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박형준 부장

동아일보 산업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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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형준 기자입니다. 일본 정치와 사회, 한국 산업과 경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lovesong@donga.com

취재분야

2024-05-17~2024-06-16
칼럼97%
사설/칼럼3%
  • [오늘과 내일/박형준]노키아가 죽자 핀란드가 살아난 이유

    서울에서 핀란드 알토대 MBA 과정을 이수하던 2007년 8월이었다. 핀란드 헬싱키 현지에서 2주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휴대전화 기업 ‘노키아’를 찾았다. 안내하던 여직원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럴 만한 게 노키아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핀란드 전체 수출의 약 25%를 차지했다. 시가총액은 헬싱키 증시의 70%였다. 핀란드 경제는 노키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기자가 방문한 2007년이 노키아의 최대 전성기였다. 같은 해 6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다. 노키아는 새 흐름을 가벼이 봤다. 아이폰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갖췄고, 자동차가 그 위를 지나가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을 가진 자사 휴대전화에 도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노키아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수직 낙하했다. 결국 2014년 4월 핵심인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노키아의 추락에 핀란드 경제도 휘청했다. 핀란드의 휴대전화 수출은 2007년 3070만 대(69억 달러)에서 2012년 400만 대(9억 달러)로 줄었다. 핀란드 전체 수출은 2008년에 전년 대비 0.2% 줄어들었고, 이듬해에는 31.3% 급감했다. 무역수지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연속 적자였다. 그런데 세상사 참 묘하다. ‘노키아가 죽으니 핀란드가 살아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핀란드는 과거부터 연구개발(R&D) 투자 비율이 높고, 교육 경쟁력도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였지만 기업 실적은 신통치 않아 ‘핀란드 패러독스’라는 말까지 생겼다. 창업을 주저하는 문화, 고율의 법인세 등이 문제로 꼽혔다. 하지만 노키아의 몰락이 위기감을 불러왔고, 그 위기감이 핀란드 패러독스를 해결했다. 노키아는 2008년 이후 1만 명 이상의 공학 인재들을 구조조정했는데, 그들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으로 흘러갔다. 점차 위험을 감수하고 창업에 도전하는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들은 산학협력을 통해 학생들의 창업 활동을 격려했다. 정부는 벤처캐피털을 조성해 신생 기업에 자금을 공급했다. 헬싱키기술대학 학생 3명이 창업한 로비오는 2009년 앵그리버드 모바일 게임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2010년 설립된 슈퍼셀은 전략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의 성공으로 설립 4년 만에 약 2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의 이익이 되다’(월스트리트저널, 2011년 8월), ‘대기업이 쓰러질 때 기업가정신이 살아난다’(하버드비즈니스리뷰, 2013년 3월) 등 평가가 나왔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부진을 보면서 10년도 더 지난 핀란드의 추억이 떠올랐다. 반도체가 부진하니 한국 수출은 8개월 연속 적자다. 무역수지도 15개월째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 치명타라 할 수 있다. 올해 성장률은 1%대로 예상되는데,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 충격 없이 1%대 성장률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소수 대기업이나 특정 산업에 의존한 경제 생태계는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만 핀란드 사례가 보여주듯 위기 상황이 오히려 한국의 고질병을 고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반도체와 중국에 대한 과도한 수출 의존도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 반도체가 무너지자 한국도 같이 무너질지 아니면 오히려 성장할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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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사기범은 멀리 있지 않다

    4월 중순 “제보를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일본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400억 원대 사기 행각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다단계처럼 투자자를 끌어모아 주가를 인위적으로 띄운 SG증권발(發) 주가조작 사태가 터졌다. 왠지 제보에 관심이 갔다. 문제의 인물은 박모 씨(51)였다. 그는 2018년부터 일본 도쿄에서 카페, 의류, 분식 등 매장을 운영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청소를 했고 저녁까지 일했다. 수더분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 성실함과 외모에 더 믿음이 갔다고 했다. 인테리어 업체를 운영하는 재일교포 L 대표는 지난해 박 씨의 의류 매장을 공사한 적이 있다. 박 씨는 “골프 의류 사업을 하고 있는데, 주문이 몰려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주문이 밀려 배송이 늦어졌다,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박 씨는 한두 달 융통할 자본이 있으면 생산을 더 할 수 있다면서 L 대표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12% 수익 중 8%를 이자로 주겠다고 했다. L 대표는 우선 몇천만 원을 빌려줬다. 실제 8% 이자를 포함한 원리금을 받았다. 점차 투자 액수를 늘려 합계 28억 원을 건넸다. 거래하는 동안 별문제가 없었기에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박 씨는 2월 중순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그 후 피해자들이 대거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약 100억 원을 물린 교민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일본 경찰서에 사기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시켰다. 자체적으로 박 씨의 행적도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경남 거제, 광주 등지에서도 사기 행각을 벌인 사실을 확인했다. 제보자는 2015년 7월 거제경찰서에 접수된 고소장과 올해 3월 인천 중부경찰서에 낸 민원 접수증 사진을 보여줬다. 모두 사기 혐의였다. 제보자는 “도쿄의 한국 교민 사회를 산산조각 내놓고 지금은 다른 곳에서 사기를 치고 있을 것이다. 하루빨리 잡아야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2015년 이후 국내 범죄 중 부동의 1위는 사기다. 2015년 25만7000여 건이었던 사기 발생 건수는 2021년 29만2042건으로 늘었다. 사기 수준을 부동산이나 보험 사기, 보이스피싱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기도 갈수록 지능화되고 있다. 최근 음성과 영상을 인공지능(AI)으로 위조해 돈을 가로채는 신종 사기까지 등장했다. 순진한 사람이 사기범에게 당한다는 생각도 고치는 게 좋다. SG 사태를 보면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이 주가조작단에 거액을 맡겼다.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 등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일부는 속아서 돈을 건넸을 것이고, 일부는 주가조작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일확천금을 노렸을 것이다. 사기 피해자가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사기꾼이 잡혔을 때는 사기로 얻은 돈을 이미 탕진한 경우가 많다. 법률 지식으로 무장한 사기꾼은 미리 돈을 빼돌려 놓기도 한다. 피해를 없애려면 ‘예방’이 최선이다. 법무법인 법조가 펴낸 저서 ‘사기꾼의 얼굴을 공개합니다’에 따르면 100% 확신적으로 말하는 사람, “둘도 없는 기회” “지금 안 하면 놓친다” 등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 안 되는 일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 되는 일도 없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쉽게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게 사기 피해를 막는 지름길이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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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주와 스티븐 슈워츠먼의 차이점[오늘과 내일/박형준]

