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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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6-03-04~202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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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2만 년 전 에덴동산에 초고대문명이 실재했다”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의 시작보다 1만 년 더 전에 고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초고대문명이 동남아시아와 남미에 존재했다. 그곳이 구약의 아담, 바빌로니아 신화의 오안네스,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 등의 고향이다?’ ‘별종’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자가 영화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책까지 여러 권 냈다. 이 책의 저자인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51)는 “20년 전 ‘UFO 신드롬’이라는 책을 썼을 때부터 ‘별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정확한 방위와 모서리각, 내부의 복잡한 통로 등 지나칠 정도로 정밀한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를 건설했고 오늘날에도 가공이 쉽지 않은 화성암을 깎아 돌항아리를 만들었죠. 역사시대 이전에 이미 18세기 초 서구와 비슷한 수준의 과학 문명이 있었던 겁니다.” 저자는 인류학자인 영국 옥스퍼드대 스티븐 오펜하이머 교수의 주장을 따라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모두 동남아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았던 수만 년 전 동남아에 ‘순다랜드’라는 대륙에 준하는 아(亞) 대륙이 있었고, 이곳이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 인류의 요람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순다랜드인 중 뛰어난 종족이 광물자원을 개발하러 별자리를 보며 대양을 건너 남미 안데스 산맥 중부의 알티플라노 고원에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그곳이 훗날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신들의 고향’이라는 것. “알티플라노 고원에 살던 사람들을 후세인이 신격화한 것이지요. 남미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고, ‘갈대의 평원’과 같은 신화적 모티브가 일치하는 한편 페루어와 수메르어에 유사한 단어가 많다는 것 등은 그들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고도의 기술력을 지닌 문명이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퇴보를 겪은 이유는 뭘까? 저자는 1만5000년 전과 8000년 전 급격한 해수면 상승 탓에 지각변동이 활성화된 게 원인이라고 했다.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유적을 발굴하기 전까지 트로이 문명은 전설에 불과했다. 저자는 여러 단서를 짜 맞춰 가며 논리를 박력 있게 전개한다. 그러나 읽다 보면 ‘뭔가 아니다’ 싶은 구석도 적지 않다. 책이 그저 ‘잘 쓴 소설’에 불과한 게 아닌지 하는 물음에 그는 “지금 알려져 있는 고대 문명이 현대까지 단선적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며 “기존 통설에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정도라도 만족한다”고 답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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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수립-건국 논쟁,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 건국’은 영문으로는 똑같이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로 번역된다.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한 지금의 논쟁은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책 ‘한국의 정치 70년사’에 ‘건국 논쟁을 통해 되돌아본 대한민국’이란 글을 실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54)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건국 논쟁이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2009∼2012년 국사편찬위원을 지낸 광복과 6·25 전후 한국 정치사 연구의 권위자다. 》정부는 올 9월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하며 검정 교과서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고쳤다. 이에 대해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와 독립운동 역사를 평가절하하는 ‘대한민국 건국’이란 표현의 전 단계”라며 비판했다. 1919년 4월 임정 수립이 곧 ‘건국’이고, 1948년 8월 15일은 38선 이남의 ‘(단독) 정부 수립’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보 측의 주장이다. 역사학계는 1948년 8·15를 ‘건국’ 또는 ‘정부 수립’으로 보느냐를 이른바 좌파, 우파(뉴라이트)로 나누는 한 기준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두 용어는 역사적으로 병용돼 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의 현수막에는 ‘정부 수립’이라고 썼지만, 1949년과 1950년 8월 15일에는 각각 ‘민국건설 제1회 기념일’ ‘민국독립 제2회 기념일’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명시했지만, 헌법 ‘개정’이 아니라 새로 만들었다는 뜻의 ‘제헌절’이라는 표현에는 임정과 대한민국 헌정 간의 불연속성이 드러난다. 이 교수는 또 “임정 인사들도 1919년 임정 수립을 완전한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다가올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한 것,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에서 “우리가 처한 단계는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라고 말한 것 등이 그렇다. 진보 측에서 때로 ‘건국’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근래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8월 15일 ‘건국 50주년’을 기념했고, 같은 해 ‘제2건국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교수는 “후백제·후고구려도 건국이라고 지칭하는 마당에 분단국가라고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이 미완의 과제라는 인식도 함께 담는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표현도 제안했다. 이 교수는 현행 교과서 집필 기준인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이 나쁘지 않다고 봤다. ‘대한민국’에 정부를 포괄하는 국가라는 말이 내포돼 있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 간결하다는 것이다. 그는 “1919년이나 1948년 모두 ‘건국’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는데, 상대편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정치 논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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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에 백제門 세운 왕인박사 전도사 윤재명씨 문체부장관 표창 받아

