도는 전문 경기인들 빼면 아이들이 잠시 배우다 마는 스포츠가 됐습니다. 심신을 수양하는 도의 개념이 사라진 것입니다.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잘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태권도를 통해서 심신을 수양할 수 있도록 도를 다시 강조해야 합니다. 태권도는 운동 효과는 물론 정신수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대한민국에서도 남녀노소가 태권도를 즐기는 시대가 오길 기대합니다. 저도 힘을 보내겠습니다.” 곽 대표는 국내는 물론해외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태권도를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서울 중구 신당동에 WCO 태권도장을 만들었다. 그의 태권도 사랑은 끝이 없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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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양종구]‘발 펜싱’과 ‘고속 팔 젓기’

    한국 펜싱 사브르 선수들은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명 불빛터치 스텝 훈련을 줄기차게 반복했다. 1∼2m 전방 목표지점에서 불이 들어오면 잽싸게 펜싱 스텝으로 앞으로 나가 손으로 터치한 뒤 돌아오는 동작을 1회에 15초 동안 반복한다. 3개의 불 중 2개(빨간색, 주황색)가 들어오면 빨간색을 터치하는 훈련도 했다. 빠른 발과 순간적인 판단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이다. ▷도쿄 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한국이 9년 만에 정상에 오르자 ‘발 펜싱’이 화제가 되고 있다. 키가 큰 것은 물론 팔도 긴 데다 손기술까지 좋은 유럽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한 한국식 펜싱이 우승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2년 런던 때 펜싱 사브르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활약한 발 펜싱 1세대인 김정환 구본길 등으로 구성된 남자 대표팀이 다시 금메달을 걸며 그 진가를 보여준 것이다.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춘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체격의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체력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4강 신화의 원동력인 한국축구대표팀 파워 프로그램도 결국 유럽 선수들보다 더 많이 뛰게 만든 체력 프로그램이었다. 상대보다 빨리 움직이기 위해 한국 펜싱 대표팀은 강도 높은 체력훈련과 함께 스텝 훈련을 밥 먹듯이 했다. ▷수영 자유형 남자 100m에서 아시아선수로 69년 만에 최고인 5위에 오른 황선우는 빠른 팔 젓기로 세계적인 선수들과 대등한 레이스를 펼쳐 주목받았다. 역시 큰 키와 근육질 몸매의 서양 선수들이 파워를 과시하는 100m에서 체격적인 열세를 극복한 방법이 빠른 팔 젓기였다. 황선우는 이날 우승한 미국의 케일럽 드레슬보다 약 10회 더 팔을 회전시켰다. ▷황선우는 어려서부터 스피드 강화를 위해 자신만의 영법을 진화시켰다. 황선우는 오른쪽으로 숨을 쉰 다음 오른팔을 앞으로 더 길게 밀어 넣어 물을 세게 당겨 추진력을 얻는 ‘엇박자 영법’이란 리듬을 유지하며 팔 젓기를 빠르게 했다. 그를 지도한 이병호 서울체고 감독은 “리듬이 깨지지 않고 팔 스트로크를 빠르게 하는 게 선우만의 기술”이라고 했다. 리듬 없이 무작정 팔만 빨리 회전시킬 경우 오히려 추진력을 잃을 수 있다.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남이 흉내 내기 힘든 자신만의 강점이 있어야 한다. 남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은 한발 빠른 발로 세계를 정복했다. 황선우는 한 템포 빠른 팔 젓기로 가능성을 보였다. 고등학생 황선우는 아직 체력적으로도 미완성이다. 가능성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황선우가 3년 뒤 파리에서 남자 펜싱 대표팀처럼 최정상에서 활짝 웃길 기대한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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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종구의 100세 건강]“정신까지 건강하게 해준 태권도, 내 인생의 버팀목”

