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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에서 ‘화평굴기(和平굴起·평화롭게 우뚝 선다)’를 추구해 온 중국이 예술 분야에서도 굴기하고 있다. 여전히 중화(中華)를 강조하는 대규모 관제 예술 공연이 성황을 이루고 있지만 한편에선 그런 정부에 냉소적이고 세계적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현대 미술도 베이징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중국 예술의 폭과 관용도가 점차 넓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2일 중국 청더(承德) 시의 ‘정성왕조(鼎盛王朝) 강희대전(康熙大典)’ 야외 공연장은 3000명을 수용하는 객석이 가득 찼다. 좌우로 100m가 넘는 대형 무대에 조명이 켜지자 기마병이 수십 명씩 무리 지어 달리다가 원을 그리며 황제 앞에 도열했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에 온몸이 긴장될 정도였다. 경기문화재단 ‘신연암로드’ 탐방단과 함께 관람한 이 공연은 청나라의 융성기를 이끈 강희제의 업적을 다뤘다. 공연은 규모로 관객을 압도했다. 작은 야산 전체를 무대 배경으로 사용했고, 말 130여 마리와 지역 주민을 비롯한 배우 400여 명이 투입됐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선전(深(수,천)) 시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대형 공연이 잇따라 생겨났다고 한다. 강희대전 같은 공연은 내적으로는 ‘민족 대융합’을 강조하면서 소수민족의 분리 운동을 억누르고 외적으로는 ‘G1’을 노리는 중국 정부의 지향점을 보여 준다는 분석이다. 현대무용가 안은미 전 대구시립무용단장은 “질서를 중시한 연출 탓에 감동은 적었지만 최고급 조명과 시설이 사용된 공연의 스펙터클과 주제가 ‘팍스 차이나’를 지향하는 중국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지난달 25일 방문한 베이징 차오양(朝陽) 구 헤이차오(黑橋) 촌의 ‘오십육도 예술구(五十六度 藝術區)’에서는 정부에 냉소적인 작품도 발견할 수 있었다. 헤이차오 촌은 베이징 내 대표적 빈민촌이었으나 베이징 올림픽 이후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져 물류창고와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의 스튜디오 등이 들어선 곳이다. 수묵이나 판화 등 전통 기법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주로 만드는 쑨쉰(孫遜·35) 작가의 작업실에는 해학 넘치는 드로잉이 가득했다. 그는 2010년 중국현대미술상(CCAA)을 받고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중국 현대미술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그의 애니메이션 ‘용년왕사(龍年往事·용의 해에 일어난 일)’는 공산당을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현수막 아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관중의 항의가 묘사됐고, 조소에 이어 환멸에 가득 찬 흐느낌 소리로 마무리됐다. 2012년 쑨쉰 등 중국 젊은 미술 작가의 작품 전시를 기획한 임종은 큐레이터는 “반체제 성향의 설치 미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가 한때 가택 연금되는 등 중국 정부는 현대 미술을 불온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는 작가들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청더·베이징=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치, 경제에서 ‘화평굴기(和平¤起·평화롭게 우뚝 선다)’를 추구해 온 중국이 예술 분야에서도 굴기하고 있다. 여전히 중화(中華)를 강조하는 대규모 관제 예술 공연이 성황을 이루고 있지만 한편에선 그런 정부에 냉소적이고 세계적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는 현대 미술도 베이징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중국 예술의 폭과 관용도가 점차 넓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2일 중국 청더(承德) 시의 ‘정성왕조(鼎盛王朝) 강희대전(康熙大典)’ 야외 공연장은 평일인데도 3000명을 수용하는 객석이 가득 찼다. 좌우로 100m가 넘는 대형 무대에 조명이 켜지자 기마병들이 수십 명씩 무리 지어 달리다가 원을 그리며 황제 앞에 도열했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에 온몸이 긴장될 정도였다. 경기문화재단 ‘신 연암로드’ 탐방단과 함께 관람한 이 공연은 청나라의 융성기를 이끈 강희제의 업적을 다뤘다. 공연은 규모로 관객을 압도했다. 작은 야산 전체를 무대 배경으로 사용했고, 말 130여 마리와 지역 주민을 비롯한 배우 400여 명이 투입됐다.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선전(深¤) 시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이와 유사한 대형 공연이 잇따라 생겨났다고 한다. 강희대전 같은 공연은 내적으로는 ‘민족 대융합’을 강조하면서 소수민족의 분리운동을 억누르고 외적으로는 ‘G1’을 노리는 중국 정부의 지향점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현대무용가 안은미 전 대구시립무용단장은 “질서를 중시한 연출 탓에 감동은 적었지만 최고급 조명과 시설이 사용된 공연의 스펙터클과 주제가 ‘팍스 차이나’를 지향하는 중국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지난달 25일 방문한 베이징 차오양(潮陽) 구 헤이차오(黑橋) 촌의 ‘오십육도 예술구(五十六度 藝術區)’에서는 정부에 냉소적인 작품도 발견할 수 있었다. 헤이차오 촌은 베이징 내 대표적 빈민촌이었으나 베이징 올림픽 이후 대규모 재개발이 이뤄져 물류창고와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의 예술가 스튜디오 등이 들어선 곳이다. 수묵이나 판화 등 전통기법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작품을 주로 만드는 쑨쉰(孫遜·35) 작가의 작업실에는 해학 넘치는 드로잉들이 가득했다. 그는 2010년 중국현대미술상(CCAA)을 받고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중국 현대미술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그의 애니메이션 ‘용년왕사(龍年往事·용의 해에 일어난 일)’는 공산당을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현수막 아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관중의 항의가 묘사됐고, 조소에 이어 환멸에 가득 찬 흐느낌 소리로 마무리됐다. 2012년 쑨쉰 등 중국 젊은 미술 작가의 작품 전시를 기획한 임종은 큐레이터는 “반체제 성향의 설치 미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가 한때 가택 연금되는 등 중국 정부는 현대 미술을 불온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작가들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청더·베이징=조종엽기자 jjj@donga.com}

“나 같은 하사(下士·삼류 선비)는 중국의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과 똥 부스러기에 있다고 말하리라.”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일신수필(馹迅隨筆)의 한 대목이다. 그는 명나라를 우러러보는 숭명(崇明)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청나라 문물을 비하하는 이른바 ‘상사(上士·일류 선비)’를 비판하며 반어적으로 이렇게 썼다. 하찮은 물건을 유익하게 사용하는 문화가 커다란 궁성보다 더 가치 있다는 얘기다. 경기문화재단(대표 조창희)은 연암 210주기를 맞아 지난달 17∼26일 연암의 연행로를 따라 중국 단둥-랴오양-선양-친황다오-청더-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신(新)연암로드’를 탐방했다. 신연암로드는 열하일기에 드러난 연암의 창의적 상상력을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탐방에는 무용가와 시인 등 예술가와 인문학자를 비롯해 현대의 ‘삼류 선비’를 자처하는 17명이 참가했다. 19일 랴오양에서 선양으로 가는 도로에서는 지평선 끝까지 옥수수 밭이 펼쳐진 만주 벌판이 드러났다. 연암은 랴오양 백탑을 보고 “한번 크게 울 만한 곳”이라며 ‘호곡장론(好哭場論)’을 펼쳤다. 김홍백 박사(단국대 동양학연구원)는 “연암의 청 문화 찬사는 조선의 협소함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며 “타자를 배타하지도 추종하지도 않는 긴장의 균형은 현대 한국이 중국이나 미국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연암이 몰래 사행단을 벗어나 마주친 사람과 사건을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썼던 것처럼 이번 탐방에서도 예기치 못한 만남들이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난달 17일 단둥 시의 한 식당에서 우연히 중국 동포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들렸다. “요즘 ‘스판 바지’를 하루에 한 250장, 한 달이면 7000장쯤 만드는데 다 남조선으로 갑니다.” 중국 동포라고 생각했던 한 50대 남성은 자신을 북한의 무역일꾼이라고 소개했다. 단둥의 중국인 소유 공장에서 자신이 북한 노동자를 관리하고 있는데 제품은 모두 한국으로 수출된다는 것. 동행한 북-중 무역 전문가 강주원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단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한국-북한의 교역 규모는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말했다. 