    일본 오사카 히라카타 시 왕인 묘역에 한국 전통 양식의 백제문(百濟門)을 세웠던 윤재명 한일문화친선협회 회장(83·사진)이 24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7·8·10대 국회의원을 지낸 윤 회장은 고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백제 왕인 박사의 정신을 기리는 백제문을 2006년 건립하는 등 왕인 박사와 관련한 각종 기념사업을 벌여왔다. 문체부는 “40년간 왕인 박사를 중심으로 한일 고대사 연구와 민간 교류활동을 활발히 추진해 한일 관계 개선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이 크다”고 표창 사유를 밝혔다. 윤 회장은 왕인 박사의 유적지가 있는 전남 영암군 등에서 국회의원을 지내다 1976년 정계를 은퇴한 뒤 왕인문화원을 창립하고 ‘소설 왕인 박사’ ‘왕인 박사 전기’ ‘박사 왕인과 일본문화’ 등을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하며 왕인 박사를 알리는 데 힘썼다. 윤 회장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한자 문화권에서 답사 온 사람들이 백제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접할 때면 정치 할 때보다 더 흐뭇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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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강남 사대부들은 왜 대일통을 돕게 됐나

    기자는 올 여름 청나라 융성기를 이끈 강희제(재위 기간 1661∼1722년)를 소재로 한 공연 ‘정성왕조(鼎盛王朝) 강희대전(康熙大典)’을 중국 청더(承德)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강희제의 영토 확장 등 업적을 약 10개의 막으로 나눠 공연했는데 ‘강희제가 강남 지방의 아름다움에 반했다’는 내용이 별도의 막으로 구성돼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보니 강남이 단순히 양쯔 강 남쪽 지방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족과 오랑캐 왕조가 번갈아가며 다스렸다. 황허 유역의 ‘중원’이 특히 그랬다. 그러나 강남은 수려한 경치와 맞물려 사대부가 한족 문화를 고수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표상됐다. 청나라를 비롯한 비(非)한족 왕조는 강남의 한족 사대부를 회유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중원의 사람들은 강희제 이전엔 모두가 명나라의 유민이었으나, 강희제 이후로는 청 왕조의 신민이 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쓴 이 표현처럼 이 책은 유학의 ‘도통(道統)’을 지켰던 강남 사대부들이 어떻게 청나라 황제가 이루려는 ‘대일통(大一統)’의 협조자로 변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중화 중심적인 통설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만주족이 한족의 문화에 흡수돼 ‘한화(漢化)’됐다는 것이지만 중국 런민대 교수인 저자의 분석은 다르다. 청 왕조가 일관되게 근검하고 질박한 북방의 생활태도를 강조하고 붕당의 폐해를 들어 명나라 문화를 비판할 때, 명나라의 유민들도 강학의 폐해나 예의의 재건을 주장하며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유사점이 적대적인 그들을 잠재적 동맹관계로 변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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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년 대한민국 각 분야 성과와 과제 총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광복 70년을 맞아 대한민국 각 분야의 성과와 과제를 정리한 책 ‘한국의 70년’ 시리즈 6권을 21일 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분야는 외교안보, 산림녹화, 정치, 경제발전, 문화, 교육 분야다. 이배용 한중연 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과거 70년을 토대로 미래의 70년을 만들어 나가자는 취지에서 책을 출간했다”며 “필자들이 ‘한강의 기적’이나 ‘세계 유일’과 같은 자화자찬식 표현 없이 자료와 실제 수치를 근거로 광복 이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냉정히 평가했다”고 말했다. 이번 책은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연구자가 집필에 참여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문화 분야 총론을 썼고,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경제 발전)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외교안보와 통일) 이완범 한중연 교수(정치)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교육)가 각 분야의 연구책임을 맡았다. 산림녹화 집필을 총괄한 이경준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한국은 6·25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를 딛고 반세기 만에 산림녹화에 성공했다”며 “이러한 역사를 기록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숲과 사회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중연은 여성과 가족, 스포츠, 의식주 분야의 70년사를 담은 책을 추가로 출간할 계획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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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 교수 “14세기 말 왜구는 日 남북조시대 남조의 무사 집단”

    “고려 말 왜구는 일본 남북조시대 남조의 정규 군사집단입니다. 하지만 ‘황국사관’에 입각한 일본 사학계는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왜구에 관한 논문 9편을 묶어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라는 책을 최근 펴낸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 교수(56)를 23일 만났다. 이 교수는 20년 넘게 왜구를 연구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임이 극심했다’ 정도만 서술할 뿐 왜구가 왜 생겼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일본의 대마도나 해안 지역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노략질하러 나섰다는 게 왜구에 대한 통상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왜구의 활동 변화가 일본 남조 고다이고 천황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의 군사 정세 변화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왜구는 남조의 무사들”이라고 말했다. 1376년 11, 12월 왜구가 부산 경남 일대를 노략질한다. 이 교수는 이를 일본 남조가 북조와의 결전을 앞두고 급히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본다. 이듬해인 1377년 2월에는 충남 당진과 인천 강화도까지 왜구가 나타난다. 이는 1377년 1월 17일 남조가 북조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해 고려의 물자가 모이는 개경 근처까지 침입해온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남조의 본거지를 북조가 점령한 시기(1381년)와, 왜구의 침입 빈도와 규모가 격감한 시기(1383년)가 비슷한 것도 왜구가 남조 무사라는 방증이 된다. 이 교수는 “1376년 고려 사신이 무로마치 막부(북조)의 장군으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막부)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군사 작전을 하고 있으니 규슈가 통치되면 해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돼 있다”며 “이 역시 왜구가 남조의 무사 집단이라는 명백한 사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사학계는 대체로 왜구가 변방의 ‘해민(海民)’이고, 심지어 화척(백정)이나 제주도민 등 고려인이 왜구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은 고려 조정이 무능하고 부패해 왜구의 실체가 자국민이라는 것도 파악을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주장의 뿌리가 일본 천황은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메이지 유신 세력의 ‘황국사관’이라고 말했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자신들의 역할 모델로 봤다. 그런 남조의 무사들이 바다 건너 노략질을 하러 다닌 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학계에도 왜구에 고려인과 중국인이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처럼 알려져 있다”며 “왜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명과 조선의 건국, 일본 북조의 승리 등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한 14세기 후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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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은 복음을 ‘동네방네’ 전하는 방법입니다”

