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봄가을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을 것 같은 시절입니다. 유난히 춥고 눈 많은 올겨울, 반가운 친구처럼 찾아온 책이 있습니다. 책 속 겨울은 그저 지나가는 계절이 아닙니다. 반갑게 만났다 헤어지는 친구이며, 떠났다가도 세 계절 지나 다시 만날 친구입니다. 물론 겨울을 친구 삼아 놀던 아이는 점점 자라겠지만요.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겨울이 아이와 함께 걷고 있습니다. 아이 손엔 방패연, 뒤서거니 앞서거니 강아지도 따라 갑니다. 아이는 겨울이 안내하는 들판을 지나 숲을 찾고 언덕에 올라 바다와 마을을 봅니다. 겨울이 불러다 준 바람을 타고 방패연은 하늘 높이 오릅니다. 나붓나붓 내려 쌓인 눈 위로 썰매도 타고, 챙챙 고드름 칼싸움도 합니다. 강아지도 신이 나서 뛰어놉니다. 겨울과 아이가 눈사람을 만듭니다. 둘은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어요. 더, 더 놀고만 싶은 아이는 새로 사귄 친구를 자기 집 안으로 초대합니다. 하지만 겨울은 철모르는 친구가 아닙니다. 내일 또 만나 놀자며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내지요. 한밤중에 자다 깬 아이는 달빛 아래 온통 반짝이는 겨울과 희고 고요한 세상을 봅니다. 겨울은 생각만큼 빨리 떠나진 않을 것 같았지요. 2002년 ‘가을을 만났어요’가 출간되었을 때 아, 이건 사계절 시리즈로 나오겠거니 했지만 10년이 다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10년, 잊을 만한 때 이 책 ‘겨울을 만났어요’가 나왔습니다. ‘그렇지! 이건 시리즈였어!’ 내심 반가웠답니다. 글은 가을과 마찬가지로 이미애 작가가 썼습니다. 조금 긴 한 편의 시와 같은 글입니다. 겨울이라는 친구의 서늘한 눈빛과 짓궂은 장난기를 노련한 그림 작가 이종미가 차분한 색감과 풍부한 앵글로 벼려냈습니다. 겨울 이야기지만 따뜻합니다. 난방이 충분해 한겨울 칼바람이 아프기만 한 아이들은 진짜 겨울을 만날 기회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겐 충분한 공감이 될 것입니다. 떠나보내기 전에 우리가 잠시 잊었던 그 ‘겨울’을 만나세요. 김혜진 어린이도서평론가}

에너지와 국제정치, 지정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대니얼 예긴은 20년 전 ‘황금의 샘(The Prize)’이라는 책으로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은 바 있는 에너지 미래학자다. 60대 후반 원숙함의 경지에 접어든 저자의 신작(원제 ‘The Quest’)은 역시 문제를 보는 깊이와 넓이에서 정점에 이른 석학의 면모가 엿보인다. 하지만 원숙함보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저자가 여전히 에너지 분야의 최전선에서 상충된 가치를 지닌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명쾌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견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가령 석유 문제와 관련해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닌 그는 이 책에서 석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의식의 산물인 ‘피크 오일(Peak Oil)’ 이론의 한계와 회피 방안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피크 오일이란 석유 생산의 정점을 의미하며, 동시에 석유 생산의 감소가 시작되는 지점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에너지 학자들 사이에서 그 존재 여부에 대한 많은 논란을 야기할 뿐 아니라 기업전략과 국가정책 형성에서 혼란과 오류의 근원이 되어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과거 주장을 번복하면서 지금은 ‘피크 오일’ 이론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대신 그는 ‘고원(高原·plateau) 이론’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이 이론은 당분간 석유 생산이 늘어날 것이며, 언젠가 그 생산이 정점에 달하더라도 마치 고원 지대처럼 상당 기간 평탄면을 유지하다가 감소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세계의 주목을 끈 바 있는 셰일가스(퇴적암인 셰일층에 매장돼 있는 천연가스)와 전기차, 풍력,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 등에 대해서도 저자는 현황을 설명하고, 논쟁적인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역시 ‘에너지, 안보, 그리고 현대 세계의 재편’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의 미덕은 에너지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포괄적인 설명과 개별 사실들의 역동적인 네트워킹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에너지의 위기라고 하면 자원에 대한 물리적 고갈을 떠올린다. 특히 화석연료에 관한 전통적인 위기 관념에서 이러한 통념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에너지의 위기라는 관념 자체를 포괄적이고 본질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인류가 경험했던 에너지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물리적 위기’가 아니라 ‘지상의 위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가 말하는 지상의 위험이란 에너지 자원을 둘러싼 다양한 지정학적 변수들을 일컫는 것이다. 1, 2차 오일쇼크나 걸프 전쟁을 떠올려 보면 저자의 관점은 쉽게 이해된다. 또한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에너지 자원이 국제 금융 시장에서 파생상품의 주된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도 지상의 위험에 해당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에너지 자원의 물리적 위기는 기술의 혁신을 통해 줄곧 예기치 않게(기술 혁신을 주도한 사람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원대한 야망은 결코 예기치 않은 것이라 할 수 없지만) 해결됐으며, 최근에 천연가스 분야에서 ‘진정한 혁신’으로 평가되는 셰일가스의 경우도 물리적 위기에 대한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석유의 역사를 설명하고 셰일가스의 현황을 분석했으며, 재생에너지의 미래를 조망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에너지 자원을 말하고 있다. 바로 ‘에너지 이용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에너지 자원이다. 그 어떤 에너지 자원보다 중요하고 생태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에너지 자원은 바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는 생활 방식과 기술이라는 점을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가치관의 변화와 기술 혁신의 진정한 융합을 의미하는 이용 효율성 개념은 극적 반전 효과를 거두며 둔중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올겨울 유난히 추운 날이 이어지고 있다. 연일 정전 위험과 석유 값 상승을 경고하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우리는 효율성이라는 에너지 자원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최기련 아주대 에너지학과 교수}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 쪽이었다. 시위대가 운집해 있던 그곳에서 은퇴한 약사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아테네에 도착해 공항버스에서 막 짐을 내리려는 순간, 아테네 민주주의 심장인 신타그마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시골의사’란 필명으로 경제전문가 작가 방송인으로 활약해온 박경철 씨(49·안동신세계연합의원 원장)가 그리스 문명의 현장을 답사한 책을 펴냈다. 안철수 전 대선후보와 전국을 순회하며 ‘청춘콘서트’를 했던 그는 2011년 겨울부터 그리스, 터키, 스페인, 이탈리아, 이집트 등을 떠돌았다. 