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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이 있는 한 배우를 하고 싶어요. 75세가 됐을 때 영화 ‘집으로…’의 할머니 같은 역할을 하면 정말 좋겠어요.”(2010년 동아일보 인터뷰) 7일 오후 3시경 향년 56세로 별세한 한국 최초의 ‘월드 스타’ 강수연은 늘 그랬듯 영화에 오롯이 헌신하고자 했다. 올해 공개하는 넷플릭스 영화 ‘정이’로 복귀한 뒤 연기를 본격적으로 재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뇌출혈에 따른 심정지로 5일 쓰러진 그는 결국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을 8일 찾은 임권택 감독은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내 영화가 더 빛날 수 있었다. 워낙 영리한 배우라 숱한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촬영에 지장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감사한 배우”라며 비통해했다. 봉준호 감독은 “영정사진이 영화 촬영 소품같이 느껴질 정도로 실감이 안 난다”고 말했다. 고인이 걸어온 길은 한국 영화사와 맥을 같이한다. 1969년 세 살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한 후 초등학생 때 어린이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1976년)과 ‘정의의 번개돌이’(1978년)에 출연하며 아역 스타로 떠올랐다. 고교 시절인 1982년 영화 ‘깨소금과 옥떨매’, 1983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에 출연하며 TV와 스크린을 넘나들었다. 정식 영화 데뷔작은 1976년 ‘핏줄’이다. 이후 영화 ‘별 3형제’(1977년), ‘어딘가에 엄마가’(1978년)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1985년 김수형 감독의 ‘W의 비극’,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본격적인 도약을 예고했다. 배 감독은 “아역 시절부터 재능이 특출해 눈여겨봤는데 성인이 돼서도 그 참신함이 여전하더라. 발랄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20대 초반에 ‘젊은 거장’ 배우가 된 데에는 임권택 감독의 공이 컸다. 고인은 1987년 임 감독의 ‘씨받이’에서 주인공 ‘옥녀’ 역을 맡아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한국 배우가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한 건 처음이었다. 1989년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월드 스타’로 떠올랐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1997년 인도 트리반드룸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했는데 현지인들이 ‘영화 ‘씨받이’를 봤다. 강수연 연기가 정말 좋았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며 “고인은 한국영화와 한국 배우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2011년 방송에서 “당시 모두가 노출 연기에만 관심을 가져 큰 상처를 받았다. 상을 타고 나니 갑자기 다들 ‘너 어쩌면 그렇게 연기를 잘하느냐’고 물어 상처가 싹 치유됐다”고 했다. 영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등 1980, 90년대 화제작에 다수 출연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강조하거나 여성이 겪는 차별을 들여다본 작품에 출연했다. 2000년대 드라마 ‘여인천하’(2001∼2002년)의 주인공 정난정 역으로 압도적인 연기를 펼쳐 연기대상을 받았다. 공개되지 않은 ‘정이’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작은 2013년에 개봉한 단편영화 ‘주리’다. 시드니국제영화제 심사위원(2013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2015∼2017년)을 역임하며 국내외 영화계 발전에도 기여했다. 고인은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답을 안 주는 짝사랑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쓰러지기 3주 전까지 ‘정이’ 후시녹음을 하며 한순간도 영화를 손에 놓지 않았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른다. 김동호 전 위원장이 장례위원장을, 임 감독과 배우 김지미 박중훈 안성기 박정자 등이 장례 고문을 각각 맡았다. 10일 오후 10시까지 조문을 받은 뒤 11일 오전 영결식을 한다. 영결식은 영화진흥위원회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한다. 영화 ‘베테랑’ 명대사의 원작자스태프 챙기는 인간적인 면모 유명비구니역 삭발-겨울 얼음물 입수 등“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배우”“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영화 ‘베테랑’(2015년)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내뱉은 이 대사의 원작자는 배우 강수연 씨다. 스태프를 챙길 때나 사석에서 이 말을 자주 한 고인은 류승완 감독과 만나 농담처럼 말했다. 이 말이 ‘베테랑’에 나오며 돈의 유혹에도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의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고인은 의리 있고 인간적인 면모로 유명했다. 그를 월드 스타에 오르게 한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는 특히 각별했다. 2008년 부산 동서대가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을 출범시키자 고인은 특강 강사들을 다 섭외했다. 임 감독은 2010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강사료로) 몇백만 원은 줘야 하는 배우나 스태프들을 수연이가 다 데려온다”고 했다. 카리스마 있고 불의 앞에서 단호히 행동해 ‘깡수연’으로도 불렸다. 과거 제작자가 나쁜 의도로 그를 호텔에 불렀을 때 주저 없이 뺨을 때렸다. 그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하는 건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못 받아들인다”라고 잘라 말했다. ‘말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계 유명한 애주가들도 그를 술로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삭발 투혼’은 뗄 수 없는 단어.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비구니 역을 위해 삭발하던 모습은 한국영화사의 역사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고인은 당시 “머리는 또 자라는 법”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드라마 ‘여인천하’(2001∼2002년)에선 얇은 소복만 입고 한겨울 얼음물에 장시간 들어가 화제가 됐다. 배우 손숙은 “강수연이야말로 배우다. 다른 수식어가 없다. 오롯이 인생을 거기에 바친 사람”이라고 했다. 고인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등학교 때부터 사실상 가장 역할을 했다. 이에 “가정환경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독신주의자는 절대 아니다”라며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싶지만 결혼은 인연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답했다. 당당함은 고인을 표현하는 말이었지만 그 이면엔 여린 모습이 있었다. 고인은 “언제 가장 외롭냐”는 질문에 “당당한 척할 때, 그때가 가장 외롭다”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서비스 품질 향상을 위해 통화 내용은 녹음되며….” 고객 센터에 전화하면 나오는 안내 문구를 유심히 들어보자. 녹음되는 건 통화 내용만이 아니다. 전화를 건 모두의 목소리도 포함된다. 목소리가 녹음되는 게 무슨 문제냐고 되물을 수 있다. 과학 기술은 목소리만으로 많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목소리 톤으로 감정이나 성격을 추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앓는 질병부터 체중, 신장, 나이, 인종, 나아가 교육과 소득 수준까지. 