    곽영훈 세계시민기구(WCO) 대표(78)는 10대 초반부터 태권도를 배웠고 팔순을 눈앞에 둔 지금도 도장에서 품세와 발차기, 주먹지르기, 격파로 수련하고 있다. 그는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돼 있고 심신의 건강을 동시에 끌어올리기에는 태권도가 제격이라고 강조한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청도관 본관에서 처음 태권도를 접했다. 집 바로 옆이 청도관이었다. 형이 먼저 시작하자 따라 배웠다. 곽 대표는 “그땐 특별하게 즐길 스포츠가 없었다. 태권도는 운동이 되기도 했지만 사범을 존경하는 자세로 체계적으로 무술을 익히며 도(道)를 배웠다”고 말했다. 당시엔 개인 수양으로 태권도를 했다. 그는 “사범들은 내게 호국정신과 호연지기를 불어넣었다. 누구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수양하는 것이다. 그 정신이 좋았다”고 했다. 곽 대표는 무엇보다 태권도를 통해서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것도 배웠다. “태권도 품세든 발차기든 내 머릿속에서 하겠다고 마음먹은 뒤에야 행동으로 나타난다. 순간적인 판단에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상대를 공격하거나 방어할 수 없다. 세상 모든 게 마찬가지다. 마음을 먹어도 결국 몸으로 실행해야 뭐든 할 수 있다. 생각만 가지고는 이뤄지는 게 없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도 건강하다. 태권도를 통해 그것을 체득했다.” 평생 태권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건축학), 하버드대(정책학) 유학 시절에는 체육관에 태권도 클럽을 만들어 세계적인 수재들을 직접 지도했다. 1960년대 초 한국 학생이 일본 혹은 중국 사람으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태권도로 한국을 알렸다. 태권도는 그에게 좋은 기회도 가져다줬다. 1964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지켜봤는데 ‘아, 이런 국제 행사로 나라가 발전하는구나’ 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해 일본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을 멀리서 지켜보며 ‘한국도 올림픽을 개최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굳혔다.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인프라를 잘 갖추는 게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직접 참관했다. 마음먹은 것은 행동으로 옮기는 태권도 정신을 실천했다. MIT와 하버드대에서 태권도를 지도하며 모아둔 돈이 있어 가능했다. 그는 그곳에서 “시내 곳곳을 지하철로 연결하고, 쓸모없을 것 같은 공간도 공원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직접 보고 왔다”고 했다. 곽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홍익대 도시계획학과 학과장으로서 고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서울 올림픽 개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서울 잠실 일대에 올림픽종합경기장 및 공원을 짓는 밑그림을 만들어 제시했다. 지하철 2호선도 그곳을 통과하도록 조언했다. 1975년 사람과환경그룹을 만든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기간시설 건설계획은 물론이고 1993년 대전 엑스포 유치 마스터플랜, 2012 여수 엑스포 기획 및 설계 등에 기여했다. WCO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국제 네트워크로 지원하기 위해 1987년 창설했고, 지금은 실크로드 도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친환경적 도시 건설을 유도하고 있다. 곽 대표가 이렇게 활기차게 활동하는 원동력에 태권도가 있었다. 태권도에서 배운 호국정신을 국가번영정신으로 발전시켰고, 미국 유학 시절부터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준비해 실행했다. 지금도 최소 주 1회는 WCO 태권도장에서 수련하고 있다. 먼저 복식호흡과 명상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뒤 본격적인 신체 단련에 들어간다. 정신 수양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곽 대표는 평소엔 걷기와 주변 청소로 건강을 관리한다. 집(서울 신당동) 근처 매봉산과 남산을 매일 오른다. 40여 년 전부터 하고 있는 ‘남산소나무 살리기’도 그에겐 운동이다. 남산을 걷다 아카시아나무가 너무 빨리 자라며 소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을 보고 아카시아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매일 하는 집 주변 서울성곽 청소도 그의 건강을 지켜주고 있다. 가지치기와 청소의 운동량이 상당하다. 모두 태권도에서 배운 봉사정신에서 비롯됐다. 태권도 9단인 곽 대표는 “이제 뉴노멀 시대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시대 변화에 잘 적응하려면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심신을 단련시키는 태권도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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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양종구]희망의 태권도

