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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손자인 골로는 숲에 사냥을 나갔다가 아름다운 소녀 멜리장드가 울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골로는 멜리장드를 데려와 신부로 삼지만 멜리장드는 골로의 동생 펠레아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펠레아스가 떠나기로 한 밤, 둘은 서로 껴안고 있다가 골로에게 발각됩니다. 펠레아스는 골로의 칼에 죽고 멜리장드도 아이를 낳은 뒤 죽고 맙니다. 얼마간 뻔한 이야기죠? ‘파랑새’로 유명한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사진)의 희곡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893년)입니다. 이 희곡은 특히 음악사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작곡가 드뷔시가 이를 바탕으로 1902년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발표했고 다음 해 쇤베르크도 교향시를 완성했습니다. 포레는 1898년, 시벨리우스는 1905년 이 희곡을 위한 극음악을 만들었습니다. 극음악이란 연극이 진행되는 사이에 연주하는 음악으로, 오늘날의 영화음악과 비슷합니다. 문학작품이 다양한 음악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구노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가 오페라로 만들었고, 괴테 ‘파우스트’도 오페라와 교향곡으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연극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하는 데 비해 유독 여러 형태의 음악작품으로 옮겨진 점이 특별합니다. 이 작품의 판타지적인 면이 낭만주의 후기 작곡가들의 관심을 끈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판타지적인 면은 등장인물들의 몽환적인 대사 외에 작품 배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실세계의 어디와 닮았는지 알 수 없는 가상의 왕국이 배경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인 포레의 음악에서는 지중해의 온화한 대기와 남국적인 정취가, 핀란드인 시벨리우스에선 찬바람 이는 듯한 북구적 인상이 느껴집니다. 배경이 ‘지중해’나 ‘북유럽’으로 설정되었더라면 둘 중 한 사람은 손을 대지 않았을 듯합니다. KBS교향악단은 6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에서 베르트랑 드 비이 지휘로 포레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를 연주합니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하이라이트도 베이스 연광철 협연으로 연주합니다. 두 작품은 ‘왕가의 불륜에서 빚어지는 비극’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먼 옛날 뻐꾸기와 나이팅게일이 내기를 했습니다. 더 예쁘게 노래하는 쪽이 이기는 걸로요. 누가 심판을 맡을까요? 뻐꾸기는 당나귀에게 선택을 맡기자고 했고 나이팅게일도 동의했습니다. 이유는… 당나귀는 귀가 크니까 소리를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이라나요. 둘의 노래를 들은 당나귀는 말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어려워. 뻐꾸기는 화음도 좋고 박자도 좋아. 그러니, 내 높은 지성으로 말한다. 뻐꾸기가 이겼다!” 말러의 가곡집 ‘아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나오는 가곡 ‘높은 지성에의 찬미’입니다. 독일 민요를 가사로 차용하고 있지만 이 노래에는 ‘비평가’들을 보는 작곡가들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작곡가들이 보기에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시하고, 박자가 맞다 틀리다, 음정이 맞다 같은 ‘말로 표현하기 좋은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는 베크메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노래경연대회의 심사위원장이자 비평가인데, 이 사람은 ‘틀리면 감점’이 모토입니다. 자유롭게 개인의 예술을 펼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바그너는 자신이 혐오하던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사진)의 모습을 베크메서에 투영했다고 합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초고에는 아예 베크메서라는 이름 대신 ‘한슬리크’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죠. 왜 작곡가들이 비평가들을 싫어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죠? 작품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들추는 데 열심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유가 뭘까요. 오늘날 발표되는 창작곡에 대해서는 고전 낭만시대처럼 열심히 단점을 들추는 비평가를 보기 힘듭니다. 콘서트나 음반에 대해서는 보기 민망할 정도로 따가운 비판도 쏟아지는데 말이죠. 하지만 작곡가들이 맹렬한 비판도 감수해야 했던 시절에 비해 오늘날의 창작음악이 청중들과 더 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정명훈 예술감독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말러 교향곡 5번 C샤프단조를 연주합니다. 이 곡의 5악장에는 말러가 비평가들에 대한 씁쓸한 기분을 담았던 가곡 ‘높은 지성에의 찬미’ 선율이 반영되어 있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카를로 브로스키(사진)는 18세기의 전설적인 가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 스페인 왕실의 초청을 받고 건너간 그를 전 유럽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높은 평판은 단지 ‘노래를 잘한다’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계약을 성실하게 지켰고 최선을 다해 공연에 임했습니다. 행동에서도 우아하고 고귀한 풍모가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는 훌륭한 공직자이기도 했습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겼던 그는 작은 선물이라도 들어오면 무조건 돌려보냈습니다. 이름 없고 힘없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다고 합니다. 한 재단사가 그에게서 코트를 주문받고는 옷값을 받지 않겠다며 대신 노래를 한 곡 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노래를 들려준 뒤 “내 청도 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노래를 들려준 ‘대가’로 원래 주문액의 두 배가 넘는 코트 값을 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스페인 펠리페 5세 왕에 이어 페르난도 6세를 섬기면서 그에 대한 신뢰와 평판은 높아져만 갔습니다. 