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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은 한국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기념일’이다. 중국은 올해 2월 이날을 법정 기념일로 처음 지정했다. 중국은 이후 국가주석이 처음 참석한 가운데 ‘7·7사변 기념식’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 자료를 국내외 언론에 공개하는 등 ‘항일 공정(工程)’을 벌이고 있다. 이번 ‘승리기념일’ 행사는 항일 분위기 조성의 정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유일한 ‘항일전쟁승리기념관’이 있는 후난(湖南) 성 즈장둥쭈(芷江侗族) 자치현 치리차오(七里橋)를 찾았다. 》○ ‘일본의 항복은 즈장에서 시작되다’ ‘8년에 걸친 항일 전쟁은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시작해 즈장에서 끝났다.’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후난 성 창사(長沙)에서 50인승 쌍발기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가량 날아가 도착한 즈장. 비교적 외진 이곳은 중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처음 받은 곳이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락 및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고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주리함에서 연합국 대표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장제스(蔣介石) 당시 중화민국 국방최고위원회 위원장은 9월 3일을 경축일로 정하고 사흘간 국기를 게양토록 했다. 이어 9일 장쑤(江蘇) 성 난징(南京)에서 약 20분간 항복 서명식을 가졌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7·7사변’ 이후 벌어진 중일전쟁은 1945년 8월 21∼23일 즈장에서의 ‘수항(受降·항복 접수)’으로 끝났다. 7·7사변은 루거우차오 인근에 주둔한 일본군이 한 병사가 실종되자 “중국이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주변 지역을 점령한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중일전쟁이 촉발됐다. 일본은 이곳에서 중국 전역에 배치된 100여만 일본군의 배치도를 제출하고 무장해제 등 항복 절차에 관한 명령이 적힌 ‘비망록’을 받았다. 중국 내 일본군 항복의 세세한 내용과 난징의 항복 서명식 등이 즈장에서 결정됐다. 수항식을 전후해 중국육군총부도 난징에서 즈장으로 옮겨와 항복 절차를 총지휘했다. 난징 항복 서명식장이었던 중앙군관학교는 지금은 호텔로 바뀌어 흔적도 없어졌다. 하지만 즈장에 항일전쟁승리기념관을 세우고 1년 365일 무료 개방하는 것은 즈장이 이런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백년 치욕을 씻는 곳에 개선문 세우다’ 기념관 정문을 들어서자 높이 8.5m, 폭 10.6m로 ‘중국의 개선문’이라고 불리는 하얀색 석조 ‘수항기념비(受降紀念坊)’가 우뚝 서 있다. 기념관 관리사무소 장즈융(張智勇) 주임은 “기념비에 ‘백 년의 치욕을 씻는 표지’라는 설명을 붙였듯이 즈장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것은 중일전쟁뿐 아니라 100여 년 외침(外侵) 역사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념비 겉모양은 ‘혈(血)’자를 형상화해 피로 얻어낸 승리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기념비에는 ‘국가의 영광을 영원히 역사에 새긴다’ ‘적을 이겨내고 얻어낸 항복 접수를 만방에 알린다’는 등의 문구를 새겼다. 1985년 9월 3일에 문을 연 테마 전시실인 ‘중국인민항전승리수항기념관’의 1층 넓은 홀 정면 벽에는 항복을 받던 장면을 대형 그림으로 재현했다. 국부 쑨원(孫文)의 대형 사진 앞에 4명의 중국과 미국 대표가 앉고 맞은편에 일본 이마이 다케오(今井武夫) 등 4명의 대표가 앉았다. 그림 속 일본 대표는 긴장한 듯 땀을 닦고 있다.○ ‘V’자로 덮은 항복 수락 장소 실제로 ‘항복 수락’ 의식이 있었던 장소는 기념관 맞은편에 ‘중국전구수항전례회장(中國戰區受降典禮會場)’이라는 간판과 함께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건물 기둥에는 “즈장에서의 항복 접수로 일본 제국주의의 철저한 실패를 선고하다” “맹방(盟邦·연합국) 전우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즈장에서의 항복 접수는 중화민족의 반외세 침략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 장을 썼다” 등의 문구가 위아래로 쓰여 있다. 모든 문구 첫 부분에는 승리를 나타내는 ‘V’자를 새겼다. 즈장 인근 창더(常德) 시에서 왔다는 친지융(秦吉勇·42) 씨는 “항복을 받았던 장소는 처음 와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즈장 승리기념관을 듣고 배워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쓰던 의자와 책상, 쑨원의 사진 등이 그대로 있어 당시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하다. 1945년 8월 21일 오전 11시 반 즈장 공항에 도착한 이마이 등 대표단은 항복의 뜻으로 백기(白旗)를 단 차량을 타고 이곳에 오후 3시 40분쯤 도착했다. 일본 대표단 신분 확인과 일본군 병력 배치도 및 항복 절차에 관한 ‘1호 비망록’ 접수 등 첫 의식은 오후 4시부터 1시간가량 진행됐다. 일본 대표단에는 어느 때보다 길고 굴욕적으로 패전의 쓴맛을 보는 순간이었다. 즈장 항복 의식이 열린 좌우의 중국육군총부 등 3곳에는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와 장제스의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다. 당시 일본의 항복은 국민당과 장제스가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항일’에서의 국민당 역할이 재평가받고 있다. 기념관 여성 해설원 류쉬리(劉旭麗) 씨는 “항일 투쟁에 당파가 따로 없었고 국민당이나 장제스 위원장 모두 항일전쟁을 통해 승리를 이룬 같은 중국인”이라고 말했다.○ 왜 즈장인가 즈장은 예부터 ‘전검문호(滇黔門戶·윈난 성과 구이저우 성으로 통하는 문) 전초인후(全楚咽喉·초나라 전체로 통하는 목구멍)’라는 말이 있듯 중국 서남부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장제스가 1936년부터 이곳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항식이 열릴 당시 즈장 공항은 중국에서 상하이(上海) 훙차오(虹橋) 공항 다음으로 커 많은 대표단이 참가할 수 있는 이곳으로 결정됐다. 즈장에서 일본과 중국이 1945년 4월 9일부터 6월 9일까지 ‘최후의 전면전’을 벌인 것도 이곳이 항복 접수 장소로 결정된 이유 중 하나다. ‘샹시(湘西)회전’ 또는 ‘즈장보위전’으로도 불리는 이 전투에서 일본은 1만5676명, 중국은 1만2483명이 숨졌다. 류쉬리 씨는 “관람객이 많을 때는 1시간짜리 해설을 하루에 6, 7회나 한다. 지난 한 해 100만 명가량이 찾아왔는데 올해는 벌써 80만 명이 넘었다”고 말했다. ▼ 12월 13일 ‘난징학살 국가애도일’ 첫 지정 ▼中 정부-언론 항일분위기 띄우기중국은 9월 3일을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로, 12월 13일을 ‘난징대도살 희생자 국가애도일’로 처음 지정하는 등 항일 분위기 고조에 ‘올인’하고 있다. 국가당안국은 지난달 25일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피맺힌 분투-사료 속의 중국의 항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에 대항한 주요 전투 내용과 사진 영상 등을 공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루거우차오 사건(1937년 7월 7일)으로 30일간 하루 한 건씩 공개된다. 국가문서 보존 및 관리를 담당하는 국가당안국은 8월 15일부터는 ‘위대한 승리-중국이 항복을 수락한 당안 24편’을 공개했으며 7월 3일부터 8월 16일까지는 ‘일제 전범 서면 자백서’ 45편을 전범 사진과 함께 하루에 한 편씩 공개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인 8월 15일 관영 런민(人民)일보는 “일본은 과거 침략 역사에 책임을 져야 비로소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며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7·7사변 77주년을 맞아 7월 7일 베이징(北京) 펑타이(豊臺) 구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기념식에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했다. 일본 관동군사령부가 있었던 지린(吉林) 성 창춘(長春)의 당안관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입증하는 자료 등을 올해 잇따라 공개했다. 