그의 책은 10권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리스에 대해 두 가지 관심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신화, 올림포스, 하얀 대리석의 나라라는 몽환적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은 비탄과 고통의 나라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 속에는 엄청난 공백이 있습니다.” 그의 책은 하얀 대리석 돌무더기로 남아 있는 신전이 화려한 빛깔로 채색돼 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비잔틴 시대, 19세기 터키 지배, 20세기 독립전쟁, 최근의 경제위기까지 그리스의 역사를 넘나들며 그리스 문명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간다. 그는 지난해 여름 그리스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법안이 통과되던 날에도 그리스 국회의사당 앞 10만여 명의 시위대 중에 맨 앞줄에 서 있었다. 그는 “외신에서 폭동사태를 묘사한 ‘불타는 그리스’의 이미지와는 달랐다”고 기억했다. 수천 년 이어져온 그리스의 ‘공동체 정신’이 위기 속에서도 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해발 5000m가 넘는 수백 개의 산 속에 200여 개의 폴리스 공동체가 발전해온 나라입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아버지가 일하는 올리브 농장, 친구의 레스토랑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나의 그리스식 웨딩’에서 보듯 그리스에는 지금도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흔해요. 그리스는 경제위기 속에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낮을 정도로 개인의 고립무원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어요.” 박 씨는 이런 그리스인의 태도를 폭넓은 수용성이라는 그리스 문명의 본질에서 찾았다. 20세기 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미국 중국처럼 세계를 힘으로 제패하는 패권주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그리스는 다르다는 얘기였다. “그리스도 지중해를 중심으로 ‘마그나 그라키아’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건설했어요. 그러나 착취와 약탈 대신 문명의 교류를 추구했어요.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을 점령한 후 그리스인의 군복을 벗고 페르시아 옷을 입을 정도였죠. 우리나라까지 전파된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는 착취와 약탈로 이룰 수 있는 문화가 아닙니다. 21세기형 ‘융합과 수용’의 문화지요.” 박 씨는 지난 대선에서 벌어진 세대 및 이념갈등에 대해 “조급하게 비난하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의 선택을 이해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마음을 키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에서는 세대갈등이 거의 없어요. 윗세대는 지혜와 문화를 전달해주는 스승으로 존중되죠. 그리스는 어릴 적부터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배웁니다. 반면 우리는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요. 타인을 자꾸만 경쟁상대로 보니까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죠. 넘어진 사람에게 손길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승화’시켜 주는 적극적인 공동체 의식이 필요한 때입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안녕하세요. 제 아버님께서 주신 한문 액자가 집에 걸려 있지만 글 내용을 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딸들과 아내에게 설명해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철범 씨·59) 결혼하면서 받은 액자,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병풍과 족보…. 걸어놓고 바라보는 것까지는 좋지만 정작 그 내용을 모를 때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한문고전 자문서비스’가 인기를 얻고 있다. 2008년 시작된 이 서비스는 매년 1000여 건씩 의뢰가 들어오다 지난해에는 1600여 건으로 크게 늘었다. 번역원은 일반인이 글씨를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ask.itkc.or.kr)으로 보내면 번역해준다. 두세 쪽 정도는 무료이고 양이 많으면 약간의 수수료를 받는다. 지난해 가을 광주에 사는 채영옥 씨(73)는 “고향인 담양의 효자각에 걸려 있는 18대조 할아버지의 효행 내용을 알고 싶다”며 ‘효자평강채공정려기(孝子平康蔡公旌閭記)’라는 제목의 현판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함께 부모의 묘를 지키던 호랑이가 꿈에 나타나 구해달라고 해 순창 범칫말에 가서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구해줬다’는 내용이었다. 번역원은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조선 중종 때 관련 기록도 찾아 보내줬다. 벼루 도자기 같은 일상용품에 새겨진 글씨를 알고 싶다는 내용도 많다. 한 시민이 보내 온 밥그릇 뚜껑에는 ‘부(富) 귀(貴) 다남(多男)’이란 글자가 있었다. 번역원은 “밥을 먹으면서도 ‘부자 되고, 높은 자리 오르고, 자식 많이 낳기’를 기원한 조상들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퇴계 이황의 친필, 세종시대 과거급제 합격증처럼 문화재급 보물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다. 노성두 고전번역원 연구원(50)은 “소장품의 진품 여부는 사진을 통해 알 수 없지만 일상 속에서 고전의 향기를 찾도록 도와주는 일은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프랑스 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은 백만장자 장애인과 그를 돌보는 흑인 청년의 유쾌한 우정을 그렸다. 어느 날 백만장자가 흰 캔버스에 빨간색 물감이 흩뿌려진 작품을 수만 유로에 사들이는 걸 보고, 흑인 청년은 집으로 돌아와 파란색 물감으로 대충 붓질해 직접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촉망받는 현대작가의 작품’으로 포장돼 또 다른 부자에게 고가에 팔려나간다. 숙련된 기교보다는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현대미술을 풍자한 영화장면이다. 이처럼 컴퓨터 기술과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프로를 위협하는 아마추어가 곳곳에서 생겨난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합성한 ‘프로추어(Proteur)’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다. 최근 가요계에서도 이러한 논쟁이 뜨겁다. MBC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3개월 동안 컴퓨터로 작곡을 배운 개그맨 박명수가 작곡하고 정형돈이 부른 ‘강북멋쟁이’가 소녀시대, 백지영 같은 톱가수들을 제치고 음원차트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가요계는 이러한 대중의 반응에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방송사의 인기프로그램에 의한 음원시장 교란이 한류의 경쟁력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가요계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무엇보다 대중이 선택한 결과를 가요계가 무슨 근거로 ‘값싼 취향’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음악성이 높다고 해서 꼭 유행가가 되는 건 아니다. 유튜브에서는 벌써 ‘강북멋쟁이’를 패러디한 UCC 비디오가 넘쳐난다. 박명수는 본의 아니게 ‘강북멋쟁이’를 통해 기존 가요계의 권위를 깨부수는 통쾌한 풍자에 성공했다. 그는 반복되는 리듬, 일렉트릭 사운드, 후크송 후렴구를 컴퓨터로 배합해 만든 ‘인스턴트 음악’쯤은 개그맨도 몇 주 만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공장처럼 찍어내는 천편일률적인 댄스가요 시장을 이끌어 온 대형 기획사들은 외부 탓을 하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대중의 자연스러운 선택을 비난하는 시각은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 이후 일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이런 천박한 수준의 국민들이 정말 싫다” “이민가고 싶다”는 글이 쏟아졌다. 