왕이 자리를 비울 때는 고문관 자격으로 중요 인사를 접견했으며, 유명한 아란후에스 궁전의 보수를 감독했고, 마침내 타호 강의 배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지휘해 냄새가 고약했던 강가를 아름답고 말끔한 곳으로 되돌렸습니다. 떠나는 자리도 깔끔했습니다. 평생 연금이 보장됐지만 선대의 이탈리아 취향과 거리를 두려 한 카를로스 3세가 등극하자 그는 새 왕에게 예를 올린 뒤 주저 없이 이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파트리크 바르비에르가 쓴 ‘카스트라토의 역사’(이혜원 옮김·일조각)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브로스키는 ‘남성’이 제거된 거세가수, 즉 카스트라토였고, 그는 오늘날 ‘파리넬리’라는 예명으로 널리 기억되는 그 사람입니다. 30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는 카운터테너 필립 자루스키와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립니다. 오늘날 카스트라토는 사라졌고 ‘완전한 남성’으로서 가성(假聲)으로 높은 소리를 내는 카운터테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공연에서 자루스키는 파리넬리의 스승 포르포라가 제자를 위해 쓴 아리아와, 헨델이 파리넬리의 라이벌 카레스티니를 위해 쓴 아리아를 노래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그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오 나를 사랑하지 말아요!/태양을 사랑하셔요,/금빛 머리칼을 갖고 있으니까요!(…)” 19세기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그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입니다. 프랑스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가 오늘(2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부를 노래 중 한 곡이기도 합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슈만이 곡을 썼습니다. 어? 하고 의아해할 분도 있을 듯합니다. 이 가사는 구스타프 말러의 가곡집 ‘5개의 뤼케르트 노래’ 중 마지막 곡으로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클라라 슈만의 곡 역시 이에 못지않게 아름답고 완숙한 수법으로 쓰인 노래입니다. 말러의 곡을 잘 아는 분이라면 비교해서 듣는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뤼케르트는 오늘날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시인이지만 생전에는 독일 지식인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서정성과 비극성, 힘을 동시에 갖춘 그의 시에 슈베르트, 브람스, 레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버르토크, 볼프 같은 쟁쟁한 작곡가들이 다투어 곡을 붙였습니다. 클라라의 남편 슈만도 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을 여럿 남겼습니다. 동일한 시에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이는 것은 음악사를 통틀어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널리 기억되는 것은 대부분 단 한 곡뿐입니다. 독일 문호인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Nur wer die Sehnsucht kennt)’도 슈만을 비롯한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였지만 오늘날엔 차이콥스키가 러시아 번역가사에 곡을 붙인 것만 즐겨 불리고 있습니다. 음악의 나라로 불리는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굴욕이라고 할까요. 이와 반대로 하나의 곡에 여러 다른 가사가 붙은 경우도 있습니다. 채동선이 곡을 붙인 우리 가곡 ‘고향’이 대표적입니다. 시를 쓴 정지용 시인이 6·25전쟁 당시 북으로 가면서 이 시는 금기의 영역에 속하게 됐고, 이후 이은상 시 ‘그리워’ 또는 박화목 시 ‘망향’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88년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 이 노래는 세 가지 가사로 두루 불리고 있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 모든 꽃들이 피어날 때, 나의 마음에도 사랑이 돋아났노라….” 하이네(사진)의 시에 곡을 붙인 슈만의 가곡집 ‘시인의 사랑’ 첫 곡입니다. 시인이 사랑에 빠졌다가 실망을 겪고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을 특별한 줄거리 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낭만적이죠. 그렇습니다. ‘낭만주의’가 가진 가장 순수한 뜻 그대로 이 작품은 낭만적입니다. 꽃들이 피어나는 독일의 5월은 우리의 4월 날씨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올해도 4월에 ‘시인의 사랑’ 연주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곡을 들을 때 상기해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두 16곡의 가곡이 이어진 이 작품은 각 곡마다 후주(postlude)를 주목해서 듣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 곡의 후주가 길면서도 개성이 또렷하거든요. 후주가 무엇이냐고요? ‘전주’의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수가 노래를 끝낸 뒤 반주만 나오는 부분을 말합니다. ‘시인의 사랑’에서도 마지막 곡 ‘불쾌한 옛 노래’는 특히 유별납니다. 조와 박자까지 바뀐 새로운 선율로 2분이나 되는 긴 후주가 이어집니다. 별개의 곡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시인의 사랑’에서 후주가 이렇게 강조된 이유가 뭘까요. 슈만 자신이 피아노의 음색과 기법에 대해 잘 알았고, 부인 클라라도 피아니스트였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피아노가 ‘반주’를 넘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고 싶었겠죠. 그렇지만 그의 여러 가곡집 중에서도 ‘시인의 사랑’의 후주는 특히 돋보입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여운이 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19일 경기 고양시 고양아람누리 음악당에서 영국 테너 이언 보스트리지가 줄리어스 드레이크 반주로 ‘시인의 사랑’을 노래한다는 소식은 들으셨죠. 18일 서울 신문로 금호아트홀에서 열리는 바리톤 송시웅 독창회에서도 같은 곡이 연주되는데, 반주자의 이름이 눈에 크게 들어옵니다. 이날 반주자인 헬무트 도이치는 세계 가곡 반주계에서 우뚝한 인물로 바리톤 보 스코부스가 노래한 ‘시인의 사랑’ 음반과 올라프 베어가 노래한 슈만 가곡집에서도 반주를 맡았습니다. 