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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조경(1586∼1669)의 초상화에는 관복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보다 더 눈길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다. 그의 발밑에 깔린 조선시대 카펫 ‘모담(毛담)’이다. 붉은색 배경에 하얀 꽃과 초록색 팔각무늬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모담은 근엄한 인물초상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 그림은 최근 개최된 국립대구박물관의 ‘실로 짠 그림―조선의 카펫, 모담’ 특별전에서 볼 수 있다. 주로 양털이나 염소털로 만든 실과 면실을 엮어 짜는 모담은 바닥의 찬기를 막아주고 집 안을 장식하는 기능을 했다. 직조 시 가로실(씨실)에 색깔이 있는 실을 사용해 다양한 색채와 무늬를 표현했다. 일종의 사치품이었던 모담은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실물이 거의 없다. 18세기부터 온돌이 널리 보급되면서 바닥에 모담을 깔 필요가 없어져서다. 박물관은 개인 수집가가 일본에서 구입한 모담 실물 10점을 확보해 사진 및 그림 20여 점과 함께 전시했다. 전시 유물 중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비와 박쥐무늬 모담’도 눈길을 끈다. 누런색 바탕에 회색 및 흑갈색의 박쥐 다섯 마리가 가운데 원 무늬를 둘러싸고 있다. 박쥐 위아래로는 회색, 흑갈색, 빨간색이 어우러진 나비 한 쌍이 마주 보고 있다. 복을 상징하는 나비와 박쥐를 통해 가정의 안녕을 기원한 것이다. 모담은 17세기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당시 일본에서 ‘조선철’(朝鮮綴·조선의 직물)로 불리며 매년 7월 교토에서 열리는 ‘기온 마쓰리’ 축제에 사용되는 수레를 장식하는 데 쓰였다. 19세기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섯 마리 학과 꽃무늬 모담’도 전시돼 있다. 조선시대 모담은 문헌이나 초상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국내에 남아있는 실물이 거의 없어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전시된 모담 10점도 제작연도와 제작자가 확실하지 않다. 민보라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모담 무늬에 쓰인 간결한 선과 색감, 면의 분할과 비례감은 현대의 디자인 감각과도 통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10월 10일까지. 무료.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여당이 이번 개정안을 끝까지 밀어붙여 통과시키면 우리나라는 외국으로부터 언론 탄압국으로 낙인찍혀 국격이 매우 손상되는 상황이 펼쳐질 겁니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낸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85·사진)는 22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추진을 반대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허 교수는 개정안 조항 다수가 헌법에 위배되는 요소들을 담고 있으며, 개정 과정 또한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해 “입법 독재”에 해당한다며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개정안이 규제하려는 대상부터 모호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법안의 ‘허위·조작 보도’에서 허위와 조작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아 입법의 기본 원칙인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면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법을 언론계가 따를 수 없으며, 애매모호한 개념을 사용하면 권력에 의해 법이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했다. 허 교수는 언론사에 고의·중과실이 있다고 추정하고 입증 책임을 지운 것을 특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민사법이나 형사법의 기본 원칙인 증거법에서 증거를 채택하기 위해서는 허위·조작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것을 전가시켜서 허위·조작이라고 추정을 해놓고, 그 추정을 부인하려면 언론사 또는 언론인이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증거법과 책임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민주당이 법안 수정 과정에서 고의·중과실 추정 주체를 법원으로 명시한 것을 두고 ‘사법의 정치화’를 우려했다. 그는 “헌법에서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한 취지는 사법부가 정치권의 동향을 보면서 판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며 “법원에서 언론의 고의·중과실을 추정하도록 한 것은 사법의 정치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헌법적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열람 차단 청구권에 대해 허 교수는 “언론의 자유에는 국민의 언론 매체 접근권도 포함돼 있다. 기사 열람을 차단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공적 인물 이론에 따라 공인은 일반인보다 비판을 더 많이 수용할 의무가 있고, 선진국에서는 공인 비판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도 인정하지 않는다”며 언론을 대하는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의 특수성도 강조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조선시대 형조판서를 지낸 문신 조경(趙絅·1586~1669)의 초상화 속에는 관복을 갖춰 입고 앉아있는 그의 모습보다 이목을 사로잡는 게 있다. 바로 그의 발밑에 깔려있는 조선시대의 카펫 ‘모담’(毛毯)이다. 붉은색 배경에 하얀 꽃과 초록색 전통무늬가 형형색색 그려져 있다. 모담은 화려하면서도 초상과 조화를 이룬다.‘실로 짠 그림-조선의 카펫, 모담’ 특별전이 10월 10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털실과 면실을 엮어서 짠 모담은 직조할 때 가로실인 씨실에 색깔이 있는 실을 사용해 다양한 색채와 무늬를 표현했다. 하지만 모담은 국내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실물이 거의 없었다. 17세기 이후 조선에 온돌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18세기 무렵부터 바닥에 모담을 깔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 이번 전시에는 국립대구박물관이 국내 개인 수집가로부터 새로 구입한 모담 실물 10점과 관련 사진 자료 등 총 30여 점을 볼 수 있다.조경 초상화가 위치한 전시실 중앙에는 조선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비와 박쥐 무늬 모담’이 있다. 이 모담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모담이다. 소색(素色) 바탕의 모담 가운데 원 모양 전통무늬를 회색과 흑갈색으로 표현된 박쥐 다섯 마리가 둘러싸고 있고, 그 위아래로 회색, 흑갈색, 빨간색이 어우러진 나비 한 쌍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나비는 좋은 운수를, 박쥐는 복을 상징한다. 모담의 무늬를 통해 가정의 안녕을 기원했던 선조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숙명여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박쥐와 사슴무늬 모담’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소색 바탕으로 모담 중앙의 ‘卍’자를 사이에 두고 사슴과 박쥐 각각 한 쌍이 마주보고 있다. 사슴은 우애와 장수를 의미한다.