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신석호 전무

동아닷컴 임원진

구독 37

추천

안녕하세요. 신석호 전무입니다.

kyle@donga.com

취재분야

2024-05-02~2024-06-01
남북한 관계38%
문학/출판30%
사회일반13%
인사일반7%
정치일반3%
문화 일반3%
언론3%
교육3%
  • “내가 임명한 부하들이 왜 나를 위해 싸워주지 않는가” [책의향기 온라인]

    중국 전국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뒤를 다퉜던 유방과 항우. 항우는 유방을 상대로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긴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결국 전쟁에서 지고 죽음을 맞이한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개국했지만 ‘토사구팽’의 신세가 되는 한신, 소련의 개혁개방을 주도하다 본의가 아니게 소련 제국의 붕괴를 이끈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역사적 인물이다.●저자의 문제의식은?고대 중국과 한반도 삼국시대, 로마제국과 조선왕조와 막부시대 일본, 대혁명 시절 프랑스와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 등 동서고금 13개 역사적 사건에 등장하는 비운의 패배자들에겐 어떤 점이 부족했을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것이 있었을까.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경제학과 게임이론을 적용하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출판사 서평 한 문단많은 독자들이 이미 아는 것처럼 항우가 진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세운 왕들이 경쟁자인 유방을 위해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해석은 이렇다.“저자는 항우의 비극에 대해 ‘비협조적 게임’ 이론을 적용하여 설명한다. 비협조적 게임이란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 존 내시 교수가 주장한 이론으로, 모든 의사결정은 개인들이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분명 항우가 임명해 왕이 된 자들인데, 항우를 돕지 않고 유방의 편에 서서 싸운 것은 이미 왕이라는 자리로 포상을 받은 터라 더 이상 항우에게서는 받을 것이 없는 반면,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새로 논공행상을 한다면 더 큰 포상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항우는 부하가 충성하는 것은 내가 승진시켜준 데 대해 감사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또 승진시켜줄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이 책의 무엇이 특별한가?역사 속 패자들에게 돋보기를 들이댄 경제학 서적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항우와 유방의 일생을 통한 경쟁은 ‘초한지’로 전수되어 왔다. 이를 근거로 많은 해설서와 리더십 책이 나왔지만 대부분 승자인 유방을 조명해왔다. 항우로 시작해 한신, 로마의 원로원, 당태종 이세민,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 가마쿠라 막부 등 명멸한 일본 사무라이들…, 한 때 세상을 호령하다 졸지에 몰락한 패자들에게서 교훈을 찾으려 했다는 역발상이 돋보인다.이들의 패인을 경제학 특히 게임이론으로 설명하는 시도가 신선하다. 경제학자가 역사를 공부하면 이렇게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독자들은 저자가 꼽은 13가지 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개괄적으로 접하면서 동시에 게임이론이라는 경제학의 다양한 이론과 개념들도 소개받을 수 있다. 역사에 해박한 독자들은 게임이론의 신박한 해석을, 역사 입문자들에게는 동서고금의 역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제공하는 책이다. 떴다 진 인물들의 일생 속에서 삶을 전략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조직과 국가를 이끄는 리더들이 읽어야 할 처세서로도 손색이 없다.●저자는 누구?저자인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릭 매스킨 교수와 게임이론의 대가로 불리는 드루 푸덴버그 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이후 게임이론과 법경제학을 전공해 왔다. 저서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대한민국이 묻고 노벨 경제학자가 답하다’ ‘경제학 비타민’ ‘인생경제학’ 등이 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5-12
    • 좋아요
    • 코멘트
  • [온라인 라운지]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 창립 20주년 기념식

    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NKDB·이사장 신영호)는 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창립 20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다. 북한에서 자행되는 인권 실태에 대한 기록분석, 보관을 목적으로 2003년 설립된 이 단체는 현재까지 2만여 명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조사와 증언을 분석해 8만 5391건의 인권침해 기록과 5만 5065의 인물정보를 보관하고 있다. 북한인권 침해 정보 관련 세계 최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세계 각국과 단체들의 북한 인권 운동에 밑거름을 제공해 왔다.NKDB 임순희 본부장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앞으로의 20년은 북한인권의 탈정치화와 북한인권에 대한 보편적인 국민인식의 제고를 위해 북한인권박물관 운영, 북한인권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작업에 그간 쌓은 역량을 쏟을 예정이다. 북한인권 피해 당사자와 그 가족의 이익과 요구를 우선하며 북한이탈주민 스스로 당사자로서 인권 활동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돕겠다”라고 밝혔다.‘함께 기록한 20년, 나아갈 내일’이라는 슬로건을 걸은 이번 기념행사에 데이비드 알톤 영국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살몬 UN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워싱턴 D.C. 북한인권위원회(HRNK) 그렉 스칼라튜 사무총장 등이 축하 영상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준 전 유엔 대사, 안호영 전 주미 대사 등이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신영호 이사장은 국군포로와 납북자 실태를 알린 공로로 귀환 국군포로 유영복과 귀환 납북자 이재근에게 대표로 감사장을 전달했다. 김상헌 NKDB 명예 이사장(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 김선화 마천종합사회복지관 관장, 김웅기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 김일동 한울회계법인 회계사, 박종훈 전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장, 이재춘 전 러시아 대사, 이재화 전 명화실업 회장, 이현일 전 GM대우 마케팅 본부장 등에게도 공로패를 전달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5-09
    • 좋아요
    • 코멘트
  • [온라인 라운지]이인배 국립통일교육원장, ‘한반도 운명과 두 개의 특이점’ 출간

    이인배 국립통일교육원장이 한반도 통일과정에 4차 산업혁명 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시론적 고민을 담은 ‘한반도 운명과 두 개의 특이점, 열린책들’을 출간했다. 두 개의 특이점 중 하나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운명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말한다.이 원장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통일 이후 북한의 도로와 철도 건설, 주택 개선사업, 통일화폐 발행 등의 과제에 현재 개발되고 있는 자율주행차, 3D 프린팅 건축기술, 암호화폐 기술 등을 활용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관련 이슈들에 대해 현재의 열악하고 퇴행적인 북한의 상황을 소개하고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통일 독일의 경험 등이 함께 소개된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 2023-05-05
    • 좋아요
    • 코멘트
  • [온라인 라운지]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시어도어 루즈벨트 리더십 연구서 출간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가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일생과 리더십을 담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가장 사나이 다운 대통령의 빛나는 리더십, 박영사’를 출간했다.강 교수는 “루즈벨트는 ‘사나이 다움(virtu, 혹은 manliness)’을 추구하고 또 몸소 실천한 역사에 아주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 한 세대 후에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Winston S. Churchill)이 등장할 때까지 그와 같이 사나이다운 민주주의적 정치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고 저술 이유를 밝혔다.처칠 수상이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의 참전 영웅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한다면, 루즈벨트 대통령은 1898년 쿠바를 둘러싼 스페인과의 전쟁에 의용 기병대장으로 참가하면서 일약 전쟁 영웅이 된다.1900년 부통령이 되었다가 다음해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피격 사망에 따라 집권한 뒤 국내정치적으로는 소수 기득권이 아닌 국가와 국민의 공익을 대변하며 공화당의 진보진영을 이끈다. 한국인들에게는 ‘카스라-테프트 조약’을 승인해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용인한 장본인이지만 러일전쟁을 종식하는 ‘포츠머드 평화회담’을 이끈 공로로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미국의 영향권을 확고히 한 ‘먼로독트린’을 강화하고 미국의 대외정책을 고립주의에서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로 전환해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드는 초석을 놓은 그는 러시모어 바위산(Mount Rushmore)에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얼굴이 새겨진 20세기 유일한 대통령이다.강 교수는 2014년 퇴임 이후 링컨과 처칠, 워싱턴, 해리 투르먼, 헨리 키신저, 오토 폰 비스마르크, 나폴레옹 보나파트르 등 세계사의 역사적 인물의 리더십을 탐구해 저서로 펴내왔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 2023-05-05
    • 좋아요
    • 코멘트
  • [온라인 라운지]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에 박학용 씨

    한국온라인신문협회(온신협)는 2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표자 회의를 열고 박학용 디지털타임스 대표(전 문화일보 편집국장)를 회장으로, 김정욱 매경닷컴 대표를 부회장으로 선임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4-25
    • 좋아요
    • 코멘트
  • 죽은 빨치산 영정들이 김일성 증손녀 사열에 동원된 까닭 [한반도 가라사대]