27일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테너 김재형이 문정재 피아노 반주로 ‘시인의 사랑’을 노래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김연아가 현역 마지막 무대인 5월 4∼6일 서울 올림픽공원 특설링크 갈라쇼에서 사용할 음악을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 ‘잠들지 말라’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김연아 자신이 항상 연기하고 싶었던 음악이라고 소속사는 설명했습니다. ‘투란도트’의 남자 주인공 칼라프 왕자가 부르는 이 아리아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본래 제목은 ‘잠들지 말라(Nessun Dorma)’입니다. 비밀 맞히기 대결에서 이겨야만 목숨을 지키고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칼라프 왕자가, ‘새벽이 밝아오면 내가 승리할 것’이라며 자신에 차서 ‘이기리라(Vincero)’라고 노래하죠. 이 부분의 높은 B(시)음이 전곡의 절정을 이룹니다.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에서는 금메달리스트였던 일본의 아라카와 시즈카가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이 음악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곡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마지막 ‘빈체로’의 ‘체∼’를 테너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길게 끌기 마련입니다. 길게 연주하라는 ‘페르마타’ 표시가 악보에 있기라도 한 듯이. 그렇지만 악보에 페르마타 표시는 없습니다. 실제 이 부분은 짧은 16분 음표로 노래하도록 되어 있지만 오늘날 이 악보대로 노래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합니다. 오페라 무대는 물론 콩쿠르에서조차 길게 노래하는 것이 용인됩니다. 노래 없이 관현악만으로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노래뿐이 아닙니다. 푸치니의 테너 아리아 중 ‘라보엠’의 ‘그대의 찬 손’,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도 절정의 순간에 음표를 길게 끄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대…’에서는 ‘희망(Speranza)’, ‘별은…’에서는 ‘키스(Baci)’라는 가사 부분이죠. 이 노래들에도 길게 끌라는 표시는 없습니다. 이 노래들 모두 처음에는 푸치니가 쓴 악보대로 노래했다고 합니다. 몇몇 가수들이 길게 음표를 끌어 좋은 반응이 나오자 너나없이 길게 늘여 노래하게 된 거죠. 변칙이 ‘스타일의 변화’로서 용인되게 된 사례라고 할까요. 이런 걸 보면 ‘클래식은 악보를 바꾸지 않고 연주하는 음악’이라는 인식도 바꾸어야 할 듯합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벗들과 수다를 떨던 중 “훌륭한 음악작품을 들을 때면 옛 작곡가에게 e메일을 보내 어떻게 쓴 건지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주소로 보내게?”라는 질문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몇 분의 가상 주소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주소가 아니니 메일은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헨델은 handel@royal.gov.uk로 해보았습니다. 그는 영국 왕 조지 1세의 신하였습니다. 하이든은 작곡가이자 공연기획자였던 페터 잘로몬을 통해 런던에서 활동했으므로 papahaydn@salomon.com으로 했습니다. ‘파파 하이든’은 자애로운 성격이었던 그의 별명입니다. 고전주의 이전의 거의 모든 음악가가 왕실 또는 귀족의 신하였거나 후원자의 도움을 받았지만 모차르트는 드물게 ‘독립 음악가’로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했습니다. 그에겐 과감히 mozart@mozart.com이란 e메일을 붙여보았습니다. 생상스는 saintsaens@societe_nationale_musique.or.fr입니다. 그는 프랑스의 고유한 음악문화를 만들어가자는 취지로 국민음악협회(Soci´et´e Nationale de Musique)를 창립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거장인 베르디와 푸치니는 두 세대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나란히 verdi@casaricordi.co.it, puccini@casaricordi.co.it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카사 리코르디’는 두 사람이 속했던 이탈리아의 악보출판사 겸 음악기획사입니다. 비발디는 고아들을 돌보는 베네치아의 ‘피에타’에서 신부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별명이 ‘빨간 머리 신부(Prete Rosso)’였으니 e메일은 preterosso@pieta_venezia.go.it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옛 소련에서 작곡가들은 작곡가 연맹의 지침에 따라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는 dmitri@composer_union.or.ru입니다. 팬클럽 ‘슈베르티아데’를 갖고 있었던 슈베르트는 andiemusik@schubertiade.net로 해보았습니다. ‘An die Musik(음악에)’는 음악의 ‘힐링’하는 힘을 예찬한 슈베르트의 가곡입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음악사를 살펴보면 유독 이름이 나란히 거론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드뷔시와 라벨,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도니체티와 벨리니가 그런 예죠.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함께 활동했고, 공통된 개성이랄까 특징도 있습니다. 음악사에서의 비중도 한쪽이 크게 기울어짐 없이 비슷합니다. 개인적 친분도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란히 거론되는 이름 중에서도 독일의 중기 낭만주의 거장인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과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활동 시기와 지역도 비슷했고, 둘 다 작곡 외의 특기가 있었던 점도 같습니다. 멘델스존은 지휘자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 당대 지휘 거장이었습니다. 슈만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평론가였습니다. 지휘자로서 멘델스존은 슈만의 신작을 기꺼이 무대에 올렸고, 슈만은 멘델스존을 음악 저널에 널리 소개했습니다. 옛 거장의 잊혀진 명작을 소개하는 데 열심이었다는 점도 비슷했습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찾아내 1829년 역사적 초연을 이뤄냈습니다. 슈만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을 발굴해 1839년 멘델스존의 지휘로 초연되도록 했습니다. 불행히도 두 사람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는 점까지 비슷했습니다. 한 세기 뒤, 나치가 집권한 뒤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렸습니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을 전면 금지한 것입니다. 