    1963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소년은 10대 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버퍼드칼리지를 졸업한 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년 정도 인수합병(M&A) 관련 업무를 한 뒤 사표를 던지고 하버드대 MBA 과정을 밟았다. 그 후 36세가 되던 1999년 세계적인 사모펀드 운용사인 칼라일그룹에 입사했다. 그는 한국사무소 대표로 지내며 2000년 한미은행을 인수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4년 뒤 한미은행을 팔아 7000억 원대 차익을 거두면서 M&A 시장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2005년 3월 칼라일그룹을 떠나 아예 직접 사모펀드 운용사를 설립했다. 사명은 MBK파트너스. 자신의 영문 이름(마이클 병주 김)에서 따왔다. 이야기의 주인공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자산가 순위에서 올해 처음 1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자산 97억 달러로 2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80억 달러)보다 더 많았다. 3월 기준 MBK파트너스가 투자한 기업의 매출 합계는 441억 달러, 고용 인원은 37만 명이다. 87명의 투자전문인력이 만들어냈다고는 믿기 힘들다. 한국 최고의 부자지만 많은 사람이 김병주란 이름을 낯설어 할 것 같다. 그만큼 한국에서 사모펀드의 역사는 짧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 굴지의 대기업이 줄줄이 쓰러지자 외국계 사모펀드들은 헐값에 사들였다. 제일은행, 외환카드, LG카드 등 금융기관들도 줄줄이 팔렸다. 당시 국내에는 토종 사모펀드가 없었다. 뒤늦게 정부가 법 제정에 나섰고, 2004년 12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이 시행되면서 한국에서도 사모투자전문회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MBK파트너스가 2005년 설립됐으니 토종 사모펀드 1세대라고 볼 수 있다. 약 20년이 지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1년 말 사모펀드 운용사는 394곳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으로도 창업할 수 있어 김 회장과 같은 해외 유학파뿐만 아니라 국내파도 속속 사모펀드 시장에 진입했다. 쉽게 돈을 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조 원짜리 사모펀드를 만들려면 운용사는 최소 100억 원의 자기 자본을 넣어야 한다. 투자한 기업이 망하면 운용사도 함께 망하는 경우가 많다. 사모펀드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자금력 있는 대기업들이 주도하던 M&A 시장에 사모펀드들이 새로운 거인으로 등장했다.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사모펀드들은 기업 경영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오너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한국 기업 생태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먹튀’ 이미지가 강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사모펀드의 본질이 싸게 기업을 인수해 성장시킨 뒤 높은 값에 되파는 것이어서 그 이미지를 피하기 힘들다. 은밀한 거래를 추구하기에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도 있다. 김 회장은 2021, 2022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의 대표 자선가로 뽑혔지만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의 창업자 스티븐 슈워츠먼. 그의 이름 앞에는 월스트리트의 황제뿐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교사, 미중을 잇는 제2의 헨리 키신저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영향력이 투자업뿐만 아니라 경제와 외교까지 걸쳐 있는 것이다. 김병주 회장도 자산 1위에 걸맞은 선한 영향력을 더 확산시켜 주길 기대한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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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료 5만7070원 vs 1만1578엔[오늘과 내일/박형준]

    최근 짐 정리를 하다가 일본 도쿄 특파원 시절에 냈던 전기료 영수증을 발견했다. 일본은 장기간 물가 하락을 겪었기 때문에 공산품, 음식, 집값 등 어지간한 것들은 한국보다 저렴하지만 전기료는 예외다. 도쿄 시내 아파트에서 5인 가족이 살면서 2021년 2월 낸 전기료는 8131엔(약 8만1000원)이었다. 올해 2월 한국에서 낸 전기료 5만7070원보다 훨씬 높았다. 한국과 일본의 전기료 구조는 비슷하다. 기본요금에 전력 사용량만큼 요금이 더해지고, 거기에 연료비 가격 등락에 따른 조정요금 등이 반영된다. 양국 모두 전력 사용량이 많을수록 곱해지는 단가가 높아지는 누진제를 채택하고 있다. 한일 모두 자원 빈국이어서 원유, 액화천연가스(LNG) 등 연료를 대부분 수입한다. 지난해 연료 수입 가격 급등, 자국 통화 가치 하락도 함께 경험했다. 그만큼 전기료 인상 요인이 많았지만 한국은 전기료를 억눌렀고, 일본은 꾸준히 올렸다. 한국에서 2월에 사용한 전력량 384kWh를 일본 도쿄전력의 가격 시스템에 기초해 계산했더니 1만1578엔이란 요금이 나왔다. 물가가 저렴한 일본이지만 전기료는 한국의 2배였다. 한국에선 질 좋은 전기를 값싸게 이용할 수 있어 좋긴 한데, 너무 싸다는 게 문제다. 현재 전기료는 원가의 약 70%밖에 되지 않는다. 콩을 가공해 두부를 만드는데, 콩값이 두부값보다 비싼 셈이다. 이런 기형적 구조는 자원 낭비와 경제 왜곡으로 이어진다. 한 지인은 최근 주택을 수리하면서 기름보일러를 없애고 전기 패널을 깔았다. 그게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기업도 전기에 점점 더 의존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발표에 따르면 1990∼2020년 기간 한국의 산업용 전력소비는 372% 늘었다. 같은 기간 독일(3%)과 프랑스(1%)는 소폭 증가했고, 일본(-19%)과 미국(-14%)은 오히려 줄었다. 1차 에너지원인 석유나 석탄으로 난방을 하면 에너지 전환 손실률이 10∼20%에 그친다. 전기는 석유나 석탄으로 만든 2차 에너지원이다. 전기로 난방을 하면 손실률이 60%로 커진다. 전기 패널이 늘어날수록, 기업이 전기에 의존할수록 국가 차원의 자원 낭비가 심해지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전기요금을 제때 올리지 않은 지난 정부의 무책임함을 비판하면서 지난해부터 올해 1월까지 전기요금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왔다. 올바른 방향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최근 2분기 전기료 인상 결정을 보류했다. 전기료 인상으로 인한 연쇄적인 물가 상승, 직격탄을 맞을 취약계층과 소상공인의 반발 등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일본 사례를 보면 전기료 인상이 고스란히 가계 충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떠올려 보면 특파원 생활할 때 다섯 가족 모두 거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전기 패널이 거실에만 깔려 있기에 겨울엔 거실을 떠날 수 없었다. 여름에도 거실에만 에어컨을 켰고, 가족 모두 거실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절전 습관은 한국 귀국 후에도 유지돼 서울 아파트에서 낸 전기료는 전체 평균보다 항상 적었다. 일본인 역시 전기 사용을 줄여 고지서에 찍힌 요금을 계속 낮췄을 것이다. 일본 기업도 저에너지 주택인 ‘스마트 하우스’ 등을 개발하며 절전을 도왔다. 전기료 현실화를 통해 개인의 절전과 기업의 기술 혁신을 유도하는 게 시장원리에 맞다. 취약계층에 대한 핀셋 지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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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금융의 보이지 않는 조타수[오늘과 내일/박형준]

    일본 오사카에 사는 이경재 씨(73)는 1982년 7월 7일이란 날짜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재일교포들이 낸 자본금으로 설립된 신한은행이 그날 서울 명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재일교포 주주 200여 명이 서울로 날아왔다. 개점 행사 때 눈물을 흘린 주주도 있었다고 한다. 이 씨는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약 150만 명의 조선인들이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그의 부친은 일본에 남았다. 가난과 차별을 각오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 남은 교포들은 쓰레기 수거, 청소, 고물상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일본 각 도시에서 분뇨 수거 작업을 맡기도 했다. 저학력에 일본어가 서툴렀기에 대체로 2세에게 빈곤이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한 교포들도 하나둘 나왔다. 제과로 일어선 신격호 롯데 회장, ‘파친코 황제’ 한창우 마루한그룹 회장 등이 그 예다. 그들은 한국에도 투자했다. 하지만 자금 조달이 문제였다. 한국 기업들도 대출받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재일교포 기업이 은행 문턱을 넘기는 더 힘들었다. 결국 재일교포들이 나서 한국에 은행을 직접 설립했다. 재일교포 341명이 자본금 250억 원을 모아 첫 순수 민간자본 은행이자 교포은행인 신한은행을 만든 것이다. ‘조상제한서(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로 불리는 5대 시중은행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때 신한은행은 서울에서 점포 3개로 시작했다. 영업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고객 한 명이 은행 문을 열고 들어오면 모든 직원이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당시 고객이 ‘을’인 시절이었기에 다른 은행 직원들은 고개 숙이는 데 인색했다. 또 대출에 따르는 검은 커미션(사례금)을 없앴다. 그러자 신한은행 점포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2002년 굿모닝증권, 2003년 조흥은행, 2006년 LG카드 등을 잇달아 인수하면서 비(非)은행 포트폴리오까지 갖춘 신한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변화도 많았다. 특히 창립 멤버들이 주식을 상속, 증여하면서 현재 재일교포 주주는 약 5000명으로 늘었다. 100%였던 지분은 15∼20%로 줄었다. 재일교포 주주의 존재감도 비례해 떨어졌다. 하지만 신한금융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각별하다. 시세차익을 노리고 주식을 사들이는 다른 투자자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23일 신한금융 주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이 씨는 “신한은 재일교포의 자랑이다. 주식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려는 재일교포 주주는 1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상시 느슨한 연합체 주주로 있지만 위기 때는 주인의식을 내보인다. 2010년 소위 ‘신한 사태’로 불리는 경영권 다툼 때 결국 재일교포 주주들이 문제 인사 3명을 일본으로 불러 다들 물러나도록 교통정리 했다. 23일 주총에서도 최대주주 국민연금의 반대표에도 불구하고 재일교포 주주들이 뭉쳐 진옥동 회장 내정자의 사내이사 선임안을 통과시켰다. 정부의 부적절한 간섭에 대해선 방패 역할을 해왔다. 다만 앞으로도 무한 애정을 무기로 은행을 성장시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다. 지금은 시장 신뢰를 잃은 은행이 하루 만에 초고속으로 파산하는 시대다. 지분율에 비해 경영권에 미치는 과도한 영향력, 재일교포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들의 금융 전문성 부족, 불투명한 사외이사 선임 과정 등 약점을 개선할 때 또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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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벤고시닷컴 vs 로톡