    8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창건 75주년, 이른바 건군절 기념 열병식을 보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관심은 온통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네 발과 주석단에 오른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 모아졌습니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인지를 둘러싼 섣부르고 소모적인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북한이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을 위한 정지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는 신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중요 기념일의 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정주년)마다 열리는 제대로된 열병식 주석단에 북한 김씨 독재자가 자식을 데리고 등장하는 장면 자체가 흔하지 않습니다. 생전 김정일이 김정은을 데리고 등장했던 2010년 10월 10일, 65주년 당창건기념일의 열병식 장면이 생생합니다. 마침 김일성의 지시로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87세 일기로 서울에서 사망했던 날이었습니다. 처음 무대에 올린 아들을 바라보는 걱정스런 김정일의 눈빛과 잔뜩 긴장한 26세 김정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아래는 황 전 비서의 사망 소식과 함께 다음날 동아일보 1면에 실렸던 사진입니다.23년 뒤인 8일 김정은은 딸 김주애를 데리고 주석단에 올랐습니다. 김주애는 부인 이설주보다 더 대접받는 모양새였습니다. 당연하지요. 이설주는 이씨이고 김주애는 김씨 이기 때문입니다. 10대 김주애가 후계가 될지 아닐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가 김일성의 증손녀, 이른바 ‘백두혈통’의 4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그를 주석단에 올려놓고 그날 열병식장에 벌어진 일은 모두 북한의 4대 세습 분위기 띄우기에 집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올해 4월 김일성의 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전후해 인공위성을 띄우겠다고 공언한 북한은 이를 핑계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의 정상각도 발사를 단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일본, 미국에 핵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4대 세습을 할 수 있다. 고로 김씨 독재 정권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엉뚱한 생각들 마라. 지금처럼 충성해라!.’ 이게 8일 열병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그런데요, 그런 뻔한 스토리에 흥미로운 소품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활동을 같이한 이른바 ‘빨치산’들의 영정이 4대 세습 분위기 띄우기에 무더기로 동원되었다는 겁니다. 북한군이 죽은 선배들의 얼굴 사진을 들고 행진을 했다는 것인데, 제 눈에는 죽은 선배들을 영정사진의 형식으로 등장시켜 3대세습 후계자 김정은과 4대 김주애에게 사열을 시킨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오늘 가라사대의 제목입니다.구체적으로 조선중앙통신은 세 문단에 걸쳐서 빨치산 출신 ‘북한 개국 공신’ 8명과 이후 군 간부 등 모두 18명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오늘 소개할 8명은 첫 문단에 소개된 빨치산 출신 ‘북한 개국 공신’ 8명입니다. 통신이 공개한 순서대로 김책 안길 최용건 오중흡 김일 김주현 오백룡 강건이 바로 그들입니다.북한을 20년 넘게 공부하고 지켜보고 있지만 대충 이름만 들었던 그들의 프로파일을 확인하기 위해 책들을 뒤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북한 조선인민군의 창설 역사가 꿰어졌습니다. 8일 북한이 기념한 건군절은 김일성이 1948년 2월 8일 당시까지 비밀리에 키워온 정규군을 ‘조선인민군’으로 명명하여 공식적으로 군창설식을 가졌다는 이벤트입니다. 8일 소개된 8명 가운데 당시까지 살아남았던 5명은 요직을 맡게 됩니다. 최용건은 사령관을, 강건은 총참모장이 됩니다. 이후 5명은 죽을 때까지 김일성과 김정은의 ‘은전’을 받아 요직을 독차지했고 대대손손 북한의 핵심성분 지위를 누립니다. 김주현과 오중흡 역시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1937년 6월 이른바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지만 해방 전인 1938년과 1939년 전사했습니다. 안길은 북한 정권 수립 직전인 1947년 12월 사망합니다. 김일성을 둘러싼 8명의 관계는 훨씬 더 이전에 시작됩니다. 말씀드린대로 8명은 100%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활동을 같이 한 빨치산 출신입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저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에서 북한 건설과정에 참여한 빨치산을 100여 명으로 계산했는데 8명은 초기인 1932~35년 사이에 참가했던 인물입니다. 해방 이후까지 살아남은 6명은 일본을 막기 위해 동아시아에 진주한 소련군의 지원과 비호를 받아 ‘제대로 된’ 군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최용건 김책 안길 강건 등 4명은 아래 과정을 통해 김일성과 함께 소련군 대위 출신이지요.“소련군들은 빨치산 출신 중 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거나 만주시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선별하여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보병학교에서 6개월 동안 장교 속성교육을 시키고 정규군의 초보전술을 가르쳤다. 소련군은 유격대 경력, 장교교육에서 성적 등을 고려해 88여단 내에서 이들에게 계급과 직책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김광수, “조선인민군의 창설과 발전, 1945~199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아카데미, 2006, 82쪽.)최용건 김책은 해방 이후인 1945년 7월 김일성이 ‘조선에서의 당 건설과 해방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한 ‘조선공작단’을 주도했습니다. 이들은 해방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 했지만 소련군의 반대로 해방 이후 가명을 사용해 개인 자격으로 북한에 들어옵니다. 소련군 정찰대에 파견되었던 오백룡 만이 유일하게 소련군과 함께 북한 지역에 진주했습니다. 1946년 7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난 김일성은 정규군을 만들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와 ‘보안간부학교’라는 이름의 군관학교를 설립합니다. 당연히 빨치산 측근들을 요직에 중용하죠.“김일성은 간부 구성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사령관에는 88여단의 부참모장이었던 최용건이 임명되고 참모장으로는 같은 여단 제1대대의 정치위원을 지낸 안길이 임명되었다. 계몽과 정치교육을 담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책인 문화사령관에는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김일이 임명되었다.”(김광수, “조선인민군의 창설과 발전, 1945~1990”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엮음, ‘북한군사문제의 재조명’ 한울아카데미, 2006, 72~73쪽.)최용건은 북한 건국 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을 1인 독재자로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2인자로 군림하면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부주석 등을 지내고 1976년 사망합니다. 김일도 내각 부수상, 정무원 총리, 국가부주석 등 권력서열 3위를 지키다 1984년 사망했습니다. 오백룡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정위원 등을 거쳐 1984년 사망했습니다.6.25전쟁 중에 죽은 이는 둘입니다. 김책은 초대 내각부수상 겸 산업상을 맡았는데 6.25전쟁 중인 1951년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강건도 초대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1950년 6.25전쟁을 일으켰다가 그해 9월 전사합니다.설마 이들이 숨을 거두면서 영정의 형태로 김씨 4대 세습에 활용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못했을 겁니다. 다만 김씨 일가가 영원히 권력을 지켜 자자손손 대를 이어 호가호위를 하기는 바랬을 겁니다. ‘김책공대’로 북한 역사에 영원이 이름을 새긴 김책의 아들은 노동당 간부담당 비서를 오래 지낸 김국태 였습니다. 한번 김씨 일가의 ‘로열패밀리’가 되면 대대손손 잘 먹고 사는 나라, 로열패밀리의 2대, 3대가 물려받은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김씨 2대, 3대 후계자에게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 무너지지 않는 나라, 그게 오늘의 북한입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2-10
    • 좋아요
    • 코멘트
  • 줄리 터너 美 신임 북한인권특사에 대한 기대와 우려 [한반도 가라사대]