중국 정부는 6월에는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 올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주최하는 중국은 3일 승전기념 행사 이후에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 분위기 조성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즈장=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22년 전 덩샤오핑(鄧小平) 동지가 선전셴후(深(수,천)仙湖) 식물원에 심은 가오산룽(高山榕) 나무와 1년 전 롄화산(蓮花山) 공원에 시진핑(習近平·사진) 국가주석이 심은 같은 수종의 나무가 모두 우람하게 자라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떠나 역사가 교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인 22일을 앞두고 19일 보도한 ‘개혁 개방의 위대한 기치를 더욱 높이 들자’는 특집 보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 중심에서 선전을 내려다보는 롄화산 공원은 덩의 대형 동상이 서 있어 ‘개혁 개방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 같은 보도는 올해를 ‘심화 개혁 개방의 원년’으로 선포한 시 주석의 반부패 개혁이 덩이 남긴 과제를 계승한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시 주석과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 덩을 동격화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시절에는 없던 일이다. 통신은 2012년 12월 선전을 찾은 시 주석이 덩이 1992년 2월 남순강화를 할 때 심었던 것과 같은 나무를 심고 같은 마을인 ‘뤄후(羅湖)어민촌’을 방문했다고 전했다. “용감히 뼈를 깎는 노력으로 위험한 늪을 건너면 넘지 못할 화염산은 없다”는 시 주석 발언도 “중앙은 돈이 없다. 당신들이 스스로 혈로를 개척하라”는 덩의 발언과 나란히 소개했다. 통신은 또 덩의 개혁 개방으로 발전의 계기를 맞은 상하이(上海)의 푸둥(浦東)에 시 주석이 취임한 뒤 ‘자유무역시험구’가 설치됐고 덩의 남순강화 첫 번째 방문지였던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에 시 주석이 21년 뒤 다시 찾아와 개혁 바람을 일으켰다고 전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세계적인 영화배우 청룽(成龍·본명 팡스룽·房仕龍)과 그의 아들 팡쭈밍(房祖名·32)이 대마초 악연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최근 1, 2년간 통화도 하지 않고 지낼 정도로 사이가 나빠 이번 일로 갈등이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반관영 통신 중국신문망 등은 19일 팡쭈밍과 대만 배우 커전둥(柯震東·23)이 대마초 흡입 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이징(北京) 공안은 8월 초 시민 제보로 유명 배우의 대마초 흡입 사실을 조사해 왔다. 14일 베이징 둥청(東城) 구의 한 발마사지 업소에서 두 사람과 매니저 등 3명을 붙잡았으며 청룽 소유의 팡쭈밍이 거주하는 곳에서 대마 100g가량을 발견했다고 신징(新京)보가 19일 보도했다. 체포 당시 두 사람 모두 대마 흡입 혐의를 부인했으나 소변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신문은 전했다. 커전둥은 행정 구류 14일 처분을 받았으며 대마를 흡입하고 2년간 대마류를 소지한 혐의로 구류 중인 팡쭈밍은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만에서 영화 ‘드래건 블레이드’를 촬영하던 청룽은 아들의 체포 사실이 알려진 뒤 19일 급히 베이징으로 와 구치소를 찾았다고 대만 둥썬(東森)뉴스가 이날 전했다. 특히 청룽은 2009년 중국 국가마약금지위원회의 홍보대사로 위촉돼 활동했으며 지난해에는 “내 아들이 마약 관련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직접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른 꼴이 됐다. 또 청룽은 최근 인터뷰에서 아들과 불화로 1, 2년간 통화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청룽은 과거에도 공개석상에서 “나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아들에게는 한 푼도 남겨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팡쭈밍은 중화권에서 신인 배우로 활동 중이며 커전둥은 2011년 제48회 대만 금마장 영화제와 아시아 필름 어워즈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6월 제28차 ‘세계 약물 남용 및 불법 거래와의 투쟁의 날’(6월 26일)을 앞두고 열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마약범죄 엄단을 지시한 이후 집중적인 마약 단속을 벌이고 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중국 관영 중국중앙(CC)TV는 8일부터 황금시간대인 오후 8시에 덩샤오핑 관련 특집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22일 탄생 110주년을 앞두고 시작된 ‘역사 전환기의 덩샤오핑’이란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모두 48부작으로 주 5일간 방영된다. 이 드라마는 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과 쓰촨 성 정부 및 CCTV가 공동으로 제작한 것으로 덩샤오핑 시대에 대한 시진핑 정부의 평가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는 최근 덩이 모스크바 유학 시절 남긴 ‘공산당 입당 이유’ 자술서 등 희귀 자료나 1978년 제11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 비화 등을 소개했다. 신화통신이나 환추(環球)시보 등 다른 관영 매체들도 일제히 관련 글을 내보내고 있다. 자연히 이런 ‘집중 보도’의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시 주석은 총서기로 취임한 직후인 2012년 12월 첫 지방 시찰지로 광둥(廣東) 성 선전(深(수,천))과 주하이(珠海) 등을 방문했다. 1992년 덩의 남순강화(南巡講話)와 비슷한 여정이다. 이를 두고 CCTV의 덩샤오핑 특집 드라마가 반부패 개혁에 매진하는 시 주석이 개혁의 적통임을 과시하고 부패 척결에 따르는 역풍을 덩의 후광을 통해 돌파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드라마 첫 회에서는 화궈펑(華國鋒) 전 주석이 등장해 ‘정치 금기’를 깼다. 화 전 주석이 드라마에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화 전 주석은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이 “당신이 맡으면 내가 마음이 편하다(니辦事 我放心)”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신뢰를 받아 후계자로 지명됐으나 결국 덩에게 밀려났다. 앞으로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등 중국에서 언급마저 금기시되었던 인물들도 등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각 분야 지도층 1만 명 이상에게 드라마를 보게 한 뒤 (CCTV로) 방영됐다. 더이상 민감한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덩 시대의 부정적 역사의 짐을 덜고 더욱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는 것이자 지도부 간 단결도 중시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 덩샤오핑 탄생 110주년을 계기로 지금의 반부패 개혁도 실패하면 ‘공산당과 국가가 망한다(亡黨亡國)’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광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10주년인 22일을 앞두고 중국중앙(CC)TV와 런민(人民)일보 등 관영 매체들이 그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를 두고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반부패 개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덩샤오핑 띄우기’에 나섰다는 관측들이 많다. 덩샤오핑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과거와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을 짚어본다. 》“덩샤오핑의 은혜에 감사해, 덩의 고향 발전에 공헌하겠다.” “존경하는 덩샤오핑 동지, 광안(廣安) 인민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15일 오전 중국 쓰촨(四川) 성의 성도인 청두(成都)에서 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덩샤오핑의 생가를 찾기 위해 ‘청난(成南) 고속도로’를 달려 광안 시 경계에 들어서자 그의 커다란 얼굴과 함께 이런 문구가 새겨진 붉은색 입간판이 줄지어 나타났다. 