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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은퇴를 선언한 가수 임재범 씨(사진)가 17일 전국투어 콘서트에서 “여기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전부 여러분 덕분”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임 씨는 이날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열린 데뷔 40주년 전국투어 ‘나는 임재범이다’에서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투어를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난다.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니 편안히 보내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그는 은퇴 이유에 대해선 “자초지종을 말하면 가슴이 아프고, 여러분의 마음도 아플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어 “은퇴가 가까워서인지 목 컨디션이 오늘도 좋지 않다. 끝까지 사력을 다하겠다”고 했다.문화체육관광부는 임 씨에게 공로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날 콘서트장을 찾은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수많은 명곡을 통해 국민의 삶에 깊은 위로를 전하고, 대중문화예술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설명했다.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임재범은 1986년 밴드 ‘시나위’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히트곡 ‘비상’, ‘너를 위해’, ‘이밤이 지나면’ 등을 발표하면서 호소력 있는 음색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사랑받았다. 지난해 9월 신곡 ‘인사’를 냈고, 11월부터 전국 투어를 펼치고 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250년 뒤 인류는 핵전쟁으로 자멸하지만 주인공 릴리스는 낯선 우주선 안에서 눈을 뜬다. 그를 구원한 건 미끈거리는 촉수를 뻗는 외계 종족.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유전적 개량’을 요구하는 외계 생명체에게 릴리스는 항변한다. “나는 바라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과학소설(SF)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국 흑인 여성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저자는 백인 엘리트 남성 위주로 돌아가던 SF계의 장벽을 뚫고서 세계적인 SF문학상인 휴고상 등을 거머쥐었다. ‘새벽’은 저자가 펴낸 제노제네시스(Xenogenesis·‘낯선 것’과 ‘창세기’의 합성어로, 부모 세대와 완전히 다른 자녀 세대의 출현을 일컬음) 3부작의 첫 편에 해당한다. 소설은 외계 생명체를 정벌하거나, 혹은 화합을 이루는 단면적 서사에 매몰되지 않는다. 촉수 괴물은 주인공 릴리스를 생물학적 실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릴리스를 가족처럼 돌보고 멸종과 암으로부터 구원한다. 여기에 더해진 관능적 문체는 두 존재의 관계를 우열이나 선악에 따라 규정하기보다 폭력적 연인, 선량한 독재자 등 모순적인 관계로 읽게 만든다. 실험용 쥐 또는 반려동물과 같은 위치에 놓인 릴리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인류가 세계에 자행하고 있는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외계 종족은 릴리스를 향해 서늘한 선언을 한다. “인류를 지능적이고 위계적인 존재로 만들어 주는 복잡한 유전자 조합은 당신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장애물로 남을 것이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어두운 석판 위에 어린 양이 제물로 놓여 있다. 네 다리가 묶인 채 죽음을 기다리는 듯하지만, 표정은 체념보다 수긍에 가까워 보인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사용해 ‘스페인의 카라바조’라고도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의 그림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이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전에 출품된 이 그림은 단순한 구성에 크기(가로세로 52.1X35.6cm)도 자그마하지만 관람객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끄는 힘을 지녔다. 어두운 배경 속 밝은 양의 모습이 마치 연극 무대처럼 강렬한 대비를 이뤘고, 양털은 손을 가져다 대면 부들거리는 촉감이 느껴질 듯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수르바란은 이처럼 경건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종교화와 정물화로 널리 이름을 알렸던 화가다. 종교 지도자들과 지역 귀족들이 그를 적극 후원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수르바란의 초상화와 정물화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다고 한다. 1630년경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화가로 임명되기도 했다. 당시 국왕이 수르바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왕의 화가여, 화가들의 왕이로다”라고 말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어린 희생양의 그림 역시 인기가 상당했는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작품이 적어도 6점 더 그려졌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샌디에이고 미술관 소장본은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꼽힌다. 그림 속 선반에는 ‘양처럼’을 뜻하는 라틴어 글귀(TANQUAM AGNUS)가 작게 새겨졌고, 양의 머리엔 은은한 후광이 그려져 있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에 따르면 이는 예수를 희생 제물에 비유한 성경 구절과 관련이 깊다. 변형본을 소장한 프라도 미술관 측은 “이 시리즈는 종교화와 정물화가 교차하는 성격을 띤다”며 “장르 간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정물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고 평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어두운 석판 위에 어린 양이 제물로 놓여 있다. 네 다리가 묶인 채 죽음을 기다리는 듯하지만, 표정은 체념보다 수긍에 가까워 보인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사용해 ‘스페인의 카라바조’라고도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1598~1664)의 그림 ‘하느님의 어린 양(Agnus Dei)’이다.