목소리에 많은 정보가 담겼다면 결국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충돌한다. 이 책은 음성인식의 탄생과 확산, 이를 수집하기 위한 거대 기업들의 전략과 속임수 등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구글, 아마존, 애플, 삼성 등은 전방위적으로 음성 데이터를 수집해 전례 없이 강력한 방식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음성 데이터에 개인이 공유하고 싶지 않은 생체정보가 담겨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음성 데이터가 기업의 전략에 사용되는 걸 마냥 허용해줄 수만은 없다고 저자가 말하는 이유다. 나아가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또 음성 데이터가 정부의 통치 기술과 결합하면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마존의 알렉사, 삼성의 빅스비, 애플의 시리…. 친근한 이름을 달고 나긋한 목소리로 존재하는 음성인식 기술의 실체는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험악하고 위협적인 미래를 초래할지도 모른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다큐멘터리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연출가 전윤환(36)에게 비교적 최근 벌어진 경험을 담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지난해 6월 국립극단으로부터 기후위기에 대한 연극 연출을 제안받았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작품을 올릴 공연장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이었다. 8년 차 연출가인 그에게 명동예술극장은 꿈의 무대였다. 최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기후위기라는 작품 주제보단 좋은 극장에서 작품을 올릴 수 있다는 데 사로잡혀 있었다”며 “개인의 욕망에만 충실한 제 마음이 기후위기를 불러온 인간의 욕심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11일 개막하는 ‘기후비상사태’는 기후위기란 자연과 공존하기보다 욕망을 우선시한 인류가 초래한 결과라 말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편하게’와 같은 욕심의 결과가 기후위기잖아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 되게 하려면 개인 서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배우는 11명. 나이와 성별은 각양각색이지만 모두 연출가 전윤환을 대리하는 ‘나’로 등장한다. 무대 위에 풀어낼 재료를 찾기 위해 전 연출가는 보름간 여행을 떠난다.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되는 자연에서 기후위기를 직접 겪은 당사자를 만난다. 부산 가덕도에 사는 수달 가족, 경주 원자력발전소 인근 피폭된 70대 노인, 자신이 ‘기후악당’처럼 느껴진다는 보령 화력발전소의 근로자, 신공항 건설로 매립 위기에 놓인 새만금 수라 갯벌 인근 주민 등이다. “기후위기는 너무 먼 지구의 문제 같잖아요. 내 문제가 되려면 결국 직접 체험해야 해요. 이 문제를 오래 보고 듣고 물음을 품은 사람만이 감각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배우들을 관통해 궁극적으로는 관객에게 닿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올 1월 광주 아파트 붕괴 사건도 극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더 빨리, 높게 건물을 지으려는 욕심이 불러온 결과이기에 기후위기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배제와 착취, 폭력이 발생했고 이것이 재난을 유발했어요. 우리가 만든 시스템에서 계속 사람과 동물이 죽어나간다는 점에서 기후위기와 속성이 같지 않을까요.” 11일∼6월 5일, 3만∼6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판소리 ‘춘향가’라 하면 보통 춘향과 몽룡 먼저 떠올린다. 사랑가, 십장가, 옥중가, 이별가…. 절절한 창(唱)의 주인은 대부분 두 연인의 몫. 하지만 주야장천 애틋한 사랑과 이별 만 노래하면 금세 지루해지지 않을까. 중간중간 웃음과 유희를 불어넣는 방자와 향단이 춘향과 몽룡만큼 필요한 이유다. 4일 개막하는 창극 ‘춘향’에서 방자와 향단을 각각 맡은 국립창극단의 유태평양(30)과 조유아(35)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지난달 28일 만났다. 두 소리꾼이 연기하는 방자와 향단은 소리와 캐릭터, 존재감만큼은 춘향과 몽룡을 압도한다. “춘향 몽룡의 사랑 이야기에 묻혀서 그렇지 방자와 향단은 어려서부터 동네 친구로 자라 서로 티격태격하며 ‘썸’ 타는 사이일 거예요. 서로 좋아하는 걸 동네 사람 다 아는데 둘만 모르는 그런 커플요.”(조유아) ‘춘향과 몽룡’처럼 ‘방자와 향단’도 입에 붙는 조합이지만 창극 ‘춘향’에 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리는 아직 없다. 다만 극 후반부, 두 사람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로 유명한 사랑가를 살짝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대본에 명시된 건 아니지만 공연하면서 저희끼리 나름대로 방자와 향단의 러브라인을 만들게 됐어요. 대놓고 연애까진 아니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진 않는 그런 커플요.”(유태평양) 두 소리꾼이 연기하는 방자와 향단은 어느 배역보다 희극적이다. 유쾌하고 밝으며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호감형 캐릭터. 눈만 마주쳐도 호쾌하게 깔깔 웃어버리는 실제 두 사람처럼 말이다. “고등학생 때 예술제에서 딱 한 번 춘향 역을 한 적이 있어요. 분장을 하고 무대에 딱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이 다 웃더라고요. 아무리 진지한 역할을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웃어버려요. 근데 전 무대에서 관객들 웃는 얼굴을 보는 게 훨씬 좋더라고요.”(조유아) “초등학교 5학년 때 쑥대머리 가발 쓰고 춘향도 해봤어요. 몇 년 전엔 몽룡도 해봤고요. 근데 전 카멜레온 같은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안 해본 배역은 다 궁금해요. 변학도 역도 탐납니다.”(유태평양) 여러 예능 프로그램 출연 경력이 있는 두 사람. 또래처럼 우리 전통보다는 대중문화가 익숙할 법하지만 여름만 되면 산에 가서 소리 공부를 하는 천생 소리꾼이다. 6세에 ‘흥보가’를 완창해 판소리 신동으로 통했던 유태평양은 2012년 동아국악콩쿠르 판소리 부문 금상 수상 뒤 2016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주요 배역을 도맡아 왔다. 진도 엿타령으로 유명한 박색구의 손녀이자 전남도 무형문화재 조오환의 딸인 조유아 역시 2010년 임방울 국악제 일반부 대상 출신이다.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도 좋죠. 그런데 3∼4시간 동안 땀을 빼면서 소리할 때, 나를 보는 저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나갈까 안 나갈까 궁금하거든요. 완창하고 나면 박수가 쏟아지는데 그때 오는 희열은 잊히지가 않아요.”(유태평양) “창극 배우로서의 삶이 훨씬 만족스러워요.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바로 받는 감동이 아직은 너무 좋아요. 물론 TV에서 창극을 알리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소리할 때만큼 움직이진 않네요.”(조유아) 4∼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만∼8만 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아기장수 우투리’는 한반도 전역에 내려오는 구전 설화다. 폭정이 심하던 시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우투리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영웅이지만 결국 뜻을 펴지 못하고 죽는다. 지난해 초연을 거쳐 서울연극제 선정작으로 지난달 29일 개막한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도 이 설화에서 출발한다. 혹한의 시대, 비극적 영웅이란 소재를 제외한 모든 것이 새롭다. 여성이 스스로의 결단으로 영웅이 돼 사회구조적 착취에 맞선다. 극 중 우투리를 암시하는 주인공 ‘3’(김희연)은 3등 시민이 모여 사는 도시의 세탁소집 딸로 태어난다.