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엽

조종엽 차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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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종엽 차장입니다.

jjj@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문학/출판25%
역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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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11%
문화 일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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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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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일반4%
산업3%
  • 고구려 한성 함락 이후 한강 하류 유역은 누구 땅이었을까

    475년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킨 뒤 한강 하류 유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통설은 백제가 신라와의 동맹에 힘입어 551년 이 지역을 되찾기까지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이지만 최근에는 백제가 계속 이 지역을 영유했다는 주장도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9월 경기 안성시 도기동에서 발굴된 삼국시대 목책성이 고구려 영토설을 뒷받침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16일 열린 고구려발해학회 학술대회에서 김진영 기남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은 “도기동 목책성은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볼 때 백제가 만든 뒤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이 일대를 점령하면서 고쳐 사용한 것”이라며 “경기 남부 지역에서 고구려가 활용한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성곽”이라고 밝혔다. 양시은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도기동 목책성은 대전 서구 월평동 산성 등 금강 유역 고구려 유적과 한성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금강 일대까지 진출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진 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고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후에도 백제가 한성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해석되는 내용이 20여회에 등장한다. 482년 백제의 영토인 한산성(한성)을 말갈이 습격했다, 이듬해 백제 동성왕이 한산성에 사냥을 나가 군사와 백성을 위문했다, 499년 여름 가뭄이 들자 이 지역 사람 2000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등의 기록이다. 통설은 이들 기록을 믿을 수 없거나, 한성을 잃은 백제가 한성이라는 지명을 남쪽 어딘가로 옮겼다고 본다. 그러나 최근 일부 백제사 연구자들은 △장수왕이 한성을 함락시킨 뒤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고 돌아가 백제가 계속 한강 일대를 점유했다는 설 △백제가 5세기말~6세기초 동성왕 혹은 무령왕 시절에 국력을 회복해 되찾았다는 설 등을 활발하게 제기했다. 한편 학술대회에서는 도기동 목책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웅천책(熊川柵)일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삼국사기에는 마한 왕이 동북 100여 리를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에게 할애했는데 온조가 웅천책을 세우자 위협을 느꼈다는 기록이 있다. 상당수 학자들은 4세기 근초고왕 시절의 일이 시조 온조왕 대에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본다. 김 연구실장은 “웅천은 지금의 안성천”이라며 “도기동 목책성에서 4세기 근초고왕 시절의 유물이 출토돼 웅천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기동 유적은 성벽만 조사한 상태여서 향후 내부 막사나 생활유적 발굴 결과가 주목된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 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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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일상의 기억’으로 쌓은 3622쪽의 성채… 그것은 회복을 향한 투쟁

    표지 사진 속 저자의 인상은 강렬하다. 500원짜리 동전을 끼울 수 있을 것 같은 미간의 주름과 형형한 눈빛은 노르웨이 소설가라기보다 마치 고행을 마친 인도의 현자 같다. 철학적인 스토리가 담겼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처음 책을 펼치면 무슨 소설이 이런가 싶다. 별다른 드라마가 없다. 작가는 그저 어린 시절 TV 뉴스에서 나온 바다 표면에서 사람의 얼굴 형상을 봤던 일, 고교 시절 몰래 술을 마셨던 일, 지금 정신없이 세 아이를 키우는 일 등 본인의 기억과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헌데 읽다 보면 매력 있다. “나는 얼른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불을 껐다. 그러고는 캄캄한 방 안에 누워 어머니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차 문을 닫는 소리, 마당의 자갈 위를 걷는 발소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 어머니가 집 안에 있을 때면 그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최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허은실 시인은 “이 작가는 글쓰기로 기억의 투쟁을 벌이며, 스스로도 몰랐던 자기를 찾아간다”고 말했다. 소설은 독자에게도 잊고 있던 사소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기억이 나중에도 영향을 미치는 원형적인 기억이건 아니건, 오직 독자 자신만의 소유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완고한 것으로 보이는 구조 속에서, 남루함으로 점철된 일상을 보내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이 자기 삶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작가는 일상이라는 벽돌에 성찰이라는 시멘트를 발라 원서 기준으로 총 3622쪽 6권에 이르는 거대한 성을 구축했다. 소설은 ‘당신도 잊고 있을 뿐, 이런 성채를 갖고 있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김민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작가는 개인들이 놓쳐 사라진 것들, 받은 상처를 회복시킨다”고 평했다. 2009∼2011년 출간된 이 소설은 인구 500만여 명의 노르웨이에서 50만 부가 팔렸고, 32개국에서 번역됐다고 한다. 최근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현대 북유럽 문학의 한 대표작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주목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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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술∼술 이책]금수