광안 시 중심에서 그의 생가가 있는 셰싱(協興) 진 파이팡(牌坊) 촌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크고 작은 깃발과 안내판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택시 지붕 광고판에도 덩의 탄생 110주년 관련 광고가 나왔고 크고 작은 상가들도 자체적으로 추모 간판을 세웠다. ‘중국이 낙후함을 벗어난 데는 마오쩌둥을 잊지 않고, 부를 쌓은 데는 더욱 덩샤오핑을 생각한다(飜身不忘毛澤東 致富更思鄧小平)’는 문구가 파이팡 촌 진입로 입구 양옆에 걸려 있었다. 덩은 ‘선부론(先富論)’을 기치로 사회주의 평등 이념에 집착하지 않고 일부 계층이나 지역부터 먼저 발전하고 이를 파급한다는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웠다. 이는 중국을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시키는 밑바탕도 됐지만 심화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재도구까지 모두 나눠줘라” 833.4m² 면적에 ‘ㄷ’자 모양으로 17개의 방과 창고 등이 배치된 생가는 소지주 집안이었음을 보여준다. 덩은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당시 광안 현 위원회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생가 관리와 관련해 “특별 대접 하지 마라. 일체의 가산은 농민에게 나눠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51년 인근 농민 9가구가 그의 생가로 이사와 살고 중앙 거실 2칸은 사무실로 사용됐다. 생가를 자진 헌납한 조치로 문화대혁명 시절 그가 실각했을 때 집과 가산, 집기 등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됐다. 나눠 받은 농민들이 사용 또는 보관해 나중에 생가를 복원할 때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후 위대한 지도자로서 덩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1980년대 초부터 국내외 언론들과 정치인들이 ‘개혁개방의 뿌리’를 찾고자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이곳에 살던 농민들은 하나둘씩 떠났다. 중앙과 쓰촨 성 정부는 생가를 수리해 ‘고거(故居)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2001년 7월 ‘국가중점문물’로 지정된 생가 정면 중앙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쓴 ‘덩샤오핑 동지 고거’ 편액이 걸려 있다. 그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좌측 방에는 나무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고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의 사진도 걸려 있다. 여성 해설원은 “중국의 운명을 바꾼 지도자의 생가치고는 지극히 소탈하고 간소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덩은 1919년 파리 유학 준비를 위해 청두로 떠난 뒤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찾아오면 현지 관리나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들 유학이 부친의 최고 보람 그의 유골은 1997년 유언에 따라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지만 그의 부친인 덩사오창(鄧紹昌)은 생가 인근에 묻혔다. 부친은 자(字)가 원밍(文明)이어서 덩원밍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50대 남성 천하이쥔(陳海軍) 씨는 “훌륭한 아버지가 위대한 아들을 만들었다”고 칭송했다. 묘비 설명문에도 “청두의 법정대학에 다녀 생각이 개방적이었던 그가 가장 보람 있어 한 일은 샤오핑을 파리에 ‘근공검학(勤工儉學·근면하게 일하면서 검소하게 살며 공부)’ 유학생으로 보낸 것”이라고 적었다. 생가 박물관 내 덩샤오핑의 동상 주변에는 방문객들이 화환이나 꽃다발을 사서 갖다 놓았다. 그의 대형 입상과 그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는 진열관은 탄생 110주년을 맞아 첨단 멀티미디어 안내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잠정 폐쇄됐다. 그 대신 진열관 건물 앞 야외에서 덩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거 박물관 입구에서 생가에 이르는 길이나 동상 주변에는 중앙과 지방기관, 지도자들이 심은 나무가 많았다. 국가통계국의 ‘통계림(林)’처럼 이름도 붙여 놓았다. 이는 덩이 나무심기에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는 1981년 12월 13일 5차 전국인민대표대회 4차회의에서 ‘전 국민 의무 식수 운동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만 11세 이상 국민은 환자나 노약자가 아니면 누구나 한 해에 3∼5그루의 나무를 심도록 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04년 이후 이곳에는 중앙과 지방정부, 주요 인물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나무를 심어 덩의 생가 박물관은 작은 숲을 방불케 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2004년 5월 17일 저장(浙江) 성 서기 시절 관리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저장림’을 조성했다.광안=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보하이 만을 따라 22.5km의 해변을 끼고 있는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의 베이다이허는 중국의 대표적인 해변 휴양지 중 한 곳이다. 면적 약 3000m²의 진시황 행궁 유적지가 말해 주듯 역대 황제들도 이곳을 찾았다. 청나라가 1898년 이곳을 ‘내외국인 별장 주거지’로 지정하면서 1949년까지 719동의 별장이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100여 동이 국가나 시의 문물로 지정돼 있다. 고대로부터 제왕을 뜻하는 숫자인 ‘九五(95)’를 딴 마오쩌둥의 ‘95호 별장’도 있었다. 중국을 침략한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고관과 중국 유명인사의 별장이 함께 있어 이곳은 동서 문화의 교류나 융합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베이다이허가 외부에 널리 알려진 것은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뒤 ‘공산당 지도부의 은밀한 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스위스 다보스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때문에 유명해진 것과 비슷하다. 여름 휴양지로서 최고의 성수기인 7, 8월 이곳에서는 공산당 최고 지도부나 전현직 지도자들이 은밀히 모여 피서도 즐기고 비공식 회의도 갖는다. 회의가 언제 무슨 주제로 며칠간 열렸는지 한 번도 공식 발표된 적은 없다. 베이다이허의 일부 지역이 봉쇄되면 ‘그들만의 회의’가 열리는구나 하고 추측할 뿐이다. 올해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을 주요 화두로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반부패 개혁에 대한 틀을 다지는 회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베이다이허 회의는 1958년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린 것이 ‘1차 회의’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디이차이징(弟一財經) 일보는 공산당 중앙판공청이 1952년 이곳에 있던 공산당 요양원의 관리를 중앙조직부로부터 넘겨받은 뒤 중앙의 간부들에게 1년에 일주일가량 휴가를 보내라고 하면서 ‘베이다이허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유래를 전했다. 전현직 지도부가 일제히 한 휴양지에 모여 비공개 토론을 갖는 베이다이허 회의에는 중국식 사회주의 정치의 키워드 몇 가지가 담겨 있다. 무엇보다 ‘토론과 합의의 정치’다. 퇴임 후 정치에 나서지 않는 것이 관례화된 원로들까지 이 회의에 참석해 전현직을 아우르는 넓은 범위의 지도층이 주요 현안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대외적으로는 화합하는 모양을 연출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퇴임 뒤에도 영향력을 유지하는 ‘원로 정치’의 폐해가 지적되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비밀주의’다. 총서기를 포함한 고위 공산당 지도부 선출이 막후에서 이뤄지듯 베이다이허 회의는 중국 정치가 공산당 엘리트들에 의해 일반 대중에게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밀스럽게 이뤄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없지 않다. 1958년 1차 회의에서 ‘영국을 따라잡는 철강 생산’ 등 ‘대약진 결의’가 나와 그 후 3년간 3000만 명 이상이 굶어 죽는 대재앙을 맞는 원인이 됐다. 후진타오 주석 시절에는 ‘공산당 간부만 호화판 휴가를 즐기느냐’는 비판이 나와 몇 년간 이 회의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몇 년이 지난 뒤 흐지부지됐다. ‘소수 엘리트 비밀회의’가 핵심인 베이다이허 회의는 점차 민주화돼 가는 중국의 정치 사회적 현실과는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정치의식이 높아진 중국 국민이 언제까지 ‘그들만의 회의’를 곱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최근 윈난 성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시 주석 등이 베이다이허에 가지 못했다는 관측이 나왔다. 시진핑식 개혁의 칼날에 베이다이허 회의도 계속 살아남을지 지켜볼 일이다.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bonhong@donga.com}

