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모

유원모 기자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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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법조팀 유원모 기자입니다. 잘 듣고 잘 쓰겠습니다.

onemore@donga.com

취재분야

2026-02-26~2026-03-28
검찰-법원판결63%
사회일반20%
사법10%
정치일반7%
  • “호위군 무예… AR로 보는 사계… 궁궐로 초대합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대해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고 표현했죠. 슬픈 일이지만 문화유산이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궁중문화축전’은 궁이라는 문화유산이 우리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17일 만난 진옥섭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은 다음 주 개막하는 궁중문화축전의 의미를 이같이 설명했다. 5대궁과 종묘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유산 축제인 ‘제5회 궁중문화축전’이 27일부터 5월 5일까지 9일간 펼쳐진다. 올해에는 경희궁이 처음으로 축전 무대에 포함됐고, 역대 최대 규모인 46개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즐길거리가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다. 축전이 펼쳐지는 5개의 궁은 저마다의 역사를 살려 ‘품격의 경복궁’ ‘자연의 창덕궁’ ‘예악의 창경궁’ ‘근대의 덕수궁’ ‘미래의 경희궁’ 등 각기 다른 주제를 선보인다. 조선의 법궁(法宮) 경복궁에서는 궁중연회 장소였던 경회루를 중심으로 품격 있는 행사가 준비됐다. 개막제 ‘2019 오늘, 궁을 만나다’(26일 오후 7시 반)에서는 식전행사 ‘궁궐 호위군 사열의식―첩종’이 눈에 띈다. 첩종은 임금이 불시에 궁궐의 군사들을 소집할 때 울린 큰 종을 뜻한다. 종이 울리면 병사들이 빠르고 절도 있는 무예를 선보이며 조선 왕조의 권위를 드높였다. 전통예술 연출가, 국악평론가를 지내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진 이사장은 궁궐을 어떤 무대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공간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는 예부터 문무(文武)의 겸비를 중시했는데 지금 복원 및 재현되는 전통의 대부분이 정적인 문에 치중됐던 게 현실”이라며 “경회루에서 펼쳐지는 첩종 무대와 실경 미디어 공연 ‘화룡지몽’을 포함해 역동적인 한국의 전통 문화를 되살린 프로그램을 여럿 준비했다”고 말했다.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서는 28일 오후 3시부터 어가행렬 등을 재현한 ‘신(新)산대놀이’가 열린다. 창덕궁에서는 조선의 왕들이 즐긴 달밤의 운치를 느껴볼 수 있는 ‘달빛기행 in 축전’과 증강현실(AR) 기술을 통해 창덕궁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만날 수 있는 ‘AR 체험―창덕궁의 보물’을 선보인다. 진 이사장은 “우리의 선조들은 축제를 할 때마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노력했다”며 “최신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전통의 색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덕수궁에서는 117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공연장이었던 ‘협률사(協律社)’를 재현해 구한말 당시에 선보였던 판소리와 전통가무를 소개하는 ‘소춘대유희’ 공연이 펼쳐진다. 김덕수 안숙선 국수호 등 우리나라 대표 예술가들이 총출동한다. 창경궁에서는 시민배우들이 참여하는 ‘시간여행 그날, 영조―백성을 만나다’와 어르신들을 위한 ‘창경궁 양로연―가무별감’이 마련됐다. 올해 처음 축전 대상에 포함된 경희궁은 ‘어린이 씨름한마당’을 준비했다. 축전의 대장정은 5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펼쳐지는 종묘대제로 마무리된다. 진 이사장은 내년 축전에서는 사직단을 포함시켜 5대궁과 종묘사직을 아우르는 축제로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는 “올해부터 국립국악원 서울시무용단 국립고궁박물관 등 여러 기관이 함께 참여해 전문성을 높였다”며 “궁중문화축전이 대한민국 축제의 허브가 될 수 있도록 시민들이 많이 찾고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세한 일정은 홈페이지 참조.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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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전통소금 ‘자염’ 만들던 조선시대 염전 첫 발견