탐방단은 단둥을 출발한 지 5일째인 21일 연암의 목적지였던 베이징 북쪽 청더(承德·옛날 열하)에 도착해 연암을 기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용가 안은미 씨는 청더 강변에서 즉흥 공연을 했는데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기괴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공동체 예술을 하는 김월식 씨가 참가자들이 여정 중 촬영한 이미지를 청더 거리 곳곳에 빔 프로젝터로 투사하며 대화를 이끌자 현지 중국인들도 삼삼오오 호기심을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신춘호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는 “연행로를 답사할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사라지고 있다”며 “연행길의 모습을 기록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은 “연행로는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길이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로였고,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건너간 길이었다”면서 “경제와 문화 교류의 통로가 되고 있는 연행로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문화재단은 동행한 미디어 아티스트 등의 작업을 바탕으로 답사 자료를 정리하고 2016년까지 연암의 발자취를 추가로 연구한 뒤 전시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청더·단둥=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공포영화의 거장 웨스 크레이븐 감독(사진)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향년 76세. 크레이븐 감독이 1984년 선보인 ‘나이트메어’는 꿈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 캐릭터 ‘프레디 크루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다. 1996년에는 영화 ‘스크림’으로 공포영화의 문법을 새로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31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29회째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등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학교와 재단, 개인 2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대학교수 등 외부 전문가 4명씩이 참여해 6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신입생 1대1 면담 전통… “학교는 인성교육의 요람” ▼교육) 광주 살레시오여고광주 살레시오여고는 ‘교육은 마음의 일’이라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인성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교장선생님과 제대로 인사를 나누기가 쉽지 않지만 살레시오여고는 다르다. 류경희 살레시오여고 교장수녀는 올해 초 300명이 넘는 신입생을 모두 1 대 1로 면담했다. 류 교장수녀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짧은 순간이지만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살레시오여고는 담임교사들도 한 학기에 두 번씩 학생들과 개별 면담을 하면서 학생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해주고 있다. 편부모나 조손가정 등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도 교사와 단둘이 있을 때면 비교적 자연스럽게 말문을 연다. 살레시오여고는 명상의 시간, 합창경연대회, 부모와 함께하는 봉사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인성교육을 함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아버지와 딸이 함께하는 소록도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류 교장수녀는 “2학기에는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힐링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성교육은 일반 수업시간에도 배어 있다. 1학년은 ‘생활과 인성’, 2학년은 ‘생활과 종교’, 3학년은 ‘생활과 심리’ 과목을 전원 선택과목으로 이수하고 있다. 이 학교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1년이 지나면 착해지고, 2년이 지나면 더욱 착해지고, 3년이 지나면 그보다 더욱 착해진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돌 정도다. 다른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끈끈한 유대관계의 밑바탕에는 이런 노력과 전통이 있다는 평가다. 류 교장수녀는 “홈커밍데이에는 연세가 지긋한 대선배들이 찾아와 학생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운다”며 “학생들도 졸업생들의 이런 마음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인성교육을 국제화교육과 연계한 점도 특별하다. 살레시오여고는 네팔 지진 사건 등이 일어났을 때 학생들에게 국제사회에서 인류애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당 재난국가를 돕는 교내 행사를 열기도 했다. 미국, 캐나다, 일본에 있는 살레시오 자매학교들과의 교류를 통해 여러 나라의 다양성을 체득하고 포용하는 법도 배운다. 류 교장수녀는 “학생들이 학교를 집처럼 느끼고 선생님을 가족처럼 친밀하게 느끼도록 하는 게 올해 목표”라며 “학생들에게 학교는 또 하나의 집”이라고 말했다.공적살레시오여고는 1961년 1월 살레시오 수녀회가 세운 가톨릭 학교. 개교 당시 9학급이었으나 초대 교장인 안칠라 그릿디 수녀 취임이래 1970년 12학급, 1974년 24학급, 1994년 30학급으로 성장해 현재 총 1006명(29학급)이 재학 중이다. 2006년부터 몽골 해외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같은 해 사학기관 경영평가에서 우수학교로 선정됐다. 2011년 일본 도쿄 세이비여고와 국제교류 자매결연을 했고 2012년에는 인성교육실천 우수학교에 선정됐다. 2013년엔 영어교육모델창의경영학교 성과 우수학교에 선정돼 표창을 받았다. 올해 2월 제52회 졸업식에서 338명이 졸업해 개교 이래 총 2만88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3월 현 류경희 마리아 제네로사 교장수녀가 취임했다. ▼ 국내 언론지원 반세기… “인촌선생이 성곡선생에게 준 상” ▼언론·문화) 성곡언론문화재단“이 상은 하늘나라에서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이 제자였던 성곡(省谷) 김성곤 선생(1913∼1975)에게 준 상이라 생각합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성곡언론문화재단(성곡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한종우 이사장(83)은 “창립자인 성곡이 1930년대 말 보성전문학교에 재학할 당시, 교장이던 인촌을 모델로 삼아 인촌의 3대 과업인 산업, 교육, 언론 육성의 뜻을 이어받고자 노력했다”며 “인촌의 길을 따르고자 했던 성곡의 노력이 창립 반세기 만에 빛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 성곡은 금성방직과 쌍용양회를 창업한 후 대구 현풍중고교와 국민대를 설립, 인수했으며 동양통신과 연합신문 등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기업가·교육가·언론인이었던 인촌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한국 최초의 언론 지원 재단인 성곡재단은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언론 규제를 위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해 언론계와 갈등을 빚은 것이 재단의 창립 계기가 됐다. 당시 박 대통령과 언론인들의 ‘유성(儒城)회담’을 주선한 성곡은 이 법의 시행을 미루는 대신 언론사 각자가 자율적으로 윤리강령을 만들도록 했으며 언론인의 자질향상을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 성곡재단은 영국의 톰슨, 미국의 니먼 재단을 모델로 설립된 후 현역 기자들의 해외 유학 및 연수 사업을 통해 언론인의 소양을 기르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뒀다. 1966년 중견 기자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인터뷰 자리에 한 이사장과 함께한 박현태 전 KBS 사장은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일본 도쿄대로 1기 연수를 떠났다. 그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수준으로 여권도 쉽게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며 “당시 해외 연수를 통해 기자로서 국제적인 감각과 선각자적인 혜안을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곡재단은 이후 삼성언론재단(1995년)과 LG상남언론재단(1995년) 등 민간언론재단이 설립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0% 독자적인 출자로 창립된 성곡재단은 쌍용양회의 주식배당금과 쌍용그룹의 지원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왔다. 한 이사장은 “외환위기 등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도 언론계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며 “언론이 양적으로 팽창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언론인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공적국내 최초의 언론재단으로 1965년 9월 창립 이후 현역 언론인들이 해외 대학에서 유학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해왔다. 재단은 지난 50년간 총 213명의 언론인이 미국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 일본 도쿄대, 영국 카디프대, 프랑스 파리대, 독일 베를린대 등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체재비와 학비 등을 지원했다. 