    ‘가톨릭 신부가 연극을 연출하는 것도 신기한데, 부조리극을 연출한 건 좀 부조리하지 않나?’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차장 유환민 신부(44)의 연출작 목록에 대표적 부조리극 작가 이오네스코의 ‘왕, 죽어가다’가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1998년 사제 서품을 받은 유 신부는 ‘동네방네’라는 극단을 이끌고 있다. 음악, 미술 등 예술을 하는 신부님들이 적지 않지만 연극은 아무래도 특이하다. 24, 25일 각각 서울 명동대성당과 방배동성당에서 열리는 낭독공연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를 연출하는 그를 21일 명동성당에서 만나봤다. “‘왕, 죽어가다’는 이오네스코가 말년에 며칠간 병으로 거의 죽다 살아난 뒤에 쓴 작품이거든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해 허둥대는 왕의 모습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유 신부는 “2012, 2013년 가톨릭에서 망자(亡者)들을 위해 기도하고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성월인 11월에 공연한 작품”이라며 “충분히 종교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극을 공부하려고 2003∼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을 다녔다. 주변의 시선은 어땠을까. “‘신선한 발상이고, 가톨릭에 필요하다’고 격려해주신 분들이 있어 교구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는 반응이 일반적이었어요. 교구에 신부가 많아지더니 ‘별놈’이 다 있구나 하는 말도 들었고요.” 유 신부가 처음 연극을 시작한 건 가톨릭대 신학대를 다니던 중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연극은 복음을 ‘동네방네’ 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10∼15세기 가톨릭에서 연극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하는 수단으로 성행했다”며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을 만나는 데도 연극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제 유 신부는 성극(聖劇)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철거민을 소재로 한 ‘없는 사람들’, 6·25전쟁 당시 배달되지 못한 병사들의 편지를 다룬 ‘달아나라 편지야’ 등을 2011∼2013년 연출했다. 내년에도 가톨릭 순교자에 관한 작품과 구한말 신극을 하는 이들을 소재로 한 ‘한낮에 혼령처럼’을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 중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적 가치를 발견하는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부가 한예종에 들어갔으니 한예종이 선교의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아, 이 얘기가 보도되면 혼나겠는데”라며 재학 당시 주변인들에게 세례 받으라고 권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평소 유 신부를 ‘형, 오빠’라고 부르다 신자가 된 연극인이 1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유 신부가 이번에 공연하는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는 기독교의 오래된 전설로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한 동방박사가 준비했던 보물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모두 쓰고 헌신한다는 이야기다. 올해 결성된 서울가톨릭연극협회 회원인 배우 최주봉 등이 출연한다. 성탄절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유 신부는 답 대신 극중 대사 한 구절을 소개했다. 뒤늦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난 네 번째 동방박사가 ‘주님께 드릴 선물이 없다’며 탄식하자 하늘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들아, 이렇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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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의 피 흘렸지만, 민주주의는 결국 설득과 협의의 과정”

    정년을 맞아 은퇴한 대학 교수가 프랑스 혁명사를 10부작으로 쓰고 있다. 책 한 권이 대략 200자 원고지 1200장 분량이라고 치면 10부작은 원고지 1만2000장에 이른다. 최근 1부 ‘대서사의 서막’과 2부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을 발간한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65)를 전화로 만나 봤다.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흘린 피가 역사의 추진력으로 작동했지만 새로운 체제는 폭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민주주의는 결국 ‘설득과 합의’겠지요.”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은 헌정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며 “입법가들이 의회 내에서 서로를 설득하는 의회 활동을 중심으로 혁명사를 짚어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 무기는 사료다. ‘1787년부터 1860년까지 의회 기록’ ‘프랑스 혁명기 의회의 역사’를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어 사료에 근거를 뒀다. 앙시앵레짐(구체제)에 대한 오해도 고치고 싶다고 했다. 흔히 앙시앵레짐을 혁명이 극복해낸 모순 덩어리로만 보지만 절대 왕정이 후원하는 여러 아카데미에서 활발하게 학술 토론이 벌어지는 등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앙시앵레짐이 사실은 혁명을 품어 낳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그동안 뜻이 모호하거나 잘못 번역된 혁명 기구와 법률 등의 명칭도 이번 기회에 바로잡고 있다. 예를 들면 1790년 제정된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은 이름만 보면 성직자의 민사소송 절차를 정한 법 같지만 실은 구체제에서 제1신분이었던 성직자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재산과 직위 임명 등을 통제하는 법이라는 것. 주 교수는 “‘성직자 시민 헌법’이 정확한 용어인데 일본 학자들이 잘못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라며 “또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의 ‘구국위원회’를 ‘공안위원회’로 번역하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1792년 8월 10일 민중들이 국왕이 있는 튈르리 궁으로 진격해 입헌군주정을 사실상 끝낸 ‘제2의 혁명’을 꼽았다. 주 교수는 수년 전 원로 서양사학자인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의 권유로 책 집필을 시작했지만 미뤄두다가 올해 정년을 맞았다고 한다. 탈고한 3, 4권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고 현재 5권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매년 1권씩 쓸 생각이라고 하니 10부작을 모두 끝내려면 6년은 더 걸릴 예정이다. “마라톤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골인 지점은 조금씩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이걸 끝내야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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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사’ 집필 주명철 명예교수 “민주주의는 ‘설득과 합의’”