    중견 건설사 회장의 딸인 아키가 어느 날 경찰의 전화를 받는다. 남편 야스아키가 심하게 다친 채 여관에서 발견됐다는 것. 남편 옆에는 클럽 호스티스가 숨져 있었다. 경찰 수사 결과 호스티스가 야스아키와 동반자살하려 했다는 게 밝혀진다. 행복한 부부라고 믿었던 아키는 충격을 받고 그와 이혼한다. 매듭짓지 않은 실타래는 다시 풀리기 마련. 10년 뒤 단풍이 절정이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알린다. 현실이라면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 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의 원작 소설을 썼던 저자는 수채화 같은 문체로 환상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오는 과정을 드러낸다. 1만2000원.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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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는 사회를 수동적으로 만들어”

    한국 사람들은 요즘 두렵다. 북한이 또 핵실험을 했고, 먹을거리엔 못 먹을 게 들어갔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취업준비생들은 언제 일자리를 가질 수 있을지, 근로자들은 다음 달이나 내년에도 그대로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감정사회학’을 연구하는 박형신 박사(54)와 정수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41)는 공포 등 감정의 사회적 작용을 다룬 책 ‘감정은 사회를 어떻게 움직이는가’(한길사·사진)를 최근 냈다. 두 사람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으로 감정을 꼽았다. 2000년대 초반 ‘부자 되세요’ 열풍을 시작으로 광우병 파동, 세월호 참사 애도, 지역갈등, 취업 및 실업 공포 등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주요 현상이 대부분 감정과 밀접히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특히 책은 ‘공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최근 인터뷰에서 이들은 “만연한 공포는 구성원을 순응적으로, 사회를 수동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하위 계층 청년들의 체념이 담긴 ‘금수저, 흙수저’론이 그 예다. 정 교수는 “가족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이 유행어는 가난한 집 청년들이 일찌감치 꿈을 포기하는 ‘체념집단’이 돼 버린 현실을 반영한다”며 “일자리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가 청년의 활력을 빼앗은 것”이라고 말했다. 박 박사는 “고도 경쟁사회 구성원의 불확실한 미래는 사회적 문제임에도 개인적인 무능력 탓으로 다뤄진다”며 “정부는 불확실성에 따른 사회 구성원의 공포를 줄이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감정사회학은 사회 연구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 감정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으로 서구에서는 197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됐다.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에 대한 애도 물결, 미국 9·11테러 이후 공포와 증오 등을 계기로 활성화됐다. 박 박사는 “1987년 이후 형식적 민주화와 시민의식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민주주의가 답보 상태인 것은 합리성만으로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라며 “공포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연구하겠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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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배구조와 통제 시스템으로 본 北韓의 행동

    북한의 행동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6일 4차 핵실험을 단행했지만, 북한은 한동안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떠들기도 했다. 북한이 이처럼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을 자주 하는 이유 등을 통치 체제와 결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나왔다. 안희창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이 최근 출간한 ‘북한의 통치체제: 지배구조와 사회통제’(사진). 북한에서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주민이 아사해도 정권 퇴진 대신 3대 세습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북한의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라는 지배구조와 당근과 채찍을 병용하는 고차원의 사회 통제체제가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일간지 기자와 수석논설위원을 지내며 대북 관계를 20년 이상 다뤄 왔다. 저자는 북한의 문헌과 탈북자 인터뷰 등을 통해 북한 체제를 생생하게 조명했다. 또 ‘혁명적 수령관’과 ‘혁명적 수령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선군정치’ ‘선군사상’ ‘선군혁명 영도’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 자주 혼용되는 북한 체제의 다양한 개념들을 비교 분석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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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치억 교수 “유교 퇴출시키려 공부하다 유학에 빠져”

    “솔직히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맞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 지금도 없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이제는 왜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지 알게 됐어요.” 유학 연구자라고 해 고리타분한 인상일 것이라는 기자의 편견은 빗나갔다. 퇴계 이황의 17대 직계 후손으로 퇴계 철학을 연구하는 이치억 성균관대 초빙교수(41·사진)는 영화배우처럼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생존해 있는 이 교수 부친이 16대 종손이고 이 교수가 차종손(次宗孫)이다. 최근 퇴계학 권위자인 김기현 전북대 윤리교육과 교수와 ‘인생 교과서 퇴계’라는 책을 함께 낸 이 교수는 “‘유교 문화의 퇴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유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종가는 항상 손님에게 문이 열린 집이거든요. 사생활도 없고, ‘너는 앞으로 종손이 될 사람이니 점잖고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장난꾸러기였던 어린 시절에는 너무 큰 무게로 작용했어요.” 20대에는 노장(老莊) 사상이나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철학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는 “지금은 ‘유교에는 버릴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조상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부친이 있는 경북 안동의 고향집에서는 퇴계 선생을 기리는 불천위(不遷位) 제사와 유두차사(流頭茶祀·유두절인 음력 6월 15일에 새로 나온 곡식을 조상에게 올리는 의례)를 비롯해 매년 지내는 제사가 요즘도 10회가 넘는다. 그나마 그가 어렸을 적보다 많이 줄어든 것이다. 그는 자신이든 아내든 제사에 거의 참석한다고 했다. “제사는 우리 존재의 관계성을 횡적으로, 또 종적으로 확인하는 일이죠. 아름다운 문화가 없어지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유학, 그중에서도 조상인 퇴계의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 부친의 우려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 연구 중 퇴계의 철학이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후손 된 도리로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혼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좋아하신다”면서도 “아버지도 퇴계 학문을 많이 공부하셨는데, 내가 쓴 책이 부족하지 않을까 여전히 부담된다”고 말했다. 이번 책은 삶에 관한 질문에 퇴계 대신 답하는 식으로 짜였다. 그는 “주리론(主理論)을 인간에 국한해 설명하자면, 원래 잘못된 사람은 없으며 잘못돼 보이는 것은 자신이 고귀한 본성을 타고났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며 “세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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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경도 오지 유배 부른 ‘백석 비평문’ 발견