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전에 출품된 이 그림은 단순한 구성에 크기(가로세로 52.1X35.6cm)도 자그마하지만 관람객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끄는 힘을 지녔다. 어두운 배경 속 밝은 양의 모습이 마치 연극 무대처럼 강렬한 대비를 이뤘고, 양털은 손을 가져다 대면 부들거리는 촉감이 느껴질 듯 사실적으로 묘사됐다.수르바란은 이처럼 경건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종교화와 정물화로 널리 이름을 알렸던 화가다. 종교 지도자들과 지역 귀족들이 그를 적극 후원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수르바란의 초상화와 정물화에 대한 수요가 상당했다고 한다. 1630년경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화가로 임명되기도 했다. 당시 국왕이 수르바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왕의 화가여, 화가들의 왕이로다”라고 말했다는 야샤도 전해진다. 어린 희생양의 그림 역시 인기가 상당했는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작품이 적어도 6점 더 그려졌다. 현재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과 살바도르 플란디우라 컬렉션,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아카데미, 스위스 GMG 재단 등에 소장돼 있는데 각각 크기와 도상에서 살짝 차이가 난다.이번 전시에 출품된 샌디에이고 미술관 소장본은 그 중에서도 특히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으로 꼽힌다. 그림 속 선반에는 ‘양처럼’을 뜻하는 라틴어 글귀(TANQUAM AGNUS)가 작게 새겨졌고, 양의 머리엔 은은한 후광이 그려져 있다. 샌디에이고 미술관에 따르면 이는 예수를 희생 제물에 비유한 성경 구절과 관련이 깊다. 변형본을 소장한 프라도 미술관 측은 “이 시리즈는 종교화와 정물화가 교차하는 성격을 띤다”며 “장르 간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정물화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고 평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의 한국 분관이 올 6월 개관 때 첫 전시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 등 입체파 작품을 선보인다. 프랑스 퐁피두센터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63빌딩에 문을 여는 ‘퐁피두센터 한화’는 입체주의를 주제로 6∼10월 개관 전시를 연다. 퐁피두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입체주의 작품들을 연대기와 주제에 따라 총 8개 구역으로 나눠, 사조가 여러 갈래로 발전한 과정을 따라가게끔 구성한다. 입체파 화가인 브라크와 피카소, 후안 그리스, 그리고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등이 주요 작가로 꼽힌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들도 아우른다. 유럽 전역으로 입체주의를 전파한 외국 예술가인 나탈리야 곤차로바, 알베르토 마녤리부터 이른바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소니아 들로네, 프랑시스 피카비아 등도 서울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퐁피두센터는 “입체주의가 단순히 기하학적 표현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성을 창시한 순간을 이룬다는 점을 이번 서울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퐁피두센터 한화에서는 해마다 2회, 4년간 8차례에 걸쳐 퐁피두센터 소장품을 활용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약 1500㎡ 규모인 전시 공간에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조 위주로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의 한국 분관이 올 6월 개관 때 첫 전시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 등 입체파 작품을 선보인다.프랑스 퐁피두센터에 따르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63빌딩에 문을 여는 ‘퐁피두센터 한화’는 입체주의를 주제로 6~10월 개관 전시를 연다. 퐁피두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입체주의 작품들을 연대기와 주제에 따라 총 8개 구역으로 나눠, 사조가 여러 갈래로 발전한 과정을 따라가게끔 구성된다. 입체파 화가인 브라크와 피카소, 후안 그리스, 그리고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등이 주요 작가로 꼽힌다.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들도 아우른다. 유럽 전역으로 입체주의를 전파한 외국 예술가인 나탈리아 곤차로바, 알베르토 마넬리부터 이른바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소니아 들로네, 프란시스 피카비아 등도 서울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퐁피두센터는 “입체주의가 단순히 기하학적 표현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성을 창시한 순간을 이룬다는 점을 이번 서울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한다”고 설명했다.퐁피두센터 한화에서는 해마다 2회, 4년간 8차례에 걸쳐 퐁피두센터 소장품을 활용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약 1500㎡ 규모인 전시 공간에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조 위주로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K컬처 열풍으로 지난해 국립박물관 문화상품이 사상 최대의 매출을 낸 가운데, 최고의 효자 상품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캐릭터 더피를 닮은 ‘까치 호랑이 배지’였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K콘텐츠의 인기로 지난해 문화상품 ‘뮷즈’의 연간 매출이 역대 최고치인 413억 원을 기록했다”고 13일 밝혔다. 400억 원대를 넘어선 건 2004년 재단 설립 이후 처음으로, 2024년 매출액(약 212억 원)의 약 2배에 이른다. 가장 사랑받은 상품은 ‘까치 호랑이 배지’였다. 지난해 ‘케데헌’ 인기의 영향으로 약 13억 원어치인 9만 개가 판매됐다. 판매량 2위 상품은 ‘취객선비 3인방 변색잔 세트’(약 6만 개)였다. 음료를 부으면 잔 표면의 선비 얼굴이 붉게 물들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상품이다. 조선 후기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 속 취객 선비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밖에도 단청 문양 키보드와 신라 금관총 금관을 본뜬 브로치 등이 큰 인기를 얻었다. 조선의 왕이 집무를 볼 때 입던 곤룡포(袞龍袍) 문양 비치타월도 잘 팔렸다.‘뮷즈’ 열풍을 이끈 건 가족 단위 방문이 많은 30, 40대 관람객이었다. 재단 측에 따르면 30대가 35.