영화 ‘레미제라블’의 인기는 “선거 후 집단 우울증에 빠진 48%에 대한 위로”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대선 결과를 놓고 원인을 분석하거나 스스로를 성찰하기보다 아직도 재검표 주장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복잡계 경제학자인 존 캐스티는 ‘대중의 직관’(반비)이란 책에서 “전문가들의 합리적 예측보다는 대중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신념이나 느낌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더 정확하게 바라본다”고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스마트 대중’의 시대, 프로나 엘리트가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는 시각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 혹시 식민지 시대 일제가 “민도(民度)가 뒤떨어진 조선 민중”이라고 폄훼한 시각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려는 데 따른 영토분쟁은 17세기에도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잘 대응했어요. 이는 ‘죽도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68·사진)가 조선 숙종 재임기인 17세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 쓰시마(對馬) 현의 침탈계획 전모를 담은 문서총집 ‘죽도기사(竹島紀事·한국학술정보)’ 5권을 13권으로 편역해 냈다. ‘죽도기사’에는 조선인 어부 안용복 납치사건을 계기로 쓰시마 현이 울릉도와 독도의 영토문제를 제기했던 1693∼1699년 조선과 교류한 외교문서, 내부 작전회의, 통역관 회의 내용이 모두 들어 있다. 당시 조선은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근거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증명했고, 에도 막부는 결국 “울릉도(독도)에는 일본인이 사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취한 것도 아니므로 일본인이 건너다니면 안 된다”는 ‘다케시마도해금지령’을 내렸다. “죽도기사는 17세기 말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활동한 내용을 날짜별로 기록한 대단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당시 일본인의 독도에 대한 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1차 자료지요.”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7∼8세기 일본의 고대사를 주로 연구해온 권 교수는 2006년부터 17세기 독도와 관련된 일본의 고문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 자료들은 행서나 초서로 돼 있어 국내에는 제대로 번역돼 소개되지 못했다. 권 교수는 일본의 재야사학자 오니시 도시테루(大西俊輝·67) 박사와 3년간 협업한 끝에 ‘죽도기사’를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로 편역 출간했다. 그는 “한국 학자들은 일본 사료 전체를 읽기보다는 일본 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만 해독한 자료나 양심적인 일본 학자들이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러다 보니 전체 문맥과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하고, 일본 학자들로부터 일본 자료를 보지 않는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권 교수는 “일본의 사료를 잘 분석해보면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모순되는 논리를 드러내는 대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법적인 논리로 풀려는 이유는 국제법 논쟁에서는 양측 당사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상황논리를 잘 전개하면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도는 기본적으로 역사문제입니다. 사료를 통해 역사적 정통성을 밝혀내면 한국 땅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음모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하드커버로 된 두툼한 경영학 책이 하룻밤 새 읽혔다. 스토리의 힘이었다. 이 책에는 숫자나 도표, 어려운 개념용어 대신 100편이 넘는 스토리가 등장한다. 스토리는 단순한 ‘사례’가 아니다. 일정한 서사구조를 갖추고 감동과 은유, 반전과 놀라움을 통해 마지막 순간에 깨달음을 주는 내러티브다. 스토리텔링은 인류 역사에서 리더십의 요체였다. 고대의 샤먼부터 중세의 음유시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영웅 전설까지….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청중이 얼마나 잘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를 위해 노래의 리듬, 시의 운율, 이야기 구조가 활용됐다. 그러나 요즘엔 이야기의 자리를 공식 보고서, 메모, 정책 매뉴얼이 대신하고 있다. 회의에선 얼마나 따분하고, 졸리고, 감동 없는 말들이 오고 가는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당장 스토리텔링을 시작하라’는 게 이 책의 조언이다. 저자는 글로벌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에서 20년간 근무한 리더십 및 커뮤니케이션 교육 전문가. 그는 최고경영자(CEO) 앞에서의 첫 프레젠테이션 경험을 들려준다. 그는 심혈을 다해 자료를 준비했지만 앨런 래플리 P&G 회장은 발표를 듣는 20분간 스크린을 등지고 앉아 한 번도 슬라이드 화면을 보지 않았다. 대신 발표자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는 깨달았다. “회장은 중요한 것은 내 입에서 나오지, 스크린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자가 말하는 스토리텔링이란 공식회의에서건 복도에서의 잡담이건, 아니면 수백 명 앞에서 하는 연설이건 일대일 토론이건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책에는 스토리를 통해 어떻게 변화를 위한 비전을 수립하고, 동기와 영감을 주며, 기업문화를 바꿔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컨설턴트를 지망하는 대학생들이 지방법원장으로부터 과제를 의뢰받았다. 배심원단의 심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해 달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조사 끝에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인 배심원 심의실에서는 상좌에 앉은 배심원이 대화를 지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생들은 배심원들이 둥근 테이블에 앉아야 활발한 토론과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조사 결과를 본 지방법원장은 만족해하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모든 법원에 내렸다. ‘즉시 배심원실에 있는 둥근 테이블을 모두 제거하라. 그 자리에 직사각형 테이블을 놓으라.’” 이 스토리는 반전의 결말로 끝난다. 법원장의 진짜 목적은 배심원들의 심의 과정이 활기를 띠지 못하도록 해 재판 심리가 지연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은 그해 리포트 점수로 A를 받았지만, 자신들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신입 조사원들에게 이 스토리를 말하며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전 명확한 ‘목표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친다”고 말한다. 백 마디의 지침보다 스토리 한 편은 잊히지 않는 생생한 교훈을 던져준다. 스토리텔링은 일상생활에서도 요긴한 기술이다. 저자는 스토리텔링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나만의 스토리를 수집하라’고 조언한다. 책이나 인터넷에서도 스토리를 찾을 수 있지만 역시 가장 공감을 얻는 스토리는 내 인생의 경험담이다. 책의 말미에 주제별로 스토리를 분류하고 활용하는 법을 담은 부록도 쓸 만하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오늘 소개하는 책은 동유럽에 있는 체코의 동화입니다. 