    한국의 전통 소금인 ‘자염(煮鹽)’을 생산해내던 조선시대 염전 터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그동안 문헌으로만 전해 내려온 영남 최대의 소금 생산지 ‘명지염전’의 존재가 발굴조사를 통해 실체가 확인됐다.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부산 강서구 강동동(명지도) 일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한 부경문물연구원은 “지난해 낙동강 삼각주 내에 위치한 명지도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용한 명지염전 터를 찾아냈다”고 16일 밝혔다. ○ 한반도 전통 소금 ‘자염’ 이번에 확인된 명지염전 터는 낙동강과 남해안이 맞닿아 있는 삼각주에 속해 있는 지역으로, 넓이가 약 1만4000m²에 이른다. 명지염전은 1907년 이후 일본이 한반도에 도입한 천일염이 아닌, 1400여 년간 한반도의 소금으로 애용된 자염을 만들던 곳이다. 자염의 생산 과정은 먼저 약 3도의 염도를 띠는 바닷물을 농축시키기 위해 모래나 갯벌 흙을 햇볕에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 다음 여과 장치인 ‘섯구덩이’에 다시 흙을 쌓은 뒤 바닷물을 통과시켜 염도가 18∼19도까지 높아지는 함수(鹹水)를 만든다. 이 함수를 가마에 끓여서 만들어 낸 것이 자염이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바닷물을 농축하던 염전 26개면과 해수를 끌어들이는 너비 3m 규모의 도수로(導水路) 1기, 이를 각 단위 염전에 공급하던 너비 1m 이하의 공급수로 4기를 확인했다. 또 인근 지역에서는 함수를 끓여냈던 소금가마 8기와 창고(염창) 시설로 보이는 건물지도 나왔다. 김기민 부경문물연구원 연구실장은 “지금은 전남 신안군 일대의 천일염전이 활발하지만 개항 이전 전통사회에선 동해안, 남해안 등 해안지역 대부분에서 염전을 조성해 자염을 생산했다”며 “자염은 물을 계속해서 끓여야 했고, 이를 위해 많은 연료가 필요했는데 명지도에는 갈대밭이 무성해 이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영남 최고의 소금 산지 ‘명지염전’ “명지도 한 곳만 해도 일 년에 구워 내는 소금이 수천만 석이므로 낙동포(洛東浦)에 따로 염창감사(鹽倉監司)를 두어 해마다 천만 석을 추스르게 했다. 소금 이득이 나라 안에서 제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명지염전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는 명지도의 탁월한 지리적 위치 덕분이다. 부산 앞바다에서 유입되는 바닷물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육로 교통이 불편했던 조선시대 당시 상대적으로 운송이 용이했던 선박을 활용해 낙동강을 따라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소금이 귀한 영남 내륙 지역을 거대한 배후 소비지로 삼을 수 있었다. 이에 1731년 영남 감진사(監賑使·기근이 들었을 때 지방에 파견하던 특명 사신)로 온 어사 박문수(1691∼1756)는 국가에서 명지염전을 활용할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 영조는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여 명지염전을 국가가 관리하는 공염(公鹽)으로 지정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부터 생산 원가가 저렴하고, 상대적으로 짠맛이 강한 천일염을 생산하면서 자염은 쇠퇴해갔다. 명지염전은 1933∼36년 낙동강 제방 공사를 진행하면서 전체 규모의 60%가량이 사라졌다. 광복 이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유승훈 부산시 학예연구사는 “서해안에 비해 조수간만의 차가 작은 낙동강 하구의 염전은 제방을 설치했다는 특징이 있다”며 “한반도 소금 역사를 알려주는 곳이라는 점에서 관련 유적지를 보존,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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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새봄’ 기다리는 마음 화폭에… 국립중앙박물관 근대서화 특별전

    ‘양양화관(洋洋畵館·동양화와 서양화를 함께 함).’ 조선 왕실의 마지막 화원이자 중국과 일본에서 유학하며 근대 화풍을 도입하려 했던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 그의 꿈은 이 네 글자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고희동(1887∼1965)을 비롯한 후대 서화가뿐 아니라 한국적 정체성을 고민한 서양화가들에게도 이어졌다. 글과 그림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억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가 16일 개막한다. 전시에서는 안중식을 필두로 오세창, 이회영, 김옥균 등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화가로 활동했던 이들의 그림, 글씨, 삽화 등 100건이 공개된다. 근대 서화의 거장 안중식의 작품이 가장 눈길을 끈다. 1915년 경복궁과 백악(북악산)의 풍경을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등록문화재 제458호)’는 전시의 백미. 해태상, 광화문, 북악산의 산세를 투사도법으로 원근감을 살려 담아냈다. 1915년은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박람회)를 개최한다며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을 허물고 서양식 건물을 대거 지었을 때다. 그럼에도 안중식은 훼손되지 않은 경복궁의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그림에 담아냈다. 김승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잃어버린 조선의 봄, 다가올 조선의 봄을 꿈꾸며 그림의 제목을 ‘백악의 봄날 새벽’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존재만 알려졌던 일본 사노(佐野)시 향토박물관 소장품인 김옥균 박영효의 친필 글씨도 공개된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67∼1932)이 그린 ‘석란도(石蘭圖)’에는 우당의 작품 중 유일하게 서명이 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00년 전 혼돈의 시대에 예술가들이 사회적 아픔, 저항정신, 밝은 미래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6월 2일까지. 4000∼6000원.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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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대한민국 임시헌장’서 시작한 헌법 100년史

    1919년 4월 10일 29명의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이 중국 상하이 한 다락방에 모여들었다. 밤샘 토의 끝에 이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로 하고, 10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한다. 먼저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가 없는, 국민이 주인 되는 민주국가로의 전환을 못 박은 것이다. 뒤이어 3조를 통해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는 자격을 획득했고, 5조에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지게 됐다. 9조 “생명형·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한다는 선언을 통해서는 반문명적인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단순한 100년 전 에피소드가 아니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쓰여 있다. 즉, 대한민국의 헌법 계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에 바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있다.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인 저자는 이에 더해 ‘대한민국 헌정사 100년’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헌법의 역사, 의미, 가치 등을 촘촘하게 풀어냈다. 저자가 꼽는 우리 헌법의 핵심 단어 가운데 하나는 ‘3·1운동’이다. 1948년부터 현행 헌법까지 9차례 개헌이 있었지만 ‘3·1운동’은 단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평등하게 두루 참여해 전개한 비폭력 만세운동이자 5000년 군주정치를 타파한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1962년 5차 개헌에서 헌법 전문에 반영된 뒤 5공화국 시절 사라졌다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부활한 ‘4·19민주이념’ 역시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100년간 굳건히 이어 온 대한민국 헌법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책이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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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해 손녀 수지-스테파니 왕 “미국에 이승만, 유럽엔 서영해였죠”