    정년을 맞아 은퇴한 대학 교수가 프랑스 혁명사를 10부작으로 쓰고 있다. 책 한 권이 대략 200자 원고지 1200장 분량이라고 치면 10부작은 원고지 1만2000장에 이른다. 최근 1부 ‘대서사의 서막’과 2부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을 발간한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65)를 전화로 만나봤다.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흘린 피가 역사의 추진력으로 작동했지만 새로운 체제는 폭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민주주의는 결국 ‘설득과 합의’겠지요.”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은 헌정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입법가들이 의회 내에서 서로를 설득하는 의회활동을 중심으로 혁명사를 짚어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 무기는 사료다. ‘1787년부터 1860년까지 의회기록’ ‘프랑스 혁명기 의회의 역사’를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어 사료에 근거를 뒀다. 앙시앵레짐(구체제)에 대한 오해도 고치고 싶다고 했다. 흔히 앙시앵레짐(구체제)을 혁명이 극복해낸 모순 덩어리로만 보지만 절대 왕정이 후원하는 여러 아카데미에서 활발하게 학술 토론이 벌어지는 등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앙시앵레짐이 사실은 혁명을 품어 낳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 도중인 1790년 제정된 법 중에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이라고 번역된 것이 있다. 마치 성직자의 민사 소송 절차를 정한 법 같지만 사실은 구체제에서 제1신분이었던 성직자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재산과 직위 임명 등을 통제하는 법이라고 한다. “원래 ‘성직자 시민 헌법’이 맞는 표현입니다. 일본 학자들이 잘못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거죠. 또 ‘공안위원회’는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의 ‘구국위원회’가 맞아요.” 주 교수는 “혁명 기구와 법률 등에 뜻이 모호한 번역이나 오역이 꽤 있는데 이번 기회에 고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에게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물었더니 “마음이 약해서 (피 흘리는 혁명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혁명은 고통스럽고, 말조심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어서 행복한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민주주의를 향한 몸부림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1792년 8월 10일 민중들이 국왕이 있는 튈르리 궁으로 진격해 입헌군주정을 사실상 끝낸 ‘제2의 혁명’ 순간이라고 봅니다.”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이 주는 교훈에 대해 “민주주의는 매우 어렵게 도달한 것이고, 그만큼 소중한 가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 교수는 수년 전 원로 서양사학자인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의 권유로 책 집필을 시작했지만 미뤄두다가 올해 정년을 맞았다고 한다. 탈고한 3, 4권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고 현재 5권 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매년 1권 씩 쓸 생각이라고 하니 10부작을 모두 끝내려면 6년은 더 걸릴 예정이다. “마라톤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골인 지점은 조금씩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이걸 끝내야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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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우주의 신비와 과학의 미래를 밝혀라

    둘레가 27km에 이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2008년 가동되기 전 “이 시설에서 생길 수 있는 블랙홀이 지구를 삼켜버릴 수 있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의 물리학자가 반박 논문까지 내야 했다. 엄청난 질량이 존재하는 우주가 아니라 지구의 실험실에서 블랙홀이 생긴다는 주장은 황당한 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미국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그 가능성은 낮지만 분명 존재한다. 심지어 고차원 우주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LHC에서 생긴 블랙홀은 크기가 아주 작을 것이고, 순식간에 에너지를 방출하고 사라질 것이니 걱정할 것은 없다. 저자는 ‘비틀린 여분 차원’이란 새로운 개념을 통해 최신 우주론인 ‘끈’ 이론의 일부를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현대 우주론과 양자역학 이론을 다룬 책은 대중서라고 해도 기본 개념 이해부터 쉽지 않다. 이 책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분 차원’에서의 중력은 매우 강하지만 우리는 그 힘의 아주 일부만 느낄 뿐인데, LHC에서 중력자가 1조 배 정도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상태가 관측되면 ‘여분 차원’의 증거가 될 것이라는 저자의 이론은 아무리 되새겨 읽어도 알쏭달쏭하다. 그래도 저자는 입자 가속의 원리를 “그네에 탄 아이의 등을 밀어 더 높이 올라가게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는 등 비교적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하는 책의 제목으로 밥 딜런의 유명한 노래 ‘Knockin‘ On Heaven’s Door’를 빌려온 것도 반어적인 위트로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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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금동아미타삼존불은 ‘매불신앙’ 확인할 진품”

    조선 초기 신앙의 목적으로 금강산에 묻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삼존불상이 16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한국미술사연구소장)는 이날 불상을 공개하고 “145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국내에서는 유일한 금강산 매립 불상”이라며 “감정 결과 금강산 은정골에서 출토돼 북한 평양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10여 점의 금동불상과 같은 티베트계 명나라 양식의 금동아미타삼존불상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문 교수에 따르면 매불(埋佛) 신앙은 고려 말부터 당대 사람들이 불국토라고 생각한 금강산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번에 공개된 불상은 본존 아미타불상, 좌협시 관음보살상, 우협시 지장보살상으로 전체 크기는 12∼13cm, 대좌를 제외한 부처님의 크기는 7.5∼8.2cm다. 문 교수는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가늘며 두 손이 유난히 크고 긴 전형적인 티베트계 명나라 양식의 불상”이라고 밝혔다. 문 교수는 불상이 올해 중국 지안(集安) 시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상의 가치 등에 관한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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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건 사료 작성 시기 착오 탓”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에서 (진·秦) 장성(長城)이 시작된다.’ 사기색은(史記索隱)과 통전(通典) 등 각종 중국 사서에 나오는 기록이다. 