    죽음 뒤에서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게 ‘순수’의 운명일까. 광복 뒤 북한에 남았다가 1963년부터 30여 년간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던 천재 시인 백석이 1950년대에 쓴 시 비평문 등 글 4편이 새로 발견됐다. 이번에 발견된 시 비평문은 현재까지 알려진 백석의 유일한 시 비평문이다. 이 비평문은 사회주의 문학의 정치성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훗날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산골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 그의 비극을 예감케 한다. 박태일 경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반년간지 ‘근대서지’ 최근호에 ‘아동문학에 발표된 신인 및 써클 작품들에 대하여―운문’이라는 백석의 비평문 전문과 해설을 실었다. 백석의 비평문은 1956년 북한 조선작가동맹 아동문학분과위원회의 기관지 ‘아동문학’ 12월호에 실린 것으로 해당 내용을 중국 지린(吉林) 성에서 연구했던 박 교수가 최근 확인했다. 백석은 이 글에서 그해 아동문학에 실린 여러 사회주의 성향의 동시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어째서 약속이나 한 듯이 협동조합을 노래한 것들뿐인가”라며 “시를 짓는 이들의 감성이 가난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느낀 시가 아니라 지은 시들이고 아이들의 마음과 지혜의 세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며 “아이들의 시에서 이러한 정치성의 노출은 이롭지 않다”고 강조했다. 백석은 이어 동시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세계와 관계된 시어는 단순 소박 순진해야 하며 맑아서 밑이 환히 꿰뚫려 보이고, 다치면(건드리면) 쨍 소리가 나는 그런 말이어야 할 것”이라며 “문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사회의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을 감동 속에 사색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대회의 스탈린주의 배격 이후 짧은 완화기를 틈타 백석이 모처럼 얻은 발언 기회를 활용해 실은 글”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957년 백석은 ‘부르주아 문학’이라는 비난과 함께 사실상 당의 취조를 받았고 1958년 겨울 삼수갑산(三水甲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오지인 함경남도 삼수군에 ‘현지파견’ 명목의 유배를 간다. 백석은 1995년이나 1996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세상을 뜰 때까지 삼수군을 벗어나지 못했다. 1962년경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시가 발표된 이후에는 공개된 작품이 없다. 박 교수는 이 밖에 1956년 8월호 ‘소년단’에 실린 백석의 동시 ‘소나기’와 산문 ‘착한 일’ ‘징검다리 우(위)에서’도 발견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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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작품선집 시리즈 첫 권 ‘잠(箴), 마음에 놓는 침’ 출간

    한국고전번역원이 고전의 대중화를 목표로 기획한 ‘고전작품선집’ 시리즈의 첫 책으로 ‘잠(箴), 마음에 놓는 침’(사진)을 최근 펴냈다. ‘잠’은 서양의 잠언처럼 스스로를 경계하거나 다른 사람을 훈계하는 전통적 글쓰기 형식이다. 책은 마음 학문 습관 관계를 주제로 옛 선비들의 잠 64편을 묶었다. 조선 학자 정종로(1738∼1816)는 “나는 예리한 검 한 자루 얻었으니 그 뿌리를 잘라 털끝만큼도 남겨 두지 않겠네”라는 잠을 통해 골수에 밴 나쁜 습관을 고치려면 칼로 뿌리를 자르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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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대표가 생존 피해자 할머니들 직접 찾아 사죄문서 전해야”