    “아버지는 평생 할아버지가 프랑스에서 활동한 한국인 기자이자 작가인 줄 아셨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2012년 우연히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알았죠.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찾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외모에서도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두 자매의 입에선 ‘독립’이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한 수지 왕 씨(49)와 스테파니 왕 씨(38)를 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들은 임정에서 유일한 주프랑스 대사를 지낸 서영해(1902∼?)의 손녀들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임정 요인으로 활동한 서영해는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이후 그는 1929년 언론사 ‘고려통신사’를 설립하고,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 등을 발표했다. 언론과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외교관으로서 역량을 펼쳐왔다. 당시 임정 외교가에선 “미국에는 이승만, 유럽에는 서영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스테파니 씨는 “건축가로 일한 아버지와 미술사를 전공한 언니, 그리고 생태학자인 나까지 학구적인 할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광복을 맞이한 뒤인 1947년 서영해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세대 등지에서 학생을 지도하고, 프랑스어 교과서를 펴냈다. 하지만 분단이 고착화하고, 국내 정치 활동에 한계를 느끼면서 다시 프랑스로 건너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1948년 상하이를 거쳐 가려다 국공내전으로 혼란스럽던 중국 상황으로 인해 억류되고야 만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서영해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면서 결국 여권을 빼앗기고, 이후 그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됐다. 수지 씨는 “할아버지의 저서를 번역해 유럽에 소개할 계획”이라며 “할아버지가 교편을 잡았던 연세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등 앞으로 한국을 더 많이 찾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부산박물관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 ‘서영해, 파리의 꼬레앙, 유럽을 깨우다’를 11일부터 6월 9일까지 선보인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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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의병 이끈 의병장 ‘척암 김도화 문집’, 독일서 돌아왔다

    구한말 가장 앞장서 일본에 맞서 싸운 을미의병장 척암 김도화(1825~1912)의 문집 책판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의 유생들이 일으킨 을미의병 당시 경북 안동 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한 척암 김도화의 문집 책판 1장을 지난달 독일 경매에서 낙찰 받아 국내로 들여왔다고 11일 밝혔다. 이번에 고국으로 들어온 ‘척암선생문집책판(拓菴先生文集冊板)’은 가로세로 48.3x19.1㎝에 두께는 2.0㎝다. 척암 문집을 찍기 위해 1917년경 만든 책판 1000여 장 중 한 장으로, 김도화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설명한 권9 23¤24장에 해당한다. 이전까지 확인된 척암선생문집책판은 20장으로, 모두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소장하고 있다. 이 책판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 중 일부다. 안동에서 태어난 김도화는 고성 이씨 이찬의 딸과 1839년 혼인하면서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안동 임청각(臨淸閣) 가문의 사위가 됐다.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가옥이며, 김도화는 이상룡의 종고모부다. 김도화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령(70세)에도 곽종석, 김흥락 등과 함께 일제의 국권 침탈을 우려하는 안동통문을 각지에 보냈다. 이듬해 결성된 안동의진(安東義陣)에서 권세연에 이어 2대 의병장에 올라 지휘부를 조직하고 의병 참여를 호소했으며,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대문에 이를 반대하는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문구를 써 붙이는 등 일제의 부당함에 끝까지 맞섰다. 정부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해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유원모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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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승 교수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저자는 한용운 아닌 최남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1운동 당시 한반도 전역에 뿌려진 독립선언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공약삼장(公約三章)’이 수록돼 있다. 민족대표 측이 3·1운동에 참가할 시민에게 당부한 일종의 행동강령이다. 최근까지 일부 교과서와 불교계 등에서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공약삼장을 작성했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공약삼장의 저자가 한용운이 아닌 육당 최남선(1890∼1957)이란 학계의 연구가 나왔다. 독립운동사 연구 권위자인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사진)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919’(다산북스) 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공약삼장은 독립선언서 본문과 비교해보면 문체가 단호해 한용운이 쓴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며 “하지만 당시 한용운과 최린이 주고받은 대화를 보면 독립선언서 작성을 최남선에게 맡겼다는 내용이 등장한다”고 밝혔다. 이어 박 교수는 “민족대표였던 오세창 역시 ‘최남선의 선언서 초안을 가지고 왔을 때 모두가 이를 돌려봤지만 따로 첨삭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며 “3·1운동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수정·보완하는 것이 학계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신간 ‘1919’는 3·1운동의 원인과 배경, 전개 과정 등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고, 잘못 알려지거나 왜곡된 정보를 지적한 역사 교양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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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이황의 마지막 귀향길… 물러남의 미학 오롯이 체험