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일이 궁금한 삶을 살기 위해 떠난 곳에서 새 희망을 발견하지만, 이내 모순을 발견하고 고뇌에 빠진다. 이기쁨 연출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100분간 진행되는 공연에는 배우 5명이 등장한다. ‘3’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여러 배역과 내레이션을 함께 맡는다. 배우이자 극 중 캐릭터, 두 역할이 무대 안팎에서 혼재돼 등장하는 모습은 홍단비 작가의 의도를 반영했다. 홍 작가는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관찰자가 되는데 ‘애정과 진심이 담긴 관찰’은 진실하고 소중한 것을 물 위로 끌어올린다”고 말했다. 회색 시멘트 집, 고철 공장, 무기 제작소 등 차갑고 날카로운 장면의 배경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무대 디자인과 조명도 인상적이다. 극의 처음과 끝에 앙상블로 흐르는 노랫말은 가사와 음정 모두 동요처럼 귀에 익다. 8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3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판소리 ‘춘향가’라 하면 보통 춘향과 몽룡 먼저 떠올린다. 사랑가, 십장가, 옥중가, 이별가…. 절절한 창(唱)의 주인은 대부분 두 연인의 몫. 하지만 주구장창 애틋한 사랑과 이별 만 노래하면 금세 지루해지지 않을까. 중간 중간 웃음과 유희를 불어 넣는 방자와 향단이 춘향과 몽룡 만큼 필요한 이유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국립창극단의 유태평양(30)과 조유아(35)을 만났다. 두 소리꾼은 4일 개막하는 창극 ‘춘향’에서 소리와 캐릭터, 존재감만큼은 춘향과 몽룡을 압도하는 방자와 향단을 연기한다. “춘향·몽룡 사랑 이야기에 묻혀서 그렇지 방자와 향단은 어려서부터 동네 친구로 자라 서로 티격태격하며 썸 타는 사이일거예요. 서로 좋아하는 걸 동네 사람 다 아는데 둘만 모르는 그런 커플이요.”(조유아) ‘춘향과 몽룡’처럼 ‘방자와 향단’도 입에 붙는 조합이지만 아직 ‘춘향’에 둘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리는 없다. 다만 극 후반부, 두 사람이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로 유명한 사랑가를 살짝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대본에 명시된 건 아니지만 공연하면서 저희끼리 나름대로 방자와 향단의 러브라인을 만들게 됐어요. 대놓고 연애까진 아니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진 않는 그런 커플이요.”(유태평양) 창극 ‘춘향’에서 두 소리꾼이 연기하는 방자와 향단은 어느 배역보다 희극적이다. 유쾌하고 밝으며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호감형 캐릭터. 눈만 마주쳐도 호쾌하게 깔깔 웃어버리는 실제 두 사람처럼 말이다. “고등학생 때 예술제에서 딱 한 번 춘향 역을 한 적이 있었어요. 분장을 하고 무대에 딱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이 다 웃더라고요. 아무리 진지한 역할을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웃어버려요. 근데 전 무대에서 관객들 웃는 얼굴을 보는 게 훨씬 좋더라고요.”(조유아) “사실 초등학교 5학년 때 쑥대머리 가발 쓰고 춘향도 해봤어요.(웃음) 몇 년 전엔 몽룡도 해봤고요. 근데 전 카멜레온 같은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안 해본 배역은 다 궁금해요. 변학도 역도 탐납니다.”(유태평양) 여러 예능 프로그램 출연 경력이 있는 두 사람. 또래들처럼 우리 전통보다는 대중문화가 익숙할 법 하지만 여름만 되면 산에 가서 소리 공부를 하는 천생 소리꾼이다.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도 좋죠. 그런데 3~4시간 동안 땀을 빼면서 소리할 때, 나를 보는 저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나갈까 안 나갈까 궁금하거든요. 완창하고 나면 박수가 쏟아지는데 그때 오는 희열은 잊히지가 않아요.”(유태평양) “창극 배우로서의 삶이 훨씬 만족스러워요.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바로 받는 감동이 아직은 너무 좋아요. 물론 TV에서 창극을 알리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소리할 때만큼 움직이진 않네요.”(조유아) 4~8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만~8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2015년 4월, 배우 김수로(52)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소극장에서 한 연극을 만난다. 배우가 아닌 제작자로서 그는 오사카 빈민촌 재일 한국인 가족의 삶을 그린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2008년)처럼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찾고 있던 터였다. 마침내 찾은 연극은 그해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상, 연출상을 받은 연극 ‘돌아온다’였다.》 공연을 보고 나오자마자 오랜 친구인 배우 강성진(51)에게 연락한다. “성진아, 네가 꼭 봐야만 하는 연극이 있다.” 마지막 공연 날, 강성진은 만석이던 극장에 겨우 구석의 한 자리를 얻어 연극을 관람했다. “‘이 공연은 이렇게 느린데 왜 안 지루하지? 이렇게 비어 있는데 왜 꽉 찬 느낌이지?’ 그동안 봤던 연극과 차원이 다른 정서였어요.”(강성진) “감동과 코미디가 잘 섞인 한국의 ‘야키니쿠 드래곤’ 같은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는데 ‘돌아온다’를 만난 겁니다. 주저 않고 판권을 구입했죠.”(김수로) 그렇게 시작된 연극 ‘돌아온다’가 7일부터 다시 무대에 오른다. 김수로가 판권을 사들여 210석의 소극장에서 다시 공연한 2018년 때와는 달리 올해 공연은 1000석 규모 대극장인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예술의전당에서 지난달 29일 만난 두 사람은 “객석이 다 안 찰까 솔직히 두렵지만 이 작품에 담긴 진심이 많은 관객들에게 통할 거라 믿는다”고 했다. 선욱현 작가가 희곡을 쓰고, 정범철 연출가가 연출한 이 연극의 배경은 ‘돌아온다’라는 이름의 식당.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는 미신이 있는 곳이다. 무심한 듯 손님에게 막걸리를 건네는 남자(강성진 박정철)가 운영하는 식당엔 여러 손님이 찾아온다. 군대 간 아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는 선생(홍은희 이아현), 인근 절에 새로 온 주지 스님(최영준),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김수로) 등….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풀어낸다. “살면서 ‘그립다’란 표현은 잘 안 쓰잖아요. 근데 이 연극을 보고 막걸리를 마시는데 ‘그리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 떠오른 분이 고3 때 돌아가신 아버지였어요. 아버지가 그립더군요. 아무래도 이 작품은 그리운 사람을 찾아주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김수로) “무대 위에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배우로 30년을 살았지만 ‘컷 연기’를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좀처럼 그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거든요. 이 작품은 무대에 설 때마다 카타르시스가 옵니다.”(강성진) 29년 지기인 둘이 처음 만난 건 20대 초반 대학생 때였다. 영화감독과 배우를 꿈꾸던 두 청년은 훗날 서로에게 은인이 되어준다. 강우석 감독의 연출부였던 강성진은 영화 ‘투캅스’(1993년)를 통해 김수로의 데뷔를, 김수로는 극단 유 소속 당시 강성진을 무대로 각각 이끌었다. “강성진은 무대에서 훨씬 깊은 배우예요. 그 힘이 80세까지 배우 하도록 지탱해줄 겁니다. 아무리 친한들 연기가 안되면 어떻게 제 자식 같은 작품에 주인공을 시킵니까. 우정만 지킬 거면 제 배역인 ‘청년’하라고 했을 겁니다. 하하.”(김수로) “김수로는 대중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매력적인 배우지만 제작자로서 자기의 길을 참 잘 찾았어요. ‘돌아온다’ 같은 작품을 알아보고 제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김수로 같은 제작자가 있다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강성진) 5월 7일∼6월 5일, 4만∼7만 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2015년 4월, 배우 김수로(52)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한 연극을 만난다. 