    《 “주한 일본대사나 그에 상응하는 (일본 정부) 대표자가 생존 피해자 할머니 마흔여섯 분을 직접 찾아가 아베 신조 총리의 서명이 담긴 사죄 문서를 전달해야 합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78)는 7일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합의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합의의 진의를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추가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 정부에 어떤 추가 행동을 제안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와다 교수는 러시아사·북한 현대사 연구자로 평화 운동을 벌여 왔으며, 2010년 ‘한일 강제병합 조약은 무효’라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과 지난해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세계 역사학자들의 공동성명을 이끌었다. 그는 “사죄 내용에 군의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이 명시되지 않았다”면서도 “아베 총리가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한 것은 진일보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와다 교수는 한일 관계의 올바른 회복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 인사의 ‘망언’ 사태 등이 재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향후 일본 정부 인사들은 이번의 사죄를 뒤집고 훼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본보가 한일 합의 발표 전인 지난해 12월 2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연내 타결’보다 5월 전후 개최설이 나온 한일 정상회담에 즈음해 아베 총리가 전향적 입장을 밝힐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와다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아베 총리가 미국의 해결 요구와 한중 정상회담에 압박감을 느껴 결국 문제 해결에 나섰던 것”이라며 “한국 정부는 교섭을 잘해 오다가 마지막에 쫓기듯 합의한 인상이 있다”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위로금’ 성격 여부로 다수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수령을 거부했던 ‘아시아여성기금’에서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3년간 이사로 일했다. 그는 “(기금에 대한) 한국 측의 불만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아시아여성기금은 ‘속죄의 시작’이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는 기금의 실패 원인에 관해 올 상반기에 책을 낼 계획이다. 그는 한일 간 진정한 화해의 실현을 위해서는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조언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 해결로 한일 간 역사 문제의 마침표를 찍자’는 식으로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화해 실현을 위해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무효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도 영유권에 대해 한국 입장을 따르는 등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북한 현대사를 전공한 그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처한 상황에 대해선 “북한 정권이 안정적인 상태로 보이지만 외교가 안 풀려 큰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격(格)에 맞는 대접을 받고, 대미·대일 관계에서 고립을 타파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와다 교수는 “북한은 결국 중국식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과거 베트남전 반대, 한국 민주화 세력과의 연대 등에 힘쓴 노학자의 평생 화두는 동아시아 평화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북한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잘 이끌어야 한다. 한일 간 평화 안보 협력의 일환으로 한국 정부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돕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지금은 유토피아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한국 일본 중국은 동북아 지역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조종엽 jjj@donga.com·노지현 기자}

    • 20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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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평범한 인물 통해 본 미국 사회의 불평등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증거는 절대 없어. 문자해독률은 7위, 수학은 27위, 과학은 22위, 기대수명은 49위, 유아사망률은 178위지. (…) 우리는 딱 세 가지 분야만 세계를 리드하고 있어. 인구당 감옥에 가는 비율, 천사가 진짜라고 믿는 성인 비율, 그리고 국가 방위비.” 미국 드라마 ‘뉴스룸’에서 한 대학생이 “미국이 왜 가장 위대한 나라인지”를 묻자 주인공인 뉴스 앵커가 대답한 것이다. 순위 하나하나는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최강국 미국의 공교육이나 의료보험, 부의 재분배 수준 등이 엉망진창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평범하지만 ‘미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의 인생 역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현대 미국 사회의 불평등이 어떻게 심화되는지 조명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딘 프라이스는 미국 남부의 담배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주유소와 패스트푸드 사업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이윤을 정유회사 등이 가져가고 남는 것이 없었던 차에 2008년 금융위기를 맞고 파산한다. 그는 폐식용유나 카놀라유에서 바이오디젤을 만드는 사업으로 재기하려 하지만 여러 난관에 처한다. 이 밖에 오하이오 주의 제철도시 영스타운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태미 토머스, 워싱턴의 정치세계에 인생을 걸었다가 좌절하는 제프 코너턴 등의 삶이 주요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어떻게 명멸하는지 그려진다. 세 인물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되는 중에 실리콘밸리의 신화와 본질, 인터넷 기업의 흥망, 서브프라임 모기지 열풍 속에서 자행되는 다양한 사기, 월스트리트 점령운동, 토크쇼 진행자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 흑인 여성 오프라 윈프리의 양면성 등을 콜라주처럼 삽입한다. 지은이는 극작가이자 ‘뉴요커’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다. 앞서 이라크전쟁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책 ‘암살자들의 문:이라크의 미국’을 쓰기도 했다. 인터뷰와 조사를 바탕으로 쓰인 논픽션이지만 다양한 인간들에 대한 묘사의 핍진함은 장편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난다. 경작지를 잃은 미국 이주 농민의 고통을 다룬 존 스타인벡의 1939년 소설 ‘분노의 포도’를 연상시킨다는 평가가 과하지 않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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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국 교수 “경쟁과 협동이 결합한 탈물질적 자본주의서 대안 찾아야”