이 나라의 동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외국 동화가 많이 번역되어 책으로 나오지만, 의외로 그 대상이 되는 나라가 다양하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영미 문화권과 일본의 동화가 대부분이고 서유럽 몇 나라의 동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출간은 참 반가운 일입니다. ‘바츨라프 르제자치’라는 작가의 이름이나 ‘프란티크’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조금 낯설지만, 그것 또한 새로운 나라의 문학작품을 읽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먼 나라 어느 골목길의 모습은 우리 이웃이 사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힘 있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 그 사이의 부당함에 속상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프란티크는 부당함에 속상해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골목길 사람들의 떠들썩한 일상 속에서 ‘정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이야기합니다. 주인공이 나름의 정의를 실천하고, 주변의 어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든든하게 아이를 지지하는 과정이 작위적이지 않아서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책입니다. 외국 동화를 읽은 후에는 그 나라가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기본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문학작품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렇게 읽은 책의 나라를 찾아보다 보면 또 다른 나라의 책들도 궁금해지겠죠?○ 독후활동: 내가 읽은 책 지도에 표시하기준비물: 세계지도 전도(혹은 사회과부도에 나와 있는 세계지도 복사본), 사인펜 1. 세계지도 전도를 벽에 붙인다. 2. 이 책이 출간된 ‘체코’를 찾아 동그라미를 친다. 3. 체코 근처에 책 제목 ‘대장간 골목’을 써 넣는다.4. 다음에 외국의 동화나 그림책을 읽으면 그 나라와 책 제목을 표시한다. 5. 이렇게 1년 정도 표시하다 보면 책 읽기가 어느 나라에 편중되는지 짚어 볼 수 있다. 김혜원 어린이독서교육연구가}

‘레미제라블’처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꾸로 드라마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소설도 인기다. 지난해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1월 초 출간 1주일 만에 2만 부나 팔려 나갔다. 21세기북스는 올해 드라마, 영화 콘텐츠를 소설로 만드는 전담팀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화 개봉이나 드라마 종영에 맞춰 나오는 영상 소설의 작가는 누구일까. 원작 대본과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직접 소설화한 것일까? ‘피에타’ ‘반창꼬’ ‘돈 크라이 마미’ ‘써니’ ‘응답하라 1997’ ‘아이두 아이두’ 등 영화와 드라마 소설, 게임과 만화 스토리를 개발해 온 콘텐츠창작 그룹 ‘박이정’을 찾아 이 같은 궁금증을 해결했다. 서울 구로구 온수동의 한 빌라에 자리 잡은 ‘박이정’의 사무실은 벌집을 연상케 했다. 109m²(약 33평)의 공간에 상주 작가 10명의 집필공간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말 그대로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야기 공장’이었다. 이들이 영화, 드라마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작업을 하는 기간은 평균 6주, 길어야 두 달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보통 서너 명이 한 팀이 돼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집에도 못 가고 밤샘작업에 매달린다. 특히 드라마는 ‘쪽대본’ 촬영 관행 탓에 작가도 ‘결말을 모른다’고 할 때가 있어서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종영 전까지 책을 내야 하는 저희로서는 피가 마르죠. 작가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발휘해 보기도 하고, 인터넷 게시판 여론을 살펴보면서 소설로 창작해 냅니다. ‘연가시’의 경우 영화 속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됐던 생물학적 지식을 보충하는 등 캐릭터의 심리묘사, 시대고증, 배경지식 등을 보충하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팀 작업이 필수입니다.”(양수연 작가·36) 새벽형, 달밤형 등 작가들의 집필 취향은 각각 다르지만, 작업용 컴퓨터는 꺼지는 법이 없다. 글을 쓰다 지친 사람들은 사무실 한쪽에 마련돼 있는 남녀별 2층 침대에서 쓰러져 잔다. 한여름엔 에어컨까지 돌려야 하기 때문에 전기요금이 한 달에 100만 원 가까이 나와 한전 직원이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박이정’의 목정균 대표(36)는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비뢰도’(현재까지 총 29권)를 쓴 인기 무협소설 작가. 다른 작가들도 방지연(SF 판타지), 이금영(청소년물 및 게임 스토리), 방진하(역사물) 작가 등 각자 전문 분야가 있다. ‘박이정’(넓고 정밀하다는 뜻)이란 이름은 한자성어 ‘박이부정(博而不精)’에서 나온 말이다. “‘박이정’이 구로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부천(만화, 애니메이션 중심지)과 홍대(출판사가 많은 지역)의 중간에 있어서예요. 최근에 판교로 이사 간 구로디지털단지의 게임업체들도 주 고객이었고요. 미국 드라마 ‘로스트’의 작가는 24명이고, 게임 개발엔 수많은 인원이 참여합니다. 순수소설 창작은 혼자 하는 게 좋겠지만, 장르를 넘나드는 ‘원 소스 멀티 유스’ 콘텐츠 개발은 각 분야 전문가가 협동작업을 하는 게 ‘신속성’과 ‘퀄리티(질)’를 보장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협업을 하지만, 영화 ‘피에타’의 경우는 황라현 작가가 두 달간 홀로 작업했다. 황 작가는 “‘피에타’가 취향에 맞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며 “청계천 뒷골목과 황학동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주인공들의 심리를 상상하며 소설로 재창작한 일은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작가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가끔씩 택시 한 대에 가득 타고 심야영화를 보러 가는 ‘풀 택시 파티’를 연다. 만화스토리 전문 방지연 작가(35)는 “서른이 넘은 작가는 ‘감(感)’이 떨어지면 끝”이라며 “매달 100여 권의 신간을 구입하고, 베스트셀러 책은 물론이고 TV드라마 영화도 빼놓지 않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정건희 인턴기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한국 중국 일본 어린이 100명이 함께 그린 동화책 12권이 나왔다. 필자들은 모두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APCEIU)이 지난해 8월 경주에서 개최한 ‘한일중 어린이 동화교류 2012’ 참가자들이다. 일주일간 열린 이 행사의 주제는 ‘빛’이었다. 아이들은 10명씩 한 반을 이뤄 반별로 동화책 한 권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먼저 ‘빛’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스케치한 뒤 각각의 그림을 모아 어떻게 하나의 줄거리로 만들 수 있을지 통역을 통해 토론하며 이야기를 붙여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 중 ‘손큰이의 대모험’은 한쪽 팔이 유독 굵고 큰 사내아이 손큰이가 팔을 치료하기 위해 빛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줄거리. 이 이야기는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됐다. 한 어린이가 남자아이를 그리면서 실수로 팔을 너무 크게 그렸는데, 반 아이들이 이 캐릭터를 좋아해 만장일치로 동화책의 주인공 ‘손큰이’가 된 것이다. 