배우가 아닌 제작자로서 그는 오사카 빈민촌 재일 한국인 가족의 삶을 그린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2008년) 같은 작품을 찾고 있던 터였다. 마침내 찾은 연극은 그해 서울연극제에서 우수상, 연출상을 거머쥔 연극 ‘돌아온다’. 공연을 보자마자 오랜 친구인 배우 강성진(51)에게 연락한다. “성진아 네가 꼭 봐야만 하는 연극이 있다.” 마지막 공연 날, 강성진은 만석이던 극장에 겨우 구석의 한 자리를 얻어 연극을 관람했다. “‘이 공연은 왜 이렇게 느린데 안 지루하지? 왜 이렇게 비어 있는데 꽉 찬 느낌이지?’ 그동안 봤던 연극들과 차원이 다른 정서였어요.”(강성진) “감동과 코미디가 잘 섞인 한국의 ‘야키니쿠 드래곤’ 같은 작품을 제작하고 싶었는데 ‘돌아온다’를 만난 겁니다. 주저 않고 판권을 구입했죠.”(김수로) 그렇게 시작된 연극 ‘돌아온다’가 7일부터 다시 무대에 오른다. 210석의 소극장에서 초연됐던 2018년 때와는 달리 세 번째 공연인 올해는 1000석 규모의 대극장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2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객석이 다 안 찰까 솔직히 두렵지만 이 작품에 담긴 진심이 많은 관객들에게 통할 거라 믿는다”고 했다. 배경은 ‘돌아온다’라는 이름의 식당.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는 미신이 있는 곳이다. 무심한 듯 손님에게 막걸리를 건네는 남자(강성진 박정철)가 운영하는 식당엔 여러 손님이 찾아온다. 군대간 아들에게 매일 편지를 쓰는 선생(홍은희 이아현), 인근 절에 새로 온 주지 스님(최영준),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김수로) 등….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풀어낸다. “살면서 ‘그립다’란 표현은 잘 안 쓰잖아요. 근데 이 연극을 보고 막걸리를 마시는데 ‘그리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순간 떠오른 분이 고3 때 돌아가신 아버지였어요. 아버지가 그립더군요. 아무래도 이 작품은 그리운 사람을 찾아주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김수로) “무대 위에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배우로 30년 세월을 살았지만 ‘컷 연기’를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선 좀처럼 그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거든요. 이 작품은 무대에 설 때마다 카타르시스가 옵니다.”(강성진) 29년 지기인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20대 초반 대학생 때였다. 영화감독과 배우를 꿈꾸던 두 청년은 훗날 서로에게 은인이 되어준다. 강우석 감독 연출부였던 강성진은 김수로를 영화 ‘투캅스’(1993년)로 데뷔를, 김수로는 극단 유 소속 당시 강성진을 무대로 이끌었다. “강성진은 무대에서 훨씬 깊은 배우예요. 그 힘들이 80살까지 배우 하도록 지탱해 줄 겁니다. 아무리 친한들 연기가 안 되면 어떻게 제 자식 같은 작품에 주인공을 시킵니까. 우정만 지킬 거면 제 배역인 ‘청년’하라고 했을 겁니다. 하하.”(김수로) “김수로는 대중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매력적인 배우지만 제작자로서 자기의 길을 참 잘 찾았어요. ‘돌아온다’ 같은 작품을 알아보고 제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김수로 같은 제작자가 발굴됐다는 건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강성진) 5월 7일~6월 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4만~7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수만 년 전 인간의 후각은 삶, 죽음과 연결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는 데 불과했다. 주로 썩은 고기 냄새를 감지하거나 화재, 포식자와 직면한 사실을 알려주는 기능에 충실했다. 하지만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후각과 향은 여러 기능을 담당하게 됐다. 미적 쾌락이나 유혹, 종교 제의,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넘어 현대엔 문화와 산업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로 향기를 활용하게 되자 점점 다양한 향수가 만들어지기 시작됐다. 독특하고 좋은 향을 찾고자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 터키, 중동, 스페인, 이집트의 다양한 동식물을 찾아다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미, 바닐라뿐 아니라 베르가모트, 재스민, 머스크 등의 향을 발굴해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예전엔 자연 추출물로만 만들었지만 이젠 여러 화학반응을 통해 인위적인 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책에는 조향사가 되거나 관련업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담겼다. 냄새의 역학, 향수의 역사, 향의 원료, 추출방식과 같이 향수에 관한 것뿐 아니라 조향사가 되기 위한 방법까지 상세히 수록돼 있다. 조향사의 손을 거친 향수가 제조 단계에 접어들고 각종 규제를 통과한 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과정도 알려준다.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조향업의 생생한 현실과 어려움도 담아냈다. 담긴 정보가 방대해 일반교양서보단 전문 서적에 가깝다. 저자는 후각과 향에 열정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로, 향수 애호가와 향수를 다루는 언론인, 과학자, 역사학자, 전문의 등으로 이뤄진 ‘콜렉티브 네’(le Collectif Nez·후각 단체) 소속이다. ‘콜렉티브 네’는 2016년 최초의 향수 잡지 ‘네’(Nez)를 발간하면서 향수 문화를 알리고 정착시키는 주요 단체로 주목받았다. 역자도 베르사유 소재 향수 대학원 ‘이집카’(ISIPCA)에서 공부한 뒤 ‘나는 네Nez입니다’를 썼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운영난으로 폐관 위기에 처했던 46년 역사의 세실극장(사진)이 다시 관객을 맞게 됐다. 국립정동극장이 세실극장 소유주인 대한성공회로부터 5년간의 장기임대를 통해 올 7월부터 운영을 맡기로 했다. 공식 개관작은 지난해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임지민 연출가의 연극 ‘카사노바’다. 김희철 국립정동극장장은 26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46년 역사를 지닌 세실극장을 되살려 보고자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며 “개관 이후 한국 연극사의 중요한 무대가 돼 왔던 세실의 상징성을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1976년 320석 규모로 개관한 세실극장은 이듬해부터 연극협회가 연극인회관으로 사용하며 1∼5회 대한민국 연극제를 개최한 유서 깊은 공간이다. 세실극장은 수년간 경영난을 겪으며 폐관 위기가 반복됐고, 지난해 말 위탁운영자인 서울연극협회가 무대 설비 개보수 문제로 성공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정동극장은 세실극장을 신인 창작진의 ‘초연 전문 무대’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새로 발굴한 창작 작품을 낭독회, 쇼케이스로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공연으로 선보이는 과정까지 맡겠다는 것이다. 김희철 극장장은 “대부분의 창작 지원 프로그램이 초기 발굴에만 집중돼 있는데 실제 공연으로 올리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신인 창작진 작품의 초연 무대를 세실에서 선보여 창작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올 7월 재개관에 맞춰 연극 ‘카사노바’를 포함해 뮤지컬 ‘딜쿠샤’, 음악극 ‘괴물’ 등 9개 공연을 선보인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10년 전, 보수적이고 문이 좁기로 유명한 한국무용계에 한 패션디자이너가 무대 연출가로 발을 디뎠다. 