    “철학자이자 비판적 합리주의자인 카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던 1930, 40년대의 과제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이었는데, 지금은 사실상 소멸했죠. 제가 보는 탈근대의 특징은 잡종성(雜種性)입니다.” 아나키즘을 연구해온 김성국 부산대 명예교수(69)가 최근 책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을 펴냈다. 그는 대학에서 불평등 이론과 산업사회학 등을 가르쳤고,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지냈다. 이번 책에서 김 교수는 이른바 잡종사회의 특징으로 타협적 탈국가주의, 협동적 개인주의, 상대적 허무주의, 현세적 신비주의를 꼽았다. 특히 인터넷 혁명으로 시공간이 압축되고 사이버 세계와 현실세계가 중첩되는 오늘날의 ‘잡종사회’는 개인적 자유의 확장에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의 이상에 가깝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무정부주의나 자유연합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국내에 연구자가 드문 편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아나키스트는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약산 김원봉 정도다. 김 교수는 “일제 치하라는 극한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저항은 오늘날의 테러리즘과는 달리 무고한 민간인을 다치게 하지 않고 최소한의 폭력으로 효과를 극대화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책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혼합한 ‘탈물질적 자본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말은 어딘가 ‘검은 백지’ 같은 모순으로 들리기도 한다. “‘공정무역 커피’(원두값을 시세보다 높게 치러 생산 농민의 인건비를 착취하지 않는 커피) 같은 소비 형태도 있잖아요. 사회가 탈물질적으로 변하면 성장 규모는 작아도 분배가 강조된 협동경제의 영향력이 커질 겁니다.” 그는 “모든 잘못을 구조 탓으로 돌리며 복지국가와 공동체에 무한 희망을 기대하지 말고 개인과 자유, 개인들의 자유연합이 지닌 근원적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올해 ‘한국 아나키즘 3부작’을 완성할 계획이다. 일제강점기 신채호 박열 등의 아나키스트 5명을 소개한 ‘한국의 아나키스트’(2007년)가 ‘과거’라면 이번 책이 ‘미래’에 해당한다. ‘현재’에 해당하는 책은 집필 중으로 5·18민주화운동을 국가의 폭력 차원에서 조명하는 등 한국 사회를 아나키스트적 관점에서 들여다볼 계획이다. 평화반핵군축시민연대 공동회장을 맡고 있는 김 교수는 본인이 아나키스트인지를 묻자 “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군비 축소와 군대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줄이는 운동을 벌이고 싶다”고 덧붙였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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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부 문제 연구모임 학자들 “日 법적책임 빠진 합의 파기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국내 학자들은 4일 성명을 내고 “지난해 12월 28일의 한일 외교장관 합의는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한 외교 실책이며 파기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성명에는 김창록(경북대), 양현아 정진성(서울대), 이나영(중앙대), 이신철(성균관대), 이재승 교수(건국대), 조시현 전 건국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이번 합의에는 일본 국가기관의 주체적이고 강제적인 위안부 동원이 언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역사 교육 역시 빠졌다”며 “이는 위안부 피해자 및 그들을 지지해 온 세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돌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 “일본은 법적 책임을 부정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설립한 재단에 출연하는 10억 엔에 대해서도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못 박고 있다”며 “출연금은 실패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과 마찬가지로 도의적 책임에 따른 ‘인도적 지원금’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지속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나카노 도시오(도쿄외국어대), 요네야마 리사 교수(캐나다 토론토대) 등 국내외 위안부 연구자와 단체 활동가 380여 명이 참여하는 연구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4일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문에 대한 입장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가 언급됐지만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사과가 아니고 법적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에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라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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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2만 년 전 에덴동산에 초고대문명이 실재했다”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의 시작보다 1만 년 더 전에 고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초고대문명이 동남아시아와 남미에 존재했다. 그곳이 구약의 아담, 바빌로니아 신화의 오안네스,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 등의 고향이다?’ ‘별종’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공학자가 영화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책까지 여러 권 냈다. 