모담은 외교사절인 조선통신사를 통해 1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모담은 일본에서 ‘조선철’(朝鮮綴)이라고 불리며, 일본 3대 축제 중 하나로 교토에서 매년 7월 열리는 기온마쓰리에 사용되는 수레인 야마보코(山鉾)를 장식하는 데 사용됐다. ‘다섯 마리 학과 꽃무늬 모담’ 등 국립대구박물관이 새로 구입한 조선철 10점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19세기 제작된 다섯 마리 학과 꽃무늬 모담은 흙색 배경에 학이 모담의 중앙과 각 모서리에 위치해있고, 학들 사이에 적갈색 꽃무늬가 있다. 화초를 키우며 자연을 감상하던 조선 후기 선조들의 생활양식이 모담에 반영된 것. 민보라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18세기 이후 조선시대에서 모담 사용은 현저히 줄었지만 일본과 교류하면서 일본의 요청에 의해 제작해서 나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국내에 남아있는 실물이 거의 없어 모담 연구는 활발히 이뤄질 수 없었다. 조선시대 모담은 문헌 자료나 일부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전부다. 그에 따라 제작년도 등 모담과 관련한 정보는 추정할 수밖에 없다. 민보라 학예연구사는 “모담의 무늬는 한국적인 소재이면서도 간결한 선과 색감, 면의 분할과 비례감 등이 현대의 디자인 감각과도 통한다”며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잘 몰랐던 모담에 대해 많은 관심과 다양한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무료. 053-768-6051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높이 7.9cm, 길이 12.7cm의 은으로 만든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 정사각형 몸체 위에 거북이가 목을 길게 내밀고 앉아 있다. 1882년(고종 19년) 제작 후 약 140년의 세월을 반영하듯 금도금이 벗겨져 있다. 대군주보와 1740년(영조 16년) 제작된 ‘효종어보(孝宗御寶)’ 등 조선 국새와 어보(御寶·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는 모두 귀뉴(龜紐·거북 모양의 손잡이)를 갖고 있다. 십장생(十長生) 중 하나인 거북이를 통해 왕의 장수를 빌고, 다산(多産)을 통한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다. 문화재청은 올해 6월 조선의 마지막 국새 대군주보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한국문화재재단이 이달 25일 발간하는 월간문화재 봄·여름호 ‘동물의 왕국’은 각종 문화재에 담긴 동물들의 의미를 조명한다. 예컨대 다음 달 중순 야간 개장을 하는 경복궁 곳곳에도 동물 상징이 자리하고 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입구에는 해치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 뿔이 달린 상상의 동물 해치는 왕을 도와 옳고 그름을 가리고, 불의를 보면 뿔로 물리치는 ‘법과 정의의 화신’이다. 경복궁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국보 제223호) 주변에도 22개의 해치상이 있다. 왕실 수호자인 해치를 통해 왕의 영역을 알리는 동시에 근정전을 오가는 대신들이 법과 정의에 따른 정치를 하도록 경계하는 의미를 담았다. 근정전과 더불어 경복궁을 대표하는 경회루(慶會樓·국보 제224호)에는 화재가 끊이지 않던 경복궁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동물이 있다. 경회루는 흥선대원군(1820∼1898)이 경복궁 중건 후 화재를 막기 위해 1867년(고종 4년)에 만든 인공 연못이다. 경회루 북쪽 자시문을 지나 누각으로 향하는 돌다리에는 곰의 몸에 코끼리의 코를 지닌 상상의 동물 ‘불가사리’ 석상이 놓여 있다. 불과 상극인 쇠를 먹는다고 알려진 불가사리를 통해 화재를 막고자 한 선조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과거 높은 위세를 상징하던 동물이 세월이 흘러 재해석되기도 한다. 예컨대 아시아에서 용은 왕을 상징했고, 사신(四神) 중 하나인 청룡은 죽은 이를 보호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대중문화에서 용은 힘을 잃은 무력한 존재로 묘사될 때도 있다.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80)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하쿠’는 강을 수호하는 백룡이지만 마녀 ‘유바바’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그려진다. 동물의 왕국을 기획한 김태영 한국문화재재단 홍보과장은 “동물이 지닌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동물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동물을 통해 대중들이 문화재에 쉽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순조실록에 따르면 1802년 조선 형조판서 조윤대(1748∼1813)는 사신으로 청나라를 방문한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청나라의 서양 선교사에게서 천주교를 들여왔다며 이들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는 글을 당시 황제 가경제(1760∼1820)에게 올린다. 가경제는 “서양인들은 선교를 행한 일이 없다. 조선의 무뢰한들이 몰래 다른 곳에서 교리를 들여와 전파하다가 발각돼 이런 말을 날조하려는 것이니 믿을 수 없다”며 조선이나 천주교 단속을 확실히 하라고 답한다. 조선은 신부가 들어오기 전부터 천주교 신앙이 나타났지만 신부 없이 미사를 드릴 수 없어 최초의 미사는 1795년 중국 베이징 교구의 주문모 신부가 파견돼 거행됐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청나라도 천주교가 탄압을 받았다. 그 와중에 서양 선교사들은 어떻게 중국에 머물며 천주교를 포교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지난달 30일 출간된 신간 ‘건륭제와 천주교’(혜안)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 이준갑 인하대 사학과 교수(60)는 가경제의 아버지 건륭제(1711∼1799) 때 서양 선교사들의 숨통이 트였다고 서술한다. 중국인 천주교 신자는 탄압하면서 서양 선교사에게는 관대했던 건륭제의 이중적 태도를 연구한 그를 13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 교수는 “건륭제는 선교를 금지하면서 자기 측근의 선교사는 보호했다”고 말한다. 통치에 필수적인 천문과 역법에 대해 서양 선교사들이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건륭제는 이들을 심복으로 두고 신뢰했다. 왕의 신뢰는 탄압 속에서도 포교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건륭제는 선교사들이 베이징 천주교당 내에서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도록 허락했고, 중국인이나 타국 사신이 이곳에 드나드는 것을 묵인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1756∼1801)도 1784년(건륭 49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다. 건륭제가 보인 이중성의 원인에는 중국인이 우월하다는 화이론(華夷論)도 있다. 중국인 천주교 신자 400여 명과 선교사 18명이 탄압당한 ‘건륭대교안’(1784∼1786)에서 건륭제는 옥중 사망한 6명을 제외한 선교사들을 모두 사면한다. 이 교수는 “건륭제는 유교를 따르지 않는 서양인에게 유교국가의 법을 적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중국인 차별이 아니라 유교를 따르는 중국인만 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 교수의 연구는 당시의 기축통화 ‘백은(白銀)’이 중국 곳곳으로 유통된 경로를 추적하면서 시작됐다. 무역 자료를 통해 17, 18세기 세계에서 생산된 백은 12만 t 중 절반이 중국으로 유입됐다는 것만 알 수 있었던 그는 천주교 탄압 기록을 분석했다.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통해 선교 자금으로 백은을 들여왔기 때문. 이를 통해 백은이 광저우부터 쑤저우까지 유통됐음을 확인했다. “종교를 돈이라는 세속적인 측면으로 다뤄 신부님들이 안 좋아하실 수도 있죠(웃음). 하지만 앞으로 기존과 다른 접근이 연구에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1999년 2월 28일,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세라(世羅)고 교장 이시카와 도시히로(당시 58세)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히로시마 교육청은 그에게 졸업식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하고 일장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교사들은 “기미가요는 군국주의 잔재”라며 반발했다. 