또 다른 작품 ‘희망의 빛으로’에서는 이 행사에 참가한 박경태 군(대구매곡초교 6학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빛’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둠’이라고 대답한 경태 군에게 빛을 찾아주자는 의견이 모아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장래 희망이 천문학자라고 밝힌 박 군은 이야기 속에서도 별을 관찰하며 빛을 찾는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해서 ‘마음의 빛’ ‘희망을 찾아서’ ‘꿈이 가득한 우주’ ‘기묘한 달빛 여행’ ‘태양을 피하는 방법’ 등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동화책이 탄생했다. 삐뚤빼뚤한 손글씨와 그림체가 그대로 살아있는 책에는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가 번갈아가며 적혀 있다. 일본 와카야마(和歌山) 현에서 온 마쓰모토 아즈사 양은 “빛(光)이라는 단 한 글자의 단어인데, 모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다르니까 재밌고 즐겁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전국공공도서관협회와 다문화가족 전문 여행사인 플라이어스는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공도서관과 다문화실에 기증할 외국 어린이 동화책을 모으기 위해 ‘지구촌 북크로싱’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해외 여행객들이 현지의 어린이 그림 동화책을 가져오면 5권 이내에서 가져온 권수만큼 국내 신간 동화책으로 바꿔준다. 정용선 플라이어스 대표는 “북크로싱 운동을 통해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한국 문화뿐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나라의 문화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밝혔다. 1599-5663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1527년에 사망한 마키아벨리는 죽은 지 40년쯤 지났을 때부터 이미 ‘공공의 적’으로 규정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권모술수와 이중 전략의 미덕을 찬양한 ‘악의 교사’로 규정했고, 독재자를 위한 지침서를 쓴 사악한 정치 이론가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정치공학적 시각이나 처세술 책으로 바라본 기존의 편견을 걷어낼 것을 주문한다. 그는 10여 년간 마키아벨리의 수많은 저작과 편지를 입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마키아벨리의 역사적, 인문학적 면모를 새롭게 재해석해냈다. 마키아벨리가 “철저하게 약자의 시선으로 권력의 속성을 파헤치고, 약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 했던 ‘약자들의 수호성자’였다”는 시각이다. 그는 우선 마키아벨리의 삶 자체가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는 평생 가난했던 ‘스페치오(세금미납자)’였다. 그도 늘 가난에 쪼들렸으며, 공직에서 해고당할까 두려워했고, 공직에서 파면된 뒤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으며, 실업자로 무려 15년 동안 빈둥거리는 삶을 살았던 불쌍한 인물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외교정책을 총괄했던 피렌체 공화국은 이탈리아에서도 최약체국이었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공 때 가장 먼저 항복을 선언했던 피렌체는 체사레 보르자(1475∼1507)와 교황 율리우스 2세(1443∼1513)의 이탈리아 정복전쟁 당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말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군대의 침략도 목격해야 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의 인생 최악의 시기에 쓰였다. 1512년 피렌체 공화국이 무너지고 메디치가가 복귀하면서 공직에서 해임된 그는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후 15년간 실업자로 은둔 생활을 하면서 낙심과 절망 속에서도 ‘군주론’ ‘로마사 논고’ ‘전쟁의 기술’ 같은 명저를 남겼다. ‘군주론’은 “군주란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 편하다” “군주는 사자의 사나움뿐 아니라 여우의 교활함도 갖춰야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오해를 받아 왔다. 그러나 이는 분열된 이탈리아의 소국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법을 역설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말년의 마키아벨리는 청년들에게 ‘로마사’ 등 고전을 가르치고, 약자들을 응원하는 ‘만드라골라’라는 코미디 작품을 써 대성공한다. 저자는 “마키아벨리는 약자들에게 ‘더이상 당하고 살지 마라’며 스스로의 힘을 키워 살아남고, 희망을 갖는 법을 가르친 인문학자”라고 평가했다. 연세대 신학과 교수인 저자는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의 이야기를 다룬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창조경영’ 등의 책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에도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집, 피렌체 시뇨리아 정청의 집무실, 마키아벨리가 외교여행을 떠났던 프랑스, 로마냐 지역 등을 직접 답사해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어 흥미를 더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이 책은 그렇게 작은 책이 아닙니다. 우선 서가 여기저기에 앉은 동물들이 저마다 책을 한 권씩 읽거나 찾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표지를 열고 책장을 넘기면 원래 책보다 작은 크기의 속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을 펼쳐 봐.’ 자, 펼쳐보세요. 그 장을 펼치면 그보다 작은 종이가, 그 다음 장에는 또 그보다 작은 종이가 반복해서 나온답니다. 무당벌레는 개구리가 나오는 초록색 그림책을 읽습니다. 개구리는 주황색 그림책에 실린 토끼 이야기를, 토끼는 노란 꿀색 곰 이야기를 읽어요. 아이가 책을 ‘읽게’ 되는 맨 처음 함께 반복해서 읽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글을 배우지 않고 학교에 가는 어린이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글자는 알지만 문맥을 이해하기엔 조금 서툰 1학년 아이들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제각기 크기가 다른 색색의 책장을 넘기며 동물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이유도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독후활동 ‘내 작은 책을 펼쳐 봐’준비물: 8절 도화지, 사인펜, 색연필, 크레파스 등 필기도구, 색종이(둥근 색종이도 가능), 풀, 가위, 스테이플러1. 읽은 책을 잘 살펴보고 준비한 색종이의 색깔과 크기에 맞춰 동물이나 사물의 배열 순서를 정한다.2. 색종이 중 제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순서대로 배열한다.3. 색종이 가운데를 잘 맞춰 반으로 접고 배열한 순서대로 끼워 스테이플러로 고정한다.4. 표지가 될 8절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 3의 크기보다 조금 크게 잘라낸다.5. 책을 가로로 만들지, 세로로 만들지 정한다.6. 1에서 정한 순서에 맞춰 책장을 하나씩 펼치며 이야기를 만들어 적어 나간다.7. 책 제목은 ‘내 작은 책을 펼쳐 봐’로 쓰고, 표지를 꾸민다.8. 또 다른 그림책은 어떤 것을 펼쳐 볼지, 우리 집 책장을 살펴보거나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찾아본다.김혜진 어린이도서교육연구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프랑스에서는 현대사회의 금융권력에 대한 수많은 비판서가 나왔다. 이 책의 저자는 금융권력의 지배 역사를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추적한다. 프랑스 혁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세력은 민중이 아닌 상층 부르주아지였으며, 그 궁극적 동기는 돈과 권력이었다. 자유, 평등, 박애는 그저 표면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3신분에서 소수에 지나지 않는 부르주아지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행세하며 ‘이성’을 내세워 종교권력을 붕괴시켰고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왕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그렇게 해서 왕권과 종교권력 대신 금전적 권력이 우위에 선 현대세계가 열린 것이다. 