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40대(25.9%)가 뒤를 이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K컬처 열풍으로 지난해 국립박물관 문화상품이 사상 최대의 매출을 낸 가운데, 최고의 효자 상품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캐릭터 더피를 닮은 ‘까치 호랑이 배지’였다.국립박물관문화재단은 “K콘텐츠 인기로 지난해 문화상품 ‘뮷즈’의 연간 매출이 역대 최고치인 413억 원을 기록했다”고 13일 밝혔다. 400억 원대를 넘어선 건 2004년 재단 설립 이후 처음으로, 2024년 매출액(약 212억 원)의 약 2배에 이른다.가장 사랑받은 상품은 ‘까치 호랑이 배지’였다. 지난해 ‘케데헌’ 인기 영향으로 약 13억 원어치인 9만 개가 판매됐다. 판매량 2위 상품은 ‘취객선비 3인방 변색잔 세트’(약 6만 개)였다. 음료를 부으면 잔 표면의 선비 얼굴이 붉게 물들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된 상품이다. 조선 후기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의 ‘평안감사향연도’ 속 취객 선비를 토대로 만들어졌다.이 밖에도 단청 문양 키보드와 신라 금관총 금관을 본뜬 브로치 등이 큰 인기를 얻었다. 조선의 왕이 집무를 볼 때 입던 곤룡포(袞龍袍) 문양 비치타월도 잘 팔렸다.‘뮷즈’ 열풍을 이끈 건 가족 단위 방문이 많은 30, 40대 관람객이었다. 재단 측에 따르면 30대가 35.4%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40대(25.9%)가 뒤를 이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살아 있는 역사이니 가 보아라. 영웅심을 기르기 위하여 가거라…그리하여 조선의 산 많음이 긴절(緊切)한 의미가 있도록 할지어다.”(1917년 잡지 ‘청춘’에 실린 ‘산에 가거라’에서) 일제강점기 문인이자 학자였던 최남선(1890∼1957)은 등산을 통해 한민족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길 권했다. 이후 1920년대 여러 문인이 신문과 잡지에 잇달아 명산 기행문을 냈고, 이는 조선인의 등산 의욕과 자긍심을 자극했다고 한다.올해도 새해를 맞아 전국 명산에 올라 기운을 받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선호하는 취미 상위권에 언제나 꼽히는 등산이 최근엔 한국 여행을 오는 외국인들까지 사로잡고 있다. ‘K등산’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조선시대 선비들은 등산이 아니라 ‘유산(遊山·산으로 놀러 다님)’을 했다. 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사학)는 유산을 “명산 속 사찰을 찾아 보고, 골짜기에서 물놀이하고, 시문도 짓는 선비들의 유람 여행”(산악연구 2호, ‘한국 근대 등산문화의 형성과 그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산을 유람하는 건 선조와 선배 학자의 길을 되짚으며 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사대부의 나들이, 뱃놀이와 꽃놀이’, 김정운 지음·한국국학진흥원 기획). 17세기 경북 예안의 사대부 김광계(1580∼1646)는 퇴계 이황이 수련을 했던 청량산에 여러 차례 오르며 산을 수양과 성찰, 공부의 장으로 이용했다. 사대부의 유산 문화는 1920년대까지도 영향을 줘 많은 지식인들이 명산을 찾고, 기행문인 ‘유산기’를 남겼다. 오늘날처럼 주로 주말에 도심 근교 산을 오르는 ‘여가 스포츠’로서의 등산은 1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연구서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오영훈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계약교수 지음)에 따르면 근대적 등산 문화는 1910년 전후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처음엔 통감부 등 소속의 일본인들이 구성한 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차츰 조선인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오 교수는 “신체를 단련하고 기개를 길러 국권을 되찾는다는 ‘지·덕·체 3육론’의 영향으로 회사나 학교 등 단체에서 등산 모임이 생겨났다”며 “조선인에게 등산은 ‘상상으로나마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탈출구’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1921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백두산행’은 당대 등산에 대한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 산악의 조종(祖宗)이며 두뇌다. …백두산 같은 산에서 수많은 영웅이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1930년대 들어선 조선총독부도 등산을 권장했다. 등산로를 정비하고, 학교에 산악부를 설치했다. 1942년엔 ‘식민지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전환시킨다’는 연마육성(鍊磨育成)을 목적으로 등산을 보급하기도 했다. 1931년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조선산악회를 조직하자, 이에 자극 받은 조선인 산악인들은 1937년 ‘백령회(白嶺會)’를 결성해 산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급속히 경제가 성장한 1960, 70년대엔 등산이 ‘극복과 경쟁의 활동’이 됐다. 국위 선양을 위한 히말라야 등정이 국가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건강과 휴식을 위해 산을 찾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건 1980년대에 들어서다. 오 교수는 “정부 주도하에 국립공원 주변 리조트와 탐방로가 조성되고, 전국의 도로망이 개선된 것과 맞물리면서 등산은 대중적 취미가 됐다”며 “모험적인 뉘앙스가 빠진 ‘산행’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이후로 보인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살아있는 역사이니 가 보아라. 영웅심을 기르기 위하여 가거라…그리하여 조선의 산 많음이 긴절(緊切)한 의미가 있도록 할지어다.”(1917년 잡지 ‘청춘’에 실린 ‘산에 가거라’에서)일제강점기 문인이자 학자였던 최남선(1890~1957)은 등산을 통해 한민족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길 권했다. 이후 1920년대 여러 문인이 신문과 잡지에 잇달아 명산 기행문을 냈고, 이는 조선인의 등산 의욕과 자긍심을 자극했다고 한다.올해도 새해를 맞아 전국 명산에 올라 기운을 받고, 마음가짐을 다잡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선호하는 취미 상위권에 언제나 꼽히는 등산은 최근엔 한국 여행을 오는 외국인들까지 사로잡고 있다. ‘K등산’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조선시대 선비들은 등산이 아니라 ‘유산(遊山·산으로 놀러 다님)’을 했다. 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사학)는 유산을 “명산 속 사찰을 찾아 보고, 골짜기에서 물놀이하고, 시문도 짓는 선비들의 유람 여행”(산악연구 2호, ‘한국 근대 등산문화의 형성과 그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산을 유람하는 건 선조와 선배 학자의 길을 되짚으며 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사대부의 나들이, 뱃놀이와 꽃놀이’, 김정운 지음·한국국학진흥원 기획). 17세기 경북 예안의 사대부 김광계(1580~1646)는 퇴계 이황이 수련을 했던 청량산에 여러 차례 오르며 산을 수양과 성찰, 공부의 장으로 이용했다. 