중국 동북 랴오닝(遼寧) 성 선양(瀋陽)에서 대학을 졸업한 러우쑹(肉松)은 가수의 꿈을 안고 베이징(北京)에 왔다. 노래를 부를 술집을 찾아다녔지만 러우 같은 신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몇 달이 지나자 휴지 한 장 살 돈이 없다. 컨더지(肯德基·KFC의 중국식 이름) 화장실에 가서 ‘훔쳐’ 쓴다. 마침 같은 동북지방 출신의 한 식당 사장이 노래를 부르고 팁을 받으라고 하지만 손님이 거의 없다. 중국식 소주인 얼궈터우(二鍋頭) 한 병 살 수 있으면 다행이다. 그래! 화랑이 밀집한 베이징의 예술구인 차오양(朝陽) 구의 ‘798거리’에 가면 새로 문을 여는 화랑이 관람객에게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무료로 제공한다. 아무렇게나 만든 명함을 넣고 이곳저곳을 유격대식으로 다닌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래도 꿈이 없으면 소금에 절인 생선(죽은 생선을 비유한 표현)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되뇐다. 바링허우(八零後·1980년대 출생자) 작가 쓰번진(私奔錦·사진)이 올해 5월 내놓은 신간 ‘베이징, 너는 내가 오늘 밤 이룰 수 없는 꿈(北京, 니是我今夜不及的夢)’에 등장하는 베이징의 청춘들은 대개 이런 유형이다. 이 책은 ‘베이징에 너와 나밖에 없다’라는 이름의 전자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던 작품을 보완해 나왔다.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든다. 특히 청춘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든다. ‘베이징을 떠도는 자’들을 부르는 ‘베이퍄오(北漂)’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 도시는 늙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매일 몰려드는 청춘이 있기 때문이다”는 말은 베이징에 딱 맞는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베이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을 이루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꿈이 깨어지는지 모른다. 청춘들은 때로는 벗어나 도망가고 싶어 하고 때로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려고 하면서 머뭇거리고, 이런 과정에서 청춘은 흘러간다.” 작가는 대학 교정과 지하실, 구러우(鼓樓) 같은 옛날 건물, 첨단 기술업체들이 모인 중관춘(中關村), 술집 등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바쁜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청춘, 반란, 절망, 분노 등을 담담하게 그린다. 작가 자신도 동북 출신으로 약 1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했다. 그는 “대학에서의 몇 년간 청춘은 얼마나 무력한가, 생활은 얼마나 경박한가, 사회에 들어온 후에는 얼마나 많은 속된 세상 물정을 느껴야 했나. 벗어나고도 숨고도 싶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청춘은 그를 아프게도 하고 생기 돌게 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이상’을 잊지 못하게 했다고 말한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중국 당국이 외국계 자동차 완성차 및 부품업체, 딜러상 등을 대상으로 반독점 조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독일 자동차회사 아우디에 대한 벌금액이 사상 최고액인 18억 위안(약 3006억 원)으로 잠정 결정됐다고 징화(京華)시보가 13일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아우디가 중국에서 판매한 48만8488대 금액의 1% 정도에 해당한다. 반독점 행위에 법적으로는 판매액의 1∼10%를 물릴 수 있어 비율상 최저치지만 이 금액대로 부과된다면 지금까지 국내외 업체를 통틀어 중국이 부과한 반독점 벌금의 최고 금액이다. 아우디의 11개 딜러에도 최고 5000만 위안이 부과될 것이라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아우디의 어떤 행위가 반독점 위반인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우디가 지정된 딜러에만 정품 부품을 공급하고, 소비자는 그곳에서만 수리를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수리비용이 높아졌다는 이유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런 관행은 수리 품질 보증을 위한 것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이뤄지는 관행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조치는 자동차 가격이나 수리비용을 낮춰 소비자에게 유리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는 아니라는 것이 업계의 의견이다. 이 같은 최근 중국 당국의 외국 기업에 대한 ‘의법 조치’를 보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 독일계 화학회사 A 사장이 10여 년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초상국(招商局·투자 유치 부서) 공무원은 더이상 보이지 않고 환경 노동 등 규제 담당 부서 사람들이 찾아오다가, 사장 개인 비위까지 들먹이며 공안(公安·경찰)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보따리를 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중국 경제가 커지면서 외국 기업이 사업하기가 녹록지 않을 것이라며 이렇게 전망했다. 지금 중국은 외자 유치를 위해 초상국이 원스톱 서비스를 하던 시대가 아니다. 루진융(盧進勇) 대외경제무역대 교수는 “과거 외국 기업은 세금 환경 노동 행정 등에서 특혜를 받았지만 지금은 (국내 기업과) 같은 출발선에 섰다”고 말했다. 냉정히 보면 같은 출발선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외국 기업의 불법·탈법이나 애매한 반독점 행위는 ‘모난 돌이 정 맞듯’ 먼저 규제 감독 당국의 ‘칼날’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 한국 기업은 역사 영토 북한 문제 등 ‘잠재적 지뢰’ 같은 현안들이 불거지면 소비자의 반발 등 또 다른 도전을 맞을 수 있다. 중일 관계 악화로 최근 중국에서 철수하는 일본 기업이 늘고 있다. ‘중국에서 외국 기업의 황금시대는 지나갔다’는 신징(新京)보의 최근 보도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다.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덩샤오핑(鄧小平) 전 최고지도자,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등 3가족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으로부터 반부패 조사 면죄부를 받았다.” 