    “나는 한국어를 구사할 순 없어도 인권을 ‘구사할 수’ 있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재임 8년의 대부분을 미국의 북한인권특별대사로 일한 로버트 킹은 2022년 10월 한국어로 출간된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2009년 5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자신에게 북한인권특사직 수락을 제의한 것은 자신이 한국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인권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었습니다.그는 젊은 시절 미 터프츠대 플레처법률외교대학원에서 냉전 초기 중부 유럽의 다민족 공산주의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쓴 후 7년 동안 독일 뮌헨에 있는 자유유럽방송 본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후 미 의회에 자리를 잡았고 거의 25년 동안 톰 렌토스 하원외교위원장의 비서실장이자 하원 외교위원회 실무국장으로 일하며 인권문제를 두루 다루게 됩니다. 그는 “북한의 인권유린에 경악함과 동시에 이 문제에 완전히 사로잡혔다”며 오바마 행정부 2기, 존 케리 국무장관 시절까지 자리를 지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나는 한국어도 구사할 수 있다. 거기다 인권도 구사할 수 있다.”14년 전 킹 특사의 수락 일성을 그의 후임인 줄리 터너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과장에게 대입한다면 이럴 겁니다. 한국계인 터너 과장은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미 국무부에서도 인권에 특화된 부서, 민주주의·인권·노동국에서 16년을 근무하면서 주로 북한인권 문제를 다뤘다고 합니다. 2017년 12월 국무부가 SNS에 공개한 ‘인권의 영웅들’이란 동영상에서 탈북 여성 지현아 씨와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이신화 북한인권대사는 그의 지명을 반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2022년 10월초 대사로 처음 방미해 국무부에 면담을 갔을 때 동석한 담당과장이었지요. 당시 좋은 인상을 받아 12월초 다른 회의로 짧게 다시 갔을 때 식사라도 하며 그의 북한인권에 대한 경함과 이해에 대해 들어보고 의견을 교환하고 싶었는데 못 만났어요. 지명이 빨리 승인되어 조만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의 가까운 협력을 크게 기대합니다.”2005년 8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초대 북한인권특사로 지명했던 제이 레프코위츠 변호사는 한국어를 못했을뿐더러 인권, 특히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전문성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3대 터너 특사는 2대인 킹 특사가 가졌던 인권 전문성에 모국어로서 한국어 능력도 가졌다고 하니 앞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다뤄나갈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는데 엄청난 강점(strength)을 가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하지만 8년 가까운 임기동안의 일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킹의 경험담을 읽으며 비교해보니 터너 특사에겐 상대적인 약점(weakness)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그가 전임자에 비해 ‘정치적 무게감’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70대의 원숙한 의회 간부 출신 킹 특사는 지명 때부터 그 무게감으로만 한미 관계자들의 기대를 샀습니다. 실제 그는 한국과 북한을 수차례 오가며 북한인권문제를 조율했고, 미국 내에서 의회와 행정부의 교량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2011년 북미 2.29합의 전후 대북 식량 지원 협상, 유엔인권이사회에서의 대북 인권 압박, 로버트 박·아이잘론 곰즈·전용수·케네스 배 등 북한 내 억류자 송환,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활동, 북한 내 정보유입 활동 등 북한인권운동사에 남을 이벤트들이 킹의 손을 거쳐갔습니다. 각각의 이슈들을 깨알같이 정리한 회고록을 보면 그는 재임기간 미국 국무부의 대사급 직책을 앞세워 한국과 미국 내 두터운 인맥을 동원하고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북한도 그를 여러 차례 초대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킹 특사의 개인적 무게감이 작용한 덕분이죠. 하지만 터너 특사는 어떤 기준으로도 전임자 만큼의 비중을 느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저도 2013년부터 3년 동안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하면서 킹 특사를 공석 사석에서 여러 차례 만났지만 터너 특사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한미 공공외교에 함께 몸담았던 동료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더군요. 한마디로 터너 특사는 국무부에 입부해 ‘블랙’으로 북한인권업무를 수행해 온 실무 공무원이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16년 동안을 국무부에서 근무했다는 것으로 보아 의회 경험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북특사라는 자리가 요구하는 경력의 큰 공백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북한인권 업무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키는 근본적으로 의회가 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이 모두 북한 핵문제와 인권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가운데 키를 쥐고 있는 몇몇 의원들에 대한 직접 소통과 관계 활용이 특사직을 잘 수행하는데 핵심적인 역량일 수 있습니다. 킹 특사도 국무부 대사 직책이 의회와의 관계 유지에 중요하다는 맥락에서 의회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이러한 지위(북한인권특사)는 북한 문제에 대한 의회 고위관계자들의 관심을 다루는 데에도 중요하다. 의회는 전통적으로 북한인권 뿐만 아니라 인권 전반에 대한 미국의 행동을 촉구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의회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국가별 인권보고서, 인신매내 보고서, 국제종교자유 보고서)는 인권 문제에 대해 매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의회 위원회는 이러한 보고서와 관련된 청문회를 열고 다양한 인권 사안을 정기적으로 논의한다. 북한인권특사를 초청해 청문회를 자주 연다는 것은 그만큼 국무부 내에서 특사의 지위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무엇보다 북한이 전략핵과 전술핵 미사일 공격 능력을 완성하고 법제화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 좋건 나쁘건 미국과 북한 사이에 활발하게 진행되는 인권 이슈가 거의 없다는 것도 터너 특사에겐 위기(threat)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새로운 상황과 도전에 대한 새로운 인물의 응전으로 발전해 왔다고 믿습니다. 터너 특사는 전임자보다 젊습니다. 전임자와 달리 냉전을 경험하지 못했을 터이구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젊은이들이 참신한 발상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온 것이 인류 역사 아니던가요. 터너 특사가 전임자와의 차이를 극복하고 북한 인권 문제에 새로운 획을 긋는 중대한 역할을 해 주어 과거의 기준에 따른 위기 요인을 미래를 만들어가는 기회(opportunity)로 삼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2-03
    • 좋아요
    • 코멘트
  • 그 간첩은 어떻게 총리의 비서가 되었을까[한반도 가라사대]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조금 지난 2022년 7월. 갓 취임한 사정기관 고위 당국자가 사석에서 ‘국가정보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넘겨주도록 한 문재인 정부 시절 국회 입법은 국가안보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취지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하라고 했으니 따라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국회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직접 내려 보내는) 직파간첩은 없습니다. 해외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인데 그건 해외 정보기관들과의 협조가 되어야 파악이 됩니다. 경찰은 그거 절대 못 잡습니다.”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스파이 작전도 글로벌화 되었기 때문에 ‘북에서 바로 들어오는 간첩을 앉아서 잡는’ 시대는 갔고 그렇기 때문에 간첩 조직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과의 ‘정보 교환’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해외 정보기관들은 정보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을 수 있고 비밀유지가 되는 상대방과만 거래를 합니다. 그 일을 해 온 것이 한국에서는 국정원입니다. 국정원이 나서도 힘이 부칩니다. 북한은 대남 간첩 요원을 80년 키운다고 합니다. 평생 그 일만 시킨다는 것이죠. 우린 30년을 키워도 대적이 안 될 판인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잘리고 또 잘리고….”당시에는 그 말이 긴급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최근 속속 드러나는 시민단체와 정치권, 노동계 등의 간첩 연루 혐의 소식을 보면 윤 정부 국정원은 출범 초기부터 대공수사권이 왜 국정원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증명해 보이기로 마음 먹은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 김규현 국정원장의 비서실장 산하에 방첩조직을 만들어 간첩 수사에 매진했다고 합니다.최근 언론에 드러나는 내용들을 보면 국정원의 ‘증명’이 일부 성공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한민국의 제도권 노동운동 조직인 민노총 간부들이 해외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었다는 혐의가 사실이라면 충격적입니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거점을 마련한 북한 공작 조직이 남한 인사들을 불러내 접선했다고 합니다. 돈이 오갔고 비밀 교신 수법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내에 반국가단체를 조직하고 요인들을 포섭하려 했답니다.과거 냉전시절의 뻔한 스토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북한의 대남 공작 조직 활동 구조의 변천을 네 단계로 구분합니다. 먼저 분단 후 남한에 자생하는 간첩 조직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1975년 불가리아를 방문해 “남조선의 마르크스당인 통혁당은 약 3000명 가량”이라고 실토했음이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입수한 북한 외교문서를 통해 2013년 공개됐습니다.두 번째는 북한 간첩이 남한에 내려와 요인을 만나고 포섭하는 방식입니다. 1990년대 유명한 간첩 김동식이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만나 포섭하려 했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1996년 기자생활을 서초동 법원에서 시작하면서 법정에 선 김동식을 직접 보았습니다). 유 원장은 “북한은 김대중 정부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을 한 뒤 직파간첩 투입 방식에 부담을 느끼고 해외에서 간첩을 들여보내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010년대 들어서는 해외에 거점을 둔 북한 간첩조직이 남한 인사들을 해외로 불러 포섭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글로벌 화’ 했다는 겁니다.이번 사건에서 국정원은 상대국인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은 물론 국제 정보당국과의 긴밀한 공조 수사를 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정원이나 검찰 등 공안당국이 암시하는 간첩조직의 규모도 상상 이상인 듯합니다. 한 사정당국 인사는 “하마터면 나라 넘어갈 뻔 했다”고 암시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도 동아일보에 “혐의자는 수십, 수백 명 더 늘어날 수도 있다”거나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인사들이 튀어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말만 들어도 섬뜩합니다. 1990년대 이후 남북한의 국력차이가 커지면서 남한 내부에 간첩조직을 키워 전복시키겠다는 북한의 대남전략이 사실상 끝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핵 미사일 능력을 키워오면서 방식을 전환하며 대남 간첩 활동을 계속하는 북한을 보면서 한반도는 아직 분단과 냉전 상태의 지속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당국자들의 허풍이 아니라면, 이대로 가다가 정말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북한을 위해 일해 온 스파이들이 드러날지 모르는 일입니다. 마치 1974년 서독 빌리 브란트 총리를 사임으로 이끈 총리실 직원 생 귄터 기욤처럼 말입니다.1927년 동독에서 태어나 1956년 아내와 서독으로 건너 온 그는 동독과의 비밀 교신이 꼬리를 잡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동독 첩보조직 슈타지 소속 인민군 장교였음을 실토했다고 합니다. 그레고어 쇨겐이 쓴 ‘빌리 브란트(김현성 옮김, 빗살무늬, 2003)’에 따르면 조사를 맡았던 ‘기밀조사위원회’ 위원장 테오도르 에쉔부르크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영리하고 조직력이 있으며 명민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 어떤 일도 피하지 않는다. 여기서 (총리실에서) 그는 동료들과 부하직원들과 잘 지냈다. 호기심이 가득하고,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공무를 맡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므로.”한마디로 기욤이 우리 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공직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유동열 박사의 구분에 따르자면 세 번째 유형입니다. 밖에서 들어왔지만 오랫 동안 자리를 잡은 뒤 활동을 한 케이스지요. 최영태 전남대 교수는 ‘빌리브란트와 김대중: 아웃사이더에서 휴머니스트로(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0)’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정치적 이유를 내걸며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도 서독에서 장기간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대공당국의 관심이 없어질 즈음 애초에 의도했던 임무를 수행하는, 소위 장기전을 펴는 간첩들이 있었다. 기욤의 경우도 이에 해당되었다. 동독 첩보원 혹은 간첩들 중에는 동독 정치범의 석방기회를 활용하여 서쪽으로 옮겨온 사람도 있었다. 서독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 동독 첩보원 혹은 간첩들을 단속하기가 쉽지 않았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1-20
    • 좋아요
    • 코멘트
  • 진짜 핵보유 하려면 바이든에게 편지부터 매일 쓰라 [한반도 가라사대]