그 대신 ‘순수 아리아인’ 음악가로 간주된 슈만의 음악은 장려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 계속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면 슈만이 멘델스존의 손을 꼭 잡으면서 “미안하네, 이른바 ‘순수’ 아리아인으로서”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5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갖는 헝가리 출신 피아노 거장 안드라스 시프는 슈만과 멘델스존 곡만으로 프로그램을 짰습니다. 멘델스존 ‘엄격변주곡’ 작품 54와 환상곡 작품 28, 슈만 소나타 작품 11과 ‘교향적 연습곡’ 작품 13을 연주합니다. 두 거장이 기뻐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사순절기를 맞아 국립합창단이 20일 같은 장소에서 ‘마태수난곡’을 연주하는군요. 바흐도 멘델스존에게 거듭 고마워할 것 같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1월 23일,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회를 보러 갔습니다. 협연자는 이 악단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였죠. 코른골트의 협주곡을 화려하게 연주한 뒤 그는 청중의 환호에 앙코르로 화답했습니다. 두 번째 앙코르곡에서 익숙한 선율이 귀를 붙잡았습니다. 도-시-도-라-시-솔-라. 아하. 이 곡은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입니다. 그런데 이 선율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마지막 악장에도 나옵니다. 이 밖에 리스트의 피아노곡 ‘죽음의 춤’,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차이콥스키 ‘만프레드 교향곡’…. 일일이 꼽기가 힘들 지경입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멜로디가, 여러 대가의 작품 속에 반복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선율은 원래 중세 성가 중 진혼미사(레퀴엠)의 부속가(시퀀스) 시작 부분입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분노의 날, 다윗과 시빌이 예언한 바와 같이 세상은 재로 변하리라.’ 무서운 가사를 통해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이런 ‘세상 끝날’의 경고에 매혹되었습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 선율을 흘리면 ‘인간아,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그너는 19세기 말 그의 음악극에서 특정 선율이 나오면 일정한 주인공을 상징하도록 한 ‘시도동기(Leitmotiv)’를 창안했지만 성가 ‘분노의 날’ 선율은 이보다 앞서 여러 작곡가를 통해 ‘죽음과 멸망’을 상징하는 시도동기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중세 성가의 텍스트에는 복음과 구원의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유독 멸망과 죽음을 형상화한 선율이 널리 퍼져나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저도 정답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인간의 속성 자체가, 죽음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프랑스 근대음악의 대가 미셸 플라송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지휘합니다. 마지막 악장은 주인공이 환상 속에서 마녀들의 광란에 뒤섞이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악장에서도 ‘분노의 날’ 선율이 인상 깊게 쓰입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1890년대 후반의 어느 날, 30대의 구스타프 말러가 60대인 요하네스 브람스를 찾았습니다. 브람스는 당대 독일어권 음악계 보수파의 거두였고, 말러는 교향악 분야의 혁신세력을 대표하는 야심만만한 젊은 작곡가였죠. 말러는 젊은 시절의 야심작인 칸타타 ‘탄원의 노래’가 브람스를 비롯한 보수적 심사위원진의 판정 때문에 ‘베토벤상’ 심사에서 떨어진 일도 있었지만, 이후 두 사람은 비교적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개울가를 산책하던 중 브람스는 큰 소리로 작곡계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은 이제 끝났네. 요즘 나오는 작품들은 도대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 없단 말이야.” 그 순간 말러가 개울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기 마지막 물결이 흘러오고 있군요!” “…!” 세상에 마지막 물결이 어디 있겠습니까. 브람스도 허허거리며 불평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브람스의 교향곡 2번과 말러의 교향곡 1번을 생각하게 됩니다. 브람스 곡의 4악장은 중간부에 갑자기 느려지면서 잔잔하게 깔리는 현악 위에 ‘미-시-도-라’, 세 음 낮아졌다 한 음 올라갔다 다시 세 음 낮아지는 선율이 목관으로 나타납니다. 말러 교향곡 1번 첫 악장의 서주부에도 이와 너무나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찬미를 담은 점도 두 작품이 비슷합니다. 브람스의 곡은 황혼을, 말러는 새벽을 나타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우연치고는 묘한 유사성입니다. 혁신가 말러는 첫 번째 교향곡에서 ‘위대한 보수주의자’ 브람스에 대한 오마주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을까요, 또는 단순한 우연이었을 뿐일까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대니얼 하딩 지휘로 내한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합니다. 이틀 앞서 KBS교향악단은 같은 장소에서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합니다. 시간과 여유가 있는 분은 콘서트를 통해 두 작품의 닮은 부분을 마음속에 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저는 브람스와 말러가 세대를 교대하면서 나란히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과 잘츠카머구트 호수지대를 5월에 다녀옵니다. 함께 가실 분? tourdonga.com유윤종 gustav@donga.com}