저자는 “이런 진실을 가리기 위해 부르주아지 권력층은 ‘명석하고 진보적인 선의 세력’과 ‘반계몽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악의 세력’이라는 두 진영으로 이뤄진 세계를 제시했고, 그렇게 프랑스 혁명은 선이 악을 이긴 신화가 됐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좌파 이론가. 그는 로스차일드 은행의 전임 사장으로 프랑스 19대 대통령에 당선된 조르주 퐁피두를 비롯해 존 F 케네디의 암살과 샤를 드골의 실각, 우드로 윌슨의 당선 등에 얽힌 금융권력과 정치권력의 힘겨루기의 역사를 조명한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유명 도서의 특별판은 고급 양장본으로 표지만 바뀔 뿐 내용은 별 차이가 없어 가격만 비싼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근 발행된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 출간 70주년 기념 특별판은 세계적인 일러스트 화가가 재해석한 ‘그래픽 노블’로 눈길을 끌고 있다. ‘일러스트 이방인’(책세상)은 1942년 출간 후 750만 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이방인’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가 새롭게 편집했다. 카뮈 탄생 100주년, ‘이방인’ 출간 70주년을 기념해 나온 이 책은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세계적인 거장 호세 무뇨스가 일러스트 작업에 참여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인 무뇨스는 카뮈의 텍스트를 형상화하기 위해 두 차례나 알제리를 방문했으며,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숨 막히는 부조리로 가득 찬 실존주의 소설 속 현실을 재현해 냈다. 이 책의 백미는 작열하는 태양을 향해 겨누어진 권총과 그것을 쥔 주인공 뫼르소의 손이 알제리 건축과 미술작품 특유의 모자이크 양식으로 표현된 그림이다. 책은 기존 책의 두 배 크기의 대형 판형(가로 18.8cm, 세로 25.7cm)이다. 날카롭고 묵직한 70여 점의 삽화가 작가의 건조한 문체와 어우러져 긴장감을 더한다. 텍스트로만 읽던 ‘이방인’과는 시각적 배열과 물리적 공간감이 다른 편집본으로 소장용으로 인기가 높을 법하다. 책세상 김지연 편집팀장은 “하드보일드풍의 선 굵은 그림체 때문에 남성 독자들의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이 책은 발간 1주일 만에 초판 2000부에 대한 추가주문 요청이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문학동네는 스테디셀러인 ‘꼬마 니콜라’ 1∼5권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합본호(855쪽) 초판 2000부를 ‘특별 한정판’으로 내놓았다. 르네 고시니의 글과 일러스트레이터 장자크 상페의 그림이 어우러진 ‘꼬마 니콜라’는 1959년 벨기에 만화잡지 ‘필로트’에 연재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작품. 하드케이스로 선물처럼 포장돼 있는 ‘꼬마 니콜라’ 합본호에는 장자크 상페의 일러스트가 곳곳에 그려져 있는 양장노트 한 권도 함께 들어 있다. 줄이 없는 노트는 상페의 그림처럼 주변의 인물이나 사물을 스케치할 수 있고, 메모를 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 문학동네 안나영 책임편집자는 “‘꼬마 니콜라’의 오랜 팬들도 합본호와 노트를 구하기 위해 다시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며 “출판계의 불황 속에서도 잘 만든 ‘한정 스페셜 에디션’은 수집가 소장용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장이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2007년 11월 뉴욕 맨해튼에 있는 암병동 대기실. 췌장암 말기 환자인 어머니(73)의 화학치료에 동행한 중년의 아들(50)은 긴장된 마음을 달래려고 어머니에게 묻는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어머니는 퓰리처상 수상작인 윌리스 스테그너의 ‘안전함을 향하여’를 읽고 있다고 답한다. 하이퍼론 출판사 편집장인 아들은 ‘읽지도 않은 책을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장기인 직업을 가졌지만, 어머니에게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집에 돌아와 읽은 이 책은 초반부터 주인공이 암으로 죽어가는 소설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아들과 어머니는 병원 대기실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고, 함께 읽은 책에 대해 토론을 했다. 회원이 단 둘뿐인,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북클럽이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암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나눈 대화와 용서, 화해의 기록이다. 신비스러운 책의 힘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혼돈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고,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췌장암 말기 환자의 평균 생존수명은 6개월. 어머니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2년 가까이 살아남았다. 이 기간에 두 사람은 거의 50권에 이르는 고전 시 소설 희곡 미스터리 논픽션 등 광범위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처럼 얇은 책을 골라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마이클 토머스의 ‘추락하는 남자’ 같은 두툼한 소설도 읽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결코 아프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어머니와 아들일 뿐이었다. 처음엔 얇은 책을 읽다가 긴 책을 읽기로 했다는 것은 어쩌면 희망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장편소설을 읽으려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이 아주 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어머니와의 북클럽 대화에서 가장 꺼렸던 주제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책은 어머니가 죽음으로 향하는 여행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왔고, 아들에겐 당신이 없는 삶을 꾸려갈 채비를 갖출 수 있게끔 이끌어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책 한 권을 다 읽어냈다는 데서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아들은 다음에 함께 읽을 책을 고르면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은 어머니의 침대에서 메리 와일더 타일스턴의 책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발견한다. 1884년 출간된 이 책은 표지가 떨어지고, 곳곳에 얼룩이 지고 누렇게 퇴색돼 있었다. 아들은 “읽기는 실천하기의 반대말이 아니란다. 그건 죽음의 반대말이야”라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해낸다. 