미국에 본부를 둔 중화권 매체인 밍징(明鏡)신문망은 10일 중국 최고 권부인 중난하이(中南海) 소식통과 홍콩 잡지 신스지(新史記) 등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에 대한 공식 조사가 지난달 29일 발표된 뒤 다음번 ‘호랑이’(부패한 고위 관료)가 누가 될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번 보도는 전직 최고지도자의 가족이 조사에서 제외됐음을 시사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3대 로열패밀리’를 제외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밍징은 원자바오(溫家寶) 리펑(李鵬) 전 총리,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허궈창(賀國强) 우관정(吳官正) 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자칭린(賈慶林) 전 상무위원 등 지도층 가족들에 대한 사정이 불시에 철저하게 이뤄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덩샤오핑 자녀들 조사가 면제된 것은 일찌감치 이권 사업에서 손을 뗐고, 현재는 고위직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으며 가족들 모두 최근 수년간 매우 조용하게 살고 있는 점 등 3가지가 고려됐다는 분석이다. 3녀인 덩룽(鄧榕)과 둘째 아들 덩즈팡(鄧質方)은 광둥(廣東) 성 선전(深圳)에서 부동산 사업을 벌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홍콩의 밍징월간이 지난해 2월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덩샤오핑 가족은 시 주석 집권 이후 더욱 ‘자세를 낮추고’ 있고, 자녀들이 시 주석과도 여전히 왕래하고 있는 점 등이 ‘조사 면제’의 이유라고 밍징은 전했다. 장 전 주석의 아들 장몐헝(張棉恒) 상하이과기대 총장은 아버지가 국가주석 시절인 1994년 상하이롄허(上海聯和)투자공사 대표로 취임해 10여 개 기업을 거느리며 정경 유착 의혹을 받았다. 올해 28세인 장 전 주석의 손자 장즈청(張志成)은 2010년 9월 홍콩에 사모펀드 보위(博裕)캐피털을 세운 뒤 막대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장 총장은 5월 시 주석을 안내하는 장면 등이 보도돼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 전 주석의 아들 후하이펑(胡海峰)은 아버지 후광으로 보안장비업체 칭화퉁팡(淸華同方) 회장을 맡는 등 정경 유착설이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5월 저장(浙江) 성 자싱(嘉興) 시 부서기 겸 정법위 서기로 임명돼 칼날을 피했다고 밍징이 전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호주인 부부의 의뢰를 받아 태국인 대리모가 낳은 쌍둥이 중 한 아기가 장애를 앓고 있다는 이유로 친부모로부터 버려져 생명윤리 논란은 물론이고 대리모 제도 폐지 움직임까지 나오고 있다. 2일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가미라는 이름의 이 아기는 지난해 12월 태국 방콕 남동부 촌부리에서 대리모 빠따라몬 찬부아 씨(21)를 통해 쌍둥이 중 아들로 태어났다. 애를 낳지 못하는 호주인 부부가 태국인 대리모에게 1만4900달러(약 1546만 원)를 주기로 하고 출산을 시도했다. 대리모 찬부아 씨는 자신의 두 자녀를 학교에 보낼 교육비를 마련하고 빚도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가미가 태어난 뒤 다운증후군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자 호주인 친부모는 건강한 딸아이만 데려갔다. 친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가미는 현재 찬부아 씨가 양육하고 있다. 가미는 선천성 심장질환도 앓고 있지만 거액의 비용 때문에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최근에는 폐렴에 걸려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대리모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정의 친부모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호주 정부는 논란이 커지자 국외 원정을 통한 대리모 출산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에 가미의 양육 책임까지 떠안은 찬부아 씨는 “아기를 내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른 자식들과 똑같이 대하고 있다”는 말로 주변을 감동시켰다. 딱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2일 오후까지 호주 자선단체의 온라인 모금에 약 500만 밧(약 1억6100만 원)이 모였다. 덕분에 가미는 심장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호주 자선단체 측은 “이 수술로 가미의 미래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대리모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지하 대리모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2일 보도했다.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漢)의 대리모 알선 회사는 자녀를 출산하지 못해 고민하는 고객이 찾아오면 “여러분의 DNA를 가진,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24만 달러(약 2억4900만 원)에 시골 여성의 몸을 통해 낳아주겠다”고 제안하고 있다. 이 회사는 중국 4개 도시에 지점이 있고 연간 300명가량의 아이를 대리모를 통해 출산할 정도로 성업 중이다. 중국에서 지하 대리모 사업이 번창하는 배경에는 공기 물 토양 오염 등으로 불임률이 높아지는 것이 원인이다. 중국 위생부에 따르면 2010년 불임률은 12.5%로 20년 전의 3%에 비해 4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또 한 가정 한 자녀 산아제한 정책이 완화되고 아이를 낳지 못하면 불효라는 문화적 배경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은 한 해 1만 명 이상이 대리모를 통해 태어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 위생부는 2001년 8월 어떤 형태의 대리모 시술도 불법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수백 개의 대리모 알선 웹사이트가 성업 중이다. 최근에는 명문인 베이징외국어대의 한 여학생이 대리모를 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 왕빈(王彬) 교수(법학)는 “대리모 수요가 있는 만큼 지하시장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생계 등을 위해 대리모를 하겠다는 농촌 처녀가 많은 것도 시장을 받쳐주고 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 조사를 계기로 중국에서 ‘원로 정치’가 끝나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대만 롄허(聯合)보가 31일 보도했다. 신문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원로정치를 끝냈다’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에서 이번 발표가 전직 지도자 등 중국 원로 정치인들이 여름 휴양 도시인 허베이(河北) 성 베이다이허(北戴河)로 대부분 떠난 가운데 이뤄진 점에 주목했다. 통상 주요 결정은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원로들의 의견을 들어 이뤄졌지만 이번에는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또 시 주석이 “정치국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저우융캉 조사에 나선 것은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남으려는 개인적 욕망이 작용한 결과라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31일 보도했다. 한 태자당(원로 개국 공신의 자제) 인사는 신문 인터뷰에서 “시 주석이 저우 전 서기까지 잡아넣는 개혁에 나선 것은 태자당의 일원으로서 부패로 얼룩진 중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또 “덩샤오핑(鄧小平)과 같은 업적을 이뤄 역사적 인물로 남고 싶다는 점도 주요 동기”라고 설명했다. 한편 홍콩 밍(明)보는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위원회 서기가 저우융캉 조사 발표가 나오기 하루 전인 지난달 28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찾아갔다고 보도했다. 왕 서기는 라오스 인민혁명당 총서기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장 전 주석은 반부패의 비조(鼻祖·처음 시작한 인물)”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발언은 반부패 사정의 칼날이 향할 다음 타깃이 장 전 주석이 될 것이라는 항간의 관측이 지나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신문은 분석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베이징(北京) 공안국은 29일 베이징의 반테러 경비 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 중요 전철역은 총기를 휴대하고 순찰하기로 했다. 