    일본인 모토에 다이치로(元榮太一郎·48) 씨는 학창 시절 교통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다. 태어나 처음 변호사와 상담을 했고, 상담 내내 고액의 이용료가 걱정됐다. 그는 게이오대 법학과를 졸업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2001년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2005년 법률 포털사이트 ‘벤고시(弁護士)닷컴’을 만들었다.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경험을 떠올려 모든 사람이 법률을 좀 더 쉽게 이용하게끔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벤고시닷컴의 법률 Q&A 코너를 즐겨 이용했다. 질문을 남기면 변호사가 무료로 답을 해준다. 월 330엔(약 3200원)을 내고 프리미엄 회원이 되면 다른 사람의 사례 203만 건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실제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는 단계에선 가장 성실하게 답을 내놓은 변호사에게 연락하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들에게 벤고시닷컴은 일종의 구세주와 같다. 일본 변호사 업계는 극심한 ‘레드오션’이다. 변호사 수는 2000년 1만7126명, 2010년 2만8789명, 지난해 4만3960명으로 매년 늘었다. 수임을 못 해 연봉이 300만 엔에 그치는 변호사도 적지 않다. 온라인 광고를 하려 해도 ‘○○ 분야 전문가’, ‘가장’, ‘완벽’, ‘불패’ 등 표현은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벤고시닷컴은 고객 유치의 중요한 통로가 됐다. 월 2만 엔 회비를 내면 검색 때 상위에 표시되고 자신의 해결 사례까지 내보일 수 있다. 벤고시닷컴에 가입한 변호사는 현재 2만1031명이다. 일본 전체 변호사의 절반에 육박한다. 대형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와 기업에 고용된 변호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용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벤고시닷컴은 초창기 적자를 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설립 9년째부터 흑자로 돌아섰다. 2012년부터 뉴스 서비스를 시작했고, 2014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2021년엔 매출액 53억1800만 엔, 영업이익 1억7200만 엔 실적을 올렸다. 종업원은 320명이다. 한국에서도 2014년 벤고시닷컴과 유사한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이 탄생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서비스 시작 1년여 만에 변호사 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변호사 단체는 “저가 수임 경쟁을 부추겨 법률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변호사들이 플랫폼과 자본에 종속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톡은 세 차례 고발을 당했지만 모두 ‘혐의 없음’으로 끝났다. 하지만 장기간 변호사 단체와 갈등을 겪다보니 경영 상황이 나빠졌다. 최근 직원 90여 명 중 절반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벤고시닷컴은 일본 변호사 단체와 갈등이 없었을까. 일본 최대 변호사 단체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련)’의 부회장을 지냈던 지인에게 물어봤다. “(일변련 부회장을 지낸 변호사인) 나도 벤고시닷컴 회원이다. 지금까지 특별한 문제 없었고, 일변련에서 변호사 가입을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사건 소개하고 소개료 받는 것은 위법인데 (벤고시닷컴은) 그런 활동이 없다.” 그는 벤고시닷컴이 보낸 최신 뉴스레터를 전송해주며 “변호사에게 중요한 판례 등 정보를 잘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일본 변호사는 “법 위반 사항이 없는데 왜 로톡이 고발당하느냐. 뭔가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겠느냐”고 되물었다. 한국 이익단체의 기득권 지키기를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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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日 가상자산 사업가가 싱가포르로 간 이유

    ‘Japan as No. 1 AGAIN.’ 지난해 9월 26일 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이 같은 영문 광고가 실렸다. 이미지는 없었다. 일본을 다시 넘버원으로 만들자는 뜻의 영문이 가운데 큼지막하게 자리했고, 그 주변에 329개사 로고가 있었다. 가상자산 벤처기업도 여럿 포함됐다. 블록체인을 연결시킨 플랫폼을 만들어 기존 사회, 경제, 문화, 정치 체계를 바꾸겠다는 설명도 달려 있었다. 광고주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발한 스타트업 ‘스테이크테크놀로지’다. 27세인 창업자 와타나베 소타(渡邊創太) 씨는 애초 일본에서 사업하려 했다. 하지만 규제와 세금이 너무 엄격해 2020년 싱가포르로 건너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싱가포르는 ‘가상자산에 리스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리스크를 겁내는 게 국가에 더 손해다. 우리는 가상자산 시장을 진흥시킬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선 세금을 더 내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은 가상자산 사업을 하기 쉽지 않은 국가다. 일본 정부는 2017년 자금결제법을 개정해 가상자산을 화폐에 준하는 지급수단으로 보고 규제하기 시작했다. 거래소는 의무적으로 금융청에 등록해야 하고, 고객 자산을 별도로 관리해야 했다. 세금도 무겁다. 가상자산 매매로 얻은 이익은 주식 매매와 달리 분리과세 대상이 되지 않는다. 기존 소득과 합산해 과세하기 때문에 최대 55% 세율로 세금이 매겨진다. 가상자산을 다른 가상자산으로 교환할 때마다 세금을 내야 한다. 반면 투자자라면 일본만 한 곳도 드물다. 지난해 11월 미국 FTX 파산 때 미국에선 투자자들이 자산을 인출할 수 없어 패닉에 빠졌지만, 일본에선 그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FTX 일본 법인은 금융청 규제로 투자자가 맡긴 자금을 은행 등에 의무적으로 맡긴 덕분이었다.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인 일본에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금융당국이 최소 6개월이 걸리는 가상자산 상장 심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겠다고 지난해 10월 밝혔다. 또 한 거래소에 상장된 가상자산을 다른 거래소에서 거래되게끔 할 때 신규 상장 절차를 거쳐야 하는 기존 제도도 없애겠다고 했다. 일본이 이제 가상자산 산업 진흥에도 나서는 모습이다. 한국은 어떨까. 가상자산 관련법은 2020년에 개정된 특정금융정보거래법이 유일하다. 이 법은 주로 가상자산 사업자의 진입 규제에 대한 것으로 투자자 보호에는 미흡하다. 투자자 보호를 중심으로 하는 법안 19개는 모두 국회에 계류돼 있다. 지난해 FTX 사태, 테라-루나 폭락을 계기로 국회에서 법안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아직도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없다.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과 금융당국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가상자산 투자자 보호와 산업 진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답은 예외 없이 “투자자 보호가 최우선”이었다. 한 금융 당국 인사는 “규제 당국에 왜 산업 진흥 이야기를 하느냐”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모든 부처의 ‘산업부화’,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등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적어도 가상자산 업계에선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일본은 다시 세계 1위가 되겠다며 조용히 산업 진흥에 나서고 있다. 와타나베 씨가 일본으로 유턴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환경이면 한국에 지사를 세울 일은 분명 없을 것이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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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아직은 대통령이 나서야 ‘갑질’ 해결된다