    윤석열 대통령은 11일 “더 (북핵) 문제가 심각해져서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교부와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만약 그렇게 되면 오랜 시간 안 걸려서 우리 과학기술로,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더 빠른 시일 내에 우리도 (핵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이라는 단서를 붙였고 “그러나 늘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미 공조를 통한 미국의 핵우산 강화가 최선책이라는 점을 밝힌 전제에서 한 발언이었지만 파장은 컸다.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에 대한 대통령 취임 이후 첫 발언이었다. 최근 북한의 전술핵 도발 위협과 관련해 ‘압도적인 힘에 의한 평화’ 등 대북 강경발언을 쏟아 내고 있는 맥락에서 이해되었기에 파장은 더 커지고 있다. 미국 안보당국들은 일제히 “바이든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목표는 불변”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전략핵과 한국 일본을 타깃으로 하는 전술핵 개발을 완료하고 법제화까지 했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한국도 상응하는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보수 진영의 숙원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실현을 위한 액션플랜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자체 핵무장이라는 정책선택의 키는 ‘비대칭 동맹국’인 미국이 쥐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이 핵보유 권리를 독점하고 대신 비핵국가의 평화적 핵이용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핵비확산체제(NPT)를 구축해왔다. 비핵국가인 한국과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NPT체제를 위반한 것에 대한 혹독한 제재를 감수하던지, 아니면 미국이 주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 NPT 체제의 예외를 인정하는 정책결정을 내려야 한다. 미국과 나토의 핵공유 방식이 도입되는 방식과 1990년대 초까지 미국이 한반도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던 방식을 부활하는 방안 역시 전적으로 미국의 정책결정 사항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핵 문제의 악화’라는 원인과 ‘한국의 핵무장’이라는 결과 사이에 게재해 있는 중요한 ‘블랙박스’인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과정이 무엇인지 미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미국 외교사의 흐름 속에 고립주의와 개입주의를 오가며 대외정책의 큰 틀을 바꾼 정책결정 전환이 사례들은 적지 않다. 특히 나치 독일의 침략에 맞닥트린 영국이 고립주의 속에 잠자고 있던 미국을 깨워 참전시키는 과정은 참고할 대목이 많다. 나치와의 전쟁 시작 직후인 1940년 5월 영국 전시 내각 수상에 오른 윈스턴 처칠은 아돌프 히틀러의 파상공세에 시달렸다. 독일 잠수함 ‘U-보트’와 전투기 폭격에 따른 영국 전함 피해는 날로 커져갔고 결국 미국에서 해군력을 지원받는 것이 가장 절실한 과제로 떠올랐다. 지금 한국에 자체 핵무장이 점차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처럼. 처칠은 취임 다음달인 6월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세 차례나 간곡한 어조로 편지를 썼다. “구축함이 증강되는 것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에 이렇게 요청을 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투쟁이라도 할 것이지만, (구축함 증강을) 받지 못한다면 자원의 범위를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200척의 구축함이 있었고 대략 50척은 빌려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한 미국의 의회는 행정부가 전쟁 중인 국가에 전투함을 빌려주는 행위를 겹겹이 규제하고 있었다. 1917년 방첩법은 그것을 불법행위로 보았다. 미국인들의 고립주의 정서에 편승한 의회는 구축함의 대여는 물론 판매도 승인하지 않을 기세였다. 대통령이 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의회의 승인 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3선을 노리는 루즈벨트는 의회를 우회할 자신이 없었다. 처칠이 해군성 장관이던 1939년 9월부터 서신교환을 시작해온 루즈벨트였지만 그해 연말 3선에 도전하는 루즈벨트에게 우호국 영국의 요청보다 중요한 건 국내정치였다. 그런 루즈벨트를 도와준 것은 영국을 걱정하는 민간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었다. 1940년 7월 11일 뉴욕의 센추리 클럽에 모인 타임지 발행인 헨리 루스, 윌리엄 스탠들리 전 해군 제독 등 30여 명은 영국이 가진 서반구의 해군기지를 제공받는 대가로 미국이 50여 척의 구축함을 빌려주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에 고무된 처칠은 7월 31일 곧바로 루즈벨트에 대한 편지 공세를 이어나갔다.“최근 10일 동안 우리는 11척의 구축함을 잃거나 손상당했습니다. 구축함은 공중폭격에 취약합니다. 하지만 적의 해상침투를 막기 위해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손상을 오래 버텨낼 수 없습니다. 실질적인 증강이 없다면 전쟁의 전체 판세는 작은 요인에 의해 결정 날 겁니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재 상황입니다. 대통령 각하,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길고 긴 세계 역사 속에 이것은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임을 말씀드립니다.” 영국을 걱정하는 미국인들의 노력도 계속됐다. 미국의 전쟁영웅인 존 퍼싱 대장의 라디오 연설 이후 타임지와 뉴욕타임즈 등 유력지들이 ‘영국은 구축함을 원한다’는 배너 광고를 실었다. 변호사인 딘 애치슨 등은 ‘대통령이 의회의 조치 없이 영국에 구축함을 양도할 수 있다’는 글을 실었다. 이에 힘을 얻은 루즈벨트는 미국이 영국에 50척의 구축함을 지원하는 대신 영국이 미국에 뉴펀들랜드와 버뮤다, 바하마 자마이카 등 8곳의 기지를 99년간 임대하는 방안을 의회의 승인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루즈벨트는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서) 사들인 이래 우리 국방력 증강에 가장 중요한 조치”라고 홍보했다. 대중은 압도적으로 찬성했고 의회도 대통령을 비판하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이를 선거운동에 활용했고 11월 대선에서 승리해 역사상 첫 3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다음해 취임하자마자 의회를 설득해 연합국에 대한 물자지원을 할 권한을 대통령이 가지는 것을 골자로 하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를 통과시켰다. 처칠은 미국의 도움으로 나치와의 전쟁을 이어났고 1941년 12월 일본에 진주만을 기습당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함께 나치 독일을 물리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고립주의로 회귀했던 미국이 다시 개입주의로 방향을 바꾸는 기지-구축함 맞교환 사례는 미국 외교정책결정의 몇 가지 핵심적인 측면을 보여주었다. 외교정책결정의 ‘거래주의’적 측면,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결정에서 여론과 여론주도자의 중요성, 외교정책에 미치는 국내정치적 영향 등이 그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미국에선 우호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도 국가이익에 우선한 ‘거래’의 양태를 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구축함 지원을 가로막는 국민의 고립주의와 의회를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영제국의 해양기지라는 대가를 근거로 내세워 넘어섰다. 우호국이라도 무조건 지원하기보다 상응하는 안보상의 이익을 대가로 지원을 교환한다는 ‘상호주의’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부간의 거래가 성사되기 전에 민간 엘리트들이 여론을 움직였다. 이른바 ‘센추리 그룹’이라고 역사가 기록하는 미국인들은 의회에 가로막힌 루즈벨트 행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내부 여론에 호소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 정책의 ‘힘의 중심부’는 바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국민의 여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루즈벨트가 민간 여론 주도층의 지지와 여론의 호응을 확인하고서야 영국 지원에 나선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선거에 미칠 영향이 주요 고려 요소였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외교정책의 결정과정에 결정자의 국내정치적 고려가 강하게 게재된 사례다. 83년 전 영국과 미국의 전시 무기대여 협상을 현재의 한국의 핵무장 논의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핵무장 논의에 결정적인 요소가 ‘미국의 정책결정’이라고 본다면 몇 가지 시사점을 추릴 수 있다. 미국에 한반도와 일본 비핵화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원칙으로 보인다. 한국과 일본이 핵무장을 하면 대만 등도 도미노로 핵무장을 하게 돼 사실상 NPT체제가 붕괴되어 버린다. 하지만 역사의 어떤 국면에서 만일의 하나 미국이 한국 비핵화를 허용할 수 있다면 영국이 구축함 지원을 대가로 해군기지를 내놓은 것처럼 한국도 미국이 바라는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수도 있다. 이미 대중 봉쇄에 나선 미국은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역내 동맹국들과의 양자 다자간 협상에서 다양한 정치 경제적 기여와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 무엇이든 중국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결기가 우리 국민들에게 공유되어 있는가? 미국 오피니언 리더 그룹이 한국의 핵무장을 지지한다면 정책결정 변화에 긍정적인 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일부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국과 일본의 독자적인 핵무장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지만, ‘센추리 그룹’이 처칠과 루즈벨트를 지원했던 것과 같은 결정적인 지원 세력은 아직 없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에 대한 철두철미한 공공외교 강화를 통해 그런 지원그룹을 조직하고 육성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을 포괄하여 한국 핵무장 허용 결정은 현직 대통령의 재선이나 수권 정당의 정권연장에 도움이 될 때만이 의회와 백악관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안보 당국자들은 지금 한국의 핵무장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게 2024년 재선을 노리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게 미래다. 그런 역사적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앞서 말한 공공외교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관계의 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미 대통령에 대한 직접 외교다. 또 그 핵심은 정상 대 정상간의 진정한 소통이 이다. 미국 내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대통령의 결단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전에 소통의 문화를 조성하고 그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처칠은 2차대전 중 루즈벨트 대통령과 수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것 외에 위에 소개한 것을 포함해 1300여 통의 비밀 편지를 썼다. 한국이 핵무장을 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고 그럴 땐 잘 할 수 있다는 호소는 한국의 지지층과 여론이 아니라 우선 미국 여론과 그의 지지층을 향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전략적이고 은밀하고 치밀한 방식으로.※참고문헌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영국 구축함 지원 정책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Jean Edward Smith, FDF(New York: Random House, 2007); 권용립, 미국 외교의 역사(서울: 삼인, 2010) 참고. 처칠 수상의 루즈벹트 대통령 설득의 리더십은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의 ‘윈스턴 S. 처칠-전쟁과 평화의 위대한 리더십(서울: 박영사, 2019)’ 참고.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1-13
    • 좋아요
    • 코멘트
  • 핵을 든 김정은에 맞서려는 尹대통령에게…처칠이 주는 교훈 [한반도 가라사대]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께.안녕하십니까.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외다. 요즘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자 김정은을 향해 ‘할말은 하는’ 당신을 보면 90년 전의 내가 떠오릅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난 그의 침략성을 간파했소. 그리고 장차 독일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지요. 1차 세계대전 이후 맹목적인 평화주의에 빠진 영국인들은 그런 나를 ‘전쟁광’ 이라고 욕했소.나의 전임자 네빌 체임벌린이 1938년 히틀러를 만나 훗날 잘못된 유화정책의 대명사가 된 유명한 ‘뮌헨협정’을 체결했을 때에도 난 강력히 반대했소. 하지만 영국인들은 평화를 지킬 수 있게 됐다며 환호성을 질렀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김정은과 백두산에 올랐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박수를 쳤던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 독일에 바친 치욕적인 협정은 다음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휴지조각이 되었소. 2018년의 이른바 평양선언과 9·19군사합의도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일는지요.각설하고, 지금 한반도에 1939년처럼 진짜 전쟁이 난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군사적 대비를 강조하는 당신의 상황 인식은 올바른 것이외다. 김정은은 미국을 겨냥한 전략 핵미사일에 더해 대한민국과 일본을 공격할 전술 핵미사일 체제를 완성했다며 선제적 사용 가능성마저 공언하고 있는 판 아니오? 아직도 북한의 핵무장이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적인 것이며, 협상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나는 누구보다 먼저 공산주의자들의 본질과 속성을 먼저 간파한 사람이요. 비록 이오지프 스탈린이 2차대전에서 나와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손잡고 독일과 일본 등을 물리치는 데 협조했지만 난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그와의 평화는 오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소. 1949년 3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타임-라이프 지’ 설립자인 헨리 루스와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공산주의자들과 논쟁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들을 전향시키거나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소련 정부에 당신이 우월한 무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그 무력을 완전히 실질적으로 무자비하게 사용할 것이며 어떤 도덕적인 고려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가장 큰 기회이고 평화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최근 당신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더군요. 지난해 12월 29일 대전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전쟁을 대비하지 않는 군이란 있을 수 없다. 도발에는 반드시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현실주의 평화관’을 정확하게 피력한 겁니다.그런데 말이오, 전체주의 독재국가에 맞서 평화를 지키는 말처럼 쉬운 건 아니란 걸 당신도잘 알고 있을 거라 믿소. 무엇보다도 정부와 군대, 국민을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로 단결시키는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간지’를 갖추었다 한들 국가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전쟁에서의 승리에 동원하는 영웅적 리더십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그래서 난 중요한 고비마다 공개 연설을 통해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데 공을 들였소.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정치권, 특히 당신을 비판하는 야당은 가장 중요한 설득 대상이요. 1940년 5월 13일 수상으로서의 첫 연설에서 나는 이렇게 호소했소.“나는 의회에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피와 노고, 눈물, 그리고 땀 외에 달리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심각한 종류의 시련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떤 비용을 치루더라도 승리하는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승리 없이 우리의 생존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연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소.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수사학이 지도자의 필수적 덕목이라는 것을 마르쿠스 톨리우스 키케로(로마 공화정 말기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에게 배웠소. 그는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배를 조타하는 것과 같다’고 했지요. 그만큼 정치지도자에게는 철저한 지식이 요구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소. 내 손으로 72권의 책을 썼다오.키케로는 진정한 지도자란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항상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했소. 자신의 이익에는 국내정치적 인기도 포함될 것인데, 그야말로 그건 정말 덧없는 거외다. 나도 2차대전에서 승리한 직후인 1945년 7월 총선에서 영국 유권자들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았소. 사람들은 나에게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정치에서는 졌다’고 비아냥댔지. 하지만 난 낙담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후 기간을 ‘위장된 축복’이라 여기며 자서전을 쓰고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보냈소. 그 결과 1951년 다시 수상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소.나의 삶을 돌아보면 핵을 든 북한에 대적하려는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덕목은 더 많이 있소. 신념과 비전(Faith and Vision), 공직자로서의 의무감(the Sense of Duty), 분별력(Prudence), 전략적 안목(the Strategic Mind), 외교술(Diplomatic Skill), 용기(Courage) 그리고 장엄함(Magnanimity)까지. 그중에 분별력은 미국이라는 가장 중요한 동맹을 세심하게 관리해야 할 한국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이요. 내가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것이요. 두 나라, 두 정상 사이에 아주 작은 오해도 없도록 세심하게 따져보고 치밀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난 당신의 전임자인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절대 미국과 헤어지지 말라’는 고별연설 내용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오.▶‘오늘과 내일’ 칼럼 2017년 9월 18일자하고 싶은 말은 더 많지만 개인적인 조언 하나로 마칠까 하오. 적과 대적하는 상황에서는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는 것이오. 안보를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자리에 있지만 더 자주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권하오. 나는 혼자 그림 그리기를 즐겼소. 전쟁 중에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소. 평생 족히 500여 점 그린 듯하오. 그림을 그리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나와 대화를 했소.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올지,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대한민국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그럼 이만.처칠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의 ‘윈스턴 S. 처칠-전쟁과 평화의 위대한 리더십(서울: 박영사, 2019)’를 인용 및 재구성 했습니다. 처칠의 생애에 대해서는 2018년부터 읽은 두 권의 원서를 참고했습니다. Martin Gilbert, Churchill: A Life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1991), Roy Jenkins, Churchill: A Biography (New York: A Plumbook, 2002).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3-01-06
    • 좋아요
    • 코멘트
  • 사회주의 국가의 후계자 이론은 왜 북한에 들어맞지 않나[한반도 가라사대]