원로 무용수를 중심으로 “패션 하던 사람이 무용 무대에 대해 뭘 알겠느냐‘는 지적이 쏟아졌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세련된 색감의 무대는 고전적인 분위기가 강했던 한국무용의 격을 높였고, 공연은 관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며 매진 행렬을 이뤘다.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 브랜드 ‘KUHO(구호)’로 이름을 알린 뒤 2012년 국립무용단 ‘단’을 시작으로 ‘묵향’ ‘향연’ ‘춘상’ ‘산조’ 등 공연을 연달아 성공시킨 패션디자이너 정구호(60) 이야기다. 그가 다음 달 19∼22일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일무(佾舞)’를 선보인다. 이전처럼 무대 연출뿐 아니라 의상, 조명, 소품 디자인까지 맡았다. 종묘제례악에 포함된 춤 일무가 정구호의 손을 거치면 어떻게 바뀔까.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22일 그를 만났다. “수십 명의 무용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춤인 일무만큼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은 없어요. 움직임이 크지 않은 동작을 선보이려면 숨고르기와 균형 잡기를 통한 절제가 요구되죠. 전 세계적으로도 그런 형태의 군무는 거의 없어요.” 혹자에게 일무는 그저 오래된 궁중 의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무에서 전위성을 발견해냈다. 일무에 대한 그의 재해석은 3막에서 두드러진다. 전통의 틀을 크게 흔들지 않는 1, 2막과 달리 ‘신일무’라 명명한 3막에선 음악과 안무, 의상, 무대 연출까지 모두 새롭다. “3막은 지금 시점에서 일무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는 접근에서 출발했어요. 제가 추구하는 ‘신(新)전통’이죠. 처음 한국무용을 할 때 목표는 장르 구분 없이 전통과 현대가 완벽하게 혼합된 장르를 만들자는 거였는데…. 조금씩 목표에 가까워지는 중입니다.” 이번 작품도 전작들처럼 화선지를 은유하는 흰색 무대를 사용한다. 일무에 무용수로 등장하는 조선의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의 의상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아닌 자주색과 청록색으로 채도를 낮췄다. 무용수의 몸짓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단출한 무대만 선보이진 않는다. 2막 춘앵무(春鶯舞)에선 무대 전환도 시도한다. “화문석 돗자리 위에서만 추는 춘앵무는 ‘봄날에 날아든 꾀꼬리의 몸짓’이라는 상징 자체가 너무 아름답잖아요. 무대적 상상력을 가미해 춘앵무가 갖는 의미를 현대적으로 보여줄 거예요.” 한국무용이야말로 예술적 상상력을 풀어낼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몸의 실루엣을 대놓고 드러내는 옷들을 보세요. 상상력을 없애버리니 재미없잖아요.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해내는 서양무용과 달리 한국무용은 내향적이에요. 에너지를 안으로 누름으로써 미세한 동작의 차이를 만들어내거든요. 비우고 숨겨서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한국무용은 제게 최적화된 재료입니다.” 한국무용계에 입성한 지 10년, 그는 또 다른 목표를 꿈꾼다. “한국 춤의 명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록을 남기는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어요. 제대로 된 자료가 없는 게 늘 안타까웠거든요. 돈은 안 받아도 좋으니 기회만 있다면 명인들 한 분 한 분의 몸짓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한국무용계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종적인 기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만∼8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한 컷의 추상예술.’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발레리노 출신의 박귀섭 사진작가(38)는 무용수를 찍은 사진을 이렇게 정의했다. 무용수의 몸짓은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추상의 영역이기에 찰나를 담아낸 사진 역시 추상예술이라는 얘기다. 오로지 무용수를 사진에 담는 이들이 있다. 화가들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듯, 무용수의 신체와 동작을 사진예술의 소재로 삼는 ‘발레 사진작가’들이다. 국내 양대 발레단에서 활동 중인 이들을 인터뷰했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사진작가 1순위로 꼽는 박귀섭 작가는 “무용수는 단련된 신체로 몸짓이 주는 에너지를 표현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고 여러 감정을 표현하기에 최고의 피사체”라고 말했다. 무용수를 촬영하는 작업은 고난도의 기술을 요한다. 무용수마다 각기 다른 근육의 질감이나 신체 라인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있는데 이를 정확히 포착해야 하기 때문. ‘타이밍의 예술’을 하는 사진작가들 사이에서도 무용수 촬영이 유독 도전적인 작업으로 통하는 이유다. 김경진 유니버설발레단 전속 사진작가(36)는 “인간의 몸만큼 많은 텍스트를 담고 있는 건 없는데 발레는 신체의 선과 움직임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르”라며 “순간의 역동성, 미세한 근육 변화를 사진에 담는 게 짜릿하다”고 말했다. 손자일 국립발레단 전속 사진작가(36)는 “발레리나나 발레리노를 잘 찍는 게 평생 로망인 작가도 많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걸출한 발레 사진작가 중에는 무용수 출신이 꽤 있다. 국립발레단과 체코 국립발레단을 거친 김윤식 사진작가(33)는 “무용수들이 신경 쓰는 동작의 방향이나 라인을 아는 게 중요하다”며 “점프했을 때 공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도 정확한 포즈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순간을 잡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귀섭 작가도 “발레리노로 활동하면서 몸으로 체득한 게 무용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어떤 무용수는 자신의 몸짓을 찍은 사진을 일종의 ‘자습장’으로 활용한다. 발레는 초 단위로 정확한 동작을 연기해야 전체 작품의 질이 올라가는 만큼 자신의 사진을 보고 동작을 점검하는 것. 김경진 작가는 “사진을 훑어보면서 ‘이런 게 문제였구나’ ‘몸을 이렇게 썼구나’라며 복습하는 무용수가 많다”고 했다. 박귀섭 작가는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 촬영하면 굳이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무용수 본인이 실수한 걸 스스로 알아차린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는 무용수들은 사진 결과물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2018년 내한한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공연 장면을 촬영한 김경진 작가는 “아치형으로 둥글게 말린 발등은 기본이고 ‘턴 아웃’(무릎과 발끝이 바깥을 보도록 한 채 다리를 회전하는 동작)의 정석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최근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의 이상은 수석무용수와 함께 작업한 김윤식 작가는 “이상은이 클래식 발레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형화되지 않은 몸짓을 보여줘 촬영하면서 ‘이런 동작도 가능하구나’라고 감탄했다”고 말했다. 박귀섭 작가는 최고의 피사체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의 김지영 경희대 교수를 꼽았다. 그는 “김지영은 어떤 무용수보다 자신의 몸과 이미지를 꿰뚫고 있다. 팔다리가 길고 가는 신체 선의 아름다움이 사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말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뮤지컬 ‘아몬드’의 주인공은 뇌 속 편도체가 남들보다 작아 선천적으로 감정 표현이 불가능한 16세 소년 윤재다.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소년. 죽어가는 사람을 봐도 그저 태연하기만 한 윤재를 두고 사람들은 ‘괴물’이라 부른다. 또 한 명의 소년이 있다.