이는 이날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 등 테러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특히 여름방학 및 휴가철을 맞아 많은 관광객이 베이징으로 몰려들고 있어 대중을 상대로 한 테러가 발생하면 어느 때보다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7월 들어 월∼금요일 평일에도 하루 평균 지하철 이용객은 1000만 명이 넘는다. 베이징 공안은 지하철 보안검색 인원을 검색대마다 현재 2명 남짓에서 3∼5명으로 늘리기로 했다. 특히 지하철 역 구내의 모든 휴지통을 15분마다 검사해 이곳에 폭발물을 설치해 터뜨리는 것을 막기로 했다. 강화된 보안검색을 거부하면 5∼10일의 구류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신징(新京)보가 30일 보도했다. 시 공안당국은 “승객이 안전검사에 응하지 않으면 일단 권고하고 그래도 계속 거부하면 ‘치안관리 처벌법’에 따라 5∼10일의 구류처분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29일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수십 명이 사망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30일 보도했다. 통신 등에 따르면 28일 오전 칼 등 흉기로 무장한 수백 명의 위구르인들이 사처(莎車) 현에서 경찰서와 청사를 습격했다. 차량 30여 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경찰이 이들에게 발포해 20여 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고 통신은 전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팔뚝을 자르는 용기로 보다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 미래를 위해선 반부패의 종점은 없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 인터넷판은 저우융캉(周永康)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에 대한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공식 조사 발표가 나온 지 하루가 지난 30일 이같이 강조했다. 저우 전 서기가 형사 처벌되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비리로 처벌받는 첫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다. 신문은 “‘정치국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말을 깬 것”이라며 “지위고하 없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저우 전 서기의 처벌 수위와 관련해 런민(人民)망은 그에 대한 조사 발표에서 ‘동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점을 주목했다. 저우 전 서기의 혐의가 엄중하며 처벌 수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권력남용 혐의 등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시 서기는 2012년 공식 조사가 시작될 때 ‘동지’라고 불렀으며 출당 조치가 내려진 뒤에야 동지 호칭이 사라졌다. 저우 전 서기 이후 다음 ‘호랑이’(부패한 고위 관료)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에 본부를 둔 뉴스사이트 보쉰(博迅)은 사정의 칼날이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의 비서실장을 지낸 링지화(令計劃) 통일전선공작부장에게 향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베이징의 정치평론가 덩위원(鄧聿文) 씨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모두가 부패했기 때문에 또 다른 (거물급) 인물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보쉰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친누나인 치차오차오(齊橋橋)가 주식 매매와 관련된 의혹 때문에 출국금지가 됐다고 보도했다. 치차오차오와 덩자구이(鄧家貴) 부부는 2012년부터 올해까지 부동산과 광산 등 관련 10개 회사에 투자했던 자산을 처분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이 같은 보도가 사실이면 시 주석이 반부패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 자신의 주변부터 정돈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치차오차오는 문화대혁명 때 탄압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성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시 주석이 저우 전 서기에게까지 칼을 빼든 것은 큰 호랑이를 방치하고는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위협하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시 주석은 2012년 11월 총서기에 선출된 뒤 “부패 척결이 되지 않으면 당도 국가도 망한다(亡黨亡國)”고 강조해 왔다. FT는 “저우 전 서기 처리로 베이징의 정치 드라마는 이제 시작됐다”고 표현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제주도에 99만 m²(약 30만 평)가량의 대지에다 빌라 등을 지으려던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국 교민 S 씨는 요즘 당황하고 있다. 당초 투자 의향을 보였던 중국인들이 “지사가 바뀔 때마다 제도가 달라지는 제주도에 투자해도 되겠느냐”며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베이징칭녠(靑年)보가 ‘제주도가 중국 자본투자에 볜롄(變검·변검)하나?’라는 기사를 내보낸 뒤 투자와 관련한 제주도 행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변검은 얼굴에 쓴 가면을 순간적으로 바꾸는 중국의 전통 공연으로 행정의 연속성이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다. 이 신문은 “원희룡 신임 지사가 투기성 중국 자본에는 반대하며 제주도 전체가 차이나타운이 되는 것을 우려해 중국 기업의 투자에 중지 또는 재검토 통보를 내렸다”며 “주한 중국대사관이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이어 신문은 “한국에서도 다른 외국 기업 투자가들의 한국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 국영 라디오 방송 인터넷판인 중국광보왕(廣播網)도 “원 지사는 대부분의 중국 투자가 투기자본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중국 언론의 ‘한국 투자 경계령’은 제주도가 5월 28일 건축설계 변경 허가를 내준 ‘제주드림타워’의 건축허가를 전면 재검토하고 있는 것이 주요 이유다. 중국 굴지의 부동산 개발그룹인 상하이 뤼디그룹이 롯데관광개발 자회사인 동화투자개발과 합작으로 제주시 노형동에 짓고 있는 제주드림타워는 지하 5층, 지상 56층의 제주 최고층 빌딩이다. 2017년까지 약 1조 원을 투자해 호텔과 콘도미니엄 2개동, 외국인 전용 카지노 등이 들어설 계획이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일부 도민은 교통 정체와 경관 파괴, 초고층 빌딩의 안전 문제 등을 들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원 지사는 신동아 최근호 인터뷰에서 “뤼디그룹과 재협상하고 상생할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제주도 관계자는 2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미 내려진 행정조치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허가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라며 “상호 협의를 통해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중국계 부동산 업체인 L사가 서귀포시 안덕면 ‘신화역사공원’ 내에 건립을 추진 중이던 ‘리조트월드 제주’ 사업도 지난달 24일로 예정됐던 기공식이 취소됐다. 