    열정 하나로 자신만의 사업 모델을 만들어가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애로사항도 꼭 물어본다. 좋은 인재를 구하기 힘들다는 점, 자금 부족, 그리고 정부 규제를 공통적으로 꼽았다. 불합리한 규제는 언론의 힘으로 없앨 수도 있다. 구체 사례를 물었지만 그들은 예외 없이 입을 닫았다. 공무원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핀테크 플랫폼 ‘토스’의 성장사를 다룬 서적 ‘유난한 도전’을 읽으면서 그들이 입 닫았던 규제의 단면을 볼 수 있었다. 토스는 2014년 3월 개인 간 간편 송금 시범 서비스를 열었다. 은행 모바일 뱅킹은 첫 화면에서 송금까지 8, 9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토스는 3단계로 줄였다. 가입자가 매주 8%씩 늘어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한 달 뒤 금융 서비스 망을 제공한 회사가 “더 이상 협력할 수 없다”고 했다. 개인 간 송금에 금융 서비스 망을 허용하지 말라는 금융당국의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은행 아니면 송금 서비스를 할 수 없다는 법 규정은 없다. 하지만 ‘해도 된다’는 법 조항도 없다. 금융당국은 이처럼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가장 쉽고 안전한 길, 규제를 선택한 것이다. 1년 뒤 문제는 해결됐다. 2015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 업무보고에 토스를 만든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도 초대됐다. 대통령과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 국책은행장 등이 모인 자리였다. 이 대표는 3분간 발언 기회를 얻었다. “보안 사고에 대한 금융당국의 정책이 변해야 합니다. 과도한 제재로 인해 금융회사가 새로운 시도를 열심히 해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에는 2, 3초간 침묵이 흘렀다고 한다. 다행히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규제 일변도의 금융 정책을 바꾸겠다고 화답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금융위원회는 토스 서비스를 사실상 허용하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 덕분에 2015년 2월 토스 서비스가 정식으로 출시될 수 있었다. 현재 토스는 국내 제1호 핀테크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이 됐다. 모든 규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시장의 실패를 막고 시장경제가 안고 있는 부(富)와 정보 격차를 줄여주는 좋은 규제도 많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신사업 영역에서 종종 규제는 기업인의 손과 발을 묶는다. 아무리 사업 모델이 좋아도 법에 명쾌하게 규정돼 있지 않으면 공무원은 “서비스 불가” 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안전, 환경, 질서, 이해관계 충돌은 단골로 내세우는 명분이다.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는 박하고, 규제를 없애 부작용이 일어났을 때 ‘책임’은 무거운 현 감사 시스템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아랍에미리트(UAE)와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잇달아 영업사원을 자처했다. “공무원을 상대할 때 ‘갑질이다’ 싶은 사안은 저에게 직접 전화해 달라”고도 했다. 당장 전화기를 들고 싶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대통령이 수많은 전화를 받지 않고도 문제를 개선시키는 방법도 있다. 감사 방향을 바꾸면 된다. 일이 되게끔 하려다 그릇을 깬 공무원에게는 관대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애매하면 처리하지 않는 소극적인 공무원에게 감사의 칼날을 들이대야 한다. 그럼 저절로 갑질이 줄어들 수 있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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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비스 혁신, 이번엔 정말 가능한가 [오늘과 내일/박형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힘을 넣는 사업 중 하나는 ‘서비스업 활성화’다. 서비스업을 발전시키면 내수를 키울 수 있고, 고용에도 효과적이다. 생산이 10억 원 늘어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취업자는 제조업이 6.2명인 데 비해 서비스업은 12.5명(2021년 한국은행 발표)이다. 하지만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서비스업을 강조해야 할 정도로 매번 서비스 혁신의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8월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안경업, 이·미용업, 도매시장업, 리스업 등 11개 서비스업 분야의 진입규제에 대해 토론회를 열었다. 진입규제를 없애면 더 많은 참여자가 뛰어들어 산업이 커지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라고 봤다. 예를 들어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안경사 면허가 없으면 안경점을 열 수 없고, 안경사는 안경점 1개만 차릴 수 있다. 토론회를 통해 자금력을 가진 개인이나 법인에도 진입을 허용하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빨간 머리띠를 두른 수십 명의 안경사들이 나타나 토론회장을 점거했다. 그들은 “진입장벽을 낮추면 영세 사업자들이 다 죽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나흘간 예정된 11개 업종의 토론회 중 절반이 취소되는 파행을 겪었다. 의료기사법의 핵심 내용은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았고, 전국 안경점들은 대체로 소규모 구멍가게처럼 운영되고 있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서비스업 중에서 특히 영리병원에 관심이 높았다. 그는 “영리병원을 허용해야 의료 분야에 민간 투자가 흘러들어오고, 의료서비스 질도 높아진다”고 확신했다. 참고로, 한국 의료법에는 비영리법인만 병원을 운영할 수 있게끔 돼 있다. 비영리법인은 이익이 나더라도 투자자에게 배당할 수 없다. 투자자 입장에선 비영리재단에 투자할 유인이 없는 것이다. 투자가 부족하다 보니 종합병원이 생기기 힘들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이 비영리재단을 만들어 종합병원을 운영하는 정도다. 종합병원이 부족하다 보니 예약하려면 2, 3개월씩 기다려야 한다. 경제부처 최고 수장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였지만 결국 지금까지 영리병원은 설립되지 않았다. “사람 생명을 담보로 돈을 벌려고 하느냐”, “의료비가 올라가 부자만 좋은 서비스를 받는다”와 같은 부정적 국민감정에 무너졌다. 정말 부자만 좋은 서비스를 받는 의료 양극화가 일어나는지, 아니면 보통 사람의 종합병원 접근이 더 편해지는지 이성적인 논의의 장은 없었다. 윤석열 정부도 서비스 혁신에 시동을 걸고 있다. 정부는 29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이끄는 서비스산업 발전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당정은 내년 경제정책 방향을 협의하면서 5대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서비스’를 꼽았다. 내년엔 수출과 고용이 휘청거리고, 성장률은 1%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기에 서비스업 활성화에 더욱 눈길이 간다. 한국 서비스업 취업자는 주로 숙박·음식업에 몰려 있고, 정보통신업이나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등 고부가가치 분야에는 많지 않다. 의료, 교육, 관광 등에서 돈 있는 사람이 국내에서 돈을 더 쓰고,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집단 이기주의, 부정적 국민감정, 총론에선 찬성하지만 각론에서 반대하는 부처 갈등 등을 극복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서비스업 혁신이 가져올 사회 변화상을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보여줘 국민적 공감대를 넓히는 게 돼야 할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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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MOU 체결만으로 해외 광물 확보할 수 있나