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뒤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며 ‘괴물’처럼 거칠게 자라난 곤이. 다시 친부모를 찾았지만 어릴 때 겪은 상처로 인해 작은 파장에도 크게 동요하는 감정 과잉을 겪는다. 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에서 초연된 뮤지컬 ‘아몬드’는 괴물 같은 두 소년이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는 윤재의 생일이자 크리스마스이브에 시작된다.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된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예쁜 괴물’이라 불러주는 가족을 잃은 윤재는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다. 하지만 가족들의 빈자리는 곤이, 도라, 신 박사 등 친구와 이웃으로 채워진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감정을 배워 나가는 윤재는 특히 친구 곤이와의 사건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작품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7년 3월에 출간된 소설 ‘아몬드’는 국내 누적 판매량 90만 부, 해외 20개국 출간을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영화계에서 수많은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원작자인 손원평 작가는 오직 뮤지컬 제작만 허락했다. “원작의 장면과 스토리를 거의 똑같이 무대로 옮겼다”고 말한 김태형 연출의 말대로 뮤지컬은 소설을 ‘그대로’ 무대화하는 것에 성공했다. 부분적으로 모티프를 따오는 각색이 아니라 인물, 사건, 구성도 원작 소설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인지 사건을 쌓아올려 서사의 강도를 높여가기보다는 인물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인물의 내면 상태를 직접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인물이 겪는 사건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야 하는 공연에선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다른 작품에 비해 인물의 독백을 자주 활용하지만 장면을 소개하는 기능에 그치는 것도 아쉽다. 잔잔한 서사 대신 무대를 가득 메우는 건 웅장한 넘버들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이성준 작곡가가 쓴 넘버들은 곡 안에서 기승전결을 확실하게 매듭지어 뮤지컬의 극적 매력을 배가시켰다. 세련된 디자인에 색감이 다채로운 무대도 주요 볼거리다. 감정 표현이 커질 수밖에 없는 무대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문태유 홍승안)의 안정적인 연기를 볼 수 있다. 5월 1일까지. 5만5000∼9만9000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뮤지컬 ‘아몬드’의 주인공은 뇌 속 편도체가 남들보다 작아 선천적 감정 표현 불능증에 걸린 16세 소년 윤재다. 기쁨과 슬픔뿐 아니라 두려움,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소년. 죽어가는 사람을 봐도 그저 태연하기만 한 윤재는 어려서부터 ‘괴물’이라 불린다. 또 한 명의 소년이 있다.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뒤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며 ‘괴물’처럼 거칠게 자라난 곤이. 다시 친부모를 찾았지만 어릴 때 겪은 상처로 인해 작은 파장에도 크게 동요하는 감정 과잉을 겪는다. 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아티움에서 개막한 뮤지컬 ‘아몬드’는 괴물 같은 두 소년이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윤재의 생일이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된다.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된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예쁜 괴물’이라 불러주는 가족을 잃은 윤재는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다. 하지만 가족들의 빈자리는 곤이, 도라, 신 박사 등 친구와 이웃으로 채워진다.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감정을 배워 나가는 윤재는 특히 친구 곤이와의 사건으로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작품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7년 3월에 출간된 소설 ‘아몬드’는 국내 누적 판매량 90만 부, 해외 20개국 출간을 기록한 베스트셀러. 영화계에서 수많은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원작자인 손원평 작가는 오직 뮤지컬 제작만 허락했다고 한다. “원작의 장면과 스토리를 거의 똑같이 옮겼다”고 말한 김태형 연출의 말대로 뮤지컬은 소설을 ‘그대로’ 무대화하는 것에 성공했다. 부분적으로 모티프를 따오는 각색이 아니라 인물, 사건, 구성도 원작 소설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인지 사건을 쌓아올려 서사의 강도를 높여가기 보다는 인물 내면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인물의 내면 상태를 직접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인물이 겪는 사건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내야 하는 공연에선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다른 작품에 비해 인물의 독백을 자주 활용하지만 장면을 소개하는 기능에 그치는 것도 아쉽다. 잔잔한 서사 대신 무대를 가득 메우는 건 웅장한 넘버들이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이성준 작곡가가 쓴 넘버들은 곡 안에서 기승전결을 확실하게 매듭지어 뮤지컬의 극적 매력을 배가시켰다. 세련된 디자인에 색감이 다채로운 무대도 주요 볼거리다. 감정표현이 커질 수밖에 없는 무대에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문태유 홍승안)의 안정적인 연기를 볼 수 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뮤지컬 ‘킹키부츠’ ‘물랑루즈!’ ‘백투더퓨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를 달구며 세계적으로 흥행한 이 뮤지컬들은 초연 제작부터 국내 기업이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2014년 한국을 떠나 8년 넘게 브로드웨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최윤하 PD(42)가 주인공. CJ ENM 공연사업부 소속인 그의 업무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흥행할 만한 뮤지컬을 찾는 것이다. 그가 될성부른 작품을 찾아내면 회사는 공동 제작에 나선다. 그를 사로잡은 작품들은 미국 토니상과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며 명작 반열에 올랐다. 13일 미국 뉴욕 현지에 있는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8년간 성공도 했지만 실패도 참 많이 했어요. 대본 읽기부터 제작진 구성, 배우 캐스팅, 초연까지…. 작품 하나 올리는 데 5∼6년씩 걸리는 브로드웨이는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곳입니다.(웃음)”그의 안목을 거쳐 공동 제작된 작품들에는 관객뿐 아니라 평단 호평도 쏟아졌다. 신디 로퍼가 작곡가로 나선 ‘킹키부츠’는 2019년 토니상 6개 부문을 휩쓸었고, 2021년 초연된 ‘백투더퓨처’는 올해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신작 뮤지컬 작품상을 받았다. “개발 초기 작품을 선정해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노하우를 쌓고 있어요. 이를 토대로 한국 스토리 기반의 작품을 공동 제작해 세계무대에 올리는 게 목표입니다.”작품당 50만∼1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해 공동 제작자가 되면 모든 제작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 회의 참석은 그가 뉴욕에 ‘1인 사무실’을 차린 이유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K콘텐츠의 성공 이후 보수적인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한국문화를 하위문화가 아닌 예술로 대우하죠. 