학계 통설에 따르면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평양과 그 인근. 이 사서들의 기록을 근거로 1910년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82년 발간된 ‘중국역사지도집’과 최근의 동북공정, 2012년 12월 공개된 미 의회 조사국 보고서 등에도 반영됐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사료가 만들어진 시기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연구가 나왔다. 12일 한국고대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공석구 한밭대 교양학부 교수는 “해당 기록이 처음 등장했고 이후 사서들이 인용하는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는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던 때가 아니라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돼 요서지방으로 교치(僑置·땅 이름을 다른 곳으로 옮김)된 뒤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진 장성이 시작되는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던 낙랑군이 아니라 요서지방의 낙랑군이라는 얘기다. 공 교수는 ‘진 장성 동단과 낙랑군 수성현 관련기록 고찰’이라는 발표문에서 “자치통감 등이 인용한 태강지리지에는 동진(東晉) 원제(재위 318∼323년)나 북위(北魏·386∼534) 시대에 일어난 일과 용어가 등장한다”며 “낙랑군과 장성 기록도 낙랑군 축출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공 교수는 태강지리지 다음으로 낙랑군 수성현과 장성에 대해 기록한 사서인 진서(晉書)의 서술 역시 갈석산이 요서에 있었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 책은 당 태종의 명령으로 648년 완성된 책이다. 태강지리지가 진 장성 동단과 관련해 ‘갈석산’을 언급하고 있는 데 반해 진서에는 갈석산이 빠져 있다. 공 교수는 “진서의 편찬자들은 요동에 대한 영토의식을 기반으로 한반도 일부 지역까지 아우르는 낙랑군을 설명하려 했다”며 “갈석산이 요서에 있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자 편찬자들이 이를 빼버린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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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신, 인간에게 묻다 “나와 함께 갈 준비가 되었는가”

    현대의 성서는 모두 번역서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였다. 이후 라틴어로 옮겨진 성서가 공인된 권위를 얻었고 다시 영어와 한국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됐다. 번역은 운명적으로 유사한 단어로의 대체나 축약과 같은 의미 변화를 겪는다. 성서 번역에는 그런 일이 없었을까.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동시에 전공하는 등 다양한 고대 언어를 연구한 고전문헌학자다. 저자는 번역되며 변형된 성서의 원래 의미를 복원해내고, 역자들의 의도까지 추측해낸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창세기 22장 5절)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신에게 바치려는 순간이다. 책에 따르면 히브리어 성서 원문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지칭한 단어는 ‘이 아이’가 아니라 ‘건장한 청년’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기원전 3세기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과 기원후 5세기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에서는 ‘이 아이’가 됐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송하기 위해 당대 역자들이 일부러 오역한 것”이라며 “성서의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약 37세 정도인 아들 이삭에게 영적인 권위를 넘기는 이야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과일을 따 먹은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라 ‘모든 지식의 나무’가 원래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저자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상징은 인간의 오만과 원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책은 성서의 풍부한 의미를 살려냈다. 예수는 빌라도 총독에게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증언하다’는 그리스어 ‘마르튀레오(martyreo)’인데 ‘죽을 각오를 하고 실행에 옮기겠다고 말하다’이고,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로는 ‘샤하다(shahada)’인데 ‘순교하다’라는 뜻도 담겨 있다. 얼핏 난해할 것 같은 책이지만 이야기에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식으로 구성돼 쉽게 읽힌다. 저자는 신의 질문에 주목한다. ‘신의 위대한 질문’은 구약,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신약에 나오는 물음이 화두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장 1절) 구약에서 신은 아브람(신으로부터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의 이름)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수 있는가’를 묻는다. 히브리어 원문의 첫마디는 ‘레크 르카(lek lka)’다. ‘레크’에는 ‘버리다’라는 의미가 있고 ‘르카’는 ‘너를 위해서’라는 뜻이다. 저자는 “신이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군 안전장치나 기득권을 버리고 신과 동행할 준비가 돼 있는지를 물은 것”이라며 “신의 명령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사막에서 왕처럼 대접한 낯선 이는 사실 신이었다. 저자는 “‘거룩함’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카도쉬(kadosh)’의 원래 의미는 ‘다름’”이라며 “낯선 타자를 성찰의 기회로 삼고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 때 그 ‘다름’이 바로 신이 된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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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진보가 가야할 방향 제시한 故김기원 교수의 유고집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too(케이크를 먹어치우면서 그대로 간직할 수는 없다).” 진보적 입장에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하다 지난해 12월 세상을 뜬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가 고교 영어 수업 시간에 배웠다며 지난해 3월 자신의 블로그에 인용한 속담이다. ‘복지는 좋지만 세금을 더 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보통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테다. 그러나 김 교수는 평소 그런 일은 이뤄질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 책은 난무하는 헛된 구호들의 텅 빈 알맹이를 따지고 들며 ‘개혁적 진보’를 설파했던 그의 1주기를 맞아 나온 유고집이다. 2011∼2014년 그가 동명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뽑아 주제별로 엮었다. 책은 진보적인 입장에 있으면서도 진보의 경직성을 탈피하려 했던 그의 고민을 경제민주화, 노동, 한국 정치, 통일 등 4개의 범주로 묶어 담았다. 그는 참여연대의 재벌 개혁 운동을 통해 재벌 비판을 시작했는가 하면 대기업 노동조합들의 ‘노동귀족적’ 운동에 대해서도 뼈아픈 비판을 했던 인물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은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 첨예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는 게 지론이었다. 책에 묶인 글은 학술 연구를 목적으로 쓰인 글이 아니라 시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각을 정리한 글인지라 그만큼 더 직설적이다. 