    “퇴계 이황은 생전에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만 73회를 썼습니다. 2019년 재현하는 마지막 귀향길은 나아서기보다 물러남의 미학을 실천한 퇴계의 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보우당(普雨堂)에서 9일 열린 퇴계 이황의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 행사 ‘위대한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의 개막식에서 이용태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전 도산서원 원장·86)은 이같이 말했다. 도산서원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9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10일부터 21일까지 450년 전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을 도보로 재현한다. 퇴계는 1569년 음력 3월 4일 당시 임금이던 선조에게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일시적 귀향을 얻어냈다. 다음 날인 5일부터 17일까지 퇴계는 봉은사∼광나루∼미음나루(남양주)∼가흥창(충주)∼단양향교(단양)∼도산서원 등의 여정을 따랐다. 이번 도보 행사에는 인문학 전문가들의 여러 강연이 함께 펼쳐진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 이광호 국제퇴계학회장,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기동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이 강사로 나선다. 걷기 6일 차인 15일에는 김종성 충남대 의대 교수가 퇴계가 지은 시조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소재로 만든 공연도 선보인다. 일반인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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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과 가장 가까운 동해안 감시초소 문화재 된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동해안 감시초소(GP)가 문화재로 등록된다. 문화재청은 1953년 군사정전협정 체결 뒤 남측 지역에 처음으로 설치한 감시초소인 강원 고성군 수동면의 ‘동해안 감시초소(GP)’를 등록문화재로 예고한다고 8일 밝혔다. 동해안 감시초소는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남북이 체결한 ‘9·19 군사 분야 합의서’에 따라 철거하기로 했으나 역사적 상징성과 활용 가능성을 고려해 보존이 결정됐다. 문화재청은 “북측 감시초소와 최단 거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며 “냉전이 만들어낸 남북 분단이라는 시대 상황과 이후의 남북 화합 등 여러 상징성을 느낄 수 있는 현장감과 긴장감 있는 건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항일유산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23인 필묵’과 ‘부산 옛 동래역사’, ‘세종 옛 산일제사 공장’도 등록문화재로 예고됐다. 임시정부 환국기념 필묵은 김구,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 23명이 환국 하루 전인 1945년 11월 4일 저녁 중국 충칭(重慶)에서 감회와 포부를 남긴 필첩이다. 부산 옛 동래역사는 1934년 동해남부선에서 처음 완공한 기차역이다. 건물 변천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도면이 현존한다. 세종시 조치원읍에 있는 옛 산일제사 공장은 내부에 균일한 빛을 받기 위해 북쪽에 창을 높게 설치한 톱날형 지붕 구조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초기 산업 건축유산으로서 가치가 크다는 평가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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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침략-내전의 아픔… 사회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약소민족으로 주변국과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침입을 받았고, 현대에 들어서는 이념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들었던 슬픔을 겪었다. 우리나라와 흡사한 역사를 가진 나라. 유럽의 북아일랜드와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다.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회 갈등과 트라우마. 그리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두 나라의 모습을 연세대 연구팀이 직접 현장을 찾아 책 속에 담아냈다. 의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진이 참여해 다양한 시각으로 사회 치유의 방법을 소개한다. 위치적으로 아일랜드섬에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영국에 속해 있는 북아일랜드는 1000여 년간 민족주의 성향의 구교도와 통합주의를 택한 신교도의 갈등이 끊임없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68년부터 30년간 무려 시민 3500명이 같은 민족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후 1998년 ‘성금요일 협정’을 맺으며 외형적으로는 평화를 찾았지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언제나 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늘 사회 전반에 남아 있었다. 이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예술’과 ‘교육’이었다. 여러 비정부기구(NGO)들이 나서 트라우마를 공유할 수 있는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자신의 아픔을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예술작품으로 표현하는 공간 등을 만들었다. 또 종교별로 학생을 나누지 않는 ‘통합학교’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며 과거의 아픔을 자연스럽게 극복하려고 노력 중이다. 1976년부터 3년간 200만 명의 시민이 잔혹하게 죽어가야 했던 ‘킬링필드’의 비극을 가지고 있는 캄보디아. 이들이 택한 치유 방법은 재판을 통한 정의 회복이었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2006년 ‘유엔 캄보디아 특별재판부’를 설립해 킬링필드 당시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절차적 정의를 지키며 단죄하고 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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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독립선언서 신문관판은 원본 아닌 광복 이후 만들어진 것”