과거보다 훨씬 더 한국인의 관점과 취향을 궁금해하고요.”걸음마 수준이지만 한국 뮤지컬의 해외 판권 수출도 이뤄지고 있다. 2016년 국내 초연된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대표적이다. 미국 공연 제작사가 판권을 사 가 2020년 1월 애틀랜타에서 공연을 올렸고, 현재 브로드웨이 초연을 준비 중이다. 배우 등 공연 제작진이 모두 미국인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는 해외 제작사에 높은 가격의 로열티를 낸 라이선스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다.“‘어쩌면…’을 본 브로드웨이 관계자 반응도 무척 좋았어요. 애틀랜타 초연도 좋은 리뷰를 받았죠.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보다 새로운 화두가 될 만한 작품을 찾는 최근 브로드웨이 취향을 저격한 작품입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응원하고 있습니다.”뉴욕살이 8년 차, 이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5년? 아니 3년만 있어도 한국인이 만든 좋은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브로드웨이 현장에서 열심히 뛰겠습니다. 하하.”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뮤지컬 ‘킹키부츠’ ‘물랑루즈!’ ‘백투더퓨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의 극장가를 달구며 세계적으로 흥행한 이 뮤지컬들은 얼핏 보면 한국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엔 세계 초연 제작 단계서부터 한국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세 작품의 공동제작에 나선 것. 이 과정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2014년 홀연히 한국을 떠나 8년 넘게 브로드웨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최윤하 PD(40)가 주인공이다. CJ ENM 공연사업부 소속인 그의 업무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흥행할 뮤지컬을 찾는 것이다. 일단 그가 될성부른 작품을 찾아내면 회사는 공동 제작에 나선다. 그를 사로잡은 작품들은 미국 토니상과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며 명작 반열에 올랐다. 13일 뉴욕 현지에 있는 그를 화상으로 만났다. “8년 간 성공도 했지만 실패도 참 많이 했어요. 대본 리딩부터 창작진 구성, 배우 캐스팅, 트라이아웃, 초연까지…. 작품 올리는 데에만 5~6년 씩 걸리는 브로드웨이는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곳입니다.(웃음)” 그의 안목을 거쳐 CJ ENM이 공동제작한 작품들엔 관객뿐 아니라 평단의 호평도 쏟아졌다. 신디로퍼가 작곡가로 나선 ‘킹키부츠’는 2019년 토니상 시상식서 6개 부문을 휩쓸었고, 2019년 초연된 ‘백투더퓨처’는 올해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신장 뮤지컬 작품상을 받았다. “개발 초기 작품을 선정해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노하우를 쌓고 있어요. 이를 토대로 한국적인 스토리 기반의 작품을 만들어 양국의 창작진과 협업해 세계무대에 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작품당 50만~10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해 공동 제작자가 되면 모든 프로덕션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회의 참석은 그가 뉴욕에 ‘1인 사무실’을 차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K콘텐츠의 성공 이후 보수적인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요. 한국문화를 하위문화가 아닌 예술로 대우하죠. 과거보다 훨씬 더 한국인의 관점과 취향을 궁금해 하고요.” 걸음마 수준이지만 한국 뮤지컬의 판권 해외 수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 국내 초연된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이 대표적이다. 미국 공연 제작사가 판권을 사가 2020년 1월 애틀란타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올렸고, 현재 브로드웨이 초연을 준비 중이다. 공연의 창작진과 배우들 모두 미국인이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한국 뮤지컬 시장은 해외 제작사에 고가의 로열티를 내며 라이선스 작품을 주로 올려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한 대목이다. “‘어쩌면…’을 본 브로드웨이 관계자 반응도 무척 좋았어요. 애틀란타 초연도 물론 좋은 리뷰를 받았죠.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보다도 새로운 화두가 될만한 작품을 찾는 최근 브로드웨이 취향을 저격한 작품입니다.” 뉴욕 살이 8년차, 이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진 않을까. “5년? 아니 3년만 있어도 한국인이 만든 좋은 뮤지컬들이 브로드웨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전까지 당분간 한국에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하하.”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수장고 신축과 내부 복원 공사를 위해 휴관해온 간송미술관이 7년여 만에 전시를 개최한다. 간송미술관은 16일부터 6월 5일까지 서울 성북구 ‘보화각’에서 봄 전시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를 연다. 이번 전시에선 간송이 소장한 1만6000여 점의 유물 중 최근 2년간 문화재청의 ‘문화재 다량소장처 보존관리 지원 사업’을 통해 보존 처리된 작품 8건 32점을 선보인다. 세종(1397∼1450)의 스승이었던 여말선초의 유학자 권우(1363∼1419)의 시문집 ‘매헌선생문집’ 초간본은 대표 출품작 중 하나로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된다. 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화 수장가 김광국(1727∼1797)이 수집한 ‘해동명화집’도 전시된다. 해동명화집은 조선 초기 화원인 안견의 ‘추림촌거’, 5만 원권 앞면 그림의 원형인 신사임당(1504∼1551)의 ‘포도’ 등을 포함해 30점의 그림이 수록된 서화첩이다.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이자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한시각(1621∼?)의 ‘포대화상’, 김홍도(1745∼1806)의 ‘낭원투도’, 장승업(1843∼1897)의 ‘송하녹선’ 등도 공개된다.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은 “문화재 보존 처리에 중점을 둔 이번 전시를 통해 1971년 시작한 간송미술관의 전시, 보존, 연구, 교육 활동을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국보 경매 논란이 일었던 국보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은 포함되지 않았다. 금동삼존불감은 올 3월 가상화폐 투자자모임 ‘헤리티지DAO’가 49%의 지분을 매입한 국보로, DAO 측은 삼존불감을 간송 측에 영구 기탁했다. 전 관장은 “앞으로 국보를 경매에 내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료 전시로 전시를 관람하려면 간송 홈페이지에서 예약해야 한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집, 학교, 직장, 박물관, 관공서, 공원…. 사람들은 도시와 건물을 이야기할 때 보통 ‘나’를 위주로 생각한다. 이왕이면 직장이 지하철역 인근에 있으면 좋고 집 근처엔 공원 하나쯤은 있길 바라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근처에는 유명 학원가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개인의 욕구만을 충족하는 도시는 자칫 괴물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시대를 초월해 도시를 함께 점유하는 공공(公共)의 필요성을 우선시하는 것이 건축의 기본이자 바탕에 깔린 철학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여러 도시의 다양한 건축물에 관해 말한다. 