    북한의 3대 세습 지도자 김정은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 발사장에 열 살 짜리 둘째로 알려진 딸 김주애를 데리고 나와 공개하자 한국과 국제사회에 또 ‘북한 세습 지도자 알아맞히기’ 게임이 시작된 형국입니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뒤를 이을 ‘4대 세습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두고 전문가들의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노무현 정부)은 11월 30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미 김주애로 후계자가 결정이 됐고 앞으로 아마 웬만한 데는 다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을 시킬 것 같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는 2일자 한 신문 칼럼에서 김주애가 후계자로 등장한 것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두 가지 가설을 제기했습니다.“2010년 얻은 아들(정보가 맞는다면)이 지도자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김정은의 아들을 얻은) 현송월과의 권력다툼 속, 이설주가 김위원장에게 김주애를 일찍 후계자로 공개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은 아닐까.”일단 김주애에 대한 김정은의 ‘의전’은 파격적입니다. 11월 18일 미사일 발사장에서 앳띤 모습의 김주애와 동행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했습니다. 27일 미사일 발사 공로자들을 치하하는 행사에 또다시 김주애를 등장시켰는데 이번에는 어머니 이설주를 꼭 닮은 모습으로 연출된 채였습니다. 인민군 장성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매체들은 “존귀한 분” “제일 사랑하는 자녀” 등 우상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하지만 과거의 사례를 돌아볼 때, 열 살 난, 그리고 여성인 김주애를 후계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김주애가 아들이 아닌 딸이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성년인 자녀를 후계자로 등장시킨 적이 없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김주애의 오빠와 동생으로 알려진 두 아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는 것은 큰 변수입니다. 애버라드 대사는 이 아들들이 ‘지도자감은 아닐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김정은의 등장 과정을 보면 최후의 순간까지 후계자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북한스럽습니다. 김주애의 등장은 오히려 그녀가 후계자가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고도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김정일 위원장의 세 아들 중 누가 3대 세습 후계자가 되는지를 놓고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 점치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장남인 김정남이 가장 많이 등장했고, 그가 아버지의 눈에 나자 차남 김정철이 그 다음을 이었습니다. 3남 김정운(개명 하기 전의 이름)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 아버지 김정일이 정철과 정운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김정일은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려졌다가 일어난 뒤인 2008년 겨울에야 후계자 지명 작업에 나섰습니다. 몇 달 전인 그해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국방연구원 박사 22명이 집단 설문조사를 통해 후계구도를 점친 보고서가 1면과 3면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국방부 차관을 지난 백승주 전 국회의원이 미국 정부의 용역을 받아 비밀리에 작성한 것입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박사 22명의 집단 예측은 한마디로 거의 빚나갔습니다.▶관련기사: ▶관련기사: 박사 22명 중 45.5%인 10명은 ‘김정일이 자연사한 뒤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지금 그런가요? 아닙니다. 후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36.4%(8명)가 김정철을 꼽았고 31.8%(7명)는 김정남, 22.7%(5명)는 장성택을 점쳤습니다. 그런가요? 김정철은 동생의 그늘에 가려 두문불출 살고 있고 김정남 장성택은 저세상에 가고 없습니다. 심지어 보고서는 당시 기준으로 5년 내에 승계가 이뤄지면 ‘장성택-김정남’ 조합이, 5년이 지나면 ‘김정철-정운’이 유리하다고까지 내다봤습니다. 김정일은 3년만에 죽었습니다.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우선 김정일 사후에 집단지도체제가 들어설 것이라는 전망은 사실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가깝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그러기를 바랐으니까요. 김정운의 낙점을 예상하지 못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북한이 정보를 철저히 숨긴 상황에서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의 후계자 지명 이론을 적용해 ‘학문적인 추측(academic guessing)’ 한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백 박사는 논문을 작성하면서 비교사회주의 정치학자 레슬리 홈스 박사의 ‘3Ps+X’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독재국가에서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잃을 경우(X), 권력기반(Power base)과 인격적 자질(Personal qualification), 정책능력(Policy making ability)을 가진 인물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차지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렇게 흐루시쵸프는 스탈린의 후계자가 되었고 덩샤오핑도 마오저뚱 사후 혼란한 정국 속에 등장했다는 거죠.이 이론을 적용하고 보면, 장성택이라는 든든한 후원 세력이 있고(권력기반) 김일성 주석의 장손, 김정일 위원장의 장자(인격적 자질)인 김정남이 김정철이나 김정은보다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정책 수행 능력이 불투명하기는 셋 다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만일 김정남이 아니라면 둘째 김정철이었던 것이구요. 하지만 정철과 정운 두 아들을 숨겨놓은 채 관찰했던 김정일은 모든 면에서 김일성과 자신을 닮은 정운을 마음속에 낙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류를 눈치 챈 외부인은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정도였음이 훗날 드러났습니다.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 중 유일하게 세습독재를 하고 있다는 점도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습니다. 독재자 사후 성이 다른 어떤 엘리트라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소련과 중국에서는 ‘3Ps+X’라는 복잡한 고려사항이 필요했겠지만 세습독재 국가인 북한에서는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에 든 아들만이 권좌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이런 이유로 북한 김씨 독재의 미래를 전망하느니 ‘차라리 동전을 던지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21세기에 세습 독재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국민들의 궁핍과 인권의 유린을 전제로 한 세습은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최근 시진핑 주석의 3연임 이후 중국 국민들의 불만들이 높아지고 있는 것처럼, 북한 내에서 들려오는 불만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런 가운데 숨겨진 두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정보력을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2-12-05
    • 좋아요
    • 코멘트
  • 김정은은 왜 김여정이 아니라 어린 딸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한반도 가라사대]

    20일 오전 공개된 노동신문의 화성-17형 미사일 발사 관련 ‘정론’은 여러 면에서 흥미롭습니다. A4용지로 7장이나 되는 긴 글은 “핵에는 핵으로, 정면대결에는 정면대결로!”라는 구호로 시작해 같은 구호로 끝을 맺습니다.자신들이 18일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1만5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고 자축하면서 “그것은 핵선제타격권이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국가가 미국의 핵패권에 맞설 수 있는 실질적힘을 만장약한 명실상부한 핵강국임을 세계 앞에서 뚜렷이 실증하는 가슴벅찬 호칭인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한마디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핵으로 맞장을 뜨겠다는 말입니다. 핵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방어용이라는 그동안의 레토릭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 자신들도 미국을 선제타격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다지 새로워보이지 않는 이같은 주장은 ‘대내 선전용’으로 보입니다. 정론의 대부분은 ‘위대한 수령 동지’의 쾌거를 자랑하는데 할애되고 있습니다.하지만 이번 ‘정론’을 통해서 우리는 북한의 오랜 습성, 중국에 빌붙어 생존을 연명하고 있는 가난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을 직접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척 하는 ‘강대국 코스프레’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 위협을 당한 국가가 자신의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해 상대방에 대처하는 전략을 ‘내적 균형(internal balancing)’이라고 합니다. 공격적 현실주의자로 불리는 시카고대 미어샤이머 교수는 “국방비를 늘리거나 병력의 숫자를 증강시키는 징집제도” 등을 내적 균형 유지 노력의 사례로 설명하면서 말 그대로 “자조(self help)”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하지만 이런 전략은 적어도 미국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옛 소련이나 지금의 중국 등 강대국에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국력 면에서 미국에 상대도 되지 않는 약소국 북한이, 그것도 겹겹이 경제 봉쇄와 코로나19 경제난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책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은 ‘강대국인 척’ 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럼 왜 북한은 핵개발에 집착하며 강대국 코스프레를 계속하는 걸까요. 김정은이 18일 화성-17형 ICBM 발사장에 10대 딸을 데리고 나와 대내외에 공개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벌써 3대째 이어온 수령 절대주의 세습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최강대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홍보하면서 김 씨 독재체제 유지의 정당성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말입니다.특히 그동안 ‘백두혈통’이라며 후계자로도 거론되던 여동생 김여정 대신 성인도 아닌 어린 딸을 위험한 ‘괴물 미사일’ 앞까지 데리고 나와 홍보사진의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김정은이 세습독재 체제의 유지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동안 오빠를 지분거리에서 보좌하던 김여정은 과거 김정일의 김경희가 그랬던 것처럼 ‘곁가지’로 분류되어 김씨 4대 세습의 뒷막으로 사라지는 운명의 첫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김정은은 이를 통해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내 아이들도 이렇게 잘 크고 있으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래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다른 생각들 말고 나에게 충성하라’ 는 메시지를 ‘인민들‘에게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이런 분석은 향후 북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듭니다. 김정은 세습 독재 체제의 균열이 없이는 공격적인 대외 핵정책을 포기하기 어렵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북한이라는 국가의 내부 정치와 권력의 문제에 대해 후원국인 중국도, 같은 민족인 한국도 바람직한 변화를 추구할 효과적인 수단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입니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2-11-20
    • 좋아요
    • 코멘트
  • “전술핵 공격훈련 마친 북한, 현상타파 국가가 되고 있다”[한반도 가라사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열리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북핵 이슈가 단연 부각되고 있습니다. 13일 한일-한미-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북핵 위협의 당사국인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일본 등 관련국 고위 당국자들이 북핵 이슈를 공개적으로 언급했습니다.가장 강력한 발언은 미국 측에서 나왔습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1일 “시진핑 주석에게 북한이 한미일 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된다는 견해를 전할 것”이라며 “북한이 도발을 계속한다면 이는 역내에서 미국의 안보·군사 주둔(military and security presence)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얘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발언이 ‘주한미군 증강’을 시사한 것으로 12일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이 커졌습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미군 증강이 아닐 것이고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와 관련해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얘기한 것이 아닐까 생각 한다”고 언급했습니다.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도 12일 현지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북한의 도발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중국이 건설적인 역할을 해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대통령실은 전했습니다. 북한을 두둔하는 중국도 최근 상황이 엄중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탄도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CVID’ 원칙을 강조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전했습니다. 북핵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식으로 폐기하도록 국제사회의 협력을 호소했다는 겁니다.관련국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에 대해 북한의 7차 핵실험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시급하게 ‘현존하는 위협’으로 떠오른 것은 ‘한국과 일본 등을 상대로 한 전술핵무기 공격능력’이라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9월 이후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대응 훈련을 핑계로 전술핵을 탑재할 수 있는 단거리 미사일 공격 능력은 물론 이와 결합된 공군 전투기 공격능력, 남북한 접경지역에서의 방사포 등 재래식 무기 공격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과시했습니다.한미연합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해 실시한 11월 3일 훈련에서는 “적의 작전지휘체계를 마비시키는 특수기능전투부의 동작믿음성 검증을 위한 중요한 탄도미싸일시험발사를 진행했다”고 노동신문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한미 군 당국은 화성-17형 장거리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화성-15형 탄도미사일을 활용한 전자기충격파(EMP)탄 시험발사를 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하루 전인 2일 동해상으로 단거리미사일을 발사해 동해 해상분계선(NLL)을 넘긴 것입니다.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이를 부인하는 취지로 주장했습니다. 우리 군이 동해에서 인양한 미사일의 잔해가 당초 예상했던 단거리탄도미사일이 아닌 러시아제 SA-5 지대공 미사일로 드러나면서 일각에서는 북한의 오발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전문가들은 북한이 수명이 다된 지대공 미사일을 활용해 대남 공격에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풀이했습니다. 남북 군사경계의 약한 지점인 NLL을 건드린 겁니다.북한의 NLL 인근 무력충돌 시도는 이미 서해에서 있었습니다. 9월 24일 새벽 3시 42분경 북한 상선 한 척이 서해 백령도 서북방 약 27km에서 NLL 이남으로 월선했습니다. 우리 군이 이에 경고사격을 한 것에 대해 북한 군도 NLL 이북 완충구역으로 포를 쏘며 대응했습니다. 새벽 3시는 우리 해군이 근무 교대를 하는 취약시간대입니다. 사실상 의도적으로 상선을 월선시켜 9·19 남북군사합의를 노골적으로 위반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이 사건 이후 전문가들은 북한이 서해에서 NLL을 무력화하는 일련을 도발을 할 것을 우려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9일 뒤인 11월 2일 동해 NLL로 단거리미사일을 넘긴 것이 의도적인 도발이라면 그야말로 ‘성서격동(聲西擊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한미 군 당국과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전술핵 공격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북한이 이를 토대로 6·25 전쟁 이후 지켜져 온 한반도 군사경계를 허물겠다는 야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의 ‘고립압살 정책’에 대응해 자신들의 자주권을 지킨다는 방어적 목적이라며 핵과 미사일을 개발했지만, 이제는 이를 공격적으로 활용해 접경지역의 군사경제를 허무는 전혀 다른 목표를 세우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현상유지’와 ‘현상타파’로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미국 국제정치학의 태두 한스 J. 모겐소 시카고대 교수는 ‘국가간의 정치’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기존의 권력을 유지할 뿐 자국에게 유리한 권력분포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정책적 입장을 취하는 나라는 현상유지정책(a policy of the status quo)을 택하고 있다.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집어 현재의 상태보다 더 큰 권력을 얻으려는 정책을 추구하는 나라는, 즉 권력관계에서 유리한 변화를 추구하는 외교정책을 택한 나라는 제국주의 정책(a policy of imperialism)‘을 따른다.“ 한스 모겐소(이호재 역), 『현대국제정치론』(박영사, 1987), 53쪽.주로 강대국 사이의 정치를 논한 모겐소 교수에게 현상유지의 반대말은 제국주의 정책이었지만,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서 북한이 추구하는 정책은 ‘현상타파’로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6·25전쟁을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전쟁 이후 정전상태에서 지켜진 동서해 NLL 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전술핵 공격능력을 가지고 이를 법제화했다고까지 주장하는 북한이 이를 활용해 영토변경에 나서는 상황은 지금까지의 북한 문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의미합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이어지고 있는 주변국들의 심각한 논의는 바로 이런 상황변화를 반영한 것일 수 있습니다.최근 북한 도발에 대한 심층분석은 동아일보 유튜브 [중립기어 라이브] 방송(https://youtu.be/UxIihSQV9Ho)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신석호기자 kyle@donga.com}