어머니인 메리 앤 슈발브는 젊은 시절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하버드대 입학처장, 뉴욕 돌턴스쿨의 대학 진학 전문지도교사를 역임한 교육자였으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미얀마 등 전 세계 27개국을 돌며 난민구조활동을 한 맹렬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병상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 도서관을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탈레반에 억류된 뉴욕타임스 기자가 무사히 풀려나도록 기도하길 멈추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화학치료를 받는 암환자가 죽는 날까지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과도한 슬픔 끝에 맞는 허망한 죽음에 비하면 부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해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 함께 책을 읽는 소중한 기회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소통할 책이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찾아보면 분명히 있을 것이다. 70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초중생 자녀가 읽어드릴 수 있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저자는 “우리가 읽는 각각의 책은 늘 삶의 마지막 선정 도서가 될지 모르며, 각각의 토론 역시 마지막 대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내 인생의 마지막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새해가 왔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한국을 둘러싼 나라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일본은 일본대로 왜곡된 애국심으로 우리에게 상처를 줍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아래 고구려나 발해 같은 우리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리랑이나 씨름조차도 자신들의 문화유산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신문에 나면, “나는 학생이니까 몰라도 돼” 하면서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선 발해가 배경인 동화를 읽으며 관심을 가지기 바랍니다. 이 책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에서 커다란 상단을 이끌며 무역을 하는 ‘홍라’의 이야기입니다. 상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좌절하고 비틀거리면서도 홍라는 일어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과연 자존심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합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옛사람들의 행동반경에 놀라게 됩니다. 말을 타거나 걷거나 하는 방법만으로 로마에서 서라벌까지 가봤다는 이야기는 입이 딱 벌어지게 합니다. 화석화된 역사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생한 숨소리가 느껴지는 책입니다.○ 독후 활동: 발해 발견하기 준비물: 발해를 다룬 책, 종이, 필기도구대상 학년: 초등 고학년, 중학생방법 1. 책 뒤편에 실려 있는 발해 지도와 현재 세계지도를 비교해 그리고 홍라가 이동한 도시들을 찾아 표시한다. 가능하면 이동한 거리를 계산해 본다. ‘생활사박물관 6’(사계절) 참고.방법 2. 주변 박물관에서 발해 유물을 찾아본다. 특히 책 181쪽에 등장하는 불상을 찾아본다. 본 것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유물 하나를 세밀화로 그린다. 발해 유물이 있는 대표적인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속초시립박물관이다.방법 3. 신문과 인터넷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관한 자료를 찾아 읽어 본다. 김혜원 어린이도서교육연구가}

‘문 옆의 악어(The Crocodile by the Door)’를 쓴 셀리나 기네스는 기네스 맥주로 잘 알려진 기네스 가(家)의 후손이다. 셀리나의 가족은 대대로 더블린 외곽에 있는 티브래든 저택과 주변의 120에이커(약 48만6000m²)에 이르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왔다. 작가 또한 어린 시절 티브래든에서 할머니및 삼촌 찰스와 함께 생활했던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었다. 옥스퍼드대에 진학한 이후 줄곧 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는 2004년 어느 날 중병에 걸린 삼촌 찰스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삼촌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그에게 농장을 물려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아일랜드의 경제가 활성화되고 부동산 붐이 일면서 땅들은 모두 부동산개발업자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던 그와 남편에게도 수많은 부동산 개발업자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땅을 팔라고 회유하는 부동산업자들의 제의를 모두 물리치고 농사꾼이 되기로 결심한다. 농장을 운영해본 경험이 없는 평범한 학자였던 셀리나와 남편 콜린 앞에는 무수히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부는 삼촌이 오랜 기간 병으로 농장을 돌보지 못해 다 쓰러져가는 농장을 복구해야 했고, 유럽연합의 농업 및 환경 정책을 공부해야 했다. 인터넷 같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나이 많고 고지식한 고용인들을 설득하는 지루한 작업도 해야 했다. 부유한 기네스 가문의 후손이 왜 고루한 농사일 따위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기네스 가문의 직계가 아닌 방계에 해당하는 그의 가족에게는 이 거대한 토지 외에 어떠한 재산도 없었다. 이쯤 되면 끊임없는 부동산업자들의 구애에 넘어갈 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땅에 애착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남편과 끈끈한 애정을, 주위의 농사꾼들과는 진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에서 ‘악어’란 탐나는 땅을 끊임없이 노리는 부동산개발업자들, ‘문’이란 티브래든 저택을 뜻한다. 그는 결국 탐욕스러운 악어들로부터 땅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이 작품은 승리의 회고록이다. 지난해 코스타 상 심사위원들은 “젊은 나이에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집을 상속받은 여인의 감동적인 분투기”라며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수상 후보로 추천했다. 2012년 코스타 상 수상작은 이달 29일 발표된다.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

《2008년 가을, 미국 출장길에 들렀던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SK커뮤니케이션즈에서 IT 개발자로 일하던 정진호 씨(42)의 눈에 한 외국인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남자는 창밖을 보며 작은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정 씨는 그림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륙을 준비 중인 비행기의 모습이었다. ‘아, 부럽다’ ‘나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휘감았다.》출장길 공항에서 그를 설레게 했던 예술가를 만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회사 근처 대형서점에 들렀다가 ‘그림 그리기’에 관한 책을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미술을 배운 적도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불혹을 넘긴 나이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찾아왔다. “왜 그리기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을 못하겠어요. 화가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입시를 위한 그림도 아니에요.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잊었던 나를 찾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깨운 것 같습니다.” 2011년 봄, 그는 몰스킨 노트와 펜 한 자루를 사서 무작정 그리기 시작했다. 책상 주변에 있는 컵 전화기 휴대전화 지갑 같은 작은 사물을 스케치했다. 30분 이내로 그릴 수 있는 A5용지 크기(148×210mm)의 그림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미술학원을 다녔던 아들이 그에게 붓질하는 법, 물감 섞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매일매일 그리기’에 도전했다. 출퇴근길 지하철, 버스 안에서,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연필과 펜으로 시작한 그림은 색연필, 수채화로 발전해갔다. 