사대부의 유산 문화는 1920년대까지도 영향을 줘 많은 지식인들이 명산을 찾고, 기행문인 ‘유산기’를 남겼다.오늘날처럼 주로 주말에 도심 근교 산을 오르는 ‘여가 스포츠’로서의 등산은 1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지난달 발간한 연구서 ‘한국 근대 등반, 역동의 한 세기’(오영훈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계약교수 지음)에 따르면 근대적 등산 문화는 1910년 전후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처음엔 통감부 등 소속의 일본인들이 구성한 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차츰 조선인으로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오 교수는 “신체를 단련하고 기개를 길러 국권을 되찾는다는 ‘지·덕·체 3육론’의 영향으로 회사나 학교 등 단체에서 등산 모임이 생겨났다”며 “조선인에게 등산은 ‘상상으로나마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아를 회복하는 탈출구’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1921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백두산행’은 당대 등산에 대한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산악의 조종(祖宗)이며 두뇌다. …백두산 같은 산에서 수많은 영웅이 태어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1930년대 들어선 조선총독부도 등산을 권장했다. 등산로를 정비하고, 학교에 산악부를 설치했다. 1942년엔 ‘식민지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전환시킨다’는 연마육성(鍊磨育成)을 목적으로 등산을 보급하기도 했다. 1931년을 전후해 일본인들이 조선산악회를 조직하자, 이에 자극 받은 조선인 산악인들은 1937년 ‘백령회(白嶺會)’를 결성해 산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급속히 경제가 성장한 1960, 70년대엔 등산이 ‘극복과 경쟁의 활동’이 됐다. 국위 선양을 위한 히말라야 등정이 국가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건강과 휴식을 위해 산을 찾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건 1980년대에 들어서다. 오 교수는 “정부 주도 하에 국립공원 주변 리조트와 탐방로가 조성되고, 전국의 도로망 개선과 맞물리면서 등산은 대중적 취미가 됐다”며 “모험적인 뉘앙스가 빠진 ‘산행’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이후로 보인다”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슈퍼맨이 처음 등장하는 만화책으로, 미국 할리우드 배우 니컬러스 케이지가 소장했던 ‘액션 코믹스’ 1938년 초판본(사진)이 경매에서 1500만 달러(약 219억 원)에 판매됐다. 만화책으로는 사상 최고 경매가다. 11일 미 만화책 경매회사 코믹커넥트에 따르면 DC코믹스가 1938년 6월에 발간한 ‘액션 코믹스 1’ 초판본이 9일(현지 시간) 한 비공개 거래에서 익명의 수집가에게 1500만 달러에 팔렸다. 해당 만화책의 출간 당시 가격은 10센트로,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해도 2달러가 조금 넘는다. ‘액션 코믹스 1’은 슈퍼맨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연재 만화잡지로, 세계 만화 및 영화 역사에서 슈퍼히어로 장르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남아있는 수량은 100부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경매가는 종전 만화책 최고 경매가인 912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전 기록 역시 지난해 11월 낙찰된 ‘액션 코믹스 1’ 초판본이 세운 기록이었다. 거래를 중개한 메트로폴리스 컬렉터블스-코믹커넥트의 스티븐 피슐러 대표는 “최고 등급 사본일 뿐 아니라, 케이지가 소유했다가 도난당한 뒤 11년 뒤 회수한 이력까지 작용하며 가치가 폭등했다”며 “만화계의 모나리자인 셈”이라고 말했다. 케이지는 해당 초판본을 1996년 15만 달러에 사들였다가, 2000년 자택에서 열린 파티 도중에 도둑 맞았다. 이후 2011년 캘리포니아의 한 창고에서 다시 발견되며 되찾았다. 케이지는 회수 6개월 뒤 경매에 이 책을 내놓았고, 220만 달러에 팔렸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프랑스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까막잡기 놀이’는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여인의 발그레한 뺨을 짚 한 가닥으로 간질이는 연인, 큐피드로 보이는 아이가 우아하고 관능적인 필치로 그려졌다. 화려한 봄꽃과 경쾌한 색채는 당대 귀족 사회가 선호하던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17세기 바로크 화가들이 절제된 색조와 극적인 명암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을 표현하던 화풍과는 극명히 대비된다.‘까막잡기 놀이’를 비롯해 16∼19세기 유럽 회화사에서 이정표를 세운 작품들이 대거 한국을 찾아온다. 3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 서울 ALT.1 미술관에서 개막하는 ‘렘브란트에서 고야까지: 톨레도 미술관 명작’전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300년 유럽 미술사를 한눈에 이번 전시는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털리도) 미술관의 소장품 3만 점 가운데 엄선된 52점을 선보이는 전시. 톨레도 미술관이 100여 년간 수집해 온 유럽 회화 컬렉션을 이렇게 대규모로 공개하는 건 아시아에선 처음이다.이 작품들은 미술사적으로는 바로크부터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미술 등을 아우른다. 약 300년에 걸쳐 유럽에서 사랑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 나타난 예술 사조인 ‘매너리즘’ 시기 대표 화가 엘 그레코의 ‘겟세마네의 기도’, 바로크 미술의 거장 렘브란트 판레인의 ‘깃털 모자를 쓴 청년’, 스페인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수레와 아이들’ 등을 꼽을 수 있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남긴 명작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축소본으로 전시된다.이번 전시는 폭넓은 시대를 망라하는 만큼, 다양한 미술 사조가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17세기부터 그려진 낭만주의 풍경화는 훗날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줬는데, 존 컨스터블의 말년작 ‘어런들 방앗간과 성’이 그런 연관성을 잘 보여준다. 그림을 그릴 당시의 컨스터블은 직접 영국 어런들 지방을 찾아, 구름에 따라 바뀌는 햇빛의 방향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등을 화폭에 즉흥적으로 담아냈다고 한다. 김도현 큐레이터는 “당대 화가들은 작업실을 벗어나 야외에서 그리는 방식을 지향했고, 예술가가 자연을 다루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고 설명했다.