    태국과 우즈베키스탄은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태권도 첫 금메달을 땄다. 태국의 파니팍 웡파타나낏이 여자 49kg급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울루그베크 라시토프가 남자 68kg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뉴욕타임스(NYT)는 25일(현지 시간) 이 소식들을 전하면서 태권도가 메달 획득이 어려웠던 스포츠 약소국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된 태권도는 12개국 이상 국가에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안겼다. 2016년 리우 대회에서 코트디부아르와 요르단은 국가 최초이자 유일한 금메달을 태권도에서 땄다. ▷태국의 태권도 첫 금메달은 한국 사범들이 1960년대 중후반 동남아시아 태권도 보급에 나선 지 50여 년 만에 일군 성과다. 웡파타나낏을 조련한 최영석 감독은 2002년부터 20년째 태국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태권도 강국으로 키우고 있다. 태국은 2004년 아테네 대회부터 2016년 리우 대회까지 4회 연속 태권도에서 5개의 메달(은 2, 동 3)을 획득한 뒤 이번에 금메달까지 땄다. ▷올림픽 금메달의 효과는 크다. 공식 국가대항전인 올림픽에서 국기를 달고 최정상에 서는 순간 웡파타나낏은 물론 태국 국민은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리우에서 동메달에 그쳤던 웡파타나낏은 명실상부한 태국 최고 스타가 됐다. 최 감독까지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태국 현지 언론들은 역사적인 금메달을 획득하게 해준 최 감독이 계속 태국을 지도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프리카의 튀니지 코트디부아르 니제르, 아시아의 태국 우즈베키스탄 요르단 네팔 등 스포츠 약소국들은 한국 사범들을 영입해 태권도를 국가 차원에서 집중 육성하고 있다. 성과도 계속 나온다. 이번 대회에서 튀니지의 무함마드 칼릴 젠두비가 남자 58kg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역대 두 번째 태권도 메달이다. ▷현재 210개국이 세계태권도연맹(WT)에 가입했다. 태권도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스포츠다. 실력도 평준화되고 있다. 매 대회 돌풍을 일으키는 국가가 나오고 있고 이번에도 태국 우즈베키스탄 크로아티아 등이 새롭게 부상했다. 역으로 한국의 금메달 수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 일부에선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이 흔들린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걱정해야 할 건 이뿐만이 아니다. 전자호구를 도입한 뒤 파워 넘치는 플레이보다는 센서를 터치하는 잔기술로 점수 따기에만 몰두하는 경기 방식이 태권도의 인기를 위협하고 있다. 박진감이 떨어져 팬들이 점점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선수들을 많이 키워 경기력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권도 자체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도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종주국의 중요한 임무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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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양종구]“세계 양궁의 지배자”

    26일 열린 대만과의 도쿄 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결승. 한국 오진혁이 3세트 3번 사수로 나서자 먼저 쏜 김우진이 뒤에서 “7, 6, 5, 4…”라고 불러줬다. 오진혁은 자신 있게 시위를 당겨 10점을 명중했다. 3명이 60초 안에 각 한 발씩 쏘는 단체전에서 마지막 사수는 남은 시간을 모르면 심리적으로 불안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수들끼리 남은 시간을 알려주게 한 것. ▷남자 단체전 우승으로 한국은 도쿄 올림픽에 걸린 총 5개의 양궁 금메달 중 벌써 3개를 획득했다. 앞서 한국이 여자 단체전에서 사상 첫 9연패를 하자 AP통신은 ‘이름이 바뀔 수 있겠지만, 한국 여자 양궁의 지배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타전했다. 여자 양궁의 9연패는 미국과 케냐가 각각 남자 수영 400m 혼계영과 육상 장거리 장애물 경기에서 보유한 특정 종목 최다 우승 기록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기록이다. 남자도 대회 2연패에 이은 6번째 정상이다. ▷한국 양궁의 비결은 남녀 모두 선발 과정의 공정한 경쟁과 준비 과정의 철저한 디테일이다. 한국에서는 ‘대표로 선발만 되면 금메달’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하게 실력을 검증한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4월까지 3차례의 평가전으로 남녀 각 8명을 뽑고, 선수촌에서 함께 합숙훈련하며 다시 2차례의 평가전으로 각 3명을 최종 선발했다. 과거 기존 대표 선수는 1, 2차전을 면제해 줬지만 이번엔 그런 특혜도 없앴다. 이렇게 살아남은 선수들은 치밀한 실전 훈련을 했다. ▷선수들은 5월부터 충북 진천선수촌에 도쿄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하고 똑같이 만든 훈련장에서 활을 쐈다. 