아들과 함께 ‘서울드로잉’ 수업을 받으며 도심 곳곳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그의 책 ‘철들고 그림 그리다’(한빛미디어)에는 그가 좌충우돌 그림을 그리며 일상의 행복을 깨달았던 기록이 담겨 있다. “누구나 어릴 때는 종이만 주면 본능대로 맘껏 그림을 그리죠.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남의 눈을 의식해 그림의 즐거움을 잃어버려요. 매일 아침 한 시간 일찍 출근해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지루했던 내 삶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린 지 1년 반 만에 책을 썼고, 서울 명동에 있는 성바오로딸서원 서점 내 갤러리에서 수채화 60여 점으로 개인전도 열었다. 전시된 작품 중 절반이 작품당 5만∼7만 원에 팔렸다. 정 씨는 “내 그림이 좋아서 집에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출장길 공항에서 마음을 설레게 했던 비행기 그림을 자신도 완성했을 때였다. 이 그림은 그의 지인이 홍익대 앞에 오픈한 막걸리 레스토랑에 대형벽화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레스토랑 주인이 막걸리 집과 공항그림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며 평생 술과 안주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는 식사권을 그림값으로 주었다”고 했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 ‘덕의 기술’과 페이스북 ‘매일매일 그리기’ 사이트에는 그처럼 그림을 따라 그리기 시작한 수많은 사람의 사연이 올라온다. “철들어 시작한 그리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수단입니다.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을 뜻한다는 것은 알아도, 세 잎 클로버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행운은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지만 행복은 스스로 직접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최근 발간된 ‘탈냉전사의 인식’(한길사)은 현재 우리 사회의 기원으로 1990년대 초반 옛 소련 해체를 전후로 시작된 ‘탈냉전’과 ‘세계화’를 주목했다. 필자들은 냉전 종식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와 글로벌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고,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탈냉전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 내부의 이념 대결은 더욱 증폭됐다. 진보와 보수이념이 다양하게 진화하고 세분됐다. 특히 이번 대선은 “좌우 이념 진영 간 총력전”(장훈 중앙대 교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탈냉전 시대의 이념 대결 양상은 문화이슈에서도 첨예하게 부각됐다. 과거사 인식, 언론정책, 예술정책 등을 놓고 전면전을 벌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단체의 낙하산 인사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정권 실세의 누나, 형수가 예술단체장이 되는가 하면, 전 정권이 임명한 문화계 ‘코드 인사’를 끌어내려다 ‘역(逆)코드 인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박근혜, 문재인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성명이 잇따랐다. 공연예술계만 보더라도 박명성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가 박근혜 캠프에서 문화특보로 활약했고, 연출가 이윤택, 기국서, 채승훈 씨 등 연극인 50여 명은 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또한 캠프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많은 소설가, 시인, 배우 등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치인들보다 더욱 선동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렇듯 문화계 인사들이 선거에 목숨을 걸게 된 것은 ‘문화권력’의 패권주의 때문이다. 최근 10여 년간 정권에 따라 특정 성향의 예술인들이 점령군처럼 각종 인사와 지원금을 독차지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낙선한 후보 측에 섰던 예술인들은 창작지원금에서 소외돼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비판했던 ‘무늬만 공모제’의 폐해는 문화계에서 가장 심했다. 문화단체장 인사 때마다 전문성과 예술성보다는, 정권 실세와의 인맥이 화제로 떠오르곤 했다. 학문에 관심 없이 선거판에 기웃거리는 교수를 ‘폴리페서(polifessor)’로 부르듯이, 예술계에도 창작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권에 줄을 대 문화권력을 장악하려는 ‘폴리아티스트(poliartist)’가 판을 쳤다. 이제 문화계에서 정치 갈등의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 박 당선인이 롤 모델로 꼽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관용과 통합’의 상징이었다. 그는 개신교(영국 성공회)의 도움으로 여왕에 올랐지만, 자신을 탄압했던 가톨릭에 대한 복수를 하지 않고 ‘종교통합령’을 반포해 대영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새해 출범하는 정부는 누가 당선되더라도 전문 예술인이 인정받고, 창작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예술정치꾼이 사라진다. 그제야 예술계에서 언젠가부터 볼 수 없던,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어른’과 미래를 열어나갈 ’신진’이 함께 떠오를 것이다.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높은 굽의 하이힐이 그려진 표지. 검은색 바탕으로 된 아랫부분에는 빨간 네모 칸 안에 ‘19.0’이란 숫자가 눈에 띈다. ‘19.0’은 21세기북스의 새로운 임프린트(독립 출판 브랜드) 이름이다. ‘19금(禁) 소설’을 전문으로 펴내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일까?실제 19.0에서 펴낸 실비아 데이의 ‘크로스 파이어-유혹’(사진)은 성인용 로맨스 소설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아성을 무너뜨릴 기세다. 2012년 아마존 최고의 로맨스 소설로 선정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최근 교보문고와 예스24의 전자책 종합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올랐다. ‘그레이…’ 시리즈가 변태적인 섹스 묘사에 중점을 뒀다면, ‘크로스…’의 경우 에로틱 스릴러처럼 운명적 사랑과 과거의 덫으로 갈등하는 두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0’은 앞으로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에서 선호도가 높은 스릴러, 판타지, 추리, 로맨스, 무협의 장르문학을 전문으로 펴낼 예정이다. 김성수 21세기북스 편집실장은 “19금 작품만 전문으로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19금까지도 자유롭게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자책의 초기 대중화에는 ‘에로틱 소설’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20∼80쪽 분량의 ‘싱글 e북’ 등 다양한 형태의 전자책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한때 ‘○○북스’ ‘△△하우스’ 등이 유행하던 출판사 이름에 숫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올해부터다. ‘8.0’이라는 임프린트가 펴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의 책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다. ‘8.0’은 문학을 전문으로 출판하던 세계사가 새롭게 만든 경제경영서 전문 브랜드였다. 이 책이 50만 부 이상 팔리는 소위 ‘대박’이 나면서 ‘8.0’은 세계사의 임프린트에서 에이트포인트라는 회사로 독립했다.허윤정 8.0 기획편집팀장은 “8.0은 독자들에게 비즈니스와 관련된 8가지 비전과 기회를 제공하며, 8이란 숫자가 옆으로 보면 무한대란 의미를 갖고 있는 브랜드”라면서 “최근 숫자로 된 이름이 미래학, 테크놀로지, e북 등에서 각광받고 있다”고 전했다.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