그는 재벌의 폐해를 바로잡고 복지를 강화해 거대 기업 노동자와 종소기업 노동자의 실질적 생활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돈만 있으면 안 될 게 없다는 ‘소비자의 편리’도 희생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갑작스럽게 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타계 직전까지 블로그에 글을 올릴 정도로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아내는 책 말미 발문에서 “독일에서 돌아오며 ‘이제 겨우 내가 바라는 통일 경제 연구의 방향이 잡혀 가는데…’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온다”고 썼다.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아쉬움도 쌓인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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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 사회공헌]전도-봉사 날개 삼아 ‘낮은 곳, 더 낮은 곳’ 살피고 보듬어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온누리교회의 표어다. 전도와 사회 참여 및 봉사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교회는 서울 영등포 지역 노숙자들을 위해 교회 겸 노숙자 쉼터인 마태복음교회에 쌀과 부식, 월세 등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 남대문 쪽방촌 주민에게도 매주 점심식사 등을 대접한다. 불우 이웃에게 사랑의 쌀을 모아 전하고, 질병이나 갑작스러운 생활고를 겪는 80여 가정에게 매년 약 1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나눔센터 ‘프렌즈’를 통해 무료 급식을 하는 한편 무허가 건물에서 사는 주민들의 주거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돕는 사업 교회는 ‘사랑의 열린 나눔장터’를 열어 의류와 생활용품, 유아용품 등을 기부받아 물품이나 판매금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달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위탁 아동과 노숙자, 독거노인 등을 위한 헌금과 바자 및 선물 전달, 판자촌에 연탄 쌀 김치 배달하기 등도 수시로 진행되고 있다. 신자들이 지역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일대일로 관계를 맺는 ‘한 다락방 한 사역’ 사업, 지역사회 자원봉사기관 찾아가기, 어려운 사람들 빚 줄여 주기, 필요 이상의 유산 안 물려주기 등의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정착도 돕고 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미래홈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고 여성 탈북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가족캠프나 문화체험 행사도 수시로 연다. 청년에게 비전 제시 온누리교회는 새롭게 부각되는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청년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희망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 그 대표적 사례다. 사회선교본부와 CEO포럼은 청년 실업과 양극화에 대한 대안으로 청년들의 사회적 기업 창업을 장려하기 위해 올 6∼11월 ‘러빙 유 청년 벤처대회’를 열었다. 청년들로 구성된 59개 팀이 ‘게임 중독 아이들과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온라인 한국어 교육 플랫폼’ ‘감사 메시지 전달 앱’ 등의 아이템을 갖고 참여했다. 그중 3팀이 상금을 받았고, 향후 1년 동안 경영 컨설팅도 받게 됐다.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해서는 ‘청년 부채 해결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전문 기관과 빚을 진 청년을 연결해 상담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사후관리를 하도록 했다. 부채해결뿐 아니라 위축된 심리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장애인이 함께 하는 교회 온누리교회는 발달장애 등의 장애인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등 장애인이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2011년 창단된 ‘온사랑 합창단’은 음악가 12명과 단원 등 약 40명이 있다. 처음에는 화음 연습도 어려웠던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연습을 반복하면서 각종 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1999년 시작된 ‘온누리 사랑 챔버’는 80여 명의 단원이 복지관과 노인회관, 병원, 소년원 등에서 연평균 50여 회의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2013년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에서도 초청공연을 했다. 전문 연주자 40여 명으로 구성된 ‘사랑 플러스’가 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온누리교회의 각 지역 성전에서는 장애인들을 위한 예배 공동체 ‘사랑부’를 운영하고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모든 성도가 선교사 ‘하나’되어 이웃사랑 실천 ▼이재훈 담임목사 온누리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태어난 교회입니다. 선교사 파송과 후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선교사 직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땅끝’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지역사회도 선교 현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교회 자체의 확장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 섬기기 위해 정한 표어는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입니다. 예수께서 삶으로 보여 주셨듯이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고통 받는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해 애쓰고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슬로건은 ‘Loving U’입니다. 이는 ‘Uncomfortable’ ‘Unfamiliar’ ‘Unsafe’를 사랑하기, 즉 ‘행복한 불편함’ ‘따스한 시선’ ‘손해 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는 세 가지 원칙 아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첫째, 모든 성도가 함께 참여합니다. 어린이부터 청소년, 대학생과 청년, 장년층과 어르신 세대에 이르기까지 동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부분적으로 움직이는 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 되어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존의 사회봉사를 지속하며 새로운 영역의 봉사를 개발하고 실행합니다. 온누리 성도들의 사회봉사정신을 고취할 수 있도록 회복적 정의, 생명과 환경, 청지기 사역에 관한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제 봉사와 긍휼의 대상들을 찾아가 돕는 기존 봉사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새로운 봉사를 개발하여 실천하고 있습니다. 취업이 어려워진 청년들에게 비전을 주기 위해 연 ‘러빙유 청년 벤처 대회’, 청년 부채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러빙유 청년부채해결 프로그램’, 장애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사랑챔버’와 ‘온사랑합창단’ 운영 및 전 세계 투어 공연, 그리고 독거노인 탈북민 다문화가정과 이웃이 되기 위한 다양한 사역들을 구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셋째, 교회 외부의 사회봉사 시설·단체와의 연계 및 신설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교회는 ‘온누리복지재단’을 설립해 복지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체 시설로 경기 군포시 청소년 쉼터 하나로, 온누리요양센터, 온누리농업실습지(남한산성, 경기 안성)를 운영하고 있고 정부 수탁시설로 시립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 시립용산노인종합복지관, 청파노인복지센터, 번동코이노니아(장애인보호작업장)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201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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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곡 둘러싼 백성-관원 간 갈등, 살인까지