교육당국의 지시와 교사 반발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시카와 교장은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BBC, 가디언에 글을 기고해 온 신간 ‘국가로 듣는 세계사’ 저자는 11개국의 국가(國歌)를 통해 각국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이시카와 교장 사건 얼마 후 일본은 기미가요와 일장기를 공식 국가와 국기로 지정한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일본인임을 자랑스러워해야 일본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기미가요는 이 같은 민족주의 강화의 수단이었다.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기미가요를 서정적인 가사를 지닌 노래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우익단체들은 야스쿠니신사 앞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기미가요를 부른다. 저자는 “기미가요는 아름다운 노래지만 정치에 의해 훼손됐다”고 지적한다. 민족주의 역시 국가처럼 국민을 단합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돼 왔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현실을 부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서강대 사학과 교수로 신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쓴 저자는 홀로코스트와 식민지배의 희생자들이 자신도 가해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지구적 연대를 통한 문제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제목에 나오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희생자를 자의적으로 나눠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명분을 확보하려는 행태를 말한다. 예컨대 2000년 유대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는 ‘예드바브네 학살’을 다룬 단행본 ‘이웃들’을 발표했다. 예드바브네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폴란드의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들이 유대인 16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즘의 희생자로만 여겨진 폴란드가 가해자이기도 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 폴란드는 나치 강요에 의해 학살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며 희생자 민족으로서의 이미지를 지키려 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통해 식민지배의 희생자임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함경도 나남에 거주한 일본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에게 당한 성폭력을 에세이 ‘요코 이야기’를 통해 고발했다. 가해자로서의 한국인이 부각된 것. 이 책은 2005년 국내 발간 후 식민통치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부 국내 언론은 요코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가해의 역사를 가리려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전범국인 동시에 원자폭탄 피해국이다. 1945년 8월 원폭의 기억은 일본 사회의 희생자의식을 강화했다. 우파 정치인들은 유대인과 일본인이 백인 인종주의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2차 대전의 책임은 희생자로서의 기억으로 대체됐다.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할 때 기억의 연대를 향한 첫 관문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 지적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1999년 2월 28일,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세라(世羅)고 교장 이시카와 도시히로(당시 58세)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히로시마 교육청은 그에게 졸업식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하고 일장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교사들은 “기미가요는 군국주의 잔재”라며 반발했다. 교육당국의 지시와 교사 반발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시카와 교장은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BBC, 가디언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 신간 ‘국가로 듣는 세계사’(틈새책방)를 쓴 알렉스 마셜은 11개국의 국가(國歌)를 통해 각국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이시카와 교장 사건 얼마 후 일본은 기미가요와 일장기를 공식 국가와 국기로 지정한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일본인임을 자랑스러워해야 일본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기미가요는 이 같은 민족주의 강화의 수단이었다.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기미가요를 서정적인 가사를 지닌 노래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우익단체들은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기미가요를 부른다. 저자는 “기미가요는 아름다운 노래지만 정치에 의해 훼손됐다”고 지적한다. 민족주의 역시 국가처럼 국민을 단합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돼 왔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현실을 부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신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휴머니스트)를 쓴 임지현 서강대 교수(사학과)는 홀로코스트와 식민지배의 희생자들이 자신도 가해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지구적 연대를 통한 문제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제목에 나오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희생자를 자의적으로 나눠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명분을 확보하려는 행태를 말한다. 예컨대 2000년 유대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는 ‘예드바브네 학살’을 다룬 단행본 ‘이웃들’을 발표했다. 예드바브네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폴란드의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들이 유대인 16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즘의 희생자로만 여겨진 폴란드가 가해자이기도 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 폴란드는 나치 강요에 의해 학살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며 희생자 민족으로서의 이미지를 지키려 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통해 식민지배의 희생자임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함경도 나남에 거주한 일본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에게 당한 성폭력을 에세이 ‘요코 이야기’를 통해 고발했다. 가해자로서의 한국인이 부각된 것. 