서울의 광화문과 경복궁, 보스턴 공공도서관, 뉴욕 그라운드 제로, 도쿄 호류지 박물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건축물의 역사를 통해 지역과 사회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루 살핀다. “건축은 지나간 시간을 정리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준비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하듯 건축은 도시가 품은 과거와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현재, 새롭게 디자인될 미래에 관한 모든 것을 아우른다. 고로 책 곳곳엔 개별 단위의 지역과 도시, 나아가 국가가 직면한 많은 문제를 풀어낼 통찰이 담겨 있다. 바다 건너 대륙의 도시에 지어진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지금 우리의 도시가 겪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러한 결론을 두고 저자는 “곁눈질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저자가 2년여간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한데 모은 만큼 짧은 호흡의 글이 기다란 병렬 구성을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를 망라하는 줄기가 없는 건 아니다. 혁신, 전통, 수변(水邊), 높이, 흐름, 공공, 기념. 12년간 여러 책을 통해 저자가 끊임없이 질문해 왔던 건축에 관련한 문제의식을 담은 키워드가 담겼다. 그중에서도 “한정된 재원 속에서 더 나은 환경이 되기 위한 건축의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라는 물음에 저자는 혁신, 수변, 흐름을 꼽았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노래한 정의로운 해적 콘라드와 순수한 소녀 메도라의 사랑 이야기가 화려한 몸짓으로 무대에 오른다. 국립발레단이 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고전 발레 ‘해적’ 이야기다. ‘해적’은 프랑스 출신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가 1899년 만든 이후 수많은 예술가의 손길을 거쳤다. 국립발레단은 ‘해적’의 안무, 서사, 음악을 모두 바꾼 새로운 버전을 2년 전부터 선보이고 있다. 이번 시즌에선 수석무용수 허서명(32)과 솔리스트 심현희(30)가 콘라드, 메도라 커플로 처음 호흡을 맞춘다. 허서명은 2020년 공연에 이어 두 번째 콘라드 역으로, 심현희는 메도라 역으로는 데뷔 무대를 가진다. 서울 공연에 앞서 1일 강원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첫 무대를 선보인 두 사람은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12일 만난 심현희는 “처음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오빠가 ‘힘을 더 빼고 여유롭게 하자’고 격려해줘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면서 “연기할 땐 신났는데 끝나고 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며 웃었다. 허서명은 “관객들은 아마 눈치를 못 채셨을 텐데 처음엔 현희가 잔뜩 얼어 있었다”면서 “다시 정신을 부여잡기가 쉽지 않은데 프로답게 금세 무대에 적응했다”며 심현희를 칭찬했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이자 안무가 송정빈이 새로 짠 ‘해적’의 안무는 고난도 기술과 막대한 체력이 요구된다. 34∼38회전 푸에테(한쪽 발로 지탱해 다른 쪽 다리를 휘두르며 회전하는 동작)에 발레리나를 번쩍 들어올려야 하는 리프트까지…. 힘든 동작이 쉼 없이 이어져 국립발레단 무용수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다. “쉴 새 없이 동작이 이어지다 보니 관객이 박수 쳐주실 때만 인사하면서 잠깐 쉴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박수가 길수록 좋더라고요. 오래 쉴 수 있으니까요.(웃음)”(허서명) “기술적으로도 힘들지만 사랑이란 감정 표현에도 충실해야 해요. 동작을 하면서 눈도 마주치고 웃어야 하고…. 정말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은 작품이에요.”(심현희) 요즘 눈만 마주치면 파드되(2인무) 동작을 연습한다는 두 사람. 사랑에 빠진 연인이 추는 2막의 침실 파드되에 특히 공을 들인다고 했다. “침실 파드되가 시작될 때 보통 메도라는 콘라드에게 기대서 침실로 들어가는데 저희는 약간 변형하기로 했어요. 부끄러워하는 메도라가 뒤로 주춤하면 콘라드가 손으로 잡아 이끄는 식으로요.”(허서명) “연습할 때 나눈 대화에서 비롯된 동작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설레는 감정이 들 땐 어떻게 손을 잡는지 등 작은 것 하나하나 대화를 나누며 동작을 연구했어요.”(심현희) 선화예고 1년 선후배인 두 사람은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한 무대에 서기까지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옆에서 지켜보던 오빠예요. 남편과도 잘 아는 사이여서 평소 집에도 자주 놀러가고요. 무엇보다 무용수로서 경험이 많다 보니 오빠에게 많이 의지를 하게 돼요. 힘들 때 의지하게 되는 파트너예요.”(심현희) “현희는 순수한 소녀 메도라 그 자체예요. 백지 같아서 어떤 색이나 그림을 입혀도 매끄럽게 소화해내는 무용수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 가벼워요! 발레리노에겐 그게 최고거든요.(웃음)”(허서명) 5000∼10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미국 뉴저지주의 어느 소도시. 대형마트 직원인 한국계 입양아 수아가 수상한 괴짜노인 네불라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을 사진작가라 속인 수아에게 네불라는 촬영을 의뢰한다. 촬영 과정에서 알게 된 네불라의 정체. 그는 미치광이 살인마로 알려진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였다.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1일 개막한 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는 가짜 독재자와 가짜 사진작가가 만나 각자의 모습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을 만든 ‘한이박 트리오’(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가)의 3년 만의 신작이다. 남 흉내를 잘 냈던 8세 소년 시절부터 극단에서 단역을 전전하던 청년, 독재자 대역으로 군중 연설을 담당했던 때까지…. 주인공 네불라를 번갈아 가며 연기하는 배우 윤나무, 강기둥은 나이를 초월한 연기로 한 남자의 인생을 펼쳐낸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수아(박란주, 정운선)는 스스로를 몸이 아픈 동생을 돌보는 보모쯤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인물. 직장에서도 병가로 공석이 된 상사의 직책을 맡고자 상사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좇으며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간다. 타인을 모방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수아는 자신이 혐오하는 네불라와 다르지 않다는 걸 차츰 깨닫는다. 작품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넘버 ‘인생은 내 키만큼’의 무대 연출은 극 전체를 함축한다. 심해가 차오르는 듯한 청색 조명이 전신을 감싸면 네불라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허우적댄다. 이때 울려 퍼지는 넘버 ‘인생은…’ 속 가사 “인생은 내 키만큼의 깊은 바다”에 대해 한정석 작가는 “아무리 키를 뛰어넘는 깊이의 바다여도 애써 뛰어올라야 숨쉴 수 있다는 삶의 굴레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리지널’ ‘굿 걸’ 등 넘버는 금세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귀에 꽂힌다. 뮤지컬에선 생소한 트럼펫을 포함해 바이올린, 첼로 등 6인조 관현악 밴드가 라이브 연주를 선보이는 것도 매력이다. 이선영 작곡가는 “네불라가 느꼈을 쓸쓸함과 트럼펫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악기가 됐다”고 말했다. 5월 10일까지, 전석 7만 원.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