재단은 또 기자 재교육 사업을 위해 1968∼1978년 서울대 신문대학원에 입학한 현직 언론인 150여 명에게 등록금 전액을 지원한 바 있다. 1989년에는 한국언론학회에 ‘성곡언론학연구기금’을 창설했고 1993년 9월부터 학술계간지 ‘언론과 사회’를 발간하고 있다. 1994년 11월 미국 미주리대로부터 한국언론의 국제화에 기여한 공로로 ‘언론공로메달’을 받았다. ▼ 6·25 직후부터 60년 한우물… “중문학계 전체가 받는 것” ▼인문·사회)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제가 중문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이 분야를 이해하는 사람도, 관련 논문도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인문 분야에서 학생들이 몰리는 학과의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성장한 중문학계 전체가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8일 경기 성남시 수내로 자택에서 만난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81)는 과거 펴냈던 번역서 ‘중용’의 개정판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가 중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고교 시절 학도병으로 참전한 6·25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황포군관학교 출신 중공군 장교를 만나면서부터다. ‘제대로 된 소총도 없이 꾸준히 전투를 벌이는 중국을 우리가 제대로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대 중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중문학 교수진도 적었고, 그나마 일부가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상황이었다. 김 교수는 1959년 국비 유학생으로 대만으로 유학해 중국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베이징대 교수들에게서 배우며 관련 자료를 모았다. 귀국해 처음 쓴 중국의 탈놀이에 관한 논문이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번역돼 현지 학술지에 실리기도 했다. 1961년 그는 서울대에서 중문학 강의를 시작했지만 쓸 만한 교재가 없었다. 중문학 고전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일반인에게 보급하기 위해 이때부터 번역과 저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적 시각으로 주석을 단 당시 번역서 중 일부는 최근까지도 개정판이 나온다. 김 교수는 “그때는 한자에 토를 달아 놓은 값싼 문고본, 이른바 ‘딱지본’이 전부여서 틀려도 나중에 고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단 책을 썼다”며 “전국에 고전 강연을 하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부터는 초기의 관심으로 돌아가 중국 전통 민간 연희 연구를 시작했다. 한중 수교 이전부터 정부 허가를 받아 중국 각지로 연희 탐사를 다녔다. 그때 수집한 중국 전통 탈 300여 점이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 교수는 “당시는 중국에 지방 연희에 관심을 가진 학자가 거의 없었고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연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북송 시대와 위진 남북조시대의 문학사에 관한 책을 각각 내기 위해 준비하는 등 왕성한 연구열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데 곁눈질하지 않고 평생 중문학만 파 왔습니다. 이번 수상도 계속 중문학계를 위해 헌신하라는 뜻으로 생각하는데, 늙은 저의 힘이 어디까지 닿을지 걱정입니다.”공적학계에서 중문학의 입지가 협소하던 1950년대부터 연구를 시작해 중국문학 연구의 토대를 닦은 대표적 중문학자다. 서울대 중문학과 학사, 석사, 박사 과정과 국립대만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줄곧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1967년 국내 최초로 서경(書經)을 완역한 이래 유학의 핵심 경전과 제자백가의 주요 고전을 현대적 해석을 담아 펴냈고 동양 고전 읽기 운동을 벌여 대중화에 기여했다. 중국의 학자들이 민간 전통 연희에 주목하기 전인 1960년대부터 탈놀이 ‘나희(儺戱)’를 비롯한 전통 가무와 잡희에 관해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냈다. 국내외에서 현대 중문학 연구의 대표서로 꼽히는 ‘중국문학사’를 1986년 저술하는 등 연구서와 번역서 70여 권을 냈다. 학술원 회원이다. ▼ ‘화학적 암 예방’ 세계적 석학… “암 발생 줄이는 게 평생목표” ▼ 과학·기술) 서영준 서울대 약대 교수“훌륭한 은사님들과 헌신적인 연구원들 덕분에 이런 큰 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학문도 패션처럼 유행이 있기 마련이지만 유행 타지 않고 30년간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해 온 끈기에 대한 격려로 생각하겠습니다.” 지난달 26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난 서영준 서울대 약대 교수(58)는 인촌상 수상의 영광을 스승과 제자들에게 돌렸다. 그는 “체내에 독성물질이 들어가면 간에서 해독 과정을 거치지만 발암물질은 오히려 독성이 강해져 ‘조물주의 실수’로 불린다”면서 “1985년 미국 매디슨 위스콘신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암 발생 연구를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화학적 암 예방(ChemoPrevention)’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힌다. 안전한 화학물질을 이용해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일탈’하는 과정을 막아 암 발생을 줄이는 게 서 교수의 목표다. 그동안의 연구 업적은 화려하다. 2003년 10월에는 암 분야 최고 저널로 꼽히는 ‘네이처 캔서 리뷰(Nature Cancer Review)’에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단독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매년 10편 이상, 총 2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인용 횟수는 1만4000회를 넘겼다. 미국 최대 온라인 의학 도서관인 ‘펍메드(PubMed)’ 검색창에 그의 영문 성인 ‘Surh(서)’를 치면 ‘Surh Young-joon’이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뜬다. 서 교수는 2011년부터 서울대에서 ‘종양미세환경 글로벌 핵심연구센터’를 이끌며 정상세포가 고장을 일으켜 암세포로 바뀌는 과정을 밝혀냈다. 서 교수는 “암은 오랜 세월 인류와 역사를 같이한 질병인 만큼 치료도 중요하지만 예방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 연구실은 ‘과학자 사관학교’로도 불린다. 2000년부터 9년 연속 ‘미국암학회’가 수여하는 ‘젊은 과학자상(Scholar-in-Training)’ 수상자를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도 중국 옌볜(延邊)대 출신 중국동포 연구원이 젊은 과학자상을 받았다. 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예측과 다른 ‘네거티브 데이터’가 나오더라도 숨기거나 실망하지 말고 이걸 ‘반전’으로 삼아 새로운 논문을 쓰라고 조언한다”면서 “스스로 실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율성을 갖춘 연구자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공적서울대 제약학과에서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발암물질이 정상세포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암세포를 만드는 과정을 처음 밝혀낸 제임스 밀러 미국 매디슨 위스콘신대 교수의 논문을 읽고 감동을 받아 무작정 손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인연이 돼 2000년 작고한 밀러 교수가 논문지도를 한 ‘마지막 제자’로 유학 생활을 시작해 199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연구원, 예일대 의대 조교수를 거쳐 1996년 서울대 약대 교수로 부임했다. 2011년에는 서 교수 연구실이 글로벌핵심선도연구센터(GCRC)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 지식창조대상, 2012년 보령암학술상, 2013년 한국 과학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2014년부터는 대한암예방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조종엽 기자 jjj@donga.com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이은택 기자 nabi@donga.com제29회 인촌상 심사위원∇교육 △위원장=권대봉 고려대 교수△위원=강상진 연세대 교수, 성기옥 세계화교육문화재단 회장, 정철영 서울대 교수∇언론·문화 △위원장=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위원=고승철 나남출판 사장, 김영나 국립박물관장, 김영석 연세대 교수∇인문·사회 △위원장=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위원=박찬욱 서울대 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과학·기술 △위원장=김병윤 KAIST 교수△위원=강현배 인하대 교수, 김기문 포스텍 교수, 노정혜 서울대 교수}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뒤 도쿄의 거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산케이신문이 2009년 펴낸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진실’이라는 책에 따르면 ‘조선인이 방화와 살인, 강간을 저질렀다’. 물론 ‘미친’ 소리다. 당시 이 같은 유언비어로 조선인 6000여 명이 일본 민간 자경단과 군대, 경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됐다. 그러나 우경화와 역사 왜곡이 진행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당시 조선인이 실제로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의 방화로 일본인 몇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등의 글이 인터넷에 무더기로 나온다. 오늘날에도 일본 극우 단체인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은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한국인을 내쫓아라” “좋은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모두 쳐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혐한 시위를 벌인다. 