이 책의 저자인 맹성렬 우석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51)는 “20년 전 ‘UFO 신드롬’이라는 책을 썼을 때부터 ‘별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정확한 방위와 모서리각, 내부의 복잡한 통로 등 지나칠 정도로 정밀한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를 건설했고 오늘날에도 가공이 쉽지 않은 화성암을 깎아 돌항아리를 만들었죠. 역사시대 이전에 이미 18세기 초 서구와 비슷한 수준의 과학 문명이 있었던 겁니다.” 저자는 인류학자인 영국 옥스퍼드대 스티븐 오펜하이머 교수의 주장을 따라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모두 동남아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았던 수만 년 전 동남아에 ‘순다랜드’라는 대륙에 준하는 아(亞) 대륙이 있었고, 이곳이 아프리카를 벗어난 현생 인류의 요람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순다랜드인 중 뛰어난 종족이 광물자원을 개발하러 별자리를 보며 대양을 건너 남미 안데스 산맥 중부의 알티플라노 고원에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그곳이 훗날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신들의 고향’이라는 것. “알티플라노 고원에 살던 사람들을 후세인이 신격화한 것이지요. 남미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고, ‘갈대의 평원’과 같은 신화적 모티브가 일치하는 한편 페루어와 수메르어에 유사한 단어가 많다는 것 등은 그들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고도의 기술력을 지닌 문명이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퇴보를 겪은 이유는 뭘까? 저자는 1만5000년 전과 8000년 전 급격한 해수면 상승 탓에 지각변동이 활성화된 게 원인이라고 했다.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유적을 발굴하기 전까지 트로이 문명은 전설에 불과했다. 저자는 여러 단서를 짜 맞춰 가며 논리를 박력 있게 전개한다. 그러나 읽다 보면 ‘뭔가 아니다’ 싶은 구석도 적지 않다. 책이 그저 ‘잘 쓴 소설’에 불과한 게 아닌지 하는 물음에 그는 “지금 알려져 있는 고대 문명이 현대까지 단선적으로 발전했다는 것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며 “기존 통설에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정도라도 만족한다”고 답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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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수립-건국 논쟁,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 건국’은 영문으로는 똑같이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로 번역된다.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한 지금의 논쟁은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책 ‘한국의 정치 70년사’에 ‘건국 논쟁을 통해 되돌아본 대한민국’이란 글을 실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54)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건국 논쟁이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2009∼2012년 국사편찬위원을 지낸 광복과 6·25 전후 한국 정치사 연구의 권위자다. 》정부는 올 9월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하며 검정 교과서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고쳤다. 이에 대해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와 독립운동 역사를 평가절하하는 ‘대한민국 건국’이란 표현의 전 단계”라며 비판했다. 1919년 4월 임정 수립이 곧 ‘건국’이고, 1948년 8월 15일은 38선 이남의 ‘(단독) 정부 수립’에 불과하다는 것이 진보 측의 주장이다. 역사학계는 1948년 8·15를 ‘건국’ 또는 ‘정부 수립’으로 보느냐를 이른바 좌파, 우파(뉴라이트)로 나누는 한 기준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두 용어는 역사적으로 병용돼 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의 현수막에는 ‘정부 수립’이라고 썼지만, 1949년과 1950년 8월 15일에는 각각 ‘민국건설 제1회 기념일’ ‘민국독립 제2회 기념일’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명시했지만, 헌법 ‘개정’이 아니라 새로 만들었다는 뜻의 ‘제헌절’이라는 표현에는 임정과 대한민국 헌정 간의 불연속성이 드러난다. 이 교수는 또 “임정 인사들도 1919년 임정 수립을 완전한 건국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다가올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한 것,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에서 “우리가 처한 단계는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라고 말한 것 등이 그렇다. 진보 측에서 때로 ‘건국’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근래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8월 15일 ‘건국 50주년’을 기념했고, 같은 해 ‘제2건국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교수는 “후백제·후고구려도 건국이라고 지칭하는 마당에 분단국가라고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이 미완의 과제라는 인식도 함께 담는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표현도 제안했다. 이 교수는 현행 교과서 집필 기준인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이 나쁘지 않다고 봤다. ‘대한민국’에 정부를 포괄하는 국가라는 말이 내포돼 있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 간결하다는 것이다. 그는 “1919년이나 1948년 모두 ‘건국’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는데, 상대편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정치 논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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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에 백제門 세운 왕인박사 전도사 윤재명씨 문체부장관 표창 받아