    • 2022-11-13
    • 좋아요
    • 코멘트
  • “북한을 고단하게 하고 배고프게 하며 동요시켜라” [한반도 가라사대]

    ▶동아일보 유튜브 라이브 ‘중립기어’ 10월21일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정상화된 것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너무나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훈련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실제 전쟁 상황에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장애물들을 군이 평시에 경험하고 대비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프로이센의 군사전략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On War)에서 설파했다. “평화 시의 기동작전은 진짜 전투 경험의 약한 대체제이지만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훈련보다는 부대에 이점을 줄 수 있다. 기동작전을 계획하는 것은 경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장점이 더 많다. 작전에 포함된 마찰의 요소들은 장교들의 판단력과 상식과 결단력을 단련한다.” -Clausewitz, Carl von, On War, ed. and trans. by Michael Howard and Peter Pare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p. 122. 우선 ‘마찰’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로 ‘friction’으로 정의되는 마찰은 군사전략 분야로 좁혀 말하면 ‘전쟁에 나선 장군이 생각한대로 전쟁이 흘러가도록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전쟁에 나선 장수가 행군에 10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먼 곳에 있는 공격에 나선다고 치자. 10일치 군량을 마차에 실어 가다보면 뜻하지 않게 비도 오고 진창에 마차 바퀴가 빠져 행군이 중단되는 이른바 ‘마찰’이 발생한다. 행군은 이틀이나 늦어지고 군량은 모자라 굶는 병사가 생기게 된다. 충분한 진격훈련으로 ‘마찰’에 익숙한 장군은 이에 대비해 행군 기간을 미리 12일로 이틀 넉넉하게 잡고 군량도 그에 따라 늘리며 무엇보다 여분의 마차 바퀴를 마련해서 싣고 가게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화성-12형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도발 대응 차원에서 군이 4일 밤 강원 강릉 모 공군기지에서 발사한 현무-2C 지대지 탄도미사일이 낙탄한 사고는 우리 군에 중대한 ‘마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은 이번 사고의 원인을 추진체 결함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의 미사일이 일종의 ‘썩은 사과’였다는 설명이다. 발사 10여 초만에 추진체의 노즐 구동장치가 작동 불능이 되면서 발사 방향(동해상)과 정반대로 비행하다 30초만에 추락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0월21일자 6면. (링크) 이번 사고는 비록 군과 윤석열 정부의 체면을 구겼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쓴 약이 될 수 도 있다. 실전이었다면 군의 대북 킬체인(kill chain)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 엄청난 희생을 초대했을만한 사고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제작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메워야 할 결함이 훈련 덕분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도 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화성-12형 발사 도발은 9월 말 미국의 니미츠급 핵추진항공모함 로널드레이건(CVN-76·약 10만 t)과 로스앤젤레스(LA)급 핵추진잠수함 아나폴리스(6000t)가 참가한 가운데 동해상에서 실시된 한미·한미일 연합훈련에 대한 고강도 도발로 한반도 유사시 미 전략자산의 발진기지가 ‘핵공격 타깃’이 될 것임을 노골적으로 위협한 것이다. ▶동아일보 10월11일자 6면. (링크) 한미연합군사훈련 기간 동안 북한은 건건이 단거리 및 중거리탄도미사일 도발로 대응하고 전투기 남하나 동서해안 포사격 훈련도 곁들였다. 30일간의 잠행을 깨고 당 창건 77주년 기념일인 10일자 노동신문에 부인 이설주와 함께 등장한 김정은은 그간 북한의 대응도발이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지휘한 대남 전술핵부대 실전운용태세 점검 훈련이라는 점을 과시했다. 9월 25일부터 10월 9일까지 진행된 훈련에는 북한군 전술핵 운용부대, 장거리포병부대, 공군비행대가 참여했다. 한미연합훈련 기간 동안 그들도 기획 훈련으로 대응한 것이다. 대를 이어 대남 적화통일을 꿈꾸는 김씨 일가는 예외 없이 군사훈련을 강조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5년부터 베트남에 공군 등 병력 5000~1만 명(연인원)을 파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는 파병 여부를 결정하면서 “젊은 조종사들이 실제 전쟁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1994년 아버지 사망 이후 홀로서기를 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선군(先軍)정치’를 외치며 국가 위기상황의 전면에 군을 앞세웠다. 김정은은 다시 정상화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핑계로 한국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 기간 동안 집중해 개발한 대남-대일 전술핵 공격능력을 실전처럼 운용해 본 셈이다. ▶(링크) 왼손에 담배를 끼고 귀를 막은 채 부인 이설주와 함께 선 노동신문 홍보사진은 30일만에 자신의 건재를 대내외에 알리는 기획 사진이었을 것이다. 이를 포함한 89장의 사진은 이번 한미연합훈련에 동원된 핵항모 로널드레이건호나 스텔스 기능을 갖춘 F-35 등 한미의 최첨단 무기체계에 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까지 엿보이기도 한다. 훈련과정에서 북한은 여러 차례 2018년 9·19군사합의까지 위반했는데 이는, 남북간 군사대치 상황이 2017년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연합훈련의 정상화로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한 미 트럼프 대통령의 약속도 사실상 파기된 셈이다. 저수지한가운데서까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쏴대는 은폐엄폐 능력에 비추면 한미연합군사전력의 대응 범위가 크게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측의 군사적 긴장강화는 북한에게도 큰 부담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겹겹이 제재에 둘러싸인 북한의 대외정책의 핵심은 한미군사훈련의 중단 또는 축소였다. 특히 1990년대 경제난 이후 달러와 원유가 부족해진 북한은 다양한 대남 대미 협상에서 연합훈련 축소 요구를 강하게 제기했다. 2018년 싱가포르 회담에서 한미군사훈련 축소, 평양회담에서 휴전선 일대의 한국군 훈련 중단 또는 축소를 약속받는 성과를 이뤘지만, 다시 원상회복의 수순이 되고 있다. 싸우지 않고 ‘북한 비핵화’를 이루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든다는 게 한국과 미국, 국제사회의 변하지 않는 목표다. 하지만 이를 위한 협상과 군사적 대치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핵개발을 해온 북한이 이제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까지 핵으로 공격하는 능력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는 상황은 주변국의 대응태세가 과거와 달라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맞대응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다. 서양의 클라우제비츠에 버금가는 군사 전략가이자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던 중국 춘추시대 병가(兵家)인 손무는 손자병법 허실(虛實) 편에서 그 방편 하나를 이렇게 밝혔다. 싸우지 않고 이기려면 대치국면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혜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적이 편안하면 고단하게 하고 배부르면 굶주리게 만들며 안정되어 있으면 동요시켜야 한다.” -손자병법, 손무 지음, 박창희 해설, 플래닛미디어, 258-265쪽 정상화된 한미연합 군사훈련은 김정은을 고단하게 만들었다. 인도·태평양 지역을 관할하는 미국 해군 7함대의 칼 토머스 사령관도 “우리가 (동해) 지역에 있었던 것이 그(김정은)의 짜증(tantrum)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로널드레이건의 두 차례 한반도 해역 진출이 김정은의 핵공격 트라우마를 건드렸다는 설명이다. ▶동아일보 10월 17일자 6면. (링크) 고단하기만 한가.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데는 다량의 달러와 기름과 인력에 대한 병참비용이 들어간다. 김정은이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응해 훈련현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경제를 챙기기도, 정치를 단속하기도 어렵다. 그런 가운데 내부의 동요가 커질 수 있다. 적을 고단하게 굶주리게 동요하게 만들어 싸우지 않고 전쟁에서 이긴 대표적인 최고사령관은 1980년대 냉전을 통해 소련 제국을 무너뜨린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막대한 돈과 기술을 쏟아부은 ‘우주전쟁’을 주창해 소련을 끌고 다니며 고단하고 배고프고 동요하게 한 결과 소련은 안으로부터 무너졌다. 미국의 많은 항모중에 로널드레이건 호가 김정은을 짜증나게 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2022-10-24
    • 좋아요
    • 코멘트
  • [오늘과 내일/신석호]‘386 정치인’들이 중국에 등을 돌릴 때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한국인들을 분노케 한 다음 해인 2005년.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은 1년 내내 현지의 중국인들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지은 ‘중국이라는 거짓말’(2006년) 서문에 이렇게 썼다. “몇몇 중국인들은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구 여러 국가의 정부가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는 것을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종종 물었다. 천안문 학살 사건을 당신들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망각할 수가 있는가?” 소르망은 2년 뒤 베이징 여름올림픽에 대해 예지력 있는 질문을 던졌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인정해 주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개방하면서 민주화를 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베를린 올림픽처럼 될 것인가, 아니면 서울 올림픽처럼 될 것인가? 이것은 서구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결과는 전자였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미국에 리먼브러더스발 경제위기가 찾아오자 중국 공산당은 미국에 맞짱을 뜨는 국제정치의 패권 추구자로서의 본색을 드러냈다. 2009년 출범한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8년 내내 ‘중국은 경쟁자이자 협력 파트너’라는 애매한 태도로 사실상 중국의 부상을 방조했다. 공산당 독재와 지도자 개인숭배, 인권과 소수민족 탄압, 국가 주도 개발이 낳은 불평등의 심화 등 각종 부작용에 눈감은 채 중국이 자비로운 패권(benign hegemon)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에 한국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사회주의 독재자들과 천안문 망루에 올랐던 박근혜 대통령도 있지만 이번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북한의 김정은을 불러내 종전선언이라는 정치적 이벤트를 만들려고 했던 ‘386세대’ 정치인들이 핵심이었다.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 386 운동권 세력들이 중국에 경사된 경위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민주화 세력 탄압, 이를 방관한 ‘제국주의 미국’에 비판적이었던 그들은 ‘반미(反美)’ 이념을 지지해줄 대안 외세로서 중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 진보·보수의 중국 인식 차이와 이념의 영향’을 연구한 차정미 박사는 ‘중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2017년)에서 “진보층이 보수층보다 중국에 대한 인식이 우호적인 것은 ‘반공주의’ ‘한미 동맹주의’와 다른 ‘대북 포용정책’과 ‘자주외교’의 구조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으니 바로 ‘자주’라는 가치를 건드릴 때다. 차 박사는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 전후 여야 정치인 설문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자주, 주권과 연관된 이슈가 부상할 경우 중국에 대한 (진보층의) 인식도 ‘반미자주’의 연장선이 아닌 ‘자주 vs 친중’의 구도로 전환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은 이번 겨울올림픽에서도 ‘중국에 앞서면 반칙’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편협한 민족주의에 기반한 ‘꼬름한 패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아직 80년대를 사는 듯 보수진영을 맹렬히 비난하던 옛 386 정치인들도 중국 비난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자주 vs 친중’의 프레임이 다시 가동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주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도 미국도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이다. 미국이 자유주의 이념과 제도, 문화로 ‘자비로운 패권’을 추구하는 척이라도 한다면 중국은 여러 면에서 그 수준이 떨어진다는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신석호 부국장 kyle@donga.com}