프리랜서 작가인 저자는 이 같은 역사의 반복에 공포를 느껴 간토대지진의 실상을 소개하는 블로그를 개설하고 책으로 묶었다. 이 책은 간토대지진을 겪은 사람들의 진술과 기록을 통해 조선인 학살 현장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책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인 인간의 얼굴을 드러낸다. 읽다 보면 평범한 인간들의 잔혹함에 좌절하게 되지만 희망이 생기는 대목도 있다. 학살의 광기로부터 조선인 이웃 2명을 지킨 마루야마 마을 주민들 이야기, 살해당한 조선인 엿장수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 맹인 안마사의 이야기가 그렇다. 저자는 학살 원인을 3·1운동 등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보고 일본인들이 느낀 공포에서 찾는다. 조선인의 분노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이 유언비어와 학살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흉악범죄의 주범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등 이주 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한국 내부에도 없지 않다. 이 역시 우리가 저질러 놓은 차별과 착취에 대한 공포의 반영이 아닐지. 책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경종을 울리는 한편 우리 내부의 편견도 돌아보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 정부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내건 슬로건이다. 근대화와 산업화 등 그간의 성과를 평가하며 앞으로 나아갈 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새로운 도약을 위해선 만만찮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동아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오피니언 리더 11명은 무엇보다 이념과 지역, 계층 등으로 인한 사회 갈등의 극복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등을 계기로 불거진 한국 사회의 다양한 갈등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앗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갈등 넘어 미래 갈등에 대비해야 상당수 응답자는 현재 한국 사회의 갈등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11명 가운데 3명은 ‘국가적 위기’ 수준이라고 우려했고 6명은 ‘위기까지는 아니나 국가 발전과 사회 통합에 상당히 악영향을 주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념과 지역, 계층, 세대 갈등을 포함한 다양한 반목이 우리 사회의 큰 ‘적(敵)’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수준의 갈등이라고 분석한 이는 2명에 그쳤다. 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연구실장은 “‘모 아니면 도’ 식의 극한적 대립 심리가 팽배한 상황”이라며 “국가 위기라고 볼 단계는 아니지만 ‘갈등’이 우리 사회를 어두운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눈에 띄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갈등의 양상이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는 의견이다. 앞으로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해소해야 할 갈등으로 11명 가운데 9명이 ‘빈부격차 심화에 따른 계층 갈등’을 꼽았다. 2명은 ‘고령화 때문에 빚어질 세대 갈등’ 해결을 1순위로 선택했다. 반면 고질적인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 해소가 중요하다고 응답한 인사는 1명도 없었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와 산업화 시기 대표적 갈등으로 꼽히던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 대신 새로운 ‘미래 갈등’의 도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산업화 이후 이른바 ‘가진 자’들이 만들어 내는 문제가 심해졌고 이 때문에 갈등이 일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라며 “서울대 역시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화합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려고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계층 갈등은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 때문에 나타날 세대 갈등이 겹쳐지면서 위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지훈상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이사장은 “급속한 고령화 때문에 현역 세대의 사회보장비용이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세대 갈등이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오피니언 리더들은 갈등 해소를 위해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한 복지제도 강화’(4명)가 가장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4명은 전반적인 ‘국민의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진강 대법원 양형위원장은 “갈등 당사자들은 그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경우가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결국 남을 인정하는 데서 갈등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안전 한국’ 위협할 기후변화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어 올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으며 국민들의 불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최근 국민안전처 조사 결과 ‘우리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국민은 20% 내외에 그쳤다. 오피니언 리더들은 30년 뒤 우리를 위협할 재난 재해 역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가장 많은 6명은 ‘기후변화에 따른 대형 풍수해나 가뭄 같은 사태’를 가장 위협적인 재난 재해로 예측했다. 문경란 서울시 인권위원장은 “현대의 자연재해는 지구온난화 같은 생태계 파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대안이 사회 전방위적으로 모색돼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사태 속에서 안전 사회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교통사고 등 일상생활 속 안전사고’(2명), ‘메르스 같은 새로운 전염병’(2명)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들이다.▼ “한국 스토리텔링 강해 영화-드라마 미래 밝다” ▼“운동선수 아닌 학생선수 육성을”문화 분야에서는 영화감독 문인 역사학자 건축가 종교인을 비롯한 관련 인사 12명에게 광복 100년이 되는 2045년 한국의 대표적 문화콘텐츠와 미디어의 모습에 대해 물었다. 먼저 ‘2045년 한국을 대표할 문화 콘텐츠’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6명)이 ‘영화와 드라마’를 꼽았다.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는 “한국은 (영화, 드라마의) 스토리텔링 구조가 다른 나라보다 강하다”라고 말했다. 문정희 한국시인협회장은 제작진의 상상력에 높은 점수를 줬고,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는 현재 문화산업 내 영화·드라마의 비중이 큰 점을 이유로 꼽았다. 영화와 드라마 다음으로는 ‘케이팝’(4명)이 대표적 콘텐츠로 꼽혔다. 지원 스님은 “스리랑카에 가봤는데, 사람들이 한국의 불국사와 다보탑은 몰라도 케이팝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서현 한양대 건축과 교수는 “한국인들은 ‘판’을 뒤집으면서 잘 노는 자질이 있는데 케이팝이 거기에 딱 들어맞는 콘텐츠”라고 말했다. ‘한글’을 꼽은 최광식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한류가 ‘4.0’으로 진화하려면 정보화와 디지털화를 이뤄야 하는데, 한글은 한국의 인터넷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처럼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화 아이템이 등장할 것”이라고 봤다. 다음으로 ‘2045년 신문과 방송 등 미래 미디어의 모습’을 묻는 질문에는 ‘모바일이 중심 매체로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 응답자가 4명으로 가장 많았다. 소설가 복거일 씨는 “스마트폰 노트북 태블릿 등 사람이 갖고 다닐 수 있는 정보처리기구가 활발히 이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과 방송의 구별이 사라지고 콘텐츠 생산 기업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본 응답자는 2명이었다. 안규철 교수는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해 배포하는 역할은 사회가 유지되는 한 필요할 것이지만 플랫폼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스포츠 분야에선 국내 양대 스포츠인 야구와 축구의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장과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의견을 들었다. 김 위원장은 30년 뒤 한국 스포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운동선수가 아닌 학생선수 육성’이 중요하다고 꼽았다. 그는 “선수들이 은퇴한 뒤에 사회에 다시 적응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어려움을 겪는다. 선수들이 비단 스포츠 분야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국민의 건강 증진’에 무게를 뒀다. 이 위원장은 “스포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는 건강한 몸과 마음에 있다”고 설명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조종엽 jjj@donga.com·양종구 기자}