이 책은 2005년 국내 발간 후 식민통치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부 국내 언론은 요코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가해의 역사를 가리려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전범국인 동시에 원자폭탄 피해국이다. 1945년 8월 원폭의 기억은 일본 사회의 희생자의식을 강화했다. 우파 정치인들은 유대인과 일본인이 백인 인종주의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2차 대전의 책임은 희생자로서의 기억으로 대체됐다.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할 때 기억의 연대를 향한 첫 관문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 지적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같음으로써 서로 구제하면 어떤 환난인들 구제 못하며, 구제하기를 서로 함께하면 어떤 걱정인들 같지 않으랴.” 독립운동가 신규식(1879∼1922)이 ‘동주공제(同舟共濟·같은 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다)’의 뜻으로 1912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를 창립하며 작성한 취지문의 일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신규식은 독립이라는 같은 목표 아래에 모인 이들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신규식은 동제사 창립 3년을 기념해 이 취지문을 손수 붓글씨로 옮겨 썼다. 이 작품을 비롯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에서 펼쳐진 한인 독립운동과 한중 공동 항일투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 60점이 전시된다.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기념관이 13일부터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개최하는 ‘연합국과 함께한 독립운동: 한·중 공동 항전’ 특별기획전에서다. 상하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중국 내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 이듬해 1월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이 중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상해사변이 발생한다. 당시 푸단대에 재학 중이던 독립운동가 안병무(1912∼1986)는 학생 의용군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는 안병무가 당시에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인 학생 의용군과 서명을 주고받은 수첩이 전시돼있다. 한중 공동 항일투쟁의 기록이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중국 정부의 주요 인사와 교류하기 위해 작성한 서한에 찍은 도장(등록문화재 제440-1호·사진)도 살펴볼 수 있다. 황색 옥석으로 만든 이 도장 윗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김구 선생은 이 도장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된 1940년부터 1945년 귀국할 때까지 사용했다.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광복은 우리가 미국 중국 등과 함께 일제에 맞서 쟁취해낸 성과”라며 “내년이면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한중 공동 항일투쟁의 역사를 주제로 준비한 이번 전시가 양국 간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1944년 6월 6일 0시,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상공. C-47 수송기에 타고 있던 한 남자가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군의관인 한인 2세 프랭크 최(Frank Choy·당시 31세)였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의대를 마치고 레지던트로 일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군에 배치됐다. 약 1년간 의무대에서 훈련을 받은 뒤 공수부대에 자원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낙하산을 편 그와 부대원들은 목표 지점에 착륙하지 못했다. 소 목장에 떨어진 그는 수류탄과 금속제 피아 식별기를 손에 쥐고 다급히 수풀로 몸을 숨겼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밤을 새우면서 훈련 내용을 계속 떠올렸다. ‘피아 식별기를 한 번 눌렀을 때 건너편에서 두 번 누르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그곳으로 수류탄을 던져라.’ 새벽녘 다른 부대원들과 합류해 농가에 숨어든 그는 연합군 부대의 상륙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수행했다. 2002년 사망한 그는 회고록에 “수송기를 타고 노르망디로 이동할 때 대공포의 섬광이 활활 타오르던 모습이 생생하다. 50구경 기관총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고 긴박한 순간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군 소속으로 참전해 일본, 독일과 싸운 재미 한인들의 감춰진 활약상이 새로 발굴됐다. 장태한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UC리버사이드) 교수가 12일 독립기념관의 제76주년 광복절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미주한인 전쟁영웅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서다. 논문에 등장한 참전용사 10명은 태평양전쟁부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투에 나섰지만 국내 학계에 알려진 적이 없다. 논문에 따르면 미 육군 항공대 820폭격비행대대 정보장교로 복무한 얼 김(Earl Kim) 대위(당시 24세)는 1943년 11월 태평양 전선에 배치됐다. 미군은 일본 진격의 발판으로 당시 일본군이 점령한 남태평양 키리바시의 타라와 환초(環礁·고리 모양의 산호초)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미군 정찰 비행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사진을 판독해 일본군 대공포의 위치를 파악하고, 전투기 조종사에게 폭탄을 투하할 위치를 알려주는 중책을 수행했다. 논문에서 다룬 참전용사 중 유일한 생존자인 레이몬드 조 (Raymond Cho·97)는 태평양전쟁에 투입됐다. 미 육군 96보병사단 의무하사관으로 복무한 그는 스물한 살이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부상병의 절반 이상이 수술 후 사망했다”며 당시의 참상을 회상했다. 그는 미 정부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딸로 미 해군의 첫 여성 포격술 장교였던 안수산 여사(1915∼2015)를 비롯해 2차 대전에 참전한 재미 한인들이 많지만 이처럼 상당수는 베일에 싸여 있다. 정확한 한인 참전 규모도 파악되지 않은 상황. 장 교수는 “이들은 미군에 입대해 일본에 맞서는 것이 모국의 독립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며 “한인 참전용사들의 복무기록을 확보하기 어려운 데다 생존자가 적어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생존자들이 남아 있을 때 이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구술자료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2020 도쿄 올림픽 개회식 중계 때 다른 국가들을 비하해 비판을 받은 MBC가 마지막 날 마라톤 중계에서도 부적절한 발언으로 비난을 샀다. 8일 육상 남자 마라톤에 출전한 오주한 선수가 부상으로 경기 도중 기권하자 MBC 윤여춘 해설위원이 오 선수를 힐책하는 발언을 한 것. 케냐에서 우리나라로 귀화해 올림픽에 출전한 오 선수는 이날 초반 선두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13km 지점을 넘어가면서 다리를 절뚝거렸고 15km 지점에서 결국 경기를 포기했다. 이날 경기는 이른 아침이지만 27도의 기온과 77%의 습도로 인해 총 106명이 출전해 30명이 중도 포기할 정도로 힘든 레이스였다. 하지만 윤 해설위원은 한숨을 쉬며 “완전히 찬물을 끼얹네요, 찬물을 끼얹어”라고 말했다. 