유니버설스튜디오형 월드테마파크 등이 ‘신화역사공원’이라는 이름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건축허가 신청 면적이 사업승인 면적과 다르다는 이유로 보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들은 “중국 자본이 매입한 토지는 제주도의 0.16%에 불과하고, 지난해 181만 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제주도를 찾았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중국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본 투자에 부정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민 S 씨는 “원 지사가 31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어떤 발표를 할지 중국 투자가들이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중국 당국이 29일 저우융캉(周永康) 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원회 서기에 대한 공식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관영 신화통신은 29일 저우 전 서기를 ‘중국공산당 당장(黨章)’과 ‘중국공산당기율검사기관안건검사 공작조례’에 따라 조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억류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진 저우 전 서기 조사가 공식 발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공산당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이 비리 혐의로 처벌받은 전례가 없다. 따라서 저우 전 서기가 사법 처리된다면 파장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반부패 개혁은 한층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시 주석은 지난해 2월 “파리든 호랑이든 다 잡겠다”고 선언하며 반부패 투쟁을 선언했고 수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부패 혐의로 낙마했다. 저우 전 서기는 ‘가장 큰 호랑이’로 평가된다. 저우 전 서기 조사설은 무성했으나 혐의는 뚜렷이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가족과 ‘석유방’ 등 측근들이 줄줄이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3월에는 저우 전 서기의 가족과 측근들로부터 최소 900억 위안(약 14조9130억 원)의 자산을 압수했다는 보도가 나와 부정 축재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의 맏아들인 저우빈(周濱)과 며느리, 사돈인 황위성(黃투生)도 부정축재 혐의로 독방에 감금됐고 둘째 아들인 저우한(周涵)은 미국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저우 전 서기는 베이징(北京) 석유학원을 졸업한 뒤 다칭(大慶) 유전 근무를 시작으로 석유공업부 부부장,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 사장, 국토자원부 부장 등 37년간 에너지 업무를 맡아 석유방 대부로 불린다. 그동안 저우 전 서기는 뇌물수수 등 부패 혐의로 조사설이 나돌았다. 그의 측근이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시 서기가 사법 처리되면서 그의 처벌은 시간문제라는 시각이 많았다. 그의 양대 세력 기반격인 ‘쓰촨(四川)방(쓰촨 성 관료 출신)’과 ‘석유방(석유 업계 관련 인사)’ 인사들이 각종 비리 혐의로 대거 낙마하거나 구속돼 저우 전 서기를 압박하기 위한 사전 조치라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까지 나서 반부패 개혁에 속도 조절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데다 저우 전 서기의 세력이 곳곳에 뻗쳐 있어 실제로 조사 및 처벌이 이뤄질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측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처리는 시 주석 반부패 투쟁의 시금석이 되어 왔다. 결국 그에 대한 조사가 공식 발표된 것은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는 중국 지도부의 특징상 그에 대한 처벌에 합의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저우 전 서기에 대한 공식 조사가 이뤄짐으로써 위법행위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워 나가는 데 큰 이정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10월에 열리는 제18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의 주요 의제도 ‘법치’여서 저우 전 서기 조사 발표는 4중전회의 핵심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벌써부터 저우 전 서기에 이어 그 다음은 누구인지 질문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만큼 ‘저우 전 서기 조사’의 파장은 누구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후 전 국가주석의 비서실장 출신인 링지화(令計劃) 통일전선공작부장은 그의 친형과 매형 등이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를 두고 후 전 주석에게까지 조사가 미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으나 전직 최고지도자 조사는 공산당의 집권 기반까지도 흔들 수 있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중일 정상회담을 희망하고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10가지 질문에 답하라고 요구했다. 호칭은 줄곧 ‘아베 씨’였다. 먼저 △‘아베 씨’는 침략의 정의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고 했는데 그러면 1931년 중국 동북지방 침입, 1937년 난징(南京)대학살은 어떤 각도로 보면 침략이 아닌가 △일왕은 1945년 8월 15일 ‘정전조서’를 내려 무조건 항복했는데 아직 그 조서는 유효한가 △1972년 중일 수교 시 중국 인민에게 끼친 피해에 책임을 느끼고 깊이 반성한다고 했는데 정부 인정 교과서에서 위안부 세균전 난징대학살 등을 왜곡한 것이 반성하는 자세냐고 물었다. 이어 △일본 총리의 부전(不戰) 맹세는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아닌 세계 인민 앞에서 해야 더 적합하지 않은지 △공공연히 주변국을 공격하는데 자신의 역사도 청산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이 있는지 △극단민족주의로 정치자본을 소모하고 군비 확장에 힘써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전 일본과 닮은 것은 아닌지 △일본이 ‘중국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데 자신의 안전을 타국의 불안전한 기초 위에 세워야 ‘정상 국가’가 될 수 있는지도 대답하라고 했다. 또 △‘아베 씨’가 전후체제 탈피를 주장하는데 일본을 다시 ‘상무(尙武·군사력 숭상)’ 국가로 돌리려는 것인지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려 하지만 ‘동상이몽’의 동맹이 얼마나 갈지 △세계가 3차 대전을 피하려고 하는데 일본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무고한 어린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폭력을 제발 멈춰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망자가 1000명을 넘어서자 프란치스코 교황(사진)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정전을 강력 촉구하고 나섰다. 중국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에 특사를 파견했다.○ 즉각적인 정전 촉구 교황은 27일 바티칸 교황궁 창문에서 삼종기도를 집전하면서 “이제는 그만둘 때”라며 가자지구와 이라크,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호소했다. 교황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언급하며 “전쟁을 통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강조했다. 교황은 특히 “목숨을 잃거나 다친 아이, 불구가 된 아이, 고아, 전쟁 잔해를 장난감으로 삼는 아이, 더이상 웃지 않게 된 아이를 생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지구에서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시작된 8일 이후 최소 1062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니세프는 이 가운데 어린이 사망자가 218명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조건 없는 인도주의적 휴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유엔이 제안한 24시간 휴전 연장안을 수용하라고 양측에 촉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8일 긴급회의를 열어 “조건 없이 즉시 정전해야 한다”는 의장 성명을 냈다. 유엔 안보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라마단 이드 기간과 그 이후까지 인도적 정전을 받아들이고 필요한 긴급지원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중국까지 중재자로 나서 15일 이후 중동지역에서 활동해 온 중국의 우쓰커(吳思科) 중동문제 특사는 24일 카타르에서 하마스 지도자 칼리드 미샬을 만나 전쟁 종식 방안을 논의했다. 