    100년 전 3·1운동 당시 전국 곳곳에는 수만 장의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독립선언서의 종류는 2가지. 제작된 인쇄소의 이름을 따 ‘보성사판’과 ‘신문관판’이다. 하지만 신문관판 독립선언서가 1919년 3·1운동 당시가 아닌 수십 년이 지난 광복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다. 독립운동사 연구 권위자인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62)는 “3·1운동 참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민족대표들과 보성사 인쇄공들의 재판 신문기록 등을 분석한 결과 신문관판은 1919년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했다”며 “현재 국가기록원이 국가지정기록물(제12호)로 지정하고 있는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 가운데 신문관판은 빼는 게 옳다”고 4일 밝혔다. 박 교수는 5일 출간될 책 ‘1919’(다산북스·사진)에 이 같은 내용을 담았다. ○ 보성사판 ‘선조(鮮朝)’ vs 신문관판 ‘조선(朝鮮)’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는 2009년 인쇄업에 오래 종사해 오던 한 개인 소장자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하면서 존재가 알려지게 됐다. 최근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1점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신문관판은 현재까지 2점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문관판은 수량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보성사판과 비교해 봤을 때 일부 글자와 맞춤법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신문관판은 첫 문장에 “朝鮮(조선)의 독립국”으로 적혀있지만 보성사판은 ‘鮮朝(선조)의 독립국’이라는 오탈자로 기록돼 있다. 보성사판에 오기가 생긴 이유는 3·1운동 직전의 긴박한 상황 때문이다. 1919년 2월 27일 독립선언서 원고를 작성한 최남선은 자신이 운영하던 출판사인 신문관에서 선언서 내용과 민족대표 31인의 명단 등이 적힌 활판을 짰다. 이후 천도교에서 운영한 인쇄소였던 보성사 이종일 사장에게 활판을 가져가 인쇄해 달라고 부탁한다. 보성사는 인쇄에 돌입하려 했지만 활판의 크기가 맞지 않아 다시 조판을 해야만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간이 워낙 촉박하다 보니 ‘조선’을 ‘선조’라고 잘못 기입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27일 오후에 민족대표 측에서 기존 31인의 명단에서 2명을 빼고, 4명을 추가해 달라고 주문한 것. 결국 보성사는 민족대표 명단이 들어간 부분의 활자를 다시 만들어 27일 오후 9시부터 독립선언서 인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박 교수는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27일 늦은 오후에야 겨우 확정됐는데 이미 활판이 보성사로 전달된 상태에서 신문관판에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 정확히 적혀 있다는 것은 정황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1919년에 등장하기 힘든 현대식 맞춤법 신문관판의 글씨를 자세히 보면 ‘없으며’ ‘함에’ ‘오직’ 등 현대식 맞춤법을 따른 표기와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반면 보성사판은 ‘업스며’ ‘하매’ ‘오즉’ 등 당대 맞춤법을 따르고 띄어쓰기 없이 표기를 했다. 신문관판이 진품이라고 보는 쪽에서는 최남선이 주시경의 영향을 받아 현대식 맞춤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박 교수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불과 한 달 전인 1919년 1월 1일 최남선이 매일신보에 쓴 글을 보면 ‘업슴’ 등 보성사판의 표현과 같았다”며 “활자와 맞춤법의 차이 등 여러 정황을 고려해 봤을 때 신문관판은 광복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문관판을 소장 중인 독립기념관 측은 “학계의 지적이 합리적인 부분도 있지만 진품으로 볼 여지도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검증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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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성 해자서 1600년 전에 만든 最古모형배-나무방패 출토

    작은 배를 못에 띄우면 금방이라도 항해할 듯 정교하다. 길이는 약 40cm에 불과했지만 갑판과 선수, 선미 등이 분명하게 표현돼 있었다. 형태는 단순한 통나무배에서 복잡한 구조선(構造船)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인 준구조선. 경북 경주시 월성 해자 현장에서 2일 공개된 4∼5세기 신라 목제 배 미니어처(모형)의 모습이다.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불에 그을린 흔적이 발견됐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으로 확인됐으며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배 모형이다. 등불을 올린 뒤 물 위에 띄운 듯한 모습으로 신라 왕실의 의례용 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년여간 진행한 경북 경주시 월성(月城·사적 제16호) 발굴 조사 성과를 이날 현장에서 공개했다. 1600여 년 전 만들어진 배 모형과 동시대에 제작된 나무 방패 2점, 신라의 지방관인 당주(幢主)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목간 1점 등 보물급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동심원 문양 넣은 신라의 방패 배 모형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은 방패 2점이다. 한 점은 손잡이가 달렸는데 이 같은 형태의 고대 방패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손잡이가 있는 방패는 가로세로 14.4×73cm, 손잡이가 없는 것은 26.3×95.9cm로 성인의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크기였다. 두 방패 모두 표면에는 날카로운 도구로 동심원과 띠 같은 기하학적 무늬를 새기고,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칠한 흔적이 나왔다. 일정 간격으로 구멍도 뚫려 있었다. 이는 방패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실로 감기 위한 흔적이라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신라 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목간도 발견됐다. 3개 면에 글씨를 적어 넣은 이 목간에서는 신라의 지방관인 ‘당주’가 등장한다. 6세기 비석인 단양 신라 적성비(국보 제198호) 이후 두 번째로 발견된 사례다. 내용은 당주가 곡물과 관련된 사건을 보고하는 것으로 ‘벼 3(參)석, 조 1(壹)석, 콩 8(捌)석’ 등 곡물과 수량을 적어 놓았다. 이 소장은 “신라가 통일 이전부터 숫자를 원래 글자보다 획수가 많은 갖은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 느티나무숲 거닐던 신라인의 풍류 월성 주변을 둘러싼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싸고 판 물도랑이다. 월성은 신라의 멸망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해자의 밑바닥은 유기물질이 보존되기에 알맞은 뻘처럼 남아 있었다. 덕분에 이번 조사 결과 쌀, 콩, 자두, 가래, 머루, 버찌, 복숭아, 가시연꽃 등 63종의 신라시대 씨앗과 열매 자료를 확보했다. 문화재청은 규조(珪藻·물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를 분석해 해자의 흐름, 깊이, 수질 등에 대한 정보를 분석 중이다.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신라인들이 가시연꽃이 가득 핀 해자를 보며 걷고, 느티나무숲에서 휴식을 취했을 5세기 무렵 신라 왕궁의 풍경을 복원해 낼 계획이다. 멧돼지뼈 26점이 발견된 사실도 흥미롭다. 치아 분석 결과 모두 6개월 전후의 어린 돼지인 것으로 확인됐다. 식용이나 의례용으로 ‘영돈’(어린 돼지)을 즐겨 먹은 신라인들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조사 성과는 5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한성에서 만나는 신라 월성’에서 공개된다.경주=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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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보물서 국보로 승격 예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리공예품인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보물 제1767호)의 명칭을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로 변경해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1일 밝혔다. 사리기는 참된 수행을 한 부처나 승려 몸속에 생긴다는 구슬 모양 유골인 사리를 보관한 용기를 뜻한다.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진행한 백제 왕실 사찰인 충남 부여군 왕흥사터 목탑지(木塔址)에서 발견됐다. 출토 당시 금당 앞 목탑 지의 사리공(舍利孔·사리를 넣는 네모난 구멍)에서 진흙 속에 잠긴 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사리기는 안에서부터 금제 사리병, 은제 사리호, 청동제 사리합 세 겹으로 구성됐다. 사리합 겉면의 명문에 “위덕왕(백제 제27대 왕)이 정유년에 죽은 왕자를 위해 제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정확한 제작연도(577년)와 왕실 공예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왕흥사지 사리기는 지난달 27일부터 국립부여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전시 중이다. 한편 문화재청은 1740년 조성된 ‘구미 대둔사 삼장보살도’와 1803년에 제작된 ‘김천 직지사 괘불도’, 고려 말 문인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의 문집인 ‘도은선생시집 권1·2’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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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동기~19세기 베트남 유물 51점 한자리에