    일본 오사카 히라카타 시 왕인 묘역에 한국 전통 양식의 백제문(百濟門)을 세웠던 윤재명 한일문화친선협회 회장(83·사진)이 24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7·8·10대 국회의원을 지낸 윤 회장은 고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백제 왕인 박사의 정신을 기리는 백제문을 2006년 건립하는 등 왕인 박사와 관련한 각종 기념사업을 벌여왔다. 문체부는 “40년간 왕인 박사를 중심으로 한일 고대사 연구와 민간 교류활동을 활발히 추진해 한일 관계 개선과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이 크다”고 표창 사유를 밝혔다. 윤 회장은 왕인 박사의 유적지가 있는 전남 영암군 등에서 국회의원을 지내다 1976년 정계를 은퇴한 뒤 왕인문화원을 창립하고 ‘소설 왕인 박사’ ‘왕인 박사 전기’ ‘박사 왕인과 일본문화’ 등을 한국과 일본에서 발간하며 왕인 박사를 알리는 데 힘썼다. 윤 회장은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한자 문화권에서 답사 온 사람들이 백제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접할 때면 정치 할 때보다 더 흐뭇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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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강남 사대부들은 왜 대일통을 돕게 됐나

    기자는 올 여름 청나라 융성기를 이끈 강희제(재위 기간 1661∼1722년)를 소재로 한 공연 ‘정성왕조(鼎盛王朝) 강희대전(康熙大典)’을 중국 청더(承德)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강희제의 영토 확장 등 업적을 약 10개의 막으로 나눠 공연했는데 ‘강희제가 강남 지방의 아름다움에 반했다’는 내용이 별도의 막으로 구성돼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보니 강남이 단순히 양쯔 강 남쪽 지방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족과 오랑캐 왕조가 번갈아가며 다스렸다. 황허 유역의 ‘중원’이 특히 그랬다. 그러나 강남은 수려한 경치와 맞물려 사대부가 한족 문화를 고수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표상됐다. 청나라를 비롯한 비(非)한족 왕조는 강남의 한족 사대부를 회유하는 것이 큰 과제였다. “중원의 사람들은 강희제 이전엔 모두가 명나라의 유민이었으나, 강희제 이후로는 청 왕조의 신민이 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쓴 이 표현처럼 이 책은 유학의 ‘도통(道統)’을 지켰던 강남 사대부들이 어떻게 청나라 황제가 이루려는 ‘대일통(大一統)’의 협조자로 변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중화 중심적인 통설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만주족이 한족의 문화에 흡수돼 ‘한화(漢化)’됐다는 것이지만 중국 런민대 교수인 저자의 분석은 다르다. 청 왕조가 일관되게 근검하고 질박한 북방의 생활태도를 강조하고 붕당의 폐해를 들어 명나라 문화를 비판할 때, 명나라의 유민들도 강학의 폐해나 예의의 재건을 주장하며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유사점이 적대적인 그들을 잠재적 동맹관계로 변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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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년 대한민국 각 분야 성과와 과제 총정리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은 광복 70년을 맞아 대한민국 각 분야의 성과와 과제를 정리한 책 ‘한국의 70년’ 시리즈 6권을 21일 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분야는 외교안보, 산림녹화, 정치, 경제발전, 문화, 교육 분야다. 이배용 한중연 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과거 70년을 토대로 미래의 70년을 만들어 나가자는 취지에서 책을 출간했다”며 “필자들이 ‘한강의 기적’이나 ‘세계 유일’과 같은 자화자찬식 표현 없이 자료와 실제 수치를 근거로 광복 이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냉정히 평가했다”고 말했다. 이번 책은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연구자가 집필에 참여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문화 분야 총론을 썼고,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경제 발전)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외교안보와 통일) 이완범 한중연 교수(정치)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교육)가 각 분야의 연구책임을 맡았다. 산림녹화 집필을 총괄한 이경준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한국은 6·25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를 딛고 반세기 만에 산림녹화에 성공했다”며 “이러한 역사를 기록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숲과 사회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중연은 여성과 가족, 스포츠, 의식주 분야의 70년사를 담은 책을 추가로 출간할 계획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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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 교수 “14세기 말 왜구는 日 남북조시대 남조의 무사 집단”

    “고려 말 왜구는 일본 남북조시대 남조의 정규 군사집단입니다. 하지만 ‘황국사관’에 입각한 일본 사학계는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왜구에 관한 논문 9편을 묶어 ‘황국사관과 고려 말 왜구’라는 책을 최근 펴낸 이영 한국방송통신대 일본학과 교수(56)를 23일 만났다. 이 교수는 20년 넘게 왜구를 연구하고 있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임이 극심했다’ 정도만 서술할 뿐 왜구가 왜 생겼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일본의 대마도나 해안 지역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노략질하러 나섰다는 게 왜구에 대한 통상의 인식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왜구의 활동 변화가 일본 남조 고다이고 천황에 충성했던 규슈 지역의 군사 정세 변화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왜구는 남조의 무사들”이라고 말했다. 1376년 11, 12월 왜구가 부산 경남 일대를 노략질한다. 이 교수는 이를 일본 남조가 북조와의 결전을 앞두고 급히 군량미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본다. 이듬해인 1377년 2월에는 충남 당진과 인천 강화도까지 왜구가 나타난다. 이는 1377년 1월 17일 남조가 북조와의 전투에서 패한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해 고려의 물자가 모이는 개경 근처까지 침입해온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남조의 본거지를 북조가 점령한 시기(1381년)와, 왜구의 침입 빈도와 규모가 격감한 시기(1383년)가 비슷한 것도 왜구가 남조 무사라는 방증이 된다. 이 교수는 “1376년 고려 사신이 무로마치 막부(북조)의 장군으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막부) 조정에서 장수를 보내 군사 작전을 하고 있으니 규슈가 통치되면 해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돼 있다”며 “이 역시 왜구가 남조의 무사 집단이라는 명백한 사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사학계는 대체로 왜구가 변방의 ‘해민(海民)’이고, 심지어 화척(백정)이나 제주도민 등 고려인이 왜구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나카무라 히데다카(1902∼1984)다. 이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은 고려 조정이 무능하고 부패해 왜구의 실체가 자국민이라는 것도 파악을 못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 주장의 뿌리가 일본 천황은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메이지 유신 세력의 ‘황국사관’이라고 말했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 세력은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남조의 고다이고 천황과 그를 도운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자신들의 역할 모델로 봤다. 그런 남조의 무사들이 바다 건너 노략질을 하러 다닌 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학계에도 왜구에 고려인과 중국인이 많았다는 주장이 사실처럼 알려져 있다”며 “왜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명과 조선의 건국, 일본 북조의 승리 등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변한 14세기 후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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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은 복음을 ‘동네방네’ 전하는 방법입니다”