KAIST 경영대의 일부 강의가 이르면 9월부터 국내 최초로 인터넷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MBA(경영학 석사)를 비롯한 석·박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KAIST 경영대 관계자는 “9월 초부터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TV를 통해 경영학 강의 2개를 방송한다”며 “경영대 재학생이 대상이지만 검토를 거친 뒤 졸업생과 일반에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계적 무료 공개 강연 테드(TED)를 비롯해 일반인과 지식을 공유하는 다시보기(VOD) 형식의 영상은 유튜브 등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강사와 불특정 다수가 인터넷 방송에서 댓글을 통해 실시간으로 질의응답하며 소통하는 것은 이번 KAIST 강의가 처음이다. 김영걸 KAIST 경영대 부학장이 고객관리(CRM), 정재민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교수가 미디어와 정보기술(IT) 분야의 최신 이슈를 강의한다. 강의별로 주중 1회(방송 요일 미정) 오후 9∼10시 방송된다. KAIST 경영대 측은 “MBA나 경영학에 관심 있는 직장인들에게 유익한 강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강의가 호응을 얻으면 그동안 캠퍼스 안에 갇혀 있던 대학 교육이 일반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아프리카TV 관계자는 “이런 형태로 대학이 인터넷에 공개 강의를 여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것”이라며 “국내 대학과 협업해 양질의 쌍방향 교육 콘텐츠를 계속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홍상수 감독의 17번째 장편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15일 폐막된 제68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표범상과 남우주연상(정재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영화감독 함춘수(정재영)가 화가 윤희정(김민희)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으며 윤여정 기주봉 최화정 등이 출연했다. 이 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대상을 받은 것은 1989년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 이어 두 번째다. 홍 감독은 2013년 ‘우리 선희’로 이 영화제의 최우수감독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9월 말 국내 개봉될 예정이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간도 참변이나 난징 대학살 등에서 민간인을 무차별로 학살한 일본 ‘황군’은 ‘악마’였다. 그러나 그게 일본군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황군의 상당수는 보통 사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일본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모습을 보여 준다. 1925년 태어난 오구마 겐지가 1944년 11월 징집돼 관동군에 배치되고, 패전 뒤 구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노역하다가 돌아온 이야기다. 오구마의 구술을 게이오기주쿠대 종합정책학부 교수인 아들이 책으로 펴냈다. 오구마는 만주 헤이룽장 성 동남부 닝안 지역의 관동군 항공통신연대에 배치됐지만 전투를 치른 적이 없고, 총 한 방 쏘지 않았다. 패전 소식을 들은 뒤에는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기뻐했지만 그를 포함한 일본군 등 약 64만 명(강제 동원 조선인 약 1만 명 포함)은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등에 분산 수용된다. 오구마는 시베리아 연방관구 치타 주의 치타 제24지구 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에서 포로 한 명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수년 뒤 귀환 때까지 그와 함께 수용된 포로 약 500명 중 45명 이상이 죽었다. 추위와 영양실조 탓이었다. 시베리아 포로의 사망률은 약 10%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시베리아 포로가 펴낸 귀환기는 주로 장교나 지식인 출신이 쓴 탓에 젊은 날이 덧없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초조감 등이 담겨 있지만 오구마는 “그냥 살아남는 데 필사적이었다”고 했다. 건장하지 않았던 몸으로 운 좋게 노역을 견뎌 낸 오구마는 1948년 8월 귀환선을 탄다. 귀향을 학수고대했던 그지만 배에 내걸린 일장기에 대한 감개는 전혀 없었다. 그는 “1945년부터 일장기를 보자기로 썼다”고 했다. 그는 “나는 전쟁을 지지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휩쓸려 간 것이다”고 입대 전의 자신을 회상했다. 군 복무는 “포로가 되기 위해 (만주에) 보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했고 패전 뒤에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전쟁 책임에 대해 쇼와 천황의 사과를 받고 싶었다”고 했다. 책은 입대 전후 오구마의 개인사를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 변동과 함께 서술한다. 전쟁 중 물자가 부족해져 궁핍해지고, 전후에는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호구책을 찾는 일본 서민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한국의 부모나 조부모 세대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전쟁과 대규모 학살은 별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르는 보통 사람들의 손으로 수행되는 것이기에 평범한 병사라고 무조건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역시 중국군이나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곳에 투입됐다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죽였을 것이다. 오구마는 1988년부터 평화를 지향하는 ‘부전(不戰) 병사의 모임’에 참여하며, 과거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시베리아 포로로 수용됐지만 일본 정부의 위로금 지급 대상에서는 배제된 조선인 오웅근 씨를 기억해 내고, 1990년 정부에서 받은 위로금 10만 엔 중 절반을 오 씨에게 보냈다. 1996년에는 오 씨와 공동으로 “일본 정부가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포로에게도 배상을 해야 한다”는 소송을 냈으나 끝내 패소했다. 저자는 “인간은 평범하게 살지만 몇 차례인가 위기를 경험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며 “아버지의 궤적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평균적인 인생행로”라고 말한다. 돌려 말했지만 평화는 힘없어 보이는 평범한 양심에서 온다는 얘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저는 ‘날조 기자’가 아닙니다. 부당한 공격에 무릎 꿇지 않겠습니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을 처음으로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57)는 13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동북아역사재단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력의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14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 ‘전쟁과 폭력의 세기의 여성을 생각하다’에 패널로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우에무라 씨는 김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기 사흘 전인 1991년 8월 11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통해 할머니의 증언을 한국 언론보다 먼저 아사히신문에 보도했다. 이후 일본 우익들로부터 끊임없는 협박과 공격을 받아 왔다. 지난해 1월 우익 성향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이 “우에무라 기자의 위안부 증언 기사는 날조”라고 보도한 뒤 협박이 더 극심해졌다고 한다. 지난해 3월 아사히신문을 퇴사한 그는 교수로 임용될 예정이던 대학에 “우에무라를 임용하지 말라”는 e메일과 협박 전화가 이어져 결국 임용이 무산됐다. 심지어 그의 열여덟 살 딸에 대한 협박도 시작됐다. 딸의 이름을 거론하며 “네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고생을 했나. 자살할 때까지 몰아 댈 수밖에 없다” 등의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고, 올 2월에는 딸이 다니는 학교에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장이 날아왔다고 한다. 요미우리나 산케이 등 보수 성향의 신문이나 혐한(嫌韓) 잡지들도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인물의 인터뷰 등을 통해 그의 기사를 왜곡된 것으로 몰아 왔다. 그는 “제 처와 장모가 한국인이어서 위안부 기사를 썼다는 등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없는 차원의 억지 공격도 있었다”고 했다. 우에무라 씨는 15일 김 할머니의 묘를 찾을 계획이다. “솔직히 가족까지 피해를 볼까 두려워 1991년 기사를 쓴 뒤에는 위안부 문제와 거리를 둬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연히 같은 기사를 쓸 것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일본 공사관에 배상을 요구하려 했다는 러시아 측 기록이 발견됐다.