심지어 점수를 보여주는 전광판의 밝기까지 똑같았다. 밝기 차이가 선수들 시각에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전 경기 때도 선수들끼리 격려하며 돕는 세세한 루틴이 있다. 혼성경기에서 김제덕이 먼저 쏜 뒤 바로 안산을 향해 “지금 바람 없으니 자신 있게 쏘면 돼요”라고 정보를 줬다. 초 알리기도 그 연장선이다. 한국만의 현장 전술이다. ▷남녀가 함께 훈련하는 환경도 양궁 발전에 도움이 됐다. 대표팀 중 유일하게 양궁만 남녀가 함께 훈련한다. 일부 종목은 남녀 합동 훈련을 터부시하기까지 하지만 양궁은 체력부터 기록 훈련까지 똑같이 한다. 여자 선수들은 한 수준 높은 남자 대표 선수들과 거칠게 경쟁하면서 실력은 물론이고 자신감까지 업그레이드됐다. 남자 선수들은 한국 여성의 섬세함과 적극성을 배웠다. 명품과 짝퉁의 차이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세계 여러 나라가 한국의 지도자를 스카우트해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지만, 한국 양궁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 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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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기만 했는데 확 빠져”…의사도 놀란 노르딕워킹 효과[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주연서 INWA 코리아 사무국장(49)은 모델 출신 노르딕워킹 전도사다. 어려서부터 모델 활동을 했고, 사업을 하다 몸 상태가 나빠졌다. 노르딕워킹을 알게 되면서 푹 빠져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7년 전이었어요. 모델 에이전시 사업을 하는데 한 노르딕워킹 브랜드에 모델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일하다 노르딕워킹을 접했어요. 30대 전후 직장인들을 포커스해서 마케팅 기획하는 것이었습니다. 후배 모델들을 소개해주고 빠지려고 하는데 저도 배워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배웠는데 너무 좋았어요. 저도 운동을 좋아했는데 활동량도 많고 야외를 걷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배우자마자 강사로 나섰다. “제가 모델을 해서인지 저를 지도해주신 분이 바로 강의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전북 전주 공무원연수원에 가서 강의를 했습니다.” 배우며 강의하고를 반복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르딕워킹을 생활화했다. 몸도 바뀌었다. “제가 당시까지 10년 넘게 사업상 출장을 많이 다니다보니 건강관리를 위해 운동을 했는데도 몸이 자주 피곤했어요.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항진증이라고 하더군요. 약을 먹었죠. 허리에 통증도 왔어요. 그런데 노르딕워킹을 하고 1년 뒤 병원에 갔더니 말끔하게 나았다는 겁니다. 저도 놀랐고 의사도 놀랐습니다. 자연 속에서 걷다보니 효과가 배가 된 것 같아요. 그 때부터 약을 끊었습니다.” 체력, 특히 심폐지구력도 좋아졌다. 평소 요가와 수영, 골프, 사이클, 배드민턴 등 다양한 운동을 즐겼던 주 국장은 사업을 하면서는 주로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건강관리를 하고 있었다. 노르딕워킹을 접한 뒤엔 노르딕워킹에 집중하고 있다. 2016년부턴 모든 사업을 접고 INWA 코리아에서 전문 강사로 활약하게 됐다. INWA(International Nordic Walking Federation)는 핀란드에 본부가 있는 국제노르딕워킹협회이다. INWA 코리아는 체계적인 INWA 교육프로그램을 보급하고 있다. 주 국장은 네덜란드와 핀란드에 가서 전문 강사 자격증도 획득했다. 주 국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을 계기로 새롭게 시도한 프로그램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코로나19 탓에 실내 운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체중이 느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속칭 ‘확찐자’라고…. 그래서 지난해 12월 말 자연 속을 걷고 싶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효과적이라 저도 놀랐습니다.” 주 4회 매회 2시간 정도 함께 노르딕워킹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2시간 함께 걸으면 10km를 넘게 걷는다. 나머지 요일엔 개인적으로 1만보 이상 노르딕워킹을 하면 된다. 노르딕워킹 1만보도 2시간가량 해야 한다. “104kg의 한 남자분은 이번 달로 7개월째 인데 25kg이 빠졌어요. 첫 3개월에 14kg 감량했죠. 79kg의 여자분은 이제 4개월 차인데 65kg으로 14kg이나 줄었어요.” 주 국장은 “회원들 모두 제대로 잘 먹고 뺀 것이라 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주로 복부 내장지방, 그리고 피하 지방이 빠진다. 