    • 2022-02-0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신석호]디지털 크리에이터의 자격

    요즘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크리에이터를 꿈꾼다. 모바일 온라인 환경이 심화되면서 창의력의 정도에 따라 개인과 조직의 브랜드와 영향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놀이 경험을 현대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교직한 영화 ‘오징어게임’, 한국 군대의 가혹행위를 다룬 웹툰이 드라마 ‘D.P.’로 변신해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을 타고 세계적인 대박 콘텐츠가 되는 상황은 많은 젊은 창작가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창작할 것인가에 있다. 동아일보가 새해를 맞아 ‘오겜’의 황동혁 감독, ‘D.P.’의 원작 웹툰 작가 김보통 씨 등 K콘텐츠의 ‘황금손’들을 인터뷰해 추려낸 ‘창의성의 원천’은 다섯 가지다. 어린 시절 온몸으로 즐긴 놀이, 각계각층과 즐기는 수다, 분야를 망라한 잡식성 관심,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준 독서, 뼛속까지 새긴 경험.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경험하고 많이 만나 들으라는 것, 한마디로 ‘행복하게 열심히 살라’는 이야기다. 디지털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흐름에 언론사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변화하는 뉴스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모바일과 디지털 기기로 무장한 독자들은 전처럼 뉴스를 읽고 보고 듣는 것에서 나아가 오감으로 경험하고 싶어 한다. 매스미디어가 전달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흡수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매체와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선택해 건건이 전달받는 개인화 방식을 선호한다. 따라서 많은 기자들이 신문이나 잡지 기사, 방송 리포트라는 고전적인 표현 방식에서 나아가 멀티미디어 스토리텔링, 유튜브, 뉴스레터, 롱 폼의 디지털 내러티브 기사, 데이터 저널리즘 등 새로운 플랫폼과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허구를 창조하는 영화나 소설과는 달리 뉴스는 ‘팩트(fact)’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며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영화감독과 웹툰작가, 기자가 다를 바 없다. 몇 년 동안 새로운 시도에 나서는 선후배 동료들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동안 디지털 크리에이터로의 변신에 성공하는 이들에게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선 남다른 전문성이 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온라인 공간의 소비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해 쌓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전문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해 보겠다는 열정, 이를 위해 기꺼이 직역이 다른 전문가들과 협업할 수 있는 태도가 두 번째다. 전처럼 진실을 추구하면서 콘텐츠 기획자, 플랫폼 개발자, 디자이너와 데이터 분석가, 영상 전문가 등 자신이 잘 모르는 직역의 능력자들과 소통해야 한다. 수평적인 협업의 지혜와 자신이 모르는 전문성에 대한 존중, 리더십과 팔로십의 기술이 필요하다. 전문성과 의지, 태도를 가진 이들이 디지털 독자들이 요구하는 매력까지 가지면 금상첨화다. 플랫폼마다 장르마다 요구되는 매력이 조금씩 다르다는 게 포인트다. 유튜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자도 있고 뉴스레터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기자도 있다. 세 가지 자격을 갖춘 크리에이터들에게 창작은 일(work)이 아니라 즐거움(pleasure)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고 과정에 몰입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돈도 벌리는 것처럼 즐겁게 만든 콘텐츠에 독자들의 반응도 따라온다. 만든 사람이 행복해야 소비자도 만족한다는 건 영화와 웹툰이 뉴스 콘텐츠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신석호 부국장 kyle@donga.com}

    • 2022-01-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신석호]콘텐츠의 품격

    지난해 출범한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가족을 떠나 고시원에 은거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좀 걱정스러웠다. 보통 인터뷰나 르포도 아니고 그들이 사는 모습과 구구절절한 사연을 여러 장의 사진과 동영상, 그래픽으로 구성한 장문의 시리즈 기사와 멀티미디어 스토리텔링 페이지로 만드는 작업. 기획과 취재, 제작에 몇 달이 들어갈지 모르는 수고에 독자들이 얼마나 호응해 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해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증발’ 5회 시리즈 첫 보도가 나간 뒤 우려는 기우로 변했다. 기사와 멀티미디어 스토리텔링 페이지는 온라인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조회수도 많았지만 더 고무적인 것은 독자들이 이모티콘과 댓글로 드러낸 ‘공감의 질’이었다. 코로나19 1년 차, 다양한 처지와 공간에서 삶의 무게를 버티고 있던 독자들은 가정불화와 사업 실패 등으로 세상을 등진 주인공들을 응원했다. 다수가 “나도 증발하고 싶다”고 했다. 뉴스 콘텐츠 속 주인공과 감정을 공유하는 ‘좋은 공감’이었던 것이다. 삶을 마감하면서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 떠난 장기기증자들과 가족의 사연을 다룬 히어로콘텐츠 ‘환생’ 7회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2월 보도된 기사에는 “뉴스를 보고 댓글을 단 것도, 눈물을 흘린 것도 처음”이라는 격한 공감이 이어졌다. 치솟는 부동산 값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사라지고, 코로나19 방역으로 장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가족의 건강과 무사가 행복임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저널리즘 혁신과 뉴미디어에 주는 언론상이 이어지고 있으니 언론계도 공감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좋은 신문 기사와 좋은 온라인 기사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틀렸다. 좋은 신문 기사는 좋은 온라인 기사다. 핵심 지표는 조회수가 아니라 ‘공감의 질’이다. 히어로콘텐츠팀의 경험에 따르면 좋은 기사에는 대략 네 가지 특징이 있다. 기자 여러 명이, 이슈의 현장에 가서, 구체적인 스토리를 심층 취재해, 다양한 사진과 그래픽, 동영상과 함께 보도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가치로는 ‘현장주의’와 ‘협업정신’으로 집약된다. 하루하루 벌어지는 이슈를 다루는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충북 제천의 한 사우나에 불이 나 무고한 이용자들이 화마에 삶을 잃었을 때, 여러 명의 기자가 직접 현장에 가서 각 층에 비상구가 막히고 먹통 소화기가 뒹구는 기막힌 상황을 고발한 기사(2017년 12월)가 좋은 사례다. 공동체가 지켜주어야 할 안전이라는 가치가 실종된 현장 기록은 지면과 온라인에서 독자들의 공분(公憤)을 이끌어 냈다. ‘좋은 공감’을 이끄는 콘텐츠에는 당연히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입된다. 제천 화재 보도는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몇 자 적은 많은 온라인 기사와는 품격이 달랐다. 히어로콘텐츠팀은 취재기자와 사진·영상기자, 멀티미디어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 등 10명 안팎으로 구성된다. 취재 아이템에 따라 3∼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최근 온라인 공간에 값싸게 빨리 ‘나쁜 공감’을 노리는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기자들이 현장에 가지 않고, 협업하지 않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떠도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들로 조회수나 올려보려는 것을 ‘클릭 저널리즘’이라고 한다. 쓰는 사람과 매체의 브랜드와 영향력은 물론 독자들과 언론계, 우리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히어로콘텐츠의 오늘이 있게 한 주인공은 그런 가운데서 ‘진짜 저널리즘’을 알아보고 성원해준 독자들, 진정한 히어로들이다. 신석호 부국장 kyle@donga.com}