    최근 정치 경제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긴밀한 교류·협력을 진행 중인 베트남. 2000년 넘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유물들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실 3층 아시아관 인도·동남아시아실 내 베트남 상설전을 확대 개편한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소장품전’을 지난달 27일 시작했다. 베트남의 고대문화, 청동기, 도자기 등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기원전의 청동기부터 19세기 유물까지 51점이 공개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베트남의 손꼽히는 유물인 ‘청동북’이다. 베트남 선사 문화를 대표하는 청동북은 높이와 폭이 1m가 넘는 것부터 작게는 사람 주먹만 한 크기까지 다양하다. 이번 전시에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폭 1m 정도의 청동북이 출품됐다. 박성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베트남의 청동기 문화는 우리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하다”며 “이번 전시에는 청동북, 청동칼과 종, 귀고리 등 한반도 문화권과는 다른 다양한 유물을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11∼13세기 베트남의 통일 왕국이던 리 왕조 시기에만 나타난 보리수 잎 모양 기와도 놓치면 아쉽다. 리 왕조의 불교사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장식성 강한 기와로, 큰 보리수나무 안에 용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두 박물관은 이전에도 학술 교류와 공동 발굴조사를 진행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은 2014년 ‘베트남 고대 문명전: 붉은 강의 새벽’을 개최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베트남이 이룩한 독창적 문화와 함께 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동질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 11월 1일까지. 무료.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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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유모차 끄는 아빠… 스웨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직장상사가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남자 직원에게 눈치를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한 손에 카페라테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유모차 핸들을 잡는 일명 ‘라떼파파’가 거리에 넘친다. 꿈같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 같은 문화가 단단하게 자리 잡은 국가가 있다. 바로 북유럽의 ‘스웨덴’이다. 스웨덴의 육아휴직 수당 신청자의 비율을 보면 남자가 45%, 여자 55%로 성별 차이가 거의 없다. 대부분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것. 이 책은 10년간 스웨덴에서 머물며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저자가 직접 경험한 스웨덴의 육아 시스템을 소개한다. 스웨덴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던 배경에는 탄력적인 육아휴직제도와 각종 지원금이 자리한다. 스웨덴 정부가 아이의 부모에게 지급하는 유급 육아휴직일수는 총 480일인데 출산 후 첫 2주간은 엄마와 아빠가 반드시 같이 사용해야 한다. 이후에는 부모의 편의에 따라 어떤 비율로 나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 양성평등을 위해 부모 중 한 사람이 390일 이상을 쓸 수 없도록 막아뒀다. 처음부터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1974년 세계 최초로 ‘아빠육아휴직제도’를 도입했지만 첫 10년 동안 단 5%의 아빠만이 이 제도를 사용했다. 10%를 넘기는 데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후 스웨덴 정부는 ‘육아휴직법’을 도입해 육아휴직을 시민의 권리로 보장했다. 회사원들은 두 달 전에만 육아휴직 시작 여부를 회사에 알려주기만 하면 되고, 회사는 이를 거부할 수 없도록 했다. 스웨덴 역시 맞벌이 부부의 비중이 높다. 한국과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는 맞벌이 가정이 조부모나 베이비시터의 도움 없이 직장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점이다. 육아휴직 제도와 더불어 양육자를 위한 각종 사회보험과 지원금, 탄탄한 공립 유치원 운영 덕분이다. 스웨덴의 출산율은 1.9명으로 유럽 평균인 1.6명보다도 높다. 지난해 0.96명으로 추락한 데 이어 이르면 내년부터 인구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한국 사회가 반드시 참고해야 할 지침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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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일 벗는 창덕궁 희정당… 내달 3일부터 일반 공개

    전통 건축과 근대 문물의 조화를 선사하는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 내부가 다음 달부터 일반에 정식으로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평소 관람이 제한됐던 희정당 내부를 둘러보는 특별관람 프로그램을 다음 달 3일부터 시작한다”고 27일 밝혔다. 보물 제815호인 희정당은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과 대조전(大造殿) 사이에 있는 전각으로,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내전 영역에 속한다. 본래 명칭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 ‘밝은 정사를 펼친다’는 의미를 지닌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됐지만 1920년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당대의 서양식 생활양식을 적용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대표적으로 자동차에 타기 쉽도록 현관을 마련하고, 건물 창호는 한지가 아니라 유리창으로 마감했다. 또 다양한 전등과 유럽풍 가구로 내부를 꾸미고, 현대식 화장실과 보일러를 설치했다. 문화재청은 희정당 내부를 100년 전 모습으로 정비하고, 현대에 변형되거나 낡은 설비를 교체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특별 관람은 상반기는 5월 25일까지, 하반기는 9월 4일부터 10월 26일까지 매주 수·토요일 오전 10시 30분과 오후 2시에 진행한다. 예약은 29일 오후 2시부터 가능하다. 1회 정원은 10명, 관람료는 1만 원.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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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도봉산’ ‘포천 금수정’ 조선 후기 3대 명승지