● ‘대항해 시대’를 담은 걸작도제작된 시기의 사회적 맥락을 살펴보기 좋은 작품들도 많다.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콜럼버스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첫 카리브해 항해를 마치고 1493년 귀환했을 때의 장면을 그린 이 작품에는 이른바 ‘신대륙’에서 약탈해 온 전리품들이 등장한다. 금과 무기, 모피, 작은 조각상들, 심지어 원주민들까지 강렬한 색채와 역동적인 붓질로 묘사돼 있다. 네덜란드 화가 마리아 판오스테르베이크의 1685년작 정물화에도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등에서 수입된 화려한 석재 꽃병과 조개 장식이 등장한다.영국 풍경화의 대가 윌리엄 터너가 그린 ‘베네치아의 캄포 산토’(1842년)에는 대항해 시대 이후 쇠락의 길을 밟는 이탈리아 항구 도시의 면모가 담겼다. 베네치아 석호 너머로 바라본 풍경이 찬란하면서도 다소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렘브란트에서 고야까지: 톨레도 미술관 명작’전은 컬쳐앤아이리더스가 주최하고 주한 미국대사관과 현대백화점이 후원한다. 강미란 컬쳐앤아이리더스 대표는 “심층적인 전시 설명을 함께 읽다 보면 이번 출품작들이 유럽 미술사에서 갖는 핵심적 역할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7월 4일까지.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슈퍼맨이 처음 등장하는 만화책으로, 미국 할리우드 배우 니컬러스 케이지가 소장했던 ‘액션 코믹스’ 1938년 초판본이 경매에서 1500만 달러(약 219억 원)에 판매됐다. 만화책으로는 사상 최고 경매가다.11일 미 만화책 경매회사 코믹커넥트에 따르면 DC코믹스가 1938년 6월에 발간한 ‘액션 코믹스 1’ 초판본이 9일(현지 시간) 한 비공개 거래에서 익명의 수집가에게 1500만 달러에 팔렸다. 해당 만화책의 출간 당시 가격은 10센트로,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해도 2달러가 조금 넘는다.‘액션 코믹스 1’은 슈퍼맨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연재 만화잡지로, 세계 만화 및 영화 역사에서 슈퍼히어로 장르의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남아있는 수량은 100부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경매가는 종전 만화책 최고 경매가인 912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전 기록 역시 지난해 11월 낙찰된 ‘액션 코믹스 1’ 초판본이 세운 기록이었다. 거래를 중개한 메트로폴리스 컬렉터블즈-코믹커넥트의 스티븐 피슐러 대표는 “최고 등급 사본일 뿐 아니라, 케이지가 소유했다가 도난당한 뒤 11년 뒤 회수한 이력까지 작용하며 가치가 폭등했다”며 “만화계의 모나리자인 셈”이라고 말했다. 케이지는 해당 초판본을 1996년 15만 달러에 사들였다가, 2000년 자택에서 열린 파티 도중에 도둑 맞았다. 이후 2011년 캘리포니아의 한 창고에서 다시 발견되며 되찾았다. 케이지는 회수 6개월 뒤 경매에 이 책을 내놓았고, 220만 달러에 팔렸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지난해 6월,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기지 곳곳에 소형 드론(무인기) 떼가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스파이더 웹’이라 명명한 작전.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드론 부대는 러시아 군용기를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불태웠다. 드론은 인간의 지시 없이도 피아 식별이 가능했다. 최고의 조종사가 비싼 전투기에 올라타 목숨 걸고 적군과 교전하는 영화 ‘탑건’의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머신러닝’ 전문가이자 광운대 경영학부에서 빅데이터 경영을 가르치는 저자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다”고 말한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군사용 드론을 쓰거나 개발하는 국가는 100개국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드론의 확산 속도는 1947년 개발된 AK-47 소총의 보급 속도보다도 빠르다. 저자는 “과거에는 더 많은 탱크와 미사일을 가진 부자가 승자였지만, 이제는 가난한 쪽에도 승산이 있다. 드론은 싸고 쉽고 효과적”이라고 했다. 책은 기계가 인간의 전쟁에 도입된 역사를 되짚으며 시작된다. 1991년 걸프 전쟁은 ‘인간이 기계에 항복한 날’로 불린다. 이라크 군인들은 미 해군의 무인 정찰기와 정밀 유도 무기 앞에 백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29년 뒤,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 자율 무기’가 사람을 공격했다. 2020년 북아프리카 리비아 내전에 투입된 자폭 드론 ‘카르구-2’는 통신 두절 상황에서도 도주 중인 적군을 스스로 찾아내 타격했다. 2002년 개봉했던 공상과학(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현실화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범죄자를 예측하는 첨단 시스템 ‘프리 크라임’이 작동하는 2054년의 사회를 그렸다. 실제로 오늘날 중동 가자지구에선 이스라엘군이 특정 주민이 무장대원일 가능성을 분석하는 AI 킬체인(Kill Chain)을 운용하고 있다. ‘라벤더’라는 이름의 이 AI는 주민 개개인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 위험 점수가 높아지면 군사 표적으로 자동 분류한다. 영화 속 ‘프리 크라임’이 인간 예지자 3명의 역량에 의존해 패턴을 분석하는 것과 달리, ‘라벤더’에선 인간이 거의 빠져 있다. 인간 장교들은 AI가 추천한 표적을 재검증하는 대신 “남성인지 아닌지만 확인”한다. 대신 AI가 표적 동향을 살펴 패턴을 분석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공격을 개시한다. 심리전에서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미군이 시험 중인 ‘고스트 머신’은 적군 지휘관의 목소리로 허위 명령을 발송하고,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심리전 메시지를 자동 생성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주로 민간 기업에 의해 개발되는 상황은 문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지난 전쟁에서는 국가가 방산 기술 발전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페이스X나 팔란티어 등 거대한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앞서가고 있다. 책은 “(기업들이) 자사 기술의 테스트베드로 전쟁을 활용하고 있다”며 “팔란티어가 개발한 AI 표적 식별 소프트웨어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 명중률을 기존 50%에서 최근 80%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세계가 기술적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AI의 목표와 행동을 ‘공동의 안전’ ‘정직’ ‘친절’ 등 인류의 가치와 일치시킬 것, AI의 의사 결정 프로세스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인간의 주도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구현할 것 등이다. AI 대전환 시대, 저자의 목소리는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숫자와 화면 너머 실제 인간의 삶을 떠올려야 한다. 