상체의 목, 등, 팔에도 지방이 많은데 노르딕워킹을 하면 그 부분 지방도 잘 빠진다”고 말했다. 25kg을 감량한 남자 회원의 경우 턱선이 두터워 귀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젠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은 노르딕워킹의 기본인 바르게 걷기에 집중했었어요. 이렇게 다이어트에 포커스를 두고 하진 않았는데 이번에 노르딕워킹의 다이어트 효과가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노르딕워킹은 노르딕 스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걷기 방법으로 ‘폴 워킹(Pole walking)’이라고도 한다. ‘노르드(Nord)’는 ‘북방(北方)’을 뜻하는 말로서, 노르딕 스키는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발달했다. 스칸디나비아의 산지는 알프스 산악지방의 가파른 지형과는 달리 대부분 낮은 언덕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긴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인 지역을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스키가 발달했다. 노르딕 스키는 낮은 언덕과 평지가 대부분인 발원지의 지형 특성이 반영되어 평지와 언덕을 가로질러 긴 코스를 완주하는 거리 경기 등으로 나뉘는데 평지와 언덕을 걷는 것으로 발전시킨 것이 노르딕워킹이다. 노르딕워킹은 1990년대 중반 핀란드 등 북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국내에도 2000년대 초중반 들어와 한 때 반짝 인기를 끌고 일부 마니아층에서 즐기는 운동이 됐다. 최근 바른 자세와 다이어트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노르딕워킹의 장점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걷게 해준다는 겁니다. 폴을 활용해 걷기 위해서는 상체에서 어깨의 움직임이 중요합니다. 상체는 어깨가 운동의 시작입니다. 발이 나갈 때 어깨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땅에 짚은 뒤 폴을 끝까지 밀어줘야 보폭이 커지고 운동량도 배가 됩니다.” 주 국장은 INWA의 10단계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보행, 바른 폴 사용법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폴을 잡고 걸으려 하는 순간 가슴이 펴진다. 가슴을 펴지 않으면 폴을 잘 사용할 수 없다. 자세교정에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거북목, 굽어진 등 등도 교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회원들과 함께 걸으면서 지도한다. 북한산성 INWA 코리아 옥상이나 주변에서 기본 교육을 한 뒤 북한산 둘레길을 걷는다. “우리 몸은 큰 근육을 잘 써야 에너지 소비가 잘 됩니다. 걸을 때 허벅지 장딴지가 가동되는데 폴을 잡고 밀면서 걸으면 팔과 어깨 근육은 물론 대흉근과 견갑근, 광배근, 척추기립근 등 상체의 큰 근육도 힘을 쓰게 됩니다. 몸 전체 근육의 90% 이상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에너지 소비가 극대화 됩니다. 다이어트에 좋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3주 이상해야 운동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한달 정도 하면 체중 변화는 크게 없지만 몸이 균형 있게 변합니다. 전체적으로 근육량이 늘고 지방이 없어집니다. 일종의 몸의 탈바꿈이라고 할까요. 3개월 이상 하면 다이어트 효과가 크게 나타납니다. 최소 하루 60~90분은 해야 합니다.” 주 국장은 노르딕워킹 3개월로 10kg을 감량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솔직히 젊은 사람들은 맘만 먹으면 바로 체중을 감량할 수 있지만 갱년기가 지난 여성들은 다이어트가 쉽지 않아요. 호르몬의 영향도 있고, 골격근을 유지하면서 체지방만 빼줘야 합니다. 노르딕워킹이 딱 좋습니다. 우리 회원 중에 교사로 정년퇴직을 한 60대 후반 여성의 경우 노르딕워킹 4개월째인데 63kg에서 56kg으로 7kg을 감량했어요.” 주 국장은 어떨까? 주 5일 이상, 많게는 하루 4시간 이상 노르딕워킹을 하고 있다. 그래도 체중 변화는 없다고 했다. “전 원래 체중이 많이 나가진 않았어요. 오히려 노르딕워킹을 한 뒤 1~2kg이 증가했죠. 체지방이 빠지고 코어 근육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노르딕워킹으로 몸매가 더 좋아졌다는 평을 받아요. 남자나 여자나 노르딕워킹으로 자세를 바르게 잡고 살이 빠지고 몸이 건강해지면 몸매가 정말 아름다워져요.” 주 국장은 어린이부터 대학생까지 교육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노르딕워킹은 잘못된 자세로 몸이 틀어진 학생들을 잡아줄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자세를 잡아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르신들이 노르딕워킹을 하면 통증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걸을 때 무릎, 허리, 고관절 등에 통증이 있는 분들이라면 폴을 집고 걸으면 통증을 완화 시킬 수 있습니다. 폴로 지면을 압박하기 때문에 무게를 분산시켜 줍니다. 