“우리 아이가 절대음감이 있어요. 음악을 시켜야 할까요?” 음악 전공자들이 종종 듣는 얘기입니다. 과연 절대음감이 음악을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할까요.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부모님 중에 절대음감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분도 많습니다. 절대음감은 영어로 ‘absolute pitch’ 또는 ‘perfect pitch’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절대(완전) 음높이감(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과 관련된 능력에는 박자, 화음을 비롯해 수많은 갈래가 있고, 음높이에 대한 감각은 그 일부일 뿐입니다. 어린이가 멜로디를 듣고 따라 치는 능력이나 선율에 쉽게 반주를 붙이는 감각, 악보를 술술 읽는 능력은 절대음감과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라는 표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해 차원이 다른 천재적 소질처럼 들리죠. 그렇지만 ‘절대’라는 말이 붙은 것은 그것이 비범하게 천재적인 능력이어서가 아니라, 절대음감과 대비되는 ‘상대음감’과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상대음감이란 어떤 음이 다른 음과 비교해 얼마나 높고 낮은지 짚어내는 능력입니다. 절대음감은 다른 음과 비교하지 않고서도 바로 그 음이 어떤 높이인지 알아내는 능력입니다. 상대음감은 절대음감과 별개의 능력이지 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절대음감의 소유자 중에서도 상대음감은 부족한 사람도 많습니다. 게다가 절대음감 자체도 ‘상대적’입니다. 음악학자들의 실험 결과 절대음감을 가진 음대생들도 C, G, F 등 ‘쉬운’음일수록 잘 맞혔고 F#과 같이 상대적으로 드물게 연주되는 음은 틀릴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절대음감이 항상 선천적인 것은 아니며, 훈련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도 물론입니다. 요약하자면, 절대음감은 ‘절대적’이 아니며 수많은 음악적 능력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절대음감이 있어야 음악하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도 아닙니다. 절대음감을 갖지 못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음악가도 많습니다. 음악사상 문헌을 통해 절대음감을 갖췄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대작곡가는 모차르트, 베토벤, 생상스 정도에 불과합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미아정 베토벤 소나타 리사이틀 프로그램에는 베토벤(1770∼1827)의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Die Wut ¨uber den verlorenen Groschen)’라는 곡이 등장합니다. 5분 남짓한 짧은 작품입니다. 이 곡의 원래 이름은 ‘헝가리풍 론도 카프리치오’였습니다. 악보에 적혀 있던 짧은 메모가 오늘날 대신 제목처럼 쓰이고 있죠. 그런데 이 ‘제목’은 베토벤이 아니라 그의 비서였던 안톤(1795∼1864) 신들러가 적어 넣은 것입니다. 신들러는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방대한 필담(筆談) 대화록을 정리하고 그의 전기를 쓴 인물입니다. 고독한 거인의 면모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죠.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 ‘운명’으로 알려진 것이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이 ‘템페스트’로 불리게 된 것도 신들러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교향곡 5번 첫 주제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지 묻자 베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따따따 따∼)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17번에 대해 물었을 때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폭풍)를 읽어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음악학자들은 신들러의 기록이 그대로 믿기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가 베토벤을 12년 모셨다는 주장부터 두 배 부풀린 것이며, 대화록도 많은 부분 위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제는 교향곡 5번을 ‘운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신들러가 적어 넣은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라는 피아노곡 제목도 베토벤의 뜻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곡을 듣다 보면 이 제목은 꽤 적절한 묘사처럼 여겨집니다. 짜증나고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을 묘사하는 데 끌어오면 제격이죠. 20일 연주회에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품들과 소나타 8번 ‘비창’을 비롯한 대곡들을 나란히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소품 중 한 곡은, 베토벤 사후 40년 뒤에야 출판되었고 어느 여성에게 헌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여성이 누구인지 모호해 치열한 연구 주제가 되었던 작품입니다. 연주해보신 일 없으신가요? 그 곡의 제목은 ‘엘리제를 위하여’입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작곡’이란 행위에는 어떤 과정들이 필요할까요. 책상머리나 피아노 앞에 앉아 선율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작곡은 단지 선율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떠오른 선율들을 적절한 구조와 형식으로 길게 펼쳐내고, 화음을 붙이고, 각 성부(聲部)를 어떤 악기들의 조합으로 연주할지 지정해야 합니다. 특히 관현악에서 악기를 지정해 완성된 악보로 만드는 기술 또는 작업을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작곡가가 선율과 형식,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에 두루 능통한 것은 아닙니다.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앨런 길버트 지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피아니스트 오조네 마코토 협연으로 연주하는 거슈윈 ‘랩소디 인 블루’도 오케스트레이션에 남의 손을 빌린 작품입니다. 거슈윈은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악보점이나 극장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음악을 익혔습니다. 이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야심작 ‘랩소디 인 블루’를 구상했지만 제대로 오케스트레이션을 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현악에 일가견이 있던 다른 작곡가 퍼디 그로페에게 마무리 작업을 맡겼습니다. 1924년 발표된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 대성공을 거두었죠. 이후 거슈윈은 관현악법뿐 아니라 화음을 붙이는 화성학도 꼼꼼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두 번째 야심작인 피아노 협주곡 F장조는 자신이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혼자 해냈습니다. 피겨 여왕 김연아가 2010 밴쿠버 겨울올림픽 프리스케이팅 배경음악으로 택했던 그 작품입니다. 그로페는 거슈윈이 완성한 이 작품을 재즈밴드용으로 편곡하기도 했습니다. 거슈윈을 도왔던 그로페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미국 서부의 대자연을 묘사한 관현악 모음곡 ‘그랜드캐니언’을 발표해 주목받는 관현악 거장으로 떠올랐습니다. 대협곡의 일출과 일몰, 큰 비를 묘사한 대작입니다. 이 작품 중 특히 세 번째 악장 ‘산길을 걷다’는 계곡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나귀의 또각또각하는 발굽 소리를 묘사한 선율로 한국인의 귀에도 친근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광고나 영화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왔는데, 요즘엔 조금 뜸하군요.유윤종 gustav@donga.com}