    “캐나다, 호주, 인도네시아 정상들을 만날 때 핵심 광물에 대한 공급망 협조를 구했다. 광산 자체를 매입해 개발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윤석열 대통령) “핵심 광물은 첨단산업의 씨앗이다. 정부로서도 광물자원 부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10월 말 TV 생방송으로 진행된 1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해외 광물 확보에 대한 이 같은 대화가 오갔다. 그렇게 해서 핵심 광물을 척척 확보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은 자원이 곧 무기인 시대다. 하지만 광산을 매입하거나 지분 투자를 하지 않는 한 안정적 광물 확보는 힘들다. 문제는 광산 매입과 투자에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2009년 3월, 지도상에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아프리카 니제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니제르 국영 광산 관리회사와 우라늄 공급 MOU를 맺으러 방문하는 한국광물자원공사(현 한국광해광업공단) 김신종 당시 사장을 동행 취재했다. 그때 광물 확보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우선 육체적으로 힘들다. 니제르를 방문하려면 출국 전에 황열 예방접종을 하고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어야 했다. 그랬더니 사흘 정도 근육통과 몽롱함에 시달렸다. 니제르에선 말라리아가 무서워 밤에 일절 돌아다니지 못했다. 니제르 중부 마다우엘라 광산을 취재할 땐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었다. 옆 사람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더니 입 안에 모래가 버석버석 씹혔다. 김 사장은 몸살 증상이 있었고, 설사가 멈추지 않았지만 약을 먹으며 현장을 다녔다. 일이 되게끔 하기도 힘들다. 30년간 산업부에 몸담았던 김 사장이 2008년 광물자원공사 사장이 됐을 때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서두르면 감사원 감사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유망한 해외 광산을 감지해도 규정대로 진행하다 보면 1, 2년이 흘렀고, 그 사이 중국, 일본이 채 갔다고 했다. 김 사장은 “확보해야 할 광물이라면 곧바로 계약하라. 문제가 생기면 사장인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올해 들어 에너지 수입 가격이 치솟으면서 비상경제민생회의, 국정감사 등에서 자원개발 중요성이 강조됐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땅 밑의 자원을 확인하고 개발하는 데에는 막대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하다. 탐사 단계만 2, 3년이 걸리고 개발과 생산 단계까지 가려면 통상 10년은 걸린다. 성공하면 큰 이익을 얻지만 실패하면 재정적 손실이 막대하다. 해외 자원개발 선진국도 10개 중 1, 2개 사업만 성공한다. 한국에선 정권이 바뀌거나, 자원 가격이 떨어지면 자원개발은 ‘돈 먹는 하마’로 지목된다. 김 사장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후 자원개발 관련 배임 혐의로 기소됐다. 다만 1, 2, 3심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자비로 수억 원의 변호사 비용을 댔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본 후배 공무원들이 감히 “자원개발에 나서자”고 주장할 수 있을까. 윤석열 정부가 본격적으로 해외 자원개발을 하려면 장기 프로젝트로 밀어붙일 뚝심이 있어야 한다. 개인 비리가 있다면 당연히 처벌해야겠지만, 일이 되게끔 하려고 내린 의사 결정을 법의 잣대로 재단해선 곤란하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자원개발 업무를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 지금처럼 지원 역할에 그치는 게 낫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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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한국 금융 경쟁력을 1980년대로 되돌릴 것인가

    신한은행 창립자인 고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은 회고록 ‘여러분 덕택입니다’에서 은행 설립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했다. 1981년 말 이승윤 당시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만났을 때 일이다. “초대 은행장으로 어느 분을 선임하실지요?”(이 장관) “혹시 심중에 둔 적임자가 있는지요?”(이 명예회장) “김세창 증권거래소 전무님이 어떨지요?”(이 장관) 이 명예회장은 ‘그 순간 정부 차원에서 이미 김세창 전무로 낙점한 것으로 감지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재무부가 3명을 후보로 올렸더니 청와대가 김세창 씨를 골랐다고도 전했다. 실제 김세창 씨는 1982년 7월 7일 개점한 신한은행의 초대 은행장이 됐다. 회고록에는 2대 행장에 대한 일화도 나온다. 이 명예회장은 1985년 초 청와대를 방문해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차기 은행장으로 이용만 (중앙투자금융) 사장을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답했다. 이처럼 청와대의 의중을 확인하고서야 그해 2월에 2대 행장으로 재무부 출신 이용만 사장을 영입했다. 경북 경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자전거 타이어 장사 등을 하며 돈을 모은 뒤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340여 명의 재일교포들로부터 출자금을 모아 국내 최초 순수 민간자본 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첫 시작은 겨우 점포 3개였다. 그는 은행장 인사에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회고록에 ‘1980년대 초반엔 한국에서는 여전히 관치(官治) 분위기였기에 은행장은 대정부 과제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고 적었다. 정부 뜻에 맞춘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읽힌다. 요즘은 어떨까.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 여러 명에게 물었더니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민간 금융사 인사에 개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반대하는 인사가 안 되게끔 할 수는 있다”로 결론이 모아졌다. 최근 신한, 우리, NH농협, BNK금융지주 등 주요 민간 금융사들이 새 최고경영자(CEO) 선임에 나섰다. 각 금융사는 회장·행장추천위원회 같은 독립기구를 가동한다. 시스템상으로는 독립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당국의 인사 개입성 발언이 나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10일 라임자산운용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와 관련해 중징계를 받은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흘 뒤에는 이례적으로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과 간담회를 하며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유능한 경영진 선임”을 강조했다. 이 원장은 인사 개입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CEO 선임 등에 절대 구체적인 개입을 할 생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경제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한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다. 금융권이 상대적으로 실적이 좋다고 해도 CEO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경쟁에서 낙오될 수도 있다. ‘CEO가 낙하산이냐 아니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정부와의 원활한 소통으로 더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낙하산 인사도 명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민간 금융사가 전문성과 능력을 최우선시해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느냐, 아니냐’다. 관치 인사는 한국 금융산업 경쟁력을 1980년대 수준으로 되돌릴 것이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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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관계 재정립 위한 언론의 역할’ 제52회 한일 언론간부 세미나 열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2년간 중단됐던 한일 언론인들의 교류가 재개됐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와 일본신문협회는 15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한일 관계 미래지향적 재정립을 위한 양국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제52회 한일 언론간부 세미나를 열었다. 한일 중견 언론인 30여 명이 참석했다. 양국 언론인들은 △미중 관계와 동아시아 안보 △기후변화와 글로벌 경제위기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문제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 등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 20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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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경기를 부양할 순 없어도 급락은 막아야

    “경기도 뜨거워지고 물가도 안정시키는 해법은 경제학에 없다. 물가도 안정시키고 경기 후퇴도 막아야 한다고 하면 스탠스가 꼬인다. 당분간은 물가 안정에 방점을 둬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한 말이다. 동의한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면 모든 국민이 불행해진다. 한국은행 전망대로 올해 물가가 5.2% 뛴다고 하면, 연봉 5000만 원을 받는 회사원은 260만 원을 날리게 된다. 물가 상승 폭이 너무 커지면 체제에 순응하던 서민들이 폭도로 변하기도 한다. 2008년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했을 때 아이티에선 유혈 폭동으로 최소 8명이 숨졌다. 집권 1년 차인 윤석열 정부는 물가 안정에 초점을 맞췄다. 내년도 예산안(639조 원)을 올해 본예산보다 5.2% 늘어나도록 짰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총지출이 연평균 8.7%씩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건전재정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한국은행도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포함해 최근 5차례 연속 금리를 올리며 보조를 맞췄다. 빚 있는 가계, 투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기업에서 비명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목표를 우선시했고, 그런 공감대도 형성돼 있는 것 같다. 다만 변수가 생겼다. 올해 들어 고물가·고금리·고환율(원화 가치 급락) 등 ‘3고’가 한국 경제를 위협했는데, 최근 자금시장에 돈줄이 마르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중소 증권사, 건설사의 도산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경제위기가 금융과 실물 분야로 파급되기 직전이란 느낌이 든다. 새 위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악재가 우연히 겹치면서 생겨났다. 우선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지난달 말 테마파크 레고랜드 기반 조성 사업을 했던 강원도 산하 공기업에 대해 법원에 회생 신청을 한다고 발표했다. ‘지자체의 신용보장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시장에 확산됐다. 대형 건설사인 롯데건설이 18일 2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결정하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인해 자금이 부족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증권가 사설정보지(지라시)는 사실관계 확인 없이 다른 건설사 이름까지 넣어 부도설을 퍼뜨렸다. 올해 약 30조 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한국전력공사는 연일 최고 신용등급(AAA)인 한전채를 고금리로 대규모 발행하며 시중 자금을 흡수하고 있다. 레고랜드 사태, 롯데건설의 유상증자, 한전채 발행은 모두 별개의 이슈이고 발생 시점도 다르다. 하지만 지난주 후반 한꺼번에 주목을 받으면서 폭탄이 터졌다. 과거의 빚은 부동산과 관련해 위험성이 본격적으로 불거졌고, 미래의 빚이 될 자금은 한전 등 일부 신용을 인정받는 기업에만 몰렸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흑자 도산’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신속하게 유동성을 공급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부와 한은이 일요일인 23일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어 50조 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새 정부 경제팀은 이제 더 어려운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게 됐다. 과감하면서도 선제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해야 하지만 너무 과해선 안 된다. 그럼 물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실기업을 솎아내면서도 일시적 자금 부족을 겪는 우량 기업에 자금이 흘러가도록 정교하게 핀셋 지원해야 한다. 경제팀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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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제2 외환위기 가능성도 대비해야