생명을 빼앗는 결정에는 그 무게를 통감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지난해 6월, 러시아의 전략폭격기 기지 곳곳에 소형 드론(무인기) 떼가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보안국이 ‘스파이더 웹’이라 명명한 작전.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드론 부대는 러시아 군용기를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불태웠다. 드론은 인간의 지시 없이도 피아 식별이 가능했다. 최고의 조종사가 비싼 전투기에 올라타 목숨 걸고 적군과 교전하는 영화 ‘탑건’의 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머신러닝’ 전문가이자 광운대 경영학부에서 빅데이터 경영을 가르치는 저자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다”고 말한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군사용 드론을 쓰거나 개발하는 국가는 100개국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드론의 확산 속도는 1947년 개발된 AK-47 소총의 보급 속도보다도 빠르다. 저자는 “과거에는 더 많은 탱크와 미사일을 가진 부자가 승자였지만, 이제는 가난한 쪽에도 승산이 있다. 드론은 싸고 쉽고 효과적”이라고 했다.책은 기계가 인간의 전쟁에 도입된 역사를 되짚으며 시작된다. 1991년 걸프 전쟁은 ‘인간이 기계에 항복한 날’로 불린다. 이라크 군인들은 미 해군의 무인 정찰기와 정밀 유도 무기 앞에 백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29년 뒤,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 자율 무기’가 사람을 공격했다. 2020년 북아프리카 리비아 내전에 투입된 자폭 드론 ‘카르구-2’는 통신 두절 상황에서도 도주 중인 적군을 스스로 찾아내 타격했다.2002년 개봉했던 공상과학(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현실화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범죄자를 예측하는 첨단 시스템 ‘프리 크라임’이 작동하는 2054년의 사회를 그렸다. 실제로 오늘날 중동 가자지구에선 이스라엘군이 특정 주민이 무장대원일 가능성을 분석하는 AI 킬체인(Kill Chain)을 운용하고 있다. ‘라벤더’라는 이름의 이 AI는 주민 개개인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 위험 점수가 높아지면 군사 표적으로 자동 분류한다.영화 속 ‘프리 크라임’이 인간 예지자 3명의 역량에 의존해 패턴을 분석하는 것과 달리, ‘라벤더’에선 인간이 거의 빠져 있다. 인간 장교들은 AI가 추천한 표적을 재검증하는 대신 “남성인지 아닌지만 확인”한다. 대신 AI가 표적 동향을 살펴 패턴을 분석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공격을 개시한다. 심리전에서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미군이 시험 중인 ‘고스트 머신’은 적군 지휘관의 목소리로 허위 명령을 발송하고,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심리전 메시지를 자동 생성한다.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주로 민간 기업에 의해 개발되는 상황은 문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지난 전쟁에서는 국가가 방산 기술 발전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페이스X나 팔란티어 등 거대한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앞서가고 있다. 책은 “(기업들이) 자사 기술의 테스트베드로 전쟁을 활용하고 있다”며 “팔란티어가 개발한 AI 표적 식별 소프트웨어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 명중률을 기존 50%에서 최근 80%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저자는 세계가 기술적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AI의 목표와 행동을 ‘공동의 안전’ ‘정직’ ‘친절’ 등 인류의 가치와 일치시킬 것, AI의 의사 결정 프로세스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인간의 주도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구현할 것 등이다. AI 대전환 시대, 저자의 목소리는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숫자와 화면 너머 실제 인간의 삶을 떠올려야 한다. 생명을 빼앗는 결정에는 그 무게를 통감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들판에 맨발의 소녀가 서 있다. 고동색 곱슬머리와 흘러내리는 옷 주름, 목가적 풍경이 섬세한 붓질과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돼 고상한 느낌을 준다. 당당한 눈빛으로 관람자를 응시하는 이 소녀는 당장이라도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의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에서 볼 수 있는 ‘양치기 소녀’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아돌프 부그로(1825∼1905)의 작품이다. 소장처인 미국 샌디에이고미술관 측 표현을 빌리면 “비슷한 시기 활동한 밀레나 쿠르베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이 그린 ‘흙내 나는 농부’가 아닌, 고전적인 목가시(牧歌詩)에 등장하는 이상화된 양치기”가 화폭에 담겼다.‘양치기 소녀’는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전시된 호아킨 소로야(1863∼1923)의 그림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스페인 인상주의 화가인 소로야의 ‘라 그랑하의 마리아’ 속 여인은 과감하고 경쾌한 붓질로 그려졌다. 이와 달리 프랑스 아카데미 종신회원이었던 부그로는 고전적인 미(美)의 기준에 충실하게 소녀를 완성했다. 신체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히 묘사됐고, 빛과 그림자는 세밀하게 표현됐다.흠잡기 어려운 기술과 서정성을 갖춘 화가지만, 부그로가 활동한 19세기 후반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생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라파엘로를 존경했다는 부그로는 여신이나 요정, 성모 마리아 등 주로 역사, 종교, 신화와 관련된 소재를 그렸다. 고전적 그림은 국가 기관과 상류층 수요가 꾸준했기에 미술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종종 폄하되고 시장 가격이 불안정하던 상황과 대비된다.그러나 유럽에서 인상주의가 확산되고 미술계에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면서, 부그로는 ‘과거에 갇힌 기교파 화가’ 취급을 받기도 했다. 