자세 고정에 따른 통증완화도 됩니다. 특히 고관절이 틀어져 있는 분들에게 효과적입니다. 물론 아프지 않은 분들은 바른 자세로 쉽게 걸으면서 건강을 챙길 수 있습니다. 100세 시대를 건강하게 사려면 몸에 무리를 주지 않고 운동효과를 높이는 노르딕워킹이 최고입니다.” 주 국장은 “유럽에서는 노르딕워킹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치매와 파킨슨병 등을 예방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주 국장은 국민대에서 운동처방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체형과 걷는 스타일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딱 맞는 정보를 주려면 더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모델과 패션사업은 접었지만 그는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즐겁게 살고 있어 삶의 만족도는 훨씬 크다”고 했다. 그는 “100세 시대 이렇게 자연 속에서 노르딕워킹하며 건강하게 살면 이보다 행복한 삶이 어디있나”라며 활짝 웃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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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육 운동’으로 새로운 삶…오십견도 사라졌다[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태권도와 골프, 댄스스포츠, 등산…. 체육을 전공했고 다양한 스포츠와 운동을 즐겼지만 체계적인 근육운동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늘 마음속에 ‘언젠간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어야지’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사태가 그를 근육의 세계로 이끌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김경래 전 연세대 미래캠퍼스 인문예술대학 교수(65) 이야기다. “골프 전문가이기 때문에 겨울이면 꼭 따뜻한 나라로 가서 골프를 쳤어요. 추우면 엘보가 와 국내에서는 못 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에는 코로나 19탓에 해외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버킷리스트로 간직했던 근육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로 몸을 단련했고 미국 유학시절 골프와 댄스스포츠를 배우며 다양한 운동을 즐긴 그는 몸매가 날씬했다. 키도 185cm로 컸다. 교양체육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주위에선 ‘근육을 키우면 진짜 보기 좋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런 주위 평가도 있었지만 운동을 좋아하고 체육을 전공했기 때문에 늘 “은퇴한 뒤 여유가 있을 때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코로나19가 그를 근육의 세계로 인도한 셈이다. 김 전 교수는 이왕 하는 김에 제대로 배우기 위해 전문가를 찾았다. 경기도 용인 메카헬스짐 박용인 관장(59)이 눈에 들어왔다. ‘양종구 기자의 100세 건강’에 소개됐고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임종소 씨(77)와 권영채 씨(66)를 지도하고 있는 인물이다. 박 관장은 보디빌딩 국가대표 출신으로 PT계에서 잘 나가는 지도자다. 김 전 교수는 지난해 12월 말 박 관장을 찾아가 개인 PT(퍼스널 트레이닝)를 받기 시작했다. 주 2회 1시간씩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저를 보자마자 관장님이 그러는 거예요. ‘교수님은 대회에 출전해야 한다’고. 처음엔 그냥 근육운동이나 하겠다. 100세 시대 근육을 키워야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기 때문에 찾아 온 것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럼 더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에 대회 출전을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박 관장은 “교수님의 체형이 너무 좋아 조금만 근육을 만들면 바로 입상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대회 출전 같은 목표가 있어야 동기부여가 돼 열심히 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 열릴 예정인 대회를 목표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데 3월 갑자기 대회가 취소되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김 전 교수로선 목표가 사라져 주춤한 데다 은퇴 후 2년간 준비한 사업상 바쁜 일도 겹쳤다. 한 달 반 정도 쉬고 있을 때 6월 27일 월드 내추럴 챔피언십 시그니처(WNC) 대회가 열린다고 해 5월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주 2회 PT 받는 것에 더해 집(경기도 의왕) 근처 피트니스센터에서 1, 2회 추가로 운동했다. 