    “정말 외환위기가 다시 오는 거야?” 최근 지인들로부터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지난달 말 경제 전문가를 인용해 “엔화가 달러당 150엔을 돌파하면 1997년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보도한 다음부터 특히 그렇다.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자.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을 맺었다.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한국 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편입되면서 경제주권을 잃게 됐다. 한보, 기아, 대우, 한라그룹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팔려나갔다. 또 간신히 살아남은 곳은 강력한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한동안 매일 1만 명의 실업자가 새로 생겨났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국민들의 자존감에 큰 생채기를 냈던 외환위기는 ‘외화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일어났다. 1997년 말 외환보유액은 204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3.7%에 불과했다. 대외자산도 없었다. 오히려 대외부채가 더 많았기에 대외순자산은 645억 달러 적자였다. 국내 금융기관은 해외에서 외화를 빌려 왔는데, 외국 금융기관들이 외화 차입금 만기를 연장하지 않고 회수에 들어갔다. 한국이 달러를 얻기 위해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환율, 고물가, 무역적자 등 현상은 1997년과 비슷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외환을 포함한 대외건전성이 크게 다르다.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67억7000만 달러로 GDP의 20%가 넘는다. 대외순자산은 7441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달 28일 한국의 대외건전성에 대해 “무역적자 및 외환보유액 감소 등에도 불구하고 대외순자산과 연간 경상수지 흑자 전망 등을 고려할 때 양호하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할 때 현 시점에서 제2의 외환위기를 맞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에 대해 “매우매우 낮다는 게 외부의 시각”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정해선 안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2009년 경제사령탑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입버릇처럼 “해외가 기침을 하면 한국은 홍역을 앓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 경제는 외부로부터의 경제 충격에 취약하다. 그랬기에 윤 전 장관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외채 증감에 극도로 민감했다. 언제든 한국 시장을 떠날 수 있는 단기외채는 외환위기의 트리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 말 기준 단기외채 비율은 41.9%로 10년 만에 가장 높다. 2017년 이후 주식과 채권 시장에 매년 외국인 자금이 유입됐지만, 올해는 1∼8월 동안 5조6000억 원이 빠져나갔다.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경상수지는 최근 꾸준히 흑자를 유지했다. 상품수지 악화에 해외 배당이 겹친 올해 4월만 제외하고 2020년 5월 이후 올해 7월까지 꾸준히 흑자였다. 하지만 월간 기준 사상 최대 무역적자를 냈던 8월에 경상수지 역시 적자로 돌아섰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는 심리다. 1997년과 달리 외환보유액이 아무리 넉넉하고, 대외순자산이 많아도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순간 해외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 위기대응 시나리오에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포함시켜 경제 정책을 짜야 할 때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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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또다시 기획재정부 출신인가

    ‘□ 없습니다.’ 2010년 12월이었던 것 같다. 경기 과천시의 한 음식점에서 기획재정부 공무원들과 출입기자들이 모여 송년회를 했다. 그때 기재부 측에서 이 퀴즈를 내면서 “기재부 직원들이 □에 들어갈 단어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이 무엇일지” 물었다. 기자들의 답은 다양했다. ‘이성 친구’ ‘돈’ ‘자유시간’ ‘취미’…. 다 틀렸다. 기재부가 공개한 답은 ‘불만’이었다. 일이 많아 자유시간이 부족하고, 데이트를 할 여유가 없으니 이성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며 민간 기업에 비해 월급도 크게 낮다. 하지만 기재부 공무원들은 “불만 없습니다”라고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약 2년간 기재부를 출입한 기자는 그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24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기자가 가장 바쁜 직업이라 여길 때였는데, 기재부 공무원들은 기자 이상으로 바쁘다고 인정했다. 경제위기 상황이었기에 경제사령탑인 기재부가 특히 바쁘기도 했을 것이다. 기재부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기자지만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조규홍 현 1차관이 지명된 것에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조 차관은 1988년 공직에 입문해 기재부 내에서 예산총괄과장, 경제예산심의관, 재정관리관(차관보) 등을 지냈다. 30여 년간 예산과 재정 업무를 담당한 정통 경제관료다. 지난해 10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이사에서 퇴임한 후 윤석열 대선 캠프에서 일했고, 대통령직인수위 경제1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5월 복지부 1차관에 기용됐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장관 후보자가 된 것이다. 그를 보건 및 복지 분야 전문가로 부르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대통령실도 이번 인사에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전문성을 가진 의사, 교수도 여럿 접촉했지만 그들은 예외 없이 장관직을 고사했다. 청문회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퇴직 후 3년 동안 업무 관련성이 있는 곳에 재취업을 할 수 없는 점도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조 후보자를 포함해 이번 정권에서 기재부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고 있다. 대통령실 경제수석, 경제부총리, 금융위원장 등 사실상 기재부 몫인 자리뿐 아니다. 대통령비서실장, 총리와 국무조정실장,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도 기재부 출신이다. 은행연합회 등 주요 금융 협회와 공기업에도 전직 기재부 인사들이 두루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해 과거 청와대 고위직을 거친 한 기재부 출신 인사는 “서로 눈빛만 보고서도 알아서 일처리를 할 테니 효율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부처 의견을 제대로 들을지 모르겠다. 다양성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현재 상황은 2012년 말 일본과 유사하다.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아베 신조 전 총리는 당시 두 번째로 총리에 오르면서 경제산업성 출신들을 대거 중용했다. 러시아와의 영토 교섭을 외무성이 아니라 경산성이 주도했다. 재무성이 재정 안정을 걱정할 때 경산성은 “일단 투자부터 하라”며 밀어붙였다. 하지만 아베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20번 이상 정상회담을 하고서도 영토 교섭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본이 선진국 최악의 국가채무에 짓눌리고 있는 것은 재무성 목소리가 작아진 탓도 있다. 2020년 9월 일본 총리가 바뀌자 경산성 출신들은 모두 요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정부의 한 부처가 실권을 쥐면 분명 속도감 있게 일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멀리 가려면 여럿이 함께 가는 게 낫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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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인구 감소 시대, 농촌에서 길을 찾다