    • 2021-12-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김정은은 언제쯤 대중과 진짜 소통을 할까[오늘과 내일/신석호]

    내년 1월 북한에서는 김정은 집권 만 10년째를 맞아 조선노동당대회가 열린다. 이번 8차 대회는 2016년 5월 7차 당 대회에 이어 5년 만으로 김정은 집권 이후 두 번째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흔적기관처럼 만들어버린 당의 기능을 활성화해 온 연장선에서 북한도 중국이나 쿠바처럼 정기적으로 당 대회를 열어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 ‘사회주의 정상국가’임을 대내외에 홍보하려는 듯하다. 중국과 쿠바, 북한 등 현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최고 권력기관이다. 당 대회는 당의 최고 지도기관이자 의사결정 기구로 직전 당 대회 이후 국가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국가운영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겹겹이 경제제재와 외교적 단절,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자체적인 고립 속에서 당 대회를 여는 평양의 분위기는 암울해 보인다. 5년 전 당 대회에서 김정은이 스스로 인민들에게 공언한 ‘김정은식 경제개혁’도, ‘핵 무력을 짧은 시간에 고도화한 뒤 대대적인 대외 평화공세를 통해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자’는 전략도 현재로서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형식과 절차의 측면에서도 ‘김정은식 당 대회’에는 정말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민주적 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라고 말하는 최고지도자와 엘리트, 대중 3자 간의 격의 없는 위아래 소통의 제도와 문화다. 당 대회의 안건을 마련하는 과정에 최고지도자와 당이 엘리트와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형식으로 기존의 정책에 문제가 있다면 대안을 만들고 잘해 온 것은 더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는 의사결정 프로세스인 것이다. 1991년 4차 당 대회를 앞두고 쿠바 공산당이 사용한 ‘대중 집회(Llamamiento)’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갖은 원조와 우호무역을 제공했던 소련이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을 모색하면서 ‘특별한 시기’라는 초유의 경제위기를 만난 피델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 제1서기는 그야말로 머리를 조아리고 인민들의 의견을 구했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고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 달라’는 ‘호소문’을 돌리고 주민 토론회를 열었으며 곳곳에 익명 건의함도 설치했다. 공산당에 속내를 말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숙청된 이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온 쿠바인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 아바나대 박사 출신 호세 아리오사 씨 역시 그랬다. 2007년 서울과 아바나에서 만났던 그는 “당 간부들이 나서서 ‘솔직하게 건의해 달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인민들은 마음을 열었고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희망사항을 제안했다. 카스트로는 인민의 이름으로 공산당을 쇄신하고 제한적이나마 경제 개혁과 개방 정책을 만들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카스트로의 성공은 국가정책의제 형성 과정에 관한 코브와 로스의 동원모델(mobilization model)의 실제 사례였다. 반면 최고지도자와 한 줌의 엘리트들이 의제 형성 과정을 독점하는 내부주도모형(inside initiative model)에 해당하는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위기로 가장 고통받는 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의지도 능력도 없는 최고지도부의 저급한 수준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쉽게들 말하는 소통이야말로 지극히 정치적인 현상이다. 진정한 소통은 권력자들이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자유롭고 안전하게 말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년 1월 당 대회에서 김정은은 또 ‘사랑하는 인민 대중’을 운운하며 말잔치를 벌이겠지만 사회주의 선배 카스트로의 지혜를 실천할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현명한 대중은 핵을 내려놓고 ‘진짜 정상국가’가 되는 길을 반드시 알려줄 텐데 말이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 2020-12-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열등감에 빠진 전체주의자들의 최후[오늘과 내일/신석호]

    권력에 대한 의지 하나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말 못 할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 자신의 경쟁자인 레온 트로츠키나 니콜라이 부하린 등에 비해 가방끈이 짧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철학이나 이론에 밝지 못했고 레닌의 혁명이론을 곡해한다는 경쟁자들의 비난에 직면했다. 누구보다 그의 깜냥을 잘 아는 레닌도 1924년 사망 전 아내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 스탈린을 제거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 등과의 권력투쟁을 막 시작한 스탈린은 1925년부터 3년 동안 마르크스 엥겔스 연구소의 부소장 얀 스텐 교수를 일주일에 두 차례 불러 개인교습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배경인 헤겔과 칸트의 철학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스텐 교수를 비난했다. 권력을 공고화한 1937년에는 급기야 그를 감옥에 가두고 총살해 버렸다. 숙청을 밥 먹듯 했다지만 스승을 자기 손으로 죽인 배경에는 최고 권력자가 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열등감과 자신의 무식을 알고 있다는 불쾌감이 있었을 것이다. 꼭 7년 전인 2013년 12월 12일 고모부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형장의 연기로 날려버린 김정은의 심리도 비슷했을 것이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는 2013년 12월 8일 결정서에서 장성택의 죄를 줄줄이 열거했지만 실은 2008년 나이 어린 조카에게 권력이 넘어갈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라종일 전 주일 대사는 2016년 발간한 ‘장성택의 길’에서 “(장성택의 훌륭한) 자질들은 특히 연령이나 경륜이 일천한 새로운 지도자에게 불안한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집권 초기에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이며 스승 같은 인물이 점차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고 김정은의 마음을 예리하게 짚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구스타프 융에 이어 세계 3대 심리학자로 불리는 알프레트 아들러는 신경증의 근원은 유년 시절부터 자아 깊은 곳에 뿌리박힌 열등감이라고 갈파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유아기 때 형성된 열등감은 세상을 자기식대로 해석한 결과인 ‘사적 논리’를 만들어 내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이것을 ‘공동 감각’, 즉 상식으로 바꾸지 못한 인간들은 신경증과 같은 병리현상을 겪는다는 것이다. 일부는 과도한 권력을 추구하게 되는데 스탈린과 김정은이 딱 그런 경우다. 생전의 아들러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권력욕도 어린 시절 열등감에 대한 분노로 설명했다.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 지배층 역시 일제강점기 김일성의 항일 신화와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허구적 사적 논리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북한이 성장 발전하는 길은 공동 감각의 세계, 즉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하고 인류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지며 국제사회와 정상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생 북한을 연구하다 은퇴 후 리더십 코치로 변신한 그는 최근 아들러의 심리학을 원용한 리더십 코칭 책 ‘아들러 리더십 코칭’을 펴냈다. 상담을 통해 사적 논리가 열등감 때문임을 깨달으면 상식을 가진 리더로 거듭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2월 하노이 외교 참사에 이어 경제제재와 코로나19 등 대내외적 악조건에 둘러싸여 비합리적인 통치행위를 하고 있다는 김정은이야말로 코칭이 필요한 것 같다. 코로나19 방역물자도,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적 지원도 거절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열등감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열등감에 근거한 사적 논리로 권력을 유지하는 독재자나 측근들, 그들의 체제는 상담의 가능성도, 개선의 여지도 없다는 게 문제다. 세계 평화를 위협했던 스탈린의 소련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도 이젠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 2020-12-0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바이든에 침묵하는 북한의 고민[오늘과 내일/신석호]

    조 바이든 제46대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앞으로 북핵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전망과 제언이 쏟아지고 있다. 가히 ‘백가쟁명’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처럼 바이든 당선인과의 대화와 담판을 통한 ‘톱다운(Top-Down)’ 방식을 선호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트럼프처럼 연애편지도 주고받으며 싱가포르와 하노이, 판문점 같은 곳으로 불러내 만나주기를 바란다는 가정이다. 과연 그럴까? 트럼프의 하노이 노딜(No Deal)이 김정은의 정치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 60시간이 넘게 열차를 타고 하노이로 가 트럼프를 만난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과 대북제재의 대부분을 맞바꾸는 ‘북한식 계산법’을 들이댔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최고지도자의 권위 실추와 이에 따른 내부 분란을 잠재우는 데 지금도 노심초사하는 상태다. 프로이센의 전쟁 철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트럼프는 알고 했건 아니건 ‘수령의 권위’라는 북한 체제의 가장 민감한 ‘힘의 중심부(the Center of Gravity)’를 건드린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것을 트럼프 대북정책의 최대 업적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초유의 외교참사를 통해 김정은이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미국의 국가이익 앞에 공화당과 민주당, 대통령 개인의 스타일이 무차별하다는 점일 것이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는 공화당인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태어나 민주당인 버락 오바마 행정부 8년 내내 유지되었고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계승되었다. 요컨대 미국은 북한에 한 줌의 핵무력이 남아있는 한 제재를 해제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북한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바이든 당선인에 대해 북한이 이렇다 할 공식적인 언급을 내놓지 않는 것은 이를 놓고 깊어지는 고민의 증거로 보인다. 포인트는 바이든표 대북정책이 그가 부통령을 지낸 오바마 행정부 8년의 ‘전략적 인내’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지, 트럼프 시대와의 단절성이 클지 연속성이 클지에 있다. 우선 대북정책의 우선순위가 문제다. 오바마는 러시아와 이란, 이슬람국가(IS) 문제에 집중하면서 대북정책은 사실상 뒷전이었다. 트럼프는 임기 초반부터 대북정책에 매달렸다. 오바마는 트럼프와 달리 실무협상을 우선시하는 ‘보텀업(Bottom-Up)’ 방식이었다. 대북정책의 목표도 달랐다. 오바마 행정부는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법으로 봤다. 트럼프는 북한 비핵화에 협상의 주제를 국한했다. 오바마는 인권문제를 강조했지만 트럼프는 아니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오바마 행정부 당시와 지금은 상황에 많은 변화가 있다.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과 미국 경제위기 이후 양국의 패권 경쟁이 시작되었지만 오바마 행정부 8년은 경쟁과 협력의 공존기였다. 트럼프 시대에 경쟁이 격화되었고 지금은 거의 적대관계에 이르렀다. 북한의 핵능력도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핵과 미사일 능력 면에서 바이든에게 지금 북한은 부통령 시절의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모든 것을 고려한 뒤 바이든이 어떤 수를 집어 들까.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된 이후의 역사는 단절적이기보다는 경로의존적이고 행위자의 의지와 우발적인 사건이 뒤엉켜 진화해왔다. 미국의 CVID 목표뿐 아니라 핵을 들고 버틸 때까지 버텨 국제사회에서 사실상의 핵국가로 인정받자는 북한의 정치적 의지도 변하기 힘들다. 북한은 바이든이 어떨 것인지에 대한 전망과 함께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 전략적 우위를 점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더 고민할 수도, 결과를 조만간 드러낼 수도 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 2020-11-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