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범 처벌 요구 외에 일본에 대한 외교적 카드로 배상 요구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최근 분석한 1903년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의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아관파천 직후 “명성황후의 시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일본 공사관에 전달했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2월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간 거처를 옮긴 일이다. 》베베르 공사는 이 보고서에서 “아관파천 직후 조선에서 불법으로 사업을 하던 일본인 약 40명이 살해당했고, 일본 공사관은 이에 대해 금전적으로 배상 해 줄 것을 요구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의 살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달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것을 포기했다”고 기록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배상 요구가 언급된 국내외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배상 요구 방침을 일본에 전달하는 한편 대일 협상카드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1903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사절로 한국에 온 베베르 공사가 그해 4월 러시아 본국에 보낸 것으로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김 연구위원은 “베베르 공사는 표면적으로는 축하사절로 왔지만 사실은 한러 비밀 협정 체결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 과정에서 1880년부터 1903년까지 한국, 러시아, 일본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연구위원이 최근 입수해 분석한 자료 중에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신해 살아남았다”는 이른바 ‘명성황후 생존설’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됐다는 게 정설이지만 피신했다는 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3년에는 로바노프 당시 러시아 외무장관과 베베르 주한 러시아 공사로부터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독일과 영국 외교관들의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다시금 조명받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독일과 영국 외교관들에게 명성황후 생존설을 전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원래 보고 내용을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를 정리한 자료집에서 찾아냈다. 1896년 1월 2일 시페이에르 주한 러시아 공사는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한 조선인이 ‘명성황후가 살아 있고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러시아 공사관에 은신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알렸다”는 내용을 비밀 전문으로 보고했다. 또 “고종은 아직 (황후가 생존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적었다. 이 전문에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황후의 생존설과 관련된 소식을 알린 조선인이 누구이고 신빙성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더구나 이 조선인은 행방불명됐다. 시페이에르 공사는 “고종이 자신과 베베르에게 황후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조선인을 찾고 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며칠 전 이범진을 통해 알려왔다. 이 조선인은 행방불명됐다”고 보고했다. 김 연구위원은 “명성황후 생존설을 뒷받침한다기보다 생존설이 어디서 비롯돼 어떻게 증폭됐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라고 평가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일본 정부는 일본군 등 126만 위의 유골을 해외에서 수습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수습해 온 유골은 고작 442위다. 일본이 2850배로 많다. 이 격차는 어디서 왔을까. 국내총생산(GDP)은 일본이 한국의 3배 정도지만 경제력 차이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한국이 ‘먹고사는 일 말고’ 다른 데 눈을 돌릴 경제적 여유가 생긴 것이 얼마 안 된 이유도 있지만 적어도 1980년대에는 유골 봉환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했어야 했다. 2004년 특별법이 제정돼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가 발족하기 전까지 한국 정부는 수십만의 해외 강제동원 사망자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선 적이 없다. 그 격차는 결국 의지와 철학의 차이다. 일본은 후생성 원호국에 업무를 전담시켜 1967년부터 조사단을 300차례 넘게 해외에 파견했다. 미국은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re not forgotten)’는 기치 아래 450명의 전문 인력이 전쟁·분쟁 지역에서 사망한 군인 등 미국인 유해를 끝까지 추적해 안장한다. 한국은 어떨까.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대일항쟁기 위원회)가 진상규명위의 뒤를 이어 유골 실태 조사 및 봉환 업무를 하고 있지만 유골 조사 업무는 단 4명이 담당한다. 이 위원회가 강제동원 피해조사, 희생자 및 유족 여부 심사와 보상을 모두 맡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위원회 조직(78명)과 예산(연 사업비 76억 원)이 너무 작다. 물론 위원회도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강제동원 피해 관련 민간단체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할 테다. 문제는 이 위원회마저 한시 조직이어서 법률에 따라 올해 말이면 활동을 종료한다는 것. 그나마 6월 25일 활동 종료를 닷새 앞두고 6개월 연장안이 국회를 통과한 덕에 연말까지 유지될 예정이다. 내년부터는 업무를 행정자치부 등이 잇게 되지만 행자부 1개과(약 5명)와 공식 권한이 없는 민간 재단이 맡을 것으로 전망돼 외교 협력이 필요한 유골 봉환에 얼마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제 걸음마 단계인 한국의 일제 강제동원 사망자 유골 봉환 사업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대일항쟁기 위원회를 상설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국이 일본 정부의 과거사 왜곡을 비판할 때 “자국민 유골도 방치하는 나라가 말이 많다”며 국제사회가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26만 위(位)와 442위.’ 일본과 한국 정부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각각 해외에서 수습한 자국인 사망자 유골의 수다. 일제강점기 피해 조사 및 유골 봉환을 담당해 온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자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11일 현재까지 해외에서 봉환한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유골은 일본에서 423위, 사할린에서 19위가 전부다. 이는 일본이 수습한 자국민 유골의 0.04%도 안 되는 수다. 학계는 일제에 의해 군인과 군무원, 노무자 등으로 강제 동원됐다가 해외에서 숨진 한국인 사망자를 최대 4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 중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 유골은 정부 주도로 봉환한 442위를 포함해 약 9000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합국 총사령부, 민간, 일본 정부에 의해 봉환된 유골을 더한 수로 이 중 5000여 위는 한국인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에도 42만여 명의 유골은 시베리아 동토, 태평양의 섬에서 흙이 돼 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유골 봉환과는 별개로 유골 소재에 대한 실태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대일항쟁기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한국인으로 확인된 해외 소재 유골은 1만5000여 위에 불과하다. 중국과 미얀마를 비롯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세력권에 흩어져 있을 유골 조사는 시작도 못 했다. 대일항쟁기위원회 관계자는 “한시 조직인 우리 위원회가 올해 말 활동을 종료한 이후에는 유골 조사와 봉환 업무를 담당할 곳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1967년부터 300차례에 걸쳐 해외에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자국인 유골을 꾸준히 수습해 왔다. 최근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전략적인 요충지로 일본과 사이판 사이에 있는 이오(硫黃) 섬의 동굴 조사를 위해 로봇까지 투입하는 등 적극 나서고 있다. 이오 섬에서는 조선인 137명도 사망했다. 대일항쟁기위원회 관계자는 “이오 섬의 137명 모두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합사돼 있다”며 “일본이 유해 발굴을 자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만큼 우리 정부도 실태 조사와 유골 소재 국가와의 봉환 협의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제30수용소 제1·14지부. 