무대음악예술의 꽃인 오페라에는 종종 역사상의 실제인물이 실명으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유명 예술가, 특히 음악가가 오페라에 등장하는 경우는 보기 힘듭니다. ‘오페라 베토벤’ ‘오페라 모차르트’가 있다면 멋진 일이겠지만, 위대한 선배 음악가들의 음악을 직간접으로 인용해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 커서인지 감히 시도해본 작곡가가 없습니다. 하나 예외를 들자면 독일 작곡가 한스 피츠너(1869∼1949)가 작곡한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입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곡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1525∼1594)의 모습을 담은 3막짜리 오페라죠. 이 작품엔 교황이 교회 개혁을 위해 소집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라는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당시 여러 다양한 교회 개혁의 요구와 맞물려 ‘지나치게 복잡한’ 교회음악을 단순하고 간명한 음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그때 교황 비오 4세가 이 사안의 결정권을 가진 추기경들을 초청해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로의 미사’를 들려주었습니다. 복잡한 다성(多聲) 음악과 개혁파들이 요구한 단순한 음악의 장점을 잘 혼합한 음악이었죠. 추기경들은 만족했고, 다성 음악은 그 뒤에도 계속 교회에서 연주될 수 있었습니다. 왜 피츠너는 이런 오페라를 썼을까요?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초반은 그때까지의 고전음악 전통이 권위적이고 형식적이라며 음악의 ‘문법’을 뒤집어엎자는 급진적 전위주의자들의 실험이 왕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전통에 뿌리박고 있었던 피츠너는 이 오페라를 통해 선배 작곡가들의 업적을 존중하자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1917년 이 곡이 뮌헨에서 초연되자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사람들은 금세 ‘피츠너가 자신의 모습을 팔레스트리나에 투영한 거로군’ 하고 알아챘다고 합니다. 이런 사연이 있는 만큼 이 오페라도 20세기 초반 작품으로서는 꽤 ‘보수적’이며 처음 들어도 비교적 이해하기 쉽습니다. 2월 2일은 음악사상의 위대한 절충주의자, 보수주의자였던 팔레스트리나가 세상을 떠난 지 420년이 되는 날입니다. 하루 뒤인 3일은 그의 489번째 생일이기도 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20일 눈을 감은 이탈리아의 대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에 대해 외신들은 ‘민주주의적 지휘거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보스가 아니다. 우리(지휘자와 단원)는 함께 일할 뿐”이라는 그의 말도 주목을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 아바도는 밀라노에서 당대 지휘 거장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의 리허설을 지켜보면서 지휘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단원들에게 욕을 하고 연습장 밖으로 내쫓기까지 하는 모습에는 혐오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토스카니니에 대해서는 그의 NBC교향악단 단원들이 ‘토스카니니가 온다!’라는 말로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했다는 일화도 알려져 있죠. 지휘란 한 사람이 여러 사람 위에 군림하는 행위입니다. 여러 명이 저마다 자신의 음악적 해석을 주장하면 올바른 합주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민주적 지휘’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점잖은 말을 쓰고 온화한 표정으로 단원들을 대하는 게 전부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토스카니니나 푸르트벵글러, 카라얀을 포함한 예전 세대 지휘자들은 먼저 악보를 보고 머릿속에 완벽한 표현을 상상한 뒤 단원의 역량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그 표현을 실제의 연주로 구현했습니다. 아바도의 스타일은 이와 달랐습니다. 자기만이 상상한 표현을 관철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연주 현장에서 발생하는 섬세한 분위기와 그때마다의 영감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바도는 그날그날 현장에 공기처럼 떠도는 단원들의 분위기와 컨디션을 파악해 연주에 반영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톰 서비스가 쓴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아트북스)에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플루트 주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음악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 음악이 알아서 연주되도록 만드는 것 같아요.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에 서서 벌어지는 일을 조율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나 이것은 자연히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몸속에 완전히 담아두고 있습니다.” 아바도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지휘자들이 지난 시대의 독재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조율형’ 지휘자로 각인됐습니다. 생존 거장으로는 로열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인 마리스 얀손스가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아바도가 이 새로운 시대를 앞장서 이끌었고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교향악단 지휘자 여럿이 단원들의 집단행동으로 물러났습니다. 