홍콩의 친중국 언론인 다궁(大公)보는 28일 중국 정부 대표가 하마스 지도자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중국이 대담하게 이-팔 갈등 해소 주선에 나선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중국이 화해 중재자 행보를 통해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서는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이-팔 충돌 해결에 이집트가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하마스의 동지인 무슬림형제단을 축출해 서로 등을 돌렸고 미국에 대한 불신도 커 ‘중동의 중재자’가 없는 틈을 노린다는 것이다. 우 특사는 미샬과 만나 “중국은 조속히 양측이 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에 이르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누구라도 만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이스라엘 공습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가자지구에 인도적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파리=전승훈 raphy@donga.com베이징=구자룡 특파원}

‘평양 건설회사 근로자는 월급 8달러를 받는데 관광가이드 하는 여성은 구치나 프라다 같은 명품을 들고 다닌다.’ 중국 관영 차이나데일리는 27일 평양과 묘향산 등 북한 관광기를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오전 8시 랴오닝(遼寧) 성 단둥(丹東) 역에 모여 10시에 출발했다. 5분 만에 신의주에 도착. 하지만 입국수속과 짐 검사에 2시간이 걸렸다. 평양까지 가는 철로 변은 대부분 농토여서 지루한 풍경이 이어졌다. 농부들은 대부분 손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기차에서 한 산시(山西) 성 출신 중국인 사업가를 만났다. 그는 평양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며 근로자 40명을 고용하고 있다. 근로자 월급은 8달러(약 8200원)라고 했다. 근로자들은 1.6달러(약 1600원)가량만 갖고 나머지는 국가에 상납한다고 말해준다. 오후 7시. 드디어 북한의 수도 평양에 도착했다. 7년 경력의 관광가이드 ‘미스 김’(31)이 유창한 중국어로 안내했다. 그는 진품 구치 가방을 들었고 지갑은 프라다였다. 중국에 출장갔을 때 샀다고 한다. 평양의 중산층 월소득은 600위안(약 9만9500원) 정도라고 했다. 투숙한 대동강 양각도 호텔 30층에서 커튼을 젖히자 평양의 야경이 펼쳐졌다. 서구 언론이 칙칙하다고 묘사한 것과는 달리 고층 빌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네온 불빛도 밝아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밤에 나가 보니 어두웠다. 가로등이 없어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야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호텔 47층에는 회전식 식당, 사우나, 마사지룸, 카지노, 실내 골프장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있었다. 카지노에는 거의 손님이 없었다. 둘째 날, 평양 거리를 구경했다. 평양은 거리에서 상업광고를 볼 수 없는 세계 유일의 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는 비싸지만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평양 기차역의 한 남자는 휴대전화로 자신의 아이와 영상 통화를 했다. 셋째 날 찾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상당수 관광객은 현지 안내원이 김일성 부자 밀랍상에 절을 하라고 해서 불쾌했다고 했다. 절하며 우는 주민이 있어 물으니 미스 김은 “위대한 지도자와 너무 닮아서”라고 설명한다. 평양 개성 판문점 묘향산 등을 둘러보는 3박 4일 북한 관광비용은 2800위안(약 46만4000원)에 이른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 중심의 전쟁이 아니었다. 중국인 수십만 명이 ‘중국인 노동부대(CLC·Chinese Labor Corps)’로 참전했다. 종전 후 일제강점 아래 한국은 민족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26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청나라가 망한 뒤 중화민국 대총통을 지낸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독일이 차지한 산둥(山東) 성 칭다오(靑島)를 돌려받기 위해 1차 대전 초기 연합국 측에 5만 명가량의 군대 파견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연합국은 병력 손실이 커지자 중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중국인 노동부대 1698명은 1916년 8월 24일 톈진에서 프랑스 마르세유로 처음 출발했다. 1차 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 등에 약 14만 명, 러시아에 50만 명가량이 각각 ‘전시 노동자’로 동원됐다. 중국은 1917년 10월 중립을 포기하고 정식으로 연합국 측에 가담했다. 중국인 전시 노동자들은 참호 파기나 탱크 수선, 탄약 운반 등 비전투 요원으로 활약했다.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 주둔한 영국군을 위해 물을 운반하다 상당수가 희생되기도 했다. 전선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잇따랐다. 1917년 2월 17일 독일 잠수함이 프랑스 여객선 아토스호를 몰타 근처에서 침몰시켜 중국 노동자 400∼600명이 숨졌다. ‘전쟁 노역’에 동원된 중국인 중 러시아 서부전선에서만 3만 명가량이 사망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러시아 서부 전선까지 6000km가량의 이동 과정에서는 마치 가축이나 죄수 취급을 당했다고 당시 캐나다의 ‘핼리팩스헤럴드’ 신문은 전했다. 최근 중국에서는 1차 대전 당시 중국인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중국이 승전국이었는데도 전후 처리 과정에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반면에 일본이 칭다오를 손에 넣는 등 많은 이권을 가져간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고조된 ‘항일 분위기’와 관련돼 있다. 한국은 종전 후 독립 요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승전국 27개국 대표가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파리 강화회담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는 같은 해 3·1운동과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23일 대만 펑후(澎湖) 섬 마궁(馬公)공항에 비상 착륙하다 48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한 항공기 사고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 빚어진 것일 수 있다고 롄허(聯合)보가 24일 보도했다. 신문이 입수한 마궁공항 관제 및 기상기록에 따르면 사고 항공기인 푸싱(復興)항공 ATR-72 터보프롭기(편명 GE222)가 이날 비상 착륙을 시도할 때는 악천후로 가시거리가 800피트(약 244m)에 불과했다. 사고 당시 관제 정보에는 ‘800+TSRA’라고 기록돼 있었다. ‘800’은 가시거리, ‘+TSRA’는‘특대(特大) 뇌우’ 상태를 뜻한다. 이런 상황에도 관제 당국이 착륙을 허가한 것은 14년 전 국제항공 관제 규정이 바뀌어 ‘기장이 착륙을 요구하면 날씨를 이유로 공항 당국이 착륙을 거절할 수 없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대만 당국은 가시거리가 1600피트 이내이면 공항을 잠정폐쇄하고 비행기 이착륙을 금지했다. 사고 당시 기상은 제10호 태풍 마트모가 지나간 직후로 강풍이 불고 시간당 59mm의 많은 비가 내리는 한편 천둥과 번개까지 치는 등 착륙에 부적합했다고 대만 기상당국은 밝혔다. 이번 사고가 발생한 펑후 섬 주변에서는 1967년 이래 11차례의 사고가 발생해 289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고 중국라디오방송의 인터넷판인 중국광보왕(廣播網)이 24일 전했다. 2002년 5월 홍콩에서 출발한 중화항공 여객기가 펑후 해역에서 공중분해돼 탑승자 225명 전원이 숨졌으며 이는 대만 항공 역사상 최대 항공사고로 남아 있다. 펑후 열도 주변에서 사고가 잦은 원인에 대해서는 해설이 분분하다. 대만해협 중간에 있는 펑후 열도는 64개 섬으로 이뤄져 있으며 여러 해류가 교차한다. 대만인들 중에는 해협 상공에 기묘한 자기장(磁氣場)이 발생한다는 설도 돌아 이곳 주변을 ‘대만의 버뮤다’라고도 부른다고 중국광보왕은 전했다.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