이와모토 소켄, 마키야마 도료, 가나우미 숀코, 나가노 가쿠치이, 고 헤이키, 가타쿠마 잇키, 다카시마 쇼가푸. 이상 7명. 탈츠이 역 7km 앞 유주락 지구 매장.” 북위 51.51도, 동경 107.51도. 시베리아에 있는 러시아 자치공화국의 하나인 부랴트 공화국 내 모처에 묻힌 사람들의 이름이다. 광복 70주년이 된 오늘도 이들은 일본 이름으로 기록돼 있지만 조선인이다. 이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 강제 동원됐다 시베리아로 끌려간 1만여 명의 한국인 중 일부다. ‘대일 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자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대일항쟁기위원회)에 따르면 이처럼 강제 동원됐다 해외에서 사망한 한국인은 43만 명에 이른다. 시베리아의 경우 군인과 군무원 등으로 일본군에 강제 동원됐던 이들이 소련에 포로로 억류됐다. 대부분은 한국과 북한 등으로 귀환했지만 당시 포로의 사망률(약 10%)을 감안할 때 수백 명이 사망해 현지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이와모토 소켄’ 등 7명은 대략적인 매장지 정보라도 있는 사례다. 이들을 포함해 자국인 포로 사망자를 조사하던 일본 후생노동성이 2009년 조선인으로 확인해 한국에 정보를 넘겨준 12명을 빼면 유골의 매장지 정보가 아예 없다. 사망자 명단도 1991년 소련이 일본에 4만 명의 명부를 전달했지만 한국은 받지 못했다. 시베리아에 흩어져 묻힌 사망자의 매장지 확인과 유골 수습은 점점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생환자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 회원들이 잇따라 타계해 매장지 확인이 어려워지고, 이들 지역이 급속히 산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지난해 시베리아에 억류됐다 귀환한 일본인 포로들에 관한 기록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대일항쟁기위원회는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 희생자들은 묻힌 곳도 모르는데 일본은 역사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태평양 지역의 유골 봉환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태평양 지역 유해를 발굴해 화장한 뒤 도쿄 무명 전몰자 묘역에 봉안하는 과정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등도 포함됐기 때문에 이를 가려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뒤늦게 한국인 유족들이 발굴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에 따르면 지난해 미군기지가 있는 마셜 제도 콰절린 섬에서 태풍으로 일본군 유해가 드러났지만 일본 측은 한국인이 포함됐는지에 대한 확인을 거부했다. 한국인 유족들의 DNA 검사 요청을 거절하면서 “한국인이 포함돼 있다면 아예 수습하지 않고, 현지에 그대로 두겠다”는 황당한 답변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몽골, 시베리아로 유해 조사 대상지를 확대하는 등 자국민 유골 발굴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한국의 공동 조사 요구는 묵살하고 있다. 2012년 대일항쟁기위원회가 이오(硫黃) 섬 유해 발굴과 조사 과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의 묵묵부답으로 무산됐다. 이처럼 해외 유골 봉환이 걸음마 단계에 머무르는 것은 한국 정부의 의지 부족이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 대일항쟁기위원회의 출범 전에는 광복 60년이 가깝도록 우리 정부가 해외 유골 실태 조사를 한 적이 없다. 정부가 일본 과거사 문제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할 뿐 유골 봉환 등은 ‘관심 밖’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참여정부 시절 합의된 일본 내 한국인 노무 동원자 유골 봉환이 그 예다. 2010년 중 1차 봉환 실시에 양국 정부의 의견이 접근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악영향을 끼쳐 봉환이 무산됐고,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김민철 보추협 집행위원장은 “보추협이 ‘유해 발굴에 한국 유족이 참여해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면 ‘한국 정부에 물어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며 “그러나 우리 정부는 ‘열심히 하겠다’는 하나마나한 말뿐 일본 정부와 구체적 협상을 진전시키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은 전쟁포로·실종자 합동확인사령부(JPAC)를 구성하고 연간 1억4000만∼1억5000만 달러의 예산과 전문 인력 450명을 투입하고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설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1월 어느 날 경기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아버지 이낙호 씨(1914년생)와 함께 있던 당시 일곱 살 이명구 씨(78) 집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그는 10리(4km) 밖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무작정 뛰었다. 아버지는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숨어 다니다 지친 끝에 할머니에게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명구 씨는 ‘아버지를 못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할머니와 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끌려가고 없었다. “그렇게 생이별을 했습니다.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고 울부짖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끌려간 아버지로부터는 편지 한 통 없었다. 가장이 없는 집안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이듬해 8월 광복을 맞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1946년 어느 가을날 새벽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병으로 돌아가셨다. “다섯 살 터울 남동생마저 얼마 뒤 굶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울던 동생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 씨는 “아버지가 일본에 강제로 징용된 뒤 4년 사이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며 “일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연탄공장 노동자와 학교 등사실 직원 등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살았고, 1997년에야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일제가 만든 서류에는 ‘마츠모토 라쿠시노기(松本落鎬·아버지의 일본 이름). 육군 군속. 제3선박운송사령부 소속. 쇼와(昭和) 20년(1945년) 4월 12일 남양 군도(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일대) 팔라우에서 전병사(戰病死)’라고만 적혀 있었다. 남양 군도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수천 명은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동원돼 혹사당했고, 총알받이로 내몰리며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폭격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 씨는 지금도 아버지의 사망일이 아니라 아버지가 집에서 끌려가던 날 추도 예배를 올린다. 일본이 만든 서류의 사망일자와 사망원인을 믿을 수 없어서다. 그는 부친의 위패를 충남 천안시 망향동산에 모셨지만 일본 야스쿠니신사에도 위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한국인 야스쿠니 합사 취소 소송에도 참여하고 있다. “없는 소작 살림에도 친구들은 못 가진 연필하고 크레용을 사다 주시던 아버지셨어요. 유골이라도 한번 만져 봤으면 이 한이 조금이나마 덜어질까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복 70주년과 한일수교 50년을 맞아 한국 중견 학자 700여 명은 10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일관계에서 올바른 과거 청산과 참다운 화해를 열망하는 한국학자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2015년은 한일 양국이 식민 지배의 아픈 과거를 극복하고 우호 관계를 쌓아야 할 시기임에도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며 “이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양국 정부가 식민 지배 시기 잔혹한 행위들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학자들은 “유엔 총회가 2005년에 채택한 인권피해자권리장전은 인권침해사실의 인정과 사죄, 피해구제,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혁, 역사기록 등을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이러한 원칙을 반영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날 선언에는 강상현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20년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에 크게 이긴 봉오동(鳳梧洞) 전투 당시 독립군 부대의 배치 상황을 그린 전투도가 10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지도는 전투에 참가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박승길 선생(신민단 사령·1893∼1960)이 작성한 것이다. 