개인적 실수가 이유라고 하지만, 우연인지 그들 대부분이 ‘독재형’ 지휘자로 불렸습니다. 단원들도 대부분 ‘물러난 지휘자의 리더십이 시대에 맞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억해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진정한 ‘민주적’ 마에스트로상(像)은 온화한 표정을 하고 약속된 시간에 연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강압보다는 자연스러운 조율로 음악이 악단에 침투하도록 만드는 데서 나온다는 것 말입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음악사는 수많은 대작곡가들의 이름으로 장식되지만 한편으로는 주목을 덜 받는 조연도 많죠. 영화 ‘아마데우스’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영화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제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읽은 베토벤 전기에 이미 ‘자애로운 살리에리 선생님’으로 등장했거든요.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은 사실일까요? 그가 나이 들어 정신착란 속에서 모차르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뇌까렸던 탓에 독살설이 퍼졌지만, 그것은 오히려 모차르트의 불우한 요절을 애석해했던 그의 ‘따뜻함’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음악사에는 ‘가족 조연’도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지인이었던 작곡가 라흐너 집안이 그렇습니다. 4형제인 테오도어, 프란츠, 이그나츠, 빈첸츠 모두 슈베르트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특히 둘째 프란츠 라흐너(1803∼1890·사진)가 여섯 살 위의 슈베르트와 가장 친했고 작곡가로도 가장 인정을 받았습니다. 슈베르트의 전기를 읽다 보면 그의 이름이 곳곳에서 튀어나옵니다. 슈베르트가 가곡 ‘죽음과 소녀’를 현악4중주로 만들었을 때 라흐너는 ‘특별한 의미는 없는 곡이군’이라고 냉정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결국 슈베르트는 생전에 이 곡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사후 37년 만에 햇볕 아래 나왔던 일도 라흐너와 관계가 있습니다. 지휘자 헤르베크가 오래전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휘텐브레너에게 ‘슈베르트와 라흐너, 또 당신 동생의 곡을 모아 콘서트를 하려 하는데…’라고 말하자 휘텐브레너가 “내게 슈베르트의 미발표 교향곡이 있네”라며 주섬주섬 서랍에서 꺼내 보여준 곡이 ‘미완성 교향곡’이었죠. 프란츠 라흐너는 교향곡 8곡을 비롯해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오늘날 많이 연주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목관 합주곡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오늘날 들어보면 신선한 아이디어가 가득하고 슈베르트의 작품과도 닮았습니다. 마침 20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4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의 막내아우이자 당대에 꽤 유명했던 이그나츠 라흐너도 22일에 121번째 기일을 맞는군요. 얼마 전까지는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인물들이지만, 오늘날 인터넷 세상은 이 ‘조연’ 작곡가들의 작품도 한층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추운 겨울날,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3번 A장조를 듣습니다. 두 번째 악장 스케르초. 피아노의 가만히 두드리는 듯한 반주와 함께 리드미컬한 첼로 선율이 흐릅니다. 함께 듣던 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 음악, 국악 같은데?” 어, 듣다 보니 그러네요. 덩∼ 덩∼ 덩∼따 쿵따…. 국악 무대에서 자주 듣던 자진모리장단과 비슷합니다. 끝을 살짝 들어올리는 첼로의 ‘쿵따’ 리듬이 특히 그렇습니다. 베토벤이 우리 선조들의 악보를 입수해서 연구했나? 비슷한 예가 또 있을까요. 말러의 교향곡 5번 c샤프단조 중에서 3악장 스케르초는 전체 관현악의 휘몰아치는 합주와 광포한 리듬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들을 때마다 우리 굿거리장단을 떠올리게 합니다. 덩기덕 쿵 더러러러…. 말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했으니까 누군가가 채보한 한국음악 장단을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상상은 필요 없죠. 대륙과 시대를 가로지르는 ‘비슷함’은 예술작품 속에서 얼마든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요. 20세기 작곡가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중 ‘별들의 피의 기쁨’ 부분도 자진모리장단을 연상케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메시앙 역시 한국음악을 연구한 바는 없습니다. 이처럼 국악 장단을 연상시키는 서양음악 작품들이 대체로 3박자의 스케르초 악장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닙니다. 세계 여러 문화권의 음악 중에서도 우리 전통음악은 흥겨운 3박자가 발달한 편에 속합니다. 서양음악의 ‘스케르초’는 ‘해학’이란 뜻입니다. 우리 음악이 갖고 있는 해학미와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19세기 말 러시아 체코 등을 필두로 서양음악계에 민족음악 운동이 대두하면서 여러 작곡가가 자국의 고유한 춤곡을 서양음악 전통에 녹여 넣으려 시도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가 서구 음악문화와 접촉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풍요한 3박자 문화의 자산을 이용해 서구인들이 찬탄할 만한 다채로운 스케르초 악장을 써냈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입니다. 11일 오후 서울 신문로 금호아트홀에서 열리는 마유경 첼로 독주회에서는 첼리스트 마유경과 피아니스트 황보영이 위에 소개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3번을 협연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새해가 밝을 때마다 우리 곁을 찾아오는 빈 왈츠와 폴카의 향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입니다. 1939년 새해 전날 콘서트로 시작해 1941년부터 74년째 신년음악회로 열리고 있죠. 요즘은 세계 곳곳에서 이 음악회를 모방해 왈츠와 폴카로 꾸미는 신년음악회가 열립니다. 그렇지만 빈 필 특유의 ‘붕 뜨는 듯한’, 밝고 화사한 음색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빈에서 사용되는 ‘빈식 호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른은 긴 구리관을 둥글게 말아 올린 아름다운 악기죠. 빈 필 신년음악회를 보면 이 호른의 모습이 다른 악단과 다릅니다. 