    온천의 나라 일본. 그런 일본이지만 이와테현 가와군 니시와가정은 2020년 말 남탕과 여탕, 휴게실, 매점, 주차장이 있는 온천 시설을 공짜로 민간에 넘기겠다고 공고했다. 2005년 7400여 명이던 인구가 공고 당시 5400여 명으로 줄어든 게 근본 이유였다. 온천 이용자도 줄다 보니 지자체는 이용료 300엔(약 3000원)으로 시설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적자가 쌓이다 보니 공짜로 내놓은 것이다. 공짜로라도 처분하고 싶었던 것은 온천 시설뿐만이 아닐 것이다. 마을의 매점, 식당, 상가 등도 매출 부진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이미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인구 감소가 지속되면 결국 지자체는 소멸하고 만다. 일본 정부는 “2040년 일본 기초지자체 1727곳 중 896곳이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고 2014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도 강 건너 불구경 할 때가 아니다. 지난해 처음 총인구(국내 거주 외국인 포함)가 줄어들었다. 첫 인구 감소 시점이 일본보다 16년 늦었지만 앞으로 감소 속도는 일본보다 훨씬 빠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합계출산율)는 지난해 0.81명으로 일본 1.34명보다 크게 낮았다. 줄어드는 인구를 갑자기 늘릴 묘수는 없다. 하지만 대도시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킨다면 지방 인구를 늘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지방 소멸을 막고 국가 균형 발전도 이룰 수 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는 마당에 서울 사람을 지방으로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 역시 아니다. 도쿄특파원으로 재직하던 2013년 1월에 취재했던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정의 사례를 소개한다. 노토정은 ‘깡촌 중의 깡촌’이었다. 마을에는 편의점이나 음식점이 전혀 없었다. 1박 2일 동안 머물렀지만 버스나 택시 등 대중교통 수단을 보지 못했다. 당시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37%. 그런 시골 골짜기에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 주민들이 일주일씩, 길게는 한 달씩 머문다. 해외에서도 여행이나 이민을 오는 경우도 흔했다. 노토정 주민이면서 마을 변화를 주도하고 있던 60대 다다 기이치로(多田喜一郞) 씨는 “깡촌이라는 게 바로 노토정의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벼 베기, 과일 수확, 반딧불이 보기, 이글루 만들기 등이 노토정의 대표 상품이다. 그런 노토정을 온라인으로 알리고, 농가민박 예약을 받았더니 일본 국내외에서 이용객들이 몰려 왔다고 했다. 방학 때면 대도시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오기도 했다. 다만, 두 가지 유의할 점. 다다 씨는 “정보기술(IT) 능력을 가진 젊은이가 있어야 마을 변화를 이끌 수 있고, 각 가정집의 화장실과 욕실을 최신식으로 수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지자체들은 이미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대도시 청년들에게 각종 지원책을 제시하며 귀농을 제안하고 있다. 경남 밀양시는 만 18∼40세를 대상으로 스마트팜 청년창업 보육센터를 운영한다. 20개월 교육의 수강료는 전액 무료고 숙식도 지원한다. 충남 서천군은 만 18∼40세 도시 청년에게 초보농부 교육 훈련비 월 100만 원을 7개월 동안 지원한다. 만약 전국 지자체의 귀농 지원책을 알고 싶다면,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2022 A FARM SHOW(에이팜쇼)-창농·귀농 고향사랑 박람회’를 방문하면 된다. 행사는 26일까지 열린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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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자율’이라고 적혀 있지만 ‘강제’로 읽힌다

    일본 정계에는 ‘30% 룰’이 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의 집권당은 내각 지지율이 30%를 밑돌면 총리 교체를 검토한다. 총리가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내각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지면 예외 없이 총리를 교체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잇달아 직무수행 긍정평가가 30% 아래로 떨어졌다. 정부는 평상시 같았으면 ‘경제’에서 돌파구를 찾을 것이다. 재정 집행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 시중에 돈을 공급하면 경제는 살아난다. 내 배가 부르면 정권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은 돈을 풀 형편이 안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이미 엄청나게 돈을 푼 데다 원자재 가격 고공행진, 원-달러 환율 급등(원화 가치 급락) 등의 영향으로 물가가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돈을 흡수해야 해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실제 상당수 기업이 비상 경영을 선언하며 투자와 지출을 줄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눈에 들어온 게 금융권 아닐까 싶다. 대부분 은행들은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 금리 인상기엔 대출 금리가 곧바로 오르고 예금 금리는 천천히 오르는 경향이 있어 예대마진이 늘어난다. 면허(라이선스)로 은행을 관리하는 정부로선 은행이 공적 역할을 대신해 주길 내심 바랐을 것이다. 5월 이후 새로 취임한 정부와 금융 당국 수장들은 입을 맞춘 듯 은행의 ‘이자 장사’를 비판했다. “은행의 지나친 이익 추구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도 했다. 여론 역시 우호적이었다. 그러자 시중은행들은 고정형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즉각 내렸다. 예금과 대출은 은행업의 본질이지만, ‘이자 장사’라는 프레임에 은행이 꼼짝 못 했다. 지난달 14일 금융위원회는 금융 부문 민생안정 대책을 발표하며 9월 종료 예정인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만기 연장과 상환 유예 조치에 대해 “주거래 금융기관의 책임 관리를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차주(돈 빌린 소상공인)가 신청하는 경우 자율적으로 90∼95%는 만기 연장 및 상환 유예 해주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금융위는 ‘자율’이라고 표현했지만 금융기관들은 ‘강제’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부실 대출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계속 만기를 연장해 줘야 한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7일 6조6000억 원에 이르는 수상한 외환 거래에 대한 잠정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큰 규모의 송금 거래가 이뤄지면 일단 뭔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며 은행을 질책했다. 이에 대해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은행 창구 직원은 매뉴얼대로 적법하게 대응했다. 어떻게 서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느냐”고 반문했다. 금감원의 칼끝이 ‘관리 책임’이란 명목으로 은행장, 지주 회장으로까지 향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새 정부는 민간시장 중심의 역동성을 강조하며 “모래주머니를 확 벗겨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금융권에 대해선 관치(官治)가 여전한 느낌이다. 정부는 “언제 강제로 지시한 적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부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 금융권으로선 금융 당국자의 말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를 하나둘 차게 되면 금융 경쟁력은 그만큼 떨어진다.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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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경제 정상화에 따르는 고통

    2019년 1월 도쿄 특파원으로 출국했을 때 코스피는 2,100대였다. 한동안 한국 증시를 잊고 살다가 지난해 초 우연찮게 코스피가 3,000을 돌파한 것을 봤다. 깜짝 놀랐다. ‘코스피가 이렇게 쉽게 끓어오르다니….’ 그 무렵 일본에서 한국 지인들과 통화를 하면 그들은 온통 투자 이야기를 했다.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돈을 모아 집을 샀다. 목돈이 마련되지 않으면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했다. 대출 이자가 워낙 낮았기에 은행 대출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주점을 운영하던 한 지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를 명분으로 손쉽게 은행에서 돈을 빌렸고, 그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정부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상환유예와 만기연장 조치를 2년 넘게 실시했기에 원금 상환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3월 일본에서 귀국했더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주식과 코인은 연일 가격이 떨어졌고, 부동산 상승세는 주춤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투자를 권했던 지인들은 입을 닫았다. 13일 한국은행의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보면서 속이 탔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경제 위기 때마다 정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돈을 풀었고, 그 돈을 거둬들이는 정상화 때마다 항상 고통이 뒤따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경제를 살리느라 돈을 풀자 너도나도 은행 빚으로 부동산을 사고 소비를 늘렸다. 물가가 치솟았기에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계속 올렸다. 이자 부담에 쓰러지는 가계가 하나둘 나왔다. 지금 상황과 판박이다. 다만 현 상황은 아직 고통의 정점이 아니다. 1차 충격은 10월 즈음 드러날 것 같다. 9월 말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상환유예가 끝나기 때문이다. 3월 말 기준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960조 원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말과 비교해 40.3% 급증했다. 금융위는 “10월 이후에도 급격한 대출회수가 없도록 주거래 금융기관 책임관리를 추진하겠다”고 14일 밝혔다. 하지만 금융기관들은 대거 부실채권이 생길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은행도 비례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2차 충격은 연말 즈음에 완연해질 수 있다. 지난해 7월 0.5%에 불과했던 기준금리는 이달 2.25%가 됐고, 연말이면 약 3%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 ‘가계부채’ 문제가 수면으로 드러날 수 있다. 현재 한국 가계부채는 약 1900조 원이다. 국제금융협회(IIF)가 36개국을 대상으로 올 1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빚 규모를 조사한 결과 1위가 한국이었다. GDP 대비 104.3%였다. 급격하게 금리가 오르면 파산하는 가구가 속출하게 된다. 가계부채 폭탄의 뇌관에 불이 붙게 되고, 그 폭탄이 터지면 금융 부실, 부동산시장 폭락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돈 풀기 파티는 끝났다. 정상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정부는 비상경제민생대책회의, 비상경제장관회의 등 요란한 이름의 회의를 연일 열고 있지만 신통한 해법이 있을 리 없다. 가계와 기업은 고통스럽지만 끈질기게 구조조정해 건전성을 높일 때다. 정부는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지 않는지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취약계층의 부담을 낮추는 핀셋 지원을 해야 한다. 아울러 일자리를 늘려 가계소득을 증가시키는 정공법도 필요하다. 이제 내려가기 시작하는 롤러코스터의 손잡이를 꽉 잡을 때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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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박형준]‘복합위기’ 극복을 위한 조언