    “고을에서 환곡을 갚지 않는 양하진의 백성 가족을 저에게 모조리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중략) 용천에 도착하여 허의척과 실랑이가 붙었는데 그때 허의척의 아비가 머리로 저를 받았으므로 제가 철편을 휘둘러서 의도치 않게 머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이는 손이 가는 대로 휘두른 일이고 죽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평안도 의주의 포교인 박창일이 관의 지시로 환곡을 독촉하러 갔다가 저항하는 백성을 살해했다는 일성록(日省錄·사진)의 정조 19년(1795년) 9월 7일 기사다. 정조 17년 기사에는 반대로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함봉련이라는 이가 환곡 대신에 소를 빼앗아간 관리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사건도 실려 있다. 당시 환곡을 둘러싼 백성과 관리 간의 갈등이 극심했음을 알려준다. 일성록은 영조 28년(1752년)부터 1910년 국권을 잃기까지 국정의 제반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1998년부터 일성록 번역을 시작해 올해 정조 대를 완역했다. 최근 열린 기념 학술대회에서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발표문 ‘일성록 소재 형사 사건의 사료적 가치’를 통해 일성록의 형옥(刑獄)에 관한 기사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일성록에는 이미 양반과 상민의 신분제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 기록이 적지 않다. “저는 시골의 우매한 백성으로 윤상(倫常)과 명분이 엄격하다는 걸 모르고 며느리를 들이려는 욕심을 냈습니다. (중략) 갈수록 마음이 급해져서 더럽고 추잡한 소문을 냈습니다.” 1795년 경기도 가평에서 돈 많은 상민이 몰락한 양반의 딸을 억지로 며느리로 들이려고 추잡한 소문을 냈는데, 양반의 딸이 수치심에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같은 해 전라도 고부에서 한 상민이 ‘돈 1전 4푼을 훔쳤다’며 양반을 때려 살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상민이 양반을 넘보거나 가난한 양반을 함부로 대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성록에는 정조 대 953건, 순조 대 1046건, 헌종 대 377건, 철종 대 477건의 살인사건이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료에는 없고 일성록에만 기록된 것이 많다. 김성재 번역위원은 “일성록에는 사건의 피고와 피해자 가족, 증인 등의 진술이 그대로 담겨 있어 당시 백성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며 “또 범죄를 국왕에게 보고하는 과정, 심리와 재판, 형조의 법 적용, 대신들의 토의까지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내년 상반기 안에 번역된 일성록 정조 대를 185책으로 출판할 예정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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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년 평양 장충성당에 사제 파견해 미사 봉헌”

    부활절 등 가톨릭 축일에 남한 측 사제를 평양에 파견해 미사를 봉헌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천주교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방북단은 7일 기자회견을 열고 “매년 4, 5차례 가톨릭의 주요 대축일에 서울대교구가 평양 장충성당에 사제를 파견해 미사 봉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북한 조선가톨릭교협회와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주교회의 의장이자 방북단장을 맡은 김희중 대주교는 “방북단의 제안에 북측 관계자들은 ‘언제든지 오시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답했다”며 “파견 미사가 성사되면 북측과의 만남을 정례화하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방북단은 김 대주교와 대구대교구장인 조환길 대주교를 포함해 주교 5명과 수행신부 등 17명으로 구성됐으며 북한 조선가톨릭교협회 초청으로 1∼4일 방북했다. 방북단에 따르면 정기적인 사제 파견이 성사될지는 북한 당국의 허가와 남북관계에 달려 있다. 김 대주교는 “북측 관계자는 ‘당국자 간에 이변이 없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았다”며 “남북관계가 경색될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협력하겠다는 취지였다”고 했다. 사제 파견이 성사된다면 2016년 3월 부활절부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김 대주교는 북한의 사제 양성을 돕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기적인 사제 파견이 이뤄진다면 그런 문제도 논의할 수 있겠지만 지금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김 대주교는 또 “‘북측이 교황님을 초청했으면 좋겠다’고 가볍게 말했는데 북측에서는 ‘그렇게 되면 좋죠’라고 답했다”며 “북한의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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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고죄로 도입된 간통죄, 처음부터 사기-협박등에 악용돼”

    《 “최원택과 조구담은 1908년 결혼해 살다가 1923년 3월 최원택은 (아내) 조구담을 지금의 조구담 남편인 안재익에게 금 60원에 팔아서 30원은 그때 받고 나머지 30원은 언제든지 호적 수속을 마칠 때 받는다는 계약을 하고 … 속히 주지 않는다고 호적에는 아직 내 계집이라고 작년 9월 2일 조구담을 상대로 안재익과의 간통죄로 고소를 제기하는 동시에….” 1927년 대구에서 열린 재판을 다룬 그해 2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돈을 받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넘긴 한 남자가 나머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아내를 고소한 것이다. 최원택은 결국 패소했지만 이런 파렴치한 소송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일제가 도입했던 간통죄가 있었다. 》○ 시작부터 사기 협박에 악용돼 간통죄는 올 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여성과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나온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4일 개최한 학술대회 ‘성(聖·性)스러운 국민: 국가, 법, 젠더·섹슈얼리티’에서 홍양희 한양대 HK연구교수는 “‘포스트 간통죄’ 시대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간통죄가 근대 형법에서 어떻게 규율되기 시작했는지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간통죄가 대한민국 형법에 제정된 것은 1953년이지만 일제강점기 처음 도입된 것은 1912년 공포된 ‘조선 형사령’이다. 홍 교수의 발표문 ‘선량한 풍속을 위하여: 식민지 시기 형법과 성(sexuality) 통제’에 따르면 당시에도 간통죄를 악용한 사기와 협박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 1930년 황해도 해주에서는 젊은 아내를 동네 부자 아들과 간통하게 한 뒤 남편이 돈을 뜯어낸 사건이 있었다. 1929년 서울에서는 딸을 첩으로 부자에게 시집보낸 뒤 돈을 목적으로 남자를 간통으로 고소한 사건 등도 벌어졌다. 