이에 온라인에서는 ‘MBC가 올림픽 참가 선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선수가 걱정되는 상황에서 해설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최선을 다하는 선수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다’ ‘MBC 중계는 개회식부터 마지막까지 최악이다’ 등의 비판 글이 이어졌다. MBC노동조합(3노조)은 ‘마지막까지 막말 쏟아낸 올림픽 중계, 박성제 사장 사퇴하라’는 성명을 냈다. 앞서 MBC는 지난달 23일 개회식 중계 때 여러 국가를 비하하는 사진과 자막을 내보내는 ‘참사’를 빚었다. 25일에는 한국과 루마니아의 남자 축구를 중계하면서 자책골을 넣은 상대 선수를 조롱하는 듯한 자막을 내보냈다. 이에 해외 주요 언론사들이 MBC에 대한 비판 보도를 이어가고, 해당 국가 관계자들이 불쾌감을 표시했다. 국내외에서 비판이 커지자 박성제 MBC 사장이 26일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방송을 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이후에도 인터뷰 자의적 편집, 자막 오류 등이 계속됐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브라질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파울루 코엘류(74·사진)가 안산(20·광주여대)의 2020 도쿄 올림픽 양궁 3관왕 달성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코엘류는 6일(현지 시간) 자신의 트위터에 “축하한다! 당신의 나라는 이 스포츠·명상에 탁월하다”며 “조만간 양궁에 대한 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는 대로 출판사에 한 부를 요청해 당신을 위해 사인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이번에 안산을 언급한 것은 11일 국내 출간 예정인 신작 ‘아처’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아처는 활쏘기의 각 단계를 통해 영혼의 평정에 이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담았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2020 도쿄 올림픽 개회식 중계 때 다른 국가들을 비하해 비판을 받은 MBC가 마지막 날 마라톤 중계에서도 부적절한 발언으로 비난을 샀다. 8일 육상 남자 마라톤에 출전한 오주한 선수가 부상으로 경기 도중 기권하자 MBC 윤여춘 해설위원이 오 선수를 힐책하는 발언을 한 것. 케냐에서 우리나라로 귀화해 올림픽에 출전한 오 선수는 이날 초반 선두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13km 지점을 넘어가면서 다리를 절뚝거렸고 15km 지점에서 결국 경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윤 해설위원은 한숨을 쉬며 “완전히 찬물을 끼얹네요, 찬물을 끼얹어”라고 말했다. 이에 온라인에서는 ‘MBC가 올림픽 참가 선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선수가 걱정되는 상황에서 해설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최선을 다하는 선수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했다’, ‘mbc 중계는 개회식부터 마지막까지 최악이다’ 등의 비판 글이 이어졌다. MBC노동조합(3노조)은 ‘마지막까지 막말 쏟아낸 올림픽 중계, 박성제 사장 사퇴하라’는 성명을 냈다. 앞서 MBC는 지난달 23일 개회식 중계 때 우크라이나 선수단 소개 장면에 최악의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했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진을 쓰는 등 여러 국가에 모욕적인 내용을 내보내는 ‘중계 참사’를 빚었다. 25일에는 한국과 루마니아의 남자 축구경기를 중계하면서 상대 팀의 마리우스 마린 선수가 자책골을 넣자 ‘고마워요 마린’이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이에 해외 주요 언론사들이 MBC에 대한 비판 보도를 이어가고, 해당 국가 관계자들이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국내외에서 비판이 커지자 박성제 MBC 사장이 26일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방송을 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이후에도 인터뷰 자의적 편집, 자막 실수 등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축구팬이라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잠에서 깬 적이 있을 것이다. 치열한 순위 싸움은 응원하는 구단의 경기를 놓칠 수 없게 한다. 짜릿한 골 장면은 피곤함을 잊게 만든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유럽 스포츠 담당 기자와 편집자인 저자들은 10년간의 EPL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EPL이 어떻게 212개 나라에서 방영될 만큼 성공한 산업이 됐는지를 보여준다. EPL 출범 전까지 영국에서 축구는 사양산업으로 여겨졌고, 구단들은 입장료라는 주 수입원이 감소할 것을 우려해 TV 중계를 반대했다. 성공의 발단은 모순적이게도 구단들의 재정난이었다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1989년 4월 힐스버러 스타디움의 입석 구역에 수용 인원을 초과하는 관중이 입장하며 96명이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부는 관중이 많은 영국 리그 상위 구단에 전석 좌석제 경기장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경기장 개조 비용이라는 부담을 안게 된 상위 22개 구단은 영국 리그에서 탈퇴한 후 TV 중계료, 광고 수익, 기업 후원 등의 이익을 위해 1991년 EPL을 출범시켰다. 이후 EPL의 각 구단은 그들만의 경영 전략을 세워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구단 지주 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공모해 자금을 모았다. 아스널은 시즌권 평생 갱신권을 일시불로 판매하는 제도를 도입해 재정을 늘려갔다. 토트넘 홋스퍼는 유망한 어린 선수를 비싸게 파는 방식으로 재정을 불렸다. 새로운 구단주를 등에 업고 성장한 구단도 있다. 선수들의 월급도 못 줄 위기에 처했던 맨체스터 시티는 졸부 산유국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했던 아부다비의 왕자 셰이크 만수르가 2008년 구단을 매입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게 됐다. 첼시 역시 2003년 정유 회사 시브네프트를 운영하던 로만 아브라모비치를 구단주로 만나 세계적인 팀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세계화와 EPL의 성공이 새로운 위기를 낳았다고 저자들은 분석한다. 구단과 연고지와의 유대는 그저 구단이 지역 사회에 자금을 투자하는 것에 그쳤고, EPL 상위 구단들은 작은 구단들과 수익을 분배해야 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EPL의 시작과 현재를 들여다보며 위기가 부른 성공, 성공 너머 도사리고 있는 위기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방탄소년단(BTS·사진)의 ‘버터(Butter)’가 올해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에서 최장 기간(9주) 1위를 차지한 곡이 됐다. 빌보드는 2일(현지 시간) BTS의 버터가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서 총 9주간 1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앞서 8주간 1위를 유지한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드라이버스 라이선스’를 뛰어넘은 기록이다. 올 5월 21일 발매된 버터는 지난달 발표된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에 한 주만 1위를 내준 뒤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퍼미션 투 댄스까지 포함하면 BTS는 10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는 셈. 현재 퍼미션 투 댄스는 핫100 9위에 올라 있다. 