    “경제 분야에서 30년 일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위기다.” 한 경제연구소의 부사장급 인사의 말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로 인한 공급망 교란, 유가 폭등…. 통제할 수 없는 해외 요인이 한국 경제를 덮치고 있다. 거기에 물가 급등, 무역수지 적자, 금리 인상 등 국내 문제도 만만치 않다. 연일 주가는 급락하고 원-달러 환율은 치솟는다. ‘복합위기’다. 깜깜한 터널 속에서 어떻게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과거 한국 경제의 위기 사례를 참고 삼아 들여다봤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지금처럼 한국 증시와 원화 가치가 연일 하락했다. 그해 연간 물가 상승률은 4.7%로 치솟았다. 불을 끌 소방수로 2009년 2월 윤증현 당시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이 새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기재부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윤 장관의 취임 기자회견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그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3% 내외에서 ―2.0%로 과감하게 낮췄다. 일부 기재부 당국자는 “그래도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마이너스’ 언급만큼은 피해야 한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윤 장관은 “국민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그 이후 약 1년간 신문은 ‘위기’ ‘사상 최악’ ‘도산’ 등 단어로 도배됐다. 국민들은 경각심을 가졌고 위기 극복에 동참했다. 만약 정부가 1997년 외환위기 직전처럼 “경제 펀더멘털은 좋다”며 달콤한 발언만 내놨다면 2010년 한국 경제의 퀀텀 점프(성장률 6.5%)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는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났던 1979년 이야기다. 그해 초 청와대에서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이 농가주택 개량사업 업무보고를 했다. 애초 9만5000호를 개량하려다 그 규모를 3만 호로 줄였다. “나도 농촌 출신인데 더 투자합시다.”(박정희 전 대통령) “각하, 경제의 안정구도를 갖고 나가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시멘트를 비롯한 건설 자재값과 건설 임금 상승, 그리고 재정 부담 때문에 축소가 불가피합니다.”(신현확 전 경제기획원 장관) “그래도 6만 가구는 해야 하는 거 아니오?”(박 전 대통령) “안 되겠습니다.”(신 전 부총리) 그날 이후에도 대통령과 장관의 농가주택 논쟁은 이어졌고, 심지어 박 전 대통령이 “내가 농업 개발에 대한 집념이 있는데, 당신이 내 집념을 꺾을 작정이냐”고까지 몰아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신 전 장관은 신념을 꺾지 않았다. 오일쇼크의 위기 속에 ‘성장’을 추구할 게 아니라 ‘안정’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경제 전문가로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해 봄 경제기획원은 중화학공업 축소 및 조정, 새마을운동 지원 축소, 수입 개방 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을 내놨다. 성장 지상주의자였던 박 전 대통령의 심기는 불편했겠지만 이 정책으로 치솟던 물가는 떨어졌고, 1981년 한국 경제는 다시 반등할 수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팀도 최근 성장률 전망을 대폭 낮추고, 물가 전망은 2배 이상으로 올리며 연일 위기 경고음을 내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 앞에서 신념 있는 목소리를 내는지는 의문이다. 지방선거 직전에 결정된 62조 원의 사상 최대 추가경정예산이 물가를 더 부채질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1979년 상황은 ‘신현확의 증언’(신철식, 2017년)을 참고했습니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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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의 180도 다른 소상공인 손실보상 접근법[오늘과 내일/박형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상에 본격 모습을 드러낸 2020년 초,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에 있었다. 그랬기에 일본 정부의 소상공인 손실보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도쿄에서 15m² 남짓한 공간에 한식 음식점을 운영하는 지인 A 씨는 그해 4월 일본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를 실시했을 때 ‘곧 망하겠다’고 느꼈다고 했다. 정부는 도쿄도민들에게 외출 자제를, 음식점에는 오후 8시까지 단축 영업을 요청했기에 손님이 뚝 끊어졌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로 돌아갔다. 단축 영업에 응하면 하루 4만 엔(약 40만 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그 금액은 지난해 초 하루 6만 엔으로 늘었다. 가게 임차료 지원금(6개월 동안 100%), 주류 판매 제한에 따른 영업손실 보조금(매월 최대 400만 원)도 나왔다. 거기에 1회성으로 사업부활 지원금, 소규모 사업자 지속화 보조금 등도 받았다. A 씨는 “2년 동안 받은 정부 지원금을 다 합치면 2000만 엔 정도 되는 것 같다. 코로나19가 앞으로 계속되어도 끄떡없다”고 말했다. 올해 3월 귀국해 서울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지인 B 씨를 만났다. 최근 2년 동안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은 두 차례 방역지원금 400만 원과 손실보상금 3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두세 달 임차료와 인건비를 내니 사라졌다. 그는 결국 올해 초 가게를 접었다. B 씨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코로나19로 임차료조차 못 낸 식당 주인이 자신의 식당에 불을 냈다는 신문 기사를 봤는데, 나도 꼭 그런 느낌”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두툼한 손실보상은 참 부럽다. 지난해 일본에서 도산한 업체 수는 6030곳으로 1964년 이후 57년 만에 최저였다. 외식업, 여행업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지만 분명 정부 지원금으로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본 정부를 비판한다. 선진국 최악 수준의 국가채무를 가진 일본이 또다시 퍼주기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일본의 세출은 175조6000억 엔으로 예년 수준(약 100조 엔)보다 크게 늘었지만 세입은 55조1000억 엔에 그쳤다. 결국 그해 평상시 두 배가 넘는 112조5000억 엔의 국채를 발행해야만 했다. 일본이 100조 엔 이상 국채를 발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해 상황도 비슷했다. 그렇게 늘어난 나랏빚은 후대가 갚아야 한다. 참고로 한국도 2020년에 세출이 크게 늘어 통합재정수지가 71조2000억 원 적자였지만, 적자 규모는 일본의 약 6%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만난 경제 당국의 고위 공무원은 “처음에 한국 정부의 소상공인 지원책을 보고 ‘이것뿐인 게 맞나’ 싶어 몇 번이고 다시 봤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일본보다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 국회가 약 62조 원의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통과시켰다. 추경 사상 최대 금액이다. 주로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 지원에 사용된다. 국가재정법에 제대로 근거한 추경인지, 물가 상승을 부추기지 않을지 등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소상공인에게 ‘단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62조 원 중 23조 원을 교부금 관련법에 의해 지방교부금으로 의무 사용해야 한다는 데에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빠른 추경 집행과 비효율을 초래하는 50년 된 교부금 제도를 이번 기회에 손볼 것을 제안한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 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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