봉오동 마을에 들어선 일본군 부대를 포위한 홍범도 부대와 독군부, 신민단, 의군부 등의 위치, 일본군의 침투로와 도주로, 격전지 등이 지도에 표시돼 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吉林) 성 왕칭(汪淸) 현 봉오동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대패시킨 전투다. 이 전투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국장과 육군 주만 육군참의부 참의장, 광복군 사령부 군정 겸 군수국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승학 선생의 증손인 김병기 대한독립운동 총사 편찬위원장이 보관해온 자료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하면서 공개됐다. 김 편찬위원장은 “이 지도는 박승길 선생이 1945년 광복 이후 저술했던 ‘간도 독립군 약사’(미출간)에 부록으로 첨부한 것을 증조부가 보관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기존에 알려진 봉오동 전투도는 일본군이 자신들의 시각에서 만든 것으로 독립군 부대의 배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며 “이번 지도는 봉오동 마을을 둘러싼 사방의 산줄기에 독립군 각 부대가 어떻게 배치되고 싸웠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김 편찬위원장은 또 순국의사를 사망 원인에 따라 이름과 약력을 기록한 순국의사명부초, 만주지역 각 독립운동단체의 약사를 기록한 한국독립운동혈사 재료 초안,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김승학 선생에게 광복군 국내 군부 설치를 위임하는 광복군 국내 제2지대장 위임장,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 국민장 행사 요령 등도 기탁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古)지도는 주로 동해·일본해 표기나 독도의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서 주목받을 때가 많다. 고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근대적 조사와 측량술이 발달하기 이전 지도를 만들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을 자신들의 세계관에 의존해 표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점의 서양 고지도에서 당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가 어떻게 표시됐는지를 분석했다. 중세의 세계지도를 라틴어로 ‘마파문디(Mappa Mundi)’라고 한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경이다. 중세인들은 에덴동산이 지구상에 실재한다고 보고 지도에도 표시했다. 지도 제작자들은 창세기의 ‘동방의 에덴’이라는 표현에 따라 인도 동쪽의 섬이나 인도 동쪽의 내륙에 지상낙원을 표시했다. 간혹 중국의 동쪽에 위치시킨 경우도 있다. 12세기 많이 보급됐던 이시도루스의 ‘어원론’에 수록된 지도에는 인도 동쪽과 중국 북쪽에 해당하는 위치에 ‘Paradisus(낙원)’가 쓰여 있다. 저자는 “굳이 이 장소를 지구상에서 찾는다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이라고 말한다. 반면 한반도로 보이는 지역을 성경에서 종말을 야기하는 악인들인 ‘곡과 마곡(Gog and Magog)’의 땅으로 표기한 지도도 있다. 서양인들은 곡과 마곡을 스키타이족, 투르크족, 몽골족 등 유럽인과 대립하는 민족으로 이해했는데 1457년 제작된 제노아 지도는 중국 북쪽에 위치한 반도에 곡과 마곡을 그렸다. 결국 서양 고지도에서 한반도 주변지역은 에덴동산에 근접한 곳이거나 종말의 민족이 사는 땅으로 표현된 셈이다. 제주도가 괴물 인간이 사는 곳으로 표시된 지도도 흥미롭다. ‘사티르(Satyr)’라는 괴물 인간은 로마 관료 플리니우스(23∼79)가 ‘박물지’에서 기술한 이래 많은 중세 지도에 등장했다.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리학’에서 사티르가 사는 땅 ‘사티로룸(Satyrorum)’을 표시한 것에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이후에는 동아시아에 사티르를 그려 넣었다. 17세기 프랑스 지리학자 상송은 1672년 출판된 지도 ‘옛날의 아시아’에서 제주도를 사티로룸으로 표기했다. 저자는 “근대적 삼각측량이 시작된 이후에도 과학적 방식에 따라 그린 지역과 과거 전설에 의거한 지역이 혼재했다”며 “유럽인은 미지의 장소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도에 그린 뒤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고 말했다. 사실 1561년 이전 서양 고지도에서 한반도는 구별해 낼 수 없거나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등장한다. 한반도를 반도로 그린 최초의 서양 고지도는 1561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벨류가 그린 해도다. 한반도 남단에는 ‘PVTVRVS’라고 표기돼 있다. 저자는 이를 ‘끝’이라는 의미의 ‘PUNTUS’로 봤다. 한반도 아래에는 제주도가 16∼17세기 서양인들이 불렀던 ‘도적의 섬’과 ‘코레 섬(I. de core)’이라는 명칭으로 표시됐다. 부산대 지리교육과 교수로 한국지도학회장을 지낸 저자는 고지도를 동해·일본해 등 특정 지명 표기나 간도 등의 영유권 문제와 연결시키는 데 회의적이다. 저자는 “울릉도·독도를 조선과 일본의 영토로 각각 표기한 서양 고지도가 발견되는 것은 당시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갖지 못한 지도 제작자들이 어느 나라의 영토냐에 신경 쓰지 않고 임의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라며 “서양 고지도를 영토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광복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조명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국내외에서 잇따라 열린다. 먼저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이 항일운동사의 연구 성과를 나누는 국제학술회의 2개가 사흘 간격으로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국근현대사학회는 국가보훈처,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후원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 세계문명중심과 함께 5일 푸단대에서 ‘광복 70년 계기 한중 공동 국제 독립운동사 학술회의’를 연다. 양국의 공동 항일투쟁이 주제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상하이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상하이를 망국 이후 재건의 돌파구를 찾은 곳이면서 3·1운동의 진원지이자 최초의 민주공화정을 편 장소로 봤다. 배경한 신라대 교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신해혁명(1911년)을 통해 중국 혁명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상하이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됐고, 공화제를 수용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한다. 이 밖에 ‘근대 중국인의 한국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5·4운동’(장슈위·姜秀玉 연변대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한국 독립운동과 중국공산당’(쑨커즈·孫科志 푸단대 교수) 등의 발제가 이어진다. 한국근현대사학회는 “한중 공동의 역사적 경험이 미래의 한중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도 중국 연변대, 칭화(淸華)대와 공동으로 8, 9일 연변대에서 ‘광복 7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항일운동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 ‘세계사를 통하여 본 21세기 동아시아의 발전과 협력’이 주제다. 한국에서는 한상도 건국대 교수,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정은 3·1운동 기념사업회장, 이동언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 리팅장(李廷江) 칭화대 교수, 선즈화(沈志華) 화둥(華東)사범대 교수, 쓰치다 아키오(土田哲夫) 일본 주오(中央)대 교수, 진시위 미국 레이크 포리스트대 교수 등 해외 연구자도 참석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해외 학계는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 이전부터 한국인들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의병전쟁과 3·1운동, 독립군 활동 등 일제에 맞서 계속 투쟁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며 “이를 알리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조명하는 국내 학술대회도 열린다.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는 ‘역사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해방’을 주제로 ‘해방 70주년 기념 공동학술대회’를 13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연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기조발제를 하고 ‘민주주의의 역사화’ ‘역사학의 민주화’를 소재로 세션 1, 2가 열린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광복 이후 역사 교육의 변화 과정을 조명한다. 김 교수는 “해방 직후 민주주의의 열풍이 불어올 때 역사 교육도 민주주의적 교육을 모색했지만 분단과 독재의 시절에는 국가주의 역사 교육이 만개했다”며 “민주주의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역사 교육 ‘안’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제기, 좌절, 부활의 과정을 고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성립된 ‘87년 체제’의 한계와 극복을 논할 예정이다. 이 밖에 ‘해방과 민주주의의 열린 공간’(임종명 전남대 교수)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민주주의’(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등이 발표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