버터 신기록의 원동력은 높은 음원 판매량이다. BTS 리더 RM은 팬 커뮤니티 위버스에 “늘 과분한 무언가를 씌워주셔서 참 황송하면서도, 우리 것이지만 절대로 여러분 것이라고 마음 깊이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동시 시청자 수 12만8000여 명. 유명 인플루언서가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이 아니다. 지난달 19일 진행된 국가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보유자 김기호 장인(53)의 라이브 커머스에 몰린 사람들의 수다. 김 장인은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금박장을 만드는 과정과 그에 담긴 의미를 설명했다. 조선시대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신부가 착용하던 ‘도투락댕기’를 소개할 때는 당시 왕실과 관계된 이들만 금박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0만 원대인 금박 명함함, 금박 카드지갑은 판매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MZ세대가 즐겨 찾는 라이브 커머스에 도전하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은 네이버와 함께 올해 6월부터 매달 한 명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출연하는 라이브 커머스를 열고 있다. MZ세대에게 전통을 알리기 위해서다. MC를 맡은 방송인 박경림 씨(42)가 장인의 공방으로 찾아가는 토크쇼 방식을 통해 시청자와 소통한다. 시청자는 영상으로 공방을 둘러보고, 작품 제작 과정도 볼 수 있다. 장인들이 라이브 커머스에 도전하게 된 건 전통 문화를 알리는 기존의 방식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김기호 장인은 지난달 29일 전화 인터뷰에서 “강연과 작품 제작 시연에는 많아야 50여 명이 참석했다”며 “대학생 아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이런 방식의 홍보가 젊은 세대에게 전통공예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실시간으로 시청자와 소통하는 건 생소한 경험이긴 하다. 6월 라이브 커머스에 나선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 박명배 장인(71)은 시청자들의 “귀엽다”는 반응에 당황하며 수줍게 웃음 지었다. 그의 라이브에는 7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모였다. 박 장인은 “나무의 무늬를 담는 표현 기법 등을 설명해 예술품으로서 우리 전통 목가구의 조형성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조명과 카메라가 있는 생방송 환경과 실시간 소통은 처음이라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토크쇼도 장인들에게는 낯선 방식이다. 김기호 장인이 아내에게 금박댕기를 생일선물로 준 것에 대해 박 씨가 묻자 김 장인은 당황했다. 시청자들은 댓글로 “너무 로맨틱하다”, “댕기 주는 사람 있으면 결혼해야죠 ㅎㅎ”,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 와∼ 멋져요!”라는 반응을 남겼다. 김 장인은 “기존 방송에서는 작품에 대해서만 말했기에 사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곧바로 답하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이달 19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보유자 김혜순 장인(77)의 쇼핑 라이브가 진행될 예정이다. 그는 MBC ‘놀면 뭐하니’의 MSG워너비 편에서 유재석이 착용한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 김 장인은 “섬유라는 소재 특성상 매듭은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어서 제 작품을 통해 매듭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새로운 시도에 나선 장인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는 게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의 사명감이다. 박명배 장인은 “무형문화재는 방치해 두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며 “전통을 계승하고 보급할 수 있다면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라도 기꺼이 도전하겠다”고 전했다. 이번 라이브 커머스를 기획한 한국문화재재단의 김희정 상품기획팀장은 “수공예 작품이라 종류가 아주 다양하지 않고 가격이 비싼 작품도 일부 있어 아직 매출이 많지는 않았다”면서도 “대중이 무형문화재에 친숙해지도록 이를 널리 알릴 방법을 연구해 계속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동시 시청자 수 12만8000여 명. 유명 인플루언서가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이 아니다. 지난달 19일 진행된 국가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보유자 김기호 장인(53)의 라이브 커머스에 몰린 사람들의 수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MZ세대가 즐겨 찾는 라이브 커머스에 도전했다. 한국문화재재단은 네이버와 함께 올해 6월부터 매달 한 명의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와 함께 하는 라이브 커머스를 진행하고 있다. MZ세대에게 전통을 알리기 위해서다. MC를 맡은 방송인 박경림 씨(42)가 장인의 공방으로 찾아가는 토크쇼 방식을 통해 시청자와 소통한다. 시청자는 영상을 통해 공방을 둘러보고, 작품 제작 과정도 지켜볼 수 있다. 장인들이 낯선 라이브 커머스에 도전하게 된 건 전통 문화를 알리는 기존의 방식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김기호 장인은 7월 29일 전화 인터뷰에서 “강연과 작품 제작 시연에는 많아야 5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며 “대학생 아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이런 방식의 홍보가 젊은 세대에게 전통공예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MZ세대가 접근하기 좋은 방식으로 바꾼 결과 그는 라이브 커머스를 통해 12만 명이 넘는 시청자들에게 전통 문화를 알릴 수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이 실시간으로 시청자와 소통하는 건 생소한 경험이긴 하다. 6월 라이브 커머스에서 나선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보유자 박명배 장인(71)은 시청자들의 “귀엽다”는 반응에 당황하며 수줍게 웃음을 짓기도 한다. 그의 라이브에는 7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모였다. 박 장인은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했는데, 조명과 카메라가 있는 생방송 환경과 실시간 소통은 처음이라 정작 준비한 것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토크쇼도 장인들에게는 낯선 방식이다. 김기호 장인이 아내에게 금박댕기를 생일선물로 준 것에 대해 박 씨가 묻자 김 장인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청자들은 댓글로 “너무 로맨틱하다”는 반응을 남겼다. 김 장인은 “방송에서는 작품에 대해서만 말했기에 사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곧바로 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이달 19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보유자 김혜순 장인(77)의 쇼핑 라이브가 진행될 예정이다. 김 장인은 MBC ‘놀면 뭐하니’의 MSG워너비 편에서 유재석이 착용한 머리장식을 만들었다. 김 장인은 “실시간 소통하는 이런 라이브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 솔직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장이들이 MZ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낯선 방식에 도전하면서도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의 사명감이다. 김혜순 장인은 “한국 전통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고 말했다. 