    “장점과 단점을 이처럼 숨길 수 없다. 그런데 이 누각을 보니 뒤에는 큰 산에 기대고 있으면서도 바짝 다가서 있지 않고, 좌우에 들이 펼쳐져 있되 넓고 좁기가 적합하다. 아무래도 이 누정을 ‘집대성’이라 해야겠다.” 조선 후기의 문신 남학명(1654∼1722)은 남한강을 품에 안은 충북 제천시 청풍 한벽루(寒碧樓)의 빼어난 경관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유금산기(遊錦山記)’ ‘유사군기(遊四郡記)’ 등의 저서에서 전국의 명승을 개성 넘치는 표현으로 평했다. 계룡산을 바라보며 “공자가 봄날 행단에서 강학할 때 안회와 증점이 거문고를 튕기는 듯하다”며 극찬했고, 전북 남원시 광한루에 대해서는 “못은 넓고 시내가 가까우며 먼 산도 모두 수려하고 빼어나지만 앉은 자리가 평범하다”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앞다퉈 명승지로 향했다. 조선 후기부터 급속히 발달한 교통과 상업 덕분에 여행이 대중화됐고,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구경할 만한 명승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마치 주5일제 도입 이후 전국적인 여행 붐이 일었던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무릇 명승이 명승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한 시대의 풍류가 있는 문사들이 시로 읊고, 글로 기록해야 한다.” 1761년 영조 때 문사 이현운은 명승의 정의를 이같이 내린다. 뛰어난 자연경관은 필요조건일 뿐이고, 인문학적 통찰이라는 충분조건이 더해져야 명승이 된다는 것. “경치 좋은 곳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것”이라는 현행 문화재보호법에서 정한 ‘명승’ 정의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22일 열린 명승학회의 창립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조선 후기 전국 명승의 범위와 평가’를 공개했다. 안 교수는 “조선시대 수많은 문인이 남긴 시와 산문, 회화 등에 나타난 전국의 명승을 정리하고 목록화한다면 현재 문화재 보존·활용 정책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최고의 인기 명승지는 어디였을까. 바로 ‘금강산’과 ‘도봉산’ ‘포천 금수정’이다. 안 교수는 명승을 다룬 대표적인 문헌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와유편(臥遊篇)’ ‘해좌명승(海左名勝)’ ‘팔선와유도(八仙臥遊圖)’ ‘청구남승도(靑邱覽勝圖)’ 등 5편을 분석한 결과 이 3곳만이 유일하게 모든 기록에서 언급됐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삼각산(북한산)과 남한산성, 단양팔경, 설악산, 변산, 광한루, 송광사 등 17곳이 4개 문헌이 소개됐고, 용문산과 한벽루, 관동팔경 등 25곳은 3개 문헌에 언급됐다. 안 교수는 “조선 후기 명승들이 누린 인기와 위계를 개략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라고 말했다. 명승은 멋과 흥이 함께 어우러지는 역사를 간직해 왔지만 국보나 보물 등 다른 국가지정문화재에 비해 관심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은 1970년 제1호로 지정된 강원 강릉시의 ‘명주 청학동 소금강’부터 최근 지정된 전남 강진군 ‘백운동 원림’까지 총 113건이다. 이원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명승에 대한 문화재 정책이 보존을 중시하는 규제 위주로 진행돼 왔던 게 현실”이라며 “학계와 협력해 명승에 인문학적 가치를 더해 새로운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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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사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색감… 더 환해진 ‘神의 정원’