    ‘가톨릭 신부가 연극을 연출하는 것도 신기한데, 부조리극을 연출한 건 좀 부조리하지 않나?’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차장 유환민 신부(44)의 연출작 목록에 대표적 부조리극 작가 이오네스코의 ‘왕, 죽어가다’가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1998년 사제 서품을 받은 유 신부는 ‘동네방네’라는 극단을 이끌고 있다. 음악, 미술 등 예술을 하는 신부님들이 적지 않지만 연극은 아무래도 특이하다. 24, 25일 각각 서울 명동대성당과 방배동성당에서 열리는 낭독공연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를 연출하는 그를 21일 명동성당에서 만나봤다. “‘왕, 죽어가다’는 이오네스코가 말년에 며칠간 병으로 거의 죽다 살아난 뒤에 쓴 작품이거든요.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해 허둥대는 왕의 모습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유 신부는 “2012, 2013년 가톨릭에서 망자(亡者)들을 위해 기도하고 죽음을 묵상하는 위령성월인 11월에 공연한 작품”이라며 “충분히 종교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연극을 공부하려고 2003∼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을 다녔다. 주변의 시선은 어땠을까. “‘신선한 발상이고, 가톨릭에 필요하다’고 격려해주신 분들이 있어 교구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상한 놈이 나타났다’는 반응이 일반적이었어요. 교구에 신부가 많아지더니 ‘별놈’이 다 있구나 하는 말도 들었고요.” 유 신부가 처음 연극을 시작한 건 가톨릭대 신학대를 다니던 중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연극은 복음을 ‘동네방네’ 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10∼15세기 가톨릭에서 연극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하는 수단으로 성행했다”며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을 만나는 데도 연극이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제 유 신부는 성극(聖劇)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철거민을 소재로 한 ‘없는 사람들’, 6·25전쟁 당시 배달되지 못한 병사들의 편지를 다룬 ‘달아나라 편지야’ 등을 2011∼2013년 연출했다. 내년에도 가톨릭 순교자에 관한 작품과 구한말 신극을 하는 이들을 소재로 한 ‘한낮에 혼령처럼’을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 중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모습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적 가치를 발견하는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부가 한예종에 들어갔으니 한예종이 선교의 무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아, 이 얘기가 보도되면 혼나겠는데”라며 재학 당시 주변인들에게 세례 받으라고 권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평소 유 신부를 ‘형, 오빠’라고 부르다 신자가 된 연극인이 10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유 신부가 이번에 공연하는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는 기독교의 오래된 전설로 아기 예수를 만나지 못한 동방박사가 준비했던 보물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모두 쓰고 헌신한다는 이야기다. 올해 결성된 서울가톨릭연극협회 회원인 배우 최주봉 등이 출연한다. 성탄절을 맞아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유 신부는 답 대신 극중 대사 한 구절을 소개했다. 뒤늦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난 네 번째 동방박사가 ‘주님께 드릴 선물이 없다’며 탄식하자 하늘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들아, 이렇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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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의 피 흘렸지만, 민주주의는 결국 설득과 협의의 과정”

    정년을 맞아 은퇴한 대학 교수가 프랑스 혁명사를 10부작으로 쓰고 있다. 책 한 권이 대략 200자 원고지 1200장 분량이라고 치면 10부작은 원고지 1만2000장에 이른다. 최근 1부 ‘대서사의 서막’과 2부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을 발간한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65)를 전화로 만나 봤다.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흘린 피가 역사의 추진력으로 작동했지만 새로운 체제는 폭력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민주주의는 결국 ‘설득과 합의’겠지요.”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은 헌정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며 “입법가들이 의회 내에서 서로를 설득하는 의회 활동을 중심으로 혁명사를 짚어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 무기는 사료다. ‘1787년부터 1860년까지 의회 기록’ ‘프랑스 혁명기 의회의 역사’를 비롯한 수많은 프랑스어 사료에 근거를 뒀다. 앙시앵레짐(구체제)에 대한 오해도 고치고 싶다고 했다. 흔히 앙시앵레짐을 혁명이 극복해낸 모순 덩어리로만 보지만 절대 왕정이 후원하는 여러 아카데미에서 활발하게 학술 토론이 벌어지는 등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앙시앵레짐이 사실은 혁명을 품어 낳은 면이 있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그동안 뜻이 모호하거나 잘못 번역된 혁명 기구와 법률 등의 명칭도 이번 기회에 바로잡고 있다. 예를 들면 1790년 제정된 ‘성직자 민사 기본법’(Civil Constitution of Clergy)은 이름만 보면 성직자의 민사소송 절차를 정한 법 같지만 실은 구체제에서 제1신분이었던 성직자를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재산과 직위 임명 등을 통제하는 법이라는 것. 주 교수는 “‘성직자 시민 헌법’이 정확한 용어인데 일본 학자들이 잘못 번역한 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라며 “또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의 ‘구국위원회’를 ‘공안위원회’로 번역하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프랑스 혁명의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1792년 8월 10일 민중들이 국왕이 있는 튈르리 궁으로 진격해 입헌군주정을 사실상 끝낸 ‘제2의 혁명’을 꼽았다. 주 교수는 수년 전 원로 서양사학자인 이광주 인제대 명예교수의 권유로 책 집필을 시작했지만 미뤄두다가 올해 정년을 맞았다고 한다. 탈고한 3, 4권은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고 현재 5권째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앞으로 매년 1권씩 쓸 생각이라고 하니 10부작을 모두 끝내려면 6년은 더 걸릴 예정이다. “마라톤처럼 느껴지지만 어쨌든 골인 지점은 조금씩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이걸 끝내야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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