박명배 장인 역시 “무형문화재는 그냥 방치해두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며 “전통을 계승하고 보급할 수 있다면 새로운 방식이라도 도전하겠다”고 전했다. 전통 문화와 MZ세대 문화의 결합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번 라이브 커머스를 기획한 한국문화재재단 김희정 상품기획팀장은 “전통 공예를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느끼고, 장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통문화를 알리려 했다”며 “무형문화재를 친숙하게 여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앞으로도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조선 18세기 후반 제작된 신윤복(1758∼?)의 ‘연소답청(年少踏靑)’은 봄을 맞이한 젊은이들이 교외에 나가 푸른 풀을 밟는 답청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천민인 기생들이 말에 타고, 나이 어린 양반 집안 자제들은 담뱃대 시중을 든다. 신분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남녀가 어울리는 시간을 갖고자 했던 청춘들의 설렘이 그림에서 새어나오는 듯하다. ‘사랑에 밑줄친 한국사’는 역사 속 사랑이야기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건 중심인 역사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개인들의 사연이다. 특히 저자는 역사 속 인물들의 로맨스, 스캔들을 소개해 그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율곡 이이(1536∼1584)는 기생을 향한 ‘플라토닉 사랑’을 펼쳤다. 1574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이이는 기생 유지에게 흠뻑 빠진다. 이이는 기생의 딸로 태어난 유지에게 측은함을 느끼고 수청을 들게 하는 대신 학문을 전수해준다. 그것도 잠시. 이이가 떠나고, 그들은 9년이 지나 다시 만난다.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이이는 유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완곡한 거절과 내세의 인연을 약속하는 연서를 남기고 4개월 뒤 세상을 떠난다. 파격적인 밀애도 있다. 1417년 태종 때 환관 정사징은 왕의 형님의 첩, 상왕 정종의 시녀와 간통했다. 1425년 세종 때는 시녀 내은이가 왕이 쓰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고리)를 훔쳐 환관 손생에게 준 일도 있었다. 신분상 왕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온갖 욕망을 참고 살아야만 했던 이들의 일탈인 셈이다. 걸출한 예술가이자 학자가 아내에게는 온갖 어리광과 투정을 부린 귀여운(?) 이야기도 있다. 1840년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제주도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아내에게 쓴 편지를 온갖 반찬 투정과 힘들다는 어리광으로 도배한다. 떨어져 있어도 추사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던 부인 예안 이씨는 끝내 추사의 마지막 편지를 읽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부인의 부고를 접했다. 이런 사랑 이야기 속에는 ‘주자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가부장적 이념이 녹아있다. 여성은 기생으로서 수청을 들어야 했고, 부인으로서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했으며, 왕의 소유물인 궁녀는 밀애를 나눴다는 이유로 참형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에서는 조선시대에 남자들이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의 각종 서신과 일기 등 기록을 통해 외조하는 남자들을 그린다. 정치적 가부장제가 모든 가정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살림꾼으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있다. 퇴계는 음식과 의복 같은 안살림부터 농사와 노비 관리까지 집안 살림을 모두 주관했다. 심지어 자신이 한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대신 살림을 관리하도록 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부인을 잃고 홀로 자식 뒷바라지를 했다. 그는 직접 반찬거리를 만들어서 두 아들에게 보냈고, 편지로 반찬이 맛있는지를 묻는다. 살림과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던 그 시대 남성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와 외조하는 남자들이라는 당대 남녀 관계의 이모저모는 흥미로운 미시사에 빠져들게 한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20cm가 채 안 되는 목간(木簡·나무 막대로 제작한 고대 문서)에 낙서 같은 한자가 적혀 있다. ‘지치삼년(至治三年)’. 지치는 원나라 황제 영종(1303∼1323)의 연호로, 지치삼년은 1323년을 말한다. 이 목간은 1976년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서 발견된 중국 원나라 무역선 신안선에서 나왔다. 신안선 목간에는 배의 항해 시기와 목적지, 화물 종류 등의 핵심 정보들이 담겨 있다. ‘수중유물, 고려바다의 흔적’ 특별전이 27일부터 인천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인천시립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이번 특별전에서는 신안선 등 각종 침몰선에서 출토된 유물 45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신안선 발굴 이후 45년간 이어온 국내 수중 발굴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신안선 목간을 지나면 옛 선원들의 선상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나온다. 특히 2010년 충남 태안군 마도해역에서 발굴된 13세기 고려선박 마도 2호선에서 발견된 ‘돼지 머리뼈’가 눈길을 끈다. 마도 2호선은 전북 고창에서 개경으로 가던 조운선으로 추정된다. 조운(漕運)은 국가가 세금으로 거둔 물품을 강이나 바다 등의 물길로 운송하던 제도다. 해일과 풍랑에 맞선 선원들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돼지 머리뼈는 당시 동물들이 제물로 쓰였음을 보여준다. 2011년 발굴된 13세기 고려선박 마도 3호선과 신안선에서는 돌로 만든 장기 알과 주사위가 각각 발견됐다. 최소 한 달은 걸리는 항해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원들이 다양한 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주인에게 닿지 못한 난파선의 유물도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수중 발굴된 유물 대다수는 고려청자와 백자 등의 도자기다. 고려 선박에서 나온 유물의 경우 최소 800년 넘은 것들이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침몰 과정에서 바닷물이 완충 역할을 했고, 오랜 시간 갯벌에 파묻혀 조류 등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이 중 마도 2호선에서 발견된 ‘청자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꽃무늬 매병’(보물 제1783호)을 주목할 만하다. 13세기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청자 매병은 중앙정부에 보낼 참기름을 담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S자 곡선의 몸체가 조화를 이룬 고려 상감매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매병을 둘러싼 6개의 마름꽃 무늬 안에 황촉규(닥풀), 갈대, 버드나무, 대나무, 모란, 국화를 흑백 상감으로 표현했다. 전시에는 2010년 인천 옹진군 섬업벌 해역에서 발굴된 8세기 후반 통일신라시대 교역선 영흥도선을 위한 6.6m² 크기의 별도 공간이 마련돼 있다. 영흥도선은 지금까지 발굴된 우리나라 고선박 중 가장 이른 시기의 배다. 