간통죄는 또 며느리와 처를 학대하거나 보복성으로 고소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홍 교수는 “이 같은 문제는 간통죄가 피해자가 고소해야 공소할 수 있는 친고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유부녀만 처벌 간통죄가 친고죄가 된 이유는 “피해자인 남편이 자신의 ‘명예와 이해’를 위해 간통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또 간통죄 도입 당시 처벌 대상은 ‘유부(有夫)의 부(婦)’, 즉 결혼한 여성으로 한정됐다. 남편은 바람을 피워도 혼인의 평화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로 처벌받지 않았다. 기혼 여성의 성을 부권(夫權)의 관점에서 다뤘던 것이다. 간통죄 규정 개정 주장은 도입 초기부터 나온다. 1926년 법 개정을 위한 회의 자료에는 “간통죄를 처벌해 재판 기록을 남기면 자손이 혈통을 의심하게 돼 조상과 자손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처벌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온다. 홍 교수는 “이는 일본 정책 당국이 ‘일본 민족의 순혈 혈통 보존’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전근대사회에서 성 통제의 대상은 주로 상층 신분 여성에 한정됐지만 일제의 간통죄 도입으로 기혼의 모든 여성의 성을 국가가 통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950년대 퀴어 장의 변동: 여성혐오의 전이와 동성애의 범죄화’ ‘나라를 위해 죽을 권리: 병역법과 남성적 국민 만들기’ ‘탈식민 국가의 ‘국민’ 경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 ‘내선결혼(內鮮結婚)’ 가족의 법적 지위’ 등의 주제가 발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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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은 신체적으로 日人보다 우월하며 밝고 친절”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입니다. … 지하자원이 많으며 특히 사금이 산재해 있으나 정부는 외국인의 광산 개발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조선인은 신체적으로 일본 사람보다 우월하며, 청나라 사람들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민족적 기질은 밝고 쾌활하며, 격식을 차리지 않습니다.” 조선 주재 영국 부영사로 일했던 C W 캠벨이 1892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영국학술협회에서 조선을 묘사한 대목이다. 한승훈 고려대 BK21플러스한국사학사업단 연구교수는 5일 열린 조선시대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영국 외교관들이 1882∼1894년 조선을 여행하며 느낀 조선인들의 첫인상은 ‘친절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외교관의 여행기를 통해 본 조선’이라는 발표문에서 영국외교문서, 의회문서, 왕립지리학회지 등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당초 조선의 쇄국정책과 임오군란에 대해 알고 있던 영국 외교관들은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여행하는 중 조선인들은 호기심과 호감이 섞인 가운데 영국인들 주변에 모여들었다. 서해안 탐사를 했던 영국 해군 대위 존 매클레어는 “조선인들은 예의 바르고 정직하며 종종 탐사를 도와줬다”고 적었다. 청나라 사람들 같은 반외세 성향이 조선인들에게는 없다는 기록도 있다. 한 교수는 “청나라는 일찍부터 영국의 정치, 군사적 침략을 받았지만 조선은 그런 경험이 당시까지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 관리들이 국제 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초대 조선 주재 영국총영사를 지낸 W G 애스턴은 1882년 동래부사 김선근을 만난 뒤 “김 부사는 최근 이집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영국에 있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 파나마 운하 건설이 제안됐다는 등의 일을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기록했다. 외교관들은 조선 전통 가옥의 내부와 온돌 구조, 지역 간 이동거리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조선 관리의 부정부패와 농업 체계의 후진성을 묘사한 부정적인 언급도 있었다. 한 교수는 “외교관들은 영국 상인들의 무역을 도울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했다”며 “이후 이 여행기는 영국 신문에 보도되고 왕립학회에서도 발표됐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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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惡은 싹튼다, 일상적 무관심 속에

    “여전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에 유일한 화두는 먹고사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가 계간 ‘황해문화’ 올 겨울호에 쓴 ‘몫 없는 이들의 몫-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던진 질문이다. 그는 우리가 ‘인터레그넘’의 시기에 있다고 본다. 인터레그넘은 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기한 것으로 왕이 죽었는데 새로운 왕은 즉위하기 전의 공백 상태를 말한다. 한국이 딱 그렇다.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이 경쟁하던 거인들의 시대는 갔다. 그 시대에는 국민 건강을 위해 의료보험을 도입하는 것과 같은 대규모의 기획이 가능했다. 지금은? 한국 정부의 금융정책보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대다수 한국인의 삶이 곤두박질칠지 아닐지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참여’ ‘실용’에 이어 대통령의 이름을 딴 정부까지 들어섰지만 새로운 시대는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1989년 지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다. 공저자인 레오니다스 돈스키스는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리투아니아 ISM경제경영대 교수다. 이들은 책에서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서양의 현대 사상가와 소설가, 비평가 등을 종횡으로 오가며 대담을 벌이며 거인들의 시대처럼 분명한 드라마, 꿈, 선악의 행위자들이 있던 시대는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들은 기존의 구조, 제도, 풍속, 도덕이 해체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진, 이른바 ‘유동적(액체) 근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악은 이슬람국가(IS) 테러리스트의 총 끝이나 북한 김정은 독재와 같은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을 물리치는 것,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장벽에서 자라난다. 감수성의 상실이 곧 ‘도덕적 불감증’이다. 책은 “사랑, 우정, 충성 그리고 창조의 정신을 통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회자되는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다르지 않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을 조롱하는 일이 ‘놀이’처럼 벌어진다. 페이스북에는 난민이나 전쟁 등으로 기아 상태에 놓인 비참한 이들을 다룬 게시물이 적지 않다. 여기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 이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 책의 저자들은 “SNS가 우리를 대신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전진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학살과 같은 범죄뿐 아니라 그것을 망각하는 것도 악으로 본다. 기억만큼 윤리와 직결된 것도 없다. 저자들은 “역사는 어떤 정치적 신조에 봉사하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정치가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라며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 둬야 한다”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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