다른 악단의 호른은 구불구불 말린 관이 큰 원 안에 들어가는데, 빈의 호른은 마우스피스(입을 대고 부는 부분) 근처에 두 번 말린 작은 관이 툭 튀어나와 두드러져 보입니다. 겉보기보다는 구조의 차이가 더 큽니다. 다른 악단들이 쓰는 호른은 두 개의 관을 하나로 합체한 ‘더블 호른’이죠. 반면 빈 호른은 기본 관이 하나로 된 19세기 초의 ‘싱글 호른’을 토대로 변형한 것입니다. 마우스피스도 19세기 초 호른과 비슷하게 길고 좁습니다. 악기를 다루기는 어렵지만 더 밝은 소리가 납니다.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서 호른이 다르다고 큰 차이가 날까요. 그렇습니다. 금관악기들은 대체로 소리가 큰 데다 호른은 표준적인 오케스트라 편성에서 4대나 들어갑니다. 금관 중에서도 호른은 소리가 둥글게 잘 퍼져나가 ‘관현악의 용연향(龍涎香)’이라고 불립니다. 향수 성분 중에서 다른 향들을 잘 섞이게 만드는 용연향에 비유한 표현이죠. 그런 만큼 전체 합주의 색깔에 미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저는 2003년 4월 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기억합니다. 마이크를 대고 확성장치를 사용하는 연주회인데 빈 필 소리의 개성이 제대로 전달될까 의심했죠. 그러나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첫 마디부터 빈 필 특유의 그것이었습니다. 역시 빈 호른이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올해도 빈 신년음악회는 1일 빈 무지크페라인잘의 황금홀에서 열렸습니다. 올해는 이스라엘 출신의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대에 섰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올해 연말도 전국 각지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연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7, 28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이 곡을 연주합니다. 이 작품의 4악장은 실러의 시 ‘환희에의 송가(An die Freude, Ode to Joy)’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가사를 들여다볼까요.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 낙원의 딸들이여/ (…) 관습이 준엄히 갈라놓았던 것을 너의 마법은 다시 결합하노라/네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이처럼 기쁨을 통해 국적과 풍습을 넘어 하나가 되는 인류애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가 원래 ‘환희’에의 송가가 아니라 ‘자유’에의 송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1989년 성탄절,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동베를린의 ‘샤우스필하우스’에서 동서독, 미국, 소련, 프랑스 등 다국적 단원들로 구성된 악단을 지휘했습니다. 곡목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번스타인은 가사의 ‘환희(Freude)’를 ‘자유(Freiheit)’로 바꿔 부르게 했습니다. 그는 실러가 이 시를 발표할 당시 억압적인 정치 분위기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원래 썼던 ‘자유’를 ‘환희’로 바꾸었다는 주장을 인용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까요? ‘환희’ ‘기쁨’은 좋은 일이 있을 때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류의 하나 됨 같은 결실을 낳는 ‘원인’으로 보기에는 부자연스럽습니다. 대신 ‘자유’를 통해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말은 문맥상 자연스럽고 당시 독일 지식계의 기류와도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이 주장엔 함정도 있습니다. 비록 ‘심증’이 있더라도, 물증 즉 실러가 당초에 ‘자유’라고 썼다가 고쳤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이 ‘합창교향곡’과 비슷한 스타일로 쓴 ‘합창환상곡’ 가사에도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희열이 행복한 자를 지배하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 ‘기쁨’이 이상적인 인간형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 위대한 교향곡을 듣는 사람 저마다의 마음속에 있을 것 같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우리가 듣는 음악 장르들은 얼마나 오래되었을까요? 오늘날과 같은 여러 악장의 교향곡은 역사가 길어야 3세기를 넘지 않습니다. 오페라는 비교적 기원이 뚜렷해서 1598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그 첫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만 해도 교향곡도, 오페라도 없었던 셈입니다. 이에 비하면 크리스마스 캐럴은 훨씬 유구한 역사를 가졌습니다. 로마시대에 나왔다는 캐럴 중에서도 오늘날 전해지는 곡이 있으니까요. 중세와 르네상스 곡 중에는 16세기 스페인 곡인 ‘리우 리우 치우’처럼 오늘날 연주회 프로그램에 자주 오르는 작품도 많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 역사만 긴 것이 아닙니다. 고전 성가에서 오늘날 걸그룹이나 개그맨이 부르는 노래까지 다양한 형태의 노래가 캐럴로 분류됩니다. 문득 궁금증이 생깁니다. 대작곡가들이 작곡한 캐럴도 있을까요? 예수 탄생을 그린 작품 중에는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있습니다만 캐럴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보다는 음악사의 변방으로 치부돼 온 20세기 초 영국 작곡가들이 캐럴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교향모음곡 ‘행성’의 작곡자로 알려진 홀스트가 로제티의 시에 곡을 붙인 ‘음산한 한겨울에’는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영국인들은 매우 사랑하는 캐럴입니다. 비슷한 시대의 작곡가인 본 윌리엄스도 영국 전통 캐럴을 모아 ‘크리스마스 캐럴 환상곡’이라는 작품으로 발표했습니다. 현대 작곡가인 브리튼은 예수 탄생을 주제로 한 중세 영국 시에 곡을 붙여 ‘캐럴의 축제’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곡은 12, 13일 서울시합창단이 ‘성탄 축하’ 콘서트에서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영국 밖에서는 서울국제음악제를 맞아 내한 중인 현대 폴란드 음악 거장 크지슈토프 팬데레츠키도 초기 작품에 캐럴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교향곡 2번 ‘성탄 교향곡’에 ‘고요한 밤’ 선율을 삽입했죠. 마침 20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KBS교향악단이 그의 교향곡 7번 ‘예루살렘의 7개의 성문’을 한국 초연합니다. 아래 QR코드와 링크를 통해 중세와 현대 영국의 캐럴 곡들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