결과는 50세 이상부 스포츠모델과 피지크 부문에서 각각 2위를 차지했다. 최소 몇 년에서 수십 년 운동한 50세 초반 선수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이제 갓 시작한 60대 중반이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근육을 키우면서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먼저 골프 엘보와 오십견이 사라졌다. 그는 “골프 연습 때 왼쪽 팔꿈치가 아팠다. 오른쪽 어깨엔 오십견 증세가 있었다. 통증클리닉까지 갈 정도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팔꿈치와 어깨 주변 근육이 강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송준섭 강남제이에스병원 원장은 “통증 유발 원인이 근육 약화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통증의 원인이 관절이라면 의학적 치료가 우선이다”고 분석했다. 김 전 교수는 미국 퍼듀대 유학시절(스포츠심리학 전공)부터 술과 담배를 다 끊었고 골프와 댄스스포츠, 등산을 즐겼기 때문에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근육운동으로 달라진 것은 몸매가 더 탄력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힘이 좋아지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솟았다”고 했다. 김 전 교수는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입시 당시 인기 있었던 기계공학과(인하대)에 들어갔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군대를 마치고 연세대 체육학과에 다시 들어갔다. 어릴 때부터 태권도를 했기 때문에 체육과에는 잘 적응했다. 체육인으로서도 특이함을 추구했다. 미국 유학 때 골프와 댄스스포츠를 접한 뒤 ‘향후 우리나라에도 꼭 필요한 스포츠’라고 생각해 골프 레슨 프로 및 PGA 투어 프로 자격증을 획득했고, 볼룸댄스(현 댄스스포츠) 지도자 및 심판 자격증까지 땄다. 미국에선 자신의 특기인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해 발로 뛰었다. 태권도 5단 유단자인 그는 퍼듀대에 태권도 지도관 클럽을 만들어 유단자들을 배출했다. 인디애나주 티피카누 카운티 라피엣과 웨스트라피엣으로부터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태권도로 지역사회 보이스클럽 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태권도시범과 활동이 미국 NBC 방송 스포츠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김 전 교수는 귀국한 뒤 연세대 신촌 및 원주, 송도국제캠퍼스에 골프와 댄스스포츠를 보급했다. 댄스스포츠 책도 썼다. 1998년 국내 처음 열린 제1회 슈퍼코리아컵 전국 댄스스포츠선수권대회에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향후 댄스스포츠의 스타로 군림할 박지은(43)-박지우(41) 남매와 함께 겨뤘다. 지은 지우 남매는 한국 댄스스포츠의 전설 박효 전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 회장의 자녀다. 박 회장은 1998년 한국댄스스포츠연합회를 설립해 각종 대회를 개최했다. 댄스스포츠 경력은 보디피트니스에도 도움이 됐다. 박 관장은 “김 전 교수님은 첫 대회부터 무대를 사로잡았다. 댄스스포츠를 해서 인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연기했다”고 평가했다. 김 전 교수는 9월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대회 출전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늦게 시작했지만 근육운동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다. 마치 미국에서 골프와 댄스스포츠를 처음 배우는 기분”이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요즘 나이든 분들은 근육운동과 단백질 섭취에 대해 얘기를 많이 한다. 100세 시대 장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늦게나마 젊음을 되돌리는 회춘약 근육운동을 시작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김 전 교수는 또 다른 새로운 도전도 시작했다. 머리를 잘 써야 치매가 안 걸린다고 판단해 학점은행제로 경영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올 초부터 각 18학점씩을 들었다. 경영학 학사 학위를 받아 나무 의사 자격증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2018년부터 나무 의사 자격증을 획득하면 나무병원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자격증을 따면 근육운동을 즐기면서 나무를 치료하며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그는 “자격증을 따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도전을 계속해야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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