이곳에서는 영상과 더불어 바닥에 그려진 실측도를 통해 발굴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이번 전시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중 발굴과 옛 선원들의 선상 생활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20㎝가 채 안되는 나무 조각에 낙서 같은 한자가 적혀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엔 유리 진열장 한가운데 이것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한자들을 다시 읽어본다. ‘지치삼년(至治三年)’. 지치는 원나라의 황제 영종(1303~1323)의 연호다. 지치삼년은 1323년을 뜻한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돼 우리나라 수중 발굴의 시작을 알린 중국 무역선 신안선의 출항 시기를 알려주는 목간(木簡)이다.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조각에 배의 항해 시기와 목적지, 화물 종류 등을 적은 목간은 수중 유적의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수중유물, 고려바다의 흔적’ 특별전이 27일부터 인천 연수구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인천시립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이번 특별전에서는 신안선 발굴 이후 45년간 이어온 국내 수중 발굴 성과를 신안선과 고려 선박에서 인양된 수중유물 450여점을 통해 선보인다. 신안선의 목간을 지나면 선원들의 선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등장한다. 특히 2010년 충남 태안군 마도해역에서 발굴된 13세기 고려선박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돼지 머리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도2호선은 전북 고창에서 개경으로 가던 조운선으로 추정된다. 조운(漕運)은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거둔 물품들을 물길로 운송하던 제도다. 해일과 풍랑에 맞섰던 선원들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돼지 머리뼈는 당시 동물들이 제물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또 2011년 발굴된 13세기 고려시대의 마도3호선과 신안선에서 발견된 돌로 만든 장기알과 주사위를 통해 최소 한 달 이상인 항해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원들이 다양한 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주인에게 닿지 못한 난파선 속 유물도 볼 수 있다. 수중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려청자와 백자 등의 도자기다. 최소 8세기 이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침몰과정에서 바닷물이 완충 역할을 했고 오랜 기간 갯벌에 파묻혀 부식과 바다 해충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그 중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청자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꽃무늬 매병’(보물 제1783호)이 시선을 끈다. 13세기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청자 매병은 관리에게 보낼 참기름을 담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S자 곡선의 몸체가 조화를 이룬 고려 상감매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매병을 둘러싼 6개의 마름꽃 무늬 안에 각각 황촉규(닥풀), 갈대, 버드나무, 대나무, 모란, 국화를 흑백 상감으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0년 인천 옹진군 섬업벌 해역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의 교역선 영흥도선을 위한 약 6.6㎡ 크기의 별도 공간도 마련돼 있다. 영흥도선은 지금까지 발굴된 우리나라 고선박 중 가장 이른 시기의 배다. 이 곳에서는 영상과 바닥에 그려진 실측도를 통해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장은 “이번 전시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수중 발굴과 당시 선원들의 선상생활에 대해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조선시대 ‘대신마누라도’는 머리에 가채를 올린 푸근한 인상의 귀부인을 연상시킨다. 대신마누라는 이 시대 최악의 역병이던 호구마마(천연두)를 물리치는 신으로 여겨졌다. 병과 고통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약사여래를 묘사한 ‘석조약사여래좌상’도 백성들이 감염병의 공포를 이기는 수단이 됐다. 두 유물은 팬데믹 와중이던 지난해 5월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역병에 맞서다’ 전시에서 공개됐다. 이 전시에는 1774년 무과 합격자 18명의 초상화를 모은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도 나왔다. 18명 중 3명의 초상화에서 천연두를 앓은 얼굴 흉터가 확인될 만큼 천연두는 조선 사회를 휩쓸었다. 조선시대 역병에 대한 두려움은 괴담으로도 발전했다. 괴담에는 역병에 대한 인식과 대처 등 조선시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조선 광해군 때 문신 유몽인(1559∼1623)이 17세기 초에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유생 박엽의 역병에 얽힌 괴담이 실려 있다. 1594년 4월 박엽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방으로 피란을 떠났다가 한양으로 돌아왔다. 옛집은 쑥대밭이 돼 있었고, 거리는 굶거나 역병에 걸려 죽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박엽은 밤거리에서 선비 집안의 미녀를 만났고, 그의 집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박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옆에 어젯밤 만난 미녀의 시신이 누워 있었던 것. 집안 곳곳엔 미녀 가족들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정신을 차린 박엽은 관을 갖춰 시신을 수습한 후 제사를 지낸다. 박엽 괴담에는 전란 후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1594년 흉년으로 일부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권혁래 용인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올 3월 발표한 논문 ‘17세기 재난문학 어우야담을 통해 보는 재난상황과 인간존중 정신’에서 “어우야담의 괴담은 흉년으로 인한 참상을 기술하고 위정자들이 하늘의 뜻을 살펴 재해를 대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세기 중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丘野談)에도 역병을 다룬 괴담이 전한다. 비가 내리던 밤 영의정을 지낸 이유(1645∼1721)는 종묘 근처에서 비릿한 냄새에 발길을 멈췄다. 이윽고 불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방립(비를 피하기 위한 갓)을 쓰고 도롱이(짚을 엮어 만든 비옷)를 입은 채 외다리로 뛰는 사람이 한 가마를 따라가는 모습을 봤다. 외다리치곤 믿기지 않는 빠른 속도에 느낌이 이상했던 이유는 뒤를 쫓았다. 가마에 탄 이는 괴질에 걸린 이유의 친척 며느리였다. 이유는 이윽고 외다리 귀신이 며느리 옆에 있는 걸 발견했다. 이유가 귀신의 눈을 노려보자 귀신은 방에서 뛰쳐나갔고 며느리는 건강을 되찾았다. 이유의 괴담에서는 역병이 귀신으로 형상화됐다. 박수진 성결대 강사는 논문 ‘조선후기 야담집에 나타난 역병의 형상화 양상과 그 의미’에서 “역병을 귀신 이야기로 그려 인간이 귀신을 쫓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역병 같은 문제를 개인들이 직접 해결한다는 것이다. 현혜경 한경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는 “기근, 질병처럼 국가가 해결해야 할 대규모의 사회 문제가 괴담을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비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모색된 것”이라고 분석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