발레리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에드가르 드가는 매끄럽고 인위적인 그림을 묘사할 때 경멸적인 뉘앙스를 담아 ‘부그로풍(Bouguereaut´e)’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부그로가 파리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제자인 앙리 마티스가 그의 화풍과 훈련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일화도 전한다.하지만 오늘날엔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미국 비영리 교육기관인 ‘아트 리뉴얼 센터’는 부그로를 두고 “사회적 변화로 인해 불운하게 저평가된 화가”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들판에 맨발의 소녀가 서 있다. 고동색 곱슬머리와 흘러내리는 옷 주름, 목가적 풍경이 섬세한 붓질과 부드러운 색채로 표현돼 고상한 느낌을 준다. 당당한 눈빛으로 관람자를 응시하는 이 소녀는 당장이라도 액자 밖으로 걸어 나올 듯 생동감이 넘친다.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의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에서 볼 수 있는 ‘양치기 소녀’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1825~1905)의 작품이다. 소장처인 미국 샌디에이고미술관 측 표현을 빌리면 “비슷한 시기 활동한 밀레나 쿠르베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이 그린 ‘흙내 나는 농부’가 아닌, 고전적인 목가시(牧歌詩)에 등장하는 이상화된 양치기”가 화폭에 담겼다.‘양치기 소녀’는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전시된 호아킨 소로야(1863~1923)의 그림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스페인 인상주의 화가인 소로야의 ‘라 그랑하의 마리아’ 속 여인은 과감하고 경쾌한 붓질로 그려졌다. 이와 달리 프랑스 아카데미 종신회원이었던 부그로는 고전적인 미(美)의 기준에 충실하게 소녀를 완성했다. 신체는 해부학적으로 정확히 묘사됐고, 빛과 그림자는 세밀하게 표현됐다.흠잡기 어려운 기술과 서정성을 갖춘 화가지만, 부그로가 활동한 19세기 후반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생전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라파엘로를 존경했다는 부그로는 여신이나 요정, 성모 마리아 등 주로 역사, 종교, 신화 관련된 소재를 그렸다. 고전적 그림은 국가 기관과 상류층 수요가 꾸준했기에 미술 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종종 폄하되고 시장 가격이 불안정하던 상황과 대비된다.그러나 유럽에서 인상주의가 확산되고 미술계에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면서, 부그로는 ‘과거에 갇힌 기교파 화가’ 취급을 받기도 했다. 발레리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에드가 드가는 매끄럽고 인위적인 그림을 묘사할 때 경멸적인 뉘앙스를 담아 ‘부그로풍(Bouguereauté)’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부그로가 파리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교편을 잡던 시절, 제자인 앙리 마티스가 그의 화풍과 훈련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하지만 오늘날엔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미국 비영리 교육기관인 ‘아트 리뉴얼 센터’는 부그로를 두고 “사회적 변화로 인해 불운하게 저평가된 화가”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지난해 세계적인 조각가 ‘론 뮤익’전의 흥행 등에 힘입어 사상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부터 ‘국제 미술전’을 해마다 선보인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6일 서울 종로구 미술관에서 열린 신년 간담회에서 “국제 미술계에서 관심 높은 작가와 현상을 탐구하는 국제 미술전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 11월 과천관에서 ‘조지아 오키프와 미국 모던아트 전’을 개막할 예정이다. 모더니즘 회화사에 한 획을 그은 여성 미술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를 중심으로 당대 미국 모더니즘 회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국내에 두꺼운 팬층을 가진 해외 작가들의 전시도 예정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 가운데 최고가로 꼽히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7월부터 ‘과천관 40주년 프로젝트: 빛의 상상들’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 전시는 필립 파레노, 이반 나바로 등 작가들의 설치미술을 ‘빛’을 주제로 망라해 소개한다. 3∼6월 서울관에서는 ‘문제적 작가’인 데이미언 허스트의 아시아권 첫 대규모 개인전이 개최된다.‘K아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국 원로 작가들도 대대적으로 톺아본다. 연말부터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파리의 이방인’ 전은 1950∼197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들을 조명한다. 김기린, 김창열, 방혜자, 이응노, 이우환 등 50여 명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과수원 풍경화로 잘 알려진 한국 근현대 미술의 ‘숨은 거장’ 이대원 회고전도 8월 덕수궁관에서 열린다. 김인혜 학예연구실장은 “원로 작가를 재조명해 미술사를 확장하고 중견 작가에게는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동시대 작가에게는 제작 지원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지난해 세계적인 조각가 ‘론 뮤익’전의 흥행 등에 힘입어 사상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부터 ‘국제 미술전’을 해마다 선보인다.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6일 서울 종로구 미술관에서 열린 신년 간담회에서 “국제 미술계에서 관심 높은 작가와 현상을 탐구하는 국제 미술전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 11월 과천관에서 ‘조지아 오키프와 미국 모던아트 전’을 개막할 예정이다. 모더니즘 회화사에 한 획을 그은 여성 미술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를 중심으로 당대 미국 모더니즘 회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국내에 두꺼운 팬층을 가진 해외 작가들의 전시도 예정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 가운데 최고가로 꼽히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이 7월부터 ‘과천관 40주년 프로젝트: 빛의 상상들’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 전시는 필립 파레노, 이반 나바로 등 작가들의 설치미술을 ‘빛’을 주제로 망라해 소개한다. 3~6월 서울관에서는 ‘문제적 작가’인 데이미언 허스트의 아시아권 첫 대규모 개인전이 개최된다.