    미세먼지를 씻어 내는 봄비가 내린 후 청명한 날씨를 선보였던 25일. 조선의 왕과 왕비의 능 9기가 모여 있는 경기 구리시 동구릉(사적 제193호)은 ‘신(神)의 정원’이라는 별칭답게 맑은 날씨와 수백 년 된 갈참나무, 소나무 등이 어우러져 청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가운데 동구릉 서남쪽에 위치한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1686∼1718)가 묻힌 혜릉(惠陵) 근처로 다가갔다.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 건물이 혜릉 권역의 가운데에 서 있지만 오히려 양쪽의 작은 건물인 수라간과 수복방이 시선을 더 끌었다. 건물 규모는 정자각에 비해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내는 색감이 단아하고 따스했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1995년 복원되면서 현대안료로 단청했지만 능지기가 머물던 공간인 수복방과 음식을 하던 수라간은 지난해 9월 전통안료로 복원됐다. 혜릉의 이 두 건물은 지난해 9월 문화재청이 전통안료로 건물 전체를 단청한 첫 시범 모니터링 대상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4년부터 진행 중인 ‘전통 단청안료 제조기술 및 품질평가 연구’의 일환으로, 문화재청은 이곳에 적용된 기술과 색상 변화 과정을 모니터링해 내년까지 전통안료 표준시방서와 품셈 등을 만들어낼 계획이다. 혜릉에는 총 7가지의 전통안료 색상이 적용됐다. △초록색 계열의 뇌록 △붉은색을 각각 띠는 석간주, 경면주사 △오렌지색과 유사한 장단 △조개껍데기를 빻아 흰색을 내는 호분 △석간주와 호분을 섞어 팥죽색 같은 토분 △소나무 재를 이용해 만든 검은색의 먹 등이다. 모두 고문헌에 나와 있는 방식 그대로 돌과 나무 등 천연 재료를 이용해 만들었다. 전통안료의 강점은 화사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색감이다. 화학성분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인위적인 형광색을 발산하는 현대안료와의 가장 큰 차이다. 혜릉의 단청 작업을 진행한 양영송 화공은 “주로 돌을 갈아 만드는 전통안료로 단청을 하면 해충이 나무를 파먹기 어려워 내구성을 따져도 현대안료에 뒤질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다만 전통안료의 복원이 이제 걸음마 단계이기에 보완할 점도 있다. 전통안료와 아교(접착제)의 접착력이 현대안료와 접착제(아크릴 에멀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져 이를 보충해주려면 3, 4배의 작업 과정이 더 필요하다. 양 화공은 “지금까지 대부분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현대안료를 썼기 때문에 앞으로는 전통안료로 단청을 해볼 수 있는 여건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연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장은 “광화문 현판과 혜릉에 이어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 등에서도 추가로 전통안료 시범 모니터링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리=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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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과 미래를 노래한 신동엽… 그의 詩세계 되새긴다

    ‘껍데기는 가라’ ‘4월은 갈아엎는 달’…. 신동엽 시인의 시는 1960년대에 주로 발표됐으나 1970, 80년대에 널리 읽혔다. ‘저항’ ‘혁명’ ‘민족’을 노래한 그의 시는 엄혹한 시절 대학가의 정신을 지배했다.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39세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년. 더 큰 틀에서 작품 세계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50주기의 또 다른 키워드는 대중화다. 신 시인의 장남인 신좌섭 서울대 의대 교수는 “깊고 넓은 시인의 시 세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시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뛰고 있다”고 했다. 김응교 김형수 박준 시인에게 준비 중인 행사와 오늘날 시인의 외침이 갖는 의미를 묻고 이들의 목소리로 각각 정리했다.○ 김응교―평전 재출간·문학길 지정 50주년을 맞아 2005년 발간된 평전 ‘시인 신동엽’(현암사)이 최근 재출간됐다. ‘좋은 언어로-신동엽 평전’(소명출판)으로 제목을 바꾸고 일부 내용을 고치고 더했다.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나 남다른 총기로 명시를 남긴 시인의 일생을 촘촘히 되살렸다. 충남 부여, 제주(4월), 서울(6월)에서 신동엽 문학기행도 열린다. 서울 행사는 배우 김중기 씨가 신동엽 시인으로 분해 성북구 자택과 종로5가 등을 시민 35명과 함께 둘러본다. 중간 중간 상황극과 시 낭송을 곁들인다. 시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생태적 평화주의자에 가깝다. 한반도 화해 무드가 조성된 요즘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김형수―신동엽 유튜브 100회 올해 1월 유튜브 채널 ‘문학난장’을 열고 시인의 작품과 생애를 소개하는 동영상 19편을 올렸다. 올해 100편 업로드가 목표다. 생전 시인도 ‘내 마음 끝까지’라는 동양라디오 심야 방송 대본을 집필하며 대중과 소통했다. 새 시대의 채널로 그가 독자와 가까워지길 바란다. 그는 오랜 기간 평론을 공부했다. 그래서 언어 세공능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신동엽만큼 문명을 깊이 사유한 시인은 드물다. 쉽고 간결한 어휘로 ‘중립론’ ‘전경인’(인문학적 농사꾼) 같은 개념을 내세워 민족과 역사의 미래를 논했다. ‘향아’ ‘금강’ 등 시 전편에 이런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박준―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인 작품집 출간 시인의 기일에 맞춰 ‘신동엽산문전집’과 신동엽문학상 수상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집이 나온다. 각각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창비)과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창비)으로, 도종환 시인과 공선옥 김금희 소설가 등이 참여했다. 습작 시절 그의 시집을 펼쳤는데 동시대 시인들과 결이 달랐다. 형식 실험과 전통 시에 몰두한 당시 분위기에서 신 시인은 민족을 파고들었다. ‘금강’ 등에서도 역사성이 현실과 이어지는 자각이 묻어난다. 도시화의 이면을 포착한 ‘종로5가’를 특히 좋아한다.이설 기자 snow@donga.com}

    •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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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락됐던 조선왕조실록 96책, 국보 추가 지정

    우리나라 기록 문화의 정수인 ‘조선왕조실록’의 정확한 책수(冊數)가 국보 지정 46년 만에 밝혀졌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정족산사고본 7책, 오대산사고본 1책, 적상산사고본 4책, 봉모당본 6책, 낙질과 산엽본 78책 등 96책의 존재를 추가로 파악해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26일 밝혔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총 2124책이 국보(제151호)로 지정됐다. 정족산사고본(제151-1)이 1181책, 태백산사고본(제151-2호) 848책, 오대산사고본(제151-3호) 74책, 낙질을 모은 기타 산엽본(散葉本·제151-4호) 21책 등이었다. 이후 2016년 조선왕조실록 책수가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문화재청이 진행한 조사를 통해 최근 96책의 존재가 확인됐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 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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