‘K아트’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한국 원로 작가들도 대대적으로 톺아본다. 연말부터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파리의 이방인’ 전은 1950~197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들을 조명한다. 김기린, 김창열, 방혜자, 이응노, 이우환 등 50여 명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과수원 풍경화로 잘 알려진 한국 근현대 미술의 ‘숨은 거장’ 이대원 회고전도 8월 덕수궁관에서 열린다.김인혜 학예연구실장은 “원로 작가를 재조명해 미술사를 확장하고 중견 작가에게는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동시대 작가에게는 제작 지원을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韓영화 그 자체… 별이 된 안성기(1952∼2026)‘한국 영화의 살아 있는 전설’ 배우 안성기(사진)가 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 1957년 다섯 살에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한 고인은 70년 가까이 200여 편에 출연하며 20세기 영화계 최고의 스타로 자리를 지켰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깊고 푸른 밤’ ‘라디오스타’ 등 숱한 대표작을 남겼으며, ‘실미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1000만 영화란 기록도 세웠다. “내 최고의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이라던 고인은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에도 복귀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30일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진 지 6일 만에 결국 우리 곁을 떠나갔다.》그가 내딛는 발걸음이 한국 영화가 걸어온 길이었다. 5일 영면한 배우 안성기는 ‘국민 배우’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대한민국 영화의 전설이었다. 다섯 살 꼬마 배우로 데뷔해 70년 가까이 연기 외길을 지켜온 그는 한국 영화사(史) 전체를 훑어봐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배우다. 영화계 안팎에서 존경받았던 고인은 ‘후배들의 영원한 선생님’으로도 불렸다. 촬영 현장은 물론이고 사석에서도 예의 바르고 정도를 지켰다. 영화의 ‘사회적 영향력’을 믿었으며, 30년 넘게 국제구호기금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 사실상 연기 활동은 멈춘 상태였다. 투병 중에도 여러 영화제 등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귀 의지를 불태웠으나 끝내 천상의 무대로 떠나갔다.● ‘천재 소년’에서 ‘국민 배우’로“1980년대에 영화며 광고며 정말 많이 쏟아졌죠. 보통 잘나갈 때 확 ‘땡기죠’. 주위에서 ‘메뚜기도 한철’이라 속삭이면 흔들리기 쉬워요. 하지만 전 자제했어요. 영화를 오래 하고 싶었고, 평생 할 거니까요.”(2006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5세에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10년 넘게 아역으로 출연한 작품만 70여 편. 충무로에선 그를 “천재 소년”이라 불렀다. 하지만 1965년 ‘얄개전’을 끝으로 고인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베트남에 진출하려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배우의 길은 천명(天命)이었을까.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로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고인의 화려한 날갯짓은 1980년대 꽃을 피웠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로 대종상 남우신인상을 받은 뒤 당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탄탄한 연기력과 폭넓은 인지도, 온화한 성격 그리고 “내 최고의 작품은 언제나 다음 작품”이라던 도전정신은 그를 넘볼 수 없는 스타로 만들었다.반공법에 연루된 아버지를 둔 청년 만수를 연기한 ‘칠수와 만수’(1988년)에선 시대의 아픔을 담아냈다.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리는, 국내 영화 최초 컬트물 ‘개그맨’(1989년)에선 한국의 찰리 채플린을 마주한 듯했다. 청춘의 부유를 담은 ‘고래사냥’(1984년) 속 노숙인 민우와 ‘깊고 푸른 밤’(1985년)의 야망에 찬 백호빈, ‘투캅스’(1993년)에서 세파에 찌든 조 형사와 ‘라디오 스타’(2003년)의 든든한 매니저까지. 그는 언제나 천변만화(千變萬化)했고, 그때마다 아름다웠다.● “품격을 보여준 삶에 경의를” 고인은 영화가 갖는 영향력과 가치를 믿는 배우였다. “영화로 표현되면, 그 사회는 거기까지 열려 있다”고 했던 그는 시대정신을 담은 작품에 적극적이었다. 최초의 1000만 영화 ‘실미도’(2003년)와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2007년), ‘아들의 이름으로’(2021년) 등이 그랬다. ‘아들의 이름으로’는 노개런티였는데 거기에 사비까지 보탰다.“책임자들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이런 영화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에 계속 이런 영화에 출연하는 거죠.”‘가왕(歌王)’ 조용필과는 같은 중학교를 나온 60여 년 절친. 2003년 조용필은 ‘실미도’의 몇 장면을 18집 타이틀곡 ‘태양의 눈’ 뮤직비디오에 쓰기도 했다. 2013년 나란히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이 별세한 뒤 각계에선 애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소셜미디어에 “화려함보다 겸손을, 경쟁보다 품격을 보여준 삶에 경의를 표한다”고 추모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세대와 시대를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 우리 사회에 밝은 빛이 돼줬다”고 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고인을 평생의 지기(知己)로 여기는 배우 박중훈은 병마와 싸우던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안 선배님을 뵌 시간이 우리 아버지 뵌 시간보다 길어요. 안 선배님은 40년을 가까이서 뵀잖아요. ‘라디오 스타’나 ‘투캅스’ 같은 작품을 하나 더 찍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고인의 마지막 걸음은 대한민국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운구는 배우 이병헌과 이정재, 정우성, 박철민 등이 맡는다. 배창호 감독과 정우성이 조사를 낭독한다. 정부는 5일 고인이 한국 영화에 기여한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유족으로는 부인인 조각가 오소영 씨와 아들 다빈 필립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9일 오전 6시.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사지원 기자 4g1@donga.com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